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진스키 영혼의 절규
바슬라프 니진스키 지음, 이덕희 옮김 / 푸른숲 / 2002년 12월
평점 :
절판


“러시아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 러시아 시인 츄체프의 시구인데, 고골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작품들 속에서 ‘황당한’ 인물들을 만나다 보면 자연스레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이다. 비단 문학작품이 아니더라도 러시아란 나라의 자연적/역사적 조건에 대한 약간의 상식만 갖고 있으면 이 나라의 ‘비합리성’에 대해서는 어림짐작이 가능하다. 혁명 이전 전세계 육지의 1/6에 해당하는 광활한 영토와 한랭한 기후가 이 나라의 자연적 조건이라면, 3세기에 걸친 이민족 몽고의 강압적인 지배는 그 역사적 조건이다.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너무도 잔혹한 삶(러시아적 삶!), 그래서 비인간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조건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러한 조건 속에서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덕목은 ‘인내’였다. 러시아의 인텔리겐차들이 자인한 바 있듯이 러시아적 영혼이란 달리 ‘노예적 영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의 노예적 상태란 단지 정치적 부자유나 신체적인 구속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또한 인간 실존의 조건이면서 동시에 폭력과 고통으로 얼룩진 인류사의 역사적 조건으로 확장된다. 그리고 그 조건에 대한 인내의 '폭발'에서 광기의 계보학은 태어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1866)에는 어린 로쟈가 학대받는 늙은 말의 목을 껴안고 흐느끼는 장면이 나온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유일한 심리학자’라고 일컬은 바 있는 철학자 니체는 1889년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에서 학대받는 말의 목을 끌어안고 흐느끼다가 쓰러져 정신을 잃는다. 이후에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 그는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900년에 사망한다. 1889년에 태어난, 20세기초 러시아가 낳은 전설의 발레리나 바슬라프 니진스키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디오니소스적인 영혼의 소유자는 철학을 하는 대신에 춤을 추었을 뿐.

그는 10년은 자라고, 10년은 배우고, 10년은 춤추고, 나머지 30년은 정신병원에서 보냈는데, ‘영혼의 절규’란 이름을 새로 얻은 그의 ‘일기’는 그가 정신을 놓기 직전인 1919년초 6주간에 걸쳐 씌어진 기록에 근거한다. 한 민감한 영혼이 삶의 고통과 싸운 이 쟁투의 기록에는 도스토예프스키적, 니체적 흐느낌이 가득 배여 있다.

그는 고기를 먹으면서 울고, 사랑의 시를 적으면서 울고, 아내의 울음 때문에 또 운다.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전설적인 발레리나’ ‘위대한 예술가’라고 했지만, 그 자신에 의하면 그는 “너무나 많은 고통을 받은 단순한 사람”이며, 그는 “그리스도도 내가 평생에 걸쳐 받은 고통보다 더 많은 고통을 받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왜 그런가? 그가 받은 고통은 그 자신의 몫만이 아닌 전 인류의 고통이기 때문은 아닐까? 한 시인을 위해 울어주던 버드나무처럼 그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운다. 그의 일기는 이 울음의 기록이다: “나는 울고 싶은데 신은 내게 쓰라고 명령한다.”

정신의학자들에 의하면, 그의 병명은 정신분열증, 더 정확하게는 ‘자기애적 인격의 분열적 정서 혼란’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자기애적’이란 진단은 절반만 옳다. 브로일러나 프로이트 같은 당대의 대가들조차도 치유할 수 없었던 그의 병증은, 라스콜리니코프가 앓았고 또 니체가 앓았던 병, 곧 자기애-인류애적 정신분열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병증의 치유는 자기만의 구원이 아닌 전인류의 구원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병증의 환자들은 “저를 구원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저를 맨마지막에 구원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한다.

자기애-인류애적 정신분열증 환자들의 경전과도 같은 이 책에서 니진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인간이지 짐승이 아니다.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 나 역시 결점들을 지녔다. 나는 인간이지 신이 아니다. 나는 신이 되고 싶다... 나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다. 이것이 내 인생의 목표이다.”(348쪽) 당신도 그런 목표를 갖고 있는가, 라고 니진스키는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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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사회의적 2004-12-01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글을 잘 쓰시는군요.러시아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 부럽습니다. 니진스키 저도 읽어볼까요? 행복한 12월 되세요~~

알고싶다 2005-07-01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을 보니 매우 간결하게 잘 쓰셨습니다. 다만 정신분열병에 대한 제 의학적인 지식으로 볼 때 맞지 않는 부분이 보여 지적해드리고 싶습니다. 흔히 정신과의 의료 기록(Chart)에서 쓰이는 진단 용어는 일상적으로 쓰이는 언어와는 맥이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일종의 의료 기술적인 접근이 용이하도록 만들어진 용어죠. 일단 니진스키를 정신분열병 환자로 규정하면서, 의사가 그에 대한 진단을 '자기애적 인격의 분열적 정서 혼란'이라고 했다는 전제를 둔다면, 여기서 '자기애적'이라는 용어는 '자신을 사랑한다'라는 사전적인 용어가 아니라 의학적인 용어로 이해하여 해석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자기애적 방어 기제(Narcissistic defense)의 줄임말이죠. 이것은 니진스키의 심리 상태에서 투사적 동일화와 같은 내적 긴장의 완화 기교가 인식되었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자기애'적이라는 진단이 절반만 옳다는 해석은 잘못된 것입니다. 로쟈님이 이 글을 통해서 쓰신 '자기애-인류애적 정신분열병'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말씀하려고 하신 바는 이해가 가지만, 의료 용어에 대한 정확하지 못한 이해 혹은 해석은 혼란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지적드립니다. 인명도 틀리군요. 브로일러가 아니라 블로일러(Bleuler)가 맞습니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그 당시 블로일러나 프로이트가 정신분열병을 치유하지 못했더라도 그때(19세기~20세기 초반)는 정신의학의 태동기였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죠. 지금은 항정신병 약물을 복용하면 치유 가능성이 충분히 높은 병증입니다.

로쟈 2005-07-20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멘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투사적 동일화와 같은 내적 긴장의 완화 기교가 인식되었다는 뜻"이 어떤 뜻인지 좀 모호한데('완화 기교'는 무엇이고, 누구에게 인식되는 건지요?), 조금 자세하게 풀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향락의 전이 (개역판)
슬라보예 지젝 지음 / 인간사랑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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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지젝은 한나 아렌트와 함께 올 한해 내가 가장 많은 관심을 가졌던 저자이다. 따라서 지젝의 책이 좀더 많이 번역 소개되기를 누구보다도 바라는 편이다. 물론 전제는 있다. '제대로 된' 번역들을 통해서 소개되어야 한다는 것.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여 상당히 유감스럽다.

작년에 두 종이 번역돼 나오고, 이 개역판까지 포함하면 올해는 세 종이 번역돼 나왔다. 하지만,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정도를 제외하면(물론 여기에도 오타와 오역이 없지는 않다) 나머지 두 종은 제값을 못하는 번역서들이다. 특히 이 <향락의 전이>의 경우는 차라리 나오지 말았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 만큼 불성실하고 무책임하다.

역자 자신이 개역판의 서문에서 시인하고 있듯이 초판은 '몇 군데 오역'을 포함하고 있었다. 역자가 말하는 '몇 군데'라는 건 주로 대중문화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영화감독과 제목명의 오역인데(거의 맞는 게 없었다), 개역판에서는 이를 상당 부분 바로 잡았고, 그 점에 대해서는 (비록 기본이라 하더라도) 역자의 노고를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거의 전부이다. 내 생각에 이 번역은 몇 군데 정도가 읽을 만할 따름이다.

영화명과 주인공에 대해서도 '시라노'를 여전히 '키라노'로, 그의 여인 '록산느'는 '로잔느'라고 옮기고 있다. 그래도 이건 영어가 병기돼 있어서 눈치껏 읽으면 된다. 하지만, 멀쩡한 유고의 영화감독 '쿠스투리차'는 왜 '쿤스투리카'로 개명해놓고, 거기에 'Kunsturica'(406쪽)라고 병기까지 해놓는가? 그런데, 정작 문제는 이런 것들이 아니다. 역자는 본문의 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의미있는 교정을 하지 않았다(내가 읽은 1장 등에서 내용이 제대로 고쳐진 대목은 딱 한군데였다).

예컨대, 1장 시작부터 '부모의 성적 착취'(parental sexual abuse)를 역자는 '아버지의 성적 남용'(28쪽)으로 옮겼다. 그리고 '욕동이론과... 해석의 이중성'을 '욕동이론의 이중성'(29쪽)으로 옮기고, 정신분석에서의 '수정주의'를 줄곧 '개량주의'(30쪽 이하)로 옮겼다. '제2의 본성'(second nature)은 '이차적 자연'(33쪽)으로 옮기고, '억압의 모든 장벽을 제거하려는 요구'는 계속 '억압의 모든 장벽을 벗기려는 요구'로 옮겼다. '한순간이라도 멈춰서 생각해본다면'을 '한순간이라도 생각하기를 멈춘다면'(44쪽)으로 옮기고, '반계몽주의'는 '계몽주의'(170쪽)으로 옮겼다. 물론 이러한 지적은 부분적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이러한 부분들이 역자에게는 '몇 군데 오역'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일반 독자가 이 '교양서'를 읽어낼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때문에 '이 역서가 이미 지젝의 작업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사람들이 그의 글쓰기를 즐길 수밖에 없는 이유를 확인해 주기를 바라고, 처음으로 그에게 다가가는 독자들에게는 지젝과의 꾸준하고 의미있는 지적 의사소통이 시작되기를 기대한다.'(11쪽)는 역자의 바람은 정치코미디에 가깝다. 지젝의 작업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이 역서는 짜증만을 불러일으키며, 처음으로 그에게 다가가는 독자들에겐 애꿎은 고역만을 선사한다. 한국의 출판계와 지식사회에선 어째서 이런 일들이 반복해서 벌어지는지 정말 궁금하다(물론 이전에 더 심한 오역서들도 수두룩했다. 문제는 21세기 대낮에도 이런 일들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몇 군데 오역'을 손본 대가로 출판사는 책값을 10,000원이나 올렸다. 물론 하드커버로 장정이 바뀌긴 했지만(정말 종이가 아깝다), 역시나 무책임한 처사이다. 초판에 문제가 있다면, 전량 회수하여 환불하거나 구입한 독자들이 개역판과 교환할 수 있도록 했어야 했다. 그런 이후에라면 '독자들의 '너그러운' 다시 읽기를 권하는 바이다.'라는 역자의 부탁이 덜 민망했을 것이다. 물론 지젝의 열성적인 팬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이 책에 대해서 결코 너그러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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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 - 엘리트문고 47
안톤 체호프 지음 / 신원문화사 / 199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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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4막에서 니나가 트례플례프에게 하는 말: '난 이제 진짜 여배우예요. 난 즐겁게 기꺼이 연기를 하고 무대에 서면 도취하여 자기를 훌륭하다고 느껴요.(...) 무대에 서는 거나 글을 쓰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우리의 일에서 명성이니 영광이니 하고 내가 공상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 실은 인내력이라는 것을 나는 알았어요.(...) 자기 십자가를 지는 법을 알고 다만 믿을 지어다, 이거죠.'

이 대사는 <갈매기>라는 연극의 세계에서 자신의 역할을 깨닫는 유일한 주인공이 니나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면서 결국 삶을 '인내'하지 못하고 권총 자살하는 주인공 트례플례프와 니나를 구별시켜 준다. 또한 이 4막의 희곡에서 유일하게 뭔가 등장인물의 의지(힘)을 담고 있는 대사이기도 하다. 니나를 제외한 대다수의 인물들이 자신의 삶과 운명에 대해서 체념하고 달관했던 것과는 달리, 니나는 적극적으로 삶에 뛰어들었고 뭔가 경험했으며 그래서 정말 자신을 '살아있는 인물'로 만들었다.

꿈많고 성공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찬 젊은 처녀로 등장하고 있는 니나는 3막이 끝날 때까지는 감상적 여주인공의 형상에서 크게 이탈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러한 형상은 트례플례프가 그녀에게 부여한 형상이면서 동시에 그녀를 읽어내는 독자들이 부여한 형상이기도 하다. 자신을 갈매기로 비유하는 니나에게 트례플례프가 자신이 쏘아죽인 갈매기를 보여주는 것은 그가 니나에게 부여하고 있는 형상(일종의 강박관념)이 어떤 것인가를 시시하고 있다. 갈매기처럼 자유롭게 비상하는 삶이라는 건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

삶에 대한 이러한 경직된 태도는 4막에서 니나와 트례플례프가 대면하는 장면에까지 계속 견지된다. 니나는 잘난 소설가를 따라나섰지만 버림을 받고 배우로서도 빛을 보지 못한 채 2년 만에 고향에 들른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자면 니나 역시 감상적 여주인공이라는 문학적 형상에 대한 모방이다. 하지만 이미 앞에서 인용한 대사에서 보여지듯이 그녀가 보다 넓은 세상에서의 경험을 통해 얻은 삶에 대한 통찰은 문학적 모방으로서의 감상적 여주인공의 그것이 아니다. 그것을 넘어선다.

이렇듯 달라진 그녀의 모습은 그녀가 4막에서 다시 반복하는 트례플례프의 대사를 전혀 다른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인간도, 사자도, 독수리도, 뇌조도, 뿔달린 사슴도, 거위도, 거미도, 물 속에 사는 말없는 물고기도, 바다에 사는 불가사리도, 사람 눈으론 볼 수 없던 것들도, 한 마디로 말해서 모든 생물, 모든 생명, 생명이라는 생명은 모두 슬픈 순환을 마치고 사라져 버렸다...' 이것은 1막에서 트례플례프가 20만년 후의 이 지상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 것인데, 이 미래의 시점에서 보자면 현재의 삶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미소해서 거의 무가치할 지경에 이른다. 그런데 이 페시미즘을 니나는 4막에서 '정답고 산뜻한 꽃과 같은 감정'으로 다시 암송한다. 이는 그러한 페시미즘과 허무의 긍정으로 읽힐 수 있다.

자신의 창조한 인물(니나는 트례플례프의 여주인공이다)의 이러한 예기치 못한 성숙과 배반은 창조자의 입김이 더 이상은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암시한다. 이제부터 그녀는 자신의 의지에 의한 자기만의 삶을 당당하게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마지막 대면에서 그녀는 트례플례프의 품을 빠져나와 유리문 밖으로 나간다. 즉 연극의 공간에서 삶의 공간으로 이동한다, 결정적으로.). 트례플례프의 자살은 이렇듯 (정서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더 이상 자신의 품으로 돌아오지 않는 니나에 대한 유일한 대응으로 보인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갈매기>는 성숙한 시기의 작가 체홉의 삶과 예술에 대한 깊은 성찰을 읽을 수 있게 한다. 유한한 삶 속에서 순간순간이라도 제 목소리와 빛을 뽐내는 사소한 즐거움이 있는 것이고, 작가 체홉은 이러한 즐거움에의 권리는 충분히 존중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불행한 경험에 유폐되지 않고 보다 적극적인 삶에의 의지로 승화시키는 니나와 같은 여주인공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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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혜원 월드베스트 22
A.P.체호프 지음 / 혜원출판사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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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1899)은 중년의 사내와 젊은 유부녀 사이의 불륜이 '이제 막 시작인 사랑'으로 전화되어 가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이다. 마흔이 조금 안된 이 중년의 사내는 드미트리 구로프이고, 스물을 갓 넘긴 이 젊은 유부녀는 안나 세르게예브나이다. 이들은 휴양지 얄타에서 처음 만나 사랑을 나누고 헤어지지만, 서로를 잊지 못하는 바람에 다시 만나게 되고 결국은 진짜 사랑, 그리고 행복한 미래의 문턱에 서게 된다.

그래서 '해변에 새로운 얼굴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았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이었다.'의 이야기의 시작은 이런 결말을 가지게 돼버렸다: '조금 기다려보면 해결책이 찾아질 것도 같았다. 그렇게 되면 새롭고 아름다운 삶이 시작되는 것이지. (하지만 동시에) 이들은 종점이 아직 멀고도 멀었으며, 가장 복잡하면서도 힘든 일이 아직 남아 있음도 분명하게 느꼈다.'

해결책이란 무엇이고 이 복잡하고 힘든 일이란 무엇일까? 짐작에, 그것은 두 사람의 원만한 이혼과 재결합의 과정일 터인데, 이는 자식이 셋이나 딸린 중년의 사내 구로프는 말할 것도 없고 안나에게도 쉬운 일이 아닐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사랑이라는 삶의 새로운 공간 앞에서 이들이 잠시 머뭇거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체홉이 독자인 우리를 인도하는 것은 바로 거기까지이다. 사랑의 힘을 막무가내로 믿기에는 현실의 관성이란 것이 너무 막강하고, 그렇다고 이대로 체념하고 주저앉기에는 다시 그 '새장 같은 삶'이 지겹고 두렵다.

이 단편의 후반부에서 우리는 두 사람의 일상화된 '불륜'을 목격한다. 안나는 남편을 속이고 지방에서 모스크바로 와서는 호텔방을 잡아놓고 구로프를 부르고, 구로프는 안나에게 가는 길에 딸을 학교까지 바래다 준다(이게 생활이다!). 남들 앞에 내놓고 사는 공적인 삶과 그들만의 비밀스런 삶(사생활)이 공존하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안나는 자신들의 밀애가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는 없으리란 두려움과 남들의 눈을 피해야 한다는 처량함에 울음을 터뜨리고 이젠 문제는 조금 복잡해졌다는 걸 두 사람은 직감한다.

구로프는 안나를 어루만지다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다(어느 것이 진짜 구로프인가?). 이미 머리가 희끗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난생 처음으로 사랑을 알게 되다니. 그것도 서로가 각각의 새장에 갇힌 채. 이젠 어떡해야 하나? 그래서 우리는 다시 결말에 이른다. '조금 기다려보면 해결책이 찾아질 것도 같았다. 그렇게 되면 새롭고 아름다운 삶이 시작되는 것이지. (하지만 동시에) 이들은 종점이 아직 멀고도 멀었으며, 가장 복잡하면서도 힘든 일이 아직 남아 있음도 분명하게 느꼈다.'

체홉의 서술자 또한 이 장면에서 이야기를 중단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제 막 새로운 삶의 공간, 문턱에 이른 이들에 대한 배려이자 예의일 것이다. 비록 낙관적인 장래를 장담할 수 없다 하더라도 어쨌거나 이들은 이전과 같은 삶은 계속 반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의 주제는 작가 체홉이 즐겨 다루는 '또 다른 삶'이다. 사랑은 이런 주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아주 요긴한 소재이다. 그 다른 삶이 유부남 유부녀의 불륜(이것도 승화되면 사랑이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해서 우리가 두 주인공을 탓해야 할까? 불륜을 미화시키고 있다고 작가를 비난해야 할까? 그럴 만한 권리를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제도적이고 관습적인 굴레를 떨치지 못하는 것을 두고 도덕이라 말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부도덕, 비도덕이 편이 되어야 할 것이기에. 반대로, 삶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삶의 가능성을 향유하는 것을 우리가 도덕이라 부를 수 있다면, 안나와 구로프는 이제 비로소 도덕적인 삶의 길에 들어선 것이고, 우리는 그들의 새로운 시작(아직은 막막한 불행의 시작)을 축하해 마지 않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도덕주의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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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나 2004-10-21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멘트 남겨주셨더군요.. 제 리뷰를 러시아문학 전공자나 전문가는 읽지 않고 지나치길 바랬습니다. 러시아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했는데.. 그 말이 가슴에 남네요 ^^;

비로그인 2010-02-07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작이건 끝이건 불륜이 어떻게 하면 '승화'되는 건지 궁금해집니다.
 
칸트 정치철학 강의 푸른숲 필로소피아 9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 푸른숲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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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0세기의 가장 독창적인 정치사상가이자 유태계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의 유작이 번역되었다. <전체주의의 기원>(1951)이나 <정신의 삶>(1971) 등이 칸트가 체계적인 정치철학을 쓰지 않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이 책(강의)보다 사실 먼저 출간됐어야 하지만, 순서야 어찌됐든 그녀의 책들이 더 많이 번역되고 더 많이 읽히기를 기대하는 독자로서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아렌트의 유작을 읽는다는 것은 좀 무리해 보인다. 그녀가 어떤 문제의식을 통해서 판단의 문제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조감하지 않고서는 이 '강의'에 접근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아렌트의 문제의식이란 무엇인가?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활동적 삶'을 노동과 작업, 그리고 행위로 나누는데 거기서 그녀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행위이고, 이 행위의 핵심이 바로 정치적 행위이다. 사실 사회적 동물로 흔히 번역돼 온 아리스토텔레스의 'zoon politikon'이란 말은 '정치적 동물'이란 뜻으로 번역돼야 한다. 그리고 이 '정치적인 것'의 발견/발명이야말로 고대 그리스의 가장 위대한 유산이라 할 만하다. 아렌트는 중세 이후로 사장된 정치적인 것을 재발견하고 사적 영역과 구별되는 공적 영역을 복원하며, 그리하여 인간의 중요한 행위능력인 정치적 행위를 회복하고자 한다.

인간이 정치적 동물이라면 정치야말로 인간을 다른 동물로부터 구별지어주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즉 정치 행위를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동물임(being animal)으로부터 구제되어 비로소 인간임(being human)을 주장할 수 있게 된다. 때문에 우리 사회에 정치에 대한 불신과 혐오가 만연해 있다면, 그만큼 우리 스스로가 정치적 행위능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정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함께-함의 형식을 탐구하고 보존하기 위해서 함께 행동하는 것이다. 그것은 함께 하기 위해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인정이다. 정치에서 다루는 인간은 유적 존재로서의 인류(human species)나 도덕적 존재로서의 단수적 인간(man)이 아니라 복수적 존재로서의 인간(men)이다. 즉 정치의 근본은 인간의 복수성(human plurality)에 대한 인정과 긍정이다. 때문에 정치는 진리와 무관하다(아렌트는 정치적 진리를 도출해내고자 하는 정치'철학'에 비판적이다).가령 우리는 2×2=4인가, 아니면 2×2=5인가의 문제를 다수결로 결정하지 않는다. 지구가 도는지 마는지를 배심원들의 판결에 의존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후보를 다음 대통령으로 뽑을 것인가 같은 문제는 정답, 즉 진리를 갖고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정치의 영역, 의견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행위란 이 정치라는 공적 영역에서 복수의 행위자들이 하는 공동행위, 즉 함께-행동함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공동으로 주장될 수 있는가에 대한 판단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 판단은 취미판단과 닮았다. '판단, 특히 취미판단은 항상 타인과 타인의 취미를 반성하는 가운데, 그들이 내릴 수 있는 가능한 판단들을 고려하게 된다.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내가 인간이고 또 인간들과 함께 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132쪽) 예컨대, 미군장갑차가 두 여중생을 치인 사건을 불가피한 사고라고 보는 판단과 최소한 과실이라고 보는 판단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판단이 더 공유될 수 있는 판단인가를 물을 수 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이 공통감(common sense)이다. 이때 공통감은 공적 감각(public sense)이면서 동시에 공동체 감각(community sense)이다. 따라서 정치를 회복하는 일은 우리의 상식, 즉 공통감을 일깨우는 일이며 공동체 감각을 북돋는 일이다.그리하여 광화문에 촛불을 들고 모이거나 여기저기서 미국의 부당한 행위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다. 정치의 계절을 맞이하여 우리는 다시금 이러한 정치의 본질에 대한 관심을 회복하고 우리 정치의 현실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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