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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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과 화해는 누구에게 허락된 것인가.


작년에 <지옥에서 온 판사>라는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다. 인간의 영혼이 지옥에서 예기치 않은 난동을 부리다가 악마인 유스티티아에게 불똥이 튀어 유스티티아는  대악마(?)의 명으로 인간 세상에서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그 임무가 못된 짓을 했음에도 참회하지 않는 영혼을 지옥으로 끌고 가는 일이었는데, 유스티티아는 이 악인을 데리고 가기 전 자신이 한 짓을 그대로 돌려받는 형벌을 내렸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보다 더 통쾌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솔직히 잠깐 그 고통을 겪는 가해자와 오랜 시간에 걸쳐 그 고통에 노출된 피해자의 고통이 같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가해자가 그 두려움과 공포를 느낄 수 있을테니까. 하지만 과연 똑같이 해 준다고 가해자가 참회할까 싶은 생각도 있었다. 두려움과 공포에서 나온 사죄는 누구에게 하는 것이며 누구를 위한 것일까.


1994년 넬슨 만델라가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악명 높던 '아파르헤이트'는 철폐되었다. 수많은 백인들이 보복을 두려워했다고 하는데 그만큼 백인들이 흑인들에게 가혹했기 때문이었다. 거주지를 분리하고 투표권을 제한하고 인종 간 성관계를 금지하는 등 인종차별적인 정책들이 사라졌지만 그 폐해는 남았다. 억울하게 가족을 잃은 흑인들은 복수를 꿈꿨고, 넬슨 만델라와 데즈먼드 투투 주교 등은 학살을 막기 위해 애썼다. 만델라 정부가 발족한 '진실과 화해 위원회'는 어찌보면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 같았다. 청문회를 열고 그들이 범죄 사실을 밝히면 사면했다. 


역사책에서 읽어서 그랬구나 알게 된 것과 이 책의 주인공인 루리가 자신이 고발당해 열린 청문회에서 발언하는 장면을 읽으면서 느끼게 된 것은 너무 달랐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는 종교도 아닌데 화해와 용서를 주는 놀라운 기관이었다. 피해자들 모두가 그 기관의 이념에 동의하고 가해자들이 진심으로 참회했다면 세계사적으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이상적인 사건이었을테다. 하지만 이 책의 루리가 겪은 청문회를 본다면 가해자가 진심으로 사죄한다는 게 가능한지 모르겠고,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할만큼 어떤 조치가 취해지는지도 모르겠다.


루리는 백인 남성이고 교수다. 그는 자신은 모르는 것 같지만 성욕 해소가 무엇보다 중요한 사람이었고, 위력이 주는 압박이 무엇인지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는 딸보다 어린 제자와 사랑을 나눈다고 생각했고 솔직히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청문회에서 면죄부를 주기 위해 사죄를 하라 해도 '사실'만을 인정하며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다. 대학에서 쫓겨 난 그는 자신의 딸인 루시가 있는 이스턴케이프의 그레이엄스타운과 켄턴 사이에 위치한 샐럼으로 간다. 루시는 그 곳에서 작은 농장을 운영했는데 이웃인 페트루스가 루시의 농장을 도왔다. 동물에도 관심이 많았던 루시는 위탁소를 운영해서 개들을 돌봤고, 동물보호소를 운영하는 베브 쇼와도 친했다.


백인 여성 혼자 살기에 외진 곳에 자리한 농장은 위험했다. 물론 앞 문장에서 백인을 흑인으로 바꾸어도 전혀 위화감이 들지 않는다. 백인이든 흑인이든 여성 혼자 살기에 농장은 위험했다. 왜냐하면 그녀들의 몸과 꿈과 희망은 누군가에게는 그저 소유할 수 있는 어떤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 이 책에서는 아파르헤이트 이후 착취하고 지배하던 백인들이 처지가 바뀌어 흑인들의 눈치를 보는 상황이기에 백인 여성인 루시가 무척이나 위험해 보였다. 그리고 그 위험은 사실이 되었다.


이야기는 너무나 불공평했다. 루리가 제자를 성폭행한 것과 딸인 루시가 성폭행 당한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루리는 결코 멜러니와 루시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작가인 J.M.쿳시 역시 알지 못할 것이다. 이해하려 노력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루시, 베브 쇼, 로절린드, 멜러니의 엄마, 멜러니의 여동생 등 이 책에 나오는 여자들은 어딘가 남성의 성욕과 지배에 대해 무척이나 관대하거나 혹은 당연하다 여기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페트루스의 과거는 알 수 없다. 그가 백인들에게 착취를 당했는지 혹은 그의 가족 중에 끔찍한 일을 당한 사람이 있는지 말이다. 페트루스는 저열했다. 자신의 아내가 되지 않거나 자신의 보호 아래 들어오지 않으면 어떤 일을 겪게 되는지를 너무나 폭력적으로 보여줬다. 그리고 그것에 순응하는 루시는 멜러니와 겹쳐 보였다. 


베브 쇼는 어째서 루리를 택했을까. 어쩔 수 없이 행하는 일들 속에서 같이 죄책감을 공유하고 힘든 일을 덜어줘서일까. 차라리 이 이유라면 좋겠다. 베브 쇼를 통해 루시나 멜러니와 다른 여자 캐릭터를 구축하려 한 것이 아니길 바라니까. 성에 대해 결정권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또 불편했던 점은 바로 동물들이었다. 미친 짐승같은 놈들이 개들을 사살하는 장면이나 돈 때문에 정들었던 동물들을 안락사 해야 하는 장면이나 결국 버림받는 개들을 보면 가슴이 아팠다. 


만약 베브 쇼의 동물보호소 이야기가 없었다면 루리라는 인물은 훨씬 평면적이고 전형적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루리는 동물보호소에서 종도 다르고 말도 통하지 않은 동물들을 돌보고 힘든 일을 자처하면서 오히려 조금씩 자신 안에 있던 인간적인 면을 찾아내는 것 같았다. 자신이 준 고통, 딸이 받은 고통, 말 못하는 동물들이 겪는 온갖 고통에 대해 생각하면서 말이다. 여전히 인간의 고통과 동물의 고통은 끊이지 않고 미래는 알 수 없지만 루리는 변하고 있었다. 


루리가 쓰고자 했던 오페라는 처음에는 바이런의 이야기였고, 다음에는 바이런의 옛 연인 테레사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제는 저 개의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자신 안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고통은 이해할 수 없지만 이해하려는 시도를 하게 하고 끝내 견뎌내지 못하고 '추락'하게 되는 걸지도. 


어쩌면 진실과 화해는 허락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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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투리드 투명 북마크 - 방랑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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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유람을 잘 할 것 같은 냥이 모습.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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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5-06-12 1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이 귀여운 방랑 고양이는 뭡니까!
감성 돋네요.

꼬마요정 2025-06-15 15:05   좋아요 1 | URL
그쵸?? 세 가지 형태가 있던데 너무 고르기 어려웠습니다. ㅠㅠ 아마 다른 거도 사지 않을까 저를 걱정하고 있어요 ㅎㅎㅎ

꼬마요정 2025-06-15 15:06   좋아요 1 | URL
아, 두 가지네요. ㅎㅎ 걱정 안 해도 되겠어요. 두 개는 살 수 있죠 암요 ㅋㅋㅋ
 
본투리드 투명 북마크 세트 (3개입) -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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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책갈피를 어떻게 안 살 수 있나. 너무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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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5-06-12 11: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 해의 냥이 캐릭터 상품은 투명 북마크인가요?ㅋㅋ
어제 제가 그 냥이 실리콘 얼음통 꺼내서 얼음 얼리면서 올 해는 뭘까? 생각했거든요.ㅋㅋㅋ

꼬마요정 2025-06-15 15:04   좋아요 1 | URL
얼음냥이 꺼내셨군요. 저도 열심히 얼리는 중입니다. ㅎㅎㅎ 올해도 냥이 얼음통 다른 걸로 나오면 좋겠네요. 책갈피도 매우 마음에 듭니다!!
 
국산 비건인증 알토리 맛밤 50g - 맛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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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촉하고 달아 맛있다. 알이 굵어 갯수가 몇 개 안된다.
밤도 까는 사람이 없어 못 먹을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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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6-12 09: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국산비건 인증 알토리 밤맛이라니 밤이 국산이라 국내산 인증받은 것은 이해하는데 밤은 열매이니 당연히 육류는 아닌것은 누구나 알터인데 비건 인증은 무슨 의미인지 당최 알수가 없네요^^;;;

꼬마요정 2025-06-12 10:34   좋아요 0 | URL
식물성 원료만 사용하고 동물실험 안 하고 동물성 원료와의 교차 오염 여부까지 확인한다고 하네요. 그래서 비건 인증인가 봅니다. 맛있는데 몇 개 없어서 아쉬워요 ㅎㅎ

책읽는나무 2025-06-12 1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밤 좋아하는데 맛밤은 못 사먹겠더라구요.
양이 적어서 순삭!ㅜ.ㅜ

꼬마요정 2025-06-15 15:03   좋아요 1 | URL
맞아요 밤 양 너무 적어요ㅠㅠㅠㅠ 이거도 알은 크지만 갯수가 몇 개 안 돼서 뜯으면 그냥 없습니다ㅜㅜ
 
밤에 돌다리 밑에서 열린책들 세계문학 292
레오 페루츠 지음, 신동화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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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아라비안나이트를 읽으면 늘 꿈결을 거니는 듯한 느낌을 받곤 했다. 요정 지니가 소원을 들어주고 마신 지니가 복수를 하고 양탄자가 날아다니고 마법 그물이 물고기를 잡는 이야기들은 재미있으면서도 환상적이었다. 거기엔 늘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 나오고 인간이 마법을 부리곤 했다. 이 책 <밤에 돌다리 밑에서> 역시 이국적인 마법과 신이 존재하는 환상적인 이야기들이었다.


아라비안나이트와는 다르게 이 책의 무대는 프라하이다. 16~17세기 프라하는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다스리고 있었고, 황제인 루돌프 2세는 바보였다. 그리고 지독한 순정파라는 자신에게 취해 있는데다가 예술에 미쳐 있었고 회계에는 잼병이었다. 즉 아주 사치스러웠다. 


이 시대 유대인들은 늘 그렇듯 고리대와 상업에 능했고, 특히나 모르데카이 마이슬은 황금이 따라다닌다고 할만큼 사업수완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런 마이슬에게는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는데 아내인 에스터와 마이슬, 황제 루돌프 2세는 이 몽환적인 이야기의 핵심 인물들이다.


단편 열다섯 편과 에필로그로 이루어진 이 이야기들은 시간순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처음 시작은 유대인 마을에 페스트가 번져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이었다. 위대한 랍비가 여차저차하여 간음한 죄인을 벌하라는 신탁을 받아 돌다리 밑에서 서로를 휘감고 있는 로즈메리와 장미 중 로즈메리를 떼어내 강에 던진다. 간음한 여인의 영혼은 로즈메리에서 떠났고 루돌프 2세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다.


간음은 둘이 저질렀는데 왜 로즈메리만 죽어야 했을까. 읽는 내내 나는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건 로즈메리가 아니라 장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황제라는 자에겐 위대한 랍비의 술법도 통하지 않는 건지, 역사적으로 루돌프 2세가 살아있어서였는지 에스터만 죽었다. 이 아리송한 관계는 한참 뒤에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게 되는데, 황제와 마이슬의 인연이 엮이는 것도 제법 흥미진진했다. 


20세기 마이슬의 먼 후손이 한탄하며 재산 한 푼 못 받은 사연을 풀어놓는 것 역시 처량한 구석이 있었다. 마이슬이 최고권력자에게 시원하게 복수를 한 것처럼 보이기는 하나 그의 인생에서 사라진 빛이 돌아오지 않기에 복수가 씁쓸하고 허무해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황제 옆에 붙어 그를 등쳐먹던 자들의 말로를 보면 마이슬의 복수가 그리 헛되지는 않는 듯 했다. 


루돌프 2세가 죽고 프라하는 프로테스탄트를 옹호하지만 결국 30년 전쟁에서 패하고 보헤미아는 혼돈과 격랑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황제도, 위대한 랍비도 사라진 세계는 더 이상 꿈 같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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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5-06-08 18: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밤에 돌다리 밑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거기에서 이야기를 들을까요 옛날 이야기 같은 느낌이 드는군요 현실과 환상이 섞인 이야기... 지금 생각하니 남성과 여성이 함께 잘못했을 때 여성만 벌을 받는 일이 많았군요 둘 다 잘못한 건데... 지금이라도 다를지, 많이 달라지지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희선

꼬마요정 2025-06-09 10:19   좋아요 1 | URL
밤에 돌다리 밑에선 마법에 걸린 로즈메리와 장미가 얽힌답니다. 역사적 사실에 마법과 환상을 엮어서 정말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합니다. 진짜 둘 다 잘못했는데 여자만 죽었어요. 살인죄보다도 간음죄가 더 큰 건지… 간음했다고 페스트가 돌아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역시 옛날 얘기라 그런가봐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