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즉 2005년에 개최되는 프랑크푸르트도서전에서 한국은 주빈국 역할을 하게 된다. 그 준비의 일환으로 얼마전 ‘한국의 책 100권(종)’이 발표되었다. 당초 ‘한국의 명저(베스트) 100권’을 엄선할 예정이었다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그냥 100권’이 돼 버렸다. 놀라운 건 이 100권의 책을 1년 안에 번역 출간한다는 것. 선정위원회 황지우 위원장의 표현을 빌면, ‘문화의 삼풍백화점’이 우려되지만, “불가사의한 순발력과 저력에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고. 해서 우리도 더불어 놀라고, 우려하고, 기대하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이런 류의 호들갑을 통해서라도, 우리의 출판/번역 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지원이 배가될 수 있다면, 크게 나무랄 일은 아니라고 본다. 내가 관심을 갖는 쪽은 시와 철학 분야인데, 먼저 기존에 많이 번역된 시인/작가들을 제외한다는 방침하에 선정된 시집들은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민음사), 신경림의 <농무>(창작과비평사), 오규원의 <사랑의 감옥>(문학과지성사), 이성복의 <남해금산>(문학과지성사), 천상병의 <주막에서>(민음사), 그리고 최승호의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열림원)로서 모두 7권이다.

아쉬운 것은 이들 시집들이 모두 독어(김수영, 신경림, 오규원, 천상병), 스페인어(기형도, 최승호), 프랑스어(이성복)로 번역되기 때문에, 내가 직접 읽어볼 수 없다는 것(나는 김소월, 서정주, 김춘수, 김지하 등의 영역시집과 <님의 침묵>의 체코어역 시집을 갖고 있다). 짐작컨대, 이성복이 직접 번역에 간여할 듯한 <남해금산>이 가장 신뢰할 만하지 않을까 싶은데, 읽어보고 싶은 시집은 스페인어역 <입 속의 검은 잎>이다.

철학쪽으로 선정된 책들은 대개 최근에 나온 책들이다. 김영두의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소나무)가 작년에 나온 책이고, 이대출판부에서 나온 <동아시아여성의 기원>도 재작년 연말에 나온 것이며, 이승환 교수의 <유교 담론의 지형학>(푸른숲)은 불과 지난 1월에 나온 책이다. 아마도 내용과 더불어 번역의 용이성이 고려된 선정인 듯하다.하지만, 재미철학자인 이광세 교수의 <동양과 서양, 두 지평선의 융합>(길)에 실린 글들은 대개 영어로 먼저 씌어진 걸로 아는데, 영어로 번역한다고 하니까 좀 어리둥절하다. 역시 영어로 (아마도 먼저) 씌어진 김재권 교수의 <심리철학>(철학과현실사)처럼 독어로 옮겨진다면 모를까.

철학분야 선정 14권의 책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고미숙의 <열하일기 -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그린비)와 <니체가 뒤흔든 철학 100년>(민음사)이다. 얼마전 ‘회사원’ 강유원씨로부터 모욕에 가까운 비난을 받은바 있는 <열하일기>는 프랑스어로 번역되는데, ‘들뢰즈의 언어’로 번역된다고 하니까 현지인들에게 좀 흥미를 끌지도 모르겠다(‘박지원의 언어’는 누가 번역할는지 궁금하지만). <니체>는 당당하게 독어로 번역되는데, 현단계 한국의 서양철학 연구수준을 대표할 만한 책으로 선정된 듯하다(이 대표성에 대해서는 비판의 여론도 없지 않지만). 번역에는 아마도 독일철학 박사들이 여럿 동원되어야 할 듯하다...

비록 관료적인 ‘한건주의’식의 번역사업이긴 하지만, 우려보다는 기대를 충족시켜주기를 바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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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3-16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대할 수 있을지 정말 우려되는군요. 번역의 질이 좋다고 해도, 몇몇 책들은 그 내용으로 비아냥이냐 받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로쟈 2004-03-17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기대할 건, '불가사의한 저력'인 것이죠. '비아냥' 정도의 반응도 '반응'아닐까요? 제 짐작엔, 그냥 정적 속에 파묻힐 것 같은데...

포월 2004-03-28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분야 보다 철학 분야가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전공 탓보다 어이없는 탓이 크겠습니다. [열하일기..]는 사실 굳이 경직된 태도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철학적인 것(?)으로 봐줄만한 것인지 언제나 의심스러웠습니다. [니체] 역시 실린 논문들의 수준이 매우 고르지 않아 부적절해 보입니다. 이런 책이 포함되었다는게 아무리 학문과 현실의 논리가 얼마간은 분리되어있다고 하더라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모욕감을 줄 수도 있는 듯 합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어떤 반응이 나오건 상관없이...
 

 

 

  

 

오늘자(2003.11.1) 한겨레의 <책과사람>란에 고정칼럼인 '김재기의 책읽기'는 데즈먼드 모리스의 <털없는 원숭이>를 다루고 있다. 모리스는 영국의 저명한 동물행동학자로서(그는 노벨상 수상자인 니코 틴버겐의 제자이다) 인간을 대상으로한 대중적인 동물행동학 저서들로 유명하다. 물론 우리에게도 꽤 많은 책들이 번역 소개돼 있다(한 가지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굉장히 재미있는 그의 자서전이 절판된 지 오래됐다는 점이다. 김석희 번역이니까 번역도 날림이 아닌데. 기본 부수 이상은 팔릴 만한 책이 사장돼 있다는 건 좀 안타까운 일이다. 내 기억에 원제는 '동물들과의 나날'인데, 우리말 제목은 촌스럽게도 '옷을 입은 원숭이'였다. *<나의 유쾌한 동물 이야기>로 재출간됐다).

칼럼의 필자는 철학자로서 '동물+알파'로서의 인간 공식에서 동물(성)에만 초점을 맞추는 동물행동학이나 이후의 사회생물학(그리고 진화심리학)에 대해서 불편한 심정을 숨기지 않는데(그 불편함을 가중시키는 것이 이러한 책들의 '재미'이다), 칼럼의 마지막 문단은 이렇게 돼 있다.

"인간을 둘러싼 다양한 인문학적 담론들을 실증적인 생물학적 탐구로 대체할 수 있다고 믿는 사회생물학의 오만은 유전자의 해독이 모든 수수께끼를 풀어줄 것이라는 망상처럼 해롭고 위험하다. 또 그것은 성경의 자구가 모든 지적 탐구를 대신해야 한다고 믿었던 낡은 신학의 강요만큼이나 폭력적이기도 하다. 인간에 대한 생물학적 탐구는 자기자리를 지켜야 한다. 그 어떤 진리도 한계를 벗어나면 오류가 된다는 변증법의 지침이 여기서도 필요하지 않을까?"

사회생물학이란 사회성 동물들에 대한 진화론적 행동과학이다. 그리고 인간이 사회성 동물의 일종인 이상, 그 사회적 행동의 많은 부분이 사회생물학에 의해 해명될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창시자인 에드워드 윌슨도 강조하고 있듯이,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은 다양성이며, 그것은 환경에 대한 다양한 적응기제의 산물이다. 때문에 리처드 도킨스 같은 경우도 인간에게서 생물학적 유전자(Gene)과 대비되는 문화적 유전자(Meme)가 갖는 중요성을 강조한다.

칼럼 필자의 오류는 사회생물학을 몇몇 테제적 주장으로 단순화시켜서, 그것을 모든 인문학적 담론과 모든 지적 탐구를 대체하고자 하는 오만한 주장으로 환원시킨 데 있다. '동물+알파'에서 알파는 동물성에 부가된 것이지, 결코 그것과 독립적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바람직한 철학적 태도는, 칸트가 뉴턴의 물리학에 대해서 그랬듯이, 현대 생물학의이론과 주장들을 이해/소화해서 그것이 갖는 철학적 함의를 반성하는 일이다.

그건 분자생물학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필자는 사회생물학과 분자생물학을 동급으로 취급하고 있는데, 사실 둘의 전제는 많이 다르며 사이가 그다지 좋은 것도 아니다. 물론 몇몇 유전학자들은 유전자결정론식의 주장들을 하지만, 그것을 문자 그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오늘날의 분자생물학은 인간이 유전자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더 지지하는 듯하다(게놈 프로젝트 결과가 말해주듯이, 유전자의 위치정보는 그 복잡한 '기능작용'에 비하면 사소하다). 따라서 '낡은 신학' 어쩌구 하는 논리는 매카시즘적인 배제의 논리일 따름이다.

모든 지적 탐구에 대해서 폭력적인 전횡을 일삼아온 것은 사실 철학적 담론이었다. 물리학과 심리학에서의 '혁명' 이후에 철학이 차츰 분수에 맞게 '언어' 분석에나 몰두해 온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따라서 그러한 자기 자리지킴에의 요구가 향해야 하는 것은 생물학 '혁명' 이후의 철학이지 생물학이 아니다.

이번에 방한했던 지젝의 강연문 중 "유전공학에서 정신분석학으로"를 읽고 감화를 받은 적이 있는데, 지젝은 유전공학과 인지과학의 최신 성과들과 쟁점들을 섭렵하면서 그것이 정신분석과 어떻게 접속될 수 있는지, 정신분석학적으로 어떻게 재독해될 수 있는지를 다루었다(덕분에 나는 스티븐 핀커의 책을 여러 권 샀다, 살 수밖에 없었다). 철학의 '낡은 경전들'에 대한 자구풀이로 철학을 대신하면서 "그 어떤 진리도 한계를 벗어나면 오류"가 된다고 변명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그 제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해야 할 일들과 읽어야 할 책들은 산더미이다.

도전은 거부되거나 회피되어서는 곤란하다. 사회생물학(진화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은 철학에 대한, 인간학적 담론에 있어서 철학의 권위와 우선성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다(라캉은 정신분석학을 통해서 철학을 해소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이 도전에 제대로 맞서는 일은 '적'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나는 제자리에 있을 테니까, 너도 제자리에 있어라"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형적인 복지부동의 자세이다. 그러한 자세로는 동물성이 인간의 영혼을 어떻게 침식하는지, 우리는 왜 맨날 이 모양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제 필요한 것은 '영혼의 담론'만으로 인간을 논의해왔던,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논의만으로 사회적 기득권을 향유해 왔던 이들이(철학교수들은 그런 점에서 목사들과 상통한다) 물정을 좀 알고, 정신을 차리는 일이다. 게으른 것은 자유이지만, 그것을 현학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보기에 흉하다...

03. 1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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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3-26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의 유쾌한 동물 이야기'를 읽다가 하도 재미있어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읽었나 보려고 들어왔더니, 역시나 '로쟈와 나귀'(나귀를 몰고다니는 로쟈의 모습, 아니면 로쟈를 끌고다니는 나귀의 그림이 연상된다는, 하여간 제 이미지-세계 속에서는 짝을 이룰 법한 두 대상)의 글들이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벌써 몇년 지난 글인데도 관점이 뚜렷해서 '감화'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젝한테도 고마워해야겠군요)

아마도, 철학하는 사람들이 과학을 섭렵하는 속도보다 과학하는 사람들이 철학을 흡수하는 속도가 더 빠를 듯 합니다.
 

조금 늦게 출근해서 점심을 먹고 나서야 인터넷을 둘러보는데(*이 글은 2003년말에 씌어졌다), 미디어다음의 메인 뉴스가 “여배우 매염방 암으로 사망”이다. 그녀가 암투병중이라는 얘기는 오래전에 흘깃 지나가면서 들은 거 같은데, 그럼에도 2003년을 불과 이틀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까 갑작스럽다. 지난번 장국영의 자살에 이은 매염방(Anita Mui)의 죽음으로 이들 홍콩의 가수이자 배우들을 좋아했던 이들에게 올해는 ‘최악의 해’로 기억될 모양이다.

 

 

 

 

장국영이나 매염방의 열혈팬은 아니지만, 나는 그들의 음악, 특히 영화주제가들을 좋아한다. 자신이 주연도 맡았던 영화의 주제가로 장국영이 부른 <천녀유혼>과 <영웅본색3>의 주제가로 매염방이 부른 <석양의 노래(夕陽之歌)>가 그것들이다(나는 그 노래들을 들으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 주연으로 출연했던 관금붕의 <인지구>를 빼놓을 수 없다(이 영화로 매염방은 대만의 금마장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후에 장국영이 <아비정전> <동사서독> <해피 투게더> 등 왕가위 감독의 영화 여러 편에서 최고의 연기를 선보인데 반해, 매염방은 몇몇 무협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지만(그녀는 연기력에 비해서 좋은 영화를 만나지 못했다), 재주 많은 두 사람이 홍콩 연예계의 한 시대뿐만 아니라, 우리 세대(흔히 386이라고 부르는)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있다.



나에게 매염방은 개인적으로 한 친구에 대한 기억과 연결돼 있다. 그 친구는 사실상 나에게 매염방이란 배우의 존재 자체를 각인시켜준바, 언젠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가 (나로선 이외였지만) 매염방이라고 했다(그때 나는 아마도 임청하를 좋아하는 배우로 들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입 밖에 내진 않았는지도). 그러면서 그 친구가 내세운 이유는 그녀의 도톰한 입술이었다(나는 턱이 야무진 배우를 좋아한다. 임청하나 애슐리 주드처럼).

내가 갖고 있는 유일한 매염방 음반(테입)은 1989년에 나온 <브라질>이고, 커버에는 예의 게슴츠레한 눈빛과 도톰한 입술의 그녀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지금은 음반을 사는 일이 아주 드물지만, 그때만 해도 한번 산 테입은 거의 닳을 정도로 들었고, 매염방의 것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음반은 A면(The Bright Side)과 B면(The Blues Side)이 각기 다른 주제로 돼 있는데, A면의 첫곡이 <여름날의 사랑(夏日戀人/ Summer Lover)>이고, B면의 첫곡이 바로 <석양의 노래(Sunset Melody)>이다. 매염방과 더불어, 어느덧 우리 인생의 여름날들은 다 저물어 간 듯하다. 하지만, 그녀가 부르는 <석양의 노래>는 얼마나 박력 있고 장쾌한가! 나는 그녀가 암과의 사투 속에서도 그러한 의연함을 지켜갔으리라고 믿고 싶다.

매염방을 좋아했던 친구는 이후에 입술이 도톰하지는 않아도 매염방만큼 훤칠한 미인을 만나서 결혼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감쪽같이 숨겨왔던 자신의 배우자감을 처음 내게 소개하면서 의기양양해 하던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 그가 지난봄 끄트머리에 세상을 버렸다. 모든 일에 자신감을 잃고, 우울해 하던 그를, 한동안 자주 보지 못하던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내가 그를 다시 찾았을 때, 그는 더 이상 같은 하늘 아래 있지 않았다. 그가 마지막 고통스런 시간들을 보내고 있을 때, (나를 포함하여) 세상 그 무엇도/누구도 그의 의지가 되어줄 수 없었다는 것이 슬프고 안타깝고 아쉽다. 그는 의연했던 것일까, 어리석었던 것일까?..

 

 

 

 

지난주말에 산 정현종의 산문집 <날아라 버스야>에 실린 ‘숨막히는 진정성의 시: 바예호 읽기’를 읽으며, 오래 잊고 있었던 이 페루의 시인 세사르 바예호(1892-1938)를 다시 떠올렸다. 그의 시선집 <희망에 대해 말씀드리지요>(문학과지성사)가 바로 5년 전인 1998년 12월에 나왔었고, 나는 그해 겨울을 레바나스를 읽으며, 바예호를 읊조리며 보냈다(나는 스페인어권 시인들 가운데 미겔 에르난데스와 바예호를 좋아한다). 평생을 경제적 고통과 병마로 시달리다가 죽은 시인 바예호는 자신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털어놓는다.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라고 정의하는 그의 시들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적은 없다...”이다. “호이 메 구스타 라 비다 무초 메노스(Hoy me gusta la vida mucho menos)...” 그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적은 없다.
항상 산다는 것이 좋았었는데, 늘 그렇게 말해왔는데.
내 전신을 이리저리 만지면서, 내 말 뒤에 숨어 있는
혀에 한 방을 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리고 이렇게 끝난다.

엎어져서라도 어쨌든 산다는 것은 늘 기분 좋은 일일 거야.
“그리도 많이 살았건만 결코 살지 않았다니! 그리도 많은
세월이었건만 늘, 언제나, 항상, 항시 세월이 기다린다니!”
이렇게 나는 늘 말해왔고 지금도 말하니 말이다.

Hoy me gusta la vida mucho menos,
pero siempre me gusta vivir: ya lo decía.
Casi toqué la parte de mi todo y me contuve
con un tiro en la lengua detrás de mi palabra.

Hoy me palpo el mentón en retirada
y en estos momentáneos pantalones yo me digo:
¡Tánta vida y jamás!
¡Tántos años y siempre mis semanas!...
Mis padres enterrados con su piedra
y su triste estirón que no ha acabado;
de cuerpo entero hermanos, mis hermanos,
y, en fin, mi ser parado y en chaleco.

Me gusta la vida enormemente
pero, desde luego,
con mi muerte querida y mi café
y viendo los castaños frondosos de París
y diciendo:
Es un ojo éste, aquél; una frente ésta, aquélla... Y repitiendo:
¡Tánta vida y jamás me falla la tonada!
¡Tántos años y siempre, siempre, siempre!

Dije chaleco, dije
todo, parte, ansia, dije casi, por no llorar.
Que es verdad que sufrí en aquel hospital que queda al lado
y está bien y está mal haber mirado
de abajo para arriba mi organismo.

Me gustará vivir siempre, así fuese de barriga,
porque, como iba diciendo y lo repito,
¡tánta vida y jamás! ¡Y tántos años,
y siempre, mucho siempre, siempre, siempre!



한때 인생이 아주 싫었던 날들에 나는 이 시를 읽으며 버텼다. 에밀 시오랑의 말대로, 자살에 대한 관념은 자살을 유예시킨다.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적은 없다!”고 투덜거리면, 어느새 삶은 그럭저럭 살 만한 것이 된다. 그래서 말하게 된다. “엎어져서라도 어쨌든 산다는 것은 늘 기분 좋은 일일 거야.” 내가 지난봄에 그 친구에게 바예호를 읽어주었더라면, 사정은 달라질 수 있었을까?

한해가 가고 있다. 하지만, 늘, 언제나 항상, 항시 또 다른 한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건 산 자들의 몫이다. 저무는 해에 삶을 놓음으로써 자유를 얻은 모든 이들의 명복을 빈다. 내 친구의 명복을 빌고, 매염방의 명복을 빈다(이 도톰한 여가수 덕분에 그 친구가 좀 덜 심심할까?).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죽은 어린 남매의 명복을 빈다. 전철에 몸을 던져 우리가 한국인임을 부끄럽게 한, 한 외국인 노동자의 명복을 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명복을 빈다. 그리고, 지진으로 숨진 수만의 이란 사람들...

바예호의 사후에 발표된 시들 가운데 한편을 여기에 옮겨놓는다.

전투가 끝나고,
한 사람이 죽은 전사에게 다가왔습니다.
“죽지 말아!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러나, 죽은 이는 그냥 죽어갑니다.

두 사람이 와서 말했습니다.
“우리를 두고 가지마! 힘을 내! 다시 살아나!”
그러나, 죽은 이는 그냥 죽어갑니다.

스물, 백, 천, 오십만의 사람들이 와서 절규합니다.
“이렇게도 많은 사랑도 죽음 앞에서는 힘이 없구나!”
그러나, 죽은 이는 그냥 죽어갑니다.

수백만 명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애원했습니다.
“형제여, 여기 있어줘!”
그러나, 죽은 이는 그냥 죽어갑니다.

그러자, 전세계 만민이 몰려와 그를 에워쌌습니다.
슬픈 시신은 감동이 되어 그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나
맨 처음에 온 사람을 껴안았습니다. 그리고 걸어갔습니다.

- <스페인이여! 나에게서 이 잔을 멀리해다오.12>

2003.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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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7장이다. 내가 보기에, 지젝의 소프트 버전처럼 보이는 이 책에서 살레클의 변별성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5장과 7장이다. 그녀는 포스트모던 전위예술에 대해 넓은 안목과 이해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7장에서는 여성의 음핵절제와 피터 그리너웨이의 <필로우북>과 함께 ‘바디 래디컬’ 그룹의 작업 등이 분석되고 있다(음핵절제를 지칭하는 말은 ‘여성 할례’이지만,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의 경우에도 이상할 만큼 ‘할례’라는 용어가 번역에서는 기피되고 있다).

먼저 226쪽. ‘신체 채색’은 물론 ‘바디 페인팅body painting’의 번역인데, ‘신체 채색’이란 말이 오히려 생소하다. 외국어에 대한 혐오에서가 아니라면(그럴리는 없어 보이는데), 굳이 더 생소한 번역어를 선택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거기에 무슨 ‘향략’(역자의 ‘향유’)이 있는 것인지?

-233쪽. ‘여성적 수줍음female shyness’은 ‘여성의 수줍음’이라고 하는 게 더 나을 듯하다. ‘-적’이란 말은 다른 말로 대체가능할 경우, 풀어주는 것이 읽기에 더 편하다. 또 ‘여성적 수줍음’이란 표현은 ‘남성적 수줍음’을 연상시키는데, 프로이트가 얘기하는 것은 여성의 고유한 특징으로서의 수줍음이므로, ‘여성의 수줍음’이라고 해주고 싶다.

-234쪽의 둘째줄. ‘남근 기관의 부재’에서 ‘부재’는 ‘lack’의 역어이다. 오역이라는 건 아니지만, 다른 곳에서는 (그리고 일반적으로) ‘결여’라고 번역되는 단어가 유독 여기서만 ‘부재’로 번역되었다. 바로 앞뒤로도 ‘결여’라고 번역돼 있으므로, 일관성을 희생시킬 만한 이유는 없어 보인다.

-242쪽 맨아래. “출판업자는 매우 무례했으며, 아버지에게 몸을 내맡길 것을 요구했다.” 영화 <필로우북>의 내용에 관한 것인데, 원문은 “The publisher was extremely rude and demanded sexual favors from the father.” 번역문은 sexual favor란 원뜻이 잘 드러나지 않는, 점잖은 번역이다. 그런 상황에서 쓰는 말은 ‘몸을 내맡기다’가 아니라, ‘몸을 대주다’이다.

-245쪽. 밥 플래니건이란 ‘공연 예술가’ 얘기인데, ‘공연 예술가’는 ‘퍼포먼스 예술가’로 바뀌어야 한다. 우리말의 ‘공연예술’은 연극이나 연주회를 다 포괄하는 말이며, 더 제한적인 의미로 사용할 때는 ‘퍼포먼스’라고 해야 한다(255쪽의 올란의 ‘공연’도 마찬가지이다). 바로 다음, “그의 외음부는 절단된다”에서도, 남자의 경우는 보통 ‘생식기’라고 하는 것인데, ‘외음부’란 역어는 상당히 낯설다(남성의 경우에도 ‘음부’란 말을 쓰는가? 여성의 ‘외음부’에 해당하는 것은 남성의 ‘음경’, 곧 ‘생식기’이다).

-252쪽. 바디 래디컬 그룹에 대한 얘기인데, 7행 “거기서 발생하는 것은 말 그대로의 것이다.”도 정확한 번역이라고 할 수 없다. 원문은 “What is happening is literal.”이며, 이에 대한 번역은 “거기서 일어나는 일은 말 그대로 해프닝이다” 정도이어야 한다. 'literal'이 ‘happening’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performance'를 ‘공연’이라고 하는 것까지야, 말릴 수 없다고 하더라도, ‘happening’을 ‘발생하는 것’으로 옮기는 것은 좀 심하다 싶다(‘해프닝’은 현대미술의 어엿한 한 장르이다).

-254쪽. ‘자본의 세계화(the globalization of capital)’를 역자는 ‘자본의 범역화’라고 옮기는데(271쪽에서도), 이미 통용되고 있는 말이 어디가 문제라는 것인지? ‘범역화’란 용어가 사회과학에서 통용되는 말인가? 내가 인터넷에서 찾아본 ‘범역화’의 유일한 용례는 다음과 같다: “문학에 대한 기존의 인식이 붕괴되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문학에도 ‘퓨전전의 시대’가 당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추세를 확인할 수 있는 현상은 장르 사이의 전통적인 관념이 빛을 잃고, 문학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범역화 되어가고 있는 점이다.” 역자의 고집이 기이하다고 할밖에.

-256쪽 중간 부분. “재생산은 재설계되고, 성관계는 주체와 기계 사이의 인터페이스로 대체된다.”(지나는 김에, ‘인터페이스’는 되는데, ‘퍼포먼스’나 ‘해프닝’은 왜 안되는가?) 첫번째 절에서(Reproduction is redesigned), 재생산은 재설계의 목적어가 아니므로(번역문은 그렇게 읽힌다), “재생산(=생식)은 재설계가 되고” 혹은 “재생산은 재설계로 바뀌고” 등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257족. ‘무제약적 자유의 가능성(unlimited possibilities of freedom)’은 ‘자유의 무한한 가능성(들)’로 바뀌어야 한다. 이어서 “자기-부과된 절제의 신체 예술(a body art of self-imposed cuts)”은 나라면, “바디 아트로서의 자해(적인 절단)”라고 하겠다.

-258쪽. 각주4) ‘이스람교’는 ‘이슬람교’의 오타이다.

-<페이스 오프>와 <가타카> 등의 영화를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는 결론의 경우에 새로운 건 없다. 굳이 한번더, 지적하자면, 279쪽에서 “그 순간 ‘쓰여지지 않기를 멈추지 않는다’로서 조음되는 성적 관계의 불가능성은...”에서 ‘조음되는’은 ‘말해지는’이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찾아보기. 번역본의 찾아보기는 가령, (ㄱ)에서 <강간살인>Lustmord이라는 작품명 다음에 괄호안에 넣은 작가명 홀저를 병기해주고, (ㅎ)에 가서, 다시 작가명, 홀저 제니(Hilzer, Jenny)와 작품명 <강간살인>을 써주고 있다. 이렇게 이중적으로 해줄 필요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한다면, 작가명 ‘O. 헨리’가 찾아보기에 빠져 있다. 참고로, 오. 헨리는 이번에 두툼한 작품선집이 새로 나왔는데, 살레클이 분석하고 있는 <기념물(Memento)>도 번역되었는지 모르겠다(목차에서 같은 제목의 작품은 눈에 띄지 않는다).

자, 이 정도면 이 다양한 사례(판본)들에 대한 풍성한 향연을 충분히 즐긴 것이라고 말하고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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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을 한일이니까 끝을 보기로 한다. 시인 황인숙의 표현을 빌면, '빚을 까자'! 근데, 내가 누구한테 빚을 지고 있는 것인지?...

-5장부터이다. 170쪽. 러시아의 행위예술가 쿨릭에 대한 장인데, 그가 전시장에서 개-쿨릭 노릇을 하던 중 관람객을 무는 바람에 경찰에 잡혀갔다. 하지만 풀려났다. "무엇 때문에 고발을 당한 것인지가 불분명했기 때문에 말이다." 해당 원문은 "Kulik was released, since it was unclear what he could be accused of."(104쪽) 역자는 이 수동문의 의미상 주어를 '관람객'(혹은 '전시회 조직위원')으로 봤는데, 나는 앞문장의 '경찰관(policemen)'이라고 본다. 즉 그를 무엇으로, 어떤 죄목으로 기소해야 할지가 불분명했기 때문에 그는 풀려난 것. 사람을 물었으니까 고발당한 이유는 분명하다. 하지만, 문제는 문 것이 인간-쿨릭이 아니라 개-쿨릭이었기 때문에, 형사상의 책임을 물을 수 있을지가 불분명한 것이다. 오역이랄 것도 없지만, 의미를 좀더 분명히 하자면 그렇다.

-171쪽. "어떤 이상적인 민주적 우주를 창조하는 하버마스적인 이상적 담화상황..." '이상적인 민주적 우주'란 'ideal democratic universe'이다. 역자는 하버마스의 소통이론을 우주적인 차원으로 격상시키는 데, 좀 과장이다. '이상적인 민주적 세계'라고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대개 'universe'의 일차적 의미는 '우주'가 아니라 '세계'이지만, 역자는 모든 경우에 일률적으로/자동적으로 '우주'라고 옮긴다. '상징적 우주' 정도까지는 비유적으로라도 말이 되지만, 하버마스와는 좀 안 맞는다는 게 내 생각이다. '미스 유니버스'를 '미스 우주'라고 부르는 게 어색한 것처럼.

-아래쪽에 "어떤 예술가들이 폭력과 파괴를 소통의 양태로서 사용할 때..."에서 소통의 양태는 'a mode of communication'이다. '양태'가 틀렸다는 건 아니지만, '소통의 방식'이 더 편안하지 않을까 한다. 'mode'는 무조적 '양태'라는 건, 'universe'는 무조건 '우주'라는 것만큼 뻑뻑하다.

-173쪽. 쿨릭의 협력자 '밀라 브레디키나Mila Bredikhina'는 러시아여자인 모양인데, '브레디히나'라고 읽어야 한다. 그리고, 아래의 'noosphere'는 흔히 '정신권', '정신계'라고 옮기는데('생물계biosphere' '기호계semiosphere'와 짝개념이다), 여기선 역자가 고른 '인지권'이란 역어도 적절해 보인다. 'nous'가 냄새맡는 능력에서 파생된 단어라고 하니까. 그렇다면, 개는 얼마나 탁월한 '정신적인' 동물인 것인가!

-174쪽. '생윤리학'은 'bioethics'의 역어인데, '생명윤리학'이라고 옮기는 게 낫다. '생윤리'에서의 '생'은 '생명'보다는 '인생'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179쪽. 중간에 '언어 속으로 입장할 때'에서 '입장'은 'entrance'의 역어인데, 나는 그것이 오역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진입'이라고 옮기는 건 어떨까라고 제안한다. 그리고 라캉네 개 이름 '저스틴Justine'은 프랑스 개니까 '쥐스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드 후작의 소설 제목이기도 한 것. '쥐스틴, 혹은 미덕의 불운'.

-180쪽. "라캉의 테제는 파블로프가 실제로 문자 이전에avant la lettre 구조주의자로 행동했다는 것이다."에서 불어 'avant la lettre'는 문자 그대로 '문자 이전에before the letter'란 뜻이 아니다. 숙어로 어떤 이름(명칭)으로 불리기 이전에란 뜻이다(웬만한 불어사전엔 다 나오는데). 따라서 본문은 "라캉의 테제는 파블로프가 구조주의자란 말이 생기기도 전에 이미 구조주의자로 행동했다는 것이다."로 옮겨져야 한다.

-그리고 6장. 192쪽에서 'corpus'를 '집성체'로 번역하고 원어를 병기함으로써 마치 중요한 단어처럼 과장됐다. 웬만한 개념어들에는 한자도 병기해주지 않는 역자로선 '파격적'인데, 그건 단지 corpus에 적당한 쉬운 말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성체'는 너무 낯선/어려운 말이다. 같은 의미라면, '모음집'(혹은 그냥 '모음')이라고 하는 것이 이해하기 쉽다. 영어의 'corpus'는 생각보다는 자주 쓰이는 단어이다.

-198쪽. 가운데에서 '이 적(適) 타자는..."할 때의 '적'은 당연히 'enemy'를 옮긴 말인데, 한자가 잘못 적혀 있다(골호안의 한자는 '적당하다'고 할 때 '맞을 적'자이다). 이건 생각할 여지없이 '적(敵)'으로 교정될 것으로 믿는다. 재미있는 실수이다.

-201쪽. 역자는 "saying is of the order of not-all"을 "말하는 것은 비-전체의 심급이다"라고 옮겼다. 'order'를 '심급'이라고 옮긴 것인데, 그렇게도 옮겨지는 것인지 궁금하다.

-203쪽. "언어는 세계를 대신할 뿐만 아니라 세계 속에서 작용한다."("Language not only represents the world, but acts in it.") 내 경우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아니지만, '대신하다'는 건, 물론 '표상하다' '재현하다'란 의미도 함축한다. 거기에 반대하진 않는다. 다만, '작용한다'는 '행동한다'와 좀더 경쟁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화행(speech act)이란 말도 있기 때문에, '언어가 행동한다'고 하더라도 이상한 번역은 아니다. '작용한다'란 뜻은 좀 약한 거 같다.

-같은 쪽에서. "그 대신 우리는, 잔여 속에서 바로 이 역사, 이 사회 상징적 투쟁의 적대가 기입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해야 한다."의 원문은 "Instead we must say that in the remainder it is the antagonism of this very history, the social symbolic struggle, that is inscribed.") 번역문은 '이 역사=이 사회 상징적 투쟁의적대'라고 오독하기 쉽다(나도 그렇게 읽었다). 우리말에서는 한 단어가 두 단어에 동시에 걸리는 경우, 반복해 주어야 깔끔하다. "이 역사의 적대, 이 사회 상징적 투쟁의 적대..."라는 식으로. 그리고 원문은 강조구문이므로, 의미를 좀더 살리자면, "그 잔여 속에 기입되는 것이 바로 이 역사..."라는 식으로 번역하는 게 나을 듯싶다.

-211쪽. "남자들이 이족 결혼 관계를 시장할 때..."에서 이족은 '異族'이란 뜻이다(그런 정도는 골호안에 넣어줄 수도 있을 텐데). 그리고 의미상 '이족간 결혼 관계'라고 하는 것이 좀더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

-213쪽 인용문. "평등의 급무는 '우리' 역사의, 우리가 속한 역사의 이 구역의 창조물이다."(The exigency of equality is a creation of our history, this segment of history to which we belong.") 번역문은 전형적인 번역투/직역투이다. 역자도 이런 번역문을 만나면 좀 찜짐할 것이다. '평등의 급무'라는 건, 평등을 중요하고 긴급한 지상과제로 설정한다는 것이다. 약간 의역하면, "평등에 대한 (과도한) 강조는 '우리의' 역사, 곧 역사의 한 마디로서 우리 시대가 창조해낸 산물이다."

-216쪽. "왜냐하면 우리가 실재를, 즉 사회가 그 둘레로 스스로 조직화하는 그 상징화불가능한 중핵을 이해하고자 할 때,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사회의 바로 그 중핵이기 때문이다." 첫번째 '중핵'은 'kernel'을 두번째 '중핵'은 'core'를 번역한 것이다. 둘은 구별해주지 않아도 되는 동의어인 것인지?

-217쪽. 헤겔의 'Sittlichkeit(인륜성)'을 원어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는데, 불친절한 일이다. '인륜성'이라고 옮기고 괄호안에 원어를 넣어주든가, 아니면 '지틀리히카이트'(맞나?)라고 음역해서 써줘야 한다.

-218쪽. "국가를 형성하는 국적들이 혼합되어 있는, 최근에 도가니melting pot 혹은 샐러드 접시salad bowl라고 불리는 미국은..."에서 '최근에'는 '샐러드 접시'에만 걸린다. 미국이란 나라가 '인종의 도가니'라고 불린 건 오래전부터의 일이고, 최근에 와서 '샐러드 접시'라고 불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가니로서의 미국, 혹은 최근에 불려지는 바대로 '샐러드 접시'로서의 미국은..."

-221쪽. 각주21) '이중적 속박'은 'double bind'의 역어인데, 그렇게 옮길 수도 있지만, 'doble bind'는 베이트슨의 용어로서 '이중구속'이라 번역되고(그의 '이중구속론', <마음의 생태학>), 이미 그렇게 굳어진 말이다.

-224쪽. 각주40) 인용문에서 "자신들이 정부와..."는 "자신들의 정부와..."의 오타이다('그들의 정부'라고 해야 더 자연스럽고)...

조금 쉬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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