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나온 신간 <들뢰즈 커넥션>을 읽고 있지만, 아직 다른 책들이 다 차지 않은 까닭에 이 신간 소개 연재를 미루어두고 있었는데, 드디어 반가운 책이 한 권 나왔고 그걸 빌미로 50번째 '책 수다'를 시작한다(대개 너무 말이 없다는 얘기를 듣는 내가 유일하게 수다스러울 때가 책얘기들을 늘어놓을 때이다). 호기심에 언제 이 연재를 시작했는지 찾아봤더니 2002년 12월 20일로 돼 있다(*다시 확인해보니 10월이다). 대략 2년 8개월만에 50회를 채우는 건데, 작년 러시아 체류 기간을 제외한다면, 실질적으로는 1년 9개월 정도만이다. 이를 스스로 기념하여 맨처음 소개했던 책 다섯 권을 다시 꼽아본다.

 

 

 

 

지젝의 <향락의 전이> 개역판(인간사랑, 2002), 아렌트의 <칸트 정치철학 강의>(푸른숲, 2002), 에른스트 마이어의 <이것이 생물학이다>(몸과마음, 2002), 김상환의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창비사, 2002), 그리고 마지막으로 김동식 <프래그머티즘>(아카넷, 2002)가 그 다섯 권의 책들이다. 이 다섯 권의 책을 나는 모두 소장하고 있고, <이것이 생물학이다>와 <프래그머티즘>을 제외한 세 권의 책을 읽었다. <향락의 전이>의 원서는 내가 '지젝'에 빠져들도록 만든 책이면서, 동시에 그 번역본은 오역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도록 만든 책이다(오역의 진창에서 살아남는 일은 마치 전장을 방불하게 한다. 나를 단련시키지 않으면 살아남을/읽어낼 수 없었는바, 나의 독해력을 키워준 건 8할이 오역서들이다. 나의 친애하는 적들인 셈). 나머지는 모두 훌륭한 책들이다. 그런 책들과의 '첫'만남을 나는 이런 누추한 자리에서나마 기억해두고자 한다. 그것이 이 연재의 소임이다.

 

 

 

 

이번에 다룰 첫번째 책은 <이기적 유전자>로 잘 알려진 영국의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신간 <악마의 사도>(바다출판사)이다. 언젠가 드나들던 도킨스의 홈피에서 이 책이 출간된 2003년쯤에 이와 관련한 얘기를 얼핏 본 듯하다. 하지만, 러시아에 1년 가 있으면서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어느새 우리말 번역본이 '알아서' 출간된 것. 마치 생일선물을 받은 듯이 반갑다. 번역도 전문번역가의 작품이라 신뢰가 간다. 책은 일종의 에세이집인데(우리의 경우 최채전 교수가 잘 쓰는) 소개에 따르면 "지난 25년간 리처드 도킨스가 썼던 기고문과 연설문, 회고록과 논설문, 서평과 헌사 가운데서 정수만을 가려 뽑아 엮은 책"으로서 "다윈주의나 과학 전반을 다룬 글, 도덕을 다룬 글, 종교와 교육 및 진리와 과학사를 다룬 글, 개인적인 이야기를 쓴 글 등 종횡무진한 32편의 에세이가 담겨있다."

나는 <확장된 표현형>(을유문화사, 2004)를 제외한 그의 책들을 모두 읽었으며, 아직 번역되지 않은 그의 책 <풀리는 무지개(Unweaving the Rainbow)>는 원서로 갖고 있다. 그러니 애독자로서의 자격은 충분하다고 본다(<이기적 유전자>의 경우 나는 동아출판사에서 나온 초판 번역과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개정판 번역을 모두 읽었다). 그런 자격으로 도킨스 입문서를 들자면, 물론 <이기적 유전자>부터 읽어나가는 게 제일 간편한 지름길이지만, 분량이 많다 싶은 독자는 에드 섹스턴이 쓴 <도킨스와 이기적 유전자>(이제이북스, 2002)를 먼저 읽어볼 수도 있겠다. 그보다 좀더 시간을 투자할 수 있는 독자라면 킴 스티렐리의 <유전자와 생명의 역사>(몸과마음, 2002)도 유익하다. 책의 원제는 '도킨스 vs. 굴드'이니까 이 두 스타과학자에 대한 예비지식을 갖고서 읽는 게 좋겠지만(곁말을 덧붙이지면, 이 책은 알라딘에서 '도킨스'란 검색어로 뜨지 않는다. 어정쩡한 우리말 제목이 책의 성격을 드러내주지 못하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만하다. 책이 안 팔려도 당연한 일). 잠시 홍보를 하자면, 이 책은 "리차드 도킨스(Richard Dawkins)와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라는 두 석학의 주장을 통해, 지난 수십 년 동안 현대 진화생물학계에서 벌어진 논쟁을 다룬다." 읽어볼 만하다. 

反도킨스를 표나게 내세운다는 점에서 굴드와 한편에 서고 있는 이가 그의 동료 닐스 엘드리지인데, 도킨스가 못마땅한 이라면 그의 책  <우리는 왜 섹스를 하는가>(조선일보사, 2004)을 참조할 수도 있다(나는 아직 못 읽어봤다). 책의 부제는 '이기적 유전자의 성이론에 대한 반박'으로 노골적이다. 내 기억에 굴드와 엘드리지는 단속평형론이라는 진화론을 공동으로 주창한 것으로 유명한데, 이에 대한 도킨스의 반박은 <눈먼 시계공>(민음사, 1997)이 강력하다. 도킨스에 대한, <이기적 유전자>에 강력한 옹호로는 최재천 교수의 해제(동아일보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 해제)가 있다. 그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한 권의 책 때문에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이 하루아침에 뒤바뀌는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내게는 <이기적 유전자>가 바로 그런 책이다."

 

 

 

 

말이 나온 김에 인생관, 가치관을 조금 바꿔준 책 몇 권을 꼽아본다. 나대로의 대학 신입생 추천도서 목록인데(신입생이 제일 먼저 알아야 할일은 자신이 얼마나 '밥통'인가라는 사실이며, 가장 먼저 해야 할일은 비스듬히 고개를 숙여서 돌자갈 같은 관념들을 말끔히 비워내는 것이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을유문화사),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민음사), 듀란트의 <철학이야기>(문예출판사), <장자>(현암사) 등이 그것이다(장자의 경우는 특히 '내편'). 물론 이 목록은 들뢰즈식의 '연결접속'으로 계속 이어질 수 있다. 릴케의 <말테의 수기>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 같은 책들이 그 추가적인 접속의 대상들이다. 주체로서의 '나'는 그 책들이 통과해간 어떤 '자리'를 지칭할 따름이다. 이러한 목록에 한국책들이 앞자리에 놓이지 않은 것은 나의 '편식' 탓이겠다.  뭐하면, 대학 1학년때 제일 처음 읽은 책 중 하나인 정진홍 교수의 <종교학 서설>(전망사, 1984)을 슬쩍 올려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절판된 책이라 이미지는 비슷한 성격의 책 <종교문화의 이해>(청년사, 1995)를 가져왔다). 그런 책들을 읽었고, 읽고 있으며, 읽을 것이다.

    

 

 

  

두번째 책은 이미 언급한, 라이크만의 <들뢰즈 커넥션>(현실문화연구)이다. 역자의 기준대로 하자면, 저자 라이크만과의 인연은 나름대로 '깊은' 편이다(여기에 이어서 어제 한시간 반쯤 쓴 글이 날아갔다. 그때그때 '등록'을 안해둔 탓이니 할 수 없는 노릇이고, 다시 쓴다. 그래도 자존심이 있기 때문에 절반으로 줄여서 쓸 작정이다). 그가 쓴 <미셸 푸코: 철학의 자유>(인간사랑, 1990)을 (비록 원서는 아니었지만) 나도 읽었기 때문이다. 그 책은 드레피스/라비노우의 <미셸 푸코: 구조주의와 해석학을 넘어서>(나남, 1989)와 함께 가장 좋은 푸코 입문서로 꼽히던 책이다. 게다가 라이크만의 <진리와 에로스: 푸코, 라캉, 윤리의 문제>와 <들뢰즈 커넥션>의 원서를 진작부터 복사해서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다시 <들뢰즈 커넥션>의 번역서를 마주하게 되니 '감회가 남다르다.' 비록 들뢰즈의 사상에 대한 적절한 입문서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역자에 따르면 "이 책은 한국에서 중요한 입문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특히 예술과 미학을 다루는 6장은 이 책의 백미다. 들뢰즈의 철학은 바로 미학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직 6장까지 다 읽지 못했기 때문에(나는 현재 3장까지 읽었다) '백미'를 읽어본 소감은 아직 적을 수 없겠다. 하지만, 경험론과의 관계를 다룬 2장(실험), 3장(사유)은 충분히 읽을 만했다. 물론 역자의 '독자적인' 역어들에 먼저 익숙해져야 하는 애로사항은 감수해야 한다. '들뢰즈 전공자'의 번역으로 책의 표지도 훌륭하지만 책의 편제는 그닥 '프로'답지 않으며(너무 많은 외국어 병기가 오히려 가독성을 떨어뜨린다), 군데군데 오역(실수)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도 아쉬운 점. 이에 대한 자세한 검토는 나중에 다른 자리에서 다루겠지만, 일례를 지적하자면 이런 식이다.

52쪽에서 "들뢰즈의 독창성은(...) 철학에서 개념들의 고름이나 정합성이 있기 위해서는 문제들에 의존하게 되고, 이 문제들은 사물들이 동의에 '정착'해서 그 안에 지속적으로 머무르기 전에 도래하는 '바깥'에 의해 도입되었다고 말해다는 데 있다."고 돼 있는데, 원문은 이렇다: "An originality of Deleuze is (...) to say that the consistency or coherence of concepts in philosophy owes its existence to the problems introduced by an 'outside' that comes before things 'settle' into agreements and persists within them."(20쪽) 내용은 단순한데, 다만 역자는 'persists'의 주어를 '바깥(outside)'이 아닌 '사물들(things)'로 잘못 보았다. 다시 옮기면, "들뢰즈가 독창적으로 주장하는바, 철학에서 개념들의 일관성 혹은 정합성은 (철학의)'바깥'에 의해 제기되는 문제들에 빚지고 있다. 이 '바깥'은 문제가 동의점들로 고정되기 전에 도래하여 거기에 계속 존속한다." 

<들뢰즈 커넥션>과 함께 나온 책이 대담집 <디알로그>(동문선)이다. 라이크만의 책의 들뢰즈 저작 약어표에 보면, D(='Dialogues')로 돼 있는 책인데, 불어본은 1977년에 나왔고 나도 갖고 있는 영역본은 1987년에 나왔다. 기존에 번역돼 있는 <대담 1972-1990>(솔, 1994)과는 다른 책이며 분량도 얇다. 영미문학쪽 얘기가 많이 나왔던 걸로 기억된다. 이로써 들뢰즈의 책은 흄을 다룬 들뢰즈 최초의 저작 <경험론과 주체성>(1953)을 제외한 거의 모든 책이 번역돼 나온 듯하다(이 가운데 최악은 <비평과 진단>인데, 거기에 견줄 만한 책이 더 있는지 모르겠다).  

 

 

 

 

세번째 책은 칸트의 <윤리형이상학 정초>(아카넷). 나는 분량으로 보아 <도덕 형이상학>이 출간된 줄로 알았으나 목차를 보니 흔히 <도덕형이상학의 정초>로 불리던 그 책이다.  이 책은 물론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놓기>(책세상, 2002)로 번역돼 나온바 있다. 일반독자로선 <실천이성비판>의 다이제스트 정도로 이해하는 게 좋겠다. '다이제스트'란 말 그대로 보다 이해하기 쉽고, 소화하기 쉬운 책. 더구나 두 권에는 모두 자세한 '해제'가 붙어 있으므로 칸트 도덕철학에 대한 입문서로서 적격이라 할 만하다. 아마 '윤리형이상학'의 원어는 'Metaphysik der Sitten'이며, 흔히 'metaphysics of morals'로 영역된다. 그런데, 칸트에게서 '도덕'이란 게 우리가 생각하는 '도덕'과는 달리 실질적으론 '윤리'의 뜻을 갖는다(도덕과 윤리의 차이에 대해선 고진의 견해 참조). 역자인 백종현 교수는 그런 의미에서 아예 (기존의 번역관행과는 달리) '윤리형이상학'이라고 '의역'한 듯하다. 일리가 없는 건 아니나, 그 또한 칸트식의 어법이므로 나름대로 존중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라는 게 내 생각이고, 나로선 보다 친숙한 제목인 '도덕형이상학'에 더 애착을 갖는다. 이러한 칸트 윤리학에 대한 가장 '자극적인' 입문서는 내가 읽은 한도 내에서 고진의 <윤리21>(사회평론, 2001)과 주판치치의 <실재의 윤리>(도서출판b, 2004)이다. 후자의 부제는 '칸트와 라캉'이다.

 

 

 

 

네번째 책은 터키문학의 거장이라는 아샤르 케말의 작품집 <독사를 죽였어야 했는데>(문학과지성사)이다. 케말의 다른 작품이 번역된 것 같지 않으므로 최초로 소개되는 게 아닌가 싶다. 소개에 따르면, "표제작 '독사를 죽였어야 했는데'는 납치혼과 명예살인이라는 전통에 희생되는 여인의 삶을 아이의 시선을 통해 보여준다. 어머니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밖에 없었던 아이의 복잡한 심정과 처절한 가족사, 사람들의 질투와 증오가 간결한 문체로 그려진다. 치밀한 심리 묘사와 추진력 있는 전개가 돋보이는 작품." 명예살인, 혹은 복수를 다룬다는 점에서 당장에 연상되는 소설은 알바니아의 거장 이스마일 카다레의 <부서진 사월>(문학동네, 1999)이다. 역시나 "알바니아 북부 고원 지대에 남아 있는 관습법(카눈)의 전통을 소재로 인간 실존의 비극을 형상화한 장편 소설"로서 "소설의 중심 소재는 알바니아의 북부 고원 지대에 남아 있는 옛 관습법(카눈)의 전통이다. 카눈이란 고대로부터 전승되어온 알바니아 고유의 관습법으로 피는 피로써 갚는다는 것이 주내용이다." 문학작품을 많이 읽는 박찬욱 감독이 복수 3부작을 찍으면서 이 '변방'의 소설들을 참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복수의 색깔이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란 생각을 해본다(<올드보이>에서 이물감이 두드러지지만, '복수'는 한국적인 정서가 아니다. 그닥 '독한' 민족이 아니어서).


 

 

  

마지막 책은 '휴식' 같은 책으로 골랐다. 이란 영화의 거장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바람이 또 나를 데려가리>(디자인하우스). 소개에 따르면, "1970년대 말부터 2000년대까지, 영화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직접 촬영한 사진과 시를 수록"한 책이다. "흑백의 간결한 프레임 안에 그의 영화를 통해 익숙해진 이란의 다양한 자연경관을 담아"냈고, "시적인 정취를 드러내는 사진들 사이사이로 짧고 담백한 시들이 아련하게 등장한다"고 한다. 그의 영화들이 그렇지만, 고상하고 고답적인 '문자들'에 멀미가 날 무렵 마음을 비우는 의미에서 한번쯤 뒤적여볼 만하겠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 3부작에서 <체리향기>(이 영화를 아직 안 봤군)까지의 '소박한' 그의 영화세계는 한때 영화의 '오래된 미래'란 평을 듣기도 했다. 아마도 영화는 박찬욱의 복수 3부작과 키아로스타미의 이란 3부작 사이에서 좀더 진동하겠지만... 

05. 8. 24-25.  

P.S. <바람이 또 나를 데려가리라>의 영어제목은 'Walking with the Wind'이다. 바람과 함께 걸으며, 바람이 우리를 또 어딘가로 데려갈 때까지 오늘도 나한테 주어진 책들을 읽어가야겠다...

P.S.2. 케말과 관련하여 나귀님의 서재에서 퍼온 자료.

<메메드>(홍진주 옮김, 학원사, 1988 중판)

야사르 케말의 책으로는 아마도 국내 "최초" 번역본인 듯한 <메메드>. 모두 4부로 구성된 작품 가운데 제1부이다. 본래 이 책은 1982년에 주우(학원사) 세계문학전집 가운데 한 권으로 출간되었다. 지금 사진에 보이는 것은 훗날 단행본으로 "방법"해서 다시 만든 것이다. 이번에 나온 <독사를>의 작가 연보에는 "메메드"가 아니라 "메흐멧"으로 되어 있었다.
 
SEAGULL, (tr. by Thilda Kemal, NY: Pantheon Books, 1981)

터키에서는 1976년에 나온 소설이라는데, <메메드>와 <독사를>의 작가 연보에는 원제인 Al Gozum Seyreyle Salih 에 해당하는 작품이 없는 듯했다. 과연 무엇일꼬. (여기서 Salih 는 주인공 이름인 듯.) 표지에 US Army Young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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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8-24 23:04   좋아요 0 | URL
지금 크리스토퍼 노리스의 "데리다"를 읽고 있는데 수능만 끝나면 진화생물학(사회생물학)서적들도 좀 손을 봐야겄습니다. 로자님 책 소개는 늘 유익하네요.

비로그인 2005-08-24 23:04   좋아요 0 | URL
아참 저 그리고 질문이 하나 있는데 비트겐슈타인에 대해서 좀 자세하게 알려면 무엇을 읽는게 좋은가요? 박병철 교수의 개론서는 읽었는데 좀 아쉬운 점이 많아서...

로쟈 2005-08-25 12:26   좋아요 0 | URL
수능도 보기 전에 '데리다'를 읽는다구요? 천재신가 봅니다.^^ 비트겐슈타인에 대해선, 저도 아직 안 읽었지만, 전기 <천재의 의무>(문화과학사)가 평판이 좋은 책입니다. 번역에 대해선 잘 모르겠지만...

주니다 2005-08-25 16:45   좋아요 0 | URL
다음부턴 꼭 '등록'을 수시로 하시길...업데이트가 늦었던 사정이 있었군요.^^ 전 인터넷 게시판에 긴글을 쓸 때는 워드 프로그램에서 문서를 작성한 후 따다 붙이는 방법을 씁니다. 힘들여 쓴 글 날아가면 대책없이 슬퍼집니다.ㅜ.ㅜ 더군다나 이젠 기억력도 신통찮고...동문선에서 나온 '디알로그'는 이제 거의 본능적으로 걱정이 앞서는군요. 책값도 만만치 않습니다. 대단한 동문선...

로쟈 2005-08-25 17:12   좋아요 0 | URL
이미지 등록 때문에 알라딘에 바로 쓰는데, 가끔 그런 일을 당하게(!) 되네요.^^

armdown 2005-08-26 02:43   좋아요 0 | URL
지적하신 부분을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잘못되었다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더 정확시 지적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들뢰즈 커넥셕' 역자 올림.

yoonta 2005-08-26 02:44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스캔에 김재인님의 실수가 또 잡혔군요.. 번역의 꼼꼼함을 늘상 주장하시는 그분으로써는 상당히 뭐 팔리는 일이겠네요..^^ 내용상으로도 개념의 외부가 가지는 중요성을 말하는 부분인 것 같은데..김재인씨의 번역은 무슨 선문답같아서 도무지 알아 먹을수 없는 문장이 되어버렸군요..실수라고 하기엔 너무 사소하지 않은 부분에서 실수한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저런 문장들이 책 읽다가 가끔씩 튀어나와 버리면 돌아버리죠..(읽는 내가 머리가 나쁜줄 알고) ^^

yoonta 2005-08-26 02:46   좋아요 0 | URL
앗..그사이 역자께서 댓글을 다셨군요..로쟈님의 댓글을 기대하면서...^^

로쟈 2005-08-26 11:58   좋아요 0 | URL
역자께/ 제가 지적한 것은 아주 단순한데, "...'outside' that comes before things 'settle' into agreements and persists within them."에서, 반복하자면 persists의 주어가 번역하신대로 things가 아니라(그렇다면 동사가 3인칭 단수가 될 수 없겠죠) outside여야 하고, 문맥상으로도 그게 맞습니다. 사실, 오역은 번역의 '필요악'이며 다만 우리로선 언제나 긴장하는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다른 대목들은 책을 마저 읽은 다음에 지적하도록 하겠습니다...

armdown 2005-08-28 21:53   좋아요 0 | URL
지난번에 술먹고 써서 보이지 않았었군요. 명백한 오류네요. 번역을 수정하는 것이 맞겠습니다. "들뢰즈의 독창성은(...) 철학에서 개념들의 고름이나 정합성이 있기 위해서는 문제들에 의존하게 되고, 이 문제들은 사물들이 동의에 '정착'하기 전에 도래하여 그 안에 지속적으로 머무르는 '바깥'에 의해 도입되었다고 말해다는 데 있다." 번번히 신세(?)를 지게 되네요. 앞으로도 많은 질정 부탁드립니다.

einbahnstrasse 2005-08-29 03:13   좋아요 0 | URL
케말의 '메메드'가 80년대 초반에 번역되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로쟈 2005-08-29 11:39   좋아요 0 | URL
암다운님/ 신세(?)는 더 좋은 번역으로 갚으시면 되겠죠. <안티 오이디푸스>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앙겔루스 노부스님/ 케말의 다른 번역에 대해서는 몇 분이 지적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비로그인 2005-08-29 18:03   좋아요 0 | URL
오타 났네요.^^ 이스마엘 카다레는 "알바니아" 사람입니다.

로쟈 2005-08-29 18:16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테렌티우스 2006-12-09 15:21   좋아요 0 | URL
네 맞지요. 우리말 들뢰즈의 '디알로그'는 일단 다음을 번역한 책이고요
초판 Dialogues avec Claire Parnet. Paris, Flammarion, 1977, 184 p. ;
2판 2e éd. 1996, coll. « Champs », 187 p. ('L'actuel et le virtuel'에 대한 부록이 추가).

이전 솔 출판사의 '대담 1972-1990'은 다음을 번역한 것인데 잘 아시다시피 완역이 아니지요. 아래에 각 불어원본 및 우리말 번역본을 보시면 잘 알 수 있고요...

Pourparlers 1972 - 1990, Les éditions de Minuit, Paris, 1990.

‑‑‑‑‑ Table des matières ‑‑‑‑‑

I. De L’Anti-Œdipe à Mille plateaux :
1. Lettre à un critique sévère –
2. Entretien avec Félix Guattari sur L’Anti-Œdipe –
3. Entretien sur Mille plateaux

II. Cinéma :
4. Trois questions sur Six fois deux (Godard) –
5. Sur L’Image-mouvement –
7. Doute sur l’imaginaire –
8. Lettre à Serge Daney : Optimisme, pessimisme et voyage

III. Michel Foucault :
9. Fendre les choses, fendre les mots –
10. La vie comme œuvre d’art.
11. Un portrait de Foucault

IV. Philosophie :
12. Les intercesseurs –
13. Sur la philosophie.
14. Sur Leibniz –
15. Lettre à Réda Bensmaïa, sur Spinoza

V. Politique :
16. Contrôle et devenir –
17. Post-scriptum sur les sociétés de contrôle.

1. '반-외티푸스'에서 '천개의 세트'까지
1) 어느 가혹한 비평가에게 보내는 편지
2) '반-외티푸스'에 관한 이야기
3) '천개의 세르'에 관한 이야기

2. 영화
1) 상상에 대한 의혹
2) 세루쥬 다네에게 보내는 편지 : 낙관, 비관 그리고 여행

3. 미셸 푸코
1) 푸코의 초상화

4. 철학
1) 조정자들
2) 철학에 관하여
3) 라이프니츠에 관하여
4) 레다 벤마이아에게 보내는 편지 : 스피노자에 관하여

5. 정치
1) 통제와 생성
2) 추신 : 통제 사회에 대하여

로쟈 2006-12-09 12:16   좋아요 0 | URL
저도 두 책의 영역본을 따로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정리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작년 연말부터의 개인적인 인연 때문에 벤야민 얘기를 자주 하게 된다(<모스크바 통신>에 그런 내용들이 좀 들어가 있다). 또 자주 얘기하다 보니 남들에게는 어느새 유사-전문가처럼 비치기도 하는 모양이다(물론 나는 벤야민에 관한 유사-전문가적 ‘에세이’이라면 웬만큼은 쓸 수 있다). 하지만, 아도르노의 표현을 빌자면, “벤야민의 매력 앞에서는 자석처럼 끌리거나 몸서리치며 거부하는 것 외에 다른 도리가 없다.” 그러니 벤야민을 조금이라도 읽어본 독자가 벤야민이란 이름을 자주 들먹이며 벤야민 읽기에 나서는 것은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며 오히려 ‘자연현상’에 가깝다. 마치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비록 몸서리치며 거부하기보다는 ‘대세’를 따르기로 작정하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벤야민 읽기가 마냥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벤야민에 대한 짤막한 글을 한편 쓰기 위한 필요 때문에 최근에 몇 권의 벤야민 책을 뒤적거렸는바(“웰컴 투 벤야민베가스!” 참조), 물론 재미가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나로선 곤욕이었다. 이유는 물론 다소간 부적절하고 무성의해 보이는 번역들 때문. ‘벤야민’이란 원(原)텍스트 자체도 난해하다고 하지만, 거기에 ‘우리식 번역’의 불가해성까지 겹쳐지게 되면 웬만한 지력(知力)으로는 감을 잡거나 읽어내기 힘든 수준이 된다. 남들 수준의 웬만한 지력만을 소유한 나로선 당연히 버벅댈 일인 것이고. 해서, 그런 하소연을 담게 될 이 편지는 유감스럽지만 ‘즐거운 편지’가 아니라 ‘괴로운 편지’가 될 것이다. 

 


 

 

 

 

 

 

“웰컴 투 벤야민베가스!”에서 벤야민 읽기의 길잡이로 내가 제시한 텍스트들은 아도르노의 <발터 벤야민의 초상>과 아렌트의 <발터 벤야민>, 그리고 숄렘의 <한 우정의 역사>인데, 이 중 아도르노의 텍스트는 (물론 예상할 수 있는 바이지만) 깊이 있으면서도 상당히 난해하다(아렌트와 숄렘의 텍스트는 상대적으로 읽기 편하다). 짧은 글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역본을 참조하여 반나절 이상을 꼬박 투자해야 했다. 아도르노 전공자의 번역인 만큼 아도르노의 난해성은 십분 전달하고 있는 번역인데, 그런 만큼 좀더 읽기/이해하기 편한 번역은 될 수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나대로 읽기 편하게 고쳐 읽으려면 상당한 견적이 나오는지라 여기서는 그냥 한 대목만 지적하기로 한다.


국역본 <프리즘>의 276쪽. “이러한 강령은 그의 미완성 대표작에 대한 논평에서 다음과 같이 공식화되었다. ‘영원한 것은 아무튼 어떤 이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옷에 달린 한 조각의 레이스다.’” ‘미완성 대표작’이라는 건 <파사젠베르크> 곧,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인용문은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대한’ 논평이 아니라 <아케이드 프로젝트> ‘안에 들어 있는’ 벤야민의 메모/노트이다. 일부러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관련한 대목을 꼽았는데, 이런 식으로 조금씩 틀어지는 대목들이 국역본에는 너무 많이 들어가 있다.


가령, 288쪽에서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볼 수 있듯이 먼지나 플러시천 같은 최소한의 객체 혹은 초라한 객체들을 편애하는 그의 태도는 관습적 개념망의 그물코 사이로 빠져달아나는 것들, 혹은 지배정신이 너무도 도외시 하여 성그한 판단 이외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은 모든 것들에 매료되는 기술과 상호보완적이다.” 흔히 ‘대상(들)’로 번역될 단어가 왜 ‘객체(들)’로 옮겨졌는지는 의문이다(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최소한의 객체들’? 물론 ‘사소한 대상들’을 뜻할 것이다. 283쪽에서는 ‘사물화(reification)’을 ‘대상화’로 옮겨놓았는데, 물론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상식적이지 않다. 프루스트에게서의 ‘비의지적 기억(involuntary memory)’을 ‘본의 아닌 기억’(289쪽)으로 옮기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역시나 불가능하지 않지만 촌스럽다. 가뜩이나 복잡해서 각도가 잘 나오는 아도르노의 문장들을 독해하는 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그런 식으로 ‘갠세이’해서야 되겠는가?(해서 아도르노의 텍스트는 따로 브리핑을 필요로 한다.)

 

 

 

 

아도르노에 비하면 <맑스주의의 향연>의 저자 마샬 버먼은 아주 친절하며, 번역 또한 깔끔하다(‘맑스주의의 모험(Adventures in Marxism)’이란 원제가 ‘맑스주의의 향연’으로 바뀐 것은 이해할 만한 조처이다. ‘모험’이란 표현이 혹시나 反맑스주의적 함의를 전달하지 않을까 우려되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런 ‘모험’을 감수하지 않은 것이 바람직한 선택이었는지는 의문이다). 비록 벤야민을 다루고 있는 12장에서 서평대상으로 삼고 있는 3권의 책 가운데 두 권은 국내에 소개돼 있지 않지만(한 권은 하버드대학에서 새로 나온 선집의 1권이다) 신뢰할 만한 저자 버먼은 능숙한 솜씨로 벤야민에 관한 상당히 많은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가령, 벤야민의 ‘유별난’ 파리(프랑스) 애호증에 대해서 버먼은 (벤야민 자신은 소원한 관계로 간주했지만) 아버지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본다. “벤야민의 인자한 아버지는 파리에 산 적이 있을 뿐만 아니라, 베를린 집에서도 늘 파리에서 사는 것처럼 지냈다. 그 결과 벤야민은 별다른 노력 없이 프랑스의 언어와 문화에 통달했다.”(335쪽) 그리하여 “하이네 이후 프랑스 문화 속에서 이처럼 철저하게 편안함을 느낀 독일인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런 개인사적 맥락 외에 버먼은 독일과 프랑스 간의 역사적 맥락 또한 짚어준다. “프랑스 계몽운동 이후 프랑스혁명 이전까지 적어도 두 세기 동안, 파리는 조상 대대로 독일의 다른 한 쪽이었다.” 마지막은 구절은 “Paris has been Germany's ancestral Other.”를 옮긴 것인데, “파리는 조상 대대로 독일의 타자였다.” 정도가 낫겠다. 여기서 ‘타자(Other)’란 쉽게 말하면 “나에게 없는 걸 갖고 있는 놈”을 뜻한다: “독일인들은 언제나 파리를 자기들에게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 두 가지의 주요한 근원으로 여겨왔는데, 섹스와 유행이 그것이다.”(336쪽) 여기서 ‘섹스와 유행’은 ‘Sex and Style’을 옮긴 것이다(하긴 독일은 자동차는 잘 만들지만, 우리 생각에도 포르노나 란제리와는 인연이 없어 보인다).


해서 “수많은 독일 고유의 정치학(독일 사상에서 창조적이며 풍성한 것, 그리고 망상적이며 위험한 것)은 섹시하고 멋들어진 친구 바로 옆집에 사는 고상한 얼간이라는 독일 국민의 집단적인 불쾌감에서 생겨난다.”(참고로, 이와 유사한 지적은 <낭만주의의 뿌리>에서 이사야 벌린도 반복하는데, 벌린은 역사적 낭만주의의 발상지가 독일이며 그 뿌리는 독일 국민의 집단적인 열등감이라고 주장한다.)


거기서 다시 벤야민으로 돌아오면, 자, “자신을 독일 토박이 얼간이로 여기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독일인답지 않은 멋쟁이로 인정받는 벤야민이라는 사람을 상상해보라. 이 독일인은 자신이 최선을 다해 따르려 했다고 생각한 독일 문화와 왜 조화하지 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내내, 벤야민은 독일 문화를 독일인보다 더 잘 아는 유태인이며, 또한 ‘계몽의 도시’(=파리)에 훌륭하게 적응하고 자기 집처럼 너무 편하게 지낸 멋쟁이라고 미움을 샀다.”(336쪽) 자주 언급되는 벤야민의 양가성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비록 눈이 휘둥그래지는 파리에서는 촌뜨기/얼간이였지만, 베를린에서는 멋쟁이로 통할 수 있었던 것. 그런 의미에서도 그는 ‘걸어다니는 모순덩어리(a walking contradiction)’였다.


버만이 벤야민의 전기에서 또 한 가지 강조하는 것은 젊은 시절 가장 절친했던 친구이자 시인이었던 프리츠 하인레의 자살과 그에 대한 벤야민의 (찬양적) 태도이다. 이것을 그는 1940년의 자살과 연관지어 생각한다(벤야민은 이전에도 자살을 기도한 적이 있다). 흥미로운 건 자살에 대한 태도를 기준으로 하여 벤야민과 루카치를 비교해볼 수 있다는 버만의 제안이다: “벤야민과 루카치를 비교해볼 만한 한 가지 방법은 둘 다 젊은 시절에 자살을 모면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두 사람은 모두 자신에게 대단히 소중한 사람이 죽었을 때 몹시 좌절했다. 하지만 루카치는 자신이 늘 자책했던 첫사랑의 자살을 조금도 현명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 반면 벤야민은 가장 친한 친구의 자살을 언제나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것으로 본다.”(349쪽 각주1) 이러한 지적은 매우 시사적인데, 나는 그런 관점에서 루카치와 벤야민을 비교하는 글을 구상중이다(더 잘 쓸 수 있을 버만이 아직 쓰지 않았다면).

 


이런 유익한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는 <맑스주의의 향연>의 번역은 별로 흠잡을 구석이 없다(다른 번역들이 이 정도만 되더라도 ‘읽을 만한’ 세상이다!). 옥의 티라면 ‘문학 상식’이 약간 부족한 것. “도대체 어떻게 벤야민이, 그 사람들은 자신을 자기들의 성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체스판의 기사 이상으로 여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341쪽) 원문은 “How could Benjamin have thought that these people would see him as any more than K. trying to break into their Castle?”(246쪽) 여기서 암시적으로 비유되고 있는 것은 카프카의 소설 <성>이고, K는 그 소설의 주인공 건축기사이다. 역자는 아마도 K를 Knight(기사)의 약자 정도로 보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break into'는 ‘무너뜨리다’가 아니라 ‘침입하다’란 뜻이다.


‘문학 상식’ 운운하는 것은 내가 읽은 다른 장들에서도 그런 류의 오역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기병대>의 러시아 작가 ‘이삭 바벨(Isaac Babel)’을 ‘아이작 바벨’로 옮긴 것도 그렇고, 루카치를 다룬 장에서 <죄와 벌>에 등장하는 라스콜리니코프의 친구 ‘라주미힌(Razumikhin)’을 ‘라주미킨’으로(각주에서는 한술 더 떠서 두 번이나 ‘라추미킨’으로) 옮긴 것도 사소하지만(?), 인명(人名) 경시의 사례들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런 정도면 ‘괴로움’을 말할 수 없다. 애초에 내가 ‘괴로움’이란 표현으로 염두에 둔 책은 질로크의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이다. 전공자가 옮긴 데다가 외견상 아주 얌전해 보이는 책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인가? 내가 문제삼고 싶은 것은 이 번역의 ‘무지함’이라기보다는 ‘무성의함’인데, 그 ‘무성의함’이라는 게 어떤 걸 말하는 것인지 좀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시간상/분량상 다른 자리를 마련하겠다...

 

05. 0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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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불우했던 천재 비평가 발터 벤야민(1892-1940) 붐이 일고 있다. 그의 미완의 주저 <아케이드 프로젝트>(새물결, 2005)가 ‘드디어’ 번역/출간됐고(최근에 절반이 나온 이 책의 나머지 절반은 11월에 나온다고 한다), 곧 10권짜리 우리말 벤야민 선집도 연말부터는 선보일 예정이라고 한다. 바야흐로 ‘벤야민의 세기’가 준비되는 것인가?

 

 

 

사실, 이러한 벤야민 붐은 서양이나 일본 등지에서는 진작부터 시작된 것이므로 특별히 한국적인 현상은 아니다. 우리도 이제 그러한 물결에 발을 담글 수 있게 된 것일 뿐. 해서, 자신이 즐겨썼던 말이지만, 그의 ‘사후의 삶’(afterlife)은 더 이상 불우해보이지 않는다. 비록 “수줍음 많고 숫기 없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자신의 바람대로 20세기 독일 최고의 문학비평가로 평가되는 한편, ‘도시맑스주의’의 선구적 이론가로 자리매김되고 있는 상황이라면 싱긋 미소를 지을 만도 하지 않을까.

 

 

 

입소문이 아니라 본격적인 번역을 통해서 우리에게 처음 벤야민이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80년 차봉희 교수 편역의 <현대 사회와 예술>, 그리고 1983년 반성완 교수 편역의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민음사)이 출간되면서부터이다(1985년엔 베르너 풀트의 전기 <발터 벤야민>(문학과지성사)이 소개되었다). 이제 25년쯤의 역사를 갖고 있는 셈인데, 이 시기 ‘벤야민’의 간판 노릇을 한 것은 아마도 그의 가장 유명한 논문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었다. 해서, ‘벤야민=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란 등식이 통용되던 이 시기의 우리에게 벤야민은 친구인 아도르노에게 영감을 준 문학비평가이자 동시에 매체(미디어) 이론가였다.


벤야민 수용사의 두번째 단계는 1992년 벤야민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박설호 교수의 편역으로 <베를린의 유년시절>(솔출판사)이 출간되면서 시작된다(거기에는 벤야민의 박사학위논문인 <독일 낭만주의에서의 예술비평의 개념>이 포함돼 있었다). 이를 통해서 벤야민의 예술론을 더욱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는 마련되었지만, ‘새로운 벤야민’, 즉 도시 이론가 혹은 도시 ‘관상학자’로서의 벤야민의 모습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단계이다(<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에는 물론이고, <베를린의 유년시절>에 실린 ‘발터 벤야민 연보’에도 ‘파사젠베르크’, 곧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관한 내용은 전혀 들어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전설로만 남아 있다가 뒤늦게 발견되어 독일에서도 지난 1982년에서야 전집에 묶여 출간될 수 있었던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우리말로도 소개됨으로써 우리의 벤야민 수용사는 세번째 단계에 진입하게 되었다. 근년에 나온 벤야민 관련서들이 조명하고 있는 것도 대부분 이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관련되는바, 한마디로 “발터 벤야민, 도시를 산책하다”를 주제로 하고 있다.


어떤 도시들인가? 나폴리, 마르세유, 모스크바, 베를린, 그리고 파리 등이 그가 산책하면서 읽고/쓰고 있는 주요 도시들, 아니 도시-텍스트(city-as-text)들이다. 현대성의 상징인 이 도시-텍스트들을 재료로 하여 그가 계획했던 것, 하지만 미완으로 남겨놓은 것이 텍스트-도시(text-as-city)라는 ‘유례없는’ 텍스트로서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이다. 우리의 책상머리에 놓여 있는 것 말이다. 이렇게 말을 건네면서: “웰컴 투 벤야민베가스!”(Welcome to Benjamin Vegas!)


여기서 나의 몫은 아직 다 둘러보지도 못한 벤야민베가스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벤야민베가스로 떠나기 위한 간단한 로드맵을 제시하는 것이다(나는 ‘가이드’가 아니라 ‘스토커’다). 무작정 떠나보는 것도 여행의 한 가지 방법이긴 하지만, 뭐라도 한 장 들고 가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하기 때문이다. 혹 경제적/시간적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벤야민의 유태인 세 친구의 ‘보고서’를 길잡이 삼아 미리 훑어볼 수도 있겠다.


아도르노가 쓴 <발터 벤야민의 초상>(<프리즘>, 문학동네, 2004)과 한나 아렌트가 쓴 <발터 벤야민>(<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문학과지성사, 1983), 그리고 게르숌 숄렘이 쓴 <한 우정의 역사: 발터 벤야민을 추억하며>(한길사, 2002)가 그것들이다(아렌트의 글은 벤야민 선집 <일루미네이션>의 영역본 서문으로도 수록돼 있는데, 이 책의 우리말 번역본은 <문학비평과 이론>(문예출판사, 1987)이다). 물론 이들을 참조하는 건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다(참고로 말하자면, 아도르노의 글은 꽤 난해하다. 아도르노와 숄렘은 1955년에 나온 최초의 <벤야민 전집>(2권)을 편집하기도 했으니 벤야민 생전에나 사후에나 ‘최측근들’이라 할 만하다).

 


 

 

 

 

 

내가 나름대로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마샬 버먼의 <발터 벤야민 - 도시의 천사>(<맑스주의의 향연>, 이후, 2001)부터이다. 1996년에 영어로 발간된 벤야민 관련서 세 권에 대한 서평 형식으로 씌어진 이 글은 짤막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벤야민의 전기적/사상적 맥락을 잘 짚어주고 있다. 그러면서 1999년에 발간된 영어본 <아케이드 프로젝트>(하버드대출판부)를 예고하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벤야민에 대한 버만의 평가: “나치와 자기 자신의 파멸의 느낌이 자신을 죽음으로 이끌 때조차 벤야민은 독자들에게 길거리에서 춤추는 법과 현대 세계에 대한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법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결론: “벤야민이 센트럴 파크에서 춤추기에는 너무 늦었지만, 우리가 춤을 추면서 벤야민을 기억하는 것은 그다지 늦지 않았다.”(348쪽)


‘19세기 세계수도로서의 파리’를 베를린보다도 사랑했던 벤야민이 1940년 스페인 국경에서 자살하지 않고 미국으로의 망명에 성공했더라면 이후에 ‘20세기의 세계수도 뉴욕’도 사랑하게 됐을까? 자본주의적 환락의 도시, 라스베가스는?(라스베가스에 처음 카지노가 들어선 것은 1941년이라고 한다.) 그런 의문은 ‘도시맑스주의’(Metromarxism)란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지리학자 앤리 매리필드도 던지고 있는데, 그가 짐작하기에 “벤야민이 20세기 후반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면, 그 역시 전(前) 뉴욕 시장인 줄리아니의 보도(步道) 개혁을 혐오했을 것이고, 노숙자와 노점상, 무단횡단자, 그리고 뉴욕의 노변에서 어슬렁거리는 거주자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에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161쪽)


당연한 일이지만, 매리필드의 <매혹의 도시, 맑스주의를 만나다>(시울, 2005)의 한 장은 “자본주의 도시를 세속적 계몽이나 혁명 속의 혁명적인 것인 것으로, 또한 신뢰할 만한 빛의 도시로 평가한 최초의 맑스주의자”, 아니 “아마도 20세기 가장 위대한 도시맑스주의자”, 벤야민에게 바쳐지고 있다(유감스럽게도 우리말 번역본은 많은 오역을 포함하고 있다). 그는 맑스주의 연구를 통해 도시를 연구했던 엥겔스와는 달리 도시 연구를 통해서 맑스주의를 연구했던 벤야민의 ‘도시맑스주의’를 그의 전기적 맥락 속에서 명쾌하게 해명하고 있다.   


 

 

 

 

 

각각 ‘도시의 천사’ 벤야민, ‘도시맑스주의자’ 벤야민을 화두로 하고 있는 버먼과 매리필드의 글이 말하자면 워밍업이 되겠다. 거기에 이어서 ‘벤야민과 도시’란 주제에 대해서 보다 포괄적이면서도 자세한 안내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건 그램 질로크의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효형출판, 2005)이다. 특히, 서론과 결론은 전체적인 윤곽을 그리는 데 아주 유용한데, 마치 63빌딩의 전망대 같은 역할을 해준다(유감스럽게도 우리말 번역본은 몇 군데 부정확한 대목을 포함하고 있다).


질로크가 셈하고 있는 벤야민의 도시풍경 연작들은 1924년에 씌어진 <나폴리>를 기점으로 <모스크바>(1927), <바이마르>(1928), <마르세유>(1928), <파리, 거울 속의 도시>(1929), <산 지미냐노>(1928), <북해>(노르웨이의 베르겐시에 대한 스케치, 1930) 등을 포함하며 이들은 ‘사유이미지’로 통칭된다. 물론 19세기 파리에 바쳐진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이 ‘사유이미지’의 총결산이다. 질로크는 이러한 도시풍경을 관상학, 현상학, 신화, 역사, 정치, 텍스트라는 6개의 범주, 혹은 키워드로써 갈무리한다. 

 

그가 보기에 벤야민의 도시풍경은 “맑스주의적 전통에 비판적으로 개입하는” 벤야민만의 아주 독특한 방식이다. 벤야민은 현대성과 현대적 삶의 중핵으로서의 도시를 사랑했고 또한 혐오했다. 도시는 그에게 매혹의 대상이자 동시에 구원의 대상이었으며, 천국이자 지옥이었다. 질로크의 표현을 빌면, 벤야민은 ‘걸어다니는 모순’이었는바, 현대성의 비판과 구원이라는 벤야민 텍스트의 힘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그러한 모순 속에서이다.  


질로크의 책을 통해서 벤야민 프로젝트의 전체적인 윤곽에 대한 브리핑을 제공받았다면, 이제는 벤야민의 아케이드, ‘벤야민베가스’를 직접 거닐어볼 차례이다. 여기부터는 수잔 벅 모스의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문학동네, 2004)를 지참하는 게 좋겠다. 그녀는 벤야민의 프로젝트가 나폴리(남쪽)와 모스크바(동쪽), 베를린(북쪽), 파리(서쪽)라는 네 개의 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본다. 나폴리에 관한 짧은 텍스트인 <나폴리>는 아직 우리말로 번역돼 있지 않지만(이에 대한 해설은 질로크와 매리필드를 참조), 모스크바에 관한 텍스트 <모스크바 일기>(그린비, 2005)는 올해초에 소개된바 있다. 베를린 텍스트를 구성하는 것은 <베를린의 유년시절>과 <베를린 연대기> 등이며(전자가 번역돼 있다), 가장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파리 텍스트가 바로 <아케이드 프로젝트>인 것.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말 그대로 ‘수집가’ 벤야민이 마지막 열정을 다 바쳐서 모아놓은 자료들의 거대한 묶음이자 몽타주 재료들이다. 요컨대, 도시 자체이다(그래서 ‘텍스트-도시’이다). 벤야민이 사랑했던 파리의 아케이드는 현대성의 환상(판타스마고리아)이 가장 극적으로 구현된 매혹의 장소이며, 또한 그러한 환상으로부터 우리가 깨어나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횡단)해야 하는 공간이다. 벤야민이 보기에 이 도시의 바깥, 현대성의 바깥에서는 현대성에 대한 비판도 구원도 가능하지 않다. 오직 우리를 찌른 창만이 우리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것처럼 도시의 ‘경험’만이 우리를 도시의 환상으로부터 구제해줄 수 있다. 이것이 벤야민의 변증법이며, 그가 우리에게 텍스트-도시의 경험을 제안하는 이유이다. 자, 저것이 우리에게 손짓하는 텍스트-도시, 벤야민베가스의 입구이다. 판돈과 배짱이 충분하다면 한번 들어가 보시라! 나의 동행은 여기까지이다...  

 

 

 

 

 

 

 

05. 08. 20-22.

* 이 글은 북매거진 <텍스트>에 기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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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8-20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국이자 지옥이었던...
저에게 공부할 한 가지 일이 더 늘었군요.

여울 2005-08-21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오늘 도서관에서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들었다 놓았다하며 결국 빌리지 못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쯧~. 벤야민 가지치기가 많군요. 이거 어쩐다. 까이거 대충 글을 따라 설명글 많은 것....몇권 꼭 훑어야 쓰것네요. ..ㅎㅎ

로쟈 2005-08-22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충, 까이거 읽어야 할 게 좀 많습니다--;
 

 

 

 

 

최근에 나온 책으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독일의 20세기 최고비평가로 꼽히는 벤야민의 '주저'이자 미완성 수고 <아케이드 프로젝트>(새물결)이다. 일찍부터 '소문'은 무성했던 책인데, '드디어' 출현한 것. 지난주 아무런 예고도 없이 구내서점에 책이 들어온 걸 보고 잠시 놀랐는데, 한국어판은 4권으로 분권돼 나올 예정이라고(4권이 양장본을 기준으로 한 것이라면 분권으로 나오는 반양장본은 8권이 될 것이다). 아마도 최근 몇 년간 출간된 인문학 번역서로서는 가장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지 않을까 싶다. 하니, 의당 친절한 안내서의 도움이 필요할 텐데, 그런 도우미로 정평있는 책이 수잔 벅 모스의 <시각의 변증법>이고, 알다시피 이건 이미 작년에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문학동네)란 제목으로 출간됐다. 그만하면 풍성한 식탁이다.

간혹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번역에 대해서 불만을 표시하는 이들이 내 주변에도 있는데, 인문서 번역의 평균적인 '실상'을 잘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투정'에 불과하지 않나 싶다. 원저와 대조해서 읽어본 이라면 알겠지만, 번역하기 까다롭지만 역자가 나름의 수완을 발휘한 대목들을 적잖이 찾아볼 수 있다. 내가 100여 쪽을 읽으면서 발견한 가장 두드러진 오역은 다음의 한 대목뿐이다(나머지는 사소하다). 91쪽의 맨마지막줄, "테크놀로지가 약속하는 '새' 자연에 대한 극단적 낙관 그리고 역사의 흐름에 대한 총체적 비관 - 이것이 없다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결코 선사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 이것은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모든 단계를 특징짓는 중요한 경향이다."(강조된 부분이 오역이다) 

내용상으로도 아주 '중요한' 대목인데, 원문은 이렇다: "Extreme optimism concerning the promise of the 'new' nature of technology, and total pessimism concerning the course of history, which without proletarian revolution would never leave the stage of prehistory - this orientation characterizes all stages of the Arcades project."(64쪽, 강조는 나의 것) 내용은 '극단적인 낙관주의'와 '총체적 비관주의'가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모든 단계를 특징지어준다는 것인데(도시 혹은 아케이드에 대한 벤야민의 매혹은 언제나 양가적이다), 역자는 'which without' 'without which'로 잘못 봄으로써 엉뚱한 오역을 범하고 말았다. 다시 옮기면, "'새로운' 성격의 테크놀로지가 약속하는 바에 대한 극단적인 낙관주의와 역사의 전개과정에 대한 총체적인 비관주의(역사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없다면 내내 선사적 단계에 머물게 될 것이다), 이것이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전 단계를 특징짓는 방향성이다." 이건 물론 사소한 실수이지만, 결과는 좀 문제가 되는 오역이다. 다행스러운 건 그래도 이런 오역이 거의 드물다는 것이고, 우리의 번역 현실에서 이 정도는 감수할 수밖에 없다.   

어떤 '현실' 말인가? 가령, 작년에 재판 5쇄까지 찍고 있는 리처드 커니의 <현대유럽철학의 흐름>(한울) 같은 책을 보자(나는 이 조잡한 번역서가 아직까지 유통되는 까닭을 모르겠다). 벤야민에 관한 장이 어떻게 번역되고 있는가? "보들레르는 벤야민에게 도시를 방황하는 일이 공간적 변화보다는 순간적 진보의 문제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177쪽; 내가 갖고 있는 책은 1995년 초판 5쇄이지만, 그 사이에 번역이 수정됐을 리는 만무하다) 보들레르가 벤야민에게 얼마나 중요한 '영웅'인지는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벤야민이 보들레르에게 배운 것이 '공간적 변화'가 아닌 '순간적 진보'의 문제인가?

원문은 이렇다: "Baudelaire taught Benjamin that stray through a city was to discover how meaning is less a matter of temporal progress(chronos) than of spatial placement(topos)."(1994년, 2판, 152쪽) 그러니까 정확히 정반대, 즉 파리의 산책자 보들레르가 가르쳐준 것은 '시간적 진보(크로노스)'가 아니라 '공간적 배치(토포스)'가 갖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 점은 벤야민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그를 매혹시킨 것은 '시간의 공간화'이기 때문이다(오죽하면, 벤야민 자신이 '관상학'을 얘기하고 '정지의 변증법'까지 말하겠는가?). 여하튼, 인용문과 같은 오역문들로 아주 범벅이 돼 있는 책이 대학가에서 내내 교양 철학서로 팔려나가고 있는 현실은 개탄스럽다. 게다가 한술 더 떠서, 이런 책을 철학강의의 참고문헌으로 올려놓는 강사/교수들도 없지 않은데,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는 파렴치한들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애꿎은 학생들의 머리는 왜 혹사시킨단 말인가?..

  

 

 

 

성질을 부려봐야 건강에 좋지도 않으므로 다른 책 얘기로 넘어가자. 이언 해킹의 과학철학서 <표상하기와 개입하기>(한울)가 출간됐다(또 한울출판사로군. 요컨대 이 출판사가 엉터리책만 내는 건 아니다). 부제는 '자연과학철학의 입문적 주제들'이고, 말 그대로 과학철학 입문서이다. 하지만, (적어도 역자의 의견을 참고해보건대) '최고의' 입문서이다. 구내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됐는데, 나에게 '이언 해킹'이란 이름은 <왜 언어가 철학에서 중요한가>(서광사, 1989)의 저자로 각인돼 있다. 즉, '언어철학자'로. 그런데, 웬걸, 이 양반이 어느새(!) '과학철학'의 대가가 돼 있지 않은가?

게다가 영어권 학자로는 아주 드문 일일 텐데, 현재 콜레주 드 프랑스의 '과학적 개념의 철학과 역사'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는 것!  짐작에 그 자리는 푸코의 스승이기도 했던 캉키옘(캉킬렘) 같은 이가 맡았던 자리 아닌가? 어쨌든 저자의 '포지션' 하나만으로도 무시할 수 없는 책일 텐데, 이 신간은 해킹의 대표작이면서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와 비견될 만한 저작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 우리는 우선은 '두 번' 놀라면서 책을 손에 들 일이다. 읽는 건 나중에 '천천히' 읽더라도(역자의 서문 정도 읽어놓고)... 참고로, 역자는 신뢰할 만한 전공자이다. 훌륭한 저자와 역자가 패키지로 묶인 이런 류의 책을 만나는 건 행운이다...

 

 

 

 

참고로, 토마스 쿤 덕분에 '대중화'된  과학철학에 대해서 입문하고자 하는 독자라면, 최근 목요일판 한겨레 책/지성 섹션에 연재되고 있는 '과학속 사상, 사상속 과학'을 죽 훑어보시는 게 좋겠다. 그럼 대략의 개념/구도가 잡힐 것이다. 거기서 좀더 나아가고자 하는 독자라면, 쿤이나 포퍼, 라카토스('라카토슈' '러커토시'), 파이어아벤트 등을 읽으면 되는데, 자세한 서지는 '과학철학'을 검색하거나 <표상하기와 개입하기>의 역자 서문을 참고하는 게 좋겠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둘러싼 논쟁을 다룬 <현대과학철학논쟁>(아르케, 2002)이 좀 어렵지만 기본서이고, 국내 필자들의 쓴 것으론 <현대 과학철학의 문제들>(아르케, 1999)이 있다. 물론, 이렇게 두꺼운 책들만 읽어야 하는가란 푸념이 나올 수 있겠다. 요령이 없지는 않다. 지아우딘 사르다르의 <토마스 쿤과 과학전쟁>(이제이북스, 2002)은 '분량대비' 최고의 입문서(내가 읽은 아이콘북스 시리즈 중에서도 가장 읽을 만했던 책).

사실인즉, 그 유명한 <과학혁명의 구조>도 읽기에 쉬운 책은 아니다(요즘은 고등학교 논술주제로도 자주 등장하지만). 내가 열아홉살, 대학 1학년때 읽기에 가장 어려웠던 책 두 권이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과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였다. 해서, 두 책에 대한 나의 이해는 대부분 2차 문헌들에 근거한다. 요즘은 두 책의 요지에 대해서 30분 정도씩은 강의라도 할 수 있지만, 정작 책을 펴놓고 한 구절씩 막힘없이 읽어나가는 건 별개의 문제이다(두 책을 덮은 지 10년도 더 됐기 때문에 지금은 사정이 좀 달라졌을 테지만). 해서, 리라이팅 시리즈(그린비)나 e-시대의 절대사상 시리즈(살림)에서 다루어짐직하다(<과학혁명의 구조>는 목록에 들어가 있는바, 책이 나오면 한번 다시 읽어봐야겠다).   

 

 

 

 

세번째는 역사분야의 책으로 먼저, 프랑스의 혁명가 로베스 피에르의 평전,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교양인). 저자는 장 마생이고, 책은 로베스피에르 평전이 고전이라고. 물론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로베스피에르 평전"이다. 752쪽의 분량도 어느 정도 신뢰감을 준다. 소개에 따르면, 책은 "프랑스 혁명의 중심 인물이자 프랑스 혁명 자체와 동일시되는 인물, 로베스피에르를 통해 바스티유 함락에서 국왕 처형, 혁명의 몰락에 이르는 프랑스 혁명의 숨가쁜 과정을 생생하게 재구성했다." 요컨대, 로베스피에르란 문제적 인물을 통해서 프랑스혁명사를 읽고자 하는 것(지난주 한겨례의 서평은 밑도 끝도 없이 시작부터 '최교수' 운운하고 있었는데, 책의 머리말은 서울대 서양사학과의 최갑수 교수가 썼다). 

비단 역사를 읽을 때, 반드시 '문제적 인물'의 시선과 행적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어제가 광복절이었지만, 해방 60주년을 기념하여 나온 여러 종의 책 가운데 <8.15의 기억>(한길사)을 꼽아두고 싶다. "책은 KBS 광복 60주년 프로젝트팀이 '8.15의 기억 - 우리는 8.15를 어떻게 기억하는가'를 제작하면서 채록한 구술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만들어졌"고, 마침 나는 그 프로그램을 TV에서 봤다. 인상적이었다(특히 일본군 포로들과 함께 시베리아에까지 끌려가 3년간 수용소 생활을 한 분들도 있었다). 형식상으론 일종의 '구술사'인데, 이러한 살아있는 증언들은 (진리뿐만 아니라) 역사도 '구체적'이라는 걸 새삼 말해준다.

 

 

 

 

네번째 책은 오사와 마사치의 <연애의 불가능성에 대하여>(그린비). 저자에 대해서 나는 아는바 없지만, '언어'나 '화폐' '커뮤니케이션' 등을 키워드로 삼고 있는 걸로 봐서 가라타니 고진의 자장권 안에 있는 학자인 듯싶고, 그런 경우 대략 읽을 만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제목의 '선정성'에 기대를 건 독자라면 실망할 테지만. 역자는 고진의 <윤리11>, <일본정신의 기원> 등을 번역한 송태욱씨이다. 책은 출판사의 안목을 따른 것인지 역자의 안목을 따른 것인지 모르겠지만, 믿을 만한 역자라는 게 일단은 안심. 박해일, 강혜정 주연의 영화 <연애의 목적>이 지난주에 비디오로 출시됐던데, 조만간 '연애의 목적'을 주시하면서 '연애의 불가능성'에 대해 숙고해봐야겠다...

 

 

 

 

 

마지막 책은 아옌데와 함께. 칠레 작가 이사벨 아옌데의 신작 <세피아빛 초상>(민음사)이 번역돼 나왔다. "<영혼의 집>, <운명의 딸>을 잇는 3부작의 마지막 편으로, 여섯 세대에 걸친 여성들의 역사를 완성하는 작품"이라고 한다. 칠레의 대표적인 작가로 군림하고 있지만, 아옌데의 작품을 나는 아직 읽은바 없고, 다만 안토니오 반데라스 주연의 영화 <영혼의 집>(1993)을 10년도 더 전에 보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 신작을 꼽은 건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책의 역자가 친구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부터 나는 그(녀)가 아옌데의 소설을 한 권 번역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고, 간혹 만날 때마다 일의 진행상황에 대해서 '보고'를 받았다. 알고 보니 이 책이었던 것이다(생각보다는 두껍군!). 개학을 하게 되면, 점심 한끼 사주고 책을 건네받아야겠다(이렇게 홍보까지 하고 있으니 점심도 얻어먹을까?). 그나저나 책이 좀 팔려야 나중에 한 턱 내라고 할 텐데...

05. 0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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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5-08-16 18:06   좋아요 0 | URL
책 소개를 볼 때마다 감탄사가.... 대단하세요.

로쟈 2005-08-16 18:33   좋아요 0 | URL
대단한 건 제가 아니라 책들이죠...

galapagos55 2005-08-17 07:28   좋아요 0 | URL
헉. "세피아빛 초상"은 개인적으로 몇년동안 언제 번역판이 나오나 싶어 끊임없이 민음사를 들락거리게 했던 책인데요; 역자가 친구분인데다가 진행상황에 대해 중간보고까지 받으셨었다니, 부럽습니다!^^ 얼른 읽으러 가야겠네요.

로쟈 2005-08-17 10:49   좋아요 0 | URL
아옌데 '마니아'시군요.^^
 

 

 

 

 

필요 때문에 앤디 메리필드가 쓴 <메트로맑시즘(Metromarxism)>(Routledge, 2002), 국역본 제목으로는 <매혹의 도시, 맑스주의를 만나다>(시울, 2005)를 읽는다. 책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메트로맑시스트'들은 '맑스'까지 포함해서 8명인데, 그 중에서 당장에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이는 발터 벤야민이다. 벤야민에 관한 장은 맑스와 엥겔스에 이은 제3장인데, "벤야민은 아마도 20세기 가장 위대한 도시맑스주의자였을 것이다."(149쪽)란 논평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이번에 드디어 번역이 나온 <아케이드 프로젝트>(새물결)의 저자가 '메트로맑시즘' 프로젝트에서 한 자리 차지할 거라는 건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일이다.

언젠가 한번 언급한 바대로, '벤야민과 도시'란 주제는(아예 질로크의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효형출판)란 책이 나와있지만) 벤야민과 관련하여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 이유로 <메트로맑시즘>의 국역본 출간에 대해서 반가움을 표하기도 했었는데(212쪽짜리 원서가 439쪽짜리 번역서로 탈바꿈했다), 이번에 책을 읽으며 유감스럽게도 그 반가움을 대폭 수정해야 했다(이제 그 반가움의 상당 부분은 당혹감이 채우고 있다). 웬만해서는 한국어 책을 읽고 똑똑해질 수 없는 것이 이런 류의 비협조적인 '번역서들' 때문이란 걸 나는 여러 차례 강조해왔는데, 왜 이토록 부실한 번역서들이 계속 양산되는지 궁금하다(이건 상투적인 표현이다. 사실은 별로 궁금하지 않다. 이젠 오역서들을 읽는 데도 얼마간 익숙하기 때문이다. 다만, 아깝다는 생각은 한다. 돈과 시간이, 그리고 엉뚱한 데 투여되는 순진한 독자들의 학구열이).

사실 책의 서두에 붙은 '옮긴이의 말'에서부터 아마추어리즘의 냄새를 풍기기는 했다. "Henri Lefevre의 책을 찾기 위해 '르페브르'가 좋을지 '르뻬브르'가 좋을지 걱정하는 일은 또 어떤가"라고 별걱정을 다하는 역자들을 두고 미소를 지어야 할지 쓴웃음을 지어야 할지 헷갈렸기 때문이다(요즘은 Lefevre를 '르뻬브르'로 읽는 게 가능한가? 물론 Foucault를 '푸꼬'로 읽는 걸로로 모자랐는지 '뿌꼬'라고 읽는 이도 보긴 했지만). 어쨌든 다소 미덥지 않았는데, 번역은 생각보다 더 열악했다. 해서, 벤야민이 강조하는바, '세속적 계몽' 대신에 내가 얻은 것은 '세속적 오역'들에 대한 불만이었다. 이런 불만을 털어놓는 것이 '계몽'에 얼마나 이바지 할는지는 모르겠지만, 오역의 반복들로부터 (언젠가는!?) 놓여나기 위해서라도 '싫은 소리'를 몇 마디 해야겠다.

애초에 시작은 '사랑' 이었다. 123쪽에서, "니체와 비슷한 주장을 했던 '개인주의의 설교자들'이 '대도시를 그렇게 끔찍하게도 사랑했던 것과 대도시적 인간의 가장 불만족스러운 열망에 대한 예언자이자 구원자로서 앞에 나타난 이유' 사이에 우연이라고 할 만한 요소가 없다..."로 나가는 문장이다. 원문은 "it's no coincidence that these 'preachers of individuality' are so 'passionately loved in the metropolis and why they appear to the metropolitan man as phrophets and saviors of his most unsatisfied yearnings."(52쪽) 굵은 글씨는 내가 표시한 것인데, 번역문은 수동문을 능동문으로 옮겼다. '니체와 비슷한 주장을 했던'이란 말은 역자의 서비스로 들어간 것인데, 그런 서비스 정신이 문장의 기본틀을 간과한 건 유감스럽다. '개인주의의 설교자들'이란 앞 페이지에서 언급된 루소, 러스킨, 니체 같은 이들이다. 이들은 대도시의 '군집화 경향'에 대해서 혐오했는데, 대도시에서는 이들이 아주 열정적으로 사랑받았다는 것(그러니까 그들이 대도시를 사랑한 게 아니다. 바로 앞에서 혐오했다고 해놓고, 어떻게 '끔찍하게도 사랑했다'고 말을 바꿀 수 있는가?).

같은 쪽에서 "20세기 초반 베를린에서 보낸 10년간 벤야민은 지적인 욕구를 느꼈고, 그 욕구가 가지는 '활동적인 환상'은 알프레드 되블린의 1929년 걸작인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의 배경이 되었다."도 원래 끊어진 두 문장을 한 문장으로 바꿔 옮기면서 주어(그 욕구)를 잘못 표기하고 있다. 번역문 대로라면, 벤야민의 지적 욕구가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의 배경이 되었다는 것인데, 말이 되는가? 되블린의 작품은 우리말로도 번역돼 있는데(적어도 3종의 번역서가 있다. 나는 아직 읽지 않았지만), 1980년 파스빈더에 의해서 15시간짜리 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내용은 프란츠 비베르코프의 하층생활에 관한 이야기인데, 제목에서 암시되듯이, '알렉산더 광장'이라는 공간 자체가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알렉산더 광장의 바로 그 이웃인 되블린의 작품 속 등장인물이 숨을 들이마시고 그로부터 자양분을 얻었던 그 공기는 벤야민이 들이마셨던 근대 베를린의 공기였다."는 건 말 그대로 '소설'이다. 원문은 "But one of stars of Doblin's book - the Alexanderplatz neighborhood itself - gulped in, and was nourished by, the same modern Berlin air that Benjamin imbibed." 자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지만, 문장에서 '소설의 한 배역'과 '알렉산더 광장 지구 자체'는 동의어이다. 번역문은 '지구/지역(neighborhood)'이란 말을 '이웃'으로 오역하는 바람에 연이어 엉뚱한 작문을 한 사례이다.

사실 이런 사례들은 글의 대세(=내용)와는 무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실수들이 허용되다 보면 '유관한' 오역들이 나올 수밖에 없다. 126쪽에서, "이후 17년 동안 벤야민은 그 도시 자체와 넓은 풍경에 아이와 같은 천진한 포용력을 유지했다."의 원문은 "Seventeen years later, Benjamin retained this wide-eyed, childlike embrace of the city."(53쪽)이다. 먼저, '17년 동안'이 아니라 '17년이 지난 뒤에도'이다. '그 도시'는 파리이고, 파리에 대한 천진한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 호기심어린 시선을 그가 견지했다는 내용. 번역문의 '넓은 풍경'은 무얼 옮긴 것인지 알 수가 없는데, 'wide-eyed'를 옮긴 거라면 눈이 크게 떠질 만한 오역이다.

곧 이어서 "청년이자 성인이었던 벤야민에게, 베를린은 파리의 옆에 있음으로써 핏기를 잃어버린 곳이었다. 파리는 음모, 진기함, 그리고 모험으로 상징화되었지만, 이에 반해, '베를린은 아마도 그토록 작은 것들이 간과되거나 간과될 수 있는 유일한 도시였을 것이다." 같은 대목은 내용을 반대로 옮겼다는 점에서 부도덕한 오역에 속한다. 원문은 "For the young and mature Benjamin alike, Berlin paled alongside Paris. The latter symbolized intrigue, novelty, and adventure. Conversely, 'there are perhaps few cities in which so little is - or can be - overlooked as in Berlin."이다. '청년이자 성인이었던 벤야민'이란 번역은 문맥을 이해하지 못한 것인데, 'young Benjamin'은 대학시절 처음으로 두 주간 파리를 여행하던 시절의 청년 벤야민을 말하고, 'mature Benjamin'은 그로부터 17년 후 파리에 체류하며 <파리 일기>를 쓰게 되는 중년의 벤야민을 말한다. 그러니까 "청년 벤야민에게서나 중년 벤야민에게서나 똑같이" 정도로 옮겨져야 한다.

똑같이 어쨌다는 건가? "베를린은 파리에 견주면 창백한(=볼품없는) 도시였다"라는 것. 왜? 비밀스럽고 진기한 모험으로 가득 찬 파리와는 달리 베를린은 그토록 작은 것들이 간과될 수 있는 유일한 도시였다? 알다시피, little은 '거의 없다'라는 부정의 뜻이므로 이 대목에서는 간과될 게 거의 없다는 뜻이 된다('그토록 작은 것들'?). 왜? 파리와는 달리 볼 게 별로 없기 때문. 파리에서라면 어제 본 거리와 건물도 오늘 '새롭게' 보이지만, 베를린에서는 '조직적/기술적 정신'의 효과로 한번 보면 더 볼 게 없다는 얘기이다. 해서 약간 의역하면, "베를린만큼 볼 게 별로 없는 도시도 거의 없을 것이다."  

128쪽에서, 'a second dissertation'을 '두번째 박사학위논문'으로 옮겼는데, 역자가 벤야민에 대해서나 독일의 학제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다는 걸 보여준다. 벤야민의 박사학위논문은 <독일 낭만주의에서의 비평개념>이고(<베를린의 유년시절>에 번역돼 있다), '두번째 학위논문'이라 지칭된 <독일 비극의 기원>은 그의 교수자격취득논문이다(물론 끝내 통과되지 못한). 원문에는 '박사' 운운하는 내용이 들어 있지 않다. 이 두번째 논문이 'the work of esoteric genius'로 지칭되고 있는데, '비밀스런/비교(秘敎)적인 천재의 작품' 정도가 아니라 '난해한 분위기의 그 논문'이라고 어렵게 옮겨진 것도 이해하기 난해하다.

 

 

 

 

133쪽에서, "블로흐는 다가오는 나치의 무자비한 공격을 마주하는 데 있어서는 벤야민과 전혀 다른 방식을 택했다. 벤야민이 망명을 택했던 것이다."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원문은 "Bloch, however, survived the approaching Nazi onslaught in a way Benjamin never did: he got out."이다. 두번째 문장의 주어(he)를 역자는 블로흐가 아닌 벤야민으로 착각해서 엉뚱한 사람을 망명시켜버렸다.  작년에 대표작 <희망의 원리>(전5권, 열린책들)가 완역돼 나온(영역본은 3권짜리이며 나는 이 책을 갖고 있다) 에른스트 블로흐(1885-1977)는 벤야민과 교우관계를 갖고 있었는바, "블로흐가 보여주는 종교적 신비주의와 강경한 공산주의의 혼합은 벤야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런데, 블로흐는 벤야민과 달리 비교적 일찍, 1933년에 망명했고(처음엔 스위스로, 그리고는 미국으로)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살아남았다. 해서 뒷문장은 "그는 탈출한 것이다."로 옮겨져야 하며, 여기서의 '그'는 '벤야민'이 아닌 '블로흐'이다(앞뒤 문장의 주어가 전부 '블로흐'인데, 대명사 'he'가 '벤야민'을 받는다는 건 난데없는 일이다).

블로흐보다 '정통적인' 맑시스트로 벤야민에게 영향을 끼진 이는 블로흐의 친구이기도 했던 루카치이다. 특히나 중요한 저작은 <역사와 계급의식>(1923; 거름, 1992), 이 책을 벤야민은 이탈리아의 카프리에서 걸출한 볼세비키 아샤 라시스로부터 소개받는다(라시스와 벤야민의 관계에 대해서는 특히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를 참조). "그와 그녀는 때로는 카페에서, 때로는 라시스의 호텔에서 발가벗은 채로 루카치의 책을 함께 소리내어 읽었다." 이런 배경지식하에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은 1920년대의 급진적인 국면을 맹비난했다."란 문장을 읽어보자. 원문은 "...Georg Lukacs, whose History and Class Counscious tore on to the radical scene in the 1920s." 'tear'란 동사에 '비난하다/혹평하다'란 뜻이 없는 건 아니지만, 여기서의 뜻은 내 생각에 말 그대로 '구멍을 내다' '찢어놓다'(=양분시키다)이며, 구어적으론 '들쑤셔놓다' 정도로 보인다.

알다시피, 1930년대에 루카치는 '공식적인 맑스주의'로서의 스탈린주의와 갈등관계에 있었으며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내비친 자신의 사상에 대한 수정을 요구받는다('관념론'이란 멍에를 뒤집어쓰면서). 인용문에 붙은 각주10)은 이에 관한 내용인데,  "최근 들어 밝혀진 바로는, 실제로 루카치가 그 모든 것을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과거에 그가 집필한 위대한 저작에 대한 폐기통고를 거절하면서 그 자신을 변호하기 위한 에세이를 집필했다."(413쪽) 이에 대한 원문은 이렇다: "More recently it was discovered that Lukacs really believed everything all along: he'd actually written an essay in his own defense, renouncing his earlier denunciation of his great text."(190쪽) 내 생각에 번역문은 일의 영문을 전혀 모른 채 옮겨진 것이다. 당시에 루카치는 소위 '자아비판'을 감행했지만, 그 자신은 스스로가 옳다는 믿음은 내내 견지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사실이 최근에 밝혀졌다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다시 옮기면, "최근에 밝혀진 바로는 루카치는 자신의 신념을 정말로 끝까지 견지했다. 사실 그는 자신의 위대한 텍스트(=<역사와 계급의식>)에 대한 이전의(=30년대의) (자기)비판을 철회하는 자기옹호의 에세이를 쓰기까지 했다." 

물론 그 에세이는 '공식적인' 것이 아니며, 그러한 사실이 밝혀진 것은 러시아의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이다. 루카치가 쓴 에세이가 영어로 번역돼 나온 것이 <'역사와 계급의식'에 대한 옹호 A Defense of History and Class Consciousness: Tailism and the Dialectic>(Verso, 2000)이다(이 책의 후기를 슬라보예 지젝이 쓰고 있다). 이 '옹호'를 아직 읽어보지 않았지만, 짐작에 이야기의 줄거리는 그러하다. 해서, '맑스주의' 책을 번역하는 역자들이 ('일반 독자'보다 게으르게도) 걸출한 맑시스트들에 대한 기본사항들마저 챙기고 있지 않은 것은 거듭 유감스럽다.

저자인 메리필드는 이후에 <역사와 계급의식>의 주요 내용을 3쪽에 걸쳐서 요약 정리하고 있다. 비록 "벤야민이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정확히 알기란 어렵다"란 단서를 잊지 않고 있지만. 그 내용 가운데 134쪽에서, '두번째 자연(second nature)'은 아도르노에게서도 그렇고 '이차적 본성'이라 옮기는 것이 더 적합하다. 그리고 136쪽에서, "모호한 메시지와 억압적인 힘(subtle messages and repressive force)"은 "교묘한 메시지와 억압적인 힘"이 더 적당하겠다.

"이제껏 존재했던 그 어떤 맑스주의자보다도 가장 덜 실천적인 맑스주의자" 벤야민과 루카치의 차이점? 그건 '총체성'에 대한 의견차이에 두어진다. "처음에 벤야민은 자본주의를 이음매 없는 전체로서 파악할 수 없었다."(138쪽) '처음에'는 'To begin with'를 옮긴 것인데, 당연히 '먼저'란 뜻이다(이런 사소한/자질구레한 오역들은 독자를 허탈하게 한다) . "그의 정신은 폐쇄가 아니라 개방에 의해서 풍부해졌다. 언제나 미세한 균열의 틈과 구멍이 존재했다. (루카치의) 상품화는 더할 나위 없는 개념이었지만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문화와 도시주의(=도시화), 모든 건축물 그리고 일상에는 다공성(porosity)이 존재한다."

벤야민이 나폴리에서 발견해낸 '다공성'이란 개념은 '벤야민과 도시'란 주제를 살필 때 핵심적인 것인데, 루카치의 총체성 개념과 대비시킨 저자의 설명은 일품이다(내가 '다공성'이란 개념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대목을 읽으면서이다). 요컨대, 루카치의 '총체성' 대 벤야민의 '다공성'이란 구도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이며, 이러한 차이 때문에 '가장 덜 실천적인 맑스주의자'가 한편으론 '가장 위대한 도시맑스주의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내가 아는 한 루카치에게서는 '도시(urbanism)'가 주제화되지 않는다).   

이를 약간 소급시켜서 적용해 보자. 루카치를 읽으면서 벤야민의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은 상품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확장되는데, 그 둘은 결국 동일한 것이었다("they'd become one and the same"을 "그 둘은 하나가 되었고 같은 것이 되었다"라고 옮기는 것도 지극히 보기 드문 일이겠다). "그러나 일상의 문화와 경험을 정치-경제적 궤도에 옮겨놓는 것 또한 루카치의 맑스주의라는 브랜드를 붙여야 했다."(138쪽) 벤야민의 '다공성'에 대한 설명 바로 이전에 나오는 것으로 벤야민식 맑스주의를 루카치의 그것과 대비하고 있는 대목이다. 원문은 "But bringing everyday culture and experience into the orbit of political-economy also required a few caveats about Lukacs's brand of Marxism."(58쪽) 역자가 제대로 옮기고 있지 못한 것은 'caveats'란 단어. '보류' '단서' '경고' 등으로 사전에서는 풀이되고 있는데, 문맥상 '(벤야민식으로) 일상적 문화와 경험을 정치경제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은 또한 루카치식 맑스주의에 대한 몇 가지 유보사항을 필요로 했다" 정도의 뜻이겠다. 그 유보는 루카치가 가정/전제하는 '총체성'에 대한 유보이다.

나폴리의 '다공성'에 대한 설명. "모든 것은 여기에서 우발적인 것의 '극장', '대중적인 무대'가 되었다. 그래서 어느 곳도 '그렇게 되거나 그 밖의 다른 것이 될 수는' 없다." 두번째 문장의 원문은 "nowhere is it 'thus and not otherwise'"이다. 벤야민의 짤막한 에세이 <나폴리>로부터의 인용인데, 원문의 이중부정을 단순부정으로 옮김으로써 내용을 거꾸로 옮긴 사례이다. 모든 것이 '즉흥성을 향한 열정'에 의해 좌우되며, 우발적인 것에 개방되어 있다면, "어느 것도 그 밖의 다른 것이 될 수는 없다"라는 말은 모순적이다. "때문에 다른 장소가 될 수 없는 장소란 것은 없다"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이해하기 쉽게 옮기면, "모든 장소가 다른 장소로 변신이 가능했다" 정도이다. 해서, 나폴리에서는 공적인 생활/공간과 사적인 생활/공간이 마구 뒤섞이게 되는 것. 참고로, 나폴리는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처음 착안되는 장소이다. 때는 1924년 여름. 수잔 벅 모스는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이 벤야민의 텍스트 <나폴리>에 3쪽을 할애하고 있으며, 질로크는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에서 그러한 '과소평가'에 이의를 제기하고 보다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140쪽으로 넘어가자(도대체 언제 끝나는 것인가?). "벤야민은 혁신적이고 경험적인 사상가"였다? '실험적인(experimental)'을 '경험적인'으로 잘못 옮겼는데, 안된 얘기지만 역자가 무식할 뿐만 아니라 얼마나 무성의한가를 보여준다. 좀 심한 비난인가? 그렇다면, 과연 얼마나 무식하며 무성의한가? 141쪽에서 '고상한 초현실주의적 경험(heightened surrealist experience)'는 '강화된/고양된 초현실주의적 경험'이 낫겠다. 프랑스의 초현실주의자 앙드레 브르통이 그런 경험을 추구했다는 것인데, 벤야민은 좀 다른 방식을 시도한다. 그가 시도한 건 마리화나, 즉 마약이었다. "그는 해시시를 통해 환각 증사에 빠지길 시도했다." '해시시'('하시시')로 옮겨진 'hashish'는 사전에 따르면 통상 '마리화나'라고도 불리는 마약이므로 좀더 익숙한 용어로 옮겨지는 게 낫겠다.

문제는 그 다음 문장. "그(=벤야민)는 의사인 에른스트 조엘에게 수 년 동안 마약중독자란 진단을 받아왔다. 조엘은... 벤야민이 주기적인 우울증을 극복하도록 도와주었다." 벤야민이 마약중독자라고? 원문은 "He'd been medically prescribed the drug for years by Dr. Ernst Joel... to help cope with periodic depression."이다. 내용은 벤야민이 주기적인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서 친구인 의사 조엘로부터 수년간 (치료용)마약을 처방 받아왔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감기약 등에도 치료용 마약이 소량씩 들어 있으며 이를 다량 복용하면 환각 증세를 일으킨다. 벤야민의 복용한/처방받은 것도 그러한 치료 목적의 마약이었는데, 벤야민이 복용량을 늘림으로써 약간의 환각상태를 경험하고 이를 근거로 <마르세이유에서의 하시시>란 글까지 썼다는 것. 벤야민이 '마약중독자'라는 내용을 어디에서 읽을 수 있나?(마약 복용과 마약중독은 엄연히 다른 문제이다.) 

어쨌든 벤야민은 마르세이유의 한 작은 호텔에서 마리화나를 피우며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를 읽다가 곧 환각상태에 빠져들게 되며(브라스밴드가 머릿속에서 울려퍼졌다) 그는 거리로 나와서는 항구의 선술집을 헤매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약은 '그때까지만 해도 두려워했던 근본적인 예리함을 드러내며 그것의 진정한 마력'을 발휘했다." 벤야민으로부터의 인용문(내가 강조한 대목)의 원문은 "its canonical magic with primitive sharpness that I had scarcely felt then"이다. 이런 대목은 오역을 지적하기도 쑥쓰러운데, 역자는 'scarcely'란 부정부사를 '두려워했던'이라고 옮긴다(좀 심하지 않은가?). 여기서 'canonical magic'은 마리화나의 아주 '전형적인/일반적인 마력'이란 뜻이고, 그 마력의 내용은 감각이 아주 민감/예민해지고 날카로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경험은 "그때까지 내가 느껴보지 못한 것"이다.(몇 줄 내려가서 "그는 굴 몇 개에, 아마도 토끼고기나 닭고기를 따위를 먹었을 것이다."에서 '-했을 것이다'로 옮긴 조동사 'would'는 내가 보기엔 '-하곤 했다'는 뜻이다.)

이런 류의 '각성(覺醒)'의 경험이 초현실주의에 대한 벤야민의 경도를 설명해주지만, 한편으로 그는 마약에 의한 황홀경에 비판적이었다. 그에 따르면, "초현실주의자의 경험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단지 종교적 황홀경이나 마약에 의한 황홀경일 뿐이라고 믿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이다."(142쪽) 진정한 초현실주의적 경험은 '세속적 계몽(profane illumination)'을 통해 이루어지며, 그것은 "유물론적인, 인류학적인 영감"이다. 아주 부실한 번역문들을 통해서이긴 하지만, 이 대목에 대한 설명이 또한 ('다공성'에 이어) 메리필드의 책에서 건질 만한 부분이다. 즉, 벤야민에게 있어서 사유란 '뛰어난 마약'이며, 진정한 계몽은 '세속적 계몽'을 통해서, 냉정한 텔레파시를 통해서 일어난다는 것. 독서야말로 그 텔레파시의 과정인바, 벤야민이 1930년대 내내 파리의 국립도서관을 드나들며 했던 일, 즉 자신의 프로젝트를 위한 자료를 읽고 정리했던 일이야말로 바로 '세속적 계몽'이었으며, '뛰어난 마약'의 장기복용이었던 것이다!(해서, 우리의 청소년들이 배워야 할 것은 '본드'가 아니라 '독서'이다.)

물론 읽을 만한 대목이라고 해서 오역이 빠지는 건 아니다. "따라서 벤야민이 보기에 '신비스러운 것의 불가사의한 측면'에 있어 '신파조의' 혹은 '광신도적인 긴장'이 여태까지 이루어낸 것은 하나뿐이었다."(143쪽) 무슨 말인가? 원문은 "Thus, 'histrionic' or 'fanatical stress' on the mysterious side of the mysterious' takes one only so far, Bejamin thought."(강조는 나의 것, 역자는 'stress on'으로 이어지는 대목을 잘못 보고 있다) 벤야민이 강조하는 것은 '미스테리한 것'의 일상성, 일상적인 면모이다. 즉, 미스테리한 것은 연출되는 것도 아니며 들뜬 상태에서 포착되는 것도 아니다. 다시 옮기면, "그래서, 벤야민이 생각하기에, 신비스러운 것의 신비스러운 면에 대한 과장적이면서도 열광적인 강조는 기껏해야 일면적일 뿐이다." 왜? 우리는 변증법적인 시각을 통해서, '불가해한 것으로서의 일상', '일상으로서의 불가해성'을 지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정말로 신비스럽고 불가해한 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면하는 것들, 벤야민이 보기엔 저 '아케이드'와 '쇼핑몰' 속에 있다. 따라서, 벤야민이 "만약 초현실주의의 아버지가 다다(Dada)라고 한다면, 초현실주의의 어머니는 아케이드였다"(147쪽)라고 말한 것은 우연이 아니겠다.

벤야멘에게서 '다공성'과 '세속적 계몽'이 갖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면, 내 생각에 메릴필드에게서 배울 수 있는 핵심은 다 챙긴 것이 된다. 해서, 뒷부분은 그냥 대충 빨리 넘어가기로 하자. 152쪽 "벤야민은 보들레르의 풍자적 문체와 천재성에 의지했지만, 파리를 향한 그의 열정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게 "맑스보다도 시인 보들레르를 더 마음 속 깊이 사랑"했던 벤야민의 보들레르에 대한 태도인가? 원문은 "Benjamin got turned on by the poet's allegorical style and genus, to say nothing of his prodigious passion for Paris." 지적하기도 멋쩍은 일이지만, to say nothing of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가 아니라 '-은 말할 것도 없이'란 뜻이다(2+2는 5가 아니라 4라고 지적하는 식이니 낯간지럽다). 그리고 'turn on'은 여기서 '의지하다'가 아니라 '흥분되다' '매혹되다'란 뜻이다.

이어지는 문장. "그는 늘 보들레르에 대한 자신의 작업이 다름아닌 자신의 가슴에 소중한 것이라고 얘기했다." 원문은 "Benjamin always insisted that his work on Baudelaire was more dear to his heart than any other."(65쪽)이고, 다시 옮기면, "벤야민은 언제나 자신의 보들레르론이 어느 작업보다도 그에겐 소중하다고 말했다." 즉, 비평가로서 자신이 많은 글을 썼지만, 그가 가장 아끼는 것은 보들레르론이라는 뜻이다. 'any other'를 '다름아닌'으로 옮겼는데, 문맥상 'any other works'란 뜻이다.

153쪽에서 '모호함(ambiguity)'는 '양가성'으로 옮기는 게 이해하기에 쉽다. 근대 파리의 설계자 오스망의 새로운 파리 건설에 대해서 보들레르/벤야민은 개탄했지만, 한편으론 그러한 파괴/건설이 나은 '감각적 즐거움'이라는 새로움도 인정했다는 것(오스망에 대해서는 데이비드 하비의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가 자세하다). "새로움은 상품의 사용가치와는 독립적인(=무관한) 성질이다. 그것은 부지런한 식료품 상인의 유행이 어떤 것인가와 같은 착각의 원천이 된다." 무슨 소리인가? 원문은 "Newness is a quality independent of the use value of the commodity. It is the source of that illusion of which fashion is the tireless purveyor."이다. 복잡한 문장의 오역이라면, 지적하는 사람도 좀 덜 민망할 것이다. 관계사로 연결된 뒷문장을 분해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즉, Newness is the source of the illusion. + Fashion is the tireless purveyor of that illusion. 해서, "'새로움'이란 (상품물신이라는)환영의 원천이며, 패션은 그 환영의 지칠 줄 모르는 조달자이다."  

벤야민과 엥겔스와의 비교. "벤야민이 '오스망'에 대한 엥겔스의 생각을 인용하긴 했지만, 그의 맑스주의적 방침은 '주택문제'에 대한 엥겔스의 방침보다 오히려 치밀했다. 엥겔스가 자본주의적 근대화로부터 그다지 벗어나지 못했던 반면에, 벤야민은 자본주의적 근대성의 총체적인 경험에 으해 큰 자극을 받았다."(153쪽). 두번째 문장에서 엥겔스 파트는 "Whereas Engels saw little apart from capitalist modernization"을 옮긴 것인데, 내용은 엥겔스가 자본주의 근대화를 약간 떨어져서, 즉 거리를 두고 보았다는 것이다.

지나가는 김에, 154쪽 끝에서 '1789년의 일(the work of 1789)'은 '1789년의 과업'이라고 해야겠다. 그리고, 159쪽에서 "진실은 구체적이다(Truth is concrete)"란 브레히트의 유명한 공리는 "진리는 구체적이다'로 옮겨져야겠다. 더불어, 브레히트의 작품 <3페니 소설(Threepenny Novel)>은 <서푼짜리 오페라>를 말하는 것 아닌가? 브레히트와 벤야민의 관계에 대해서도 설명되고 있는데, 아도르노와 숄렘은 모두 브레히트가 벤야민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걸로 평가한다. "그들은 브레히트가 갖고 있던 영악하고 복잡한 심성과 잘 제련되고 세련된 도구가 이제는 벤야민에게 잔혹한 회초리로 변했다고 말했다." 원문은 "Such a sophiscated and complex mind, they said, a fine-tuned instrument of precision, was now converted into a crude mallet."(68쪽) 일단 'Such a sophiscated and complex mind'와 'a fine-tuned instrument of precision'가 동일인으므로 번역문은 지지될 수 없다. '영악하고 복잡한 심성의 브레히트'? 뜬금없는 소리이다. 내용은 벤야민처럼 아주 섬세하면서 복합적인 심성의 소유자가, 아주 정밀하게 조율된 악기 같은 사람이 (브레히트의 영향으로) (투박한) 나무 방망이처럼 변해버렸다는 얘기이다.  

지금까지 지겹게 나열한 이 세속적 '오역'의 대미는 나름대로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다. "벤야민은 자본주의 도시를 세속적 계몽이나 혁명 속의 혁명적인 것으로, 또한 신뢰할 만한 빛의 도시로 평가한 최초의 맑스주의자였다"(160쪽)란 결론에서 마무리되었다면 좋으련만, 그리고 1940년 9월 피레네 산맥에서 스페인 국경을 넘으려던 벤야민이 50알의 모르핀을 한꺼번에 먹고 자살한 장면에서 끝났다면 그냥 넘어갈 수 있으련만, 저자 메리필드는 가정법 문장들로 벤야민 장을 마무리하고 있다. 만약에 벤야민의 희망대로 무사히 미국에 망명할 수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그는 (결국) 리버사이드 도로를 거닐지는 못했다." 하지만, 아마도 그가 망명에 성공했더라면, 그래서 미국에 살았더라면, "의심할 나위없이 그는 웨스트사이드 위쪽 거리의 유태인 이민문화에 대해 편암함을 느꼈다."(161쪽) 이하의 과거시제 문장들은 전부 오역이다. 가정법 과거완료형의 문장들이기 때문에, '느꼈을 것이다'란 식으로 모두 수정되어야 한다. 다시 한번, 잔뜩 인상을 써야 할지 웃음을 지어야 할지 알지 못하겠다. '번역 연습'을 '번역'으로 착각하고 책을 내는 일은 삼가해주었으면 싶다...

05. 08. 12-14.

P.S. 벤야민 장의 각주는 '발터 벤야민'이 아닌 '월터 벤야민'으로 표기돼 있다. 아마 본문과 각주의 역자가 달랐던 모양이다. 414쪽 각주22)는 유익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번에 국역본이 나온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발간과 관련된 것이다. "그 책은 전설적인 역사를 갖는다. 1940년 벤야민이 죽은 이후에도 그것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벤야민이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을 가로지를 때 끈덕지게 끌고 다녔던 커다랗고 낡은 서류가방 안에 그 원고가 있었던 것일까? 당국에 의해 압수당했던 것일까? 벤야민이 나치의 점령을 피해 달아나기 전에, 운명이 풍전등화에 놓인 그 책을 국립도서관 안에 감추어 놓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1981년, 이것은 1962년에 사망한, 벤야민의 친구이자 도서관의 전 기록보관인(=사서)인 조지 바타이유('조르주 바타이유'를 말한다)의 사유지에서 기적적으로 발굴되었다. 1년후, 파사젠베르크는 그 책을 독일어로 출판했고, 오랜 기다림 후에서야 벨넵(벨크넵) 출판사(Belknap Press)가 마침내 영어판을 출간했다."

'파사젠베르크'는 벤야민이 자신의 원고에 붙인 이름이고, 그것이 1982년에 드디어 출간됐다는 것. 그런데, '파사젠 베르크'가 그 책을 독일어로 출판했다고? 이 '지독한 무지'에 대해서는 무어라 이름을 붙여야 할는지? 더불어, 번역과는 무관한 것이지만, "벤야민이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을 가로지를 때 끈덕지게 끌고 다녔던 커다랗고 낡은 서류가방 안에 그 원고가 있었던 것일까?"에 대한 궁금중을 이 각주는 해결해 주는데, 사실 <아케이드 프로젝트>(문학동네, 2004)의 책갈피 벤야민 약력에는 "벤야민은 1940년 9월 26일 밤, 에스파냐 국경 지역 포르 부에서 모리핀으로 자살한다. 그는 에스파냐 국경으로 향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파사젠베르크> 원고를 지니고 있었다."고 돼 있다. 물론 매우 '감동적'이지만 믿기지는 않았었는데(그는 원고를 위해서라면 자살해서는 안되었다!), 내막은 따로 있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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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다 2005-08-16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이 타시겠습니다.^^ 이거 참 한두번도 아니고, 경찰에 신고라도 해야하는 건지, 음란물 유포행위로...로쟈님 말씀처럼 한국말로 유식해지기는 힘들까요? 그나마 이렇게 솎아주시니 다행입니다만...

로쟈 2005-08-16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한국어로 유식해진다는 건, '웬만해선' 힘듭니다. 웬만하지 않은 책들 덕분에...

비연 2005-08-16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krinein 2005-08-18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번역에 대한 몇몇 소문은 들었지만, 그래도 번역본의 출간을 반가움 반 근심반으로 지켜보고 있었는데. 정말 신고라도 해야할까 봅니다(그런데 어디에?).

주니다 2005-08-18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번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소개해주신, 할 포스터의 <욕망, 죽음 그리고 아름다움(Compulsive Beauty )>(아트북스)의 역자가 이 책보다 먼저 혼자 번역해서 출간한 토마스 크로우의 <대중문화 속의 현대미술>(아트북스)를 어제 읽었습니다. 결론은 엄청난 번역으로 도저히 견적이 나오지 않는 책이었습니다. 오역,오역하지만 이처럼 심각한 경우는 처음입니다. 책 전체가 전형적인 번역투인데다가 오역은 차치하고(오역도 수두룩), 한국말이 아닌 문장들로 빼곡했습니다. 역자 후기는 더 가관인게 "많은 학생들이 내용을 반대로 해석하곤 하는 것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그건 영어만의 문제는 아니지 싶었다."라고 입바른 소리를 하는데 이거보고 뒤로 자빠졌습니다. 하하핫. 이거 출판사에 환불해달라고 해야 되는건지....처음으로 리뷰를 올리게 될 것 같은 예감이 엄습합니다.^^

로쟈 2005-08-19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스터의 책은 안 산 게 천만다행이네요(주니다님은 사서 읽으신 거네요!). 아무튼 이런 '문화'는 더이상 지속될 수 없도록 무슨 특단의 조치라도 있어야 할 거 같습니다...

aho 2005-08-19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분석이에요. 저자에게 메일을 보내보는 건 어때요? 이정도 오역이라면 좀 심각한데, 두께로 개정을 포기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로쟈 2005-08-19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은 건 벤야민 장뿐이지만, 다른 장들의 번역이라고 해서 그닥 나을 거 같지는 않습니다. 제 생각에, 역자들 자신이 모르고 있을 거 같지 않으며(만약에 그렇다면, 그 '둔감함'과 '무능력'에 대해선 어찌해볼 도리가 없겠죠), 그런 '부실한' 번역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에서 책을 낸 거라면(대단히 '오만한' 경우인데) 이 정도의 지적에 꿈쩍할 거라 생각지 않습니다. 기대할 수 있는 건 출판사측에서 회수하고 재번역서를 내는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가능성은 제로이겠죠. 오늘도 생각없는 언론(한겨례 같은)에서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관련하여 이 책을 추천도서로 올려놓았더군요. 사실, 제가 더 뻔뻔하고 무책임하다고 생각하는 쪽은 그렇듯 옆에서 부추기는 이들입니다...

주니다 2005-08-19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스터의 책<욕망, 죽음 그리고 아름다움(Compulsive Beauty )>은 학생들과 함께 번역을 해서인지^^ 가독성이 훨씬 좋습니다. 서점에서 잠깐 살펴본 거지만서도. 문제는 그 책이 아니라 '크로우'의 책이죠.^^ 책의 1장은 이미 다른 책에서도 2번이나 번역이 되어 있는데, 결론은 그것도 안봤다는 얘기죠. 역자가 그 이름도 거룩한 <교수님>이시니, 아마도 그 책으로 수업을 진행할터, 죄없는 학생들이 불쌍한거죠. 근데 이 정도 상태면 학생들도 형편없는 번역이란걸 알텐데, 도대체 무슨 배짱일까요?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그나저나 비가 좀 오면서 날이 너무 시원해졌네요. 주말을 잘 보내실 준비는 되셨나요? (일들은 좀 마무리가 되시는지....끝없이 쏟아지는 일들을...^^)

로쟈 2005-08-19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불가사의한, 미스테리한 일들 투성이입니다. 한국식 '학술'을 한꺼풀만 벗겨보면 말이죠... 일들이야 늘 소나기 같아서, 안 젖어 있을 도리가 없습니다(주말마다 비맞은 생쥐꼴입니다. 어쩌다 볕들 날 기다리는--;).

주니다 2005-08-19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맞은 생쥐꼴이라...ㅎㅎㅎ, 가족과 함께 주말 편하게 보내시구요...
한겨레 서평에는 이번에도 <베냐민>을 고집했더군요. 그 고집에 경의를^^

리그파 2006-11-18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의 무식함을 탓하고 있었는데...더 이상 끙끙 앓지 말고 책 덮으렵니다.
로자님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로쟈 2006-11-18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이 책은 좀 심한 경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