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 - 시공 로고스 총서 8 시공 로고스 총서 8
크리스토퍼 노리스 지음, 이종인 옮김 / 시공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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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1930- )를 아십니까란 물음에 제법 고개를 끄덕일 만한 독자는 많지 않을 듯하다. 하지만, 그는 정말 중요한 철학자다. 심지어 그에 관한 영화까지 만들어진! 하지만, 디지털 영화제에서 본 <데리다>(2002, 85분)의 번역 자막에도 오역은 드물지 않았던 걸 보면(가령 '부정신학'을 '네거티브 이론'이라고 옮겼다), 그에 대한 이해는 많은 오해와 더 많은 무지 사이에서 한동안 배회할 듯싶다.

미국인 여성 감독의 데뷔작이기도 한 영화 <데리다>는 자신의 삶과 철학에 대해서 대담과 갖가지 다큐 자료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었다. 그가 어떻게 생겼느냐고? 가장 최근의 그의 모습을 담고 있는 이 책의 표지 대로이다. 백발이고 좀 작은 키에 단단해 보이는 인상인데, 눈웃음이 자상하지만 눈매가 깊고 예리하다. 미국 영화배우 '조 페시의 똑똑한 형' 같은 인상이다(그의 형에 의하면, 데리다의 집안은 전혀 지적이지 않은 집안이다. 그는 집안의 '천재'이다.) 그런 그가 짓궂은 질문들에 대해서 진지하고도 유쾌하게 답변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 영화는 데리다에 대한 가장 좋은 입문적 길잡이로 삼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면, 그의 실물과 목소리를 접할 수 있으니까. 또 그의 철학의 끊임없는 공격대상이긴 하지만, 바로 그 '현전'(presence)의 형이상학으로부터 우리는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현존하는 가장 중요한 철학자(중의 한 명, 최소한)와의 85분간의 대면이 그에 대한 과감한 관심(열정)으로 발전한다면, 비로소 우리는 그의 글쓰기의 세계, 문자의 세계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데, 이때도 가장 좋은 건 그의 대담들이다. 국내엔 리처드 커니와의 대담(<현대 사상가들과의 대화>에 실림)이 가장 유용하고, 좀 어렵고 번역도 만족스럽지 않지만, <입장들>이 도전해 볼 만하다.

그런 다음에, 본격적으로 그의 저작을 읽어나갈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사정이 또한 그렇지가 못하다. 번역된 책들 중에 그의 초기 주저라 할만한, <그라마톨로지>나 <글쓰기와 차이>가 결코 만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개는 10여쪽을 못 넘기고 포기하기 십상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크리스토퍼 노리스의 <데리다>(1987)이다. <해체비평Deconstruction>(1982)으로 명성을 얻은 저자가 쓴 본격적인 데리다 안내서이다. 내가 읽은 <해체비평>은 그저 그런 수준이었지만, <데리다>에서 노리스는 훨씬 정교한 논리적 분석과 재구성을 통해 데리다의 전략과 실제를 소개한다.

데리다의 저작이나 그에 대한 연구서 번역들이 대개 부정확하고 미흡한 번역으로 독자를 고생시키는 반면에, 직업번역가가 번역한 이 책은 (물론 부정확한 부분이 없진 않지만) 상대적으로 명쾌하여 문맥을 살피면서 읽는다면 충분히 독파할 수 있는 수준이다. 나 자신도 이전에 절반쯤 읽다가 접어둔 걸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영화 때문에!) 오히려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정도면 노리스를 길안내 삼아 데리다의 책을 본격적으로 읽어나갈 수 있으리라.(<그라마톨로지>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루소의 텍스트 <인간언어기원론>도 최근에 번역돼 나왔기 때문에 같이 읽으면 더 좋을 듯하다.)  

후설 현상학에 대한 해체에서부터 해체론이 함축하고 있는 윤리학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지만, 이 책은 (87년에 나왔으므로 당연히) 90년대 이후의 데리다에 대해서는 다루고 있지 않다. 입문서로는 <데리다 입문 Derrida for beginners> 같은 쉬운 책도 번역돼 나왔으면 싶다. 최근의 철학까지 포괄하고 있는 책으로는 카푸토Caputo의 <호두껍질 속의 데리다 Derrida in a nutshell>가 권할 만하다.

그런데, 데리다를 왜 읽어야 하느냐고? 그것은 데리다에 이르러 철학이 다른 가능성(철학의 타자)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철학의 가능성, 또 다른 사유의 가능성, 더 나아가 또 다른 삶의 가능성. 데리다를 읽는 이유는 그 가능성에의 모험이 우리를 잡아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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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유럽철학의 흐름 한울총서 92
리처드 커니 / 한울(한울아카데미) / 199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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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커니의 책이 한때 대학원 연구실 서가를 장악했던 적이 있다. 굳이 철학 전공이 아니더라도 인문학, 특히 문학이론이나 영화이론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무엇보다도 20세기 유럽 철학자들(물론 대부분 독일과 프랑스 철학자들이다)의 '화려한' 이름(명성)들과 먼저 대면해야 했고, 거기서 인상을 구기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 '사상학습' 혹은 '사전무장'이 필요했는데, 커니의 책은 아주 유용한 철학자 '사전' 역할을 해주었다.

커니는 현대유럽철학의 조류를 명쾌하게 세 흐름으로 나눠서 가각을 대표하는 철학자들의 세계를 많지 않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깊이있게 조명한다(현상학에서 레비나스가, 비판이론에서 아도르노가 빠진 것이 아쉽다). 때문에 이들 철학자들에 대한 입문서로서 아주 유용하며, 역시 철학자/사상가 사전으로 읽히는 <문화연구를 위한 현대사상가 50>(현실문화연구)에서보다 더 깊이있는 이해를 원하는 독자들에게 적당하다. 커니의 또다른 책 <현대사상가들과의 대화>(한나래)와 짝으로 읽으면 더 좋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나 번역이다. 2판까지 나온 원서는 현대 유럽철학에 대한 훌륭한 개관으로서 손색이 없지만, 번역서는 그다지 신뢰할 만한 수준이 못된다(때문에 번거롭지만 의심나는 부분이 있다면 반드시 원서와 대조해 보아야 한다). 특히 라캉처럼 난해한 저자에 관한 부분에선 역자가 무얼 이해하고 번역한 것인지 의아해지며, 능기/소기(책에선 '기표/기의'를 좀 구식으로 번역해 놓았다)를 바꿔서 번역한 대목들에선 성실성마저 의심스러워진다. 입아픈 얘기지만, 전면 개정(증보)판이 나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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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하룻밤의 지식여행 15
다리안 리더 외 지음, 이수명 옮김 / 김영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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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이 귀환하고 있다(그가 언제 억압되었던가?). 한때 근거없는(텍스트 없는!) 라캉 유행을 경계하면서 그의 대책없는 난해성과 현학에 대한 비판이 떠돌기도 했지만, 라캉의 한국 상륙, 혹은 라캉의 한국화는 더이상 저지할 수 없는 대세인 듯하다. 이미 그는 두툼한 책으로 <재탄생>되었고, 사위이자 유산 상속자인 알랭 밀레르 계열(지젝과 핑크 등)의 저작들도 연이어 번역되고 있다.(밀레르의 가장 큰 기여는 라캉 이론의 발전과정을 '역사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 점에 있다.) 그의 주저인 <에크리>와 세미나들도 곧 한국어본을 얻을 예정이라고 하니 아마도 푸코와 들뢰즈를 잇는 새로운 열풍이 불어닥칠지도 모르겠다(믿기지 않는 얘기지만).

다리안 리더의 <라캉>은 그런 열풍을 슬쩍 예감하게 하는 미풍처럼 다가온다. 그 바람은 가볍고 경쾌하지만, 라캉의 매력과 라캉 읽기의 곤경 또한 집약적으로 전해준다. 라캉 자신이 '프로이트로의 귀환'을 이야기하고, 혹자는 프로이트를 읽지 않고 라캉을 읽는 일의 어리석음을 이야기하지만, 아무래도 그 읽기의 순서는 라캉부터이어야 할 듯싶다. 우리가 아무리 프로이트를 읽어도 거기서 라캉이 도출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이미 '라캉 이후의 프로이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더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후에 사람들이 나라는 의식 너머에 있는 (나 자신이면서 동시에) 타자인 무의식에 대해 근심했다면, 라캉 이후의 '나'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정신분석학은 여느 책처럼 읽어'치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우리의 망각과 억압 속에서도 그것은 귀환한다! 라캉에 대한 거부와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미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 작동한다. 우리의 모든 신경증과 편집증과 분열증이 그의 수수께기 같은 언어들과 도식 속에서 되살아난다. '나'는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어디에선가 라캉은 모든 정신분석(학)은 저항을 동반한다고 했다. 그것은 라캉을 읽는 일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하지만, 그 '저항'이 바로 그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형식이다. 우리의 앎은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는 방식으로(not-all) 이루어지니까. 거기엔 항상 어떤 잔여가 남는다. 어떤 불충분성이 항상 떠도는 것이다. 다리어 리더의 '만화'도 마찬가지이다. 저자는 라캉의 모든 것을 요약해서 전해주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읽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는 이해의 막다른 길(impasse)에서 그대로 통과(pass)된다. 사실 그것이 이 책의 의의이기도 하다. 그것은 단지 징후이고 예감이며 미풍일 따름. 아직은 전부가 아닌(not-all) 것이다. 그러니 아직은 라캉을 두려워하기에 너무 이른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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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의 해부학
마아틴 에슬린 / 한양대학교출판부 / 199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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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마틴 에슬린은 저명한 연극학자이자 오랜동안 BBC의 드라마제작 책임자로서 활동한 분이다(한국에도 다녀갔다). 그런 경력에 걸맞게 그는 '드라마'의 영역을 소위 '연극'에만 국한하지 않고 상당히 폭넓게 잡는다. 그것은 '드라마'에 대한 기존의 정의를 비평하고 있는 1장에서부터 잘 드러난다.(이러한 점은 그의 다른 저작 <극마당>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보기에 무대 드라마로서의 연극은 '20세기 후반기의 오늘날에는, 드라마적 표현양식들 가운데의 단 한 가지 그것도 매우 작은 한 가지이며, 영화, 텔레비젼, 라디오 등 대중매체에 의하여 기계적으로 재생된 드라마도... 본질적으로는 드라마'(15쪽)이다. 이 드라마의 성격은 그것이 인간 행위(action)의 의태적 모방이라는 데 있으며, 그런 점에서 드라마는 제의적 전통을 잇는 놀이이며 인간의 기본적인 기질(make-up)이다. 또한 드라마는 한 사회가 그 구성원들에게 행동규범을 전달하는 가장 주요한 도구의 하나이다. 따라서 모든 드라마는 하나의 정치적 사건이기도 하다(37쪽).

저자는 이러한 기본적인 전제 하에서 드라마의 요소들을 해부한다. 그 요소에 해당하는 것들은 문체와 인물, 구조, 비평용어, 장르(비극, 희극, 희비극), 그리고 무대와 미디어 등이다. 그런 해부 이후에 그가 결론에서 얘기하고 있는 것은 '드라마의 진실'인데,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드라마가 가진 열린 해석의 가능성과 다가성이다.

'드라마는 그것이 반영하는 실세계만큼이나 그 이미지가 다면적이며 그 의미가 다가적이다. 그것이 바로 드라마의 중요한 강점이며 표현양식으로서의 특징이며 그리고 그 위대성이다.'(156쪽)

책은 일급 연극학자의 드라마 입문서로서 일독할 만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얇은 분량 때문에, 아무래도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부조리극>(왜 아직 번역되지 않는지 궁금하다) 만큼의 부피감을 맛보기는 힘들다. 말 그대로 입문서일 따름이다. 사실 드라마를 해부한다고 해서 살아있는 연극을 경험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는가!

우리말 번역은 몇 가지 아쉬움을 남긴다. 고유명사의 표기가 부정확하고, 작품명에 아무런 표시가 돼 있지 않으며, 오타도 너무 많다. 프랑스의 마임 예술가인 '마르셀 마르소'가 '마르셀 프루스트'로 엉뚱하게 옮겨져 있기도 하다(11쪽). 개정판이 나오길 기대한다. 더 바람직한 건, 우리 드라마를 인용한 드라마 입문서가 나오는 것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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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 미술에 대한 오래된 편견과 신화 뒤집기 Beliving is seeing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 지음, 박이소 옮김 / 현실문화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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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사둔 책을 불쑥 끄집어 내어 뒤적거린다,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원제는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인데, 이것은 아사 버거의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를 뒤집은 것이다. 믿는 것(believing)이란 우리가 가진 고정관념과 선입견이고, 그걸 가능하게 하는 인식틀이자 제도이며, 이데올로기이다. 저자 스타니젭스키는 우리가 보기(seeing) 전에 이미 작용하고 있는 믿음(beleing)들에 대해서 폭로하고자 한다.

사실 번역서의 제목인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또한 이런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와 같은 제목의 푸코의 마그리트론을 패러디한 것인데, 마그리트/푸코가 문제삼은 것 또한 이미지와 재현 사이의 불일치이기 때문이다. 그것들 사이의 자연스러운 일치를 가정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선입견이자 이데올로기가 아닌가!

지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상당수의 도판을 통해서(도판이 흑백이란 것이 좀 아쉽다) 저자가 입증하고자 하는 것은 비교적 간명하다: '우리가 아는 미술은 상대저으로 최근에 나타난 현상으로, 미술관에 전시되고, 박물관에 보존되며, 수집가들이 구매하고, 대중매체 내에서 복제되는 그 무엇이다. 미술가가 미술작품을 창조한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소용이나 가치가 없다. 그러나 이 미술작품들은 미술의 여러 제도들 내로 순환하면서 비로소... 깊은 의미와 중요성을 획득하고 그 가치가 증폭된다.'(38쪽)

이러한 주장을 저자는 논증한다기보다는 많은 사례들을 동원해 암시하고 있는데, 가령 마르셀 뒤샹이 화장실 변기를 미술 전시회의 좌대 위에 올려놓고 <샘>이라고 명명함으로써 변기를 미술로 바꾼 것은 미술사가들이 25,000년 전의 인물상을 박물관에 전시하여 <비너스>라 명명한 것(빌렌도르프의 비너스)과 마찬가지라고 지적하는 대목들이 그렇다(41쪽).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보다 본격적인 본론을 아직 남겨놓고 있다. 좀더 빽빽하고 무게 있는 책이 기다려진다.

존 버거의 <이미지>(원제는 <보는 방법>)과 함께(버거의 책도 아쉽지만 흑백 도판이다) 미술에 대한 유용한 입문서인 이 책에서 저자가 도달하는 결론. '미술은 근대-지난 200년간-의 발명품이다'(38쪽) 여기서 미술을 '인간'으로 바꾸면, <말과 사물>에서 푸코가 도달하고 있는 결론과 동일하다. 즉, 거꾸로 말하면 이 책은 일종의 미술(개념)의 고고학인 것이다. 하여간에 그런 저자의 도발적인 문구, 혹은 곰브리치의 '미술이란 존재하지 않고, 다만 미술가만이 있을 뿐이다.'란 문구로 우리의 미술 교과서가 시작된다면 얼마나 멋질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 미술을 배우며, 또 미술의 얼굴이 바닷물에 씻겨져 가는 걸 보며 싱긋이 미소지을 수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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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렌티우스 2006-12-10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미술 개념의 고고학'을 다룬 간결한 책은 그야말로 푸코 에피스테메 이론의 미술 개념에 대한 적용이더군요. 저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저자의 핵심적 주장은 결국 '근대미술'이란 '미술'이라는 개념이 근대적 에피스테메 안에서 탄생하고 또 기능하는 '근대적' 개념, 발명품이니만치 '동어반복'에 불과하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이는 '이른바 모든 보편명사는 사실상 고유명사에 불과하다'는 푸코나 여타 인근 사상가들의 주장을 미술이라는 개념에 충실히 적용한 것으로 간결하지만 흥미로운 적용/분석이었습니다.

여기에 우리에게는 '미술(美術)'이라는 이 19세기에 일본의 지식인들에 의해 조합된, 혹은 보다 정확히는 발명된, 일본말이 자신만의 개념적 지형과 정치학을 갖는 역시 또 하나의 '고유명사'라는 점이 추가되어야 할 듯 싶습니다...

다만 책 자체에 대해서 말해보자면, 원서는 어떤지 알 수 없지만, 이 우리말본은 책의 내용에 비해 장정이나 디자인이 좀 허술하고, 그리 미학적이지 못한 공백이 많은데다, 그에 따라 책값이 부피나 분량에 비해 좀 '쎄진' 것이 좀 아쉬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