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며칠보다 두시간 더 잠을 잔 탓에 여행기를 적을 시간이 부족해서 옹플뢰르에서 찾았던 부댕박물관과 사티박물관 얘기는 생략하고 보들레르에 대해서만 적는다. 사실 보들레르의 옹플뢰르에 대해서 이번 문학기행을 준비하던 중에야 알게 되었다.

사실 이상한 일도 아니다. 그의 작품에는 나오지 않는 지명이니까. <악의 꽃>(1857)을 출간하고 보들레르는 1859년 계부가 옹플뢰르에 구입한 저택에서 체류했다(계부는 1857년 사망).

보들레르가 ‘장난감 집‘이라고 부르며 사랑했던 이 저택은 현재 철거되고 남아있지 않다. 건물이 있던 자리에 그 역사만 기록돼 있다. 보존되었다면 아마도 번듯한 보들레르박물관으로 꾸며져도 좋았겠다. 안내판만으로는 부족했는데 저택이 있던 자리에 ‘보들레르거리‘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는데 실제로 찾아가보니 ‘보들레르 골목‘이라고 번역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옹플뢰르 시절에 보들레르는 <악의 꽃> 2판(1861)에 수록될 대표작 ‘알바트로스‘를 완성하는데, 이 시에 옹플뢰르의 기여분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유작으로 나올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에 실린 ‘항구‘는 옹플뢰르를 묘사하고 있다는 게 정설이다. 그밖에 여행을 모티브로 한 몇편의 시들이 그 영감을 옹플뢰르에 빚지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보들레르의 옹플뢰르를 상기시켜주는 장소나 기념물은 제한적이었지만(옹플뢰르의 우울?) 문학기행의 의미는 찾을 수 있었던 방문이었다... 조식을 먹을 시간이어서 급하게 마무리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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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앙에서의 하룻밤을 뒤로 하고 일행은 카부르로 향했다. 버스로 한시간반쯤 소요되는 거리. 휴양도시로 조성된 카부르는 비수기라 한산한 모습이었다. 우리가 찾은 이유는 순전히 프루스트 때문. 프루스트가 즐겨찾았던 숙소 그랜드호텔과 해변의 프루스트 산책로를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카부르는 발베크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카부르에 도착하여 해변 방향으로 조금 걸어보니 사진으로 익숙한(영화 <되찾은 시간>에도 등장한다) 건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목적지 그랜드호텔. 호텔앞 정원에 있어야 할 프루스트 동상은 자리에 없었지만(벨에포크박물관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호텔 내부에는 프루스트와 관련한 사진과 그림이 잔뜩 진열돼 있었다. 프루스트 호텔이라는 별명이 붙여질 수도 있을 정도로. 호텔로비를 통과하면 바로 해변이 펼쳐졌고 역시나 사진으로 보았던 산책로가 눈에 들어왔다. 자연스레 영화속 스크린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 유 인 더 픽처?˝(영화 <바톤 핑크>의 대사)

작가의 장소, 작품의 공간을 찾는 일은 프루스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독서의 시간을 되찾는 경험이다. 카부르는 프루스트 독자들에게 자연스레 그 시간을 되돌려주었다. 프루스트 독자들답게 우리는 호텔로비에서 마들렌 과자를 곁들여 차와 커피를 마셨다. (비싸고 맛없는 커피였다는 후문이 있었지만) 프루스트의 마법에 그조차도 의식하지 못한 분들이 있을 것이다.

카부르 방문을 마친 일행은 다시 버스에 올라 인상파의 항구로 불리는 예향 옹플뢰르로 향했다(가이드는 한국의 예향으로 통영에 견주었다) 역시나 노르망디의 해안도시인 옹플뢰르는 미술에선 모네의 스승, 외젠 부댕의 도시이고, 음악에선 에릭 사티의 도시다. 그리고 문학독자들에겐 보들레르의 도시가 될 수 있다. 카부르에서는 40분정도 소요되는 거리. 옹플뢰르 초입의 식당에서 프랑스식 정식으로 맛있고 배부른 점심식사를 하고(생굴과 가오리, 치즈와 디저트로 이어졌다) 그림같은 항구와 명소를 둘러보았다. 이어진 동선은 외젠 부댕박물관과 보들레르거리, 그리고 에릭 사티박물관으로 이어졌다. 보들레르의 옹플뢰르에 대해선 따로 적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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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문학기행 3일차 행선지는 루앙이었다. 파리에서 북서쪽으로 100킬로쯤 떨어진 센강 하구의 도시로 문학에서는 플로베르의 도시, 미술에서는 모네의 도시(대성당 연작), 그리고 역사적으로는 잔다르크의 도시(1431년 잔다르크가화형을 당한 곳)다. 관광객이 루앙을 찾는다면 대개는 이 세가지 의미 때문이리라.

파리에서 버스로 한시간반쯤 이동하여 루앙에 도착했다. 숙소가 있는 구도심 안쪽으로는 대형버스가 진입할 수 없어서 인근에서 하차했고 도보로 투어를 시작했다. 가장 먼저 둘러본 곳은 루앙의 랜드마크인 대성당이다. 후기고딕양식의 대표적 건물로 프랑스에서 손꼽히는 교회건축물(이런 대성당이 존재한다는 사실로 중세 루앙의 위상을 가늠해볼 수 있다. 노르망디의 중심지이자 파리에 뒤이어 프랑스 제2의 도시가 루앙이었다).

앞서도 적었지만 루앙 대성당은 인상파의 대가 클로드 모네가 30여점의 연작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이 가운데 20여점이 여러 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듯싶은데, 오후에 들른 루앙미술관에도 한 점이 있었다). 마침 주일 오전이어서 성당에서는 미사가 진행되고 있었고 성당 내부를 조용히 둘러보면서 아름다운 성가대합창과 파이프오르간 연주를 덤으로 들을 수 있었다.

이어서 일행은 플로베르박물관을 찾았다. 플로베르의 생가이기도 한 이 곳은 현재 플로베르박물관이면서 의학사박물관을 겸하고 있다. 플로베르의 아버지와 형이 루앙의 손꼽히는 외과의사였던 사실과 무관하지 않은데 당시의 의약재부터 여러 진찰과 수술기구, 인체모형, 심지어 미이라까지도 전시하고 있었다. 플로베르의 방에서는 줄리언 반스의 소설로 유명해진 ‘플로베르의 앵무새‘도 볼 수 있었다. 플로베르문학에서 의학과 의학적 관점이 갖는 의의에 대해서 새삼 음미해보게 되었다.

플로베르의 방 진열장에는 <마담 보바리>(1857) 초판도 놓여 있었지만 아무래도 생가박물관적 성격을 띠고 있어서 플로베르의 전모를 보여주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독신의 플로베르가 어머니와 조카와 함께 살면서 대표작들을 집필한 인근 크루아세의 저택은 현재 본체는 보존되지 않고 별관만 남아있다. 전날 방문한 졸라의 집이 유족에 의해 기증, 보존돼 나중에 복원될 기회를 얻었던 것과 비교된다. 따로 후손을 남기지 않은 작가로선 감수해야 할 운명인 것인지.

하지만 그렇게만 볼 것도 아니다. 역시나 독신으로, 그리고 플로베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무명으로 생을 마친 카프카에 대한 프라하의 예우를 생각해본다면 말이다. 최근에 플로베르 문학호텔도 들어섰다고는 하지만 나로선 루앙시와 시민들의 무심함이 느껴진다. 인간혐오적인(어제 버스 이동중 강의에서 내가 쓴 표현이다) 작가 플로베르라면 개의치않을 듯싶지만.

루앙에서 오후 일정은 구도심과 잔다르크성당을 둘러보고 루앙미술관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지방미술관으로서는 손꼽힐 정도로 좋은 컬렉션을 갖추고 있다는 곳이다(카라바조와 벨라스케스의 작품도 있어서 이채로웠다). 주로 인상파와 모네의 작품에 대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자유시간을 가졌는데 오전부터 도보 투어를 진행해온 탓에 피로감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루앙에서 주어진 단 하루였기에(오늘 아침에는 루앙을 떠나 노르망디의 다른 도시로 향한다) 저녁은 일행 몇분과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먹었다. 영화 ‘줄리 앤 줄리아‘에 나왔다는 유명식당에서 졸음을 참으면서. 루앙의 밤길을 언제 또 걷겠는가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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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메당의 졸라의 집 방문의 뒤이은 일정이었던 반 고흐의 집(정확히는 반 고흐의 방이겠다. 고흐가 세를 살았고 생을 마친 아주 작은 방) 방문 이야기를 나중에 적겠다고 한 건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시간이 부족해서다. 시차적응이 아직 안 돼 밤 9시면(한국시간으론 새벽 5시) 피로가 몰려오고 새벽 3시엔 눈이 떠지기에(한국시간은 오전11시) 여행기를 적고 있는데, 그렇다고 전체 일정을 자세히 적을 정도로 시간이 나는 건 아니다. 당일의 일정(오늘은 플로베르와 모네의 루앙을 찾는다)도 준비해야 해서 오베르 쉬르우아즈의 고흐와 루이뷔통재단의 로스코에 관한 이야기는 미뤄놓은 것이다.

그럼에도 숙제를 좀 덜기 위해 고흐에 대해 한마디만 적는다. 앙토냉 아르토의 고흐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고흐에 대한 관심은 으레 그렇듯 대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때 최승자 시인이 번역한 어빙 스톤의 전기소설과 동생 테오와 나눈 서간집이 베스트셀러에도 올랐던 것 같다. 대학 신입생이 고흐의 그림을 좋아하는 건 비틀즈의 음악을 좋아하는 것만큼 자연스러울 것이다(지금은 바뀌었을까?).다르게 말하면, 특별하지 않은 일이다. ‘나의 빈센트‘를 말하려면 박홍규 교수처럼 <내 친구 빈센트> 정도는 써주어야 하리라.

문학기행 짐을 챙기면서 고흐 책을 두권(이나) 넣어 왔는데 하나가 최근에 다시 나온 아르토의 <사회가 자살시킨 자, 고흐>다. 앞서는 <나는 고흐의 자연을다시 본다>로 나왔던 책의 새 번역본이다. 가벼운 책이어서 좀 무거운 시공아트 총서 <반 고흐>와 같이 들고 왔는데, 어제 오베르 쉬르우아즈를 방문하고 비로소 책을 읽으니 흥미롭게 읽히는 대목들이 있다.

그 자신 정신질환으로 각지의 정신병 치료와 요양시설을 전전했더 터라 아르토는 누구보다는 고흐를 내부적 시점에서 공감하고 이해한다. 반면에 정신의학에 대해선 증오에 가까운 적대감을 갖고 있으며, 고흐에게 오베르 시절의 가장 중요한 인물인 정신과 의사 가셰 박사에 대해서도 매우 부정적으로 해석한다. 아르토는 그가 고흐의 자살에 실제적인 원인 제공자라고까지 본다.

˝반 고흐는 먼저 그에게 조카의 탄생을 알린 동생에 의해 세상으로부터 쫓겨나게 되었고, 그 다음으로 어느 날, 의사로서 반 고흐가 잠자리에 드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으면서도 그에게 휴식과 고독을 권하는 대신 풍경화를 그리라며 밖으로 내보낸 가셰 박사에 의해 세상에서 추방된 것이었다.˝(93쪽)

고흐의 정신질환과 예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난무하고 또 많은 책들이 나왔다. 우연이긴 하지만 아르토의 문제제기를 실마리로 삼아서 고흐의 작품을 다시 들여디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조식을 먹으러 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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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문학기행의 첫 일정은 에밀 졸라의 집, 메당의 집 방문이었다. 숙소에서 30분 정도 거리(주말이어서 시간이 단축되었다). 파리의 교외지역인데 19세기와는 달리 지금은 부르주아들의 저택도 많이 들어섰다고 한다. <목로주점>(1877)의 히트 덕분에, 그리고 1878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소란을 피하기 위해서 졸라는 집장기간의 복원공사 이후에 2021년에 개장했다고.

건물 자체는 사진으로 이미 본 터여서 친근하게까지 느껴졌다. 졸라는 10여년에 걸쳐 저택과 주변 택지를 구입하고 증축, 확장했다(집은 연결된 세 동으로 구성돼 있는데 <목로주점> 성공으로 중앙 동을, 그리고 <나나>와 <제르미날>의 수입으로 좌우 동을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는 드레퓌스박물관이 된 별채를 손님들을 위해서 지었다.

이 졸라의 저택을 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이 찾았고 ‘메당의 저녁‘은 모임의 이름이 되었다. 그들 가운데 문학사에 족적을 남긴 이들이 모파상과 위스망스, 도데 등이다. 1880년에 나온 사화집 <메당의 저녁>은 1870년 보불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모음집으로 모파상의 대표작 ‘비곗덩어리‘를 수록하고 있다.

졸라의 집은 기대 이상으로 잘 꾸며져 있었다(1902년 졸라의 사망한 뒤, 1906년 아내 알렉산드린이 건물을 관에 기증하고 이후에 상당기간 동안 고아들의 보육시설로 이용됐던 걸 감안하면). 작가의 공간(특히 서재)이 고스란히 복원되기는 졸라의 공간을 상상하는 데는 충분했다. 정면의 큰 채광창(원래는 스테인드글라스였다고 한다)을 둔 서재에는 넓다란 책상과 의자가 놓여있었는데, 얼핏 봐도 골동품의 인상을 주는 의자는 졸라가 실제로 앉았던 것이라고 한다.

˝한줄도 쓰지 않은 날은 없어야 한다˝가 신조였던 졸라는 주로 오전 네 시간에 집중해서 작품을 썼다. 오후에는 산책을 즐기며 정원을 둘러보고 메당을 센느강 풍경도 즐겼으리라. 산책로 한쪽에는 언제 만들어졌는지 모르겠는데 졸라의 흉상도 있어서 그 옆에 서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졸라의 집 구경은 바로 별채의 드레퓌스박물관 견학으로 이어졌다. 2021년 10월에 개괸했으니 이제 2년 된 곳이다. 입구의 박물관삽을 통과하면 바로 전시실로 들어서게 되는데, 드레퓌스사건과 관련한 온갖 자료가 망라돼 있어서 프랑스사회를 양편으로 갈라서 들끓게 했던 사건의 한복판으로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1894년에 프랑스군 참모본부의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 대위에 대한 기소에서부터 시작된 이 사건이 최종적으로, 드레퓌스의 무죄로 종결된 건 졸라가 사망한 뒤인 1906년이다.

프랑스의 맹목적 애국주의와 반유대주의, 그리고 군부의 비뚤어진 자존심과 기만의 합작품이었던 이 사건은 1898년 졸라가 드레퓌스의 무고와 군부의 거짓선동을 비판하는 격문 ‘나는 고발한다‘를 일간지에 발표함으로써 극적인 전환점을 맞았고 이로 인해 졸라가 기소되기까지 했지만(졸라는 영국으로 피신하여 8개월간의 망명생활을 한다) 결국은 진실의 승리로 귀결된다(졸라는 자신의 기고글들을 모아 <전진하는 진실>(1901)을 출간하기도 했다).

사건이 그렇게 종결되면서 드레퓌스 대위(이미 복권돼 진급했었지만)는레종도뇌르 훈장을 받고 졸라는 판테옹으로 이장된다(작가로서는 1885년 빅토르 위고 이후 판테옹에 안장된 대표 사례다). 졸라를 단순히 작가라는 말 대신에 지식인-작가로 부르게 된 배경이다. 졸라 이후 ‘지식인-작가‘는 프랑스문학의 특징이자 전통이 되며 앙드레 지드와 장 폴 사르트르로 바톤이 이어진다...

졸라의 집과 드레퓌스박물관을 방문하면서 졸라의 성취와 업적에 대해서, 작가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사실 일행이 더 흥미를 가졌던 이야기는 졸라의 예기치않은 사생활, 즉 아내의 하녀였던 잔느 로즈로와 사이의 관계, 그리고 그녀에게서 얻은 두 자녀(졸라 사후에 에밀졸라라는 성을 갖게 된다)에 관한 것이었다. 늦은 나이에 외도로 자녀들을 얻게 된 졸라는 사진술을 배워 이들의 사진집까지 펴낼 정도의 자상한 아버지이기도 했다. 마침 기념품샵에 <에밀 졸라와 사진>이라는 양장품 불어책이 있기에 기념으로 구입했다.

가볍게 비가 흩뿌리는 만추의 주말, 우리는 반나절의 졸라 기행을 뒤로 하고 다시 버스에 올랐다. 빈센트 반 고흐가 생의 마지막 70일을 보낸 작은 마을 오베르 쉬르우아즈(‘우아즈강변의 오베르‘란 뜻)로 향했다.(이번 문학기행은 부분적으로 미술기행도 겸하고 있는데, 고흐는 오베르 쉬르우아즈와 오르세미술관 특별전에서 만나보게 된다. 반 고흐 이야기는 특별전을 관람하고 적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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