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중에 <나는 새들이 왜 노래하는지 아네>라는 것이 있기에, 마야 안젤루의 자서전이 표지를 바꿔 새로 나왔나 궁금해서 클릭해 보니, 엉뚱하게도 탐조 활동에 관한 논픽션이었다. 그렇다면 저 흑인 작가의 책 제목은 뭐였나 싶어 검색해 보니, <새장에 갇힌 새가 왜 노래하는지 나는 아네>라고 나온다. 이쯤 되면 순진한 나귀님이 충분히 착각할 만해 보인다.


탐조 활동에 참여해 본 적은 없는 나귀님이지만, 그 분야의 애호가가 많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훗날 영화로도 제작된 <빅 이어>라는 또 다른 논픽션을 통해서 그 극단적인 사례를 일별한 기억도 나고 말이다. 거기서 좀 더 나아가면 <난초 도둑>과 <깃털 도둑> 같은 더 극단적인 사례에서처럼 취미에 대한 집착이 범죄로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예전에 이사벨라 로셀리니가 등장해서 뉴욕 센트럴파크의 탐조 활동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를 본 기억이 나는데 (지금은 어째서인지 유튜브에서 검색해도 못 찾겠더라!) 어쩌면 서울 한복판에서도 여의도 샛강이나 뚝섬 서울숲 같은 곳에서는 비슷한 활동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샛강 풀숲에서 족제비인지 수달인지 여러 마리를 본 기억도 난다.


예전에 이어령은 동양에서는 새가 "운다"고 표현하지만, 서양에서는 새가 "노래한다"라고 표현하는 문화적 차이를 지적하며 동서양의 사고방식 특징을 설명했었다. 지금이야 미국의 대중 문화를 중심으로 전세계 문화가 몰개성 동질화되는 추세이고, 이른바 '케이' 문화도 거기 편승해서 문화적 '소중화'를 자처하고 있으니, 그 차이도 많이 희석되지 않았나 싶다.


물론 최근 화제가 된 '스웨덴의 손님 접대'처럼 국가별 문화 차이는 여전히 남아 있고, 특히 유튜버들이야말로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 열심인 듯하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공공 장소에서 핸드폰을 놓아두어도 훔쳐가지 않더라'를 비롯한 각종 실험 영상에서 간과한 점이 있다면, 그런 양심적인 모습이 우리 일상에 정착된 지가 그리 얼마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나 곳곳에 깔린 '씨씨티비'일 것이다. 어차피 훔쳐가도 오래 못 가서 걸리고 말 터이니 굳이 무리할 필요가 없는 셈이고, 혹시나 주인을 찾아주고 싶어도 공연히 오해를 받을까봐 굳이 손대지 않는 것이 아닐까. 반면 지난번에 말했듯 쓰레기 무단 투기를 비롯해서 비양심적인 행동도 빈번하니, 제도의 차이를 문화의 차이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반면 위에 언급한 책 두 권 모두 제목을 "새가 왜 우는지"로 의역하지 않고 "새가 왜 노래하는지"로 직역한 것은 문화적 차이의 희석 사례로 지적할 만해 보인다. 일각에서는 외국어 표현을 직역해서 차용하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지만, 사실 언어와 문화의 상호 침투는 나라마다 꾸준히 있어 왔던 현상이니 이제 와서 뭐가 옳고그르고를 따지는 것도 무의미하다.


"새가 운다"라고 표현했던 문화에서는 "새가 노래한다"라는 표현을 신선하다고 생각할 수 있고, 그리하여 "새가 노래한다"가 옳은 표현인 것마냥 통용되던 어느 날 누군가가 "새가 운다"라는 표현을 재발굴해 유행시킬 수도 있으니까. 예를 들어 어느 교정 전문가의 지적처럼 일본어 관용구가 난무한다던 박경리의 <토지>가 마치 한국어 문장의 모범처럼 추앙되듯이.


새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어제 뉴스에서 미국 배우 리처드 체임벌린의 타계 소식을 접하고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그의 대표작이 콜린 매컬로 원작의 드라마 <가시나무새>였기 때문인데, 예전에 우리나라에서도 방영되어서 큰 화제가 된 작품으로 기억한다. 저 제목은 영어 원제 The Thorn Birds의 직역인 듯한데, 우리나라에는 그 새의 정식 명칭이 없는 듯하다.


이 배우는 <가시나무새>와 <쇼군> 같은 드라마로도 유명하지만, 나귀님은 <삼총사> 시리즈에서 아라미스 역할을 맡은 것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지금 다시 검색해 보니 라이더 해거드 원작의 '알란 쿼터메인' 시리즈에서도 무명 시절의 샤론 스톤과 함께 나온 적이 있었다! 물론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의 아류라는 지적이 대부분이었으니 좋은 평가는 받지 못했지만.


흥미로운 점은 우리나라에서 이 배우의 얼굴을 표지에 등장시킨 책이 있다는 것이다. 로버트 러들럼의 '제이슨 본' 시리즈 첫 권인 <본 아이덴티티>의 1988년 드라마화에서 주연을 맡으며, 고려원에서 출간한 시리즈 3부작 여섯 권 모두에 얼굴을 올렸기 때문이다. 나귀님이 '본'이라면 지금도 맷 데이먼보다 리처드 체임벌린을 떠올리게 되는 것도 그래서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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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2기 행정부의 출범과 함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도 막바지로 접어들며 협상이 진행 중이다. 당선되면 전쟁을 곧바로 끝내겠다던 호언장담처럼 양국 모두에 압박을 가한 미국 대통령이지만, 유독 우크라이나에 대해서는 냉랭하다 못해 야멸찬 태도로 일관했고, 급기야 정상 회담 중에 말다툼을 벌이는 사상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졌으니 희한한 일이다.


비록 큰소리를 치기는 했지만 미국의 지원 없이는 버틸 수 없는 우크라이나의 입장에서는 완전한 자주 국방을 이루지 못한 한계를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어 보인다. 우크라이나는 본래 소련 시절에 핵무기를 다량 보유했지만, 국내 정세 불안으로 미국과 러시아와 협상 끝에 전량 폐기를 선택했는데, 결국 러시아의 침략에도 속수무책이 되었으니 씁쓸한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히 기억해야 할 점은 우크라이나가 항상 선역만 맡은 것까지는 아니라는 점이다. 소련 해체 이후 독립은 했지만 부정부패가 워낙 심해서 불안한 정세가 계속된 것이 한 예이다. 급기야 영국 언론인 올리버 벌로가 우크라이나의 심각한 부정부패를 보도하는 과정에서, 국제적 규모의 돈세탁을 지칭한 '머니랜드'라는 신조어를 고안했을 정도였으니.


이후 민주화 혁명이 일어났지만 정세 불안이 그치지 않다가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수년간의 전쟁으로 큰 피해까지 입었으며, 종전 과정에서도 미국의 압박으로 국토 상실과 자원 조공 등 손해를 억울하지만 감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니, 이른바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으며 피도 눈물도 없다는 국제 관계의 냉정함과 잔혹함을 새삼스레 실감하게 될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흠좀무'한 점은 '하늘이 억까하는 나라'인 우크라이나의 이런 억울한 처지가 어제오늘의 이야기도 아니라는 것이다. 요충지이자 곡창 지대라는 특성상 근대까지도 폴란드와 러시아 같은 주변국의 등쌀에 종종 탄압을 받았다기 때문이다. 이런 우크라이나의 비극적인 역사를 응축한 것이 타라스 셰브첸코의 <유랑시인>에 수록된 여러 편의 시들이다.


이 책은 한길사의 대표 시리즈인 그레이트북스 가운데 한 권으로 출간되었는데, 다른 책들이 대부분 역사나 철학 같은 인문학 분야의 고전인 것을 감안하고 보면 문학 작품, 특히 시라는 점에서 상당히 의외였다. 일단 번역자부터가 역사학자인 것도 특이한데, 문학보다는 역사의 측면에서 우크라이나를 소개한다는 의미에서 번역하게 되었다고 해제에서 설명한다.


셰브첸코는 본래 농노로 태어났지만 미술에 재능을 보인 까닭에 귀족 후원자들의 모금을 통해 해방되었으며, 이후 화가 겸 시인으로 활동하다가 반정부 활동 혐의로 10년간 유배에 처해지기도 했다. <유랑시인>에 수록된 시들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내용인데, 때로는 압제자 폴란드인과 그 주구로 (잘못) 간주된 유대인에 대한 노골적 비난도 나온다.


이 당시 우크라이나의 상징이 바로 코사크 기병인데, 고골의 <타라스 불바>에 묘사된 것처럼 난폭하고 다혈질이지만 자유와 조국을 사랑하는 저 남자들의 목소리는 셰브첸코의 여러 시에서도 우렁차게 반복된다. 물론 현실을 돌아보면 목소리가 크고 자존심을 내세우나, 역량은 부족하여 손해를 자초하는 것이 우크라이나의 한계이자 비극인가 싶기도 하다만.


흥미로운 점은 시를 이해하기 위해 덧붙인 배경 설명이 꽤나 방대하다는 점이다. 서두의 해제에서 우크라이나 역사에 대한 개관만 무려 40페이지에 달하는데, 구입 당시에 잠깐 훑어볼 때에는 '시 한 편 읽자고 이런 것까지 알아야 하나' 싶어서 의아했다가, 러시아와의 전쟁 이후 다시 읽어보니 워낙 험난했던 역사인만큼 긴 설명도 필요했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나저나 <유랑시인>을 구입했을 때에만 해도 우크라이나 역사에 대해서는 잘 몰랐기 때문에, 비슷한 시기에 창작되었다는 폴란드 민족 서사시 <판 타데우시>와 나란히 놓고 읽어보면 어떨까 싶었는데, 알고 보니 양국은 과거사의 앙금 때문에 한국과 일본 못지않은 앙숙 관계라고 하기에, 뭔가 큰 실수를 할 뻔했던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살짝 뜨끔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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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선정 '21세기 최고의 책' 광고 중에 희한하게도 노란 과일을 표지에 박아 놓은 것이 있어서 뭔가 궁금해 살펴보니 <망고와 수류탄>이라는 책이었다. 제목이며 표지만 보면 '수류탄 던져야 하지만, 망고는 먹고 싶어' 류의 에세이라든지, '사상 최강의 수류탄, 전생했더니 망고였다' 류의 소설이라야 어울릴 것 같은데, 특이하게도 생활사 연구서라고 한다.


일본인 사회학자가 오키나와에서 현지 연구를 실시하며 수집한 증언을 토대로 쓴 생활사 이론 논고라는데, 왜 하필 '망고'와 '수류탄'인지는 알라딘 미리보기에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책 소개 글을 토대로 짐작하면, 오키나와 전투 때 정부 지시대로 수류탄 자폭을 포함한 결사 항전을 앞두고 자녀들과 망고를 나눠 먹었다는 어느 할머니의 회고와 관련이 있나보다.


특이하게도 최근 10여 년 사이에 오키나와 관련서가 여럿 간행되었는데, 십중팔구 200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제주 해군 기지 건설 관련 논란의 연장이 아니었을까 싶다. 독특한 자연과 문화를 보유하고, 본토와 갈등과 차별의 역사를 경험했으며, 군사 기지 건설까지 공통점이 많다고 본 모양인데, 이후의 상황을 보면 해군 기지도 필요했으니 속단은 금물이겠다.


그나저나 과일과 폭탄의 조합은 뭔가 의외다 싶기는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일본에는 선례라 할 만한 책도 없지 않다.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요절 작가 가지이 모토지로의 가장 유명한 단편 "레몬"을 보면, 무료한 일상에 지친 화자가 무심코 그 과일을 사서 들고 다니다가 마루젠 서점에 들어가 책 사이에 마치 수류탄처럼 놓아두고 나온다는 묘사가 나오기 때문이다.


레몬과 수류탄의 조합이야 에마뉘엘 카레르의 <리모노프> 표지에도 등장하는데, 그 제목은 레몬과 수류탄을 뜻하는 러시아어 '리몬'과 '리몬카'에서 따온 것이며, 이 실화 소설의 주인공인 반정부 활동가 에두아르드 사벤코의 별명이기도 하다. 평소 거침없는 언변으로 찬반양론을 일으키며 저서도 여럿 간행해서 제법 화제를 모았지만 2020년에 사망했다고 전한다.


딱 여기까지 쓰니까 바깥양반이 들어와서 '또 내 욕을 쓰느냐'며 검열에 들어가는데, 레몬과 수류탄 이야기를 보더니 '왜 <카탈로니아 찬가>에 나오는 애완 수류탄 이야기는 빼먹었느냐' 묻는다. 스페인 내전 당시 의용군으로 참전한 조지 오웰의 말로는 무기와 보급이 워낙 엉망이라 수류탄도 불발이 많아서, 심지어 이쪽이 던지면 저쪽이 주워서 되던지기도 했다나.


그렇게 해서 수류탄 하나가 계속 왔다갔다 하다 보니, 나중에는 정이 들어서 수류탄에 이름까지 지어주었다는 거다. 조지 오웰 책은 워낙 예전에 읽어서 기억도 나지 않지만, 뭐, 그런 이야기가 있다고 하니 일단 적어보기는 해야 되겠다. <카탈로니아 찬가>는 대의명분을 위해 모인 여러 세력이 서로 퉁수쳤던 이야기로도 기억해서 어쩐지 요즘 부쩍 생각이 났었다.


그나저나 가지이 모토지로는 또 다른 단편에서 "벚꽃이 활짝 핀 나무 밑에는 사람 시체가 묻혀 있다"는 사뭇 도시전설스러운 이야기를 내놓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3월이 되어도 날씨가 쌀쌀해서 과연 봄이 올까 싶었는데, 황사도 가시고 벚꽃도 피어난 듯하니 가까운 공원에 한 번 나가봐야겠다. 물론 산불 뉴스를 며칠째 본 다음이니 마음도 가볍지는 않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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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발자크의 단편 몇 가지가 생각나던 참인데, 지난 주에 바깥양반과 대화를 나누다가 "무신론자의 미사"의 줄거리와 유사한 일화를 듣게 되어서 이번 기회에 다시 한 번 꺼내 읽기로 했다. 내친 김에 "그랑드 브러테슈"와 "불사의 묘약"도 꺼내 읽었는데, 아쉽게도 내가 가진 번역서는 워낙 옛날 것들이다 보니 하나같이 중역본이어서 그리 좋지는 않았다.


"무신론자의 미사"는 이성을 중시하고 종교를 배척하기로 악명 높은 어느 저명한 의사가 어느 날 성당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제자가 우연히 목격하면서 시작된다. 알고 보니 가난했던 학생 시절 아무 대가 없이 자신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던 은인이 사망하자, 독실한 가톨릭신자였던 은인을 기리려 무신론자인 의사가 매년 네 번씩 성당에 미사를 의뢰했다는 것이다.


자신은 하느님도 천국도 믿지 않지만, 혹시나 그런 게 있다고 치면 자신의 은인처럼 선량한 사람이야말로 꼭 혜택을 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겠느냐, 그러니 혹시나 하느님이 계시다면 자신의 은인을 절대 잊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 미사를 드린다는 것이었다. 어쩐지 신약성서에서 예수를 찾아왔던 백부장의 사례처럼 '기이한 믿음'의 사례처럼도 보인다.


"불사의 묘약"에도 미사가 등장하지만, 이쪽은 아예 불경스럽기 짝이 없는 흑미사에 가깝다고 봐야 하겠다. 스페인 귀족 청년 돈 후안이 (저자는 이 사람이 훗날 몰리에르와 모차르트의 창작을 통해 유명해진 바로 그 난봉꾼이라고 주장한다!) 노환으로 사망한 부친에게서 불사의 묘약을 물려받지만, 그걸 이용해 소생시켜 달라는 부친의 유언을 무시하고 매장한다.


세월이 흘러 돈 후안도 아들에게 불사의 묘약을 물려주고 사망하지만, 순진한 아들 덕분에 얼굴과 팔까지만 소생한 상황에서 기뻐 설레발을 치다가 얼마 남지 않은 묘약을 담은 유리병이 깨지자 좌절한다. 사람들은 일부나마 부활한 그를 성자 취급하며 미사를 드리지만, 정작 본인은 부활에 실패한 나머지 갖가지 쌍욕을 늘어놓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그랑드 브러테슈"는 동명 저택의 폐허를 발견한 화자가 그곳에 얽힌 기막힌 사연을 알아낸다는 내용이다. 본래 어느 귀족의 소유였는데, 하루는 남편이 예정보다 일찍 집에 돌아와 보니 아내의 모습이 뭔가 수상하더라는 것이다. 방금 전까지 다른 남자가 안방에 있었던 흔적을 감지한 남편이 그 은신처로 짐작되는 벽장 문을 열려 하자, 아내가 완강히 반대한다.


벽장 문을 여는 순간 부부의 신뢰가 깨졌다고 간주해서 이혼하겠다는 아내의 고집에 잠시 망설이던 남편은 그렇다면 '벽장 안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십자가에 대고 맹세하라고 요구한다. 아내가 그렇게 맹세하자 남편은 곧바로 미장이를 불러 벽장 앞에 벽돌을 쌓아 막아 버리고, 이후 수십 일간 그 앞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도록 감시한다.


물론 아내도 나름대로 꾀를 써서 미장이를 매수하려 들고, 남편이 없는 틈을 타서 직접 곡괭이를 휘둘러 벽돌을 깨부수려 하지만, 이 모든 시도가 수포로 돌아가자 자포자기하고 말았다. 이 사건을 모조리 지켜본 하녀의 말에 따르면, 부서진 벽돌 구멍 사이로 벽장에서 웬 남자의 얼굴이 흘끗 보였고, 이후 수십 일이 지나면서 희미한 신음소리도 들렸다고 한다.


이후 남편이 사망하자 아내도 저택에서 나왔으며, 향후 50년간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공증까지 마친 상태로 사망한다. 지난번 뉴스에서 동거녀를 살해하여 베란다에 옮겨놓고 시멘트 덩어리로 만들어 암매장했다가 발각된 범죄자에 대한 이야기를 접했는데, 그 내용 때문에 "검은 고양이"와 "아몬틸라도 술통"에 이어서 발자크의 단편까지 떠올렸던 모양이다.


발자크의 "인간 희극" 번역서 목록에 관해서는 예전에 한 번 정리한 적이 있었는데, 그 사이 수년간 새로 번역된 것도 있고 절판된 것도 있다 보니 매번 시중에서 구입 가능한 작품 총수에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꾸준히 출간되는 것만큼이나 꾸준히 절판되는 발자크이니, 사실은 그 명성에 비해서 인기가 실제로 그리 높지는 않다고 봐야 할 것도 같다.


"그랑드 브러테슈"는 예전에 휘문출판사에서 나온 서머싯 몸 선정 세계 단편 100선에 수록된 것으로 읽었는데, 이번에는 더 나중에 황금가지에서 나온 <세계공포문학걸작선: 고전편>에 수록된 것으로 읽었다. 양쪽 모두 영어 중역이다. "불사의 묘약"은 <악마의 초상>이라는 프랑스 괴기 단편 선집에 수록된 것으로 읽었는데, 이쪽은 일어 중역이라 더 좋지 않다!


"무신론자의 미사"는 펀앤런북스의 펭귄클래식스 가운데 한 권으로 처음 접했는데, 이 책에는 표제작 외에 "신병(新兵)"과 "지갑"이라는 단편도 들어 있다. 펭귄클래식스의 우리말 번역본이라면 대부분 2000년대 들어서 웅진에서 간행한 검정색 표지의 시리즈를 떠올리게 마련일 터인데, 더 먼저인 1996년에도 펭귄클래식스라는 이름을 걸고 간행된 시리즈가 있었다.


이 시리즈의 대본은 영국 펭귄 북스가 1995년에 창립 60주년을 기념해 유명 작가의 대표 단편을 엮어 권당 60쪽 내외로 간행한 60권짜리 미니북 세트이다. 책등 색깔에 따라 고전 시리즈인 '블랙' 세트와 현대작 시리즈인 '오렌지' 세트가 있었고, 따라서 오렌지 시리즈는 영국판과 미국판의 구성이 달라서, 13종만 중복되고 47종은 서로 다른 작품이 수록되었다.


1996년에 총30권으로 마무리된 펀앤런북스의 번역서는 원서 블랙 세트(16종)와 오렌지 세트 영국판(14종)에서 반반씩 선별한 것처럼 보인다. 표지마다 원서 표지와 함께 한옥의 문살 사진이 곁들여졌는데, '관조'가 찍었다기에 그게 뭔가 했더니만 스님 이름이었다! 30년 넘게 승려 겸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작품집도 간행했었는데 지난 2006년에 타계했다고 전한다.


우리말 번역본은 100페이지 내외라 단편 중에서도 긴 것은 서너 편씩, 짧은 것은 예닐곱 편씩 수록했고, 장편 중에서 일부를 발췌한 경우도 있다. 그중에서도 각별히 눈길이 가는 것은 발자크의 <무신론자의 미사>, 에밀리 브론테의 <슬픈 미나 로리>, 이탈로 칼비노의 <마법의 궁전>, 그레이엄 그린의 <꿈의 정원>처럼 아직까지 유일 번역본으로 보이는 것들이다.


특히 칼비노의 책은 소설이 아니라 민담 선집인 <이탈리아 민담>(1956)에 수록된 200편 가운데 10편을 소개한 것이어서 더욱 이채롭다. 장편 소설은 대부분 번역되고 강연록 <왜 고전을 읽는가>와 편저서 <세계의 환상 문학>도 간행되었지만, 순수 창작이 아닌 민담집이 번역될 가능성은 아무래도 낮아 보이니, 사실상 향후로도 유일무이한 번역본으로 남지 않을까.


다만 번역과 편집은 그리 좋지 않아서 오타도 많고 오역도 많으며, 영어권 이외의 작가들은 결국 영역본의 중역이기 때문에 가치도 높지 않다고 봐야 맞을 것 같다. 내 기억으로는 판매도 신통치 않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정가의 60% 정도로 할인 판매를 했는데도 그리 많이 팔리지는 않은 듯하고, 그래서인지 지금 와서는 기억하는 사람도 별로 없는 듯하다.


지금 알라딘에서 검색하면, 원서인 펭귄 60주년 박스는 아예 등록조차 안 되어 있고, 2015년의 "80주년 클래식 단편 80권 세트"와 "모던 클래식 단편 50권 박스세트"만 나온다. 마침 2025년이 90주년이니 올해 안에 "90권 세트"가 나올지 문득 궁금해진다. 또다시 10년 뒤인 2035년의 100주년에는 뭐가 나올지, 또는 그때까지 내가 살아 있기는 할지도 궁금해지고...




<< 펀앤런북스 펭귄클래식스 목록 >>


B = 블랙(고전)세트 / O = 오렌지(현대작)세트


01. O-UK    여름 (알베르 카뮈)

02. O-UK    모델 (아나이 닌)

03. B       데카메론 (조반니 보카치오)

04. O-UK/US 악마의 발 (코난 도일)

05. O-UK/US 수도승의 전설 (안톤 체홉)

06. B       순결한 여인 (구스타프 플로베르)

07. B       영웅들의 배 아르고 (아폴로니우스)[*]

08. B       홍루몽 (조설근)

09. B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10. O-UK    일곱 편의 요크셔 이야기 (제임스 헤리옷)[*]

11. B       리시스트라타 (아리스토파네스)

12. O-UK/US 행복한 왕자 (오스카 와일드)

13. O-UK    예언자 (칼릴 지브란)

14. B       비곗덩어리 (기 드 모파상)

15. O-UK    소니의 블루스 (제임스 볼드윈)[*]

16. O-UK/US 버틀비 (허먼 멜빌)[*]

17. B       오딧세우스의 항해 (호메로스)

18. B       영혼에 관한 크리슈나의 대화

19. O-UK/US 동산지기 (루드야드 키플링)[*]

20. B       유형지에서 (프란츠 카프카)

21. B       무신론자의 미사 (오노레 드 발자크)[*]

22. B       아편의 쾌락과 고통 (토머스 드 퀸시)[*]

23. B       이탈리아에서 온 편지 (요한 볼프강 폰 괴테)

24. O-UK    정신분석 강의 (지그문드 프로이드)

25. B       사냥꾼의 앨범 (이반 투르게네프)

26. O-UK    해변의 별장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27. B       슬픈 미나 로리 (샤롯 브론테)

28. B       키스 (케이트 쇼팽)[*]

29. O-UK    마법의 궁전 (이탈로 칼비노)[*]

30. O-UK/US 꿈의 정원 (그레이엄 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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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파업부터 시작해서 비상 계엄과 탄핵 정국을 거쳐 이번 동시다발 산불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심란하기 짝이 없는 심각한 사건사고를 연달아 겪으니 새삼스레 '나라 하나 망하는 것 시간 문제'라는 생각마저 든다. 물론 자세히 뜯어 보면 문제가 없지야 않았겠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돌아가는 듯 보였던 나라가 어떻게 불과 1년 사이에 이 정도로 망가졌을까.


대통령 탄핵 심판 결론이 차일피일 미뤄지는 사이, 야당 대표의 재판 결론이 먼저 나왔는데, 하루종일 뉴스마다 쟁점을 분석하고 있지만 나귀님이 보기에는 양쪽 다 말장난일 뿐이다. 그 와중에 며칠째 지속 중인 경상도의 동시다발 산불로 인한 피해는 눈더미처럼 커져만 가서, 지금까지 사망자만 20여 명에 달하고 심지어 진화 헬기도 추락해 조종사가 사망했다.


문득 스터즈 터클의 <일>에서 어느 소방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라도 개판이고, 세상도 개판이고,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들지만, 그래도 소방관들은 '진짜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거였다. 불이 나면 끄러 가고, 아이가 갇히면 구해 나오고, 사람이 쓰러지면 인공호흡을 하며, 남들처럼 책상에 앉아 종이에 적힌 숫자 들여다보는 일이 아니라 '진짜 일'을 한다던가.


해당 소방관의 인터뷰는 그 책에서 맨 뒤에 나온다. "빌어먹을 세상 엿 먹으라고 하십시오. 이 나라도 엿 먹으라고 하십시오. 하지만 (...) 소방수는 생산적인 일을 한다구요. 불을 끄니까요. 품안에 아기를 안고 불 속을 빠져나오는 소방수를 보셨을 겁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인공호흡을 실시하는 모습도 보셨을 테죠. 이걸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이게 진짜니까요. 


저도 그렇게 되고 싶습니다. 은행에서 일한 적 있습니다. 돈이란 종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짜가 아니라구요. 아홉 시 출근에 다섯 시 퇴근? 엿 먹으라고 하십시오. 선생님이 보는 건 숫자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저는 뒤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불을 껐어. 누군가를 살렸다구.' 그건 이 세상에서 뭔가 보람 있는 일을 했다는 말이죠."(867쪽)


물론 소방관이라 해서 반드시 인격자까지는 아니니, 남자다움을 유치하게 과시하며 흑인과 히스패닉에 대한 편견도 드러낸다. 그래도 일단 불이 났다 하면 앞뒤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 방금 전까지 자기가 욕하던 사람들을 구해내는 것이 소방관이라고 화자는 주장한다. 결국 지금 모든 문제의 원인은 '진짜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아닐지...




[*] 스터즈 터클(1912-2008)은 미국의 평범한 사람들을 인터뷰한 구술사 시리즈로 유명한데, 우리나라에서는 선집이 몇 권 나왔다가 지금은 모두 절판되었다. 이전에 잠시 언급했듯이, 과거 뿌리깊은나무에서 민중구술사를 제작했을 때에도 터클의 책을 모범 가운데 하나로 삼았다는 발행인 한창기의 회고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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