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6월이면 서울국제도서전에 찾아가던 때도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 딱 10년 전인 2014년에 다녀온 이후로는 영 가지 않게 되고 말았다. 나귀님 기억으로는 90년대 초부터 다닌 것 같으니, 대략 20년 넘게 거의 매년 찾아가던 행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외면하게 된 셈이다.


나귀님 같은 독자의 입장에서 도서전은 단지 책을 구경하고 싸게 구입하는 기회일 뿐만 아니라, 관련 정보를 수집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무료 배포하는 도서목록도 챙기고, 나아가 현장에 나와 있는 출판사 관계자에게 이런저런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고 답변을 얻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마지막 몇 번은 참가하는 출판사 숫자도 크게 줄었고, 부스마다 판매며 이벤트에 열중하다 보니 정작 책에 대해 물어볼 기회도 없어지면서, 이제는 굳이 입장료까지 내 가면서 갈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굳어지게 되었고, 그러면서 결국 자연스레 발걸음이 끊어지게 된 듯하다.


해외에서 도서전이라 하면 근간 및 신간 도서를 소개하고 판권을 교섭하는 출판인들만의 행사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책을 홍보하고 판매하는 전시회로 시작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그저 책을 전시하고 할인 판매하고 각종 이벤트까지 곁들이는 행사 정도로 인식된다.


그나마도 잘만 운영하면 나름대로 의미가 있겠지만, 매년 각종 논란이 곁들여지곤 해서 문제다. 지난번에는 이전 정부 블랙리스트 작성 관여 인사가 주최측에 포함되었다고 해서 논란이 있었고, 이번에는 행사 수익금 처리 문제며 과도하게 비싼 참가비 등으로 논란이 있는 모양이다.


이전부터 말이 많았던 도서전인데, 이번에는 정부와 대놓고 설전까지 벌이고 있으니, 이러다가는 머지않아 없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애초부터 성격이 애매한 행사였으니, 이번 기회에 차라리 싹 없애 버리고 대신 와우북처럼 책 할인 판매 행사를 벌이는 게 차라리 나을까.


그나저나 2024년 서울국제도서전의 주제는 무려 '후이늠'이라 하는데, 이건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나라에서 야만적인 인간 '야후'와 달리 이성을 갖춘 말들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도대체 왜 하필 '후이늠'일까 궁금해서 공식 홈페이지에 찾아가 보았더니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 2024 서울국제도서전 주제전시는 우리가 바라는 세상으로 가기 위한 지도를 그립니다. ‘후이늠’의 세계가 해법이 아니라면 어떤 방식으로 미래를 그려야 할지에 대해 이야기 나눕니다. 막연한 낙관을 넘어서 기꺼이 환대할 현실을 모색합니다. 함께 '후이늠’을 키워드로 큐레이션된 400권의 도서를 통해 후이늠의 세계를 여행하면서 ‘세상의 비참’을 줄이고 ‘미래의 행복’을 사유하며 발견할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



또 이런 설명도 있다.



>>> 심술, 둔감, 무지, 변덕, 호색, 오만, 고집, 무례, 비겁, 야비, 잔인, 사악, 거만, 비굴, 추악, 교활과 같은 말은 인간의 어두운 면을 묘사할 때 쓰는 말이다. 이런 어두운 면들은 인간이 자기만 더 먹고, 더 갖겠다는 욕망을 만들고 서로의 이해에 따라 편을 가른다. 침략, 약탈, 살인과 전쟁은 어둠의 가장 비참한 결과이다. 걸리버는 여행에서 이런 면이 전혀 없는 종족, '후이늠'을 만난다. 이성적, 상식적으로 완벽한 ‘후이늠’의 세상을 만들면, 우리는 전쟁을 그칠 수 있을까? 유능한 인공지능은 우리 미래에 ‘후이늠’이 되어 줄 것인가? ‘후이늠’의 세계가 해법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떤 미래를 그려야 할까?


우리는 배려, 민감, 지혜, 믿음, 사랑, 유연, 예의, 용기, 격조, 품위, 인정, 겸손, 아름다움, 정직 같은 말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싶다. 2024 서울국제도서전은 독자들과 함께, 우리가 바라는 세상으로 가기 위한 지도를 그린다. 지난 300년간 지도를 그리기 위해서 길을 찾아 헤매었던 걸리버, 사람과 같은 법적 권리를 찾기 위해 노력 중인 제돌이와 함께 출발했다. 95년 만에 저작권의 굴레에서 벗어난 미키 마우스에게도 길을 청했는데, 여전히 상표권에 매여 있어 뒤에 숨어 함께 간다. 함께 나선 독자들과, 뒤에 숨어 따르는 모든 이들이 걸리버의 발자취를 따라, 후이늠의 세계를 여행하면서 ‘세계의 비참’을 줄이고 ‘미래의 행복’을 찾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



도서전 측의 설명만 보면 후이늠의 세계를 미래 사회의 한 가지 이상으로 삼겠다는 것 같은데, 하고많은 이상향의 사례 중에서 왜 하필 그것인지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사실 풍자 문학인 <걸리버 여행기>에서 후이늠은 어디까지나 야후의 야만성을 드러내는 장치일 뿐이니까.


아울러 스위프트의 소설에서도 후이늠이 하나부터 열까지 이상적인 존재로만 묘사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걸리버는 인간 사회의 온갖 문제점을 열거하며 후이늠 사회의 미덕을 예찬하지만, 정작 거기도 주인과 하인의 신분 차별이 있고 야후를 천시하는 편견이 있다.


급기야 후이늠은 걸리버가 말하는 야후로서 이성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가 다른 야만적인 야후 떼를 선동하여 사회에 위협이 될까 우려하여 축출하기까지 했으니, 제아무리 이성적인 말대가리라 하더라도 불안이나 공포 같은 비이성적인 감정까지 억누르지는 못했던 셈이다.


즉 후이늠의 세계라고 완전무결까지는 아니니, 어떤 면에서 이번 도서전의 주제 설정은 지나친 의미부여 같기도 하다. 물론 2023년과 2022년과 2021년의 주제가 각각 '비인간'과 '반걸음'과 '긋닛'이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이처럼 뜬금없어 보이는 전시 내용도 새로운 전통인가 싶다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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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펀드에 <한국 인터넷 밈의 계보학>이라는 것이 있기에 뭔가 궁금해 눌러 보니, 제목 그대로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각종 밈들을 모아가지고 그 기원과 발전에 대해 설명하는 책인 모양이다. '밈'이라고 하면 도킨스의 책에 나오는 개념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각종 '짤방'을 일컫는 명칭이 되더니, 지금은 동영상도 가리키는 모양이다.


과거에도 이은집이니 서정범이니 하는 저자들이 고등학생과 대학생의 유행이며 유행어를 엮은 책이 있었다고 기억하니, 이제는 인터넷 밈을 엮은 책이 나오는 세상이 되었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을 법하다. 아직 나오지 않은 책의 샘플 페이지를 보니 '개죽이'처럼 나귀님의 눈에도 익은 것들이 보인다.(그나저나 '개벽이' 주인 양반은 알라딘에서도 활동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샘플 페이지에 나온 사진 가운데 이른바 "노동요"라는 유명한 인터넷 동영상의 화면을 캡쳐한 것이 유독 눈길을 끌었다. 제목 그대로 일하면서 듣기 좋은(?) 중독성 높은 음악을 여러 곡 엮어놓은 동영상이라고 알고 있는데, 이번 책에서는 <세서미 스트리트>의 캐릭터인 머펫 엘모의 모습에 핵폭발 장면을 합성한 화면에 대한 분석이 주로 이루어지는 듯하다.


그런데 나귀님의 입장에서 각별히 흥미가 갔던 것은 그 제작자의 또 다른 유튜브 동영상 "이마트"였다. 이마트에서 사용하는 로고송 가운데 하나를 장시간 빨리 재생하는 것으로 "노동요" 못지않게 인기를 끌었다고 알고 있는데, 원곡 자체를 예전부터 좋아했던 나귀님으로선 지금 와서 대형 마트 로고송을 거쳐 인터넷밈으로까지 자리잡았다는 사실이 살짝 황당했다.


문제의 노래는 제임스 미치너의 연작 단편을 토대로 로저스와 해머스타인이 만든 유명한 뮤지컬 <남태평양>에 나오는 "해피 토크"인데, 적진 정찰 임무를 부여받고 최전선에 파견된 장교가 짬을 내서 원주민 마을에서 휴식을 즐길 때, 미군 부대 옆에서 장사를 하는 원주민 여성 블러디 메리의 딸인 예쁜 아가씨와 물에 들어가 헤엄을 치며 꽁냥꽁냥할 때에 나온다. 


블러디 메리는 장교에게 자기 딸과 결혼해 그냥 이곳에 눌러앉아 살라고 유혹하지만, 그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화를 내며 딸을 데리고 떠나 버린다. 이후 장교는 그 지역의 유지인 프랑스인 농장주의 안내를 받아 적진에 침투했다가 전사하고 만다. "해피 토크"라는 노래 자체는 경쾌하지만, 그 전후 맥락에는 살짝 어두운 느낌도 없지 않은 셈이다.


아마도 이마트에서 로고송으로 사용한 이유도 바로 그런 경쾌함 때문이겠지만, 그걸 또 한 번 더 비틀어서 인터넷 밈의 일종으로 만든 것은 상당히 괴이하다고 해야 할 법하다.(하나 덧붙이자면, 나귀님이 수년 전에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이마트에 다니던 시절에는 "해피 토크"를 이용한 로고송을 한 번도 듣지 못했다. 대신 "아직도 B컵, 엄마는 D컵"은 자주 들었지만...)


소설가 제임스 미치너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태평양 전선에 배치되어 복무했는데, 한 번은 누벨칼레도니에 갔다가 훗날 프랑스인 농장주며 원주민 블러디 메리며 하는 인물들의 모델이 된 사람들을 만났다고 전한다. 이후 그때의 경험을 토대로 한 연작 단편집 <남태평양 이야기>가 1948년 퓰리처상을 받았고, 훗날 뮤지컬과 영화로도 각색되며 큰 인기를 누렸다.


전쟁이 끝나고 10년 뒤에는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젊은 곤충학자가 누벨칼레도니에 왔다가 바로 그 프랑스인 농장주의 집에 한동안 머물며 신세를 지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풍토병에 걸려 끙끙 앓는 바람에 원래 계획한 곤충 채집은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떠나 버렸는데, 그가 바로 세계적인 개미 연구자 겸 사회생물학의 창시자인 에드워드 O. 윌슨이다.


또 한 가지 묘한 점은 앞서 언급한 인터넷 밈 "노동요"와 "이마트" 모두에 사용된 사진에 등장하는 엘모와 관련이 있다. 나귀님이 예전에 2번으로 <세서미 스트리트>를 시청하던 시절에는 없었던 캐릭터라고 기억하는데, 지금 와서는 드라큘라, 길쭉이와 넓적이, 쓰레기통 괴물, 노란 새, 개구리 기자 같은 기존 캐릭터들을 밀어내고 일약 프로그램의 간판이 된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얼마 전에는 트위터의 엘모 계정에 "어떻게들 지내?" 하는 안부 인사가 올라오자 수많은 팬들이 각자의 삶을 하소연하며 큰 반향을 일으킨 적도 있었다. 그런데 정작 이 캐릭터의 움직임과 목소리를 원래 담당하던 연기자는 수년 전에 성추행 혐의로 불명예 퇴진했다고 하니, 이 사실 역시 이 인터넷 밈에 아이러니를 한층 더해주는 요소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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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딥스로트"라는 암호명으로 지칭되던 정부 고위층의 내부 고발자가 있었다. 그 정체를 놓고 구구한 추측이 있었지만, 제보를 받은 <워싱턴 포스트>에서 함구하며 추측만 무성했었다. 알다시피 이 언론사는 다른 매체의 외면 속에서도 이 스캔들을 끈질기게 파고들어 대통령 하야를 이끌어냈다.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당시 FBI의 2인자였던 부국장 마크 펠트가 바로 그 제보자였던 것으로 밝혀졌고, <대통령의 부하 모두>라는 논픽션의 공저자인 <워싱턴 포스트> 기자 밥 우드워드가 "딥스로트"의 내력을 저술한 <시크릿맨>이란 저서를 간행했었는데, 나귀님은 최근에야 그 번역서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잖아도 수년 전에 외서를 하나 사려다가 할인 쿠폰을 쓰려면 3만 원인지 5만 원인지를 딱 맞춰야 하기에 울며겨자먹기로 마침 대폭 할인 판매하던 그 원서를 사서 책장에 꽂아둔 바 있었다. 워터게이트 관련서를 꾸준히 사 모은 나귀님 말고는 딱히 볼 사람도 없을 터이니 번역서는 못 나오리라 생각했던 까닭이다.


암호명 "딥스로트"는 린다 러블레이스가 주연한 동명의 저 유명한 포르노 영화에서 유래한 것으로, 밥 우드워드가 처음으로 이 조력자에 대해 언급했을 당시에 신문사 편집국의 누군가가 장난스레 제안한 이름이었다. "목구멍 깊숙이" 들어 있는 비밀을 누설하는 제보자를 가리키기에는 제법 그럴싸하다고 생각했던 걸까.


극소수 내부자만 알 수 있는 고급 정보가 누설되었다는 사실을 간파한 정부에서 눈에 불을 켜고 용의자 색출에 나섰지만, 우드워드의 책에 따르면 마크 펠트는 이런 상황을 예견한 듯 "우리 중에 스파이가 있어!"라며 자기가 먼저 앞장서서 설레발을 치며 내부 고발자 단속을 제안함으로써 혐의를 벗어버렸다고 한다.


연방 수사기관의 2인자가 굳이 내부 고발을 하게 된 배경에는 닉슨 정부의 폭주를 막아 보려는 의협심도 있었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FBI 국장 임명을 코앞에 두고 낙마한 데에서 비롯된 불만도 없지 않았던 모양이니,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을 쫓아낸 사람의 행동 동기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없지 않은 듯하다.


탄핵의 위협에 직면했던 대통령이라면 이후의 클린턴이나 트럼프도 있었지만, 닉슨은 실제로 가결을 앞두고 자포자기로 하야한 최초(이자 아직까지는 마지막) 사례라는 점에서 아직까지도 최악의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는 실정이다. 외교 면에서의 실적에도 불구하고 도덕성이라는 면에서 치명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잖아도 최근 번역된 필립 로스의 초기작 <우리 패거리>에서도 그를 연상시키는 정치인의 막장 행보를 꼬집는다 하니, 이래저래 닉슨이라면 여전히 최악의 정치인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진 듯하다. 심지어 맨 정신이었던 때가 별로 없었던 환각제 애호가 P. K. 딕도 닉슨과 그 정부에 대해서는 줄곧 비판적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시크릿맨> 번역서를 알라딘 미리보기로 확인하니 군데군데 축역된 듯한 문장이 나타나는 것은 아쉽다.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파장된 수천 건의 심문 기록과 문서"(11쪽)라는 희한한 표현도 등장하던데, 아마도 "파생된"을 잘못 적은 듯하다. 아니면 매번 출판사들이 주장하듯이 나귀님 눈깔이 잘못된 거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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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밥>의 작가 쿠이 료코의 신간이 나왔다기에 뭔가 궁금해 살펴보니 제목부터 "낙서집"이다. 장편 연재 도중에 심심풀이로 그린 것들을 엮었다더니만, 샘플 페이지를 보니 그 주인공들을 활용한 낙서가 적지 않은 듯하다. 혹시 <던전밥>의 후일담에 속하는 내용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니, 기회가 되면 훑어봐야 하겠다.


그러고 보니 <엠마>의 작가 모리 카오루도 비슷한 그림들을 엮어가지고 "습유집"이라는 제목으로 간행한 적이 있었다. "습유"라고 하면 보통은 옛날 문집을 엮으면서 본편에서 빠진 글을 뒤늦게 덧붙인 일종의 부록이나 보유에 해당하는 것인데, 감히(?) 만화 제목에 활용했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눈길이 가기도 했다.


작가 스스로는 낙서라고 낮춰 말하지만, 남이 볼 때에는 충분히 돈을 주고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생각해 보니 <마음의 소리>의 작가 조석도 최근 시즌 2로 돌아오면서 그간 블로그에 "막 그린" 그림 일기를 <마음의 소리(였던 것)>이란 제목으로 연재하고 있으니, 이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낙서를 작품으로 승화시켰다는 이야기를 하다 보니, 2022년에 갑자기 사망한 만화가 김정기의 사례가 떠오른다. 원래는 살짝 애매했던 네이버 웹툰 <TLT>로 처음 접한 작가였는데, 나중에 하얀 벽에 매직펜을 이용해서 끝도 없이 즉흥적인 그림을 그려 나가는 이벤트로 전세계적인 화제가 되었다기에 뒤늦게 놀랐다.


김정기의 생전 작품 중에는 일본의 만화가 테라다 카츠야와 공저한 것도 있는 모양인데, 양쪽 모두 낙서에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다 보니 의외로 괜찮은 조합이었던 것도 같다. 테라다 카츠야의 낙서는 <전부>라는 제목으로 한데 엮은 것으로 갖고 있고, 그 외에도 작품집인 줄 알고 샀더니 "뽀샵" 지침서였던 책도 있다.


창작 만화로는 예전에 동네 헌책방에서 구입한 일본어판 <서유기전 대원왕>이 있고 (나중에 2권까지 번역되었다), 그 외에 클래식카에 대한 책이며 만화가로 먹고 사는 방법에 대한 대담집도 나왔지만 아쉽게도 그쪽은 존재감이 약했던 것 같다. "사전극야"라면 여전히 "낙서" 작가라고 기억하는 이유도 그래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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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최근 나온 <최은희와 괴물들>이라는 만화 이야기도 해 보자. 제목 그대로 과거 북한에 납치되었다가 가까스로 탈출했던 영화감독 신상옥과 영화배우 최은희의 실화를 각색한 그래픽노블인데, 십중팔구 국내 보수 성향 언론사나 출판사가 제작한 '반공 만화'가 아닐까 했던 예상과는 딴판으로 무려 독일(!) 작가들이 쓰고 그린 만화였다.


유튜브의 '외국인이 만든 이상한 한국 음식'처럼 살짝 뜬금없다 싶다가도, 두 사람의 체험이 얼마나 극적이었는지를 상기해 보니, 과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분단 국가였던 독일에서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충분히 일리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 부부였던 감독과 배우를 납치해 영화 제작을 명령한 독재자라니, 이만한 부조리극이 어디 있겠나!


나귀님만 해도 두 사람의 행적에 대해서는 약간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본 적이 있었는데, 납북 직후에만 해도 '사업 실패로 자진 월북했다'는 언론 보도가 빗발쳤던 기억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탈북 이후의 해명에 대해서도 살짝은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의 영화 제작이며 언론 노출을 지켜보면서도 과거 반공 교육의 연장인가 싶어 슬쩍 의구심을 품었다.


두 사람은 <내레 김정일입네다>라는 희한한 제목으로 공동 수기를 간행한 바 있었는데, 지금 다시 확인해 보니 외국에서는 수년 전에 아예 그 사건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도 제작되는 등 뒤늦게나마 국내에서보다 더 많은 관심을 받았던 모양이다. 우리야 지겨울 정도로 들어 무덤덤하지만, 외국에서는 오히려 제3세계 독재자의 엽기 실화로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최은희와 괴물들>은 특이하게도 신상옥이 북한에서 만든 괴수 영화 <불가사리>의 내용과 최은희의 실제 경험이 교차되는 방식으로 서술되는 모양이다. 따라서 제목에서 가리키는 '괴물'은 김일성과 김정일을 비롯한 북한 사람들일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영화에 등장하는 진짜 괴물 불가사리일 수도 있으니, 그 자체로 중의성을 지녔다고 해야 될 듯하다.


쇠를 먹으면 몸집이 커지며 무슨 수로도 죽일 수 없는 괴물 불가살, 또는 불가사리는 한국 고유의 괴물이라 하던데, 처음에는 작고 소듕하지만 나중에는 너무 거대해져 감당이 불가능할 정도의 재난을 불러온다는 내용만 보면 건드릴수록 커지는 도깨비 사과나, 또는 동유럽 유대인의 골렘 전설이나, 괴테의 '마법사의 제자'와도 비슷한 점이 없지 않아 보인다.


한편으로는 수탈에 대한 민중의 원한이 드러나는 것도 이 소재 각색물의 한 가지 특징이 아닐까 싶은데, 당장 신상옥의 영화에서는 물론이고 나귀님이 가장 인상 깊게 본 각색물인 백성민의 만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후자에서는 악덕 관리에게 억울하게 죽은 대장장이의 눈 먼 아들이 악에 받쳐 토해낸 핏덩이에 충성스런 황소의 원혼이 깃들어 괴물이 된다.


백성민 버전에서는 주인공이 직접 부모의 원수를 갚지는 못하는 대신, 왜구 토벌 중에 치명상을 입은 원수를 발견하고 최후를 지켜보기만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급기야 애국심 뿜뿜한 원수의 부탁을 받아들여 불가사리에게 적선을 파괴하도록 지시하지만, 쇠를 먹는 불가사리는 물과 상극이라 바다에 빠져 자멸하고 주인공은 절에 들어가는 것으로 급마무리된다.


왜구 이야기가 나왔으니, 최근 나온 만화 중에 특이하게도 해적과 노예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미국의 역사가 마커스 레디커의 저서를 각색한 작품이 여럿 있기에 깜짝 놀랐던 기억도 난다. 번역서로는 까치에서 나온 <악마와 검푸른 바다 사이에서>만 알고 있었는데, 나중에 갈무리에서 저서를 무려 네 권이나 내놓았고, 내친 김에 만화 각색물까지 두 권 내놓았다.


마침 대니얼 디포의 수많은 저술 속 내용을 통해 18세기 영국 경제사를 재구성한 희한한 책인 <디포의 세계>를 뒤적이다가, 거기서 한 장에 걸쳐 묘사된 '해적의 민주주의'를 보고 새삼스레 관심이 생겨서 책장 곳곳에 흩어져 있던 해적 관련서를 이것저것 도로 꺼내 놓았는데, 조만간 시간이 되면 살가리의 해적 소설들까지 포함해서 한 번 훑어보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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