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를 보니 최근 일본에서 쌀값이 한 달 사이에 무려 두 배 이상 폭등했다는 모양이다. 다른 물가는 비싸도 식품 가격은 유난히 저렴하다고 알고 있었는데, 어쩌다가 갑자기 이런 상황이 닥쳤는지 의문이다. 원인을 놓고 의견이 분분한데, 일각에서는 날씨와 전쟁 등의 영향으로 식량 생산이 감소하는 상황에서 투기 세력이 개입한 결과로도 보는 모양이다.


그 사이에 미국에서는 조류 독감의 영향으로 달걀 품귀 현상이 벌어졌다는 뉴스도 있었다. 우리나라도 수년 전 비슷한 이유로 달걀 품귀 현상이 벌어져 미국 달걀을 수입해 온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미국이 우리나라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달걀을 수입하게 된 모양이다. 트럼프는 역시나 평소대로 이것 역시 바이든 정부의 잘못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급기야 미국에서는 집집마다 필요한 달걀을 직접 생산할 수 있도록 암탉을 대여하는 신규 사업까지 생겨났다니, 이래저래 희한한 일이다. 1970년대의 중동 전쟁과 오일 쇼크 당시에 미국에서도 집집마다 정원에 꽃 대신 채소를 길렀다는 일화를 레이 황도 언급한 바 있었는데, 신냉전 시대의 도래와 함께 졸지에 반세기 전의 세상으로 돌아간 듯한 모양새다.


물론 닭을 길러 달걀을 직접 생산하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내 뒷마당의 제국>이라는 책을 보면 언론인인 저자가 뉴욕의 자택 뒷마당에 텃밭과 축사를 만들어 야채와 가축을 직접 돌보았던 체험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데, 1년여의 악전고투 속에 얻은 수확물이라고 해야 야채와 고기 모두 지극히 빈약하기 짝이 없어서 허탈했다고 전한다.


농사 경험이 전무한 저자로서는 부득이한 결과였는지 몰라도, 반대로 농촌 출신인 사람은 도시에서도 약간의 흙만 있다면 뭐라도 농사를 지으려는 욕망이 꿈틀대는 모양이다. 나귀님 집에서도 한때 마당이며 화단에 각종 채소를 길렀고, 그걸 다시 닭과 토끼에게 먹이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식품 가격이 비싸니 도시에서는 닭 먹이 구하기도 쉽지 않겠지만.


이쯤 되니 <채링크로스 84번지>에서 미국에 살던 저자가 전쟁의 여파로 식량 배급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던 런던의 단골 서점에 달걀과 햄을 비롯한 식품 소포를 보내주어서 모두로부터 은인 대접을 받았던 일화도 떠오른다. 나귀님도 이번 기회에 아마존 본사에 달걀 한 판 보내 볼까 싶어서 어제 마트에 갔더니, 의외로 가격이 만만찮아 포기하고 말았다.


육류 생산의 경우에는 밀집 사육의 폐해를 비롯해서 오래 전부터 문제점이 지적되었는데, 지금은 기후 변화 때문에 유제품이나 채소류나 곡물류의 생산까지도 차질을 빚는 모양이다. 이런 상황에서 4년 만에 돌아온 트럼프가 관세 장벽을 세우겠다며 연일 폭주하고 있으니, 한국과 일본과 미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밥상 물가 고민은 향후로도 계속되지 않을까.


어쩌면 미국의 달걀 품귀 사태로 인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오랜 의문에 대해서도 잠정적 해결책이 제시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달걀이 없으면 닭을 대여해서 해결할 수 있지만, 닭이 없다고 달걀을 대여해 봐야 딱히 해결되는 것은 없어 보이니까. 다시 말해 달걀에서 닭을 도출하기보다는 닭에서 달걀을 도출하기가 더 쉽다는 거다.


여기서 문득 생각난 것이 클라리스 리스펙토르의 단편 "달걀과 닭"이다. 얼핏 보면 횡설수설인데, 또 어찌 보면 달걀은 '현재'의 은유이기도 하고 '생명'의 은유이기도 하며, '우주처럼 커다란 삼중당문고'처럼 수많은 의미를 빨아들였다 뱉어냈다 하는 것도 같다. 물론 지금 가장 잘 어울리는 비유는 달걀도 '트럼프'나 '탄핵'처럼 예측불허라는 것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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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슈퍼히어로 만화라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이 슈퍼맨과 배트맨인데, 지난 수년 사이 비록 최근작 위주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번역서가 다수 간행되어 그 위세를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1939년에 첫 등장했으니 슈퍼맨과 함께 80년이 넘도록 오랜 인기를 누린 시리즈이며, 오랜 이력에 걸맞게 방대한 작품군을 통해 다양한 변주가 이루어져 왔다.


슈퍼히어로물에서는 주인공 못지않게 악당이 중요한데, 그중 일부는 반복 등장하는 과정에서 독특한 개성을 부여받기도 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슈퍼맨의 숙적인 렉스 루터와 배트맨의 숙적인 조커이다. 특히 조커는 앨런 무어의 <킬링 조크>에서 묘사된 탄생 비화를 통해 단순한 범죄자에서 광기와 비애를 모두 지닌 인상적인 인물로 재해석되며 큰 인기를 누렸다.


물론 배트맨의 입장에서야 조커는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놈일 뿐이다. 살인은 기본이고 다양한 범죄를 일삼는데다, 일반인뿐만 아니라 배트맨의 여러 지인에게도 갖가지 악행을 서슴없이 저질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트맨은 매번 주먹으로 응징하는 선에서 그치고, 설령 살의를 느꼈을 때조차도 고든 경찰청장 등 주변인의 만류 때문에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다.


고든은 번번이 "우리 식대로" 해야, 즉 법에 의거해 처벌해야 마땅하다는 이유를 내놓지만, 실상은 악순환의 반복일 뿐이다. 조커는 법정에서 정신 이상을 호소하여 아캄 정신병원에 수감되고, 머지않아 탈주하여 범죄를 저지르다 배트맨에게 제압당하기 때문이다. 물론 만화의 전개를 위한 설정이니 과도한 몰입은 곤란하지만, 어쩐지 현실의 딜레마와도 유사하다.


쉽게 말해 악당은 법을 안 지켜도 그만이지만, 경찰은 법을 준수하지 않을 수 없는 역설이라 하겠다. <더티 해리>에서 악당이 여론을 이용해 경찰에게 큰소리치던 모습이 떠오르는데, 그 영화에서처럼 무작정 인권만 앞세운다면 범죄 단속이 가능할지도 의문이기는 하다. 그러니 큰 사건마다 단속 강화, 중형 선고, 사형 부활 등의 여론이 비등하는 게 아닐까.


현직 대통령의 탄핵 심판에서도 이런 딜레마가 드러났다. 자신은 비상 계엄 등 불법적인 행동을 줄줄이 해 놓고, 막상 심판과 수사의 대상이 되자 절차의 정당성을 따지기 때문이다. 똑같은 위선자가 될 수 없으니 담당 기관마다 최대한 법률과 절차를 준수하려 노력한다지만, 대통령 지지자들은 사소한 일까지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니 피로만 쌓여갈 뿐이다.


이쯤 되니 아무리 조커를 응징해도 전혀 끝을 볼 수 없는 배트맨이 느낄 절망감과 암담함이 실감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조커는 아무리 범죄를 저질러도 법적 보호를 받는 반면, 배트맨은 아무리 범죄를 응징해도 자경단이라는 특성상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니 사실상 입장이 역전된 셈이다. 결국 둘 중 누구 하나가 먼저 쓰러진다면 십중팔구 배트맨 쪽이 아닐까.


만화가들도 이런 역설을 인식한 까닭인지, 최근작 중에는 아예 배트맨이 악당보다 먼저 세상을 뜬다고 가정하고,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여러 숙적들이 내놓는 '배트맨의 최후 목격담'을 엮은 것도 나왔다. 심지어 조커와 투페이스 같은 악당뿐만 아니라 앨프리드 같은 측근까지도 배트맨의 최후를 저마다 다르게 서술하기 때문에 '배트맨판 <라쇼몽>'이 되어 버린다.


무려 닐 게이먼이 스토리를 맡은 <망토 두른 십자군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가 바로 그 작품인데, 다시 찾아보니 황당하게도 저 소설가가 작년에 여러 건의 성범죄 혐의로 고발당했다 한다. 급기야 작품 출간이며 영상화 계획이 줄줄이 취소되며 손절당하는 상황이라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어쩐지 픽션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의문의 1패'인 배트맨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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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이란 책이 간행된 모양이다. 제목 그대로 저 유명한 재판 이전까지 피고인의 행적을 추적하면서, 무지와 맹종이 아닌 확신범 나치로서의 악행을 재조명하는 내용으로 보인다. 지금이야 한나 아렌트의 재판 방청기에 나온 '악의 평범성'의 사례로만 유명하지만, 실제로 아이히만은 '괴물'이란 수식어가 딱 어울리는 악인이기 때문이다.


사실 아렌트의 개념은 애초부터 나치 동조자에게 면죄부로 악용될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 바꿔 말해서 식민 통치며 태평양 전쟁에 적극 관여한 일본인 관료들이 무지한 종범이었다면 순순히 믿을 수 있겠나. 바로 이 대목에서 피해자인 우리로선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는데, 최근의 사태와는 별개로 홀로코스트에만 한정하자면 유대인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겠다.


아렌트는 나치의 탄압을 피해 미국에 망명한 신세였지만, 나중에 가서는 유럽 유대인 공동체의 무저항과 순응성을 비판하다 동족 사이에서는 일종의 내부 총질자로 반감을 사기도 했다. 아울러 아이히만의 체포와 이송 자체가 국제법 위반이라는 절차적 하자를 지니고 있었으니, 아렌트의 입장에서는 아이히만 재판 자체를 비판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을지 모른다.


일각에서는 아렌트가 재판을 일부만 방청하고 얻은 단편적인 인상에만 의거해 '악의 평범성' 개념을 도출했다는 점을 비판한다. 니체와 헤겔의 영역자로 유명한 유대계 철학자 월터 카우프만이 아렌트를 학자 아닌 언론인으로 분류한 다음, 인간의 선악 이중성이야 신조어 없이 톨스토이의 단편 "무도회 직후"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느냐고 꼬집은 것이 대표적이다.


톨스토이의 단편 속 화자는 무도회에서 어느 대령 부녀를 만나게 되는데, 딸과 함께 춤을 추며 자애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던 저 아버지가 무도회 직후 본업으로 돌아가서는 탈영병을 무자비하게 체벌하는 냉혹한 장교가 된 것을 보고 경악한다.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모순적 행보이지만, 사실 인간의 선악 이중성을 전제하면 충분히 이해할 만한 행보이기도 하다.


인간의 본성이 선한지 악한지를 둘러싼 논쟁은 고대부터 있었으며, 향후로도 쉽게 결론이 나오지는 않을 법하다. 다만 역사와 생활 모두에서 드러난 증거만 놓고 보면, 인간에게는 선악 이중성이 있어서 좋은 일과 나쁜 일을 모두 할 수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전적으로 선한 사람도 없고 전적으로 악한 사람도 없으며, 상황에 따라 달라질 뿐이라고 말이다.


히틀러도 누군가에게는 '아돌프 아저씨'였을 수 있고, 역사상의 다른 모든 독재자와 범죄자도 사랑하는 누군가가 있었을 것이다. 그날 넓은 재판정에 설치된 방탄 유리 상자 속에서 초라해 보인 아이히만도 다른 날에는 특유의 오만과 냉혹을 종종 드러냈다고 전하니, 이 모두를 전부 방청했다면 아렌트도 '악의 평범성'이라는 결론을 쉽게 내놓지 못했을지 모른다. 


어쩌면 아렌트의 결론은 인간의 선악 이중성을 외면하고픈 대중의 심리를 반영할 수도 있겠다. 나치의 홀로코스트가 전세계에 큰 충격을 준 까닭은 그 당시에 문명국으로 간주되던 독일에서 벌어진 종족 학살이었기 때문이다. 독일인을 그저 괴물이라고만 간주하기는 어려워 보이니, 결국 우두머리를 제외한 나머지는 무지한 바보들이었다는 해석이 나온 것은 아닐까.


실제로 '평범한' 독일인 대부분은 종전 이후 자신들의 무지함과 힘없음을 애써 강조하며 자기 합리화를 시도했고, 국가의 범죄에 대한 공동 책임이나 집단적 죄의식 같은 개념을 외면하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장 아메리 같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는 그렇지 않다고, 즉 평범한 독일인도 나치 동조자와 똑같이 악의적이고 적극적인 유대인 탄압에 임했다고 반박한다.


르완다와 유고슬라비아에서 벌어진 유사한 종족 학살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지만, 홀로코스트 역시 특정 소수 민족 집단에 대한 유서 깊고 보편적인 반감에 결국 불이 붙은 경우였다. 그런 인종차별적 편견이라면 나치 동조자뿐 아니라 평범한 독일인 역시 공유하고 있었을 터이니, 홀로코스트를 계기로 반감을 표출했던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겠다.


그렇다 해서 독일인을 무작정 악마화할 수는 없다. 대니얼 골드하겐의 저서 <히틀러의 적극 동조자들>을 둘러싼 논란에서 나타났듯이, '악의 평범성'이건 '평범성의 악'이건 간에 입증은 쉽지 않고, 왜곡과 과장의 가능성이 항상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로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히틀러의 적극 동조자들> 사이에서 최대한 균형을 찾아 보아야 하지 않을까.


나치 독일에서는 히틀러에 찬성한 사람도 있었지만 반대한 사람도 분명히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찬성자가 더 많다 보니 자국에는 물론이고 외국에도 큰 불행을 자아냈는데, 그 과정이 선거라는 합법적 절차였음을 감안하면 독일인으로서도 '집단적 죄의식'은 마땅한 도리가 아닐까. 이웃에 대한 민폐라는 점에서는 지금의 이스라엘인이나 미국인도 마찬가지이겠고.


'악의 평범성' 개념은 사실상 책임 전가이기 때문에, 아이히만의 경우에서처럼 범죄를 축소하고 범죄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데에 악용되기가 편리하다. 단적으로 아직 끝나지 않은 탄핵 심판에서 대통령이며 장관이며 군인들의 모습도 한 순간만 떼어 보면 '악의 평범성'의 사례로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 모든 일을 '알고도 저질렀다'는 것이 진실일 테니까.


현재 탄핵 심판을 둘러싸고 나타난 대통령 지지자들의 망동 역시 적극적 동조일 뿐, 단순히 '악의 평범성' 같은 개념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시민 의식이라는 겉치레마저 내던지고 '그 피를 나와 내 후손에게 돌려도 좋다'고 외치는 모습을 보면 유아적 퇴행이 아닐 수 없으니, 과연 탄핵이 끝나더라도 성숙한 시민 의식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벌써부터 의문이다.


그렇게 보자면 '악의 평범성' 개념을 수용하는 것도 사회의 정상화를 위해서는 훌륭한 전략일 수 있겠다. 독일과 일본과 중국 모두 학살과 광기는 지도자의 잘못이며 국민은 몰랐다고 시치미를 떼고 나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상 회복에 전념할 수 있었으니까. 어찌 보면 매번 과거사 청산을 외치면서도 헛수고인 우리보다 그들이 한 수 위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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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 제주도 노인네가 보낸 한라봉인지 천혜향인지, 하여튼 왕귤 한 박스를 바깥양반이 받아 왔다기에 큰길까지 나가서 카트에 싣고 달달대며 걸어오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가 소리를 지른다. 뒤를 돌아보니 웬 할아버지 한 분이 바닥에 떨어진 뭔가를 가리키며 우리를 쳐다보고, 그제야 바깥양반이 놀라서 달려가 주워 오면서 노인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건넨다.


과일 상자를 실은 김에 바깥양반이 들고 있던 에코백 가운데 하나도 실어서 끌고 가던 중이었는데, 카트가 흔들리다 보니 옷가지를 넣어 둔 비닐 봉지 가운데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는데도 우리가 모르고 그냥 가니까, 마침 뒤에 따라오던 노인이 그걸 보고 알려주려고 소리를 지른 모양이다. 젊은이라면 주워서 따라왔겠지만, 그게 어려우니 소리를 지른 게 아닐까.


비닐봉지를 에코백에 도로 넣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게 입구를 여미고, 카트를 정리해서 다시 끌고 가다 보니, 방금 전의 그 노인이 저만치 앞에서 휘청휘청 걸어간다. 좁은 길이다 보니 쌩하니 앞질러 가기도 민망해서 한동안 천천히 따라가는데, 등산복에 운동화 차림이나 어디 운동이라도 다녀오시는 모양이지만, 연세가 많다 보니 걸음도 가볍진 않아 보인다.


문득 왕귤이나 몇 개 드릴까 싶어 바깥양반에게 물어보니 선뜻 그러자고 한다. 두 개 꺼내서 바깥양반에게 건네주었더니, 어느 정도 멀어진 노인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잡아, 마침 길이 넓어진 곳에서 과일을 건네드린다. 노인도 처음에는 안 받겠다며 손사래친다. 고마워서 드리는 거랬더니만 그럼 하나만 받겠다는 걸 실랑이 끝에 다 드리고 인사하며 헤어졌다.


하마터면 잃어버릴 뻔했던 물건을 덕분에 찾게 되었으니 작게나마 고마움의 표시를 하려는 것인데 뭘 그렇게 한사코 거절하시나 싶었는데, 기억을 더듬어 보니 나귀님도 예전에 한 번은 근처에서 어느 초딩이 하는 비슷한 행동을 한사코 거절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바깥양반과 함께 세탁소에 가려고 또 다른 골목을 지나가는데 어린애들 여러 명이 모여 놀고 있었다.


그중 제일 큰 여자아이를 여럿이 에워싸고 뭘 들여다보는 듯하더니, 우리가 지나가는 걸 보고 초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큰애가 선뜻 다가와서 뭔가를 내밀며 도와달라고 한다. 가만 보니 애들 먹는 사탕인지 비타민인지를 담은 플라스틱 통인데, 너무 꽉 닫혔는지 아니면 아이들이 함부로 못 열게 하는 무슨 장치가 되어 있었는지 열지 못해서 애를 먹었던 모양이다.


바깥양반이 받아들고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손쉽게 열어 건네주자 아이들이 환호하는데, 맹랑한 꼬마가 '감사의 의미로 드리는 것'이라며 별사탕처럼 보이는 알갱이 두 개를 꺼내 바깥양반에게 건넨다. 처음에는 황당해 하면서 괜찮다고 했지만, '도와주셨으니까 보답을 해야 한다'며 의외로 의젓한 여자아이의 태도가 재미있었는지 결국 바깥양반도 받아 먹었다.


곧이어 꼬맹이가 사탕을 손바닥에 얹어서 나한테도 다가오기에, '이 나이에 뭔 애들 사탕까지 빼앗아 먹겠나' 싶어서 손사래치고 뒤돌아 걸어오는데, 꼭 받아야 한다며 졸졸 따라오기까지 하니 어쩔 수 없다 싶어서 결국 두 알 받아먹고 인사하며 헤어졌다. 원체 작고 밍밍했던 사탕 맛은 금세 잊어버렸지만, 우리 부부에게는 재미있는 사건으로 오래 기억에 남았다.


이후에도 종종 세탁소를 오가면서 그 꼬마를 만났던 장소에 도착하면 주위를 한 번 두리번거리게 된 것도 그래서이고, 그게 벌써 십수 년 전이니 지금은 그 맹랑한 녀석도 어엿한 아가씨가 (또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는 '버진'이)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어느새 그 지역도 재개발 구역으로 묶여서 골목은 막히고 주택은 헐려서 흔적도 찾아볼 수 없으니 뭔가 아쉽다.


사실 그냥 고맙다는 말 한 마디로 끝날 수도 있었던 일에 굳이 왕귤이라는 선물까지 동원한 까닭도 역시나 재미 때문이었다. 뭐랄까, 가끔은 이런 일도 있어야 재미있지 싶은 생각이라고나 할까. 별 것 아닌 사탕 두 개가 우리 부부에게는 잊지 못할 좋은 추억으로 자리잡은 것처럼, 역시나 별 것 아닌 왕귤 두 개가 저 노인에게도 비슷한 추억이 되었으면 싶어서.


물론 그렇다고 심성이 곱거나 순진무구한 나귀님까지는 아니다 보니, 딱 여기까지 생각하는 순간 은근 걱정이 생긴 것도 사실이었다. 평소에 하지 않던 좋은 일을 했으니, 혹시 셜리 잭슨의 단편 소설에서처럼 ("평범한 날에 땅콩을 들고"라는 작품인데 <제비뽑기>에는 없는 듯하다) 내일은 또 나쁜 일을 해서 상쇄 작용을 일으켜야 하나 싶은 의문이 생긴 까닭이다.


그 작품에서는 어느 화창한 날에 산책을 나간 신사가 처음 본 사람에게도 연이어 배려와 선행을 베풀고, 심지어 단지 잘 어울릴 듯하다는 이유로 생판 초면인 남녀를 중매하고 데이트 비용까지 건네준다. 이렇게 훈훈한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 남편을 맞이하는 부인이 오늘 하루 자기가 범한 악행들을 열거하더니, 내일은 다시 당신 차례라고 상기시킨다.


셜리 잭슨의 작품 속 부부가 하루씩 역할을 바꿔 가면서 소소한 선행과 악행을 거듭하는 것과 유사하게, 김용의 무협 소설에는 사람을 함부로 해치는 악한 아내와 그렇게 다친 사람을 도로 살려내는 의사 남편도 등장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십중팔구 인간의 마음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 양면적이고 모순적인 부분이 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로 만든 인물이 아닐까.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나귀님이 사소한 선행으로 좋아진 기분을 직접 악행으로 상쇄시킬 필요까지는 없었다. 집에 다 왔을 즈음 옆집 아가씨가 쓰레기 담은 비닐봉지를 들고 나와 우리집 쪽에 갖다 놓더니, 이쪽을 흘끗 쳐다보고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기껏 훈훈해진 마음이 불과 십 분만에 싸늘히 식어버렸으니, 세상의 선과 악은 자동으로 균형을 맞추나 싶다.


아파트 사는 사람들은 층간 소음 때문에 윗집과 갈등이라지만, 단독주택에 살면 쓰레기 문제로 옆집과 갈등을 빚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기 집 앞에 놓으면 되는데 굳이 남의 집 앞에 쓰레기 봉지를 갖다 놓는 것부터 시작해서, 담배꽁초와 음식물 쓰레기는 물론이고 각종 폐기물까지도 무단 투기하는 경우가 빈번하니, 정말 헉핀의 말마따나 인간이 싫어지게 된다.


다음날 내다 보니 '폐기물 쓰레기는 전용 봉지에 담아서 내놓지 않으면 수거 불가'라는 환경미화원의 경고문이 비닐봉지에 적혀 있었다. 그래도 이웃끼리 얼굴 붉히는 일은 없어야지 하는 생각에 (물론 이미 몇 번 싸워 보았지만 실효가 없었던 것도 증명되었으므로) 꾹꾹 참고 있었는데, 이번만큼은 오랜만에 또 찾아가서 따져야 하려나 싶어서 심란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나중에는 비닐봉지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결국 수거되었는지, 아니면 배출자가 도로 가져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옆집 아가씨가 뒤늦게 잘못을 깨닫고 쓰레기를 도로 가져가서 제대로 된 절차를 거쳐 다시 배출했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야만 탄핵 심판의 각종 궤변에 지친 나귀님도 인간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다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 우리나라에 번역된 셜리 잭슨의 작품에 관해서는 10년 전쯤에 한 번 정리한 바 있다. 그중 "제비뽑기"와 "소금기둥"은 새로 간행된 단편집 <제비뽑기>에 수록되었지만, 다음 몇 가지 작품은 아직 새로운 번역이 나오지 않은 듯해서 참고 삼아 적어본다.


A.  <현대미국문학전집>(전6권, 시사영어사, 1971) IV권 수록 작품:


(1) "버스"(The Bus)

(2) "어느 날 땅콩을 가지고"(One Ordinary Day, With Peanuts, 1955)

(3) "생일 파아티"(Birthday Party, 1963)

(4) "아름다운 집"(The Lovely House)


B. <에드가 상 수상 작품집 II>(정태원 편역, 명지사, 1993 2쇄) 수록 작품:


(5) "악의 가능성(The Possibility of Evil,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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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의 연구>가 재간행된 모양이다. 여전히 최승자가 번역자로 나와 있기는 한데, 오랜 투병 이력을 감안해 보면 이번에 추가된 공역자가 예전 번역문을 대조하고 수정하는 정도의 손질만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예이츠의 말과 아즈텍 신 설명을 마치 한 문단인 것마냥 오기했던 서두의 인용문 두 가지를 깔끔하게 구분한 것이 그 한 가지 예로 보이고.


원제는 "자살의 연구"가 아니라 "잔인한 신"인데, 방금 언급한 예이츠의 말에서 가져온 것이다. 서두에는 "우리들 이후의 잔인한 신"으로 나왔는데, 본문에 인용된 인용문 전체의 맥락상 "우리 다음에는 잔인한 신이 나올 것이다" 쯤이 적절해 보인다. 일어판에서는 이를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라고 번역해서, 훗날 하기오 모토가 만화 제목으로 차용한 바 있다.


저자가 지인 실비아 플라스의 자살에 충격을 받아서 저술했다는 설명이 서문에 나와 있는데, 자살 그 자체보다는 20세기 예술이며 예술가와의 관계라는 측면을 주로 고찰하는 내용이니, 어쩌면 번역서 제목에 혹해서 집어들었다가 의외로 실망한 사람도 없지 않을 법하다. 하기오 모토의 만화와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나귀님이 예전에 길게 설명한 글을 올렸었다.


이 책의 원제를 제공한 예이츠의 발언은 알프레드 자리의 부조리극 <위뷔 왕>을 보고 나서의 충격을 토로한 일기의 한 대목이다. 일반적인 풍자와 파격을 넘어서서 광기와 무의미로까지 치닫는 연극의 내용에다, 이에 대해 비난을 퍼붓는 관객의 반응을 지켜보며, 과연 이 다음에는 뭐가 더 나올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 여러 모로 착잡한 심정을 표현한 듯 보인다.


<위뷔 왕>은 번역본이 2종(동문선과 연극과인간/지만지)이나 있지만, 지난번에 읽은 기억으로는 어느 것도 번역과 주석 모두에서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었다. 천박하고 막무가내에 잔인무도한 성격인 위뷔 부부가 용병을 동원해 반란을 일으켜서 왕국을 장악하더니, 머지않아 외국 군대와 전쟁을 벌여 패배하자 최대한 많은 재물을 챙겨 도주한다는 줄거리다. 


지난번에는 아무리 봐도 영 모르겠더니, 지금 보니 재임 내내 갖가지 논란으로 갈등만 빚다가 비상 계엄으로 자폭해서 탄핵 심판에 회부된 현직 대통령 부부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그나저나 희곡의 결말과는 달리 부디 죗값을 치르길 바랐는데, 날짜 계산 착오로 갑자기 석방이라니, 이 무슨 부조리극인가. 어쩐지 연극보다 더 황당하고 잔혹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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