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선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평점 :
절판


프랑스 스릴러의 황제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가 돌아왔다. 역시 오래 기다렸다. 출판사에 여러번 졸랐는데 이제야 나왔다. 기다린만큼 이번에는 전작과는 다른 색다른 모습을 선보이고 있다. 한 마디로 범죄 사냥꾼과 연쇄 살인마에 대한 이야기다.

연쇄 살인마는 이미 감옥에 들어가 있고 미결수지만 사형이 확정된 거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그의 발자취를 그의 지시에 따라 가는 마르크에게서 공포의 냄새가 나고 점점 오싹해지는 뭔지 모를 스릴을 느끼게 된다. 혹시 덫은 아닐까 생각하며 나아가는 마르크와 같이 나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뢰밭을 걷는 기분이 이럴까? 마르크가 르베르디의 지시에 하나 하나 따를 때마다 그 잔인함보다 오히려 그 뒤에 뭐가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느낌이 진짜 스릴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게 만들었다. 작가는 여기에서 이미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감옥에 있는 살인마와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행적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독자를 스릴에 빠지게 만들고 있다. 여기에는 어떤 반전이나 트릭도 없다. 한 남자의 광기와 살인의 흔적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마르크가 움찔할때마다 따라서 움찔하게 된다.

세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그 인물들은 공통적으로 어린 시절에 끔찍한 경험을 해서 그것이 트라우마로 남아 어른이 된 지금까지 그들의 인생을, 그들의 꿈속에서 괴롭히고 있다.

마르크는 두번의 죽음을 경험하며 그때마다 코마에 빠졌다. 그리고 깨어나면 그 일을 잊는 기억상실증에 시달린다. 그가 아는 것은 남들이 이야기해준 것들 뿐, 그의 머리 속에는 잔인한 기억이 남아 있지 않다. 그는 그것에서 심한 불안을 느낀다. 그것이 그가 범죄, 특히 연쇄 살인범을 쫓게 만든 원인이다.

르베르디는 어린 시절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자살을 했고 그것을 본 그는 상처를 받아 연쇄 살인범이 된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또한 "도망쳐. 아빠가 돌아왔다."라는 말을 하며 무의식 상태에 빠져 아버지에 대한 어떤 안좋은 기억이 있는 것은 아닌지 추측하게 만든다. 그에게 어떤 과거가 있었길래 그는 잔인한 살인마가 된 것일까.

하디자의 등장은 작품에 스릴을 더하는 양념인 동시에 작가가 그동안 추구한 여성상의 연장선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디자는 빈민가에서 마약중독에 빠진 부모에게 손수 마약을 주사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자신이 양육권을 얻을 나이까지만이라도 부모가 살아 있어 동생을 돌볼 수 있기를 바랐지만 그의 부모는 마약에 취해 스스로 불을 내고 타죽는다. 그것이 지금까지 꿈 속에서 그녀를 따라다니고 그녀에게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그런 하디자의 사진을 빼돌려 르베르디에게 자신이 그녀인 것처럼 속여 사진을 보낸 마르크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이라니. 이로인해 더욱 불안은 증폭된다. 읽는 내내.

살인자가 무호흡 다이버라서 그런지 계속 숨 쉬는 것을 확인하게 만든다. 책을 보는 내내 그래서 가슴이 답답했던 모양이다. 검은 선은 절대 넘어서는 안되는 선이다. 그 선을 넘는 순간, 악으로 향하는 문을 연 것이 된다. 마르크가 망설일때마다 돌아가다오를 외쳤다. 외친다고 돌아갈리 없지만 제 발로 그 선을 넘는 것이 무모하고 처절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점점 르베르디와 엘리자베트만 남고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을 인식하는 마르크가 더 무섭게 느껴졌다.

작가는 아주 단순하게 접촉, 여행, 귀환이라는 세 단원으로 나누고 있다. 그 단순함은 악과의 접촉, 악으로의 여행, 악에서의 귀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안에 공포와 스릴을 꽉 채워 독자들을 숨 막히게 만들어 버린다. 이 단순함으로 포장한 불순물을 첨가하지 않고 보여주는 악이 진짜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검은 피의 흐름 하나만으로 충분하게 잔인한 악과 마주하게 한다. 오히려 이런 점이 더욱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지게 만든다. 그러면서 작품 안에서 복선을 깔아 독자들에게 앞을 암시하는 세심한 배려도 하고 있다. 독자는 이미 첫 장을 읽는 순간 결말을 어쩌면 알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렇게 알게 되면서도 작품이 시시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빠져들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작가가 가진 힘이다.

프랑스 스릴러의 황제는 이렇게 멋진 작품을 가지고 우리에게 돌아왔다.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 한단계 더 도약을 한 느낌이 든다. '시체와 공포가 푯말처럼 이어진 선. 검은 선.' 그 다음 악의 기원은 어떤 선으로 이어질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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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우연히 아이를 구하고 잡지에 자신의 얼굴이 실린다.
그런데 누군가 자신의 어린 아이 사진을 보내고 묻는다.
"내 딸이냐?"
아니 이런 드라마에나 있을 법한 일이...
어떻게 이 작품이 스릴러가 되는 지가 궁금하다.
정말 아름다운 거짓말일까? 그 말은 누가 하는 것일까?

쿰란에 이어지는 작품인가?
쿰란 사막으로 돌아온다니?
흠... 쿰란을 안 읽어봐서...
프리메이슨이 등장하고 살인이 등장하고...
글쎄...

백권이 나왔다.
지독한 작가같으니라구.
표지는 행복해보이는데 아버지랑 화해한건가?
이제 그만 내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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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08-03-14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0권... 대단하네요. 더 파이팅도 막 80권을 넘었는데... ㅎㅎ;;; 아빠는 요리사라는 책도 그만큼 되지 않았나요? 예전 조금보다가 못봤었는데...

물만두 2008-03-14 12:07   좋아요 0 | URL
저는 이제 긴 책은 눈길을 안줄 생각입니다. 아주 죽겄습니다^^ㅋㅋㅋ

무스탕 2008-03-14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맛의 달인은 하나도 안봤는데 어제던가 오늘이던가 100권이 나왔다는 광고를 보고 기절할뻔 했어요 @.@

물만두 2008-03-14 17:44   좋아요 0 | URL
그걸 다 산 사람도 있습니다요 ㅜ.ㅜ

soyo12 2008-04-05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그만 내면 좋겠습니다. 지쳐요.....지쳐. 세상에 만화책 보다 지쳐보긴 처음입니다.^.~

물만두 2008-04-07 11:35   좋아요 0 | URL
정말 징글징글합니다^^;;;
 
쓸쓸한 사냥꾼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북스피어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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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여사의 이 작품에 <이와 손톱>이 나온다고 해서 나는 부랴부랴 <이와 손톱>을 봤다. 그럴리야 없겠지만 이 작품을 먼저 보고 낭패를 당할까봐서. 내가 자발적으로 떡밥 만들고 내가 낚인거니 할 말은 없지만 <이와 손톱>에 대한 미미여사의 대응 작품이 아닐까 생각했던 나에게는 조금 씁쓸한 작품이 되고 말았다.

친구가 하던 헌책방을 친구가 죽자 얼결에 하게 된 이와 씨가 운영하는 다나베 헌책방은 손자가 주말마다 도와주러 요코하마에서 와서 하는 할아버지와 손자 미노루의 아옹다옹하는 재미를 주는 것이 더 매력적인 작품이다. 핵가족화는 옛말이 되고 이제는 일인 가족시대가 되어버린 오늘날, 그래도 할아버지와 손자가 함께 하는 모습은 그 모습만으로도 가슴 따뜻하게 해준다.

6편의 작품이 등장하는데 <무정한 세월>을 빼고는 모두 책이 등장하고 있다. 한 마디로 헌책방 속 책을 둘러싼 미스터리 단편집이라고 할 수 있다. 첫 작품에는 <이와 손톱>이 등장하고 나머지 작품에도 내가 모르는 작품들이 등장하고 마지막 작품에는 표제가 된 <쓸쓸한 사냥꾼>이 미완성된 추리작가의 책으로 등장한다. 이 작품이 <모방범>의 원형이 된 작품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모방범>에서 나온 두부가게 할아버지의 모습이 이와 씨의 모습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무정한 세월>을 보다 잠깐 울컥했다. 1945년 도쿄 대공습때 8만여명의 도쿄의 무고한 시민들이 죽었다고 나온다. 잔인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도 잔인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전쟁 가해국이든 피해국이든 죽는 이들은 힘없는 이들뿐이다. 영국이 독일의 무기공장을 폭격한다고 하고 무고한 시민들만이 사는 곳을 공격해서 일부러 많은 이들을 죽였고 그 장군은 영국에 동상을 남겼다는 얘기를 들었을때도 나는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본인, 그것도 공인인 작가의 입에서 이런 말을 들으니 기분 안좋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미미여사 이래도 되는 건가요? 라고 묻고 싶었다. 그 뒤 <거짓말쟁이 나팔>에서 작가는 일반 시민들은 전쟁이 좋은 거라는 말에 속아 전쟁에 동원되었을 뿐이라고, 거짓말에 속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두번 다시 속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도 어떻게 대공습에 대해 가르치는지는 알고 싶다. 전쟁이 잘못이었고 주변국에 피해를 끼쳤다고 반성하는 모임으로 후세에 가르치기를 바라지만 글쎄...

다나베 서점 이와 씨를 중심으로 그 서점에 오는 사람들에게서 벌어지는 미스터리, 일상의 미스터리, 살인과 범죄의 미스터리가 펼쳐지고 있다. 그리고 이와 씨는 손자 미노루가 열살 연상녀를 사귀는 것에 속앓이를 하고 손자와 냉전도 벌인다. 이와 씨는 아무리 까치발을 들어도 아이는 아이이고 어른일 수 없다고 말한다. 어른이 애를 도피처로 삼아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나이는 그 나이만큼만 먹는 법이라고, 아이같은 어른, 어른같은 아이라해도 진짜 자기 나이보다 애가 되거나 어른이 되지는 않는다고. 이 말이 와닿았다. 나이를 먹을 수록 나이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있음을 느낀다. 이와 씨만큼의 연륜은 아니지만 사십이 넘으니 그만큼의 세상이 보인다고 말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이와 씨, 참 매력적인 인물이다. 그가 있어 이 작품은 빛이 난다.

사건보다 오히려 이와 씨와 손자 미노루의 이야기가 더 재미있었다. 그리고 <거짓말쟁이 나팔>에서 아이가 학대받고 있음을 금방 알아내고 걱정하고 경찰에 신고까지 해주며 아이를 보호하는 마음이 바로 <쓸쓸한 사냥꾼>에서 이와 씨가 마지막에 중얼거리는 구절과 닿고 있다. 사람이 가장 무서운 세상이지만 그래도 사람의 온기때문에 사람인 우리는 살고 있는 거니까.

280쪽에서 281쪽에 걸쳐 나오는 마지막 내용이다.

『쓸쓸한 사냥꾼』에 나오는 한 부분이 문득 이와 씨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우리는 모두 쓸쓸한 사냥꾼이다. 돌아갈 집도 없이, 거친 들판에 내던져진 외톨이다. 이따금 휘파람을 불어도 대답하는 것은 바람소리뿐이다.'
그 젊은이가 저지른, 변명할 길이 없는 끔찍한 살인 뒤에서마저도 고독한 휘파람 소리와 그 소리에 대답하는 공허한 바람소리가 들려오는 걸까?
그리고 그 부분은 이런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잠이 든 미노르 곁에서 이와 씨는 살며시 그 구절을 암송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을 사랑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늘 사람의 따스한 온기를 그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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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팬더 2008-03-23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짐 레벨7 읽고 있고 이 책을 다음 구입목록으로 정하고 있었는데 미미여사가 그런 발언을 하다니. 지금 신분이 군인이서서 그런지 몰라도 거부감이 드는군요. 해변의 카프카를 읽다가도 그 일본병사들 나오는 장면에서 거부감이 들던데 참..
군대와서 뒤늦게 책 읽는 즐거움을 알고 일본 소설들도 접하게 되었습니다. 일본 작가들은 소설읽는 재미를 느끼게는 해주는데 이런식으로 종종 사람 뒤통수를 치더군요. 솔직히 레벨7도 모방범의 그때 그 포스를 느끼지는 못하겠구. 암튼 책 구입에 참고하겠습니다.

물만두 2008-03-24 10:20   좋아요 0 | URL
제 생각일수도 있습니다. 일본 작품은 좀 그런 면이 있죠. 어떤 생각으로 썼는지가 의식되는 거요. 책 많이 보세요~ 레벨7은 미미여사작품같지 않죠^^:;;
 

만화 몬스터의 소설판이라...
하지만 원작 만화와는 또 다른 것이 있다?
몬스터 결말을 못봤는데 소설을 봐부러???
기대된다. 암튼...

1편도 아직 안봤는데 2편이 나왔다.
간바라 메구미 시리즈라...
클레오파트라가 뭐냐고 묻는군.
그나저나 표지가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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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얼굴
아베 코보 지음, 이정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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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내가 이 책을 왜 보게 되었을까? 책을 읽는 내내 책을 덮은 뒤, 그리고 글을 쓰는 지금도 생각 중이다. 일본의 카프카로 불린다는 아베 코본지 고본지 암튼 이 작가의 이 작품을 보게 된 것은 <실종 삼부작>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오오~ 실종이라, 이것은 추리소설의 소재가 아니던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내심 하라 료의 <내가 죽인 소녀>와 비슷한 작품이기를 바랬다. 하지만 일본의 카프카가 추리소설을 썼을 리 없고 처음에는 그나마 추리소설처럼 나아가는 것처럼 보여 기대를 했는데 오히려 SF적인 요소가 더 많은 철학적인 내용이라 머리를 쥐어뜯고 말았다.

사고로 얼굴에 화상을 입고 붕대로 얼굴을 가리고 다닐 수밖에 없게 된 남자는 도대체 얼굴이 뭐기에 얼굴 하나로 인해 자신의 생활이 이렇게 달라지고 남들의 시선이 괴물을 보듯 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내의 모습마저도 그는 자신을 평소처럼 대하는 듯 보이지만 그 속에 자신을 밀어내는 것이 있음을 감지하고 자신의 얼굴에 사람의 가면을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가면을 제작한다. 새 얼굴을 만들어 타인과 소통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작품은 그 결과를 남자가 아내에게 남긴 노트의 이야기다. 우리는 남자가 자신이 쓴 글을 다시 읽는 셈이다. 마치 타인의 일기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타인의 얼굴을 보는 것처럼. 아마도 작가가 이런 형식으로 얼굴이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인식시키고자, 소통하고자 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처음에 나는 주인공에게 공감했다. 무언가를 잃어본 이는 처음 당황하게 되고 남에게 상처받게 되고 자신을 점점 고립되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단 얼굴뿐이 아니다. 눈과 귀일수도 있고 몸 전체일 수도 있다. 또한 정신일 수도 있고 마음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계속되는 주인공의 오만 속에서 단순하게 자학으로 바뀐다는 생각이 드니 결국 잃은 것은 얼굴이 아닌 자아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가 잃어버린 자신을 누가 인식하고 인정해서 소통의 통로를 열겠는가? 그는 소통의 통로를 닫고 자신만의 동굴 속으로 이미 갇혀버린 사람이었다. 그에게 노트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고 타인의 가면은 피에로의 우스꽝스런 가면일 뿐이다.

태초에 거울이 없어 인간이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었을 때 인간의 다른 사람의 얼굴만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타인의 얼굴로 자신의 얼굴을 미루어 짐작하거나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의 얼굴 생김새를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것으로 동질감을 느끼고 자연스럽게 소통했다. 그것이 인간에게 얼굴이 인간의 모든 것임을 나타내게 만든 것은 아닌가, 오랜 시간 인간에게 그런 것들이 쌓여 얼굴을 보여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아니 더 나아가서 얼굴의 아름다움만으로 내면의 아름다움은 무시하게 만든 것이고 오늘날도 얼굴이라는 것은 인간이 타인과 소통하며 살아가는데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은 끊임없이 얼굴만이 소통의 통로는 아니다. 얼굴을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얼굴은 결코 내면을 반영하지 않는다. 인간은 얼굴만으로 한 사람의 인격을 판단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려 하지만 결국 그는 가면을 만들면서 모든 사람들이 가면을 사용하는 장면을 상상하며 즐거워한다. 똑같은 가면을 쓰고 문제가 일어나자 당국이 개입해서 가면금지를 내린다는 다소 엉뚱하게 보이는 이런 발상은 패전 후 일본에게 강요당한 다른 얼굴, 자신들에게 맞지 않는 가면을 억지로 쓰게 만들고 화상 입은 주인공은 일본 그 자체를 대변하는 것으로도 여겨지게 만든다. SF적 공상이 현실에 대한 비판 내지는 현실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장면이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결국 아내마저 가면으로 속이고 시험했던 주인공의 모습은 가면이 자신인지, 가면을 벗은 얼굴의 모습이 자신인지조차도 인식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받아들이지 못하고 외면하려 하면 할수록 상처만 깊어진다는 것과 자신 스스로 그것에 당당했다면 타인의 시선을 인식하는 일도 극복할 수 있었을 텐데 그는 오히려 자신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이 왜곡된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작가가 당시의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잘못과 패전을 인정하고 반성하지 못하고 원폭에 대한 책임만을 물으려 한 것에 대한 시선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국수주의적인 생각에서 자신들에게 강요하는 미국의 부당함에 대한 울분의 토로로써 무장을 역으로 주장하는 것이던지.

일본 작품들을 보면 이런 것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그들에게는 겉과 속이 다른 이중성이 있어 그것을 잘 감추고 남이 그것을 다른 시각으로 보게끔, 아니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드는 포장의 미학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문학작품에서 그런 점은 내가 작품을 잘 읽고 있는 건지, 혹 그들에게 당한 역사가 있어 왜곡되게 받아들이는 건지를 따지게 만든다. 한마디로 교묘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실종된 것은 무엇일까? 단순하게 보면 얼굴의 실종은 인간의 자아의 실종이 아닌 자신감의 실종이다. 그것도 무시할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타인의 얼굴로 사는 것은 개성의 실종이다. 좀 더 들여다보면 일본이라는 국가의 얼굴의 실종을 들 수 있다. 패전으로 망가진 나라, 전 국민의 패배감, 그렇다고 다른 나라로 둔갑할 수는 없다. 일본은 일본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중적인 인간과 국가라는 두 가지를 나타내고 있는 이 작품은 그만큼 마지막까지 내게 너무 어렵고 벅찬 작품이었다. 소통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이해를 바탕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얼굴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아니고 '나'와 '남'의 다름의 차이를 인식하고 존중하는 가운데 발전시키는 것이다. 거울을 보게 된 인간은, 더 나아가 자신과 다른 얼굴의, 다른 문화의 인간을 많이 만나게 된 인간은 그것을 인지하고 있다. 다만 그것은 아주 미묘해서 소통하고자 하는 이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전제조건이 따른다. 얼굴은 변명에 불과하다. 진정 소통을 하려고 마음을 먹은 사람이라면 그 마음을 전달하는 방식이 타인에게 명확하고 우호적으로 전달되어야 한다. 그리고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 다른 이의 얼굴을 자기 방식대로 해석하는 것이 아닌 타인의 방식과 타협하는 것이다. 아니면 개인 간의 소통도, 국가 간의 소통도 모두 그럴 듯하게 보이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타인의 얼굴이라는 제목이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나'가 아니면 '나'조차도 모두 타인이다. 그것은 바꿔 말하면 타인의 얼굴은 자신의 얼굴과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똑같은 것은 가면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소통을 거부하고 있다. 자신만의 자아, 자신을 충족시킬 타인의 시선만을 원한다. 그리고 그것이 안 된다면 무력도 행사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남의 얼굴을 통해 상처 입는 것이 자신의 얼굴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한 타인의 얼굴과의 소통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작품을 보면 점점 더 소통 불가능, 소통 불통, 일방적인 언어와 행동이 소통이라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의 문제점이 더욱 부각된다. 그러면서 작품 속 똑같은 가면을 쓴 것처럼 여겨지는 주변의 느낌에 소름이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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