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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 ㅣ 그림책은 내 친구 2
앤서니 브라운 글 그림, 장미란 옮김 / 논장 / 200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어두운 터널 안으로 들어가는 용기를 내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문학적 상상력으로 채워진 소심한 여자아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 소심함도 두려움도 물리치게 만드는 힘이 있다면 그건 사랑이다. 우리는 살면서 그런 터널을 통과해야 할 일들을 많이 겪는다. 두렵지만 용기를 내야하는 일들이 허다하다. 그런데 형제나 남매는 가족이기에 오히려 불신이나 불협화음에도 익숙하게 그냥 적응해버리고 마는 것 같다.
그래서 <터널>은 우리가 익숙하게 적응해 왔던 불협화음에 대해 생각해 볼 빌미를 제공한다. 어른도 마찬가지이지만, 요즘 아이들은 더욱 개성을 인정하는데 서툴다는 것을 느낀다. 아이들에게 '다름'은 곧 '왕따'의 시발점이다. 그 다름을 어떻게 바라보고 인정하느냐에 '조화와 소통의 열쇠'가 있다. 작가는 '터널'을 어떻게 소통의 공간으로 열어 놓았을까?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도 같이 터널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같은 환경에서 자란 두 아이, 나이가 다르고 성별이 다르다. 단지 그 뿐이다. 그런데 두 아이에겐 마치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작가는 그 다름을 이렇게 표현했다. 동화책과 축구공. 어린이의 눈높이에서 精,動을 이렇게 상징적으로 잘 표현해 주는 물건이 또 있을까.그 배경으로 우아하고 고급스런 벽지와 튼튼한 붉은 벽돌담이 대비되어 있다.
그리고 첫 페이지엔 그 벽지와 벽돌담을 배경으로 같은 느낌의 서로 다른 두 아이가 나란히 있다. 무표정한 얼굴로 액자 속에 갇혀 있는 느낌이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 세계에만 갇혀 있으려는 고집스런 표정과 소녀적인 예민함, 소년의 냉소적인 웃음기가 보일 듯 말 듯 그려져 있다.
아이들의 표정에서 자신은 드러내되 상대는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독선이 읽히기도 한다. 또래의 독자가 읽었을 때 충분히 동일시가 가능한 표정들이다. 정적이거나 동적이거나, 자기의 색깔을 가진 아이들이라면 모두 그 표정에서 자기 모습을 읽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익숙한 것만큼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이 또 있을까.
그런 점에서 작가는 첫 장부터 어린 독자들에게 안정감이란 방석을 깔아 주었다. 그 방석에 앉아 편안히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면, 틀어박히기를 좋아하는 아이와 내지르기를 좋아하는 아이의 충돌이 담담하고 일상적인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다. 보다 못한 엄마에게 내쫓긴 두 아이가 간 곳은 쓰레기장, 일상의 찌꺼기가 모여 있는 곳이다. 찌꺼기는 모이면 배설을 해야하는 법, 그 곳에 터널이 있었다.
오빠는 마치 '뻥' 하고 공을 차듯 주저함 없이 터널로 들어가 버리고, 누이는 책을 펼치듯 터널 속의 공간을 상상하고 또 오빠의 불확실한 미래를 상상한다. 누이에겐 오빠가 등을 돌리고 미지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은 공포였다. 내 곁에 있는 형제가 등 돌리고 차가운 돌이 되듯 남처럼 생활한다면, 세상은 온통 어둡고 외롭고 불안하게만 느껴질 것이다. 그래서 숲 속을 도망치듯 오빠를 찾아다니는 동생의 모습엔 외로움과 두려움이 잔뜩 배어있다.
늑대, 곰, 괴물로 보이는 나무들은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누이의 심정을 잘 대변하고 있다. 그런 무서운 세상에서 발견한 오빠. 그 존재는 더러 차갑고 불완전하고, 나하고 많이 다르더라도 내가 먼저 껴안음으로써 내 편이 되고야 만다. 돌로 굳어버린 오빠를 끌어안는 동생의 암담하고 막막한 심정과 서서히 사람으로 돌아오는 오빠...박제된 듯한 그림에서 풍겨 오는 따듯함의 의외성은 우리가 핏줄을 어떻게 보듬어야 하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핵가족 시대, '둘'이라는 울타리는 티격태격할 수 있는 '좁음'을 언제나 안고 있다. 그래서인지 다툼이 일상화 되어버린 형제들이 많다. 그런 다툼을 보고 있으면 양보나 화해, 용서라는 미덕은 아예 아이들에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진다. 가정에서 연습되지 않은 용서와 배려가 어찌 사회에서 발현되길 바라겠는가?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면 용서와 화해의 마음은 절로 열릴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망설임 없이 우리 집 두 아이를 모두 <터널> 안으로 들여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