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마그리트 시공아트 18
수지 개블릭 지음, 천수원 옮김 / 시공아트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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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푸줏간에서 한 여인이 좋은 콩팥 두 점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끔찍한 콩팥 두 점을 달라고 요구하고 싶었습니다.'(17쪽) 마그리트의 말이다. 그의 그림들이 감동을 주지는 않지만 우리를 놀라게 하는 이유가 절반은 숨어있지 않을까? 나머지 절반은 장담컨대, 저자인 수지 개블릭이 책임지고 있다.

그녀는 마치 '당신이 마그리트에게 알고 싶었던 모든 것, 하지만 차마 옆사람에게 물어보지는 못한 것'에 대해서 답해주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이 마그리트와 그의 철학과 그의 회화에 대해서 폭넒고 깊이있게 쓰고 있다. 그래서 뒷표지에 실린 '확실히 마그리트 연구의 모범이 될 것'이라는 타임스의 서평이 허사만은 아니지 싶다.

의미심장하게도 책의 시작은 '철학과 해석'이다. 사실 재현을 거부하는 그의 그림들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지-개념들의 낯선 병치와 그것이 거두는 효과이다. 이런 사실은 그가 일생동안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걸 알게 되면 아주 자연스레 이해된다.

요컨대 '회화작품에서 그는 거의 천부적인 싫증을 보여 주었으며, 권태, 피로, 혐오감 사이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꾸며냈다'(9쪽) 그에게 회화가 가지는 의미? '그에게 있어서 회화란 정신이 지닌 두세 가지 기본적인 문제들을 끊임없이 변화하는 빛으로 표현하는 효과적인 수단이었고, 존재의 평범함에 대항하는 영원한 반란'(9쪽)이었다.

그는 일생을 두고 자신의 생각(정신)을 그림으로 그렸던 것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그는 화가의 특이한 유형이면서 동시에 철학자의 특이한 유형에 속한다. 넓은 의미에서 초현실주의 계열에 속하면서도 브르통 등과 결별했던 것도 그런 기질상의 차이가 빌미를 제공하지 않았을까 싶다.

저자는 마그리트와 초현실주의 회화의 선구자로 데 키리코와 시인 로트레아몽을 들어 자세히 설명하고 있고, 마그리트의 영향을 받은 팝아트와 마그리트의 관계에 대해서도 요령있게 설명한다.

하지만 그녀가 무엇보다도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는 것은 회화에서의 '재현의 위기'를 주제화하고 있는 마그리트 회화의 특징과 그 전략이다. 그녀는 파이프를 그려놓고 밑에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써놓아 어깃장을 놓는 그의 심보(?)를 아주 유려하게 해설해 보이는 것이다.



마그리트의 전략을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이렇다(138-140쪽) (1)회화에서 단어는 이미지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단어=이미지) (2)회화에서 오브제는 단어나 이미지와 동일하지 않다(오브제≠단어, 이미지) 그리하여 이제 더이상 재현적 회화란 가능하지 않으며 유효하지도 않다.

재현으로부터 해방된 회화는 무한한 가능성과 함께 회화적 불가능성에 직면한다. 무엇을 그린다는 것이 더이상 가능하지도 의미있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가는 무언가를 그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모순으로부터 현대 회화의 희소한 가능성과 과제가 동시에 산출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책은 비단 마그리트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뿐만 아니라 현대 회화를 조망하는 데 있어서도 아주 유익한 지침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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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레딩거의개 2006-10-18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ㅎ 근데 님 전공이 무엇이셧나요?

로쟈 2006-10-18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를 한번만 둘러보시면 전공은 알아맞히실 수 있을 겁니다.^^
 
어떻게 인간적 상황을 벗어날 것인가 - 인간과 종교, 제사, 축제, 전쟁에 대한 소묘
조르주 바타유 지음, 조한경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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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설서에 의하면 바타유 입문서로서 가장 좋은 책은 <에로티즘>이다. 그리고 이 <종교론>(<어떻게 인간적 상황을 벗어날 것인가>의 원제)은 가장 읽기 어려운 책 중의 하나이다. 국내 번역되어 있는 바타유의 책 가운데 가장 얇은 분량이지만, 가장 읽기 힘든 것이다!

그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는 것이 '난해한' 번역이다. 물론 바타유의 원문 자체가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겠지만, 우리말 문장도 잘 안 돼 있는 몇몇 대목에서는 역자의 무신경함을 탓하게 된다.

가령 '존재들이 불분명하게 묻인 세상만이 쓸데없는 세상, 목적없는 세상, 하릴없는 세상, 의미없는 세상이다. 오직 자체로 가치가 있을 뿐이며, 그 외의 것은 아무것도 의미가 없으며, 다른 어떤 것도, 제 3의 것도, 그리고 그 뒤의 어떤 것도 의미가 없는 세상은 오직 그 세상이다.'(38쪽)라는 대목 등은 몇 번을 읽어야 대충 감을 잡을 수가 있다. 바타유가 말하는 바는, (좀 역설적이지만)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세상이란 쓸데없는 세상, 목적없는 세상, 하릴없는 세상, 의미없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목적에 의해서 그 가치가 규정되는 도구적 유용성의 세계와 대척되는 세계를 말한다.

바타유가 말하는 인간적 상황이란, 도구적 유용성에 포획된 상황이다. 그것을 그는 사물의 세계라 말하고, 현실적 질서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세계/질서는 그 자체로는 수단적이며 무의미하다. 인간은 그것을 벗어나서 내재적 신성(=연속성의 세계)에 합류하고자 하며, 그 합류의 방식들을 바타유는 종교적인 것으로 지칭한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제사(희생)와 축제이다. 제사와 축제는 '미래를 염려하는 생산의 반대명제이며, 오직 순간에만 관심을 갖는 소모이다.'(63쪽) 마르셀 모스에게 빚지고 있는 이 '소모'는 소비와 대조되는 개념이다. 그것은 생산에 복무하지 않는 무자비한 탕진을 뜻한다.

바타유가 보기에 (고대인들과 비교하여) 근대인들의 불행은 그 소모가 더이상 미덕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것이 책의 2부인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에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전쟁(군사적 질서)라든가 산업의 증대(자본의 축적)이라는 것은 '관리되는 소모' 즉 가짜 소모라는 지적이다. 그리하여 '결국 현실의 원칙이 내밀성의 원칙을 눌러 이긴 것'(119쪽)이 근대 사회이다. 이러한 그의 진단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바타유는 이 책을 '인생을 가장 멀리까지 밀고 가볼 필요성이 있는 체험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바치고 있다(그런 의미에서 그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생각나게 한다). 그럴 필요성을 아직도 자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남아 있는지? 아니면 우리는 점차 이 사물적 세계, 현실적 질서에 순응하며 쥐죽은 듯이 살고 있는지 책장을 덮으며 궁금해진다. 오 겡끼 데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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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창비시선 203
허수경 지음 / 창비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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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의 두번째 시집을 읽은 지 햇수로 10년이 돼 간다. 그 사이에 그녀는 꽤나 '오래된' 시를 쓰고 있었던 걸 알았다. 시집 얘기가 아니다. 독일 유학을 떠나 선사고고학을 공부하고 현재는 동방문헌학 박사과정에 있으면서 여기저기 발굴답사도 다니고 하는 것이 그녀의 지난 10년 세월이었던 듯한데, 그게 시적이라는 거다.

그런 '시적 행적'에 비하면 시집에 실린 시들은 마치 말더듬이의 시들처럼 빈약하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흩날리는 풍경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기대 이하다. 시인의 말대로, '시를 쓰고 싶어하는 간절한 마음'은 읽히지만, 마음과 시는 안타깝게도 종류가 다른 걸 어쩌겠나.

가장 좋은 시는 역시나 <바닷가>이다. 리뷰들을 통해 눈에 익혀 두었던 시였지만, 더 좋은 걸 찾을 수 없었다. 사랑하는 손과 눈, 혀, 그리고 아마도 마음까지 '아는 사람' 집에 다 두고 왔음을 노래하는 이 시는 어지간한 마음까지 눈물 글썽이게 만든다.

글썽이고 싶네 검게 반짝이고 싶었네
그러나 아는 사람 집에 다, 다,
두고 왔네

해서 서두의 불만은 다소 누그러진다. 그대의 시는 더 오래 되었나니, 마음까지 다 두고 간 시인에게 '반짝이는' 시들을 요구하는 건 잔인한 일이지 싶어서이다. 게다가 '나의 고아들은 따스한 물이불을 덮고 잠이 들 것이다'(57쪽)는 걸 보면, 안쓰럽기도 하고. 그래서 발문을 쓴 신경숙의 말대로, 우리는 시인이 여전히 '시로 가는 길'에 서성이고 있다는 걸 확인하는 선에서 이번 시집의 의의를 찾아야 할 듯하다. 이 시집을 '현실의 시간을 넘어서는 오래된 시간 혹은 그 모국어의 공간을 향해 띄우는 간절한 편지'(이광호)로 읽고자 하는 한 평론가의 말에도 고개를 끄덕여주면서. 간절한 편지의 문체를 탓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시집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따로 있는데, 그건 신경숙이 쓴 발문이다. 신씨와 허씨의 대면기와 봉별기가 거기엔 간곡하게 들어가 있다. 둘이 한바탕 싸우고 시래깃국을 먹으며 화해한 얘기를 읽다가 괜히 눈물이 핑돌기도 했다(아, 시래깃국이여!). 바라건대, '토끼 고기' 같은 거 말고, 손맛 좋다는 시인의 시래깃국 같은 시들을, 다음에는 꼭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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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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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나온 지 벌써 5년이 되었다. 10쇄를 거듭하고 있다니 아직까지 잘 팔려나가는 소설인 듯싶지만, 왠지 뒤늦은 책읽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읽으면서 김빠진 사이다나 식은 죽을 먹는 듯한 느낌이 내내 들었으니까. 요컨대, '그래, 너는 너를 파괴할 권리가 있겠다만,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작가는 분명 재능이 있고 아직 젊다. 따라서 그의 가능성을 미리 예단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닌 듯싶다. 다만, 그의 소설이 지닌 '가벼움'이 '경쾌함'을 지나서 '무료함'에 이르는 여정이 나같은 독자에게는 마땅찮을 따름이다.

작가는 후기에서 몽상가 기질과 역마살을 소설쓰기의 동력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그런 맥락에서 이 소설이 여행안내서를 모델로 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럽다. 자살안내자로 등장하는 주인공 '나'는 압축할 줄 모르는 자들을 뻔뻔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너저분한 인생을 하릴없이 연장해가는 자들도 그러하다. 압축의 미학을 모르는 자들은 삶의 비의를 결코 알지 못하고 죽는다.'(10쪽) 그런 의미에서 여행안내서는 압축의 미학의 교본이자 소설의 전범이다. 이를테면, 소설에는 조서(調書)체(3인칭), 고백체(1인칭)과 함께 안내서체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삶의 비의'라는 것이 반드시 압축파일식으로만 저장되고 다시 해독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작가의 간결하고 건조한 문체는 그의 특장이지만, 등장인물들 어느 누구도 '사람다운' 면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은 적잖은 약점이 아닐까. '나'건, 'K'건, 'C'건, 그리고 '유디트'건 '에비앙'이건 모든 등장인물은 모두 그럴 듯한 이미지와 기호로 포장돼 있을 뿐 현실감이라는 아우라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맥빠지고 공허하다.

'자살보조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말짱 거짓말이지만 그것을 가능한 삶의 이야기로 읽게 하는 능란한 장인적 기예가 돋보인다'(148쪽)고 예심평은 적고 있는데, 나는 이 소설이 '말짱 거짓말'(꽃으로 치면 조화)이라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가능한 삶의 이야기'라는 데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도대체 이 작품 어디에서 향기가 나는지?). 소설 내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그림 이야기들과 CD플레이어의 노래들만이(마리아 칼라스며 레너드 코헨 따위) 가능한 삶의 흉내를 내고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독자들을 잠시 착각 속에 빠뜨릴 따름이다(작가는 인터넷 자살사이트를 그런 '가능한 삶'의 현실화(!)고 항변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줄거리가 같다고 해서 현실과 허구가 동일시될 수는 없다.)

나는 소설이 (여행의) 구경거리라기보다는 체험의 형식이라고 믿는 쪽이다. 여행안내자로서의 작가는 이미 나같은 독자들에 대해서 '나는 너무 많은 의로인을 원하지는 않는다'(140쪽)고 일침을 놓고 있다. 그런 그의 인생은 '거실 가득히 피어 있는 조화 무더기들처럼' '언제나 변함없고 한없이 무료하다'(그러니 그에게 무얼 더 닦달할 것이냐!). 그의 마지막 말: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 인생이란.'(141쪽) 거기에 덧붙여, '왜 읽어도 변하는 게 없을까, 소설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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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부르크의 대가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책세상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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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의 작가 쿳시가 난데없이 1869년의 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를 호출한다. 해외여행 중이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의붓아들 파벨의 죽음을 통고받고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다. 그리고 아들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음모론을 쿳시-도스토예프스키는 교묘한 문학론으로 치환한다. 이것이 소설의 뼈대이다.

쿳시의 문학론은 일견 단순하다. 작가는 글쓰기를 위해서 모든 사람들 배반하고 또 영혼을 팔아먹는 작자라는 것. 그 배반의 맛은 식초맛인가, 쓸개맛인가? '이제 그는 그것의 맛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것은 쓸개즙 맛이다.'(328쪽) 그렇다면 이 소설의 제대로 된 독법은 그 쓸개즙 맛을 얼마만큼 따라가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책을 읽고난 감상은 다소 씁쓸했다...

실제 도스토예프스키의 의붓아들 파벨(1848-1900)은 소설에서 그려지는 네차예프 사건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는 1869년에 페테르부르크에 간 일도 없다. 그렇다면 소설의 마스터(대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소설에서 작가 쿳시의 마스크이자 대행자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작가 쿳시는 아들을 자살로 잃었다고 한다. 아들의 죽음에 처한 한 작가가 그 비탄과 분노를 어떻게 떠밀어낼 것인가 하는 절박함이 이 소설에 형식을 부여하고 있다. 하지만, 그 형식은 다소 늘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단 '죽은 아이에 대한 슬픔은 끝이 없는 법이다'(103쪽)는 것이 전제이다. 하지만 결국 작가는 '죽은 아이를 살려낼 수 없다'(313쪽)는 것이 결론이다. 쿳시-도스토예프스키는 끊임없이 자신의 아들을, 아들의 영혼을 불러내고자 하지만, 그것은 불가항력적으로 불가능하다. 그에게 남겨져 있는 일은 다만 아들의 죽음을 수습하면서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른바 배신의 글쓰기이다. 그런데 죽음의 의미는 '죽을 때까지 서로의 적인 아버지와 아들'(314쪽) 사이에서 생성된다. 여기서 '내' 아들의 죽음은 그 구체성을 상실하는 대신에 보편성을 획득한다.

그렇다면 러시아라는 시공간은 사실 이 소설에서 그다지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지 못하며 플롯 또한 마찬가지이다. 소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죽음에 대한 사변적인 푸닥거리이다. 그것은 여자들이 갖고 있는 굉장한 비밀로서의 울음을 갖고 있지 못한 사내들의 신음 소리이기도 하다.

아들의 죽음 이후에도 살아야 하는 아버지-작가란 무엇인가? 영혼을 단념한 존재들 아닌가! 소설은 그런 존재들이 가진 '고통의 무딘 부재'에 대해 이빨 사이로 새는 듯한 문장들로 서술하고 있다. 그것은 씁쓸한 쓸개즙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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