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새의 멈추어진 걸음'은 8년전 여름에 쓴 것으로 '모스크바 통신'에 옮겨놓은 바 있지만, 이미지-버전으로 다시 옮겨놓는다. 지난번엔 분재했었기 때문에 일목요연하게 보기엔 좀 불편했다. 막 서른에 진입할 무렵에 쓴 것이기에 내게 '서른의 추억'이란 의미를 갖는 글이기도 하다. 회고적인 정서에 잠시 물드는 건 이제 본격적으로 연말이 시작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약간의 첨삭과 함께 군말을 더 집어넣도록 한다. 그럼, 어져, 시작해보도록 하자...

 

 

 

 

1. 어져 내 일이야... Oh, my business!.. (*그러니까, 나의 목소리는 황진이의, 여성의 목소리이다. 나는 여성처럼(like woman), 여성으로서(as woman) 말하고자 한다. 가능하며 불가능한.)

2. 먼저, ‘어져’에 대해서 말하여야 한다. ‘어져’가 전제로 하는 것은 과거와 현재라는 두 시간적 계기이다. 그런데 이 두 계기는 따로 놓여 있지 않다. 그것들은 겹쳐 놓인다. ‘어져’는 이 겹쳐 놓임의 양태에 대한 평가적 발화의 한 가지이다. 두 음절의 이 발화가 집약하고 있는 것은 과거의 어떤 사건에 대한 현재의 안타까운 회한이다. 이 회한은 세계-내-존재로서의 유한한 인간이 이 세계에 지불하고 있는 자신의 몸값이며, 자기 삶의 무게이다. 현재의 우리는 간혹 목욕탕에 가 체중계에 올라서듯이 과거의 한 시점을 불러내어 닦아세운다. 자백해라, 왜 그랬더냐? 이건 두말할 것도 없이 어리석음(=무지) 때문이었다(‘그릴 줄을 모로더냐?’). 이 어리석음이 과거가 저지른 과오이다. 그리고 ‘어져’는 이렇듯 겹쳐 놓인 어리석음과 안타까움에 대한 우리의 평가적 발화이다.

다음, ‘내 일’이란 건 ‘어져’가 포괄하고 있는 사태를 모두 뭉뚱그리는 말이다. 그리고 중요한 건 이렇게 뭉뚱그려진 사태가 반복된다는 점이다. 저질러놓고 후회하는 일은 그것이 반복되면서 비로소 제값의 ‘일’(=업)이 된다. 그것은 내가 저질러놓은 일이면서 내가 끊임없이 저지르게 될 일이다(그래서 ‘내’ 일이다). 우리의 회한은 결코 우리의 어리석음을 구제하지 못할 것이기에. 그러니 어이하랴, 결국 어리석게도 나는 또 이런 일을 벌이고 있다. 이것도 비즈니스라고? 빌어먹을!

 

 

 

 
3.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로더냐
    이시라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나는 중장의 ‘제 구태여’를 ‘제 구태여 가랴마는’이 도치된 것으로 읽는다(혹자는 ‘제 구태여 보내고’로 읽는다. *원래는 고어(古語) 표기로 인용했었는데, 여기서는 현대어 표기로 바꾸었다. 인터넷에 띄우면 곧잘 깨지기 때문에). ‘가랴마는’ 뒤에 (구태여) 덧말로 붙여진 ‘구태여’가 정치된 ‘제 구태여 가랴마는’의 ‘구태여’보다 효과적이다. 말의 기능면에서 그렇다. 여기서 ‘구태여’의 주체는 님이다. 즉 내가 가는 걸 말렸더라면(=그냥 가게 내버려둔 나의 과오) 구태여 님이(=지가) 떠났겠는가(=그리고 뒤늦은 회한), 라는 것이 중장의 내용이다. 종장의 ‘보내고 그리는 정’은 이 과오-회한의 구도를 그대로 집약하고 있다. 그리고 이 구도가 바로 서정(시)의 구도이다.

하지만 이 정도의 단순한 서정이라면 흔한 서정에 불과할 따름이다. 이른바 기질지성(氣質之性)의 푸념을 조금 멋을 내어(‘나도 몰라 하노라’) 표현한 것. 나는 조금 더 복잡하게 읽고 싶다. 이른바 ‘복잡한 서정’이란 무엇인가? 다시 중장. 가는 걸 말린다고 해서 못 이기는 체 눌러앉는 작자를 님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런 님은 적어도 일류의 기녀(=황진이)라면 용납할 수 없을 님이다(품위가 떨어지는 님이기에 그렇다). 우리의 님은 (부여잡고) 말렸더라도 결단코/구태여 떠나갔을 것이다(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며). 그리고 우리에겐 그리움의 몫만을 남겨놓았을 것이다. 그런 님을 두고 짐짓 내가 가는 걸 말렸더라면 구태여 떠났겠는가, 라고 말하는 것은 이중의 전략이며 복잡한 서정의 결과이다.

어차피 떠나고 말 님을 이시라 하며 말리는 것은 성과가 없는 일일 뿐더러 정나미 떨어뜨리는 일이며 자존심만 구기는 일이다(이류들은 이런 일에 구애 받지 않겠지만). 그러니 그냥 가게 내버려두는 것. 이 사소한 과오 덕분에 나는 잘난 자존심과 님 그리는 정을 모두 지켜낸다. 그래도 이만한 어리석음(=과오)이라면 뒤집어쓰고 남을 만하지 않을까, 라는 계산이 바로 복잡한 서정이고 이중의 전략이다.


 

 

 

나는 이걸 달리 ‘유머’라고 부른다(내가 좋아하는 한 작가(=쿤데라)는 ‘좋은 기분’이라고 부른다). 유머란 우리 내부의 모순들이 우리를 쓰라리게 하거나 불행하게 만들지 못하도록 고양된 의식이다. 나의 자존심은 님을 떠나가게 할 수도 없고 눌러 있게 할 수도 없다. 이것은 모순이다. 이 모순을 쓰라리거나 불행하지 않은 것으로 만드는 것(=길들이는 것), 그것이 바로 ‘어져 내 일’이다. 이 시(조)에서 ‘내 일’은 ‘돌이킬 수도 있었던 과거’, 그래서 ‘달라질 수도 있었던 현재’라는 어떤 다른 삶의 (희박한) 가능성을 불행한 현실과 대질시킴으로써 완료된다. 이 일로 물론 구제 받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나는 지난주의 KAL기 사고를 떠올린다). 다만 어루만져줄 수 있을 따름. 그럼에도 이 어루만짐(=유머)은 소중한 것이며 오직 유한한 인간, 중간쯤의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특권적인 라이프 스타일이다. 희랍인 조르바의 경우.

 

 

 



4. 조르바는 사람을 세 부류로 나눈다. 먹은 음식을 비계와 비료로 만드는 사람, 먹은 음식을 일과 유머에 쓰는 사람, 그리고 먹은 음식을 하느님에게 돌리는 사람, 이렇게 세 부류로 나누고 자신은 가운데 부류에 속한다고 말한다. “저는 셋 가운데 가장 흉측한 녀석은 아닙니다. 주인님, 그렇다고 가장 훌륭한 축에도 못 끼고 그저 어느 중간쯤에나 끼겠지요. 내가 먹은 음식은 일이 되고 좋은 유머가 된다는 거죠. 결국 그만하면 과히 나쁠 건 없어요!”

5. 나쁠 건 없지만, 배는 고프다. 한두 달 전에 문득 ‘어져 내 일이야’란 시구가 머릿속에 떠올랐고, 나는 이것이 새 시집의 머리에 오게 될 것임을 직감했다(그리고 이렇게 몇 시간을 투자한 것이다). 내가 호감을 가진 것은 이 시구의 품위이다. 따지고 보면, ‘아이고 내 팔자야’란 뜻에서 멀지 않지만 ‘어져 내 일이야’에는 그런 팔자를 관조하는 여유가 있다. 그런 여유를 나는 ‘품위’라고 부른다. 품위(品位)에서 품(品)자는 입구(口)자 세 개로 이루어져 있는 바, 품위란 세 식구(혹은 세 여자)를 먹여 살릴 만큼 자신을 세운 사람의 처지를 이른다(*나는 현재 세 식구의 가장이지만, 먹여 살리지는 못하고 있다!). 나는 당연히 그런 여유로운 처지에 놓여 있지 않다(그래서 조금 쓰라리다). 다만 그런 불운한 처지를 남의 일인 양 지껄일 수 있는 사소한 여유만을 가지고 있을 따름이다. 분명 어디선가 길을 잘못 들었다!

 

 

 



6. 인간의 위대성은 자기가 비참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에 있다.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그러나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한마디로, 인간은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비참하다. 왜냐하면 비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대단히 위대하다. 왜냐하면 그는 이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파스칼)(*나는 <팡세>의 이 단장을 ‘파스칼의 변증법’이라고 부른다.)

7. 그러니 나를 만만하게 보면 안된다. 나는 내가 비참하다는 걸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자신에게 중얼거린다. “너는 물방개야, 아주 형편없는 자식이지!”(아, 나는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내가 요새 읽은 동료 위인전들. (a)“나는 여러 번 연기를 그만두려 했다. 내 안에는 정말 연기를 하고자 하는 욕구와 그 모든 일을 경멸하는 마음이 공존한다. 나는 왜 말론 브랜도가 연기를 그만뒀는지 이해가 간다. 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들은 항상 내가 다른 누군가, 무엇이기를 바란다. 왜 그저 재미없고 뚱뚱하고 늙은 놈이면 안되는 거지?”(게리 올드만) (b)“난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남편과 이혼하려 하지 않았으며 나도 아내와 이혼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춥고, 난 혼자다. 삶 그 자체는 내가 바라는 바에 적합하지 않았다. 난 바라는 것이 많은 이기적이고 멍청하며 개보다 나을 것이 없는 존재이다. 내 운명은 내게 당연하다. 가난은 증오스럽고 광기는 굳건하며 결국 난 끝장이다. 난 끝장이다.”(줄 파스킨)


 

 

 

8. 나의 경력. 초등학교 1학년 때 나는 어쩌다가 내가(그리고 우리가) ‘죽음에의 존재’(Sein zum Tode)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많이 울었다. 10년 후 대학교 1학년 때 나는 이런 걸 읽었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그밖에, 세계가 3차원으로 되어 있는가 어떤가, 이성의 범주가 아홉 가지인가 열두 가지인가 하는 문제는 그 다음의 일이다. 그런 것은 장난이다.”(참고로, 이런 ‘장난의 대가(大家)’에 칸트가 있다.) 나는 더 울지 않았다. 대신에 시를 쓰기 시작했다(시는 ‘입을 틀어막고 우는 울음’이란 말을 내가 했던가?).


 

 

 

“세계의 두꺼움과 낯설음, 이것이 바로 부조리다”(카뮈) 같은 건 얼마나 멋있는 말인가! 하지만 나는 그런 멋있는 시는 쓰지 못하고, 이후 10년을 더 살았다. 몇 권의 시집을 자비로 냈다. 한두 사람이 재미있어 했고, 많은 사람이 그저 그런가 보다 했다. 그렇다, 진실 혹은 냉담!(*마돈나의 자전적 다큐필름의 제목이 <진실 혹은 대담>이었다. 어젯밤 이곳 MTV에 마돈나 특집이 방송됐다). 바로 그것이 세상이 유지되는 원리이다. 이렇듯 너무 많은 걸 알았는데도 나는 아직 죽지 않았고, 미치지도 않았다(아으, 냉담이여!). 삶은 행복을 위해서는 너무 길다(행복은 지레 지쳐버린다).



 

 

 

9. 아침마다 일어나고 (한)숨을 쉬고 집을 나가고 다시 집에 돌아온다. 많은 책을 사고 많은 영화를 본다(그렇다고 독서광이나 영화광은 아니다). 그리고 느리게 지나가는 삶의 시간을 본다. 이런 것이 변함없는 나의 현실이고 나의 삶이다. 아니 나의 현실-이미지이고, 삶-이미지이다. 우리가 가지는 것은 이미지일 뿐이지 현실이나 삶 자체는 아니다. 현실이나 삶의 리얼리티는 분명 어딘가에 있다. 하지만 그것은 n차원(고차원)적인 어떤 것이어서 우리의 개념적 사유로는 도저히 잡아낼 수 없다. 개념적 사유, 즉 우리의 인식이나 이해라는 것은 n차원적(이론물리학자들이 주장하는 유력한 n의 값은 10이나 26이다) 리얼리티를 3차원적 리얼리티로 변형하고 조작하는 작업에 의해 이루어진다. “보통 크기의 물체가 3차원에서 적당한 속도로 움직이는 세계”가 유일한 현실로 둔갑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아홉 가지건 열두 가지건 우리 이성의 인식범주가 동원된다. 이것이 내가 가진 인식론 그림이다(인식론에 있어서 나는 대략 칸트주의자이다).

이 그림에 의하면, 우리가 말하는 현실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짜맞추는 것이다. 즉 우리는 현실을 재현하면서 동시에 생산한다(나는 현실에 대한 일방적인 재현론이나 구성론에 반대한다). 여기서 현실-재현과 현실-생산은 단일한 존재론적 사태에 대한 기술로서 모순 없이 양립한다. 이들은 동의어이다. 이런 맥락에서, 아침마다 일어나고 (한)숨을 쉬고 집을 나가고 다시 집에 돌아오는 ‘나’는 내가 재현하는 나이면서 내가 생산하는 나이다. n차원적인 나는 거기에 없다. 나-이미지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나를 대신하여 내 일을 말하고, 파스칼의 ‘이상한 변증법’을 말하고, 나의 경력을 말하고, 또 당신에게 말을 건다. 우리들은 모두 다 아주 외로운 존재들이라고.

Christopher Doyle

10. 난 사람들은 모두가 외롭고, 그래서 사랑이 필요한 거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만드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가는 또 다른 방법이다. 영화를 무슨 예술 같은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는 단지 사람들과의 대화, 일종의 연애편지 같은 것이다. 마치 누군가에게 “안녕, 잘 있었니? 난 이렇게 지내고 있어”라고 말하기 위해 거는 전화 같은 것 말이다. 영화는 그런 것이다.(두가풍)(*두가풍은 왕가위의 모든 영화를 찍은 촬영감독 크리스토퍼 도일의 중국 이름이다.)

11. 시집을 만드는 일은 영화를 편집하는 일과 비슷하다. 머릿속에 들어 있는 러시-필름 속에서 필요한 장면을 끌어내 이렇게 저렇게 배열해 보는 것. <황새의 멈추어진 걸음>(Le Pas Suspendu de la Cigogne)은 그리스의 영화감독 테오 앙겔로풀로스가 1991년에 발표한 영화(나는 보지 못했다)의 제목이다. 이 제목에 처음 시선이 닿았을 때 느꼈던 가벼운 흥분을 나는 기억한다. 이걸 새 시집의 제목으로 정한 건 작년 가을이다. 하지만 ‘자기만의 방’과 돈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나로선 시쓰기에 모든 걸 집중할 수 없었다. 정말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나는 형편없는 자식이다). 지난 봄에 겨우 입막음 정도의 것을 썼다. 어떤 거냐고?

장대비가 내린 갈대밭에 먹물 같은 발자국이 찍힌다
버려진 빈 병 속에 모인 몇 알갱이 흙이 애써 기억을 더듬을 무렵
개굴치 한 마리 툭 뒷발질하며 물속으로 자맥질한다
너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사모하였던가
뒤따르던 황새의 걸음이 문득 멈추어진다

어느새 먹구름은 저만치 먼데를 지나가고 있다


이건 아주 단순한 시이다. 조금 더 복잡하게 씌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나는 들여다보고 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 듯싶다(*그런 때는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시에 내 인생을 걸지 않았으므로, 시로부터 이런 ‘박대’를 받는 건 당연하다). 어쩌겠는가. 이런 시집을 만드는 일의 바보스러움? 내가 좋아하는 폴란드의 영화감독 키에슬로프스키가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A Short Film about Love)을 찍던 얘기를 들어보자.



12. 이 영화를 만들면서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얼마나 바보스런 일인가를 예민하게 의식하게 되었다. 이 영화는 한 아파트에 사는 소년(=토멕)과 건너편 아파트에 사는 여자(=막다)의 이야기다. 처음 대본을 읽었을 때 우리가 영화를 어떻게 찍으려 했겠는가? 당연히 우리는 아파트 두 층(소년과 여자에게 하나씩)과 계단 일부를 빌렸다. 돈이 들지 않는 영화를 만들자는 게 우리의 의도요 목표였다. 그런데 실제로는 영화를 찍는 동안 장소를 무려 열일곱 번이나 바꿔야 했고, 그 결과 간신히 두 집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었다. 토멕과 막다는 한두 번 거리나 우체국에 나갈 뿐 다른 장면은 거의 없었다. 열일곱 군데의 촬영지 중 하나는(막다의 집 장면이었는데) 바르샤바에서 2,30킬로 떨어진 조립식 빌라였는데, 상상할 수 있는 나쁜 점이란 모두 갖춘 건물이었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벽돌 하나를 가져다 휑한 벌판에 떨어뜨려 놓은 것 같았다.

그러나 어쨌든 그 빌라가 우리가 로케 때 촬영한 창 모양과 같은 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막다의 집 세트를 설치했다. 따라서 막다의 집은 한 블록 건너가 아니고 바르샤바에서 30킬로 떨어진 곳에 있는 조그만 2층짜리 빌라였다. 거기다 토멕은 막다보다 한두 층 높은 곳에 사는 걸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빌라를 토멕이 바라보는 것처럼 찍자면 촬영팀이 올라갈 수 있는 탑이 필요했다. 작은 건물이었으므로 우리가 가진 롱렌즈로 그것을 토멕이 망원경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찍는 데는 2층짜리 탑이면 충분했다. 밤 장면이었고 잡음이 없어야 했으므로 우리는 그곳에 밤 10시경 도착해 탑 위로 기어오르곤 했다. 다른 스텝들은 제작사가 근처에 빌려둔 집으로 가 잠을 자거나 포르노 비디오를 보았고 나와 비텍(조명감독)은 동이 틀 때까지 한 쌍의 건달처럼 가설탑 꼭대기를 지키고 있었다. 해는 7시나 되야 뜨는데 기온은 영도 이하로 떨어졌다. 탑과 빌라의 거리가 6, 70미터 가량 되었으므로 세트의 자폴롭스카(=막다)와는 마이크로 교신해야 했다. 내가 마이크를 들고, 빌라 안의 자폴롭스카는 스피커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일주일 동안 매일 밤, 추위 속에 홀로 남아 있었다(물론 내 조수와 촬영감독의 조수도 있었지만).

추운 밤 한적한 교외에서 창 하나는 휘황하게 불을 밝혀 놓고, 웬 구조물 위에는 두 바보가 앉아 하나는 마이크를 쥐고 ‘왼쪽 다리 위로! 다리 아래로! 테이블로 다가가! 계속! 이제 카드를 집어!’하고 외쳐대는 기가 막힌 상황이었다. 동시녹음이었기 때문에 진짜 촬영할 땐 소리지르지 않았지만. 식사를 하거나, 하느라고 그 자리를 잠시 떠나 있으면 그 상황의 어처구니없음이 더 절실해졌다. 거대한 빌딩으로 보이려고 애쓰는 작은 빌라, 있는 대로 조명이 밝혀진 창(우리가 사용한 망원렌즈는 구경이 낮아서 조명이 많이 필요했다). 모두가 잠든 시간, 주변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 밤에, 우스꽝스런 구조물 위에 앉아 마이크로 ‘다리 들어!’하고 외치는 나. 물론 마이크가 말을 안 들을 때도 있었으므로 그냥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하여간 그 한주간 내내 나는 내 직업의 바보스러움을 뼈저리게 느꼈다.

 

 

 

 

13. 작년 12월에 체코의 프라하에서 시집 한 권이 날아왔다. 이바나 그루베로바가 자신이 번역한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보내온 것이었다(이 번역에 나는 몇 마디 조언을 한 바 있다). 한 대목을 들어볼까(*체코어 번역은 생략한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사실 ‘차마 떨치고’ 떠나버린 님을 두고 이런 넋두리를 하는 것은 한편 어수룩하며 바보스런 일이다. 제 곡조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아직 정념의 자기운동(=사랑의 노래)이 ‘나’라는 장소에서 다 소진되지 않았음을 뜻한다. 운동이란 것은 그것 자체의 관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어서 현실적인 사태의 종결에 따라 마감되거나 하지 않는다. 때문에 장미의 ‘이름’만 남아 있는 사태가 얼마간 지속되는 것이다. 이 비어 있음의 사태(=님의 침묵)를 휩싸고 도는 사랑노래가 바로 어루만짐의 손길이다. 이 손길이 자신의 어이없음을 깨닫게 될 때, 그것은 일종의 손장난(=유머)으로 변모한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란 구절을 읽을 때마다 내가 웃음을 참지 못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또 이런 건 어떤가. “나는 님을 잊고자 하여요.”

14. ‘<님>만이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라고 만해는 시집의 ‘군말’에 적어놓는다. 재미있는 것은 ‘기룬’(‘그리운’의 충청도 방언)이란 말이다. 그것의 기본형인 ‘기루다’는 내게 ‘그리다’와 ‘기르다’의 뜻을 합쳐 놓은 말로 들린다(우리말 사전에 ‘기루다’가 등재되어 있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님은 우리가 그리는 대상이면서 동시에 기르는 대상이다. 님을 ‘기루는’ 행위 속에 과거-현재-미래라는 인과론적 시간질서는 적극적인 의미를 상실한다. 과거와 미래가 현재라는 시간축을 중심으로 정확하게 접히면서 이 과거-미래는 동일한 시간적 지평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새로운 시간 경험이 아닐까? 왜 아닐 건가. 바로 님에 들린 시간일 텐데 말이다.


 

 

 

 15. 들리는 시간이 있으면 들렸다 놓이는 시간도 있는 법이다. 그럴 때는 이렇게 나직이 중얼거리는 것이 좋다.

하늘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 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잠과 도연명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하늘이 정말로 그가 귀해 하고 사랑하는 것들이라면 굳이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할까 싶지만, 이런 정도의 믿음(이 또한 유머인데)은 우리에게 허락되어 마땅하다. 무얼 어쩌자는 건 결코 아니니까 말이다(*한국 근대 시인 중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거명하고 있는 시인은,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백석과 윤동주, 두 사람이다. 윤동주의 <별 헤는 밤>에,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나오는바, 나는 그 시가 백석의 영향하에 씌어진 거라고 생각하다. 그런 의미에서, <별 헤는 밤>은 가장 백석다운(=윤동주답지 않은) 시이기도 하다. 백석론과 윤동주론을 쓰는 일은 나의 오랜 숙제이다).

16. 다들 자기 할 일은 한다. 하고 본다. (a)“시지프의 신화에 있어서는 다만 거대한 돌을 들어올리기를 수백 번이나 되풀이하느라고 잔뜩 긴장해 있는 육체의 노력이 보일 뿐이다. 경련하는 얼굴, 바위에 밀착한 뺨, 진흙에 덮인 돌덩어리를 떠받치는 어깨와 그것을 고여 버티는 한 쪽 다리, 돌을 되받아 안은 팔 끝, 흙투성이가 된 두 손 등 온통 인간적인 확신이 보인다. 나는 이 사람이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는 고통을 향하여 다시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본다. 마치 내쉬는 숨과도 같은 이 시간, 또한 불행처럼 어김없이 되찾아오는 이 시간은 곧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제신의 소굴을 향하여 조금씩 더 깊숙이 내려가는 그 순간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더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더 강하다.”

(b)“말벌(=나나니벌) 암컷은 먹이를 쏘아서 마취시킨 후 집으로 끌고 온다. 그런 다음 그것을 밖에 놓아둔 채, 집안으로 들어가서 이상이 없는지를 확실하게 확인하고 나서 먹이를 끌고 들어가려고 다시 나타난다. 땅에 구멍을 파서 만든 집 속에 말벌이 들어가 있는 동안에, 실험자는 먹이를 말벌이 놓아둔 곳에서 몇 센티미터 정도 멀리 떼어놓는다. 말벌이 다시 나타나면 먹이가 없어진 것을 알아채고 그것을 재빨리 다시 찾는다. 그런 다음 그것을 끌고 와서 자기 집 입구에 다시 갖다 놓는다. 말벌이 집안을 조사한 지 몇 초밖에는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말벌의 행동 프로그램은 초기 단계로 다시 넘어간다. 말벌은 먹이를 굴 입구에 다시 놔두고 집안을 한번 더 조사한다. 실험자는 싫증이 나서 그만둘 때까지 이 짓을 40번이나 되풀이했다. 말벌은 이미 40번이나 빨래를 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프로그램의 초기 단계로 다시 돌아가 자동세탁기처럼 행동했다.”

이 두 가지 사례의 차이? 그것은 프로그램, 즉 자기가 하는 일(=자기 삶)의 바보스러움을 아느냐, 모르느냐 (의식하느냐, 못하느냐) 이다. 비록 하는 일은 같지만, 거기에서 시지프와 나나니벌의 운명은 갈라진다.

17. “사랑하고 소유하는 것, 정복하고 소진하는 것, 이것이 곧 그의 인식하는 방법이다(성서에서는 사랑의 행위를 ‘인식하다(connaitre)’라고 부르고 있는데, 거기에서 자주 보이는 이 말은 뜻이 깊다).” 돈 후안주의에 대해 카뮈가 적고 있는 말이다(*모스크바에 와서 나는 카뮈 작품집을 두 권이나 샀다).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중세 우리말에서도 ‘사랑하다’는 ‘사랑하다’와 ‘생각하다’ 두 가지 뜻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이 두 뜻이 결별하게 된 계기가 따로 있었을까? 어쨌든 이 결별의 결과, 우리 주변엔 사랑하는 만큼 생각하지 않거나 생각하는 만큼 사랑하지 않는 새로운 ‘사랑’의 유형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믿거나 말거나.

삶, 그리고 사랑은 우리의 직접적인 행위와 그걸 바라보는 시선, 즉 인식행위의 종합에 의해 완성된다. 이때의 종합은 자신의 행위의 준칙을 보편적 입법의 원리(이것이 바로 책임이다!)로 만드는 것이면서, 이 입법의 원리를 자신의 삶 속에 투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한 사람을 사랑하면서 만인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고(만인에 대한 사랑을 한 사람에게 투사하는 것이고), 한 개체의 삶을 살면서 인류 전체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인류 전체의 삶을 자신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해서 삶은, 너무도 가벼운 존재인 우리에게 너무도 무겁다! 우리는 저마다 전 인류를 데리고 다니는 것(*지젝이라면, 헤겔의 말을 빌어, ‘구체적 보편성’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18. 사실 우리의 몸 자체가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우리의 몸은 어제오늘 뚝딱 만들어진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오랜 진화과정에서의 적응(=협력과 사투)의 결과이다. 우리의 개체발생은 바로 이 계통발생을 반복하는 것인바, 우리의 개인사와 가족사는 전체 인류사(그리고 더 나아가 우주사)와 별개의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바로 전체로서의 부분, 부분으로서의 전체인 것이기에. 그래서 “우주에 관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우주가 이해 가능하다는 사실”(아인슈타인)이라는 건 따지고 보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사정은 이렇다. “우주가 이해될 수 있는 이유는 우주가 바로 우리 자신인 인간 존재에 의해서 구성되고, 우리가 그런 우주를 알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작업은 언제나 우리 자신이 이해할 수 있다.”(*이걸 ‘인간학적 원리’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즉 우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우리가 구성하는 우주의 자기인식이다(이 우주에서의 인간의 지위와 책임은 이런 맥락에서 이야기될 수 있을 것이다).


 

 

 

19.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식과 이해는 개개 사물과 사건의 ‘다름’ 속에서 ‘같음’을 보는 행위이다. 즉 차이 속에서 어떤 반복을 보는 행위이며, 그래서 어떤 타입과 패턴을 파악하는 행위이다. 여기엔 동서양이 따로 없다. 동양의 주자학적 전통에서 공부란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말하는데, 이때 ‘격물’은 사물을 격자 속에 놓고 파악하는 걸 뜻한다(패턴에 대한 앎이 바로 공부이다). 이 격자가 바로 서양철학적 전통에서의 기하학적 공간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내가 좋아하는 물고기 그림을 여기에 예시하겠다(D. 톰슨이 한 사각형 좌표격자에 한 종류의 물고기를 그리고 단순한 미분동형이라 불리는 변환을 수행함으로써 세 개의 다른 종류의 물고기를 얻어낸 것이다).(*이정우의 들뢰즈 강의록 중 한 권에도 그림이 인용돼 있으니까 참조하시기 바란다).



이러한 작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기하학적 이성이다. 기하학적 이성이란 자신의 삶이 유일한 삶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인 삶(=패턴)의 한 양상(=거품)에 불과하다는 걸 꿰뚫어보는 이성이다. 즉 이것은 “자신의 한계를 확인하는 명철한 이성”(카뮈는 이걸 ‘부조리’라 부른다)이다. 그리고 여기에 대조되는 것이 바로 반-기하학적 이성, 섬세한 정신이다(‘기하학적 정신’과 ‘섬세한 정신’의 이분법은 파스칼을 따른 것이다). 그것은 진짜 물에서 헤엄치고 있는 개개의 물고기(혹은 물방개)의 물에 대한 현실적인 앎을 가능하게 하는 이성이다. 즉 우리의 현실을 주무르는 손때 묻은 이성이다. 나는 이걸 달리 아줌마적 이성, 아줌마 정신이라고 부른다(아줌마들은 섬세한 걸 좋아한다).



20. 한 아줌마의 시적 발언 한 대목을 예로 들어보겠다(김상미의 <아줌마>).

한 명의 아줌마 안에 수백 수십 명의 아줌마가 숨어 있다
그 수심의 깊이는 아줌마가 아니면 절대 알지 못한다
아줌마는 현재 우리 집 안에도 있다
아줌마가 생각하는 것은 아줌마들에겐 중요한 것이다
아줌마의 생각을 알려면 아줌마들만의 은어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사회학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들이다.


이 시의 1행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아줌마 나름의 (무시 못할) 내력이다. 이 내력은 기하학적 이성에서의 전체화된 부분, 부분화된 전체에 대응하는 것이고 맞먹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3행이다. ‘아줌마가 생각하는 것은 아줌마들에겐 중요한 것이다’라는 건 뒤집어서 얘기하면, 아줌마들은 자신에게 중요한 것만을 생각한다는 것. 이 자기-중심적 사고야말로 아줌마적 이성의 모토요, 아줌마 정신의 알토란 같은 핵이다. 이 억척 어멈의 이성(메를로-퐁티의 ‘신체적 이성’)은 삶의 현장 속에서 빛을 발하는 이성이다. 이 이성은 물 밖에서 팔짱끼고 있는 제3자적 이성이 아니라, 물속에서 팔딱이고 있는 주관적 이성이다. 그것은 결코 삶을 멀거니 관조하지 않는다(‘그’의 삶이 아니라 ‘나’의 삶이다). 악착같이 삶에 밀착하여 부대끼고 싸우며 이겨낸다. 그리하여 “육체적 편안함과 안락한 보금자리, 그리고 걱정 없이 자녀를 기를 수 있는 가능성”(이런 것이 아줌마에겐 중요하다)을 확보한다. 아줌마는 동물적인 실존을 선택하는 것이다.

 

 

 

 

아줌마의 이러한 존재론에 비하면, 아줌마의 사회학은 별거 아니다(그런 사회학에 집중하고 있는 이 시의 나머지 부분은 그래서 우리의 주목에 값하지 못한다). 이 아줌마들에게 E=mc2 같은 기하학적 인식은 오직 미학적, 장식적 가치만을 가질 뿐이다(이건 결코 폄하의 뜻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이 ‘아줌마’가 바로 우리 집 안에도 있고, 우리 자신에게도 있다(남성에게 있는 여성성은 ‘아니마’만이 아니다).


 

 

 

‘아줌마성’이란 무엇인가? “라파엘의 그림이 다 없어진다면 야단들이 날 것이다. 그러나 이끼의 한 종류나 식물 한 가지가 없어지는 데는 아무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이 불균형한 휴머니즘이 현대문명의 이상한 점이다.”(레비-스트로스)라고 한 인류학자가 털어놓을 때, 그가 꼬집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아줌마성이다. 또 “언제나 대중은 그들이 원하는 것만을 본다. 내가 도스토예프스키와 프루스트에 관해 이야기한다 해도 그들은 내 낮은 목소리만을 듣고, 가슴만 뚫어져라 볼 뿐이다.”(제니퍼 틸리)라고 한 여배우가 털어놓을 때, 그녀가 꼬집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아줌마성이다(아줌마들은 돈을 좋아하고 또 음탕하다).

사실 이 아줌마성은 우리의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이면서, (생활 속의) 행복의 원천이긴 하다. 또 자기-중심주의와 가족-중심주의, 그리고 종족(민족)-중심주의, 자문화-중심주의에 아줌마성이 기여하는 바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문제는 그것에의 편향이다. 무엇에의 편향(=편애)은 인간으로서의 품위에 다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기하학적 이성과 반-기하학적 이성의 균형과 조화에서 인간다움의 품위와 가치가 찾아져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저마다의 죽음을 죽으면서 동시에 인류 공통의 죽음을 죽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바로 그때 우리는 “수많은 파도 중의 하나처럼 개체이면서 동시에 전체일 수 있는 존재로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나의 인간 존재론이다.

 


 

 

 

과연 그러한 인간 존재론이 현실적인 것이냐, 라는 아줌마들의 우악스런 반론이 바로 나의 뒤통수를 때린다. 나는 종교적이면서 동시에 세속적인 삶의 양립가능성을 예시하는 걸로 답변을 대신하겠다. 저쪽 이디오피아 얘기이다. “이디오피아의 도르제족이 보기에, 표범은 기독교적 동물이라 교회의 금식 행위를 준수하는데, 이는 이디오피아에서 종교의 기본 척도에 해당하는 규율이다. 그렇다고 도르제인이 금식일인 수요일과 금요일에 다른 날에 비하여 자기집 가축 보호에 덜 신경 쓰지는 않는다. 표범이 금식한다는 것과 표범이 매일 식사한다는 것, 도르제 인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진실로 여긴다. ‘표범은 항상 위험하다’는 것을 그는 경험에 의해 알고 있다. 그리고 ‘표범은 신앙적인 동물이다’는 것은 전통이 보장해주는 사실이다.”(폴 벤느, <그리스인들은 신화를 믿었는가> *이 책은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다)

이 두 가지 진실이 양립 가능하다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나는 이 사례가 데리다가 말하는 ‘종교 없는 종교’ ‘메시아 없는 메시아주의’의 탁월한 사례가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지젝의 ‘유토피아 없는 유토피아’의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말하기로 하겠다). 이디오피아의 도르제족이 우리보다 특별히 우수한 종족이 아닌 이상(이디오피아가 유토피아가 아닌 이상), 그것은 우리에게도 가능하다. 즉 ‘나’란 존재는 이 세상에 유일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그런 ‘나’가 이 세상에 모래알처럼 널려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말이다. 우리는 유치원에서부터 이런 걸 배워야 한다.


 

 

 

21. 이른바 존재론 교육. 매일같이 ‘우리는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우리는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가!’하는 것을 숙지시켜야 한다(제멋대로 키우면 안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러한 ‘있음’의 신비스러움에 눈을 뜨게 될 때(시라도 몇 자 적게 될 때), 그래서 “세계가 어떻게 있느냐가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라, 세계가 있다는 것이 신비스러운 것”(비트겐슈타인)이라는 걸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직업교육을 시켜야 한다(사실, 나는 교육학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그리고 의미론 교육. 우리의 젊은 철학자는 명철하게도 세계의 의미에 관하여 이렇게 적고 있다. “세계의 의미는 세계의 밖에 놓여 있어야 한다. 세계 속에서는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있고, 일어나는 그대로 일어난다. 세계 속에 가치는 없다.”(그는 철학을 그만두었다.)

세계의 의미가 세계의 밖에 놓여 있다는 말은 세계-내-존재로서의 우리는 세계의 의미에 관한 ‘아르키메데스의 점’을 가질 수 없다는 뜻이다(이건 아주 당연하다). 이것 또한 숙지시켜야 한다. 잘 이해할 수 없다고 하면, 먼저 물리(론)적 불가능성이 의미론적 불가능성을 필함한다(=필연적으로 함축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여 지구를 들어올리는 계산을 해준다(이것도 잘 이해할 수 없다고 하면, 주저 없이 몇 대 패준다).



22. 생각해보자. 받침점을 갖다 놓고 우리가 지구를 들어올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길이의 지렛대가 필요한지. 지구의 질량은 6.0×10*24kg이다. 이걸 (무거우니까) 10*-3m(1mm)만 들어올리도록 해보자. 우리의 질량을 편의상 10*2(100)kg으로 한다면, 지레의 원리에 따라 (6.0×10*24)×(10*-3)=(10*2)×(x)의 등식을 만족시키는 x의 값이 바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지렛대의 길이가 된다. 계산해보면, x=6.0×10*19m(=6.0×10*16km)이다. 이건 얼마만한 거리일까? 초속 30만(3.0×10*5)km의 빛이 1년간 가는 거리인 1광년을 대략 9.46×10*12km라고 하면, 대략 6.3×10*3광년, 즉 6,300광년 정도의 거리이다. 어쨌든 이만한 길이의 작대기를 지렛대로 구했다고 쳐도(어디서 구했는가를 묻지 말아 달라), 지렛대 저쪽 끄트머리까지 가는데 6,300광년이 걸린다는 얘기다(*지난번 계산이 틀려서, 이번에 다시 했다. 물론 이번에도 장담할 수는 없지만).

광속으로 간다면 모를까, 현재로선 불가능하므로 일단 음속(≒초속 330m)의 한 1,000배, 즉 대략적으로 1.04×10*10km/년 정도까지 날아간다고 해보자. 그럼 6,300광년의 거리는 ‘인간적인 거리’로 대략 5.73×10*6년 정도가 된다. 573만 년(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한 건 200만년쯤 전이다). (편의상) 한 세대를 30년으로 잡으면 대략 우리의 19만 세대 후손이 비로소 지렛대를 잡게 된다(이걸 가능하다고 해야 할까, 불가능하다고 해야 할까). 해서, 적어도 광속여행이 가능하지 않은 이상(우리 문명에서는 불가능하다), 현재의 우리가 이 지구를 1밀리라도 들어올리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걸 이론적인 산술에 기대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기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지구의 중력이 끌어당기는 만큼 우리의 떨어지는 사과도 지구를 끌어당기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과 같다(*만유인력이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은 유머이지 진리 주장이 아니다. 유머는 이 세계 안에 놓여 있는 우리가 자신의 처지를 견디는 방식이지 이 세계를 인식하고 기술하는 방식이 아니다(*’세계-내-존재’의 아렌트 버전은 ‘지구-내-존재’이다. 그것이 ‘인간의 조건’이다).

 

 



 

결론은 무엇인가? 우리가 지구를 들어올릴 수 없는 이상, 세계의 의미에 대해서 입다물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 닥치고 춤이나 춰!).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침묵하지 않으면 안된다; Wovon man nicht sprechen kann, daruber muss man schweigen; Whereof one cannot speak, thereof one must be silent.”(비트겐슈타인)

23. 그런데, 사실 지구보다도 더 들어올리기 힘든 것이 있으니, 바로 자기 자신이다! 대략 40-100kg 정도 되는 질량을 지레로 들어올리는 것은 별로 힘든 일이 아니지만, 문제는 자기 자신이 들어올리면서 들어올려져야 한다는 것이다(이건 손뼘으로 자신의 키를 재는 것과는 정말 다른 문제다). 즉 한 사람이 지렛대의 양쪽 끝에 동시에 올라앉아 있어야 한다는 것. 이 또한 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유일한 가능성은 양자 효과를 이용하는 것인데, 이것은 존재확률로서의 두 ‘나’가 지렛대의 양쪽에 동시에 ‘존재’하도록 하는 것이다(두 존재확률의 합은 당연히 100%가 되어야 한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확률은 현재로선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희박하기 때문에 무시해도 좋다(*코끼리가 타자기를 제멋대로 두드려서 <파우스트>나 <정신현상학>을 쳐낼 확률이 이에 견줄 만하겠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 자신의 의미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말할 수 없다(우리는 자신에게 무의미한 존재이다). ‘나’의 의미를 말해줄 수 있는 것은 바로 당신(들)뿐이다(빌어먹을!). 우리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은 생물학적 요구에서뿐만 아니라 의미론적 필요에서이기도 하다. 적어도 우리가 ‘의미론적 질병’을 앓고 있는 동물이란 걸 전제한다면 말이다. 우리에겐 사랑이 필요하다. 그리고 바로 이 사랑이 (*S. 베이유를 따를 때) 우리의 비참함을 말해주는 표시이다. 아, 사랑이란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우리의 신은 또 얼마나 초라한 것인가!

24. 육신은 떠나지만, 사랑은 아니다
육신은 재가 되겠지, 하지만 재가 되어서도 느끼리라
먼지가 되겠지, 하지만 사랑에 빠진 먼지가 되리라
- 케베도, <죽음 너머의 영원한 사랑>

25. 물론 이제까지 내가 말한 세계의 의미와 자신의 의미란 건 기하학적 이성에 의해 따져본 것이다. 즉 기하학적 의미론(혹은 의미의 기하학)이다. 이 의미론에서 고려되지 않은 것은 ‘나’의 생태학이다. 우리는 결코 순수 기하학적 공간에 존재하는 순수 사유체가 아니다. 그건 이론적 가정일 뿐이다(이론물리학적 모델). 현실 속에서 우리는 ‘먼지 일반’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 먼지’로서 존재한다. 즉 사랑에 빠지건, 욕조에 빠지건 하여간에 어딘가에 빠져서 꼼지락거리고 있는 먼지인 것이다(생물지리학적 모델). 반-기하학적 이성, 즉 아줌마적 이성은 바로 이 ‘빠짐’에 기초하여 모든 의미를 주관한다. 바로 이러한 국지적 구체적 시-공간에서의 의미론이 생태학적 의미론(혹은 의미의 생태학)이다. 이제 자리를 서서히 정리해야 할 시간을 맞이하여, 이 생태학적 의미론에 따라 나 자신에 대해 기술해보기로 한다.

26. 내가 존재하는 공간은 세계의 아름다운 영혼(SeOUL) 한 구석이다. 나는 동생과 전세방에서 산다(나는 이사하는 게 귀찮아서 빨리 결혼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특별한 직업도 없고 따라서 대단한 벌이도 없다(그래도 직장인 평균의 빚이 있다). 매일같이 학교에 가고(이 작업이 이루어지는 공간도 학교이다), 일주일에 두세 편의 비디오를 보며 한번 정도 극장에 간다. 매주 5-10권 정도의 책을 산다. 공부도 간혹 한다(학생이니까). 한 달에 두어 번 술을 마시고(맥주 1-2병), 담배는 피지 않으며 바둑 이외의 잡기는 하지 않는다(*요즘은 그마저도 하지 않는다). 학교 밖에서 사람을 만나는 일은 거의 없다(만나자는 사람도 거의 없다).

그리고 시를 쓴다. 전력으로 쓰진 않는다(돈벌이가 되지 않아서이다). 일주일에 한편 정도씩 몇 달 쓰다가 몇 달은 자칭 휴가이다. 지난 봄에는 두어 달만 쓰는 바람에 열두어 편을 쓰고 말았다. 아직 시쓰기에 모든 걸 투자할 만큼 잘 쓰진 못한다. 그렇다고 그만두어 버릴 만큼 못쓰는 것도 아니다(우리말로 시를 쓰는 것은 우리말의 가능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잘 쓰고 못 쓰는 것이 내 탓만은 아니다. *굳이 위안을 삼자면). 그러니 그냥 재미라고 해야겠지. 특별히 읽어주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재미치고는 별로이지만. 그저 ‘빛 좋은 개살구’나 ‘굴뚝같은 마음’ 같은 흔한 우리말들이 건네주는 울림을 모른 체 지나칠 수 없었을 뿐이다.

나는 우리말을 사랑하는바, 그것은 특별히 우리말이 잘나서가 아니라 내가 가장 잘 아는 말이기 때문이다. 또 나를 길러준 말이기 때문이다(사람은 분수와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한다). 어쨌든 쓰다 보니 10년이 되었고(반은 휴가였지만), 백여 편 이상의 시를 쓰게 되었다. 그래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렇게 시선집까지 묶는다(*이 글은 <황새의 멈추어진 걸음>이란 ‘시집’의 서론이었다). 그동안 시집을 만드는 일은 ‘내가 무얼 어찌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일’이면서 ‘내가 당신을 지겹게 하는 몇 안되는 일’이었다. 이걸 종합하자면, 어져 내 일이다. 이 일이 그래도 몇 사람에게는 사소한 즐거움이 되기를 바란다(이건 나의 욕심이다). *어떤 시들인가, 혹 궁금해할 사람들도 있을 듯하여 한 편만 여기에 옮겨놓는다. 제목은 <빈 병 속의 시간>(한 지면에 소개되기도 했었다).

그대를 그리워하다 남는 시간은 빈 병 속에 넣어둔다
시간은 시간의 과욕이며 연적(戀敵)이다
그리움이 막막할수록 부질없는 시간은 빈 병 속에서 묵직해지고
나는 어느덧 텅 빈 세상 하나를 거느리게 되었다
빈 병 속 보이지 않는 자갈이 깔리고 보이지 않는 꽃들이 핀 길
그대가 원한다면 느티나무 두 그루를 마저 심겠다
보이는가, 저 텅 빈 세상의 물살과 바람과 먼지……
그대를 그리워하다 남는 시간이, 아아 더 소중해 보인다
시간은 시간의 변덕이며 불가피한 오용이다
그대를 그리워하던 다락 같은 방도 이젠 저 빈 병 속에 있다

27. “그는 다시 돌아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 다시 시작하자.” 왕가위(=왕자웨이)의 여섯 번째 영화 <부에노스아이레스>(=해피 투게더)는 그렇게 시작한다. 아주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이 영화를 적어도 올해는 볼 수 없게 되었다(나는 결정적으로 이번 대선에서 야당 후보를 찍기로 했다. *기억에 동성애 장면 때문에 문제가 됐던 것 같다. 오래 전 얘기이다. 장국영은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타르코프스키와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를 좋아하는 만큼 나는 왕가위의 영화를 좋아한다. 나는 이들의 거의 모든 영화를 몇 번씩 봤다. 이들은 영화만의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가 세계와 만나는 세 가지 방식을 내게 보여주었다. 아니 나는 내게 맞는 이들의 영화를 통해서 그런 걸 봤다. 그래서, 다시 말하지만 유감스럽다. 나의 20대에 바쳐지는 이 여섯 번째 시집(합본을 제외하면) 또한 이런 말로 끝을 맺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돌아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 다시 시작하자.”(우리의 삶은 잘할 때까지 반복될 것이다.)



 

 

 

28. 언제였던가. 87년, 그리고 5월. 나는 20세(만 18년 9개월)의 대학 신입생이었고,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꿈도 없었다. 그때 곽지균이 감독하고 강석우, 안성기, 이미숙이 주연한 영화 <겨울나그네>(결말의 장황함은 불만이지만)를 봤었고, 가사도 모르는 ‘보리수’를 흥얼거리고 다녔다. “다시 시작하고 싶어!”라는 민우(=강석우)의 대사가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돌았다(이 대사는 이후에 곽지균이 만든 <상처> <그 후로도 오랫동안>에도 나온다. 그가 요새 만드는 <깊은 슬픔>에도 나올까?). 정말 무엇인가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이맘때 나는 학생생활연구소에 (심리)상담을 받으러 다니기 시작했다. 상담 선생님에게 카뮈의 ‘시지프의 신화’를 들먹이며 자살과 부조리와 세계의 원초적 적의에 대해 떠들었다(카뮈에 대한 ‘경의’가 이 글의 앞부분에 들어간 것은 이 때문이다). 집으로 가는 버스 안은 무더웠고, 나는 세상이 빨리 끝장나기를 은근히 빌었다. 나는 그저 20세였던 것이다.

29. 하여간에 나의 30세는 이미 시작되었고, 또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이젠 30대도 말년이다!) 여전히 내겐 아무런 꿈이 없다(몇 권의 책을 쓸 계획만을 가지고 있다. *아직도 못 쓰고 있다!). 그런데도 대책 없이 또 10년이 지나갈지 모른다. 그래, 너를 두고 하는 소리다. 여전히 ‘나’라는 장소에서 꼼지락거리고 있을 ‘너’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안녕, 잘 있었니? 난 이렇게 지내고 있어.” “근데, 너 형편이 좀 나아졌니?”(*“아니!”)

30. 새로운 시작의 나이에서 나의 걸음은 멈추어진다. 많은 분량이 아님에도 6박 7일이 걸렸다. 그리고 하루가 더 걸렸다(이젠 지겨워진다). 반 정도의 분량은 말복인 날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작성한 것이다(*오늘이 말복이다!). 어쨌든 끝났다. 편집과정에서 몇 가지 빠지긴 했지만(주로 ‘확실성’ ‘가능성’에 대한 얘기들이다), 언젠가 다른 자리를 마련하면 되는 것이지. 자, 이제 이걸로 무얼 할 것인가? 일단 읽어주기 바란다. 뭔가 재미있거나 전달되는 것이 있으면 다행이고, 아니면 그만이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점점 더 많아지고 있으니까.

30. “시는 이해되기 전에 전달된다”고 한다. 복습하자면, 이때 ‘전달’은 시의 n차원적인 어떤 리얼리티가 (주관적) 직관에 의해 직접적으로 파악되는 걸 말하며, ‘이해’는 이렇게 전달된 것을 다수가 경험할 수 있는 보다 객관적인 형태로 변형함으로써(n차원의 3차원화) 보존과 공유가 가능하게 하는 걸 말한다. 이 ‘이해’를 달리 ‘개념적 사유’라고 한다. 헤겔식으로 말하자면, 시(=예술)는 자신이 발견한 어떤 새로운 사태에 이 개념적 사유(=철학)가 도착하기 전까지 현장을 보존하는 일을 담당한다. 이 개념적 사유 이후에, 자신의 의미를 모두 증발시킨 이후에 시가 직면하는 것이 시의 여생(‘자기 앞의 생’)이다. 나의 시들이 그런 여생의 한 풍경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바람불어 좋은 날의 그런 풍경을 말이다. 끝으로, ‘황새의 멈추어진 걸음’이란 제목과 만나는 계기가 되었던 그리스 영화 <율리시즈의 시선>(Le regard d’Ulysse)에서 인상적이었던 한 택시 운전사의 말로 이번 여정을 마감한다(*그러니까 이 여정은 황진이의 말로 시작해서 택시 운전사의 말로 끝난다).

30. “빌어먹을 자연아, 넌 외로우냐? 나도 외롭다. 여기 비스킷이나 먹어라!”

05. 12.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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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01 23: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5-12-01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이성복의 시와 소월문학상 수상 소감에 나오는 문구입니다. 마흔 즈음에는 무얼 읽어야 할까요?^^

2005-12-02 2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02-28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혼을 안해도 일정 나이에 이르면 아줌마인가요?
김상미 시인은 작년까지만 해도 결혼을 안했는데...ㅎㅎ

함성호 시인의 시를 검색하다 보니 이 페이퍼에 이르렀습니다.^^

로쟈 2006-03-01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인 자신과 시적 화자가 반드시 일치하는 건 아니니까요.^^

로쟈 2006-03-11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가끔 뒷북치시면서 읽어주시는 분들이 계시군요.^^ 유령이시라도 언제든 환영합니다...

2007-01-10 2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1-11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덕분에 다운된 이미지들을 수정했네요. 새해 복많이 받아요, 남주지 말고!..
 

클래식에 문외한인 나에게도 모차르트와 쇼스타코비치는 친숙한 이름이다. 이 두 '천재 음악가'에 대한 칼럼을 아침 신문에서 읽었다. 한국일보에 연재되는 '조윤범의 파워클래식'. 특히 초점이 맞춰진 것은 두 사람이 남긴 현악사중주 수작들. 내가 곡의 번호까지 기억할 리는 없지만, 필시 우리 귀에 익은 연주곡들일 터이다. 이들의 선배 음악가인 하이든은 83개의 현악사중주를 남겼다고 하는데, 양적으론 거기에 미치지 못해도, 이 두 후배 또한 상당 수의, 그리고 상당한 수준의 현악사중주를 작곡했다 한다.

 

  

 

 

우리의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의 경우 전체 23개의 현악사중주를 남기고 있는며, 그 중 '불협화음 사중주' 를 포함하여 그가 하이든에게 헌정한 여섯 곡, 즉 '하이든 현악사중주'가 유명한 듯(<사냥>이란 곡이 특히 유명하다고). 이후의 작품 가운데는 연주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음표들이 가득차 있다고 하는데, 특히 마지막 21번과 23번이 압권이라고. 필자가 소개하는 영화 <아마데우스>(1984)의 일화: (황제 왈) "음... 뭐랄까, 다 좋은데 음표가 너무 많아." (모차르트)"전 필요한 만큼만 썼는데요. 그렇다면 정확히 어디가 많았나요?" 이에 황제는 더듬거려지만, 실제로 연주해보면 황제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영화 <아마데우스>의 사운드트랙이 내가 산 몇 안되는 모차르트 음반 같다. 그 영향이겠지만, 내가 가장 많이 들은 모차르트의 음악은 레퀴엠이다.

 

 

 

 

참고로,  모차르트의 천재에 대한 살리에리의 질투라는 테마를 극화한 작품으로 푸슈킨의 소비극 중 <모차르트와 살리에리>가 있다(<아마데우스>의 시나리오 작가는 참조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우리말로는 푸슈킨 전집 중 희곡 파트에 들어 있는데, 가령 <보리스 고두노프>(열린책들, 1999/2001) 같은 책을 참조할 수 있다. 이 짤막한 작품은 러시아에서 TV용 영화로도 만들어져 있으며 나는 그 비디오CD를 소장하고 있다. <아마데우스>와 마찬가지로, 살리에리의 아주 긴 독백으로 시작한다.  

 

 

 

 

모차르트의 또 다른 영화음악으로는 <아웃 오브 아프리카>(1985)에서의 클라리넷 연주가 가장 유명하지 않을까 싶다. <아마데우스>는 고등학교 때 단체관람을 했던 듯하고, 아이작(이자크) 디네센 원작의 <아웃 오브 아프리카>는 요즘 수능시험에 해당하는 학력고사를 보고 난 고3 시절에 종로에 있던 명보아트홀에서 본 기억이 생생하다(디네센의 책은 <아웃 오브 아프리카>와 <바베트의 만찬>에 국내에 소개돼 있다. *거기에 <일곱 개의 고딕이야기>가 더 보태졌다). 강수연 주연의 <씨받이>가 예고편이었다.   

모차르트와의 기억할 만한 또 다른 만남은 1990년 여름에 TV에서 본 프랑스 뒤세네 남매(Isabelle & Paul Duchesnay)의 아이스댄싱이었다. 그들은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의 한 대목에 맞추어 춤을 추었는데, 비록 러시아 팀에 이어 2위를 차지했지만, 이들의 춤은 내가 이제껏 기억하는 최고의 아이스댄싱이었다(춤추는 걸 보며 눈물을 흘린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단편적 이미지가 운동으로서의 춤을 전달할 수는 없겠지만, 아쉬운 대로 옮겨본다. 여하튼 그런 게 내가 기억하는 모차르트이다. 아니 '모차르트 이펙트'라는 게 더 있긴 하다. 딸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태교에 좋다고 해서 구입한 건지 어떤 건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하여간에 <모차르트 이펙트>(황금가지, 1999)도 나의 장서 중의 한권이다. 그렇다고 물론 모차르트가 집안에 넘쳐흘렀던 건 전혀 아니고 책은 어디 박스에나 들어가 있는 듯하다.

 

 

 

 

모차르트 관련서로 내가 한번 읽고 싶은 책은 최근에 나온 <모차르트와 함께 한 내 인생>(문학세계사, 2005)이다. 작곡가 모차르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에세이인데, 저자인 프랑스작가 "에릭 엠마뉴엘 슈미트가 자신의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된 모차르트의 음악 중 16곡을 직접 선곡하고 각각의 곡에 대한 추억을 들려준다"고. 본문에 소개된 16곡을 한 장의 CD에 담아 부록으로 실었다고 하니까 초심자들에게는 좋은 길잡이가 될 듯하다. 그리고 역시나 프랑스의 작가이나 비평가 필립 솔레르스의 <모차르트 평전>(효형출판, 2002). 책은 필립 솔레르스의 '진정한 모차르트를 찾아 떠난 여행'의 기록이라는데, "모차르트의 흔적을 찾아 곳곳을 순례하고 그가 남긴 편지들의 어구를 되새기며 끝없이 그의 음악들을 철학적, 시적으로 해석한다." 전방위 지식인인 저자는 그 유명한 쥴리아 크리스테바의 남편이기도 하다.

다시 칼럼으로 돌아가서 이어지는 대목을 읽어본다:  "현악사중주 역사에 뚜렷한 획을 그은 모차르트는 다음 세대를 이어갈 무뚝뚝한 꼬마에게 확실한 바톤을 넘겨주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베토벤이 그 위대한 곡들을 남길 수 있었으랴. 그 후에도 많은 작곡가들이 돈벌이도 별로 안 되는 사중주를 쓰며 자신의 숭고한 작품집을 완성시켜나갔다. 하지만 딱히 이렇다 할 천재는 20세기에 들어서야 그 빛을 드러내었다. 바로 쇼스타코비치다."

 



 

쇼스타코비치(1906-1975)란 이름이 제일 먼저 떠올려주는 이는 몇 해 전 세상을 버린 한 친구이다. 클래식 애호가였던 그가 가장 좋아했던 러시아 작곡가가 쇼스타코비치였고, 덕분에 나는 그의 교향곡이나 협주곡 등에 대해서 귀동냥을 할 수 있었다. 기억에 그는 LP음반으로도 쇼스타코비치 컬렌션을 가지고 있었고, 몇 번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혁명'이란 제목이 붙은 교향곡을 그의 방에서 틀어주기도 했었다.

그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을 15개나 쓴 작곡가이지만, 현악사중주도 딱 15개를 남기고 있다(한 연구자에 따르면 이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며 이 두 양식에 대한 쇼스타코비치의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아무튼 그는 "모차르트를 의식한 듯한 간결한 1번을 쓰자마자 2, 3번부터 교향곡에 버금갈 정도의 웅장한 현악사중주들을 써내려갔다. 그의 초기 현악사중주들은 초기작인지 후기작인지 헷갈릴 정도로 기가 막힌 스타일들을 거침없이 보여준다."

"11번부터 14번까지는 그의 작품들을 초연했던 ‘베토벤 사중주단’ 멤버에게 하나하나 헌정했다. 11번은 제2바이올린에게, 12번은 제1바이올린, 13번과 14번은 각각 비올라와 첼로 주자에게. 이토록 현악사중주에 애착을 가진 이가 또 있을까. 다 듣기엔 너무 많으니 한 곡만 추천해 달라고? 역시 제목 없는 2번의 마지막 악장을 들어보라.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이 저리 가랄 정도로 멋지다." 그 멋진 음악을 나도 한번 구해서 들어봐야겠다.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두번째 기억은 스탠리 큐브릭의 유작 <아이즈 와이드 셧>(1999)의 주제가와 관련된다. 오래전 영풍문고 종로점에 들렀을 때 주제가로 쓰인 쇼스타코비치의 재즈모음곡 2번 중 왈츠가 반복해서 들려왔는데, 아마도 음악 담당자가 당시에 좋아했던 곡인 모양이었다(서점에 머물던 시간 내내 반복해서 들려왔다). 당시엔 누구의 음악인지도 몰랐지만, 왠지 러시아 음악 같다는 느낌을 받았었고, 나중에 돌이켜보니 그게 쇼스타코비치였다. 나는 영화의 비디오CD와 사운드트랙을 모두 갖고 있기에 수시로 들을 수 있는데, 누구나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곡이 아닌가 싶다. 

 

 

 

 

쇼스타코비치 관련서로 나온 건 두 권인데, 그 중 솔로몬 볼코프의 <증언>(이론과실천사, 2001)은 이 작곡가에 대한 많은 자료와 증언을 제시해준다. 하지만, 전문가의 의견을 들으니 대부분은 신빙성이 없다고 한다. 볼코프는 러시아의 망명 음악가이지만 프리랜서 작가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시인 브로드스키와의 대담집도 갖고 있다), 그의 '증언'에는 각색된 픽션도 가미돼 있어서 러시아  음악학자들이 아주 싫어한다고(볼코프는 페테르부르크 문화사에 대한 책, 차이코프스키에 대한 책 등도 갖고 있으며 러시아어로 다 소개돼 있다).

그럼에도 <증언>은 우리말로 접해볼 수 있는 가장 상세한 문헌이므로 그런 점을 얼마간 감안하고 읽으면 되겠다. 쇼스타코비치는 1928년 약관 22세에 당대 최고시인 마야코프스키의 풍자 드라마 <빈대>의 음악을 맡기도 했었는데, 두 걸출한 예술가가 조우하는 장면도 <증언>에는 기록돼 있기 때문에 전공자들에게도 흥미로운 책이긴 하다. 내년에 좀더 정평있는 전기가 출간되기를 기대한다. 그런 기대를 가질 만한 것이 "내년 2006년은 이 두 천재 작곡가의 해다. 모차르트는 탄생 250주년이며, 쇼스타코비치는 탄생100주년이다." 이것이 사실 내가 굳이 이런 내용의 페이퍼를 쓰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 2006년이 이제 한달 남았다!..

05.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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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11-30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차트르 레퀴엠 제가 강추하는 음반이 있습죠.

1996 Digital
HARMONIA MUNDI



Requiem in D minor KV 626
MOZART
Philippe Herreweghe (conductor)
Orchestre des Champs Elysees



 

 

 

 

 

 

함 들어보시면 좋을 듯.


비로그인 2005-11-30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club.nate.com/classicalmusic 네이트 고전음악 동호회
이 사이트에 가면 저작인접권이 말소된 음반 (녹음된지 50년이 넘었거나 연주자가 사망한지 30년이 넘은 음반 등.) 200여 장을 공짜로 다운 받을 수 있더군요. 참 좋습니다.

로쟈 2005-12-01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제가 음악보단 역시 책을 더 좋아하지만, 둘이 안 친할 이유도 없겠죠.^^
 

로이 잭슨의 <30분에 읽는 니체>(램덤하우스중앙, 2003)을 읽었는데(내가 읽은 건 2005년판 3쇄이다), 충실한 내용이고 좋은 번역이다. 이런 류의 책들 가운데에서는 '동급 최강'이 아닐까 싶다. 뤼디거 자프란스키의 <니체>(문예출판사, 2003)와 나란히 읽으면 좋을 듯싶다. 자프란스키의 책은 독일에서 2000년 니체 사망 100주년을 기념하여 출간된 책이며 내가 읽은 대목들에서 번역도 막힘이 없다.  

 

자프란스키는 독일어권 최강의 철학자 전문 전기작가인데, <쇼펜하우어>, <하이데거> 등의 저작을 갖고 있고(이 모두는 영역돼 있으며 나는 <하이데거>를 영역본으로 갖고 있다), 올해는 <쉴러>도 출간한 걸로 안다. 모두가 번역되어 마땅한 책들이다(그러기 위해서는 <니체>가 좀 팔려줘야 한다!).  

그의 에세이로는 <인간은 얼마만큼의 진실을 필요로 하는가>(지호, 1998), <악 또는 자유의 드라마>(문예출판사, 2002)가 국내에 출간돼 있는데, 후자는 아직 안 읽었지만 전자는 내용 좋고 번역도 좋다. 해서 자프란스키를 읽자! 

한편, 영어권을 대표하는 니체 개론서로서 홀링데일의 <니체>(이제이북스, 2004)도 유용해 보이지만, 니체가 사랑했던 여인 '루 살로메'를 '루 잘로메'로 옮긴 탓에 눈밖에 나버렸다(명품은 디테일에 강해야 한다). 거기에 무슨 '신념'이 걸려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러권의 철학서를 낸 출판사의 작품 치고는 부주의해 보인다. 국내에서 나온 가장 종합적인 책은 백승영의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책세상, 2005)이다.

그건 그렇고, 잠시 짬을 낸 김에 <30분에 읽는 니체>에 대한 밑줄긋기를 해본다. 내가 관심있어 하는 대목은 112-117쪽인바, "새로운 철학을 위해서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와 "과연 진정한 세계가 있을까?"라는 두 개의 절로 돼 있다. 저자를 따라가 본다(나는 대부분의 책의 경우 읽기-따라가기가 그냥 모든 걸 말해준다고, 이해가능하게 해준다고 생각한다).

-"사상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거의 대부분이 신이나 내세, 영원한 영혼 등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그런 개념들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며 연대기적으로 아주 짧은 시간만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의 세계관이 그런 것처럼 우리의 언어도 그렇다고 니체는 주장한다." 그러니까 언어의 '자명성'에 대해서 의심해보아야 하다는 것. 즉, 언어에 대해서도 현상학적 판단중지가 필요하다.

-"<우상의 황혼>에서 '니체는 문법을 없애기 전에는 신도 없앨 수 없다'는 유명한 주장을 한다. 이런 견해는 후에 모든 언어가 석기 시대의 형이상학을 유지하고 있다고 본 영국의 유명한 철학자 러셀에 의해서도 제기된다. 우리가 보다 나은 철학을 원한다면 반드시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니체의 이러한 통찰은 거듭 음미될 만한데, 언어(문법)과 형이상학(신) 간의 내적 커넥션에 주목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가령 (하이데거에 따라) '3인칭 단수동사 현재형'에 모든 것이 걸려 있는 서구 '형이상학'의 경우만 하더라도 그러한 동사 형태를 갖고 있지 않은 언어, 가령 한국어와 같은 교착어의 경우에는 문제의식이 온전하게 공유될 수 없다. 즉, 그건 '당신들의 형이상학'인 것. 그리스적 기원의 형이상학과 다른 형이상학이 구성될 수 있는 것은 아주 실제적인 차원에서 이러한 언어의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러시아어의 경우만 하더라도 존재동사(be동사)의 현재형을 쓰지 않는다. 그러니까 is/ist/est 대신에 아무것도 쓰지 않는 무(zero)형이다.

해서, 언어에 근거하자면, 러시아에는 서구와는 다른 종교, 다른 형이상학이 성립가능하며, 또 그럴 수밖에 없는 것. 그건 한국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He is a student'를 '그는 학생이다'로 옮기고, 거기서 계사 'is'의 대응항으로 '이다'를 분석하는데, 그러한 대응의 불완전성만큼 서구의 계사존재론과 한국어의 존재론은 거리를 갖는다. 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언어만큼의 존재론과 형이상학이 가능하다.

-"우리는 언어에 너무 집착하기 때문에 그 언어가 만들어내는 허구 없이는 살아가기 힘들다. 니체는 심지어 물리학의 언어조차도 인간의 필요에 부합하는 허구이며 해석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니체는 원자와 같은 이론적 개념뿐만 아니라 모든 개념이 허구라고 말한다. 물체, 선, 표면, 원인과 결과 혹은 운동과 같은 개념은 모두 믿음의 산물이지 그 자체로는 어떤 것도 증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 것이 니체의 원근법주의(관점주의)이다. 모든 것의 믿음의 문제이며 따라서 개종의 문제이다. 여기서 문득 니체는 흄을 떠올려주지 않는가? 

-"인과관계에 대한 니체의 생각은 흄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흄은 인과관계가 자연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습관을 통해 하나의 사건을 다른 사건에 연결해 얻어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인과관계는 정신의 산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아주 필요한 것이다. 니체가 보이게 그것은 의사소통을 위해 유용한 관습적 허구이다."(강조는 나의 것) 들뢰즈가 흄(1953)에서 니체(1962)로 건너뛰는 데에는 9년이라는 긴 세월이 필요했지만, 내가 보기엔 거기에 어떤 단절/비약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연속성이 있다. 적어도 이 인과의 문제와 경험론적/실용주의적 태도를 흄과 니체는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에 대한 습관적인/관습적인 믿음과 개종의 문제 역시.    

 

 

  

 

 

 


 

-"니체는 어떤 경우에도 철학적 관념론을 채택하지 않았다. 즉 정신의 바깥에는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 말이다. 왜냐하면 니체는 정신의 바깥에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체가 보기에 그 세상은 질서 있고 구조화된 우주를 갈구하는 인간의 희망에 결코 부응하지 않는 아주 다른 것이기 때문에, 그 세상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고사하고 인식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니체는 칸트 철학의 유산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으며, 특히 나이가 들면서 '진정한' 세계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했다."

마지막 문장에 대해서만 나는 좀 유보적이다. 설사 '칸트 철학의 유산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니체 철학의 독창성을 구성하는 것은 (들뢰즈를 따라서) 칸트 철학과의 변별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잘 잃어버린 세계'를 제안하는 니체-로티의 관점이 보다 더 니체답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로티가 니체의 철학을 높이 평가하면서 듀이의 실용주의(프래그머티즘)과 등가의 것으로 간주하는 이유도 이해할 만한 것이다. 그들은 모두 관념 대신에 망치를 들고서 철학을 한 대장장이들이었던 것이다...

05. 11. 29. 

 

P.S. 참고로 데이비드 흄(1711-1776) 철학에 대한 기본사항 혹은 '교양상식'을 정리해둔다. 독일 사람 에드문트 야코비가 쓴 <클라시커50 철학가>(해냄, 2002)의 내용이다. 24세의 나이의 흄은 프랑스에서 <인성론>(<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를 집필하기 시작했는데, 세 권으로 된 이 책은 1739-40년에 간행되었다(그러니까 그의 나이 서른이 되기 전이다). 이것은 그의 일생에 있어서 최대의 업적으로 간주된다.

-"흄은 인식의 근거로서 오직 경험만을 인정한다. 그는 로크의 경험론을 출발점으로 하여 로크와 마찬가지로 직접적 '인상들'과 고정된 인상들에서 생겨난 '관념들'을 구분한다. 그러나 그는 모든 사물들의 실체를 감각들의 '묶음'일 뿐이라고 했던 버클리를 따름으로써 로크의 경험론을 극단으로 몰고간다. 버클리에게 있어 실체는 오직 지각하는 자아뿐이었다. 그러나 흄은 이 지각하는 자아조차도 실체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 자아의 내용이 변화무쌍한 감각 지각들일 뿐이라면 이것 역시 감각 지각들의 연속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실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 개념은 그저 사유의 유용한 보조 도구일 뿐이다."(151-2쪽, 강조는 나의 것)

이러한 흄의 자아관은 곧바로 니체의 자아관과도 연결되며 들뢰즈의 철학에서 가장 세련된 반향을 얻는다. 이른바 '흄-니체-들뢰즈 커넥션'이다. 인격체로서의 자아나 주체에 대한 들뢰즈의 공격은 젊은 시절 흄에 대한 그의 읽기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오이디푸스에 대항하여 안티오이디푸스를 내세우듯이, 그는 인칭적 사유에 대항하여 비인칭적 사유(혹은 4인칭적 사유)를 철학의 새로운 무대이자 역량으로 제시한다(들뢰즈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이보다 더 쉬운 길을 나는 알지 못한다).

-"인과 관념에 대해서도 흄은 같은 입장을 취한다. 우리는 결코 경험을 통해 사건 A가 사건 B의 원인이라는 것을 알아낼 수 없으며 단지 A 다음에 B가  나타났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다. 섭씨 100도로 가열하면 물이 끓는다는 것을 경험했다고 해서 이것이 인과 관계를 증명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제 태양이 졌기 때문에 태양이 떠오르리라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논리일 뿐이다... 지금까지 태양이 매일 떠올랐다고 해서 이것이 내일도 태양이 떠오르리라는 절대적 보장이 되지는 못한다. 따라서 모든 것이 필연성에 따라 연속해서 생겨나는 창조의 질서라는 것도 증명될 수 없다. 그리하여 결국 이러한 질서를 창조한 자의 존재도 증명될 수 없다."(152쪽)

즉, 'A이므로 B'가 아니라 언제나 'A 그리고 다음에 B'라는 식이다. 여기서 A와 B를 묶어주는 것은 인과적 관계(논리)가 아니라 우연적인/습관적인 '접속'(커넥션)일 뿐이다. 이러한 회의론이 니체에게서 반복되고 있다는 건 앞에서 인용한 대로 로이 잭슨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식의 전면적인 회의주의를 갖고 있었기에 영국에서는 니체가 그다지 반향을 얻어내지 못했던 것. 흄 자신의 평가는 이렇다:

-"자신의 가장 중요한 공적은 이성과 감성 사이에 존재하는 기존의 권력 관계를 바꿔놓은 데 있다고 흄은 생각했다. 그가 이성을 '감각의 시녀'로 만든 것은 한편으로는 극단적 경험론의 입장에서 그렇게 한 것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소위 '이성적인' 도덕률에서 감성을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인간과 육체에 보다 더 가까운 관계에 있는 감성의 우위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흄은 철저한 에피쿠로스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에피쿠로스처럼 유물론을 이론적 토대로 하지 않고 감성의 실증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쾌락주의로 나아갔다."(154쪽)

하면, 그가 미학이나 예술론 저작을 남기지 않은 것이 의아할 정도이다. 그의 만년의 저작은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울산대출판부, 1998)인데, 들뢰즈는 그 '재담'에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참고로 '문필가'로서의 흄은 플라톤, 니체와 함께 서양 철학사를 통틀어서 톱클래스에 속한다. 이 레이스에서는 칸트가 중간 정도이며 그게 독일어인지 헤겔어인지 헷갈리는 헤겔이 꼴찌를 다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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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le 2005-11-29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자프란스키의 책은 정말정말 좋아요. 저는 또마님의 추천으로 읽게 되었답니다. 그의 다른 책이 번역되지 않는 건 참으로 유감스럽고 가슴 아픈 일입니다. 저기, 로쟈님이 번역해 주시면 안될까요.☞☜

Joule 2005-11-29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참, 나중에 두 권은 저도 아직 안 읽어본 책이라 정신없이 보관함에 담았습니다. 말씀 안해주셨으면 모르고 있었을 뻔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꼭 땡쓰투 눌러드릴게요. :)

yoonta 2005-11-30 0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양의 is/ist/est를 중심으로한 계사존재론이 문법적인 환각을 통해 실체론적 존재론으로 나아갔다는 것을 본격적으로 이야기한 사람은 니체였지요..그런데 <흄은 인과관계가 자연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습관을 통해 하나의 사건을 다른 사건에 연결해 얻어지는 것이라고 보았다.>라는 님의 글을 통해서도 알수있듯이 계사존재론의 문법적 환각현상을 니체보다 먼저 인식한 사람은 흄이라고 볼수도 있을듯.

그리고 그들간의 유사성을 간파하고 계사에 의해 상상되어지는 허구적인 존재론에서 벋어나 계사를 "사건과 사건을 연결"시키는 접속사로 대체함으로써 초월론적 경험론을 구축하려한 들뢰즈에 의해 흄과 니체가 하나로 연결되었다고나 할까요..어쨋든 다시금 들뢰즈로 귀결되는군요..

이제 슬슬 님의 페이퍼가 들뢰즈의 흄에서 (들뢰즈의) 니체로 이동하시는것 같네요..^^

로쟈 2005-11-30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쥴님/ 저도 자프란스키의 책들이 더 나왔으면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광고도 하고 있구요.^^ 검은비님/ 30분이면 크로키하시는 시간보다는 오래 걸릴 듯.^^ yoonta님/ 들뢰즈의 경험론에 대한 페이퍼도 곧 쓰긴 해야겠네요. 그렇다고 너무 목빼진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책임 안 집니다.^^
 

 

 

 

 

최근에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연구 과정에 대한 윤리적 논란이 사회적 파문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직접 참견할 형편은 아니기에, 나는 나대로 그냥 '니체와 여성'이란 주제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권장할 만한 책들은 니체의 저작들 이외에 고병권의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그린비, 2003)과 신경원 교수의 <니체, 데리다, 이리가레의 여성>(소나무, 2004), 그리고 데리다의 <에쁘롱>(동문선, 1998) 등이다. 이리가레(이리가라이)나 사라 코프만 등의 책들은 아직 번역돼 있지 않다.  영어권에서 이 주제에 관한 책들은 여럿 나와 있지만, 내가 맘에 들어하는 책은 켈리 올리버(Kelly Oliver)의 <니체를 여성화하기('Womanizing Nietzsche : philosophy's relation to the "feminine")>(Routledge, 1995)이다. 저자의 <크리스테바 읽기>(시와반시사, 1997)가 국내엔 소개돼 있다.

물론 이 책들을 이 자리에서 모두 다 읽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시간을 내보려고는 하지만, 알다시피 시간은 여성만큼이나 붙잡기 어려우며 변덕스럽다), 여기서는 다만 고병권의 <니체의 위험한 책>의 한 장 "여자의 해결책은 임신이다"(192-208쪽)를 따라가보기로 한다. 많지 않은 분량이지만 문제의 윤곽을 잡아주고 있어서 유용하다. 일단 시작은 여성에 대한 니체의 '마초적' 언명들이 여성 독자들을 불편하게 한다는 전제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문제제기: "하지만 니체가 정말 마초였을까? 전통적 서구문화에 그토록 급진적인 비판을 가했던 그도 여성에 대해서는 전통적 견해를 반복했던 것일까? 노예이기를 거부하라고 외쳐댄 그가 여성에게만은 노예로 머물 것을 강요한 것일까?.. 혹시 니체가 여성을 잘못 이해한 게 아니라 우리가 니체의 '여성'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193-4쪽) 

이후에 검토되는 것은 <차라투스트라>의 초반에 나오는 '늙은 여인들과 젊은 여인들에 대하여'란 장이다. 이에 대해서는 나도 지난 여름 모스크바 통신에서 자세하게 다룬바 있다(이 참에 다시 읽어봤는데, 읽어볼 만하다). 복습을 겸하여 다시 좀 따라가보기로 한다. 내가 그때 참조한 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니체전집13권, 책세상, 2003 개정1판)이다. 거기에서 “늙은 여인들과 젊은 여인들에 대하여”(109-112쪽)를 ‘그냥’ 옮겨놓고 읽어보는 방식이었다(여성에 대한 니체의 편견을 보여준다는 ‘악명 높은’ 장이기도 하다). 약간 발췌하겠다. 

-“차라투스트라여, 어찌하여 그대는 누가 볼세라 그토록 조심스레 어스름 속을 걷고 있는가? 그리고 외투 속에 무엇을 그리도 정성스레 감추고 있는가? 누군가가 그대에게 선물한 보물이라도 되는가? 아니면 그대에게서 태어난 아이라도 되는가? 그대, 사악한 자의 벗이여, 그것도 아니라면 도둑의 길에 들어서기라도 했는가?” 차라투스트라는 말했다: “진실을 말하거니와, 형제여! 그것은 내게 선물로 주어진 보물이다. 내가 지금 갖고 다니는 것, 그것은 작은 진리이다. 그런데 이 진리는 어린아이처럼 버릇이 없다. 그 입을 막지 않으면 너무 요란하게 소리를 질러대니 말이다.”(그러니까 이 장의 이야기는 차라투스트라가 조심스레 잘 싸고 감추고 있는 물건, 즉 ‘작은 진리’가 무엇이며, 그가 어떻게 선물 받았는지를 설명해주는 내용이다.)

-오늘 해질녘, 혼자서 길을 가고 있을 때였다. 어떤 늙은 여인이 다가와서는 내 영혼에다 대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우리 여인들에게도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면서도 정작 여인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늙은 여인에게 대답했다. “여인에 대해서라면 사내들에게나 이야기할 일이다.” “내게도 좀 이야기해달라. 너무 늙어 듣자마자 잊고 말 터이니.” 그 여인의 말이었다. 나는 그의 청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리하여 이렇게 말했다.

-“여인은 어느 모로 보나 수수께끼이다. 그리고 여인에게 있어서 모든 것이 하나의 해결책을 갖고 있으니, 임신이 바로 그것이다. 여인에게 사내는 일종의 수단일 뿐이다. 목적은 언제나 어린아이다. 그렇다면 사내에게 여인은 무엇인가? 진정한 사내는 두 가지를 원한다. 모험과 놀이가 그것이다. 그래서 사내는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놀잇감으로 여인을 원하는 것이다. 사내는 전투를 위해, 여인은 전사에게 위안이 될 수 있도록 양육되어야 한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그러니까 "여자의 해결책은 임신이다"라는 장제목은 여기에서 얻은 것이다. 이하는 나의 주석이다.)  

니체는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서 신랄한 비판을 일삼았지만, 그의 사고는 상당히 생물학적이고 진화론적이다(그는 ‘위버멘쉬’로의 ‘당위적’ 진화를 제창한다). 지극히 당연한 얘기지만, 생물체로서의 여성(=암컷)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임신’이며(누구의 아이를? 얼마나?), 그것이 여성의 거의 모든 수수께끼를 해결해준다(그녀의 히스테리, 그녀의 자존심, 그녀의 어리석음, 그녀의 아줌마다움, 그녀의 행복 등등). 그런 여성에게서 사내(=남자)들이란 일종의 수단에 불과하다. 즉, 정자의 제공자이면서 성실한 부양자(모든 여성이 바라는 ‘사내’란 밖에서는 ‘능력 있고’ 안에서는 ‘자상한’ 사내이다). 만약에 어떤 여성이 ‘임신’에 관심이 없었더라면(여성은 ‘임신 기계’가 아니다!), 비록 임신과 어린아이들이란 굴레로부터는 자유로웠겠지만, (지극히 당연하게도) 우리의 조상(=이브들)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더불어 그 ‘수수께끼’로부터도 소외되었을 것이다.

그럼 남자(=사내)에게 여자란 무엇인가? 니체가, 아니 차라투스트라가 주장하는바, 남자가 원하는 건 모험(=위험)과 놀이(=게임)이다. 그런데, 여자야말로 그 둘의 결합체라는 것. 즉 위험한 놀잇감! 그때의 위험(=모험)이란 건, 다르게 말하면, ‘책임’이다. 남자에게 여자는 놀잇감이고 장난감이지만, 즉 유희에 대상이지만 까딱하면 다 뒤집어써야 하는 것. 왜 있지 않은가? 하룻밤 불장난의 대가라는! 진화생물학에서는 상식적으로 하는 얘기지만, 남녀간의 성적 계약에 있어서, 쌍방의 초기 조건이 동일하지 않다. 두 사람이 관계를 갖고 아이(=2세)를 얻을 경우 쌍방이 얻을 수 있는 유전적 이익은 똑같이 1/2이지만, 초기 투자 지분에 있어서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 단도직입적으로, 난자와 정자의 상대적 크기를 비교해 보면 된다.

 

 

 


흔히 정자경쟁에서(혹은 ‘정자전쟁’에서) 3억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수정에 성공했다는 얘기를 하지만, 다르게 말하면, 난자는 산술적으로 말해서 최소한 정자의 3억 배 이상에 해당하는 가치를 갖는 것이며, 이걸 경제학 버전으로 바꿔서 말하면, 여자는 남자보다 초기에 3억 배 이상의 투자를 한다는 것이 된다(정자는 수정시 세포핵만 제공하며 모든 영양분(=세포질)은 모두 난자로부터 공급된다). 게다가 아이가 태어나도 수유/양육 기간으로 최소한 2-3년은 아이에게 매달려 있어야 한다(그러니 섣부른 임신은 여자의 인생을 때로 망치기에 충분하다).



 

 

 

경제학에서의 ‘숏다리 법칙’에 따르면 언제나 짧은 쪽이 유리하다('숏다리 법칙'은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에서 얻어온 것이다). 즉 사업에서는 같은 이익을 얻을 경우 적게 투자한 쪽이 유리하다. 때문에, 관계(=수정)를 갖기 이전에는 투자자(=여성)에게 별이라도 따다 줄 것 같던 남자도, 그 이후에는 간혹 배째라는 식으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배우자 선택에 있어서 여성이 보다 신중한 건 당연한 일이다. 여성의 성전략은 자신의 난자를 선뜻 내주기 전에 자신의 초기 투자 지분을 상쇄할 만한, 최대한의 정서적, 경제적 투자를 이끌어내는 것이다(달랑 정자만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럼으로써, 이 남자가 다른 데 또 한눈을 파느라 정서적, 경제적으로 부담을 무릅쓰느니 그냥 한 우물이나 파자고 눌러앉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즉, 사소한 일이다. 해서, 니체는 너무도 생물학적이다! 계속 읽어보자.

-“너무나도 달콤한 열매를 전사는 좋아하지 않는다. 바로 그 때문에 전사는 여인을 좋아하는 것이다. 아무리 달콤한 여인이라 할지라도 쓴맛을 내기 때문이다. 사내보다는 여인이 어린아이를 더 잘 이해한다. 그러나 사내와 여인 가운데 더 어린아이다운 것은 남자다. 진정한 사내 내면에는 어린아이가 숨어 있다. 그 아이는 놀이를 하고 싶어한다. 그러니 여인들이여, 사내 안에 숨어 있는 어린아이를 찾아내도록 하라! 여인은,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그런 세계의 여러 덕의 빛을 받아 반짝이는 보석처럼 순수하고 섬세한 놀잇감이 되어야 한다.”(그러니까 남자는 어린아이이고, 여자는 그 놀잇감이다.)

-“별의 광채가 너희들의 사랑 속에서 빛나기를! ‘나 위버멘쉬를 낳고 싶다!’ 이것이 너희들의 희망이 되도록 하라. 너희들의 사랑 속에 용기가 깃들여 있기를! 너희들은 사랑으로 무장, 너희들에게 공포심을 불어넣고 있는 자에게 덤벼들어야 한다. 너희들의 사랑에 너희들의 명예가 깃들어 있기를! 그렇지 않을 경우 여인은 명예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언제나 받는 사랑보다 더 많은 사랑을 할 일이며, 사랑을 하는 일에서 결코 둘째가 되지 말 일이다. 이것이 너희들의 명예가 되도록 하라.”(*아이를 낳되, 니체가 요구하는 바는 위버멘쉬, 즉 초인을 낳는 것이다.)

-“사내여, 여인이 사랑할 때 여인을 두려워하라. 사랑하는 여인은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기 때문이며, 그 밖의 모든 것들은 그에게 무가치하기 때문이다. 사내여, 여인이 미워할 때 여인을 두려워하라. 사내는 그 영혼의 바탕에서 사악할(bose) 뿐이지만 여인은 바로 그 바탕에서 열악하기(schlecht) 때문이다. 여인은 누구를 가장 미워하는가? 쇠붙이가 자석에게 이렇게 말한 일이 있다. ‘나 너를 더없이 미워한다. 너는 잡아당기긴 하면서도 이미 잡은 것을 놓지 않을 만큼 강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사내의 행복은 ‘나는 원한다’는 데 있다. 여인의 행복은 ‘그는 원한다’는 데 있다.”

 

 

 



남성은 사악하지만, 여성은 열악하다고 하는데, ‘열악하다’란 말은 보통 매우 빈궁한 처지를 일컫는 말이다(‘열악한 환경’에서 어쩌구저쩌구). 여기서 ‘사악한’과 대비되는 용어로는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여성은 바탕이 열악하니까 두려워해라?(그럴 경우, 보통은 안쓰러워 해야 정상이다.) 문맥상으로는 ‘사악한’보다 더 나쁜 말이 와야 하는데, 나는 ‘악질적’이나 ‘멍청한’ 중 어느 말이 거기에 더 합당한지 잘 모르겠다(*다른 번역서들을 보니까 '저열한'이라고 옮겨져 있다. 그게 타당하다). “사내의 행복은 ‘나는 원한다’는 데 있다. 여인의 행복은 ‘그는 원한다’는 데 있다.”에서는 주격 조사가 ‘는’에서 ‘가’로 바뀌어야 할 것 같다(*찾아보니까 그렇게 옮겨진 번역서들도 있다). 해서, “사내의 행복은 ‘내가 원한다’는 데 있다. 여인의 행복은 ‘그가 원한다’는 데 있다.” 이건 세상의 속설과도 일치하면서, 정신분석학적으로도 음미해볼 만한 문구이다. 말하자면 남성과 여성의 비대칭성에 대한 주장인 것이다. 그리고 이 비대칭성에 대한 최적의 문헌들은 <성관계는 없다>(도서출판b, 2005)에 실려 있다.

-“‘보라, 방금 세계는 완성되었다!’ 온 마음으로 사랑하여 순종할 때 여인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여인은 순종해야 하며, 그 자신의 표면에 대해 어떤 깊이를 찾아내야 한다. 표면은 여인이 정서, 일종의 얕은 물위에서 요동치는 격한 살갗이다. 이와 달리 사내의 심정은 깊다. 그리하여 그의 강물은 지하의 동굴 속으로 좔좔 소리를 내며 흘러간다. 여인이 이러한 사내의 힘을 짐작은 하겠지만 이해는 못한다.”(러시아어에서는 ‘정서’와 ‘심정’을 모두 ‘영혼’ 혹은 ‘넋’이라고 옮기고 있다. 이 경우 마지막 문장의 ‘사내의 힘’은 ‘그 영혼의 힘’이 된다. 어쨌든 여자의 정서, 혹은 영혼이 표면적이라는 말은 맞는 것 같다! 사소한 일들에도 어찌나 요동을 치는 것인지! 참고로, 다른 번역서들은 '마음'이라고 옮기며 나는 그게 더 마음에 든다.)

-이에 그 늙은 여인이 내게 대답했다. “좋은 말이다. 누구보다도 그런 말들을 받아들이기에 부족함이 없는 젊은 여인들을 위해서는. 기이한 노릇이다. 여인들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는 것이 차라투스트라인데도 그의 이야기는 옳으니! 그것은, 여인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 아닌가? 자, 감사의 표시로 이 작은 진리를 받아라! 그 진리를 터득하고 있을 만큼은 나 늙어 있으니! 그것을 천으로 감싸라. 그리고 그 입을 막아라. 그렇지 않으면 이 작은 진리는 너무도 크게 소리치게 될 것이다.”(*이 대목엔 사소한 오역이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여인들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는 것”이 아니라, “아는 여자가 별로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산에서 내려온 지 얼마 안 됐으니. 대신에 그는 여인들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다. 늙은 여인이 인정하는 바대로.)

내가 재미있게 생각하는 건 그 다음이다. 차라투스트라의 이야기가 옳은 것은 “여인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 아닌가?”라는 반문이다(러시아어본의 주석에는 이 말이 누가복음 1장 37절을 패러프레이즈한 것이라고 돼 있다). 늙은 여인의 이 말은, 내가 읽기에는, 여인들에 대한 차라투스트라의 모든 말을 ‘심연처럼’ 집어삼키고 있다. 여인들에겐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규정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서 무슨 말을 다 해도(=무어라고 규정하든 간에) 맞는 말이 된다는 얘기. 그렇다면, 차라투스트라는 여성이라는 ‘바다’에서 고작 헤엄치고 있었던 게 된다. 즉 그는 여인들에 대해서 많은 걸 알고 있지만, 그것이 결코 ‘전부는 아닌’ 것이다. 이제 마지막 문장.

-“여인이여, 내게 그 작은 진리를 다오!” 나는 말했다. 그러자 그 늙은 여인이 말했다. “여인들에게 가려는가? 그러면 채찍을 잊지 말라!”

이 채찍에서 다시 고병권의 <니체의 위험한 책>으로 돌아간다. "채찍 이야기나 나왔으니 말인데, 니체와 여성, 채찍이 함께 등장하는 사진이 하나 있다. 서로 미묘한 감정을 지녔던 니체, 살로메, 레 세 사람이 찍은 것인데, 니체와 레는 마차 앞에 말처럼 서 있고, 살로메는 채찍을 들고 마부 자리에 앉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아마도 니체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연출한 것일 텐데, 어떻든 채찍을 든 건 여성인 살로메고, 니체는 채찍을 맞을 말처럼 서 있다. 이건 또 뭔가? 그는 여성에게 휘둘러 달라고 채찍을 가져간 건가?"(195쪽)

이 물음에 대한 나의 견해는 지난 여름에 제시한 것과 같다. “여인들에게 가려는가? 그러면 채찍을 잊지 말라!”는 늙은 여인의 말을 다시 음미해본다면, 먼저 흥미로운 건, 이게 차라투스트라(혹은 니체)의 말이 아니라, ‘늙은 여인’의 말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진리’가 아니라 ‘작은 진리’라는 것이다. ‘작은 진리’라는 건 달리 말하면, 아직 (어린아이처럼) 미성숙한 진리이고, 부분적인 진리이며, ‘전부는 아닌’ 진리이다. 다시 이 단장의 처음으로 돌아가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진실을 말하거니와, 형제여! 그것은 내게 선물로 주어진 보물이다. 내가 지금 갖고 다니는 것, 그것은 작은 진리이다. 그런데 이 진리는 어린아이처럼 버릇이 없다. 그 입을 막지 않으면 너무 요란하게 소리를 질러대니 말이다.” 이때 그가 말하고 있는 ‘작은 진리’가 “여인들에게 갈 때는 채찍을 잊지 말라!”는 진리이다. 이 진리가 하도 요란하게 떠들어대기(혹은 빽빽거리기) 때문에 그는 이 진리의 입을 틀어막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5) 바로 이후에 발표한 <선악의 저편>(1886) 서문에서 니체는 “진리가 여성이라면, 어쩔 텐가?”(책세상 번역은 “진리가 여성이라고 가정한다면, 어떠한가?”)라는 도발적인 물음으로 시작하고 있다(독어로는 모르겠지만, 진리란 뜻의 러시아어 ‘이스찌나’의 문법적 성은 여성이다). 그러면서 철학의 모든 (남성적) 독단론은 “여전히 고상한 어린아이 장난이거나 신출내기의 미숙함에 불과하다고 단언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남성이 갖고 있는 (독단적) 진리는 어린아이의 진리이며, ‘작은 진리’이다. 그것은 고작 “여인들에게 갈 때는 채찍을 잊지 말라!”는 충고(그것도 자신이 발견한 진리가 아니라, 늙은 여인이 일러준 진리이다. 즉 그것은 늙은 여인에게 부탁해서 합법적으로 ‘도둑질한’ 진리이다)를 마치 ‘보물’처럼 모시고 다니는 자의 진리이다. 그 작은 진리(=어린아이)는 대문자 진리(=여성) 앞에서 안절부절이며 속수무책이다.

니체가 “진리란 무엇인가?”를 물을 때, 그 물음은 동시에 “여성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이며, 그것은 “여성은 무엇을 원하는가?”란 프로이트의 물음과 정확히 겹친다. 니체의 연보에 따르면, 아버지의 이른 사망(목사였던 그의 아버지 칼 루드비히 니체는 맏아들 프리드리히가 다섯 살 되던 해인 1849년에 사망한다)에 따라 여자들로만 둘러싸인 가정에서 양육된다. “아버지의 부재와 여성들로 이루어진 가정, 이 가정에서의 할머니의 위압적인 중심 역할과 어머니의 불안정한 위치 및 이들의 갈등 관계, 자신의 불안정한 위치의 심적 대체물로 나타난 니체 남매에 대한 어머니의 지나친 보호 본능 등으로 인해 그는 불안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며 이런 환경에서 아버지와 가부장적 권위, 남성상에 대한 동경을 품게 된다.”(560쪽) 그런 니체에게서 압도적인 자기규정은 ‘어린아이’이며, 그가 하는 모든 말은 ‘어린 진리’ 즉 ‘작은 진리’이다. “우리 프리드리히가 이런 말을 다 하네!”

그런 의미에서, 여성 철학자 뤼스 이리가레가 <프리드리히 니체, 바다의 연인>에서 니체에게 던지는 충고는 좀 잔인하다. “당신은 생산력이 하늘에서만 내려올 줄 알고 계속 위로만 올라간다. 정상인이여! 이것이야말로 주변 경관에 전혀 무관심한, 놀라울 정도로 순진한 모습이 아닌가!”(신경원, <니체, 데리다, 이리가레의 여성>, 162-3쪽, <텍스트>(2004, 4월호), 43쪽에서 재인용) 산의 정산에서 심연(=바다)을 들여다보는 차라투스트라, 혹은 니체는 이제껏 여자들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다가 가까스로 육지에 발을 딛고서 산으로 올라간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그의 나이 서른이 되던 해에 고향과 고향의 호수를 떠나 산속으로 들어갔다.”(12쪽) 그러니 주변 경관(=바다)에 대한 그의 무관심은 적극적인 관심의 결과이며, 필사적인 관심의 결과이다. 그런 그에게, 너는 ‘바다’를 잊고 있으니 다시 내려오라고?!

하지만, 니체가 정말로 바다를 잊은 건 아니었다. 아니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그의 삶에 각인돼 있는 것인데! 때문에, “심연으로 한없이 내려가길 두려워한, 여성의 육체를 심연에 매장해 둔 채 산의 정상으로만 오르려 한 우리의 초인은 조금 외롭지 않을까.”(<텍스트>, 43쪽)란 추정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산으로 올라간 자의 책이 아니라, 산에서 내려온 자의 책이기 때문이다. 즉 ‘몰락’을 자청한 자의 책이며, 다시 어린아이가 된 자의 책이다(“차라투스트라가 변하여 어린아이가 되었구나.”).

인간이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으로 정의하면서 그가 내세우는 것이 초인, 즉 위버멘쉬인바, 그는 무어라고 덧붙이는가? “보라, 나 너희들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이 위버멘쉬가 바로 너희들의 크나큰 경멸이 그 속에 가라앉아 몰락할 수 있는 그런 바다다.”(19쪽) 어떤 경멸인가? 행복에 대한, 이성에 대한, 덕에 대한 정의에 대한, 그리고 연민에 대한 경멸이다. 그 모든 크나큰 경멸이 가라앉아 몰락할 수 있는 그런 바다가 바로 위버멘쉬라는 것. 그리고 바다란, 여성이고 생명(의 고향)이지 않은가? 생명의 연쇄이지 않은가?..

 

 

 

 

"늙은 여인들과 젊은 여인들에 대하여"와 함께 '니체와 여성'의 기본 문헌은 <즐거운 학문>(<즐거운 지식>)의 제2판 서문이다. 고병권의 인용을 재인용하면 이렇다: "어쩌면 진리란 그녀의 이유를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는 것에 대해 이유를 가지고 있는 여자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녀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말하자면 바우보(Baubo)가 아닐까? 아, 그리스인들! 그들은 정말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생각이 깊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피상적이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되돌아 보아야 할 점이 아닌가?"(199쪽)

이에 대한 해설을 따라가본다: "여성들은 표면이 심층을 가리고 있는 게 아니라, 심층에 대한 열망이 표면의 다양성을 가리고 있음을 이해한다. 여성들은 표면에 얼마나 다양한 진리들이 반짝이고 있는지 이해한다. 아마도 여성들이 화장을 잘하는 것은 무엇보다 표면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표면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남성들만이 '화장발에 속았다'고 분개한다. 남성들은 무언가를 벗겨야 진실이 나온다고 생각하는데, 여성들은 그런 남성들의 기이한 욕망을 다스릴 줄 안다. 여성들은 저 깊은 심층까지도 껍질로 위장한 양파처럼 되는 것이다."(롤랑 바르트-라캉의 정의를 비틀면, 남성은 문체(style)를 갖고 있고, 여성은 문체 자체이다.)

 

 

 

 

그리고 바우보. "원래 바우보는 음란한 여신으로 여성의 생식기를 신격화한 것이다(*즉 버자이너이다). 어떤 학자들은 여성 생식기에서 어떤 규정으로도 좁힐 수 없는 '거리'의 개념을 발견한다. 그들에 따르면 여성은 자궁과 같다. 그것은 모든 것들을 발생시키는 비어 있는 공간이고, 일종의 거리이다. 여성은 거리를 두고 존재하는, 즉 공간 속에 있는 대상이 아니라, 그 거리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여성은 어떤 고유의 본질을 갖고 실존하지 않는다. 철학자들이 찾는 진리가 없듯이 고유한 여성성도 없는 것이다."(200-1쪽) 정신분석학에서의 명제를 반복하자면, "여성은 없다!(There's no such a thing like Woman!)"

계속. "하지만 바우보는 달리 이해될 필요가 있다. 자궁에서 강조될 것은 결핍이나 공허가 아니라 생산이나 창조이다. 자궁은 결핍의 공간이 아니라 넘침의 공간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자궁이 임신기관이기 때문이다. 여성에게 하나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게 불가능한 이유는 영원히 채울 수 없는 빈틈 때문이 아니라, 아무리 막아도 태어나는 새로운 아기들 때문이다. 임신한 여성에게는 하나의 정체성이 부여될 수 없다. 진리가 바우보인 이유도 그것이 임신한 여성이기 때문이다."(201쪽, 강조는 나의 것)

여기서 저자는 니체에게서 '임신한 여성'의 중요성과 임신 테마의 중요성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차라투스트라에게도 임신은 중요한 테마이다... 인간은 위버멘쉬를 낳을 수 있는가? 아마도 이 물음들은 이렇게 변형될 수도 있을 것이다. 너에겐 여성이 있는가? 너는 자궁을 갖고 있는가?(*요즘 어법에 따르면, "너는 난자를 갖고 있는가?") 너는 여성-되기를 할 수 있는가?" 정리하자면, 두 가지가 핵심이다. 차라투스트라-니체는 (1)임신과 관련해서 여성을 이해한다는 것과, (2)여성성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문제가 된다는 것. 니체는 한 메모에서 이렇게 적은 적이 있다고: "무엇이 내 삶을 유지시키는가? 그것은 임신이었다."(202쪽)



 

 

 

여기서 음미해볼 대목은 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바로 ‘몰락하는 자’로서의 인간에 대한 규정. 책세상판의 번역을 여기에 옮기면, “사람은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를 잇는 밧줄, 심연 위에 걸쳐 있는 하나의 밧줄이다. 저편으로 건너가는 것은 위험하고 건너가는 과정, 뒤돌아보는 것, 벌벌 떨고 있는 것도 위험하며 멈춰 서 있는 것도 위험하다. 사람에게 위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교량이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사랑받아 마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의 과정이요 몰락이라는 것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 줄을 모르는 사람들을. 그런 자들이야말로 저기 저편으로 건너가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21쪽)

우리들(=사람들)은 과거의 인간(=짐승)와 미래에 도래할 인간(=위버멘쉬) 사이를 연결하는 밧줄이고 교량이다. 우리의 존재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우리는 과정일 뿐이고 몰락일 뿐이며,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면 달리 살 줄을 모르는 자들이다. 처음에 지적한 바대로, 이것은 지극히 생물학적이고 진화론적인 존재 규정이다. 보다 확증적인 건 “아이와 혼인에 대하여”(116-9쪽)에서 읽을 수 있다(결혼과 출산을 앞둔 이들이라면 반드시 음미해 보아야 할 단장이다!).

-형제여, 여기 너만을 위한 물음 하나가 있다. 다림추를 내리듯 나 네 영혼 속에 그 물음을 내려본다. 네 영혼이 얼마나 깊은가를 알아내기 위해다. 너는 젊다. 그리하여 아이를 원하고 혼인을 원한다. 그러나 묻노니, 너는 한 아이를 원할 자격이 있는 그런 자인가? 너는 무적의 강자, 자신을 제압한 자, 관능의 지배자, 네 자신의 덕의 주인인가? 그것은 나 네가 묻노라. 그것이 아니라면 네 안에 짐승이 있고 절박한 욕구라는 것이 있어 그 같은 소망을 갖도록 하는 것인가? 아니면 외로움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네 자신과의 불화 때문인가?(*너는 한 아이를 원할 자격이 있는 그런 자인가!?)

-나, 네가 거두어들인 승리와 네가 쟁취한 자유가 아이를 갈망하기를 바라노라. 너는 너의 승리와 해방을 기리기 위해 살아있는 기념비를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너는 지금의 너를 뛰어넘어 저 위에 네 자신을 세워야 한다. 그럴려면 너의 신체와 영혼이 먼저 반듯하게 세워져 있어야 할 것이다. 앞을 향해서뿐만 아니라 위를 향해서도 생식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 혼인이라는 동산이 너를 돕기를 바란다! 너는 더욱 고상한 신체를 창조해내야 한다. 최초의 운동, 제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를 창조해야 한다. 창조할 자를 창조해야 한다는 말이다.(*네가 승리한 자라면, 너의 아이는 너의 승리를 기리는 ‘살아있는 기념비’가 될 것이다. 그러니, 삶에 복수하기 위해서 아이를 낳으면 안된다! 역설적이지만, 생물학에서는 거꾸로 규정된다. 아이를 낳은 자가 승리한 자, 즉 성공한 자이다. 성공한 자가 아이를 낳는 것이 아니라.)

-혼인. 그것을 나는 당사자들보다 더 뛰어난 사람 하나를 산출하기 위해 짝을 이루려는 두 사람의 의지라고 부른다(*이것이 결혼에 대한 니체의 정의이다). 이와 같은 의지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것으로서 서로를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 그것을 나는 혼인이라고 부른다(*그러니까 혼인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의 의지, 혹은 정념과 서로에 대한 존경이다. 나는 그걸 ‘사랑과 존경’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은 것이 네가 하는 혼인의 의미가 되고 진실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면 많은 너무나도-많은-자들(=어중이떠중이들), 존재할 가치가 없는 자들이 혼인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 아, 그것을 나는 어떻게 부를까?

-아, 짝을 이루고 싶어하는 영혼의 저 구차함이여! 아, 짝을 이루고 싶어하는 영혼의 저 더러움이여! 아, 짝을 이루고 싶어하는 영혼의 저 가엾은 자기만족이여! 이런 것 모두를 저들은 혼인이라고 부른다. 그러고는 말한다. 저들의 혼인은 하늘이 맺어준 것이라고. 좋다, 나는 존재할 가치가 없는 자들이 떠벌리고 있는 그 하늘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같은 천상의 그물에 걸려든 짐승들도 좋아하지 않고! 자기가 맺어준 것이 아닌데도 축복을 하겠다고 절름거리며 다가오는 신 또한 먼 곳에 물러나 있기를 바란다! 그렇다고 이러한 혼인을 비웃지는 말라! 어버이로 인하여 통곡할 까닭을 갖고 있지 않은 아이가 어디 있겠는가?(*아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을 것인가!)

-여기 이 사내, 품위 있어 보였고 또 대지의 뜻을 헤아릴 수 있을 만큼 성숙해 보였다. 그러나 그의 아내를 보자, 이 대지는 정신병원처럼 보이지 않던가. 그렇다. 성자와 거위의 결합, 나는 그때 이 대지가 경련을 일으켜 부르르 떨기를 바랬다. 그 성자는 원래 영웅과도 같이 당당하게 진리를 찾아 나섰었다. 그러나 결국은 화려하게 치장한 작은 거짓 하나를 노획하는 데 그쳤다. 그리고는 그것을 자신의 혼인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원래 사람들과의 교제에서 신중했으며 선택에서도 까다로웠다. 그런 그가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자신의 교제를 망쳐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고는 그것을 자신의 혼인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화장한 거위들을 주의해야 한다!)

-그는 원래 천사의 덕을 갖춘, 그런 계집종을 찾고 있었다(*간단히 말해서, ‘천사 같은 하녀’가 모든 남자의 이상형이다). 그러던 그가 졸지에 여자의 종이 되고 만 것이다(*“예, 부르셨습니까요, 마님!”). 이제 그는 그것을 넘어서 천사가 되어야 한다(*이건 좀 이상한 번역이다. 내용은 “이제는 그가 천사가 되어야 한다.”이다. ‘천사 같은 머슴’으로서의 남편!). 물건을 사는 사람들은 신중하기 마련이다. 그런 자들은 하나같이 교활한 눈을 갖고 있다. 그러나 더없이 교활한 자조차도 아내를 사들일 때는 자루를 열어보지도 않는다. 그 흔한 한때의 어리석음. 그것을 너희들은 연애라고 부른다. 그리고, 너희들은 혼인이라는 하나의 ‘긴 어리석음’으로써 그 흔한 한때의 어리석음에 종지부를 찍는다.(*제일 좋은 건 자루를 열어보고도 사지 않는 것이다.)

-여인을 향한 너희들의 사랑, 그리고 사내를 향한 여인의 사랑. 아, 이것이 고뇌하는, 감추어진 신들에 대한 연민이라면! 그러나 대개의 경우 두 마리의 짐승이 서로를 알아볼 뿐이다.(*‘신들의 교제’라면 좋겠지만, 혼인은 대개 ‘두 마리 짐승의 교미’로 마무리된다.) 너희들이 말하는 최상의 사랑이란 것도 하나의 황홀한 비유일 뿐이며 고뇌에 찬 열화일 뿐이다(러시아어 번역은 ‘병적인 격정’). 그것은 너희에게 좀더 높은 길을 비추어주도록 되어 있는 횃불이다(러시아어 번역은 “사랑이란 (그런 게 아니라) 횃불이어야 한다”는 식이다). 언젠가는 너희들 자신을 뛰어넘어 너희들 이상의 것을 사랑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먼저 어떻게 사랑을 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배우도록 하라! 그러기 위해 너희들은 사랑의 쓴잔을 마셔야 했던 것이다.(*언제나 쓴잔만 마시는 사람은 뭔가?)

-더없이 감미로운 사랑의 잔 속에도 쓴맛은 있다. 그리하여 그런 사랑은 위버멘쉬를 동경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너 창조하는 자를 목타게 하는 것이다. 창조하는 자의 목마름, 위버멘쉬를 향한 화살과 동경. 말하라. 형제여. 이것이 바로 너로 하여금 혼인하도록 만드는 의지인가? 나 이와 같은 의지와 혼인을 신성시하노라.(*즉 혼인에의 의지는 위버멘쉬에 대한 동경이다. 우리는 우리보다 더 나은 인간을 창조하기 위한 과정이고, 수단이다.)

다시 반복하자면, “진리가 여성이라면, 어쩔 텐가?”라고 니체는 물었다. 나는 그때의 진리가 다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여성의 수수께끼로서의 임신과 출산이다. “창조의 근원적인 힘의 원형이며 그것 자체인 여성의 출산을 대치하기 위해 고심한 끝에 위버멘쉬가 탄생했다”(<텍스트>, 43쪽)고 이리가레는 주장하는 모양인데, 내가 보기엔, 위버멘쉬는 출산에 대립하거나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이리가레와 데리다의 니체론을 아직 본격적으로 읽지 않았지만), 그것에의 전면적인 투항이다(니체 철학은 ‘아줌마 철학’이라고까지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그의 철학은 또 얼마나 유미적인가! 덧붙여 말하자면, 윤리학에서의 ‘아줌마 철학자’에 레비나스가 있다. 그에게서 궁극적인 타자의 모델 또한 ‘신생아’이다).

“여인들에게 가려는가? 그러면 채찍을 잊지 말라!”로 큰소리친 걸로 돼 있는 니체이지만(그마저도 늙은 여인이 일러준 말이었다!), 오히려 길들여진 건 여인들이 아니라 니체이다(그는 채찍을 들고 가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저를 길들여 주세요!”). 해서, 내 생각에 그가 말하는 위버멘쉬란 오직 남자들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즉, “남자들이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Superman이나 Overman도 다 마찬가지이다. 삶이 다른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라는 동경과 모험 속에서 아직도 장난치면서 놀이하는 어린아이-남자들이 극복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Superwoman이나 Overwoman은 불필요한바, 이미 그들은 ‘거기에’ 도달해 있기 때문이다. 즉 Wo-man으로 충분하다. 그러니까 Man과 Woman이 있는 게 아니라, Woman과 Woo-man(졸라대는 남자, 궁시렁대는 남자, 우둔한 남자)이 있을 뿐이다. 여자들의 목적은 이미 언제나 어린아이였기 때문. 그 핏덩이, 혹은 살덩이!


 

 

 

서양철학의 전통은 그 피와 살로부터의 고상한 거리두기였다(소크라테스는 “삶은 질병”이라고 말했다). 삶에 대한 부정과 이데아에 대한 동경(이건 무성(無性)의 철학이자 동성애 철학이다)은 언제나 어린아이에 대한 억압, 어린아이로부터의 도피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니체는 이걸 거꾸로 세운다. 진리란 여성이고, 바다이고, 위버멘쉬의 창조라는 것. 그 위버멘쉬를 낳을 때까지 우리의 삶의 과정은, 몰락의 과정은 영원히 지속되고 반복될 것이다. 하여, 카뮈를 패러디해서 말하자면, “참으로 진지한 생-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임신(=출산)이다. (이 남자의) 아이를 (또) 낳을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생의 근본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그밖에 다른 것들은 다 애들 장난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바, '바다의 연인'이자 아줌마 철학자 니체의 메시지이다.

고병권의 결론은 조금 다르다. "차라투스트라에서 여성성은 영원회귀와 같다. 그러나 '여성성'이라는 말조차 그리 적합해 보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차라투스트라의 여인은 생물학적 여성도 아니고, 특정한 어떤 정체성을 가진 존재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게 여성은 영원한 생성을 의미할 뿐이다. 남성에게도 여성에게도 '여성이 되는 것', '여성을 갖는 것'은 중요하다. 가장 나쁜 것은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불임증'에 걸린 인간이다."(208쪽, 강조는 나의 것)

 

"진리는 여성(바우보)이다"와 "진리가 바우보인 이유도 그것이 임신한 여성이기 때문이다"에서 얻을 수 있는 논리적 귀결은 "진리는 임신한 여성이다"이다(이것이 늙은 여인들과 젊은 여인들을 구분해줄 수 있는 준거이다). 나는 이러한 구체적/직설적 메시지와 "여성은 영원한 생성을 의미할 뿐이다"라는 다소간 추상적/비유적 메시지 사이에는 얼마간의 간극이 있다고 보며, 이 간극은 우리가 여전히 '니체의 진리'에 밀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내게 더 매력적인/파괴적인 철학자는 '영원한 생성'을 말하는 철학자 니체가 아니라 '진리는 임신한 여성'이라고 말하는 아줌마 니체이다. 이 문제는 '영원회귀'와 관련하여 나중에 한번 다루도록 하겠다...

 

05.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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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5-11-29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로쟈 님 스타일의 티저 광고군요.^>^

로쟈 2005-11-29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시간쯤 쓰던 페이퍼를 한번 날려버린 이후로는 수시로 저장하게 됩니다. 광고효과까지 겸한다면야.^^

2005-11-30 23: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5-12-01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한 논문을 읽으니 당대 진보적인 여성들은 저마다 자신을 '초인'이라고 생각했기에 니체의 '마초적' 발언들에 괘의치 않았다더군요...

아리 2009-06-03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30분에 읽는 도스토예프스키>(랜덤하우스중앙, 2005)를 읽었다. 이 '30분 시리즈'에서 <니체>와 함께 지난주에 구입한 책인데, 비록 만만한 분량이긴 하나 30분은 족히 더 걸리고 아마 1시간 정도는 투자해서 읽어야 할 분량. 물론 이런 가이드북에 큰 기대를 걸어서는 곤란하지만, 책은 기대보다는 잘 짜여져 있으며 저자 로즈 밀러의 식견 또한 여간한 수준은 아니다. 그는 주로 영어권 연구서들을 참조하고 있는데, 이래저래 알려주는 정보도 요긴하다. 국내에 소개된 책으로는 모출스키의 <도스토예프스키>(책세상, 2000)와 함께 읽으면 좋을 듯하다. 공부 요령이기도 한데, 어떤 주제나 인물에 대해서 좀 두꺼운 책과 얇은 책을 나란히 읽으면 '정리'와 '부연설명'을 동시에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한데, 번역 자체가 비교적 만족스러운 <니체>에 비하면 <도스토예프스키>는 몇 가지 오류가 눈에 띈다. 주로 러시아 인명과 관련된 것들인데, 직접적으로는 역자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은 그닥 참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어서 씁쓸하다(교정자도 안 읽었다는 얘기이고). 비근한 예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맏형 드미트리의 애칭이다. 영어 표기로는 'Mitya'가 되는데, 이걸 '미챠(미쨔)' 대신에 '미트야'로 옮긴 것. '카테리나'의 애칭 'Katya'는 마찬가지 방식으로 '카챠(까쨔)' 대신에 '카트야'가 돼 버렸는데, 좀 우스운 해프닝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친구였던 비평가 '스트라호프(Strakhov)'가 '스트라코프'로 옮겨진 것도 부주의하다. <도스토예프스키 읽기 사전>(열린책들, 2002)도 출간돼 있기 때문에 굳이 우리말 번역본을 직접 읽어보지 않더라도 고유명사 표기에서의 오류들은 피해갈 수 있었을 텐데, 그마저 참조하지 않은 것은 오만이거나 객기일 터이다.

또 그런 태도는 꼭 그 이상의 실수들을 낳게 된다. 책에서 여러 차례 인용되고 있는 연구서로 <도스토예프스키와 문학 창조과정>이 있는데, 역자는 그 저자를 '장 콕토'라고 옮겨 놓았다(86쪽 등). 터무니없는 오류인데, 'Dostoevsky and the Process of Literary Creation'란 연구서의 저자는 저자는 자크 카토(Jacques Catteau)이다. 원저는 불어이며, 저자 로즈 밀러는 영역본(캠브리지대 출판부, 1989)에서 인용하고 있다(원저는 불어권에서 나온 가장 유명한 도스토예프스키 연구서이다). 또 135쪽에서 <도스토예프스키 읽기(Reading Dostoevsky)>의 저자이자 저명한 러시아문학 연구자인 'V. 테라스(Victor Terras)'를 'V. 테릿'이라고 옮긴 것도 오류이다. 아울러 본문에서 거명된 연구문헌들의 국역본이 참고문헌란에서 많이 누락돼 있는 것은 아쉽다. 요즘처럼 정보검색이 편리한 시대에 이런 누락이 발생하는 것은 그저 성실성의 문제일 뿐이다.

이런 류의 가이드북을 읽으면서 내가 염두에 두는 것은 '만약에 내가 이런 책을 쓴다면'이다. 물론 관건은 분량이며, 얼마만큼 핵심을 압축해서 전달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물론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서라면 훨씬 두툼한 분량의 책을 써야하겠지만(나의 장기적인 목표는 2021년이다. 작가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 거기에 힌트가 될 만한 사항 하나. 92쪽에서 '자크 카토'를 인용하고 있는 대목: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고상한 인물들 중에서도 돈키호테는 가장 완성된 인물이다. 하지만 돈 키호테의 고상함은 그가 동시에 우스꽝스러운 인물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동시대 작가 투르게네프에게서 돈키호테가 햄릿과 함께 인물의 두 전형이었다면,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돈키호테의 짝은 그리스도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고상함'과 돈키호테의 '우스꽝스러움'을 동시에 구현하고자 했던, 세계문학사에서 아마 유례가 드문 작가이다. 물론 <백치>의 주인공 미슈킨(므이슈킨) 얘기이다. 사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자체가 진지함과 우스꽝스러움의 결합체이긴 하다. 그런 의미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세르반테스 이래의 산문문학 전통을 계승하고 있기도 하다. 그 전통을 가까이로는 고골로부터 이어받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나는 그러한 전통을 '파토스(pathos)의 문학'에 견주어 '바토스(bathos)의 문학'이라고 부르길 좋아한다.  

내가 '바토스'란 단어를 처음 본 건 나보코프의 <러시아문학 강의>에서였던 듯한데, 그는 고골 문학의 특이한 정서를 '바토스'란 말로 표현했다. '돈강법'이라고 옮겨지는 바토스는 "점차로 끌어올린 장중한 어조를 갑자기 익살스럽게 떨어뜨리기"란 (음악)기법을 뜻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파토스'에 상응하는 폭넓은 뜻으로 새기며, 그때 바토스는 고양된 정념과 익살의 혼종을 뜻하게 된다. 그리고 내가 경애해마지 않는 것이 세르반테스에서 고골로, 도스토예프스키로 이어져오는 바로 그러한 '바토스의 문학'이다.   

세르반테스와 같은 스페인어권에서 그러한 바토스를 가장 숭고하게 구현하고 있는 작품이 멕스코 영화의 거장 아르투로 립스테인의 <짙은 선홍색>(1996)이다(나는 지난 세기에 한 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봤는데, 이 영화가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는 것은 상당히 미스테리한 일이다). '내 인생의 걸작' 중 한편인데, 내용을 살짝 퍼오면 이렇다.

"뚱뚱하고 볼품없는, 게다가 입에서는 심한 구취까지 나는 간호사 코랄은 두 아이를 가진 과부다. 누군가의 관심이나 호감을 끌지 못하는 코랄. 그렇지만 누구 못지 않은 열정과 낭만을 내면에 갖고 있는 욕구불만의 여자다. 잘생긴 영화배우 샤를르 브와이에를 연모하는 코랄은 어느날 잡지에 실린 사교란에 자칭 샤를르 브와이에를 닮은 남자라는 니콜라스의 광고를 보고 가슴이 부풀어 편지를 쓴다. 샤를르 브와이에처럼 우아하고 매력적인 스페인 신사 니콜라스의 방문을 받은 코랄, 그녀는 한눈에 사랑에 빠져버린다. 그러나 실상 그의 정체는 빈털터리에다가 대머리를 감추기 위해 가발을 쓰고, 엉터리 스페인 억양을 흉내내어 돈많고 홀로사는 여자들을 꼬셔 돈을 뜯어내는 삼류 제비였다."

"뚱뚱하고 못생긴데다가 재산도 없고 두 아이의 엄마인 코랄은 당연히 니콜라스의 표적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갈 차비마저 없는 빈털터리인 니콜라스는 코랄과 하룻밤을 보내고는 그녀의 지갑을 훔쳐서 달아난다. 그리고는 이내 그녀에 대해서는 잊는다. 그러던 어느날, 코랄이 두 아이를 데이고 니콜라스를 찾는다. 당황한 니콜라스는 그녀의 청혼을 단호히 거절하고 코랄에게 엄마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라고 충고한다. 실망한 코랄은 니콜라스가 자신의 아이들 때문에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그길로 두 아이를 고아원 앞에 버리고 니콜라스의 집으로 돌아온다."(코랄이 엉엉 울면서 사랑을 위해 두 아이를 고아원에 버리는 장면은 압권 중의 하나이다.)

"니콜라스가 외출한 빈 집에서 코랄이 발견한 것은 자신과 똑같이 수많은 여자들에게서 온 편지와 사진, 그리고 NO가 그려진 자신의 편지였다. 코랄은 니콜라스의 과거의 의문스러운 약점을 잡아 니콜라스를 꼼짝 못하게 하고는 진심으로 사랑을 고백한다. 아이까지 버리고 자신만을 사랑한다는 코랄의 광적인 사랑에 감동받은 니콜라스는 그녀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이제 둘은 동업자가 된 것이다. 코랄은 니콜라스의 사업이 번창하도록 돕기로 하고 표적이 될 여자들을 직접 고른다. 그러나 사업이 무르익어 갈때마다 질투심에 눈이 먼 코랄은 순간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곤 한다. 이제 그들은 단순한 동업자가 아닌 피로 맺어진 불안하고 광적인 사랑의 동반자가 된 것이다." 결국은 형장에까지 이르게 되는 이 커플의 엽기 살인행각을 따라가는 로드무비가 <짙은 선홍색>이다. 그리고 그런 게 내가 말하는 '바토스의 영화'이다.

 

 

 

 

또 다른 사례로 가령 낭만적 동경의 상징인 '푸른 꽃'의 경우는 어떤가? 나는 그 동경의 대상을 '푸르죽죽한 꽃'으로 변형시킨 시를 써보기도 했는데, 이런 식이다.    

  푸른 꽃향기에 나는 중독 되었구나 나는 눈이 멀었구나

  그대 살을 맞댄 자리에 이렇듯 깊이 박힌 대못이여, 내 몸의 가시여, 횡재여

  어느 입에 발린 사랑이 또한 나를 놓고 통곡을 하랴, 가슴을 치며, 물 말아먹으며

  마음의 일용할 양식을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바대로 다 가져가리니

  가시를 묻은 자리에 피어나는 꽃들이여, 가시나무 꽃들이여

  너희의 다복한 일상에 어찌 찔리는 바 없지 않으랴

  우리가 서로를 아파하고 아프게 하며 이렇게 살아가는 음풍농월에 지화자,

  언젠가 햇빛 짱짱한 날에 백마 타고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우리를 

  개 패듯이 패리니

  그날에 마치 짙푸른 깻잎처럼 다시 푸르게 피어날

  목숨의 향연이여, 인과(因果)의 향연이여, 푸르죽죽한 꽃향기여!

 

여기엔 물론 노발리스의 '푸른 꽃', 이육사의 '광야', 니체의 '초인'의 어구나 이미지들이 혼종돼 있으며 그러한 혼종을 통해서 의도하는 효과가 '바토스'이다. 이 바토스는 파토스를 부정하면서도 보존한다는 점에서 변증법적 지양의 한 문학적 등가물이기도 하다. 언젠가 보다 체계적인 '바토스의 시학'에 바탕을 둔 도스토예프스키론을 쓰고자 한다. 그것이 내 인생의 한 목표, 즉 '푸르죽죽한 꽃'이다...

 

05.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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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29 15: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5-11-29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한때는 제 별명이 '개그맨'이기도 했습니다. 실없이 웃긴다고...

토마스 2005-12-07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짙은 선홍색>은 국내에서 개봉된 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