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에 "트럼프의 인생책" 운운 하는 광고가 있기에, 도대체 어떤 책을 읽었기에 저런 괴물이 생긴 건가 궁금해서 클릭해 보니 엉뚱하게도 <손자병법>이 나온다. 알라딘의 책 소개를 읽어보니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가치를 담은 손자병법을 반드시 읽어보라"는 트럼프의 발언 인용문과 함께, 빌 게이츠와 손정의 같은 유명인이 남긴 평가도 한 줄씩 인용하고 있다.


하지만 트럼프의 저서 <챔피언처럼 생각하라>에는 이렇게만 나온다. "맥아더도 이 책을 연구했고, 역사 속의 다른 여러 유명한 전략가들도 마찬가지였다. 비즈니스스쿨의 추천 도서로서는 이례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장담컨대 결코 이례적이지 않다. 그만큼 귀중하고, 시간을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즉 그냥 '좋은 책이니 한 번 읽어보라' 정도였다.


물론 트럼프야 저서도 많으니 다른 곳에서는 '필독서'나 '인생책'이라고 밝혔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다만 우습게도 정작 미국 언론에서 그와 이 병법서를 연관지은 경우는 "트럼프는 <손자병법>을 읽어야 한다"며 거친 태도를 질타할 때가 대부분이니, 취임 직후부터 줄곧 '닥공' 모드인 미국 대통령을 이 책의 홍보에 사용한 것이 과연 최선인지는 의문이다.


나귀님은 현암신서의 <손자병법>,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의 <무경칠서>, 책세상 밀리터리클래식의 <손자병법>처럼 가급적 사례 제시 없이 원문 해석에만 충실한 것으로 번역서를 몇 가지 갖고 있다. 이번에 나온 <손자병법>을 미리보기로 살펴보니 사례 제시에 치중한 듯한데, 산만한 것은 둘째치고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애매모호한 문장도 눈에 띈다.


예를 들면 이렇다. "플루타르코스는 <영웅전>에서 영웅이란 불확실성에 도전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카이사르, 한니발, 나폴레옹, 세기의 명장들이 <영웅전>을 읽고 추종했던 리더의 길이 이것이었다. 손자가 말한 리더의 길, 오사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25쪽) 그런데 처음에는 이게 무슨 뜻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뭐, 한니발이 <영웅전>을 읽었다고?


위의 인용문에는 생략했지만, 해당 본문에는 플루타르코스(AD 46-120)와 한니발(BC 247-183)의 생몰년이 병기되었는데, 이것만 봐도 <영웅전>의 저자가 카르타고의 장군보다 더 나중임을 알 수 있다. 카이사르(BC 100-44) 역시 기원전의 인물로서 한니발과 함께 <영웅전>에 등장했었으니, 이건 마치 "조조와 유비가 <삼국지>를 읽고 추종했다"고 말하는 격이다.


애초에 "나폴레옹과 세기의 명장들"만 언급했다면 무난했을 문장에 굳이 "카이사르, 한니발"까지 갖다 붙여서 틀린 것인지, 아니면 "카이사르, 한니발, 나폴레옹, 세기의 명장들"이 "추종했던 리더의 길"에 굳이 <영웅전>을 갖다 붙여서 틀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한국사와 전쟁사의 전문가라는 저자의 남다른 이력을 감안하면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다.


비슷하게 애매한 문장은 바로 뒤에도 나온다. "수백 개의 지역으로 분열되어 있던 독일이 통일국가와 강력한 국가, 민족주의를 이룬 데는 참혹한 내전이었던 30년 전쟁과 전 유럽을 상대로 싸운 7년 전쟁, 유럽 전체만큼 강했던 나폴레옹 전쟁이 큰 역할을 했다."(26쪽) 여기서도 "나폴레옹"과 "전쟁" 사이에 "-과의"나 "-을 상대로 싸운" 정도가 들어가야 할 듯하다.


지난번 코페르니쿠스 번역본에 붙은 서울대 교수의 해제에서도 앞뒤가 맞지 않는 이상한 문장이 잔뜩 들어 있는 것을 보고 놀랐는데, 어째서인지 요즘에는 정확하고 아름다운 문장까지는 갈 것도 없이 그냥 이해가능한 문장을 쓰는 저자도 드물어진 것 같다. 한편으로는 저자의 역량 하락이 문제이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출판사의 역량 하락도 문제가 아닐까 싶고.


그래서인지 최근 인기를 끄는 고전 해설서들을 보면 아무래도 얕고 급한 느낌을 받게 된다. 새로운 해석도 좋고, 친근한 화법도 좋고, 사례의 열거도 좋지만, 뭔가 천천히 음미하고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책이 필요하지 않을까. 경영과 처세에 적용하기 앞서 군사 전략으로서 <손자병법>의 원의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던 어느 군사학자의 일침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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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탄핵 재판 관련 뉴스를 접하다 보니 이른바 '오염된 증거'에 대한 언급이 반복되는 듯하기에, 문득 예전에 읽은 토니 힐러먼의 단편 내용을 떠올리게 되었다. 황금가지의 <세계 서스펜스 걸작선> 2권에 수록된 "치의 마녀"라는 작품인데, 애초에 남녀 모두에게 쓸 수 있는 단어인 "주술사"(witch)를 "마녀"로 옮긴 것부터 시작해서 오역이 심각한 수준이다.


지난번에 '수상쩍을 만큼 한 가지에 꽂힌 출판사들' 운운 하는 글에서 '사슴 대가리 여자' 이야기를 하면서 잠시 언급했지만, 미국의 추리소설가 토니 힐러먼(1925-2008)은 젊은 시절 나바호 인디언 보호 구역에 갔다가 그곳의 풍습에 흥미를 느끼게 되어서, 원주민 경찰 콤비 '조 리프혼'과 '짐 치'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범죄 소설 시리즈를 35년간 18권 간행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중 6권 <고스트웨이>, 8권 <시간의 도둑>, 11권 <카치나의 춤>, 17권 <스켈리톤 맨>, 18권 <셰이프시프터>가 간행되었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모두 절판이다. 흥미롭게도 고려원에서 간행된 6권과 11권을 제외한 나머지 책의 번역자는 원로 영문학자 설순봉인데, <고스트웨이>에는 이 저자에 대해 예전부터 관심이 있었다는 역자의 설명이 나온다.


'리프혼과 치' 시리즈는 그 제목에서부터 인디언 고유의 풍습이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예를 들어 '고스트웨이'는 푸닥거리의 일종을, '시간의 도둑'은 유물 절도범을, '카치나의 춤'은 제사를 위한 춤을, '스켈리톤 맨'과 '셰이프시프터'는 무시무시한 초자연적 존재를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디언의 문화에 어느 정도 익숙해야 그 재미를 더욱 만끽할 수 있겠다.


또 하나 염두에 둘 점은 주인공들이 인디언 보호 구역에서만 활동하는 원주민 경찰관이기 때문에, 워낙 소규모일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 경찰관에게는 얕보이기도 한다는 점이다. 미드에서도 지역 경찰과 FBI의 알력이 종종 묘사되는데, '나바호 경찰'은 그보다 좀 더 안습한 처지 같기도 하다. 예를 들어 '청학동 경찰'이나 '마라도 경찰' 정도 느낌이라고 할까.


앞서 언급한 <세계 서스펜스 걸작선> 2권의 "치의 마녀"도 인디언 고유의 미신과 외부 세계의 편견을 범죄 소설 특유의 설정과 버무린 독특한 작품이며, 단편이라는 점에서는 장편으로만 이루어진 '리프혼과 치' 시리즈의 외전 정도에 해당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작품에서는 원주민 경찰 콤비 가운데 '짐 치 경장' 혼자서만 등장한다.


주인공인 나바호 경찰 소속 짐 치 경장은 최근 나바호 지역민 사이에서 '주술사'('마녀'로 오역!)로 지목되어 곱지 않은 눈길을 받는 외지인에 관해 수사하던 중에 그 지역 담당자인 FBI 요원 제이크 웰스의 호출을 받는다. 알고 보니 문제의 외지인은 범죄 조직의 피라미 가운데 하나였다가 검찰 증인으로 돌아서면서 FBI의 관리 하에 은둔 생활 중인 인물이었다. 


문제는 그 증인이 나바호족 출신이라는 단순한 이유에서 FBI가 인디언 보호 구역을 은신처로 삼은 것이었다. '사과를 숨기려면 같은 사과들 사이에 두면 된다'는 백인들의 예상과 달리, 정작 그 지역 원주민 사이에서는 그 외지인이 유독 두드러질 수밖에 없었다. 백인이 보기에는 다 같은 사과 같겠지만, 원주민들은 어떤 사과가 어떻게 다른지 구분할 수 있으니.


급기야 지역 원주민들은 자신들이 겪는 갖가지 불운을 새로 온 남자의 탓으로만 돌린다. 레스코프의 <괴물 셀리반>에 묘사되었듯 농사를 망친 것도, 가축이 죽은 것도, 사람이 아픈 것도 다 누군가의 주술 때문이며, 문제의 주술사는 바로 새로 온 남자일 수밖에 없다는 식이었다. 미신 따위는 믿지 않는 치 경장이었지만, 신고가 들어오니 출동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만 해도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던 치는 제이크와 대화를 지속한 끝에 비로소 상대방의 숨은 속내를 간파한다. 문제의 나바호족 검찰 증인은 조만간 이송되어 재판에 나설 작정이었는데, 알고 보니 판결을 좌우할 만큼의 결정적인 증언까지는 보유하지 않은 피라미인 관계로, 자칫 그를 증인으로 소환한 검찰이 도리어 웃음거리가 될 만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마침 FBI에서는 문제의 증인이 나바호 주민들과 갈등을 빚는다는 점에 착안, 타인의 방문이나 협박으로 인해 변심했을 것이라며 책임을 회피하고 떠넘기려 든다. FBI 요원이 나바호 경찰을 부른 이유도 증인의 '오염' 가능성에 대한 발언을 유도해 내기 위해서였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치는 제이크의 의도를 간파하자마자 확답을 주지 않은 채 슬그머니 물러선다.


사건 발생부터 추리와 해결까지 일사천리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추리소설을 기대한 사람이라면 두 사람의 대화 위주인 내용 전개에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FBI의 증인 보호 절차가 원주민 사회의 미신이며 미국 사회의 편견과 맞물릴 때에는 어떤 역설이 발생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범죄물의 클리셰를 뒤집는 독특한 재미가 있는 작품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겠다.


문제는 번역이 워낙 엉망이라 대명사를 잘못 이해하는 등 종종 헛다리를 짚다 보니, 양측의 대화를 통해 서서히 밝혀지는 진실을 쉽게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다. 단지 이 작품만이 아니라 책 전체가 문제로 보이는데, 예를 들어 함께 수록된 렉스 스타우트의 단편에서는 대사 가운데 한 행이 누락되어 앞뒤가 안 맞는 부분도 있어서, 결국 구입한 독자만 손해이다!


앞서 말했듯이 "치의 마녀"를 떠올리게 된 까닭은 최근 대통령 탄핵 재판에서 '오염된 증거'에 대한 주장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상 계엄의 위헌성과 몰상식이 뚜렷한 상황에서 일부 절차나 증거에 대해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는 것은 의미 없는 발버둥에 불과해 보인다. 마침 오늘 최종 변론이 마무리될 예정이라니, 머지않아 결과가 정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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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알라딘에 2025년 이상문학상 작품집 광고가 있기에, 부영그룹이 인수했다는 문학사상사가 드디어 본격적인 업무를 재개했나보다 생각하고만 넘어갔었다. 그런데 나중에 더 자세히 살펴보니 발행처가 '다산책방'으로 나온다. 그제야 이상문학상 주관사가 바뀌었음을 상기하게 되었는데, 십중팔구 지난번 저작권 양도 강요 논란도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알고 보니 부영그룹은 문학사상사 전체가 아니라 <문학사상> 잡지만, 다산책방은 이상문학상만 각각 인수했다니, 결국 온전했던 출판사가 문학상, 잡지, 단행본으로 뿔뿔이 흩어진 셈인가 싶다. 다만 부영은 과거 리카르도 레고레타의 유작 건축물을 철거하며 문화적 식견 부족을 드러낸 바 있어 미심쩍었는데, 아니나다를까 잡지 쪽에는 벌써 논란이 생긴 듯하다.


그래도 여전히 "이상문학상" 하면 "문학사상사"가 떠오르는 까닭은 한편으로 당연히 반세기 동안 이어진 전통 때문이고, 또 한편으로는 이어령이라는 인물 때문이다. 이어령은 문학사상사의 창립자인 동시에 이상 연구를 개척한 평론가 가운데 한 명이었으니, 결국 그 작가의 이름에서 따온 문학상을 제정한 것 역시 개인적 관심의 연장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실제로 임종국이 편저한 최초의 '이상 전집'(1956) 다음으로 간행된 '이상 전작집'(1977-1978)은 이어령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설립한 문학사상사에서도 '이상 문학전집'(전5권, 1989-1993)과 김윤식의 <이상 연구> 등 관련서를 꾸준히 내놓은 모양이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권영민의 <이상문학대사전> 외에는 모두 절판된 듯하다.


그렇다 보니 "이상문학상 = 문학사상사"라는 오랜 고정관념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나귀님의 입장에서는 이 문학상의 새로운 주관사가 된 출판사에 대해서 한 가지 아이러니를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건 바로 올해부터 '이상문학상'을 주관하고 작품집을 내는 '다산책방'에서 지금까지 간행한 도서 중에 '이상'과 관련된 책이 정작 하나도 없더라는 점이다!


물론 다산책방의 모회사 '다산콘텐츠그룹' 산하에는 다산북스, 다산라이프, 다산초당, 다산에듀, 다산사이언스, 다산어린이뿐만 아니라 놀, 오브제, 유영, 에픽, 사무사, 브라이트, 클랩북스, 콘택트 같은 지회사가 있다니, 잘 찾아보면 그룹 전체에 한 권쯤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참고로 '다산기획'과 '다산글방'은 훨씬 더 오래 된 별개의 출판사이다).


어쩌면 문학상의 주관사 변경이 너무 갑작스레 이루어지는 바람에 부득이하게 그랬을 수도 있다. 게다가 설령 다산책방에서 이런 아이러니를 이미 의식하고 새로운 '이상 전집'을 기획 중이라 하더라도, 기존 전집을 검토하고 미발굴 작품을 찾아보고 해설을 작성하는 등의 실제적인 어려움을 감안하면 하루아침에 급조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일까지는 아닐 테니까. 


이쯤 되면 '동인문학상' 주관사 '조선일보사'에서도 '김동인' 책을 안 낸 것은 마찬가지 아니냐고 반박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는데, 사실은 원래 <사상계>에서 제정한 그 문학상을 1980년대 중반에 인수한 직후 조선일보사에서도 <김동인 전집> 전17권을 간행한 바 있었으니, '김수영 전집' 간행사인 민음사가 '김수영 문학상' 주관사인 것과 유사하다 하겠다. 


또 한편으로는 김수영 시를 읽어보지 않았다나 좋아하지 않았다나 했는데도 김수영 문학상을 받았다며 자조한 장정일의 사례도 있고, 훨씬 더 대중적인 사례로는 '홍철 없는 홍철팀'이란 것도 있으니, 굳이 이상 책 없는 출판사라 해서 이상문학상을 주관할 자격이 없다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어쨌거나 솔직히 문학사상사나 부영그룹보단 나을 테니까.


특히 부영그룹은 작년에 갑자기 <문학사상>의 간행을 취소해서 논란이 되고 있다. 즉 이전까지 사주의 저서를 간행하는 데에만 이용된 출판 부문인 우정문고를 통해 <문학사상> 2024년 10월호를 간행함으로써 재창간에 나서겠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해 놓고, 막상 출간일 직전에 가서 간행을 취소하고 침묵만 지키는 바람에 문단과 출판계에서 구구한 추측이 나왔다.


일각에서는 재창간호 수록 작가 중 하나인 황석영이 시국 선언에 참여한 까닭에, 현직 대통령의 특별 사면으로 복권된 부영그룹 사주가 정권의 눈치를 보느라 막판에 출간을 막은 것 아니냐는 추측까지 나왔다. 이게 사실이라면 불과 두 달 후에 벌어진 비상 계엄과 탄핵 심판 등의 사태까지 감안했을 때 <문학사상>의 재창간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고 봐야 하겠다.


만약 재창간과 동시에 수록 작가와 작품을 옹호하며 현 정권과 갈등을 빚는 모습만 보여주었더라도, 이후의 정치적 격변 상황에서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격언을 입증하는 사례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며 <문학사상>도 멋진 재기에 성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결국 문학을 알지도 못하는 기업의 횡포로 가뜩이나 금이 간 명성에 먹칠까지 더한 셈이니 딱한 일이다.


물론 남들은 못하겠다고 포기한 문학상이며 잡지를 굳이 떠맡은 출판사며 재벌의 선의를 굳이 폄하하려는 의도까지는 아니다. 다만 한편으로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했다고 자랑을 일삼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정작 나라를 대표하는 문예지며 문학상을 고작 반세기도 유지하지 못한 이 나라의 문화적 척박함인지 천박함인지를 새삼스레 되새겨 보았을 뿐이다.



[*] 그런데 도서 수집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부영의 <문학사상> 발행 취소 소식에서 한 가지 눈이 번쩍할 만한 부분이 있다. 출간을 앞두고 전격 취소되기는 했지만, 납본용으로 잡지 20부를 사전 제작해서 일부는 언론사에 홍보용으로도 보냈다고 전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상태로 재창간호가 사장되고 만다면 그 사전 제작본 20부는 희귀본인 것은 물론이고, 그 전후의 복잡한 사정까지 감안해 보면 이래저래 가치가 높아질 수밖에 없어 보인다. 물론 <문학사상> 재창간호가 나중에라도 결국 간행될 수는 있겠지만, 그럴 경우에는 분명 발행날짜가 수정될 수밖에 없을 터이니, 2024년 10월호라고 찍힌 사전 제작본의 가치는 그대로 고정될 수밖에 없다. 납본용이라면 20부 가운데 절반 정도는 도서관 제출과 출판사 비치 등으로 소진되었을 것이고, 나머지 10부 정도가 언론사에 배포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과연 이후에 어떤 경로를 통해 어디로 흘러 나오게 될지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고나 할까. 어쩐지 소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격이기는 하지만, 한국 문단이나 출판계에는 별로 공헌하지 못할 것 같은 부영도 도서 수집가들에게는 뭔가 좋은 일을 한 가지는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문득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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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 "좋소냥이"라는 이름으로 돌아다니는 짤이 있다. 공사장의 노란 안전모를 쓴 고양이 한 마리가 구부정한 자세로 뭔가를 가리키며 "좋아!" 하고 외치는 모습을 만화체로 묘사한 것인데, 원래는 일본의 어느 일러스트레이터가 만든 캐릭터였지만 이런저런 변형을 거쳐서 나중에는 공사 현장의 안전 불감증을 풍자하는 용도로 사용되어 유행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중소기업'의 폄칭인 '좆소'나 그 완곡어인 '좋소'를 붙여서 "좆소냥이"나 "좋소냥이", 또는 원래 명칭대로 "현장냥이"로도 통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 그림을 접하고 보니 예전에 한 만화가가 알코올 중독으로 본업을 때려치고 노숙자로 살다가 가스 설비 용역 회사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변신했을 때에 그린 유사한 안전 홍보 만화가 생각났다.


그 만화가란 일본의 부조리 및 로리(!) 만화의 대표 작가인 아즈마 히데오(1950-2019)이다. 만화를 그만 두었던 암울한 시절을 회고한 <실종 일기>를 보면, 한동안 노숙자로 지내다 갱생을 위해 가스 설비 일을 하면서도 끼(?)를 숨길 수 없었던지, 가스 설치 기사를 안전모 쓴 생쥐로 ("좋소생쥐"?) 묘사한 만화를 그려 해당 업계 소식지에 투고했다고 나온다.


우리나라에 간행된 아즈마 히데오의 작품은 <실종 일기> 두 권이 전부이지만, 사실은 그의 삽화를 수록한 SF도 한 권 출간된 적이 있다. 바로 <시공을 지배한 사나이>라는 작품인데, 미국의 수학자 겸 소설가인 루디 러커의 1984년 작품이다. 러커라면 철학자 헤겔의 6대손으로도 유명한데, 우리나라에 나왔던 책은 현재 요것 하나 말고는 다 절판된 듯하다. 


나귀님도 우연히 알라딘 중고샵을 통해서 이 책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 루디 러커의 이름에 혹해 구입해 보았더니만 외관부터 그다지 미덥지가 않은 데다, 만화풍의 삽화까지 들어 있어서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림체가 뭔가 낯익다 싶어서 혹시나 하고 검색해 보았더니만, 꽥, 진짜로 이 책의 일어판에 아즈마 히데오가 삽화를 담당했다고 나온다!


결국 이 책도 일본어 중역본일 가능성이 높아 한동안 방치해 두었고, 그렇게 시간이 가다 보니 이제는 책더미 맨 아래 깔려 꺼내기도 쉽지 않게 되었는데, 이참에 생각나 알라딘에서 검색해 보니 '내용은 좋지만 번역은 최악'이라는 누군가의 서평이 달려 있다. 그래도 아즈마 히데오의 팬이 있다면 한 권 갖고 싶어 할 것도 같긴 한데... 과연 팬이 있기는 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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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에서 현직 교사가 재직 중인 초등학교의 학생을 아무 이유 없이 살해한 일로 또다시 나라가 떠들썩했다. 자해를 했지만 목숨은 건졌다는 가해자의 구체적인 범행 이유가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을 조장해서는 안 된다느니, 아동이 소지한 위치 추적 장치가 섬뜩하다느니, 정치인과 아이돌의 조문이 옳다거니 그르다거니 논란이 활발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한 것은 과연 이 사건을 어떻게 지칭해야 하느냐는 점이다. 언론에서는 일단 "대전 초등학생 피살 사건"으로 잠정 통일한 것처럼 보이는데, 지난번 벌어진 여객기 사고에서는 공항 이름을 따서 "무안공항 사고"라고 할지, 아니면 항공사 이름을 따서 "제주항공 사고"라고 할지를 놓고 갑론을박이 있었다고 알고 있기에 벌써부터 궁금한 것이다.


여객기 사고의 경우에는 회사명과 편명을 이용하는 것이 규칙이므로 "제주항공 2216편 사고"로 정해진 모양이지만, 일반인의 경우에는 항공사도 잘 모르고 편명은 더욱 모르게 마련이니 편의상 "무안공항 사고"라고 부르는 편이 더 간단하다. 하지만 정작 무안군에서는 이럴 경우 지역 이미지가 나빠질 수 있다는 이유로 명칭 사용 반대 의견을 내놓은 듯하다.


하지만 회사명에도 지역명이 들어가 있다 보니, 제주도에서도 "제주항공 2216편 사고"라는 명칭으로 인한 지역 이미지 악화를 우려하는 반응을 내놓았다는 기사가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제주도가 그 설립에도 관여하고 지분도 보유한 상태이니, 상황이 좋을 때에는 마치 자기네 치적인 것처럼 내세우다가 상황이 나빠지니 딴소리한다는 비판을 피할 길 없어 보인다.


예를 들어 "세월호 침몰 사건"과 "이태원 압사 사고"의 경우처럼, 사건사고에서 관련 물체나 지명 가운데 어느 것을 사용해도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 물론 의도적으로 비하하는 명칭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비판의 여지가 있겠지만, "국민학교"는 틀리고 "초등학교"만 맞다고 주장하는 경우처럼 역사적 명칭조차도 굳이 부정하고 비판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


예를 들어 "광주 민주화 운동"을 "광주 사태"라고 지칭한다고 난리가 나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인데, 나귀님도 "광주 사태"로 처음 알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그 명칭이 먼저 생각난다. 당연히 비하의 의미는 없으며, 오히려 몰래 말해야 했던 시절의 살벌한 기억이 결부된 역사적 명칭일 뿐이다. 따라서 문맥상 폄하의 의미가 없다면 그냥 봐주는 게 맞지 않을까.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으니 명칭부터 조심하자는 것이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의 정신인 듯하지만, 때로는 움베르토 에코의 지적처럼 이것이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새로운 위선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지난번 "두 나오미"에 관한 책 <도플갱어>를 읽다가, 저자의 "신경다양적인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의아했던 것처럼 말이다.


구글링해 보니 나오미... 클라인의 아들이 자폐아라서 그런 표현을 썼던 모양인데, 솔직히 말해서 '신경다양성'이라는 명칭은 워낙 두루뭉실한 까닭에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신경이 다양하다니, 혹시 여러 군데 관심을 두는 바람에 산만하다는 뜻인지, 아니면 일반적인 사람의 신경보다 훨씬 더 민감해서 더 많은 감각을 느낄 수 있다는 건지.


물론 해당 증상을 실제로 겪는 사람이 '자폐증'보다 '신경다양성'을 선호한다면 그러시라고 할 수밖에 없기는 하지만, 과연 그렇게 해서 무슨 이득이 있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미 부정적인 인식이 깃든 '자폐증' 대신 일견 무해해 보이고 살짝 의아해 보이는 '신경다양성'이란 명칭을 사용한다고 해서 해당 증상이 눈 깜짝할 사이 사라져 버리기라도 할까?


장애를 비롯해 다양한 어려움을 겪는 까닭에 부모와 공감하는 수직적 정체성 대신 같은 처지인 남들과 공감하는 수평적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탐구한 앤드류 솔로몬의 서술에 따르면, 장애를 '질환'으로 볼 것이냐 '다양성'으로 볼 것이냐에 대해서는 해당 공동체 내부에서도 찬반양론이 맞서는 모양이니, 명칭이야 어쨌거나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지 않을까.


예전에는 장님, 벙어리, 귀머거리, 절름발이, 앉은뱅이 등 '불구자'라는 단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했지만, 언제부턴가 이를 기피하고 '장애자'라는 단어로 대체하더니, 또 언제부턴가 이조차도 폄칭이 되었다며 '장애인'이라는 단어로 대체해 버렸고, 중간에 '장애우'라는 명칭이 새로 나오는가 싶더니 지칭/호칭의 혼란을 이유로 다시 '장애인'으로 돌아간 모양이다.


하지만 막상 영어에서는 한동안 폄칭으로 간주되던 cripple(불구자)의 약칭인 crip(붉?)을 장애인 스스로가 사용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결국 명칭이야 어쨌건 간에 편의를 위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셈이 아닐까. 그렇다면 '광주 사태'건 '불구자'건 간에 그 맥락에 딱히 악의가 없다면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맞지 않으려나.


여기서 문득 생각나는 것이 일본의 고전 수필 <도연초>에 나오는 어느 스님 이야기이다. 절 앞에 커다란 팽나무가 있어서 사람들이 '팽나무 스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짜증나서 나무를 베어 버렸더니 이후로는 '그루터기 스님'으로 통하게 되었고, 역시나 그루터기를 파내 버렸더니 이후로는 그 자리에 생긴 웅덩이 때문에 '웅덩이 스님'으로 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의미와 지시체, 또는 단어와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의 관계가 절대적이 아니라 임의적일 뿐이라는 지적은 이른바 20세기 언어철학의 시발점이라고 알고 있다. 굳이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21세기의 두 번째 탄핵 재판의 내용에서조차 자의적 단어 해석에서 비롯된 부조리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물론 '의원'이건 '인원'이건 결론은 뻔해 보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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