황종연의 평문 "모더니즘의 망령을 찾아서"는 1994년 <세계의 문학> 여름호에 실렸던 것인데, 김성기 (편) <모더니티란 무엇인가>(민음사, 1994)에 한번 수록되었다가 이후에 그의 평론집 <비루한 것의 카니발>(문학동네, 2001)에 재수록되었다. 나는 이 3종의 글을 다 갖고 있는 듯한데, 이번에 읽은 건 평론집에 수록된 것이다. 다른 동기가 있어서가 아니라 책박스를 열어보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고, 지난번에 마샬 버만의 얘기도 나온 김에 그의 <단단한 것은 모두 녹아 날아간다 - 근대성의 경험>(국역본은 <현대성의 경험>)에 대한 해제 성격의 이 평문을 읽어본 것이다(이전에도 읽었을 법하지만, 기억에는 남아 있지 않다).

 

 

 

 

황종연은 먼저 <반시대적 고찰>에 실려 있는 니체의 글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를 검토한다. 거기서 제기되고 있는 역사 망각(니체가 부추기는 것은 우리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역사(주의)에 대한 능동적인/긍정적인 망각이다)이란 테마 혹은 망각의 이념이 모더니즘과 친족성을 갖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즉, 역사에 대한 망각과 부정이 각종 모더니즘(운동)의 공통분모라는 것. 

"모더니즘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지목되곤 하는 '전통과의 결별'이라는 것이 단순히 기존의 문학적, 예술적 관습의 파괴와 혁신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인 것을 경험하는 근대 특유의 방식이라는 차원에서, 다시 말하여 유동적인 현재에 대한 의식에 압도된 생산적인 망각의 전략이라는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비루한 것의 카니발>, 355쪽)

더불어 황종연이 지적하는 것은 모더니즘을 공격하면서 들고 나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구호/수사가 모더니즘의 그것을 반복하고 있다는 점. "포스트모더니즘의 정당화에 봉사하는 비판적 담론들이 근본적으로 모더니즘적 수사에 기생하고 있다는 것은 강조될 필요가 있다."(356쪽) 그런데, 버먼의 <근대성의 경험>은 "포스트모더니즘 자체를 다루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하여 지금까지 제기된 가장 강력한 비판 중의 하나"이다. 90년대 초반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이 횡행하던 시절에 버먼의 모더니즘 옹호를 끌고온 배경은 아마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나의 견문으로, 황종연은 우리문학에서 모더니즘의 옹호자를 자임하고 있으며(그러니까 그의 포지션은 리얼리즘도 포스트모더니즘도 아니라는 점에서 특이하다), 그러한 입장의 전거를 모더니즘에 대한 버먼의 논의에서 가져온다(이 평문이 비평가 황종연에게 갖는 의미가 거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또한 버먼과 마찬가지로 "모더니즘의 '망령들'과의 대화는 근대성의 현실에서 물러서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과 보다 정직하게 대면하고 보다 대담하게 싸우기 위한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강조해둘 것은 버먼의 책이 '근대성'이 아니라 '근대성의 경험'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그러니까 똑같이 근대성 프로젝트의 유효성을 강조하지만 '근대성' 범주에서 사고하는 하버마스와는 좀 다른 얘기를 '근대성의 경험'을 화두로 하여 버먼을 늘어놓게 되며, 이것이 그의 강점이다. 상대적으로 하버마스는 '미학'이나 '경험'에 무관심하다). 사실 이 제목(부제)만 가지고도 버먼의 입장을 어느 정도 예단할 수 있다.

"버먼이 모더니즘의 갱생을 위해 망각이 아니라 기억을 실천하고 동시에 촉구하는 배경에는 근대성이라는 것이 그저 유동적인 현재의 경험이 아니라 역사적인 실체성을 갖는 경험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무자비한 망각을 필요로 하는 삶, 그것의 본질적인 역사성을 그는 강조한다. 그가 기억하는 모더니즘은 현재 우리의 삶이 여전히 역사적 근대성의 난제와 곤경 속에 있음을 직시하도록, 문화적 단절의 환상에서 깨어나도록 자극한다."(358쪽) 그리고 "<근대성의 경험>에서 버먼이 제기한 가장 중요한 주제는 모더니즘과 근대화 사이에 존재하는 복합적이고 역동적인 관계이다."(359쪽)

여기서 '근대화'란 '일군의 사회적 과정'을 뜻하며, 모더니즘은 그것이 야기한 다양한 비전과 이념이다. "모더니즘이 근대화와 맺고 있는 관계는 대단히 복합적"이다. "모더니즘은 근대화에 의존하면서도 근대화에 개입하고, 근대화에 적응하면서도 근대화에 반발한다."(359쪽) 즉, 모더니즘과 근대화는 변증법적인 관계에 놓이며, 여기서 암시되는 바이지만, 모더니즘에 대한 버먼의 정의는 일반적인 정의보다 광범위하며 포괄적이다(그걸 단점으로 지적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구도하에서 버먼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생겨난 인간 경험 양식의 차원에서 근대성의 본질에 접근한다."(360쪽)

"버먼이 말하는 근대성의 경험은 근대화가 유럽 봉건사회를 체계적으로 파괴하고 세계 전체로 확대되면서 인류에게 초래한 보편적인 경험이다. 근본적으로는 세계적 규모의 자본주의에 의해 추동되는 근대성은 비록 시간과 정도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인류 전체가 공유하는 경험이 되었다고 그는 보고 있다. 모든 지역적, 종족적, 이념적 경계를 넘어서 사람들의 개인적, 사회적 생활에 침투한 이러한 근대성은 사람들의 생황을 안정적이고 확실하게 하는 모든 질서 또는 토대의 원천적인 결여를 기본 특징으로 한다."(361쪽) 때문에 근대적인 삶이란 "창조와 파괴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과정 속에 있는 유동적인 삶"이며, 그것은 "근대적 인간에게 희망의 원천이면서 동시에 절망의 온상이고, 행복의 약속이면서 동시에 재앙의 저주"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근대성은 본질적으로 역설의 경험이다."(361쪽)

이러한 전제하에 버먼의 논의는 괴테의 <파우스트>와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을 거쳐, 근대성의 원초적 장면을 드러내주는 도시 공간으로 이어진다. 거기서 특별히 자세하게 분석되는 것은 보들레르의 파리와 도스토예프스키의 페테르부르크이다(물론 도스토예프스키의 전사(前史)로서 푸슈킨과 고골이 다루어진다). 물론 나의 개인적인 관심은 (파리보다는) 페테르부르크에 두어지며, 사실 '저발전/저개발의 모더니티'를 다룬  <근대성의 경험> 제3장은 러시아문학 전공자들에게도 많은 유익한 생각거리를 제공해준다.

 

 

 

 

버먼의 해석에 따르면, "러시아의 왜곡된 근대성이 문학에서 표현되는 가장 두드러진 방식은 페테르부르크/뻬쩨르부르그가 '비현실적 도시'로 그려진다는 데에서 찾아진다."(368쪽, 나는 이전에 이 '페테르부르크 테마'에 관한 리뷰를 쓴 적이 있다.) 단적인 예가 고골(리)의 <페테르부르크 이야기>이다(5편의 작품이 묶인 <뻬쩨르부르그 이야기>(민음사) 참조). 그리고 이 페테르부르크 모더니즘의 고뇌와 열정의 표현으로서 (비단 버먼에게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이며, 버먼이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 것은 <지하생활자의 수기>(1864)이다.

 

 

 

 

"이를테면, (버먼은) <지하생활자의 수기>의 가난한 서기가 페테르부르크의 네프스키 특구의 군중 속에서 자신이 장교와 사회으로 등등한 존재임을 스스로 확인하는 장면에서는 도시의 로맨스를 자기 것으로 삼는 정신의 출현, "정신적 근대화 속에서의 거대한 전진적 도약"을 보고 있다."(369쪽)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버먼의 논의를 정리하고 있는 대목에서 황종연은 (국역본에서만큼은 아니지만) 약간 정돈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 인용에서 '네프스키 특구'는 '네프스키 거리'나 '네프스키 대로'로 옮겨져야 하는데, Prospect를 '특구'로 옮긴 것은(국역본은 '지구'라고 옮겼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가 고골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읽지 않았다는 걸 뜻한다. "도시의 로맨스를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이란 표현도 보다 정확한 맥락을 확인하기 위해서 버먼의 원서(펭귄북)를 뒤적여 봤지만, 찾지 못했다.

황종연의 평문은 버먼의 논의에 대한 가장 유려한 해제로 꼽을 만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에 관해 정리하고 있는 대목만큼은 나로선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들을 포함하고 있다. 가령, "버먼이 이해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위대함은 그가 바로 후진성의 통렬한 고뇌로부터 '공학'으로 표상되는 인간의 건설적, 창조적 활동을 긍정하는 비범한 각성에 도달했다는 데에 있다"(370쪽)는 대목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유클리드 기하학'의 산물로서의 (근대 건축)공학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입장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의 대심문관의 논리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처럼 양가적인 면모가 있지만,  궁극적으론 비판적이다. 그게 적어도 일반적인 이해이다. 

 

 

 

 

반면에 버먼은 근대화(공학)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비판이 근대화 일반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근대화의 일면에 대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즉 그는  근대화를 '모험으로서의 근대화'와 '일상으로서의 근대화'로 양분하고 도스토예프스키의 비판은 후자를 향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러시아 문학도에게 흥미로운 건 이 대목이며, 지하생활자와 장교와의 '결투'를 버만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는바, 이건 '새로운' 이해이다). 그런데, '일상(routine)으로서의 근대화'라는 건 황종연의 요약에서 빠져 있다. (그럴 수도 있지만) 그의 논의/정리가 삐그덕거리는 건 그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가령, "버먼은 특히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에게는 도시생활에 잠재된 욕망과 고통, 투쟁과 환희의 모든 가망한 현실을 포용하는 비전, 정체와 안주를 모르는 영웅적인 근대화의 비전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같은 건  작품을 읽지 않고 평문만 읽을 경우 지하생활자에 대한 정반대의 이해를 조장하기 쉽다. '영웅적인 근대화의 비전'이란 말은(역시 원문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반어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면 지하생활자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말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이어지는 대목: "'모험으로서의 근대화'라는 그 비전은 도시의 갈등과 혼란을 종식시킬 계획과 발전을 추구하는, 그리하여 결국은 근대화마저 삶의 활기를 죽이는 판에 박힌 관례로 전락시키는 모든 근대화의 이념들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을 내포한다고 한다."(370쪽) 전체문장의 내용은 '모험으로서의 근대화'라는 비전은 모든 근대화의 이념들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을 내포한다, 이다. 거기서 '모든 근대화의 이념들'은 (1)도시의 갈등과 혼란을 종식시킬 계획과 발전을 추구한다. (2)근대화마저 (삶의 활기를 죽이는) 판에 박힌 관례로 전락시킨다. 나로선 (1)과 (2)가 어떻게 동시에 '모든 근대화의 이념들'을 수식할 수 있는 건지 이해되지 않는다(나는 의미론적으로 이 문장이 비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둔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 탓하기에는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황종연의 이해가 미덥지 않다.

파리와 페테르부르크에 이어서 버먼이 분석하고 있는 것은 1960년대 뉴욕의 모더니즘이다. "포스트모더니즘과 대립되는 버먼의 입장은 60년대의 활발한 논의를 통하여 성립된 모더니즘의 개념과 이론들에 대한 그의 비판을 보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모더니즘에 연관된 60년대의 사상과 논쟁이 근대성에 대한 풍부한 비전들을 산출했음을 인정하면서도 모더니즘과 근대생활의 관계를 인식하는 방식에 있어서 우직하고 소박한 성격을 드러냈다고" (비판적으로) 본다(374쪽).

60년대 모더니즘의 (후퇴적/긍정적/부정적) 세 가지 경향에 대한 버먼의 비판은 모더니즘에 대한 그 자신의 비전이 지난 포괄적이며 복합적인 성격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며, "자본주의가 모더니즘 문화에 가하는 변질과 부식을 강조하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르게, 그는 자본주의의 번창이 오히려 모더니즘이 필요로 하는 근대성의 자원과 활력을 꾸준히 생산하리라 믿고 있다... 이것은 모더니즘을 인식하는 그의 입장을 맑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양쪽 모두와 구별되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다."(376쪽). 더불어, 이러한 입지에서 황종연은 맑스주의(창비식 리얼리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양자와는 거리를 유지한다.

버먼에 대한 비판은, 황종연도 지적하고 있지만, 페리 앤더슨의 "근대성과 혁명"(<창작과 비평>, 1993년 여름호)을 참조할 수 있다(이 또한 복사해두었었는데, 읽은 기억이 없다. 아, 망각이여!). 그러한 비판을 수용하면서 황종연은 앤더슨의 비판(주로 버만이 모더니즘'들'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 버먼의 논의를 오히려 보충해줄 수 있다고 본다. "버먼이 올바르게 인식했다면 그가 말하는 근대성은 현재 사람들이 처해 있는 유일한 실존적 조건"이며 "그것에 대해 우리는 찬양할 수도 규탄할 수도 있지만 그것 밖으로 나가지는 못"하고, "그것을 떠나서는 삶도 없고, 따라서 혁명도 없다"는 결론하에서. 때문에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모더니즘은 리얼리즘"이라는 버먼의 주장에 황종연도 동감을 표시한다. 이 경우 "역설과 모순으로 가득 찬 삶을 철저히 사는 리얼리스트는 바꿔 말하면 아이러니스트"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근대성의 경험에 충실하는 것, 그것에 내재한 변증법적 가능성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것이다."(381쪽). 근대성의 경험이 내포하는 '생산적인 역설'에 충실할 때 우리는 아이러니스트가 된다(오랜만에 로티의 구호를 본다!). 그렇다면, 리얼리즘이냐, 모더니즘이냐의 이분법을 넘어서 우리에게 남겨진 시대정신은 '아이러니즘'이다. 슐레겔의 말을 빌면, "영원한 생동성에 대한, 한없이 풍부한 대혼돈에 대한 명료한 의식"! 더불어, "자기 창조와 자기 파괴의 무한한 능력을 소유하게 되는 지점들"! 우리는 그런 지점들을 통과하고 있는가?..

05. 0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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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5-04-14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덕분에 늘 잘 배우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로쟈 2005-04-14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송합니다...

나목 2006-12-30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rospect 는 지구, 거리로만 번역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특히 네프스키는 페테르부르크 안에 특별하게 조성된 지구라는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고 보면, 특구(특별히 조성된 지구)라는 말은 어색하지 않습니다. 또 "비루한 것의 카니발" 곳곳에 근대문학의 언표로 도스토예프스키가 언급되고 있는데, 읽지 않았다고 단순히 취급하는 것은 지나칩니다. 문제로 드신 부분은 "제2장 마르크스, 모더니즘, 현대화"의 핵심이 되는 부분으로, 근대의 지향은 본질상 자신의 지향을 거부하는 것까지를 함의함으로서 '망각'의 소용돌이에 기꺼이 빠져드는 역동성이 있다는 뜻으로 저는 이해했는데, 이는 황종연의 해석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비문이라기보다는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근대의 역동적인 모순이었던 것일 수 있습니다. 여러모로 명쾌한 글에 궁금한 점이 있어서 댓글을 붙여 봅니다.

로쟈 2006-12-29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전적으론 '네프스키 특구'라고 번역될 수도 있겠지만, 그냥 고골의 작품 제목이기도 한 '네프스키 거리'란 말이 모든 걸 다 카바합니다. 그 자체로 페테르부르크와 러시아 근대성의 상징이 되구요. 필자가 참조하지 않았을 거라고 한 건 국역본 고골과 도스토예프스키입니다. '특구'란 말을 안 쓰기 때문에. 아마도 필자는 영역본을 참조했겠지요. 그리고 '비문'이라고 한 건 다시 읽어보니 제가 오버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언제 다시 한번 꼼꼼히 읽어봐야겠네요.^^ 어쨌든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나목 2007-01-01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가지 더 궁금한 점이 있다면, 근대 문학에서 "영웅적인 근대화의 비전"이란, "세계의 현실적인 변화를 '주도하는'"의 뜻보다는, "세계와 나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의 뜻이 한층 더 큰 것으로 압니다. 훨씬 내향적인 것이지요. 예를 들어, 제임스 조이스의 "스티븐 히어로"에서 히어로는 단순히 반어적인 의미로 쓰인 것은 아닙니다. 같은 작가의 "율리시즈"에서 블룸의 행위도 실은 비루하기 그지 없으나, 평단에서는 "영웅적인 근대의 비전"을 가진 인물로 무리 없이 꼽습니다. 황종연의 글은 전반적으로 일상적인 의미의 용어보다 문학사적으로 의미가 축적된 용어를 쓰는 경향이 농후한데, 저는 문학에는 문학적인 잣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장단점이 있을 것입니다. 저도 언젠가^^ 다시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족한 글에 답문 감사합니다.

로쟈 2006-12-30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타석으로 좋은 지적을 해주셨네요.^^ 사실 버먼의 책을 저도 완독한 상태에서 쓴 글은 아니었기 때문에 '숙제'로 남겨놓은 부분들이 있습니다. 덕분에 이번 겨울에 시간을 내봐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는군요.^^
 

별거 아닌 얘기를 간단히 몇 자 적는다. 알라딘을 돌아다니다 보면,  책과 관련된 이런저런 리스트들을 보게 된다. 그게 '마이리스트'라는 건데, 내 생각에 그 '마이리스트'의 기본적인 기능은 '뚜쟁이'의 그것이다. 즉, 이 책과 연결/접속될 만한 '다른 책'을 소개해준다는 데 의의가 있는 것이다. 때문에, 마이리스트라는 뚜쟁이는 수사학의 용어로 말하자면, 은유의 역할을 하기도 환유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가령, '나에게 감동을 준 책'이란 제하의 리스트를 만든다면, 거기에 묶인 책들은 순전히 '감동'이라는 이유만으로 붙들려나온 은유적 계열체들이다. 반면에, '들뢰즈의 책들'이라든가 하는 (게으르기 짝이 없는) 리스트들은(나는 이런 리스트는 왜 만드는지 모르겠다. 검색어로 '들뢰즈'를 치면 되는 것을) 들뢰즈를 구성하는 환유적 통합체들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더 의미있는 리스트란 은유적인 리스트, 은유적인 짝짓기이다(그런 리스트에서 우리는 '타자'로서의 책과 대면하게 된다).

아쉬운 것은 그런 류의 마이리스트를 만나기란 아주 드물다는 것. 물론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은유라는 것 자체가 '천재'의 소산이기도 하지만(다름 속에서 같음을 읽어내는 게 '천재'이다), 너무 범상한 리스트들만이 넘쳐나고 있는 것. 아직 한 건의 리스트도 만들어본 적이 없으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주제넘기는 하지만, 그래서 나름대로 '마이리스트의 조건'이란 걸 생각해 보았다.  

첫째, 10권 이상은 안 넘는 게 좋겠다는 것(맥시멈 20권). 가령 베스트5나 베스트10 같은 게 좋겠다. 무작정 늘어놓는 게 아니라. 리스트란 단순히 '목록'의 의미만을 갖는 게 아니라 '선정'이란 뜻도 내포한다. 허다한 책들을 늘어놓는 게 아니라 권할 만한 책들을 꼽아보는 것. 그럴 경우, 너무 많은 '목록'은 제 살 깎기 식의 목록이며, 스스로의 가치와 품위를 떨어뜨리는 선정이다. 그래서 리스트에 필요한 건 랭킹감각이 아닌가라는 게 내 생각이다. '이 책만은 꼭!'이란 생각이 리스트에는 가미되어야 한다.

둘째, 코멘트는 반드시 붙여야 하다는 것. 이건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그런 책을 꼽은 이유를 간략하게라도 제시해야 하는 것. 일반 연구서들을 읽다가도 그런 코멘트가 붙은 참고문헌 서지를 읽다 보면 간혹 감동하게 된다. 먼저 읽고 나서 나중에 읽을 사람들을 위해 친절하게 안내해주는 정신, 그게 코멘트의 정신이다. 이 책은 이런저런 장단점을 갖고 있다든가, 어디에 핵심이 있다든가, 어떤 의의가 있다는가 하는 내용들이 코멘트를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다못해, 개인적 사연이라도('내가 어젯밤 밤새 읽은 책'이란 식으로). 그런 코멘트 달기가 요구하는 것은 일단 자신이 읽어본 책들에 대해 리스트를 만들라는 것이다(물론 '내가 읽어보고 싶은 책들'이란 주제의 리스트라면 예외이겠지만, 그 경우에는 왜 읽고 싶은지 코멘트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너무 상식적이거나 상투적인 리스트는 곤란하다는 것. 어떤 분야별 리스트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그런 목록은 클릭을 몇 번 하면 찾아볼 수 있는 목록이다. 해서 필요한 건 '창의성'이다. 그리고, 뭔가 새로운 '지역'으로, 새로운 '모험'의 세계로 안내하고자 하는 서비스 정신(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스토커>에서의 주인공처럼). 이왕이면, 그런 정신이 담겨 있는 리스트를 '읽고' 싶다. 그냥 '보는/보여지는' 리스트 말고.

이렇듯 조건을 몇 개 달아놓았으니 조만간 나서서 시범이라도 보여야 할 판이지만, 언제일는지는 장담하지 못하겠다. 그저 동의하시는 분들의 동참이 있으시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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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4-09 2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5-04-10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엄한 잣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제 생각만 그럴까요?
어차피 이 곳 서재라는게 (아니 이 곳뿐만 아니라 요즘 모든 블로그가 그렇지만) 그냥 본인의 독서생활과 취향을 올리는 곳이 아닌가 하거든요
책을 자꾸 주문하다보니 이 곳도 알게되고 또 그렇게 각 서재를 꾸려가시는 분들을 보면서 아 이런 분들은 이런 책들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구나 하는 재미가 제겐 있답니다.
그리고 나의 서재 나의 리스트라는게 물론 남들에게 도움이 되면 금상첨화겠으나 자기 독서기록이나 정리의 목적으로 만드는게 당연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구요

책만 주문하고 서재에 별 신경안쓰다가 얼마전부터 공개로 해놓고 사이버서재로 이용할려는 마음을 먹었던 저로선 갑자기 주춤하는 마음이 생기네요..^^

로쟈님 서재에 왔다리 갔다리 하는 사람인데 제 수준상 전혀 코멘트달 기회가 없다가 첫 인사를 이렇게 드립니다.

어쨋든 댓글은 그것도 비공개로 하나 추천이 네 개인걸 보면 남들도 저처럼 널럴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구나 싶습니다만..하하


로쟈 2005-04-11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님/ 그동안의 추천에 감사드립니다.^^ 사야님/ 제가 제시한 조건은 물론 '강요사항'이 아니라 '제안사항'입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중요한 책들이라면, 그에 대해 코멘트를 해주는 것이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는 게 아닐까요? 아무런 코멘트 없이 수십 권의 책들을 목록에 올려놓은 리스트들은 그런 의미에서 저에겐 '애정'이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냥 찍어놓은 '이성'의 리스트들을 보는 것처럼...

비로그인 2005-04-21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은 부분 동의합니다^^ 그런데 이게 또 쉽지가 않더라구요..;; 누군가에게 '제대로' 도움 되는 리스트 좀 만들어보고 싶은데,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서투른가봅니다..;;;
 

매주 연재할 의도는 아니었지만, 매주 쏟아지는 책들을 '무시'하기도 뭐해서 몇 자 적는다. 먼저, 우리 고전에 대한 얘기 몇 마디부터 하고. 양양에서 큰 산불이 났었던 지난주 식목일(화요일) 한겨레에는 정수일 교수의 <문명교류기행>이 실렸는데(이 때문에 화요일에는 한겨레를 보기로 했다) 정 교수는 '조선인들의 눈에 비친 세계'를 다루면서, 이수광의 <지봉유설>, 최한기의 <지구전요>, 유길준의 <서유견문>을 우리가 자랑할 만한 '책'으로 지목했다.


 

 

 

 

 

 

 

 

<지봉유설>이나 <서유견문> 정도는 한국인이라면 국사시간에 달달 그 이름을 외워둔 책들이지만, 정작 몇 명이나 읽어보았을까 의심이 가는 책들이기도 하다. 호기심에 알라딘을 검색해보았더니 <지봉유설 정선>(현대실학사, 1990)과 <서유견문>(서해문집, 2004) 등으로 번역돼 있었다. 물론 최한기의 <지구전요>는 아직 우리말 번역이 없는 듯하고, 대신에 그의 <기학>(통나무, 2004)이 작년에 (다시) 번역돼 나왔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이지만. 해서 우리 조상들이 쓴 ‘동서문물의 백과사전’(<지봉유설>)과 ‘개화사상의 교본’(<서유견문>)은 맘만 먹으면 읽어볼 수 있는 책들이다.


 

 

 

 

 

 

 

오늘(토요일)자 동아일보의 한 독서칼럼에서는 최한기의 <기학>이 ‘전근대’ 사회 속에서 과거와의 단절을 과감히 시도했던 조선 후기 지식인의 문제적인 저작으로 역시 ‘탈근대’ 사회 속에서 근대화의 연속성을 읽어내고 있는 마샬 버먼의 <현대성의 경험>(현대미학사, 2004)과 같이 비교되고 있었다. 칼럼에서도 지적되고 있는 것이지만,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에 녹아버린다”란 원제를 가진 버먼의 책은 지난 1994년 엉터리 번역으로 출간됐다가 1998년에 개정본이 나오고, 작년에 다시 재개정본이 나왔다. 2004년판을 자세히 검토해보지는 않았지만, ‘페테르부르크’를 여전히 ‘페테스부르그’란 이상한 명칭으로 표기하고 있는 걸로 봐서 그다지 신뢰가 가지는 않는다.

 

 

 


 

버먼의 책의 한 장은 ‘저개발의 모더니즘’으로서의 19세기 페테르부르크에 할애되고 있다. 푸슈킨의 <청동기마상>과 고골의 페테르부르크 단편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이 분석되고 있는데, 버먼은 번역과 2차 문헌만을 읽고서도 이 주제와 관련하여 최상급의 비평적 에세이를 써냈다. 하지만, 우리말 번역본에서 그 ‘최상급’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고도의 상상력을 발휘해야만 한다(이 경우는 상상력을 길러주는 게 아니라 상상력을 쥐어짜내게 한다). 나처럼 빈곤한 상상력의 게으른 독자로선 짜증스런 일이다.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그래도 <현대성의 경험>은 기본자세는 돼 있는 번역서이다. 독자를 만족시키지는 못하더라도 끊임없이 AS해보겠다는 자세 말이다(이전의 졸역본들을 다시 교환해주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하지만, ‘상상력’만을 강조하는 대부분의 오역서들에는 그런 자세/성의가 결여돼 있다. 아마도 <현대성의 경험>만큼 ‘압박’을 덜 받아서 그런 모양이다. 가령, (정말로 믿지 못할) <믿음에 대하여>(동문선)나 (무너지기 쉬운 번역의)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인간사랑) 같은 지젝의 허다한 번역서들은 왜 개정본이 나오지 않는가? 데리다의 <불량배들>(휴머니스트)이나 부르디외의 <강의에 대한 강의>(동문선), <텔레비전에 대하여>(동문선), 마슈레의 <문학생산이론을 위하여>(백의), <문학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동문선) 등은 무슨 생각으로 개정본을 내지 않는가? 이 문제 또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는데, 그게 빈곤한 나로서는 그저 혀를 찰 뿐이다.  

 


 

 

 

 

 

 

 

지난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건 애꿎게도 또 동문선에서 나온 것이다. 프랑수아 도스가 쓴 <폴 리쾨르>. 번역서 분량으로는 890쪽이고 책값도 38,000원이나 되는 ‘숭고한’ 책이다. 거기에 견줄 만한 책은 역시 1004쪽이나 나가고 똑같이 38,000원인 <과학의 탄생>(동아시아) 정도이다. 그런 이유에서 이 두 책이 일단 내가 손으로 꼽아두고 싶은 책이다. <구조주의의 역사>를 쓴 프랑수아 도스는 리쾨르의 제자이고, 언젠가 방한 강연시에 리쾨르에 대한 책을 쓰고 있다는 걸로 들은 것도 같다. 그 책이 지난 1997년에 나온 <폴 리쾨르, 삶의 의미>라는 책이고, 이번 번역서는 그걸 옮긴 것이다.


 

 

 

 

 

 

 

도스의 책들은 그간에 여러 권이 번역돼 나왔지만, 권할 만한 건 <구조주의의 역사1>이다(아날 학파를 다룬 <조각난 역사>는 내가 자세히 읽어보지 못했다). 내용이 권할 만하다는 게 아니라 번역이 그래도 제일 낫다는 의미에서. <구조주의의 역사>(2-4권)은 어느 정도 상상력을 갖춘 경우에 한에서 도전해볼 만하다. 역사가이지만 디디에 에리봉처럼 굉장히 저널리스틱하게 글을 쓰는 도스이건만 다른 번역본들은 어느 것 하나 쉽게 읽히지 않는다. <역사 - 성찰된 시간>(동문선, 2001)은 무슨 암호문 같은 책이고, 작년에 나온 <역사철학>(동문선)은 내가 기피대상으로 꼽은 역자의 ‘작품’이어서 들여다볼 생각도 않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나온 게 <폴 리쾨르>인지라 사실 걱정이 앞서지만, 그래도 다행스러운 건 역자들이 나름대로 최상의 진용이라는 것. <구조주의의 역사1>을 공역한 이봉지 교수 같은 이는 신뢰할 만한 번역자이다. 해서, 가격에 대한 부담만 떨쳐낼 수 있다면 읽어볼 만한 책이 될 것이다.

 


 

 

 

 

 

 

 

폴 리쾨르에 대한 책을 제일 처음 꼽은 것은 사실 그의 <시간과 이야기> 전3권이 완역돼 있고(<살아있는 은유>나 <프로이트와 철학> 등이 더 번역되어야 하는 책들이다) 연구서도 몇 권 나오는 등, 게오르그 가다머와 함께 현대 해석학을 양분하고 있는 그의 사상과 저작을 읽고 이해하기 위한 여건이 어느 정도 성숙돼 있는 걸로 보이기 때문이다. 1913년생이지만, 아직도 ‘현역’인(2004년에도 영어와 러시아어로 그의 <기억, 역사, 망각>이 번역 출간되었다) 리쾨르는 현대사상가로서 한번 도전해볼 만한 봉우리이다.


개인적으론 <살아있는 은유>(영어본은 <은유의 규칙>)의 번역 스터디에 참여해본 적도 있어서 리쾨르가 낯설지 않고, 그에 대한 책들도 많이 갖고 있다. 지난주에는 <해석의 갈등>(아카넷, 2001)을 영어본, 러시아본(완역본은 아니고 3/4이 번역돼 있다)과 같이 펴놓고 읽어보기도 했다. <해석의 갈등>은 <악의 상징>과 마찬가지로 역자가 긴 문장들을 전부 토막을 쳐서 번역했기 때문에 읽기에는 편하지만 모호하거나 오해의 소지가 있는 대목들이 많다(리쾨르는 영어본도 가다머보다 읽기에 불편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인용하기가 께름칙하다. <시간과 이야기>는 러시아아로도 아직 완간이 안돼 있는데(3권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 우리말로는 읽어볼 만한 여건을 갖추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직 영어로도 번역되지 않은 도스의 <폴 리쾨르>가 출간된 것. 그래서 의미가 있다(재정상 도서관에나 주문해놓았기 때문에 최소한 한달쯤 후에나 나는 책을 손에 들어볼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꼽은 <과학의 탄생>은 여러 신문에서 크게 다루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말을 아끼도록 하겠다. 내용의 방대함 못지않게 저자인 야마모토 요시타카의 특이한 이력이 흥미로운데, (1)동경대 물리학과의 수재였다가 (2)1960년대 학생운동 당시 ‘전공투’(우리의 ‘전대협’쯤 되는 건가?) 의장이었고, (3)이후엔 입시학원 물리강사. 무려 20년간 준비해서 63살에 완성한 책이라고 한다. (연봉이 수십억에 이르는 입시학원 강사들도 여럿 된다는데) 우리 주변엔 이런 책을 써줄 만한 입시학원 강사가 없는 건지?(대학 교수들은 ‘문제의식’이 다른지라 이런 종류의 책을 쓸 리 만무하고.)


 

 

 

 

 

 

 

세 번째 책은 중국의 신좌파 지식인 왕후이의 <죽은 불 다시 살아나>(삼인). 이미 <새로운 아시아를 상상한다>(창비, 2003)로 소개된바 있는데,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아시아 지식인들이 어떤 문제틀을 갖고 사고하고 어떤 식으로 풀어나가고자 하는지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일 듯하다. <새로운 아시아를 상상한다>에는 저자의 자전적 (학문)편력과 대담이 수록돼 있으므로 아마도 그 책부터 읽어보는 것이 순서에 맞을 듯도 하다. 창비에서 나오는 ‘동아시아의 비판적 지성’ 시리즈는 단발로 끝나고 아직 후속타가 없는데, 좋은 기획인 만큼 계속 이어졌으면 싶다. 이와 보조를 맞출 만한 것이 민음사에서 나오는 ‘현대의 일본지성’ 시리즈인데, 그 외에는 더 많은 기획들이 선보여서 미래 ‘동아시아’ 연대를 위한 사상적 교류의 물꼬를 트고 동시에 공통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해 주었으면 한다.

 

 

 


 

 

 

네 번째 책은 문학비평가 서영채의 신작 <문학의 윤리>(문학동네)이다. <소설의 운명>(문학동네, 1995) 이후에 10년 만에 낸 비평집인데, 4년 터울로 책을 냈던 김현이나 매년 책을 내고 있는 김윤식 등에 비하면 젊은 비평가들의 ‘게으름’이 (내용도 없는 가운데) 상당하지만, 황종연과 함께 ‘문학권력’ 문학동네의 대표적인 비평가로서 서영채는 주목할 만하다(1991년에 <비루한 것의 카니발>을 낸 황종연은 15년 주기로 책을 낼 모양이다(*착오이다. 황종연의 비평집은 2001년에 나왔으며, 내년쯤 책이 보태지면 5년 주기가 된다). 비평가들에겐 각자의 사정이 있으며 저마다의 주기가 있다). ‘권력’에 관해서가 아니라 ‘문학’에 관해서. 그리고 그의 단정한 문장에 관해서. 내가 특별히 그의 글을 많이 읽은 거 같지는 않지만, 내가 읽은 한도 내에서 그는 문제를 깊이 다루되 ‘오버’하지 않았다. 그의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미덕은 그가 낸 책들의 제목에서도 확인된다. <소설의 운명>에서 (이광수, 염상섭, 이상 연구서인) <사랑의 문법>과 <문학의 윤리>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자수율과 단어결합 패턴을 자랑한다(비평서의 제목으로 가장 애호되는 ‘○○과 ○○’도 아니고). 조금 오버해서 말하자면, 그는 문학에서건 생활에서건 ‘바람’을 피울 만한 위인은 아닌 듯싶다.


지난주에 미국의 노벨상 수상 작가이자 포크너와 함께 ‘20세기의 두 작가’로도 꼽히는 솔 벨로가 세상을 뜬바, 그의 책들을 검색해 보았더니, 달랑 <클라라의 반지>(한국학술정보, 2004) 정도만 구할 수 있는 책으로 뜬다. 거기에 그에 관한 연구서만 서너 권(작품도 없는 연구서라는 건 얼마나 생뚱 맞는가!). 통계상 국내에서 출판되는 책들의 대략 30% 정도가 번역서라고 하는데(지난주 한국일보 기사처럼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다. 한국의 지식생산능력이 전세계의 몇 %나 되기에 고작 30%의 출간률이 부끄럽다는 말인가? 문제는 번역의 양이 아니라 질이다. 번역될 만한 책들이 양질로 번역된다면 그 비율은 60%가 되어도 무방하다), 뒤져보면 없는 책들이 태반이다.


 

 

 

 

 

 

 

 

 

다섯 번째 책은 하는 수없이 안데르센의 <즉흥시인>(웅진닷컴)을 꼽는다. ‘하는 수없이’라는 건 이 작품이 고전으로서의 가치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이 작품에 대해서 내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읽은 건 그저 그의 동화들뿐이었기 때문에. 1835년작인 <즉흥시인>은 동화가 아니라 소설이다. 시대상황으로 봐서는 낭만주의 소설 범주에 들어갈 것이다. 올해가 안데르센(1805-1875) 탄생 200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한 만큼 한번 읽어보는 기회를 가질 만하다. 게다가 역자는 전문번역가인 김석희씨이다. 믿고 추천할 만하다. 580쪽에 18,000원. 물론 이 책을 손에 집어든다면, <안데르센 자서전>(휴먼&북스, 2003)도 함께 참조하는 게 좋겠다. 언젠가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한번 언급한 적이 있는 책이다...


05. 04.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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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 때문에 파일들을 뒤적이다가 오래전에 써둔 글을 발견했다. 기억에 99년 12월말쯤 한 독서강좌에서 강의안으로 사용한 것인데(<기형도 전집>이 나온 걸 빌미로 하게 된 강의였다), 언제가 쓰고자 하는 '기형도론'의 초안 성격을 갖는다. 자료 정리 차원에서 여기에 옮겨둔다(각주는 제외하거나 압축하였다).

 

 

 


1. 편집증/분열증적 문명

남자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가정으로부터, 혹은 여자로부터. 어느쪽이든 멋지지 않느냐. 여자들이나 아이들도 서투른 만류 공작 같은 하고 있을 틈이 있으면, 남겨지는 것보다 먼저 도망치는 쪽이 낫다. 행선지 같은 건 알게 뭐냐. 어쨌든 도망쳐라, 도망쳐라, 어디까지든... 여기서 먼저 생각나는 것이, 인간에게는 두 형태, 즉 파라노이아paranoia형과 스키조프레니아schizophrenia형이 있다는 최근의 주장이다. 파라노이아라는 건 편집증형을 말하는데, 과거의 모든 일을 적분(=통합)integrate하여 짊어지고 있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면, 10억원을 가지고 있는 구두쇠가 10만원만 더, 5만원만 더, 라고 혈안이 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에 대해, 스키조프레니아라는 건 분열증형으로, 그때마다 시점 제로에서 미분(=차이화)differentiate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항상 <지금>의 상황을 예민하게 살피면서 순간순간에 모든 것을 거는 도박꾼 같은 사람이 그 전형이다.

가장 기본적인 편집증형의 행동이라고 한다면, <정주(定住)하는> 것이 될 것이다. 가정을 이루고, 그곳을 중심으로 영토의 확대를 도모하는 동시에, 재산을 산더미처럼 축적한다. 아내를 성적으로 독점하고, 태어난 자식의 엉덩이를 두드리며, 가정의 발전을 도모한다. 이 게임은 도중에서 그만두면 진다. <그만둘 수 없다, 멈출 수 없다>를 계속하여, 어쩔 수 없이 편집증형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병이라고 하면 병이지만, 근대 문명은 이런 편집증적 추진력에 의해 여기까지 성장해온 것이다... 그런데, 사태가 급변하기라도 하면, 편집증형은 약해진다. 잘못하다가는 울타리 안에 들어박혀 있는 힘을 다해 싸우다가 목숨을 바치게 되는 사태가 올지도 모른다.

여기서 <정주하는 사람>을 대신하여 등장하는 것이 <도망치는 사람>이다. 이 녀석은 무슨 일이 있으면 도망친다. 머무르지 않고 아무튼 도망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몸이 가볍지 않으면 안된다. 가정이라는 중심을 갖지 않고, 끊임없이 경계선에 몸을 둔다. 재산을 부지런히 모으거나, 가장으로서 처자식 위에 군림하고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때마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을 이용하고, 대를 이을 아이도 적당하게 씨를 뿌려놓고 뒷일은 운명에 맡겨버린다. 의지가 되는 것은 사태의 변화를 포착할 수 있는 센스, 우연에 대한 직감, 그것뿐이다. 이렇게 되면 정말 분열증형이라 할 만하다... <편집증적 인간>으로부터 <분열증적 인간>으로, <정주하는 문명>에서 <도망치는 문명>으로의 대전환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편집증적 인간은 모든 과거를 적분(=통합)하여 등뒤에 짊어지고 그것에 매달려 있는 것을 뜻한다. 편집증적 인간은 <따라잡고 뛰어넘어라> 경주에 열심인 경주자이다. 그는 한발이라도 앞으로 나가자, 조금이라도 많이 축적하자고 눈에 핏발을 세우고 계속 열심이다. 한편, 분열증형은 그때마다 시점 제로에서 미분(=차이화)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분열증적 인간은 <따라잡고 뛰어넘어라> 경주에서 추월당했다고 하더라도, 금방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둘러보고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 달려가버린다. 말할 필요도 없이 아이들은 스키조 키즈다. 금방 정신이 산만해지고, 한눈을 팔고, 다른 데로 빠진다. 오로지 <따라잡고 뛰어넘어라>의 편집증적 추진력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근대 사회는 그러한 스키조 키즈를 강인하게 편집증적으로 만들고 경주 과정으로 억지로 끌어들이는 일을 존립 조건으로 하고 있다... 일정한 방향으로 숨 가쁘게 달리는 편집증형의 자본주의적 인간은 이제 종언을 고하고 있다. 그 후에 오는 것은 무엇인가?.. (아사다 아키라, <도주론>)

 

 

 

 


2. 20세기 한국시와 기형도

20세기 한국시와 기형도를 읽는데 있어서 편집증/분열증의 도식이 왜 필요한가? 대답은 간단하다. 재미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재미에 맛을 들였고, 급속도로 전자 미디어화되어 가는 문화와 삶의 양태 또한 이러한 재미의 윤리(fun ethic)를 권유하고 부추긴다.(나에게 재미가 있으면 좋은 거고, 없으면 나쁜 거.) 그것이 대안이 될지 어떨지는 속단할 수 없다. “어쨌든, 분열증적인 운동성과 편집증적인 억압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것”이니까. 다만, 여기서는 20세기 한국시의 편집증/분열증적 시의 운동과 계보를 간략하게 더듬어보는 것으로 기형도 읽기에 대한 예비공작을 대신하도록 한다.

<황무지>(1922)의 시인이자, 아마도 가장 유명한 20세기 시인, T. S. 엘리엇은 시뿐만 아니라 시론에서도 정력적이었는데, 그가 유달리 강조한 것은 전통과 역사의식이었다. 모름지기 25세 이후에도 시를 쓰려는 자는 역사에 대한 “감”을 먼저 연마해야 한다는 것. 그가 말하는 역사는 단순한 시사(詩史)를 넘어서 종교사, 종교적/상징적 상상력의 역사에 걸쳐 있지만, 하여간에 시란 것이 젊은 날의 겉멋이나 치기가 아니라는 것을 그는 줄곧 강조하였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김춘수는 (25세 이후에도?) 시론(詩論)을 갖고 있지 않은 시인은 천재이거나 아마추어라고 평했는데, 시에 대한 자신만의 주관, 혹은 관념(idea)이 없다면 일찌감치 시는 그만두는 것이 좋다는 뜻을 그의 주장은 함축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시론이란 것이 모국어에 대한 감각과 시사(詩史)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 없이 가능하지 않다고 할 때(김춘수 또한 시론(詩論)에 정력적인 시인이며 여러 권의 시론집을 낸 바 있다), 모름지기 시인이라면 시의 전통과 역사적 전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에 대한 부단한 의식 속에서, 그것과 맞서며 아주 조금씩 전진해나갈 따름이다. 시에 대한 이러한 태도를 편집증적이라 부를 수 있을까?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시인은 그 이전에 씌어진 모든 시를 다 읽고 나서야 거기에 한 문장, 혹은 한 글자 덧붙일 수 있을 따름이다. 편집증적인 시의 역사?..

그러한 시의 역사를 재구성할 때, 20세기 한국시란 무엇이었나? 20세기 초에 한국시의 기초를 이룬 시인들의 이름으로 김소월(魂의 시), 이육사(精神의 시), 이상(技巧의 시) 등등의 계보를 지적할 수 있을 테지만(김윤식의 분류이다), 20세기를 통틀어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시인을 꼽으라면, 단연 시업(詩業) 60년을 넘긴 미당 서정주를 들 것이다. 그의 정치적 과오 때문에 한때 미당(未堂)보다는 말당(末堂)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그가 우리 부족시의 족장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현역’을 자임하는 그의 시를 보라(*이 글은 그가 작고하기 이전에 씌어졌다).

내 나이 80이 넘었으니/ 시를 못쓰는 날은
늙은 내 할망구의 손톱이나 깎어주자./ 발톱도 또 이쁘게 깎어주자.
훈장 여편네로 고생살이 하기에/ 거칠대로 거칠어진 아내 손발의
손톱 발톱이나 이뿌게 깎어주자.
내 시에 나오는 초승달같이/ 아내 손톱밑에 아직도 떠오르는
초사흘 달 바래보며 마음 달래자./ 마음 달래자. 마음 달래자.

시를 못쓰날에 할망구 손톱 발톱 깎어주며 마음 달래는 일도 “이뿌게” 시로 만드는 그의 솜씨는 대가급이다. 그러나 서정주의 시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되어 있는, 체념적 달관 혹은 달관적 체념의 세계(비평가 김현은 서정주의 정신주의에 대해서 “그의 정신주의는 그가 그의 삶을 정면에서 바라보지 않는 데서 기인하는 태도의 희극”이라고 적은 바 있다)는 이념(idea), 혹은 형이상(形而上)을 배제한 세계이다(“西으로 가는 달 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추천사(鞦韆詞)>는 구절에는 그의 체념적 달관이 집약되어 있다. 이 이념-이후에 그는 “가난이란 한낱 襤樓에 지나지 않는다/.../ 靑山이 그 무릎 아래 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엔 없다”(<無等을 부며>)는 사실에 만족한다. 그것이 또한 달관적 체념의 세계이다).

‘시인부락’의 동인으로 같이 활동했던 청마 유치환은 서정주와 달리 이념적 ‘깃발’을 표나게 내세운 바 있으나, 언어적 조탁에 있어서 그에 미치지 못했고, 한자어투로 이루어진 그의 남성적 어조는 계보를 얻지 못했다(청마를 가까이 한 이에 김춘수가 있지만, 김춘수의 여성적 세계는 유치환의 남성적 세계와 대조적이다. 김춘수 자신이 시인하는 바이지만, 그의 초기시는 서정주의 계보에 속한다). 그리고 그의 시업(詩業) 또한 너무 일찍 한국시사에서 단절되었다. 그리하여 멀리는 40년대부터, 한국시단은 미당과 그 일가(一家)에 의해 접수된다(한국시사에서 지나치게 과대평가된 사례인 ‘청록파’의 경우, 박두진의 몇몇 시편들을 제외하면 비이념적 정관적(靜觀的) 세계관에 침윤되어 있다. 박목월의 경우가 대표적이지만, “구름에 달가듯”한 세계엔 이념이 틈입할 여지가 없다. 그림(=풍경)만 남고 목소리가 빠진 시는 왜소하다).

그리하여 여기에 유사-오디푸스 콤플렉스가 개입한다. 미당 이후의 시인은 하여간에 시인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얻기 위해서는 미당과 싸워야 했다. 그를 넘어서거나 그와 다른 세계로 질주해야만 했던 것이다. 50년대 모더니즘 시운동이 잠시 시림(詩林)을 떠들썩하게 했지만, 곧 빈수레였다는 것이 들통난다. 그들은 木馬를 타고간 소녀의 옷자락 얘기만 잠시 늘어놓았을 뿐이었다. ‘언어(말부림)’를 가지고 미당에 맞서 그보다 윗길로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고은 정도가 서정주의 어법을 가지고도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남은 희귀한 사례이다), 그의 시업이 60년을 넘길 수 있을는지?

미당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한 대안이라는 것은 미당의 이념적 ‘퇴행’을 걸고 넘어질 수 있는 이념이어야 했다. 60년대 김수영과 김춘수는 이 점에서 제각각의 방식이긴 하지만, 뚜렷하다. 60년대 한국사회를 지배했던 이념적 화두가 ‘자유’였다는 점에서 김수영은 6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손색이 없다. “달나라의 장난” 같은 그의 시가 처음부터 끝까지 줄기차게 노래, 아니 절규한 것이 바로 자유였기 때문이다. 산문적인 그의 시의 어법 또한 미당과는 전혀 종류를 달리하였다. 4.19 이후에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그 방을 생각하며>)고 그는 적고 있는데, 조금 다른 맥락에서, 김수영은 미당의 그늘 아래 놓인 해방 이후 한국시사에서 자신의 ‘방’을 마련한 드문 예에 속한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김춘수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미당의 빈 자리를 물고 늘어진다. 그는 언어의 이념(이라기보다는 관념)을 자신의 탐구 대상으로 삼는다. 이 또한 의미(=역사)로부터의 도피, 혹은 퇴행이라는 혐의를 지우기 힘든 경우지만, 어쨌거나 언어의 가지 끝에 매달리는 데는 성공한다. 이념의 부재로 미당의 시를 특징지울 수 있다면, 김춘수의 시는 한술 더 떠서 의미의 부재를 지향한다. 언어적 자의식을 대표하는 그에게 시는 “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고 “얼굴을 가리운 나의 新婦”이다. 그것은 말부림의 세계가 아니라, 말 비우기의 세계, 의미의 빈 그릇의 세계이다. 그리하여 어쨌거나 김수영과 김춘수에 와서 한국시는 미당시에서 탈색된 근대성(=시대성)을 다시 획득한다. 그러나 그것은 김수영의 이른 죽음을 대가로 치른 것이었다. 그리고 맞은 70년대에도 미당시는 여전히 도전/극복의 대상이다.

젊은 전사들의 이름으로 평론가 김현은 황동규, 정현종, 오규원 등을 지목하고 있는데,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즐거운 편지>)의 황동규는 “물 빛 라일락의 빛과 香”을 가진 미당의 “永遠” 대신에 비극적 세계인식의 “자세”를 대립시키고,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병신 같은 女子, 시집 같은 女子,...”(<한 잎의 女子>)의 오규원은 대상과 언어와의 관계를 의혹이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연기(緣起)론 세계인식에 딴지를 건다. 거기에 “나는 별아저씨, 바람 남편이지”의 시인 정현종의 “숨통“과 “걸음걸이”가 미당의 행보를 뒤쫓는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70년대를 증언할 수 있는 시인은 70년대의 포문을 연 <오적(五賊)>(1970)의 김지하이다. 그는 대뜸 이렇게 시작하지 않았던가. “詩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 이 황토(黃土)의 땅에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를 외치는 일에 비하면, 조곤조곤한 시들은 좀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가 70년대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낸 것 또한 그의 ‘대표성’을 수긍하게 한다. 시 또한 감옥에 들어가 있어야 마땅했을 시기가 아니었던가.

80년대 한국시는 80년 광주에서 시작된다. 그보다 조금 먼저 등단한 이성복은 이 “정든 유곽”의 땅에서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진단서를 제출한 바 있지만(이성복은 기형도의 전사(前史)로서 빼놓을 수 없다.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市內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그날>)라는 진술은 기형도의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醉客 하나가 얼어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 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안개>)란 진술로 이어진다. 그러나 기형도에 와서 그 “아픔”, “신음소리”는 “개인적인 불행”으로 이미 내면화된다), 가장 명료하게 80년대를 규정한 이는 황지우이다. “여기는 초토입니다/ 그 우에서 무얼 하겠습니까”(<에프킬라를 뿌리며>) 여기서 황지우의 “초토”는 김지하의 “황토”에 견줄 만하다.

80년대는 죽음의 연대였고, 시인들은 네크로필리야(necrophilia)에 들린 파리떼처럼 몰려들어 그 죽음을 파헤치고 음미하였다. 죽음에 분노하였고, 그 부채의식에 통곡하였다. 간혹 미치기도 하였다. “아싸라비야, 도로아미타불”이나 “내가 살아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일찍이 나는>)고 한 최승자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성복의 어법을 빌리자면, “모두 죽었는데, 아무도 죽은 줄 몰랐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죽음의 기운이 조금씩 떨쳐지는 것은 87년 이후이다. 그 이후 한국사회는 개량적․형식적 민주화의 길로 접어든다. 그리고 이어진 90년대에 80년대는 이미 “과거”가 돼 버리고, “후일담”이 횡행한다(한국사회는 가끔 (나쁜 쪽으로) 정신분열증적이다. 과거-망각(청산이 아니다!)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듯하다. 정신분열증적인 포스트-모던사회에서의 선전을 기대해볼 수 있을까?).

3. 기형도-정거장-고드름

잠시 에둘러왔지만, 기형도의 시가 자리하는 건 80년대 말이다. 100년의 한국시사가 두 쪽에 요약될 리는 만무하지만, 적어도 (편집증적인 시읽기에 있어서) 시의 전사(前史)를 모르고 한 시인에 대해 말한다는 건 어불성설이기 때문에 이러한 사전공작이 필요하였다. 미리 말하자면, 기형도의 시는 죽음-의식과 비관적 세계인식의 한 극점으로 평가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80년대적이지만, 그의 비관론이 개인사적인 근원을 더 강하게 갖는다는 점에서 80년대를 넘어선다. 그렇다고 90년대적일까?

참고로, 90년대적인 시(현상)으로 장정일과 유하의 경우를 들고 싶다. <햄버거에 대한 명상>(1987)의 장정일과 <무림일기>(1989),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의 유하는 키치적인 상상력과 패러디적인 기법으로 무장하고 “진지한 시”의 전통에 냉소를 퍼붓는다.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곱게 다졌으면,/ 이번에는 양파 1개를 곱게 다져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넣고/ 노릇노릇할 때까지 식혀놓는다/ 소리내며 튀는 기름과 기분 좋은 양파 향기는/ 가벼운 흥분으로 당시의 맥박을 빠르게 할 것이다...”; “그 무렵 하남 당에서 민초들의 항쟁이 있었다/ 아, 이름하여 하남의 대혈겁(大血劫)/ 광두일귀는 공수무극파천장(空輸無極破天掌)을 퍼부어 무림잡배의 폭동을/ 무사히 제압했다고 공표, 무림의 안녕을 거듭 확인했다” 이들의 “가벼운 흥분”과 재미의 세계는 80년대적인 무거움과 극적이면서 단호하게 결별한다. 이는 새로운 시이면서, 시의 끝(=종말)이다. 근황? 장정일은 일찍이 시를 그만 두었고, 유하는 영화계 주변을 맴돌다가 다시 시의 초심(初心)으로 되돌가겠다며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를 발표하고 욕을 먹는다.

하긴 90년대의 많은 시인들이 기형도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그의 시에도 불운한 시대의 징후/이미지들이 알레고리나 상징의 형태로 들어서 있다. 하지만 그 징후/이미지들은 그의 “개인적인 불행”과 겹쳐지면서 증폭되는 것이지 결코 그 반대가 아니다. 그는 어떠한 “후일담”도 허용하지 않을 만큼 집요하게 비관적이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오래된 書籍>)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장미빛 인생>)
“자시의 다리를 바라보고 동물처럼 울부짖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또 어디로 가란 말인가!”(<여행자>)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진눈깨비”(<진눈깨비>)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정거장에서의 충고>)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질투는 나의 힘>)...

이 비관론의 출처는 개인적인 심리적 외상(外傷, trauma)이다. 그 상처로 여러 평자들이 지목하고 있는 바는, 유년/소년시절의 가난과 청년시절의 실연이다. 거기에 덧붙여서 소년시절 누이의 죽음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서 그러한 상처는 상징이 아니다. 대리체험도 아니다. 그것은 ‘현실’이다. “기형도의 리얼리즘의 요체는 현실적인 것에서 시적인 것을 이끌어”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시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며, 현실적인 것이 시적인 것이라는 것을, 아니 차라리 시적인 것이란 없고, 있는 것은 현실적인 것뿐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 데 있다.”고 평론가 김현이 적을 때,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 또한 그것이다. 그러한 상처 이후에 기형도에겐 집이 없다.

여기서 그가 떠나온 자리를 기록해 두기로 하자. 어린시절의 가족사와 가난을 증언하고 있는 여러 시편 가운데서 <폭풍의 언덕>의 끝부분: “다음날이 되어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폭풍의 밤마다 언덕에 오르는 일을 그만두엇다. 무수한 변증의 비며을 지르는 풀잎을 사납게 베어 넘어뜨리며 이제는 내가 떠날 차례였다.”

보라,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정거장에서의 추억>) “딱딱한 손”이란 건 유사-죽음의 이미지이다. ‘상처’ 이후에 그에겐 집이 없다. 그리고 이 지상에서 다시는 그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물 속의 사막>의 끝부분: “미친 듯이 소리친다, 빌딩 속은 악몽조차 젖지 못한다/ 물들은 집을 버렸다! 내 눈 속에는 물들이 살지 않는다” “장마통에 집을 버”린 개처럼 (눈)물마저 집을 버려서 이젠 눈물조차 나지 않는다. 나의 악몽조차 적셔주지(=위로해주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라는 도저한 비관조차도 빌딩 속이라는 이 도시적 공간에서는 아무런 반향을 얻지 못한다. 이런 비관이 그에게 포즈가 아니었다니!). 그런 그의 마음은 죽음이 잠시 유예된 거처일 뿐이며, “저녁의 정거장”이다.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속에 옮겨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시의 이러한 결말은 서두에서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려다”고 한 화자의 의지와 모순된다. 그의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는 행위(포기/체념)가 역설적으로 그에겐 마지막 남은 희망이라는 뜻일까? 모든 희망을 포기함으로써, 희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써 그는 역설적으로 희망의 문턱에 서게 되는 것일까? 혹 그에게 희망은 죽음의 다른 이름이 아니었을까? “이 누추한 육체” 속에 가두어진 삶의 비극성으로부터의 해방이 어찌 희망이 아닐 수 있겠는가! 어쨌거나, 그는 추억이 잠시 머물다 가거나 손을 깨물고 가는 정거장이다. 또 길 위에서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정거장에서의 충고를 남발하는 여행자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러한 ‘여행’의 이미지들이 다른 세계로의 아무런 탈출구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인도(印度)로 가지도 않고 타히티로 가지도 않는다. 그는 항상 떠나되 언제나 제자리이다. 그는 정거장이되, 모든 길들이 흘러(들어)오는 정거장이다. 그는 정거장(停車場)에 정거(停居)되어 있다. 그는 거기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한다. 왜? 그에게 이 세상 어디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는 무어라고 중얼거리는가? “어둠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그에 의하면 일생을 그르친 것은 오히려 희망이다. 그는 희망에 떠밀려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여행을 하지만, 결국 “무엇이 그를 이곳까지 질질 끌고 왔는지[조차], 그는 더 이상 기억도 못한다”(<여행자>) 그래서 “그는 탄식한다, 그는 완전히 다르게 살고 싶었다, 나에게도 그만한 권리는 있지 않은가”. 하지만, “모퉁이에서 마주친 노파, 술집에서 만난 고양이까지 나[그]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여행자>).

기형도의 시는 꿈을 꾸는 시가 아니라, 추억에 들려 있는, 사로잡혀 있는 시이다. 그는 편집증적으로 추억에 매달리며, 그것에 시달린다.(추억에 바쳐진 시들의 예시는 장석주의 <기형도, 혹은 길 위에서의 중얼거림> 참조.) 추억은 그에게 상처이며 억압이고 죽음에의 유혹이다. 추억은, 혹은 추억의 통합/집적은 그를 더욱 지치게 하고 늙게 만든다. 그는 일찍이 집을 잃고, <정주민(定住民)>의 대열에서 이탈했지만, 그렇다고 마음 가볍게 <유량민/유목민>의 대열에 합류하지도 못한다. 그는 자유롭게 증발하지도 못하고(=유랑민), 물이 되어 흘러 대지에 스며들지도(=정주민) 않는 고드름과도 같다. 그는 문밖에서 서성이며 밤새 처마끝을 지키고 서 있다. 그가 견디는 외로운 천형을 보라.

어느 영혼이기에 아직도 가지 않고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느냐. 네 얼마나 세상을 축복하였길래 밤새 그 오로운 천형을 견디며 매달려 있느냐. 푸른 간유리 같은 대기 속에서 지친 별들 서둘러 제 빛을 끌어모으고 고단한 달도 야윈 낫의 형상으로 공중 빈 밭에 힘없이 걸려 있다.(...)

오오, 모순이여, 오르기 위하여 떨어지는 그대. 어느 영혼이기에 이 밤 새이도록 끝없는 기다림의 직립으로 매달린 꿈의 벼가 되어 있는가. 곧이어 몹쓸 어둠이 걷히면 떠날 것이냐. 한때 너를 이루었던 검고 투명한 물의 날개로 떠오르려는가. 나 또한 얼마만큼 오래 냉각된 꿈속을 뒤척여야 진실로 즐거운 액체가 되어 내 생을 적실 것인가. 공중에는 빛나는 달의 귀 하나 걸려 고요히 세상을 엿듣고 있다. 오오, 네 어찌 죽음을 비웃을 것이냐 삶을 버려둘 것이냐, 너 사나운 영혼이여! 고드름이여.

고드름의 이미지는 기형도적 편집증의 정점이다. 그것은 어머니의 “그토록 가늘은 유리막대처럼 위태로운 모습”(<폭풍의 언덕>)의 반복이면서, 그 자신의 “낡아바진 구두에 쑤셔박힌, 길쭉하고 가늘은/ 자신의 다리”와 조응하는 이미지이다: “나는 풀밭에 꽂혀서 잠을 잤다.”(<위험한 가계․1969>) 등에서 보여지듯이, 그의 잠(=안식)은 일시적이고, 그래서 불안하다. 그것은 “나는 이렇게 쉽게 뽑혀지는구나”라는 아버지의 진술이나, “나는 빨랫줄에서 힘없이 떨어지는 아버지의 러닝 셔츠가 흙투성이가 되어 어디만큼 날아가는가를 두눈 부릅뜨고 헤아려보았다.”(<폭풍의 언덕>) 같은 구절과 조응한다. “가난한 아버지” “아버지, 불쌍한 내 장난감/ 내가 그린, 물그림 아버지”(<너무 큰 등받이의자>) 등에서 보듯이, 아버지의 ‘무력함’, ‘굳게 뿌리내리지 못함’은 그에게서 ‘집없음’(→여행자→정거장)으로 표상되는데, 그의 ‘정거장’은 동적인 운동성보다는 정적인 정체(停滯)성을 주된 자질로 갖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정거장은 고드름과 통한다.

그의 꿈, 고드름의 (냉각된!) 꿈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진실로 즐거운 액체”가 되어 생을 적시는 것이다. 기형도의 시는 딱딱하게 굳어진 눈물의 시이고, 고체화된 액성의 시이다. 오오, 그런 그의 시를 우리가 어찌 비웃을 것이냐, 버려둘 것이냐!..

 

 



 

 

4. 다시, 분열증적 읽기

대강 건너뛰면서 기형도 시의 한 가지 주제를 살펴보았다. 추억에 대한 편집증적 집착이 고드름이란 이미지로 극화되는 과정에 어떤 논리를 부여하고 싶었지만, 결과는 신통찮다. 많은 걸 건너뛰고 생략했기 때문이다(시간관계상!). 기형도 시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고, 그의 보편문법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의 ‘편집증적’ 읽기 또한 다시 반복될 것이다. 그러나 시에 등장하는 모든 이미지들의 반복을 좇아가며 거기에 논리를 부여하려는 편집증적 읽기, 시사(詩史)적인 맥락에 대한 집착적 읽기에서 놓여난다면, 우리는 시집의 아무 페이지나 읽고 또 덮어둘 수 있을 것이다. 아무 구절이나 암송하고, 간혹 정거장이나 혹은 술집에서 되뇌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잊을 것이다. 시에 대해서, 시인에 대해서... 왜냐고? “갸우뚱 고개 젓는 그대 한숨 속으로 언제는 나는 들어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아, 그대는 곧 입김을 불어 한 잎의 불을 끄리라. 나는 소리없이 가장 작은 나뭇가지를 꺾는다. 그 나뭇가지 뒤에 몸을 숨기고 나는 내가 끝끝내 갈 수 없는 生의 僻地를 조용히 바라본다. 그대, 저 고단한 燈皮를 다 닦아내는 薄明의 시간, 흐려지는 어둠 속에서 몇 개의 움직임이 그치고 지친 바람이 짧은 휴식을 끝마칠 때까지.”(<바람은 그대 쪽으로>) 내가 끝끝내 갈 수 없는 “生의 僻地”를 두고 얼마나 많은 밤을 메마른 눈물로, 불면으로 지새웠던가(손수건을 씹어댔던가!). 그럼에도, 여전한 것... “내 그리움의 거리는 너무 멀고 沈黙은 언제나 이리저리 나를 끌고다닌다.”

그리하여, 현명한 당신은 이제 알 것이다. 이 모두가 다만 침묵하기 위해서 말해진 것일 뿐이라는 것을!... (어서 도망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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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무 때문에 토요일 오전부터 학교에 나왔다. 귀국 이후엔 처음이다. 조용할 줄 알았는데, 점심을 먹고 나니까 여기저기서 북적거린다(대개 나와 같은 종류의 용무이다). 한 편의 프로그램성 글을 작성하는 것이 오늘의 할일인데, 아직 동료들의 글이 도착하지 않은 걸 핑계로 잠시 쉬고 있다. 이 잡는 기분으로 몇 자 적는다. 오는 길에 두 종의 토요일자 신문에서 북리뷰도 읽은 티를 낼 겸.

 

 

 

 

 

 

 

 

 

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가 출간예정이라는 건 지난번 글에서 언급한바 있는데, 책은 지난주에 서점에 깔렸고 나는 어제 출판사측으로부터 책을 건네받았다. 옮긴이 서문에 내 이름이 언급돼 있는데, 러시아어 인명과 작품명을 교정한 인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인연은 전적으로 우연에 기인한다. 모스크바에서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읽던 중 우연히 역자가 운영하는 벤야민 카페에 '모스크바 일기'가 번역/소개돼 있다는 내용을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알게 되었던 것. 카페에 올라와 있던 초역에는 러시아어 인명/지명 등이 잘못 표기돼 있는 경우가 많아서 '잠자는 숲속의 벤야민'이란 통신문을 통해 지적한바 있는데, 눈 밝은 출판사측에서 연락을 취해 왔다. 귀국 준비 때문에 별로 경황이 없었지만, 나는 보내준 '일기' 원고파일의 절반 가량을 훑어보고 귀국했다.

 

교정은 흔쾌히 맡기로 했지만, 귀국 이후에 이런저런 잡일과 병치레로 맡은 일을 만족할 만큼 처리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은근히 걱정이 없지 않았지만, 책이 현재의 깔끔한 모양새로 나온 것은 출판사측의 '전문가적' 편집/교정 덕분이다. (아마도 문교부의 '외래어 표기안'대로) 러시아어의 무성음화를 우리말 표기에 반영한 것 정도가 나로선 약간 낯설게 느껴지는데('메이에르홀드(Meyerhold)'를 '메이에르홀트'로 표기하는 식), 그러한 원칙이 일관되게 적용되고 있기 때문에 헷갈릴 건 없다고 본다. 61쪽에서 펠트로 만든 장화 '발란키스'도 내가 갖고 있는 영어본(1986년)과 러시아어본(1997년)에는 '발렌키'로 돼 있는데, 이게 선택적인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책 표지에도 사진으로 들어가 있는 '바실리' 성당을 '바실리우스' 성당이라고 (라틴식으로) 표기하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이런 경우는 러시아쪽 표기를 살려주는 게 낫지 않나 싶다(물론 우리말 표기가 러시아쪽 표기를 전적으로 존중하는 건 아니다. 예컨대, 러시아어 '시비리'는 우리말로 '시베리아'라고 표기된다. 이미 굳어져 버렸기 때문에 고치지 않는 것).

 

잘 읽히는 책이지만, 가끔 미심쩍다고 생각되는 대목들이 없지는 않은바, 내가 읽은 범위내에서 두어 가지를 지적한다(나는 오는 길에 63쪽까지 읽었다). 37쪽에서, 독일과 러시아 신문 기사의 차이를 지적하고 있는 대목인데, "500-600줄 사이의 기사들은 예외없이 그렇다"는 "여기서는(=러시아에서는) 500-600줄 짜리 기사가 드물지 않다"란 내용이다. 독일 신문들은 짤막하게 '결론'을 제시하지만, 러시아 신문들은 자료를 폭넓게 제시한다는 것(이건 요즘도 그런 편이다). 60쪽에서, 구걸을 다루고 있는 대목인데, "거리 구석구석, 특히 외국인들이 좌판을 벌이고 있는 구역"은 "거리 곳곳에, 특히 외국인들의 비즈니스 구역" 정도의 뜻이지 않을까 싶다. 외국인(사업가들)이 적선에 더 관대하기 때문에 걸인들이 더 모인다는 내용일 테니까. 좌판을 벌인다는 건, (비유적 의미에서가 아니라면) 우리의 경우 노점상을 뜻하는데, 1926년에 외국인들이 모스크바 시내 한복판에서 노점상을 할 일은 없어 보인다.

 

61쪽의 '어린 노숙자' 사진은 영어본에 따르면, 지가 베르토프의 뉴스필름에서 따온 것이다(주석의 경우 영어본이 더 자세한 경우가 많았다). 이 사진은 물론(!) 러시아어본에는 들어가 있지 않다. 62쪽, "이름이 불러일으키는 비실제적 환상"에서 '환상'은 영어나 러시아어본에서모두 복수형이고 fantasies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판타지'이다('환상'은 단수형으로만 쓴다). 문맥상 '환상'과는 약간 다른 의미여야 할 듯하다. 그리고 63쪽, 불가코프의 <투르빈가의 나날들> 공연을 보러완 청중(=관객)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대목인데, "여기엔 코뮤니스트들은 거의 하나도 없었고 검정 혹은 푸른 색 블라우스도 눈에 띄지 않았다"는 대목에서 흔히 여성용 옷을 지칭하는 '블라우스'는 남성용 잠바나 제복 정도로 바뀌어야 할 듯싶다. 영어본은 tunic이라고 옮기고 있고, 러시아어로는 '블루즈'란 단어를 쓰고 있는데 '블루즈'는 여성용 블라우스와 함께 남성용 잠바도 뜻한다. 내 생각에 검정 잠바, 파란 잠바는 밀리찌야(경찰) 등을 가리키는 환유가 아닌가 싶다...

 

 

 

 

 

 

 

 

 

 

그건 그렇고, 책 얘기나 (시간관계상) 얼른 마무리짓도록 하겠다. 제일 먼저 꼽을 책은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소설 <바람의 그림자>(문학과지성사)이다. 북리뷰란들에서 가장 크게 다루어지고 있는 작품이므로 별다른 얘기를 덧붙이지 않겠다. 우리에게 처음 소개되는 작가 사폰은 스페인 출신으로 그의 이 작품은 20개국의 언어로 번역된 대형 베스트셀러라고 한다. 도대체 스페인 사람들은 무슨 소설을 읽는가라는 주변적인 관심만 가지고도 읽어볼 만하다고 본다. 대중적 평가뿐만 아니라 문학성에 있어서도 여러 사람이 보증을 서고 있는 작품. 문학과지성사가 파스칼 키냐르에 이어서 새롭게 내세우는 '간판'이 아닌가 싶은데, 한국 작가들의 소설만 가지고는 더이상 '영업'이 안된다는 인식이 이런 소설들의 번역출판에는 전제돼 있다. 그래서 '추리소설 결정판'(문화일보)라는 평에도 불구하고 뒷맛이 달지만은 않다.

 

 

 

 

 

 

 

 

 

두번째는 역사서 <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사계절). 이 또한 한겨레에서 크게 다루고 있으므로 군말을 덧붙이지 않겠다. 이 책의 원제는 <칭키스 칸과 근대 세계의 형성>인데, 제목이 말해주는 바대로, 칭기스 칸의 '보편적' 제국건설이 '근대 세계'를 만들어냈다는 것. 그러니까 '그리스=세계'나 '중국=세계'의 레벨이 아닌,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에서의 '세계'라는 건 세계사의 이 유일무이한 주역이 이루어놓은 결과이다. 더불어, 그의 몽고 제국은 '러시아'의 발명자이기도 하다. 몽고(타타르)에 대한 항전과 대타의식에서 루시(러시아의 고어명)의 정체성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 방면의 역사서가 드문 상황이기에 특별히 이 자리에 이 책을 올려놓는다. 저자인 잭 웨더포드는 인류학자로서 <돈의 역사와 비밀 그 은밀한 유혹>(원제는 '화폐의 역사', 청양, 2001)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인류학도 상당히 박식한 학문, 박식을 요구하는 학문이다.

 

 

 

 

 

 

 

 

 

 

세번째 책은 역사학에 관한 책으로 <굿바이 E. H. 카>(푸른역사)이다. 책은 1961년에 나온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40주년(2001년) 기념심포지엄의 발표논문들을 모은 것이다(한겨레의 고명섭 기자는 이 책이 1982년에 죽은 카의 20주기를 맞이하여 개최된 심포의 산물이라고 적는데, 착오인 듯싶다. 땡겨서 하지 않는 한, 20주기는 2002년이어야 하므로. 그는 <역사란 무엇인가>가 1962년에 나온 걸로 적고 있다). 대학가의 필독서였던 <역사란 무엇인가>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란 정의로 잘 알려져 있는 책이고, 국내에 그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준비하던(카는 서문만을 써넣고 죽었다) 2판 <역사란 무엇인가>(까치, 1997)도 번역돼 있다.

 

 

 

 

 

 

 

 

 

 

40년, 강산도 여러 번 바뀔 만한 세월인 만큼 당연히 역사학의 지형에도 변화가 생겼을 법하다. 책은 그러한 지형의 변화를 일람해 보는 데 요긴할 듯하다. 그간에 특히 강세를 보이고 있는 건 문화사, 미시사인데, 이번 주 한겨레의 '아깝다! 이 책'란에는대표적인 미시사학자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마녀와 베난단티의 밤의 전투>(길, 2004)가 다시 소개되고 있다. 출판사로선 열과 성을 다해서 만든 책인데, 생각만큼 안 나가고 있다는 것. 지난주 자프란스키의 <니체>(문예출판사)의 경우도 그렇지만, 이렇게 나온 책들은 독자들이 좀 사줘야 한다. 독자가 좋은 책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책들도 좋은 독자들을 외면하고 돈맛이나 챙기기 마련이기에. 언젠가 모스크바 통신에서 언급한 듯한데, 작년에 러시아에서 나온 긴즈부르그 선집은 역사분야 베스트(2권)의 하나였다. 참고로,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타의식에서 씌어진 책이 케이스 젠킨스의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혜안, 1999)이다. 원제는 'Rethinking history'.

 

 

 

 

 

 

 

 

 

네번째 책은 김용준 고대 명예교수의 <과학과 종교 사이>(돌베게). 화학 전공의 과학자로서 그리고 모태신앙을 가진 종교인으로서 자신의 40년 학문적 삶 혹은 여정을 총결산하고 있는 이 책은 '과학인 김용준의 연구노트'라는 부제를 갖고 있으며, 계간 <과학사상>에 10년간 연재한 것을 모은 것이다. 나는 부분적으로 읽어본 기억이 있는데, 그의 종교 정향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는 있지만, 그의 학문적 열정과 여정에는 배울 만한 대목이 많다. 일독해볼 만한 책.

 

 

 

 

 

 

 

 

 

이 책은 한겨레와 동아일보 서평에서 모두 크게 다루어지고 있는데, 동아일보의 시작은 이렇다: "1900년 태생으로 말년까지도 논문을 발표하다 2002년 별세한 가다머를 생각하면 나는 저절로 숙연해진다. 그를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지만, 환갑노인이 되도록 무명의 학자로 칩거해 있다가 나이 60에 '진리와 방법'이라는 불후의 명저를 내놓음으로써 일약 세계적인 학자로 군림한 그 신실함은 내게 너무나도 벅찬 감동을 안겨준다." 해서 불현듯 가다머를 다시 생각해보게 됐는데, 사실 어제는 러시아에서 온 책들 가운데 <진리와 방법>을 찾아내기도 했다. 500루블(2만원) 주고 산 책. 영어본 <진리와 방법>의 경우 개역본까지 몇 년전에 나왔건만 한국어본은 1/3 정도만 나온 채 소식이 없다. 이런 게 한국의 학문과 교양의 평균적 수준이 난장이 수준에서 계속 머물러 있는 그럴 듯한 이유이다.

 

딱히 더 꼽고 싶은 책이 없어서 다섯번째 책은 근간으로 나올 책을 기록해둔다. 도서관에 책을 주문하기 위해서 아마존을 검색하다가 알게 된 건데, 지젝 선집 과 그의 또다른 책 이 올해 안에 나오는 것으로 예고돼 있다. 출판사는 Verso가 아니라 Continuum International Publishing Group이며, 두 권 모두 350쪽 안팎의 두툼한 분량이다. 짐작컨대, 아무도 그보다 더 많이 쓸 수는 없다! 지젝-오타쿠들의 걸음이 더 빨라져야겠다...

 

05. 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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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다 2005-04-06 15:27   좋아요 0 | URL
옮긴이 서문에 언급된 이름은....'로쟈'더군요.
로쟈가 박노자의 다른 필명이라....ㅎㅎㅎ, 귀여운 상상력
올해 안에 로쟈님의 전공관련 연구서적이 출간될건가요?

로쟈 2005-04-06 16:32   좋아요 0 | URL
어떻게 아셨나요?! 아마도 학위논문이 출간될 듯한데, 워낙에 소량을 찍는 거라 구경하시기는 힘들 듯합니다.^^

주니다 2005-04-07 17:23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페이퍼에 힌트가 있었던거죠 뭐. 제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그나저나 그 책이 시중에 깔리는게 아닌가봐요? 섭섭하네요.
어디가면 구경이라도 할 수 있을까요? 하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