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가끔 열람실에 가서 공부를 한다. 나는 칸막이가 있는 곳보다 큰 책상에 사람들이랑 모여서 공부하는게 더 좋다. 갑갑하지 않고, 공간도 여유가 있는데다 나와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상대방 모르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에는 맞은편에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분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아침 일찍부터 나와 늦게까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는지 갖가지 공부 도구(무려 연필꽂이까지)를 바리바리 싸갖고 다니는 듯 했다. 공부는 도구의 문제가 아니라며 콧방귀를 뀌었다가 기능적이고 아름다운 문구류에 거듭 침을 삼켜댔다. 문구류는 여자 아이들의 영원한 로망 같다.
책을 보면서 메모를 하고, 책 사이에 포스트잇을 붙였다. 일기를 썼고, 사설을 필사했다. 영어 공부를 아주 잠깐 한 후에 아주 오랫동안 자기도 했다. 팔을 대고 엎드려 잘 때면 짧아서 달콤했던 학교 다녔을 때의 쉬는 시간이 생각난다. 무료하거나 건방졌던, 그래서 더더욱 나를 주눅 들게 했던 아이들 틈에서 딱 한모금씩 자는 잠은 얼마나 맛났던지.
***** 푹 잔 후에 점심을 먹으러 나왔다.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굴려 도착한 곳은 도서관 근처에 있는 국수집이다. 가운데 테이블 주위로 빙 둘러 앉은 사람들이 김밥이며 오뎅을 먹었다. 잔치 국수를 시켜놓고, 갖다주신 접시에 먹을만큼만 김치를 담았는데 옆자리에 앉으신 분이 김치를 엄청 많이 더는거다. 저거 다 못먹으면 음식 쓰레기 되는데 무슨 욕심이 저리 많담, 혼자 생각을 하니 미운 마음도 들고, 사람들이 의식이 없네 어쩌네하며 혼자 궁시렁대고 뭐, 좀 어줍잖은 생각을 했다.
국수를 먹다보니 김치가 모자라, 다시 덜려고 하다 옆에 있는 분을 힐끔 봤는데 이런, 그 분의 김치그릇은 김칫국물 조금 말고는 남김없이 비워져있었다. 김치 좀 더 드릴까라고 묻자, 그분은 됐다고 하셨다. 그분은 뜨거운 김에 콧물이 나는지 살짝 훌쩍이며 국수를 마저 다 먹고 있었다. 보라색 코트에 둔탁한 색의 스커트와 컬이 풀리기 시작한 머리 스타일.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를 자주하는 사람처럼, 혹은 슬플 일이 많은 사람처럼 울상인 내 옆자리 누군가. 나는 내 옆자리에 앉은 사람을 '보았다' 아마, 다른 곳에서 마주쳤다면 아무 의미가 없을 정도로 아주 짧게.

안개 낀 호수 공원. 모든 것은 흐릿하고, 남김없이 가려져있다.
오늘처럼 춥고 작은 것에도 투덜거리게 하는 날에 콩나물국밥을 먹을 수 있다는건 얼마나 다행인일일까. 알코올기 싹 뺀 모주는 속을 든든하게 한다.
******************************************************************************************************************
***** 연극이 이렇게 많은 에너지를 쏟아내고, 끊임없이 기다려야하는 일이라면, 나 혼자 하는게 아니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의 잘못으로 같은 장면을 무한반복하는건 일도 아닌걸 알았다면 아마 난 재미삼아서라도 연극을 하지 않았을거다. 본격적으로 움직임과 목표와 전략을 갖고 연기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다른 곳에서와 다름없이 나는, (안 보이게)짜증을 내고, 따지고, 이해가 될 때까지 묻는다. 포기할 이유를, 어떻게 하면 많이 피곤하지 않게 할 것인가를 찾는다. 하지만 나는 예전에라면 알 수 없었던 나를 보기도 한다. 내가 이렇게 수줍음을 잘 탔던가, 난 좀 무뚝뚝한 편이구나, 표현력이 부족하구나.
순간순간 반짝이는 열의의 조각들이 워크샵 공연 끝날 때까지 빛났으면 좋겠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그들의 열정을 느낀 것만으로 좋은 경험이었다고 한발 뒤로 빼는 짓은 정말, 안 했음 좋으련만.
***** 지난 크리스마스에(무려 작년이다!) 나와 애인은 초 켜놓고 하는 이벤트 대신 좀 멋쩍은 놀이를 했다. 식상한 서로의 언어들을 돌이켜보는 이른바 '우리의 상용어' 시간. 서로가 자주 쓰는 말을 통해 무심하거나 안 예쁜 짓을 반성한다기보다는 까페 분위기가 좀 좋아서 해본 짓이었다.
내가 주로 쓰는 말은, 그거 농담이야?. 내기 할래? 더러워, 냄새나, 조용히 해, 넌 나한테 관심이 없어, 맨날 말만 해, 오늘 어때(다른 버전으로는 나 괜찮아, 어디 달라진데 없어?) 배는 부른데 음식 남기면 안 돼, 좀 걸을까.
반면에 그가 주로 쓰는 말은, (괜히 잘해서 뭘 원하냐고 물어보면)평소 때야, (나보고)독재자, 강제로 시키냐, 친구들이랑 같이 만날래, 어디야, 밥 먹었어, 뭐 먹었어, 배 나와 배, 살쪄 살, 넌 너무 극단적이야, (뭔가 캥길 때 다정한 목소리로) 아치야, 한번 봐주십쇼, 이제 그만 먹어 배부르잖아.
주로 쓰는 말을 적다보니 우린 서로 좋아하는게 아니라 주종 관계는 아닐까란 심각한 회의가 들었지만, 그가 그린 내 얼굴 그림이 너무 범죄자스러워서 권력 관계는 맘 먹기 나름이라고 덮어두었다. (장소협찬 : 까페, 러블리)
***** 여행은 시간을 달리 사유하는 것이다. 장소와 다른 사람의 삶을 재현하는건 여행이 꿈꾸는 달콤한 이상 정도가 아닐까. 달리 말하면 사람들은 쉬고 싶고, 여행을 통해 쉴 수 있다고 믿으며 쉬는 가운데에서도 색다른 것을 경험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하는건 아닐까. 이걸 착각이라고 하는건 여행을 통해 기대하는 일탈이나 시간의 속도가 다른 경험은 자신의 이상적인 여행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여유있는 시간은 여행을 떠나지 않고도 가능한거니까. '셰익스피어 배케이션'에서 김경이 뿅갈만한 여행을 해놓곤, 떠나보니 일상 역시 나 하기 따라 여행일 수 있겠다란 얘기를 결론으로 내는걸 보고 아주 확신하게 됐다. 침대 위에서 상상으로만 하는 여행(보통의 여행의 기술에 따르면)은 얼마나 간편하고 효율적인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물론, 아닐 수 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뭐냐면, 여윳돈 있는걸로 날 위해 뭔가를 하고 싶은데 할게 없다는거다. 책은 안 사기로 했고, 옷은 동생걸로도 충분하고, 자전거는 안쓰러울 정도로 낡았지만 아직 잘 굴러간다. 연극과 어학원 끝나는대로 여행을 떠나고 싶은데 어디 가고 싶은 곳 하나 없어 괜히 여행에 딴지를 걸고 싶은 심술이 발동했달까. 동네 고착형 인간이 될까, 우물 안 개구리가 될까 겁나지만 떠난다고 해결될 것 같진 않은데. 중국에 가서 '와, 중국은 정말 커.' 정도의 감상만 담아올까 염려되기도 하고. 나란 인간은 참.
***** 페이퍼를 좀 묵혀두고 손질해야겠다 싶었는데 하루에도 몇번씩이나 내 서재를 드나든다는 동생 생각에 그냥 올린다.
옥찌들 얘기는 없지만, 네 얘기를 해줄게.
얼마 전에 동생이랑 찜질방 갔다가 앞으로 어떻게 할거냐는걸 물었더니, 동생 말하길,
- 응, 나 좀 계획을 세워봤어.
라고 말하는거다. 이 녀석이 신통하게 계획을 다 세워, 무슨 계획인지 들어볼 생각으로 폼까지 잡고 있는데 하는 소리가
- 언니, 나 로또 좀 제대로 사볼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