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무도하가
공후인은 조선 진졸사람인 곽리자고의 아내 여옥이 지었다. 곽리자고가 새벽에 일어나 배를 젓고 있었는데 머리가 센 미친 사람 하나가 머리를 풀고 술병을 낀 채 물살을 헤치며 건너가려 했다. 그의 아내가 뒤따르며 막아보려 했으나 막지 못하고 결국 미친 이는 물에 빠져 죽었다. 이에 그의 아내는 공후를 타며 공무도하(公無渡河)의 노래를 지었는데 소리가 매우 구슬펐는데 노래를 마치고는 스스로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곽리자고가 돌아와 아내 여옥에게 그 노래소리를 들려주며 이야기를 하였더니, 여옥은 이를 슬퍼하여 공후를 타며 그 소리를 그대로 내었는데 듣고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여옥은 그 소리를 이웃에 사는 아낙인 여용에게 전해 주었는데 이를 이름하여 공후인이라 불렀다.[고금주]
公無渡河(공무도하) 임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
公竟渡河(공경도하) 임은 그예 건너시고 말았네
墮河而死(타하이사) 물에 빠져 돌아가시니
當奈公何(당내공하) 가신 임을 어이할꼬 [해동역사 권47]
일명 <공후인> (공후는 비파처럼 생긴 스물 석 줄로 된 현악기)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앞의 배경 설화로 인해 여옥이냐, 백수광부의 처이냐 하는 작자에 대한 문제가 많이 거론되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한국 신가(神歌)의 일면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란 명칭이 옳으며, <공후인>은 악곡의 명칭이요,작자는 백수광부(白首狂夫)의 妻이다. 제작 연대는 서기 2세기 후반으로 원래 민요이던 것이 後漢 때 한역되었다는 설도 있고, 공후인을 음악상의 操曲(조곡)인 동시에 문학상의 작품명으로 보고, 조선에서 한문으로 정착되어 중국에 유입된 가요로 한사군 이후부터 전한말에 백수광부의 처가 짓고, 여옥(麗玉)이 정착시킨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백수광부를 주신(酒神),여옥을 악신(樂神)으로 이해함으로써 이 설화를 神話로 설명하여 작품을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한편 이 노래를 우리 노래가 아닌, 중국 고대인의 노래로 보고, 여기에 나오는 朝鮮이란 6세기 전까지 존재했던 중국의 직예성(直隸省)의 조선현(朝鮮懸)을 지칭한 것으로, 또 곽리자고의 성명은 '곽마을에 사는 沙工'의 뜻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황패강, 윤원식, 한국고대가요, 1991, 새문사)
또, 이 작품에 등장하는 백수광부의 정체에 대한 의견을 살펴 본다.
모습이나 거동이 예사롭지 않은 점을 보아 죽은 사람이 무당일 것이라고 하는 견해가 특히 주목된다. 머리를 풀어 헤치고, 술병을 들고, 미치광이 짓을 하면서 강물에 뛰어들기도 하는 것은 황홀경에 든 무당의 모습이라야 이해가 된다. 강물에 뛰어들어 죽음을 이기고 새로운 권능을 확인하는 의식이 거행됐겠는데, 그렇게 하는 데 실패했으니 문제이다. 서툰 무당인 탓이라고 하면 심각한사태가 가볍게 처리되고 만다. 실패에서 어떤 역사적인 의미를 찾으면서 새로운 견해를 더 보탤 필요가 있다. 무당으로서의 권위가 추락했기 때문에 죽음에 이른 것이 아닌가 하고, 그렇게 된 이유가 고조선이 국가적인 체계를 확립하면서 나라 무당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지 못한 민간 무당은 불신되거나 배격되는 사태가 벌어진 데 있었을 법하다. 그 자리에서 공후를 탄 아내도 무당인 것 같으며, 그래서 굿노래 가락에 얹어 넋두리를 했다고 볼 수 있다.(조동일, 한국문학통사,지식산업사,198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