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책세상 니체전집 14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정현 옮김 / 책세상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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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능력에 의해서' 라고 칸트는 말했다

 

맨 먼저 ㅡ 꿈을 꾼 사람은 늙은 칸트였다. '하나의 능력에 의해서' 라고 칸트는 말했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도대체 이것이 ㅡ 대답이란 말인가? 설명이란 말인가? 아니면 오히려 물음의 반복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도대체 어떻게 아편이 잠을 들게 만드는가? '하나의 능력에 의해서', 즉 최면의 힘에 의해서이다. ㅡ 몰리에르Moliere의 작품에 나오는 의사는 이렇게 대답한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최면의 힘이 있기 때문에,

그것은 감각을 재우는 성질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대답은 코미디에 속한다. 이제 마침내 "어떻게 선험적 종합 판단이 가능한가?" 라는 칸트의 물음을 "왜 그러한 판단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가?" 라는 다른 물음으로 바꿔야만 할 시기가 왔다. 즉 우리 같은 종(種)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 그러한 판단을 참이라고 믿어야만 한다는 사실, 그리고 왜 그 판단이 당연히 잘못된 판단이 될 수 있는지를 파악해야 하는 시기가 왔다! 또는 더 분명하고 근본적으로 말해, 선험적 종합 판단은 전혀 "가능한 것"이 될 수 없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판단을 주장할 권리가 없다. 우리의 입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단지 잘못된 판단일 뿐이다. 물론 삶의 관점주의적 시각Perspektiven-Optik에 속하는 하나의 표면적인 믿음이나 외관으로 단지 그 판단의 진리에 대한 믿음은 필요하다.

 

니체, 『선악의 저편』, <제1장> 철학자들의 편견에 대하여, 제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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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칸트와 은둔하는 병자 스피노자

 

늙은 칸트는 경직되고 점잖은 위선으로 우리를 변증법의 샛길로 유인했는데, 이 샛길이 우리를 그의 '정언명법' 으로 이끌고 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 유혹하고 있다.이러한 연극은 우리처럼 버릇없는 사람들을 웃게 만든다. 우리는 고리타분한 도덕가나 도덕 설교자들의 노회한 간계를 파헤치는 것에서 적지 않은 즐거움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또는 스피노자가 자신의 철학에 ㅡ 이 용어를 바르고 적합하게 해석하면, 결국 "그 자신의 지혜애 대한 사랑" 이다 ㅡ 마치 청동 갑옷을 입히고 가면을 씌우는 저 수학 형식의 기괴한 술책도 그렇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처음부터 이 정복하기 어려운 처녀신 팔라스 아테네Pallas Athene에게 감히 시선을 던지고자 하는 공격자의 용기를 위축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은둔하는 병자가 쓰고 있는 이 가면은 얼마나 많은 특이한 수줍음과 허약성을 드러내고 있는가!

 

니체, 『선악의 저편』, <제1장> 철학자들의 편견에 대하여, 제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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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라고 부른 자기 편견의 교활한 대변자

 

모든 철학자에 대해 반쯤은 불신으로, 반쯤은 조소의 눈길로 보도록 부추기는 것이 그들이 얼마나 순수한지, 그들이 또 얼마나 자주 쉽게 잘못 파악하고 잘못된 길로 가는지, 간단히 말해 그들의 유치성과 순진함을 다시 알아차리게 된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문제의 상황은 그들이 충분히 정직하게 다가서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진실의 문제가 단지 먼 곳에서 언급되어도 모두 함께 커다란 도덕적 소동을 일으킨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견해를 냉철하고 순수하며 신적으로 초연한 변증법의 자기 전개에 의해 발견하고 획득한 것처럼 군다 (그들보다 더 진지하고 우둔한 모든 계층의 신비주의자들과 구별된다. ㅡ 이 신비주의자들은 '영감' 을 말한다. ㅡ ) : 그러나 반면 근본적으로 하나의 전제된 명제, 하나의 단상, 하나의 '영감', 대부분의 추상화되고 여과되어 나온 그들 마음의 소망은 대개 뒤늦게 찾은 근거에 의해 정당화된 것이다. ㅡ 그들은 모두 옹호자라 불리기를 원하지 않는 옹호자이며, 실상은 대부분 그들이 '진리' 라고 부른 자기 편견의 교활한 대변자이기조차 하다. 그들은 이 사실, 바로 이 사실을 고백할 양심의 용기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고, 또한 적이나 친구에게 경고하기 위해서든, 오만이나 자기 자신을 조롱하기 위해서든,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게 할 용기라는 훌륭한 취향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니체, 『선악의 저편』, <제1장> 철학자들의 편견에 대하여, 제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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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알겠는가?

 

위대한 것은 모두 그것을 인류의 마음속에 영원한 요구로 새겨 넣기 위해서, 우선 섬뜩하고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흉한 얼굴로 지상을 방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보인다. 독단적 철학, 예를 들면 아시아의 베탄타Vedanta 이론과 유럽의 플라톤주의가 이런 흉한 얼굴이었다. 우리는 이러한 철학의 은혜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 온갖 오류 가운데 가장 나쁘고 지루하며 위험한 것은 독단론자들이 저지른 오류, 즉 플라톤의 순수 정신과 선 자체의 고안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나 이 오류를 극복하고, 유럽이 이러한 악몽에서 벗어나 안도의 긴 숨을 내쉬며 적어도 좀더 건강한 숙면을 즐길 수 있게 된 지금부터 우리의 과제는 깨어 있음 그 자체이며, 우리는 이러한 오류와 투쟁함으로써 엄청나게 단련된 힘을 모두 상속받은 것이다. 플라톤이 그랬던 것처럼, 정신과 선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확실히 진리를 전복하고 모든 생명의 근본 조건인 관점주의적인 것을 스스로 부인함을 의미했다. 우리는 의사로서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병은 어디에서 고대에 가장 아름답게 자라난 존재인 플라톤에게로 옮겨왔는가? 사악한 소크라테스가 그마저도 타락시켰던 것일까? 소크라테스야말로 청년들을 타락시킨 자가 아닐까? 그 스스로 독배를 받을 만했던 것은 아닐까?" ㅡ 그러나 플라톤에 대한 투쟁, 또는 대중을 위해 좀더 이해하기 쉽게 말한다면, 수천 년에 걸쳐 지속되어온 그리스도교 교회의 억압에 맞서 한 투쟁은 ㅡ 왜냐하면 그리스도교는 '대중'을 위한 플라톤주의이기 때문이다 ㅡ 유럽 내에서 아직까지 없었던 화려한 정신적 긴장을 만들어냈다. 사람들은 이렇게 팽팽한 활을 가지고 이제부터 가장 먼 표적을 맞힐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유럽인은 이 긴장을 위기로 느끼고 있다. 그리고 이미 두 번씩이나 활의 시위를 풀고자 하는 대규모의 시도가 있었다. 한 번은 예수회 정신Jesuitismus에 의해서였고, 두 번째는 민주적 계몽주의에 의해서였다. 이 민주적 계몽주의는 실상 출판의 자유와 신문 구독 덕분에 정신 자체를 더 이상 그렇게 쉽게 '위기'로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회원도 민주주의자도 아니고 게다가 충분한 독일인도 아닌 우리, 선한 유럽인이며 자유로운, 대단히 자유로운 정신인 우리 ㅡ 우리는 여전히 긴장을, 정신의 온갖 곤경과 그러한 정신적 활의 긴장 전체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아마 화살과 과제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누가 알겠는가? 목표도 있는지……

오버엥가딘의 질스마리아에서

1885년 6월

 

 - 니체, 『선악의 저편』, <서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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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결코 빈 말이 아니었다. 영국이 설마 EU에서 '진짜로' 탈퇴하리라고까지 예상한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 충격이 훨씬 더 크게 나타난 듯하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에 전 세계 금융시장이 출렁이면서 하루 사이에 2,440조원이 증발했다"고 한다. 저 천문학적인 숫자 하나만 보더라도, '영국인들'이 이번에 정말 큰 일을 저지르긴 저지른 모양이다.

 

그런데 이런 충격적인 일을 겪고 나서 오늘 낮에 우연히 '니체의 책'을 펼쳤더니 그 속에는 마치 '오늘날'을 예견한 듯한 글들이 잔뜩 담겨 있었다. 과연 니체의 예견은 정확했다!  그는『선악의 저편』이 '2000년경'에야 읽힐 수 있다고 1886년 질스마리아에서 쓴 한 편지에서 '미리' 말했던 것이다!

 

 

 * * *

 

조국애나 애향심의 그와 같은 격세유전적인 발작

 

우리보다 더욱 둔중한 정신을 지닌 사람들은 우리의 경우에 몇 시간에 한정되어 몇 시간 안에 끝내게 될 일을 그들이 소화해내고 '신진대사'를 하는 속도와 힘에 따라, 어떤 사람은 반 년 만에, 어떤 사람은 반평생에 걸쳐 훨씬 긴 시간을 들임으로써 비로소 끝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내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조국애나 애향심의 그와 같은 격세유전적인 발작을 극복하고 다시 이성으로, 말하자면 '선한 유럽 세계'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급속히 변해가는 우리의 유럽에서도 반세기 정도가 필요할지 모르는 우둔하고 머뭇거리는 인종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8장 민족과 조국>, 241절

 

 * * *

 

'좋았던 옛' 시절은 지나갔다.

 

'좋았던 옛' 시절은 지나갔다. 그 시절은 모차르트에 의해 다 노래로 불리었다 : ㅡ 그의 로코코풍은 아직도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고, 그의 '훌륭한 사교'와 그의 부드러운 열광이, 중국적인 것이나 당초무늬 장식에 대한 그의 어린아이 같은 즐거움이, 그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정중함이, 우아한 것, 사랑스러운 것, 춤추는 것, 눈물 어릴 정도의 황홀한 것을 향한 그의 갈망이, 남국적인 것에 대한 그의 믿음이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무엇에 아직은 호소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행운인가! 아, 언젠가는 이러한 것도 사라지게 되리라! ㅡ 그러나 베토벤에 대한 이해와 감상이 더 빨리 사라지게 되리라는 것을 누가 의심할 수 있겠는가! 그는 실로 양식의 변화와 양식 파손의 여운에 지나지 않았으며, 모차르트처럼 수세기에 걸친 위대한 유럽적 취미의 여운은 아니었다. 베토벤은 끊임없이 부서지는 흐늘흐늘해진 옛 영혼과 끊임없이 다가오는 미래의 너무 젊은 영혼 사이의 중간 사건이었다. 그의 음악에는 영원히 상실해가는 것과 영원히 무절제한 희망 사이의 희미한 빛이 비추고 있다. ㅡ 루소와 더불어 꿈꾸고 혁명이라는 자유의 나무 주위에서 춤추고 마침내 나폴레옹을 거의 떠받들다시피 되었을 때, 유럽을 흠뻑 적셨던 빛이 이와 똑같았다. 그러나 이제 바로 이러한 감정은 얼마나 빨리 퇴색되어가고, 오늘날 이러한 감정에 대해 아는 것마저 이미 얼마나 어렵게 되었는가, ㅡ 저 루소, 실러F.Schiller, 셸리Shelley, 바이런Byron의 언어가 우리의 귀에는 얼마나 생소하게 들리는가, 베토벤에게서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유럽의 똑같은 운명이 이들 모두에게서 함께 언어의 길을 찾아냈던 것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8장 민족과 조국>, 245절

 

 * * *

 

영국인들이란 

 

영국인들이란 ㅡ 철학적 종족이 아니다 : 베이컨F.Bacon은 철학적 정신 일반에 대한 공격을 의미하며, 홉스Th.Hobbes, 흄D.Hume, 로크J.Locke는 한 세기 이상이나 '철학자'라는 개념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가치를 약화시킨 것을 의미한다. 칸트는 흄에 반항하여 일어나 스스로 높아졌다. 로크는 셸링이 "나는 로크를 경멸한다"고 말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영국의 기계론적 세계의 우매화와 투쟁하는 가운데 헤겔과 쇼펜하우어는 (괴테와 더불어) 한마음이 되었고, 철학에서 이 두 적대적인 천재 형제들은 서로 독일 정신의 대립적인 양극을 추구했고, 오직 형제들만이 서로 잘못하듯이, 이때 서로 잘못했던 것이다. ㅡ 영국에 결여되어 있고 언제나 결여되어 있었던 것을 저 반 정도는 배우이자 충분히 훌륭한 수사가이며 멍청하며 정신이 혼란한 사람 칼라일Carlyle은 알고 있었다. 칼라일은 자기 자신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 즉 자신에게 결여되어 있었던 것을, ㅡ 정신의 본래적 과 정신적 통찰의 본래적 깊이를, 간단히 말해 철학을 ㅡ 정열적인 찌푸린 얼굴 아래 숨기고자 했다. ㅡ 굳게 기독교에 매달린다는 것은 이렇나 비철학적 민족의 특징이다. 그들에게는 '도덕화'하고 인간화하기 위한 기독교적 훈육이 필요하다. 독일인보다 더 음울하고 관능적이며 의지가 강하고 잔인한 영국인은 ㅡ 바로 그렇기 때문에 두 민족 가운데 더 저속하고, 또한 독일인보다 더 경건하다 : 영국인에게는 여전히 기독교가 더욱 필요하다. 좀 더 예민한 콧구멍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러한 영국의 기독교 자체에도 변덕과 술로 인한 방탕이라는 실로 영국적인 냄새가 따라다니는 것을 느끼는데, 기독교를 그러한 것에 대한 치유제로 사용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ㅡ 즉 조야한 독에는 정교한 독이 사용된다 : 좀더 정교하게 독에 중독된다는 것은 실로 우둔한 민족에게는 이미 진보요, 정신화되기 위한 한 단계이다. 영국인의 우둔함과 농부 같은 진지함은 기독교적인 몸짓 언어이나 기도와 찬송으로 여전히 가장 잘 견딜 수 있게 위장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해석되고 다시 해석된다. 이전에는 감리교의 지배 아래 그리고 요즘에는 다시 '구세군'으로 도덕적으로 투덜댈 줄 아는 저 동물 같은 술꾼과 방탕한 자들에게 실로 참회의 떨림은 스스로 높아질 수 있는 비교적 최고의 '인간애'의 성과일 수 있다 : 이 정도는 정당한 것으로 인정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가장 인도주의적인 영국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 이것은 비유로 (또한 비유 없이 ㅡ ) 말하자면, 음악이 결핍되었다는 것이다 : 영국인은 정신과 몸의 움직임에 박자나 춤이 전혀 없으며, 아직까지 단 한 번도 박자와 춤에 대한, '음악'에 대한 욕구를 가진 적이 없다.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자. 가장 아름다운 영국 여성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아라 ㅡ 지구상의 어느 나라에서도 이보다 더 아름다운 비둘기와 백조는 없다. ㅡ 마지막으로 그녀들이 노래 부르는 것을 들어보라! 그러나 내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단 말인가 ……

 

 - 니체, 『선악의 저편』, <제8장 민족과 조국>, 252절

 

 * * *

 

그들의 다양하고 격정적인 예술을 통해 열망하는 것이 유럽, 바로 이 하나의 유럽인 것

 

민족주의의 망상이 유럽의 여러 민족들 사이에 가져다주었고 아직도 가져다주고 있는 병적인 소외 탓에,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이 망상에 힘입어 기운차고, 그들이 추진하고 있는 상호 분리 정책이 필연적으로 과도기적 정책밖에 될 수 없음을 조금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근시안적이고 성급한 정치가들 탓에, ㅡ 오늘날에는 말로는 전혀 표현할 수 없는 모든 수많은 것 탓에, 이제 유럽이 하나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가장 명백한 징조들이 간과되거나 제멋대로 기만적으로 다시 해석되고 있다. 이 세기의 좀더 깊이 있고 생각이 넓은 모든 인간의 경우에는, 이 새로운 종합에 이르는 길을 준비하고 시험삼아 미래의 유럽인들을 앞당겨 생각해보는 것은 그들의 영혼의 신비적인 작업에 깃들인 본래의 전체 방향이었다 : 그들이 '조국'에 속했던 것은 그들이 전면에 있었을 때, 약해졌을 때, 노령에 있었을 때이다. ㅡ '애국자'가 되었을 때, 그들은 단지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 휴식을 취했던 것에 불과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나폴레옹, 괴테, 베토벤, 스탕달, 하인리히 하이네, 쇼펜하우어 같은 인간들이다 : 내가 또한 리하르트 바그너를 그들 가운데 포함시킨다고 해도 나에게 화내지 말기 바란다. 그 사람에게 대해서는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오해에 유혹당하지 않기를 바란다. ㅡ 그와 같은 유의 천재들은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 일이 거의 없다. 물론 오늘날 프랑스에서 리하르트 바그너에게 반항하고 저항할 때 생겨나는 품위 없는 소란에 유혹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 ㅡ 그럼에도 불구하고 40년대 프랑스의 후기 낭만주의와 리하르트 바그너가 서로 내면적으로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남아 있다. 이 양자는 그 요구의 높이와 깊이 모두에서 유사하며 근본이 유사하다 : 그들의 다양하고 격정적인 예술을 통해 그 영혼이 밖으로 위로 치닫고 이를 열망하는 것이 유럽, 바로 이 하나의 유럽인 것이다. ㅡ 그것은 어디로 향하는가? 새로운 광명을 향하고 있는가? 새로운 태양을 열망하는가? 그러나 새로운 언어 수단을 가진 이 모든 장인이 명확하게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을 누가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것일까? 확실한 사실은 같은 질풍노도가 그들을 괴롭혔다는 것이고, 이 최후의 위대한 탐구자들인 그들이 동일한 방식으로 탐구했다는 점이다! 이들 모두는 눈과 귀에 이르기까지 문학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ㅡ 세계 문학적 교양을 갖추고 있는 최초의 예술가들이며 ㅡ 그들은 대부분 스스로 작가이자 시인이고, 예술과 감각의 매개자이자 교배자이기조차 했다. (바그너는 음악가로서는 화가에 속하며, 시인으로서는 음악가에, 예술가 일반으로서는 배우에 속한다.) 이들 모두는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표현의 광신자들이다 ㅡ 내가 강조하는 사람은 바그너와 가까웠던 들라크루아Delacroix이다 ㅡ . 이들은 모두 숭고한 것, 그리고 또한 추한 것과 잔혹한 것의 영역에서 위대한 발견자였고, 효과와 전시, 진열의 기술에서 더욱 위대한 발견자였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천재성을 훨씬 넘어서는 재능을 지니고 있었으며, 유혹하고 유인하며 강제하고 전복시키는 모든 것으로 통하는 섬뜩한 통로를 지닌 철저한 대가였으며, 논리와 직선의 타고난 적이었고, 이질적인 것, 이국적인 것, 기괴한 것, 구부러진 것, 자기 모순적인 것을 갈구했던 것이다. 인간으로서는 의지의 탄탈로스들이며, 인생과 창작에서는 고상한 템포, 즉 렌토lento를 취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떠오르기 시작한 천민이었고 ㅡ 예를 들어 발자크를 생각해보라 ㅡ 무절제한 노동자였으며 거의 노동으로 자기를 파괴하는 자였다. 풍속에서는 이율배반자이자 반역자이며, 균형과 향유를 모르는 야심가요 탐욕자였다. 이들은 모두 결국에는 기독교 십자가에 매달려 부서지고 침몰했지만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들 가운데 그 누가 반그리스도의 철학에 이를 만큼 충분히 깊이 있고 근원적이었단 말인가?), 전체적으로 보면 대담하고 모험적이며 뛰어난 힘이 있고 높이 비상하며 솟구쳐 날아가는 유의, 보다 높은 인간들이었다. 그들이 처음으로 그들의 세기에 ㅡ 이는 대중의 세기이다! ㅡ '보다 높은 인간'이라는 개념을 가르쳐야만 했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8장 민족과 조국>, 25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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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사람은 사후에야 태어나는 법이다

 

나와 내 작품들은 별개다. ㅡ 내 작품들에 대해 말하기 전에 여기서 나는 그것들이 이해되고 있다는, 혹은 그것들이 이해되지 못한다는 문제를 다루어본다. 나는 이 문제를 여기에 적절한 만큼만 다루겠다 : 왜냐하면 이 문제를 다루기에는 아직은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때도 아직은 오지 않았다. 몇몇 사람은 사후에야 태어나는 법이다. ㅡ 언젠가는 내가 이해하는 삶과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살도록 하고 가르치게 될 기관들이 필요할 것이다 ; 심지어는 《차라투스트라》를 해석해내는 일을 하는 교수직들이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내가 내 진리들을 위한 귀와 손들을 벌써 기대한다면, 그것은 나와는 완전히 모순되는 것이리라. 오늘날 사람들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 오늘날 사람들이 내게서 뭔가를 받아들일 줄 모른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일 뿐 아니라, 내가 보기에는 정당한 것 같다. 나는 혼동되고 싶지 않다 ㅡ 나 자신에 의해서도. ㅡ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 삶에서 '악의'는 거의 입증되지 않는다 ; 문학적 '악의'에 대해서도 나는 그 어떤 경우도 말할 수 없다. 그와는 반대로 순수한 바보는 너무도 많이 들어 있다 ······ 누군가가 내 책 한 권을 손에 든다는 것, 이것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진귀한 존경 표시의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ㅡ 그가 그런 표시를 하기 위해 신발조차 벗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ㅡ 장화는 말할 것도 없고 ······ 언젠가 하인리히 폰 슈타인 박사가 내 《차라투스트라》의 말은 한마디도 이해할 수 없다고 정직하게 불평했을 때, 나는 그에게 그게 당연하다고 말했었다 : 《차라투스트라》에 나오는 여섯 문장을 이해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 그 문장을 체험했다는 것이고, 사멸적인 인간 존재의 최고 단계에 '현대'인으로서 이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거리감을 느끼면서 내가 어찌 내가 알고 있는 '현대인'에게 읽히기를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지>, 제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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