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이어지는 내용이다. 어쨌든 독자로선 더 좋은 책을 읽을 권리가 있고, 나는 그런 권리를 포기하지 않겠다. 이런 식의 참견의 말을 거두지 않는 것은 그런 이유도 겸하고 있다.

-143쪽. “라캉에게 있어서 일차적으로 기억은 외상을, 즉 주체의 바로 그 존재가 집중되는 지점인 실재를 기억하지 않은 것과 관련이 있다.”는 “For Lacan, memory primarily has to do with not remembering the trauma, the real on which the subject centers his or her very being.”(86쪽)을 옮긴 것인데, 일단 ‘지점’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불필요한 말이다. 그리고 타동사 ‘center’도 ‘집중되는’이란 뜻보다는 ‘근거짓다’란 뜻으로 보인다. ‘기억하지 않은’이라고 과거형으로 옮긴 건 현재형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다시 옮기면, “라캉에게서 기억이란, 일차적으로 외상, 즉 주체가 자신의 존재 자체를 근거지우고 있는 실재를 기억하지 않는 것과 관계가 있다.” 약간 의역하면, “라캉에게서 기억이란 일차적으로 외상, 즉 실재를 기억하지 않는 것과 관계가 있는바, 이 실재는 주체가 자기 존재 자체를 근거지우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어지는 문장. “우리가 우리 이야기를 할 때 그것은 우리가 실재를 건드리는 지점이다. 거기서 우리의 말은 실패하지만, 결국 언제나 다시 외상으로 되돌아오고 만다. 그것을 조음할 수 없는 채로 말이다.” 원문은 이렇다: “When we tell our stories, it is the point at which we touch the real that our words fail, but fail so as to always come back to the trauma without being able to articulate it.”

여기서 ‘그것은’이라고 옮긴, ‘it’은 (내가 보기에) 강조구문의 가주어이기 때문에, 번역할 필요가 없다. 강조되는 것은 “the point at which we touch the real”이다. 즉 우리의 말이 실패하는 지점이 우리가 실재를 건드리는 지점이다. 말이 실패하는 지점이란 말로 표현되지 않는 어떤 지점이다. 역자는 강조구문의 접속사 ‘that’을 관계사로 보고 번역한 듯하다(그래서 'that'을 ‘거기서’라고 옮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상하다. 'that'이 'where'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다시 번역하면, “우리가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말로 잘 표현하지 못하는 지점이 바로 우리가 실재를 건드리는 지점이다. 하지만, 그렇게 실패함으로써 말로 표현하지 못한 채로 우리의 말은 언제나 그 외상으로 되돌아온다.”

-또 같은 쪽의 인용문에서. “다만 나중에 모든 것 속에서 다시금 그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의 원문은 “...if only to find itself again later in everything”인데, 역자는 'to find'란 부정사를 목적을 나타내는 용법의 것으로 봤는데, 이건 당연히 결과를 나타내는 용법의 To-부정사이다. ‘if ony’는 그냥 ‘only’의 뜻인바, 이 문장 전체는 ‘적합한 사유’(‘적절한/적당한 사고’라고 옮기고 싶다)가 “언제나 동일한 것을 회피”하지만, 결국엔 나중에 모든 것에서 그 자체와 대면하게 될 뿐이다, 란 뜻으로 나는 이해한다.

-역시 143쪽 맨마지막 문장에서. “이따금 무죄를 주장하는 죄수들은 그것에 대한 기억을 묻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에서 ‘이따금(occasionally)’이란 부사가 수식하는 것은 ‘주장하는’이 아니라, ‘묻고 있는’이다. 전체 원문은 이렇다: “Thus one can imagine that prisoners who do not talk about their crime and insist on their innocence occasionally bury their memory of it.”(87쪽) 사소하긴 한데, 내 생각에 ‘occasionally’가 ‘insist on’을 수식하려면, 뒤에 콤마(,)가 와야 하지 않을까 한다.

-145쪽. “따라서 그 주체에게 있어서(For the subject)”는 앞에서 ‘그 주체’를 적합하게 받을 만한 말이 없다. 나는 그것이 한정적인 주체가 아닌 일반적인 주체에 관한 거라고 생각한다. 그냥 “따라서, 주체에게 있어서”라고 옮겨져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같은 문장에서 “상징적 질서의 실존(the existence of the symbolic order)” 같은 경우, ‘existence’가 ‘실존’으로 번역되는 것은 오히려 제한적인(즉, 실존철학적인) 문맥에서인바, 그냥 ‘존재’라고 옮겨지는 것이 낫다. 역자는 한두 군데를 빼고서는 ‘existence’를 모두 ‘실존’이라고 옮겼는데(가령, 162쪽에서도), 사르트르식으로 말하면, ‘실존’은 의식을 가진 존재로서의 ‘대자적 존재’를, 하이데거식으로 말하면, ‘현존재’를 가리키는 말이므로(그는 ‘탈존’이란 용어도 쓰지만) 용례를 좀더 제한할 필요가 있다(사물들은 실존이 될 수 없다).

-147쪽. 차우셰스쿠의 공화국의 집이 오늘날 ‘민중의 집(People's House)’이라고 불린다는 내용인데, 이게 오역이란 얘기는 아니다. 문제는, 다른 곳에서 ‘People's House’는 ‘인민의 집’(153쪽)으로, ‘people’은 대개 ‘인민’으로 번역되고 있다는 점이다. 통일성을 위해서라면, ‘인민의 집’으로 바뀌어야 한다. 고유명사의 혼동된 표기는 흔히 공동번역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인데, 이 책 또한 그런 것인지?

-150쪽. ‘기표사슬’은 ‘signifying chain’의 번역인데, 어디에선가 한번 'chain of signifier'(기표의 사슬)란 표현이 나오는바, 그 둘이 같은 말인지 궁금하다. 대개 'signification'이 ‘의미작용’이라고 번역되므로, 그에 따라, ‘의미(화) 사슬’이나 ‘의미작용 사슬’ 정도로 옮겨져야 하지 않을까라는 게 내 생각이다(‘chain’은 흔히 ‘연쇄’라고도 옮겨진다.). <천개의 고원>의 역자처럼, 'signification'을 ‘기표작용’이라고 옮기지 않는다면.

-같은 문단에서. “그 사슬 너머인 ‘무로부터’ex nihilo라는 어떤 곳(기표 사슬은 바로 그곳에 정초하고 있으며 그곳에서 바로 그것 자체로서 절합된다)이 있다...” 원문은 “there is somewhere which is the beyond of that chain, the ex nihilo on which it is founded and is articulated as such.” 전체 문장이 길기 때문에 역자가 괄호안에 넣어 처리한 대목에서, as such를 역자는 ‘그것 자체로서’라고 옮겼는데, ‘그것 자체’는 흔히 명사 뒤에 'as such'가 나올 때 적합한 번역이고, 여기서는 보어로 쓰였기 때문에 ‘그러한 것으로서’, 즉 ‘기표 사슬로서’ 분절된다, 라고 해야 맞을 듯하다. 'articulate'의 번역은 ‘분절/절합하다’ 모두 가능하다. 단지 방향이 반대일 뿐인데, 어떤 연속체의 마디를 나누는 것이 ‘분절’이고, 나누어진 마디를 결합하는 것이 ‘절합’인바, 영어의 ‘articulation’은 이 두 가지 뜻을 동시에 표시한다.

-그런데, 몇 줄 아래에서는 ‘is articulated’가 다르게 번역되었다. “그것은 기표 사슬의 기능으로서만 정의될 수 있는 층위에서 조음된다.”라고 했는데, 여기서 ‘그것’은 ‘죽음충동’을 받는 말이므로, “죽음충동은... 조음된다”란 내용이다. ‘조음’이란 말은 음성학의 용어인데, 유의미한 소리를 (만들어)낸다는 뜻이다(그러니까 아주 제한적인 의미역을 갖는 단어이다). 그러한 뜻이라면, 그냥 ‘말해진다’가 낫고, 보다 포괄적인 뜻이라면, ‘분절된다’로 옮겨지는 것이 더 무난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153쪽 1행에서. ‘후-근대적 효과’는 ‘포스트모던적 효과(post-modern effect)’에 대한 억지스런 번역이다. 개그담에서도 현학적인 어휘로 자주 등장하던 ‘포스트-모던적’이란 말이 ‘후-근대적’이라고 옮겨지면, 그 말의 효과가 반감될 수밖에 없다. 예술/건축 쪽 분야 어떤 책에서도 포스트-모던을 ‘후-근대적’이라고 옮기지 않으며, 하나의 예술사조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을 ‘후근대주의’라고 번역하지 않는다. ‘하이패션’이란 말도 그냥 옮겨 쓰는 역자가 왜 이런 단어들에서만 결벽증을 발휘하는 것인지? 몇 줄 아래, ‘저속한 것’라고 옮긴 것도 그냥 ‘키치(kitsch)’라고 옮기든가 괄호 안에 병기해주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것도 어느 정도 친숙한 전문용어이기 때문이다. 키치미학을 ‘저속한 것의 미학’이라고 옮기지 않지 않는가?

-154쪽. ‘루마니아의 몰’ 절에서. “장소가 부착되어 있지 않은 도시”(a city without a place attached to it)란 말은 어색하다. ‘부착되어’란 말 때문이다. 같은 의미역에서 찾자면, ‘부속되어’ 정도로 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어지는 ‘도시 없는 궁전’은 ‘a city without a place’(장소 없는 도시)의 오역들이다. ‘place’를 자주 나오는 ‘palace’로 잘못 본 것이다.

-159쪽의 ‘차우셰스쿠의 땅(Ceausesculand)’은 ‘차우셰스쿠랜드’라고 옮기는 것이 낫다. ‘디즈니랜드’와 운을 맞춰서. 그리고 아랫줄의 ‘루마니아 마을 박물관Musium of Romanian Village’은 ‘루마니아 민속촌’혹은 '루마니아 민속박물관'이라고 하는 게 낫지 않을까?

-160쪽. “이와 유사하게 디즈니에게 있어서 큰 타자는 영화에서보다 완벽하게 실현되는 기술 세계였다.”에서 ‘기술 세계’도 역자의 결벽이 발휘된 예인데, ‘테크놀로지의 세계’(the world of technology)라 하는 게 더 자연스럽다. ‘테크노피아’도 ‘기술-유토피아’라고 번역해야 되는 게 아니라면.

-162쪽. 저자 살레클이 4장의 내용을 친절하게도 한 문장으로 요약하고 있는 대목: “루마니아 이야기의 비극은, 차우셰스쿠가 큰 타자는 한낱 상징적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으며, 동시에 사람들은 허구가 그들이 상상한 것보다 더 큰 힘을 그들에게 발휘한다는 것은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대구로 이루어진 문장인데, 역자는 차우셰스쿠와 대조되는 'the people'을 하필 여기서만 ‘인민들’이라고 하지 않고, ‘사람들’이라고 옮겼다(독재자의 짝은 ‘사람들’이 아니라 ‘인민들’이다). 아무래도 이 장은 복수의 역자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덧붙여, ‘동시에(while at the same time)’는 의미상 ‘반면에’가 더 적합하다.



-165쪽의 각주22)에서 ‘모스크바의 대학교 로모노소프’라고 한 것은 부정확한 표현이다. 우리말에서 ‘OO대학’이라고 하지 ‘대학OO’라고는 하지 않기 때문이다. 로모노소프는 1755년에 모스크바대학을 설립한 러시아 18세기 최대의 학자이다. 여기서 살레클이 비교하고 있는 것은 모스크바대학 본관건물인데(사진으로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다), 이 (학부)건물의 풀네임에 로모노소프란 이름이 들어간다. 차우셰스쿠 궁전과 외형을 비교해 보시길.

-167쪽. 각주34)에서. “우리의 사회주의 사회가 문명의 우월한 수준에 도달할 때”는 “우리의 사회주의 사회가 보다 높은 수준[단계]의 문명에 도달할 때”로 옮기고 싶고, “인간의 인격은 다면적으로 번창할 것이다”는 “다면적으로 풍성해질 것이다”가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인격이 번창한다?).

5장부터는 따로 시간을 내야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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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까지 한 두어 주 동안 살레클(*살레츨)을 읽었다. 다른 일들로 바빠서, 전철에서만 찔끔찔끔 읽는 바람에 시간이 오래 걸린 것인데, 무난한 번역이었기 때문에 읽는 일이 전혀 고역은 아니었다. 독후감은 바쁜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정리해볼 생각이지만, 그러기 전에, 번역과 관련하여 생각이 다른 부분이나 오역/실수에 해당하는 부분에 대해서 ‘마저’ 지적을 한다. 혹 개정판을 낸다면, 의견이 반영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라는 혼자만의 기대에 편승해서.

2장에서 7장까지, 그리고 결론까지 읽으면서 매끄럽지 못하거나 오역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은 1장에서만큼 두드러지진 않았다. 아마도 역자의 번역이 어느 정도에 궤도에 오른 때문이리라(실제로 2장 같은 경우는 원서를 거의 참조하지 않고서도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제부터의 지적은 애독자의 투정 같은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참고로, 요즘 하는 일이 학술지 편집 같은 것이기 때문에, 교정되어야 할 부분을 그냥 못 지나치는 것은 일종의 나의 ‘직업병’이기도 하다.

-81쪽 8행. ‘그는’은 ‘그/녀는’이다. “he or she”를 옮길 경우, 역자는 ‘그/녀’라고 표기해 왔는데, 여기서는 빠졌다.

-85쪽. 중간부분. “욕망이 끝없이 질문을 한다면, 충동은 질문이 멈추는 곳에서 관성을 내놓는다.” 원문은 “If desire constantly questions, drive presents an inertia where questioning stops.”(50쪽)이다. 매끄럽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건 두번째 절이다. 관계사 where가 받는 것이 inertia이며, 따라서 ‘질문이 멈추는 곳=관성’이다. “충동은 질문이 중단되는 관성을 내놓는다.” 정도로 옮겨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102쪽. “사이렌의 노래는 사이렌의 출현에 관한 노래가 출현하기 위해서는 멈춰야 한다”는 인용문에서 ‘출현’이 중복 번역되었다.

-103쪽. 5행의 ‘상징적인 것’은 흔히 ‘상징계’로 번역되는 ‘the symbolic’인데(물론 ‘상징적인 것’으로 번역하는 이도 있다), 역자가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인지 모르겠다. 거의 관례화된 용어인데... 그리고 하단의 ‘가희’는 'singer'를 번역한 것인데, ‘singer’는 일반적으로 뮤즈의 시종으로서의 ‘시인’을 지칭하는 말인데, 여성명사(‘가희’)로만 번역돼 있는 것이 조금 아쉽다.

-105쪽 인용문에서. “예술이 인식으로 간주되기를 포기하고..”는 “So long as past declines to pass as recognition...”을 옮긴 것인데, 'past'가 어떻게 ‘예술’이란 뜻을 가질 수 있는지 모르겠다. 실수가 아닐까 싶은데, 바로 다음 줄에서도 확고하게, “예술은 쾌락과 마찬가지로...”라고 옮긴다(여기선 대명사 ‘it’인데). 의역한 것인지?...

-112쪽 1행. “타자가 그녀를 접근불가능한 욕망의 대상으로서뿐만 아니라 향유의 대상으로 취급할 때”는 “when the Other takes her as object of jouissance and not simply as the inaccessible object of desire.”(67쪽)를 옮긴 것인데, 내가 보기엔, ‘대상으로서뿐만 아니라’가 아니라, 그냥 ‘(단순히) 접근불가능한 욕망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이다. 그리고, 오 헨리의 단편 이야기에서 브로드웨이의 ‘dancer’를 ‘무희’로 옮기는 것은 너무 점잖은 번역이다. 그냥 ‘댄서’가 낫다. 내용상 그녀가 추는 춤은 스트립쇼이거나 그와 비슷한 춤이기 때문이다. 이때의 ‘댄서’는 ‘댄서의 순정’이라고 할 때의 그 ‘댄서’이다(‘무희의 순정’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무희’는 발레리나 정도에 어울리는 말이다).

-117쪽. “(라캉은) 여성적 향유는 여자에게만 하나의 잠재성인 것임을 지적한다.”는 “Lacan points out that feminine jouissance is only a potentiality for woman...”(71쪽)을 옮긴 것인데, ‘only’가 수식하는 것은 ‘woman’이 아니라 ‘potentiality’이므로, 번역도 그에 맞게 수정되어야 한다.(라캉의 지적에 따르면, 여성적 향락은 여성에게서 단지 하나의 잠재성일 뿐이다.)

-124쪽. “나의 요점은 카프카가 오디세우스와 사이렌의 조우에 대한 표준적 판본에 근대주의적 비틀림을 제공한다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에서 ‘근대주의적 비틀림’은 ‘a modernist twist’를 옮긴 것인데, 여기서 ‘modernist’는 전근대주의의 짝개념으로서의 근대주의가 아니라 리얼리즘의 짝개념으로서의 모더니즘을 말한다. 즉 루카치가 토마스 만(=리얼리즘)이냐, 카프카(=모더니즘)냐, 라고 할 때의 그 모더니즘이다. 그 모더니즘을 ‘근대주의’라고 옮기는 것은 특이한 경우이다. 여기서는 그냥 ‘모더니스트적 비틀기’나 ‘모더니즘적 비틀기’라고 해야 할 듯하다. 그리고, 몇 줄 아래에서 “(사이렌의) 선주체화된”은 'presubjectivised'를 옮긴 것인데, 그것은 ‘주체화 이전’을 뜻하기 때문에 ‘선주체화’란 말은 맞지 않는다. 역자가 즐겨쓰는 ‘전(前)’이란 말 대신에, 왜 여기선 ‘선(先)’이란 말이 들어갔는지 모르겠다(‘선주체화된’은 ‘먼저 주체화된’이란 뜻이지 않은가?)

-126쪽. 각주12)에서 'subjects'는 ‘신하들’로 옮겨졌는데, ‘신민(臣民)들’이란 뜻이니까 신하들과 백성들을 포괄하는 말이다. ‘백성들’이란 번역이 더 낫지 않을까 싶다.

-132쪽 이하에서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가 전부 ‘부카레스트 Bucharest’로 옮겨졌다. ‘부카레스트’는 영어권에서의 명칭일 뿐이며, 이미 ‘부쿠레슈티’(루마니아식 원음에 가깝다)가 통용되고 있는데, 그걸 ‘부카레스트’로 옮긴 이유를 모르겠다. 역자가 ‘영어중독자’가 아닌 이상, 이해하기 힘든 일이고, 독자의 한 사람으로선 불쾌한 일이다. 이건 ‘파리’를 ‘패리스Paris’라고 옮기고(영어를 병기해서), ‘모스크바’를 ‘모스코Moscow’이라고 옮기는 식인데, 가뜩이나 미국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아주 못마땅하다. 철자대로 옮겼다면, 살레클이 ‘Romania’로 표기하고 있는 루마니아는 왜 ‘로마니아’로 옮기지 않았을까?...

혼자서 괜히 흥분한 것인가? 잠시 다른 업무에 매진한 다음에, 마저 지적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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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볼일 때문에, 토요일에 연구실에 나왔다가 며칠전 주문한 책 두 권을 받았다. 살레클의 <사랑과 증오의 도착들>(도서출판b)과 스탕달의 <사랑론>(펭귄북)이 그것인데, 스탕달의 책은 관심있는 주제와 관련하여 읽어볼 필요 때문에, 그리고 살레클의 책은 이미 (이 카페에서) 여러 차례 예고되었던 책이었기 때문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먼저 읽게 된 건 살레클의 책이었다. 1장만 잠깐 읽고 나서 다른 볼일을 보려고 했지만, 생각보다(혹은 생각만큼) 재미있어서(!) 반나절을 날려버렸다(그래봐야 고작 1장을 꼼꼼하게 읽은 것인데!). 뒤늦게라도 다른 볼일에 손을 댈까 하다가, 번역과 관련한 몇 가지를 지적해둔다.

미리 전제할 것은 살레클의 책이 매우 쉽고(라캉이 직접 인용되는 부분들만 빼면) 재미있게 씌어진 책이라는 점이며, 번역 또한 무난하다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저자/역자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하지만, 완벽한 번역이란 없는 법이고, 이 신간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이런저런 흠들이 눈에 띄는데, 그다지 대중적일 것 같지는 않지만(쉽다고 얘기한 건 상대적일 뿐이어서, 대학 초년생들이 읽기에는 버거울 듯하다), 개정판을 찍는다면 지적한 대목들이 일부라도 수정되기를 기대한다. 이 자리에서 지적할 부분은 1장 "당신을 포기하지 않는 한 당신을 사랑할 수 없어"에만 국한되며, 다른 장들에 대한 검토는 12월로 넘긴다.

1장의 내용은 두 편의 장편소설 <남아있는 나날>, <순수의 시대>와 단편 <뮤즈의 비극>에서의 '사랑'을 분석하는 데 전적으로 할애돼 있다. 두 장편은 모두 우리말로 번역돼 있고, 영화로도 만들어져(출시돼)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낯설지 않지만, <뮤즈의 비극>은 생소한 작품이다(단편이라니까 번역되어도 좋을 거 같은데). 번역에 대한 지적/의견은 번역본의 쪽수와 원서 (Per)Versions of Love and Hate(Verso, 2000)의 쪽수를 나란히 병기하면서 제시하도록 하겠다.

(1)국역 23쪽(원서 10쪽). 먼저, 사소한 것. "그는 타인들이 알아차릴 곳에서 스스로 행동에 연루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행동은 불능인 것이다."/"His actions are impotence because he is incapable of engaging himself in the action..."에서 그는 '연루시키다engage'의 능동적 주어이기 때문에, 수동형인 '연루되다'로 옮기는 것은 '불능'의 의미를 약화시킨다. 조금만 바꾼다면, '스스로를 연루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정도로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중요한 것. 이어지는 대목에서 "보통은 사고의 내용에 부착되는 쾌락이 사고 행위 그 자체로 옮겨지는" 다음에, and 이하의 절이 누락됐다. 누락된 부분은 "and the satisfaction derived from reaching the conclusion of a line of thought is experienced as a sexual satisfaction."이다.

(2)국역 25쪽(원서 11쪽). "스티븐스에게 있어서 이 자리는 집사의 복무 원칙들/코드이다. 혹은 더 정확히 말해서, 품격이다." 'dignity'를 품격이라고 옮기건 품위라고 옮기건 별 차이는 없다. 그런데, 같은 쪽에서 이후에 ‘품격’이라고 계속 옮겨진 단어는 'decency'이다. 나는 둘을 구별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문맥상 'decency'는 ‘체면’으로 옮기는 것이 나을 듯싶다. 그리고 다음문단에서 ‘영국다움(Englishness)’은 ‘영국인다움’이 맞고, ‘억제된 세계(suppressed world)’는 ‘억압된 세계’라고 옮기고 싶다. 사소한 거지만, 이어지는 26쪽의 ‘범인(culprit)’은 ‘죄인’이나 ‘피고인’이 어떨까 싶다.

(3)국역 29쪽에서. 3행의 ‘objet petit a’의 원어를 그대로 노출시켰는데, 우리의 번역 관행에 부합하는 거 같지 않다. ‘오브제 프티 아’라고 음역하고 괄호안에 넣어주어야 할 것이다. 52쪽의 그리스어 ‘ouden’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30쪽 인용문에서, ‘그곳이 어떤 곳인 질 알고 있지’는 띄어쓰기가 잘못돼 있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를 알고 있지’라고 고쳐져야 한다. 계속 사소한 걸 지적하면, 30쪽에서 ‘크나큰 사랑’은 'great love'를 번역한 것인데, 다른 곳에서는 다 ‘위대한 사랑’으로 옮겼으므로 (‘위대한’이건 ‘크나큰’이건) 통일시켜줘야 하지 않을까 한다. 32쪽 하단부에서는 ‘엘렌에 대한 자신의 사랑’에서 역시 'great'가 빠져 있다. 별거 아니지만, 가급적 모든 단어를 번역하는 역자의 번역습관을 고려하면, 실수가 아닌가 싶다. 따라서, ‘엘렌에 대한 자신의 위대한 사랑’으로 바뀌어야 한다.

(4)국역 33쪽(원서 16-7쪽). 스탕달의 <적과 흑>에 대한 내용인데, 사소한 거지만, ‘일정한 질서로(in a certain order)’는 ‘일정한 순서로’로 옮기는 게 어떨까 싶고(적어놓고 보니까 별 차이가 없긴 하지만), 조금 중요한 건 그 문단 마지막 대목. “담론적 제약들 배후에 숨어서 담론 속에서 스스로를 ‘표현’하는 그 어떤 무의식도 없다.” 원문은 이렇다. "- there is no unconscious hidden behind the discoursive constraints that 'express' themselves in the discourse." 여기서 'express'의 주어는 (단수인) ‘무의식’이 아니라, (복수인) ‘제약들’이다. 그래서 다시 옮기면, “담론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담론적 제약들 배후에 숨어 있는 무의식이란 없다.”

(5)국역 34쪽 하단부, 그리고 36쪽 인용문, 46-47쪽 등에서. 국역본에서는 동사 ‘mark’를 전부 ‘표식하다’로 옮겼는데, 우리말로 ‘표식하다’란 동사는 없다. 그리고 명사 ‘표식’은 ‘표지’와 같은 뜻으로 'index'를 가리킨다. 왜 역자가 ‘표시하다’란 말 대신에 부자연스러운 데다가 뜻도 맞지 않는 ‘표식하다’를 선택했는지 의문이다. 35쪽의 ‘향유’는 물론 주이상스(jouissance)를 옮긴 것인데, 이탤릭체로 된 주이상스를 그냥 ‘향유’라고 옮긴 것은 다소 불친절하다. 원어를 병기해주거나 적절한 설명이 각주로 첨부됐어야 하지 않을까. 나라면 ‘주이상스’라고 그대로 음역하거나(살레클의 방식이다), (선택의 문제이긴 하지만) ‘향락’으로 옮기는 것을 택하겠다.

(6)국역 35쪽 끝문장. “사랑은 말 속에서 단어가 실패하는 바로 그 지점을 향한다.” 원문은 "Love addresses that point in speech where the word fails."(18쪽) 여기서 ‘단어’라고 옮긴 건 내 생각에 ‘그 단어(love라는)’이다. 그게 아니라면, 단어들(words)이라고 복수형이 와야 하지 않을까 한다. 'speech'는 흔히 ‘발화’로 번역되지만(역자도 아는 바일 것이다), 더 쉽게 ‘말’이라고 옮긴 건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발화’라고 옮기는 순간 독자들이 우수수 나가떨어진다. 그건 ‘기표(signifier)’도 마찬가지이다. 하긴 ‘라캉’이니 ‘큰 타자’니 하는 것부터가 독자에 대한 ‘모독’이긴 하지만...

(7)국역 37쪽 중간에 영화 <피아노>를 다룬 부분에서, ‘일정한 한 번의 만짐(a certain touch)에 몇 개의 피아노 건반이 해당하는가’. 이건 전형적인 번역투인데, ‘한 번 만지는 데 몇 개의 피아노 건반이 해당하는가’라고 옮기는 게 이상할까? 아니, 영화 내용을 고려하면, "어느 부위를 만지는 건 피아노 건반 몇 개에 해당하는지"로 옮겨야겠다. 그리고 39쪽 마지막 행의 ‘난포착적(elusive) 특성’이란 것도 현학적인 번역의 사례이다. ‘elusive’라고 원어까지 병기했는데, 그게 그렇게 중요한 단어나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다소 멋쩍다. ‘난포착적’이란 말도 우리말이 아니고. 그냥 ‘포착하기 힘든’이라고 풀어주든가(더 풀면 ‘붙잡기 힘든’), ‘회피적’이라고 옮기는 게 어땠을지. 그리고 40쪽에서 “애너튼 부인은 ‘선들이 색의 가치를 갖는 오래된 프린트 가운데 하나’와 같은 존재로서 묘사되었다”고 했는데, 까다롭더라도 이 비유는 의역해줘야 하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원문은 "one of those prints where the lines have the value of color"(21쪽)인데, 일단 ‘프린트’는 ‘인쇄물’(여기서 다루어지는 <뮤즈의 비극>은 책과 관련된 내용이다)이고, 'lines'는 작품의 ‘행(간)’ 'color'는 개성이나 체취 같은 걸 뜻하기도 한다. 네이티브 스피커의 조언을 구했으면 좋았을 듯싶다.

(8)국역 41쪽(원서 22쪽)의 소설 <뮤즈의 비극> 인용문. 이론서 번역자들이 대개 소설 번역에는 서툴기 쉬운데(나부터도 그렇지만), 이 인용문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물론 그는 글을 쓰려고 했다. 왜 그의 재능 속에 있는 위대한 어떤 것을 행하지 않겠는가?”라고 된 걸 보자. 원문은 "Of course he meant to write - why not do something great in his turn?" 먼저, 'turn'을 굳이 어려운 말로 ‘재능’이라고 옮긴 것이 문제이다. 그런 뜻이 있는 줄은 사전을 찾아보고서야 알았는데, 모르는 게 차라리 나을 뻔했다. 'in his turn'은 숙어 그대로 ‘그의 차례’라는 뜻이다. 그리고 'do something'에서의 'do'는 'write'를 받는 대동사 아닌가? 다시 번역하면, “물론 그도 글을 쓰려고 했다. 그라고 해서 왜 위대한 작품을 쓰지 못하겠는가?” 정도이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대목의 “적어도, 그의 최선을 말이다. 처음부터, 그의 것이 바로 그 최선의 것이어야 한다는 결의를 가지고서 말이다.”/"His best, at least; with the resolve, at the outset, that his should be the best." 우리말 번역으로는 내용을 전혀 알 수가 없는데, 다시 번역하면, “처음부터 그의 작품이 최고의 걸작이 되어야 한다는 결의를 갖고서 시작한다면, 적어도 자신의 최고작은 쓸 수 있을 것이다.”

(9)국역 41쪽 하단에서 “예술적 천재, 그녀가 감탄하는 대상, 가능한 어떤 사랑”이 병렬돼 있는데, 모두 ‘사람’을 뜻하므로 ‘가능한 어떤 사랑(a possible love)’은 ‘가능한 연인’(‘연인이 될 만한 사람’) 정도로 옮겨지는 것이 좋을 듯하다. 43쪽에서. 이건 오역이라기보다는 선택의 문제인데, 역자는 ‘woman’은 모두 ‘여자’로 옮겼다. 나는 ‘여성’이라는 역어를 선택하고 싶은데, 라캉 정신분석학에서의 'woman'은 생물학적 젠더와는 불일치하기 때문이다. 성별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성차화(sexuation)의 결과인데, 이것은 생물학적 성과는 다르다. 우리가 갓 태어난 아이를 (“남성이야, 여성이야”라고 묻지 않고) “남자(애)야, 여자(애)야”라고 묻는 것처럼, 우리말에서 남자/여자는 자연적인, 생물학적인 성(sex)을 가리킬 때 더 적합하다. 거꾸로, 정신분석학에서의 성(sexuality)은 남성/여성으로 구별해서 표기하는 것이 낫다고 본다. 그래서 “여자는 없다”라는 라캉의 명제는 “여성은 없다”로 옮기는 것이 더 타당하다. 때문에, 온통 ‘여자’로 옮겨진 대목들은 나로선 읽기에 불편하다. 아울러 역자에게 다른 이유가 있는지 궁금하다.

(10) 43쪽 하단. 인명의 문제인데, ‘캐서린 밀로트(Catherine Millot)’는 프랑스인이므로, 관례상 ‘카트린 미요’쯤으로 번역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48쪽의 ‘에릭 로렌트(Eric Laurent)’도 마찬가지인데, ‘에릭 로랑’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47쪽의 ‘조안 리비에르(Joan Riviere)’는 여성인데, ‘그에게 있어’라고 해서 남성으로 받았다(원문에선 관계사 'for whom'으로 처리돼 있다). 당연히 ‘그녀에게 있어서’로 수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46쪽부터 나오는 ‘남근(phallus)’. 역시 일반인이 흔히 알고 있는 (프로이트식의) ‘남근(penis)’과 이 ‘팔루스’로서의 ‘남근’이 갖는 차이점에 대한 설명이 아쉽다. 일반 독자들이 이 부분의 논의를 따라가는 건 매우 힘들어 보인다.

(11)국역 49쪽 중간에서, ‘애너튼 부인의 파토스는’이라고 시작되는 부분. 이것은 물론 'The pathos of Mrs. Anerton,'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그런데, ‘pathos’는 우리말에서 ‘파토스(=정념)’가 아니라 ‘비애(감)’란 뜻의 ‘페이소스’이다(‘고통’이란 뜻도 함축). 50쪽 하단에서, “그녀가 왜 그를 거부했는가”는 "그녀가 왜 그를 거부하지 않았는가(why she did not reject him...)"(원서 27쪽)의 오역이다. 52쪽엔 (나 혼자 생각에) 재미있는 번역이 나오는데, “애너튼 부인은 그녀가 실비아가 아니라는 것을 폭로함으로써”에서 ‘것’은 'truth'를 옮긴 것이다. 당연히 ‘진실’이라고 옮기면 될 텐데, 다른 곳들에서 ‘truth’는 전부 ‘진리’라고 번역했기 때문에(여기서는 어색하다) ‘진실’이라고 옮기는 것이 꺼려진 것은 아닐까?(나의 추측은 진실일까? 그냥 ‘것’일까?) 중간에 “소크라테스가 스스로를 사랑받는 자로서 인정하여 사랑을 되돌려주기를 거부한 것은”이라고 돼 있는 부분은 중의적이어서 오독하기 쉽다. 뜻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소크라테스가 스스로를 사랑받는 자로서 인정하지 않고 사랑을 되돌려주기를 거부한 것은”이라고 하는 게 나을 듯하다.

(12)국역 53쪽(원서 29쪽). 클로드 샤브롤의 영화 얘기가 나오는 부분에서 “나는 바로 나를 위해 나를 사랑할 여자를 원하지 않는다” 다음에 어찌된 일인지 한 문장이 누락됐다. 아마도 편집과정에서의 실수인 듯싶은데, 이건 좀 치명적이다. 이 대목에서 설명하고자 하는 ‘역전의 논리(reversed logic)’(‘전도된 논리’ 나을 듯)가 성립하지 않게 돼버렸기 때문이다. 빠진 문장은 이렇다. "Finally I would like to meet one that will love me for my millions.(궁극적으로 나는 나의 재산 때문에 나를 사랑해 줄 여성을 만나고 싶다.)"

마지막으로 옥의 티. 57쪽의 각주 14번에서 <순수의 시대>의 국역본 서지가 누락됐다. 곧바로 쪽수만 나와 있는데, 국역본은 <순수의 시대>, 오리진, 1993이다.

몇 가지 지적하는 데 꼬박 2시간이 넘게 걸렸다. 혹 역자를 포함하여 다른 의견이 있으신 분들은 기탄없이 제시해 주시기 바란다. 나도 한 수 배우게 되면, 그걸로 교정료를 대신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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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30분쯤 친 내용을 날리는 바람에 다시 친다. 같은 내용을 다시 치는 일이 내키지는 않지만, 오기는 못말리는 법이다. 하지만, 대단한 오기는 아니기에 내용은 대폭 삭감한다...

문제의 발단은 어제 날짜 한겨레에 실린 한 서평이다. 신간 <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아트북스)에 대한 서평(24면)을 쓰면서 고명섭 기자는 줄곧 '벤야민'을 '베냐민'으로 표기했다. 제목까지 '베냐민에서 보드리야르까지...'로 달고서. 이 독일의 문예이론가 W. Benjamin에 대해 관례적인 표기는 물론 '벤야민'이다. 벤야민이나 베냐민이나 발음상에는 차이가 없으므로, 아마 고기자가 고집을 부리는 데에는 표기원칙이 작용하는 듯하다.

하지만, 설사 표기원칙에 따라 '베냐민'이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하더라도, 이 표기체계의 일관성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사용에 따라 축적된 문화적 관행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베냐민'은 (무슨 비타민이나 약이름도 아니고).'벤야민'이 갖고 있는 문화적 의미, 혹은 좀 과장해서 아우라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나는 나치를 피해 스페인 국경을 넘다가 청산가리를 먹고 죽은 사람을 베냐민과 짝짓지 못한다. 원음주의도 아닌, 이상한 표기원칙 때문에(게다가 이건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원칙이다. 베냐민이란 이름으로 검색되는 책은 아직 한권도 없다), 그런 문화적 의미를 박탈당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어 보인다. 학식있는 기자에게서 간혹 이런 만용을 볼 때(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나는 유감스럽다.

유사한 다른 사례들도 있다. 프랑스철학 좀 전공했다고, 관례화된 '베르그송(Bergson)' 대신에 '베르크손' 운운하는 족속들이다. 그들이 내세우는 근거는 원음에 가깝다는 것이다. 외국어 표기에 있어서 원음주의는 한가지 원칙이긴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한 가지 원칙일 뿐, 절대적 타당성이나 객관성을 갖는 건 아니며, 교육부의 표기원칙과도 다르다(창작과비평에서도 원음주의를 선호하여 '소쉬르'를 '쏘쒸르'로 표기하는데, 좀 짜증스럽고,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혐오스럽다).

흔히 원음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원칙이 한 가지 원칙이라고 말하는 대신에(원칙 중에서는 좀 순진한 원칙인데), 올바른 원칙이고, 진리에 근접한 원칙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베르그송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그동안 베르그송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거라고. 그런 주장은 물론 사실이 아닐 뿐더러, 혐오스러운 상징폭력에 다름아니다(부르디외라면, 티내기로서의 '구별짓기'라고 말할 것이다). 프랑스에서조차 외국어 저작이나 인명 표기에 있어서 자기들식의 원칙/체계를 충족시킬 따름이지 원음주의 어쩌구 하는 수작은 부리지 않는다. 나는 그런 것들이 현학취 이상의 의미를 갖는지 의심스럽다. '베르그송'과 '베르크손'을 절충해서 '베르그손'이라 표기하는 이들도 있는데, 과연 그게 목숨걸 일인지. 옆에서 보기엔, 이런 수작들이 무용하지만은 않다. 이런 표기를 근거로 베르그송 연구자들의 세대구분이 가능하기 때문에. 하지만,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정은 문학에서도 마찬가지다. 독일문학 (연구서도 아닌) 소개서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젊은 베르터의 슬픔'으로 옮겨놓은 걸 보고 경악한 적이 있다. 이미 '베르테르'란 번역 표기가 굳어져 있는 상태이고, 더군다나 대다수 독문학자들이 그렇게 번역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베르터'란 표기를 고집하는 이유는 뭔가? 그게 원음에 가까운가? 과연 씩씩한 '베르터'가 유부녀 때문에 자살할 위인인가? 게다가 '베르테르'란 우리말(!)에 담겨 있는 문화적 의미를 '베르터'가 다 접수할 수 있는가? 이 역시 좀 모자란 이들의 현학취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바흐친(Bakhtin)을 '바흐찐'이라고 표기해야지만 되고 '바흐친'이라 표기하는 건 무식의 발로이며, 영미식의 왜곡된 바흐친 이해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러시아문학 전공자들의 경우에도 사정은 같다. 초기에는 '바흐틴'도 있었고, 심지어 '박틴'도 있었다. 사실, 어느 것이래도 무방하다. 우리말 체계에서 '차이'만을 가지면 되는 것이니까. 거기에 '이해수준'을 거론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비뚤어진 전문가주의이다. 번역으로 책을 읽고 무얼 쓰는 건 다 가짜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외국인명의 표기는 원칙에 따라 두 가지가 공존할 수는 있다. '마르크스'와 '맑스'처럼. 그리고 거기에 무슨 우열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원칙적 일관성과 관례, 표기의 경제성 등이다. 그리고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가급적 하나로 통일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 이왕 하나로 통일돼서 쓰이고 있는 표기라면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다고 본다. 무슨 치명적인 이유가 없는 한. 엉뚱하게 좀 튀어보려는 수작들은 이젠 그만 사라졌으면 싶다...

덧붙여 말하자면, 튀는 공유명사 표기가 말해주는 것은 둘 중의 하나이다. 무식이거나 교만이거나. 계몽철학자 '디드로(Diderot)'를 '디데로'로 표기한다든가, 문학비평가 '바르트(Barthes)'를 '바데스'로 표기하는 건 '무식'이고, (이미 합의된) '후설(Husserl)'을 '후세를'이나 '훗설'로 표기하는 건 교만이다. 둘다 학문에는 유익하지 않다...

03. 0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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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ire 2004-03-12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 동감, 정말 동감입니다!!! 베냐민에 반대하신다 해서, 깜짝 놀라 읽어보니, 벤야민에 반대하는 건 아니었군요... 저도 베냐민에 반대합니다. 넘 황당한 표현이네요.

로쟈 2004-03-12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지시군요^^

sayonara 2005-04-16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만... 또는 허영이 아닐까여!?

로쟈 2005-04-18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적어도 '이상한 고집'쯤은 되는 것 같습니다...

딸기 2005-06-09 0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다른이야기입니다만.
국제기사에서 이름/지명 표기는 '아우라'가 아닌 '이데올로기'의 문제인 경우가 많거든요. '한국식/관행적 표기법'이라는 것이 대략 서구 식민주의자들->일본어 발음 거쳐서 온 것들이기 때문에 의식적으로라도 저는 현지발음을 살려주고 싶어합니다. 그러다가 번번이 벽에 부딪칩니다. '관행적 표기' '외래어표기법'을 들고나오는 교열부의 벽에 말이죠. ^^

로쟈 2005-06-09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식/관행적 표기법'이라는 것이 대략 서구 식민주의자들->일본어 발음 거쳐서 온 것들"이란 지적은 일리 있지만, 일반화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현지발음'이라는 건 상상적인 것일 뿐이어서(가령, '톨스토이' 대신에 '똘스또이'라고 하면 현지음에 가까운 것처럼 착각하기 쉬우나 현지음을 고려하면 '딸쓰또이'쯤으로 표기해야 됩니다. 이게 권장할 만한 표기인지는 의문입니다), 그걸 표기에 다 반영한다는 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경우의 난점은 해당 언어의 '정확한' 발음을 모를 경우 표기를 역추적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고, 따라서 상당히 혼란스러워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른 얘기지만, 창비사에서는 경음 표기를 선호하는데, 가령, '데까르뜨' '싸르뜨르' 등, 하지만, 그게 '현지발음'에 더 부합하는지도 의문일 뿐더러 '탈식민주의적' 표기가 되는지도 의심스럽습니다. 개인적으론, 사소한 것에 목숨 거는 (면피용 혹은 생색용) 알리바이 종류라고 생각합니다. '벤야민', '베냐민'은 사실 현지발음과도 전혀 무관하기에, 저로선 기자의 양식을 좀 의심하게 됩니다(즉 허영이 아닐까 싶은 거지요).

비로그인 2006-11-01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올 김용옥식의 표기법도 싫어 하시겠군요.ㅋ

로쟈 2006-11-01 2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원칙은 관행/관례과 일관성입니다. 그리고 '베냐민'은 사실 발음과는 무관하기에 '김용옥식 표기'와도 무관합니다...
 

크리스테바의 이어지는 질문은, 만약에 언어가 '표현'이고 그래서 그것의 한계[울타리]가 분명하게 그려진다면, 그걸 넘어설 방도는 없는가, 비표현성(nonexpressivity)이란 무얼 말하는가, 혹시 문자학은 언어학적 표기들이 아닌 논리적-수학적 표기들에 기초한 비표현적 '기호학'은 아닌가, 이다. 즉 문자학이 기존의 기호학과 대상[자료]만을 달리하는 기호학[보다 넓은 기호학]은 아닌가라는 의혹.



이에 대해 데리다는 모순적인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의 변명을 들어보자: "On the one hand, expressivism is never simply surpassible, because it is impossible to reduce the couple outside/inside as a simple structure of opposition. This couple is an effect of diff rance, as is the effect of language that impels language to represent itself as expressive re-presentation, a translation on the outside of what was constituted inside."(33쪽)

국역: "한편으로 표현주의는 결코 간단히 초월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내부-외부의 단순한 대립 구조라는 이러한 차이의 결과와 언어로 하여금 표현적인 표상, 내부에서 구성되었던 것의 외부로의 해석으로 재현되게 하는 이러한 언어행위의 결과를 환원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56쪽)

영역처럼 끊어서 읽겠다: "한편으로 표현주의[표현성]는 간단하게 초월할[넘어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단순한 (이분법적) 대립구조로서의 안/바깥을 해소[환원]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 대립 쌍은 차연의 결과[효과]인데, 이는 언어가 자기 자신을 표현적인 재현[표상], 그러니까 안에서 수군거린 일을 바깥으로 옮기는 것[번역]으로서 제시하도록 강요하는 언어(작용)의 결과라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요지는 '표현'으로서의 언어가 어떤 필연에 따른다는 것이겠지. 이것은 칸트가 선험적 환상이라고 불렀음직한 구조적인 미끼[유혹]이다(즉 어지간하면 걸려들 수밖에 없는 미끼인 것). 유독 서구 형이상학만이 좀 둔해서 걸려든 것은 아닌 것이다.

"On the other hand, and inversely, I would say that if expressivism is not simply and once for all surpassable, expressivity is in fact always already surpassed, whether one wishes it or not, whether one knows it or not. In the extent to which what is called "meaning" (to be "expressed") is already, and thoroughly, constituted by a tissue of differences, in the extent to which there is already a text, a network of textual referrals to other texts, a textual transformation in which each allegedly "simple term" is marked by the trace of another term, the presumed interiority of meaning is already worked upon by its own exteriority. It always already carried outside itself. It already differs (from itself) before any act of expression."

다소 길다. 국역: "다른 한편으로, 그리고 역으로, 나는 표현주의는 간단히 그리고 결정적으로 초월될 수는 없지만 표현성은 우리가 원하건 아니건간에, 또한 우리가 알건 모르건간에 실제로 이미 늘 초월되어왔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표현해야' 할) '의미'라고 부르는 것이 이미 도처에서 차이들의 망으로 구성되어 있고, 텍스트, 즉 다른 텍스트들에 대한 텍스트의 참조망, 또한 '단순한' 각 '항목'이 다른 항목의 흔적에 의해 나타나는 텍스트의 변형이 존재하는 한, 의미의 추정된 내재성은 이미 그 자신의 외부의 작용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이미 항상 자기 밖으로 놓여지게 되며 모든 표현행위 이전에 이미 (자기로부터) 차이됩니다."(57쪽)

나의 번역: "다른 한편으로, 이번에는 거꾸로, 나는 이 표현성이 아주 간단하게[만만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초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더라도 실제로는 이미 그리고 항상 초월되어 왔다고 말해야겠군요. 그것이 우리가 원하던 바인가 아닌가, 혹은 우리가 그걸 알고 있었나 없었나에 관계없이 말입니다. ('표현'되어야 할) 어떤 '의미'란 것이 차이들의 망에 의해 이미 그리고 완벽하게 구성되는 한, 또 이미 어떤 텍스트, 즉 다른 텍스트들에 대한 어떤 텍스트적[조직적] 관계[연관]망, 그러니까 다른 단어의 흔적에 의해 표시되는 이른바 개개의 '순진한 단어'들이 거주하는 텍스트적 변형[텍스트들 간의 오고감]이 존재하는 한, 우리가 가정하는 의미의 내재성은 이미 자신의 외재성에 의해 작동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의미(의 내재성)]은 항상 이미[먼저] 자신을 바깥으로 데려갑니다[운반합니다]. 그것은 어떠한 표현행위 이전에 (자신으로부터) 이미 벗어나 있는[달라져 있는] 것이지요."

즉 어떤 표현행위에 의해서 (의미가) 안에 있다가 밖으로 나오는 것[표현되는 것] 아니라 그러한 행위 이전에 이미 밖에 나와 있다는 얘기다. "오직 이러한 조건에서만 그것은 뭔가를 '의미'할 수 있다[Only on this condition can it "signify."]."

데리다는 이러한 관점[자리]에서 비표현성을 말할 수 있다고 한다: "Only nonexpressivity can signify, because in all rigor there is no signification unless there is synthesis, syntagm, diff rance, and text."

국역: "엄밀하게 말해서 종합·연사·차이·텍스트가 있는 곳에서만 의미작용이 존재하기 때문에 비-표현성만이 의미적일 수 있습니다." 나의 번역: "오직 비표현성만이 의미작용을 할 수 있습니다[뭔가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엄밀하게 말해서 (차이들의) 종합, 결합, 차연, 그리고 텍스트가 없다면 어떠한 의미작용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때 "물론 텍스트만이 의미를 나타낼 수 있다고 말할 때에 의미작용과 의미의 가치는 이미 변형된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규정되는 문자학: "Grammatology, as the science of textuality, then would be a nonexpressive semiology only on the condition of transforming the concept of sign and of uprooting it from its congenital expressivism."

국역: "텍스트성의 과학으로서 그라마톨로지는 그러므로 기호의 개념을 변형시키고 그 생래적 표현주의로부터 그것을 떼어놓는다는 조건에서만 비-표현적 '기호학'이 될 것입니다." 다시 번역하지 않겠다. 마지막 질문이 까다롭다는 걸 전제하면서 데리다는 인공언어[순 논리적-수학적 표기(법)]에 대한 저항[비난]이 형이상학의 로고스중심주의와 음성중심주의의 기본적 성격[전제]를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서: "A grammatology that would break with this system of presuppositions, then must in effect liberate the mathematization of language, and must also declare that "the practice of science in fact has never ceased to protest the imperialism of the Logos, for example by calling upon, from all time, and more and more, nonphonetic writing.""

국역: "이러한 전제들의 체계와 절연하고자 하는 그라마톨로지는 그러므로 언어의 수학적 체계화를 자유롭게 하고 또한 '과학의 실행이 오래 전부터 그리고 점점 더 비음성적 글쓰기에 호소함으로써 로고스의 제국주의에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해왔다'는 사실을 확인해야만 합니다." 인용은 <그라마톨로지>에서 따온 것이다.

나의 번역: "이러한 (로고스중심주의와 음성중심주의) 전제들의 체계들과 절연하고자 하는 문자학은 사실 이제는 언어의 수학화[수학적 언어화]를 거리낌없게 해야 하며, 또한 과학의 실행이 따지고 보면 지속적으로, 그리고 점점 빈번하게 예컨대 비음성적 문자[표기]에 호소함으로써 로고스 제국주의에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해 왔다는 걸 공표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형이상학 이면의 역사가 있었다는 얘기(수학[수학적 표기]은 이 또 다른 역사의 주역이다). 하지만 이 새로운 반전은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데리다가 보기에 이 반전[접수]은 거의 끝장을 보기 힘든 과업[infinite task]이다. 자연언어와 비수학적 표기들을 모두 접수[환원]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부의 적: "We must also be wary of the "naive" side of formalism and mathematism, one of whose secondary functions in metaphysics, let us not forget, has been to complete and confirm the logocentric theology which they otherwise could contest."

국역: "또한 그 부차적 기능들 중 하나가 어떻게 보면 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었던 형이상학에 있어 로고스중심적 신학을 오히려 완성하거나 공고히 하는 것이었던 형식주의와 수학주의의 '소박한' 측면에 대해서도 경계해야 합니다."

나의 번역: "우리는 또한 형식주의[형식]와 수학주의[수학]의 '순진한' 측면에 대해서도 경계해야 합니다. 바로 이런 측면이 (제대로였다면 비판할 수도 있었을) 형이상학의 로고스중심적인 신학을 (옆길로 새는 바람에) 오히려 완성하고 확고하게 해왔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죠."(라이프니츠의 예)

결론: "The effective progress of mathematical notation thus goes along with the deconstruction of metaphysics, with the profound renewal of mathematics itself, and the concept of science for which mathematics has always been the model."

국역: "그러므로 수학적 기호표기법의 실질적인 진보는 형이상학의 해체, 수학의 개념과 그것이 늘 그 모델이 되었던 과학의 개념에 대한 심오한 쇄신과 짝을 이룹니다."

나의 번역: "따라서 수학적인 표기(법)의 결정적인[실질적인] 진보는 형이상학의 해체(구축)과 함께 하는 것이며, 수학 자체와 그것[수학]이 언제나 모델[전범]이 되어 왔던 과학의 개념에 있어서의 근원적인 갱신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크리스테바의 마지막 질문. 만약 기호의 문제가 과학성[과학을 과학으로 성립시켜주는 근거]의 문제에 걸려 있는 거라면, 즉 이 둘을 분리시켜서 생각할 수 없다면, (기호학에 대한 비판[대안]으로서의) 문자학은 '과학'인가 아닌가, 하는 것. 또 만약에 데리다 당신이 어떤 종류의 기호학적 작업은 문자학의 기획[프로젝트]에 근접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어떤 종류의 것인가?

이에 대한 데리다의 답변: "Grammatology must deconstruct everything that ties the concept and norms of scientificity to ontotheology, logocentrism, phonologism. This is an immense and interminable work that must ceaselessly avoid letting the transgression of the classical project of science fall back into a prescientific empiricism. This supposes a kind of double register in grammatological practice."

국역: "그라마톨로지는 과학성의 개념과 규범들을 존재신학, 로고스중심주의, 음성주의에 연결시키는 모든 것을 해체해야 합니다. 그것은 거대하고 무한한 작업이며 과학의 고전적 계획에 대한 위반이 전-과학적 경험주의에 다시 떨어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라마톨로지적 실행에 있어 일종의 이중 기제를 전제로 합니다."(59쪽) '이중 기제'는 '이중 기재[등록]'의 오역인 것 같다.

나의 번역: "문자학은 과학성의 개념과 규준들을 존재신학, 로고스중심주의, 음성주의와 연루시키는[연결시키는] 모든 것을 해체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방대하면서 종결되지 않을 작업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과학의 고전적 기획이 과학 이전의[전과학적인] 경험주의로 추락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저지[경계]해야 하는 것이지요. 이 작업은 문자학의 실행[실천]에 있어서 일종의 이중 등록을 가정합니다."

즉 형이상학적 실증주의와 과학주의를 넘어서야 함과 동시에 형이상학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과학 자체 내의 모든 유효한 작업들을 부추겨야[북돋아줘야] 한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데리다가 보기에 문자학이 '과학'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단순하지 않다: "In a word, I would say that it inscribes and delimits science; it must freely and rigorously make the norms of science function in its own writing; once again, it marks and at the same time loosens the limit which closes classical scientificity."

국역: "나는 한마디로 그것을 과학을 기입하면서 그것의 한계를 뛰어넘는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그 자신의 글쓰기 속에 과학의 규범들을 자유롭고 엄격하게 기능하도록 해야 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그것은 고전적 과학성의 영역을 나타내는 경계를 드러냄과 동시에 이완시킵니다."(59-60쪽)

나의 번역: "한마디로, 나는 그것[문자학]이 과학을 기입하면서[새겨넣으면서] 동시에 과학을 (한계)지운다고[과학에 속하면서 과학을 넘어선다고] 말하겠습니다. 그것[문자학]은 과학의 기능에 대한 규준들을 아주 자유로우면서도 엄격하게 작성해야만 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그것[문자학]은 고전적인 과학성을 마감하게 한[울타리 지운] 한계를 표시하면서 동시에 그 한계를 이완[완화]시킵니다."

어쨌든 이러한 이유로 모든 과학적인 기호학 작업은 문자학에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One can say a priori that in every proposition or in every system of semiotic research metaphysical presuppositions coexist with critical motifs."

국역: "기호학적 탐구의 모든 명제나 체계에 있어서 형이상학적 전제들과 비판적 동기들은 함께 섞여 있다고 '선험적으로'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가 거듭 강조하는 것은, 이 둘[형이상학적 전제와 (그에 대한) 비판적 동기/모티브]이 한 언어 속에 공존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맺는 말: "Doubtless, grammatology is less another science, a new discipline charged with a new content or new domain, than the vigilant practice of this textual division."

국역: "그라마톨로지는 틀림없이 또다른 과학이라거나 새로운 내용과 제한된 새로운 영역을 지닌 새로운 학제라기보다는 이러한 텍스트 분할의 세심한 실천일 것입니다."

나의 번역: "두말할 것도 없는 얘기지만, 문자학은 또다른[새로운] 과학이 아닙니다. 즉 새로운 내용, 새로운 영역을 가진 새로운 학문[과학]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것은 차라리 이러한 텍스트 분할[가름]의 세심한[섬세한] 실천이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여기서 '텍스트 분할'이라고 한 것은 한 텍스트 속에서 아군[(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적 동기들]과 적군[형이상학의 전제들]을 배추포기 나누듯이 가려내는 걸 말한다. 그래서 먹을 만한 부분과 버려야 할 부분[벌레먹은 부분(형이상학에 오염된 부분)]을 추려내는 것. 여기에는 아주 섬세한 손길이 필요하다고 데리다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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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나무 2007-11-01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공적인 번역이란 외국어보다 우리 말에 능란해야한다는 것을 제대로 알 수 있는 페이퍼입니다. 로쟈님의 번역물을 알고 싶습니다. 전부터 알고 싶었지만 말입니다.

2007-11-01 16: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02 09: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1-02 13:40   좋아요 0 | URL
그 '의문'에 대한 열정을 키워나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