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관함에 들어 있는 책들이 얼추 열권은 넘어가기에 비우는 기분으로 몇 자 적는다. 식후에는 바로 일(혹은 공부)하지 않는다는 '철칙' 때문에, 게다가 오늘은 바깥 산책을 하기에는 날씨가 너무 쌀쌀하기에, 단순작업으로 시간을 좀 때워보려는 의도도 있다. 지난 주간에 나온 책들은 다 막상막하이지만(그러니까 결정적으로 눈에 띄는 책은 없었다는 얘기), 가장 먼저 꼽을 책은 스티븐 존슨의 <굿바이 프로이트>(웅진지식하우스, 2006)이다.

 

 

 

 

'인간 심리의 비밀을 탐사하는 뇌과학 이야기'란 우리말 부제를 단 이 책의 원제는 'Mind Wide Open'(2004). 스탠리 규브릭의 유작 '아이즈 와이드 샷'을 패러디한 제목이란 걸 바로 알 수 있다. 과학 저널리스트인 저자의 책으론 "복잡계 과학을 새롭게 설명한 베스트셀러" <이머전스>(김영사, 2004)와 <무한상상 인터페이스>(현실문화연구, 2003) 등이 소개돼 있으니까 우리 서가와는 이미 안면을 튼 사이이다. 이번에 그가 낸 책은 "흥미진진한 뇌과학의 세계"이다.

소개에 따르면, "책은 뇌과학의 연구 성과를 통해 웃음의 전염성, 집중력과 공포심의 정체,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능력, 마인드컨트롤의 원리, 자폐증의 원인 등을 살핀다. 질문이 일상적인만큼 그 질문을 푸는 방법도 대중적이고 쉽게 접근한다. 전문용어를 제한하고, 뇌의 영역·신경화학물질·신경 전달체계 등을 설명하는 데 있어 기초적이고 필수적인 사항만 모아 독자들을 배려했다. 특히 프로이트가 만들어놓은 심리적 가설을 뒤흔들며 마음에 관한 이론을 새로 쓰게 만들었던 유명한 실험들을 폭넓게 다뤘다. 실험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흥미로우며, 실험 속엔 인간 행동과 감정의 비밀을 푸는 과정이 상세하게 드러나 있다. 책에 나온 선구적인 실험들은 최근에 와서 뇌과학 실험으로 다시 한 번 입증됨으로써 인간과 마음의 풍경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계기를 제공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은 이런 것이다: "프로이트는 뇌의 특정한 영역이 의식의 통제 바깥에서 작용한다고 주장한 점에서는 옳았다. 하지만 우리가 현재 이해하고 있는 한 뇌의 구조에 생물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은 없다(우리 신체 기관들에게 일상적인 관리 업무를 중단할 때를 말해주는 생체 시계의 형태로, 우리의 유전 구조에 죽음 충동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공포 반응은 그것이 아무리 우리를 무력화시키든 간에 근본적으로 살아 있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미처 생각할 시간이 없는 상황에서 살아남으려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절반만 옳았기에, 그러니까 절반은 틀렸기에 국역본의 제목은 '굿바이 프로이트'가 된 모양이다.

저명한 언어학자이자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가 "이 책은 뇌과학의 최전선을 둘러보고 쓴 명쾌하고 재미있는 여행담"이라고 칭찬하고 있고, 동료 저널리스트인 존 호건도 "스티븐 존슨의 신나는 현대 뇌과학 여행담은 내 뇌를 자극하고, 흥분시키고, 감동시키고, 놀라게 하고, 무엇보다도 즐겁게 한다"고 증언하고 있으니까 책의 품질에 대해서는 안심해도 좋겠다. 게다가 부지런한 전문번역가의 번역이다. 분량도 312쪽으로 아주 부담스럽지는 않다(물론 프로이트와 작별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지만!). 비록 뇌과학보다는 정신분석학 책들에 더 자주 손이 가는 편이지만, '적들의 생각'은 언제나 유익한 자극을 주므로 한번쯤 읽어볼 생각이다.

 

 

 

 

두번째 책은 장 클로드 카리에르의 <부탁해요, 아인슈타인>(모티브북, 2006)이다. 불어본 원제가 'Einstein S'il Vous Plait'(2005)이니까 국역본의 제목은 지어낸 게 아니라 직역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과학철학'이라고 부제가 달려 있는데, 270쪽 정도의 분량이기 때문에 그냥 지나갔을 뻔한 책이지만, 알고 보니 저자가 제법 지명도가 있는 사람이다.

시나리오 작가, 감독이자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는데, 한편으론 프랑켄슈타인 전문가이며, 국내엔 <영화, 그 비밀의 언어>(지호,1997)와 <프랑켄슈타인>(이룸, 2004) 외에도 <현자들의 거짓말>(영림카디널, 2000)이나 <시간의 종말>(이끌리오, 1999) 등 그가 단독 혹은 공동저자로 참여하고 있는 책들이 이미 소개돼 있다.

소개에 따르면, 책은 "소설 형식으로 아인슈타인의 과학과 철학을 들여다본다. 어떤 여대생이 시간의 법칙을 이탈해 20세기 초중반에 살고 있던 아인슈타인 앞에 나타나고,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3차원 위에 시간의 차원을 덧붙여 인간의 인식을 근본적으로 탈바꿈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그 바탕이 된 사상, 그리고 그의 지난 인생 이야기를 들려준다." 고로,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겠다. 마치 이번에 나온 스티븐 호킹의 개정판 <시간의 역사>, <짧고 쉽게 쓴 '시간의 역사'>(까치글방, 2006)처럼.  

 


 

 

세번째 책은 <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이산, 2006)이다. 이 또한 '지피지기'하기 위한 텍스트인데, 후쿠자와는 알다시피 일본 메이지 시대 최대 계몽사상가이며, 1만엔권 지폐에 초상화가 실려 있을 만큼 일본 근대화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다. 더불어, '문명(civilization)', '연설(speech)', '경쟁(competition)', '저작권(copyright)' 등의 번역어들의 저작권자이기도 하니까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의 용어들로 숨쉬고 생각하고 있는 셈(그는 '문명'의 아버지이다!).

소개에 따르면, "이 자서전(원제 '복옹자전')은 1897년 후쿠자와가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만년까지의 인생역정을 구술하여 속기사에게 필기시킨 것이다. 가난한 하급 무사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서양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양이론과 쇄국이 주류를 이루던 당시 일본의 서양문명화에 평생을 바친 일대기를 만날 수 있다. 일본 자전문학의 백미이자 일본근대사 연구의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는 기록이다. 성장기와 나가사키 유학 당시의 비화나 조기교육을 반대하는 자녀교육관, 술을 끊기까지의 에피소드 등 후쿠자와의 인간적인 면모를 묘사한 부분도 상당부분 포함되어있다. 또한 부국강병으로 시작하여 군국주의로 이어지는 대표되는 일본 근대 지식인의 어두운 가치관을 함께 공유하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하여, 일본 근대사에 대한 흥미로운 텍스트로 읽을 수 있다."

지난번 WBC 준결승에서 우리는 일본에 아쉽게도 분패했는데(먼저 두 번 이긴 걸로 위안을 삼지만), 사실 실력으로는 아직 우리가 '흑번'이다. 근대화에 있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로 비록 삼성이 소니를 앞질러가고는 있지만 전체적으론 이 '이웃'에게서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분발해야 할 필요가 있다. 후쿠자와의 자서전을 읽는 건 그런 의미를 갖는다. 게다가 그의 주저 중 하나는 <학문을 권함>이니 읽어서 손해볼 일이 있겠는가?

 

 

 

 

네번째 책은 제리 멀러의 <자본주의의 매혹>(휴먼&북스, 2006). 원제는 'The Mind and The Market'(2002)이고, 부제는 '돈과 시장의 경제사상사'. 이른바 자본주의 경제사상사인데, 저자는 18세기부터 20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 사상사를 다루면서, "자본주의는 경제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전제하에, 자본주의가 낳은 정치적, 도덕적, 문화적 현실을 관찰하고 이를 당대 현실에서 비판하거나 정당화하거나 혹은 그 대안을 찾고자 했던 모든 현실 운동과 이론화 작업의 역사"를 조명한다고.

소개를 더 보태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사상가들은 모두 당대의 자본주의 현상을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극복 혹은 발전시키기 위해 평생을 몰두했던 사람들이다. 볼테르를 선두로, 애덤 스미스, 유스투스 뫼저, 에드먼드 버크, 헤겔, 마르크스, 매튜 아널드, 막스 베버, 지멜, 좀바르트, 루카치, 프레이어, 슘페터, 케인스, 마르쿠제, 마지막으로 케인스를 부정하고 완전한 자유주의 정책을 주창함으로써 20세기 마지막 2, 30년간 서구에서 가장 각광받은 경제학자가 된 하예크 등, 총 16명의 사상가와 주요 사상이 소개된다."

 

그러니 이 또한 (당신이 자본가가 아니라면) '적들의 생각'을 알기 위해서라도 읽어볼 만한 책이다. 왜?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면 자본주의에 대해서 알아야 하니까(한편으로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월가에서 가장 많이 읽는다고 하잖는가?). 이번에 론스타펀드가 수년전 헐값(?)에 인수한 외환은행을 매각하면서 4조원 이상의 이익을 챙길 거라고 하니까 (그런 걸 가능하게 하는) 자본주의는 가히 '매혹 덩어리' 아닌가?!  

북치고 장구치는 책소개: "‘자본주의란 정확히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돈과 시장이라는 자본주의적 현상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졌고 어떻게 해석되었는지, 그리고 이 새로운 현상이 인간의 다른 사회 영역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그 파급 효과가 어떠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성격을 알아보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좌파는 좌파대로 자신들의 사상적 기반의 원천을 살펴보는 것이며, 우파는 우파대로 논리를 가다듬는 기회가 된다." 고로, 양다리에 양수겹장인 책. 저자는 역사학과 교수이며, 이 책은 처음으로 번역/소개되는 그의 책이다.

유사한 성격의 책으론 리오 휴버먼의 <자본주의의 역사 바로 알기>(책벌레, 2000)와  피에르 독케스 등이 쓴 <모호한 역사>(한울, 1995)가 있다. 전자는 널리 알려진 베스트셀러이며, 후자는 아는 사람도 아주 드문 '모호한' 책이다. 하여간에 둘다 소장도서이긴 하다. 이들과  같이 읽을 만한 책 몇 권을 더 꼽아보자면, 피에르 잘레의 <자본주의란 무엇인가>(책벌레, 2000), 강만길 편,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역사비평사, 2000), 복거일의 <정의로운 체제로서의 자본주의>(삼성경제연구소, 2005) 등이 눈에 띈다. 자유주의 전도사 복거일이 자본주의의 수월성과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서 '정의'에 호소하고 있는 건 뭔가 어색하다는 인상을 주지만(정의롭지 않을 경우 '현실 자본주의'는 '진정한 자본주의'가 아니란 뜻을 함축하는 거 아닌가?).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폴란드 작가 스와보미르 므로제크(1930- )의 <초보자의 삶>(하늘고래, 2006). 제목에서 얼마간 짐작할 수 있는데, 책은 "인간사회의 위선을 위트 있게 표현한 풍자적 단편집"이며, "일상 속에서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한 39개의 주제를 다룬 짧은 이야기가 일러스트와 함께 어우러져 있다". 저자는 <탱고>, <이민자>, <스트립티즈> 등의 희곡으로 유명하다는 폴란드 작가인데, 나로선 첫대면이다. 유머러스한 동구권 작가로는 카렐 차페크가 먼저 떠오르는데, 짐작엔 비슷한 색깔의 작가이지 않을까 싶다.

소개에 따르면, "므로제크는 현대사회의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포착하는 발군의 통찰력과 유머를 자랑한다. 단편소설로 데뷔하고 풍자만화가로도 활동한 경력에서 알 수 있듯, 작가 특유의 해학과 정교한 표현은 삶의 부조리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가 쓴 이야기들은 인간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덮어쓴, 혹은 살아가기 위해 저절로 두터워진 각질을 콕콕 찌른다. 묵직하면서도 폐부를 찌르는 위트, 뛰어난 혜안이 일상의 몰상식을 적나라하게 지적한다." 분량도 가뿐하므로 어느 화창한 봄날 단숨에 읽어봄 직하다. 아래는 므로제크의 연극작품 <탱고>(1964)의 한 장면.

06. 03. 28.

P.S. 미술과 영화 책 몇 권이 소개에서 빠지게 됐는데, 다음에 몰아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딸기 2006-03-29 15:05   좋아요 0 | URL
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이 나왔군요. 소개 고맙습니다.

로쟈 2006-03-29 15:47   좋아요 0 | URL
저보다 먼저 아실 거 같은데요.^^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의 달력을 옮겨놓는다. 출처는 윤효윤 교수의  비평적 주석본 Lolita'(신아사, 1997)이다. 복사하면 되는 내용을 왜 타이핑해놓았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무려나 <롤리타> 독자들에게는 도움이 될 듯해서, 다시 편집해 놓는다. <롤리타>는 스탠리 큐브릭과 애드리안 라인에 의해서 두 차례 영화화되었는데, 여기서는 제레미 아이언스와 도미니크 스웨인이 주연한 라인의 <롤리타>(1997)에서 이미지들을 따온다. 

 

 

 

 

1910 파리에서 험버트 험버트(Humbert Humbert) 출생.

1911 오우션 시티(Ocean City)에서 클레어 퀼티(Clare Quilty) 출생.

1919 6월: 험버트의 집으로 카나리아 새 한 마리가 찾아오다. 그리고 같은 시간에 애너벨 레이(Annabel Leigh)의 집에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1923 6-8월: 리비에라(Riviera)에서 험버트와 애너벨이 여름을 함께 보낸다. 9월: 리용(Lyon)에 있는 중고등학교로 험버트 진학. 12월: 그리스의 코르푸(Corfu) 섬에서 애너벨 사망.

1934 4월: 해롤드 헤이즈(Harold Haze)와 샬롯 벡커 헤이즈(Charlotte Becker Haze) 신 혼여행으로 멕시코의 베라 크루즈(Vera Cruz)로 가게 되며 샬롯은 그곳에서 롤리타를 임신한다.

1935 1월 1일: 피스키(Pisky)에서 롤리타 돌로레스 헤이즈 출생. 4월: 헙버트 파리에서 모니크(Monique)를 만난다. 그후 험버트는 발레리아 즈보롭스키(Valeria Zborovsky)와 결혼한다.

1939 험버트와 발레리아는 이혼한다. 험버트는 미국에서 살던 삼촌의 유산을 받는다.

1939-40 겨울: 포루투갈에서 험버트 겨울을 지난다. 봄: 험버트 미국에 도착한다. 퀼티는 극 "어린 님프"(The Little Nymph)를 완 성한다.

1940-42 험버트 영미의 문학도를 위한 불문학사를 집필.

1943-44 험버트는 정신 요양소에서 치료를 받는다.

1944 여름: 롤리타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미스 팔렌(Miss Phalen)의 집에 가게 된다.

1944-45 험버트 북극 탐험대에 참가. 캘리포니아에서 출산하던 중에 발레리아 사망.

1945 11월: 헤이즈 가족 피스키에서 램즈데일(Ramsdale)로 이사.

1945-56 험버트의 북극탐험 보고서가 '성인 정신물리학 연보'(Annals of Adult Psychophysics)에 게재된다.

1946-47 험버트 다시 정신 요양원으로 간다.

1947 5월 30일-6월 3일: 험버트는 램즈데일로 가서 샬롯과 롤리타를 만난다. 6월 4일(목): 험버트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6월 9일(화): 롤리타의 눈에 있는 티를 험버트 혀로 잡아낸다. 6월 20일(토): 일기가 끝난다. 6월 21일(일): 험버트 긴 의자에서 롤리타와 함께 앉아 있는 동안 성적인 오르가즘을 경험 한다. 샬롯은 교회에 가서 험버트의 사랑과 주님의 인도를 바라는 기도를 올린다.

6월 23일(화): 험버트와 샬롯은 물건을 사러 나간다. 6월 25일(목): 화가 난 샬롯은 롤리타를 하계 캠프장(Camp Q)로 보낸다. 험버트는 샬롯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6월말: 험버트와 샬롯 결혼한다.

7월 30일(화): 험버트는 아워글래스 호수(Hourglass Lake)에서 샬롯을 살인하려는 충동을 느낀다. 8월 7일(화): 샬롯은 미스 팔렌의 편지를 받는다. 8월 8일(수) 험버트의 일기를 읽은 샬롯 격분하며 편지를 부치러 나가다가 집 앞에서 비일 (Beale)이 몰고 오던 자동차에 치여 죽는다. 8월 13일(월): 롤리타 하이킹을 떠난다. 8월 15일(수): 험버트는 롤리타를 데리고 오기 위해 캠프 큐로 간다. 험버트와 롤리타는 그 날 밤을 파킹턴(Parkington)에 있는 '도취된 사냥꾼들'(The Enchanted Hunters) 호텔 에서 보낸다. 퀼티 역시 이 호텔에서 묵는다. 8월 24일(일): 파킹턴의 영화관에서 "야성의 힘"(Brute Force)과 "악령"(Posssessed)이 상연된다.

1947-48 8월-8월: 미국 전역을 자동차로 여행한 후 험버트와 롤리타는 비어즐리의 13 타이어 스 트리트(Thayer Street)에 거주지를 정한다.

1948 11월: 롤리타는 교실에서 자주 한숨을 쉰다. 12월: 교장 선생은 험버트에게 롤리타가 "도취된 사냥꾼들"이라는 연극에 참가할 수 있도록 허가해 주기를 요청한다. 크리스마스: 롤리타는 기관지염에 걸린다.

1949 1월 1일(토): 험버트는 롤리타의 14회 생일 선물로 자전거를 사준다. 5월 20일(추정): 클레어 퀼티는 자신이 쓴 "도취된 사냥꾼들"의 공연 연습을 관람하며 이때 롤리타를 유혹한다. 5월 24일(화): 롤리타는 피아노 교습에 가지 않는다. 5월 27일(금): 롤리타가 다시 교습소에 나타나지 않자 미스 엠퍼러는 험버트에게 전화한다. 5월 29일(일): 험버트와 롤리타는 비어들리를 떠난다. 6월 7일(화): 험버트와 롤리타는 캐스빔(Kasbeam)에 있는 체스트넛 코트(Chestnut Court) 에 도착한다. 롤리타는 험버트가 이발소에 가 있는 동안 그곳에서 퀼티는 몰래 만난다. 험버트는 붉은 색 자동차가 계속 뒤따라오는 것을 느낀다. 6월 10일-14일: 롤리타와 험버트는 연극 "번개를 사랑한 여인"(The Lady who loved Lightning)을 관람하며 클레어 퀼티와 비비언 다크블룸(Vivian Darkbloom)을 보게 된다.

6월 14일-25일: 콜로라도주의 캠피온(Champion)에 도착하며 그곳 호텔에서 엉터리 전화를 받는다. 험버트가 없는 사이 퀼티는 롤리타와 정구 게임을 한다. 붉은 색 수영복을 입고 장난치는 롤리타의 모습을 보고 험버트는 구토를 느낀다. 6월 27일(월): 엘핀스톤(Elphinstone)에 있는 실버 스퍼 코트(Silver Sper Court)에 도착하 고서 롤리타는 몸이 아파 그곳 병원에 입원한다. 7월 20일(토): 험버트는 60마일을 운전한 다음 구입한 선물을 들고 롤리타를 만나러 병원 으로 간다. 그곳에서 폰더로사 로지(Ponderosa Lodge)라고 인쇄가 된 봉투를 본다. 7월 3일(일): 험버트는 몸이 아파 롤리타가 있는 병원을 찾지 못한다. 7월 4일(화): 오후 2시쯤 롤리타는 퀼티와 함께 병원을 나간다. 7월 5일-11월 18일: 험버트는 폰더로사 로지와 비어즐리 사이에 있는 342개의 여관을 수색한다. 겨울: 퀼티와 헤어진 다음 롤리타는 식당에서 일한다.

1950 1월 1일: 험버트는 롤리타의 생일 선물로 사주었던 자전거와 롤리타의 다른 물건들을 고아 원에 보낸다. 얼마후 험버트는 정신 요양소에 입원 5월까지 그곳에 머문다. 5월: 험버트는 리타(Rita)를 만난다.

1951 9월: 험버트는 방문교수로 칸트립 칼리지(Cantrip College)로 간다.

1952 6월: 험버트는 칸트립 칼리지 체재를 끝내고서 그곳 감옥에 갇혀 있던 리타를 데리고 나온다. 8월: 리타와 함께 험버트는 파킹턴을 방문하여 1947년 8월 기간의 신문을 찾아본다. 8월-9월: 한국전에 참전했던 찰스 홀름즈(Charles Holmes) 전사. 9월 18일(목): 롤리타는 험버트에게 돈을 부쳐 달라는 편지를 보낸다. 9월 23일(화): 험버트는 콜몬트(Coalmont)로 가서 롤리타와 그녀의 남편 딕 쉴러(Dick Schiller)를 만난다. 롤리타는 자신을 데리고 간 사람이 퀼티임을 알려주지만 험버트를 따라가기를 거절한다. 9월 24일(수): 험버트는 램즈데일로 가서 퀼티의 주소를 그의 삼촌 이보르(Ivor)로부터 알아낸다.

9월 25일(목): 험버트는 권총으로 클레어 퀼티를 살해한 다음 난폭운전으로 구금된다. 11월 16일(월): 험버트는 관상동맥 혈전증으로 죽는다.(험버트는 요양소와 감옥에 있는 56일 동안 수기를 썼다고 말하는데 9월 25일부터 11월 16일까지 날짜를 계산하면 56 일이 된다.) 12월 25일(목): 그레이 스타(Gray Star)에서 분만 중에 돌로레스 쉴러(Dolores Schiller) 도 죽는다.

06. 03. 28.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크아이즈 2009-08-06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둠 속의 웃음소리> 문체가 좋다길래 찾다가 여기까지 왔어요. 중단편인 것 같은데 우리말 번역본은 시중에 나온 게 없나요? 롤리타의 모티프가 된 작품이라길래 더 궁금하네요.

귀한 책 내신 것 축하드립니다. 서재질을 못해서(아니, 안 해서) 늦은 소식 접했네요. 대박나시길 기원하면서 저도 책 살게요. (샀어요,가 되지 못한 건 너무 늦게 알아 이제야 장바구니에 접수했어요.)

로쟈 2009-08-07 08:40   좋아요 0 | URL
네, 예전에 박영문고에서 나온 번역본이 있습니다. 절판된 책이긴 하지만...
 

 

오래전에 모출스키(1892-1950)의 <도스토예프스키1,2>(책세상, 2000)에서 발췌/정리한 부분을 옮겨온다. <악령>에 관한 해설인데, 도스토예프스키의 '표현예술'에 대한 저자의 해명을 포함하고있다. 모출스키의 평전은 한국어로 구해볼 수 있는 가장 권위있는 책이다. 양과 질에 있어서 가장 깊이있고, 해박한 도스토예프스키 전기라고 할 수 있다. 바흐친의 <도스토예프스키 시학>(정음사, 1989; 중앙대출판부, 2003)과 더불어 도스토예프스키 이해와 연구에 있어서 필독서라 할 수 있다. 아래 사진은 러시아문학자 콘스탄틴 모출스키.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구조와 기법의 모든 특수성은 예술적 표현성의 원칙으로 설명된다. (1)주인공의 개성을 중심으로 한 사건 집중, (2)구조의 극적인 요소, 그리고 (3)어조의 수수께끼가 바로 '표현 예술'의 세 가지 특징이다.

(1) 작가는 단지 인간과 그 세계, 그리고 그의 운명에 대해서만 알고 있다. 주인공의 개성이 작품 구성의 중심축이다(이 작가와 주인공의 자세한 관계는 바흐친의 저서를 참조할 수 있다. 바흐친은 이러한 특징을 '다성악적 소설'이란 개념으로 정식화한다). 이 축을 중심으로 등장인물들이 배분되고, 플롯이 구성된다. <죄와 벌>의 중심에는 라스콜리니코프가 서 있다. 그리고 <백치>의 중심에는 므이시킨 공작이 있다. 이런 집중화는 <악령>에서 그 극치에 이른다. 작가의 노트에서 우리는 이미 다음과 같은 메모를 발견했다. "스타브로긴이 전부다." 그리고 실제로 소설 전체가 스타브로긴의 운명 그 자체이며, 모든 것이 그에 관한 것이고, 모든 것이 그를 위한 것이다. 아래는 연극 <악령>의 한 장면.

(2) 도스토예프스키의 표현 예술의 두번째 특징은 바로 연극성이다. <악령>은 비극적이고 희비극적인 가면들의 무대이다. 도입부 후, 다시 말해 과거 사건들에 대한 짧은 설명과 주인공들의 성격 묘사 후에 발단이 뒤따른다. 스타브로기나는 스테판을 다샤와 결혼시킬 계획을 세운다. 발단은 두 개의 극적인 대화로 구성된다.도스토예프스키의 인간 세상은 복잡한 상호왕래와 도덕적인 전일체처럼 이루어진다. 모든 주요 인물들이 '중요한 날'인 일요일에 '우연히'; 바르바라의 응접실에서 만난다. 이러한 운명적 우연성은 도스토예프스키 세계의 법칙이다. 그는 극적인 기법인 이 관례를 심리적 필연성으로 변화시킨다. 그의 등장인물들은 사랑과 증오로 서로에게 끌리며, 우리는 그들의 접근을 주시하고 갈등의 불가피성을 예감한다. 작가는 폭발을 앞두고 속도를 지연시키며 우리를 괴롭히고(독자의 흥미를 높이기 위해 진행을 늦추는 수법), 우리의 기대를 점점 고조시키면서(점층법), 거짓 대단원으로 우리를 속이고(급변), 마침내 대파국으로 놀라게 한다. 이것이 그의 역동적인 구성방식이다.

(3) 도스토예프스키의 표현예술이 갖는 세번째 특징은 바로 재미다. 작가는 독자들을 자신이 의도한 세계로 끌어들이고, 그들의 공감과 참여를 요구한다. 독자의 활동은 사건의 신비스럽고 낯설며 특이하고 예기치 못한 성질에 의해 유지된다. 작가는 자신의 개인적인 평가와 수수께끼, 암시 등으로 인상을 예상하고 강화한다. 수수께끼들은 또다른 수수께끼들 위에 계속 쌓인다. 이러한 수수께끼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좋아하는 표현기법이다. 하나의 비밀을 파헤치면 또다른 비밀이 나타난다. 끊임없이 비밀을 파헤쳐도 여전히 '혼돈의 숲'을 빠져나오지 못한다. 우리는 복잡한 여러 가지 사건들의 그물 속에 빠져 어쩔 수 없이 탐구자 또는 탐정이 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노트에서 소설의 독특한 어조에 대해 썼다. "이 작품의 어조는 네차예프(표트르 베르호벤스키)와 공작(스타브로긴)을 설명하지 않는 데에 있다. 그(네차예프)를 숨겨두고 강렬한 예술적 특징을 통해서 아주 조금씩 공개한다." 공작은 '불가사의하면서도 낭만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그리고 이것은 소설 속의 두 명의 '악마들'에게 특별하면서도 고통스러운 표현성을 부여한다. 무의 공허함은 그들의 환상적인 특징들 속에서 빛난다. 부정과 파괴의 영혼들은 끝까지 설명되거나 표현되지 못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뛰어난 창작술은 어둠의 점층과 빛의 대조, 그리고 이중 조명 속에 존재한다.(642-650쪽)

06. 03. 2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필요 때문에 몇년 전에 몇 자 적어둔 글을 옮겨온다. 카뮈의 <전락>에 대한 강의를 준비하면서 쓴 거 같기도 하다. 카뮈의 생애에 관해서는 올리비에 토드의 <카뮈>(책세상, 2000)를 참조했었다. 국내에서 나온 입문서로는 유기환 교수의 <알베르 카뮈>(살림, 20004)와 박홍규 교수의 <카뮈를 위한 변명>(우물이있는집, 2003) 정도를 비교적 최근에 나온 책으로 꼽아볼 수 있겠다. 물론 카뮈에 관한 가장 방대한 연구는 국내 최고의 권위자인 김화영 교수의 <문학 상상력의 연구>(문학동네, 1998 개정판)를 꼽을 수 있으며, 가장 최근에 나온 연구서는 김진식 교수의  <알베르 카뮈의 통일성 향수와 미학>(울산대출판부, 2005)이 있다.

카뮈(1913-1960)가 영향을 받은 러시아 작가들을 들라면, 톨스토이(1828-1910)와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가 대표적이겠지만(레르몬토프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전락>의 원고는 <우리 시대의 영웅>이란 제목이 붙을 뻔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들에는 아무래도 도스토예프스키의 흔적이 더 많이 배여 있다. 대표적인 작품이 <전락>(1956)이다.

 

 



 

이 작품은 카뮈가 43세 때 쓴 것이고, 그가 1960년에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기 때문에, <최초의 인간>을 제외하면 거의 유작과도 같은 작품이 되어 버렸다. 많은 사람들은 이 작품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역시나 도스토예프스키가 43세 때 쓴 작품)에 대한 20세기 버젼(혹은 변형)으로 이해한다. 나 또한 <전락>을 읽으면서 먼저 읽었던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벌써 십년도 더 된 얘기가 돼 버렸나...

나는 <지하생활자의 수기>(1864)를 대충 잡아도 대여섯 번은 읽은 듯하다. 더 읽었을지도 모른다. <전락>은 세 번쯤 읽었다. 이 두 작품을 비교하는 학위논문도 대충 읽어 보았다. 그래서? 과연 이 두 작가는 어디에서 만나고 어디에서 갈라지는 것인지? 요점을 말하자면, <전락>은 카뮈의 작품 중에서 가장 이채로운 작품이다. 달리 말하면, 카뮈적이지 않은 작품이다. 물론 이때 카뮈적이란 말은, <이방인>(1942)과 <시지프의 신화>의 카뮈를 말한다. 태양의 작가 카뮈, 지중해의 작가 카뮈.

 

 

 


도스토예프스키와 카뮈, 둘다 가난한 작가였고, 저널리즘에 종사하였으며(한 사람은 발행인으로, 한 사람은 기자로) 문학적 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던 것도 일치한다. 그래서 <지하생활자의 수기>가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1863)에 대한 문학적 응전(작가는 원래 리뷰를 쓰려고 했으나 결과는 작품이었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이었다면, <전락>은 <반항적 인간>(1951)을 놓고 벌어졌던 사르트르(패)와의 논쟁에 대한 작가로서의 답변서라고나 할까. 작품의 많은 모티브들은 이 두 논쟁을 염두에 두고서야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그리고 형식(스타일)상의 유사성. 둘다 1인칭 독백(타자의 말에 대해 자신을 방어하는 독백)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 작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말들'뿐이다. 어떤 말을 하는가? 지하생활자는 물리법칙과 마찬가지로 도덕의 법칙이 있다고 주장하는 합리적 에고이스트들에 대해서 딴지를 걸며 흥분한다. 2*2=4 따위는 인간에 대한 모욕이라고. 클라망스(이 이름은 '사막에서의 외치는 자의 목소리'라는 성경 글귀에서 나왔다. 장 바티스트 클라망스는 세례자 요한이면서 외치는 자이다, 말 그대로)는 진정한 선행을 하는 대신에 그 흉내만 내면서 도덕적인 인간인 척 행세하는 자기 자신과 모든 사람들을 고발하고 심판한다(타인들을 심판할 권리를 얻기 위해 먼저 자기 자신을 혹독하게 심문한다).

그리하여 이 두 작품 모두 신이 사라진, 혹은 죽은 시대에 '성자'는 어떻게 가능하며 '신앙'은 어떻게 가능한지는 묻는다. 물론 작품 내에서는 아무런 해답이나 대안이 주어져 있지 않다. 그래서 두 작품은 모두 가장 음침하고 음울한 작품이 되었다. 한 전기작가의 말을 빌면, 두 작품은 모두 "(가장) 비참한, 그러나 낄낄거리며 조소하는 자포자기로 끝나는 유일한 소설"들이다.(이런 작품들을 좋아하다니!)



'속죄자이면서 재판관'이라는 클라망스의 자기 규정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카뮈가 아마도 가장 좋아했던 작품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이었을 듯한데(카뮈는 <악령>을 각색하여 무대에 올리기도 했었다. 이 각색본은 폴란드의 영화감독 안제이 바이다의 연출로 러시아 무대에도 올려졌었다. 내가 가졌던 기대에는 못 미치는 공연이었지만), 속죄자-재판관 모티브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나온다(나의 심증이다).

조시마 장로가 죽기 전에 남기는 설교 중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의 심판자도 될 수 없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심판자 자신이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죄인이며, 아니 자기야말로 다른 누구보다도 그 범죄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까지는 아무도 죄인을 심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깨달을 때 그는 비로소 심판자가 될 수 있다. 언뜻 듣기에는 정신나간 소리 같지만 이것이 진리다." 정신나간 소리같지만, 클라망스는 바로 이 진리를 깨닫고 실천한 자가 아닌가!

<전락>의 공간적 배경은 오늘처럼 흐리고 비가 많이 내리는, 안개가 자주 끼는, 물위의 도시 암스테르담이다. 알제리의 사막이 아닌 것. 이 가장 비카뮈적인 배경이 이 작품의 비카뮈적인 성격을 낳는다(카뮈는 1954년 10월에 이틀간 암스테르담에 체류한 적이 있다. 그리고 꼼꼼한 작가 카뮈에게서 <전락>은 아주 우발적으로 탄생한 작품이었다). 암스테르담은 역시나 우중충하고 진눈깨비 흩날리는 페테르부르크의 카뮈적 버젼이다. 말하자면 러시아적 공간이고 도스토예프스키적 공간이다. 클라망스의 목소리가 좀 세련되긴 했어도 지하생활자의 목소리를 닮은 것은 우연이 아니겠다. 그는 지하생활자를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즉 '배우' 카뮈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정리하자. 카뮈적인 세계란 무엇인가? "스스로 인정하는 무지, 광신의 거부, 세계와 인간을 테두리짓는 한계, 사랑받는 얼굴, 그리고 끝으로 아름다움, 이런 것이 바로 우리가 스리스 사람들과 한데 어울리게 되는 우리의 진영이다.('헬레네의 추방')이라고 적을 때, 그 '우리의 진영'에 속하는 것이 카뮈적인 세계이다. 거기엔 정오의 태양과 바다가 지배하는 세계이다(다시 한번 더 암흑의 철학은 빛나는 바다 저 위에서 흩어져 버릴 것인다. 오, 정오의 사상이여!).

그에게서 지중해가 가진 태양의 비극성은 북구(와 러시아)의 안개의 비극성과는 다른 비극성이다. 그의 정오의 사상은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암흑의 철학과 다른 철학이요 사상이다. 이러한 둘을 묶어주는 것은 인간의 부조리한/비극적인 운명에 대한 집요한 관심과 지극한 사랑이다.

만약에 진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지 않다면 나는 그리스도 곁에 남겠다라고 도스토예프스키는 적었다. 카뮈라면? 아마 그는 진리 대신에 바다(지중해)를 택할 것이다. 그리스도도 바다도 없는 나는? 이렇듯 비오는 날에 이런 걸 적으며, 중얼거리고 탄식할 따름이다. "나의 삶은 내가 바라는 바에 적합하지 않는구나!..."

06. 03. 27.

P.S. 타이밍을 맞추자면 봄비라도 내리는 날에 옮겨적어야 했나 보다. 아래 그림은 러시아 화가 알렉산드르 볼코프(1960- )의 <비오는 날>. 이걸로 비오는 날의 분위기를 대신한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6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twoshot 2006-03-28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타 신고: 김진석->김진식

로쟈 2006-03-28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정헀습니다.^^

닉네임을뭐라하지 2006-03-28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퍼갈게용)

비연 2006-03-28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퍼갈께요. 도스토예프스키나 카뮈나 제가 다 좋아하는 작가들인데..
로쟈님의 페이퍼를 보니 아...그렇구나 하는 마음이 새삼...

로쟈 2006-03-28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소략한 글인데, 좋아하는 작가들을 한번 더 떠올릴 수 있다면 나름대로 제몫은 한 것이네요.^^

2006-05-28 0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테렌티우스 2006-12-20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뮈는 노벨 문학상 수상 직후에 벌어진 자신의 알제리 독립 반대입장에 관련된 비판에 이렇게 대답했지요 : "나에게 정의와 어머니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나는 어머니를 선택하겠다"...

그런데 이 답변은 그 맥락상 좀 (상당히) 문제가 있기도 한데요... 함 간단히 브리핑을 해드려보면...


이 대답은 카뮈의 스웨덴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 직후 한 청중이 알제리 독립에 관한 그의 의견을 묻는 '스캔들'을 일으키면서 시작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1957년 카뮈의 수상 당시 젊은 푸코(카뮈는 1913년생, 푸코는 1926년생)가 스웨덴 프랑스 대사관의 문정관으로 일하며 그를 영접했었다는 사실인데, 푸코는 노벨상 위원회가 1954년 이후의 알제리 독립선언에 대한 일종의 헌정행위로서 카뮈를 '잘못' 선택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카뮈는 일반의 예상과 달리 알제리 독립에 반대했으며(나도 카뮈를 너무나 좋아했던만큼, 이는 충격이었다. 왜 우리의 카뮈 연구서들은 이러한 점을 밝히지 않나? 하긴, 서양에서도 미시마 유키오가 파시스트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알제리 문제와 관련하여,

'특히 프랑스의 정착 규모와 기간은 역사에서 그 어느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문제를 야기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알제리의 프랑스인은 이 어휘가 지니고 있는 강력한 의미에서 역시 토착민이다. 더구나 순수하게 아랍적인 알제리는 - 정치적인 독립이라는 하나의 환상이 없었다면 - 결코 경제적 독립을 성취할 수 없었다. 프랑스의 노력이 아무리 부적절하였다 할지라도, 그것은 오늘날 그 어떤 나라도 기꺼이 책임을 떠맡으려고 동의하지 않는 상당한 노력, 바로 그것이었다'라고 적었다.

이 카뮈의 말을, 우리의 예로 치환시켜, 점령국의 국민이자 노벨상 수상작가인 한 일본인의 입에서 아직 미독립 상태의 1940년대 한국을 향해 발설된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망언'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문화와 제국주의' 중 2장 8절 '카뮈의 제국주의 경험' 편을 보면 된다. 이 글에서 사이드는 카뮈의 '이방인'과 '페스트'를 '문화와 제국주의에 대한 논쟁의 일부'로서 분석하고 있다

단적으로 카뮈의 소설에 등장하는 그 많은 아랍인들은 하나도 이름이 '없다'. 일제시대 군산의 한 백사장에서 '태양빛이 너무나 뜨거워' 총을 난사한 '이방인' 일본인에 의해 사망하는 '조선인'에게는 이름이 없는 것이다.

로쟈 2006-12-20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적으로 카뮈의 소설에 등장하는 그 많은 아랍인들은 하나도 이름이 '없다'"라는 게 새로운 비판은 아니지만 카뮈를 읽을 때 참조해야 할 대목이라고는 생각됩니다...
 

 

 

 

 

이번주 <필름2.0>을 흥미롭게 읽고 있다. '중저가' 영화잡지이지만, <씨네21>에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요즘의 <씨네21>이 과연 세 배만큼의 제값을 하는 '고가' 브랜드인지는 의문이다), 최근에 개최된 '1996년의 한국영화 회고전'(서울아트시네마)를 계기로 '1886년 대한민국에 무슨 일이?'를 특집으로 내건 이번주 기획만큼은 단연 돋보인다(이번 주 <씨네21>의 기획특집은 '영국배우의 힘'이다). 

이 특집과 관련해서, 10년전, 1996년의 이야기를 나도 풀어볼까 하다가 견적 대비의 여유가 없는 관계로 그냥 한 두 꼭지에 대해서만 참견하기로 했다. 그 중 하나는 작년에 이어서 올해에도 또 한편의 저예산 디지털 영화를 발표한 송일곤 감독의 인터뷰 꼭지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송감독과 박영준 촬영감독의 대담 꼭지이다. 

폴란드의 국립영화학교 우츠출신으로 우리에겐 영화보다 (모 통신회사) CF로 처음 알려진 그의 영화들 중에서 단편영화 <간과 감자>와 장편 <꽃섬>(2001), <거미숲>(2003) 등이 내가 본 작품들이다(그러니까 단편 <소풍>과 장편 <깃> 등을 나는 보지 못했다). 나로선 너무 도식적이라고 여겨진 <거미숲>이 실망스러워서 그의 영화에 대한 기대를 접고 있었는데, 이번에 개봉될  <마법사들>은 '원 테이크 원 컷'이라는 형식적 특징 때문에 '어떨까' 싶은 눈길을 끈다.

이 신작과 관련해서는 얼마전 오마이뉴스(06. 03. 19)에 소개된 기사내용을 약간 재구성해서 잠시 따라가본다: "송일곤 감독의 영화 <마법사들>은 한편의 연극같은 영화다.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 ‘디지털 3인3색’ 프로젝트로 진행된 이 영화는 하나의 시공간 안에서 편집 없이 하나의 컷으로 이루어진 ‘원 테이크 원 컷’ 촬영으로 관심을 끈다. 이 영화는 자아 정체성을 재발견하고 상처를 극복해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줄거리 ‘마법사밴드’는 멤버 자은(강은비)의 죽음으로 해체된 인디밴드다. 음악을 통해 청춘을 보낸 그들에게 자은의 죽음은 3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깊은 상처로 남아있다. 자은과 연인 사이였던 재성(정웅인)은 그들만의 추억이 깃들어 있는 강원도 숲 속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으며, 명수(장현성)는 아르헨티나로의 이민을 결심했다. 한편, 보컬이었던 하영(강경현)은 자은의 죽음에 대한 자책감에 더 이상 노래조차 부르지 못한다. 그들은 죽은 자은을 기념하기 위해 재성이 운영하는 카페에 모인다. 이곳에서 그들은 즐거웠던 시절을 떠올리며 회상에 잠긴다. 특히 명수는 하영의 노래를 듣고 싶다며 자신이 직접 작곡한 곡을 하영에게 선물한다. 그러나 자영은 여전히 노래하기를 망설인다. 그들은 회상을 통해 잃어버린 열정과 사랑을 재정립하고 극복해간다. 이 영화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공간의 변화를 통해 시공을 넘나드는 송일곤 감독의 연출력이다. 카페의 1층은 현재의 공간으로 살아있는 세 명의 멤버가 다시 만나는 장소이며, 과거의 공간인 카페 2층에서는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힘겨워하는 자은과 재영의 갈등을 보여준다.

-형식미 단편 <소풍>으로 칸 국제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바 있는 송일곤 감독은 장편 <거미숲>, <깃>을 통해 철학적이고 실험적인 작품들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해왔다. <마법사들> 역시 그만의 실험정신과 도전정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영화 <거미숲>에서도 ‘숲’을 통해 혼란스러운 인간의 기억을 표현한 바 있는 송일곤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도 ‘숲’을 통해 각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든다. 이 영화는 ‘원 테이크 원 컷’ 촬영에도 불구하고 카페 1층과 2층, 숲에 이르기까지 장소의 변화를 주는 과감한 시도를 했다. 96분간 쉬지 않고 연기해야 할 연기자들뿐만 아니라 촬영 스태프 모두가 철저한 사전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작업이다. 중간에서의 작은 실수는 곧 촬영 종료를 의미하고, 모든 작업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다. 그만큼 이 영화는 배우와 스태프들 뿐 아니라 관객에게도 색다른 경험을 선사한다. 그러나 스토리 자체가 가지는 진부함과 급격한 심리의 변화는 다소 아쉬움으로 남는다(30분짜리 단편을 96분의 장편으로 재구성한 영화 <마법사들>은 3월 30일 CGV 인디상영관에서 개봉된다).

한편, <필름2.0> 인터뷰에서 밝히고 있는 이 영화적 실험의 배경: "폴란드에서 공부할 때 2학년 가정의 중요한 수업 중 하나가 '마스터 샷'이라고 해서 끊지 않고 이어지는 하나의 연속적인 샷 안에서 배우들이 움직일 때 카메라가 어떻게 움직일까를 공부하는 과정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타르코프스키나 소쿠로프뿐 아니라 북유럽이나 소련을 중심으로 영화미학이 발전했던 60, 70년대에는 시간을 어떻게 조각할 것인가가 많은 이들의 화두였다. 그러면 우리도 해보자, 그렇게 시작한 거다."

Александр Сокуров

다시 말하면, 그러한 실험이 헐리우드쪽보다는 러시아나 북/동유럽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최근의 사례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칸느영화제 출품작이기도 했던 알렉산드르 소쿠로프(1951- )의 <러시아방주>(2002, 99분)이다(역시나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영화). 제목에서 얼핏 암시받을 수 있는 것이지만, 영화는 러시아의 보물창고라 할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대한 감독의 공시적/통시적 사색과 명상을 담고 있다.

재작년 모스크바 체류 기간에 이 영화를 TV에서 본 적이 있는데, 실제 영화보다 흥미로웠던 건 본편 방송 이후에 덧붙여진 '메이킹 필름'이었다. 영화는 단 한번에 테이크로 모든 걸 찍어야 하기 때문에 치밀한 계산하에 모든 배우 및 스탭들의 동선까지 완벽하게 준비돼 있어야 했다(리허설이 중요하다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해서, 이런 방식의 영화는 필름속에 담기는 내용만큼(혹은 그보다 더) 그 찍는 과정 자체가 '예술'이었다. 아래 사진은 소쿠로프와 그의 스탭들.

그런 사정은 <러시아 방주>와 같은 방식으로 찍은 <마법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마법사들의 러시아 방주?). 박영준 촬영감독의 고백: "<마법사들>에서 최고의 관객은 현장에서 감독님의 '오케이'를 들었던 현장 스탭들이다. 연극을 보듯 그 순간을 우리 모두 '생짜'로 본 거다. 그 감격을 잊을 수가 없다. 뭐랄까, 우리 스스로 치유하면서 영화를 만들었다고 할까? 그런 느낌이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를 굉장히 좋아한다. 내 손으로 흙 발라서 집을 만든 것 같은 느낌이다." 옆에서 거드는 송감독: "마지막 촬영 끝나고 나서 스탭들이 너무 즐겁고 행복해 했던 것 같다." 

해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내가 <마법사들>보다 더 보고 싶은 건 그 메이킹 필름이다(어떤 경우에 예술은 'picture'가 아니라 'picturing'에 깃든다). 그걸 찍을 비용이 '저예산'에 포함돼 있었을지는 의문이지만...

06. 03. 26.

P.S. 보너스로 덧붙이자먼, 감독 자신이 꼽는 <마법사들>의 베스트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건 두 남녀가 숲에서 사과를 먹는 장면이다. 한국영화에서 그런 룩을 처음 본 것 같다. 흑백이 강렬하면서도 컬러가 살아있고 표정들도 너무 잘 나타나 있고, 미학적으로 굉장히 아름다운 신이다. 우리 영화니 자뻑이기는 하지만." 아마 자뻑인 거 맞을 것이다. 한데, 사과를 먹는 장면은 <거미숲>의 정사장면에서도 나온다. (감자가 아니라!) 사과가 송일곤 감독의 '대상a'쯤 되는 것일까?..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twoshot 2006-03-26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씨네]와 [필름]모두 좋아하지만 [씨네]의 경우 그 "값"을 한다고 봅니다. "3천원시장"을 [필름]이 포기했지만 [씨네]는 영화잡지에 바랄 수있는 "뽀대"가-표지사진하나만 보더라도-훌륭합니다. 내용은 [필름]의 경우 "이연걸 특집"에서 보듯 하나의 기사로 도배하는 경우가 왕왕있습니다.그리고 [필름]에는 토크2.1이 있지만 비평면이나 "김혜리가 만난사람들"같은 경우는 [씨네]가 독보적이구요.

로쟈 2006-03-26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씨네21>을 더 자주 봤었지만, 최근에는 주로 실망감을 안겨주더군요. 아마도 작년말에 '2005년 나의 베스트 초이스' 같은 기사 꼭지가 결정타였던 것 같은데, 기자들의 베스트 초이스의 대상이 (영화가 아니라!) '물건들'이었습니다. 그런 '수다'는 개인 블로그에나 올릴 만한 거라는 '편견'을 가진 저에겐 잡지가 좀 뻔뻔해 보이더군요. 이후엔 간혹 살 때마다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happyant 2006-03-27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입니다. 로쟈님. 한때 씨네21의 열혈 애독자였습니다만, 근래의 씨네21은 예전의 그 톡쏘는 '취향'의 맛이 느껴지지 않더군요. 스스로의 '수준높음'에 도취된 듯 보입니다. 이번호 필름2.0은 정말 재밌더군요.^^

로쟈 2006-03-27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취이면서 매너리즘 같기도 합니다. 자체적으로 긴장감 있는 리뷰들이 아주 드물게 눈에 띄는 것이 제 시력 때문만은 아닌 거 같습니다...

twoshot 2006-03-27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딴지는 아니고 또 제가 [씨네]의 내부자도 아니지만 '리뷰'에만 초점을 맞춰 말해보면:김소영,허문영,정성일등의 [전영객잔]은 필자들의 명성에 값할만큼 수준이 고릅니다. 다른 비평은 보통 신진들로 채워집니다. 또 김혜리, 정한석등의 일급 내부필진이 그 뒤를 받치고 있고요. 홍성남의 성실한 글들도 그냥 넘어갈 수 없읍니다. "뭐 이정도면"하는 도취가 없을 수는 없겠으나 이것이 '최선의 의도'인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다른 대안은 무엇일까...그게 쉽지는 않겠다는 거죠...문예지들에 그득한 '도취와매너리즘'이 그 대안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말이죠...

로쟈 2006-03-27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주 <필름2.0>에도 두어 편의 읽을 만한 리뷰들은 실립니다. 해서 저의 불만은 정확히 <씨네21>이 <필름2.0> 3권 값을 하느냐입니다. 외부 필자들과 정한석 기자의 글들이 눈에 띄지만, '내부'는 예전 같지 않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말씀드린 대로, 결정타는 '2005년 베스트 초이스' 같은 어처구니 없는 수작이었습니다(막바로 쓰레기통에 처넣고 싶더군요). <씨네21>은 그 이후에 제게 아직 신뢰감을 회복시켜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twoshot 2006-03-28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처구니 없는 수작'에 대해서...다른 물건은 차치하고라도 아무개기자가 추천한 '디빅 플레이어'를 보며 이건 또 무슨 농담인가...어리둥절했었습니다. 씁쓸했구요. 헌데 '생선회칼'과 '만년필'이 들어간 그 '페이퍼'가 그리 싫지는 않았습니다. 물건들에 대한 페티쉬가 저의 취향에는 먹혔던 거죠. '하이비'같은 잡지에서 볼 수있는 억대 오디오는 아예 쳐다 보기도 싫지만...짐작컨대 그것은 씨네의 '엘리티즘'에 대한 내부의 가벼운 반동이었던 것 같습니다. 잡지의 잡스러움은 그래봐야 거기서 거기라는 게 아쉬움을 넘어 좀 안타까웠지만...

로쟈 2006-03-28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잡지에 대한 기대나 취향의 차이일 듯합니다. 저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기 위해서 영화 잡지를 사 읽는 편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