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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재즈 음반을 조금씩 구입하면서 재즈에 관한 책도 눈에 띄는 대로 구입하게 되었다. 스터즈 터클의 <재즈, 매혹과 열정의 연대기>(이매진, 2006)는 얼마 전에야 헌책방에서 우연히 마주친 책이다. 이런 책이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나와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저자의 이름이 어딘가 낯익어 보였다. 약력을 살펴보니 라디오 인터뷰 프로그램을 반세기 가까이 진행한 유명한 저널리스트라고 했다. 그리고 <재즈>는 그가 1957년에 처음 펴낸 첫 번째 책으로, 루이 암스트롱에서 존 콜트레인에 이르는 재즈의 거장 13명의 약전이 수록되어 있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책을 구입해서 읽어보니, 내가 기대했던 것만큼 자세하거나 흥미로운 음악 논픽션까지는 아니었다. 오히려 좀 피상적인 내용에 불과했다고나 할까. 저널리스트라고 해서 기대했던 날카로운 통찰이나 흥미로운 일화 같은 것은 사실상 찾을 수 없었다. 어쩌면 너무 오래 전에 나온 책인 까닭도 있을 것이고, 또 어쩌면 이 책에 나온 내용을 이후의 책들이 주로 참고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신선감이 떨어졌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이 책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대목은,  이 책의 뒷날개에 붙어 있는 다음과 같은 공지였다. "이매진은 스터즈 터클의 선집을 계속 출간할 예정입니다."

 

그제야 다시 한 번 의문이 떠올랐다. "내가 스터즈 터클이라는 이름을 도대체 어디서 들었더라?" 알라딘에서 저자의 이름을 검색해 보니 이매진에서는 <재즈> 이후에 스터즈 터클의 책이 두 권 더 나와 있었다. 하나는 <일>(2007)이고, 또 하나는 <희망은 사라지지 않는다>(2008)였다. 그리고 검색 결과에서는 약간 의외의 한 가지 책이 있었는데, 바로 마샬 버만의 <맑스주의의 향연>(이후, 2001)이었다. 이건 <현대성의 경험: 단단한 것들은 공기 속에 녹아 사라진다>의 저자가 이런저런 기회에 쓴 서평과 에세이를 모은 책인데, 이전에 그중 몇 챕터를 무척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났다.

 

마샬 버만의 책에서 제4장은 "스터즈 터클 - 벽화 속에 살다"라는 제목이며, 우리나라에는 <일>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1974년 작품에 대한 서평(역시 같은 해에 발표된)이었다. 이 챕터를 읽고 보니 미국에서 스터즈 터클이라는 언론인의 위상이 어떤지를 알 수 있었다. 그는 구술사의 대가로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만난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증언을 한 권의 책으로 녹여내는 작가이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책 중에서는 <일>과 <희망>이 그런 경우이며, 그 외에도 대공황을 소재로 한 구술사가 유명하다고 했다. 어쩌면 내가 "스터즈 터클"의 이름을 기억하게 된 것도 예전에 읽은 마샬 버만 때문인지 몰랐다.

 

얼마 뒤에 문득 마루에 여기저기 쌓아둔 책더미 (언젠가 읽어보려고 책장에서 꺼내 두었다가 차일피일 미루는 통에 그냥 방치된 것들) 중에서 판테온 출판사의 대표를 역임한 앙드레 쉬프랭의 책이 눈에 띄었다. 아마 다른 이유로 꺼내 놓았던 책인 모양인데, 어째서인지 문득 이 책에 "스터즈 터클"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인문/사회 부문의 책을 많이 낸 출판사의 대표이다 보니, 어쩌면 그와도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색인을 찾아보니 정말로 그의 이름이 있었다! 알고 보니 쉬프랭은 터클에게 구술사 시리즈를 처음 제안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스터즈 터클(이 책에서는 "스터스 테르켈"로 표기되었다)과 일하던 기간을 쉬프랭은 "판테온에서 저자와 내가 가장 오래, 그리고 가장 친밀하게 보낼 수 있었던 기간"(83쪽)이라고 회고한다. 쉬프랭과 터클이 처음으로 호흡을 맞춰 펴낸 책은 <디비전 거리>였고, 이후 <어려운 시절>, <좋은 전쟁>, <일> 등이 나와서 계속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한다. 특히 <일>은 1백만 부 이상이 판매되고 일부 학교에서는 교재로 사용되었다는 등의 일화가 전해진다. 이쯤 되면 실물을 한 번 살펴보아야 하겠다 싶어서, 그의 대표작 <일>을 주문했다. 신국판 크기에 무려 880쪽이나 되어서 꽉 찬 느낌을 주는 책이다.


"누구나 하고 싶어하지만, 모두들 하기 싫어하고, 아무나 하지 못하는"이라는 부제는 아마도 한국어판 출판사에서 지어낸 것이 아닐까 싶은데, 가만 생각해 보면 현대 사회의 "일"에 대한 상당히 그럴듯한 정의 같기도 하다. 이 책이 구술사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막상 책을 펼쳐보니 그야말로 압도당하는 느낌이다. 농부와 광부, 경찰관과 매춘부, 청소부와 운동선수, 무덤 파는 인부와 성직자, 그리고 기타 전문직을 포함한 133명의 독백이 길게, 또는 짧게 수록되어 있는데, 어느 대목이라도 아무렇게나 골라 읽다 보면 어느새 상대방의 말에 푹 빠져 버리게 말 정도로 흡인력이 강하다. 


무엇보다도 주목할 만한 것은 저자의 서문이다. "일"에 관한 책이다 보니 노동의 거룩함이나 땀의 소중함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을 것 같은데, 천만의 말씀이다. 오히려 서문은 다음과 같이 정신 번쩍 들게 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 '일'을 주제로 한 이 책은 본질적으로 '폭력'에 대한 책이다. 여기에는 신체에 대한 폭력뿐 아니라 영혼에 대한 폭력도 포함된다. 이 책은 상처와 사고, 말다툼과 주먹다짐, 신경쇠약과 화풀이에 대한 책이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일상의 모멸감을 다루고 있다. 상처 입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 대부분은 이날까지 살아남았다는 것만 해도 대단한 성공이다."


물론 이 책에 나온 모든 사람이 일을 저주의 일종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맞지 않는 옷을 걸친 것처럼 불편해 하는 사람도 상당수이다. 애덤 코핸의 추천사에 수록된 다음과 같은 문장은 그 이유를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내준다. "<일>의 구술사는 먼 과거에서 보내온 편지이다. 이 편지에는 아쉬움이 담겨 있다. 1970년대 초는 구경제가 쇠퇴하고 현대적인 경영 기법과 컴퓨터 덕분에 미국의 일터가 바뀌기 시작하던 때였다. 지난 30년간 생산성은 치솟아 올랐으나 일의 만족도는 급락했다. <일>을 읽으면 과연 일터에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 평론가 로저 에버트도 자서전의 한 챕터를 "스터즈"에게 바치고 있는데,[*] 그의 말은 이 저널리스트의 본질을 명쾌하게 설명해 준다. "터켈이 사람들에게서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끌어내는 비결 가운데 하나는, '지금 옆자리에 앉은 이 사람과는 유익하고 긴 대화가 가능하겠다'는 인상을 상대방에게 주기 때문이다. 그의 저서 중 한 권을 골라 보라. 그러면 당신은 이제 그의 옆자리에 앉은 셈이 된다. 당신을 책 읽기를 멈출 수 없을 것이다."(586쪽)[**] 에버트의 설명대로라면 스터즈 터클은 어마어마한 매력의 소유자인 셈이다. 누구하고나 친구가 되고, 누구에게서나 솔직한 대화를 이끌어내는 힘을 보유한.


스터즈 터클은 아주 독창적인 작가이거나 뛰어난 문장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한 특이한 작가였다. "당신이 그를 만났다면, 그는 당신의 친구가 됐을 것이다. 그런 일이 그가 진행하는 라디오 쇼와 베스트셀러 20권을 위해 인터뷰했던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일어났다. 그는 목소리를 갖지 못했던 동시대 사람들의 구술사를 글로 옮겼다. 대화를 할 때 그는 그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거명할 수 있었다." 에버트의 말에 따르면, 터클은 생전에 다음과 같은 묘비명을 만들어 두었다고 한다. "호기심은 이 고양이를 죽이지 않았다(Curiosity didn't kill this cat)."


스터즈 터클에 대한 궁금증이 풀리고 나서도 마샬 버먼의 책을 이리저리 뒤적여 보았다. 상당히 글을 잘 쓰는 사람이고, 그것도 위트 있게 쓰는 사람이다. 이 선집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그가 마르크스주의에 입문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 "혼란에 휘말리다: 맑스주의와 몇 가지 모험들"이다.(그리고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다음과 같은 경구다. "자본주의는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는 것이다. 공산주의는 그 역(逆)이다." 결국 공산주의도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 장에서 저자는 평생 세일즈맨으로 일하며 어렵게 살아간 자기 아버지를 회고한다.

 

이전에 분명히 읽었다가 또다시 까먹은 것이겠지만, 이 장에서 저자는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을 거듭해서 인용한다. 그 희곡은 이전에도 몇 번인가 읽은 적이 있었지만, 이번 기회에 다시 한 번 읽기 위해서 책을 꺼내 보았다. 내가 갖고 있는 판본은 <세계의 현대 희곡>(열음사, 1990)에 수록된 오화섭의 번역인데, 이번에 다시 읽어보니 예전과는 달리 오래 된 말투 같은 것이 약간 거슬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 책은 에드워드 올비의 <동물원 이야기>와 샘 셰퍼드의 <매장된 아이> 등이 함께 들어 있기 때문에, 절대로 버릴 수가 없는 소중한 판본이기도 하다.

 

저자가 <세일즈맨의 죽음>의 주인공의 모습에서 자기 아버지를 떠올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 희곡에 묘사된 주인공은 실제로도 우리 대부분이 인식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닮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이 작품에서 우리 아버지의 모습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한때는 최고의 세일즈맨으로 명성을 날렸지만, 지금은 늙고 무능하다고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노인. 한때는 최고의 미식축구 유망주인 자랑스러운 아들을 두었지만, 지금은 실업자에 반항아인 말썽꾸러기 아들을 둔 아버지. 하지만 그 아들에게도 할 말은 있었고, 아버지에게도 부끄러운 과거가 있었다는 것이 이 희곡의 서글픈 줄거리이다.

 

윌리 로먼의 모습이야말로 아버지의 "전형"을 묘사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닌데, 평생 책상 앞에 앉아있는 책상물림인 나로선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고마움과 미안함과 낯설음과 짜증을 비롯한 여러 가지 모순되는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런 감정을 가장 가깝게 묘사한 것이 마이클 더다의 <오픈 북>에 나타난 저자의 한 마디이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아마도 자기 아버지가 일하던 철공소인지 공장인지에서 아버지 대신 며칠 일하면서, 그 노동의 강도에 깜짝 놀랐다는 이야기였던 것 같다. 자기 아버지가 이렇게 고생한 덕분에 자기는 책을 읽을 수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몸둘 바를 몰랐다던가.


나 같은 책상물림이 하는 일을 지칭하는 용어가 "정신 노동"인데, 사실 이건 신체 노동에 감히 비할 바가 아니다. 아무리 머리 쓰는 것이 힘들고 스트레스 쌓인다 한들, 팔다리가 욱신거리고 온 몸이 땀에 젖는 신체 노동에 비하자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닐 테니까. 그래서인지 가끔은 책상머리에만 앉아 있는 내가 정말로 "일"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할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런 의문을 품은 사람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빌어먹은 세상은 엿 먹으라고 하십시오. 이 나라도 엿 먹으라고 하십시오." 스터즈 터클의 저서 <일>의 서문은 브루클린에서 일하던 한 소방관의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소방수는, 소방수는 생산적인 일을 한다구요. 불을 끄니까요. 품 안에 아기를 안고 불 속을 빠져나오는 소방수를 보셨을 겁니다. 죽어 가는 사람에게 인공호흡을 실시하는 모습도 보셨을 테죠. 이걸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이게 현실이니까요. 저도 그렇게 되고 싶습니다. 은행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돈이란 종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재하는 게 아니라고요. 아홉 시 출근에 다섯 시 퇴근? 엿 먹으라고 하십시오. 선생님이 보는 건 숫자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저는 뒤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불을 껐어. 누군가를 살렸다구.' 그건 이 세상에서 뭔가 보람 있는 일을 했다는 말이죠.



어쩌면 에릭 호퍼가 지식인이기 이전에 부두 노동자라는 신분을 끝까지 유지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인지 모르겠다. 그의 일기를 보면, 글을 쓰거나 강연을 통해서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이 그에겐 적지 않은 유혹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부두에서 며칠이나 일을 공치고 난 끝에 간신히 힘든 하역 작업을 며칠간 해서 번 돈보다는, 오히려 잡지에 글을 한 편 기고해서 얻은 고료가 더 많았다고 그는 고백한다. 아울러 신체 노동은 정신 노동을 방해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가 노동으로 인해 생각이 끊긴다며 아쉬움을 드러내는 대목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생각조차도 하기 어려우니, 집필이라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다. 


내가 에릭 호퍼를 읽으며 새삼 감탄하는 까닭은, 그가 이런 유혹에도 불구하고 지식인의 가면을 쓰고 세상을 쉽게 살아가는 방법을 결국 거부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는 끝까지 부두 노동자의 정체성을 갖고 있었으며, 이에 대해 자부심도 갖고 있었다. 아울러 그는 인간을 쉽게 낙관하지 않을 정도로 영리한 인물이며, 이는 아마도 그가 현실과 이론 양쪽에 발을 걸치고 있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책을 통해 바라본 인간은 뭔가 일관적이고 통일적이며 무모순한 존재인 것만 같다. 지식인이 종종 현실에 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인간에 대해서만큼은 이런저런 어마어마한 수사를 내놓는 것도 아마 그런 착각 때문이리라. 


하지만 호퍼의 주장은 희망을 이야기할 망정 미래를 낙관하지는 않고, 뭔가 잘못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놓치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호퍼에 대한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요인인지도 모른다. "노동자 출신의 철학자"라는 딱지만 놓고 보면 뭔가 혁명적이고 급진적인 이야기가 나와야 할 것 같은데, 사실은 오히려 냉소적이고 비관적이며 일면 보수적이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호퍼를 비난할 수 있을까? 직접 땀 흘리며 일해본 적 없는 지식인이 오히려 진보적인 사고방식을 지니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직접 땀 흘리며 일하는 노동자가 오히려 보수적인 사고방식을 지니게 되는 것이 이상하겠는가?


호퍼의 주장은 아주 세련되거나 탁월하지는 않다. 대부분은 독학을 통해 얻은 지식이고, 사유의 폭이나 깊이도 대단하지 않다. 그래도 그의 주장이 흥미로운 까닭은 여전히 현실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사람의 말이기 때문이다. 책에 담긴 이론을 통해 생각을 만들어내고 그 실제 사례에 해당하는 인간을 찾아 나서는 일반적인 지식인과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람, 즉 현실에서 인간을 접하며 생각을 만들어내고 그 실제 사례를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찾아 책을 뒤적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자료의 활용에서는 한계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인간에 대한 그의 통찰에서는 종종 빛나는 부분이 드러난다.


특히 에릭 호퍼의 자서전은 스터즈 터클의 책과 나란히 놓고 읽어볼 만한 또 다른 "구술사"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최근에 한꺼번에 간행된 세 권의 책 중에서는 저자가 일과 사색을 병행하던 시기의 일기인 <부두에서 일하며 사색하며>가 특히 좋다고 생각된다. 개인적으로는 <우리 시대를 살아가며>라는 책에 수록된 "자동화, 여가, 대중"이라는 글의 한 대목, 즉 호퍼가 일하던 샌프란시스코 부두에서 자동 하역 시스템이 처음 가동되던 때의 일화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평소 같으면 몇 사람이 직접 들어 날라야 했던 1톤짜리 신문용지 롤이 기계의 힘으로 척척 운반되는 모습을 지켜보며, 호퍼는 문득 이렇게 생각한다.



인간은 신과 접전을 벌이면서 이제 에덴동산의 문 앞까지 다시 치고 올라왔다. 여호와와 그의 천사들은 번쩍이는 칼을 들고 에덴의 요새에 잠복해 있고, 우리 인간들은 자동화 기계를 가지고 에덴동산의 문을 쾅쾅 두드린다. 바로 그곳, 여호와와 천사들이 보는 앞에서 우리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만 빵을 먹게 되리라'라는 여호와의 칙령이 무효임을 선포할 것이다. (58쪽)



호퍼의 생전에 "일"의 의미는 크게 바뀌었다. 이전까지는 인간의 힘과 땀을 요하던 노동이, 어느새 석유와 기계를 요하는 노동으로 바뀐 것이다. 이제는 인간의 일이 곧 노동이 아니라, 인간 대신 일하는 기계를 관리 감독하는 것이 노동이 되었다. 호퍼의 감탄 속에는 일면 불안이 엿보인다. 은행에서 돈을 세면서도 이건 뭔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전직한 소방수의 경우처럼, 호퍼도 어쩌면 기계의 힘을 빌린 일은 진정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기계의 도입과 더불어 인간은 일이 불필요한 에덴 동산의 지복으로 거슬러 올라갈 듯 기고만장해졌지만, 실제로는 호퍼의 사망으로부터 한 세기가 지나도록 그런 지상 천국은 도래하지 않았다. 


오히려 스터즈 터클이 지적한 것처럼, 우리가 하는 일은 비인격화된 것만큼이나 비인간화되었다. 어쩌면 우리가 일을 싫어하고 증오하게 된 것도 그래서는 아니었을까? 간단한 기계 조작만으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역설적으로 우리의 몸이 우리의 일과 접점을 잃어버림으로써 우리는 결국 일에서 의미를 상실하게 된 것은 아닐까? 이쯤 되면 "얼굴에 땀을 흘려야만 빵을 먹게 되리라"던 하느님의 명령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일을 통해 흘려야 하는 땀을 헬스클럽에서 인위적으로 흘리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은 우리가 진정한 일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반증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 그런가 하면 에드워드 머로의 <내가 믿는 이것>의 리메이크에 해당하는 <라디오 쇼>(세종서적, 2009)의 서문도 스터즈 터클의 글이다. 작정하고 찾아보면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짬짬이 번역된 그의 글이나, 또는 그에 관한 글을 더 찾아볼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 번역서의 해당 구절에는 오역이 있어서 새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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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오 모토라는 작가에 주목하게 된 것은 <11인이 있다!>라는 단편집 때문이다. 표지화만 봤을 때에는 어쩐지 주인공 가운데 타다와 프롤 두 사람의 모습만 주목되어서, 대략 "공포의 여대생 기숙사" 같은 줄거리는 아닐까 지레짐작 했었는데, 막상 책을 펼쳐보니 의외로 SF 순정만화여서 깜짝 놀랐고, 읽고 보니 상당히 신선하고도 흥미로운 줄거리라서 다시 한 번 놀랐다. 곧바로 하기오 모토의 다른 작품을 찾아 보았더니 <방문자>와 <토마의 심장>이라는 작품이 있어서 곧바로 구입해 읽어보았다. 아쉽게도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는 작품은 이미 절판되어서 결국 도서대여점에서 빌려볼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상당히 우울한 내용이었다. 야오이 계열의 만화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줄거리 자체는 상당히 충격적이고 불편한 데가 있었으니까. 미국 소년 제레미는 어머니 산드라가 영국 출신의 부유한 사업가인 그레그와 재혼한다는 사실을 알게 기뻐한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레그는 산드라보다 오히려 제레미에게 흑심을 품고 있었다. 제레미는 그레그의 손길을 거부하지만, 이에 분격한 그레그가 결혼을 취소하자, 평소 심약한 성품이었던 산드라가 절망한 나머지 자살을 기도한다. 어머니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간주하던 제레미는 어쩔 수 없이 그레그에게 몸을 허락하는 대가로 산드라의 재혼을 성사시킨다. 


이후 영국으로 건너간 제레미는 점점 더 가혹하고 변태적으로 변하는 그레그의 성적 학대에서 벗어나려 고민하다가, 급기야 승용차의 브레이크를 고장 내서 그레그가 빗길에 교통사고를 일으켜 치명상을 입게 만든다. 하지만 그 와중에 산드라까지도 사망하자 제레미는 큰 충격을 받고 밤마다 그레그가 찾아오는 꿈을 꾸며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한편 제레미의 의붓형 이안은 부친의 사망에 뭔가 흑막이 있다는 생각에 조사를 거듭하다가 제레미가 진범이라는 심증을 굳히게 된다. 이안의 다그침에 제레미는 그레그와의 관계를 설명하지만, 이안은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그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제레미가 미국으로 돌아간 이후에 이안은 우연히 아버지의 서재에서 제레미를 학대한 증거가 담긴 고문 도구며 사진을 보게 되고 충격을 받는다. 이안은 사죄하러 미국에 연락을 취하지만, 제레미는 이미 거리에서 몸을 팔며 마약에 의존하는 처참한 신세로 추락해 있었다. 이안은 제레미를 구출해 영국으로 돌아오지만, 죄책감과 모멸감에서 비롯된 제레미의 자기파괴적인 행동은 그칠 줄 모른다. 그 과정에서 이안은 제레미에게 증오와 연민의 모순된 감정을 동시에 느끼면서, 이상하게도 동성이며 근친(맞나?)인 그에게 끌리게 되어서 육체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각자의 마음에 자리잡은 죄책감을 떨치기 위해 노력한다.


어딘가 좀 무리한 줄거리는 아닐까 싶은데, 사실 주인공을 '제레미'가 아니라 '제인'으로 바꿔놓기만 해도 아주 드문 일은 아닐 것도 같다. 가령 의부에게 강간당하는 아들의 이야기는 의외라고 할 수 있어도, 의부에게 강간당하는 딸의 이야기는 오히려 일반적일 테니까.(그게 '정상'이란 건 아니고, 다만 더 '빈번'하다는 뜻). 이성간의 성폭행이 아니라 동성간의 성폭행을 묘사한 것이 의외로 충격을 완화시킨다는 점은 적잖이 아이러니컬한데, 어쩌면 야오이 장르를 여성 작가들이 선호하는 이유도 이런 충격 완화 효과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여자 강간 장면 묘사보다는 남자 강간 장면 묘사가 더 편하기(?) 때문이랄까.


내가 읽은 애장판은 일반 단행본보다 더 두꺼운 편이어서, 그걸로 모두 10권이나 되다 보니 상당한 분량이다. 대략 1-5권은 제레미의 범행과 이안의 진실 확인, 6-10권은 두 사람이 각자의 죄의식과 서로에 대한 감정을 추스리는 과정을 보여준다. 전반부의 팽팽한 줄거리에 비해 후반부는 적잖이 산만한 느낌이 드는데, 그래도 작품 전체로 보자면 범죄와 정화의 과정이 꽤나 섬세하게 그려졌다. 이야기에 대해 거부감을 지닌 사람이라도, 그림에 대해서만큼은 아무런 불평도 늘어놓을 수 없을 것이다. 특히 후반부는 초현실주의 느낌의 그림으로 장식된 기나긴 엑소시즘이며, 그리스 비극을 보는 듯한 느낌도 준다.


이 작품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제목이다. 책을 읽기 전부터 상당히 인상적인 제목이다 싶었는데, 본문에서 제레미의 친구들 가운데 한 명의 입을 통해서 그 출전이 무려 W. B. 예이츠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또 다른 친구가 "그런 제목의 시를 쓴 거야?" 하고 묻자, 예이츠를 거론했던 친구가 곧바로 "아니, 다다이즘 어쩌구에서 한 말일걸" 하고 대답한다. 그런데 이 책의 앞에 나와 있는 원제를 보면 After us the Savage God 이다. Savage God 은 "잔혹한 신"으로도 번역이 가능할 것 같은데, after us 를 "지배한다"로 번역할 수 있는지 하는 의문이 문득 생긴다. 어째서일까?


궁금한 생각에 인터넷을 뒤지다 보니, 마침 영문 위키피디아의 하기오 모토 항목에서 한 가지 의외의 단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거기서는 이 만화의 제목을 A Cruel God Reigns 라고 직역해 두었는데, 그 제목은 예이츠가 아니라 다른 책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나와 있었던 것이다. 바로 알프레드 알바레즈가 쓴 <잔인한 신: 자살의 연구>(Savage God: A Study of Suicide)라는 책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그 부제를 직역한 <자살의 연구>(최승자 옮김, 청하, 1982)라는 제목으로 나와 있다. 그런데 이 책을 정말 오랜만에 책장에서 다시 꺼내 넘겨 보니, 예이츠가 했다는 그 말이 서문 앞에 다음과 같은 인용문으로 등장한다.



우리들 이후의 잔인한 신

예이츠



테즈카틀리포카 신은 진짜 신으로 여겨졌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으며 하늘이든 지상이든 사자들이 있는 곳이든 그 어디로나 들어갈 수 있었다. 그가 지상에 있을 때에는 사람들을 충동질시켜 싸우게 만들고 적의와 불화를 만들어내고 수없는 고뇌와 불안을 야기시켰다고 했다. 그는 사람들을 서로 적대시켜 전쟁을 일으켰고, 그리하여 그 이유 때문에 그는 '쌍방의 적'이라 불렸다.


그만이 세상이 어떻게 다스려지는가를 알았으며, 그만이 번영과 부를 갖다 주고, 그리고서는 그것들을 마음대로 앗아갔다. 그는 부와 번영과 명성과 용기와 지배력과 위엄과 명예를 주고, 그리하여 자신이 뜻한 바대로 그것들을 도로 앗아갔다. 이 때문에 그를 두려워하며 숭상했으니, 흥망성쇠가 그의 수중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 사하군, <누에바 에스파냐의 풍물사>



여기서 "우리들 이후의 잔인한 신"이 바로 After us the Savage God 의 번역이다. 청하 판본에서는 마치 예이츠가 그런 제목 아래에 베르나디도 데 사하군(남아메리카의 신화와 전설을 기록해서 후세에 전한 에스파냐 출신의 수도사)의 책을 인용한 것 같은 형국이다. 하지만 구글에서 원문 확인을 해 보니,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인용문이다. 즉 예이츠가 "우리들 이후의 잔인한 신"이라는 구절을 제목으로 삼아 사하군을 인용한 것이 아니라, 알바레즈가 자기 책의 서두에 예이츠와 사하군의 말을 나란히 인용한 셈이다. 따라서 위의 인용문은 아래와 같이 배치되어야 정확할 것이다.



 

우리들 이후의 잔인한 신

-- 예이츠



테즈카틀리포카 신은 진짜 신으로 여겨졌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으며 하늘이든 지상이든 사자들이 있는 곳이든 그 어디로나 들어갈 수 있었다. 그가 지상에 있을 때에는 사람들을 충동질시켜 싸우게 만들고 적의와 불화를 만들어내고 수없는 고뇌와 불안을 야기시켰다고 했다. 그는 사람들을 서로 적대시켜 전쟁을 일으켰고, 그리하여 그 이유 때문에 그는 '쌍방의 적'이라 불렸다.


그만이 세상이 어떻게 다스려지는가를 알았으며, 그만이 번영과 부를 갖다 주고, 그리고서는 그것들을 마음대로 앗아갔다. 그는 부와 번영과 명성과 용기와 지배력과 위엄과 명예를 주고, 그리하여 자신이 뜻한 바대로 그것들을 도로 앗아갔다. 이 때문에 그를 두려워하며 숭상했으니, 흥망성쇠가 그의 수중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 사하군, <누에바 에스파냐의 풍물사>

 



예이츠가 한 말의 본래 맥락을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을 더 검색해 보니, 그가 1896년에 파리에서 알프레드 자리의 희곡 <위뷔 왕>의 개막 공연에 참석했다가, 작품의 파격적이고 논란적인 내용에 반발하는 관객들이 벌인 소동을 현장에서 목격하고 난 뒤에 한 말이라고 했다.(일부에서는 그가 이 말을 관람 직후에 기록한 것이 아니라, 훨씬 더 나중에 자서전을 쓰는 과정에서 기록한 것이라고, 따라서 이 말이 <위뷔 왕>을 관람한 바로 그날의 충격에 대한 솔직한 감상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알고 보니 그 말이 포함된 원래의 구절이 <자살의 연구>에도 다음과 같이 길게 인용되어 있었다.



스테판 말라르메 이후, 폴 발레리 이후, 귀스타브 모로 이후, 퓌비 드 사반느 이후, 우리의 모든 미묘한 색채와 간결한 리듬들 이후, 그리고 내 자신의 시 이후, 콘더의 그 희미한 색조의 배합 이후, 더 이상 무엇이 가능하겠는가? 우리들 이후엔 잔인한 신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216쪽)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잔인한 신"은 칭찬일까, 아니면 비난일까? 아무래도 구체적인 맥락을 확인하려면 그 원래 출전이라는 예이츠의 자서전을 확인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존에서 원문 검색을 해 보니, 문제의 구절은 "베일의 떨림, 제4부: 비극적인 세대"라는 제목이 달린 장의 맨 마지막 단락에 등장했다.(구체적인 맥락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연극 분야에 한정해서만이라도 예이츠의 예술관, 또는 연극 이론이나 비평을 자세히 알아봐야 할 것 같은데, 아직 마땅한 참고도서를 찾지는 못했다. 물론 예이츠가 쓴 단막극집은 번역본이 몇 가지 나와 있는 것으로 알지만).



나는 테아트르 드 뢰브르에서 있었던 알프레드 자리의 <위뷔 왕>의 첫 공연을 보러 갔다. 함께 간 라이머는 자전거 타는 복장을 한 소녀에게 무척이나 매력을 느낀 모양이었다. 관객은 서로에게 주먹을 불끈 쥐고 흔들었으며, 라이머는 내게 속삭였다. "공연이 끝나고 나서 결투가 벌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지." 그러면서 그는 무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내게 설명해 주었다. 배우들은 인형, 장난감, 꼭두각시 역할을 맡고 있으며, 이제는 마치 나무로 깎은 개구리처럼 모두 펄쩍펄쩍 뛰고 있었다. 내가 보니 주연은 일종의 왕인 것 같았는데, 우리가 옷장을 청소하는 데 쓰는 것과 같은 종류의 솔을 마치 홀처럼 들고 있었다. [관객 중에서] 가장 활기 넘치는 패거리를 두둔하려는 마음에서, 우리는 연극을 지지한다는 고함을 질러 댔다. 하지만 그날 코르네유 호텔로 돌아와서 나는 무척이나 슬펐다. 왜냐하면 희극은, 객관성은, 그 증대하는 힘을 다시 한 번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스테판 말라르메 이후, 폴 발레리 이후, 귀스타브 모로 이후, 퓌비 드 샤반 이후, 우리 자신의 시 이후, 우리의 그 모든 섬세한 색깔과 불안한 리듬 이후, 콘더[오스트레일리아의 화가 /옮긴이]의 그 희미하게 혼합된 색조 이후, 더 이상 무엇이 가능하겠는가? 우리 이후에는 야만스러운 신이다."(The Collected Works of W. B. Yeats, Vol. III, Autobiography, New York: Scribner, 1999, pp. 265-5.)



그렇다면 예이츠가 말한 the Savage God 이란 정확히 무엇일까? 하기오 모토의 만화에서는 "잔혹한 신"으로, 알바레즈의 책에서는 "잔인한 신"으로 번역되었지만, 오히려 "야만스러운 신"이나 "미개한 신"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할 듯도 하다. 자서전의 구절처럼 예이츠는 비록 같은 예술가로서의 의무감에서 그 연극을 지지하는 입장을 표현하기는 했지만, <위뷔 왕>을 보고 그 전복적인 내용에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질서의 전복과 파격의 일상화라는 것이 그에게는 못내 찜찜하게 느껴졌는지, 그는 뒤늦게야 "우리 이후에는 야만스러운 신뿐이다"라고 자조적인 말을 남긴 셈이다.


이런 사실은 알베레즈의 책을 통해서도 짐작이 된다. 그는 예이츠의 "야만스러운 신"이라는 표현을 "자살과 문학"이라는 장에서도 "다다이즘"에 관한 맥락에서 인용한다. 즉 "모든 것을 파괴하자는 운동"(217쪽)으로 요약될 수 있는 다다이즘은 "이전보다 더욱 극단적이고 더욱 격렬하며, 그리고 마침내 더욱 자기파멸적 예술을 만들어내게 되었다"(216쪽)는 것이다. 그는 20세기 예술이 "끊임없는 실험의 충동"을 지니고 있으며, 그 배후에는 "카오스 의식"이 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바로 이런 불안으로 인해서 "예술가는 낭만적 영웅이며 해방자가 아니라, 희생자이며 제물이 되어 버린 것"(232쪽)이라고 지적한다.


바로 여기서 "카오스 의식"은 "자살"과 연관된다. 20세기 이전에는 예술가가 자살에 이르는 경우가 드물었지만,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예술가가 훌륭할수록 상처받기도 쉬운 것처럼 보인다"(230쪽)고 저자는 지적한다. 알바레즈의 책이 실비아 플라스의 자살 사건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의 주장은 어딘가 묘한 설득력을 얻기도 한다. 실제로 이 책의 서론은 저자가 플라스와의 만남에서 받은 몇 가지 인상을 토대로, 자살에 이르기 직전까지 그녀의 상황을 재구성해보는 대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 사람은 심지어 자살에 관해서도 몇 번인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도 한다.


내가 처음 알바레즈의 책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것도 바로 실비아 플라스 때문인데,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는 뭔가 기대에 어긋난 부분도 없지 않다. 제목만 보면 자살이나 죽음에 대한 역사나 심리학이나 사회학의 설명 같지만, 막상 읽어보면 오히려 문학에 관한 내용이 많아서 조금 어리둥절했던 것이다. 저자는 다다이즘을 비롯한 20세기의 예술 경향 배후에 있는 불안을 탐지하고, 그 불안이야말로 자살로 대표되는 예술가의 파멸의 원인이라고 진단하지만, 사실 플라스의 경우(역시나 자살 미수자인 저자 역시)에는 예술까지 갈 것도 없이, 단순히 개인적 기질이며 심리적 문제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그나저나 "잔혹한 신"인지 "야만스러운 신"인지 간에, 예이츠의 발언과 하기오 모토의 작품, 또는 알바레즈의 책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예이츠의 발언과 알바레즈의 책이 맺은 관계는 위에서 이미 설명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자료와 하기오 모토의 만화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는 어딘가 좀 모호하다. 비록 예이츠의 발언이 대사 중에 언급되고 있긴 하지만, 원문인 After us the Savage God 이 아니라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残酷な神が支配する)라고 나오고, 위키피디아에 나온 이 만화의 영문 제목은 아예 A Cruel God Reigns 이라고 나온다. 그렇다면 저자는 과연 예이츠의 발언을 어떤 의미로 사용한 것일까? 


이 수수께끼는 문제의 인용문의 일본어 번역문을 보고 나서야 풀렸다. 인터넷을 뒤져 보니 하기오 모토의 팬페이지에 나온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의 인용문 모음에서 그 단서를 찾아볼 수 있었다.(아아, 구글의 힘!) 즉 여기서는 알바레즈가 인용한 예이츠의 the Savage God 에 관한 구절이 일본어판 <자살의 연구>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 있다고 나와 있다.



ステファーヌ・マラルメのあとに、ポール・ヴァレリーのあとに、ギュスターヴ・モローのあとに、現代芸術の微妙な色彩といらだつリズムのあとに、コンダーの真珠光のような色のあとに、あと何が可能だろうか。やがて残酷な神が支配する



어딘가 좀 허무한 느낌이기도 한데... 결국 하기오 모토는 After us the Savage God 을 "머지않아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라고 옮긴 위의 구절을 그대로 가져다가 제목으로 삼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다만 "우리 이후에는 야만스러운 신이다"보다는 "머지않아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가 더 멋진 표현인지는 몰라도, 과연 충실한 번역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그리고 이 논란의 책임은 하기오 모토가 아니라 오히려 일본어판 『自殺の研究』의 번역자(早乙女忠)에게 물어야 마땅할 것 같다. 물론 이 작품 내부에서도 "잔혹한 신"의 의미를 굳이 찾으려면 찾을 수 있다. 가령 10권 말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대사를 보라.



제레미    어째서 난 인간으로 태어났을까? 어째서 이런 인간으로. 아이를 부모한테 키우게 하면 안 돼. 

            왜냐면 부모는 아이를 사랑과 폭력으로 지배하니까! 그리고 아이는 폭력을 배우게 돼. 

            부모의 감정에 이끌려 지배당하고 저주에 걸려버려.


이안      저주?


제레미    아이는 무력하잖아? 생물로서 미숙하고 아무것도 못해서 부모에게 의존하며 자랄 수밖에 없어. 

            그리고 부모 자신이 안고 있는 트라우마를 그대로 아이에게 대물림해. 이게 저주가 아니면 뭐야?


이안      뭐, 그래... 부모도 인간이니 완벽할 순 없겠지...


제레미    부모는 아이에게 인간이 아닌 신이야! 그 신이 가르친다구. 사랑도 폭력도 고통도.


이안      그런가? 하지만... 난 언제나 어머니가 그리웠어.


제레미    버림받았어도?


이안      아이 혼자서는 살아가지 못하잖아? 부모가 필요하지? 그리고 부모 또한 아이가 필요해.


제레미    희생양으로? 아이는 부모라는 신에게 제물이자, 부모의 인생에 공양으로써 존재해.


이안      Sacrifice... 문득 그 단어가 떠올랐다. 세상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어. 왜냐하면 신에게 공물이 바쳐졌으니까.

            그리고... 부모의 부모, 그리고 그 전 부모도 누군가의 자식이자 희생양이었어. 끊임없이 무너지고 있는 

            그레그의 세계에 바쳐진 공물. 끊임없이 무너지고 있는 제르미의 세계에 바쳐진. 신은 제물을 원하고 있어. 

            신의 세계 또한 계속해서 무너지고 있으니까.



이 대목만 놓고 보면, 이 만화에서 이야기하는 the Savage God 은 "야만스러운 신"이라는 예이츠의 발언보다는 오히려 알바레즈의 책 서두에 인용된 사하군의 설명에 나오는 "잔혹한 신" 테즈카틀리포카에 대한 묘사에 더 가깝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부와 권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제레미에게 편의와 고통 모두를 제공해 주는 그레그를 의미하는 것도 같고, 또 어떤 의미에서 이는 자신의 안락을 위해 아들을 희생시킨(적어도 제레미에게는 한때 그렇게 생각된다) 산드라를 의미하는 것도 같다. 여하간 하기오 모토가 말한 "잔혹한 신"이 예이츠가 말한 "야만스러운 신"과 무관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결국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라는 제목 자체는 오독의 산물일 가능성이 있다. 물론 <자살의 연구>의 한 대목을 그대로 인용한 저자에게는 오히려 책임이 없다. 다만 알바레스의 일어판 번역자가 저 예이츠의 유명한 말을 다다이즘에 대한 평가라는 원래의 맥락에서 분리시켜서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라고 애초부터 과다하게 번역한 것이 원인일 뿐이다. 하지만 만약 그 구절이 "우리 이후에는 야만스러운 신이다"라고 직역되었더라면, 하기오 모토는 과연 거기서 자기 작품을 만들어 나갈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을까?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창의적 오독"의 또 한 가지 보기 드문 사례일런지도 모를 일이다.

 

 

 


[*] 하기오 모토의 책은 <포의 일족>이 새로 간행되는 등, 이후에도 계속 나오고 있다. <방문자>와 <토마의 심장>은 아쉽게도 품절이지만, 새로운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 알프레드 자리의 <위뷔 왕>은 두 가지 번역본이 있지만, 아쉽게도 어느 쪽도 만족스러운 번역까지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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