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11.03) 유치원이 쉬는 날이라 오랜만에 아이를 보며 하루를 보낸다(보내야 한다). 점심으로 피자를 시켜먹고 아이를 피아노학원에 바래다준 후, 학원 윗층의 PC방에서 메일함과 서재 등을 확인한다. 별거 없는데, 아이가 피아노를 치는 시간 동안 집에 다시 들어갔다 나오기도 뭐하고 PC방 요금도 최저시간제인지라 좀더 죽치고 있어야 한다. 그 시간만큼만 최근에 나온 책들 몇 권을 구경해보기로 한다.

 

 

 

 

첫번째 책은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문명의 붕괴>(김영사). 788쪽의 방대한 분량이다. 지난주 중앙일보에 최재천 교수와 다이아몬드의 대담이 실려 흥미롭게 읽은 적이 있다. 다이아몬드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한바 있기 때문에 군소리를 달지 않겠다. 대신에 소개글을 좀 옮겨오면, "<총, 균, 쇠>로 퓰리처상을 받은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이번에는 '과거의 위대한 문명사회가 붕괴해서 몰락한 이유가 무엇이고, 우리는 그들의 운명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문제를 다룬다. 즉 이 책은 파괴된 문명의 역사에서 배우는 인류의 미래에 관한 보고서이다."

그는 붕괴(Collapse)의 개념을(어감상으론, 최재천 교수의 지적대로 우리말의 '몰락' 정도가 더 적절한 듯싶다. 물론 붕괴는 너무 '갑작스런 몰락'을 지시하기도 한다. 우리에겐 '성수대교 붕괴'가 있었다)  "상당히 넓은 지역에서 오랜 시간 동안 일어난 인구 규모, 정치.사회.경제 현상의 급격한 감소"로 정의한다. 그리고 "그가 택한 문명의 붕괴 지역은 단순히 지배계급이 전복되고 교체된 지역이 아니라 지금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는 곳, 또는 서서히 붕괴의 조짐을 보이는 곳이다." 해서, "로마 제국이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몰락보다는 마야 문명, 남태평양의 이스터 섬, 아시아의 앙코르와트 등처럼 단순한 쇠락이 아니라 완전히 몰락해버린 사회들을 주로 비교,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와서 붕괴의 조짐이 보이는 곳, 즉 르완다, 아이티, 중국, 오스트레일리아의 상황도 점검하고 있다."

그가  지적하고 있는 붕괴의 이유들: (1)환경 파괴 (2)기후 변화 (3)이웃 나라와의 적대적 관계 (4)우방의 협력 감소 (5)사회 문제에 대한 그 구성원의 위기 대처 능력 저하. "이런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결국에는 한 사회나 문명이 붕괴하거나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는데, 그 기준에서 자유로운 문명, 국가, 사회가 현재 몇이나 될는지는 좀 의심스럽다. 요는, 망할 땐 망하더라도 이유나 알고 망하자는 것이 될까? 

참고로, 그의 다음 책은 '국가'의 성립에 관한 것이라고 하며 5-6년 정도 걸릴 예정이라고. 다이아몬드의 책을 읽어본 독자라면 다 느낄 수 있는 것이지만, 그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방대한 시야와 스케일이다(그는 역사를 대륙 단위로 훑어내린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이론적 무기는 생물지리학. 역사학 방법론으로서 인구학과 함께 더 주목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거기에 비하면 국내 역사학자들의 관심사는 다소 협소해 보인다. 거의 유일한 예외인 듯싶은 이는 동서문명 교류사의 권위자인 정수일 선생이다. 그의 <한국 속의 세계>(창비사)가 2권 짜리로 이번에 출간됐다. 한겨레에 연재됐던 걸 몇 번 읽은 적이 있는데, 언제 그의 주저들까지 다 모아놓고 읽어보는 호사를 누렸으면 싶다. 아이에게 (피아노 대신) 골프를 가르쳐야 할까?

 

 

 

 

두번째 책은 남미의 언론인 에드아르도 갈레아노의 3부작 <불의 기억>(따님). 중남미사로 분류되는 역사책인데, 저자가 "스페인에서 두번째 망명생활을 하던 80년대 전반에 라틴아메리카의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역사를 아우른 3부작이다. <불의 기억>에 담긴 역사는 박물관에 갇히고, 헌화와 놓여진 동상이나 대리석 기념물 아래 매장된 역사가 아니다. 연표 속의 공식 역사에서 지워진 하위주체들의 목소리를 되살려낸 살이 있는 역사이다."라고 소개돼 있다. 여기서 '하위주체(subaltern)'란 말은 탈식민주의자들의 용어이다. 김택현 교수의 <서발턴과 역사학 비판>(박종철출판사, 2003)이 관련서. 우리로 치면 구술 민중사가 하위주체를 역사 속으로 적극 수용하는 방식이 될까? '민중의 함성'?

내가 갖고 있는 라틴아메리가 관련 서적은 <라틴 아메리카의 문학과 사회>(까치글방, 2001), <영화 속의 문학 읽기>(책이있는마을, 2001) 등이고 작가 카를로스 푸엔떼스의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까치글방, 1997) 정도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는데, 이번에 '풍족한' 두께의 책이 나와서 반갑다. 이 또한 언제 읽을 수 있을는지는 전혀 기약할 수 없지만.

 

 

 

 

이번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갈레아노의 책은 그간에 많이 번역돼 있다. 말하자면, 그는 우리가 중남미를 이해하는 한 '통로'이다. 갈레아노의 통역으로 우리는 중남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 그 중 상대적으로 가장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책은 교육서인 <거꾸로 된 세상의 학교>(르네상스, 2004)인 듯하다. 소개에 따르면,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하는 비판적 지성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열 번째 작품. 재치있고 예리한 언어로 시장경제와 신자유주의를 재해석하며 우리사 사는 세상의 모순들을 고발한다." 물론 그런 모순으로 치자면 우리도 남못지 않다. 한데, 왜 우리 책들은 수출되지 않는 걸까? 

 

 

 

 

세번째 책은 지역을 러시아로 옮겨보자. 작년에 영화화되어 초대형 히트를 기록한 러시아 영화 <나이트 워치>(영역본 제목이며 '야간 경비대' 정도의 뜻)의 원작 소설 <나이트 워치>(황금가지)가 영화 개봉에 즈음하여 출간됐다. 영화는 올 부천판타스틱 영화제의 개막작이기도 했는데, 기대만큼(!) 국내에서 별반응을 얻어내지 못했다. 카자흐스탄 출신의 작가 루키야넨코는 이 작품이 300만부 이상 팔리면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극했다고. 하긴 나도 작년 모스크바 체류시 이 작품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다빈치 코드>만큼은 아니었지만). 하지만 꿋꿋하게 사지 않았고 대신에 영화를 비디오CD로 사두었다(아직도 보지 않았다!).

물론 원작소설 자체가 대중성을 갖고 있기도 하겠지만, 작품이 유명해진 건 영화가 큰몫을 했다. 자료에 따르면, 러시아 국영방송 (제1채널)에서 300만 달러를 들여 제작한 이 작품은 러시아에서만 1700만 달러의 수입을 올렸고(<반지의 제왕> 3편을 앞질렀다), 각국에 수출되었다. 헐리우드의 '20세기 폭스사'는 이후에 제작될 2, 3편의 세계배급권까지 선매한 상태이니 가히 폭발적인 반응이다. 하지만, 영화를 본 이들의 반응을 그닥 신통찮은데, 딱 우리의 <쉬리>를 생각하면 되겠다. 즉, 영화적 의미보다는 영화시장의 크기를 바꾸어놓은 '초대형' 블록버스터로서 사회학적 의미를 더 많이 갖는 작품. 이후에 러시아영화는 90년대 이후의 부진을 씻고 적어도 상업적으로는 중흥기를 맞고 있다(올가을에 개봉된 또다른 블록버스터 <9중대>는 <나이트 워치> 2배 가량의 수익을 예상하고 있다고).

소설의 무대는 "현대 러시아의 대도시 모스크바"로서, "크고 오래 된 도시의 일각에는 현대적인 고층 건물과 위락 시설들이 늘 새롭게 생겨나고 있지만 우중충한 옛 건축물들과 근대화의 흔적들 또한 곳곳에 남아 있"는 모습. "음습한 골목길, 지저분한 술집, 1층이 주차장으로 되어 있는 초라한 서민 아파트, 사람들에 부대끼는 지하철 등이 소설 속 장면들의 주 배경"이며, 여기에 빛의 마법사와 어둠의 마법사들의 또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어림짐작할 수 있는 판타지 소설의 구도. 판타지 독자라면 '러시아 판타지'란 별미를 감상해보셔도 좋을 듯하다.

물론 내가 조만간 이 책을 집어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그 경우에라도 동기는 '판타지'가 아니라 '러시아'이다. 왜 이런 작품이 읽히는가에 대한 관심에서. 비슷한 동기에서 같이 읽어볼 만한 책을 두어 권 더 소개한다. 하나는 KBS의 모스크바 특파원을 지낸 조재익 기자의 <굿모닝 러시아>(지호, 2004). 우리말로 씌어진 러시아 입문서로서 가장 추천할 만하다. 무엇보다도 강점은 '지금의 러시아 현실'에 대해서 많은 유익한 정보들을 제공해주고 있다는 것. '러시아 여성'에만 관심있는 독자들도 일독해 볼 만하다.(나는 이 책을 모스크바에서 연초에 떡국을 먹으러 간 선배기자의 집에서 처음 보았다. 감동적인 떡국이었다!) 

다른 하나는 미국의 외교관 출신 예일 리치먼드가 쓴 <우리가 몰랐던 러시아, 러시아인>(일조각, 2004). 원제는 'From Nyet to Da : Understanding the Russians'(2003 개정판)인데, 제목에서 'Nyet'는 'No', 'Da'는 'Yes'란 뜻이다. 이건 이중적인 의미가 있는데, 러시아에 대해서 몰랐던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서 러시아에 대해 알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대개가 불친절한 러시아인들 자체가 서로간의 교제를 통해서 부정적 태도(Nyet)에서 긍정적 태도(Da)로 변모해간다는 뜻이기도 하다(초면에 'Yes'라고 말하는 친절한 러시아인은 짐작에 창녀들 빼고는 없다. 이 '서비스 문화'의 부재에 대해서는 모스크바통신에서 다룬 바 있다). 여하튼 비교적 얇은 분량의 책이지만 러시아 입문서로선 (기대에 안 맞게) 최적이다. 값이 좀 비싼 게 흠.  

 


 

  

 

네번째 책은, 이제 이웃나라 일본으로 넘어와서 '인문학으로 읽는 제패니메이션'이란 부제의 책 <아니메>(루비박스). 원제는 'Anime from Akira to Princess Mononoke'(2001), 그러니까 '아키라에서 모노노케 히메까지의 일본 아니메'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책. 저자인 수잔 네피어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세계적 권위자라고 하는데, 한 일본인의 추천사는 이렇다: "일본 애니메이션에 관해 이처럼 예리한 해석이 담긴 책이 태평양 저편에서 씌여졌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지은이에게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 책에 대해선 오늘자(11.04) 한겨레의 리뷰가 자세므로 참조하시길. 더불어 문득 갖게 되는 의문. 우리는 한국문화에 관한 그런 책을 갖고 있는가? 

개인적으로 일본 아니메를 즐겨보진 않지만 가끔은 보며, 러시아에 소개된 아니메를 두어 편 사서 보기도 했다. 때문에 <아니메> 같은 책도 나중에 도서관에서 대출해볼 생각은 있다. 비교적 최근에 국내에서 나온 일본만화 관련서로는 정현숙의 <일본만화의 사회학>(문학과지성사, 2004), 그리고 작가론인 <미야자키 하야오>(살림, 2005)가 있다. 그 이상의 참고문헌들은 그 책들을 참고하면 되겠지.

 

 

 

 

아는 체할 형편은 아니지만, 일본 아니메에서 자주 다뤄지는 테마는 '나는 누구인가?'이다. 정체성에 관한 물음을 일본인들은 유난히 자주 던지는 모양인데, 그런 주제와 관련하여 읽어볼 만한 책으로 <시냅스와 자아>(소소)가 눈길을 끈다. 부제는 '신경세포의 연결 방식이 어떻게 자아를 결정하는가'이고 당연히 (만화가 아니라) '과학책'이다. "뉴런들 사이의 공간인 시냅스는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고, 상상하고, 느끼고, 기억하는 통로다. 즉, 시냅스는 우리 각자가 독립적이고 복합적인 개체로 기능하도록 매순간 도와준다. 이 책에서 저명한 뇌과학자인 조지프 르두는 뇌가, 특히 시냅스가 어떻게 퍼스낼러티를 만들고 유지하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소개는 간단하지만 분량은 630쪽이다. 이 신간이 막바로 떠올려주는 책은 호프스태터와 다니얼 데넷이 편집한 <이런, 이게 바로 나야!>(사이언스북스, 2001). 원제는 'The mind's I : fantasies and reflections on self and soul'(1982)이고 보르헤스의 '보르헤스와 나'부터 시작해서 유익한 읽을 거리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다소 '경망스런' 책 제목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많이 읽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시냅스와 자아>는 소소출판사에서 내는 'new humanist classic' 시리즈의 제5권으로 돼 있는데, 같은 시리즈에서 가장 읽어보고 싶은 책은 제프리 밀러의 <메이팅 마인드>(소소, 2004)이다. 부제는 '섹스는 어떻게 인간 본성을 만들었는가?' 이고, 원제는 'Mating Mind: How Sexsual Choice Shaped the Evolution of Human Nature'(2000). 이 흥미로운 주제의 책이 그닥 주목받지 못했다면 그건 '메이팅 마인드'라는 어정쩡한 제목 때문이 아닐까 싶다. 부제를 내세우는 것이 선정적이었다면, '성과 인간의 진화' 같은 제목을 어땠을까? 아니면, '짝짓기 본능'은? 저자는 "아무리 생존능력이 뛰어난 호미니드라 할지라도 섹스 파트너를 유혹하여 자식을 낳지 못한다면 결코 우리의 조상이 될 수 없었다"라는 말로 진화에서 성선택이 가지는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건 진화론의 ABC이다. 더불어 진화적으로 성공한 개체의 기준은 자녀의 수가 아니라 손자의 수이어야 한다(손자의 수가 자녀의 성공 여부를 가름하므로). 이런 기본적인 감각/본능이 부실하거나 고장난 이들은 필독해야 할 책.

한데, 성선택설의 원조라고 해야 할 다윈의 <인간의 유래(The Descent of man and selection in relation to sex )>는 왜 아직 소개되지 않는 것일까? 그 책의 테마를 뒤집은 브로노프스키의 <인간 등정의 발자취(The Ascent of Man)>(바다출판사, 2004)까지 작년에 개정판이 나왔는데 말이다. 게으름의 소치이되, 다윈에게 불공정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섯번째는 프랑스로 건너가 보자. 20세기초 프랑스의 대표적인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베르그손)의 <물질과 기억>(아카넷)이 재번역돼 나왔다. 연초에 <창조적 진화>가 재번역된 데 이어서 이번에 또 한권의 주저가 번역됨으로써 베르그송의 새단장이 얼추 마무리되었다. 지난 봄에는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서광사, 1998)을 번역했던 송영진 교수의 연구서 <직관과 사유>(서광사)가 출간되기도 했었다. 해서, 베르그송에 관해서라면 면피의 여지가 없다. 꼬박 읽는 수밖에. 개인적으론 들뢰즈의 영화론 때문에, 그리고 세기초 러시아 모더니즘 문학과의 연관성 때문에 읽어야 하고 읽고 있다.   

내게 베르그송이란 이름을 의미있는 이름으로 처음 알게 해준 이는 작년 가을에 세상을 뜬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이다(고인의 명복을 빌어줍시다). 그녀가 18세인 1954년에 발표한 데뷔작 <슬픔이여 안녕>에서 여주인공을 대입시험인 바칼로레아를 준비하기 위해 플로베르의 <감정교육>과 베르그송 같은 '고리타분한' 책들을 읽느라 고생한다. 그 책을 나는 고등학교때 삼중당문고(1984)로 읽었었는데, 책에 실린 대담에서 작가가 카뮈보다 사르트르를 좋아한다고 하여 내가 읽게 된 책이(꼭 그런 이유에서는 아니었겠지만) 사르트르의 단편집 <벽> 등이다(역시 삼중당문고). 그 <벽>(문학과지성사, 2005)이 이번에 김희영 교수의 번역으로 다시 출간됐다. 알다시피 올해는 사르트르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인데, 별다른 소식이 없다 싶었더니 좀 뒤늦게 구색을 맞추는 듯하다. 나는 해가 가기 전에 <문학이란 무엇인가>(민음사, 1998)이나 예의상 다시 읽어둘 참이다. 예전에 내가 읽은 건 김붕구 선생 번역(문예출판사)이었는데, 정명환 선생의 번역은 '1947년의 작가적 상황'이란 장문의 글까지 마저 완역한 책이다. 이럴 땐 러시아어본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사들고 오지 않은 게 후회되는군...

04. 11. 03-04.

P.S.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개진하고 있는 사르트르의 문학론은 시와 산문을 구별하고 시를 '앙가주망'(참여)에서 제외시키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에 대한 반론으로 유력한 사례가 시인 김수영이다. 김수영의 시를 꼼꼼하게 읽고 있는 책도 출간된바 오봉옥 시인의 <김수영을 읽는다>(랜덤하우스중앙)이다. 저자는 재작년에 <서정주 다시 읽기>(박이정, 2003)을 낸 적이 있는데, 그와 마찬가지로 시강의를 묶은 이 책은 그 연장선이기도 하다. 특징은 시 한편 한편에 대한 꼼꼼한 읽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며, 나는 무엇보다도 그런 식의 '읽기'를 '비평'보다 선호한다(요즘 '숲'을 보는 비평가들은 많으나 '나무'를 찬찬히 뜯어보는 독자들은 많지 않은 듯하다. 둘의 균형이 필요하다). 

 

 

 

 

 

김수영에 관한 책들은 언제부턴가 해마다 여러 권씩 쏟아지고 있는데, 올해도 예외는 아니어서 최동호 교수 등이 쓴 <다시 읽는 김수영 시>(작가, 2005), 김명인/임홍배 교수가 엮은 <살아있는 김수영>(창비사, 2005) 등이 출간됐었다. 이 정도면 김수영은 '풀'이나 '나무'라기보다는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 해야 할 듯싶다. '자세히 읽기' 시리즈로는 2003년에 열림원에서 <서정주의 화사집을 읽는다>를 비롯해 댓 권의 책이 나온바 있는데, '실패한' 기획인지 후속작이 없다. 독자로서 유감스럽다.

P.S.2. 또다른 유감은 독일 철학자 가다머에 관한 것이다. 며칠 전 서점에서 그의 강연 <고통>(철학과현실사)이 출간된 걸 봤는데, 103세 타계한 금세기 '최장수' 철학자가 평생 척추질환으로 고생했다는 사실은 새롭게 알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철학자 가다머의 크기를 가늠하기에는 역부족인 소품. 이상하게도 이 해석학의 거두는 주저인 <진리와 방법>이 완간되는 대신에 좀 한가한 소품들만이 번역/출간되고 있다. <교육은 자기 교육이다>(동문선, 2004)나 <현대의학을 말하다>(몸과마음, 2002) 같은 책들이 그렇다. 국내엔 한국해석학회도 있고, 그 학회지에 실리는 논문의 상당수는 가마머의 해석(철)학에 관한 것인데도 사정이 이렇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제라도 단합해서 <진리와 방법> 정도는 번역해주는 것이 온당하며 가다머에게도 공정한 일이지 않을까?

 

 

 

 

<진리와 방법>은 저자가 나이 60세에 출간한 책이지만 그의 최초의 주저이다(뛰어난 철학교수였지만 그는 글쓰는 걸 힘들어 했다고). 하지만 이후에 40여년 이상을 더 장수했으니 '청년 가다머'의 저작이라고 해도 억지는 아니겠다. 이미 영어로는 두 차례 번역된바 있으며 독일 철학이 강의되고 있는 나라에는 대부분 번역돼 있을 법하다. 물론 이런 책이 번역돼 있지 않다고 해서 한 문명이 붕괴될 리는 없겠지만 '문명의 수치' 정도는 된다. 참고로, 부분역인 <진리와 방법1>(문학동네, 2000)은 5년전에 출간됐다. 물론 10년째 소식이 없는 하버마스의 <소통행위이론>(의암, 1995)에 비하면 사정이 나쁜 건 아니지만, 이런 책들이 나오길 기다리려면 과연 가다머만큼의 장수가 필요한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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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11-03 22:56   좋아요 0 | URL
"PC방 요금도 최저시간제인지라 좀더 죽치고 있어야 한다"
-.- =b 진정한 폐인이십니다. ㅋㅋㅋ

parioli 2005-11-03 23:48   좋아요 0 | URL
종종 들러서 글 읽고 갑니다. 좀 전엔 스크랩도 하나 했습니다. 격려(?)의 글을 남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네요.

로쟈 2005-11-04 19:56   좋아요 0 | URL
제가 '자주' 글을 올리는 건 아니므로 '가끔' 들르시면 됩니다. '격려금'도 환영합니다.^^
 

오늘자 한국일보 문화란에 '요즘 시'의 경향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오늘이 '시의 날'인 걸 기념해서인 듯한데, 며느리도 모를 법한 이 날의 유래는 이렇다고: "11월1일은 제19회 '시의 날'이다. '시의 날'은 우리나라 현대시의 효시로 알려진 최남선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1908년 11월 잡지 '소년' 창간호에 실린 것을 기념해 1986년 제정됐다." 1986년이면 전두환 정권하이다. 5공 때 이어령 선생이 문화부 장관을 한 적도 있으니 그 분 아이디어인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딱 이어령표 마인드의 산물 같다. 어쨌거나, 그런 날이 벌써 19번째이건만, 무슨 행사를 벌인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시시한 날인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저런 기념일을 챙기는 건 문화부 기자의 본분에 충실해 보이며, 덕분에 나는 아침부터 '요즘 시'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연예인들만한 사이즈로 지면에 오른 요즘 시인들의 면면들을 구경해볼 수 있었다. 혹 기사를 지나쳐버린 분들을 위해서 내용을 정리하고, 생각할 거리를 챙겨두도록 한다.

"일군의 젊은 시인들에 의해 시도되고 있는 우리 시의 새로운 경향을 짚"고자 하는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요즘 시(詩)가 어려워졌다는 말이 심심찮게 들린다. 시인 평론가들조차 불편함을 토로할 정도다. 한 두 사람 한 두 편의 돌출적인 현상이 아니라, 최근 등단했거나 한 두 권의 시집을 낸 젊은 시인들을 중심으로, 뚜렷한 경향을 형성하고 있다." 그런 경향을 다른 말로는 '엽기시'라고 한다.

 

 

 

 

얼마전 미당문학상 수상작이 발표되었는데, 수상자는 작년에도 시인들이 뽑은 최고작을 쓴 바 있는 문태준 시인이며 수상작은 <누가 울고 간다>이다. 짧은 시이므로 옮겨본다.  

밤새 잘그랑거리다/ 눈이 그쳤다

나는 외따롭고/ 생각은 머츰하다

넝쿨에/ 작은 새/ 가슴이 붉은 새
와서 운다/ 와서 울고 간다

이름도 못 불러본 사이
울고/ 갈 것은 무엇인가

울음은/ 빛처럼

문풍지로 들어온/ 겨울빛처럼
여리고 여려

누가/ 내 귀에서
그 소릴 꺼내 펴나

저렇게/ 울고
떠난 사람이 있었다

가슴속으로/ 붉게/ 번지고 스며
이제는/ 누구도 끄집어낼 수 없는

특별히 덧붙일 것도 뺄 것도 없는 소품인데, 사실 이런 정서와 리듬감, 시상 전개 등이 한국 서정시의 주류를 형성해왔다(문태준 이전에는 장석남이 있었다). 기형도 이후에, 혹은 장정일, 유하 이후에 여전히 이러한 시가 씌어지는 것은 어찌보면 '퇴행'이면서도 '관례'이다. 유구한. 그리고 그런 시인과 시들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건 당연해 보인다. 2000년도 이후에 나는 시도 쓰지 않고 읽는 것도 게을리 하고 있지만(나는 시에 대한 '기대'를 거의 접었다) 요즘 동태를 보아하니 그 사이에 꽤 특이한 젊은 시인들이 여럿 등장한 모양이다. 세태의 변화와 함께 새로운 문학적 성감을 찾아나선 이들의 이름은 김행숙 황병승 김민정 김근 김언 이민하 김이듬 등이다. 기사에는 8명의 시인들이 8인방처럼 거명돼 있는데, 요약하면 1:8이요, '문태준과 아이들' 혹은 '문태준과 엽기들'이다. 이들을 차례로 호명해보자.

 

 

 

 

 

 

 

 

 

 모두가 올해 데뷔시집이나 새시집을 낸 젊은 시인들이다. 김이듬, <별모양의 얼룩>(천년의시작, 2005); 진수미, <달의 코르크마개가 열릴 때까지>(문학동네, 2005); 김근, <뱀소년의 외출>(문학동네, 2005); 김언, <거인>(랜덤하우스중앙, 2005); 이민하, <환상수족>(열림원, 2005); 김민정,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열림원, 2005); 황병승, <여장남자 시코쿠>(랜덤하우스중앙, 2005); 김행숙, <사춘기>(문학과지성사, 2005)

(평론가 이장욱에 의하면) '외계어'로 시를 쓰는 이들은 (평론가 권혁웅에 의하면) 우리 시단의 '미래파'이다. 물론 이들이 떼로 몰려다니는지는 모르겠지만(외계인들끼리는 소통가능한가?) 하여간에 앞에서 인용한 문태준류의 시와는 달리 알아먹을 수 없다는 것이 이들 시의 특징이고 특장이다. 기자도 이 점을 표나게 지적하고 있다: "그 변화의 선두에 김행숙(35) 시인의 비교적 짧은 시 ‘달무리’를 보자. “그의 진동이 그에게 후광을 만든다. 그가 문둥이같이 뭉개질 때/ 배는 출렁이고 있었다. 내가 깔고 누운 파랑은 나를 통과한 그의 뒤편일까? (중략) 그의 뭉개진 코가 킁킁대며 누구니? 누구니? 묻고, 다시 물을 때// 아으, 부풀어 오르는 한 그루 버드나무.” 그의 시는 이성적 사고체계로 스며들지 않는다. 오히려 무의식과 느낌, 환상ㆍ분열적 내면 풍경에 철저히 기대고 있는 듯하다. 전통 서정시의 독법에 따라 어떤 의미나 이미지를 포착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고 무모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사실 알아먹을 수 없는 시가 문학사에 새로운 건 아니다. 이미 1930년대의 이상이 '욕먹는' 시 <오감도>를 썼다. 1950년대에는 '초현실주의 시'를 쓴 조향 시인 같은 분도 있었고(<조향 전집>(열음사, 1994)), 김춘수 시인의 무의미시나 이승훈 시인의 비대상 시들도 다 낯선 시들이었다. 그렇다고 이성복과 황지우의 시는 주류적인 시였나?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요즘의 '엽기시' 경향에 대해 특별히 호들갑을 떨 이유는 없어 보인다. 다만, 최근의 나온 시집들이 주된 경향을 이루면서 하나의 '트렌드'를 형성하고 있다는 게 눈에 띌 뿐. 더불어, 현란한 이미지들이나 수사의 국적, 계보, 혹은 전통을 종잡을 수 없다는 게 이채로울 뿐. 해서 새로운 시 독법이 필요하다? 

"이들 시의 메커니즘은 다양하다. 빛이나 공기 입자의 산란처럼 어지럽게 좌충우돌하는 사유의 혼종성, 세계와 자아의 대립과 반영을 넘어 자아분열적이기까지 한 현란한 이미지, 성적ㆍ관능적 환상과 잔혹하고 그로테스크한 상징 등…. 이성과 관념 이전의 원초적 시어들이 은닉하고 있는 ‘무엇’을 감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 독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 김행숙 시인은 문학적 감성의 변화를 말한다. “어떤 시는 시인/평론가보다 시를 잘 알지 못하는 일반 독자들이 오히려 뜨겁게 반응합니다. 폭 넓게 소통한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좁은 대신 깊이 소통하는 층이 분명히 있어요.” 그는 그것을 생물학적 세대차이라기 보다는 차별화한 문화체험에서 비롯된 문화적 세대차이일 것이라고 말했다."(강조는 나의 것) 참고로 기자가 나열하고 있는 찬반론은 이렇다. 

이들 시에 대한 비판도 있다.

-문학의 본령이 문자언어를 통한 소통이다. 암호에 가까운 자의적 기호와 자폐적 무의식의 흔적들이 어떻게 문학인지 모르겠다.

-환상이 없는 문학은 없다. 두보의 시에도, 카프카의 글에도 환상은 있다. 하지만 이들의 시는 삶의 리얼리티를 상실한 채 머리(환상) 속에서 떠오른 느낌들을 시적 긴장 없이 풀어놓은 것 같다.

-하나 하나의 작품을 놓고 보면 참신하지만 모아놓고 보면 시를 형성하는 문법이나 문장을 엮는 방법 등이 흡사하다. 일종의 유행 같다는 생각이다.

그에 대한 반론이다.

-나는 말쑥하고 균형 잡힌 시를 혐오한다. 안정감 있고 깨달은 자는 침묵하면 좋겠다. … 나는 내가 쓴 시에 관해서 말하기가 뭐하다. 낯설고 잘 모르겠고, 몰라서 쓴다.… ‘노력’해야 한다면 그때는 안녕.(김이듬, ‘시와 반시’여름호-현대시와 퇴폐)

-시단에서 유일하게 죄악인 것이 있다면 바로 다양한 꼴을 못 보아주는 태도이다. 시적으로 봐도 그렇고 생물학적 측면에서도 굉장히 위험한 태도다.… 자신 안에 스스로 잡종의 비율을 높여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김언, ‘웹진 문장’ 10월호-우리 시의 다양성과 새로움)

-아름다움은 움직이는 거다. …최근 시들을 비판하는 이들이 논거로 삼은 자리는 절대로,항구적인 진리의 자리가 아니다. 차라리 최근 시들이 진리로 간주되어온 그 자리를 비판의 대상으로 겨누고 있다고 말해야 옳다. (권혁웅 비평집 ‘미래파’-2005년 젊은 시인들)

긍정적인/전향적인 관점에서 이러한 경향을 바라보는 세 평자의 의견:

-황현산(고려대 불문) 교수는 “한국 현대시단의 양대 흐름을 형성했던 농경사회적 정서와 도시적 정서의 굳은 틈을 비집고 서울의 하위정서 혹은 지방도시적 정서들이 새로운 경향을 형성하는 듯하다”며 “하기에 따라서는 향후 2~3년 내에 우리 시단의 지형도가 바뀔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통의 문제와 관련, 그는 “승리한 자의 말은 상식에 근거하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소통되지만, 억압 받는 자는 말 한 마디 하기도 힘들고 하더라도 타박 당하기 일쑤”라며 “하지만 그 말은 우리가 반드시 소통해야 할 말“이라고 말했다.

-2003년 김행숙씨의 첫 시집 ‘사춘기’(문학과지성사)의 해설에 이장욱(시인ㆍ소설가ㆍ평론가)씨는 “우리가 도달해가는 현대시의 어떤 징후”라는 조심스러운 표현을 쓴 바 있다. 이제 그 징후는 좋든 싫든 하나의 도도한 경향으로 자리잡았다. 그는 “최근 젊은 시인들의 경향이 우리 현대시의 다양성을 확장하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지배적 경향을 형성할 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최근 낸 비평집에서 이들 젊은 시인들의 경향을 ‘미래파’라 명명한 권혁웅(시인ㆍ평론가)씨는 “60년대의 김수영, 80년대의 이성복이 당대 시단에 충격을 준 것처럼, 이들 시가 낯설고 불편한 것은 새로운 미학과 세계관을 한 발 앞서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라 했다. “먼 훗날, 이들의 작품이 낡았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날이 분명히 올 것이다. 다르게 말해서 이들의 작품이 가까운 미래에 우리 시의 분명한 대안이라는 것을 인정할 날이 올 것이다.”(‘미래파’ 171쪽)

이어서 기자는 두 편의 시를 예시하고 있다. 나의 독후감으론 황병승과 진수미의 예시된 시는 종류가 좀 다르다. 그것은 시가 그 독법에 있어서 어느 만큼의 논리를 허용하는가, 혹은 어떤 종류의 논리를 요구하는가에 달려 있다. 더불어, 시의 난해성이 시적 주체의 개성과 연관되는 것인지, 아니면 개별성 이전의 전주체성(presubjectivity)과 연관된 것인지 구별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요즘 시'를 한번 읽어보시라. 그리고 해독/해석해 보시라. 나의 생각은 조만간 다른 자리에서 정리해두도록 하겠다.

▲ 커밍아웃 / 황병승

나의 진짜는 뒤통순가 봐요
당신은 나의 뒤에서 보다 진실해지죠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
얼굴을 맨바닥에 갈아버리고
뒤로 걸을까 봐요

나의 또 다른 진짜는 항문이에요
그러나 당신은 나의 항문이 도무지 혐오스럽고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
입술을 뜯어버리고
아껴줘요, 하며 뻐끔뻐끔 항문으로 말할까 봐요

부끄러워요 저처럼 부끄러운 동물을
호주머니 속에 서랍 깊숙이
당신도 잔뜩 가지고 있지요

부끄러운 게 싫어서 부끄러울 때마다
당신은 엽서를 썼다 지웠다
손목을 끊었다 붙였다

백년 전에 죽은 할아버지도 됐다가 고모할머니도 됐다가…

부끄러워요? 악수해요

당신의 손은 당신이 찢어버린 첫 페이지 속에 있어요

▲ 그러다가 어느 날 / 진수미

유방은 부풀어오른다 터질 듯이 고요한 프로펠러
갈증을 느낀 비행선이 그림자를 몰고 나타난다.
보라색 태양일랑 내가 오려냈다오.

승냥이들이 거품 무는 파도가 쫓아오고
내장 없는 배의 항로를 걱정하는
어머니, 이 배에 앓는 항구가 누워 있어요.

사랑스런 임차인들아,
나는 그들에게 돌려줄 것이 있다오.

당신의 장기를 물어뜯는 거리의 개들
적선은 더 큰 바람을 부를 거예요.

소유를 짤랑이는 열쇠와 함께
집달리들이 득달같이 들이닥친다.
그들은 신부의 의상을 하고 있어요.

냉장고는 머리가 깨져 시큼한 국물을 지리는데
벌레들이 바람의 커튼을 흔들며 날아올라요.

뒤엉킨 서랍의
껍질 벗고 교미하는 실뱀 한 꾸러미,
그들은 신부의 의상을 하고 있어요.

05. 11. 01.

P.S. 다시 생각해보니까, '시의 날'은 5공때 문공부 장관을 지낸 정한모 시인의 '작품' 같다. 이어령 선생은 노태우 정권때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냈다. 확실하진 않지만, 내 기억이 말해주는 건 거기까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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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5-11-01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빈께서 다녀가셨네요.^^ 저도 가끔 검은비님의 그림 구경을 하는데, 제가 참견할 형편이 못되더군요. 그림을 보는 만큼 보듯이 시도 읽는 만큼 읽으면 되는 거 아닐까요...

파란여우 2005-11-01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계어로 씌여지는 시에 외계어로 반응하는 정서가 요즘 시가 아닌가해요
퍼 갑니다^^

로쟈 2005-11-01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중에 밝히겠지만, 유사-외계시들도 더러 눈에 띕니다. '더듬거리며 말하기' 혹은 의미를 다리 절게 만드는 것은 (들뢰즈식의) 소수문학적 전략으로 유효하지만, '트렌드'는 언제나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현재의 문학장, 문학제도와 무관한 문제도 아니구요. 시집들이 모두 얌전하게, 시인 누구누구의 시집 뭐뭐로 출판되는 것 자체는 전혀 '소수적'이지 않은 현상이며, 지극히 이해 '잘되는' 현상입니다.

urblue 2005-11-01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퍼 갑니다.
시는 잘 모르나 아는 시인의 이름이 언급되었군요.

kimji 2005-11-01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보,라 하기에는 울림까지 포함되어 있어 그저 '고맙게 잘 읽었습니다'라는 인사로 대신하겠습니다. 가을, 시 읽기 좋은 계절이라는,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를 주억거리면서-
(첫인사,이지요? 두루두루 종종 뵙겠습니다,라는 인사도 동봉하면서- )


로쟈 2005-11-01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쓴 것도 별로 없는데, 많이들 내왕하시는군요. 제가 쓰는 분량을 점점 줄여야겠습니다.^^

도서관여행자 2005-11-01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어요. 퍼갈게요 ^^

검둥개 2005-11-01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퍼가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 .^ (꾸벅)

페일레스 2005-11-01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지금껏 쓰시는 분량도 모자르십니다. 흐흐. ^ㅡ^

깜소 2005-11-02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저두 퍼갈께요..

로즈마리 2005-11-02 0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너무 착한 시들에 짜증이 잔뜩 났었드랬어요. 말그대로 순 깨달음의 시들. 그렇다고 젊은 시들의 외계성이 과연 좋은가..역시 의문입니다. 젊은 피들의 치열함이 의미있게 형상화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로쟈 2005-11-02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들 이렇게 시에 관심이 많으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시 얘기도 가끔 올려야겠네요...

젠틸레냐 2005-11-10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퍼갑니다.^^
 

창밖은 단풍이 절정이고 오늘은 10월의 마지막날이다. 이런 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세월은 제 갈길을 가고 남아있는 자들만 뒤늦게 정신 (못)차린다(그런 세월 죽이는 일로 세월을 다 보내다니!). 그나마 가을이어서 다행이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좀 붉어져도 단풍에 묻혀갈 수 있으니. 점심 먹고 잠시 걸었지만, 천성이 다소간 게으른 탓에 산책은 눈으로만 즐기기로 한다. 그럴 때 도서 산책은 꽤나 요긴한 핑계가 된다. 교양있는 척하며, 게으름을 즐길 수 있으니 말이다. 덤으로 천재들과도 아는 척하고...

 

 

 

 

이번에 맨처음 꼽을 책은 단연 도날드 스포토(D. Spoto; 1941- )의 <히치콕>이다. 나대로 히치콕의 대해서는 작년에 지젝 편,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새물결, 2001)에 실린 평문들을 자세히 읽으면서도 언급한 적이 있고, 그때 스포토의 저명한 전기 <천재의 이면: 알프레드 히치콕의 생애>가 번역되기를 희망한다고 적었더랬다. 이번에 <히치콕>이란 제하에 신간이 나왔길래 나는 그 전기인가 했는데, 책은 <알프레드 히치콕의 예술세계: 그의 영화인생 50년>이란 원제의 또다른 책이다. 국역본의 제목은 <히치콕: 히치콕의 영화 50년>(도서출판 동인).

이번주 영화주간지 <필름 2.0>에도 소개가 됐는데, 잠시 옮겨보면 이렇다. "드디어 나왔다. <히치콕>의 저자 도날드 스포토는 슬라보예 지젝과 로빈 우드, 그리고 영화감독 프랑수아 트뤼포와 클로드 샤브롤에 뒤지지 않는 히치콕 마니아다. '앨프리드 히치콕의 예술'이라는 원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처음 1976년에 나왔고(*아마존에서 현재 판매중인 건 1991년판이다), 이를 받아본 히치콕은 도날드 스포토를 LA로 초청해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그는 히치콕의 초기 무성영화로부터 <로프> <이창> <토파즈>까지 45편의 영화들을 연대기적 접근방식으로 세밀히 분석하고 있다."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스포토의 신간은 그의 전기와 함께 히치콕 기본서에 속한다. <필름 2.0>의 기자도 언급하고 있지만 트뤼포의 <히치콕과의 대화>(한나래, 1994)가 그런 기본서이며, 역시나 '까이예' 비평가 출신의 샤브롤과 에릭 로메르가 편집한 책으로 작년에 국역본이 나온 <알프레드 히치콕>(현대미학사, 2004)도 히치콕의 초기작들을 다루고 있는 기본서이다. 거기에 새로운 기본서로 추가된 것이 지젝의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이고. 해서, 반갑고 고무적이다(기본서들은 우리 교양의 기초를 튼실하게 해준다). 게다가 다행스럽게도 히치콕의 영화 대부분은 국내에 비디오나 DVD 타이틀로 출시돼 있다(주로 '유니버설'이나 '씨네코리아'에서 나왔고, 나오고 있다). 하니 여유만만한 분들은 45편의 영화 리스트와 스포토의 해설을 옆에 놓고 히치콕의 영화들을 연대기순으로 죽 관람하시면 되겠다. 

로로로 시리즈로 나온 또다른 전기 <앨프레드 히치콕>(한길사, 1997)은 너무 간략한 느낌이 있지만 일독할 만하다(이 책에 대해서는 '리뷰'를 쓴 적이 있다). 저작 목록을 보건대 스포토는 일급의 전기작가이며,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즈와 배우 마릴린 먼로, 제임스 딘, 로렌스 올리비에, 잉그리드 버그만 등에 관한 전기도 갖고 있다. 그 중에서 국내엔 <제임스 딘>(한길아트, 1999)이 번역돼 있다. 예수와 성 프란치스코에 대한 전기도 쓴 걸로 봐서 거의 종횡무진이라고 해야 할 듯. 국내에 잘 알려진 전기작가로서는 20세기 전반기의 슈테판 츠바이크와 자웅을 겨룰 만하다. 물론 그의 책들이 더 많이 소개된다면...  

 

 

 

 

두번째 책은 히치콕(1899-1980)과 같은 생년을 가진 미국 작가 헤밍웨이(1899-1961)가 "모든 현대 미국문학은 마크 트웨인의 <헉핀>으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예찬한 가장 '미국적인' 작가 마크 트웨인(1835-1910)의 '철학이야기' <정말 인간은 개미보다 못할까>(북인)이다. 원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What is man?)'. 지난 여름에 <지구로부터의 편지>(베가북스)라는 풍자적인 이야기가 번역/소개된바 있지만, 근년/최근에 와서 트웨인의 책들이 신간으로 자주 눈에 띈다. 사실 이번 신간 때문에 새삼 더 주목하게 된 책은 지난 2월에 나온 그의 자서전, <마크 트웨인 자서전>(고즈윈, 512쪽)이다. 모스크바에서 돌아와 내가 이 연재를 잠시 쉬던 때에 나온 책이서 거명하지 않고 지나갔던 책인데, 이 기회에 눈도장을 찍어둔다.

그의 자서전은 서강대 장영희 교수가 "대작가 마크 트웨인이기 전에 인간 마크 트웨인으로서 철저한 자기성찰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자상한 남편과 아버지, 이웃으로서의 모습과 쾌활하고 자유분방한 성격, 삶을 꿰뚫는 예리한 풍자 밑에 흐르는 슬픔과 페이소스가 담겨 있는 자서전 문학의 정수"라고 평하고 있는 책으로 트웨인의 독자나 예비독자라면 반드시 읽고 넘어가야 할 책이다.

 

 

 

 

미국 문학의 '간판' 작가답게 트웨인은 국내에도 헤밍웨이만큼 잘 알려져 있지만 주로 '아동물'을 통해서이다. <톰 소여의 모험>이 웬만한 아동/청소년 문고에는 다 들어가 있기 때문이고, 나도 초등학교 때 소년소년 세계명작 시리즈로 트웨인을 처음 만났다. 유감스러운 건 대부분의 경우 그런 게 트웨인과의 인연의 전부라는 점. 나 또한 사실 대학에 와서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미국문학사에서 그토록 '중요한' 작품이란 걸 알게 되고서 다소 놀랐을 정도였다(특히, 현대 미국문학 평론가 레슬리 피들러의 견해 참조). 그간에 머리가 큰 만큼 <허클베리 핀의 모험>(민음사, 1998/2005)도 이젠 '고전'으로 다시 읽어볼 만하다.

 

 

 

 

레슬리 피들러의 제자이기도 한 김성곤 교수의 <미국문학과 작가들의 초상>(서울대출판부, 1993)은 내가 '미국문학 사전'으로 자주 애용하는 책인데, 거기엔 영국시인 오든(W. H. Auden)의 흥미로운 평문 '허크와 올리버'가 실려있다(전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오든은 두 작품, 즉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를 현대 영미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거명하면서 두 주인공 허크와 올리버를 비교한다. 그는 자연에 대한 태도, 현실에 대한 태도, 그리고 시간과 돈에 대한 태도를 기준으로 하여 이들을 대조하는데, 가령 유럽(영국)인에게서 자연이 어머니의 품 같다면, 미국에서의 자연은 야성적이라는 식이다.

그러면서 그는 유럽인들이 읽기에 <헉핀>은 매우 슬픈 소설이라고 말한다. <올리버 트위스트>의 끝장면에서 올리버가 사랑이 있는 가정에 입양되면서 그의 꿈을 실현하는데 반해서 유사한 모험들을 겪게 되지만 허크는 그의 친구 짐과 결국엔 헤어질 것이며 다시는 못나게 되리라는 걸 독자가 알게 되기 때문이다. 또, 사건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유럽인들은 새로운 요소를 보지 못하는 반면에(사건들은 '반복'으로 의미화된다) 미국인들은 반복의 요소를 보지 못한다(사건들은 언제나 새로운 것으로 지각된다. 이런 경우 프로와 아마추어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

돈의 경우도 대비되는데, "올리버의 경우, 그것은 법적 상속권에 의해 그에게 주어진다. 허크의 경우에는 그것이 순전히 행운일 뿐이다." 오든은 거기서 조금 더 나간다: "미국에서 돈은, 자연이라는 용(龍)과의 전투를 통해 빼내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곧 성인의 표증을 상징한다. 미국인에게 중요한 것은 돈을 갖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버는 것이다... 유럽의 단점은 탐욕과 인색이며, 미국의 단점은 이 양적인 돈이 성인의 표증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어디에서 중단해야 될는지 알기 어려운 데서 기인하는 근심이다... 사실 미국인들은 물질에 대해서 별로 연연해하지 않는다. 충격적인 것은 미국의 소비일 뿐이다. 마치 유럽의 미국인들에게 충격적인 것이 유럽의 탐욕이듯이." 음미해볼 만한 견해이다.

 

 

 

 

세번째 책은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1860-1904)의 <초원>(범우사). 이번에 나온 5권짜리 체호프 선집 중 제3권인데, 특별히 이 책을 꼽은 건 중편 <초원>이 최초로 번역됐기 때문이다(책에는 '구세프' 등 4편의 단편이 더 실려 있다). 작년에 서거 10주년을 맞아 여러 행사들이 치러졌었다는 얘기는 '모스크바 통신'에서 전한 바 있다. 국내에서는 오종우 교수의 체호프 선집 2권,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과 <벚꽃동산>이 열린책들에서 나왔었는데, 탄생 145주년을 맞은 올해 좀더 그럴 듯한 5권짜리 선집이 나온 것. 그간에 많이 번역된 드라마의 경우에는 이채로울 것이 없지만(희곡 <바냐 아저씨>가 <바냐 외삼촌>으로 번역된 게 좀 튄달까), 초기 단편들이 대거 포함된 1-3권은 주목할 만하다.

1888년에 발표된 <초원>은 진지한 주제를 담은 분량 있는 작품을 써보라는 주위의 충고에 답하기 위해 씌어진 작품인데(방점은 '분량'에 있다) 주로 콩트나 단편들 위주로 써온 체호프에게 '중편' <초원>은 모험적인/실험적인 성격을 가진 작품이었다. 한 소년의 초원 여행을 기본 플롯으로 갖고 있는 서정적인 작품인데, 초기 체호프의 전매특허인 '코믹'은 극소화되어 있으며 내게는 작품 자체의 의미보다는 작가가 왜 '장편'으로는 나아가지 못했을까를 궁리해보게 만드는 작품. 역자는 이 작품으로 학위논문까지 쓴바 있기에 적역을 찾았다고 할 수 있다.  

이 <초원>이란 작품이 단연 상기시켜주는 이름은 러시아의 저명한 체호프 학자 알렉산드르 추다코프(추다꼬프)이다. 국내 대학에서도 강의를 한바 있고(나도 강연을 한번 들은 적이 있다) 한국인 제자들도 길러낸 분인데, 그의 출세작 <체호프의 시학>에 이 <초원>에 대한 자세한 비평적 분석이 실려 있기 때문(<체호프의 시학>은 체호프에 관한 단일 연구서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 그의 또다른 주저가 <체호프의 세계>이고, 이것은 <체호프와 그의 시대>(소명출판, 2004)로 번역돼 있다. 물론 전문서이기 때문에 일반 독자들과는 다소 무관한 책이지만. ('모스크바통신'에서도 거명한 바 있는) 추다코프 교수를 다시금 언급하는 것은 정정하던 그가 얼마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작년에 푸슈킨과 체호프에 관한 그의 강의를 청강해두지 못한 게 아쉽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아울러 국내에선 체호프 전공자 오종우 교수의 연구서 <체호프의 코미디와 진실>(성균관대출판부, 2005)이 이번에 출간됐다는 것도 기록해둔다. 역시나 전문서이지만 애호가들도 읽어볼 만하겠다.  

  

 

 

 

네번째 책은 종교학자 엘리아데(1907-1986)의 <세계종교사상사>(이학사)이다. 전3권이 한꺼번에 출간됐는데, 우리 출판의 '역량'을 과시하는 듯해서 나름으로 부듯하다. '엘리아데'란 이름은 내게 좀 각별한데, 대학에 들어와서 제일 처음 들은 낯선 이름이 바로 '엘리아데'였기 때문이다(나는 첫학기에 조기수강신청했던 '철학개론'을 물리고 대신에 '종교학 개론'을 들었다). 해서 엘리아데는 내게 '대학'이라는 말이 상징하는 모든 것과 결부돼 있다. 지성, 학문, 자유, 학자, 열정, 강의 등과 말이다. 하여간에 이번에 나온 방대한 저작은 <종교형태론>(한길사, 1996)과 함께 서가에 꽂아두고 쉬어쉬엄 읽어보면 좋겠다. 사실 모스크바 체류시 막판에 가장 망설였던 게 고서점에서 본 엘리아데 러시아어본들을 사느냐, 마느냐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대부분은 인터넷에 전문이 올라와 있었다. 덕분에 이 방대한 책의 러시아어본을 나는 손에 물 안 묻히고 소장하고 있다. 

   

 

 

 

그 자체가 종교학 입문의 성격도 갖는 엘리아데 입문은 엘리아데의 제자이기도 했던 정진홍 교수의 <엘리아데: 종교와 신화>(살림, 2003)이 단연 독보적이다. 아마도 국내에서는 다른 적임자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엘리아데 자신의 저작으론 <종교의 의미: 물음과 답변>(서광사, 1990)과 함께 <성과 속>(한길사, 1998)이 기본서. 독문학 연구자인 안진태 교수의 <엘리아데.신화.종교>(고려대출판부, 2005)도 다소 전문적이지만 지난 5월에 나온 관련서이다.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실재의 윤리>의 저자 알렌카 주판치치의 니체론 <정오의 그림자>(도서출판b)이다. 원제는 '가장 짧은 그림자(The Shortest Shadow : Nietzsche's Philosophy of the Two)'. 저자 주판치치는 슬로베니아 출신의 이 여성 '사무라이'로서 슬라보예 지젝이 가장 총애하는 제자 중의 한 사람이다. '칸트와 라캉'을 다룬 전작에 이어서 잔뜩 기대를 모으는 책인데(앞으로 '주판치치의 모든 책'이 될 것이다) 혹자는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에 비견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론, 인연이 닿았다면 번역을 맡을 수도 있었던 책이라 이번 출간이 반갑고 기대된다(나 같이 게으른 역자를 안 만난 게 여러 모로 다행스럽다). 또 마침 책세상판 니체 전집도 완간된 김에 이번 겨울은 니체에 폭 빠져보는 것도 일리 있겠다. 초심자라면, 이번에 나온 로런스 게인의 '만화책' 입문서 <니체>(김영사) 정도는 떼주시길(나는 작년에 러시아어본으로 읽었다).

니체에 관한 전기로는 자프란스키의 <니체>(문예출판사, 2003)와 홀링데일의 <니체, 그의 삶과 철학>(이제이북스, 2004)가 기본서이다. 전자는 독어권을 대표하며(철학자 전기에 있어서 자프란스키는 최고의 실력자이다) 후자는 카우프만, 아서 단토 등의 책과 함께 영어권(미국)의 대표 저작. 참고로 홀링데일은 카우프만과 함께 니체 영역(英譯)을 양분했었다. 그리고 국내의 대표 저작은 '한국의 책 100권'에 선정된바 있는 <니체가 뒤흔든 철학 100년>(민음사, 2000). 이젠 외국어로도 읽을 수 있다!(독역되었나?)...

기타 여러 시인들의 시전집들과 토마스 쿤 평전, 몇 권의 정치학 책과 데이비드 흄에 관한 책 등이 보관함에 들어 있지만, 다음을 기약하기로 한다. 어느새 캄캄하다...

05. 10. 31.

P.S.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또 만나요..." 제발 이젠, 그만 만나자구요?!

P.S.2. 이 페이퍼를 계기로 즐찾 400이 되었다. 평균 하루에 한 명꼴로 찾아주시는 분들이 늘었다. 찾아주시는 분들의 상당수는 출판관계자들인 것으로 안다(일부는 나를 불편하게 생각한다는!). 이 자리를 빌어 그분들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물론 엉터리나 찍어대는 분들은 나와는 아직도 계산할 게 많이 남아있다. 서로의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하겠으니, 모쪼록 독감들 주의하시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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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5-10-31 15:25   좋아요 0 | URL
한 발 빠르셨습니다. 흐흐...

로쟈 2005-10-31 15:32   좋아요 0 | URL
이런 거 먼저 찜하면 혹 상품이라도?..

이네파벨 2005-10-31 16:04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 <천재의 이면...>의 원제가 혹시 The Dark Side of Genius: The Life of Alfred Hitchcock 아닌가요? 이 원서 저에게 있어요! 10년쯤 전 미국에 있을때 벼룩시장에서 $1.5 주고 산 페이퍼북...
몇페이지 읽다 말고 처박아두었는데 시간나는대로 읽어보아야겠네요.

이 책을 쓴 스포토가 뛰어난 전기작가였군요...
전 개인적으로 평전이라는 장르를 무척 좋아하는데....우리나라에서는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어요, 아주 유명한 인물이 아니고서는...

전 히치콕은 개인적으로 잘 모르고...("새"와 "vertigo"를 보았을 뿐예요. 둘 다 인상적이었지만 개인적으로 파고들어온 느낌은 아니라서...)
오히려 "테네시 윌리엄스"의 전기를 읽어보고 싶어요.
테네시 윌리엄스의 작품들은....저에게 정말이지 intimate한 감동을 주기 때문에....
실제로 윌리엄스의 삶도 그의 작품들 못지않게 어둡고 불행했다고 들은 기억이 나는데....

고통의 진흙탕에 속에서 딍구는 돼지처럼 온 몸에 고통을 처덕처덕 발라가며....
고통의 실을 잣는 거미처럼 제 몸 가장 깊은 곳에서 누구나 외면하고 싶고 누구도 감히 드러내 보이지 못하는 가장 어둡고 아픈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예술가들....
삶과 작품을 떼어놓을 수 없는 예술가들...

그런 사람들의 전기를 읽어보고 싶어요.
(을유문화사에서 기획중이라는 빌리 할러데이의 전기도 기대 중...)

근데 우리나라에서 테네시 윌리엄스의 전기를 번역해 내놓으려는 용감한(or 돈벌생각 없는) 출판사는 아마 없겠죠?

바람구두 2005-10-31 16:19   좋아요 0 | URL
아니, 그 대신에 땡스 투 했답니다.

로쟈 2005-10-31 17:30   좋아요 0 | URL
이너파벨님/ 그 책 맞습니다(잘 사두신 겁니다). 부피가 좀 되죠. 저는 같은 1899년생인 작가 나보코프와 히치콕을 비교해보려는 생각에서 관련 대목을 좀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두 사람이 같이 작업을 할 뻔 했지만 성사되지는 않았습니다)... 바람구두님/ 땡큐...

니브리티 2005-11-01 09:14   좋아요 0 | URL
와~ 주판치치의 책이 나왔군요! 마침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을 읽고 있던 참인데...이중긍정 얘기는 도통 머리가 아파서...이해할 듯 하면서도 논점을 놓치거나...그동안의 내 글쓰기가 '원한의 글쓰기'는 아니었나 섬뜩했다는...ㅜ.ㅜ 정말 잘됐군요. 당장 주문해야지...ㅋㅋ

비로그인 2005-11-01 17:08   좋아요 0 | URL
김재인 씨가 이경신의 "니체의 철학" 번역을 "쓰레기"라고 평하셨던데 로쟈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로쟈 2005-11-01 17:13   좋아요 0 | URL
제가 <니체와 철학>을 아직 통독하지 않았는데, 진태원씨 같은 경우는 읽을 만한 번역이라고 했었죠. 제 생각엔 <니체와 철학>보다도 <들뢰즈 커넥션>에 더 오역이 많을 거 같은데...
 

지난번 읽기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거기에 덧붙이려다가 자리를 따로 마련했는데, 분량이 짧게 끝나면 도로 갖다 붙일 작정이다. 오늘은 도서관에서 ***님이 추천한 만델바움(A. Mandelbaum)의 영역본(Everyman's Library, 1995)과 함께 <미메시스>의 저자 아우얼바하(E. Auerbach; '아우어바흐'로도 표기)의 <단테: 세속 세계의 시인>(시카고대출판부, 1961/1974; 독어본은 1929)도 대출했다. 영역된 <단테>는 195쪽이며 분량으로는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책이다. <신곡>을 읽으며, 혹은 읽고 나서 내가 읽고픈 책인지라 미리 대출해놓은 것. 

 

 

 

 

아우얼바하(1892-1957)가 <미메시스>를 출간한 것이 1946년이므로(영역본은 1953년에 나온다) 그가 37세에 출간한 <단테>는 그의 초기 저작이라고 할 만하다. 내가 특별히 이 책을 기억하게 된 것은 작년 러시아 체류 시절에 러시아어본이 출간됐기 때문이다. <미메시스>의 저자라는 것 말고는 저자에 관한 특별한 지식이 없었던 나로선 비교적 얇은 분량의 '단테론'에 여러 차례 손이 갔다. 하지만 끝내 구입하지는 않았는데, 재정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어차피 영역본으로 읽으면 되리라는 판단과 아직 <신곡>도 읽지 않았다는 사정이 거기에 보태어졌다. 그건 러시아어본 <미메시스>에도 똑같이 적용이 됐는데(나는 국역본과 영역본을 갖고 있다), 지금 생각하면 좀 무리했어도 되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크게 미련을 갖고 있는 건 아니지만.

지난 1999년 한 학술지에 아우얼바하 특집이 마련되었었고(특별한 이유는 모르겠다), 그런 특집은 2003년에도 있었다. 그건 이유가 없지 않은데, <미메시스>(영역본) 출간 50주년 기념으로 <미메시스>(프린스턴대출판부, 2003)가 재출간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에 관해서는 E. 사이드나 T. 이글턴 같은 쟁쟁한 비평가들이 새로운 서평을 씀으로써 아우얼바하의 업적을 기렸다(사이드의 글은 계간 <세계의 문학>에 이글턴의 글은 북매거진 <텍스트>에 각각 번역/소개되었다). 내게 더 흥미로웠던 건 이글턴의 시각이었는데, 그는 동시대 이론가들이었던 바흐친, 루카치와 아우얼바하를 비교하면서 이렇게 지적한다: "루카치에게 현실주의가 부르주아적인 것이었다면, 아우어바흐에게 그것은 서민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아우어바흐는, 루카치의 역사주의와 바흐찐의 성상파괴주의가 혼합되는 흥미로운 교차점이다."(지주형 역) 이들의 계열체는 이렇다: 루카치(부르주아)-아우얼바하(서민)-바흐친(민중)

 

 

 

 

잠시 우회했는데, 여하튼 단테와 <신곡>에 대한 관심이 작년부터 무르익었었다는 개인적인 사정 얘기이다. 말이 나온 김에 그런 개인 사정을 조금 더 늘어놓자면, <신곡>에 대해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건 중2 때이다. 학교에서 공부 라이벌이었던 한 친구가(이 친구는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했는데, 지금은 변호사가 돼 있다) 어느날 세로 읽기로 된 <신곡>을 들고 다녔던 것. 200쪽 정도의 분량이었으니까 지금 생각에 좀 조잡한 다이제스트판이었던 듯싶은데(당시에 따로 뭐가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내가 이름을 꿰고 있지만 정작 읽지는 않은 '고전'을 옆구리에 끼고 다닌다는 게 나름대로 '충격'이었다. 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같은 책을 사서 (끼고 다니지는 않고) 책꽂이에 꽂아두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 해설만 읽었던 모양으로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전설적인 사랑 이야기를 나는 이후에 (여러 미팅 자리에서) 여러 번 욹어먹은 기억이 있다. 가령,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말이야... 너무 가까이 갈 수도 없고, 너무 멀리 떨어질 수도 없어서... 진정한 사랑이란 아마도...

 

 

 

 

본론으로 들어가야겠다. 본론이란 특별한 게 아니고 지난번 "우리네 인생길 반고비에서" 읽기를 약간 보충하고자 할 따름. 내가 새롭게 동원하고자 하는 건 서두에서 언급한 만델바움의 번역과 허인 옮김으로 돼 있는 '단떼'의 <신곡>(학원출판공사, 1996)이다. '학원세계문학전집'의 한 권인 이 책을 나는 몇 년 전 헌책방에서 2,000원을 주고 샀다. 2단 조판의 본문이 376쪽이므로 다이제스트는 아니지만 번역본 서지나 역자에 대한 소개 등이 누락돼 있어 신빙성 있는 번역인지는 좀 의심스럽다. 하여간에 이 번역본에서 지난번에 읽은 첫 9행을, 비교를 위해서 한형곤 역과 같이 옮겨보면 이렇다. 만델바움의 영역도 나란히 옮겨놓겠다.

-우리네 인생길 반 고비에/ 올바른 길을 잃고서, 나는/ 어두운 숲속에 있었다. (한형곤)
-인생의 중반기에서/ 올바른 길을 벗어난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컴컴한 숲속에 있었다.(허인)
-When I had jouneyed half of our life's way,/ I found myself within a shadowed forest,/ for I had lost the path that does not stray.(만델바움)

-아, 거칠고 사납던 이 숲이/ 어떠했노라 말하기가 너무 힘겨워/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진다!(한형곤) 
-그 가열하고도 황량한, 준엄한 숲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입에 담는 것조차 괴롭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진다.(허인)
-Ah, it is hard to speak of what it was,/ that savage forest, dense and difficult, which even in recall renews my fear:(만델바움)

-죽음 못지 않게 씁쓸했기에/ 나 거기서 깨달은 선을 말하기 위하여/ 거기서 본 다른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리라.(한형곤)
-그 괴로움이란 진정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거기서 만난 행복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거기서 목격한 두세 가지 일을 우선 이야기할까 한다.(허인)
-so bitter - death is hardly more severe!/ But to retell the good discovered there,/ I'll also tell the other things I saw.(만델바움)

1, 2연의 번역은 지난번 읽기를 수정할 사항이 없다. 3연에서 역시나 'the good'의 번역이 문제인데, '선을 깨닫다'(한형곤)나 '선을 만나다'(박상진)란 표현이 어색하다는 건 여기서도 변함없다. 다만 허인 역에서는 '행복'이 지옥와 연옥의 안내자로 등장하는 베르길리우스와의 만남을 뜻한다는 주석을 달고 있다. 박상진 역도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있기에, 이 두 행을 "그러나 나는 거기서 귀중한 선(善)을 만났으니, 내가 만난 선을 보여주려면 거기서 본 다른 모든 것들도 말해야 하리라"라고 옮겼을 법하다. 박상진 역은 만델바움의 영역과도 걔 중 가장 잘 맞아떨어진다. 과연 그 '선' 혹은 '행복'이 베르길리우스와의 만남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더 읽어봐야겠다. 참고로, <신곡>을 읽으면서 반드시 참조해야 할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도서출판숲, 2004)는 천병희 선생이 정역본이 작년에 나왔다(이래저래 <신곡> 읽기를 피해갈 구멍이 없는 셈!).

 

 

 

 

이상을 종합하여, 나의 '독단'에 따라 옮겨보면 아래와 같다(번역 작업은 때로 작곡과 유사하다).   

-우리네 인생길 반고비에/ 가야할 길을 잃고서 나는/ 어두운 숲속을 헤맸었네.
-아, 얼마나 아득하고 거친 곳이었는가/ 말로 다 이를 데 없고/ 생각만으로도 두려워라.
-죽음도 그보단 덜 쓰라릴 것이나,/ 거기서 나 은총을 마주했으니/ 이제 이 모든 걸 이야기하리라.

05. 10. 26. 

P.S. 아주 짧은 분량은 아니군... 마지막 연에서 '은총을 마주했으니'가 '신의 은총'이 아닌 '베르길리우스와의 만남'을 직접적으로 암시한다면, '은혜/은인을 만났으니'라고 옮기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이런 게 나대로의 읽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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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5-10-27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짝짝짝.... 잘 읽었어요.

로쟈 2005-10-27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격려에 감사를...

2005-10-27 2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5-10-28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칼라일 읽기 프로젝트를 저도 구경하면 안될까요?^^

쿠자누스 2005-11-05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 번역본을 출간하시면 어떨지요 ? 주문 예약을 하겠습니다.

로쟈 2005-11-06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 번역본이라니요? 턱도 없는 말씀이고, 저는 고전을 제 식으로 읽고 즐길 뿐입니다. 조만간 박상진 교수의 <신곡> 새 번역본이 나온다고 하는데, 그런 걸 기다리는 설렘을 누리면서...

2008-12-05 14: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생길 반고비에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의 <신곡(La Divina Commedia)>을 읽는다. 단테가 얘기한 반고비는 ("인생은 기껏해야 70년"이란 성서 시편의 구절을 기준으로 하여) 35세이지만, 그리고 그 나이라면 나로선 몇 년전에 (일없이)통과해 왔지만, 얼추 반고비로 간주하여(평균수명이 좀 늘어나기도 했으니 혹 여든까지 살 수도 있지 않은가?) 이 '신성한 코미디'를 한번 읽어볼 계획이다. 이런 계획을 더 일찍 실행할 수 없었던 것은 사실 개정된 완역본 <신곡>과 관련서들이 얼굴을 내민 게 바로 얼마전이기 때문이다.

 

 

 

 

 

 

 

 

 

해서 <신곡>을 읽기 위해 내가 갖추어 놓은 책은 한형곤 교수의 완역본 <신곡>(서해문집, 2005), 박상진 교수가 (산문으로)풀어쓴 <신곡>(서해문집, 2005), 그리고 김운찬 교수의 해설서 <신곡>(살림, 2005)이다. 거기에 덧붙여 도서관에서 영역본 <신곡>(J. Ciardi 옮김, New American Library, 2003)을 대출했고, 작년에 구해온 러시아어본 <신곡>(악트출판사, 2002)을 펼쳐놓고 있다(605쪽의 러시아어본은 '새 책'인데 헌책방에서 3,400원에 산 것이다. 그런 게 애서가의 '지극한' 즐거움이다). 그리고 읽을 줄 모르는 이탈리아어(단테는 피렌체 방언으로 썼다고 하며 그게 '단테 덕분에' 표준어로 성장했다고 한다)를 인터넷 사이트에서 찾아 띄워놓았다. 계획상으로 이 읽기는 이번 겨울까지 계속될 것이며, 간간이 읽기의 흔적들을 이런 자리에 남겨놓도록 하겠다. 오늘은 시작하는 의미로 '지옥편'의 첫 아홉 행을 읽는다.

 

먼저 원문은 이런 모양으로 돼 있다(왼쪽의 숫자는 칸토(Canto)와 행수를 표시한다. 시에서 '칸토'란 소설의 '장(章)', 혹은 'chapter'에 해당하는 용어인데, 현대 시인들 가운데서는 T. S. 엘리엇의 스승으로 잘 알려진 E. 파운드의 시집 <칸토스(Cantos)>(문학과지성사, 1992)가 유명하다. '시편들' 정도의 뜻이 될까? <신곡>의 우리말 번역에서는 '곡'이라고 옮기는바, '1.1'은 제1곡의 제1행이란 뜻이다.

 

1.1 Nel mezzo del cammin di nostra vita
1.2 mi ritrovai per una selva oscura
1.3 ché la diritta via era smarrita.

1.4   Ahi quanto a dir qual era è cosa dura
1.5 esta selva selvaggia e aspra e forte
1.6 che nel pensier rinova la paura!

1.7   Tant'è amara che poco è più morte;
1.8 ma per trattar del ben ch'i' vi trovai,
1.9 dirò de l'altre cose ch'i' v'ho scorte.

 

<신곡>의 형식은 알다시피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 3부로 구성돼 있으며, 각각은 33편의 곡(노래)으로 돼 있다(단테는 '3'이란 숫자에 유달리 집착했다고). 김운찬 교수의 해설을 참조하면, 각각의 시행은 11음절로 돼 있으며, 세 개의 행이 하나의 단락을 이루는 3행 연구(聯句)로 구성돼 있다. 거기서 1, 3행이 각운을 이루고 있는바, aba, bcb, cdc...하는 식으로 운이 맞추어져 있는 것. 예컨대, 인용한 대목에서 굵은 글씨로 표기한 각 연구의 1, 3행 마지막 단어들이 각운을 맞추고 있는 단어들이다. 33편의 각 곡은 115-160행 사이의 행들로 구성돼 있으며(가장 많이 활용되는 길이는 139행과 142행이라고), 맨마지막에는 3행 연구 다음에 1행이 덧붙여진다고 한다. 그런 식으로 해서 <신곡> 전체는 1만 4,233행의 방대한 분량을 자랑한다.  

 

이 첫 9행은 그러니까 지옥에서 천국에 이르는 방대한 여정의 첫 세 걸음인 셈이다. 나는 3행 연구를 편의상 '연'이라고 부르겠다. 해서, 1연부터 살펴보면, 우리말 번역은 이렇게 돼 있다. 

 

우리네 인생길 반 고비에
올바른 길을 잃고서, 나는
어두운 숲속에 있었다. (한형곤, 42쪽)

 

시의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서 행가름은 돼 있지만, 원시처럼 운율(특히 각운)을 맞추고 있지는 않다. 그리고, 우리 완역본의 경우엔 3행연구의 연 구분을 따로 해주고 있지 않다(그랬다면, 현재 968쪽인 번역본의 쪽수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더 불어났을 것이다). 일종의 절충식인 것. 참고로 영역본에서 1연을 옮기면 이렇다.

 

Midway in our life's journey, I went astray
from the straight road and woke to find myself 
alone in a dark wood. How shall I say

 

1, 3행의 마지막 단어를 굵을 글씨로 표기한 것은 각운을 맞추고 있는 단어들이기 때문이다. 이건 러시아어본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굴절어에 속하는 같은 인구(印歐)어일 경우에 시 번역은 시로서의 형식적 조건을 맞추어 주는 것이 일반적이다(내용상 약간의 변형을 감수하더라도). 반면에 교착어인 한국어로는 그런 형식미를 충족시켜주기 어렵다. 해서, 박상진 교수가 산문으로 풀어쓴 문장, "인생의 반평생을 지냈을 무렵, 나는 바른길에서 벗어나 어두운 숲속에 들어서게 되었다."를 그냥 행가름만 해주면 한형곤 교수의 번역과 별 차이가 나지 않게 된다. 

 

인생의 반평생을 지냈을 무렵, 
나는 바른 길에서 벗어나 
어두운 숲속에 들어섰다.(박상진, 14쪽)

 

혹은 같은 대목의 다른 번역:

 

우리 인생길의 한가운데에서  
나는 올바른 길을 잃고
어두운 숲속에 처해 있었다.(김운찬, 59쪽)

 

다시 말해서 <신곡>의 시로서의 묘미는 대개의 시 번역에서와 마찬가지로 국역본에서는 음미하기 어렵다. 해서, 우리가 따라가볼 수 있는 것은 그저 대략적인 줄거리이고 여정일 따름. 원문의 'mezzo'(많이 보던 단어이다!), 영역의 'midway'에 해당하는 것이 우리말의 '반 고비'인데, '고비'란 '막다른 때나 상황'을 가리키는 고유어이고 '반 고비'는 인생의 전환점, 30대 중반을 가리키는 단어로서 (비교적 제한적인)쓰임새를 갖고 있다. 이 경우에는 '반평생'이나 '한가운데에서'보다는 '반 고비'란 말이 시적이다. 참고로, 작고한 평론가 김현이 30대 중반에 쓴 기행문집에 <반고비 나그네 길에>가 있었다.

 

 

 

 

 

 

 

 

 

1연의 내용을 간추리자면, 인생길 반고비에서 길을 잃고 어두운 숲속에서 정신이 들었다는 것. 그런 상황에 처해서 놀라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는 게 2연의 (당연한)내용일 테다.

 

아, 거칠고 사납던 이 숲이   
어떠했노라 말하기가 너무 힘겨워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진다!

 

산문적으로 조금 풀면, "그 숲이 얼마나 거칠고 무서웠던지 생각만 해도 두려움이 절로 솟아난다."(박상진) 그렇다면, 이러한 회상을 늘어놓고 있는 화자-단테는 그러한 경험/여정이 완료된 상태(=현재)에 놓여 있다. 요컨대, 어두운 숲에서의 두렵고도 굉장한 경험을 이제 말해보겠노라는 것. 왜? 그 이유가 3연이다.

 

죽음 못지 않게 씁쓸했기에   
나 거기서 깨달은 선을 말하기 위하여
거기서 본 다른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리라.

 

다시 풀면, "죽음도 그보다는 더 무섭지 않으리라. 그러나 나는 거기서 귀중한 선(善)을 만났으니, 내가 만난 선을 보여주려면 거기서 본 다른 모든 것들도 말해야 하리라." 다른 번역들을 참조하건대, (한형곤 역에서의) '죽음 못지 않게'라는 동등비교보다는 (박상진 역에서의) '죽음보다 더'라는 우등비교가 더 타당한 듯하다(문맥의 논리상으로도 그렇다). 비교의 대상은 물론 '숲'과 '죽음'이다. 그리고 내가 좀 어색하게 생각하는 것은 '선'이란 번역어인데, 짐작에는 원문의 'ben'(원형은 'bene'라고 한다)을 옮긴 게 아닌가 싶다(불어의 'bien'을 연상케 하는데, 영어의 'good'에 해당한다). 참고로, 이 3연의 영역은 이렇다.

 

Death could scarce be more bitter than that place!    
But since it came to good, I will recount 
all that I found revealed there by God's grace.  

 

'선(善)' 이란 뜻 외에 불어 bien이나 영어의 good, 그리고 러시아어의 blago(영어의 'good' 혹은'grace') 모두가 공유하는 뜻은 '행복'이나 '은총'이며, 기독교적 문맥에서는 '선'보다 '은총'이 더 적합한 번역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화자인 단테는 어두운 숲과 거기서의 경험이 죽음보다도 더 두렵고 씁쓸했지만(그걸로 끝이라면 더 얘기할 것도 없다), 거기서 '은총'을 발견했기 때문에 이제 모든 걸 얘기하겠노라는 것(recount, 즉, 하나씩 되새김질하면서). "거기서 본 다른 것들"도 문맥상 "거기서 본 모든 걸들"로 이해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물론 나는 <신곡>에서 내가 읽은 모든 걸 늘어놓은 생각은 갖고 있지 않다. '거기서 읽은 몇몇 대목들' 정도를 앞으로 따라가볼 작정일 뿐. 왜? 벌써 인생길의 반고비를 지나(쳐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단테를 따라서 한번쯤 지옥과 천국을 오락가락 해보는 편이 마땅하다... 

 

05.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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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일레스 2005-10-25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은 점심을 드시고 와서 나머지 글을 쓰시겠지만 일단 추천부터 해 두렵니다.
미리 보지 않아도 나쁜 글이 아닐 거라는 걸 아니까요. 흐흐.

로즈마리 2005-10-25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손 대고 싶은데...이럴 때 이탈리아어로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럽습니다. --;;

로쟈 2005-10-25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천국은 장담할 수 없구요, 지옥 정도는 같이 가셔도 좋을 거 같습니다.^^

2005-10-25 16: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5-10-25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Mandelbaum의 영역본도 도서관에는 있는데, 제가 어떤 번역본이 더 나은가에 대한 정보는 안 갖고 있었습니다. 추천해 주시니까 그 책도 참조하겠습니다. 뭐, 저로선 <신곡>을 읽기 위해 이탈리아어를 배울 생각까지는 안 갖고 있습니다(도스토예프스키를 읽기 위해서 러시아어를 배우겠다는 게 쉬운 결심이 아니듯이). 다만, 스페인어권 시를 읽을 때 원문을 낭송해보곤 했었는데, 그런 방식 정도를 흉내 내볼 수 있겠네요(이탈리아어도 대충 철자대로 발음하는 거 맞지요?^^)...

산손 2006-06-07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뒷북 리플 답니다 ;; 저는 최민순 신부 번역을 추천해드리고 싶네요. '한뉘 나그냇길 반 고비에 올바른 길 잃고 헤매이던 나 컴컴한 숲 속에 서 있었노라/아으 호젓이 덧거칠고 억센 이 수풀 그생각조차 새삼 몸서리 쳐지거든 아으 이를 들어 말함이 얼마나 대견한고!/죽음 보다 못지않게 쓰거운 일이 었어도 내 거기서 얻어본 행복을 아뢰려로니 게서 익히 보아둔 또 다른것들도 나는 얘기하리라'. 읽기 편하지 않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영어로 번역이 미심쩍은 거 살펴보면 최민순 신부님이 더 맞더라구요(불어, 스페인어 번역과 일치하죠). 영어번역은 워낙 여러 시도가 있었는지라 ;; 이탈리아어랑 대조하면서 보시려면 Singleton 아저씨의 산문 번역(이탈-영어)을 참고하시면 될 거에요. 주석본도 같이. 이탈리아어 낭송은 www.ilnarratore.com에 단테 검색하시면 Canto I 낭송한 게 있습니다. 이상 뒷북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