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 정치철학 강의>(푸른숲, 2002)는 20세기의 가장 독창적인 정치사상가이자 유태계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1906-1975)의 유작이다. 아렌트는 말년에 <정신의 삶> 3부작으로 <사유>(1권)와 <의지>(2권)에 이어서 3권 <판단>을 집필하고자 했지만, 갑작스런 죽음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칸트 정치철학 강의>(이하 <강의>)는 1970년 가을에 뉴스쿨에서 행한 강의를 제자인 로널드 베이너가 편집/해설을 맡아서 1982년에 출간한 것인데, 그의 <판단>의 윤곽을 가늠해 볼 수 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칸트가 체계적인 정치철학을 쓰지 않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이 책에서, 아렌트가 말하는 판단이 과연 '활동적 삶'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냐, '관조적 삶'에 속하는 것이냐를 두고 의견이 나뉘지만, 나로선 칸트 정치철학을 <판단력 비판>을 통해서 재구성해내고자 하는 시도 자체가 의미있어 보인다.

 

 

 

 

하지만 처음부터 아렌트의 유작을 읽는다는 것은 좀 무리해 보인다. 그녀가 어떤 문제의식을 통해서 판단의 문제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조감하지 않고서는 이 '강의'에 접근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책들이 김선욱의 <정치와 진리>(책세상, 2001)와 알로이스 프린츠의 <한나 아렌트>(여성신문사, 2000)이다. 전자는 아렌트의 정치사상의 한 부분을 "정리하고 발전시킨 것"(8쪽)이고, 후자는 아렌트의 사적인 삶에 대한 비교적 자세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전기이다. 아렌트의 정치사상을 다룬 책으로 김비환의 <축복과 저주의 정치사상>(한길사, 2001)도 있지만 좀 부담스런 분량이고, 아렌트의 전기로는 영-브륄(Young-Bruehl)의 것이 더 자세하지만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아렌트에 대한 무게있는 연구서로는 다나 빌라의 <아렌트와 하이데거>(교보문고, 2000)가 있다. 아렌트의 저작으로는 대표작인 <인간의 조건>(한길사, 1996)과 함께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문학과지성사, 1983), <폭력의 세기>(이후, 1999)가 번역돼 있다(80년대에 번역된 <공화국의 위기>와 <혁명에 대하여>는 절판됐다). 물론 그녀의 출세작인 <전체주의의 기원>(1951)과 <과거와 미래 사이>(1961), <정신의 삶>(1971) 등이 마저 번역되기를 기대한다.

 

 

 

 

아렌트의 문제의식이란 무엇인가?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활동적 삶'(viva activa)을 노동(labor)과 작업(work), 그리고 행위(action)로 나누는데 거기서 그녀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행위이고, 이 행위의 핵심이 바로 정치적 행위이다. 사실 사회적 동물로 흔히 번역돼 온 아리스토텔레스의 'zoon politikon'이란 말은 '정치적 동물'이란 뜻으로 번역돼야 한다. 그리고 이 '정치적인 것'의 발견/발명이야말로 고대 그리스의 가장 위대한 유산이라 할 만하다. 아렌트에 의하면, 이 말을 사회적 동물(animal sosalis)로 처음 번역한 이는 세네카이다. 그리고 이어서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은 본성상 정치적, 즉 사회적이다"라고 말한다.(<인간의 조건>, 74쪽) 하지만, '정치적=사회적'이란 동일시가 오역만은 아닌데, 여기에는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와 중세 봉건 사회간의 본질적인 차이가 개입하기 때문이다. 노예제를 바탕으로 한 그리스 도시국가와는 달리 중세에는 영지 내 생산활동 구조가 정치구조와 직결돼 있었다. 즉 고대 그리스에서와 같은 사적인 것(사적 영역=경제적 생산관계)과 공적인 것(공적 영역=정치관계)의 구별이 중세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렌트의 의도는 중세 이후로 사장된 정치적인 것을 재발견하고 사적 영역과 구별되는 공적 영역을 복원하며, 그리하여 인간의 중요한 행위능력인 정치적 행위를 회복하는 데 있다. 인간이 정치적 동물이라면 정치야말로 인간을 다른 동물로부터 구별지어주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즉 정치 행위를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동물임(being animal)으로부터 구제되어 비로소 인간임(being human)을 주장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정치적이란 말은 인간적이란 말과 동일시돼야 한다. 그런데, 과연 우리의 경우, "저 인간은 정치적이야"란 말이 "저 인간은 참 인간적이야"란 말과 동일한 함축적 의미를 갖는가? 우리의 '정치인'이란 말은 과연 '(동물이 아닌) 가장 인간다운 사람'이란 뜻을 갖는가?(혹 우리는 정치인들은 소 닭 보듯 하지는 않는가?) 이렇듯 정치에 대한 혐오와 불신은 그만큼 우리가 정치적 행위능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정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함께-함(being together)의 형식을 탐구하고 보존하기 위해서 함께 행동하는 것이다. 아렌트는 권력이나 지배-예속 따위를 정치의 기본개념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러한 개념들은 모두 함께-삶(living together)이라는 원리/개념으로부터 도출되는 부수적인 개념들일 뿐이다. 정치는 무엇 때문에 필요한 것인가? 권력을 행사하거나 지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함께 하기 위해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때문에 정치는 결코 수단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함께 하고, 함께 살아가는 것은 결코 다른 무엇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러기에 정치적 행위의 유일한 목적은 정치의 영역을 계속 보존하고 영속화하는 것이다.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인정이다. 정치에서 다루는 인간은 유적 존재로서의 인류(human species)나 도덕적 존재로서의 단수적 인간(man)이 아니라 복수적 존재로서의 인간(men)이다. 즉 정치의 근본은 인간의 복수성(human plurality)에 대한 인정과 긍정이다. 때문에 정치는 진리와 무관하다(아렌트는 정치적 진리를 도출해내고자 하는 정치'철학'에 비판적이다). 가령 우리는 2×2=4인가, 아니면 2×2=5인가의 문제를 다수결로 결정하지 않는다. 지구가 도는지 마는지를 배심원들의 판결에 의존하지 않는다. 진리란 본성상 단수의 영역이며 따라서 대화나 타협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후보를 다음 대통령으로 뽑을 것인가 같은 문제는 정답, 즉 진리를 갖고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정치의 영역, 의견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행위란 이 정치라는 공적 영역에서 복수의 행위자들이 하는 공동행위, 즉 함께-행동함(acting together)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공동으로 주장될 수 있는가에 대한 판단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 판단은 취미판단과 닮았다. "판단, 특히 취미판단은 항상 타인과 타인의 취미를 반성하는 가운데, 그들이 내릴 수 있는 가능한 판단들을 고려하게 된다.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내가 인간이고 또 인간들과 함께 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강의>, 132쪽) 예컨대, 미군장갑차가 두 여중생을 치인 사건을 불가피한 사고라고 보는 판단과 최소한 과실이라고 보는 판단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판단이 더 공유될 수 있는 판단인가를 물을 수 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이 바로 다른 인간들과 함께 살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의 복수적 인간이 갖는 공통감(common sense)이다. 이때 공통감은 공적 감각(public sense)이면서 동시에 공동체 감각(community sense)이다. "칸트에 따르면 상식은 사적 감각과 구별되는 공동체 감각, 즉 공통감이다. 이 공통감은 판단이 모든 사람들 속에서 호소의 대상이 되게 하는 것으로, 이렇게 가능하게 되는 호소 때문에 판단은 특별한 타당성을 갖게 된다. 감정과 마찬가지로 그 전적으로 사적이고 소통불가능하게 보이는 나를-즐겁게-또는-불쾌하게-한다는 실제로 이러한 공동체 감각에 뿌리내리고 있다."(<강의>, 139쪽) 따라서 정치를 회복하는 일은 우리의 상식, 즉 공통감을 일깨우는 일이며 공동체 감각을 북돋는 일이다.(그리하여 광화문에 촛불을 들고 모이거나 여기저기서 미국의 부당한 행위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다.)

아렌트는 정치와 경제가 확실히 차별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동시에 정치의 전제로서 객관적 가난의 해결을 중요시했다. 진정한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정치는 '사회문제'로, 즉 궁핍한 사람들의 생존과 생계의 문제로 환원되며, 이것은 아렌트가 볼 때, 공적 자유라는 원래의 이상을 개인적 행복의 이상으로 대체하는 결과를 낳는다(Z. 바우만, <자유>, 이후, 2002, 171쪽). 우리의 경우 4.19라는 자유의 공간, 정치의 공간이 왜 억압될 수밖에 없었던가를 생각해 본다면 이 점은 분명해진다. 최인훈의 어법을 빌면, 5.16군사 쿠데타 이후 우리는 민생문제 해결이란 명분으로 정치의 광장을 상실하고 오직 비대해진 밀실만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우리 현대 정치사의 주류적 행태는 '둥근 사각형'이란 말만큼이나 모순적인 '밀실정치'였다.

 

 

 

 

하지만 요즘 우리 사회에서 문제되는 것은 그러한 객관적 가난 못지 않게 주관적 가난, 즉 상대적 박탈감인 듯싶다. 이 박탈감은 결코 소외계층만의 것은 아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사적 영역으로서의 밀실이 공적 영역으로서의 광장을 대신할 수 없으며, 원래 사적(private)이란 말 자체가 공적 영역이 '박탈된'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아렌트에 의하면, "전적으로 사적인 생활만을 한다는 것은 진정한 인간의 삶에서 본질적인 것들이 박탈되었음을 의미한다."(<인간의 조건>, 112쪽) 따라서 아무리 100평이 넘는 아파트에 바닥엔 대리석을 깔고 살아도, 풀장과 골프장까지 갖추고 살아도 그러한 사적인 삶은 진정한 삶과는 거리가 먼 박탈된 삶이고 결여된 삶이다. 그래서 현대 소비사회에서 정치의 적은 주관적 빈곤감과 이에 따른 공적 자유에 대한 관심의 쇠퇴(<자유>, 171쪽)라는 바우만의 지적은 정당하다. 정치의 계절을 맞이하여 우리는 다시금 이러한 정치의 본질에 대한 관심을 회복하고 우리 정치의 현실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02. 12.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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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deis 2004-05-19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퍼갑니다. 건강하세요.

이온서가 2005-02-12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감사합니다.

과쟈쥬세요v 2005-07-17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세요:)
 

 

 

 

 

지난해 말 '기습적으로' 출간된 가라타니 고진의 신작 <유머로서의 유물론>(문화과학사)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온라인 서점의 경우지만, 우리에게 번역 소개된 그의 책들 가운데 가장 많이 팔리고 있는 것이다. 많이 팔리는 만큼 많이 읽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표제글인 '유머로서의 유물론'만큼은 한번쯤 읽히지 않을까 싶다. 8쪽밖에 되지 않는 그 글은 이 책에 묶인 다른 비평문들과 비교할 때 가장 읽기 쉬운 글이기도 하다(게다가 유머러스하다).

고진은 먼저 일본 근대문학에서의 '샤세이분(寫生文)'이 서양의 리얼리즘과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라고 지적한다. 샤세이분에서의 객관적인 묘사는 "자기 자신을 높은 곳으로부터 보는 자기의 이중화"(127쪽)를 의미하기 때문인데, 이러한 묘사는 근대소설의 내러티브로써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자기의 이중화'이다. 고진은 그것을 프로이트가 말하는 유머와 연결시킨다. "프로이트가 생각하기에 유머는 자아(아이)의 고통에 대해 초자아(부모)가, 그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라고 격려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을 메타 레벨에서 내려다보는 것이다."

물론 유머를 그렇게 정의내릴 경우, 또 다른 '자기의 이중화'인 자기 아이러니(self-irony)와 겹칠 수 있는데, 고진에 의하면 이 둘은 같지 않다. "왜냐하면 아이러니가 타인을 불쾌하게 하는 것에 반해, 유머는 왠지 그것을 듣는 타인도 해방하기 때문이다." 고진은 이러한 유머를 보들레르를 인용하면서 다시 한번 정의내리는 바, "그것은 유한적인 인간의 조건을 초월하는 것인 동시에, 그 일의 불가능성을 고지하는 것이다."(128쪽) 그런 의미에서 유머는 일종의 '정신적 자세'이며 '웃음'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지만, 대개의 유머는 웃음을 유발하기도 한다. 고진도 사례로 들고 있지만, 사실 카프카가 자신의 음울한 소설들을 읽어줄 때, 청중은 물론 그 자신도 우스워서 데굴데굴 굴렀다는 건 잘 알려진 일화이다(요컨대 그는 블랙 유머리스트였던 것이다).

이러한 예비적인 고찰에 이어서 고진은 제법 근엄해 보이는 사상가들에게서 발견되는 유머로 우리의 주의를 이끈다. 그는 스피노자의 결정론적 세계인식에서 유머를 발견하며, 칸트의 '초월론적 비판' 또한 유머러스한 것으로 규정짓는다. '초월론적'이란 어떤 종류의 '정신적 태도'이며 '자기 이중화'이기에 유머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머는 마침내 마르크스에게까지 전염된다. 즉 "자기는 세계(역사) 안에 있으며, 그것을 초월할 수 없다, 초월한다는 믿음마저도 그것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는 초월론적 비판이야말로 '유물론'이며, 이는 그 무엇보다도 유머인 것이다."(131쪽) 그 유머를 유머로서 받아들이지 못할 때 우리는 이념을 맹신하는 민족주의·국가주의·원리주의자가 되거나 이념의 몰락 앞에서 상처받아 어떠한 이념도 경멸하고자 하는 아이러니스트 또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니힐리스트로 전락한다.

그렇다면, 아무나 유머리스트가 되는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다. 고진이 끝으로 인용하고 있는 프로이트에 의하면 유머적인 정신상태는 귀중한 천분이며 대개의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주는 유머적 쾌감을 맛볼 능력조차도 결여하고 있다. 요컨대 고진의 이 유머론에서 당신이 유머적 쾌감을 맛보지 못한다면 당신에겐 정신적 귀족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하거나 결여돼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반대로 만약에 당신이 이렇게 요약된 글에서까지 유머를 발견하고 데굴데굴 구를 수 있는 정신상태로 무장돼 있다면, 굳이 개그콘서트를 보지 않더라도 세상이 얼마나 희극적이며 유머러스한가를 실감하게 될 것이다.

 

 

 

 

민족시인이라 불리는 소월(1902-1934)의 시에서도 우리는 그러한 유머를 쉽게 발견한다. 저다병(각기병)으로 고생하던 그는 끝내 아편을 먹고 자살하는데, 그의 아내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말년의 그는 마음 상하고 아프다고 술만 마셨다. 그리고 술잔만 들면 울기만 했다. 그런 그가 생의 막바지에 쓴 시가 <三水甲山>(1934)이다(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시이다).

三水甲山 내웨왔노 三水甲山이 어디뇨
오고나니 崎險타 아하 물도 많고 山첩첩이라 아하하

내고향을 돌우가자 내고향을 내못가네
三水甲山 멀드라 아하 蜀道之難이 예로구나 아하하

三水甲山이 어디뇨 내가오고 내못가네
不歸로다 내고향 아하 새가되면 떠가리라 아하하

님계신곳 내고향을 내못가네 내못가네
오다가다 야속타 아하 三水甲山이 날가두었네 아하하

내고향을 가고지고 오호 三水甲山이 날가두었네
不歸로다 내몸이야 아하 三水甲山 못버서난다 아하하

三水甲山은 우리 생의 조건이다. 그것은 '지구'라는 '인간의 조건'(한나 아렌트)이면서 '세계-내-존재'라는 현존재의 조건(하이데거)이다. 그러한 조건 속에서 우리는 不歸로서 현존한다. 나는 이 불귀가 고진이 말하는 유머에 상응한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내 고향'이라는 종교 혹은 이념에 의해 구제될 수 있는 이들은, 그래서 三水甲山을 벗어날 수 있는 이들은 굳이 유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아하하'라는 웃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가장 높이 날면서 가장 멀리 보는 새들이나 본전 생각나면 이동하는 철새들 또한 유머와 무관하다. 유머를 필요로 하는 건 아침마다 꼬꼬댁하고 울어제끼는 촌닭들이나 두렵고 다급할 때마다 고개를 처박는 칠면조 같은 새들이다. 그 칠면조들의 칠면조다운 자기 초월에의 본능, 혹은 '자기 이중화'의 의지야말로 유머에 값한다. 말하자면, 칠면조는 유머를 아는 새이다. 그리고 소월은 우리가 자랑할 만한 칠면조이다.

 

 

 

 

지난 연말에 나온 '유머북' 가운데 걸작은 <니진스키 영혼의 절규>(푸른숲)이다. 러시아의 전설적인 무용가 니진스키 자신이 정신질환으로 투병하던 말년에 쓴 일기인데, <니진스키의 고백>(문예출판사, 1975)으로 부분 번역되었던 것이 이번에 같은 역자에 의해서 완역돼 나왔다. 이 책 어느 곳을 들춰도 소월의 '三水甲山' 못지 않은 유머들이 넘쳐나는데, 내가 특히 좋아하는 대목은 "나는 울고 싶은데 신은 내게 쓰라고 명령한다. 그는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 바라지 않는다. 아내는 울고 또 운다. 나 역시 운다..."(347쪽)로 시작하는 부분이다. 이 대목의 75년판 번역은 "나는 울고 싶은데 神은 내게 계속 쓰라고 명령한다. 그는 내가 빈들거리는 걸 원치 않는다. 내 처는 줄곧 울고 있다. 나 역시 운다..."(218쪽)이고, 영역은 "I want to cry but God orders me to go on writing. He does not want me to be idle. My wife is crying, crying. I also..."이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보다는 '빈들거리는 걸'이란 번역이 더 마음에 든다. 나 또한 오늘도 빈들거리지 않고 이 글을 쓴다. 이건 신의 명령이자 다 아시겠지만, 유머이다.

03. 01. 15.

P.S. 이 글은 북매거진 <텍스트>에 기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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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야마 게이자부로의 <존재와 언어>(민음사, 2002)와 김상환의 "언어에 대하여",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창작과비평사, 2002)를 읽었다. 분량의 차이는 있지만, '언어'에 대한 계발적인 사고를 부추긴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내가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된 건, 소쉬르가 <일반언어학 강의>에서 줄곧 강조하는 '랑그(langue)'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아나그람 연구 등을 통해서 문제화하는 '랑가주(langage)'로서의 언어이다. 딜런 에반스에 따르면, 라캉이 말하는 언어도 랑그가 아니라 랑가주이다.

 

 

 

 

물론 이전에 지적했다시피, 랑그/랑가주의 구별은 불어에만 있다. 우리말로는 '언어/언어할동'으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역시나 그 맥락적 의미가 다 전달되지는 않는다. 마루야마에 의하면, "소쉬르에게 랑가주는 인간이 가진 상징화 능력과 그 활동들(언어, 행위, 음악, 그림, 조각) 등이며, 넓은 의미의 말에 해당한다."(122쪽) 또 "랑가주는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해주는 표지이며, 인간학적 또는 사회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성격을 가진 능력으로 간주된다."(123) 이것을 마루야마는 촘스키와는 다른 의미에서 심층의 언어라고 부른다. 보다 알기 쉽게 얘기하면, 랑그는 랑가주의 일부로 포함된다. 그래서 랑가주에는 '랑그화된 랑가주'('랑가주1'이라 부르자)가 있고, '랑그화되지 않는 랑가주'('랑가주2'라 부르자)가 있다.

마루야마에 의하면, "랑가주가 개별 사회에서 독자적인 구조가 되고, 특정의 공시적인 제도가 된 것을 랑그라고 한다. 랑그는 여러 언어에 공통되는 원리적 기호 체계이며, 개인의 행위를 규제하는 조건과 규칙의 총체인 가치체계이다."(123쪽) 그리고 이 "랑가주는 랑그 이전의 상징성의 활동으로서, 음성언어에 앞서는 원에크리튀르(archiecriture)나 코드 없는 무용인 몸짓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126쪽) 이 랑가주를 적극적으로 체화하고 있는 것이 바로 상징적 언어로서의 시적 언어라고 할 수 있다.

김수영의 시평에 대해 검토하면서 김상환이 지적하는 것 또한 이 랑가주로서의 시적 언어가 아닐까? 그것은 어디에 위치하는가? "시적 언어는 언어의 안과 밖이 나뉘는 경게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김수영이 말하는 '언어 이전'은 그 자체로 완결된 기의의 질서가 아니다. 그것은 언어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접경적 사태를 가리킨다. 언어를 이 접경적 사태 속에서 일어나는 기록의 경제학으로부터 성찰하는 것, 그것이 시적 사유의 영원한 과제이다."(129) 인용문에서 '언어 이전'의 카오스적인 질서란 소쉬르나 마루야마가 얘기하는 랑그화되지 않은 랑가주, 즉 '랑가주2'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랑가주1'과 '랑가주2'는 각각 자연언어와 상징언어에 대응할 것이다.

상징언어로서의 랑가주는 마루야마가 말하는 인간적 과잉의 산물이다. "나의 견해는 인간만이 앞에서 본 것 같은 본능의 도식 이외에 또 하나의 게슈탈트를 과잉물로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차 분절의 결과 생기는 <언어 구분 구조>이며, 그 그물눈은 바로 <상징화 능력과 그 활동>이라는 넓은 의미의 말에 따른 게슈탈트이다."(165-6쪽) 여기서 '상징화 능력과 그 활동'이나 '넓은 의미의 말'은 전부 랑가주에 해당한다. 그러데 이 상징언어라는 과잉, 혹은 괴물은 우리의 일상성에 대한 폭력에 다름아니다. "시어란 일상어에 가해진 조직적인 폭력"이라는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주장을 떠올려 보라. 때문에 일상생활속에서의 일상적 자아는 일상적인 의사소통(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 일상적 의식의 수준에서 이러한 과잉을 제어할 필요가 있다. 즉 절대적 언어를 상대적 언어화하여 제한할 필요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모든 상대적 언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하고 무엇인가를 전제하는 상대적 언어는 그런 절대적 언어가 선물한 의사소통 가능성 안에서, 그러나 그 가능성을 제한하고 왜곡하면서 성립한다. 문맥을 만들고 문법을 수립하면서, 지시관계를 확립하면서 절대적 언어를 상대화한다. 대상화하고 도구화하는 것, 그것이 자연언어의 탄생내력이다. 안정성과 도구성을 띤 자연언어는 절대적 언어의 외상적 폭력에 대한 반-폭력에서 유래한다."(김상환, 133쪽)

하지만 이렇듯 상대화된 언어, 상대적 언어는 메타-일상적 차원, 즉 초월론적인 사유의 지평에서는 불편하고 불충분한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제기되는 것이 자연언어에 대한 철학적 비판인 바, 그 비판과 극복은 두 갈래의 방향으로 진행된다. 한 갈래는 자연언어가 가진 의미의 모호성을 비판하면서 수학적인 인공언어를 설정하는 방향이고(구조주의나 분석철학), 다른 한 갈래는 자연언어가 가진 의미의 빈곤성을 비판하면서 시적 언어, 비유적 언어, 즉 상징언어를 전면화시키고자 하는 방향이다(니체 이후의 해체론). 전자는 자연언어에 남아있는 시적 언어의 잔재(찌꺼기)조차 말끔하게 제거하고자 하며, 후자는 '닳아빠진 동전'과도 같은 자연언어에 새로운 생명(=은유적 언어, 상징적 언어, 무의식의 언어)을 불어넣고자 한다.

전자에 해당하는 "구조주의는 어떤 변형된 이상언어론, 어떤 형식주의적 초월론이다. 구조주의의 핵심은 '시적이거나 사적이거나 모두 수적인 것이다'라는 명제로 집약된다. 그것은 디오니소스적 개방성을 인정하지 앟는, 다만 아폴론적 개방성 안에서만 이해된 언어관에 기초하는 이론이다. 여기서 시적인 것, 그 디오니소스적 개방성은 객관적 형식의 질서로 환원되어 버린다."(김상환, 147쪽) 포스트-구조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구조주의적 사유에서 배제되고 간과된 디오니소스적 개방성을 현실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언어적 심층에서의 맹목적인 우연과 의미의 모호성을 직시하고 긍정하는 것이다.

 

 

 

 

언어는 우리 존재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동일성도 거부한다. 오직 유일한 것은 영원회귀일 뿐. "<영원회귀>는 <동일한 것이> 회귀하는 것도 아니고, 동일한 것을 향하여 회귀하는 것도 아니다. <영원회귀>는 반복이며, 반복되는 것만이 생성되고 있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바로 삶의 다양한 모습이며, 우연이며, 맹목적이기도 한 반복과 차이에 대한 긍정인 것이다."(마루야마, 257쪽) "이러한 활동에 관여하는 인간의 기쁨은 최고의 힘을 향한 의지에 의해 <생성에 존재의 각인을 찍는 것>, 즉 카오스가 기호화하는 것에서 생기는 것인데, 동시에 우리는 이것이 <존재자>가 되어 정지하는 것도 항상 부정해야 한다. 말하자면, 이것은 시지포스적인 끝없는 운동의 반복이다."(263쪽) 때문에, 리차드 로티의 말을 빌면, 강한 인간 - 그것은 곧 강한 시인(strong poet)에 다름아니다...

03. 0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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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를 말하도록 하자. 니체에 대하여가 아니다.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보다 反니체적인 것이 있을까? 당신에 대한 사랑만큼 우스운 것이 또 있을까? 우리는 언제나 당신을 사랑할 뿐이다. 우리는 니체를 사랑할 수 있을 뿐이다. 니체에 대한 사랑은 이만 걷어치우도록! 하여 나는 한편의 시와 그 주석을 니체에게 바치기로 한다.

⁂ ⁂ ⁂

모든 것이 되기 위하여 더는
아무것도 될 수 없는 나는 나의 과거는 나의 하루는
미친 척한 찔레나무와 찔레나무 한 그루를 기어
올라가는 벌레 같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그건
미친 생각이다 나는 안다

간혹 어깨가 결린다 무거운
돈가방이라도 들고 어디론가 튀고 싶다
꿈이다 아랫배가 고파오고 기온이 떨어진다
모든 것은 꿈과 같다 어젯밤에 본 영화 속의
치킨처럼 목 잘리고 잘 구워진 치킨처럼
잘만 하면 너도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어
나는 결린 사람

나는 꿈에 자주 결석하고 애린에 물들지 않는
다 내가 무얼 할 수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표백된 영혼
나는 은근히 다리를 절면서
저 온갖 벌레 같은 인간들을 사랑한다
사랑하는 척한다
나는

미칠 지경이다
간혹 나는 사랑의 유언이며 시체가 아닐까
나는 벌레이기 때문이다 나는 기어이
기어오르고 싶다 자작나무 오동나무 오르지 못할 나무
내게 필요한 날들을 돈다발처럼 세어본다
꿈이다
내가 이 지구를 끌어당기는 힘

이걸 끌고 어디로 가나

어쩌면 이보다 편한 것이 없을 것이다
흥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없다
아무것도 될 수 없는 나는 나의 과거는 과거의 한 조각은
기온이 떨어지면 따스한 곳을 찾는 꿈처럼
무말랭이처럼 입을 다문다

미친 척한 찔레나무와 찔레나무 한 그루를 기어
올라가는 벌레와 꽁무니에 고무풍선처럼 매달린 지구에
생각만 미친다 미친 생각이다 그건

왜 간혹 나는 어깨가 결리는 것일까?

⁂ ⁂ ⁂

내가 무얼 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 믿음에서부터 우리의 배움은 시작되어야 하리라. 이것이 나이 서른에 내가 배운 것이며 맨먼저 그대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의 몰락(Untergang)은 시작된다.

내가 꿈에 자주 결석하고 애린에 물들지 않는 것은 내가 결린 사람이기 때문이다. 간혹 주체하지 못할 애린에 빠져 어디론가 튀고 싶어하는 것은 내가 결린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자신의 존재조건을 극복하고 넘어가는 사람(Űber-mensch)이 아니라 그것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Unter-mensch)이다. 이걸 구상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높이뛰기나 허들(장애물) 경기를 떠올리면 된다. 넘어지는 사람도 생의 정점에서는 한순간 넘어가는 사람 못지않은 날렵한 동작을 취한다. 그리고는 거의 넘어갈 뻔한다. 그러나 그게 전부이다. 넘어지는 사람은 여린 마음에 한 뼘만큼 이 지상의 중력에 굴복하는 것이며, 그래서 결국은 넘어가는 일 대신에 걸려 넘어져 주저앉는 일을 자신의 숙명으로 선택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는 것이다. “내 이럴 줄 알았어. 나는 내가 무얼 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아.”결린, 기어이 걸린 사람.

결린 사람은 기어이 기어오르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오르지 못할 나무를 기어이 기어오르(려)는 그는 마치 시지프의 운명처럼 그것이 헛되고 헛되다는 걸 안다. 하지만 이렇듯 명징한 의식 속에서도 자신도 모르는 힘에 이끌려 그는 이 헛된 수난에 입문하게 된다. 편안히 나자빠져 있던 그가 문득 기어오르는 일이 혹 자기 생의 소명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이 의문에 걸려들어 걸려 넘어진 이후의 삶은 이미 종친 삶이다. 그는 이미 사랑의 시체인 것이며 고작해야 사랑의 유언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와는 다른 삶이 가능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또한 위대한 삶이기도 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점은 인간은 다리이지 목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인간이 가진 사랑받을 수 있는 점은, 그가 <과도Űbergang>이며 <몰락Untergang>이라는 점이다. 나는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면 살 줄을 모르는 사람을 사랑한다.(...) 인식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을, 그리고 언젠가는 초인이 살 수 있도록 인식하고자 하는 사람을 나는 사랑한다.(...)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서 모든 것들이 자기 내부에 들어올 수 있도록 영혼이 넘쳐흐르는 사람을 나는 사랑한다. 그렇게 하여 모든 것이 그의 몰락이 되는 것이다.”(최승자 옮김)


 

 

 

하여 우리는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며, 모든 몰락하는 것들에 연민과 우정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거 말고는 도대체가 더 적을 말도 없는 무능력한 나로서는 그저 두 권의 책을 소개하는 걸로 나의 몰락을 대신하고자 한다. 나는 다리이지 목표가 아니다. 나를 통과해서 읽어야 책은 고병권의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그린비)와 에른스트 벨러의 <데리다-니체 니체-데리다>(책세상)이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니체와의 우정을 제안한다. 해서, 내가 할일은 끝났다. 더는 할만한 일도 없지만...

2003. 0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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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들을 뒤적이다가 10년도 더 전에 쓴 글 중의 일부를 여기에 옮겨 놓는다. 오랜만에 읽어보니까 '격세지감'이 느껴지긴 하지만...

1.
바람도 없는데 꽃이 하나 나무에서 떨어진다. 그것을 주워 손바닥에 얹어놓고 바라보면 바르르 꽃이 훈김에 떤다. 화분도 난다. 꽃이여!”라고 내가 부르면, 그것은 내 손바닥에서 어디론지 까마득히 떨어져 간다./ 지금, 한 나무의 변두리에 뭐라고 이름도 없는 것이 와서 가만히 머문다. (김춘수, <꽃2>)

이 시는 김춘수의 다른 초기시들과 마찬가지로 인식행위, 곧 명명행위의 어려움을 주제로 하고 있다. 우리는 함부로 대상을 인식, 혹은 소유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시들에서 꽃은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되고 “얼굴을 가린 신부”(<꽃을 위한 서시>)가 된다. 우리는 이 꽃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이름을 불러주고 싶지만, 사랑하고 싶지만, 그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신부는 언제라도 “떨어져 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 시의 마지막 두 행에서 내밀한 고통이 느껴지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그 고통은 불가능한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그 불가능한 사랑을 우리가 끝까지 밀고 나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2.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이성복의 <남해 금산>. 이 시는 사랑의 운명, 즉 필연적인 결렬과 파국을 간명하게 그려내고 있다. 나의 사랑은 ‘한 여자’를 ‘그 여자’로, 다시 말해 의미있는 존재로 만들지만, 그 의미란 자의적인 것이기 때문에 결코 영속적이지 않다. 이것은 사랑이란 의미관계가 상호주관성에 바탕한 때문이기도 하다. 오롯한 주관성(에고)들의 밀월은 서로의 주관성이 해소․소멸되어 버리지 않는 한 너무나도 뻔한 결말에 봉착하고 만다. 사랑은 결국 ‘나 혼자 있음’을 확인하는 작업에 귀착되고 마는 것이다.

3.
물론 생존기계로서의 인간은 종족보존이라는 유전적 사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남녀 간의 짝짓기가 가능하려면 이 건장한 두 기계가 제대로 작동해야만 한다. 해서 대뇌에서는 두 기계의 원활한 접촉을 위해 사랑의 감정을 유발하는 호르몬(근래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도파민, PEA 등의 호르몬으로 구성된 ‘암페타민’이라는 중추신경 각성제가 작용한다)을 내보낸다. 여기까지는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 정작 문제는 필요 이상의 호르몬이 분비되는 경우이다. 이런 류의 사랑은 감정의 질병, 좋게 말해서 감정의 사치임을 면치 못한다. 방법은 자신을 제어하는 수밖에 없다(사실 나는 어떤 류의 바이러스가 이 질병의 주범인지는 언젠가 밝혀지리라 믿는다).

4.
결국 우리의 계산적인 두뇌(지능)를 믿는 도리밖에 없다. 여기서는 모범적인 두 가지 사례를 소개하기로 한다. ①은 정현종의 <그 여자의 울음은 내 귀를 지나서도 변함없이 울음의 왕국에 있다>이고 ②는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 둘째 단락이다.

① 나는 그 여자가 혼자
있을 때도 울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내가 혼자 있을 때 그 여자의
울음을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 여자의 울음은 끝까지
자기의 것이고 자기의 왕국임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그러나 그 여자의 울음을 듣는
내 귀를 사랑한다

②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①에서 “그 여자의 울음”이 나와 무관한, 그래서 적대적일 수 있는 것임은 우리가 줄곧 확인해온 바다. 그럼에도 그 울음의 유혹은 뿌리치기가 힘들다. 이 난국을 시적 화자는 “내 귀”를 사랑하는 것으로 극복해낸다. 귀를 너무 사랑해서 잘라내는 일만 없다면 그럭저럭 무난한 방법이지 싶다. ②는 아름답다. “내 사랑”의 종말을 믿는 것은 비극적이지만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일시적인 사랑의 유혹을 시적 화자는 견고한 “기다림의 자세”로 극복해낸다. 이런 건 배워둬야 한다! 그래도 당신이 입맛을 다시고 있다면, 오호 애재라, 우리는 갈 데까지 가는 수밖에.

5.
너의, 살 속으로 들어간다. 투명한 너의 몸이 나를 감싼다. 나를 보태고도 넘치지 않는 너의 몸! 찢어지는 아픔도 피 흐르는 고통도 없는 너의 몸 속에서 나는 숨이 가쁘다. 호흡이 곤란하다. 내가 나의 몸으로 남아 있으려고 몸부림칠수록 숨은 점점 끊어져 오고 네 몸은 내 몸을 틈없이 너무나도 꼭 맞게 마신다.
  네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너는 내 속으로 들어왔었다. 그걸 알았을 때 내 몸은 네 속에서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나를, 내 몸을 찾을 수 있을까? 너를 다 퍼내고 남은 발라진 생선가시일까? 내 몸은, 네 몸이 증발하고 남은 얼룩일까? 너의 살 속으로 들어갈 때 이미 나는 네 몸에 젖어 있었다. 물 속의 물방울이여.

채호기의 <물 속의 물방울>. 결국 당신은 보게 된다. “발라진 생선가시”로, “얼룩”으로 남은 자신의 모습을!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나는 당신의 생이 ‘지독한 사랑’에 거덜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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