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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너머 ㅣ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80
찰스 키핑 글.그림, 박정선 옮김 / 시공주니어 / 199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창 너머'란 말은 창 안과 밖 두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제이콥은 엄마나 할머니가 오랜 시간 공을 들여서, 짰을 법한 레이스 커튼이 드리워진 창이 있는 집에 산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 창 너머로만 바깥을 내다 볼 수 있는 아이이다. 나는 창 안 쪽 따듯하고 안전한 세상에 있지만, 창 밖의 세상엔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가 싫어하는 사람, 동정심이 가는 사람, 무서운 속력으로 질주해오는 어떤 존재들이 득시글거리며, 내가 짐작하지 못하는 사이에 닥쳐와 버리는 무서운 사건들도 숨어 있다.
제이콥이 비록 질주하는 말들에게 채일 염려 없는 안전한 2층, 창 안쪽 세상에 살고 있는 소심한 아이지만 창마저 닫고 눈을 감은 채 살 수는 없다. 그런 관계들을 작가는 바깥 세상의 그림자가 아이 얼굴에 드리우게 해 세상과 나의 공생 관계를 드러내 준다. 내가 두려워하고 피하고 싶어하는 세상일지라도, 바깥 세상은 그렇게 '내게 드리워진 존재'라는 것을 암시한다.
아이의 마음 바깥에 존재하는 세계는 무엇하나 명확한 것이 없다. 그런 불확실성을 작가는 선과 색, 형태로 교묘히 이야기한다. 아이가 있는 공간은 창을 통해 세계를 향해 열려져 있지만 아이의 마음까지 열려져 있는 것은 아니어서 외로움으로 차있다. 그래서 바깥 세상에서 들어오는 햇빛을 등진 흰색 커튼은 아이에겐 검은색 커튼일 따름이다.
그러나 바깥은 또래 아이가 걸어다니고 내가 좋아하는 사탕가게도 있는 곳이다. 아이가 가지는 그런 불확실한 감정을 작가는 빛과 어둠이 동시에 느끼지는 밝은 색들로 어룽어룽하게 표현하였다. 그림 자체에서 느껴지는 어눌함과 선이 주는 명확함과 어두운 색은 이 책 전반에 암울하고 모호하다는 인상을 심어 놓았다. 동굴에서 내다보는 듯한 컴컴한 이미지가 세상에 속한 인간이라는 존재의 나약함을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처음엔 커튼 사이로 보이는 밖이라는 한계 상황을 보여 주기 때문에 그림의 구도가 단조롭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커튼은 아이의 내면을 보여주는 장치라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부터 역동적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처음에 아이는 자기 얼굴도 다 나오지 않을 정도로 커튼을 조금만 열었다. 미친 말들이 날뛰는 장면은 커튼을 곡선으로 휘게함으로써 말을 표현한 강렬한 색과 함께 요동치는 아이의 심장 소리가 들릴 듯 아이의 심리가 리얼하게 표현되었다. 돌연한 사건은 아이가 가지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확인시켜 주기도 하지만 커튼을 열어젖히고 한 발 세상에 다가가는 적극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창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교회와 양조장에 대비되는 청소부 질레트씨와 쭈그렁탱이라 불리는 노파와 그의 비쩍 마른 개가 있다. 제이콥은 질레트씨를 좋아하고 쭈그렁탱이와 그이의 말라빠진 개에 대한 동정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약한 것은 강한 것에 치이고, 제이콥은 김이 서린 창문에다 웃고 있는 통통한 쭈그렁탱이와 역시 통통한 개를 그려넣음으로써 세상에 대한 희망이랄까 자신의 의지를 통해 고독하고 두려웠던 내면을 밝게 해소하였다. 마지막 장면이 압권인데 창 안의 세계와 밖의 세계 그 아스라한 경계 위에 제이콥의 소망이 빛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강한것과 약한 것이 존재하고 강한 것이 약한 것을 내리누르는 곳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제이콥과 같은 소심하고 약한 소년이 김서린 창문에 그려넣는 그런 희망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는 것을 작가는 절묘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도 '창 너머'는 암울한 이미지 때문에 어린이 그림책으로 선택 받기 힘들다. 그러나 이 책은 인간의 본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어른과 아이가 함께 볼 수 있는 속깊은 그림책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