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유산이 출간 되었다는 걸 알고 너무 기뻐서 바로 주문을 했다. 가 아니라 내가 지금 이런 걸 읽을 때가 아니지 하는 마음으로 책사기는 있는 뒤로 미뤄 둔 상태다. 당장 급한 책들만 e북으로 읽거나 도서관 가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읽는 정도.
그럼에도 불과하고 어쩐지 허전한 마음과 '아버지의 유산'을 읽기 전에 뭔가 로스를 정리해 두고 싶어서 머리 맡에 있던 '에브리맨'을 읽었다. 로스의 책들은 하도 몰아치듯이 읽어서 '미국의 목가'나 '네메시스','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포토노이의 불평','전락'을 제외하곤 글의 내용이 머릿 속에서 뒤죽박죽 섞여있다. 다시 찬찬히 읽고 싶은 이유다. <에브리맨>을 읽으면서 <에브리맨>을 읽은 것을 알게되었고, 이제 확실히 <에브리맨>의 줄거리를 기억하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아직 못 읽은 로스 책이 <콜롬버스여 안녕>과 <휴먼스테인1,2>라는 게 인식이 되었다. 그전에는 읽은 책과 안 읽은 책들이 오락가락 종잡을 수 없었는데 그나마 시험기간에 책상정리한 효과가 이나마는 있었다고 해얄까.
'500days in Ireland'라는 작은 활자에 끌려 <너는 어떻게 나에게 왔니>를 들춰 보았다.
'가장 낮은 곳에서 세상을 바라보던 그 때, 소외도 괴로움도 외로움도 없었던 나의 500일. 동화 같은 세상에서 겪은 진찌 동화 같은 나의 이야기'
'키 작은 동양 소년이 꼬박 이틀에 걸쳐 도착한 유럽의 작은 마을, 여기저기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마음이 진해지던 곳, 다섯 채의 집과 끝없이 펼쳐진 들판. 검은 밤하늘에 흐르던 은하수와 별빛이 가득 채운 나의 마음. 깊은 밤을 날아 적어 내려가던 작은 일기들을 보며 다짐하던 일'
'올리버가 잠들기 전에 나는 항상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우리가 오후에 산책을 하면서 본 개미떼 이야기, 젖소가 새끼를 친 이야기, 내일은 비가 올 거라는 이야기, 오늘 만든 핫초콜릿은 영 맛이 없었다는 시덥잖은 이야기까지. 새로울 것 하나 없는 이야기들로 마무리 짓던 밤, 우리에겐 늘 내일이 찾아 올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시시콜콜한 내일도, 지루한 모레도, 꼭 찾아 와주길 바랬다'
<너는 어떻게 나에게 왔니>는 군대를 다녀 온 이십대 초반의 한국 청년이 영국 시골의 장애우공동체마을에 가서 지낸 일상의 순간들을 담백하게 묘사하고 풍경과 마음을 잘 그려낸 감동적인 에세이었다.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는 봄에 나온 나희덕 시인의 에세이집인데, 나란히 꽂혀 있길래 손에 들었다. 여는 시, '길을 그리기 위해서는'의 마지막 단락이 책의 제목이 되었다.
길을 그리기 위해서는
마음의 지평선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
누군가 까마득히 멀어지는 풍경'
그 쓸쓸한 소실점을 끝까지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
나는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
중년의 시인은 길 위에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짧은 글들의 면면이 여행의 경험을 살린 차분한 글들이다. 쿠사마 야요이 전시회를 본 소회를 적은 '소멸의 방'이나 고흐와 안네 프랑크, 카프카의 방들을 엮어서 이야기한 '그들은 방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처럼 한 가지 주제를 엮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아우를 수 있는 공간을 다녀 보았다는 것이다. 어떤 이야기를 꺼내도 가지를 다섯 갈래는 칠 수 있을 것 같은 작가의 경험과 사유가 돋보인다. 작가가 직접 찍은 사진들도 잔잔한 글들과 더불어 조화롭다. 연말에 사람 많은 곳을 피해 조용히 있고 싶을 때 이런 책들을 손에 잡는다면 편안한 쉼이 될 듯하다.
요즘 곁에 두고 아무 데나 펼쳐서 읽는 <고마워 영화>. 자전거를 탄 소년에 이어 눈에 띈 영화는 '서칭 포 슈가맨'이다. 밥 딜런, 롤링스톤, 엘비스 프레슬리 시대에 공존 했던 가수 로드리게즈에 대한 다큐.
그는 자신이 살던 디트로이트에서 음반 두 개를 내고 달랑 6장만 판매되고, 잊혀진다. 그런 로드리게즈의 40년 후 반전의 삶이 펼쳐진다고 하면 적확한 표현이 아니고, 이미 반전의 삶을 살아 왔었다고 해야 하나...배혜경님은 이 영화의 OST를 사서 듣고 주변에도 선물을 했다고 했다고 하는데, 나는 이 영화를 주변인들도 봤으면 하는 열망이 넘쳐서 친한 친구와 중학생이던 딸을 데리고 다시 영화관을 찾았었다. 서칭 포 슈가맨을 본 사람들은 아마 대개 그랬을 것이다. 혼자만 보기엔 너무 아까운 영화. 보는 내내 다 보고 나면 정말 묵직한 감동이 밀려 오는데, 그 묵직함을 저자는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기적은 화려한 것도 뜻밖의 기이한 것도 아니다'
독서를 한다는 것은, 책을 읽는 것이다. 영화보기도 읽는다는 행위로 묶을 수 있는 '어떤 움직임'이다. 그 행위들이 자신의 삶에서 구체화 되었을 때 비로소 읽기에 의미가 부여 되는 것 같다. 고마워 영화를 읽으면서 저자는 영화 읽기나 책 읽기가 자기 삶에서 구체화 되는 분이라고 느꼈다. 한 행위가 다른 행위로 전이되고, 보다 더 구체화되어서 삶에서 녹아 날 때 비로소 살아 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읽는다 라고 감히 말 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