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피칼 커피(Tropical Coffee)

남국의 정열적인 무드가 살아 있는 커피로, 화이트 럼을 사용한다.



재 료
: 커피, 설탕, 럼, 둥근 레몬조각 1개

만드는 방법 : 설탕과 함께 커피를 따른 후, 위에다 레몬을 띄우고 화이트 럼을 서서히 따른다. 살며시 불을 붙이면 파랑색의 불꽃과 노란 레몬의 운치가 커피의 맛을 돋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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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듬버섯된장국

   

열량(1인분 기준) : 150Kcal
활용 : 일상식
재료(4인분 기준)
  생표고버섯8개, 팽이버섯80g, 느타리버섯80g, 토란80g, 유부4장, 실파, 다시마 국물8컵, 식초4큰술, 청주8큰술, 일본 적된장12큰술
 

1. 표고버섯은 갓말 굵게 채썰고, 느타리버섯은 길게 2~3등분한다.
2. 토란은 껍질을 벗기고 4등분한 후 식초를 넣은 팔팔 끓는 물에 3~4분 동안 삶는다.
3. 팽이버섯은 밑동을 자른 후 적당히 가르고 실파는 씻어 3~4cm 길이로 썬다.
4. 유부를 끓는 물에 데쳐 기름을 뺀 후 물에 헹궈 굵게 채썬다.
5. 냄비에 다시마 국물과 청주를 넣어 중불에 한소끔 끓어오르면 팽이버섯을 제외한 위의 재료를 넣고 약한불에서 10분간 끓인다.
6. 국물이 어느 정도 끓으면 된장을 풀어 넣고 팽이버섯과 실파 썬것을 넣은 후 불을 끈다.
 

1. 유부는 기름기를 없애기 위해 팔팔 끓는 물에 살짝 데친 후 찬물에 헹궈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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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수:20개 오븐온도:200℃ 굽는시간:10분
재료:박력분 200g,달걀 노른자2개분, 오렌지즙 50g, 버터 180g
슈거파우더 100g ,오렌지껍질 1개분,밀가루조금,설탕
 

 
1. 오렌지를 씻어 칼로 겉껍질을 얇게 벗긴다.(필러 이용하면 편리)
2. 껍질는 가늘게 채썰고,과육은 즙을 낸다.
3. 박력분을 체에 한두 차례 내린다.
4. 실온에서 버터를 녹여 슈거파우더를 넣고, 거품기로 젓다가, 달걀
노른자를 넣고 크림 상태가 될 때까지 거품을 낸다.
5. (4)에 오렌지즙과 채썬 껍질을 넣고 섞는다.
6. (5)에 체친 박력분를 넣고 고무주걱으로 자르듯이 반죽한다.
7. (6)반죽을 비닐랩으로 싸 냉장고에 1시간이상 넣어 꾸덕하게 만듬
8. (7)반죽을 긴 원통 모양으로 만들어 다시 냉장고에 30분정도 넣어
  서 꾸덕꾸덕한 상태로 만든다.
9. 쟁반에 설탕을 뿌린후,(8)의 반죽을 한번 굴려 5㎜두께로 자른다.
10 .오븐팬에 기름종이를 깔고 (9)의 반죽을 놓아 ,200℃로 예열한 오
븐에서 10분 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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럽보다는 동방에서 먼저 커피문화가 형성되었다. 1554년 현재의 이스탄불 콘스탄티노플에서 문을 연 커피점은 너무나 번창하였기 때문에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이곳에 많은 커피점이 세워졌다.

지식인들이 많이 드나들었기 때문에 <지혜로운 곳>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그 당시의 커피점에 사람들은 음악을 듣거나 체스를 하기 위하여 모여들었고, 그곳은 토론 장소로 이용되었다. 외국인들과 친해지기 위해서 오는 사람도 많았다. 콘스탄티노플의 커피점은 유럽 카페문화의 모체가 되었다.
그러나 이슬람제국의 커피점이 언제나 번창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정치적인 모임을 두려워한 군주에 의하여 세번이나 완전히 폐쇄된 적도 있었지만 대다수 국민의 반대에 부딪쳐 오래지 않아 다시 문을 열었다.
유럽에 커피점이 출현한 것은 그보다 세월이 지난 다음이었다. 유럽에서는 커피가 초기에 이교도의 음료라고 하여 거부되었으나, 교황 클레멘트8세가 이교도만 즐기기에는 너무 훌륭한 음료라고 하여 커피에 세례를 줌으로서 기독교인도 마실 수 있는 음료로 만들었다.
유럽 최초의 커피점은 베니스에 개점되었다.
초기에는 콘스탄티노플의 커피점을 모방하였다. 중산층을 주요고객으로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곧 방향을 바꾸어 상류층을 대상으로 하자 베니스의 커피점은 날로 번창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가 1645년이었다.
비엔나의 커피점은 1687년 군인이었던 게오르크 콜시츠키(Gerog Kolschitsky)가 처음 만들었다. 콘스탄티노플 커피점 그는 비엔나를 점령하고 있던 터키를 물리친 공적을 인정받아 터키가 후퇴하면서 남겨놓고 간 커피 500포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아랍 풍습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커피를 볶는 법과 추출하는 방법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커피를 제공할 때 터키를 물리친 기념으로 이슬람제국이 상징인 초승달 모양의 케이크를 만들어 손님에게 접대하였다. 이와 같은 것이 관습이 되어 오늘날에도 중부유럽에서는 커피와 함께 케이크 또는 달콤하게 가공된 고기를 곁들여 먹기도 한다.
 
 
편 지중해의 상권을 독점하고 있던 베니스의 상인들은 동방의 향신료 무역으로 새롭게 등장한 포르투갈, 영국 및 네덜란드 등의 상인들에게 그들의 영역을 점차로 잠식당하고 있었다. 잃어버린 상권을 되찾기 위하여 베니스 상인들은 커피를 독점생산하고 있던 아랍인들과 손을 잡고 커피무역을 시작하였다.
아라비아의 모카항에서 선적된 커피는 베니스항에 내려지고 이곳에서 유럽의 모든 지역으로 공급되었다. 클레멘트 4세 이때까지 아랍인들은 커피를 독점생산하기 위하여 외국인에게 커피를 판매하기 전에 커피 씨앗을 볶아버리거나 삶아 싹이 틀 수 없게 하였다.
이처럼 커피가 아랍세계를 벗어나는 것을 철저히 막았으나 17세기 초 인도의 바바 부단(Baba Budan)이 라는 한 순례자에 의하여 아랍의 커피 독점은 깨지고 말았다. 그는 1616년 아랍에서 훔쳐낸 7개의 커피 씨앗을 인도로 가져가 마이소아 지방에서 재배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정작 대규모로 커피를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네덜란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1690년 암스테르담 온실에서 재배에 성공한 커피묘목을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동인도에 보냈으며, 그리하여 1699년에는 자바와 수마트라에서도 재배되기 시작하였는데, 커피는 이 지역의 기후에 잘 적응하였다. 수년이 지나자 네덜란드 식민지는 커피 주 생산지가 되었고 동인도 회사와 암스테르담은 커피무역의 중심지로 등장하였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커피가격을 조정하기 위해서라면 과잉 생산된 커피를 과감하게 폐기처분까지 하였다.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기호음료로 차를 주로 마시고 있었는데 자국내 식민지에서 쉽게 커피를 구할 수 있게 된 후부터는 커피 소비국이 되었다.
차와 커피 어느편이 더 나은가에 대하여 논쟁이 끊이지 않자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3세 자신은 커피만을 마시면서 궁중의사에게는 차만을 마시게 하였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의사가 83살까지 장수를 하였고 왕 또한 의사와 같은 나이에 죽었다. 물론 현대 의학실험과는 성격이 다르지만 당시 의 유럽사회에 커피를 보급시키게 된 재미있는 실험이라 하겠다.
베니스에서와는 달리 네덜란드의 커피점은 번성하지 못하고 사람들은 주로 가정에서 커피를 마셨다. 북유럽의 차가운 날씨 때문에 밖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덜란드는 식민지에서 많은 양의 커피를 생산하였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상술을 지니고 있어 다른 국가와의 경쟁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커피를 독점하려고 하지 않았다.
 
 
1714년 암스테르담 시장은 프랑스왕 루이14세에게 커피나무 한그루를 선물하였다.
프랑스 왕실은 이미 커피에 매료되어 있었다. 커피에 설탕을 타 마시는 습관도 바로 이때 왕실의 여자들에게서 비롯된 것인데 설탕 대신 꿀을 섞기도 하였다. 베르아이유 궁전 온실에서 자란 커피 나무는 새로운 운명을 맞게 되었다. 즉 프랑스 식민지 마르티니크(Martinique)섬에 근무하던 끌류(Gabriel de Clieu)대위가 조국을 방문하였다가 임지로 다시 떠나면서 묘목 몇 그루를 갖고 가기를 원하였다. 되돌아가는 길은 험난하였다. 해적을 만나기도 했고 폭풍우 때문에 거의 죽을뻔 하기도 하였다. 항해도중 물이 떨어지자 끌류대위는 자신에게 할당받은 식수마저도 커피묘목을 살리기 위하여 나무에 주었다.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에 간신히 도착하였을 때 어린 묘목은 모두 죽고 단 한 그루만을 겨우 살 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한 그루는 카르티니크 섬에서 무성하게 번식하기 시작하여 1777년 천팔백만 그루가 되었다. 이곳의 커피는 그후 프랑스령 기아나(Guianna)로 옮겨져 울창하게 번성하였다. 그래서 이 한 그루의 묘목을 기념하기 위하여 프랑스 부르봉 왕조 이름에서 인용하여 이 지역에서 재배되는 커피를 부르봉 커피라고 부르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유럽의 다른 국가들도 자국의 식민지에 커피농장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스페인은 서인도 제도에, 영국은 1730년 자메이카와 1740년 인도에 대규모 커피농장을 만들었다.
세계 최대의 커피생산국인 남미의 브라질에 커피가 전해진 것은 1727년 사랑에 빠진 프랑스령 기아나 총독 부인이 포루투칼 연인과 헤어질 때 그에게 보낸 꽃다발 속에 커피나무를 숨겨 선물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그러한 이야기의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아무튼 브라질은 그 토양과 기후가 커피재배에 너무나도 적합하여 곧 세계에서 첫 번째 가는 커피 생산국가가 되었다.
북미대륙에 커피가 소개된 것은 끌류대위의 커피나무가 마르티니크 섬에 도착하기 전이었다. 영국에 정복되어 오늘날 뉴욕으로 불리우고 있는 당시의 뉴암스테르담에 1660년 커피가 등장하였다. 당시 북미의 영국인 가운데 부유층은 커피를 즐기고 있었으며 중산층은 주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1773년 영국의 조오지 국왕은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수출되고 있던 차에 세금을 지나치게 부과하였다. 이에 반발한 시민들은 보스턴항구에 정박 중이던 영국상선에 한밤중에 올라가 그배에 실려있던 차를 대서양에 모두 던져버렸다. 이것이 미국 독립전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보스턴 차사건이다. 그후 미국에서는 차를 대신하여 커피가 기호음료로 자리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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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Maya) 문명
 
마야문명


 울창한 밀림 안에 서 있는 티칼유적

마야문명은 현재 중앙아메리카의 멕시코 남부 치아파스주에서 과테말라, 유카탄 반도의 전역과 온두라스 일부에 퍼져있으며, 과테말라 북부 페텐 지역을 중심으로 번성한 고대 문명이다.
마야문명은 자연적인 지형에 의해 세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것은 광대한 열대림으로 덮힌 페텐 지구, 우수마신타 분지의 파시온 강 지구, 유카탄 저지대 지구이다.

다른 문명들과는 달리 인간이 살기에 아주 부적합한 열대 밀림에 도시를 세우고, 중앙집권의 단일 지도 체재가 아닌 수많은 부족의 집합으로써 도시 국가 형태를 이루고 있던 마야문명은 천문, 역법, 수학, 미술 공예 등이 놀랄 만큼 과학적이고 정교하였으며, 일종의 상형 문자인 신성 문자를 사용하여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이룩하였다.

마야문명은 기원전 2500년경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화전농사를 기반으로 하는 촌락이 올멕의 영향 하에 문명화로의 첫걸음을 내딛는 시기로, 기원전 300년까지를 형성기(形成期)라고 한다.
그 후로 3세기까지를 전고전기(前古典期)라 하는데, 서기 68년경에 이미 마야인은 지금의 온두라스에 우와하쿠콘이라는 도시를 세우고 약 120년간 그곳에 살았다. 엘미라도르 유적 등에서는 대규모 신전 건축이 세워졌다.


그들은 3세기 후반에 페텐 지방에 강대한 도시국가를 형성하였다. 이 때부터 987년까지를 고전기(古典期)라 부르는데 특히 티칼로 도읍을 옮기면서 전성기를 맞아 그곳에서 5세기 초까지 거주했다.
그 후 마야인은 도읍을 건립했다가 버리고 또 건립했다가 버리는 일을 되풀이했다.
8세기경부터 급속히 쇠퇴하기 시작하여 9세기말 멸망한다.

한편, 유카탄 반도 북부 저지대에는 5세기부터 도시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150년 후 문예부흥이 일어나고 유카탄의 마야문명은 8~9세기에 전성기를 누린다. 9세기말부터 유카탄이 멸망한 15세기까지를 후고전기(後古典期)라 한다. 에스파냐 인이 들어왔을 무렵(1510년)에는 이전의 화려했던 문명은 밀림 속에 함께 매몰되어 있었다.


 팔렌케 비명의 신전

마야문명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문명보다도 신비롭고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를 안고 있다.

첫째, 마야인들은 다른 어떤 문명과도 견줄 수 있는 뛰어난 문명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인간이 살기 부적합한 밀림 속에 도시를 건설했냐는 것이다.

이들이 도시를 세운 열대 우림 지역은 풀과 나무가 무성한 밀림으로 덮여있고 표범, 멧돼지, 독사, 독도마뱀, 독거미 등이 우글거린다. 또한 축축한 습기와 더위로 전염병이 유행하기 쉽다.
고대 4대 문명의 발상지들이 강을 끼고 온대기후에 속해 기후가 좋고 비옥한 토지에서 발생했던 것과는 달리 마야문명은 무더운 밀림 속에서 이룩되었다는 점이다.


 비명의 신전 내부에서 발견된 파카르 왕의 묘실

둘째, 마야인들이 세운 거대한 석조 건축물의 비밀이다. 그들이 세운 건축물은 인근 어느 민족보다도 뛰어났고 규모도 컸다.

페텐의 밀림 속에 있는 티칼은 신대륙 최대의 유적이며 마야 최고의 대도시이다. 그곳에는 신전, 궁전, 승원(僧院) 등 석조 건축물이 무려 1㎢ 당 약 200개의 비율로 3,000개 이상이나 된다.

이렇게 거대한 건축물을 건설하면서도 마야인들은 도시와 밀림을 연결하는 포장도로도 만들지 않았다.
또한, 수레바퀴의 사용법을 알고 있었음(무덤 속에서 바퀴 달린 장난감 출토)에도 불구하고 바퀴를 사용하지 않고 그들이 직접 그 많은 자재를 운반했다.


 태양의 돌

셋째, 다른 고대문명보다 훨씬 앞선 역법, 천문학, 수학이다. 그리스·로마 시대에도 사용되지 않았고 근세기에 들어와서 사용한 0(Zero)의 숫자를 마야인은 일찍이 실용화한 점이다.

카툰이란 단위로 시간을 측정했던 마야인들은 3세기경부터 이미 0 을 포함한 20 진법 숫자 체계를 갖고 계산했다. 0 의 사용은 인도보다는 3 백년, 아라비아 상인보다는 7 백년 정도 앞선 것이다.

마야의 천문학은 매우 발달하여 그들은 1년이 365.2420 일이라고 밝혔다. 오늘날 정확한 과학조사로 밝혀진 날짜는 365.2422 일이니 불과 17.28초의 차이다. 그들의 수치계산이 얼마나 정확했던가를 잘 알 수 있다.

또한, 마야인들은 금성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갖고 있어 584일 주기의 금성력(金星曆)까지 만들었는데, 그들은 태양력의 8년 동안에 금성력이 꼭 0.4일 어긋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넷째, 찬란한 마야문명을 꽃피었던 마야인은 9세기 이후 갑자기 사라졌다. 고전기의 마야의 도시는 이카튼(7,200일)의 종료 때마다 기념비를 남겼는데, 790년에는 19개의 밀림도시의 모습이 사라졌고 810년에는 12개 도시로 줄었으며 830년에는 불과 3개의 도시만이 남았다.


 코판 유적에 있는 신성 문자를 새긴 석비

전쟁이 일어난 흔적도 없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 흔적도 없다. 그들은 문명의 후계자도 남기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전설 하나 남겨놓지 않고 사라졌다.

왜 마야문명이 멸망했는가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우선 내부적인 요인으로 소수 지배계층에 대한 피지배계층의 반란을 들 수 있고 ,외부요인으로는 북쪽의 아즈테카 같은 강력한 종족의 침입을 들 수 있다.
다른 관점에서의 멸망의 원인으로는 지역적인 기후조건(열대 밀림지역), 토양의 생산성 부족, 문명 진보의 거부를 들 수 있다.


결국, 마야문명은 멸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으로 귀결 된다.
척박한 기후와 화전에 의한 토질 악화, 탐욕스러운 유럽의 정복자들과 전염병, 바로 이런 몇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멸망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재까지 살아 있는 마야인의 후예는 약 100만 명에 이른다고 하지만 그들은 고대 자신들의 선조가 이룩했던 찬란한 마야문명과는 완전히 다른 생활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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