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짧은 역사"는 로도윅의 <들뢰즈의 시간기계>(그린비, 2005) 1장 제목이다. 들뢰즈의 영화론을 읽어야 할 필요가 생겨서 다른 책들과 함께 로도윅의 책을 들춰보게 되었고(이 얼마나 '유익한' 번역인지!), 나는 며칠 전에 이 1장을 읽었다(2장은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에 대한 사전독해를 요구하기에 잠시 미뤄두었다. 그냥 읽는 게 아니라면 들뢰즈의 <시네마> 읽기는 상당한 견적을 자랑한다). '짧은 역사'인 만큼 이야기도 짧은 편이지만, 그걸 요령있게 정리하는 건 또 별개의 문제이다. 나는 중요한 대목에 밑줄긋고, 오역이나 착오는 교정하면서 잠시 자리를 데우도록 하겠다.

먼저 들뢰즈의 두 책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는 영화사 연구가 아니며 따라서 연대기적으로 배치되지 않는다. 하지만, 거기에는 (1)뵐플린이 <예술사의 원리>에서 피력하고 있는 역사관이 스며 있다(미학 형식의 역사는 그러한 형식이 역사적으로 통용될 수 있었던 시대/문화와 짝지어질 수 있다는 얘기). 그리고 (2)일리야 프리고진과 이사벨 스텐저스의 과학철학/과학사 연구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다(특히 <혼돈으로부터의 질서>와 관련해서인데, 자연을 모델로 하는 개념화 전략은 들뢰즈에게 많은 통찰을 제공한 것으로 돼 있다. 참고로, 러시아의 경우 들뢰즈는 이러한 과학철학자들과의 연관 속에서 이해되고 있다). 요컨대, <예술사의 원리>와 <혼돈으로부터의 질서>를 먼저 읽으라는 것(나는 후자만을 읽었다). 뵐플린의 책은 <미술사의 기초개념>(시공사)으로 번역돼 있고(그러니까 '예술사'라기보다는 '미술사'라고 해야 맞겠다), <혼돈으로부터의 질서>(정음사/고려원)도 국역본이 있는 책이다.

"들뢰즈는 베르그송을 전유해서 사유가 본질적으로 시간적이며 운동과 변화의 소산임을 주장한다. 또한 그는 퍼스의 재독해를 통해 이미지가 통일되거나 닫힌 전체가 아니라 연속적 변형 상태에 놓인 논리적 관계들의 집합이라고 논증한다."(36쪽) 사실 이런 대목은 사례를 직접 '봐야' 이해가 용이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다. 아무튼 들뢰즈는 "소쉬르에 연원하는 영화기호론에 반대해 퍼스의 기호학을 선호"한다. 여기서 소쉬르 계보의 대표적인 영화기호학자를 든다면, 단연 크리스티앙 메츠를 꼽아야 할 것이다(사실 메츠는 영화광 언어학자였다. 들뢰즈가 영화광 철학자였던 것과 비기는 셈. 메츠가 소쉬르 등의 언어학을 영화에 가져온다면, 들뢰즈는 퍼스의 논리학과 베르그송의 철학을 영화에서 발견한다). 

메츠와 들뢰즈의 차이? "메츠의 경우, 영화적 언표에 대한 개념, 거대 통합체에서 파생된 내러티브 이론을 제시하여 이미지의 가장 가시적 속성인 운동을 제거하면서 이미지의 의미를 언어적인 것으로 제한한다. 그러나 들뢰즈의 경우, 영화의 이미지 구성성분이 움직이는 '기호적 질료'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모든 종류의 변조 가능한 특징들, 즉 감각적인 것, 운동적인 것, 강도를 띠는 것, 정서적인 것, 리듬적인 것, 음조적인 것, 심지어 언어적인 것 등을 포함한다." 이러한 대비 또한 예비적인 지식을 요구하지만, 메츠의 경우 영화가 비록 '랑그'(이중분절이 가능한 언어체계)는 아니더라도 '언어'로 규정될 수 있다고, 즉 '언어'로 환원될 수 있다고 본 반면에 들뢰즈는 그러한 가능성을 부정한다고 정리해둔다.

이어지는 대목: "에이젠슈테인은 처음에 이를 이데올로기소에, 다음에는 좀더 심오하게도 전-언어 또는 원시 언어체계에 해당하는 내적 독백에 비유한다."(37쪽) <시간-이미지>에 인용하고 있는 부분인데, 이 대목은 오역을 포함하고 있기에 국역본 <시간-이미지>를 참조하는 게 좋겠다. '이데올로기소(ideologram)'라고 옮긴 것은 '표의문자(ideogram)'를 잘못 본 것이다('ideologram'이란 '신조어'는 어디에서 왔는지?). 들뢰즈가 퍼스 기호학을 참조하는 것은 그것이 "언어학이 아니라 논리학이며, 따라서 기호작용을 일련의 과정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기호론이 언어적 모델을 영화 바깥에서 부과함으로써 영화적 기호를 정의하려 하는 반면, 들뢰즈는 영화 자체가 역사적으로 생산해온 질료에서 기호이론을 연역하기 위해 퍼스의 논리학을 적용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들뢰즈의 유명한 '영화기호학 비판'이 제기되는 것.

 

 

 

 

참고로, 찰스 샌더스 퍼스의 기호학(퍼스는 'Semiotic'이라고 불렀다)에 관한 번역은 아직 없으며 최근에 퍼스의 사상 전반에 대한 안내서가 나왔을 따름이다. 정해창 교수의 <퍼스의 미완성 체계>(청계, 2005). 현재까지는 움베르토 에코 등이 지은 <논리와 추리의 기호학>(인간사랑, 1994)이 퍼스 기호학에 대한 가장 요긴한 참고문헌이다(물론 에코의 기호학 이론서들을 덧붙일 수 있지만, 재미에 있어서는 '추리'가 '이론'보다 한 수 위이이기에).  

이어서, "들뢰즈는 이미지 실천(image practices)이 사회적/테크놀로지적 자동기계라고 주장한다. 이 자동기계에서 각 시대가 특정한 사유의 이미지를 생산함으로써 스스로를 사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한 시대의 사유 이미지는 곧 사유의 본질, 사유의 쓰임 및 사유하고 있는 주체의 위치를 스스로 사유하는 이미지다."(38-9쪽) 이 대목은 <철학이란 무엇인가>로부터의 인용인데, 거기서 들뢰즈/가타리는 "영화를 일종의 인공지능, 데카르트의 잠수인형, 개념의 직조를 위한 기계로 간주한다." 여기서 상응관계에 놓이는 것은 특정한 이미지와 각 시대의 사유 전략이다.

이러한 전제하에 로도윅이 설명하는 것은 시간을 공간적으로 그려내는 방식의 차이로서 규정되는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의 구분이다. 운동-이미지는 시간에 대한 간접적 이미지를 제공하고, 시간-이미지는 직접적 이미지를 제공하다. "들뢰즈는 간격, 즉 포토그램, 쇼트, 시퀀스 사이의 공간이나 경계를 재고찰하는 한편, 영화가 시간을 공간적으로 표상하기 위해 이 간격들을 어떻게 조직하는지를 살피면서 이 비범한 발상을 이끌어낸다."(40쪽) 여기서 간격 개념은 러시아 영화감독 지가 베르토프에게서 차용하여 확장한 것인바, 베르토프는 <운동-이미지>에서 에이젠슈테인과 함께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감독이다(당연한 얘기지만, 시간-이미지를 대표할 수 있는 러시아 영화감독은 타르코프스키이다).

그리고 물론 베르그송을 읽은 독자라면, 들뢰즈의 '비범한' 발상 자체가 얼마만큼 베르그송에게 빚지고 있는지 헤아려볼 수 있을 것이다(특히 <의식에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들에 관한 시론>). 이참에 겸사겸사 읽어야 할 '베르그송' 목록을 나열해 보자.

 

 

 

 

이미지상으로는 세 권이 뜨는데,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아카넷, 2001 ), <창조적 진화>(아카넷, 2005) 외에 절판된 책이지만 <물질과 기억>(교보문고, 1991)이 필독서이다(<시론>의 영역본 제목은 <시간과 자유의지>인데, 이 제목이 내용파악에 더 적합하다. 판매량에도 더 긍정적이었을 테고. 기억에 베르그송이 동의했던 제목이다). 거기에 들뢰즈 자신의 <베르그송주의>(문학과지성사, 1996)를 덧붙여야 할 것이고. 들뢰즈에게서 베르그송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마이클 하트의 <들뢰즈 사상의 진화>(갈무리, 2004)가 친절하다(이런 식으로라면 '독서'라기보다는 '프로젝트'이지만).

<운동-이미지>에서 들뢰즈는 에이젠슈테인과 고전 헐리우드 영화를 별개로 다루지 않는다(이건 이상한 일이 아닌 게, 에이젠슈테인 자신이 고전 헐리우드 영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그리피스). 그들은 운동을 '열린 총체성'으로 설명하고자 했는데, 다르게 말하면 연속적인 운동을 단면으로 분할해서 미분하고 적분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소비에트 학파와 할리우드 영화의 실천은 결코 대립하지 않는다." 들뢰즈는 "소비에트 학파와 할리우드 영화가 본성상 서로 다르지 않은 운동-이미지의 두 가지 변별적 표명이라고 본다."(44쪽)

이들의 "운동-이미지에서 시간은 간격들로 환원되며, 이 간격은 운동 및 (몽타주를 통한) 운동의 연결로 정의된다. 그런 점에서 운동-이미지는 시간의 간접적 이미지만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1920년대 아방가르드 영화는 시간보다는 공간 및 운동에 대한 매혹을 천명한다. 시간의 조직화는 몽타주를 통한 운동의 재현에 귀속된다. 내러티브 영화와 아방가르드 영화 모두 운동의 문제에 강박적으로 집착했고, 바로 그 지점에서 기억과 지각에 대한 나름의 이론을 도출했다."(46쪽)

이것은 "운동-이미지의 산물인 정신기호도 마찬가지"인데, "한편으로는 연합(=연상)을 통한 연결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통합-분화를 통해 표현되는 팽창하는 전체가 있다."('통합-분화'는 '미분과 적분'(differentiation and integration)'이란 뜻도 포함하는 것으로 봐야 할 듯하다.) 여기서 "간격들과 전체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행동주의적이다. 이 관계를 분절하는 것은 갈등, 대립, 해결로 조직되는 '작용->반작용' 도식이다."(46쪽) '행동주의'는 심리학에서의 행동주의를 말하는 것이겠다. 즉, 반복과 강화 등에 의해서 조건화(conditioning)된다는 얘기이다.

"작용과 반작용의 운동은 미국적인 의지의 이데올로기, 즉 환경에 대한 지배와 이를 방해하는 장애물의 연결이 필연적이며 무한히 연장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는 문장은 중요해서가 아니라 오역이 포함돼 있어서 인용한다. 원문은 "This movement of action and reaction derives from an American ideology of will, a belief that the mastery of environments and opponents is inevitable and infinitely extendable."(12쪽)이다. 미국식 '의지의 이데올로기'란 "환경과 적대자들에 대한 지배는 불가피하며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는 신념"을 말한다.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에서 힌트를 얻고 있는바, 에이젠슈테인의 사유 도식에는 '운동중인 열린 총체성'(the changing whole of the open totality)이 무한한 확장과정을 재현할 수 있다는 믿음이 함축돼 있으며, "부분들에서 집합들로의 통합, 그리고 집합들에서 전체들로의 통합은, 이미지와 세계와 관객이 진리를 재현하는 거대한 이미지 속에서 하나가 될 때 절정에 달한다."(47쪽) 그리고 그런 점에서 에이젠슈테인은 "시네마토그래프의 헤겔인 양 이 개념의 거대한 종합을 표현했다(=제시했다)."

그리고는 시간-이미지로의 이행이다. "들뢰즈가 유기적 운동-이미지를 '고전 시기'(=고전주의 영화)에, 그리고 시간-이미지를 '모던 시기'(=모더니즘 영화)에 대응시킬 때, 이는 전자가 자연적으로 진전해서 후자가 도출됐다는 말도 아니고, 모던 형식이 고전 시기 영화에 대한 비판으로서 반드시 그에 대항한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 전이(=이행)는 사유의 가능성 및 믿음의 본성에서 일어나는 점진적 변형을 뚜렷이 재현한다." 즉, "운동-이미지가 유지하는 유기적 체제는 유리수적인 나눔들을 열결함으로써 진행되며, 궁극적으로 총체성과의 연관 속에서 진리의 모델을 투사한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가 유럽 영화계에 몰아치면서 이에 대한 변화가 생겨났고, 그 결과로 이전과는 다른 '상상적 관찰' 형식이 나타났다... 그 결과 운동-이미지의 작용-반작용의 도식이 붕괴되기 시작하고, 지각과 정서의 본성에 근본적 변화가 일어난다... 혹자는 즉각 안토니오니의 영화 <정사>(1960)와 같은 영화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무언가를 기다리지만 결국 지속으로서의 시간이 경과하는 것만을 목격하는 인물들이 남는다." 시간-이미지가 탄생하는 장면쯤 될까?

거듭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밝히자면, "들뢰즈가 시간-이미지의 비유기적 체제 또는 결정체적 체제라고 일컫는 것은 전후 재건이라는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출현한다. 그러나 모던 영화(=모더니즘 영화?)가 시간의 직접적 현시라고 할 때, 시간-이미지의 출현이 반드시 운동-이미지의 진화에 따른 결과인 것은 아니다. 들뢰즈에게 있어 영화사는 더 완전한 시간의 재현을 향한 진보의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시간-이미지의 출현이 시사하는 것은, 사람들이 시간과 사유의 관계를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상상하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새로운 기호로 재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는 시간에 대한 각기 다른 사유방식과 연관되며,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통시적임과 동시에 공시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새로운 기호는 확률물리학의 도입에 따라 시간 이미지에 발생한 변화와 생명과학의 발전을 통해 사유의 이미지에 발생한 변화의 결과다." 에이젠슈테인이 유기적 운동-이미지를 대표했다면, 알랭 레네는 결정체적 시간-이미지를 대표한다. 러시아 영화사에서라면, 에이젠슈테인과 타르코프스키가 각각을 대표하겠다. 상식적인 대립쌍을 가져오자면, 두 사람의 대립은 '과학과 시'의 대립인데, 이걸 이미지 유형학에 적용하여 운동-이미지는 과학적이고 시간-이미지는 시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어지는 설명은 시간-이미지의 대표적인 감독인 레네의 작품들과 또다른 탁월한 사례로서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인디아 송>(1975)에 대한 분석이다. 이 영화에는 두 개의 '탈속적 목소리'가 들어가 있다고 하는데, 'intemporal voices'를 국역본 <시간-이미지>에서는 '비시간적 목소리'로 옮기며, 나로서도 그게 더 적절하다고 본다. 상대적으로 규정되어 있고(=규정적이고) 예측가능한 관계를 형성하는 유기적 운동-이미지와는 달리, 이(런) 영화(들)의 시간-이미지는 개연적이다. "시간-이미지가 산출하는 간격의 자율성은 모든 쇼트를 자율적인 것으로 그려낸다... (이때) 모든 간격은 확률물리학이 말하는 분기점, 즉 어디로 선회할지 예측할 수 없는 지점이 된다. 운동-이미지의 연대기적 시간은 불확실한 생성의 이미지로 파편화된다."(52쪽)

물론 이러한 시간-이미지가 '불확실성의 시대'와 관련돼 있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모던 영화에서 만들어진 시간의 이미지가 무질서와 예측 불가능성에 대한 문화적 감각에서 피어났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동시에, 이 이미지는 다양한 것, 여러 가지의 것, 비동일자를 수용함으로써 시간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충전시킨다." 더불어 현대물리학과의 관련성: "들뢰즈가 시간-이미지에서의 간격을 무리수적인 나눔이자 공약 불가능한 관계로 정의했을 때, 그는 프리고진의 '분기점'과 맞먹는 주사위를 이미지와 사유의 관계에 던진 셈이다."(53쪽) '분기점'이란 어디로 튈지 예측 불가능한 지점이다. 시간-이미지는 그러한 '비결정성'에서 비롯한다.

정리해보자. "들뢰즈에게 있어 시간의 영화는 두 가지를 생산한다. 하나는 총체화할 수 없는 과정인 사유의 이미지이며, 다른 하나는 예측 불가능한 변화인 역사에 대한 감각이다... 운동 이미지가 사유와 이미지의 관계를 동일성과 총체성의 형태로 파악하는 지점에서 시간-이미지는 이 관계를 비동일성의 형태로 상상한다. 시간-이미지에서 사유는 탈영토화된 유목적 생성이다."(55쪽) 마지막에 두 단어가 누락됐는데, "사유는 탈영토화된 유목적 생성이며 창조적인 행위이다."로 정정하면 된다. 들뢰즈는 이를 '희소식'이라고 부른다(이 '희소식(good news)'은 '복음'으로 옮겨지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하여간에 이상이 "영화의 짧은 역사"에 대한 짧지 않은(!) 브리핑이었다.

05. 07. 27-8.

P.S. 들뢰즈는 한국의 영화비평가나 영화학도들에게 가장 애용되는(더러는 남용되는) 이름이다(요즘은 거기에 지젝이 도전장을 내민 형국이다). <문학판>(05년, 봄호)에 실린 "한국영화평론, 어디로 갈 것인가"란 정승훈의 글도 예외는 아니다(들뢰즈와 지젝으로 가야 한다?). 거기서 적용되고 있는 들뢰즈의 이미지론을 잠시 따라가 본다. 

"유기적인 전체 구조 속에 현실을 지속적으로 재현하는 '운동-이미지'는 모든 영화의 연대기와 서사를 이끄는 현행적 이미지다. 그것은 재인 가능한 하나의 시간 덩어리로 통합되는데, (임권택의) <하류인생>이 단숨에 주파하는 한국사회를 재현하는 균질적이고 비가역적인 시간이 그러하다. 그 안에서 오이디푸스화된 개인과 사회는 결핍된 욕망을 좇아 허덕이며, 그 바깥에서 아버지 임권택을 내셔널 시네마의 한 전범을 반복한다."

"반면 현실이나 진리를 재현하지 않는 '시간-이미지'는 운동-이미지의 밑바닥에 순서 없이 뒤섞이고 분열하는 시간, 곧 현실의 잠재태를 보여준다. (홍상수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순수한 첫사랑은 이미 더럽혀진 백지고 계속 덧씌워지는 흔적이며 결코 도래하지 않는 미래다... 그 안에서 오이디푸스는 끝내 집에 돌아가지 않으며, 그 바깥에서 아들 홍상수는 내셔널 시네마의 한 전범을 해체한다."

그러므로 "이처럼 당대를 상징하는 임권택/홍상수가 근대/탈근대의 맥락과 더불어 오이디푸스/탈오이디푸스, 운동-이미지/시간-이미지를 대략 암시할 수 있다면, 한국영화 전체의 내재적인 평면을 그러한 단절적인 계기를 통해 새롭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도식화에 따르는 유보: "물론 한국영화를 억지로 두 이미지 유형을 따라 서구식 고전영화/현대영화로 쪼갤 순 없고, 엄밀하게 시간-이미지를 보여주는 영화도 없다. 이런 접근이 또 한 판의 서구이론 빌려쓰기에 그칠 우려도 크다. 하지만 지젝과 들뢰즈가 학술적 권위로만 포장된 채 저널 비평에선 무시되거나 미미한 지적 액세서리로 전락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어지는 두 문장은 내가 따라가기 어려운 문장들이다: "그간 한국영화는 로컬리티의 산물이었고 세계화 추세도 지시적 맥락에서 논의됐지만, '한국'영화기 이전에 '영화'로서 그것은 비사유/비감각의 영역을 사유하고 감각케 하는 이미지의 힘을 품고 있다. 점점 확산되는 초국가성(transnational)은 지시성 층위뿐 아니라, 정신분석과 이미지 존재론을 가로지르는 '실재' 차원에서도 논의될 수 있는 것이다." 내 사유/감각으로는 쫓아갈 수 없으므로 건너뛰기로 한다.

"꼭 지젝이나 들뢰즈가 대안적 방법론이라는 게 아니라, 임권택과 홍상수 간의 간격 등을 통해 한국영화라는 동일성에 잠복한 영화 이미지 일반의 이질성을 고고학적으로 추적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한국영화와 한국영화 평론이 함께 진화하는 길도 여기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정이 그러하므로, 앞으론 '저널 비평'을 읽는 데도 상당한 지력('지적 액세서리')이 동원되어야 할 듯하다. 지젝이나 들뢰즈는 기본으로 읽어줘야 하는 것이다. 그게 '기본'이라면, 비평가들은 곧 다른 걸 빌려올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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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7-28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가서 훗날 공부해 볼려고 합니다.
이미 퍼갔어요.
항상 제게 공부할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쟈 2005-07-28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만에요.^^

palefire 2005-07-29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기계]의 1장 '영화의 짧은 역사'에 대한 알찬 브리핑의 꼬리말로 [문학-판]에 실린 정승훈의 시론적 글을 몽타주한 건 흥미롭군요. 하나는 [시간기계]의 로도윅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동아시아 내셔널 시네마를 시간-이미지의 새로운 국지적(그리고 동시에 전지구/초국가적) 발원지로 보고 있다는 점, 다른 하나는 (사소한 우연의 일치지만) [시간기계]의 역자후기에 나오듯 역자와 정승훈씨가 절친한 친구라는 점이죠. 들뢰즈는 한국의 영화학도나 영화비평가들에게 '충분히 말해지고 사유되지' 않았다고 봅니다. [시네마]를 어느 정도 다룬 국내 논문들은 몇 있지만 영화학과 계열에서 나온 건 제가 알기론 없습니다. 적어도 들뢰즈의 영화적 사유에 대한 논의는, 한국의 영화학이라는 지형에서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 그러나 서서히 생성될 가능성이 있는 - ' 논의라고 봅니다. 지젝의 경우는 비단 영화학만의 유행은 아니겠죠(최근의 문학평론들, 특히 [문학동네] 최근호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젊은 평론가들의 글은 후기라캉-지젝적 독해를 적용시키기 위해 분투하더군요). 암튼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저널비평에는 아무리 들뢰즈와 지젝이 외삽되더라도 '남용되고 오용될 수 있는' 점은 인정하지만(그런 글들이 적지 않으니까요. 특히 정신분석학은 정말 그렇죠), [문학 판]의 정승훈씨의 글은 저널비평의 틀에서 단순히 비평적 분석의 메스로서 지젝과 들뢰즈가 유효하다는 식의 단순한 메타비평을 넘어선다는 점입니다. 거칠고 산발적이고 때로는 '오버'하는 흔적이 있지만, 그 글은 Korean New Wave 이후의 한국영화의 무의식과 이미지 모두를 지도그릴 수 있는 이론적 틀 - 저널비평의 굴레에 안주하지도 않고, 그 안에서는 충분히 소화될 수도 없는 - 을 모색하려는 글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로쟈 2005-07-29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로선 <시네마>가 '영화'에 대한 독창적인 사유, 혹은 영화'의' 독창적인 사유를 담고 있지만, 그것이 일반화될 수 있는 것인가, (영화학 전문지가 아닌) '저널 비평'에서 다루어질 만큼 '대중화'될 수 있는가에 대해선 회의적입니다(평론가 김영진씨도 그런 류의 의견을 피력하더군요. 라캉-지젝의 용어들이 '저널'지에 마구 들어오는 경향에 대해서 비판하면서. 예컨대, 상상계니 상징계니 하는 용어들을 <씨네21> 같은 잡지에서 남용해도 되는가 하는). 그건 <시네마> 같은 책을 영화를 관람하는 대중이 읽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 회의적인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아시다시피, 전공자들조차도 오역/오해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게 들뢰즈의 책들입니다).

해서, 정승훈씨의 주장을 저는 좀 오버하고 있는 것으로 읽었습니다(그가 '저널 비평'을 예로 들었기 때문에). 원론적인 것이긴 하지만, 영화비평과 영화학, 영화연구가 동일시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이죠. '저널'이란 게 얼마만큼의 고급한(대중이 보기엔 난해한) 담론들을 소화할 수 있는 것인지, 그런 담론들을 다루면서도 여전히 '저널'(잡지)로 남아있을 수 있는 것인지 등등. 더구나 영화저널 같은 경우는 문학잡지만큼 충분한(?) 지면을 이론적 담론에 할애하지도, 할애할 수도 없는 형편인데 말입니다. 해서, 제가 기대하는 건 들뢰즈식의 비평이나 철학을 담지한 단행본입니다(비평의 장소로 저널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겠죠. 더구나 저널 비평에서 다 '소화될 수도 없는' 문제의식이므로). <들뢰즈의 극장에서 그것을 보다> 같은 수준이 아닌, 보다 본격적인, 보다 고급스러우면서도 갖은 궁상들을 돌파할 수 있는...

palefire 2005-07-29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널비평과 이론은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고 후자의 진지전이 더욱 중요한 것이죠. (정승훈씨의 주장은 저널리즘에 국한된 것은 아니라고 저는 읽었습니다.) 그래서 국내에도 다양한 쿼털리가 필요한 것이고, 영화학뿐 아니라 교차학제적([Journal of Visual Culture], [October], [Boundary 2] 등)인 쿼털리들이 많이 나와야 하는 것이죠. 이 점에 대해 저는 향후 몇 년간은 회의적이라고 봅니다. 그렇더라도 긴 시간과 긴 호흡을 요하는 작업들이 결국은 나중에 말을 하게 되죠. 영화학에도 그런 때가 분명히 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yoonta 2005-08-09 0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들뢰즈의 사상을 보면 느끼는 인상이 지나치게 계열과 질서로부터 도피하려는 인상이 강하다는 점입니다. 데카르트나 헤겔철학의 전통에 대한 반기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 같기는 하나..그 반대편 극으로 향함으로써 또다른 편향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 말이죠..소위 그의 유목적 사유라던가..영화론에서 이야기하는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 사이의 도식적 구분들도 마찬가지 편향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는 어떤 대상을 보는 서로다른 시각의 차이일 뿐이고..양자가 서로 상보적인 관계인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운동-이미지가 시간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거나..시간-이미지는 시간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는 표현자체가 운동이 가지는 공간적 특성의 의미들을 축소하고 시간은 그자체를 직접적으로 현시함으로써만 올바르게 인식 가능한 것처럼 간주하는 편향이 느껴지기 때문이지요..다시말하면 공간-이미지를 단지 데카르트적 인식방법으로서의 국소적 사유방식(유리수적 연결혹은 분할들)로..시간-이미지를 비국소적 사유(무리수적 나눔)로 본다는 것은 또하나의 편향이라는 것이죠..
베르그송의 지속의 개념에서 나온 운동과 이미지 그리고 물질과의 동일성의 장점들을 시간-이미지로 변형시킴으로써 시간을 공간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사유...
물리학에 비유하자면..뉴튼이나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이 가지는 공간적 국소성을 양자역학이 가지는 공간적 비국소성으로 대체하려는 경향같은 것이라고나 할까요....하지만 오늘날 이러한 양자역학적 비국소성과 시간의 가역성들이 보다 통합적 차원으로 설명되는 끈이론과 같은 현대물리학의 세계에서는 공간과 시간의 상보성..그리고 극소와 극대를 밀접한 연관으로 설명하는 방식들을 생각해볼 때..들뢰즈는 베르그송의 지속에서 파생된 운동-이미지의 혁명적 측면을 데카르트혹은 헤겔이 가진 낡은 시각으로 또다시 바라보는 오류를 공간-이미지 와 시간-이미지를 도식화하는 과정속에서 발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군요...

로쟈 2005-08-09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댓글을 달아주셨네요! 들뢰즈에 대한 책들을 남못지 않게 갖고는 있지만, 제가 두루 꿰고 있는 편이 아니어서 yoonta님의 평을 다 따라가지는 못하겠습니다. 다만, '한물간' 베르그송주의가 들뢰즈 덕분에 얼마나 때깔있는 모습으로 되살아나는지 간혹 경탄하게는 됩니다(들뢰즈가 아니라 베르그송이 한턱 내야 하지 않을까도 싶고). 들뢰즈 철학을 저는 니체 철학과 마찬가지로 아티스트 철학 정도로 분류하고 싶습니다. 그럴 경우 '진위'보다는 얼마나 멀리 가느냐가 더 문제일 거 같고, 그런 점을 평가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게 맞는 소리야?"라고 따지는 건 분석철학쪽에서 능수능란하게 하겠지만(그래서 들뢰즈 정도는 철학자로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가령 탁석산씨나 강유원씨의 평가), 그런 두 갈래 길이라면, 저는 들뢰즈의 길을 선택할 거 같아요. 소위 '꼰대'들보다는 '아티스트'를 선호하는 취향이라서...

니브리티 2005-08-10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알기론 yoonta님이 말씀하신 것(로쟈님의 글에서 따온 것이지만, 맥락상)처럼 <운동-이미지가 시간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거나..시간-이미지는 시간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라는 표현을 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운동-이미지(구체적으로는 행동-이미지)의 위기를 통해 새로운 시지각적, 음향적 기호가 '시간의 간접적인 이미지'를 제공하는 한편 '직접적인 시간-이미지'가 나타난다...는 말을 독해할 때 전자의 <시간의 간접적인 이미지>와 <직접적인 시간-이미지>의 구분은 전자가 감각-운동 도식을 통해 시간을 운동에 종속시키는 반면 후자는 그에 대한 반작용이거나 운동과 대립하는 시간이 아니라(이 경우는 여전히 시간의 간접적인 이미지일 뿐이고 감각-운동 도식에 의한 해석일 뿐이겠죠) 시간 그 자체로서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죠. 결코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가 대립되거나, 발전된 형태의 이미지거나 보다 나은 이미지, 혹은 시간-이미지로만 이뤄진 영화가 있는 건 아니니까요. 사실 모든 영화는 이 두 이미지가 서로 혼재되어 있는 건데(고전영화에서도) 어떤 관점이 변화하는 것일 뿐이죠. 하여튼 들뢰즈의 분류법이 종종 둘 아니면 셋의 도식화로 내비칠 염려가 있긴 한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대립/상보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도 말했지만, 들뢰즈에게서 분류는 '개념의 창안'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그리고 들뢰즈의 사상이 계열과 질서로부터 도피하는 인상을 받으셨다면, 정반대라고 말해야 할 듯 싶습니다. 오히려 들뢰즈는 계열이란 말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특히 <의미의 논리>는 전체가 계열에 대한 얘기라고 해도 무방하죠. <시간-이미지>에서도 세 가지 시간-이미지에 대해 얘기하면서 마지막 세번째의 이미지를 "시간의 계열로서의 시간-이미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시네마> 전체에서 하고 싶은 말도 결국은 두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라기보다는, 그것들이 "사유를 사유하게 만드는 (폭력적인)기호"로서, 즉 사유의 이미지인 "뇌"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하는 거겠죠.

yoonta 2005-08-10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계열이란 단어는..제가 무심코 댓글쓰다보니 오타비슷하게 나온 단어라..
수정할까 하다가 걍 냅둔건데요..nivritti님 때문에 수정해야 겠네요.
계열은 위계의 오타라고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nivritti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들뢰즈는 계열을 위계나 (위계적)질서가 아닌 차원에서 중요하게 여기죠..시간-이미지에서도 님말씀대로 계열이란 말이 나오죠...니체적 순환 혹은 원환이라는 방식으로 자주 언급되다는 점도 알고 있고요..그리고 운동-이미지의 간접적 성격과 시간-이미지의 직접적 성격에 대한 저의 표현은 님이 지적하신 맥락과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시간-이미지가 운동-이미지에 대해서 "반작용이거나 운동과 대립하는 시간"이라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단 운동-이미지에서 시간-이미지로의 이행이라는 문제를 들뢰즈가 했던 것처럼 "개념의 창안 혹은 개념의 역사"의 차원의 문제는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네요...들뢰즈 철학의 개념적 특이성을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문제이긴 하지만요...

제가 위에서 간략히 이야기했던 것은 운동-이미지라고 하는 베르그송적 개념 내부에 이미 시간-이미지적 요소들을(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차원에서)내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지속"이라는 개념으로 물체와 운동 그리고 이미지의 동일성을 주장한 베르그송적 '개념의 창안"속에 이미 시간-이미지의 요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죠..따라서 들뢰즈가 시간-이미지속에서 발견하고자 했던..소위 크리스탈적 묘사의 "특이성" 혹은 무리수적 무한성에 근거한 "잠재성"의 사유들은 베르그송적 사유혹은 개념들로부터 자신의 시간-이미지개념의 "특이성"을 강조하기 위한 하나의 편향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본겁니다..

이부분에 대한 자세한 논증은 저도 아직 공부중이라 유보중입니다만..그 하나의 방법으로 제가 위에 제시한 현대물리학의 초끈이론적 통합이 하나의 실마리가 되지않을까하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해보았던 것이고요...그러한 관점들이 들뢰즈의 사유의 비판적 독법의 하나로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것입니다.

니브리티 2005-08-10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이미지는 운동-이미지에서 이행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관점이 바뀌는 것일 뿐입니다. 들뢰즈에게 있어서 기호와 이미지는 구분은 있지만 거의 같은 의미로 쓰이죠. 즉 우리의 관점이 바뀌는 것--우리를 사유하게 하는 것은 이 이미지의 폭력적인 기호의 성격 때문인 겁니다. 그리고 들뢰즈는 베르그손에 대한 네 개의 주석을 통해 논의를 전개해내고, 덧붙여서 라이프니츠를 참고하고 있습니다. 베르그손에 대한 사유를 조금 더 밀고 나갔다고 해야지, 범박하게 베르그손과 다르게 보이려는 편향적 사고를 가졌다고 말하는 건 편견이겠죠. 그리고 앞에서 <간접적인 시간-이미지>가 아니라, <시간의 간접적인 이미지>라고 한 점을 주목해주세요. 후자는 <시간의 직접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직접적인 시간-이미지>입니다.... 초끈이론에 대한 언급은 어떤 철학하시는 분 사이트에서 본 기억이 있는데요.....그것이 들뢰즈에 대한 비판적 독법으로 가능하기 위해선 들뢰즈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와 접근이 필요할 듯 합니다...

yoonta 2005-08-10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맞습니다..베르그송의 사유를 더 밀고 나간것이죠..^^ 그것이 편향이냐 아니냐하는 것은 저의 개인적 판단이기 때문에 다른 분들의 경우에는 각자가 들뢰즈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따라 달라지는 문제겠죠..
그리고 "시간의 이미지"가 아니라 "시간-이미지"라고 들뢰즈가 강조한 것 역시 알고 있습니다..^^
초끈이론이야기야 뭐 제가 자세히 이야기한것도 아니니 스킵하셔도 무관합니다.
들뢰즈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접근 물론 필요하죠..그러나 정확한 이해를 위한 비판적 접근이란 방법도 존재한다는 점도 이야기하고싶네요..

palefire 2005-08-10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새 이토록 풍요로운 이야기들이 오갔군요. 요즘은 하고싶은 공부와 동떨어진(정확히 말하면 하고싶은 공부를 더 하기 위해 하지 않을 수 없는) 공부하느라고 정신이 없기에 이런 곳에 종종 들리면서 브레인스토밍을 하는 정도인데 심화시켜 생각해 볼 가닥들이 여러 개 있는 듯합니다. yoonta님의 현대과학과 들뢰즈의 사유와의 새로운 대면에 대한 시도도 그렇고, (초면은 아닌) nirvitti님의 다이제스트한 답글도 유익해 보입니다.

yoonta 2005-08-10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들뢰즈의 운동-이미지, 시간-이미지와 관련해서..특히 알랭바디우의 비판은 상당히 풍요로운 논점들을 제공하는 것 같은데요..국내에서는 바디우의 들뢰즈비판에 대해 너무 소홀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개인적으로는 바디우도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이리스 2005-08-22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토록 긴 댓글들이 어우러진것은 정말 오랜만에 봅니다. ㅠ.ㅜ 어흑..
 

지난달 4일자 <가디언>지에 유럽헌법 찬반투표에 대한 지젝의 기고문이 실렸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일단 원문을 여기에 옮겨놓는다(우리말 번역도 어디에 돌아다닐 듯싶은데 찾지 못했다). 내용 브리핑은 요즘 바쁜 일들이 마무리 된 이후에 하도록 한다(아마도 8월 이후가 될 것이다). 성미가 급하신 분들은 원문을 참조하시길(더 급하신 분들은 번역문도 올려주시면 고맙겠다). 

The constitution is dead. Long live proper politics 

Like Amish teenagers, Europe's voters were not offered a truly free choice

Slavoj Zizek
Saturday June 4, 2005
The Guardian

Amish communities practise the institution of rumspringa. At 17 their children, until then subject to strict family discipline, are set free. They are allowed, solicited even, to go out and experience the ways of the modern world - they drive cars, listen to pop music, watch TV and get involved in drinking, drugs and wild sex. After a couple of years they are expected to decide: will they return to be full members of the Amish community or leave it forever and become ordinary American citizens?

But far from being permissive and allowing the youngsters a truly free choice, such a solution is biased in a most brutal way. It is a fake choice if ever there was one. When, after long years of discipline and fantasising about the illicit pleasures of the outside world, the adolescent Amish are thrown into it, of course they cannot help but indulge in extreme behaviour. They want to test it all - sex, drugs and drinking. And since they have no experience of regulating such a life they quickly run into trouble. There's a backlash that generates unbearable anxiety, so it is a safe bet that after a couple of years they will return to the seclusion of their community. No wonder that 90% of Amish children do exactly that.

This is a perfect example of the difficulties that always accompany the idea of a "free choice". While the Amish adolescents are formally given a free choice, the conditions they find themselves in while they are making that choice make the choice itself unfree. In order for them to have an effectively free choice they would have to be properly informed on all the options. But the only way to do this would be to extract them from their embeddedness in the Amish community.

So what has all this to do with the French no to the European constitution, whose aftershock waves are now spreading all around, immediately giving a boost to the Dutch, who rejected the constitution with an even higher percentage? Everything. The voters were treated exactly like the Amish youngsters: they were not given a clear symmetrical choice. The very terms of the choice privileged the yes lobby. The elite proposed to the people a choice that was effectively no choice at all. People were called to ratify the inevitable. Both the media and the political elite presented the choice as one between knowledge and ignorance, between expertise and ideology, between post-political administration and the old political passions of the left and the right.

The no was dismissed as a short-sighted reaction unaware of its own consequences. It was charged with being a murky reaction of fear of the emerging new global order, an instinct to protect the comfortable welfare state traditions, a gesture of refusal lacking any positive alternative programme. No wonder the only political parties whose official stance was no were those at the opposite extremes of the political spectrum. Furthermore, we are told, the no was really a no to many other things: to Anglo-Saxon neoliberalism, to the present government, to the influx of migrant workers, and so on.

However, even if there is an element of truth in all this, the very fact that the no in both countries was not sustained by a coherent alternative political vision is the strongest possible condemnation of the political and media elite. It is a monument to their inability to articulate the people's longings and dissatisfactions. Instead, in their reaction to the no results, they treated the people as retarded pupils who did not understand the lessons of the experts.

So although the choice was not a choice between two political options, nor was it a choice between the enlightened vision of a modern Europe, ready to embrace the new global order, and old, confused political passions. When commentators described the no as a message of befuddled fear, they were wrong. The real fear we are dealing with is the fear that the no itself provoked within the new European political elite. It was the fear that people would no longer be so easily convinced by their "post-political" vision.

And so for all others the no is a message and expression of hope. This is the hope that politics is still alive and possible, that the debate about what the new Europe shall and should be is still open. This is why we on the left must reject the sneering insinuations of the liberals that in our no we find ourselves with strange neo-fascist bedfellows. What the new populist right and the left share is just one thing: the awareness that politics proper is still alive.

There was a positive choice in the no: the choice of choice itself; the rejection of the blackmail by the new elite that offers us only the choice to confirm their expert knowledge or to display one's "irrational" immaturity. Our no is a positive decision to start a properly political debate about what kind of Europe we really want.

Late in his life, Freud asked the famous question " Was will das Weib? ", admitting his perplexity when faced with the enigma of female sexuality. Does the imbroglio with the European constitution not bear witness to the same puzzlement: what Europe do we want?

To put it bluntly, do we want to live in a world in which the only choice is between the American civilisation and the emerging Chinese authoritarian-capitalist one? If the answer is no then the only alternative is Europe. The third world cannot generate a strong enough resistance to the ideology of the American dream. In the present world constellation, it is only Europe that can do it. The true opposition today is not between the first world and the third world. Instead it is between the first and third world (ie the American global empire and its colonies), and the second world (ie Europe).

Apropos Freud, Theodor Adorno claimed that what we are seeing in the contemporary world with its "repressive desublimation" is no longer the old logic of repression of the id and its drives but a perverse pact between the superego (social authority) and the id (illicit aggressive drives) at the expense of the ego. Is not something structurally similar going on today at the political level: the weird pact between the postmodern global capitalism and the premodern societies at the expense of modernity proper? It is easy for the American multiculturalist global empire to integrate premodern local traditions. The foreign body that it cannot effectively assimilate is European modernity.

The message of the no to all of us who care for Europe is: no, anonymous experts whose merchandise is sold to us in a brightly coloured liberal-multiculturalist package will not prevent us from thinking. It is time for us, citizens of Europe, to become aware that we have to make a properly political decision about what we want. No enlightened administrator will do the job for us.

· Slavoj Zizek is the international director of the Birkbeck Institute for the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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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한 장마가 끝나고 무더위가 시작됐다는 게 이맘때 쓰게 되는 표현이지만, 올해는 '지리한 장마'가 언제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무더위가 시작된 듯하다. 밤마다 잠깐씩 짬을 내어 아파트 단지 사잇길을 왕복으로 걸어다니는 '걷기 운동'을 지난주부터 시작했는데, 비 때문에 거른 기억이 없는 걸로 보아 장마가 이름값을 하지 못한 지는 좀 됐다고 봐야겠다. 장마 스스로가 지레 지리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문득, 장마란 무엇인가, 혹은 나는 무엇으로 장마인가, 나는 이대로 장마여도 좋은가, 등등의 의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는지도.

일이 꼬이기 시작하는 건 그때부터이다(물론 그 전에 일이 꼬였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는 진단도 가능하다). 그리고 그런 일의 변주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왜, 나는 장남인가, 어쩌다 나는 가장이 됐는가, 에서부터 세상은 어째서 이 모양인가, 에 이르기까지. 대답없는 질문을 던지는 건 (하이데거 말대로) 현존재의 특권이다. 그리고 여름에 피서는커녕 책읽을 시간도 감지덕지하는 인간은 그런 특권을 좀 남용해도 좋겠다(그런 소리가 피서지에까지 들릴 리는 만무하니까). 이왕이면 이런 엄포도 놓아가면서. "책, 내가 너 아니면 읽을 게 없을 줄 알아?!"

 

 

 

 

그런 엄포 때문은 아니겠지만, 책들은 휴가를 반납한 듯이 계속 쏟아지고 있다. 그런 책들 가운데, 새로이 맘에 드는 얼굴, 그러니까 '뉴 페이스' 몇을 꼽아보기로 한다. 첫번째로 꼽는 건 빌헬름 라이히의 <오르가즘의 기능>(그린비). 얼마전에 나왔던 두툼한 전기 <빌헬름 라이히: 세상을 향한 분노>(양문)가 함께 읽어볼 만한 라이히 컬렉션이 되겠다(알라딘에는 6권의 책이 뜨는데, 이미지가 제공되는 건 위의 3권이다. 물론 거기에 적어도 두 권쯤은 더 추가되어야 한다.). 80년대에 출간됐었던 <파시즘의 대중심리>(현상과인식, 1986)도 조만간 재번역되어 출간된다고 하니까 기다려볼 일이고. 흔히 '프로이트 좌파'로 분류되는 라이히 입문서로서 내가 추천할 만한 것은 <프로이트 급진주의 : 빌헬름 라이히, 게자 로하임, 허버트 마르쿠제(The Freudian left)>(종로서적, 1981)이다. 내가 '라이히'란 이름을 처음 접해본 책이고 나에게 그 이름을 확실하게 각인시켜준 책이다(덕분에 만화로 된 라이히 전기도 읽었다). 

프로이트 좌파란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주의를 접목시켜보고자 한 이론가들을 가리키며, 라이히와 함께 거명된 이름들 중(로하임의 저작이 번역돼 있는가?) 마르쿠제를 떠올려보면 이들의 구상이 어떤 것인지 짐작해볼 수 있다. 각자의 진로는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성해방과 계급투쟁을 연관지어 사고하고자 했던 것이고, 이들은 주류 마르크스주의로부터는 모두 찬밥의 대우를 받았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이다. 물론 라이히의 경우가 가장 유별나지만(그는 말년에 '오르곤 에너지' 연구에 몰두하다가 학계로부터 따돌림 당하고 미국 식품의약국에도 제소되어 복역하다가 감옥에서 죽었다). 그 유별난 사람의 유별난 생각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라면, 라이히의 책 두어 권쯤 들고 피서지로 향하면 되겠다(물론 연인과 동행하면서 <오르가즘의 기능>을 들고갔다간 라이히 이상으로 따돌림 받을 수 있다. 그 점은 주의하시압).

 

 

 

 

두번째로 꼽고 싶은 건 신간 들뢰즈 연구서로서 키스 안셀 피어슨의 <싹트는 생명(Germinal life)>(산해)이다. 부제는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인데, 들뢰즈 연구서를 좀 뒤적여본 사람이라면 피어슨이란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니체와 베르그송 연구서를 갖고 있는 소장 학자인데, 언젠가 한번 그의 논문을 읽고 믿음직 하다 싶어서 그의 연구서라면 모두 복사해둔 적이 있다. 그런 그의 책이 최초로 우리말 번역을 얻은 것(책의 원서는 내 책상 머리에 몇 년째 꽂혀 있는 중이다). 번역은 국내의 대표적인 들뢰지안의 한 사람인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공동대표가 맡았다. 같은 역자가 이전에 옮긴 <들뢰즈의 생명철학>에 이어지는 것일 텐데, 생명철학은 들뢰즈에 대한 나의 세 가지 관심사 중 하나이다. 다른 두 가지는 언어철학과 영화철학(국내에 소개가 좀 빈약한 건 언어철학쪽이다. 해서 르세르클의 <들뢰즈와 언어> 같은 책도 번역되어야 구색이 맞다고 본다).

역자는 후기에서 들뢰즈 철학의 요체로 "'잠재적인 것(the Virtual)'을 규명하는 것"이라고 규정하는데, 그 '잠재적인 것'의 대표적인 사례가 나로선 '배아줄기세포'가 아닌가 한다(그건 '기관없는 신체'이기도 하다). 들뢰즈의 생명철학이 윤리학적 함축도 가질 수 있는 건 그런 때문일 것이다. 역자는 또다른 빼어난 들뢰즈 연구서로서 마누엘 데 란다의 저작을 거명하고 있는데, 이쯤에서 내가 기대하는 책은 지젝의 들뢰즈론 <신체 없는 기관>이다. 이에 대해서는 재작년 내한 강연의 한 주제로 지젝이 다루기도 했다(<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 참조).

 

 

 

 

세번째 책은 엔디 매리필드의 <매혹의 도시, 맑스주의를 만나다(Metromarxism)>(시울)로 '도시 맑스주의'란 새로운(?) 분야를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소개에 따르면, "맑스가 살았던 185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도시와 맑스주의의 관계를 맑스를 포함한 엥겔스, 벤야민, 레페브르, 드보르, 카스텔, 하비, 버먼 등과 같은 일련의 맑스주의자들의 견해를 도시문화학이라는 필터에 맞추어 전기적이면서 변증법적인 방식으로 서술한 도시맑스주의 개괄서." 최근의 관심사 하나와 맞아떨어지기에 구미를 당기는 책이다. 이 '도시맑스주의'라는 건 적어도 나에겐 '사이버맑스주의'보다는 흥미로운 주제이다.  


      

 

 

 

네번째로 꼽을 책은 오규원 신간 두 권이다. 문학과지성 시인선의 301번째 책으로 나온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가 그의 시집이고, <날 이미지와 시>가 그의 시론이다. 아마도 지난주에 신간 소개를 했더라면 이 책들을 제일 먼저 꼽고 좀 장황한 얘기들을 늘어놓았겠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고 그 사이에 바람이 좀 빠져버렸다. 시집과 시론집은 내가 아는 '오규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데, 시집의 해설을 쓴 정과리에 따르면 그 '오규원'은 '절대 관념의 탐구자'로서의 오규원이었다(흔히 김춘수와 비교되는). 그리고 그런 한에서 그는 한국시의 현상학자이며, 후설이다(한국시의 하이데거는, 릴케와 횔덜린은 누구인가?).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몇 마디 하려면 좀더 많은 지면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정과리만큼은 아닌데, 그는 70쪽 분량의 시집에 60쪽이 넘는 해설을 붙여놓았다.

그가 '독자'라는 주어로 그런 '민폐'를 독자 일반에게 떠넘기려는 건 좀 볼썽사나운 수작이다. 그는 오규원 시에 대해서 '안에서 안을 부수는 공간'이라고 이름붙인바 있는데, "하지만 독자는 얼마 전 <르몽드>의 기자가 케르테스의 소설에 대해 똑같은 명칭을 쓰는 걸 읽고는 혼자 즐거워한다."에서 혼자 즐거워한 주체(주어)는 정과리이지 독자 일반이 아니다. 그가 독자라는 제유를 통해서(라도) 독자의 자리를 독점하는 건 주제에 넘는 일 아닌가? 그는 마치 자신만이 오규원 시에 대해서 샅샅히 해부할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그는 시집의 첫 시편들을 차례대로 분석해나가는데, 그런 방식으로 분석이 다 갈무리될 리 없다. 해서 숙제가 남는바, "그러나 시집 전체, 즉 모든 시편들의 구성에 대한 정밀한 분석을 차후로 미루기로 하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 하지만, 더 바람직했던 건 이 해설 자체가 '다른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지 않았을까? 오규원 시집에 걸맞는 해설은 투명하고 담백한 글이다.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처럼.).   

 

 

 

 

다섯번째 책은 오랜만에 고른 미술책이다. 할 포스터의 <욕망, 죽음 그리고 아름다움(Compulsive Beauty )>(아트북스). 부제는 "포스트모던 시각으로 본 초현실주의와 프로이트"이다. 저자는 프린스턴대 교수로서 저명한 미학지 <옥토버>의 편집자이고, 현대미술의 철학적 해명을 다룬 여러 저서를 갖고 있다. 그 중 <실재의 귀환(The Retun of the Real)>(경성대출판부, 2003 )가 번역돼 있고, 편저로 <반미학(Anti-Aesthetic)>(현대미학사, 2002), <시각과 시각성(Vision and Visuality)>(경성대출판부, 2004) 등이 소개돼 있다(이 중 <반미학>은 읽을 만한 번역이 아닌 걸로 알고 있다. 나머지 책에 대해서도 장담하진 못하겠다. 내용 자체가 쉽지 않은 면도 있고.) 

소개에 따르면 이 책에서 "저자는 '초현실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게 해줄 개념이 있다면, 그것은 초현실주의 시대의 것'이어야 하고, 또 '그 분야 내부의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기존의 범주로는 초현실주의에 나타난 이질적인 작업들과 심리적 갈등, 사회적 모순 따위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 그리하여 책은 프로이트의 '언캐니(the uncanny)' 개념을 불빛삼아 초현실주의 텍스트와 이미지의 동굴을 탐사한다." '언캐니'란 건 흔히 '기괴함' 섬뜩함'으로 번역되는 프로이트의 용어이다(국역본 프로이트 전집에서는 '기이한 낯설음'이라고 옮기고 있다). 문학작품 분석에서도 자주 사용되는데, 초현실주의 회화에 어떻게 적용되는가 한번 읽어봄 직하다.

 

 

 

 

한편, 저명한 미술사학자 에르빈 파노프스키의 <이데아>(예경)도 출간됐다(곰브리치와 쌍벽을 이루던가?). "도상해석학의 창시자이자 '독일 태생의 유태인으로 나치 시절 미국으로 망명한 저명한 미술사학자이자 예술철학자', 파노프스키의 초기 연구 성과를 집약하고 있는 책이다. 파노프스키는 책을 통해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조형 예술 이론에 끼친 결정적인 영향과 시대에 따른 변화상, 한 마디로 "미의 이데아란 개념의 역사적 운명"을 추적한다."고 소개돼 있다. 그의 책으론 이미 <도상해석학 연구>(시공사, 2002)가 소개돼 있다.

05. 07. 18.


 

 

 

 

P.S. 소개에서 빠진 책은 저래드 다이아몬드의 <섹스의 진화>(사이언스북스). 이전에 동아사이언스 북스 시리즈로 나오던 책들이 이번에 재출간됐는데, 그때 빠졌던 책으로 내가 가장 아쉬워했던 게 이 책 <섹스의 진화>이다. 이미 저자의 책을 한두 권 읽어본 독자는 알겠지만, '다이아몬드의 모든 책'이다. 그 다이아몬드의 최신간은 <붕괴(Collapse)>이다(아직 번역되지 않았는데, 알라딘에서 원서 구입이 가능하군). 575쪽의 방대한 분량인데, 어떤 사회가 왜, 어떻게 망하고 안 망하는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한국이란 나라가 망조가 든 나라인지(그래서 얼른 이민가는 게 상책인지), 기대를 걸어볼 만한 나라인지 가늠하기 위해서라도 한번 읽어봄 직하다. 물론 얼른 번역되었으면 더 좋겠다. 500쪽이 넘는 원서를 턱없이 읽어나가다간 사회생활 망가지기 십상이다...    

 

 

 

 

P.S.2. '들뢰즈 책'에 신간이 더 있다. 브라이언 마수미가 쓴 <천개의 고원 -사용자 가이드>(접힘펼침)이 그것이다. 말 그대로 매뉴얼인데, 별로 두껍지 않았던 걸로 기억되는 책이 331쪽으로 나왔다. '매뉴얼'을 자임하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전위적인' 매뉴얼을 시도한 책이라 친절한 주석서와는 거리가 멀었던 걸로 기억된다. 그 전에 같은 출판사, 같은 역자에 의해 나왔던 책은 <프로이트의 거짓말>(접힘펼침, 2004)로 유진 홀랜드가 쓴 <안티 오이디푸스> 가이드북이다. 보다 친절한 쪽은 이 책인데, 문제는 '전위적인' 책의 판형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안티-오이디푸스(Deleuze and Guattari's anti-Oedipus)>란 원제가 뜬금없이 <프로이트의 거짓말>로 옮겨진 것도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아트북 같은 판형을 고집한 탓에 161쪽 짜리 책이 539쪽으로 둔갑한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이미 나온 걸 어쩌랴만). 이런 '전위적인' 책이 많이 팔렸을 리 없는 건 당연하므로 출판사쪽의 '계산'을 짐작할 도리가 없다(나는 책 갖고 장난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책은 좋은 번역만 가지고도 충분히 튄다. '예술'은 다른 데 가서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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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바람 2005-07-19 00:22   좋아요 0 | URL
소개해주신 지젝을 읽고 있답니다. 쉽지 않군요. 오선생의 시집을 들고 좀전에 여행을 다녀왔는데, 정과리 선생의 뒷글은 주례사비평을 넘어 지독히 정치적이라는(좀 치사하다 싶을 만큼 자신의 해석을 늘어놓는) 뉘앙스가 짙더군요.

릴케 현상 2005-07-18 22:17   좋아요 0 | URL
딴 건 모르겠지만 정과리가 저러는 건 소문이 날 만큼 난 것 같아요-_-

poptrash 2005-07-19 01:59   좋아요 0 | URL
정말 잘 읽고 있어요. 제가 요즘 하는 일이 신간들 들여다보는 일이라서, 또 소개해주시는 분야가 제가 다루고 있는 책들이라서 관심 갖고 보고 있습니다. 아, 저는 뭐 학술적인 일이 아니라 그냥 '기계적인' 일을 하는 '알바생' 이랍니다. 책 좀 많이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중. 나오는 책들 다 재미있게 보이는데, 막상 어느것 하나도 읽기가 쉽지 않네요 저로서는.

로쟈 2005-07-19 09:24   좋아요 0 | URL
저도 실질 소득면에서는 '알바생'입니다. 나오는 책들을 다 재미있게 보고 계시다니 부럽네요.^^ (저는 대개 구경만 합니다.)

palefire 2005-07-19 09:55   좋아요 0 | URL
언제나 충실한 책소개 해주시는 로자님. 안셀 피어슨의 책은 일부 Deleuzeguattarrian들에게 보이는 성급함과 경박함이 없어서 좋습니다. Germ/Milieu의 관계부터 들뢰즈-베르그송을 풀어가려는 노력도 깊이가 있고요. [매혹의 도시, 맑스주의를 만나다]는 바로 보관함에 등록해놔야겠네요. 올려주신 목록중 관심분야상 제일 반가운 건 역시 할 포스터의 [Compulsive Beauty]입니다. 조금 훑어본 바로는 번역이 나쁘지 않습니다. [실재의 귀환]은 역어와 문장이 난삽한 편. MIT/October라인의 치밀하고 꼼꼼한 미술/시각문화비평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포스터의 책이 원서로만 방기되지 않을 수 있다는 건 참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가장 최근 저서인 [Prosthetic Gods]를 더 꼼꼼히 봐야겠다는 열망을 주는 책)

palefire 2005-07-19 09:56   좋아요 0 | URL
그리고, [몸체 없는 기관]은 역시 번역중입니다. 라캉 관련 전공자 들뢰즈 공부한 사람 하나가 공역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로쟈 2005-07-19 12:11   좋아요 0 | URL
포스터의 책이 괜찮은 번역이라니 다행이군요. <실재의 귀환>에서 별로 재미를 못본 터라... <신체 없는 기관>은 도서출판b에서 근간으로 예고돼 있습니다...

주니다 2005-07-19 15:04   좋아요 0 | URL
<오르가즘의 기능>은 집에 놀러온 사람들에게 괜한 오해를 살만한 제목이군요.^^ <실재의 귀환>도 아직 다 보지 못했는데, 신간이 나왔더군요. 저도 서점에서 잠깐 살펴 봤는데, 일단 한국말이 잘 안되는 <실재의 귀환> 보다는 훨씬 문장이 매끄러웠습니다.(내용의 오역 여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ps.2에서 소개하신 책 2권의 상태는 어떤지요? 일전에 서점에서 <프로이트의 거짓말>을 우연히 발견했는데, '들루즈와 과타리'(과메기가 떠올랐습니다.)라는 말에 이 무신 해괴한 책인고 했답니다. 역자가 미국에서 공부했던 것 같은데, 그 동네에서는 '들루즈, 과타리'라고 발음하나부죠? 그나저나 장마가 지지부진 끝나고 무척 덥네요. 방학이지만 아마도 학교에 매일 출근하실터,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늙으니 안나던 땀도 줄줄입니다) 언제 함께 시원한 생맥주라도 한잔 해야할텐데....

로쟈 2005-07-19 15:16   좋아요 0 | URL
그러게나 말입니다(시원한 생맥주는 모스크바에서 마셔본 기억이 마지막입니다.^^;) '과타리'는 좀 이상한 표음인데(u가 묵음이므로), '가따리'를 고집하는 사람들처럼, 그들의 '프라이드'인 걸 어쩌겠습니까? 마수미의 책은 번역본을 제가 직접 보지 못했고, <거짓말>은 폼새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아 대출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장식용 책이지 독서용 책이 아니더군요...

테렌티우스 2006-12-09 12:29   좋아요 0 | URL
이미 절판되었지만 아마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된 라이히의 책은 다음의 책일 것 같아요: "프로이트와의 대화:, 빌헬름 라이히 편저, 황재우 역, 종로서적, 1982.

그리고 이 역자 황재우씨는 바로 시인 황지우씨입니다...^^ 황재우가 바로 시인의 본명이지요. 지우는 본인 이름의 오식이던가 오타였는데, 시인은 이게 오히려 마음에 들어 필명으로 사용하게 되었다는 말을 어느 인터뷰에선가 읽은 기억이 나네요...

테렌티우스 2006-12-09 12:32   좋아요 0 | URL
그리고 위 책의 내용은 프로이트와의 대화가 전혀 아니라... 라이히가 한 대담자와 프로이트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내용이지요... 아마도 당시 82년에 라이히가 너무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 출판사에서 제안한 제목일 듯 싶네요...

로쟈 2006-12-09 15:54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책은 저도 완독하진 않았지만 들춰본 적이 있습니다. 요즘 분위기로는 다시 나와도 좋은 듯한데요. 황재우(^^) 역의 <변증법적 상상력>과 함께...

테렌티우스 2006-12-09 23:28   좋아요 0 | URL
<변증법적 상상력> 박사학위 논문으로 최상급이지요. 푸코나 벤야민 혹은 크리스테바의 것들보다는 한 급 아래라 할지라도 기존의 문제의식을 너무도 일목요연하게 자기만의 시각으로 - 혹은 논쟁적으로 - 잘 정리해 놓았지요. 더구나 호르크하이머가 서문을 써주었지요. 저도 흥미롭게 읽은 기억이 납니다. 저자가 당사자들과의 인터뷰를 진행하고 미출간 자료들을 섭렵하는 등 당시의 분위기를 파악하기엔 아주 그만인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추천할 만한 책이지요.
 
문학에 대하여 동문선 문예신서 255
J.힐리스 밀러 지음, 최은주 옮김 / 동문선 / 2004년 12월
평점 :
절판


도서관에서 몇 달 전에 주문해두었던 책으로 힐리스 밀러의 <문학에 대하여>를 대출해왔다. 저자의 지명도를 봐서는 그냥 사서 읽어도 좋겠지만(힐리스 밀러는 폴 드 만, 해롤드 불름, 제프리 하트만과 함께 예일 '마피아'의 4인방을 구성했던 비평가이자 자크 데리다의 절친한 친구이다. 데리다가 폴 드만 보다도 더 오래 교우한) 출판사가 또 워낙에 못믿을 출판사인지라 (애꿎은) 도서관에 구입신청을 해놓았던 것이다(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동문선은 프랑스 현지에서도 악명이 높다고 한다. 인세도 제대로 지불하지 않아서. 아마도 동문선은 단일 출판사로는 프랑스어 저작에 대한 판권을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가진 출판사일 것이다).

대출해 오면서 나는 루틀리지에서 나온 원서도 절반쯤 복사를 했다. 원서(2002)는 Thinking in Action 시리즈의 한 권인데, 이 시리즈가 동문선에서 '행동하는 지성' 시리즈로 몇 권 나와 있다. <믿음에 대하여>, <종교에 대하여>, <영화에 대하여>, <인터넷상에서> 같은 책들이 같은 시리즈이다(<인터넷에 대하여On the Internet> 대신에 제목이 <인터넷상에서>가 된 것은 출판사나 역자나 도대체 자신들이 무슨 책을 내는 건지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내가 읽어본 한도 내에서 이 시리즈는 허무하다(<종교에 대하여>와 <인터넷상에서>는 다 읽지 않았지만).

지젝의 <믿음의 대하여>에 대해서는 이미 리뷰도 쓴바 있지만, <영화에 대하여>만 하더라도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제목도 모르는 역자가 옮겨놓았다(역자는 영화제목 <2001>을 순수하게 연도로 옮겨놓았다). 물론 이런 류의 '문화의 오역'은 무지의 소치로 떠넘길 수 있다. 문제는 말 그대로 '문장의 오역'이다. 가령 <문학에 대하여>에서 '문학'(literature)'에 대한 옥스포드영어사전(OED)의 (세번째) 정의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대목.

"대체로 문학 산출은 이렇다; 글쓰기의 전신은 특별한 국가나 시기 혹은 대체로 전 세계에서 나왔다. 이제 훨씬 더 엄격한 점에서 글쓰기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은 형식미나 감정적 효과에 기반에서 고려될 것이 요구된다."(14쪽)

이게 '문학'의 정의란다. 영문학 박사라는 역자가 어떻게 영어 사전의 정의도 제대로 옮기지 못하는지 정말로 미스테리하다. 책의 서두에서부터 이런 걸 한국어라고 옮겨놓은 역자에게 대체 어떤 표정을 지어줘야 하나? 이런 걸 읽으면서 진도가 빠지길 기대하는 건 어불성설이다(나는 몇 쪽 읽다가 책을 덮었다). 이게 얼마나 '저질스런' 번역인지는 원문과 대조해보면 알 수 있다:

"Literary production as a whole; the body of writings produced in a particular country or period, or in the world in general. Now also in a more restricted sense, applied to writing which has claim to consideration on the grounds of beauty of form or emotional effect."(p.2)

역자는 'as a whole'이 뭔지도 'body'가 이 문맥에서 무슨 뜻인지도 모르며, 'restricted sense'가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역자는 '의미'란 뜻의 'sense'를 여기서는 '(어떤) 점'이라고 옮겼는데, 다른 곳에서는 전부 '감각'이라고 옮겼다. 가령, '현대적 의미의 문학'을 '현대적 감각의 문학'이라고 옮기는 식이다. 역자의 그 '감각'을 좀 살리느라고 독자들은 애꿎게도 전혀 '의미없는' 문장들을 읽게 되었다). 나대로 다시 옮기면 이렇다: "문학적 생산(창작) 일반. 특정한 시대나 지역에서, 혹은 세계 전역에서 산출된 글들의 총체. 현재는 보다 제한적인 의미에서, 형식적 아름다움이나 정서적 효과를 고려하여 씌어진 글들을 가리킴."(약간 의역했다.)

대개의 동문선 번역서들과는 달리 이 책에는 역자 후기가 '당당히' 들어가 있는데, 한 대목을 옮겨보면 이렇다: "문학비평가로서 제네바학파와, 후에 예일학파의 해체주의자들과 함께 이론을 펼쳐나갔던 밀러는 시적 언어와 수사에 관심을 두면서 '이해'한다는 정의에 대한 모든 인식력 있는 주장들을 해체하여, 세계를 반복하는 단어를 이해하는 바로 그 행위 속에서 독자는 의미의 미궁을 밝히려 하지만, 그 미궁의 의미를 이해하려는 시도로부터 다른 어떤 것이 나타나 실제로는 텍스트의 '의미'를 파괴하고 있음을 주장하였다."(175-6쪽)

이 대목은 번역서 전체의 '증상'으로도 읽힌다. 놀랍게도 전체가 한 문장인데, 내가 보기엔 이것도 역자 자신의 말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말을 옮겨온 말이다(그게 아니라면 '인식력 있는'이란 엉터리 표현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여간에 독자는 이 번역서에서 '의미의 미궁'을 밝혀보려고 하지만, 그 때마다 '다른 어떤 것', 즉 말도 안되는, 무책임하고 황당한 번역어들이 튀어나와서 텍스트의 의미를 '파괴'하고 있음을 지켜보게 된다.(그러니 역자가 '게을러지는 순간마다 용기를 주셨던' 이들을 어찌 탓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는 '종말의식'에 동참하게 된다(이런 번역서는 언제 종말을 맞는가?).

"그런 점에서 지금 새로운 매체가 인쇄된 책을 점진적으로 대체하듯이 문학이 종말에 이르게 된 것이다."(14쪽)

이 또한 "Literature in that sense is now coming to an end, as new media gradually replace the printed book."(p. 2)의 번역인데, 여기서 'as'는 '-하듯이'가 아니라 '하게 됨에 따라'란 뜻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in that sense'가 번역에서 누락됐다. 저자 밀러는 근대 이후에 발생한 문학에 대한 정의를 소개한 이후에 바로 '그런 의미의 문학'이 현재 종말을 고하고 있다고 진술하고 있는 것. 이후에 이어지는 번역문들은 ('뜰'은 커녕) 내리 '잡초밭'이다. 이윤기 선생의 바람처럼 나도 번역자들에게는 되도록 '저주에 가까운 비아냥'은 삼가하고 싶지만, 이런 경우들에서는 그렇게 되질 않는다. 감히 말하건대, 이런 엉터리 번역서를 낸 데 대하여 저자에게 사죄할 일이며, 이런 쓰레기 같은 번역서를 내는 데 동원된 종이들과 잉크들에게 부끄러워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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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5-07-12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참을 수 없는 수준이네요. 그런데, 참을 수 없는 번역하는 분들도 다들 공부 많이 하셨던데....대체. 쩝.

로쟈 2005-07-12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에 있어서만큼은 매트릭스 같은 세상입니다(그 공부란 게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 그래서 가끔을 볼을 꼬집어 보기도 합니다...

주니다 2005-07-12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문선 앞에서 피켓들고 1인 시위라도 해야되는 것인지...이런 부실한 번역서를 내는 간큰 역자는 또 무슨 배짱인 것인지...어쨌건 양식(양심)의 문제인듯 합니다.

사량 2005-07-12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 나오자마자 손에 쥐었는데... 스무 쪽 읽고 포기했습니다.--; 역시 번역에 문제가 있었네요.

로쟈 2005-07-12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을 돈주고 사셨다니 제가 다 속이 쓰리네요...

사량 2005-07-12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행.히.도. 사서 읽진 않았습니다. ^^

Capitalist 2006-01-24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형식적 아름다움이나 정서적 효과를 고려하여 씌어진 글들'이 아니고 그런 점 때문에 관심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되는 글들이겠죠. 원래 사전이 옮기기 가장 어려운 법이잖아요.

로쟈 2006-08-19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겠군요.^^
 

 

 

 

 

꺼내놓은 이야기를 마저 하도록 하겠다. 생각보다 견적이 많이 나올 듯하지만, 최대한 줄여서. 역시나 제목은 (이미 언급했던 대로) 속임수이다. 따로 자리를 마련하는 바람에 '부담스런' 제목을 달게 됐지만, 지난번에 속으신 분들이 또 속지는 않을 것이므로 양해의 말을 덧붙이지는 않겠다. 이런저런 번역에 대해서 참견하는 일이 어쩌다가 내가 즐겨하는 일처럼 돼 버렸지만,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건 그냥 책을 읽는 것이다(우리말 책이면 더 좋고). 물론 좋은 책을. 책읽을 시간도 부족한데, 자꾸 이런 참견들을 늘어놓는 것은 그렇게 마음놓고 읽을 수 있도록 책들이 나와주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제만 하더라도 나는 도서관에서 몇 달 전에 주문해두었던 책으로 힐리스 밀러의 <문학에 대하여>(동문선, 2004)를 대출해왔다... 이하의 내용은 너무 길어진 듯해서 '참을 수 없는 번역의 부끄러움'이란 제하에 따로 리뷰란에 옮겨놓았다. 참고하시길... 하여간에 그래서, 좋은 책 읽을 시간의 상당 부분을 나는 나쁜 책들에 대한 불평으로 채워넣고 있다. 이것도 쓸데없이 예민한 독자의 업보라면 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상황이 호전되는 것으로 보상받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하여간에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마저 읽어보기로 한다. 그렇다고 진도가 막나가는 것도 아니다(왜 그런지는 지난번에 설명했다). 지난번에 한 문장을 읽은 데 이어서 오늘도 고작 한 단락을 읽게 될 것이다. 어디냐면, #3의 마지막 한 대목이다. 먼저, 5종의 우리말 번역을 차례로 나열해 보겠다.

-"화보가 들어있는 신문이나 주간뉴스 영화가 제공해주고 있는 복제사진들은 그림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그림에서는 일회성과 지속성이 밀접하게 서로 엉켜있는데 반하여 복제사진에서는 일시성과 반복성이 긴밀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 대상을 그것을 감싸고 있는 껍질로부터 떼어내는 일, 다시 말해 분위기(=아우라)를 파괴하는 일은 현대의 지각 작용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이 세상에 있는 동질적인 것에 대한 지각작용의 감각이 너무나 커졌기 때문에 지각작용은 복제를 통하여 일회적인 것으로부터도 동질적인 것을 찾아내고 있을 정도이다. 이론의 영역에서 점차 그 중요성을 더해가는 통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는 것이 직관의 영역에서도 그래도 나타나고 있다. 현실이 대중에 적응하고 또 대중이 현실에 적응하는 현상은 사고의 면에서는 물론이고 직관의 면에서도 무한한 중요성을 지니게 될 하나의 발전과정이다."(반성완)

-"화보나 주간뉴스에서 쉽게 느낄 수 있듯이 복제는 사진(그림)과 뚜렷이 구별된다. 후자(그림)에는 일회성과 지속성이 밀접하게 얽혀 짜여 있지만 반면 전자(복제)에는 일시적인 것과 반복가능성이 들어 있다. 대상의 껍질을 벗긴다는 것 즉 아우라의 파괴는 감각의 표지이며, '세상에 존재하는 동일한 유의 것에 대한 감지의 의미'는, 복제품을 수단으로 하여 일회적인 것에서도 그것을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되었다. 대중을 향한 실재의 방향 자세나 실재를 향한 대중의 방향 자세는 사고나 직관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력을 지닌 하나의 과정이다."(차봉희)

-"확실히 사진잡지나 뉴스 영화에 의해 보여지는 복제는 육안으로 보는 모습과는 다르다. 전자에서 일시성과 반복성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후자에선 유일성과 지속성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 껍질로부터 대상을 떼어내는 것, 즉 영적 분위기(=아우라)를 파괴하는 일은 오늘날의 지각에 있어서 '사물의 보편적 동질성에 대한 감각'이 복제라는 수단을 통해서 심지어는 유일한 대상으로부터도 그 동질성을 추출해낼 수 이는 정도에까지 달하게 되었다는 표시다. 이것은 이론 분야에서 점점 더 커가는 통계의 중요성으로도 나타나지만 지각의 영역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대중에 대해 현실을 적응시키는 것 혹은 현실에 대해 대중을 적응시키는 일은 지각에서와 같이 사고에 있어서도 무한한 연구영역을 지닌 과정이다."(이태동)

-"그리고 화보가 실린 신문과 주간 뉴스가 마련해주는 복제는 분명 그림과는 다르다. 일시성과 반복성이 전자(복제)에 아주 긴밀하게 얽혀있다. 껍질로부터 대상을 분리해내는 것, (즉) 아우라의 파괴는 (우리시대) 지각의 특징이거니와 지각의 '세계 속에서의 동질적인 것에 대한 감각'이 너무 커져서 그 감각은 복제를 수단으로 삼아 일회적인 것으로부터도 동질적인 것을 획득해낸다. 따라서 이론의 영역에서 점점 증대하는 통계로서의 의의로서 두드러지는 것은 직관적인 영역에서도 나타난다. 대중에 대한 실제의 적응과 실제에 대한 대중의 적응은 직관에 대해서 만큼이나 사유에 대해서도 무한한 범위의 과정이다."(강유원팀)

-"그림이 실린 신문이나 주간 뉴스가 늘 준비해 가지고 있는 재생산(복제)는 오해의 소지없이 그림과는 구별된다. 그림 속에선 일회성과 지속이 서로 밀접하게 엉켜 있다면 복제 속에선 일시성과 반복가능성이 그렇게 서로 엉켜있는 것이다. 사물을 그 외피로부터 풀어내는 것, 아우라의 파괴가 '오늘날' 지각의 표지다. 세계에 존재하는 동질적인 것에 대한 그 지각의 감성은, 그 지각이 재생산(복제)을 수단으로 하여 일회적인 것으로부터도 동질적인 것을 얻어낼 수 있을 정도로 자라나버렸다. 그리하여 이론의 영역에서 통계학의 중요성의 증가가 드러내주는 것이 시각적인 영역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현실이 대중을 향하고 대중이 현실을 향하는 것은 사유를 위해서도 직관을 위해서도 무척 넓은 영향력을 갖는 경과이다."(김남시)

이에 해당하는 독어 원문(주어캄프 전집본)과 영역본(하버드대 선집본)의 단락은 각각 아래와 같다.

-"Und unverkennbar unterscheidet sich die Reproduktion, wie illestrierte Zeitung und Wochenschau sie in Bereitschaft halten, vom Bilde. Einmaligkeit und Daur sind in diesem so eng verschränkt wie Flüchtigkeit und Wiederholbarkeit in jener. Die Entschälung des Gegenstandes aus seiner Hülle, die Zertrümmerung der Aura, ist die Signatur einer Wahrnehmung, dern >Sinn Für das Gleichartige in der Welt< so gewachsen ist, daß sie es mittels der Reproduktion auch dem Einmligen abgewinnt. So bekundet sich im anschaulichen Bereich was sich im Bereich der Theorie als die zunehmende Bedeutung der Statistik bemerkbar macht. Die Ausrichtung der realität auf die Massen und der Massen auf sie ist ein Vorgang von unbegrenzter Tragweite sowohl für das Denken wie für die Anschauung."(1-2권, pp. 479-80) 


-"And the reproduction, as offered by illustrated magazines and newsreels, differs unmistakably from the image. Uniqueness and permanence are as closely entwined in the latter as are transitoriness and repeatability in the former. The stripping of the veil from the object, the destruction of the aura, is the signature of a perception whose 'sense for sameness in the world' has so increased that, by means of reproduction, it extracts sameness even from what is unique. Thus is manifested in the field of perception what in the theoretical sphere is noticeable in the increasing significance of statistics. The alignment of reality with the masses and of the masses with reality is a process of immeasurable importance for both thinking and perception."(1권, pp. 255-6) 

여기에 러시아어본을 더 참조하겠지만, 러시아어의 키릴 문자들마저 여기에 옮겨오지는 않겠다. 번역문들은 보통 5-6개의 문장으로 구성돼 있다.  첫번째 문장의 요지는 영어로 하면, reproduction(Reproduktion)과 image(Bilde)는 다르다/구별된다는 것('구분된다'가 아니다).  대략 '복제'와 '그림' 사이의 구별로 옮겨져 있는데(이태동 역에서, 'image'를 '육안으로 보는 모습'이라 옮긴 것은 불필요한/부정확한 의역이다), 나라면 '복제 이미지'와 '그림' 사이의 구별 정도로 해두겠다.  영어의 newreels을 반성완과 이태동은 주간뉴스 영화라고 옮겼고, 다른 번역들은 그냥 '주간뉴스'라고만 했는데, 이건 러시아어본과도 대조해 보건대 전자가 더 정확하다(그러니까 과거 '대한뉴스'처럼 영화관에서 상영된 뉴스인 것).  

두번째 문장은 그 '복제 이미지'와 '그림' 간의 차이에 대한 것이다. 후자(=그림)의 특징은 일회성(유일성)과 지속성이고, 전자(=복제 이미지)의 특징은 일시성과 반복(가능)성이다(강유원팀 역에서는 댓구의 전반부가 누락됐다).

세번째 문장은 그림 대신에 복제 이미지가 넘쳐나는 기술복제 시대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는데, 그건 한마디로 대상으로부터 일회성과 지속성이라는 '껍질/외피'를 걷어낸 '아우라의 파괴'이다. 거기서 물론 '껍질'로 은유된 것은 '아우라'인바, 나는 Hülle(싸개/외피)의 역어로 영어본의 'veil'이 더 맘에 든다. 즉, 나라면, "대상으로부터 베일을 걷어내는 것, 즉 아우라의 파괴가 우리시대 지각의 특징이다" 정도로 옮겨두고 싶다. 그 '우리시대'의 내용은 관계사를 통해서 설명되는데, '세계에서 동질적인 것에 대한 취향'이 날로 증가하여(그건 기술복제시대 '대중의 취향'이다, 나는 Sinn(sense)의 역어로 '감각' 대신에 러시아어본을 따라 '취향'으로 옮기고 싶다) 이젠 일회적인 것에서까지 복제를 통해서 동질적인 것을 뽑아내고자 하는 시대이다.

네번째 문장(차봉희 역에서는 누락되었다)부터는 오늘의 주제와 연관된 것이므로 조금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다시 나열해 보면 이렇다(인용문의 강조는 모두 나의 것이다).

-"이론의 영역에서 점차 그 중요성을 더해가는 통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는 것이 직관의 영역에서도 그래도 나타나고 있다."(반성완)

-"이것은 이론 분야에서 점점 더 커가는 통계의 중요성으로도 나타나지만 지각의 영역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이태동)

-"따라서 이론의 영역에서 점점 증대하는 통계로서의 의의로서 두드러지는 것은 직관적인 영역에서도 나타난다."(강유원팀)

-"그리하여 이론의 영역에서 통계학의 중요성의 증가가 드러내주는 것이 시각적인 영역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김남시)

-"So bekundet sich im anschaulichen Bereich was sich im Bereich der Theorie als die zunehmende Bedeutung der Statistik bemerkbar macht."(독어본)

-"Thus is manifested in the field of perception what in the theoretical sphere is noticeable in the increasing significance of statistics."(영어본)

현대에 와서 통계학의 중요성이 두드러진다는 것은 (동질적인 것에 대한 취향의 우세/증가에 따라) 세계가 그만큼 동질화, 평준화되었다는 뜻이겠다. 그것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통계란 건 사실 무의미하다. 그리고 그런 경향은 '복제 이미지'의 증가로 대별될 수 있는 지각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확인될 수 있다, 는 게 내가 이해하는 이 문장의 요지이다.

여기서 굵은 글씨로 강조한 대목들은 모두 'anschaulichen Bereich'의 번역인데, 영어본과 러시아어본에서는 에누리없이 지각의 영역(the field of perception)이라고 옮겨진 것이(이태동 역은 영어본을 중역한 것이기에 이에 따르고 있다) 대개의 국역본에서는 '직관의 영역'이라고 옮겨지고 있다. 뒤에 나오지만, 독어의 Anschauung이 보통 '직관'으로 옮겨지지만(특히 칸트철학의 용어로 굳어져 있다), 그것의 일차적인 의미는 영어의 view이다. 내가 아는 몇 안되는 독어단어 Weltanschauung이 Welt+anschauung으로 구성된바, worldview, 곧 '세계관'이란 뜻을 가질 때의 그 '관(觀)'이 Anschauung의 우리말 뜻인 것. 그것이 비록 '직관'이란 뜻도 갖는다고 해도 이 문맥에서는 좀 뜬금없다(영어의 perception이나 러시아어의 vosprijatie는 '직관'과 무관한 단어들이다. 참고로 '직관'을 나타내는 영어의 'intuiton'은 '식스 센스'란 뜻을 강하게 가지며, instinct와 동의어이다).

김남시를 제외한 다른 번역자들이 '직관의 영역'이라고 자동적으로 번역한 것은 그 단어를 철학용어로 이미 접수하고 있기 때문인 듯도 하고, 앞에서 '지각'이라 옮긴 'Wahrnehmung'과 변별해주기 위해서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Wahrnehmung과 Anschauung에 대해서 영어/러시아어본은 전혀 아무런 주저없이 '지각'이라고 옮긴다). 하지만, 우리말에서 직관과 지각이 동의어로 취급될 수 없는 한, 이 대목에 적합한 역어는 '지각'이다(혹은 김남시처럼 '시각'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어차피 문제되고 있는 건 '시지각'이니까). 그건 이어지는 마지막 문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현실이 대중에 적응하고 또 대중이 현실에 적응하는 현상은 사고의 면에서는 물론이고 직관의 면에서도 무한한 중요성을 지니게 될 하나의 발전과정이다."(반성완)

-"대중을 향한 실재의 방향 자세나 실재를 향한 대중의 방향 자세는 사고나 직관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력을 지닌 하나의 과정이다."(차봉희)

-"대중에 대해 현실을 적응시키는 것 혹은 현실에 대해 대중을 적응시키는 일은 지각에서와 같이 사고에 있어서도 무한한 연구영역을 지닌 과정이다."(이태동)

-"대중에 대한 실제의 적응과 실제에 대한 대중의 적응은 직관에 대해서 만큼이나 사유에 대해서도 무한한 범위의 과정이다."(강유원팀)

-"현실이 대중을 향하고 대중이 현실을 향하는 것은 사유를 위해서도 직관을 위해서도 무척 넓은 영향력을 갖는 경과이다."(김남시)

-"Die Ausrichtung der realität auf die Massen und der Massen auf sie ist ein Vorgang von unbegrenzter Tragweite sowohl für das Denken wie für die Anschauung"(독어본)

-"The alignment of reality with the masses and of the masses with reality is a process of immeasurable importance for both thinking and perception."(영어본)

먼저, 여기서 'realität'를 '현실' 대신에 '실재'(차봉희)나 '실제'(강유원팀)로 옮긴 건 현실성이 떨어져 보인다. 문장의 마무리에서도 '무한한 연구영역을 지닌 과정'(이태동), '무한한 범위의 과정'(강유원팀)이나 '무척 넓은 영향력을 갖는 경과'(김남시) 등은 모두 초점에서 일탈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요점은 이러이러한 것이 (우리시대의) 사유와 지각에 있어서 (측량할 수 없을 정도의) 막대한 중요성을 갖는,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과정이라는 것. '이러이러한 것'의 내용은 영어본을 따르자면 대중과 현실의 alignment(제휴/손붙잡기)이고, 러시아어본을 따르자면 상호 orientatija(정향)이다.   

이 마지막 문장의 속임수는 사실 'Anschauung'이라 할 만한데, 앞에서 '시각(적인 영역)'이라고 옮겼던 김남시조차도 이 대목에서는 '직관'이라고 옮기고 있다. 이건 거의 직관적인 번역들이라고 할 만한데, 이태동만이 유일하게 '지각'이라고 옮긴바 그가 '직항로'를 따라서, 곧 독어에서 바로 옮긴 것이 아니라 영어를 중역한 탓에 오역을 면할 수 있었다는 건 아이러니이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다면, 번역은 '직항로'로 가는 게 합당하며 중요하지만 샛길들도 무시하지 말고 참조하라는 것이다(직항만을 믿고 가다가는 간혹 삼천포로 직행하는 경우들이 없지 않기 때문에)...

이로써 몇 시간을 투자해 한 문단을 읽었다. 다른 일들도 밀려 있는 탓에, 글의 나머지 부분들은 언제 다 읽게 될지 기약할 수 없다. 그저 믿을 만한 좋은 번역 '하나'를 갖고 있지 못한 탓에 번역의 '직항로' 시대(이윤기의 표현)에도 우리의 읽기는 '우회로'만을 따라가야 한다. 여름날 모스크바의 산책로 같은 길은 우리의 책읽기에서 언제쯤 마련되는 것인지...   

05. 0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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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y 2005-07-14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벤야민 공부를 하게 되는군요. 나머지 부분도 계속 하실 의향이 있으시다면 제게도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벤야민을 잘 모릅니다만, 여기에 제시된 독일어 원본과 번역들에 기초해서 몇 마디 거들어볼까 합니다.

먼저 세 번째 문장에서 독일어 gewachen은 오타가 있었나 봅니다. (한글 번역 모두와 영역이 채택하고 있는) 커졌다, 자랐다 등의 뜻이 되려면 gewachsen이 되어야 하지요.

그런데 이 경우 감각(Sinn)이 커진다거나 자란다는 이야기가 썩 잘 어울리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만약 로쟈님의 오타가 아니라 독일어 텍스트가 gewachen으로 되어 있다면, 벤야민 자신의 실수가 있었고 번역자들이 이것을 gewachsen으로 읽었다는 이야기겠죠. 하지만 이 경우 다른 가능성을 검토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벤야민이 (깨어났다는 뜻의) gewacht라고 써야 할 것을 gewachen이라고 썼을 가능성입니다. (독일인들도 범할 수 있는 실수입니다.) 이 가능성에 따라 세 번째 문장을 번역하면, “사물에서 외피를 벗겨내는 것, 아우라의 파괴는, 세계 내의 동질적인 것에 대한 감각이 너무 깨어나서 (“깨어나서”가 싫으면 “각성되어”로 번역해도 좋겠지요), 복제를 통해, 일회적인 것에서 조차도 동질적인 것을 획득해 내는 지각 방식의 특징이다.”가 되겠습니다. (einer Wahrnehmung에서 einer를 좀 강하게 “일종의” 정도의 의미로 읽었습니다.)


그 다음에 직관이냐 지각이냐의 문제에 대해서는 저는 직관의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우선 독일어 Anschauung은 어원적으로 직접(an) 보는 것(schauen)을 의미하고 우리말 직관이 여기에 어원적으로 일치합니다. 물론 어원과 별개로 직관의 의미가 무엇인가가 사실은 더 중요한 문제이겠는데,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직관 항목을 찾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직관03 (直觀) [-꽌] 「명」「1」『교1』감관의 작용으로 직접 외계의 사물에 관한 구체적인 지식을 얻음 2」『철』감각, 경험, 연상, 판단, 추리 따위의 사유 작용을 거치지 아니하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작용. ≒직각03(直覺)

여기에서 1번 뜻은 정확하게 지금 문맥의 Anschauung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따라서 직관이라는 번역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직관이라는 번역어가 단순히 틀렸다고 할 수 없다는 것뿐 아니라, 지각이라는 번역어보다 낫다는 주장을 하고 싶습니다. 우선 일반적으로 이야기해서 원어에서 다른 표현을 사용한 것은, 할 수만 있다면, 번역에서도 다른 표현을 쓰는 것이 더 좋습니다.

보다 중요하게는 지각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하는 경우, im anschaulichen Bereich / im Bereich der Theorie, für das Denken / für die Anschauung에서의 대구가 그다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지각의 영역/이론의 영역, 사유/지각 보다는 직관의 영역/이론의 영역, 사유/직관 의 대구가 더 분명하지요. 이론과 사유는 매개적인 인식방법이고 직관은 비매개적인 인식방법이니까요. 벤야민 자신도 이러한 대구를 염두에 두고 Wahrnehmung이라는 표현에서 Anschauung이라는 표현으로 바꾸어 쓰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realität을 현실로 번역하는 것은 좀 뜬금없어 보입니다. 벤야민이 III 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역사적 대상과 자연적 대상이므로, 이 문장에서 그는 실재와 대중 사이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Tragweite는 직역하면 사정거리라는 뜻입니다. 중요성이라는 뜻을 비유적으로 가질 수도 있으나, 문장의 맥락에서 보면, 사유에서나 직관에서나 무제한적인 사정거리를 가지는 과정, 즉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해 보입니다.

지금의 글을 읽으면서 제가 받은 느낌 한 가지는 영어 번역이라고 해서 특별히 나을 것이 없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Wahrnehnumg과 Anschauung을 구별없이 perception으로 번역한 것은 그렇다쳐도, Bild(그림)을 image로 번역한 것은 명백한 오역으로 보입니다.

로쟈 2005-07-14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적하신 오타는 고쳤습니다. 오타가 어딘가 있을 줄은 알았지만, 그게 공연한 수고를 끼쳐드릴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Anschauung의 역어에 대해서는 국어대사전을 인용하셨는데, 그것이 현재 '통용되는' 의미인지는 의문입니다(제가 보기에, 인용하신 두 가지 정의는 서로 양립되기 어려운 동음이의어로 처리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감관의 작용을 통해 지식을 얻는 것과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대상을 파악하는 게 어찌 동일할 수 있을까요? 제가 '지각'과 '직관'이 동의어가 아니라면이라는 단서를 단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인터넷에서 제공하는 국어사전이나 백과사전에서 일반적으로 정의하는바는 "감각, 경험, 연상, 판단, 추리 따위의 사유 작용을 거치지 아니하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작용"이며(그래서 직각(直覺)이 동의어로 제시됩니다), 이는 영어의 intuition에 대응하는 걸로 설명돼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직관'이란 말에서 제가 떠올리는 바입니다. 만약에 그런 뜻이 제거된 상태에서 정의하신 첫번째 의미만을 전달할 수 있다면, 저는 '직관'이란 역어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정이 그렇지가 않기 때문에 '지각'이란 역어를 선택하게 됩니다.

한편, 불어역에서는 'la réceptivité'로 옮긴다고 하는데, '지각을 통한 수용'의 측면을 드러내주는 듯합니다. 제가 강조하고픈 것은 그러한 지각이나 감관을 '통한' 인지입니다. 그리고, 지각의 영역/이론의 영역보다 직관의 영역/이론의 영역이란 대구가 더 분명하다고 하시면서, "직관은 비매개적인 인식방법"이라고 하셨는데, 그때의 '직관'이 바로 1번이 아닌 2번의 뜻입니다(때문에, '직관'이란 역어를 제가 오역이라고 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문장과 관련하여 '현실'이란 번역이 뜬금없다고 하셨는데, 문맥상 동질적인 것에 대한 '대중'들의 취향과 (기술복제를 통해) 일회적인 것으로부터도 동질적인 것을 뽑아내는 게 가능해진 '현실' 사이의 상호작용, 상호연루를 뜻한다고 저는 봅니다. '역사적 대상'과 '자연적 대상'이 이 단락의 키워드라는 건 이해하기 어려우며, '실재와 대중 사이의 관계'라는 표현도 저로선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Tragweite'의 경우, 제가 인용하지 않은 다른 영역본에서는 'scope'라고 옮기고 있습니다. 그걸 제가 인용한 새 영역본에서는 importance라고 의역함으로써 뜻을 좀더 명확하게 해주고 있는데, 이것은 러시아어본도 마찬가지입니다. perception이란 역어는 두 번역본에 공통되며, 러시아어본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역어를 쓰고 있습니다. 영어나 러시아어로 똑같이 옮겨지는 독일어가 오역이라는 지적에 대해서는 제가 공감할 수 없습니다.

image는 아시다시피, 우리말 '이미지'보다는 더 광범위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영어권에서는 나름대로 벤야민 전문가들이 선택한 역어이므로 저로선 거기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습니다. Bild는 상(像) 정도의 의미로 아는데, image가 거기에 대응하지 않는다는 지적이신지요? 영역본의 '명백한 오역'에 대해서는 제가 지적하거나 판별할 만한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paby 2005-07-14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칸트 이래 독일 철학에서 직관이라고 할 때는 대개 감각적 인식을 의미합니다. 감각적 인식이 개념을 통해서 매개되지 않은 인식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이 때문에 Anschauung이 직관으로 번역되고요.

참고로 독일어 Anschauung은 우리말 직관의 1번과 2번 뜻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덕적 직관 같은 것을 이야기할 때, 독일어에서 innere Anschauung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realität (또 영어에서 reality도) 지금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의미의 현실을 의미할 수는 없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지금 말씀하시는 것은 영어로 current situation 정도의 의미죠.) 제가 이해하기로는 마지막 문장은 대중적 취향에 실재를 맞추는 것, 실재에 대중적 취향을 맞추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복제가 없는 경우는 실재가 일회적인 하나 밖에 없기 때문에 대중의 취향을 만족시켜줄 수 없겠지요. 하지만, 복제를 통해서 실재가 반복화되고 대중의 취향을 만족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죠.

Tragweite가 importance로 번역되는 것이 왜 뜻이 더 명확하게 해 주는 것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뜻을 잘못 전달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Bild는 이 맥락에서는 그냥 picture 같습니다. image는 특별히 일회적이지도 지속하지도 않지요. 반복적이고 비지속적인 image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로쟈 2005-07-14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제는 독어의 경우 지각이나 직관을 한 단어로 쓰지만(권리와 법을 한 단어 droit로 쓰는 불어처럼) 한국어의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가령 데리다의 <불량배들> 같은 경우 역자는 '주권자'를 "권리를 중단시킬 권리는 가진 자"라고 옮겨놓았더군요. 당연히 "법(혹은 헌정, 영어로는 law)을 중단시킬 권리(영어로는 right)를 가진 자"라고 옮겨져야 합니다. 불어에서는 아마도 같은 단어일 테니 '권리를 중단시킬 권리'라고 옮기는 게 무슨 잘못인가라는 반문이 가능하겠지만, 우리말로는 오역입니다.

지각과 직관을 뜻을 다 갖는 'Anschauung'의 경우도 비슷하지 않나 싶은데, 판단은 paby님이 하시기 바랍니다. 비근한 예이지만, 주어, 주어, 주제 등을 뜻하는 영어 단어 subject의 경우도, 그 우리말 역어들이 의미론적 가족유사성을 갖고 있지만, 문맥에 따라 다르게 번역해 주어야 혼동이 없습니다. Anschauung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갖고 있다는 건 제가 처음부터 전제로 한 것이며, 저는 이 대목의 문맥상 '지각'이 보다 타당한 역어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실재'란 말은 저와 다르게 사용하시는 것 같습니다. 원본이란 뜻의 '실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 경우 복제를 통해서 '반복화'된 것도 실재인가요? 저로선 서로 다른 텍스트를 읽고 있는 거라고 밖에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paby 2005-07-14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말씀드린 것은 우리말 직관도 독일어와 똑같이 두 의미로 사용된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누군가가 "우파"라는 번역어에 대해서 영어의 right이 이 경우는 오른쪽이 아니라 보수적인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우파"라는 번역어는 오역이고 "보수파"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해 보죠. 이 경우, 우리말에서 "우"도 "보수적"의 뜻을 같는다고 지적하는 것이 적절한 대응이겠지요.

제가 이야기하는 실재는 사물, 사태의 총체를 의미합니다. reality라는 말이 가지는 가장 중립적인 의미죠.

로쟈 2005-07-14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복되는 얘기지만, 다른 외국어 번역들의 사례들을 두고 보건대, (1)여기서 Anschauung은 '감관/지각을 통해 매개되는 인지'를 뜻하며, (2)우리말 '직관'은 비록 Anschauung과 마찬가지로 두 가지 의미를 다 갖는다고 하더라도, '비매개적 인식'이란 뜻을 일차적으로, 그리고 더 강하게 갖기 때문에(저는 첫번째 뜻은 특수하게 사용된다고 생각하며, 지각과 직관이 일상어적 의미상으론 양립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3)이 경우에 적합한 역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한 지인에 다르면, 이 대목의 이태리어역은 'l'intuizione'인데, 짐작하시겠지만, 영어 단어 'intuition'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instinct의 뜻을 강하게 갖는 영어의 intuition과는 다르게 이태리어 'l'intuizione'는 'sensation'[sensazione]의 뜻을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 말씀은 이런 문맥에서라면 이탈리아어 'l'intuizione'을 intuition으로 영역하는 것도 일종의 오역이라는 것입니다(각 단어가 갖고 있는 의미역이 다른 것이죠). 'Anschauung'과 '직관'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reality에 대해서는 말씀드린 대로, 저와는 다르게 이해하고 계신데, 제가 이해하는 reality의 가장 중립적인 의미는 '현실' 내지는 '현실성'입니다. '실재'는 말 그대로 real existence를 가리키는데, 그것이 어떤 사물의 실재, 우리의 감관/인지와는 무관하게 실제로 존재함을 뜻하는 걸 넘어서 '사태의 총체'까지 의미하는 단어인지는 의문입니다. 사태란 "일이 되어가는 형편이나 상태"를 뜻하며(흔하게는 영어의 situation), 그것은 심리적인 상황도 배제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한국어 '실재'는 그런 의미를 모두 포괄하지 않습니다.(덧붙여, 우리말에서 '우파'와 '보수파'는 동의어입니다. '우익보수'나 '보수우파' 등의 조어가 그래서 가능합니다. '지각'과 '직관'도 동의어인가요?)

paby 2005-07-14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nschuung이나 직관이나 기본적인 뜻은 비매개적 인식입니다. 비매개적인 인식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독일어에서나 우리말에서나 1과 2의 뜻으로 갈려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이죠.

이태리어 번역에서 percezione가 아니라 intuizione로 번역한 것은 우리말에서 지각이 아니라 직관으로 번역한 것과 정확하게 대응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reality 문제는 너무 문제가 확대될 것 같아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정도로 마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애초에 좀 지엽적인 문제였으니까요.

yoonta 2005-07-15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와 관련하여 철학소사전(동녁)을 참고해서 몇자 적어봅니다.
지각에도 두 가지 의미가 가능합니다. 첫째: 지각(wahrnehmung)은 감각을 바탕으로 성립하지만 개별적 감각들의 단순한 결합이 아닌 질적으로 새로운 감각적 반영이다..라는 정의가 있고요..둘째: 독어로 perzeption인 지각은 좁은 의미의 지각으로 의식에 이르지 못한 "지각의 한부분"을 말합니다. 즉 이 지각은 "무의식" 상태에 머물러 있는 "지각"입니다...
그리고 직관도 두가지로 나뉘는데요. 첫째: 직관(anschauung)은 감각 지각들에서 일어나는 인식과정들을 총괄적으로 가리키는 말입니다. 때문에 "감각적 직관"과 같은 용어도 사용가능합니다. 즉 이 때의 직관은 지각을 통해 "매개적"으로 "인식된" 직관이라는 것이지요..독어사전에서는 "바라봄" "관조" "관찰"등으로도 해석됩니다.
반면 두 번째의 직관(독intuition)은 어떠한 매개없이 순간적으로 주어지는 특별한 인식행위을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매개적" 성격입니다. 때문에 이러한 비매개적 직관은 일부 철학자에겐 신비적이면서 비합리적 인식방법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위의 문제와 관련하여..본문 속의 직관을 두 번째가 아닌 첫 번째 즉 지각을 통한 "매개적" 인식방법으로 본다면(독어로도 분명히 "intuition"이 아닌 "anschauung"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할 때 두 번째의 번역어로 착각할수있는 두번째 직관(intuition)보다는 첫번째의 직관(anschauung)으로 해석가능한 "지각"으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본문과 관련하여도 영화같은 것을 보는 행위는 지각(시지각)을 통해 인식을 얻는 행위이므로 더욱 그렇겠지요..이렇게 정리해서 본다면 anschauung을 보는 paby님의 해석(anschauung을 intuition으로 이해하는 해석)에는 분명 문제가 있는 것 같네요..다시한번 이야기하면 매개적 직관 혹은 바라봄(anschauung)과 비매개적 직관(intuition)은 독어에도 분명히 구분되는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지각을 좁은 의미의 무의식적 지각으로 보았을 때(두번째의 지각) 그것은 anschauung과도 그리고 intuition과도 다른 것입니다..그런데 벤야민은 이런 의미의 지각을 의미한 것같지는 않고 따라서 제가 생각하기에 제일 적절한 방식은 그냥 번역어를 직관(anschauung)혹은 "바라봄"으로 한 다음 그 의미를 분명히 하는 역주를 다는 것 같군요...직관(anschauung)을 직관으로 번역한 것 자체는 사실 큰 잘못은 아니니까요..anschauung을 intuition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우리나라에서의 "직관"의 불분명한 사용이 문제인 것이지요...그렇지 않고 차선책으로 로쟈님 말씀대로 지각이라고 할수도 있지만 역시 이것도 무의식적 지각이 될수 있으니 온전한 번역어는 아니지요..역시 역주가 있어야 됩니다...(강유원씨나 김남시씨의 번역에서도 정확히 wahrnehmung은 지각으로 anschauung은 직관으로 번역해 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한국어로 intuition을 직관으로 번역하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요? 오히려 영감 혹은 육감이 정확할 듯 합니다..이렇게 "영감"intuition(영어도 독어와 똑같이 intuition임)을 직관으로 해석하는 원인에는 아마도 영어로는 anschauung과 intuition의 구분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지금다시 찾아보니 anschauung에 해당되는 영어단어는 perception이고 intuition에 해당되는 단어는 intuition이군요..때문에 이태동씨가 perception을 지각으로 번역한 것은 어떻게 보면 오역이라고 할수있습니다... )


기타 현실이냐 실재냐의 문제도 현실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20세기적인 상황적 성격의 묘사가능성 때문에 다시말해 20세기에 들어와서야 가능한 영화라는 매체의 현실적 상황 속에서 영화를 보는게 가능하다라는 점에서 실재보다는 현실이 더 적절한 번역어 인 것 같네요..

단 제가 참조한 철학소사전(동녁)의 의미구분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의미구분이 아니라면 이야기가 또 틀려질 수도 있으니..그냥 참조만 해주시기 바랍니다. ^^

로쟈 2005-07-15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페이퍼를 쓰기 전에 일역본을 확인해보고자 했지만, 도서관 실종도서여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일역본이 의미있는 것은 아시다시피 '지각'이나 '직관'이니 하는 우리말 철학어/학술어들이 대부분 일본에서 수입된 용어들이니까요.

제 견해는 이렇습니다. (아마도 일본어) '직관'에는 '바라봄' 혹은 '바로 봄'이란 의미의 직관[직꽌]이 있고, 감관의 매개 없이 바로 깨달음, 즉 직각이란 의미의 '직관'이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는 한자 조어에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 두 의미는 파생관계에 놓여 있을 법한데, 저로선 감관의 매개성 유무를 놓고 볼 때 두 의미가 두 개의 단어로 처리되어야 하지 않나 싶고, 우리말에서 '직관'의 최근의 용례들은 이 중 두번째 의미로 굳어져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당초 독어 anschauung의 대응어였는지는 모르겠으나(일어를 경유한) 현재는 영어intuition의 대응어로 굳어지는 것이죠. 일반론이지만, 말의 의미는 용례(usage)에 의해서 결정되며 따라서 변화합니다. 벤야민 번역문에서 '직관'이란 말을 독어 anschauung의 역어로 수용할 수 있는 독자(두 분 같은 경우)라면 오해의 소지가 적겠으나 일반 독자라면 이 번역문을 바로 이해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저는 번역에서 이해가능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문학작품이라면 사정이 약간 다르지만) 이 경우 영어본이나 러시아어본에서 그렇듯이 '지각'이란 역어가 적합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번역에서 100% 대응하는 역어를 찾는다는 건 불가능하며, 무의미합니다(그런 경우엔 번역이란 '과정' 자체가 불필요하니까). 더 나은 번역, 더 이해하기 쉬운 번역을 시도할 따름입니다.

어쨌든 의견 차이가 그닥 좁혀지진 않았더라도 생각할 꺼리를 제공해주신 데 감사드립니다. 한가지, yoonta님의 견해중 "anschauung에 해당되는 영어단어는 perception이고 intuition에 해당되는 단어는 intuition이군요..때문에 이태동씨가 perception을 지각으로 번역한 것은 어떻게 보면 오역이라고 할수있습니다."는 제가 이해할 수 없군요.

독영사전을 찾아보셨다면 아시겠지만, anschauung의 뜻으로 intuition은 뜨지 않습니다. 우리와는 사정이 다른 것이며, perception이란 역어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들은 (영어권 화자나 연구자의 지적이 아닌 이상) 저로선 수용하기 어렵습니다. 언어'감각'이란 건 그닥 단순한 게 아니니까요...

paby 2005-07-15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oonta/ 제 해석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제 해석이 아닙니다. 저는 일관적으로 "직관"이 1번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직관"이라는 번역어가 잘못되지 않았다고 이야기했지요. 저는 위에서 "칸트 이래 독일 철학에서 직관이라고 할 때는 대개 감각적 인식을 의미합니다. 감각적 인식이 개념을 통해서 매개되지 않은 인식이기 때문이지요."라고 이야기했지요.

직관과 사유의 대비, 즉 개념을 통해 매개되지 않은 인식과 개념에 의해 매개된 인식 사이의 대비는 칸트 이래 독일의 철학적 전통에서 매우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넓게 보면 이 전통에서 벗어나 있지 않을 벤야민도 이런 대비에 익숙했을 테고요. (참고로, 불어 번역에서 Anschauung을 감관을 통한 수용의 의미로 번역했다는 것도 바로 이것이 개념을 통해 매개되지 않고 직접적으로 수용한 것이라는 측면을 부각시킨 번역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현실이라는 번역어에 대해 반대하는 이유는 바로 현실이라는 단어가 "20세기적인 상황적 성격의 묘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벤야민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바에 따르면) 실재를 대중에게 맞추는 일이 (예를 들어 기술적 복제 따위가)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바로 20세기의 현실이지요.

paby 2005-07-15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 저도 번역에서 이해가능성을 매우 중시 여깁니다. 그런데 사실 1번 뜻의 직관이라는 말은 철학용어로 매우 흔하게 통용되고 있는 표현입니다. 근세철학 개론 수업만 들었어도 이런 의미의 직관에 대해서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벤야민 번역자들이 고심하지 않고 그냥 직관이라고 옮긴 것이죠. 단언하건대, 번역자들 중 누구도 직관이 2번 뜻이라고 생각하면서 번역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독일어 Anschauung이 1번 뜻을 가지는 경우 직관으로 번역되니까요. (오히려 Anschuung이 2번 뜻을 가지는 경우가 어떻게 번역하는 것이 좋을까 하는 고민의 대상이 되겠지요.)

물론 철학과 관련없는 사람들이 일상언어에서 직관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이런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는 문맥을 통해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직관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일상적 의미의 직관을 사용할 때, 이것을 사고와 대비시키는 경우는 없으니까요.

(참고로 제가 인용한 표준 국어 대사전은 국립국어연구원에서 2001년 cd로 발행되었고, http://www.korean.go.kr/000_new/50_dic_search.htm# 에서 단어찾기가 가능합니다.)

paby 2005-07-15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고로 영어에서도 직관의 1번 뜻을 intuition이라고 옮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칸트 번역에서는 대개 그냥 intuition을 쓰지요. 물론 독영 사전에도 있습니다. Langenscheidts의 Anschauung 항목에 마지막으로 등재된 intuition은 분명 칸트 철학을 염두에 두고 쓰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저도 벤야민의 영어 번역에서 perception을 쓰지 말고 intuition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더 나아가 한글 번역의 경우에도 지각이라고 쓰는 것이 오역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다만 "직관"이 오역이라는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 그리고 "직관"이 "지각"보다 오히려 나은 번역이라고 생각할 따름입니다. - 제일 좋은 번역만이 오역이 아니라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 보이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yoonta 2005-07-15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내용을 보면서 다시한번 놀랍게 느끼는게 독일어가 가지는 정확한 개념사용입니다..우리말에서나 영어에서도 거의 구분없이 사용되는 지각도 그렇고 직관도 그렇고 독어에서는 정확하게 구별하여 사용가능하다는 점에서 말입니다....독어의 그 놀라운 조어능력이란...-_-

로쟈님 댓글 중에 좀 이해 안되는게 제 말은 이태동씨가 anschauung을 perception으로 해석한 영어본을 근거로..percption을 지각으로 번역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지
anschauung을 perception으로 번역한 영역자가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어에서는 지각으로서의 perception과 직관으로서의 perception이 구별없이 사용되는 듯한데(불확실함. 확인해주실수 있는분 부탁바랍니다-_-)..이 때문에 이태동씨가 직관을 지각으로 번역한것 같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영어에서는 지각perception(독wahrnehmung 혹은 perzeption)과 직관perception(독 anschauung)을 어떻게 구분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문맥에 따라 파악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사실 직관이라는 용어가 intuition으로 사용되는 경우에는 일반인의 경우에는 주로 '영감'이해되지 않나요? 그것을 직관으로 보는 경우가 오히려 저희들 처럼 철학공부좀 한 사람들테나 많은것 같은데요? 뭐 통계가 나와있는 건 아니니 누가 맞다고 할수는 없겠네요..그리고 paby님의 글을 다시보니 제가 좀 오해한 부분이 있네요..지송^^
독어에서도 anschauung이 intuition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엄밀한 철학적 개념구분은 아니겠지요? 벤야민의 글도 분명 anschauung과 intuition은 구분하여 쓴 것으로 보여집니다. 지각wahrnehmung과 직관anschauung을 구별한것 처럼 말이지요..

로쟈 2005-07-16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aby님과는 의견/입장 차이만을 확인하게 되는군요. 그리고 yoonta님, 제가 본 사전들에서 영어의 perception은 직관의 의미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더불어, 제가 참조한 러시아어본에서도 해당 독어는 영어와 마찬가지로 '지각'으로 옮기고 있으며(이 러시아어 단어도 '직관'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저로선 5종의 국역본보다는 서로 일치하게 옮기고 있는 영어본과 러시아어본을 더 신뢰할 수밖에 없군요.

그리고 매번 생각하게 되는 것은 공부하는 사람들의 훌륭한 외국어가 아니라 둔감한 한국어입니다. "우리말에서나 영어에서도 거의 구분없이 사용되는 지각도 그렇고 직관도 그렇고 독어에서는 정확하게 구별하여 사용가능하다는 점에서 말입니다."리고 하신 건 다소 의외인데, 현재의 혼선을 낳은 건 독어 anschauung의 중의성이니까 말입니다...

yoonta 2005-07-17 0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erception [psépn]
n.
1 지각(知覺)(력, 작용); 인식, 인지(認知), 이해; 직관, 직시
2 지각되는 것, 지각 대상; 【법】 취득액, 점유 취득, 징수 ((임차료 등의))
3 견해
.................잘 읽어보시기 바랍니다........<지각> 그리고 <직관> 눈에 안보이시나요?
다음 영어사전에서 찾은 겁니다.. 사전이 틀렸다고 한다면 할말 없구요..

기타 독영사전을 찾아보면 perception은 wahrnehmung이라고 나오고 독한사전을 찾아보면 perzeption은 지각이라고 나옵니다.(교학사독한사전) wahrnehmung은 지각이라고 나오고요..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perception을 anschauung의 역어로 영어권에서 사용하는가 안하는가인데요..
für das Denken wie für die Anschauung..
for both thinking and perception...
님이 직접 인용하신 벤야민독어본과 영어본입니다..
정확히 perception을 anschauung으로 옮기고 있고요..(anschauung이 직관이라는 것은 또 이야기할필요 없겠죠? )

그리고 혹시나 해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영어본을 한번 찾아보았습니다.
In whatsoever mode, or by whatsoever means, our knowledge may relate to objects, it is at least quite clear that the only manner in which it immediately relates to them is by means of an intuition.
보시는 바와 같이 직관을 intuition으로 번역했군요...다른 영어본볼까요..
IN whatever manner and by whatever means a mode of knowledge
may relate to objects, intuition is that through which it
is in immediate relation to them,....
역시 직관을 intuition으로 번역했습니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직관anschauung을 intuition으로 영역했다는 것은 이번에 확인했고요...그러나 이 칸트에서의 intuition이 영감(비매개적 직관)이 아니라는 점은 동의하실겁니다..

그런데 perception이 지각에 쓰이는 건 분명한데 직관에 쓰이는지는 불분명하다는 식으로 위 댓글에서 제가 말했으니...anschauung이 intuition으로도 영역될 수있다는 점을 이번 기회에 확인한 셈이 됐네요..

따라서 지금까지의 정보로만 기초로한다면 perception은 wahrnehmung으로는 사용하지만 anschauung으로는 적어도 칸트책에서는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벤야민책은 예외).. 그러나 한국어 번역에서의 perception에는 직관도 있다는 점입니다..

직관과 관련해서는...
직관은 두가지의미로 사용가능한데.
(칸트적) 직관anschauung은 영어로 벤야민책에서는 perception으로...
칸트책에서는 intuition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두번째 직관(영감)은 영어로 역시 intuition입니다..
이처럼 영어에서는 직관을 두가지 의미에 모두 intuition을 사용합니다..

결국 이번 혼동이 온 원인에는 anschauung을 번역하는데 perception으로도(벤야민영어본)....intuition(칸트순수이성비판영어본)으로도 사용하는 영어해석상의 혼용 혹은 perception을 지각 혹은 지관으로 번역하는 한국어해석의 혼용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보고요.. anschauung을 1번직관과 2번직관으로 섞어쓰는 독어의 혼용에서 기인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가지만 더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그리고 매번 생각하게 되는 것은 공부하는 사람들의 훌륭한 외국어가 아니라 둔감한 한국어입니다. "우리말에서나 영어에서도 거의 구분없이 사용되는 지각도 그렇고 직관도 그렇고 독어에서는 정확하게 구별하여 사용가능하다는 점에서 말입니다."리고 하신 건 다소 의외인데, 현재의 혼선을 낳은 건 독어 anschauung의 중의성이니까 말입니다..."

제가 둔감한 한국어 감각을 가졌다는 요지의 말씀이신데...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이신지 영 기분이 나쁘군요..설사 제가 정말로 둔감했다고 하더라도 꼭 "둔감한 한국어"라는 식으로 표현하여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셔야 했나요?

직관을 1번직관과 2번 직관 구분없이 intuition으로 (때로는 perception으로)사용하는 영어(혹은 한국어)때문에 혼선이 온것인가요....칸트적 의미의 직관은 어김없이 anschauung으로만 사용하고 영감으로의 직감은 intuition으로 사용하는 독어의 "중의성"때문에 혼선이 오는 것인가요?

제 말투가 특별히 님께 기분나쁘게 한 부분은 없었던 것으로 믿습니다. 전 다만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말했을 뿐이고요..
그것에 잘못이 있는것 같다면..차근차근 지적해주면 그만 입니다..(적어도 님글을 관심읽게 읽고 댓글다는 사람한테 보일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꼭..둔감한 한국어.......라는식으로 말씀하셔야만 했나요?

로쟈 2005-07-17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nschauung이 특히 칸트에게서 '직관'으로 번역된다는 얘기는 제가 처음부터 한 것입니다("특히 칸트철학의 용어로 굳어져 있다). #3은 처음부터 지각과 관련하여 현대에서의 아우라의 파괴 문제를 다루고 있기에 저는 이 대목에서 anschauung의 역어가 '지각'이 더 타당하며, 영어본이나 러시아어본에서도 그렇게 옮기고 있다고 했습니다. 독어본에 비추어 영어본의 오역들을 지적하실 만큼(이 경우 러시아어본도 오역입니다) 훌륭한 외국어 실력을 보여주셨는데, 저로선 왜 '지각'과 '직관'이란 우리말 의미의 차이가 감지되지 않는 것인지 의문이었을 따름입니다(intuition을 '지각'으로 옮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perception을 직관이라고 옮기진 않지요. 문제는 anschauung의 경우 두 가지 의미를 다 갖고 있기에 문맥에 따라 가려써야 한다는 데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둔감한 한국어'란 표현으로 기분 나쁘게 해드렸다면 죄송하군요. 그런 뉘앙스가 없지는 않지만, 제 의도는 yoonta님의 독일어 예찬에 호응하기 위해서 학문어로서 한국어 자체가 갖는 '둔감함'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물론 저로선 아이러니를 담은 것이니 이래저래 불쾌하실 수 있지만, 직접적으로 yoonta님을 겨냥한 건 아니라는 걸 밝혀둡니다(그리고 제 브리핑에 댓글을 달아주시는 분들이 특이하게도 모두 '알라디너'는 아니시더군요. 설마 제 서재에만 들르시는 건 아니시겠죠? 가면의 소통이 아닌 쌍방향 소통이라면, 서로간에 오해를 줄이고 이해의 폭을 늘릴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비슷한 공부를 하고 계신 거라면 가끔은 페이퍼도 써주시기 바랍니다...).

릴케 현상 2005-07-17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같은 '알라디너'는 댓글 달 수가 없네요-_- 읽고나면 그냥 어리벙벙해져서리^^

로쟈 2005-07-18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외계'에서 오신 분들이 무섭습니다.^^

yoonta 2005-07-19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 말이 꼭 맞다는 의미에서 글을 쓴 것은 아니고..이렇게 볼수도 있지 않느냐 차원에서 댓글쓴 것이니 굳이 로쟈님 견해에 안티를 할 생각은 없습니다.
어쨋든 로쟈님글을 계기로 생각지 못했던 용어들에 대한 정리는 확실히
한 셈이 됐네요..

그리고 저 외계인 아닌데요-_- 제가 페이퍼나 리뷰등을 쓰지 않는건 이곳을 알게 된것도 비교적 최근이고 글을 쓸만한 내공도 못되고 해서..유보하고 있는 중입니다.
근데 꼭 페이퍼를 써야 '알라디너'가 되는건 아니지요? ^^

로쟈 2005-07-19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유령이신가요?^^ '알라디너'라는 건 이 공간에서 '거주'한다는, 그래서 먹고 자고 하면서 생활하는 티를 낸다는 뜻이라고 봅니다. yoonta님의 서재는 '청정지역'이더군요. 저는 '생활'에 내공이 필요하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물론 (외계는 아니더라도) 다른 곳에 '거주'하신다면, 굳이 알라디너가 되실 필요는 없지만, 하도 자주 방문하시길래...

yoonta 2005-07-19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생각은 댓글 다는 중에도 나온다고 봅니다..페이퍼등을 써서 교류하는게 물론 정석이긴 하겠지만..그렇지않다고 로쟈님이 손해?본다고 생각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제가 님 서재에 자주방문하는 건 그만큼 님글이 저한테 재미있어서 아니겠습니까.. 로쟈님 이야기 듣다보면 왠지 괜히 제가 님 서재에 와서 물만 흐려놓는 사람이 되는것 같네요.. 댓글은 앞으로 자제하도록 하지요..

로쟈 2005-07-20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의 자제를 부탁드린 건 전혀 아닌데, 오해가 있으신가 봅니다(그리고 약간은 흐린 물에 생물들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제 서재는 '청정지역'이 아니므로 마음껏 휘저으셔도 됩니다.^^). 저로선 '특별한' 관심을 가져주시는 분들이 반갑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기 때문에 '교류'에 대한 바람을 가져보았을 뿐입니다. 제게도 '재미'를 나누어주시길 바랍니다...

2005-08-02 1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