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발자크의 단편 몇 가지가 생각나던 참인데, 지난 주에 바깥양반과 대화를 나누다가 "무신론자의 미사"의 줄거리와 유사한 일화를 듣게 되어서 이번 기회에 다시 한 번 꺼내 읽기로 했다. 내친 김에 "그랑드 브러테슈"와 "불사의 묘약"도 꺼내 읽었는데, 아쉽게도 내가 가진 번역서는 워낙 옛날 것들이다 보니 하나같이 중역본이어서 그리 좋지는 않았다.


"무신론자의 미사"는 이성을 중시하고 종교를 배척하기로 악명 높은 어느 저명한 의사가 어느 날 성당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제자가 우연히 목격하면서 시작된다. 알고 보니 가난했던 학생 시절 아무 대가 없이 자신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던 은인이 사망하자, 독실한 가톨릭신자였던 은인을 기리려 무신론자인 의사가 매년 네 번씩 성당에 미사를 의뢰했다는 것이다.


자신은 하느님도 천국도 믿지 않지만, 혹시나 그런 게 있다고 치면 자신의 은인처럼 선량한 사람이야말로 꼭 혜택을 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겠느냐, 그러니 혹시나 하느님이 계시다면 자신의 은인을 절대 잊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 미사를 드린다는 것이었다. 어쩐지 신약성서에서 예수를 찾아왔던 백부장의 사례처럼 '기이한 믿음'의 사례처럼도 보인다.


"불사의 묘약"에도 미사가 등장하지만, 이쪽은 아예 불경스럽기 짝이 없는 흑미사에 가깝다고 봐야 하겠다. 스페인 귀족 청년 돈 후안이 (저자는 이 사람이 훗날 몰리에르와 모차르트의 창작을 통해 유명해진 바로 그 난봉꾼이라고 주장한다!) 노환으로 사망한 부친에게서 불사의 묘약을 물려받지만, 그걸 이용해 소생시켜 달라는 부친의 유언을 무시하고 매장한다.


세월이 흘러 돈 후안도 아들에게 불사의 묘약을 물려주고 사망하지만, 순진한 아들 덕분에 얼굴과 팔까지만 소생한 상황에서 기뻐 설레발을 치다가 얼마 남지 않은 묘약을 담은 유리병이 깨지자 좌절한다. 사람들은 일부나마 부활한 그를 성자 취급하며 미사를 드리지만, 정작 본인은 부활에 실패한 나머지 갖가지 쌍욕을 늘어놓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그랑드 브러테슈"는 동명 저택의 폐허를 발견한 화자가 그곳에 얽힌 기막힌 사연을 알아낸다는 내용이다. 본래 어느 귀족의 소유였는데, 하루는 남편이 예정보다 일찍 집에 돌아와 보니 아내의 모습이 뭔가 수상하더라는 것이다. 방금 전까지 다른 남자가 안방에 있었던 흔적을 감지한 남편이 그 은신처로 짐작되는 벽장 문을 열려 하자, 아내가 완강히 반대한다.


벽장 문을 여는 순간 부부의 신뢰가 깨졌다고 간주해서 이혼하겠다는 아내의 고집에 잠시 망설이던 남편은 그렇다면 '벽장 안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십자가에 대고 맹세하라고 요구한다. 아내가 그렇게 맹세하자 남편은 곧바로 미장이를 불러 벽장 앞에 벽돌을 쌓아 막아 버리고, 이후 수십 일간 그 앞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도록 감시한다.


물론 아내도 나름대로 꾀를 써서 미장이를 매수하려 들고, 남편이 없는 틈을 타서 직접 곡괭이를 휘둘러 벽돌을 깨부수려 하지만, 이 모든 시도가 수포로 돌아가자 자포자기하고 말았다. 이 사건을 모조리 지켜본 하녀의 말에 따르면, 부서진 벽돌 구멍 사이로 벽장에서 웬 남자의 얼굴이 흘끗 보였고, 이후 수십 일이 지나면서 희미한 신음소리도 들렸다고 한다.


이후 남편이 사망하자 아내도 저택에서 나왔으며, 향후 50년간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공증까지 마친 상태로 사망한다. 지난번 뉴스에서 동거녀를 살해하여 베란다에 옮겨놓고 시멘트 덩어리로 만들어 암매장했다가 발각된 범죄자에 대한 이야기를 접했는데, 그 내용 때문에 "검은 고양이"와 "아몬틸라도 술통"에 이어서 발자크의 단편까지 떠올렸던 모양이다.


발자크의 "인간 희극" 번역서 목록에 관해서는 예전에 한 번 정리한 적이 있었는데, 그 사이 수년간 새로 번역된 것도 있고 절판된 것도 있다 보니 매번 시중에서 구입 가능한 작품 총수에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꾸준히 출간되는 것만큼이나 꾸준히 절판되는 발자크이니, 사실은 그 명성에 비해서 인기가 실제로 그리 높지는 않다고 봐야 할 것도 같다.


"그랑드 브러테슈"는 예전에 휘문출판사에서 나온 서머싯 몸 선정 세계 단편 100선에 수록된 것으로 읽었는데, 이번에는 더 나중에 황금가지에서 나온 <세계공포문학걸작선: 고전편>에 수록된 것으로 읽었다. 양쪽 모두 영어 중역이다. "불사의 묘약"은 <악마의 초상>이라는 프랑스 괴기 단편 선집에 수록된 것으로 읽었는데, 이쪽은 일어 중역이라 더 좋지 않다!


"무신론자의 미사"는 펀앤런북스의 펭귄클래식스 가운데 한 권으로 처음 접했는데, 이 책에는 표제작 외에 "신병(新兵)"과 "지갑"이라는 단편도 들어 있다. 펭귄클래식스의 우리말 번역본이라면 대부분 2000년대 들어서 웅진에서 간행한 검정색 표지의 시리즈를 떠올리게 마련일 터인데, 더 먼저인 1996년에도 펭귄클래식스라는 이름을 걸고 간행된 시리즈가 있었다.


이 시리즈의 대본은 영국 펭귄 북스가 1995년에 창립 60주년을 기념해 유명 작가의 대표 단편을 엮어 권당 60쪽 내외로 간행한 60권짜리 미니북 세트이다. 책등 색깔에 따라 고전 시리즈인 '블랙' 세트와 현대작 시리즈인 '오렌지' 세트가 있었고, 따라서 오렌지 시리즈는 영국판과 미국판의 구성이 달라서, 13종만 중복되고 47종은 서로 다른 작품이 수록되었다.


1996년에 총30권으로 마무리된 펀앤런북스의 번역서는 원서 블랙 세트(16종)와 오렌지 세트 영국판(14종)에서 반반씩 선별한 것처럼 보인다. 표지마다 원서 표지와 함께 한옥의 문살 사진이 곁들여졌는데, '관조'가 찍었다기에 그게 뭔가 했더니만 스님 이름이었다! 30년 넘게 승려 겸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작품집도 간행했었는데 지난 2006년에 타계했다고 전한다.


우리말 번역본은 100페이지 내외라 단편 중에서도 긴 것은 서너 편씩, 짧은 것은 예닐곱 편씩 수록했고, 장편 중에서 일부를 발췌한 경우도 있다. 그중에서도 각별히 눈길이 가는 것은 발자크의 <무신론자의 미사>, 에밀리 브론테의 <슬픈 미나 로리>, 이탈로 칼비노의 <마법의 궁전>, 그레이엄 그린의 <꿈의 정원>처럼 아직까지 유일 번역본으로 보이는 것들이다.


특히 칼비노의 책은 소설이 아니라 민담 선집인 <이탈리아 민담>(1956)에 수록된 200편 가운데 10편을 소개한 것이어서 더욱 이채롭다. 장편 소설은 대부분 번역되고 강연록 <왜 고전을 읽는가>와 편저서 <세계의 환상 문학>도 간행되었지만, 순수 창작이 아닌 민담집이 번역될 가능성은 아무래도 낮아 보이니, 사실상 향후로도 유일무이한 번역본으로 남지 않을까.


다만 번역과 편집은 그리 좋지 않아서 오타도 많고 오역도 많으며, 영어권 이외의 작가들은 결국 영역본의 중역이기 때문에 가치도 높지 않다고 봐야 맞을 것 같다. 내 기억으로는 판매도 신통치 않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정가의 60% 정도로 할인 판매를 했는데도 그리 많이 팔리지는 않은 듯하고, 그래서인지 지금 와서는 기억하는 사람도 별로 없는 듯하다.


지금 알라딘에서 검색하면, 원서인 펭귄 60주년 박스는 아예 등록조차 안 되어 있고, 2015년의 "80주년 클래식 단편 80권 세트"와 "모던 클래식 단편 50권 박스세트"만 나온다. 마침 2025년이 90주년이니 올해 안에 "90권 세트"가 나올지 문득 궁금해진다. 또다시 10년 뒤인 2035년의 100주년에는 뭐가 나올지, 또는 그때까지 내가 살아 있기는 할지도 궁금해지고...




<< 펀앤런북스 펭귄클래식스 목록 >>


B = 블랙(고전)세트 / O = 오렌지(현대작)세트


01. O-UK    여름 (알베르 카뮈)

02. O-UK    모델 (아나이 닌)

03. B       데카메론 (조반니 보카치오)

04. O-UK/US 악마의 발 (코난 도일)

05. O-UK/US 수도승의 전설 (안톤 체홉)

06. B       순결한 여인 (구스타프 플로베르)

07. B       영웅들의 배 아르고 (아폴로니우스)[*]

08. B       홍루몽 (조설근)

09. B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10. O-UK    일곱 편의 요크셔 이야기 (제임스 헤리옷)[*]

11. B       리시스트라타 (아리스토파네스)

12. O-UK/US 행복한 왕자 (오스카 와일드)

13. O-UK    예언자 (칼릴 지브란)

14. B       비곗덩어리 (기 드 모파상)

15. O-UK    소니의 블루스 (제임스 볼드윈)[*]

16. O-UK/US 버틀비 (허먼 멜빌)[*]

17. B       오딧세우스의 항해 (호메로스)

18. B       영혼에 관한 크리슈나의 대화

19. O-UK/US 동산지기 (루드야드 키플링)[*]

20. B       유형지에서 (프란츠 카프카)

21. B       무신론자의 미사 (오노레 드 발자크)[*]

22. B       아편의 쾌락과 고통 (토머스 드 퀸시)[*]

23. B       이탈리아에서 온 편지 (요한 볼프강 폰 괴테)

24. O-UK    정신분석 강의 (지그문드 프로이드)

25. B       사냥꾼의 앨범 (이반 투르게네프)

26. O-UK    해변의 별장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27. B       슬픈 미나 로리 (샤롯 브론테)

28. B       키스 (케이트 쇼팽)[*]

29. O-UK    마법의 궁전 (이탈로 칼비노)[*]

30. O-UK/US 꿈의 정원 (그레이엄 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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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파업부터 시작해서 비상 계엄과 탄핵 정국을 거쳐 이번 동시다발 산불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심란하기 짝이 없는 심각한 사건사고를 연달아 겪으니 새삼스레 '나라 하나 망하는 것 시간 문제'라는 생각마저 든다. 물론 자세히 뜯어 보면 문제가 없지야 않았겠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돌아가는 듯 보였던 나라가 어떻게 불과 1년 사이에 이 정도로 망가졌을까.


대통령 탄핵 심판 결론이 차일피일 미뤄지는 사이, 야당 대표의 재판 결론이 먼저 나왔는데, 하루종일 뉴스마다 쟁점을 분석하고 있지만 나귀님이 보기에는 양쪽 다 말장난일 뿐이다. 그 와중에 며칠째 지속 중인 경상도의 동시다발 산불로 인한 피해는 눈더미처럼 커져만 가서, 지금까지 사망자만 20여 명에 달하고 심지어 진화 헬기도 추락해 조종사가 사망했다.


문득 스터즈 터클의 <일>에서 어느 소방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라도 개판이고, 세상도 개판이고,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들지만, 그래도 소방관들은 '진짜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거였다. 불이 나면 끄러 가고, 아이가 갇히면 구해 나오고, 사람이 쓰러지면 인공호흡을 하며, 남들처럼 책상에 앉아 종이에 적힌 숫자 들여다보는 일이 아니라 '진짜 일'을 한다던가.


해당 소방관의 인터뷰는 그 책에서 맨 뒤에 나온다. "빌어먹을 세상 엿 먹으라고 하십시오. 이 나라도 엿 먹으라고 하십시오. 하지만 (...) 소방수는 생산적인 일을 한다구요. 불을 끄니까요. 품안에 아기를 안고 불 속을 빠져나오는 소방수를 보셨을 겁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인공호흡을 실시하는 모습도 보셨을 테죠. 이걸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이게 진짜니까요. 


저도 그렇게 되고 싶습니다. 은행에서 일한 적 있습니다. 돈이란 종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짜가 아니라구요. 아홉 시 출근에 다섯 시 퇴근? 엿 먹으라고 하십시오. 선생님이 보는 건 숫자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저는 뒤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불을 껐어. 누군가를 살렸다구.' 그건 이 세상에서 뭔가 보람 있는 일을 했다는 말이죠."(867쪽)


물론 소방관이라 해서 반드시 인격자까지는 아니니, 남자다움을 유치하게 과시하며 흑인과 히스패닉에 대한 편견도 드러낸다. 그래도 일단 불이 났다 하면 앞뒤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 방금 전까지 자기가 욕하던 사람들을 구해내는 것이 소방관이라고 화자는 주장한다. 결국 지금 모든 문제의 원인은 '진짜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아닐지...




[*] 스터즈 터클(1912-2008)은 미국의 평범한 사람들을 인터뷰한 구술사 시리즈로 유명한데, 우리나라에서는 선집이 몇 권 나왔다가 지금은 모두 절판되었다. 이전에 잠시 언급했듯이, 과거 뿌리깊은나무에서 민중구술사를 제작했을 때에도 터클의 책을 모범 가운데 하나로 삼았다는 발행인 한창기의 회고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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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식사업가 백종원을 둘러싼 논란이 나날이 확산되는 모양새이다. 지난 설날 즈음에 자사의 햄 통조림 할인 판매 가격을 둘러싼 논란이 그 시작이었다고 기억하는데, 이후 원산지 표기며 함량 미달 문제를 거쳐 프랜차이즈 관리와 각종 법령 위반 문제로까지 번지더니, 급기야 그간 치적이라 평가되던 재래시장 살리기며 축제 지원에 대해서까지 논란이 일고 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는 속담처럼 논란 대부분이 충분한 근거를 지닌 것은 사실이니 결국 백종원도 사죄의 뜻을 표한 모양이지만, 이후로도 논란의 기세가 줄지 않고 오히려 더 훨훨 불타오르는 모양이니 희한한 일이다. 일각에서는 최근의 정치 상황과 관련된 음모론도 제기되는 모양이지만, 이보다는 그간 쌓인 감정이 한꺼번에 터졌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여기서 문득 떠오르는 것이 <한비자> "세난"(說難) 편에 나온 미자하(彌子瑕)의 고사다. 위(衛)나라 왕이 미자하라는 신하를 워낙 총애하다 보니 간혹 '선 넘는' 경우조차 너그럽게 봐주고 넘어갔다. 예를 들어 왕의 수레를 몰래 타고 어머니에게 다녀온 것이며, 자기가 먹던 복숭아를 왕에게 건네준 것 등이 그러했는데, 하나같이 중형을 피할 수 없는 불경죄였다.


하지만 왕은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그랬으니 얼마나 효자냐!'라거나, '나를 생각해서 먹어보라고 권했으니 얼마나 착하냐!'면서 좋게 해석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미자하도 늙어서 볼품없어지자, 그때 가서는 왕도 총애를 거둔 나머지 '저놈은 예전부터 내 수레를 몰래 타고 다니는가 하면, 제가 먹던 복숭아를 나에게 먹였던 놈'이라며 욕을 했다던가.


"세난"(說難)은 "설득의 어려움"이란 뜻이며, 한비자는 해당 편에서 군주를 상대하는 유세객이 취해야 할 태도를 조언한다. 군주의 마음을 움직여서 등용되는 것이 유세객의 목표이지만, 자칫 무리해서 군주의 심사를 거스르면 안 된다는 것이니, 미자하의 일화 다음에 '용의 역린을 건드리지 말라'는 조언이 등장하는 것만 보면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법하다.


백종원의 경우도 미자하와 마찬가지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을 때에는 갖가지 문제가 부각되지 않았지만, 대중의 사랑이 줄어들면서부터 줄줄이 부각된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또 한편으로는 인기가 절정이었던 시절에 '모르는 것이 없는' 만물박사마냥 내놓았던 수많은 조언이 뒤늦게야 자승자박이 되었다는 점에서 한비자가 말한 유세객의 실수를 반복한 것도 같다.


흥미로운 점은 한때 백종원과 함께 '한국의 3대 선생님'으로 꼽히던 오은영과 강형욱 역시 논란이 없지 않다는 점이다. 세 명 모두 TV 출연을 통해 명성을 얻으며 여러 분야로 활동을 넓혔는데, 결국에 가서는 논란을 일으키고 대중의 반발을 사게 되었으니, 어떤 면에서는 '사람은 그 무능이 드러나는 지위까지 승진한다'던 피터의 법칙의 증명 사례 같기도 하다.


물론 권위에 맹종하는 대중의 속물근성도 비판할 만하다. 다만 오늘은 환호하고 내일은 비난하는 변덕의 가능성은 늘 있게 마련이고, 아무 근거 없이 매도당한 사람도 실제로 있으니, 대중의 과도한 추앙을 받는 경우라면 '선생' 스스로도 조심해야 맞지 않았을까. 이른바 '선생 노릇하기 좋아하지 말라'는 조언을 예수와 맹자 모두 내놓은 것도 이유가 있는 듯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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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 개편을 놓고 '더 내고 더 받기'라고 생색 내는 뉴스가 대부분이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요율이 높아져서 부담만 늘어날 뿐 나중에 받는 연금이야 반토막에 불과한 셈이니 한심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홈플러스에 투자해서 9천억 원을 날리게 생겼다니, 국민연금 개편에 앞서 자금 운용 담당자부터 끌어내서 공개 처형부터 하는 것이 순리가 아닐까 싶은데.


홈플러스는 그렇잖아도 갑작스러운 기업 회생 절차 돌입으로 몇 주째 관련 뉴스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가끔 산책길에 옆동네 익스프레스에 가서 천 원짜리 콩나물을 사오는 게 전부인 나귀님이야 직접적인 상관까지는 없지만, 거래업체며 입점업체와 직원 등에 이르기까지 연쇄적인 타격이 불가피해 보인다는 소식을 들으니, 덩달아 걱정스러운 마음마저 든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나귀님도 예전에는 홈플러스 대형 매장에 몇 번인가 찾아간 적이 있었다. 알라딘 중고매장 가운데 몇 군데가 홈플러스에 입점해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이마트에도 입점한 경우가 있었는데 지금은 홈플러스와 하나로마트에만 있는 듯하다. 확인해 보니 서울에 강서홈플러스점, 경기에 의정부홈플러스점과 인천계산홈플러스점이 남아 있다.


뉴스에 따르면 이번 홈플러스 사태로 입점업체 일부가 자체 결제기를 도입했다고도 한다. 알고 보니 입점업체에는 갑과 을 두 가지 종류가 있어서, 갑의 경우에는 애초부터 자체 결제기를 이용하고 홈플러스에는 월세만 지급하는 임대인인 반면, 을의 경우에는 홈플러스 결제기를 이용해서 매출금을 고스란히 넘겼다가 수수료를 빼고 돌려받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홈플러스가 기업 회생 절차에 들어갔으니, 을의 경우에는 수익 정산이 늦어지거나 불가능해질 수 있다는 불안 때문에 홈플러스 결제기 대신 자체 결제기를 사용하더라는 이야기이다. 당국이며 본사에서 입점업체의 피해를 최소화하겠다고 말하지만, 이전의 여러 사례를 보아도 그런 약속이 제대로 지켜진 적이 없다 보니, 입점업체 쪽에서도 불안할 수밖에.


그렇다면 홈플러스에 입점한 알라딘 중고매장은 갑/을 중 어느 쪽일까? 이 정도 기업 규모라면 충분히 자체 결제기를 이용할 법하니, 현지 진행 중인 사태에서도 크게 손해를 볼 일까지는 없을 듯하다. 물론 나귀님이야 언제부턴가 우주점 상품을 구매해도 기본 마일리지나 추가 마일리지 적립을 빼먹는 것이 괘씸했으니, 내친 김에 골탕 먹어도 쌤통이겠다 싶지만.


그런데 알라딘 중고매장 중에는 위치가 정말 요상한 곳도 없지 않다. 예를 들어 목동점은 큰길에서 한참 들어가야 나오는 뭔가 낡고 썰렁한 느낌의 쇼핑센터에 있고, 영등포점은 아예 공실 천지라서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옛 의류 상가 건물의 지하 2층에 있어서, 처음 갔을 때에는 에스컬레이터로 내려가려다가 불이 다 꺼진 것을 보고 놀라서 다시 나오기도 했으니.


나귀님은 맨 먼저 생긴 종로점과 신촌점을 제일 많이 갔고, 나중에 지점이 더 늘어나면서부터는 가로수길점과 강남점(Yes24 중고매장 포함), 서울대입구역점과 신림점, 영등포점과 목동점(Yes24 중고매장 포함), 합정점과 신촌점(Yes24 중고매장 홍대점 포함), 종로점과 대학로점과 수유점처럼 가까운 곳을 연이어 방문하는 코스를 주말마다 한 번씩 돌곤 했었다.


경기도 매장 중에서는 전철로 가기 쉬운 부천점, 수원점(야구장 건너편 이마트에 있었던 지점은 이제 없어진 모양이다), 산본점을 여러 번 갔었고, 분당점과 일산점은 살짝 번거롭기는 하지만 시외버스를 타고 다녀오기도 했었다. 더 멀리 있는 지방 매장 중에서는 대전시청역점엔가를 갔었는데, 어쩐지 '작고 소중한' 느낌의 대전 지하철이 상당히 신기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형태의 매장은 역시 일산점이다. 원래 나이트클럽이었던 곳을 개조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넓기는 하지만 서점을 하기에는 그다지 좋은 구조가 아니었던 것 같다. 겨울에 방문해서 그런지 유난히 추웠던 기억도 있고. 지하철 환승 통로 중간에 자리한 이수역점도 꽤나 특이한 구조인데, 일종의 무대 공간이었던 곳을 개조했던 듯하다.


건대점은 책장 사이 통로가 워낙 좁아서 맨 아래 있는 책을 꺼내기도 힘들었던 기억이 나고, 반대로 부천점은 상당히 넓은데다 복층이기도 해서 책 구경하느라 다리가 아팠던 기억이 난다. 앉아서 책 읽으라며 놓아둔 탁자에 딸린 의자는 유난히 무거워서 움직일 때마다 끌리는 소리가 요란했던 것이며, 남들 신경 쓰지 않고 줄곧 엎드려 자던 사람들도 생각난다. 


한 번은 어느 매장에서 자기가 찾는 책이 해당 위치에 없다며 계산대에 와서 항의한 여자 손님이 있었는데, 잠시 후에 다른 위치에서 찾아냈다며 '없어진 책을 내가 찾아냈으니 가격을 할인해 달라'고 따지기에 신박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마치 도서관을 이용하듯 커피와 노트북을 들고 들어와 탁자에만 앉아 있는 손님들도 있기에 참 대단하다 생각도 했고.


물론 세상에서 제일 쓸데 없는 것이 연예인 걱정이고, 나날이 확장일로인 알라딘 중고매장 걱정도 마찬가지일 법하니 공연한 말만 떠들어대는 나귀님일 뿐이다. 그나저나 현재 홈플러스의 토대 가운데 일부는 저 악명 높은 까르푸/홈에버라 했으니, 직원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무려 30년 전부터 시작되었던 잔혹사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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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를 보니 미국 트럼프 정부의 폭주에서 선봉을 담당한 머스크의 정부효율부(DOGE)에서 '미국의 소리'(VOA) 방송의 해체에 돌입했다는 뜻밖의 소식이 나온다. VOA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설립된 미국 정부의 선전 부서로 냉전 시기에는 소련과 동구권을 상대로 방송했고, 우리나라에서도 독재 정권 시기 검열을 피해 외부 세계 소식을 듣는 통로로 활용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박정희 정권의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한 보도였으니, 국내 언론이 검열로 침묵을 지키는 와중에 VOA가 오히려 민주화 운동에 일익을 담당했다고 평가할 만하다. 지금도 러시아나 중국 등의 독재 국가를 상대로 비슷한 역할을 지속하는 까닭인지, 이번의 갑작스러운 VOA 폐지 소식에 러시아와 중국 정부는 오히려 적극 환영하는 입장이라고 전한다.


물론 미국 정부의 입장을 주로 대변하는 매체이니 자국의 이익을 항상 염두에 두게 마련이고, 그렇기 때문에 보도 내용도 항상 공정하리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최근 미국 해외원조국(USAID)의 갑작스러운 폐지 결정과도 유사하게, 수십 년째 이어진 사업을 하루아침에 없앤다는 것이 과연 미국의 장기적인 이익에 부합할지 여부는 의문일 수밖에 없다.


그나저나 이번 VOA 폐지 조치로 가장 당혹감을 느낀 쪽은 바로 탄핵 반대 시위를 주도하는 윤석열 지지자들이라는 뉴스도 있었다. 무슨 뜻인가 알아보니, 그중 다수가 탄핵 심판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VOA의 방송 내용 일부를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으로 오해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생활 영어 프로그램의 내용 일부를 일종의 암호 메시지로 해석했기 때문이라나!


그렇잖아도 극우 세력이 탄핵 반대 집회마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나란히 들고 나오고, 조만간 트럼프가 윤석열을 구해줄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을 입에 올리며, 심지어 탄핵 찬성 연예인을 미국 CIA(?)에 신고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꾸준히 있었다. 그런데 같은 편이라고 믿었던 미국 정부의 뒤통수로 VOA가 폐지되었으니, 이게 무슨 영문인가 싶어 당황할 수밖에!


한편으로는 쌤통이다 싶다가도, 또 한편으로는 명분 없는 비상 계엄을 실시한 현직 대통령이며 그 지지자들 모두가 이처럼 극우 유튜버의 갖가지 가짜 뉴스를 신봉한 까닭에 나라를 어지럽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한심하고 남부끄럽기 짝이 없다. 물론 트럼프 정부의 VOA 폐지가 실현되더라도, 극우 세력은 또 다른 가짜 뉴스로 억지 주장을 지속하겠지만.


그나저나 이쯤 되니 예전에 VOA에서 방송한 강연을 엮어 만든 책이 기억나서 책장을 뒤져보게 되었다. <미국소설론>(VOA 편저, 서숙 옮김, 탐구신서 83, 1985)이라는 문고본인데, 원제는 "미국의 소리 포럼 강연: 미국 소설"(The Voice of America Forum Lectures: The American Novel)이며, 쿠퍼의 <개척자>부터 포크너의 <음향과 분노>까지 19종의 작품 해설이다.


셔우드 앤더슨의 연작 소설 <오하이오 주 와인즈버그>를 해설한 평론가 어빙 하우를 제외하면 강연자 대부분은 영 낯선 편인데, 그래도 헤밍웨이 전기로 유명한 칼로스 베이커가 해당 작가의 대표작 <무기여 잘 있거라>의 해설을 담당한 것을 보면, 대부분 현직 교수였다는 나머지 강연자들도 해당 작가나 작품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왕 책을 꺼낸 김에 몇 가지 읽어보자 싶어서, 그나마 줄거리를 비교적 뚜렷이 기억하고 있는 작품 위주로 고르다 보니,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 앤더슨의 <오하이오 주 와인즈버그>,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편을 읽어보게 되었다. 비교적 평이하면서도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을 지목해 주니, 이것이야말로 비평의 미덕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허클베리 핀>에 대한 헨리 내쉬 스미스의 설명이다. 마크 트웨인의 이 소설은 <톰 소여>의 속편이자, 백인 부랑아의 방랑기이자, 유머를 앞세운 작품에, 최근 많이 비판받는 것처럼 "깜둥이"를 비롯해서 갖가지 인종차별적 표현이 넘쳐나는 등의 갖가지 단점에도 불구하고 오래 전부터 이른바 '위대한 미국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아 왔다.


스미스는 출간 이후 50년간 뜨뜻미지근했던 이 작품에 대한 평가가 올라간 까닭을 미국의 현실에서 찾아보려 한다. 평범한 부랑아였던 헉 핀이 보물 찾기로 벼락부자가 되어 하루아침에 모두의 주목과 선망이 되자 오히려 어색함과 불편함을 느꼈듯이,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거치며 갑작스레 세계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이란 나라도 비슷한 처지였다는 것이다.


급기야 헉 핀은 재산과 명성을 모두 내버리고 자유로운 삶을 찾아 방랑을 떠났고, 이 과정에서 도주 노예를 친구로 삼고 위기에서 구출하며, 결국 다시 문명 세계로 돌아와서도 새로운 도주를 꿈꾸는데, 이 과정 내내 반복되는 임기응변이 미국인 특유의 실용주의와 공명한 까닭에 큰 인기를 끌었으며, 급기야 "위대한 미국 소설"로 공인받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하지만 헉 핀의 자유분방하면서도 무책임한 태도에는 장점 못지않게 단점도 뚜렷하다. "이처럼 행동하는 소년, 또는 국가는 일관성 있는 정책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예측할 수도, 믿을 수도 없는 태도로 행동한다는 인상을 줄 것이다."(101쪽) 이는 트럼프 정권 1기부터 줄곧 지적되었듯, 미국 문화의 저류인 반지성주의가 실용주의와 표리 관계인 것과 유사하다.


심지어 트럼프 정권 2기 출범과 함께 지속되는 폭주를 미리 예견한 것처럼 보이는 문장도 있다. "이런 소년이나 국가는 신뢰할 수 없는 우방으로 보일 수도 있다. 아무도 어떻게 그가, 또는 그 나라가 미래의 상황에서 행동할 것인지 과거의 행동으로부터 추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내외를 통해 미국의 국가 정책은 세계에 그같은 인상을 흔히 주어 왔다."(101쪽)


"묵계된, 또는 성문화된 법률보다는 직관적인 정의감에 호소하는 것은 바로 헉 속에 있는 미국적인 특징이라 하겠다. 우리는 법을 준수하지 않기로 유명한 국민이다. (...) 이런 뜻에서 우리 문화 속에는 무정부주의적인 성격이 분명히 있다. (...) 법과 법을 대변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불경은 열정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우리 문화의 어두운 면이다."(102쪽)


물론 트럼프 정권의 폭주를 마크 트웨인 탓으로 돌리려는 것까지는 아니다. 다만 초강대국으로서의 책임을 하루아침에 내버리고 고립을 택하려는 저 나라 지도자의 행동이야말로 끝까지 문명화를 거부하며 개척지로 도주하기를 꿈꾼 저 부랑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 "위대한 미국 소설"로 평가되는 이유를 아이러니하게도 실감했을 뿐이다.




[*] 검색해 보니 이보다 더 먼저 간행된 <지식과 사회: 미국의 사회학>(탈코트 파슨즈 편저, 임희섭 옮김, 탐구신서 56, 탐구당, 1972) 역시 "미국의 소리 포럼 강연" 시리즈의 번역서라고 한다. 이제 와서 다시 꺼내 보기 귀찮으니 그냥 그렇다는 것만 적어놓고 지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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