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집에 가는 길에 사서 읽은 한국일보에는 눈길을 끄는 글이 둘 있었다. 먼저, 매주 연재되는 고종석의 시인산책. '시인공화국 풍경들'이란 타이틀이 연재의 제목인데, 내가 어제 처음으로 읽은 이 연재는 김영승의 <반성>을 다루고 있었다. 나는 오늘 부랴부랴 인터넷에서 나머지 4회분의 연재를 마저 읽는다. 그간에 그가 다루었던 시인들은 김소월, 김정환, 성미정, 김수영이었다.



김소월에 이어서 김정환의 시집을 다루는 것도 의외이지만, 이어서 성미정의 시집 <대머리와의 사랑>을 읽는 건 파격적이다(이 시집을 나는 안 갖고 있는 듯하다). 아마도 그런 파격은 의도된 것인 듯하다. 김수영은 물론 이름값하는 시인이고("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안 시인은 '몽상가'가 아니었다), 이어서 어제 다루어진 시인은 '아름다운 폐인'으로 자칭하는 김영승.

고종석이 연재하는 시인공화국의 풍경들은 내게 낯설지 않은 풍경들이며 그래서 반갑다. 매주 한번씩은 한 명의 시인과 대면하는 시간을 가져본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게다가 대부분의 경우 나로서도 할말이 없지 않은 시인들임에랴. 해서, 고종석의 시인산책은 한동안 내가 손꼽아 기다리는 연재가 될 것이다. 나중에 책으로 묶여도 좋을 것이고.

내가 이런 식으로 고대했던 연재는 아주 오래전 김훈/박래부 기자의 '문학기행'과 김성우 논설위원의 '러시아문학기행'이었다. 15년도 더 된 이야기이다. 그리고나서 한참 후에 김훈의 '자전거 기행'이 있었다. 하루하루 흘러가는 게 세월이지만, 그런 기행/연재는 그 세월에 품위를 부여한다. 그 품위는 비록 얇은 신문지에 실려오지만, 그걸 읽는 마음에 얇지 않은 부듯함을 전달해준다. 시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더라도 그런 시대에 대한 회고만으로도 당분간은 풍족하다.

두번째는 사르트르(1905. 6. 21 - 1980. 4. 15)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프랑스에서는 올해를 '사르트르의 해'로 정하고 대규모의 행사들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 그와 병행하여 국내에서도 기념행사들이 기획/진행중이라고 전한다. 그의 마지막 대저 <변증법적 이성비판>도 번역출간될 거라는 얘기도 있고. 사르트르에 대해서는 이전에 '모스크바통신'에서 그의 노벨상 수상거부(1964) 40주년을 계기로 몇 마디 거든 바 있는데, 분위기가 그런 만큼 나도 뭔가 '준비'는 해야겠다. 러시아어본도 몇 권 구해본 김에 '비로소' 좀 읽기도 하고.

  

사르트르에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의당 그의 전기 <사르트르>(창, 1993) 나 자서전 <말>을 집어들 만하지만, 내가 추천하고 싶은 것은 폴 존슨의 <지식인의 두 얼굴>(을유문화사, 2005)이다. 거기서 사르트르에 관한 장은 역설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지성'이란 제목을 달고 있는데, '지식인들'에 대한 이 냉혹한 비판서를 통해서 거품을 말끔히 제거한 다음에 문제적인 저작들을 읽어보는 게 내가 권할 만한 순서이다. 가령, "실존주의자 사르트르는 전형적인 남성우월주의자였다"라는 걸 미리 알고서 사르트르를 읽어보시라는 것이다. 그래야지 지식인들은 그 '모순' 속에서 제값을 발휘한다.

존슨의 책은 이전에 <지식인들>(한언, 1993)이라고 처음 출간됐었고,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벌거벗은 지식인들>(1999)도 같은 책을 옮긴 것이다. 이번에 나온 것까지 역자가 모두 다르다. 제일 처음 나온 걸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는데, 번역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

그런 기사들과 함께 전철에서 (다시) 읽은 건 아즈마 히로키의 글 '우편적 불안들'(몇년전에 동서문학지에 번역돼 실렸다)인데, 이 글은 자신의 출세작 <존재론적, 우편적>(1998)에 대한 해제적 성격의 강연문이다. 지난 2월초 모스크바에서 돌아오자 마자 (우연히 복사물이 눈에 띄어) 읽게 된 것인데,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해주는 계발적인 글이다. 해서 '우편적 불안에 대하여'란 제목의 글을 '모스크바 통신'에 이어지는 마무리로 기획하기도 했었지만, (병치레 때문에) 결과적으론 실현되지 못하고 미루어졌다. 뒤늦게 작성되는 만큼 이 글은 원래의 의도를 다 포괄하거나 포함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저 히로키의 생각을 따라가면서 몇 마디 첨언을 할 생각이다.

  

 

 

 

 

 

 

 

먼저 히로키에 대해서. 1971년생인 그는 (소련이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는) 1991년 약관 20세에 '솔제니친 사론'을 통해서 등단한다. 프랑스 현대사상과 데리다 철학에 능통한 그는 <존재론적, 우편적>이라는 데뷔작을 통해서 제2의 아키라란 평을 듣는데, 아키라는 <구조의 힘>(국역본은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을 쓴 비평가 아사다 아키라를 말한다. 본문에서 그 자신이 비교하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국내에 소개된 바를 참조하면 가라타니 고진 - 아사다 아키라 - 아즈마 히로키 정도의 계보를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히로키는 '젊은 피'이자 비평의 제3세대, 혹은 새로운 세대쯤 되는 듯하다.

일본의 비평공간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나는 고진이나 아키라를 흥미롭게 읽었고, 그런 흥미 면에서라면 히로키 또한 뒤지지 않는다(거기에 대응할 만한 한국 비평가를 거명하지 못하겠다). 그래서 <존재론적, 우편적>이나 <우편적 불안들> 같은 그의 주저들이 번역되기를 기대한다. 근래에는 동경대 대학원쪽으로 유학을 가는 이들도 많이 있으므로 번역자원이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히로키는 이 강연문의 서두에서 먼저 '콘스타티브(constative)'와 '퍼포머티브(performative)'라는 개념을 설명하고 들어가는데, 전자는 '사실확인적'이란 말이고 후자는 '행위수행적'이란 뜻이다. 그걸 드러내는 문장을 우리말로는 각각 '진술문'과 '수행문'이라고 보통 번역한다. '진술문'은 맞다, 틀리다를 판별할 수 있는 문장을 말하지만, '수행문'의 경우엔 그런 진위의 범주가 적용될 수 없다. '수행문'은 대신에 성공하거나 실패한다(즉 '통하였는냐?'가 수행문의 기준이다). 때문에 수행문은 현실(컨텍스트)과의 관련 속에서만 의미/기능이 이해될 수 있다.

히로키의 전제는 사회의 단편화, 포스트모던화이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사회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특권적인 시점이 부재하다는 것. 이른바 총체적 시점, 혹은 총체성의 상실이다. 그러한 상실(하루키 번역본의 표현의 빌자면, '상실의 시대')이 전면화되는 것이 1990년대이며(그러니까 소련과 동구권의 대몰락 이후이며) 그러한 처지에서는 자신의 메시지(편지)가 제대로 도착하는 건지 마는 건지 불확실하게 된다. '우편적 불안'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아키라의 <구조와 힘>(1983)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전체를 조망하는 퍼스펙티브를 제시하고자 애를 쓰는데, 거꾸로 말하면 1980년대에는 그래도 우편적 불안이란 걸 그다지 의식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1990년대는 상황이 다르다는 게 히로키의 상황판단이고,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은 점점 더 아주 작은 '취미 공동체' 내의 소통으로 축소된다. 오타쿠 문화는 그러한 (변화된) 사회적 상황의 소산이다.

정리해서 얘기하면, 포스트모던화는 두 단계로 나뉘어지는데, 처음엔 "문화전체(사회전체)를 예측할 수 없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전명하고자 하는 욕망만이 좀비처럼 살아남아 있는 단계"로서, 여기서는 아직 '우편적 불안'이 전면화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이때의 전망이란 건 날조이고 사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건 아사다 아키라가 제시한 전망이 이미 극히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소통되었다는 데에서 확인된다(그러니까 <구조와 힘>에 열광하는 소수의 '취미 공동체'가 있었을 따름).

두번째 단계를 히로키는 1989년경부터로 보는데, 이 단계에서는 사회전체를 예측한다는 게 더더욱 어려워졌고 사람들은 더이상 전체를 조망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질 수 없게 되었으며 그저 자잘한 우편적 불안에나 시달리게 된다. 90년대가 바로 그러한 시대이다(한국소설사의 지형에서라면 윤대녕, 신경숙의 소설들이 통하던/먹히던 시대이다. '은어낚시통신' 같은 취미 공동체!). 그걸 부정하고, 날조이더라도 전체이론에 계속 매달리게 되면 오움진리교 같은 현상을 낳게 된다고 히로키는 지적한다.

아키라와 히로키는 각각 이 두 단계에 각각 대응하는 비평가이며, 아키라에서 히로키로의 이행은 들뢰즈에서 데리다로의 이행이다(그럼 오움진리교에 해당하는 건 네그리?). 그러한 상황인식을 전제로 하여 히로키는 자신의 <존재론적, 우편적>이 '우편적 불안'을 '우편적 향락'으로 바꿔보려는 기획의 소산이었다고 고백한다.

이어서 그는 '상징계'의 힘이 약화된 것이 요즘의 현실이 아닌가 지적하면서 메가 히트 애니메이션 <미녀전사 세일러문>을 만든 감독 이쿠하라 구니히코의 말을 인용하는데, 내가 보기엔 혜안이다. 그에 따르면, 요즘 젊은이들은 아주 가까운 것과 아주 먼 것밖에 모른다. 즉, 연애 아니면 세계의 종말에나 관심을 두는 것이다. "바꿔 말해 그들의 감각으로는 연애나 가족문제 같은 지극히 자기주변적인 문제와 세계의 파멸 같은 지극히 추상적인 이야기가 하나로 달라붙어 있는 것이죠."

그러한 지적을 라캉식으로 바꿔서 말하자면, 사람들은 저마다의 상상계와 현실계(=실재)에만 들러붙어 있다.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리얼한 것(=실재) 아니면 이미저리한 것(=상상계) 밖에 없다. 심볼릭한 것(=상징계)가 약화되고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진단을 이어받으면서 히로키는 이렇게 말한다: "사회가 포스트모던해져 버린 결과 요즘 사람들은 세계가 가까운 것과 먼 것으로 분열되어 있는 것으로서 느끼고 있습니다. 가족이나 우주 이외의 '일본'이나 '국가'라는 중간 레벨의 존재에 대한 감각은 쏙 빠져버려 있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라캉도 말했듯이 맨먼저 약해지는 것이 언어의 힘인 셈입니다. 실제로 그러한 현상이 지금 일본에서 표면화되고 있습니다."

그럼 한국은? 얼핏 '대-한-민-국'을 열호하는 한국의 젊은이들은 그러한 양극화로부터 비켜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대한민국'이 이들에게서 '중간항'으로 작동하고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혹 자신에게 '가까운 것'이거나 '먼 것'으로서의 '대한민국'은 아닐는지? 어쨌든 "상징계, 즉 심볼릭한 레벨이 없어지면 사람들의 관심은 상상적인 인간관계나 '세계의 종말'로 집중"된다. 이런 경우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지구의 소멸'이라는 거대서사적 테마는 그저 주인공과 애인 사이의 작은 인간관계를 부각시키는 소재로서나 쓰인다.

한국적인 드라마에서라면 '세계의 종말'에 대응하는 것이 아마도 죽음일 듯싶다. <가을동화>인지 <겨울동화>인지 하는 드라마들에서 연애(상상계)-결혼(상징계)-죽음(실재)이라는 3항에서 '결혼'이 배제된 것이 주된 트렌드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결혼과 가족들간의 오손도손, 티격태격을 다룬 일일드라마들에서도 그러한 인간관계를 벗어난 주제(이런 경우에는 국가)가 다루어지는 예는 거의 없다. 그런 건 시사고발 프로그램의 영역으로 제쳐놓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저마다 오타쿠가 된다(요즘 언론에서는 '진보상업주의'라는 말을 쓰던데, '진보오타쿠' '좌파오타쿠'란 말도 가능할 것이다. 거기서 소수의 취미 공동체에 대응하는 것은 소수의 이념 공동체이다).

데리다에 대한 좀 특이한 책을 쓴 히로키는 이런 시각을 내비친다: "데리다의 저서를 즐거이 읽는 독자는 제가 생각하기에 일본에서 천명, 유럽에서 이천 명, 아메리카에서 이천 명이 다일 것입니다(*그런 셈법이라면 한국에서는 오백 명 미만이다). 그들은 하나의 취미의 공동체에 속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만나면 국적이나 문화적 배경이달라도 단번에 얘기가 통합니다. 데리다를 둘러싼 '수다'가 점점 증식되고 데리다에 대한 메일 리스트가 개설되곤 하지요. 저의 책이 번역되는 것은 이 '수다'에 등록되는 것을 의미합니다."(나 또한 그런 수다에 끼어드는 걸 좋아하지만.)

그런 진단을 좀더 확장하자면, 들뢰즈를 기치로 내세운 수다 공동체, 알쏭달쏭한 타자 담론을 중심으로 모인 수다 공동체 등이 공통의 언어 없이 난립해 있는 것이 현실이다(공부와 삶의 괴리이면서 나는 이게 인문학 위기의 본 얼굴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방법은 두 가지. 공통의 언어를 억지로라도 만들어야 한다는 쪽과 작은 취미 공동체 안에서 끝까지 살아가야 한다는 쪽. 히로키는 그 중간에 서 있고 싶다고 하면서 그 방법에 대한 시도로 자신의 저작을 규정짓는다(고진의 '트랜스크리틱'도 그는 같은 맥락에서 이해한다) . 그리고 그게 데리다 철학의 의의라고 평가한다: "제가 좋아하는 데리다의 말 중에 위대한 사상가란 언제나 조금 큰 우체국이다'라는 것이 있는데, 실제로 이 세계에 있어서 철학의 역할은 편지(정보)를 배달하는 우편적인 기능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히로키가 주목하는 데리다의 텍스트는 <우편엽서>이다.)

대략 이런 내용이 글의 절반이다(시간/분량상 여기서 끊는다. 이후에 내용은 가라타니 고진의 비평에 대한 평으로 이어지는데, 관심이 있으신 분은 직접 참조하시길 바란다). 그리고 이 정도만으로도 많은 걸 평정할 수 있다. 언제부턴가 취미 공동체의 수다거리가 돼 버린 문학에 대해서도(우리 주변의 쿤데라 오타구, 하루키 오타쿠, 도스토예프스키 오타쿠, 지젝 오타쿠 등등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 공동체의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가? 공동체를 넘어선 공화국을 꾸릴 수 있는가? 질문은 아직 열려 있다.

이런 내용의 글을 다시 읽은 건, 그리고 3월의 마지막날에 (뒤늦게라도) 정리해두는 건 어제 모스크바에서 부친 책들이 도착했기 때문이다. 두 달이 넘게 걸린 셈인데, 아무튼 비로소 나의 '도착'은 완료되었다. 모스크바에서 내내 했던 일 중의 하나는 통신문을 쓰는 거였는데, '모스크바여 안녕'이란 마지막 통신문이 비로소 제값의 무게를 갖게 된 것. '모스크바여, 다시 안녕!' 다스비다냐!..

05. 03. 31

P.S. '우편적 불안'에 이어서 지난 2월에 내가 쓰고자 했던 건 윤동주와 정현종, 두 시인에 대한 것이었다(2월 16일이 윤동주의 기일이었지만, 대부분 무관심했다. 그리고 2월말에 정현종 시인은 '문학교수'로서 정년퇴직했다. 시인으로선 정년이 없겠지만) . 물론 타이밍을 놓친 터라 다시 생각을 가다듬기 위해선 다른 기회가 필요하다. 그리고 <삐딱하게 보기>의 3장 읽기(생각보다는 오역이 많다).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그리고 '국가'(고진의 <일본정신의 기원>이 요긴한 읽을 거리였다)가 당분간 읽고 생각해볼 거리이다. 생각이 모이면, 정리해두도록 하겠다.

P.S.2. 어제 잠시 '로쟈'란 이름을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다가 몇몇 블로그에 나의 글이 올려져 있는 걸 보았다. 한 블로그에서는 '로쟈'가 박노자의 다른 필명인 걸로 소개돼 있었는데(모스크바로 되돌아간?), (이미 귀화하여 한국인이긴 하지만) 박노자만큼 내가 (한국어를!) 잘 쓴다는 것이 자랑할 만한 일인지는 좀더 따져보아야겠다(내가 그보다 한국어를 더 오래 배우고 써왔건만).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에 대해서 나는 서평을 쓴바 있으며, 그 중 한 구절이 한동안 신문광고에 인용되기도 했었다. 박노자는 누구처럼 자기 책의 서평을 쓸 만한 위인은 아니므로 '로쟈=박노자'란 오해는 불식되었으면 한다. 다시 밝혀두지만, 로쟈는 (로자 룩셈부르크와도 무관하며)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이름, '로지온'의 애칭이다(왜 그 이름을 쓰게 됐는지는 내년쯤이면 아시게 된다).

P.S.3. 눈에 띈 오타를 손보면서 몇 마디 덧붙인다. 그렇게 적은 분량을 쓴 건 아니지만, 급하게 작성하다 보니까 본문을 충분한 분량으로 쓰지 못했다(모스크바에서였다면 지금의 두 배 정도의 분량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걸 보완할 수는 없고, 오늘(만우절) 아침에 읽은 글 한 대목을 인용해두기로 한다. 이번주 <한겨레21>은 '태극기 세대'를 특집으로 다루고 있는데, 그 특집의 한 꼭지는 '그 불안하고 기이한 개인주의'(전효관)란 제목을 달고 있다. 필자의 지적을 잠시 들어본다.

"나는 촛불시위와 월드컵을 통해 광장을 놀이의 공간으로 전환시켰다든지, 공적 영역에 개인 욕망의 문제를 투사했다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다만, 놀이와 연대의 소재가 왜 민족과 국가고 태극기일 수밖에 없는지를 질문해야 한다고 느낄 뿐이다. 여전히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개인이라는 작은 주체와 국가라는 큰 주체 사이에 부재하는 연대의 형식과 내용일 듯하다. 젊은 세대는 개인주의화를 통해 형성된 감수성의 연장선에서 개인의 권리에 민감하다. 하지만 집단으로서 권리에는 점점 무감(각)해지고 있다. 높은 인권 감수성과 낮은 정치 의식의 충돌은 태극기 세대를 규정짓는 또 하나의 특징이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의 권리 주장이 생존을 위한 방어라는 측면에서 제한되어 사회적 공간과 연대 능력의 발전으로 드러나지 못할 수 있다. 개인과 국가 사이 중간 영역의 공백이 여전히 문제고, 작은 주체들의 연대와 공감을 통해 매개 영역을 설정하지 못하고 있다."

필자가 지적하는바, '개인이라는 작은 주체'와 '국가라는 큰 주체' 사이에 부재하는 연대의 형식과 내용이라는 것이 내가 본문에서 거론하고자 했던 중간항이다. 그 중간항의 프로이트적 상관항이 바로 자아이며, 현대는 그러한 자아의 약화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건 일본의 오타쿠 세대나 한국의 태극기 세대나 마찬가지가 아닐까라는 게 나의 짐작이다. 사드와 함께 칸트는 넘쳐나지만, 그걸 매개해주는 자아는 약화되어 있으며 무시되고 있다. 그럴 경우 제일 먼저 약해지는 것은 (라캉-히로키도 지적하다시피) 언어의 힘이다. 그때 언어라는 건 코드화된 랑가주, 즉 랑그를 말한다. 서로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코드, 문법, 규칙. 그게 상징계이다.

어린애들의 옹알이 같은 말들과 UFO성 언어들이 인터넷상에서 범람하고 있는 것은 상징계의 약화/무시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젊은이들의 '유아화'이다. 히로키가 예로 들고 있는 건 이런 식의 대화이다. "저거 괜찮지?", "이게 좋다", "그건 안돼." 혹은 언어를 생략한 이미지만의 소통, 혹은 음악을 통한 소통. "좋지?" "응, 좋아!" 오직 그들만이 통하는('논리'가 아니라 '느낌'으로 통하는) 언어로 은밀하게 소통한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랑그는 최소화되는 것. 이런 것들이 게임세대, 비주얼 세대, 넷세대들에게서 지배적이 되어 간다는 것이 히로키 등의 지적이며 내가 동의하는 바다. 그렇다고 공통의 언어를 다시금 억지로라도 만들어내야 하는 건지, 아니면 현재의 조건에서 작은 공동체의 한계를 '트랜스'해보려고 애를 써야 하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그저 자기만족적인 공동체에 안주하며 '바깥'으로의 외출을 포기해야 하는 건지. 남은 선택지는 대략 그 세 가지이다. '우편적 향락'이란 아마도 그 두번째 길이 인도하는 선택지에서 누릴 수 있는 향락이지 싶다.

몇 마디 덧붙여 보았는데, 본문의 내용이 좀더 수월하게 전달되었는지?..(알 도리가 없는 건가?)

05. 04. 01.

 

 

 

P.S. 분문에서 언급한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문학동네, 2007)이 번역돼 나왔다. 근간 소식은 작년부터 접하고 있었던 터인데, 생각보다 분량은 얇다. 예전에 이 책과 관련한 기사는 http://blog.aladin.co.kr/mramor/854169 에 모아놓은 바 있다. 그의 <존재론적, 우편적>도 근간 예정이라고 하니까 모아서 읽어봄 직하다. 그 둘 사이에는 어떤 단절이 존재하는 듯하지만...

07. 07.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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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4-01 0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구두 2005-04-01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기대됩니다. 로쟈님...

로쟈 2005-04-01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대'랄 게 없는 건데요.^^ 한 가지, 본문에서 언급한 히로키의 <존재론적, 우편적>은 도서출판b에서 번역서가 나온다는군요...

sqiz 2020-12-03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히로키의 관광객의 철학의 존재론적,우편적을 해설하는 내용에 대해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감사합니다
 

지난 토요일자 한겨레 '책과사람'란에서 가장 크게 다루어진 것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가 100권을 돌파했다는 소식이다. 탁석산의 <한국의 정체성>부터 구춘권의 <메가테러리즘과 미국의 세계질서전쟁>까지이고 만 5년만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1년에 대략 20권씩의 책을 낸 셈인데, 그간에 국내 출판계를 대표하는 문고본으로 성장했고, 뒤이은 문고본들의 모델이 돼 주었으니 치하할 만한 일이다(물론 문학과지성의 스펙트럼문고가 있었지만, 국내 필자들만의 '인문서'로 채워진 것은 책세상문고만의 덕목이다). 100권 통틀어 65만부가 나갔다고 하니까 권당 평균으로 치자면 6,500부가 나간 셈이고 이건 다른 출판사들이 부러워할 만한 성적이다. 대개 2쇄까지는 찍었다는 얘기니까(본전은 뽑았다는 얘기이기도 하고). 나는 이 시리즈의 책을 10권쯤 읽은 거 같은데,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 <정치와 진리> 등이 기억에 남는 책들이다.

 

 

 

 

 

2003년도부터 나오기 시작한 책세상문고 '세계문학'은 '우리시대'의 기획이 성공한 덕분에 꾸려지게 된 것인데, 이 시리즈의 최신간은 러시아 작가 불가코프의 희곡 <조야의 아파트/질주>이다.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작가로 잘 알려진 불가코프는 비록 작가로서 불운한 생애를 보내긴 했지만, 러시아 20세기의 최대 작가 중 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최대 극작가이다. 20세기 작가들 중에서 그는 아마도 가장 자주 공연되는 작가일 것이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은 <백위군>(<투르빈가의 나날들>이 각색본인데, <백위군>이란 이름으로 무대에 더 자주 오른다)과 이번에 번역된 두 작품 등이며, <질주>는 영화로도 제작됐다(국내에도 출시돼 있다). 

 

 

 

 

불가코프의 다른 드라마로는 몰리에르의 생애를 다룬 <위선자들의 밀교>(연극과인간, 2001)가 같은 역자에 이해 번역/소개된바 있으며, 장편 <백위군>(열린책들, 1996), 중편집 <개의 심장>(열린책들, 1998), <비운의 달걀>(1999, 대구효성카톨린대출판부) 등이 번역돼 있다. 그의 중편들은 대부분 풍자소설에 속하며, <백위군>은 내전기를 다룬 작품. 그리고 그의 걸작 <거장과 마르가리타>은 한길사에서 출간된바 있지만, 절판되었고 현재 다른 역자에 의해서 번역이 준비되고 있는 걸로 안다(이 작품은 러시아에서 현재 드라마 시리즈로 제작되고 있다). 대략 이 정도 규모이면 20세기 러시아에서 수위를 다툴 만한 작가의 전모를 어느 정도 가늠해볼 수 있을 듯싶다.

불가코프의 <조야의 아파트>를 제일 먼저 꼽은 것은 책세상문고를 기념하고 작가의 지명도를 고려해서이지만, 한편으론 안면이 있는 역자에게서 책을 선사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 나름대로 홍보도 해줄 필요가 있는 것. 하지만, 이런 경우는 지극히 드물어서 나는 대부분의 책들을 내 돈 주고 사서 읽어야 한다.  그건 '악마적인' 차이이다. 증정받은 책들에 대해선 오타나 오역 등에 구애받지 않지만, 내 돈 주고 산 책들에 대해서 나는 엄격하다. 그 책들에는 나의 땀과 수난과 눈물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대강 얼버무리면서 넘어갈 일은 아닌 것이다.

 

 

 

 

두번째로 꼽을 책은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숲)이고, 천병희 교수의 번역이다. 1만 1995행이라는 데 우리말 최초의 완역본이다. <변신이야기>는 이전에 솔출판사(김명복 역, 1993)와 민음사(이윤기 역, 1994/1998) 본이 나와 있지만, 모두 중역본이며 고대 라틴어에서 옮긴 것으로는 이 책이 처음이다. <원전으로 읽는 변신이야기>라고 장황한 제목이 붙은 것은 그러한 사정을 드러내주기 위함일 것이다. 물론 중역이더라도 내용이 정확하고 문체가 유려하다면 굳이 원전 번역이 강조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형편이 그렇지가 않아서 가장 많이 읽히고 있는, 민음 세계문학전집의 간판으로 나온 이윤기본만 하더라도 상당히 많은 오류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지적된다(강대진의 지적인데, 어느 잡지에 실린 비평문이 그의 서평집 <잔혹한 책읽기>에는 들어가 있지 않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원전 번역이 강조되는 건 그 때문이다.

천 교수는 그리스와 라틴 고전문학 번역에 있어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데, 조만간 키케로의 책이 후속작으로 출간될 거라고 한다. 한편 천교수가 번역한 그리스 고전들은 단국대출판부에서 나오고 있는데, 그 책들의 북디자인은 좀 수준 이하다(덕분에 나는 한권의 책도 안 사고 있다). 공들여 번역한 작품들이 허름한 모양새로 나오는 건 좀 무성의하게 보인다. 겉멋만 든 책들보다야 양반이긴 하지만, 좀 때깔이 있는 책들로 다시 나왔으면 싶다.

 

 

 

 

때깔로만 치자면 동문선의 책들도 빠지진 않을 것이다. 내가 비교적 혐오하는 출판사이지만, 전공과 관심 때문에 자주 신간들을 둘러보게 되는 것도 이 출판사의 책들이다. 동문선의 최신간은 주디스 버틀러의 <안티고네의 주장>이다. 버틀러는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Body Matters)>(인간사랑, 2003)가 소개된바 있는데, 페미니즘 이론과 퀴어이론의 새로운 강자로서 주목받고 있는 여성 이론가이다. 그녀의 대표작은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이란 부제를 단 <젠더 트러불>이고, <권력의 심리적 삶>, <흥분하기 쉬운 발화> 등의 저서들을 연이어 냈다. 나는 버틀러의 책(복사본)을 여러 권 갖고 있는데, 그건 영문학과 페미니즘쪽에서 주목받는 이론가로 부상함에 따라 그녀의 책 대부분이 저렴한 마스터본으로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안티고네의 주장>(2000)은 그 시절에 따로 복사해두었던 책인데, 원서는 103쪽 분량의 얇은 책이다(번역서는 138쪽).

 

 

 

 

아무리 중요한 이론가라 하더라도 (대개의 동문선의 책들이 그런 것처럼) 번역을 신뢰할 수 없으면 나오나 마다한 책들인데(귀국 이후에 내가 읽은 최악은 마슈레의 <문학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동문선)였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번역을 하고 출간을 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책. <문학생산이론을 위하여>(백의)와 쌍벽을 이룬다) 다행히도 신간의 경우에는 버틀러 전공자가 번역을 맡았고 (드문 일이지만) 38쪽의 역자 해설까지 덧붙였다. 그러니 다소간 비싼 책이더라도 엉터리는 아닐 것이다.

 

 

 

 

버틀러와 관련해서 읽어볼 만한 논문은 <성관계는 없다>(도서출판b)에 실린 콥젝의 "성과 이성의 안락사"이다. 콥젝은 <젠더 트러블>에서 개진된, 생물학적 성에 대한 버틀러식의 해체에 동의하면서도 성의 문제가 순전히 가변적/수행적인 것이라는 버틀러의 주장에 대해서는 칸트와 라캉을 경유하여 반박한다. 그리고 이러한 기조는 지젝에게서도 이어지는데, 곧 출간예정인 <까다로운 주체>(도서출판b)의 한 장을 지젝은 버틀러에 대한 비판에 할애하고 있기도 하다. 콥젝의 논문은 <나의 욕망을 읽어봐>에 실려 있는데, 그녀의 또 다른 책 <여자가 없다고 상상해봐>는 근간 예정이다.

 

 

 

 

세번째 책은 페루 작가 바르가스 요사의 <리고베르토씨의 비밀노트>(새물결, 2004)이다. 이 책은 작년 12월에 나온 걸로 돼 있는데, 내가 서점에서 책을 본 게 최근이다. 요사의 책으론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문학동네, 2002)와 <세상종말전쟁>(새물결, 2003) 등이 최근에 나온 작품들이다. 나는 전자를 좀 읽어보았을 뿐이지만, 요사는 남미 3대 작가라는 명성에 걸맞는 '이야기꾼'이다. '요사의 모든 책'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그러니 나오는 족족 읽어볼 일. 약간 유감스러운 건 책이 두 권을 분권돼 나왔다는 점. 출판사로선 그게 여러 모로 편하고 이익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두꺼운 책을 선호하는 나로선 불만스럽다. 분량으로 봐선 한권으로 묶여도 됐을 만한 책이다.  

                             

 

 

 

 

네번째 책은 <E=mc2>(생각의나무)이란 베스트셀러를 썼던 데이비드 보더니스의 신간 <일렉트릭 유니버스>(생각의나무)이다. 제목 그대로 전기에 관한 것인데, "전화, 라디오, 레이더, 컴퓨터, 심지어 비아그라까지, 전기력의 힘을 빌어 탄생한 물건과 그들의 역사를 담았다"고. 이런 교양과학서를 읽은 지가 이젠 꽤 되는 것 같다. 휴식 같은 시간들이 내겐 없었던 셈. 에드 레지스의 <누가 아인슈타인의 연구실을 차지했을까>(지호)도 읽어볼 만한 책인데, 나는 이전에 <아인슈타인 방의 사람들>(웅진닷컴, 1993)이란 제목의 번역본으로 읽었다. 프린스턴고등학술연구원 사람들의 '프렌즈' 같은 이야기들. 옛날엔 이런 책들을 읽을 시간이 있었는데...

 

 

 

 

끝으로 벤야민 관련 신간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효형출판). 수잔 벅 모스의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문학동네, 2004)와 유사하게 파사주 프로젝트에 대한 해설서인 듯. 382쪽으로 돼 있지만, 번역서의 여백이 상당히 헐렁해서 원서는 300쪽이 안될 것 같다. 이런 식의 두툼한 책은 낭비적이며 책값도 비싸게 매겨진다는 점에서 전혀 반갑지 않다. 얄팍하게 책장사를 하려는 궁리들은 자제해주었으면 좋겠다. 벤야민의 또다른 책으로 <모스크바 일기>(그린비)가 이번주에 출간된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참견하기도 한 책이어서 기대가 된다...

05. 03. 28.

P.S. 다음에는 그간에 나온 영화관련 책들에서 읽고 싶은 것들을 꼽아보도록 하겠다... 

 

 

 

 

P.S.2. 한권만 더. 레비스트로스의 예술론이라고 할 <보다 듣다 읽다>(이매진)이 출간됐다. 원저는 1993년에 나왔고 "인류학자의 시각에서 푸생, 뒤샹, 모네, 들라크루아, 보티첼리를 보고, 라모, 바그너, 베토벤, 로시니를 듣고, 디드로, 랭보, 보들레르를 새롭게 읽어낸다."고 소개되고 있다(레비스트로스는 서양 고전음악의 애호가로서 그에 대한 자부심도 피력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이미 지난 1994년에 <레비스트로스의 미학에세이>(동아출판사)로 나왔던 책이다. 역자는 물론 다르다. 나는 이전에 나온 걸 갖고는 있지만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없는 걸로 봐서 그다지 좋은 번역도 아니었던 듯싶다. '헌 책'이지만 '새 푸대'에 담으면 좀 나아지는 게 있을지도...

05. 0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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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5-03-28 16:42   좋아요 0 | URL
앗, 오늘 한겨레에서 다뤄주었군요. 책세상 문고... 기특한 시리즈지요?

로쟈 2005-03-29 13:14   좋아요 0 | URL
'오늘'이 아니라 '지난 토요일'입니다.^^ 바람구두님도 애독하시는 것 같더군요...
 

최근에 나온 책들 얘기를 꺼내놓기 전에 최근에 개봉한 영화 두 편에 대한 얘기부터 늘어놓기로 한다. 그 두 편이란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과 이상일의 <69 식스티나인>이다. 전자는 68년에 관한 영화이고, 후자는 69년에 관한 영화이다. 이미 한국 생활에 적응하고 있는 나로선 영화관에 들락거릴 여유가 전혀 없다는 게 아주 당연하기에, 개봉 영화들을 본 건 물론 아니다. 하지만, <몽상가들>은 러시아에서 산 비디오시디를 노트북에 복사해놓고 있기 때문에 가끔 볼 때가 있다(러시아어 시나리오도 갖고 있다). 그리고 <69>에 대해서는 몇 개의 영화평을 통해서 대략 어림짐작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를 다룬 영화이어서인지 근래의 영화평들 가운데는 두 영화를 동시에 언급하고 있는 것도 드물지 않다. 오늘 아침에 전철에서 읽은 영화평론가 김영진의 "<몽상가들>, 혁명은 노는 것"(<필름2.0>)이란 평도 그런 경우인데, 베르톨루치의 영화를 비교적 호의적으로 평하면서 이렇게 언급한다: "물론 <몽상가들>의 결말은 시시하다. 어쩌면 베르톨루치는 그 당시 거리에서 벌어졌던 혁명에 대해서는 말할 게 없었는지도 모른다. 혁명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럴 바에야 지지 않는 법은 웃어주는 것이다. 이는 무라카미 류의 소설 <69>에 나오는 전언이기도 하지만 베르톨루치는 그걸 다른 방식으로 얘기할 뿐이다." 소설 <69>는 물론 영화 <69>의 원작이다. 요컨대, 베르톨루치와 무라카미 류/이상일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같은 내용은 얘기하고 있다는 것. 그 같은 내용이란 글의 제목을 빌자면, '혁명은 노는 것'이라는 전언이다.

<몽상가들>에서 김영진이 가장 충격적이었다고 말하는 장면은 이런 것이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테오와 이자벨 부모가 휴가를 마치고 잠시 집에 들렀을 때 그들은 자식들과 그들의 친구가 저질러놓은 완벽한 집안의 무정부주의적 혼란에 질겁하면서도 그걸 존중해준다. 그들은 내색하지 않고 용돈을 던져놓고는 다시 휴가를 떠난다. 이 장면은 충격이다. 다음 세대의 도덕을 현재형으로 강요하지 않는 자그마한 혁명의 도래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보수적이었던 프랑스 사회가 오늘날의 수준만큼이나 진보할 수 있었던 것은 여하튼 실패한 부르주아 혁명이었던 68년 5월 혁명 덕분이다."

갓 스물에 이른 세 청춘남녀가 서로 벗고 뒹굴고 하는 '관능의 막다른 골목에서 혁명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걸 읽어내는 건 평론가의 권리이고 관객의 권리이다. 하지만, 자유로운/방종한 아이들의 '무정부주의적' 혼란을 부모들이 존중해주는 장면에 대해 '충격적'이라고 하는 것은 좀 오버이다. 부모가 그렇게 방임하는 것은 그들이 성인이어서라기보다는 아직 (순진무구한) 어린애들이기 때문은 아닌가? "그들은 내색하지 않고 용돈을 던져놓고는 다시 휴가를 떠난다"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혁명을 자기들끼리의 '노는 것'으로 전유할 수 있는 물적 토대는 부르주아인 부모의 돈이다. 그 돈으로 히히덕거리면서 "자신들의 출신 성분의 토대를 공격"한다는 게 얼마만큼의 진정성을 가질까? 강남의 여피족들이 자녀가 대마초를 피우고 혼음하는 걸 방임하는 일이 과연 얼마나 '혁명적'일까? "뼛속 깊이까지 가부장적 도덕으로 무장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은 그러한 방임에 의해서 과연 머지 않은 미래에 프랑스 수준만큼 진보할 수 있을까? 뼛속 깊이 가부장적이기는커녕 피부와 머리카락까지 노린내를 풍기면서 길거리에서 자기들끼리의 영어로 떠들어대며 흥청대는 일부 유학생들의 비가부장적인 행태에서 과연 어떤 '진보'를 식별해낼 수 있을까?

해서 영화 <몽상가들>에 베르톨루치 자신과 자신의 세대에 대한 얼마만큼의 애정이 담겨있는지 나로선 가늠할 수 없지만(내가 이 영화에서 읽는 건 주로 영화광 어린애들의 치기에 대한 비아냥이기에), 이 영화가 '청춘판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라는 문구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그의 걸작으로 꼽히는 <순응자>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본 베르톨루치의 걸작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이며, 거기에는 '몽상'이 아닌 '현실'이 그려져 있다(그러니 '마지막 탱고'는 '마지막 몽상'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러한 현실과의 조우(혹은 상징적 거세)를 장면화하고 있지 않은 영화 <몽상가들>은 역설적이지만, '미성년판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 불과하다.

"남녀성기의 노출과 혼음을 전면 허용한 것은 처음"(영상물등급위원회 영화등급분류소위원회)이라는 데, 사실이라면 이 영화는 내가 본 러시아판과 마찬가지로 세 남녀가 말 그대로 발가벗고 나온다(이 영화는 영화사적 의미가 아닌 '개봉사적 의미'로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장면 정도로 '성인'영화의 등급을 받을 수 없다는 것 또한 당연하다. 발가벗고 나오면서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것은 이 영화가 철없는 미성년들의 영화이며, 미성년들을 위한, 애들을 위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마음껏 상상하라, 그리고 마음껏 벗어제껴라, 돈은 줄 테니까."라는 식이니까. '혁명은 노는 것'을 조금 비틀어서 말하자면, '혁명은 돈이 좀 필요한 것'이 될 것이다.



지난주 <필름2.0>은 <몽상가들>에 대해서 김영진과는 전혀 반대되는 평을 실었는데, "발가벗은 육체가 놓친 것"이란 제하의 평에서 평론가 정지연은 이렇게 쓴다: "베르톨루치가 <몽상가들>에서 부활시킨 68년 5월은 혁명조차도 유희로 쾌락했던 시네필들의 몽환적 시기에 다름아니다. 혁명이 계급이 아니라 세대에 의해 수행된다는 벤야민의 직감이 맞는 것이라면, 이들이 혁명을 수행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테오와 이자벨은 랑글루아 시위에 동참하고, 급진적 사회변화를 거부하는 아버지에 맞서지만, 그 모든 것들은 하나의 제스처에 불과하다. 이들의 방에 붙어 있는 <중국여인>의 포스터, 마오 형상의 스탠드, 들라크루아의 그림은 단지 실내장식물일 뿐이다. 이들은 거리의 진실에 관심이 없다. 그들을 지금 사로잡은 것은 부르주아의 요새와도 같은 아버지의 저택에서 고급 와인과 서로의 육체를 탐하는 에로스의 쾌락일 뿐이다."

다른 대목들에서 비친 '엄숙주의자'적 시선에 내가 동감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용한 대목에 대해서는 십분 동의한다. 다만, 나로선 <몽상가들>을 비판하는 정지연의 시각이 '몽상가들'을 비아냥거리는 베르톨루치의 시각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입각점은 다르더라도). 듣기에 한때 공산주의자였던 베르톨루치는 1970년작 <순응자>를 통해 변절하며 자신의 '아버지-형상'인 고다르를 매우 증오했다고 한다. 내가 <몽상가들>을 처음 보면서 느낀 것은 (프랑스 시네마테크의 설립자인) 랑글루아의 아들들, 고다르와 트뤼포에 대한 베르톨루치의 비아냥이다. 그는 그들을 비판하는 대신에 다만 그들이 순진했다고 말한다. 이미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도 그는 68혁명의 '한계'와 '좌절'을 거리를 두고 우회적으로 그려낸바 있다. 그 영화에서 말론 브란도를 베르톨루치와 동일시할 수 없듯이 <몽상가들>에서 (미국에서 건너온) 매튜를 (이탈리아에서 건너갔던) 베르톨루치와 동일시할 수 없다.

나는 그런 방향에서 이 영화에 대한 평이 나오지 않을까 짐작하고 있었는데, <필름2.0>의 두 평론가는 좀 다른 방향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하다(러시아어 대사들을 듣는 통에 내가 잘못 이해한 대목들이 있었는지도). 나중에 다른 지면의 영화평들을 들춰봐야겠다(주로 <씨네21>을 보던 내가 <필름2.0>를 들추게 된 건 '돈' 때문이다. 1/3 값이니까. 돈 때문에 고민하는 건 성인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은 된다. <필름2.0>에서 제일 재미있는 코너는 <토크2.1>이다).

영화 <69> 또한 사정은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 영화에는 "데모나 바리케이드 같은 것, 멋지다고 생각해"라는 여학생이 나오고, 이 여학생 때문에 학교를 봉쇄하기로 마음먹는 남학생이 등장한다고 하니까. 원작소설보다는 경쾌하다고 하는데, 그래도 기본 설정 자체는 유지되고 있을 터이다. 지난주 문화일보에 실린 영화평(이안젤라의 시네마토크)에 의하면,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시골학생들은 "한편으로는 학교 바리케이드 봉쇄를 실행하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록 페스티벌을 기획한다. 한편으로는 미군기지 담을 넘는 반미적 일탈사고를 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흑인병사의 성교장면을 훔쳐보면서 영어와 미국문화에 빠져든다. 왜냐고? 이들이 세상에 이기는 방법으로 택한 전략이란 바로 즐겁게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즐겁게 사는 투쟁 전략 또는 청춘의 핑계'로 지양하고자 하는 것은 "전후 기성세대의 보수적 권위주의와 전공투로 상징되는 좌파학생운동의 급진주의"이다. 그들은 이 양 진영을 조롱한다. 모든 건 "눈 앞에 있는 여학생"을 위한 것, "바리케이드도 페스티발도 그 여학생에게 주목받기 위한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그러한 유희는 청춘의 특권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청춘들이 모두 기성세대가 돼 버린 지금도 그럴까?



지난주 <필름2.0>의 <69>를 다룬 영화평에서 평론가 이상용은 (프랑스 68혁명을 모방한) 이 해프닝성 짝뚱에도 진실'은 있다고 쓴다(<몽상가들>에 의하면, 68혁명 또한 폼이자 제스처에 지나지 않지만). "68혁명에 대한 답변이라고 읽히는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의 저서인 <안티 오이디푸스>를 빌자면, 혁명이란 사회나 인간에 대한 의무가 아니라 욕망이어야 한다. 켄 일행은 그 누구보다 자신들의 욕망에 충실하다. 그것이 비록 고다르의 영화를 핑계대어 여학생을 꼬시고, 레드 제플린의 음악을 빌어 자유를 흉내내는 것에 지나지 않더라도 그들은 자신들의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충실히 배설한다. 켄은 입버릇처럼 즐거우면 모든 것이 괜찮다고 말한다. 정답은 여기에 있다.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담은 청춘의 기관차는 무언가를 재보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를 가득 안고 부딪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지구 반대편에서 체험한 68혁명의 진정한 기운이었다."

재일교포 감독 이양일도 이 영화에서 "지금은 없어진 그 시대 젊은이들의 에너지를 회생시키고 싶었다"라고 말했는데, 그렇다면 '68혁명의 진정한 기운'은 다 어디로 증발한 것일까? 68세대나 69세대가 사회를 이끌어가는 주류, 혹은 기성세대가 된 지금 왜 세상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걸까? 혹은 왜 이것밖에는 달라지지 않은 걸까? 그건 '즐거움' 자체가 우리 삶의 물적 토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즐거움은 특정한 사회적 토대와 관계가 허용하는 상부구조이자 잉여이고 기분이다. <69>를 쓰는 작가는 그걸 써서 밥벌이를 하는 전업작가이다. 거기에서 즐거움만 읽어내는 건 순진한 태도이다. 다들 아는 것이지만, 69라는 건 특정한 성적 체위이기도 하고 그런 의미에서 '욕망을 대변하는 기호'이기도 하다. 하지만, 69라는 체위만으로는 어떠한 재생산(reproduction)도 가능하지 않다. 바꿔 말하면, 그 욕망은 아무런 물적 토대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러니, 그러한 기호가 68혁명의 진정한 기운이었다면(<몽상가들>에서도 그렇지만), 혁명이란 그저 폼(form)이며 폼(foam)이다.



 

 

 

마음껏 전시되는 육체들에도 불구하고 <몽상가들>은 내게 틴토 브라스의 영화들보다도 재미가 없었는데(물론 브라스는 주로 엉덩이를 전시한다), <69>는 그보다는 재미있을 걸로 보인다. 하지만, 재미 혹은 재미의 윤리(fun ethic)는 말 그대로 (자기충족적인) 재미를 위한 것이다. 마스터베이션에 불과한 것. 거기에 진정한 혁명이니 기운이니 하는 문구를 갖다 붙이는 건 보기에 불편하다. 혁명이 아무리 대단한 게 아닐지언정 거기엔 피흘림이 있고 피냄새가 섞여 있다(그런 점에서 아직 보지 않았지만, 내가 지지하는 영화는 최양일의 <피와 뼈>이다. '피와 뼈'에 비한다면 '69'는 애들 장난이다). 그게 마스터베이션과의 차이이다...

P.S. 최근에 나온 책 얘기를 하려고 했지만, 영화 얘기가 너무 길어졌다(굳이 책 얘기를 덧붙이자면, 베르톨루치에 관한 것으로 <베르톨루치, 중요한 장면들>(예건사, 1991)을 들어볼 수 있다. 절판된 책이어서 구하기가 쉽진 않지만). 글을 나누는 수밖에. 제목도 바꿔서 걸고. 아즈마 히로키 얘기도 덧붙이려고 했는데, 복사한 글을 들고 오지 않았다. 다음에 보완하기로 한다...

05. 03. 28

 지난주 <한겨레21>에 두 영화에 대한 소개 기사("청춘의 꽃, 68을 기억하는가")가 실린 걸 뒤늦게 읽었다. 내가 읽은 평들 가운데에서는 가장 균형이 잡혀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이 기사를 먼저 읽었더라면 나는 굳이 두 영화에 대해 군말을 덧붙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 대목만 인용해 둔다:

"두 감독이 돌아보는 60년대는 같으면서 다르다. 두 영화는 60년대를 혁명의 시대이기에 앞서 축제의 계절이었다고 회고한다. <몽상가들>은 섹스를, <69>는 청춘을 내세운다. 인류의 마지막 청춘세대였던 68세대 출신인 베르톨루치 감독은 60년대를 돌아보며 분열한다. 베르톨루치는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영화는 60년대를 조롱한다. 베르톨루치는 “미래에 대해 깊은 우울감을 가지고 있을 요즘 젊은이들에게 나는 긍정적으로 희망으로 가득 찼던 그때를 선물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몽상가들>은 매튜의 시선을 빌려 쌍둥이 남매의 일탈적 행동이 미숙아들의 자폐적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감독은 자신의 세대를 긍정하고 싶어하지만, 감독을 포위한 현실은 감독의 무의식에서 희망을 거세한 듯 보인다. 그의 시선은 자꾸 이상과 현실의 균형을 찾는 매슈에게 쏠린다."

<몽상가들>에 대한 유효하면서도 적절한 읽기이다(내가 말하고 싶었던바 또한 <몽상가들>이 60년대에 대한 베르톨루치의 '조롱'혹은 비아냥이라는 것이다)...

 05.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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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부터 아침을 거르고 강의를 마치고 나면, 모처럼(?) 한가하다. 오전부터 당장에 (업무 같은) 공부를 하기엔 뭔가 밑진다는 기분이 들어서 '이럴 땐 이런 거'라는 식으로 책 얘기를 몇 자 적는다. 내가 휴식 혹은 여가를 사용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최근에 나온 책들'이라고 연재의 제목을 달기는 했지만, 내용은 '최근에 눈에 띈 책들'이라고 해야겠다. 이젠 제법 '당신이 없는 사이에' 나온 책들에 대해서 개관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쑥불쑥 눈에 띄는 책들이 없지 않다. 미국철학자 A. 매킨타이어의 <윤리의 역사, 도덕의 이론>(2004) 같은 게 그렇다. 작년 여름에 나온 걸로 돼 있는데, 원제는 'A Short History of Ethics'이고, 1966년 1판에 이어서 1998년에 2판이 나왔다. 기억에 매킨타이어는 찰스 테일러, 마이클 왈쩌와 함께 존 롤즈의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공동체주의 3총사의 한 사람이다.

테일러와 왈쩌는 모두 국내 학술강연에 초빙된바 있지만(각각 <세속화와 현대문명>, <자유주의를 넘어서>라는 강연집을 남겼고, 왈쩌의 경우 작년에 <관용에 대하여>도 번역 출간됐다), 매킨타이어는 상대적으로 관심밖에 놓여 있었던 듯하다. 물론 그의 주저인 <덕 이후After Virtue>가 <미덕의 상실>(문예출판사, 1997)이란 제목으로 진작에 소개된바 있지만, (역시나 번역에 대해서는 불만들이 많고) 그다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 같지는 않다. 개인적으로도 <마르쿠제>(지성의 샘, 1994)라는 짤막한 책을 통해서 매킨타이어와 처음 접해보았지만, 그다지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윤리학에 대한 그의 구도와 아이디어에는 흥미를 놓지 않고 있었는데(나는 그의 주저들을 제본해서 갖고 있다. 란 논문집을 포함해서) 이번에/작년에 나온 그의 또다른 '주저'는 그러한 흥미를 충족시켜줄 만하다.

전체 18장으로 이루어진 책에서 7장까지가 그리스의 윤리학에 할애된 걸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매킨타이어의 주된 관심(이면서 전공분야)은 그리스 고전학 쪽이다(학부시절 그의 전공이기도 하다). 즉 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윤리학에 대해서 우리가 참조해볼 수 있는 가장 신뢰할 만한 저자이다. 게다가 역자도 서문에서 밝히고 있지만, 이 책은 서양윤리학사에 대한 가장 훌륭한 입문서의 하나이다(그러니 좀 읽어줄 필요가 있다). 한가지 흠이라면, 국역본이 98년의 2판이 아닌 66년의 1판을 번역한 책이라는 점. 물론 2판의 서문이 번역돼 있긴 하지만, 본문에서는 1판의 쪽수들이 기재돼 있는바, 2판의 수정/증보된 내용이 (혹 있다면) 반영된 것 같지 않다.

원저의 제목에 Short란 말이 들어가 있지만, 본래 책은 280쪽 정도의 컴팩트한 분량이다. 하지만, (부록이 좀 들어갔다고는 해도) 국역본의 분량은 480쪽이다. 이런 사정은 비단 이 번역서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번역서들의 경우 원서보다 보통 150% 정도로 분량이 불어나는 게 예사인데, 나는 이것이 좀 낭비적이라고 생각한다. 활자를 키우거나 행간 등에 여유를 주는 것이 독자에 대한 배려인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책은 더 두툼해지고 책값은 더 비싸게 매겨진다. 나는 두툼한 책을 선호하긴 하지만, 큼직한 글씨들은 왠지 부담스럽다.

 

 

 

 

두번째로 눈에 띈 책은 <속도와 정치>로 우리에겐 잘 알려진 폴 비릴리오의 <소멸의 미학>(연대출판부, 2004)이다. 이 책 역시 작년 여름에 나온 걸로 돼 있다. 원저는 'The aesthetics of disappearance'(1991)이고, 내 기억엔 언젠가 복사해 두었던 책이다. 그의 책으론 (1994)과 <정보과학의 폭탄>(울력, 2002)의 러시아어본도 나는 갖고 있다. '지각의 병참학' 같은 용어를 화두로 들고 나오는 이 수수께끼 같은 '철학자'를 나는 아직 읽지 않았지만, 그와 자주 비교되는 보드리야르와 마찬가지로 뭔가 계발적인 면모를 그에게서 본다(보드리야르의 번역자가 비릴리오 또한 처음 소개한 건 우연이 아니다. 동시에 유감스럽기도 하지만. <유혹에 대하여> 같은 번역서를 고려해 본다면 말이다).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 혹은 다른 용어/개념으로 사고한다는 것, 우리가 일단 배워야 하는 것은 그런 것이다. 비릴리오의 책으론 <전쟁과 영화>(한나래)도 작년에 출간됐지만, 그다지 미덥지 않은 번역이란 평이다.

 

 

 

 


세번째 책은 미국작가 도널드 바셀미의 <백설공주>(책세상, 2004). 이 책은 작년 12월에 나왔고, 내가 귀국해서 지젝의 <진짜 눈물의 공포>(울력, 2004), 그리고 마야코프스키의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려라>(책세상, 2005)와 함께 가장 먼저 산 책이기도 하다. 바셀미란 이름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하던 시절에 자주 들어보던 이름이지만, 그의 저작이 본격적으로 소개된 건 이번이 처음인 걸로 안다. 알라딘의 소개를 빌자면, <백설공주>는 "'미국의 보르헤스'로 평가받는 포스트모던 소설의 선구자 바셀미의 장편소설"로서 "제목 그대로 익숙한 그림 형제의 동화 '백설 공주'를 패러디한 내용"이다.

작가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패러디 동화들처럼, 고전 동화 속의 남성중심주의를 찾아내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고쳐 쓰는 작업을 시도하며, 동시에 소설의 배경을 20세기 미국 사회로 설정함으로써 소비 자본주의와 대중문화의 홍수에 떠밀려 가는 현대인들의 일상을 유머러스하게 풍자하고 있다." 그러니 읽어볼 만하지 않을까? 물론 이런 제안을 건네는 나는 아직 이 책을 읽을 시간을 못내고 있지만. 유독 바셀미에 눈길이 간 것은 모스크바에서도 이 책의 러시아어본을 구경했기 때문이다. 사두진 않았지만(영어권 작가들의 경우는 샐린저나 포크너 등의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러시아어 작품집을 사지 않았다).


 

 

 

네번째 책 역시 모스크바의 기억과 연관된다. '현대예술의 거장' 시리즈로 나온, 패션누드의 사진작가 핼무트 뉴튼의 자서전 <핼무트 뉴튼Helmut Newton>(을유문화사, 2004)이 그것이다. 작년 11월에 나온 걸로 돼 있는데, 역시나 러시아어본도 작년 가을에 나왔으며 나는 서점에서 구경한 한국어본보다 훨씬 근사한 러시아어본을 갖고 있다(가격은 60% 정도). 나는 사진작가들의 책을 별로 갖고 있지 않지만(가령 <듀안 마이클>(열화당, 1986) 같은 게 예외적이다), 또 사진찍기에도 별 취미가 없지만(나는 모스크바에서 단 한장의 사진도 찍지 않았다, 결과적이긴 하지만), 가끔은 이런 책을 쓰다듬는다. 하긴 누드사진도 꽤 여러장 들어 있긴 하다. 그러니 부실한 번역서들을 읽느라고 눈이 침침할 때쯤이면 한번씩 들여다봄 직하지 않은가?

 

 

 

 

다섯번째 책은 진짜 신간이다. 지난주에 나온 책으로, 헝가리의 2002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 4부작 완결편 <청산>(다른 우리)가 그것이다. 케르테스의 작품인 만큼 또 '아유슈비츠' 얘기이다. 나는 그의 책을 아직 읽은 바 없지만, 이 책을 꼽은 것은 '역시나' 모스크바에서의 기억 때문이다. 류뱐카 역 근처의 <오기>라는 서점에 갔다가 눈에 띄어 산 책 중의 하나가 케르테스의 에세이집이었던 것(거기에는 그의 수상 기념연설문도 실려 있다). 샛노란책의 문고본이었는데, 주로 헝가리 비평가, 철학자들의 책 몇 권 중 하나였다... 그런 책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고 있다. 조만간 올 거라는 얘기는 듣고 있지만, 모스크바에서 서울로의 여정은 그리 만만치 않은 모양이다...

P.S. '회사원/철학자' 강유원의 <책과 세계>(살림, 2004)를 읽었다.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알 만큼 필명을 날리고 있는 저자에게는 고유한 문체가 있고, 그걸 곱씹게 만드는 질긴 사유가 있다(<책과 세계>는 최근에 읽은 책들 가운데 가장 '시'에 근접한다. 오늘날 시는 시집이 아니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듯하다). 그런 문체와 사유를 길잡이 삼아, 그는 <길가메시 서사시>로부터 <종의 기원>에 이르는, '쓸쓸한 세계'에서 '쓰라린 세계'에 이르는 여정을 독자에게 안내한다. 그가 이전에 쓴 <서양문명의 기반>(미토, 2003)의 축약판이라고 하는데(그 책을 나는 샀는지 안 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만하면 어지간한 '문명론'이다(그런 길의 끝에 자크 아탈리 같은 이가 있는 건지, 아놀드 토인비 같은 이가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로크의 '자연권'이나 마르크스의 '종교비판'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는 게 이 책을 읽은 성과이지만, 내가 음미하는 건 주로 그의 근육질 문체인바, 그의 문체는 마치 날씬하면서도 잘 단련된 근육을 보는 것 같은 쾌감을 전해준다. 마치 김훈의 글을 읽을 때처럼. 한데, 다른 자리에서 강유원은 '자칭 보수' 김훈을 매우 신랄하게 조롱하고 비판한바 있다. 하지만,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의 절대 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다. 그들은 평생 동안 살아 있는 자연만을 마주하고 살아간다."(3쪽)라는 글의 시작이나 "먼 옛날의 서사시들은 세계에 대한 과학적 인식 없이도 세계가 쓸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수많은 세월이 지난 다음에도 또다시 같은 것을 알아차리는 건 너무 허망하다. 쓰라린 것이다."(91쪽)라는 마무리에서 나는 적어도 그 정조에 있어서 김훈과의 차별성을 찾지 못하겠다. 저자가 이 책에서 호의를 보이고 있는 것도 로마제국과 대영제국의 지극한 '실용주의' 혹은 '현실주의' 아닌가?

그래서 내가 내린 잠정적인 결론은 '달뜬 낭만주의'를 경멸해마지 않는 이 '회사원/철학자'가 '배고픈 우파'가 아닌가 라는 것이다('배부른 좌파'들이 종종 눈에 띄듯이, '배고픈 우파'도 드물지는 않다). 비록 객관세계를 잊은 철학과 물신숭배에 빠진 자연과학 사이에서 찢긴 채 둘의 화해를 모색하면서(회사원-철학자!)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뭐든지 해볼 작정"이라고 그가 말해놓고는 있지만 말이다. 또 그럴 작정인 만큼 그 또한 곧 배부른 처지가 될 것이다. 그러기를 바란다(그에게도 쓰라린 나날들이 아닌 행복한 나날들을 살 만한 권리는 있는 것이니까).

 

 

 



강유원과 함께 떠올려지는 이름은 <잔혹한 책읽기>(작은이야기, 2004)의 저자 강대진이다. 이 '두 강'은 책읽기의 두 강자이다. 관심분야도 문명사와 고전학 쪽이어서 겹쳐지는 부분도 없지 않다. 두 사람을 읽는 일은 즐겁고 유쾌하다(유머에 있어서는 '쓰라림'을 줄곧 되뇌이는 강유원보다는 강대진이 한수 위이다). 그런 강자들이 주변에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턱없이(=읽은 것도 없이) '강짜'를 쓰는 놈들 말고...

05. 03. 21.

 

 

 

 

P.S.2. 최근에 눈에 띈 책들에 대해서 주로 늘어놓았는데,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확실히' 눈에 띄는 책이 있어서 언급해둔다. <움베르토 에코의 문학강의>(열린책들) 같은 책을 단번에 눌러버린 책인데, 에코도 그다지 유감스러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마틴 가드너가 주석을 단 <앨리스>(북폴리오)이다. 이전에 이 주석본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이번에 번역돼 나온 건 그 결정판이라고 한다. 가드너는 1960년에 처음 <주석 달린 앨리스>를 출간하고, 이어 1990년에는 <좀더 많은 주석 달린 앨리스>를, 그리고 마침내 2000년에는 그 결정판을 낸 것.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정도는 다들 한권씩 갖고 있거나 한번씩 읽어보셨을 테지만, '앨리스 깊이 읽기'라면 사정이 또 다르지 않을까?

과학 저술가로 유명한 마틴 가드너가 미국의 가장 대표적인 앨리스 전문가라면, 불어권에서 이에 버금할 만한 사람은 장-자크-르세르클이다. 낭테르 대학에서 언어학/영어학 교수로 있다는 그는 루이스 캐럴과 무의미(넌센스) 문학의 전문가이며, 앨리스에 대한 그의 논문은 '피귀르 미틱' 시리즈의 <앨리스>(이룸, 2003)에서 읽어볼 수 있다. 개인적으론 관심을 갖고 있는 저자라서 그의 책 몇 권을 챙겨두고 있다(나는 문학에서의 무의미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리고 다 알 만한 얘기지만,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한길사, 1999)는 <앨리스>에 대한 들뢰즈식의 '깊이 읽기'이다. <앨리스>를 읽지 않고 <의미의 논리>를 읽는 건(혹은 옮기는 건) 그래서 순서에 맞지 않는다.

한편, 러시아작가이면서 미국작가 블라지미르 나보코프 또한 <앨리스> 애호가이며 러시아어 번역자라는 좀 드물게 알려져 있을 듯하다. 가드너만큼의 주석을 달고 있는 건 아닌데, 한편으론 그럴 필요가 없기도 했다, 나보코프로선. 그의 소설들이 <앨리스>적인 의미-무의미의 유희를 이미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대, 롤리타를 읽으려는가, 앨리스도 챙겨가기를!..

05. 0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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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5-03-21 16:27   좋아요 0 | URL
헉, 찔린다...
"턱없이(=읽은 것도 없이) '강짜'를 쓰는 놈들 말고... "

로쟈 2005-03-21 16:37   좋아요 0 | URL
설마 바람구두님이?^^

바람구두 2005-03-22 09:29   좋아요 0 | URL
음, 솔직히 한동안은 스스로 천재가 아닐까 의심해본적이 있어요. 흐흐. 턱없이 높게 나온 IQ검사를 믿은 탓일지는 몰라도... 그러다 스스로 그런 류의 인간형이 아니란 것도 그야말로 처절하게 깨달은 뒤로는 공부만이 살 길이다 싶었는데, 독학의 길을 걷는 이들이 지니는 독특한 아우라가 있잖아요. 스승도 없고, 어디 소속되고 싶지도 않다고 생각하면서도(그러니까 학파니 학벌이니를 경멸하면서도) 동시에 체계적인 공부를 하고 싶다는 욕심도 버릴 수 없는 ... 가끔 그런 갈증에 시달리게 되죠. 그런데 지금 막상 체계 안에서 공부를 시작해보니 역시 원치 않는 공부를 덩달아 해야 하는 버거움이랄까, 그런 게 생기더군요. 아무래도 저는 학자라고는 할 수는 없고, 그것을 현실에 적용시키는 실천적인 입장(거창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현장실무자)에 있다보니 이론과 현실 사이에서는 늘 고민이 되더이다.

바람구두 2005-03-22 09:32   좋아요 0 | URL
참, 비릴리오의 "전쟁과 영화"는 저도 올해초에 구해서 읽었는데...번역은 둘째고, 일단 제게는 좀 어려운 이야기더군요. 종종 이런 소식 올려주시면 도움이 참 많이 됩니다. 흐흐, 고맙다는 말치곤 좀 엉성하죠?

로쟈 2005-03-22 09:48   좋아요 0 | URL
너무 엉성한 게 아니라 너무 '진한' 것 같습니다.^^ 독학자들이 모두 바람구두님이 발자국을 따라 걷다 보면, 그 나름의 호젓한 오솔길이 생길 듯도 합니다. 턱없이 높은 IQ에다가 무한정의 바람기질(=열정)까지, 양수겹장이시군요. 헤헤(도스토예프스키 소설에서는 그렇게들 웃습니다)...

바람구두 2005-03-22 14:30   좋아요 0 | URL
좋게 보아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나저나 예전에 이야기드렸던 것처럼 시간되실 때 한 번 연락주시길 ...

릴케 현상 2005-04-15 23:34   좋아요 0 | URL
우연히 강유원씨 홈에 누가 윗글을 올린 걸 봤어요. 강유원씨 코멘트
으음. 이 글을 읽어보니 제가 우파로군요. <<우정론>>에 대한 글 제목이 '행복한 시대의 징후'이고, <<국부론>>에 대한 제목이 '행복한 날들'이니 "로마제국과 대영제국의 지극한 '실용주의' 혹은 '현실주의'"에 대해 "호의를 보이고" 있다는 판단이 가능하기도 하겠습니다. 그 제목을 곧이곧대로 읽느냐, 경멸적인 의미로 읽느냐는 독자 마음이겠군요.

로쟈 2005-04-18 10:54   좋아요 0 | URL
네, 가보니까 누가 올려놓았더군요. 그리고 "곧이 곧대로 읽느냐, 경멸적인 의미로 읽느냐는 독자의 마음"이라고 코멘트되어 있군요. 저는 강유원씨의 '고전 읽기'를 높이 사지만, 그의 (자기 아이러니를 포함한) '위악적인' 포즈에는 동감하지 않습니다(그는 김훈의 위악적인 포즈는 곧이곧대로 읽더군요). 책이나 철학, 고전에 대한 비아냥을 통해서만 우리는 책과 철학과 고전을 존중할 수 있는 건지 의심스럽기도 하고. 사실 '회사원/철학자'(결국 그는 그런 자기 PR로 유명해졌는데)란 포즈도 그렇지요(그가 아직도 회사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류의 포즈나 자기과시마저도 없다면, 삶이 퍽 쓸쓸하겠지만, 보기 좋은 건 아닙니다. 더불어, 그는 자신의 정의에 근거하더라도 아주 래디컬한 보수주의자입니다. 그의 말마따나 좌파들은 먹고 사는 거 얘기나 하지 삶의 품위나 교양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거든요(이문열 같은 고전주의자도 한 사례입니다). 저의 기대는 그가 덜 떨어진 보수, 자격미달의 보수가 아닌, 제대로 된 보수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저는 그런 보수가 소위 '강단 좌파'보다 우리에겐 더 필요하며 더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릴케 현상 2005-04-20 10:41   좋아요 0 | URL
저는 잘모르지만^^ 제대로 된 보수를 보고 싶은 맘이 더 커요. 전에 김규항씨가 보수는 저 하나만 잘 지켜도 건사한 거라고 했던가요?
 

지난번에 신간 <성관계는 없다>(도서출판b)를 '최근에 나온 책들'의 하나로 꼽았었는데, 나는 필요 때문에 다른 책들보다 먼저 이 책을 손에 들게 되었다. 이 논문선집의 요점 중의 하나는 라캉의 성구분 공식에 대한 독해/이해를 제공하는 것이고, 브루스 핑크의 서론격 글인 "성적 관계 같은 그런 것은 없다"(There's No Such Thing as a Sexual Relationship)은 그런 역할에 충실하다.

 

 

 

 

나는 이전에 같은 테마를 다룬 <라캉과 포스트페미니즘>(이제이북스)을 읽었더랬지만, 그 번역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대목들이 핑크의 글에서는 명쾌하게 정리/해명되고 있었다. 해서, 라캉 읽기의 '걸림돌'이라고 할 만한 몇몇 대목들, 가령 '욕망 그래프', '네 가지 담론', '성 구분 공식' 등에 대해서 이젠 편하게 참조할 수 있는 책들이 우리에겐 주어졌다(앞의 둘에 대해서는 지젝을 참조하면 된다).

 

 

 

 

핑크의 글에 대해서는 편역자 해제에서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나는 군말을 덧붙일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해서 독자들은 그냥 읽어나가면 되는데, 여기선 내가 개인적으로 읽어나가다가 유려한 번역이지만 좀 미심쩍게 생각되는 몇몇 부분을 짚어보기로 한다. 옥의 티라고 할 만한 대목들이 몇 군데 있어서이다.

가벼운 것부터 지적하면, 64쪽에서 '사물'이 발견하는 기표의 예로 든 'art'는 '예술'이 아니라 '미술'로 옮겨져야 할 것이다(그러니까 '예술', '음악'이 아니라 '미술', '음악'이다).그건 67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74쪽에서, "적어도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로가는 저 오래된 형식과 질료의 은유"에서 '형식'은 물론 'form'의 번역이지만, 이 경우에는 '형상'이라고 번역하는 게 관례이다. 나는 '형식(형상)' 정도로 옮겨주는 게 나을 거 같다. 65쪽에서 "원인을 의미화하기"는 "subjectifying of the cause"의 번역인데, 역자가 "signifying of the cause" 정도로 잘못 본 것 같다. 다른 대목의 번역들을 보건대, "원인을 주체화하기"라고 옮겨져야 할 듯싶다. "그 자신의 원인이 되기"란 뜻이니까.

76쪽에서 "라캉은 S(빗금A)에 관해서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은 "The little Lacan directly says about S(빗금A)"인데, 여기서 little은 형용사나 부사가 아니고 명사이며 (사전에 따르면) '적으나마 있는 것'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풀어서 얘기하자면, "라캉이 S(빗금A)에 대해서 직접 언급한 것은 얼마 안되지만, 그에 따르면"이란 뜻이다(요컨대,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이 아니라 "직접 언급한 것"이다).

78쪽에서 "왜냐하면 그 파트너는 '남자들'이란 범주에 들어가지 않고, 따라서 여자는 남자와 '관계하거나' 남자를 '따르기' 위해서 남자에게 호소할 필요가 전혀 없으니까 말이다."는 "S(빗금A), as that partner is not situated under 'Men' at all, and thus a woman need have no recourse to a man to 'relate' or 'accede' it."의 번역인데, 이건 내가 보기에 오역이다. 역자는 맨마지막에 나오는 it을 남자들(Men)으로 봤는데, 문맥상 '그 파트너'인 S(빗금A)이어야 한다. S(빗금A)는 '남자들'이란 범주에 들어가지 않으니까 당연히 S(빗금A)와의 관계에서 '남자들'은 불필요하다는 얘기이니까(남자를 따르기 위해서 남자에게 호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넌센스이다).

81쪽에서 "그것은 남근 경제나 단순한 구조주의 안으로 결코 만회될 수 없다"고 한 것은 "It can never be recuperated into a 'phallic economy' or simple structualism."의 번역인데, (오역을 지적하는 게 아니라) 나라면 "그것은 남근경제나 단순한 구조로 결코 회복될 수 없다"라고 옮기고 싶다. 바로 위 문단에서는 'Sexual relationships'를 '성적 관계'라고 단수로 옮겼으므로 그것을 받는 'they'도 단수인 '그것은'으로 옮겨야 할 것이다(수의 일치상). 아니면, '성적 관계'를 '성적 관계들'로 옮기든가.

85쪽에서 "프로이트는 여자는 법에 대해서 이와는 다른 관계를 맺는다고 제안하는데, 그는 그 관계를 아직 덜 고도로 발달된 자아-이상이나 초자아와 관계지었다."는 "Freud suggests that women have a different relation to the law, which he correlates with a less highly developed ego-ideal or superego"의 번역인데, 역자는 관계사 which의 선행사를 relation으로 보았다. 나는 그게 law가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지젝이 다른 자리에서 지적하는 바이지만(144쪽) 라캉에게서 법은 상징적 자아-이상으로서의 법과 초자아 차원에서의 법이라는 두 가지 얼굴을 갖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  

근간으로 돼 있는 브루스 핑크의 <라캉의 주체(The Lacanian Subject)>는 몇 차례 언급한바 있지만, 가장 명쾌한 라캉 입문서이다. 좋은 번역서가 조만간 나온다면, 라캉에 대한 많은 오해와 갈증이 해소될 걸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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