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비늘
이강산 지음 / 책만드는집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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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타주라는 미술표현기법이 있다. 긁어내기 기법으로 스크래치로도 불리는. 도화지에 여러 색깔의 크레파스를 칠하고 진한 색으로 전체를 덧칠한 다음 칼이나 나무젓가락 같은 도구로 표면을 긁어내면 처음에 칠한 바탕의 여러 빛깔이 다시 드러나게 된다.

소설집황금 비늘에서 나는 그라타주를 떠올렸다. 아홉 편의 단편 소설 속에 펼쳐진 다양한 삶들은 여러 빛깔이지만 환하게 드러나지 않고 어둠 속에 숨은 채 구석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소설 엄마의 탄생에 나오는 말처럼보이지 않아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p9) 삶이다. 너무도 선명하게 존재하지만 거대한 장막과도 같은 사회 시스템에 가려져 자세히 둘러보지 않으면 자칫 보이지도 않는.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결코 볼 수 없는 진실을 저자는 부드러운 펜으로 조용하고도 조심스럽게 긁어낸다.

아픔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저마다 가슴 속에 아린 기억 한 두 가지 쯤은 있으리라. 그런데, 뭐랄까. 소설 속의 삶들은 가슴 속에 새겨진 아픔이라 표현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하다. 품고 있는 것도 모자라 삶 자체가 아픔이 되는 깊이가 있다 할까. 감히 어쭙잖은 연민의 눈으로 바라볼 수 없는 묵직함이 담겨져 있다.

인터넷에서 검색해본 저자의 흑백사진들과 시에서 볼 수 있는 분위기가 날 것 그대로 담겨있는 소설들. 너무나 느리게 펼쳐지기에 삶을 관통하며 갈라진 손톱 끝까지 보일 정도로 적나라하다.

저자는세상을 흑과 백으로 단순하게’(p7) 바라본다고 하지만 소설 속에서 흑백 사진처럼 서술된 삶들은 수많은 채도로 존재하므로 섬세할 수밖에 없는 복잡함이 있다. ‘언어의 절제여백의 미를 깨우치고 문학의 수묵화를 꿈꾸고 있다는 저자가 느림비우기를 거듭하며 도달한 곳은 낮은 지붕, 낮은 사람이다. 가장 하찮게 보이지만 바다처럼 많은 것을 품고 있으며, 나무의 뿌리처럼 생명의 근원이 되는.

 

 

<금반지>는 장돌뱅이 아버지의 그림자가 담긴 장터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칠순 기념으로 칠십 년 만에 처음으로 받았던 금반지를 잃어버린 아버지. 손녀딸의 금반지를 녹여서 만든 것이기에 더더욱 조바심 내며 찾으려는 과정은 옻칠한 밥상처럼 번들번들하게 얼어붙은 빙판길이 시내버스의 발목을 옭아매고 놓아주지 않는’(p17~18)것처럼 위태위태하다. 결국 밝혀진 사실을 목도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금반지 하나 때문에 마치 내다 버린 사과 궤짝처럼 처량’(p19)하다.

동네에 있는 L슈퍼의 인터넷 주문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 VVIP고객님이 되어버린 나. 덕분에 퇴근길 들르곤 했던 전통 시장과의 거래가 거의 끊어졌다. 연말정산이나 전통시장 상품권으로 시장 이용을 권장한다고는 하지만, 장꾼들이 장돌뱅이 숫자보다 적은 풍경은 특히 날이 궂은 겨울이면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수요일마다 아파트 정문 근처에 열리는 장터.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장을 보며 핫도그 등 주전부리를 사먹던 소소한 재미를 언제부터 잊어버리고 살았던가. 어렸을 적 엄마를 따라 시장을 찾던 일상은 동네 슈퍼를 가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는데, 편안함에 떠밀려 점점 사라져가는 모습들이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모래알인 듯 허전하다.

속옷 장수 에어 메리가 내뱉는 말투에서는 걸러내지 않는 삶이 그대로 투영되어 나온다. 그녀의 욕설에서 상스러움보다 후련함이 느껴지는 것은 웃음 띤 위선으로 가려진 세상을 향한 솔직한 외침 때문일까.

 

<황금 비늘>은 굴다리 옆에 간판조차 없이 생선을 파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옻칠한 밥상처럼 번들거리는 것이 <금반지>에서는 빙판길이더니, 생선 가게에서는 석양을 가리기 위해 지붕 끝에 매달아 둔, 때가 절은 국방색 천막’(p40)이다. 그것은썩은 생선 내장이 말라붙은 것처럼 물곰팡이가 피어난 슬레이트 지붕’(p40)과 더불어 그들의 삶이 담겨진 풍경과 어딘지 닮아있다.

어쨌거나 가오리를 홍어라고 한 것이 가짜를 속여서 판 죄가 된다면, 그렇게 따지고 들자면, 도대체 이 장터에서 가짜 아닌 것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중략) 가짜는 장터에서 사라져야 하는 거야. ? 알겠냐구. 가짜를 파는 사람도 사라져야 한다구. 씨팔. (중략) 설사 장터에 깔린 수많은 장물들이 가짜라 해도 사람은 가짜가 아니다.’(p62) 그래, 사람은 가짜가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사람과 그들의 삶이 어찌 가짜일 수 있단 말인가.

생선 비늘처럼 장터에서 떨어져나가는 나리 엄마지만,‘생선 비늘 같은 굳은살이 박이도록 빠짐없이 바다 생선들을 만져보았던’(p48) 그녀는다만 늙었기에 장터를 떠날 뿐이지 가짜라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p62) 소설 은교에 나오는 말,‘노인은, 그냥 자연일 뿐이다. 젊은 너희가 가진 아름다움이 자연이듯이.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p250~251)처럼.

제목이 주는 의미를 생각해본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내리꽂힌 황혼 줄기에 빛나던 조기 비늘처럼, 사회의 어두운 장막이 걷힌다면 그들의 진짜인 삶도 황금빛으로 빛나지 않을까.

 

<진주조개잡이>는 바뀐 세상에서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된 나전칠기 기술자의 이야기이다. ‘손바닥 전체에 누룽지 같은 굳은살이 박이도록자개장을 만들었던 영복은 솥단지에 들러붙었던 누룽지가 떨어져나가듯 직장으로부터 분리된다.

세상이 바뀌어야지. 이게 어디 우리 같은 놈 살라는 세상이냐?’(p80) 비정규직이 절반이 넘는 세상, 그나마 불안정한 직장이라도 다니고 있는 게 어디냐며 부러움을 사는 세상이다. ‘버스 안에서 아내와 주고받은 세상은 무서웠다. 여차하면 발목이 날아가는 지뢰밭 같았다.’(p91) ‘그것은 낡은 아파트의 외벽처럼 죽죽 갈라 터진 삶의 균열이었다.’(p92) 점점 설 곳을 잃어가는 삶들이 무겁고 또 무섭다.

 

<그물>은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우리 식구 중에 나만 병신인 줄 알아? 나만 절름발인 줄 아느냐고! (중략) 남의 식당에서 끙끙대다가 명절에나 집에 오는 큰언니는 뭐, 병신 아니야? 친정도 모르고 사는 엄마는, 엄마는 나하고 다를 줄 알아? 외가도 없는 우리는 또 어떻고. 도대체 우리 집안에 정상인 사람이 누가 있어!’(p119)라 절규하는 막내의 말에부서지고 무너진 폐허 속의 풍경처럼’(p120) 가족들 사이에 침묵이 흐른다.

흡사 갇혀 있던 견고한 그물로부터 탈출한 물고기 떼같이 모두들 긴장의 눈빛을 휘둥휘둥 밝혀두고만 있었다. 그것은 캄캄한 심연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한 그 무엇의 완전한 탈출을 기다리는 눈빛 같기도 했다. ’(p121) 소설 속 가족의 균열은 장손 집안에 아들이 없다는 사실로부터 시작된다. 그들을 캄캄한 심연 속에 가둔 것은 무엇일까. 세상으로부터 뿌리 깊게 박혀진 인식과 내일을 걱정해야하는 불안정한 삶이 가족이라는 따뜻한 말을 그물과 같은 올가미로 둔갑시킨 것일까.

 

<칼자국>은 역 주변 골목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사는 게, 걸어서 터널을 빠져나가는 것 같아. 어둡고 답답하고 두렵고.’(p143) 낮에는 기차역 매표소에서, 밤에는 술마당에서 일하는 수빈은 이 지긋지긋한 T골목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 친다.

여긴 세상의 끄트머리야. 바닥이라고. 여기서 주저앉을 순 없어. 끄트머리? , 강수빈. , 꼭 딴 동네 사람같이 말한다. 여기가 세상인 줄 몰라? 세상의 끝이 아니라 세상의 중심이라고.’(p151)‘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 외치셨다는 부처님의 말처럼 누구든 그가 서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인데 그곳을 끄트머리로 인식하는 삶이 바늘 끝에 찔린 듯 아리다.

뜨더라도 골목 사람들 무시하지 마라. 나처럼 물장사를 하든, 돼지 뼈를 삶든, 가랑이를 벌리든 코피 터지게 열심히 산다. 이 바닥에 살다 보면 누가 누구를 무시하는 게 얼마나 같잖은 일인 줄 아니? 여기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은 남을 함부로 무시하지 않아. 남을 등쳐 먹고 사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든, 돈푼이나 있다고 꼴값하는 눈먼 놈들이든 서로서로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해.’(p151)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하는 삶이거늘. 나를 돌아보고 은연중에 그런 풍경들을 무시했을 지도 모를 내 마음을 뒤적여본다.

지우고 싶어도 지워지지 않는 그 칼자국이 오늘, 여기까지 나를 끌고 왔는지 모른다. 골목을 드나들며 흔들릴 때마다 허벅지 근처에서 시큰거리던 그 통증이.’(p153) 그래도 나는 감히 그 통증이 그들의 삶을 빛나게 하고 일으켜 세워 줄 또 다른 의지의 근원이 되리라 믿는다.

 

<거인의 방>은 아홉 평짜리 원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502호미 할머니의 등은 주워 든 비닐 조각이나 시금치 이파리같이 폭삭 젖어 있었다. 우산살처럼 접힌 등 때문이었다. (중략) 그 굽은 허리춤에 밀가루를 뒤집어쓴 곶감처럼 호미 할머니의 얼굴이 걸려 있었다.’(p159~160) 사람의 몸은 그들의 삶과 점점 닮아져만 가는 걸까. 할머니를 묘사한 모습에 궁핍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 돈 이만 원이면 우리 철민이 지금 먹이는 우유, 두 배는 고급으로 먹일 수 있다고요. 거인도 될 수 있는 돈이란 말입니다. (중략) 그럼 우리 원룸이 거인의 집이라는 말이야? (중략) 집은 무슨 집? 방이지. 원룸 뜻도 몰라? (중략) 그렇다면, 거인의 방?’

몇 만 원에 동요하는 이들.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고급 우유와 유기농을 찾으며 음식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이들은 아직도 연탄을 떼며 겨울을 넘기고, 그 연탄 몇 장조차 아쉬워 추운 몸을 부비며 살아간다.

이런 부실 공사를 한 놈들이나 그것을 눈감아 주고 준공 승인을 해준 놈이나 다 마찬가지로 썩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쭈그려 앉아 모기에 뜯기는 것 아닙니까? (중략) 더 이상 이것저것 말씀드리지 않아도 우리가 힘을 합쳐 무엇을 해야 되는지 다들 아실 겁니다.’(p195)

구름 입자 백만 개가 모여 하나의 빗방울을 만들어내듯이 같은 마음으로 뭉치면 거인의 방거인의 집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이 생기지 않을까. 집이 바뀌지는 못하더라도 하다못해 마주 잡은 손의 온기라도 느낄 수 있지 않겠는가.

 

<그 새는 어디로 갔을까>는 저자가 지은 동명의 시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성소수자들의 이야기이다.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그들의 삶은 낚싯줄 같은 바람끝에 매달린 듯하다. ‘욕망이란 게 인간의 본능적인 것일진대 무엇이 불온한 욕망이라는 것인지,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불온하다는 것인지.’(p205) ‘여자를 택하고 커밍을 피한 삶이 과연 정당할까요.’(p220) 아직도 동성애자를 보는 시각이 그리 달갑지 않다. 커밍아웃을 한다는 것은 그래서 많은 희생을 필요로 한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에 성별이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닐 텐데. 다수에 속하지 않는다 해서 소수의 삶이 외면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 새는/ 국립대전현충원 제15묘역 육군 하사 서격춘의 묘와/ 육군 상병 서한원의 묘 사이로 내려앉았다/ 폭설에 간신히 발목만 파묻힌 채// 어디로 갈 것인가/ 두어 번 방향을 바꾸며 두리번거리던 그 새는/ 해군 상병 연준모의 묘를 향해 뒤뚱뒤뚱 걷다가/ 푸드덕 눈을 털고 날아올랐다// 얼어붙은 주검과 주검 사이 내려앉은/ 그 새는/ 이만 개의 화강암 비석을 숲으로 여겼을까/ 폭설 속 저 붉고 푸른 이만 개 원색의 조화(造花)가 꽃인 줄 알았을까// 새의 무게만으로도 저렇듯 선명한 발자국을 본다// 십 년 전의 추억과 일 년 전의 추억 사이에/ 떠난 사람과 돌아온 사람 사이에 내려앉아 뒤뚱거리는/ 나는 어떤 발자국을 남길까/ 어디쯤에서 날아올라야 하는 걸까// 어디선가 이명처럼 새가 울고/ 새 울음 내려앉는 비석들 사이/ 얼어붙은 발자국/ 그 새는/ 어디로 갔을까

소설에 등장하는 시가 나는 참 좋았다. 물론 저자의 심오한 마음의 깊이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뭐랄까, 토막토막 나온 시를 연결하여 읽어 내렸을 때, 멀리서 날아온 피구 공을 한순간에 덥석 안아 받은 듯 뭉클한 느낌이 가슴 속으로 들어왔다. 시는 소재를 넘어 내 삶의 모습과 방향을 돌아보게 했다. ‘나는 어떤 발자국을 남길까, 어디쯤에서 날아올라야 하는 걸까하는 질문이 한동안 마음속을 돌아다녔다.

 

<즐거운 초상>은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죽음을 찾아나서는 판화가의 이야기이다.

유족들의 모습에서 웃는 바위를 본 근상은 아픔과 소외를 표현하되 직설 대신 은유와 역설로 담아내자’(p234)고 결심한다.

정신 나간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초상이 즐거웠으면 싶다. (중략) 장례의 처음부터 끝까지가 지금보다 좀 더 가볍고 즐거웠으면 한다. 아버지, 여기까지 오시느라 힘드셨죠. 이제 편히 떠나세요. (중략) 즐거운 초상, 웃는 상주. 그게 꼭 고인에 대한 불손이고 경박한 풍습이랄 수만은 없지 않은가.’(p238) ‘어머니, 하고 부른 다음, 임종의 순간처럼 깊고 고요한 묵언의 대화를 나누는지도 모른다. 당신의 삶을 반추하는 동안 찔끔, 눈물을 흘리기도 하면서. 그 눈물 끝에, 살그머니 웃으면 안 될까. 평생을 모셨고, 평화롭게 떠나셨으니, 이제 좀 웃어도 되지 않을까.’(p249)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몇 번 겪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아직 잘 모르겠다. 죽음의 절차를 보는 새로운 시각이 살짝 충격적이었달까. 팔십을 바라보시는 부모님, 상상하기 싫지만 언젠가는 내게도 당신들의 죽음을 바라보아야 할 때가 오리라.‘있을 때 잘하라는 말을 머릿속에 심어두고 부모님께 최선을 다하고는 있지만, 아직은, 아직은 울음 끝이라도 웃을 준비가 되어 있지는 않은데.

저 일몰의 깊이는, 환상의 깊이는 얼마나 될까. (중략) 어디서부터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비현실인지. 자동문 밖인지 안인지. 빈소인지 접견실인지. 침묵인지 소음인지.’(p239)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는 말이 있다. 일몰을 뒤로 하고 내게 다가오는 실루엣이 내가 기르던 개인지 나를 해치러오는 늑대인지 구분이 안 되는, 낮과 밤의 경계가 애매한 시간을 뜻하는 말이다. 삶의 끝이 죽음이라면, 죽음의 순간은 삶인가 죽음인가. 24시이면서 0시가 되는 밤 12시처럼, 삶과 죽음이란 언제 생각해도 경계가 모호해지는 혼란을 가져다준다.

 

<붉은 섬>은 사람들 사이에 섬처럼 떠있는 또 다른 사람이 중년의 시간을 지나가는 이야기이다.

누군가를 아는 덴 그렇게 많은 게 필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p285) 누구? . 아는 사람. 흔히 지나치듯 하는 이 말을 곱씹어본다. 내가 아는 사람이라 말한 그에 대해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 걸까, 진짜 안다고 얘기할 수 있는 걸까 하고. 한 사람을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이, 직업, 학력 같은 형식 말고,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무슨 생각으로 삶을 바라보고 있는지 내면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반대로 나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많은 것이 필요하지는 않은 것 같다. 내면을 관통하는 무엇을 보게 된다면 몇 시간을 본 사이라도 아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다.

떠나온 길을 보면 아득하고 돌아갈 곳을 생각하면 까마득한 바다 한복판의 섬’(p286) 때때로 느껴지는 공허한 느낌이 나만의 전유물은 아닌 것 같아서 소설 속 인물에게서 위안을 받는다.

나무들도 인간처럼 중년이 있다. 나무들도 갈등을 겪는다……. 인간이든 나무든 그들의 중년은 다 같이 미와 추의 양면성을 지녔는데…….’(p274)

생각해보면 사람들마다 섬 하나씩 품고 사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복잡한 일상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공간,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는, 그래서 나 혼자 소유하기를 절실히 원했던 그 공간들이 실은 외딴섬 같다는 생각입니다.’(p281)

그래, 섬이었던 거다. 중년의 후반기를 향해 달려가는 나의 시간 속으로 간혹 날아드는 외로움은 섬을 품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자유를 안게 되는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 내게 있어 섬과 같은 공간은 글을 쓰는 이 곳, 이 순간. 글을 쓰는 동안 나의 사유는 어디로든, 누구에게든 날아갈 수 있으므로. 비록 발은 땅을 디디고 있지만, 고개를 들면 언제든 끝없이 열려있는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것처럼.

 

 

책장을 덮고 멍하니 겉표지를 바라본다. 처음 펼칠 때만해도 보이지 않던 배 한 척이 눈에 띈다. 빛과 어둠의 경계에는 바다를 향하고 있는 등대 같기도 한 것이 있다. 배와 등대 사이 오른쪽 중간 즈음에 떠있는 구조물도 보인다. 빛과 어둠, 그리고 그 경계. 나는 어디에 설 것인가. 나의 글은 어디를 향해 날아가 앉을 것인가.

바다와 하늘이 합쳐진 공간이 황금 비늘처럼 빛난다. 그 아래로 가라앉아 있는 어둠이 묵직하다. 저자가 소설을 통해 그려낸 사람의 흑백 풍경이 담겨있을 것만 같은 공간이다. ‘소설로서는 욕을 먹어도 사람의 기록으론 욕먹지 않기를 바란다.’(p8)는 저자의 말이 마음으로 깊이 파고든다.

그라타주는 프랑스어로 긁어 지우기마찰이라는 의미를 가졌다고 한다. 어둠 속에 희끗희끗 보이는 삶을 긁어보고 싶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마찰은 오롯이 긁어내는 자가 감내해야 할 몫이다.‘그라타주처럼 긁어내어 환하게 만들고 싶다. 아니, ‘만든다는 표현은 어쩐지 적절치 않다. 보잘 것 없는 나의 글을 도구로 드러낸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 어둠 속에 있는, 어둠에 가리워진 삶들이 처음부터 어둠은 아니었으므로.

 

 

*사족

1. 인원 수의 합이?

p257, 가이드는 패키지 여행객이 모두 열일곱 명이라 했는데,

서울 가족 3명, 광주 가족 4명, 수원 직장 동료 8명, 대학생과 충주 아주머니와 아저씨 3명.

모두 합치면 18명이다.

2. 문장이?

p281 9번째 줄, ~젖어 있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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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일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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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깨어났다. 오후 217. ‘좋은 서평이 좋은 책 살린다.’던데, 수많은 리뷰와 100자평으로 좋은 책임이 증명되었고 더군다나 2014년의 책으로 불리는 책을, 이미 쌩쌩하게 살아 팔딱거리는 이 책을 내가 어찌 더 살릴까나. 그렇다고 그냥 넘기기에는 받은 느낌이 너무 크단 말이다! 이 느낌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리뷰를 쓰고 싶은데.

주제는 한 마디로 써라!”, 느낌은 좋았다!. 그 이상을 어떻게 나타낼까?

쭉 써라, 계속 써라, 쓰고 또 써라? 이런. 너무 평범하다. 저자는 소설의 문장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라 했는데, 그렇다면 떡집에서 가래떡이 꾸역꾸역 나오듯이 써라? . 이것 역시 초라하다.

그러면 느낌에 대해서 써 볼까? 참 좋았다, 아주 좋았다? 호박잎에 된장 쌈을 먹은 듯한 느낌이다? 호박잎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반찬 TOP 2 중 하나이므로 내게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이건만, 호박잎을 안 먹거나 싫어하는 인간들이 보면 밥맛인 책으로 둔갑할 수도 있지 않은가.

으아, 고민스럽다. 내가 리뷰를 두고 이렇게 고민하는 인간이 아닌데. 앉아서 생각하다 책 베개를 베고 옆으로 누워 다시 책을 떠들어보다 잠이 들어버렸다.

 

 

264쪽의 부담스럽지 않은 크기와 두께는 하루면 읽겠지.’라는 첫인상을 안겨주지만,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책이다. 14일부터 시작해서 어제까지 읽었으니 4일이나 걸린 셈이다. 톡톡 튀는 신선한 유머가 스며있는 문장은 양념처럼 독특한 향을 내고, 가벼운 듯 손쉬운 문장은 일상의 이야기나 소설가가 되기 위해(소설을 쓰기 위해) 필요한 일들을 말해준다. 그 안에 담겨있는 내용은 종종 책장을 넘기던 손을 멈추게 한다.

산문을 통해 처음 접한 이 소설가가 궁금해진다. 네이버 서재에서 인터뷰한 동영상을 보고, 그의 소설에 대한 평도 읽어보고, 평소 좋아하는 편이 아니던 소설이란 장르에도 관심이 생긴다. 소설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문학 장르나 심지어 살아가는 데에도 지침으로 삼을만한 내용들이 들어있다.

 

리뷰를 어떻게 쓸까? 단순하게 내용을 나열하고 싶지는 않다. 마음에 남는 좋은 내용들이 많기에 그것에 대하여 기술하자면 책을 통째로 필사하는 꼴이 되어버릴 것이다.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 몇 달째 필이 꽂혀서 쓰고 있는 시들이 생각났다. 그래, 이거다! 좋은 서평이 좋은 책을 살리듯이, 이 좋은 책이 나를 살린 이야기를 쓰면 되겠구나! 첫 장을 펼치고 책을 읽는 동안 두 편의 시와 한 편의 페이퍼를 썼다. 페이퍼는 수필 형식이었으니, 내 경험을 마음 가는 대로 썼지만, 시는 다른 때보다 더 많이 고쳐졌다. 끄적거렸던 시가 적혀있는 이면지를 찾아냈다.

 

저자는 토하기 직전까지 참고 쓰는 원고를 토고라 했으니, 내 경우에는 토시라고 하자. 이 토시를 읽기 전에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토하기 직전까지 참고 쓴 시적 화자에 감정 이입되어 저도 모르게 속이 거북해질 지도 모르니까.

 

(토시 1)의 처음 제목은 <마음과 마음 사이>.

 

몸과 몸 사이의 거리는/ 자로 재면 되지만// 마음과 마음 사이의 거리는/ 무엇으로 재나//마음은 늘 움직이는 것이니/ 늘 변하기 마련인데// 느낌으로 재는 건가/ 마음 사이의 거리를/ 재는 자는/ 느낌이다

 

, 아주 많이 부끄럽지는 않다. 어차피 나는 시인도 아니고, 그냥 시를 쓰고 싶어서 쓰는 거니까 괜찮다, 괜찮다, 이런 비루한 문장들도. 라며 주문을 건다.

일단 반복되는 말들을 잘라낸다. ‘몸과 몸으로, ‘마음과 마음마음으로, ‘은 두 번이나 들어갔네? ‘잰다는 왜 이리 많이 썼지? 5번이나 들어갔다.‘잰다를 빼니 서술어가 없어진다. 문장이 성립되지 않는다. .. 일단 보류하자.

한참을 들여다본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몸 사이의 거리는 공간이지. ‘몸 사이의 거리는 공간으로, ‘마음 사이의 거리는 시간으로 바꾸자. 공간과 시간. ~ 나름 대칭적인 개념이로군.

다시 한참을 들여다본다.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너무 추상적이야. 좀 더 실질적이어야 해. 거리를 구체적으로 넣어야겠어. 이백킬로미터. 그렇다면 시간은? 하루, 이틀, 사흘. 아니지, 무슨 숫자 놀이도 아니고. ‘하루 또 하루로 하자.

고쳐놓고 보니 공간시간이란 말이 너무 어색하다. 나름 대칭적이라 했지만, 구체적인 숫자가 들어간 이 마당에 중복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눈물을 머금지는 않았지만 어울리지 않으므로 과감하게 버리도록 한다.

수정본을 읽어본다. ~ 개연성은 있지만 핍..성이 없어. 이 책을 읽고 나면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개념어 사전으로 등극하게 되는 단어. 무슨 뜻인지는 책을 직접 읽어보기를 권한다.상황 설정을 해야겠어. 사랑하는 연인에게서 갑자기 연락이 끊긴 상황인 거야. 마지막 연을 추가한다. ‘그대와 나 사이/ 흘러가는 시간이/ 너무 멀다

이번에는 제목이 마음에 안 든다. 그래, 어차피 잰다는 개념이니 거리로 하자.

정리해서 읽어본다. 뭔가 부족하다. 제목을 다시 바꿔보기로 한다. 어차피 주제가 연락 좀 해, 이 인간아.’(^^;)이니, ‘연락 없는 인간’? ‘연락 없는 시간’? .‘무소식으로 하자.

다시 읽어본다. 아까 추가한 마지막 연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대가 들어간 것이 식상하다. 소식을 기다리는 마음을 좀 더 애절하게 표현할 문장은 없을까? 그래, 핍진성을 더하기 위해 그대는 3일째 소식 없는 인간이 되는 거다.‘사흘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이/ 너무 아득하다로 교체한다.

시간이란 말이 앞의 연과 중복된다. ‘시간을 빼고 마음을 넣어본다. 이번에는너무가 눈에 거슬린다. ‘너무숨막히게로 바꿔본다.

후아~ 이제 나는 저녁을 하러 가야하므로 일단 서재에 올린다.

 

제목 : 무소식

 

몸 사이의 거리

이백킬로미터

마음 사이의 거리

하루 또 하루

 

공간을 자로 재면

시간은 느낌으로 재나

 

사흘 향해

흘러가는 마음이

숨막히게 아득하다

 

그렇게 토시를 탈출하기 위한 하루가 지나갔다. 마음에 썩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처음의 토시보다는 낫다며 스스로 위안한다.

다음 날도 이어서 책을 읽는다. 어라? 이번에는 문장을 감각적으로 써야 한단다. 도전!

 

(토시 2). 제목은 없다.

 

마음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그대를 만날 때면/ 내 마음이 여기저기 자꾸/ 돌아다닙니다// 심장으로 가서 심장을 뛰게 하고/ 얼굴로 가서 얼굴을 붉어지게 하고/ 머릿속으로 가서 온종일 내 머릿속을 돌아다닙니다/ 손끝으로 가서 손끝을 떨리게 하고/ 발바닥으로 가서 그대를 향해 걸어가게 합니다/ 눈으로 가서 그대의 모습만 쫓아다닙니다//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은 다행이지만/ 자꾸 자꾸 돌아다니는 마음은/ 온몸으로 드러나니/ 붙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습니다//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온몸 구석구석에/ 그대의 향기가 머무는 것만 같아/ 행복합니다// 마음은 벌써/ 그대에게 다가가/ 그대의 마음을 톡톡 건드립니다

 

진심 산문은 아니다. 가끔 시를 쓰던 초기, 산문처럼 길게 썼던 시기에 끄적이던 거라서. 다시 읽어보니 잡스런 산문이 따로 없다. 마음이 온몸을 돌아다닌다는 걸 나름 표현하고 싶었지만. 다시 보니 심장, 얼굴, 머릿속, 손끝, 발바닥, 이라니. 이건 뭐 머리, 어깨, 무릎, , 무릎, 도 아니고, 인간 한 번 해부해보자는 것도 아니고, . 심지어 뒷부분까지 가면 주제가 뭔지조차 애매하다. 국수가락을 넣었을 때 다시 끓어 넘치는 물처럼 마음만 우루루 넘치는 꼴이다.

마음만 돌아다니자. 뒷부분을 잘라내기로 한다.

돌아다니는 것을 극대화하려면 온몸 구석구석을 넣기는 해야겠는데, ‘심장, 심장’, ‘얼굴, 얼굴’, 반복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동일어를 지운다. 심장을 뛰게 하고, 얼굴을 붉어지게 하고...

다시 읽어본다. 뜻은 통하지만 좋아하는 사람 앞에 섰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 너무 일반적이다. 감각적인 문장이 들어가야 할 타이밍이다.

심장이 뛰는 것은 어떻게 표현할까? 과자봉지를 묶었던 노란 고무줄이 눈에 띈다. 그래! 심장은 고무줄처럼 튕겨보자. 그냥 고무줄은 좀 약한데, 좀 더 강력한 탄성을 자랑하는 건 없을까? 그래! 새총이다!

다음은, 붉어지는 얼굴. 지난 달 동네 커피숖에 갔을 때, 난생 처음 맛보았던 불그스름한 애플티가 생각났다. 투명하게 붉은 빛과 향이 참 인상적이었더랬다. 얼굴은 애플티로 정해졌어!

다음은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것. 돌아다니는 것에 대한 감각적인 대상이 떠오르지 않는다. 우와~ 복잡하다. 머리를 움켜쥐며 아이디어를 짠다. 아하! 바로 이거다! 돌아다니지 말고 헝클어뜨리자, 풀어지는 털실처럼.

그렇다면 떨리는 손끝은? 디카를 처음 득템했던 몇 년 전, 4cm 접사 기능에 마음을 빼앗겨 퇴근 후 사진기를 들고 미친 듯이 동네를 싸돌아다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꼬박 1년쯤을 야생화 접사에 빠졌었다. 무조건 찍고 인터넷으로 무턱대고 노란 봄꽃찾아보고. 덕분에 동네 야생화는 거의 섭렵했었지. 비오는 날에도 꽃잎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좋아서 찍고 또 찍었다. 연두 잎이 파릇파릇 올라오던 여름날. 내리다 그친 비로 빗방울이 뚜욱뚝 떨어지고 있었는데, 그 때 바람이 불어 살짝 떨리듯 흔들리던 연두 잎들이 어찌나 이뻐 보이던지.

사랑하는 이가 생기면 늘 그를 좇기 때문에 발걸음은 무의식적인 힘에 의해 끌려간다. 떨어져있어도 작용하는 힘이라. 중력과 전기력, 자기력인데, 중력은 아래로만 향하고, 전기력은 왠지 감전이 연상되니 철가루를 끌어당기는 자석으로 하자. 감각적인 문장으로 치환하기, 클리어!

이제 제목을 정해야 하는데. 이 시의 주제는 난 네게 반했어.’흐흣~ 직접적으로 드러내면 부끄러우니 살짝 숨기자. 첫 문장을 제목으로 한다. ‘마음은 어디에.

다시 읽어본다. 처음부터 주제가 나와 버리니 김이 새버린다. 첫 문장을 마지막으로 옮긴다.

고쳐 쓴 것을 읽어본다. . 어딘가 임팩트가 없다. 저자는 소설가만이 쓸 수 있는 독특한 문장으로 계속 고쳐 쓰라 했건만. 나만이 쓸 수 있는 문장을 더 추가하고 싶다. 마음이 돌아다니는 것을 좀 더 표현할 수 있는 문장이 없을까?

여기서부터 막힌다. 에라, 잠시 머리를 식히자. 동물 몬스터를 잡으러 갔다 온다. 오호~ 미션을 수행한 보상으로 뽑기를 하는데, 어렸을 때가 생각난다. !! 뽑기 기계 옆에 있던 두더지 놀이가 생각난다. 그래! 감 잡았어!

당도 떨어져 이제 배가 고프므로 서재에 올린다.(으잉? 밥 앞에서 무너지는 고치기의 길?)

 

제목 : 마음은 어디에

 

그대를 생각하는 내 마음이

온몸을 자꾸만 돌아다닙니다

 

새총 안 고무줄처럼

심장을 튕겨내다가

막 끓여낸 애플티처럼

얼굴을 물들이더니

풀어지는 실타래처럼

머릿속을 헝클어놓네요

 

바람 스친 연두잎마냥

떨리는 손끝을 지나

끌려가는 철가루인 듯

그대 향한 발끝으로 갑니다

 

불쑥불쑥 두더지 놀이처럼

도무지 잡을 수가 없네요

 

마음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아직도 살짝 토시 느낌이 전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써보기를 다짐한다.

11, 새해 기념으로 힐끗힐끗 탐색만 하던 북플을 깔았다. 덕분에 비슷한 감성을 가진 친구들도 많이 알게 되었다. 심지어 서재 시작 초기에 지인 1, 2와 큰 딸만 선인장에 물 주듯 달아주던 댓글도 달렸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한 후로 몇 년 만에 이루어진 역사적인 일이다. 시는 비루한데, 고수들의 댓글에서 더 많은 사유의 깊이를 배운다. 퐁당퐁당 호수를 향해 던진 돌이 어느 만큼 들어가는지 모르다가, 물수제비를 뜨는 비법을 터득하여 몇 번이나 튕겨지는지 셀 수 있어졌달까?

 

 

소설가의 일은 내게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게 불탄 다리가 되었다.‘매일 글을 쓴다는 가장 중요한 한 문장을 얻었다. 이 문장을 마음에 심고 나는 토시를 탈출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 할 것이다.

가장 인상 깊었던 267쪽을 물끄러미 바라본다.(전체가 264쪽인데 뭔 소리냐고?) 나는 이 페이지가 제일 좋았다. 비어있는 원고지와 단 세 글자김연수’. 저자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 한 장의 여백에 들어있었고, 그 느낌은 마지막에 순간적인 뭉클함으로 마음에 와 닿았다.

 

 

*사소한 오타

1. 211, 4번 제목의 본문 2번째 줄

기타큐슈 시를 방문한 있었다.~ 방문한 적이 ~

2. 236, 밑에서 3째줄

사실에 알게 됐다. 사실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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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 문도 - 제12회 사계절문학상 대상 수상작 사계절 1318 문고 94
최상희 지음 / 사계절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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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듯 여행을 가보고 싶어졌다. 여행 관련 서적이 아니었고, 여행에 대한 환상을 가질 만한 내용은 더더군다나 없었지만 왠지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었더랬다. 하긴 여행을 가서 보듯 다양한 삶의 모습을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작가가 말한 것처럼 여행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나는 여행을 가본 적이 별로 없다. 먹고 사는 문제가 큰 당면 과제였던 어린 시절에는 돈이 없어 못 갔지만, 직장을 가진 다음에도 섣불리 걸음을 떼지는 못하였다. 미지의 장소에 대한 두려움에서였을까? 혼자 떠난 여행에 대한 기억이 아예 없는 것은.

 

 

여러 나라에서 제각기 다른 빛깔로 살아가는 아홉 명의 소년과 그 친구들 혹은 그들의 부모 이야기. 외국에서 살아가는 모습들은 특이한 풍광이나 제도를 제외하면 근본적인 삶이 우리 사회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리고 아홉 가지 삶의 이야기들은 각기 다른 질문과 생각거리를 던지고 지나간다.

 

<붕대를 한 남자>. 온몸에 불이 붙은 남자가 스스로에게 던졌다는 질문. 나도 1분 동안의 삶에 대한 의지를 위해 달릴 수 있을까? 전신 화상의 고통을 느끼더라도 살아있는 게 나은 걸까, 고통을 떠안고 살아가느니 차라리 죽음을 기다리는 게 나았을까. 평소 길을 걷다 언제든 죽어도 미련이 없다며 쿨 하게 말하곤 했는데, 극한 상황이 와도 삶의 끈을 놓고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답이 어렵다.

 

<노 프라블럼>. 인도 카스트 제도의 불가촉천민에 관한 이야기. 인터넷으로 불가촉천민을 검색해보기 전까지 학창 시절에 배웠던 인도의 계급제도는 교과서 속에나 등장하는 이야기인줄 알았다. 드라마 추노에 나오던 조선시대 노예들이 없어진 지가 언제이며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접촉조차 못하는 천민이라니.

한 블로거의 글에서 입이 딱 벌어지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20081121일에 불가촉천민에 속한 15살의 한 소년이 상위 계급의 한 소녀에게 애정을 표현했다는 이유 하나로 집단 폭행을 당한 뒤 달리는 기차 선로에 던져져 숨진 사건이 발생했다.’이 책에 나오는 불가촉천민 쿤마르의 죽음과 같이 불합리하게 벌어지는 실상은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현실이었다. 글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일들이 세상 어딘가에서 분명히 벌어지고 있었다.

 

<내기>. 암에 걸린 아빠가 마지막으로 아들과 등산을 하며 대화를 한다.“뭘 자꾸 가르치려고 하는 거야?”“그러게. 이제 와서…….”(p97) 아들에게 줄 것이 별로 없음을 아쉬워하는 아빠의 마음이 먹먹하게 담겨있다.

내가 아끼는 주변 사람들은 이 다음에, 이 다음에미루는 나를 기다려주지 않을 수도 있다. 살아가면서 미루다 미루다 끝내 못하게 되는 크고 작은 일들이 얼마나 많이 지나가는가. 바쁘다는 핑계로 한동안 찾아뵙지 못한 부모님이 생각났다. 이 글을 쓰고 나면 전화부터 드려야지 반성해본다.

 

<페이퍼컷>. 말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의사 표현이라는 건 반드시 음성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텔레파시는 아니더라도 느낌을 통해 오가는 언어가 있다. 사람뿐 아니라 사물이나 세상이 걸어오는 말들이.

너무나 바쁜 세상을 살고 있다. 말로 표현해도 상대를 바라보지 못할 정도로 급한 세상. 한 호흡 멈추고 조용히 기다리며 마음이 걸어오는 말을 들어보고 싶은, 나무의 그루터기와 같은 느낌을 주는 이야기이다.

 

<missing>. 어린 시절 혼자 나섰던 작은 여행에 대한 기억. 잃어버린 어린 시절에 대한 소년의 기억에는 클로이 할머니가 끓여주었던 스프처럼 부드러우면서도 물컹한 그리움이 있다. ‘상실이라는 뜻과 함께 그리움이라는 의미도 가진 ‘miss’. 소년은 따뜻함을 그리워했던 것일까?

 

<기적소리>. 기차 길 옆에 살던 아이와의 추억. 내게 남아있는 어린 시절의 기억은 뭐가 있더라? 흩어져있는 몇 장의 사진을 찾듯 드문드문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들을 찾아본다. 마당 넓은 친구 집에서 뛰어놀던 기억, 해질 때까지 옥상을 오르내리며 숨바꼭질을 하던 기억, 가까운 냇가에 놀러가서 혼자 돌아오다 길을 잃어버려 한참을 헤매었던 일들이 생각난다. 그랬던가 희미한 웃음이 나오는 소담스런 추억이.

 

<필름>. 이국적으로 그려진 남미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한 번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붉은 호수 라구나 콜로라다’, 라마, 플라밍고, 하얀 소금 사막 우유니부터 쏟아질 것 같은 별들이 상상되는 낯선 나라의 밤하늘까지.

 

<무대륙의 소년>. 하루에도 몇 번씩 물에 잠기는 물의 도시 1층에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살아가는 소년. ‘여행이란 거짓말을 믿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하는 거라 결론짓는’(p212). 여행 책자나 지도에 담겨 있지 않은 어두운 이면을 묘사하고 있다. 물에 잠겨 차갑고 어두운 곳에서 잠들게 된 고양이와 소년의 모습이 어딘가 서로 닮아있어 마음 한 끝이 아릿하다.

 

<시튀스테쿰>. 수도원에 고아로 버려진 소년이 품게 되는 꿈. 빛이 그려놓은 그림을 좋아하는 소년과 높고 맑은 목소리를 가진 수도사와의 우정이 뭉클하다. ‘너에게 힘이 깃들기를이라는 뜻을 가진 시튀스테쿰’. 둘 만의 암호를 통해 두 사람은 서로에게 힘을 주는 존재가 된다. 나에게도 힘을 주는 존재가 있던가? ... 다행히 있다.

 

 

에스파냐어로 ‘Del Mundo’세상 어딘가란 의미. 세상 어딘가에는 여러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무언가를 잃어버렸거나 잃어버린 것에 대한 향수를 안고 살아가기도 한다.

내가 가진 상처만 커다랗게 보이던 때가 있었다. 저마다 상처를 가진 이들의 모습에서 나만 아팠던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작은 위안이 가슴을 지그시 누른다.

제도적인 모순으로 고통 받는 이들의 모습이 안타깝다.‘평탄한 삶이 조금씩 조금씩 기울어서, 어느 날 문득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로 가라앉아 버리는 것이 인생’(p210~211)이라 했지만, 인생이란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님을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원을 탈출하여 꿈을 찾아간 소년의 모습에서 작은 희망을 본다. 비굴의 시대에서 박노자가 한 말처럼, ‘그래도, 그래도 마지막에 죽는 것은 희망일테니.

세상을 향한 두려움을 떨쳐내고델문도를 찾아 한걸음 떼고 싶다. 나의 펜은 그 세상 어딘가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 어딘가를 따라 움직여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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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항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229
이강산 지음 / 실천문학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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칙칙한 동남아의 거리를 묘사한 독립영화를 본 듯했다. 컬러로 찍어도 왠지 흑백의 장면처럼 인식되는. 두 번의 사진전을 가졌다는 저자의 약력을 보고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아보았다. ! 시를 통해 전해졌던 느낌들이 사진으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이 사람은 사진으로도 시를 쓰는 구나.

 

 

소설에 대한 리뷰는 일관된 주제와 소재를 중심으로 나의 생각을 전개하면 그만이지만, 다양한 장소와 그 이상의 사람들이 등장하는 시에 대한 리뷰는 어떻게 써야 할까?

처음 읽었을 때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이 자주 등장해서 살짝 한숨이 나왔다. ‘글을 말이지, 사람들이 좀 알아듣게 쓸 것이지.’속으로 투덜거렸다. 두 번째 읽었을 때에도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 시들은 있었지만 시가 전하고자 하는 분위기는 어렴풋이 감지할 수 있었다.

 

그의 시에는 사람이 있다. 건강하고 환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아니라, ‘12월 마지막 남은 달력처럼 얇아진노인과 장수하늘소처럼 두 팔 치켜든 밥집 아주머니와 머리카락이 손가락을 가는 숫돌이 되는 허름한 시골 미용사가 등장한다. ‘라는 장르는 참 매력적이다. 시 안에서 사람은 영화 <터미네이터>의 액체 인간처럼 달력도 되었다가 곤충도 되었다가 심지어는 호수도 되어버리니. 빙산의 일각처럼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얼짱 훈남 보다 사실 우리 주변에 너무나도 흔하게 살아가는 평범하고 초라하며 아픈 이들이 불쑥불쑥 고개를 든다. 연탄구멍을 맞추는 장면에서는 어렸을 때 번개탄을 피우느라 눈물 콧물 쏙 뺐던 순간이, 변두리 골목길, 비 새던 방안 천장, 커튼처럼 방문 앞에 쳐진 두꺼운 담요 앞에 꽁꽁 얼던 걸레가 생각났다.

 

시 속의 계절은 주로 겨울, 여기에 호수와 바다가 얽혀 더욱 춥게 느껴지는 사람들이 붉게 도드라진다. 시집이 제목처럼 <모항>이 되어 사람들을 하나 둘 라는 배에 실어 떠나보내는 듯하다. 전체적으로는 춥지만, 사람들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은 따뜻하다.

모과도 자주 등장한다. 표지 안쪽에 실린 사진에서 웬 감자 냄새를?’이라 생각했던 덩어리의 정체가 모과였음을 시집을 읽고서야 알게 되었다. 사람들을 위한 약재로도 쓰이는 과일. ‘평범이라는 꽃말처럼 평범한 사람들을 얘기하는 저자와 참 잘 어울리는구나 싶다.

 

140페이지도 안 되는 시집인데도 내 어린 시절과 요즘에도 간혹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장면들이 자주 떠올랐다. 그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걸러지지 않은 우리 주변의 삶들이 시 안에 묵직하다. 처마 끝에서 툭툭 듣는 빗방울처럼 가슴속을 건드린다. ‘아픈 이를 찾아가는 길은 길이 먼저 아프다’(p42)는 저자는 그들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며 바라보는 글을 적는다.

여러 편의 시들 중에는 <허공을 끌고>라는 시가 가장 마음에 남는다. ‘가슴 속에 오천 권의 문자가 있어야만 비로소 붓을 들 수 있다.’(p94) 추사 김정희가 말했다는데, 좀 더 겸손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 가슴 속 문자는 오천 권은커녕 몇 백 권도 없이 비루하기만 한데 언제쯤 되어야 깊이 있는 글을 쓸 수 있을까? ‘가슴의 책장을 열고 빈 책을 무겁게 느끼고 허공의 무게를 감지하는작가로서의 고뇌가 느껴진다.

내 안에 우주 하나를 들이는 일인 줄 알았던들’(p84), ‘남의 생 빌려 빈칸 함부로 채우지 마라.’(p29) 모든 생명은 하나의 우주라는 데, 글을 쓸 때 신중해야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제 깜냥만큼 물을 채우고 버릴 줄 안다.’(p81) 내 깜냥은 어느 만큼일까? 더 많은 물을 채우려면 그릇을 넓혀야 하리라. 곤충이 탈피하듯 성장의 고통을 감내해야겠지. 욕심 부리지 않고 버릴 줄도 아는 과감한 마음도 필요하겠다.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했던 시간이었다. 시를 쓰는 시각과 방향을 제시해준 시집이었다. 사실 시 뿐이랴? 사진이든 노래든 다른 문학 작품이든 사람이 담겨야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을.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사람이니까.

 

 

p94, 오타로 추정되는 글자^^; : 산정에 오늘 때마다~ 오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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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산 2015-01-20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비종 님.
이강산입니다.

고맙습니다.
진작에 이 방을 알았으면 안부 인사를 드리는 것인데, 오늘에서야 알았답니다.
<모항> 리뷰도 잘 읽었습니다. 과분한 말씀으로 큰 빚을 지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졸시 `허공을 끌고`에서 오타를 발견하셨군요. 참 부끄럽습니다.
저도, 출판사도 발견하지 못한 일,
책 한 권을 세상에 내는 일이 얼마나 엄중한 것인지 새삼 깨닫습니다.
추사 선생의 글을 인용했음에도 이런 실수를 보이다니, 크게 반성할 일입니다.

생각을 더 깊이 할 일이 참 많습니다.

다시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나비종 2015-01-20 21:25   좋아요 0 | URL
과분하다 하시니 제가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짧은 식견과 사유를 가진 제가 시의 깊이를 제대로 이해 못한 것이 오히려 부끄럽습니다.
글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전하는 것으로 그 소임은 다했다고 봅니다. 오타는 그렇게 많이 중요하다 생각지는 않습니다. 문서를 볼 때 오타를 잘 발견하는 감각이 주변 사람들보다 조금 더 있는 편이라서요. 크게 신경쓰지 마세요^^
시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게 해주셔서 제가 오히려 감사드립니다ㅎㅎ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 천연균과 마르크스에서 찾은 진정한 삶의 가치와 노동의 의미
와타나베 이타루 지음, 정문주 옮김 / 더숲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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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어째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으세요? 완전 방부제 미모세요!”

살짝 기분도 좋고 솔깃해지는 말이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썩지 않고 변하지 않는다는 것. 과연 좋은 말일까? 무엇이든 썩으면 냄새도 고약해지고 모양 역시 흉하게 되니 썩는다는 건 당연히 안 좋은 현상이다. 하지만, 부패해야 할 시기에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처럼 긴장감마저 느끼게 한다. 도대체 무엇이 들어 있길래 하는.

 

 

이 책은 부패하지 않는 경제부패하는 경제로 구성되어 있다. 시골 빵집 다루마리를 열고 운영하기까지 저자 와타나베 이타루의 개인사와 경제 관련 내용이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살짝 버무려져 있다.

솔직히 자본론, 마르크스, 노동이라는 말을 겉표지에서 보았을 때, 처음에는 살짝 거리감이 느껴졌다. 절친 말에 의하면 주머니 잔뜩 달린 조끼 입고 머리에 띠 두르고 구호를 외치는듯한 분위기가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시골 빵집과 자본론이란 말에서 무슨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딱딱하고 재미없을 것 같아 머그컵에 눈이 멀어 5만원 채우기 용으로 이 책을 선택했던 자신을 자책했다, 이 감정은 오래지 않아 감동으로 바뀌었지만.

 

부드럽고 향기로운 냄새를 맡으며 따뜻한 빵을 한 입 베어 문 기분을 느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진짜 빵맛을 아직 맛보지 못한 게 안타깝지만 오랜만에 아주 괜찮은 책을 읽었다. 내 삶과 자연스러움에 대하여, 내 몸이 하는 말과 이라는 존재에 대하여 아주 느리고 진중하게 생각했던 시간이었다.

특히, 부패의 중심에 있는 이 주는 매력에 흠뻑 빠져버렸다. 자연은 끊임없이 순환하는 구조이고, 이러한 순환을 가능케 하는 것이 임을 새삼 감탄하게 된다.

부패하지 않는다는 것은 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으로 자연스러움을 막는 것이다. 흐르는 물을 계속 막으면 둑이 터지듯이 언젠가는 부패하지 않는 경제 순환 구조에 감당키 어려운 재앙이 다가올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든다.

균이 하는 목소리를 들으라는 말에 공감한다. 삶의 기운이 있으면 발효시키고, 사멸하는 기운이 있으면 가차 없이 부패시키는 균. 냉철한 자연의 기운이 느껴진다. 부패한다는 건 생명이 다한 음식이니 먹지 말라는 경고이고, 발효한다는 건 생명을 더 깊고 풍부하게 하는 작용이니 균은 지혜로운 현자와도 같다.

 

배가 슬슬 아프다. 몇 주된 두부를 부쳐 먹어서인가, 언제 샀는지 기억도 어렴풋한 브로콜리, 바나나를 키위와 갈아 마셔서인가, 아님 냉동실에 있던 유통기한 2014920일인 식빵을 토스트 해 먹은 탓일까?

누룩 균을 찾기 위해 직접 곰팡이 맛을 본 이타루 씨처럼 몸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어야 했는데, 몸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폭풍 흡입을 했으니……. 자연을 거스르는 일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세 번째 화장실을 다녀오면서 새삼 생각한다.

간혹 냉동실 문을 열고 식빵 봉지를 볼 때마다 여전히 멀쩡한 식빵 표면을 신선함의 척도로 삼았던 어리석음이라니. 식빵 사놓고 백일기도를 드리려는 심산은 아니었건만, 유통기한 백일을 넘겼어도 여전히 뽀송함을 자랑했던 식빵을 경계했어야 했다. 덕분에 방부제의 위력을 실감하기는 했지만.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점은 직접 실천하는 사람이 쓴 글에는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다. 천연 효모처럼 살아 숨 쉬는 듯한 기운이 전해진다. 글로만 번지르르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 보여주는 이타루 씨의 글에는 진정성이 있다. 저 잘난 척 어려운 용어를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쉬우면서 소박하며 곳곳에 겸손함이 배어있다. 이 책이 빛나 보이는 이유이다.

삶과 함께 하는 직업을 가진 것이 부럽다. 삶에서 느끼는 점을 글로 표현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내게는 더없이 좋을 텐데. 아직까지 작가는 생계를 유지하기에는 배고픈 직업이기에 다른 직업에 의존하며 삶을 이어가야 하는 내 자리가 아쉽기만 하다.

부패하는 경제를 위해 계속 도전하려는 이타루 씨를 응원한다. 욕심 부리지 않고 본능이 시키는 대로 살아간다면 어쩌면 책에서만 가능할 것 같은 유토피아도 존재하지 않을까?

돈의 의미도 생각해본다. 매일 돈을 쓰는 법을 바꿔보는 것도 경제를 부패시키는 하나의 방법이라니 앞으로 신중하게 돈을 써야겠다는 결심도 한다. 경제에 대한 내 삶의 방식을 천천히 시간을 두고 생각하기로 했다.

 

 

자연은 언제나 커다란 스승이다.

세월이 흐르면 내 얼굴에도 하나 둘 주름이 늘어가겠지. 하지만 이제는 방부제 미모가 부럽지는 않다. 나이에 맞게 자연스러운 얼굴이 된다는 것이 삶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니.

오늘밤에도 소심한 나는 눈가에 아이크림을 투척할 것이지만, 마음만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균의 목소리를 듣듯이 마음이 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나는 인공적인 방부제 인간이 아닌 오래될수록 숙성하여 깊은 맛과 멋을 내는 발효 인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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