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나온 교양과학서들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건 스티븐 핀커의 <빈 서판 Blank Slate>(사이언스북스) 이다. 로버트 라이트의 <도덕적 동물>에 이어서 '사이언스 클래식' 시리즈의 두번째 권이다. 시리즈의 이름이 말해주는 바대로, '고전'의 반열에 오를 만한 이 책은 무려 900쪽에 이르는 방대한 책이다(원서도 500쪽 가량된다). 

 

 

 

 

촘스키만큼 유명한 이 언어학자 혹은 인지과학자의 책들은 <언어 본능>(그린비, 1998)이 번역돼 있지만, 더 많이 번역소개될 필요가 있다. 다니엘 데넷과 함께 '핀커의 모든 책'이라 할 만큼 그의 책들은 수준있는 지식과 교양, 그리고 유익한 문제의식으로 넘쳐난다. 이런 교양서들은 우리를 똑똑하게 만들거나, 적어도 똑똑해진 것 같다는 인상을 남긴다. 그러니 읽을 도리밖에(물론 분량에 대해선 할말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책이 번역중이라는 소식을 접한바 있기 때문에 책의 출간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출간소식이 반갑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좀 찜찜한 마음이 들었는데, 그건 책값(40,000원)보다는 책제목 때문이다. 물론 책값이 원서보다 두배 가까이 비싼 건 부담스럽지만(원서의 경우 핀커의 모든 책은 염가본이 나와 있고, 또 중고로는 더 싸게 구입할 수 있다), 로크의 tabula rasa를 의역했다는 blank slate를 꼭 '빈 서판'으로 옮겨야 했는지는 아쉬움이 남는다(제목은 책의 얼굴이거늘).

잘 아는 바대로, 타불라 라사(혹은 창비식 표기로 '타불라 라싸')는 '백지(상태)'란 뜻이고, 모든 철학교양서 및 교과서에 그렇게 나와 있다. 그러니 그냥 '타불라 라사'라고 하든가(이게 차라리 '서판'이란 말보다는 친숙하다), '백지(상태)'라고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서판'은 글씨를 쓰는 판이 아니라, 글씨를 쓸 종이를 깔아놓기 위한 판을 말한다. 이게 원의에 맞는 것인지도 좀 의심스럽지만, 그럴 경우에라도 '글씨판' 같은 말 대신에, 잘 쓰지 않는 '서판'을 번역어로 선택한 것은 아쉽다.

영한사전에 slate는 글쓰기용 '석판'으로 돼 있는데, 이럴 경우 이 '석판'은 '서판'과는 다른 것이다(전자는 글씨를 쓰는 판이고, 후자는 글씨를 쓰기 위한 판이다). 요컨대, 오역의 범주에 들어갈 소지가 있다. 이것이 내가 이 제목에 대해 찜찜해 하며 유감스러워하는 이유이다. 앞으로 이 책을 거명할 때 매번 '빈 서판'이라고 해야 하다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 - 9.11과 그에 관련된 날짜에 관한 다섯 가지 논문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종주 옮김 / 인간사랑 / 2003년 10월
평점 :
절판


9.11과 이후의 국제정세를 다룬 책들은 제법 나와 있지만, 내가 읽은 최고의 책은 지젝의 것이다. 하지만, 이 국역본은 대개의 지젝 번역서들과 마찬가지로 무능하기 짝이 없는 책이어서, 유감스럽게도 지젝의 고뇌와 만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책읽기의 고난 속에서 허우적거리게만 할 뿐이다.

잠시 그 몰염치를 추궁해 보면, 먼저 영화 <매트릭스>의 대사에서 따온 책의 제목부터가 잘못 번역되었다. '실재라는 사막으로의 초대'란 뜻인데, 풀어쓰면, (영화에서처럼)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정도이다. 제목의 '환대'란 말은 우리말 문법에 맞지 않는데, ‘환대’는 '누구누구를 환대하다'나 '어디어디에서의 환대'라는 표현으로 쓰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디어디로의 환대’라니?

책의 서문은 또 어떤가? 25쪽에서, 체스터튼을 인용하면서 지젝이 자유의 역설을 얘기하는 부분이 있는데, '우리는 자유사상이 자유를 지켜내는 가장 안전한 보호물이라고...'로 돼 있는 부분은 '우리는 자유사상이 자유에 대항하는 가장 안전한 방어벽이라고...'의 오역이다. 역자는 'safeguards against freedom'를 '자유를 지켜내는 보호물'이라고 정반대로 옮겼다. 그렇게 되면, 자유사상과 자유간의 역설적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이런 건 시작에 불과하다. 1장의 제목을 역자는 '실재계에 대한 열정, 모사에 대한 열정'이라고 옮기고 있는데, 지난번 지젝 초청강좌에서의 제목처럼 ‘모사’보다는 '가상'이라고 옮기는 것이 더 적합하며 이해하기에 쉽다. 또, 37쪽의 '외관'은 전부 ‘semblance’의 번역인데, 1장에 제목에서처럼 '모사'라고 했으면, 아예 일관성 있게 ‘모사’라고 하든가, 아니면 '가상'이라고 옮겨줘야 한다. 그것이 외관/외양을 뜻하는 ‘appearance’와 동일하게 번역된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리고 'cutters'를 '자르는 자'로 번역했는데, 면도날 등으로 자기 신체에 상해를 입히는 자(대개 여성)를 가리키므로, '면도날 자해자'라고 옮기는 게 낫겠다. 8쪽의 ‘심신상관학설’은 ‘holistic’을 옮긴 것인데, holistic이란 건 기계론적(mechanical) 자연관과 대비시켜서 쓰는 말로서, ‘전일론적’ 혹은 ‘전체론적’이란 뜻을 갖는다('심신상관학설'이란 건 영한사전의 것을 그대로 가져온 번역이다).

40쪽에서 '그것을 해내지 못했고'는 '테러(그것)를 한 것이 아니라'로 옮겨야 한다. 그리고, '전형적인 포기자(disclamer)'는 '전형적인 부인 문구'의 오역이다. 즉 '이 드라마의 인물들은 실제와는 무관하다'는 식의 문구를 말한다. 이어지는 41쪽의 '리얼리티 소프(reality soap)'는 '리얼리티 비누'라고 안 옮긴 게 그나마 다행인데, 이건 그냥 우리식의 드라마이다(TV연속극). ‘soap’는 TV용 연속극이나 멜로드라마를 뜻하는 ‘soap opera’의 약칭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관여자(participants)'는 '출연자'라고 옮겨야 할 것이다. 같은 쪽에서 '생물발생학설(biogenetics)'는 물론 '생물유전학'의 오역이다. 이걸 '생물은 생물에서만 발생한다는 학설('biogenetic'이 그런 뜻이다)'이라고 역자주까지 달아놓은 건 좋게 봐줘도 코미디다.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식이다. 그러니, 아무리 원저가 좋은 책이라 하더라도 이 번역본을 추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제대로 된 번역본이 다시 나오기를 바란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쟈 2005-06-03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s a translator, he is one of the worst!...

비로그인 2004-07-22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엇, 쿤데라 카페의 로쟈 님이시다ㅇ_ㅇ 알라딘에서 뵈어서 진심으로 반갑습니다~ 일반 교양서로 이 책을 구입하고 싶었습니다만 로쟈님의 말에 따르면 번역가로서 최악인 분께서 옮긴 책인데, 글읽기에 미숙한 제가 제대로 읽어낼런지 시작 전부터 두렵군요.;

2005-04-18 09: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5-04-18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지 싶습니다'가 아니다, '맞습니다'. 작년 6월이면 제가 모스크바에 있을 때이고, 한글 쓰는 요령도 알지 못할 때라서 어줍잖은 영어로 댓글을 달다 보니까 오타가 났군요. 다른 지적들도 마음놓고 해주시길...

jo 2013-01-17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이 안보실거 알지만 흔적을 남깁니다.
책러브에 저희 어머님이 다니시는뎅.......
저도 교보문고에서 하시는 강의도 보러 간 적있고요....
인기가 많으셔서 댓글이 통제되어 있나봐요. ㅎㅎ
아, 2012서재의 달인 축하드려요.

2013-01-18 0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텔레비전에 대하여 동문선 현대신서 9
피에르 부르디외 지음, 현택수 옮김 / 동문선 / 199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부르디외의 책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그런 만큼 가장 많이 팔린 이 책은 내가 읽은 바로는 가장 쉬운 책이기도 하다. 심지어 책을 읽기도 전에 대충 내용을 짐작해 볼 수 있고, 그게 읽은 후의 소감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게 잘 읽히는 책인가 하면 그건 아니다. 같은 역자의 <강의에 대한 강의>를 읽고 느낀 것이지만, 부르디외는 아직 적합한 번역자를 만나지 못했다. 불쌍한 부르디외!...

오역의 몇 가지 사례만 지적한다. 서문에서 저자가 매스미디어들의 부추김 때문에 일전을 불사할 뻔했던 터키와 그리스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부분. “그리스 병사의 섬 상륙, 함대의 이동, 그리고 전쟁은 정의를 피했을 뿐이었습니다.”(12쪽) 여기서 “전쟁은 정의를 피했을 뿐”이라는 게 무슨 말인가? 영역본이 “war was only just avoided.'(전쟁을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다)인 걸로 봐서 역자는 불어의 justesse(혹은 justice)가 들어가는 숙어(‘가까스로’)를 잘못 옮긴 것이다. 문제는 왜 그런 오역/실수를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또 역자는 그렇다 쳐도(역자의 실력이 그렇다면) 교정자는 왜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이런 단순한 오역을 놓친다면, 다음과 같은 대목은 어떻게 읽고 이해할 수 있을는지? “저는 말하자면 과거의 온정주의 교육적 텔레비전을 바라는 향수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향수가 대중의 취향과 대규모 방송 수단의 민주적인 이용을 위한, 대중의 자발적 혁명과 선동 정치적 복종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48족) 읽으면 읽을수록 머리가 아파오는데, 이유는 말이 안되기 때문이다(역자는 아무런 고통없이 번역했을까?).

두번째 문장을 다시 번역하면 이렇다. “과거의 가족주의적-교육적 텔레비전이야말로 제가 보기엔 (로자 룩셈부르크식의) 대중적 자발주의나 대중적 취향에 대한 선동적인 투항 못지않게 대중매체의 진정한 민주(주의)적 사용에 대립됩니다.” 즉 부르디외는 매중매체에 대한 순응이나 전면적인 부정이 아닌, 민주적인/비판적인 활용에 방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문제의 번역문을 그런 뜻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인지?

이런 식의 오역들이 책에는 드물지 않다. 부르디외의 번역이 쉬운 작업은 아니겠지만, 부르디외 전문가를 자처하는 이들의 번역이 이 정도 수준에 머문다는 것은 실망스러운 일이다. 무엇이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독자로서는 하여간에 오역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는 수밖에 없겠다. 좋은 책을 읽을 권리는 그냥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불성실한 번역서들은 뼈저리게 느끼도록 해준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구두 2005-04-04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구해서 읽어야 하는 ... 저는요....흐흐
 
믿음에 대하여 - 행동하는 지성 동문선 현대신서 136
슬라보예 지젝 지음, 최생열 옮김 / 동문선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올가을에 방한할 예정이기도 한 지젝으로서 불행한 것은 그 번역서들이 대부분 오역의 진창이라는 사실이다. 비교적 읽을 만한 그의 ‘영화책’들을 제외하고는 대개가 주의해서 읽어야 하거나 차라리 안 읽는 게 더 나은 번역서들이다. 그간에 압권은 <향락의 전이>였는데, 그보다 더한 ‘향락’을 선보이는 책이 바로 <믿음에 대하여>이다.

책은 정말 믿을 수 없는 오역으로 가득 차 있다. '모세의 형상'을 '모자이크한 모습'으로 옮기기 시작하더니 '인도'를 전부 '인디언'으로 탈바꿈시키고,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난데없이 '실존성'으로, '뉴에이지'는 '신시대'로 옮겼다(뉴에이지는 신시대가 아니다!). '진리의 정치'를 전부 '진실의 정치'로 옮기고, '대상 a'는 ‘대상’ ‘물질’ ‘사물’ 등 갈피를 못잡고 옮긴 걸로 봐서 역자는 라캉/지젝을 전혀 이해하고 있지 않으며 읽어본 적도 없어 보인다(무슨 사명감으로 번역에 나선 것인지?).

정말 경악스러운 대목. “라캉의 관심은 지배자에 관한 강좌로부터 당시 사회에서 주도적 논의 대상이었던 우주에 대한 강좌로의 이전에 있었다. 논점이 우주로 바뀐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38쪽) 전후좌우가 다 오역으로 도배돼 있지만, 이 대목은 정말 하이라이트이다. 믿기지 않을까봐 원문을 인용한다. “Lacan's interest is focused on the passage from the discourse of the Master to the discourse of University as the hegemonic discourse in contemporary society. No wonder that the revolt was located in the universities.”(30쪽)

중학생도 해독할 수 있는 단순한 구문이다. 라캉의 네 가지 (강의가 아니라) 담론(discourse)에 대한 약간의 배경지식만 갖고 있다면 말이다(라캉 입문서가 부족한 것도 아닌데). 해서 다시 옮기면, “라캉의 관심은 주인의 담론에서 현대 사회의 지배적 담론인 대학의 담론으로의 이동에 초점이 맞춰진다. 그 반란이 대학들에서 일어났던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여기서 ‘반란’은 아마도 68혁명을 가리키는 듯하다.)

역자는 무슨 생각에서인지(대문자라서?) ‘대학(University)’을 ‘우주’로 옮긴다. 라캉이 천문학자였단 말인가? ‘대학’이 ‘우주’로 바뀐 것이 역자에게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지 몰라도 독자로선 놀라 자빠질 일이다. 게다가 이 놀라운 번역서에서 역자는 엄청난 누락도 서슴지 않는다. 번역서 52쪽(원서 45쪽) 밑에서 6행 ‘그러나’ 앞에는 2/3쪽(20행)이 누락돼 있다. 정말 집어던지고 싶은 책이다!

해서 책을 더이상 읽어나갈 수가 없다. 역자나 출판사측의 책임있는 해명을 요구하고 싶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5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panda78 2004-07-15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Universe가 우주 아닌가요? 와하하. 이건 정말 우습네요. 출판사에 항의 하셔도 되겠습니다. ^^;;; 이런 책은 리콜해야 한다고 봅니다. 네.

이온서가 2005-02-12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너무 통쾌합니다. 동문선에서 나오는 책들은 대부분 이 수준입니다.
문제는, 동문선에서 좋은 책들을 미리 죄다 선계약 해놨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범죄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동문선에 항의하는 모임이라도 만들어야 될 듯....

로쟈 2005-03-05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마슈레의 <문학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를 살펴보았는데, 정말 무슨 생각으로 번역하고 책을 냈는지 알 수 없는 물건이더군요. 동문선은 '동문악'으로 개명이라도 해야겠습니다...

Dieyoung 2005-11-22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라보이 지젝'은 이 책의 번역에 대한 하나의 증상으로 보이는군요(웃음).

해줘 2008-12-26 0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대한 동문선 오역본 시리즈. 개인적으로 동문선은 대한민국 인문학의 적과 같은 출판사라고 생각. 공감합니다.

카니발 2011-01-15 0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동문선의 불어번역사 가운데 제대로 끝까지 읽어본 책들이 없어요. 개론서 조차도 읽기 어렵게 번역이 되는지!
 
니진스키 영혼의 절규
바슬라프 니진스키 지음, 이덕희 옮김 / 푸른숲 / 2002년 12월
평점 :
절판


“러시아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 러시아 시인 츄체프의 시구인데, 고골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작품들 속에서 ‘황당한’ 인물들을 만나다 보면 자연스레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이다. 비단 문학작품이 아니더라도 러시아란 나라의 자연적/역사적 조건에 대한 약간의 상식만 갖고 있으면 이 나라의 ‘비합리성’에 대해서는 어림짐작이 가능하다. 혁명 이전 전세계 육지의 1/6에 해당하는 광활한 영토와 한랭한 기후가 이 나라의 자연적 조건이라면, 3세기에 걸친 이민족 몽고의 강압적인 지배는 그 역사적 조건이다.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너무도 잔혹한 삶(러시아적 삶!), 그래서 비인간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조건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러한 조건 속에서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덕목은 ‘인내’였다. 러시아의 인텔리겐차들이 자인한 바 있듯이 러시아적 영혼이란 달리 ‘노예적 영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의 노예적 상태란 단지 정치적 부자유나 신체적인 구속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또한 인간 실존의 조건이면서 동시에 폭력과 고통으로 얼룩진 인류사의 역사적 조건으로 확장된다. 그리고 그 조건에 대한 인내의 '폭발'에서 광기의 계보학은 태어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1866)에는 어린 로쟈가 학대받는 늙은 말의 목을 껴안고 흐느끼는 장면이 나온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유일한 심리학자’라고 일컬은 바 있는 철학자 니체는 1889년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에서 학대받는 말의 목을 끌어안고 흐느끼다가 쓰러져 정신을 잃는다. 이후에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 그는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900년에 사망한다. 1889년에 태어난, 20세기초 러시아가 낳은 전설의 발레리나 바슬라프 니진스키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디오니소스적인 영혼의 소유자는 철학을 하는 대신에 춤을 추었을 뿐.

그는 10년은 자라고, 10년은 배우고, 10년은 춤추고, 나머지 30년은 정신병원에서 보냈는데, ‘영혼의 절규’란 이름을 새로 얻은 그의 ‘일기’는 그가 정신을 놓기 직전인 1919년초 6주간에 걸쳐 씌어진 기록에 근거한다. 한 민감한 영혼이 삶의 고통과 싸운 이 쟁투의 기록에는 도스토예프스키적, 니체적 흐느낌이 가득 배여 있다.

그는 고기를 먹으면서 울고, 사랑의 시를 적으면서 울고, 아내의 울음 때문에 또 운다.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전설적인 발레리나’ ‘위대한 예술가’라고 했지만, 그 자신에 의하면 그는 “너무나 많은 고통을 받은 단순한 사람”이며, 그는 “그리스도도 내가 평생에 걸쳐 받은 고통보다 더 많은 고통을 받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왜 그런가? 그가 받은 고통은 그 자신의 몫만이 아닌 전 인류의 고통이기 때문은 아닐까? 한 시인을 위해 울어주던 버드나무처럼 그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운다. 그의 일기는 이 울음의 기록이다: “나는 울고 싶은데 신은 내게 쓰라고 명령한다.”

정신의학자들에 의하면, 그의 병명은 정신분열증, 더 정확하게는 ‘자기애적 인격의 분열적 정서 혼란’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자기애적’이란 진단은 절반만 옳다. 브로일러나 프로이트 같은 당대의 대가들조차도 치유할 수 없었던 그의 병증은, 라스콜리니코프가 앓았고 또 니체가 앓았던 병, 곧 자기애-인류애적 정신분열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병증의 치유는 자기만의 구원이 아닌 전인류의 구원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병증의 환자들은 “저를 구원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저를 맨마지막에 구원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한다.

자기애-인류애적 정신분열증 환자들의 경전과도 같은 이 책에서 니진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인간이지 짐승이 아니다.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 나 역시 결점들을 지녔다. 나는 인간이지 신이 아니다. 나는 신이 되고 싶다... 나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다. 이것이 내 인생의 목표이다.”(348쪽) 당신도 그런 목표를 갖고 있는가, 라고 니진스키는 묻는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7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열린사회의적 2004-12-01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글을 잘 쓰시는군요.러시아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 부럽습니다. 니진스키 저도 읽어볼까요? 행복한 12월 되세요~~

알고싶다 2005-07-01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을 보니 매우 간결하게 잘 쓰셨습니다. 다만 정신분열병에 대한 제 의학적인 지식으로 볼 때 맞지 않는 부분이 보여 지적해드리고 싶습니다. 흔히 정신과의 의료 기록(Chart)에서 쓰이는 진단 용어는 일상적으로 쓰이는 언어와는 맥이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일종의 의료 기술적인 접근이 용이하도록 만들어진 용어죠. 일단 니진스키를 정신분열병 환자로 규정하면서, 의사가 그에 대한 진단을 '자기애적 인격의 분열적 정서 혼란'이라고 했다는 전제를 둔다면, 여기서 '자기애적'이라는 용어는 '자신을 사랑한다'라는 사전적인 용어가 아니라 의학적인 용어로 이해하여 해석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자기애적 방어 기제(Narcissistic defense)의 줄임말이죠. 이것은 니진스키의 심리 상태에서 투사적 동일화와 같은 내적 긴장의 완화 기교가 인식되었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자기애'적이라는 진단이 절반만 옳다는 해석은 잘못된 것입니다. 로쟈님이 이 글을 통해서 쓰신 '자기애-인류애적 정신분열병'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말씀하려고 하신 바는 이해가 가지만, 의료 용어에 대한 정확하지 못한 이해 혹은 해석은 혼란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지적드립니다. 인명도 틀리군요. 브로일러가 아니라 블로일러(Bleuler)가 맞습니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그 당시 블로일러나 프로이트가 정신분열병을 치유하지 못했더라도 그때(19세기~20세기 초반)는 정신의학의 태동기였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죠. 지금은 항정신병 약물을 복용하면 치유 가능성이 충분히 높은 병증입니다.

로쟈 2005-07-20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멘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투사적 동일화와 같은 내적 긴장의 완화 기교가 인식되었다는 뜻"이 어떤 뜻인지 좀 모호한데('완화 기교'는 무엇이고, 누구에게 인식되는 건지요?), 조금 자세하게 풀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