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에 먼지나 날릴 만한 3월초순에 '백년만의 폭설'을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은 듯하다. 일기와 관계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나로선, 크게 불편한 일도 없고. 대학가의 서점들이 주로 수업교재를 구하려는 학생들로 미어터지는 풍경도 보기에 나쁘지 않다. 두툼한 경제학/경영학 책들과 몇 만원씩은 나갈 듯한 자연계 원서들이 수십 권씩 쌓여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왠지 마음이 젊어지는 듯하다. 분명 나에게 그런 날들은 '과거'이지만, 또 그런 날들은 해마다 '비인칭적으로' 반복된다! 왠지 그런 풍경들 속에 나도 (나를 잊고!) 끼여들었으면!...
하는 기분에, 서점에 자주 들러, 다치바나 다카시의 <뇌를 단련하다>도 괜히 쓰다듬어 보고, 이미 봄호가 나오는 계간지들 서가에서 지난 겨울호들을 뒤적이기도 한다. 두어 주쯤 됐지만, 그러다 발견한 글 두 편. 하나는 <과학사상>(47호)에 실린 이진우의 "생명공학 시대의 '주체' 또는 '탈주체'"이고, 또 하나는 <당대비평>(24호)에 실린 윤평중의 지젝과의 대담, "사유와 실천의 유희는 가능한가>이다(*<윤평중 사회평론집>(생각의나무, 2004)에 재수록돼 있다). 후자의 부제는 '지젝에 대해 알고 싶은 몇 가지'.
지난 가을 방한시 계명대에서 영어로 발표했던 <유전공학에서 정신분석학으로>란 강연문의 해제 형식인 이진우 교수의 글은 '유전공학에 관한 지젝의 정신분석학적 계몽'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데, 이미 그 강연문을 읽었던 독자에게라면 새로울 게 전혀 없는 내용이다. 필자가 미주에서 밝히고 있는 바에 따르면, "이 글은 그의 철학적 입장에 대한 비판적 논의라기보다는 그의 사상을 이해가능한 수준으로 옮겨 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지젝 관련 문헌의 하나로 카운트되는 것 이상의 의미는 찾기 어렵다(참고로, 강연문의 번역은 홍준기씨가 맡았었는데, 책으로 낼 수 있을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니 여기서는 '지젝에 대해 알고 싶은 몇 가지"만 알아보면 되겠다. 부지런한 분들은 책을 직접 참조하면 더 좋을 거 같고.전반부에서 슬로베니아와 지젝의 가정환경을 다룬 부분, 미국에 대한 견해 등은 생략하고, 바로 철학에 대한 것. 우선, 그에게서 라캉과 헤겔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는 라캉과 헤겔이 철학적 문제의식이 자신의 사유에 있어서 주요 화두라는 걸 인정하면서 "라캉 없는 철학은 공허하고 헤겔없는 정신분석학은 방향감각을 결여하고 있다"는 패러디적 문구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한다. 물론 이때 그가 주로 참조하는 라캉은 초기의 구조주의적 라캉이 아니라 후기의 라캉이다. 때문에, 그는 '주체의 죽음'이라는 포스트모던적 테제를 라캉과 결부시키는 데 완강하게 반대해왔다. "어쨌든 주체라는 행위자를 설명함에 있어 후기 라캉이 훨씬 적합한 이념적 틀을 제공하지요. 독일 관념론, 특히 헤겔에 대한 저의 집중적인 관심도 주체의 문제와 연관이 있습니다. 저는 독일 관념론이 주체 문제에 대한 가장 정교하고 역동적인 철학적 설명의 틀을 제공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그의 헤겔론은 곧 역간될 예정인(*이미 역간된)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인간사랑, 2004)에 집약돼 있다(이 책에서, 헤겔은 들뢰즈 이상의 매력적인 철학자로 탈바꿈해 있다). 다른 자리에서, 그는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란 데뷔작의 대성공(!)에 놀라는 만큼이나 뒤이어 나온 이 책의 (흥행)'실패'에 의아해 하는데, 정작 자신이 보기에 더 중요하고 더 훌륭한 책은 이 후자이기 때문이다(그는 자신의 아들에게 이 책을 바치고 있다). 그가 새로이 2판을 내면서 100쪽이 넘는 서문을 다시 붙인 것도 그러한 배경을 갖고 있다. 이 역간되면, 지젝에 대한 오해나 비판이 어느 정도 교정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그런데, 정작 국내에서는 지젝이 그토록 강조하는 혹은 숭배하는 헤겔의 주저, <정신현상학>과 <(대)논리학>을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은 아이러니컬하면서 유감스럽다(새로운 번역본이 시급히 나오기를 기대한다). 헌책방들을 뒤지면 한두 권 발견할 수도 있겠지만, 공포의 04학번 신입생들에게 대철학자 헤겔은 말 그대로 '공갈포'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해마다 헤겔학회가 열리고 가끔씩 헤겔 연구서가 나오는 건 넌센스가 아닐까? 그들의 헤겔은 독일에만/독일에나 있는 것인지? 딴은, 우리나라는 헤겔로부터 '자유로운' 나라인 것이니까 그다지 나쁠 게 없는 것인지도. 들뢰즈라면 이러한 헤겔의 공백을 반가워했을까?...
어쨌든 지젝이 생각하는 헤겔의 핵심, 혹은 변증법의 핵심: "변증법이 존재계 일반에 대한 이론으로 이해되지 않고 주체의 역동적 자기형성 과정을 지칭하는 것으로 한정적으로 독해된다면 부정의 이념은 자연스럽게 주체가 내외부적으로 실험하는 부정의 부정으로 전화하지요. 즉 부정성은 주체의 자기 관계적 부정성이며, 그런 의미에서 헤겔은 주체의 형성이라는 이 역동적이고 입체적인 과정 자체를 일반적 차이와 구별하기 위해 절대적 차이라고 명명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윤평중 교수는 "절대정신의 존재론을 설파한 헤겔과 자기 관계적 부정성을 강조한 헤겔 사이에는 건너기 어려운 간극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지적하지만, 지젝은 바로 그 점이 헤겔의 묘한 매력이 아니겠느냐고 받아넘긴다.
그리고, 영화 <매트릭스>에 대한 얘기와 함께 영화 얘기. 그 많은 영화들을 어떻게 다 보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많은 사람이 궁금해 하는 대목인데). 지젝의 답변은 기가 차다: "제가 분석하거나 해부하는 영화들의 3분의 1도 보지 않았을 겁니다. 예건대 저는 로셀리니의 작품을 한편도 보지 않았으며, 영화관에 가는 것도 그리 즐겨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극장에 갈 시간이 부족하다고 이야기하는 편이 정확하겠네요."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의 한 장은 바로 로셀리니의 3부작에 바쳐져 있는데, 정작 그는 단 한편의 로셀리니도 보지 않았다니! 이걸 사기라고 해야 할지, 묘기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그는 무엇보다도 영화 텍스트가 이데올로기와 일상적 삶이라는 텍스트의 비밀을 응축해서 보여주기 때문에, 영화에 대해서 즐겨 말하고 분석한다고 답한다. 그리고 1/3밖에 못 봤다고 하더라도 그 분량은 우리의 상식적인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점은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네그리/하트의 <제국>에 대한 얘기. 그는 '제2의 자본론' 운운하며, <제국>을 서평한 적이 있었는데, 그 서평은 사실 책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쓴 것이며, 정작 책은 아주 실망스러웠다고. 이 실망은 그가 다시 쓴 서평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요점은 저자들이 제시하는 대안이라는 게 기대이하라는 것이다. 지젝은 말한다: "저는 지금 이 시점, 그리고 앞으로 전망 가능한 중장기적 지평에서 자본주의의 외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지적으로 정직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내가 좋아하는 지젝은 이런 말을 하는 지젝이다.) "네그리와 하트의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지만, 한마디로 저는 선진 자본주의 교육제도의 수혜자이자 지식 특권계급으로서의 서구 강단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라크 문제나 유고 사태를 거론하면서 이들 비서구인들에 대해 취하는 거들먹거림이나 위선에는 이제 신물이 납니다."(짝짝짝!)
그럼, 당신의 대안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서: "저는 어떤 종류의 해답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리고 세계의 문제를 풀 해답이 존재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다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그 범위 안에서 꾸준히 할 뿐입니다. 우리네 일상의 무늬와 결에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전일성과 균열, 그리고 현대적 삶의 무한한 모순과 복합성을 웅변하는 사례들이 다양하게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그것들을 따져 묻고 분해하고 조립하는 과정에는 끝이 없습니다."
끝으로, 당신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언제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그는 음악을 들을 때라고 답한다. 그는 생각을 할 때나 쉴 때나 항상 음악을 듣는다고 말하는데, 덧붙여 자신의 비밀을 문득 털어놓는다: "저는 언젠가는 대작 오페라 한편을 직접 써서, 뉴욕 무대 같은 데에서 직접 연출해 올리는 것을 궁극적 희망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음악미학에 대한 질 높은 연구서, 예컨대 아도르노의 작업에 비견될 만한 책도 펴내고 싶습니다."
이 대담에서 내가 재미있게 읽은 부분이, 로셀리니 영화 얘기와 함께 이 음악 얘기이다. 두 이야기는 지젝을 좀더 가깝게 느끼도록 해준다. 대담을 마친, 윤평중 교수의 감상도 흥미로운데, 그는 지젝의 경이로운 통찰력과 감수성, 그리고 에너지에는 근본적으로 어떤 불안정한 데가 있어 보였는데, 그것은 그의 고질병인 '당뇨' 때문에 야기되는 불안한 제스쳐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전형적인 조증(manie) 이 아닐까, 라는 의견을 피력한다. 당연히 그러한 조증에나 울증이 동반된다(니체이 경우처럼). 실상 지젝 자신이 라캉주의자들로부터 정신분석을 받기도 했다(그 자신이 비판적이지만). 그의 결론: "나는 지젝을 니체가 미래 위버멘쉬의 모델로 상정한 '예술가-철학자'의 상에 가장 근접한 인간으로 이해했다." 우리는 어떤 위버멘쉬, 혹은 또 다른 헤겔과 동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