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자 한겨레 '책과사람'란에서 가장 크게 다루어진 것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가 100권을 돌파했다는 소식이다. 탁석산의 <한국의 정체성>부터 구춘권의 <메가테러리즘과 미국의 세계질서전쟁>까지이고 만 5년만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1년에 대략 20권씩의 책을 낸 셈인데, 그간에 국내 출판계를 대표하는 문고본으로 성장했고, 뒤이은 문고본들의 모델이 돼 주었으니 치하할 만한 일이다(물론 문학과지성의 스펙트럼문고가 있었지만, 국내 필자들만의 '인문서'로 채워진 것은 책세상문고만의 덕목이다). 100권 통틀어 65만부가 나갔다고 하니까 권당 평균으로 치자면 6,500부가 나간 셈이고 이건 다른 출판사들이 부러워할 만한 성적이다. 대개 2쇄까지는 찍었다는 얘기니까(본전은 뽑았다는 얘기이기도 하고). 나는 이 시리즈의 책을 10권쯤 읽은 거 같은데,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 <정치와 진리> 등이 기억에 남는 책들이다.
2003년도부터 나오기 시작한 책세상문고 '세계문학'은 '우리시대'의 기획이 성공한 덕분에 꾸려지게 된 것인데, 이 시리즈의 최신간은 러시아 작가 불가코프의 희곡 <조야의 아파트/질주>이다.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작가로 잘 알려진 불가코프는 비록 작가로서 불운한 생애를 보내긴 했지만, 러시아 20세기의 최대 작가 중 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최대 극작가이다. 20세기 작가들 중에서 그는 아마도 가장 자주 공연되는 작가일 것이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은 <백위군>(<투르빈가의 나날들>이 각색본인데, <백위군>이란 이름으로 무대에 더 자주 오른다)과 이번에 번역된 두 작품 등이며, <질주>는 영화로도 제작됐다(국내에도 출시돼 있다).
불가코프의 다른 드라마로는 몰리에르의 생애를 다룬 <위선자들의 밀교>(연극과인간, 2001)가 같은 역자에 이해 번역/소개된바 있으며, 장편 <백위군>(열린책들, 1996), 중편집 <개의 심장>(열린책들, 1998), <비운의 달걀>(1999, 대구효성카톨린대출판부) 등이 번역돼 있다. 그의 중편들은 대부분 풍자소설에 속하며, <백위군>은 내전기를 다룬 작품. 그리고 그의 걸작 <거장과 마르가리타>은 한길사에서 출간된바 있지만, 절판되었고 현재 다른 역자에 의해서 번역이 준비되고 있는 걸로 안다(이 작품은 러시아에서 현재 드라마 시리즈로 제작되고 있다). 대략 이 정도 규모이면 20세기 러시아에서 수위를 다툴 만한 작가의 전모를 어느 정도 가늠해볼 수 있을 듯싶다.
불가코프의 <조야의 아파트>를 제일 먼저 꼽은 것은 책세상문고를 기념하고 작가의 지명도를 고려해서이지만, 한편으론 안면이 있는 역자에게서 책을 선사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 나름대로 홍보도 해줄 필요가 있는 것. 하지만, 이런 경우는 지극히 드물어서 나는 대부분의 책들을 내 돈 주고 사서 읽어야 한다. 그건 '악마적인' 차이이다. 증정받은 책들에 대해선 오타나 오역 등에 구애받지 않지만, 내 돈 주고 산 책들에 대해서 나는 엄격하다. 그 책들에는 나의 땀과 수난과 눈물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대강 얼버무리면서 넘어갈 일은 아닌 것이다.
두번째로 꼽을 책은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숲)이고, 천병희 교수의 번역이다. 1만 1995행이라는 데 우리말 최초의 완역본이다. <변신이야기>는 이전에 솔출판사(김명복 역, 1993)와 민음사(이윤기 역, 1994/1998) 본이 나와 있지만, 모두 중역본이며 고대 라틴어에서 옮긴 것으로는 이 책이 처음이다. <원전으로 읽는 변신이야기>라고 장황한 제목이 붙은 것은 그러한 사정을 드러내주기 위함일 것이다. 물론 중역이더라도 내용이 정확하고 문체가 유려하다면 굳이 원전 번역이 강조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형편이 그렇지가 않아서 가장 많이 읽히고 있는, 민음 세계문학전집의 간판으로 나온 이윤기본만 하더라도 상당히 많은 오류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지적된다(강대진의 지적인데, 어느 잡지에 실린 비평문이 그의 서평집 <잔혹한 책읽기>에는 들어가 있지 않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원전 번역이 강조되는 건 그 때문이다.
천 교수는 그리스와 라틴 고전문학 번역에 있어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데, 조만간 키케로의 책이 후속작으로 출간될 거라고 한다. 한편 천교수가 번역한 그리스 고전들은 단국대출판부에서 나오고 있는데, 그 책들의 북디자인은 좀 수준 이하다(덕분에 나는 한권의 책도 안 사고 있다). 공들여 번역한 작품들이 허름한 모양새로 나오는 건 좀 무성의하게 보인다. 겉멋만 든 책들보다야 양반이긴 하지만, 좀 때깔이 있는 책들로 다시 나왔으면 싶다.
때깔로만 치자면 동문선의 책들도 빠지진 않을 것이다. 내가 비교적 혐오하는 출판사이지만, 전공과 관심 때문에 자주 신간들을 둘러보게 되는 것도 이 출판사의 책들이다. 동문선의 최신간은 주디스 버틀러의 <안티고네의 주장>이다. 버틀러는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Body Matters)>(인간사랑, 2003)가 소개된바 있는데, 페미니즘 이론과 퀴어이론의 새로운 강자로서 주목받고 있는 여성 이론가이다. 그녀의 대표작은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이란 부제를 단 <젠더 트러불>이고, <권력의 심리적 삶>, <흥분하기 쉬운 발화> 등의 저서들을 연이어 냈다. 나는 버틀러의 책(복사본)을 여러 권 갖고 있는데, 그건 영문학과 페미니즘쪽에서 주목받는 이론가로 부상함에 따라 그녀의 책 대부분이 저렴한 마스터본으로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안티고네의 주장>(2000)은 그 시절에 따로 복사해두었던 책인데, 원서는 103쪽 분량의 얇은 책이다(번역서는 138쪽).
아무리 중요한 이론가라 하더라도 (대개의 동문선의 책들이 그런 것처럼) 번역을 신뢰할 수 없으면 나오나 마다한 책들인데(귀국 이후에 내가 읽은 최악은 마슈레의 <문학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동문선)였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번역을 하고 출간을 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책. <문학생산이론을 위하여>(백의)와 쌍벽을 이룬다) 다행히도 신간의 경우에는 버틀러 전공자가 번역을 맡았고 (드문 일이지만) 38쪽의 역자 해설까지 덧붙였다. 그러니 다소간 비싼 책이더라도 엉터리는 아닐 것이다.
버틀러와 관련해서 읽어볼 만한 논문은 <성관계는 없다>(도서출판b)에 실린 콥젝의 "성과 이성의 안락사"이다. 콥젝은 <젠더 트러블>에서 개진된, 생물학적 성에 대한 버틀러식의 해체에 동의하면서도 성의 문제가 순전히 가변적/수행적인 것이라는 버틀러의 주장에 대해서는 칸트와 라캉을 경유하여 반박한다. 그리고 이러한 기조는 지젝에게서도 이어지는데, 곧 출간예정인 <까다로운 주체>(도서출판b)의 한 장을 지젝은 버틀러에 대한 비판에 할애하고 있기도 하다. 콥젝의 논문은 <나의 욕망을 읽어봐>에 실려 있는데, 그녀의 또 다른 책 <여자가 없다고 상상해봐>는 근간 예정이다.
세번째 책은 페루 작가 바르가스 요사의 <리고베르토씨의 비밀노트>(새물결, 2004)이다. 이 책은 작년 12월에 나온 걸로 돼 있는데, 내가 서점에서 책을 본 게 최근이다. 요사의 책으론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문학동네, 2002)와 <세상종말전쟁>(새물결, 2003) 등이 최근에 나온 작품들이다. 나는 전자를 좀 읽어보았을 뿐이지만, 요사는 남미 3대 작가라는 명성에 걸맞는 '이야기꾼'이다. '요사의 모든 책'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그러니 나오는 족족 읽어볼 일. 약간 유감스러운 건 책이 두 권을 분권돼 나왔다는 점. 출판사로선 그게 여러 모로 편하고 이익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두꺼운 책을 선호하는 나로선 불만스럽다. 분량으로 봐선 한권으로 묶여도 됐을 만한 책이다.
네번째 책은 <E=mc2>(생각의나무)이란 베스트셀러를 썼던 데이비드 보더니스의 신간 <일렉트릭 유니버스>(생각의나무)이다. 제목 그대로 전기에 관한 것인데, "전화, 라디오, 레이더, 컴퓨터, 심지어 비아그라까지, 전기력의 힘을 빌어 탄생한 물건과 그들의 역사를 담았다"고. 이런 교양과학서를 읽은 지가 이젠 꽤 되는 것 같다. 휴식 같은 시간들이 내겐 없었던 셈. 에드 레지스의 <누가 아인슈타인의 연구실을 차지했을까>(지호)도 읽어볼 만한 책인데, 나는 이전에 <아인슈타인 방의 사람들>(웅진닷컴, 1993)이란 제목의 번역본으로 읽었다. 프린스턴고등학술연구원 사람들의 '프렌즈' 같은 이야기들. 옛날엔 이런 책들을 읽을 시간이 있었는데...
끝으로 벤야민 관련 신간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효형출판). 수잔 벅 모스의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문학동네, 2004)와 유사하게 파사주 프로젝트에 대한 해설서인 듯. 382쪽으로 돼 있지만, 번역서의 여백이 상당히 헐렁해서 원서는 300쪽이 안될 것 같다. 이런 식의 두툼한 책은 낭비적이며 책값도 비싸게 매겨진다는 점에서 전혀 반갑지 않다. 얄팍하게 책장사를 하려는 궁리들은 자제해주었으면 좋겠다. 벤야민의 또다른 책으로 <모스크바 일기>(그린비)가 이번주에 출간된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참견하기도 한 책이어서 기대가 된다...
05. 03. 28.
P.S. 다음에는 그간에 나온 영화관련 책들에서 읽고 싶은 것들을 꼽아보도록 하겠다...
P.S.2. 한권만 더. 레비스트로스의 예술론이라고 할 <보다 듣다 읽다>(이매진)이 출간됐다. 원저는 1993년에 나왔고 "인류학자의 시각에서 푸생, 뒤샹, 모네, 들라크루아, 보티첼리를 보고, 라모, 바그너, 베토벤, 로시니를 듣고, 디드로, 랭보, 보들레르를 새롭게 읽어낸다."고 소개되고 있다(레비스트로스는 서양 고전음악의 애호가로서 그에 대한 자부심도 피력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이미 지난 1994년에 <레비스트로스의 미학에세이>(동아출판사)로 나왔던 책이다. 역자는 물론 다르다. 나는 이전에 나온 걸 갖고는 있지만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없는 걸로 봐서 그다지 좋은 번역도 아니었던 듯싶다. '헌 책'이지만 '새 푸대'에 담으면 좀 나아지는 게 있을지도...
05. 03.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