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당도서관 바로 옆 건물 담장을 붉게 장식한 넝쿨장미들

 

 

 - 저 녀석에겐 꽃밭이야말로 꿀을 따기 위해 부지런히 일해야 하는 바쁜 일터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든다.

 

 

 - 유난히 크고 탐스러운 장미

 

 

 - 계절이 한창 달아오를 요맘때 저토록 탐스럽게 피어난 붉은 장미만큼 고혹적인 꽃도 없을 듯

 

 

 - 도서관에서 가장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은 장미. 뜨거운 볕을 쬐고도 꽃잎이 조금도 시들지 않았다.

 

 

 - 3층짜리 아담한 도서관 건물 뒷켠 풍경. 3층 유리창 바로 곁이 내가 10년 넘도록 즐겨 찾는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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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대담무쌍한 모험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 헬렌 켈러

 

 * * *

 

어린 시절에 내가 읽은 별로 많지도 않은 아동용 책들 가운데 하나가 『톰 소여의 모험』이었다. 그 소설의 내용을 이제 와서 과연 얼마쯤이나 기억하고 있을까? 아마도 그 책을 자주 읽고 들려줄 수 있는 어느 '독서지도교사'가 내게 '그 책을 얼마나 제대로 읽었는지에 대해' 시험을 치르게 한다면, 나는 틀림없이 '거의 모든 문제'에 대해 낯설어 하며 매번 통밥을 굴리기 바쁠 것이다.('통밥'을 굴리는 얘기가 이 소설에 엄청 많이 나온다. '우리말 번역' 또한 '통밥' 그대로여서 나도 이참에 써봤다.) 그 모험소설의 내용을 새까맣게 잊은지도 너무나 오래 지났기에 그건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에 장발장을 읽지 않은 애들이 얼마나 될까. 그러나 어른이 다 된 후에 어느 누가 불쑥『레미제라블』을 바탕으로 시험을 한번 보자고 한다면, 대략 난감해 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주 특별한 기억력이 아니라면 어릴 때 읽었던 아동용 고전 명작을 읽고 그 내용을 어른이 되어서도 줄줄 기억해 낼 수 있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내가 겨우 열 살이나 혹은 열세 살 무렵에 읽었을 법한 『톰소여의 모험』은 읽을 당시로만 따지면 어쨌든 무쟈게 재미있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 곧 독자였던 당시의 나와 거의 똑같은 나이였으니까 말이다. 아무런 생각이 없던 시절이 좋은 건 '어른들이나 걱정할 고민들'은 하나도 머릿속에 담아 둘 필요가 없다는 데 있다. 어린애들은 무엇보다 '먹고 살 걱정'을 하지 않는다. '장래'도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어느 철학자의 말대로 '어린 시절엔 세상이 온통 무지개처럼 아름답게 보일 뿐'이기 때문이다. 무턱대고 저지른 온갖 저지레 때문에 나중에서야 어른들로부터 크게 혼날 걱정만 빼고는, 늘상 '뭐 재미난 일이 없을까'를 궁리하기 바쁜 게 바로 어린 시절의 특징이리라.

 

까마득한 옛날인 70년대 초에『톰 소여의 모험』을 읽고 절로 빠져든 '감정이입'을 이제 와서 다시 느끼기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 소설을 읽은 지 벌써 40년 이상이나 흐른 내게 '동심' 같은 게 과연 얼마나 남아있을까. 그나마 내게 한 가지 운이 좋았던 사실 하나는, 어릴 적에는『톰 소여의 모험』까지만 읽고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전혀 읽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묘한 우연 덕분에 어느날 문득 오십줄에 접어든 초로의 내가 다시금 그 말썽꾸러기 소년들인 허클베리 핀과 톰 소여를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집어들기 전부터 미리 걱정을 전혀 안 했던 건 아니었다. 50대의 나이에 10대 초반의 어린 소년이 '나'로 등장하는 소설을 과연 무슨 재미로 끝까지 다 읽어낼 수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래도 이 소설은 숱한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평가를 받고 있으니 그런 걱정일랑 따로 할 필요가 별로 없겠지 싶긴 했다. 괜히 엄청난 평가를 받는 고전들을 나는 여태껏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으니까 하는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아무튼 이 고전에 대해 걸출한 작가들이 내놓은 놀라운 평가부터 좀 들어 보고 나서 이 소설을 얘기하는 게 순서이지 싶다. 우선 헤밍웨이가 남긴 말부터 들어보자.

 

현대의 미국 문학은 모두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모든 미국 작품이 그로부터 비롯되었다. 그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이후에도 그만큼 훌륭한 것은 없었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헤밍웨이가 남겼던 이 말은 흔히 도스토옙스키가 고골의 가장 유명한 단편소설에 대하여 남겼던 평인 "우리는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는 말과 비교되곤 한다. 고골이 자신의 천재성을 발휘하여 자신이 활약하기 이전의 러시아 문학의 공허한 형식주의와 경직성을 완전히 파괴했던 활약상이 마치 마크 트웨인이 미국 문학에서 했던 역할과 적잖이 닮았기 때문이다.

 

미국이 싫어서 영국으로 건너갔던 T.S.엘리엇조차도 마크 트웨인을 격찬했다. 그는 모든 면에서 '하버드 맨'으로 합당했지만, '훨씬 오랜 역사와 더 위대한 문학 유산을 가진 나라, 종교와 영혼의 문제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아이러니의 깊은 의미를 아는 땅인 프랑스와 영국'에 매력을 느껴 결국 구대륙으로 건너가 살았다. 그의 평을 들어보자.

 

트웨인은, 최소한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만큼은, 본인이야말로 그 어떤 문학에서도 흔치 않은, 작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작가들에게도 타당한, 새로운 글쓰기 방식을 발견한 작가들 중 하나임을 밝히고 있다. 이런 면에서 나는 그를 심지어 드라이든과 스위프트와 나란히 놓고자, 즉 자신의 언어를 최신의 것으로 만든, 그런 와중에 ‘자기 부족의 방언을 정화한’ 그런 희귀한 작가 가운데 하나로 놓고자 한다.

 - T.S.엘리엇

 

엘리엇이 마크 트웨인의 소설을 특별히 좋아한 건 그가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세인트루이스는 미시시피강과 미주리강이 만나는 지역에 위치한 미주리주 최대의 도시이고,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도 뉴올리언스와 함께 자주 언급되는 도시이다. 특히 마크 트웨인은 미시시피강 유역 사람들만의 토속적인 사투리를 아주 맛깔나게 살린 것으로 유명한데, 엘리엇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숱하게 되살려 줄 그런 표현들에 특별히 매료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별로 없다. 조정래의『태백산맥』을 읽은 많은 독자들이 벌교 사람들의 사투리에 매료되고, 이문열의『영웅시대』를 읽은 독자들이 그 작품 속에서 자주 맞닥뜨리는 작가의 고향 사투리에 몹시 놀라며 반기듯이 말이다.

 

어쨌든 두 사람의 걸출한 작가로부터 이런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는 소설이 그저 단순히 '어린이 모험 소설'에 그칠 수는 없다. 작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미시시피 강'을 배경으로, 열세 살짜리 허클베리 핀이 도망친 노예 짐과 함께 '뗏목 여행'을 펼치는 온갖 흥미진진한 모험 이야기가 어떻게 그토록 뛰어난 작품성과 문학성을 얻게 된 것일까.

 

이 소설의 매력은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렵다. 내가 이 소설에서 느낀 가장 큰 매력은 무엇보다도 '문명'이 배제된'원시 자연 상태가 고스란히 살아 숨쉬는 펄떡이는 19세기의 낭만적인 미국'을 아주 잘 그려냈다는 점이다. 미국만큼 '새로움과 동경으로 가득찬 나라'도 드물다.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구대륙에 살던 온갖 지방의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찾아 대서양을 건너 '새로운 삶'을 시작한 곳이 바로 미국땅이었다. 보스톤이나 뉴욕이나 시카고가 아닌, 까마득한 옛날 인디언들이 살던 미시시피강 유역에 사는 미국인들의 삶은 오늘날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래서 이 소설 속엔 '서두르는 법'이 온통 배제되어 있다. 문명화되기 이전 시대의 느릿느릿한 삶의 흐름들이 마치 미시시피강이 흐르는 유속만큼 완만하기 그지 없다. 그래서 폴리 이모가 샐리 이모한테 '톰 소여'의 소식을 편지로 전하더라도, 미처 그 편지가 닿기 전에 허클베리 핀이 '톰 소여'인 양 먼저 나타나는 상황이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희대의 사기꾼인 '왕과 공작'이 우연히 어느 마을로 찾아가 막대한 상속 재산을 남기고 죽은 피터 영감의 형님 노릇을 한참 동안이나 대신할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다.

 

두 번째 매력이라면 역시 '모험 소설'로서의 매력이다. '어린 시절' 만큼 사람들이 쉽게 공유하기 쉬운 '시절'도 없다. 어느 하나 '불변적이고 고정적'이기 보다는 늘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상태에 가깝고, 거의 모든 가능성에 항상 열려 있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모험 그 자체의 연속'에 가까운 시절이 바로 어린 시절의 가장 큰 특징이다. 작가는 허클베리 핀의 '뗏목 여행'을 통해서 끊임없이 변화무쌍하게 전개되는 '모험들'을 독자들 앞에 가득 펼쳐 놓는다. 이 신명나는 모험에 공감하지 못할 독자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애들이나 어른이나를 가릴 것 없이 말이다.

 

밀란 쿤데라는 젊은 시절의 '무한한 변주 가능성'을『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음악에 빗대어 아주 멋지게 표현한 적이 있었다. "젊은 시절 삶의 악보는 첫 소절에 불과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함께 작곡하고 모티프를 교환할 수도 있지만 보다 원숙한 나이에 만난 사람들의 악보는 어느 정도 완성되어서 하나하나의 단어나 물건은 각자의 악보에서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기 마련이다"라고 말이다. 주인공 헉 핀과 짐 뿐만 아니라 이 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변화'를 찾아 도전하고 '안주'하는 걸 한사코 거부한다. 우리의 영원한 고향과도 같은 '어린 시절'의 모험 충동을 자극하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 도망치던 흑인 노예 짐이 우연히 샐리 이모네 농장의 오두막에 갇혀 쇠사슬에 묶여 있는 동안, 사실은 그가 '자유의 몸'이 된 상태였음을 알고 나서도, 굳이 죄수를 좀 더 그럴듯하게 탈출시키기 위해 헉 핀과 톰 소여가 꾸미는 '길이 남을 대탈주극'은 이 소설의 본질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허클베리 핀과 흑인노예 짐이 '뗏목'에 의지해서 벌이는 모험은 한편으로는 '어른용 모험 소설'인『돈키호테』를 몹시나 닮았다. 돈키호테가 산초 판사와 함께 늙은 로시난테에 의지한 채 온갖 흥미진진한 모험을 벌이는 그 이야기와의 가장 뚜렷한 차이점을 굳이 꼽자면 아마도『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는 '사랑 이야기'가 거의 없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두 소설은 모두 작가 특유의 유머와 해학이 주체하기 어려울 만큼 넘친다. 또한 두 소설 모두 작품 속 주인공들이 겪는 모험 속에 삽입된 '주인공을 달리 하는 또다른 이야기들'이 너무나 그럴 듯하고 훌륭한 점도 몹시 닮았다.

 

이 소설이 풍기는 또하나의 묘한 매력은 호메로스의 서사시『오뒷세이아』를 닮았다는 점이다. 주인공 오뒷세우스의 '눈물겨운 귀향'을 다룬 서사시는 어쩌면 '모험 이야기'의 원조격 작품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두 작품의 차이점 또한 『돈키호테』와 비슷하다. 오뒷세우스가 전쟁터를 떠나 고향 이타케 섬으로 되돌아오기까지 겪는 온갖 모험과 고초 가운데 등장하는 여인네만 해도 그 수가 얼마였던가. 세이렌의 유혹 정도는 축에 끼지도 못한다. 칼륍소와는 아예 살림을 차렸었고, 마녀 키르케와도 부부처럼 지냈고, 나우시카아 공주에게도 새장가를 들 뻔 하는 등 숱한 여인과 사랑과 이별을 겪었다. 전쟁터로 떠난 남편을 기다리는 페넬로페 역시 시아버지의 수의를 짜는 동안 숱한 남정네들로부터 유혹을 받았다.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를 빼면『오뒷세이아』는 금세 시들해지고 재미가 없어진다. 그런데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선 사랑 이야기가 아주 짧다. 어느 마을 대령의 딸이 '비밀 쪽지' 하나를 받고 적대적인 가문의 총각과 함께 느닷없이 줄행랑을 쳤다는 얘기를 빼면 다른 사랑 이야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그만큼 담백하다고나 할까.『평생독서계획』에서 클리프턴 페디먼은 이런 말을 남겼다. "페리클레스 시대의 고대 그리스 지식인들은 호메로스를 읽으면서 그리스의 서사시를 느꼈는데, 그와 똑같이 미국인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미국의 『오뒷세이아』를 읽는다."고 말이다. '신화'는 사라져도 어쨌든 '서사시'는 계속 태어나는가 보다.

 

이 모험 소설엔 '사랑 이야기'가 빠지는 대신에 그보다 훨씬 단단한 감정인 '우정'이 담겨 있다. 바로 주인공 허클베리 핀과 도망친 노예 짐 사이에 싹튼 백인과 흑인 사이의 '우정'이다. 두 사람이 처음부터 뗏목 여행에 자연스럽게 의기투합했던 건 아니었다. 허클베리 핀은 술주정뱅이 아버지로부터 도망쳐 나왔고, 같은 마을에 살았던 이웃집 노예였던 짐은 '남부지방으로 팔려가야 하는 신세'를 벗어나고자 '자유'를 찾아 무작정 도망쳐 나왔는데 그 두 사람이 우연히 미시시피강 한가운데 있던 잭슨섬에서 만났을 뿐이었다. 헉 핀으로서는 '도망친 노예'와 어쩔 수 없이 한 배를 탄 셈이었는데, 당시에 도망친 흑인 노예는 누구든지 '신고'하는 게 의무처럼 여겨지던 때여서 소년조차도 '마음 속의 도덕적 갈등'을 심하게 겪는다. 그런데 짐과 함께 며칠을 살다 보니 그도 백인인 자신과 똑같은 인간임을 발견하고 차마 양심상 신고할 수 없게 된다. 도리어 그를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와주기로 결심하면서, 그게 죄가 된다면 '지옥에라도 가고야 말겠다'고 다짐한다. 이 대목이야말로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을 극명하게 압축해서 드러내 주는 부분이다.

 

당시의 잘못된 법률과 사회 관습이 얼마나 한심스러운 수준이었던가는 다른 많은 이야기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적대적인 가문과의 대결에서는 10대 초반의 어린아이들까지 서로 총을 들고 서슴없이 총격을 가한다. 살인과 폭력과 미신과 탐욕 등이 백주대낮에 버젓이 횡행한다. '흑인 노예제도'를 둘러싼 뿌리깊은 인종간 갈등은 미국 사회의 야만성과 불합리성을 대표하는 문제이다. 작가는 이 골치아픈 문제를 '문명화'와 '교양'을 거부하는 순수한 마음을 지닌 헉 핀의 '마음 속 갈등'을 통해 아주 자연스럽게 해결해 나간다. 그렇다고 해서 작가로부터 노예 제도와 인종 갈등에 대한 근원적인 해결책이 명쾌하게 제시되는 것도 아니다. '노예제도'를 다루는 작가의 입장은『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더불어 19세기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 『월든』을 쓴 헨리 데이빗 소로우와 비교될 만하다. 왜냐하면 소로우는 미국의 노예제도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했고, 자신이 직접 나서서 도망친 흑인 노예의 도주를 도와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영화로까지 소개된 작품인『노예 12년』을 떠올려 보면 '그 당시의 흑인 노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하고도 절박한 문제였던가를 누구라도 금세 느낄 수 있다.

 

이 소설이 쓰여진 시기도 벌써 100년이 훌쩍 넘었고 소설의 배경은 지금으로부터 150년 이상이나 더 거슬러 올라간다. 더구나 무대의 공간 배경 또한 드넓은 미시시피 강과 뗏목과 증기선과 강변 마을과 농장 등이 전부여서 우리에겐 많이 낯설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우리들'도 한결같이 어린 시절을 틀림없이 보냈지만 미시시피강만큼 드넓은 강을 끼고 자라진 않았음에 틀림없다. 더구나 언어와 종교와 관습과 문화조차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산업화 이전 시대의 미국땅'에서 펼쳐지는 물내음 물씬 풍기는 '뗏목 여행' 이야기가 우리에게 친숙할 리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어쨌든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끊임없이 우리들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만큼 작가의 이야기 솜씨가 탁월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소설의 배경이 낯설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의 '모험 본능'이 방해를 받는 일도 거의 없다. 허클베리 핀과 짐의 뗏목 여행에 대해 독자들이 느끼는 순수한 동경이야말로 우리가 늘 잊고 있었던 '미래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무작정 겁도 없이 뛰어들었던 '이런 시절의 모험 본능'으로 되돌아가고픈 '우리들의 원초적 귀소 본능'에 대한 자극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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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j_Shin 2016-05-17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짐, 그 귀신 얘기 좀 해줘˝
암. 나중에 해주겠구먼, 이제 폭풍우가 가라앉고 있당께, 그러니 낚싯줄이나 살펴보고 미끼나 다시 달아놓는게 좋겠구먼...

『허클베리핀의 모험 』의 이 대목을 읽으면서 일전에 오렌님 블로그에서 읽었던 내용이 문득 떠올랐지 뭡니까?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이나 무더운 여름날 같은때에 독서하기가 아주 좋았다는.... ˝

oren 2016-05-17 14:28   좋아요 0 | URL
오호.. 그러셨군요. 정말 재미있는 얘기네요.

저도 첩첩산중인 시골에서(중2때까지 전깃불도 안 들어와서 호롱불 아래서 생활했던) 자란 터라, 이 소설을 읽으며 `어린 시절`을 엄청 많이 떠올렸답니다. 여름만 되면 거미줄을 걷어 신작로를 따라 포플러나무에 붙은 매미를 잡던 추억, 까마득히 높은 나무 꼭대기까지 기어올라가 `목소리도 우렁찬 말매미`를 잡던 일, 벌집에 불을 놓던 일, 한여름에 홍수났을 때 막 타작을 끝낸 보릿짚단을 띄워 급류타기 했던 일 등등.. 그 가운데 가장 자주 떠올린 추억은 아무래도 낚시하는 일이었지요. 이 소설 속에서 헉과 짐이 수시로 낚시질을 해서 끼니를 해결하니까 말이지요. 저도 형이랑 둘이서 쏘낚시, 주낚시를 하면서 메기, 뱀장어, 세숫대야만 한 자라 등등을 엄청 많이 잡았거든요. ㅎㅎ

kj_Shin 2016-05-17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잡은 고기들을 어떻게 하셨어요?

드셨나요? 파셨나요? 아니면 놓아 주셨나요?

oren 2016-05-17 16:02   좋아요 0 | URL
아주 큰 놈들은 어머니께서 가끔씩 읍내 장에 가셔서 파셨더랬지요. 지게 작대기만 한 장어와 세숫대야만 한 자라 등등은 강에서 건져올릴 때부터 ˝형, 이건 장에 내다팔아도 되겠지?˝ 하고 미리 짐작을 했었더랬지요. 가끔씩은 아주 큼지막한 뱀장어도 내다팔지 않고 양은냄비에 푹 고아서 왕소금을 쳐서 먹기도 했지요. ㅎㅎ

kj_Shin 2016-05-17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재미있었겠습니다. ㅎㅎ

yamoo 2016-05-22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톰 소여의 모험하고 허클베리 핀의 모험하고 다른 책인줄 첨 알았네요...^^;;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얼른 구해서 읽어 봐야 할 거 같습니다. 저도 어릴 때 만화로만 본 건데, 찾아서 제대로 된 완역본을 읽어 봐야 겠습니다! 걸리버여행기, 톰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 클루타르크스 영웅전...이거 어렸을 때 많이 구경만 하던 책들인데, 지금에야 읽을 리스트에 첨부 됐습니다요..^^

oren 2016-05-23 12:11   좋아요 0 | URL
『톰 소여의 모험』과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미시시피강의 추억』과 더불어 `미시시피 3부작`으로도 유명하더군요. 그런데 저 또한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 톰 소여가 등장하는 줄은 이번에 처음 알았답니다. 이들 작품들은 `어린이 모험 소설`로 훨씬 더 유명하지만, 어른들이 읽기에도 흠 잡을 데 없이 뛰어난 작품이더군요. 마치『돈키호테』나 『걸리버 여행기』『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작품들이 그러하듯이 말이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미국을 두 번 다녀오는 동안 그나마 강과 호수들을 더러 직접 구경할 기회도 있었고(콜로라도강, 허드슨강, 이리호 등), 캘리포니아의 레돈도 비치(Redondo Beach)에서는 바다로 뛰어들어가 수영도 즐겨본 적이 있었는데, 이 소설을 읽고 나니 불현듯 언젠가는 꼭 한 번 `미시시피 강`에 가서 직접 한 번 낚시를 해보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이 생기더군요. ㅎㅎ

조나단 2016-07-27 14: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다 읽고 다른 분들은 어떻게 읽었나 둘러보고 있었는데 .
정말 멋진 리뷰를 읽게 되어 기쁩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나의 야심은 다른 사람들이 책 한 권으로 말하는 것을 열 문장으로 말하는 것이다 ㅡ 다른 사람들이 한 권의 책으로도 말하지 않는 것을 ······

 

 - 니체, 『우상의 황혼』중에서

 

 

 * * *

 

다음의 격언은 오랫동안 내 좌우명이었는데, 나는 이 격언의 출처를 식자적 호기심에는 알려주지 않았다 :

 

 

상처에 의해 정신이 성장하고 새 힘이 솓는다increscunt animi, virescit volnere virtus.

 

 

어떤 경우에는 나는 다른 회복 방식을 더 환영한다. 우상들을 캐내는 방식을 ······ 세상에는 진짜보다 우상들이 더 많다 : 이것이 이 세계에 대한 나의 '못된 눈길'이자, 나의 '못된 '이다 ······ 여기서 한번 망치를 들고서 의문을 제기해본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부풀어오른 창자가 울려대는 그 유명하지만 공허한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ㅡ 그 소리는 귀 뒤에 다른 귀를 또 갖고 있는 자를 어찌나 황홀하게 하는지 ㅡ 늙은 심리학자이면서 민중의 유혹자인 나를 어찌나 황홀하게 하는지. 내 앞에서는 계속해서 조용히 있고 싶어 하는 것도 소리를 내지 않고는 못 배긴다 ······

 

 - 니체, 『우상의 황혼』, <서문> 중에서

 

 

 * * *

 

뭐라고? 네가 찾고 있다고? 너를 열 배, 백 배로 늘리고 싶다고? 추종자를 찾는다고? ㅡ 차라리 를 찾아라! ㅡ

 

 - 니체, 『우상의 황혼』, <잠언과 화살> 중에서

 

 

 * * *

 

만족하면 감기조차도 걸리지 않는다. 잘 차려입었다고 생각하는 여자가 감기 걸리던가?나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경우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 니체, 『우상의 황혼』, <잠언과 화살> 중에서

 

 

 * * *

 

"이전에 양심은 물어뜯을 것을 얼마나 많이 가졌던가? 얼마나 좋은 이빨을 가졌던가?그런데 오늘날은? 뭐가 부족한 것일까?" ㅡ 어떤 치과의사의 의문.

 

 - 니체, 『우상의 황혼』, <잠언과 화살> 중에서

 

 

 * * *

 

한 번만 경솔한 경우는 드물다. 첫 번째 경솔한 행동에서 사람들은 언제나 너무 지나치다. 바로 이 때문에 사람들은 통상 두 번째 경솔한 짓을 한다 ㅡ 그리고 이제 사람들은 너무 미약하게 행동한다 ······

 

 - 니체, 『우상의 황혼』, <잠언과 화살> 중에서

 

 

 * * *

 

밟힌 지렁이는 꿈틀거린다. 똑똑한 일이다. 지렁이는 그렇게 해서 또 다른 것에게 밟힐 가능성을 줄이는 것이다. 도덕언어로 말하면 : 순종한다. ㅡ

 

 - 니체, 『우상의 황혼』, <잠언과 화살> 중에서

 

 

 * * *

  

거짓과 가장에 대한 예민한 명예관념에서 나오는 증오가 있다 : 거짓이 신의 계명에 의해 금지되는 경우에 그 증오는 겁에서 연유한다. 거짓말을 하기에는 너무나 겁이 많아서 ······

 

 - 니체, 『우상의 황혼』, <잠언과 화살> 중에서

 

 

 * * *

  

네가 앞서서 달리고 있다고?목자로서? 아니면 예외자로서? 세 번째 경우는 탈주자일 것이다 ······ 양심에 관한 첫 번째 문제.

 

 - 니체, 『우상의 황혼』, <잠언과 화살> 중에서

 

 

 * * *

  

네가 진짜인가? 아니면 배우일 뿐인가? 대변자인가? 아니면 대변된 것 자체인가? ㅡ 결국 너는 한갓 모방된 배우에 지나지 않는다 ······ 양심에 관한 두 번째 문제.

 

 - 니체, 『우상의 황혼』, <잠언과 화살> 중에서

 

 

 * * *

 

너는 방관자인가? 아니면 관여하는 자인가? ㅡ 아니면 눈길을 돌리는 자, 외면하고 가는 자인가?  ······ 양심에 관한 세 번째 문제.

 

 - 니체, 『우상의 황혼』, <잠언과 화살> 중에서

 

 

 * * *

 

너는 같이 가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앞서 가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홀로 가기를 원하는가?  ······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그리고 자기가 원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어야만 한다. 양심에 관한 네 번째 문제.

 

 - 니체, 『우상의 황혼』, <잠언과 화살> 중에서

 

 

 * * *

 

자기 방어 본능

 

이 모든 것에서 ㅡ 영양 섭취, 장소와 풍토, 휴양의 선택에서 ㅡ 자기 방어 본능으로서 스스로를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자기 보존 본능이 명령을 내린다. 많은 것을 보지 말고, 듣지 말며, 자기에게 접근하게 놔두지 말라는 것 ㅡ 이것은 첫째가는 현명함이자 인간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의 필연이라는 점에 대한 첫째가는 증거이다. 이런 자기 방어 본능에 대한 관용적 표현은 취향Geschmack이다. 이것은 긍정이 곧 '무사(無私)'를 의미할 때에는 부정하라는 명령을 내리지만, 그뿐 아니라 가능한 한 부정을 하지 말라고도 명령한다. 계속 되풀이되는 부정을 필요로 하게 될 만한 곳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고 분리하라고 명령한다. 아주 작은 방어적 지출이라 하더라도 규칙적이 되고 습관적이 되며 엄청나면서도 전적으로 불필요한 빈곤을 유발시킨다는 합리적 이유에서다. 우리가 하는 중대한 지출은 지극히 자주 거듭되는 작은 지출들이 모인 것이다. 방어하는 것, 다가오지-못하게-하는 것은 하나의 지출이며 ㅡ 여기서 혼동하지 마시라 ㅡ , 너무 부정적인 목적들을 위해 낭비되는 힘이다. 지속적인 방어의 필요 때문만으로도 더 이상 방어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져버릴 수 있다.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지>, 제8 

 

 * * *

 

모든 피토레스크한 인간들을 주의하라!

 

꾸며진 포즈의 파토스는 위대함에 속하지 않는다 ; 누군가가 포즈를 필요로 한다면 그는 가짜······ 모든 피토레스크한 인간들을 주의하라! ㅡ 나는 위대한 과제를 대하는 방법으로 유희보다 더 좋은 것을 알지 못한다 : 이것이 바로 위대함의 징표이자, 본질적인 전제 조건이다. 아주 최소한이더라도 압박, 우울한 표정, 목소리의 거친 음조들, 이런 것들은 전부 한 인간에 대한 이의 제기이다. 그리고 그의 작업에 대해서는 얼마나 더 강한 이의 제기인 것인지! ······ 튼튼한 신경을 가져야 한다 ······ 고독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 역시 하나의 이의 제기다. ㅡ 언제나 내가 겪은 괴로움은 오로지 '다수' 때문이었다 ······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지>, 제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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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6-05-22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렌 님, 니체 전집이 엔날에 청하에서 나온 거 하고 책세상에서 나온 두 판본이 있는데요, 청하 전집 중 한 권인 <서광>은 책세상 본에서는 어디 있는지요? 제목을 찾아봐도 <서광>이 없는 거 같아서 다른 책에 껴 있는 거 같은데, 도무지 모르겠어서요~ 혹시 아시면 알려주세요~

글구 저는 청하본 전집을 7권 갖고 있는데요, 책세상 본의 가독성이 어떤지 몰라 청하본을 버리고 새 판본을 사야할지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읽은 적이 없어 고민이 됩니다. 이 부분도 문의드려 봅니당~

oren 2016-05-23 16:07   좋아요 0 | URL
청하출판사에서 나온 『서광』은 책세상에서 나온 전집의 『아침놀』과 같은 책이랍니다. 원제목을 번역하는 사람마다 달리 표현하다보니 너무나 다른 책으로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지요. 저는 최근에 밀란 쿤데라의 작품들을 읽고 있는데, 최근에 나온『무의미의 축제』라는 작품을 두고 어떤 저명한 문학가는 자신의 글 속에서 <하찮은 것들의 잔치>라고 언급해 놓았더군요. 똑같은 작품을 두고 저렇게 번역하는 것도 가능하겠구나 싶었지만 두 제목 사이의 `뉘앙스의 차이`가 결코 적잖다는 점에서 제법 놀랬답니다. 다시 니체로 돌아와서 얘기하자면, 저도 여태껏 니체의『아침놀』은 읽어보지 못했는데, 어쨌든 그 책의 내용을 짐작케 할 만한 대목을 참고삼아 여기에 덧붙여봅니다.

* * *

이 책으로 도덕에 대한 나의 전투가 시작된다. 화약 냄새는 전혀 나지 않는 전투가 : ㅡ 예민한 코를 가지고 있는 자는 화약 냄새와는 완전히 다르면서도 훨씬 더 좋은 냄새를 맡을 것이다. 이 전투에는 큰 포격도 없고 작은 포격도 없다 : 이 책의 효과가 부정적이라도, 그 수단이 그만큼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그 수단의 효과는 포격의 경우처럼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추론처럼 나타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도덕이라는 이름 아래 경외되고 심지어는 숭배되기까지 했던 모든 것을 어려워하며 조심스러워했던 일이 이 책으로 작별을 고한다. 이런 식의 작별과, 그리고 이 책 전체에 부정적인 말은 한 마디도 등장하지 않으며 공격도 악의도 없다는 사실은 모순되지 않는다. ㅡ 그리고 그 책이 심지어는 태양 아래 놓여 있다는 것, 완숙하고 행복하게, 바위 틈에서 햇볕을 쪼이는 어떤 바다동물과도 같다는 사실과도 모순되지 않는다. 결국 나 자신이 바로 이 바다동물이었다 : 그 책의 거의 모든 문장이 제노바 근처의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바위들 사이를 종횡무지 쏘다니며 생각해낸 것들이다. 거기서 나는 혼자 있었으며 바다와 비밀을 공유했었다. 지금도 우연히 그 책을 들추면, 거의 모든 문장이 내게는 저 깊은 곳에서 비할 바 없는 어떤 것을 다시 끌어올리게 하는 뾰족한 끝이다 : 이 책의 전 피부는 회상의 부드러운 전율로 떨고 있다. 이 책은 가볍고도 소리없이 스쳐가는 것들과 내가 신적인 도마뱀이라고 부르는 순간들을 어느 정도 고정시키는, 하찮치만은 않은 기술을 갖고 있다 ㅡ 하지만 저 불쌍한 도마뱀을 간단히 꼬챙이로 꽂아버리는 젊은 그리스 신의 잔인함을 쓰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쨌든 무언가 날카로운 것을, 즉 펜을 써야 했다 …… ˝아직은 빛을 발하지 않은 수많은 아침놀이 있다˝ ㅡ 이 인도의 비문이 이 책 출입구에 적혀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어디서 새로운 아침을, 다시 새로운 아침을 여는 이제껏 발견되지 않았던 은근한 붉은빛을 찾는가? ㅡ 아아, 새로운 날들의 연속과 새로운 날들의 세상 전체를 여는! 그것은 모든 가치의 전도에서이다.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아침놀> 중에서

oren 2016-05-25 21:37   좋아요 0 | URL
니체의 『아침놀』은 (제법 여러 곳에서) 『여명』으로도 번역되는가 봅니다. 오늘 우연히 펼친 책 속에서도 『여명』이라고 번역된 `생생한 현장`을 발견했답니다.
* * *
니체에 의하면 철학자는 ˝자신이 다른 길을 통해 도달한 생각들과 사물들을 연역과 변증의 기만적인 배합으로 날조해서는 안 된다. (……) 우리 생각들이 우리에게 온 그 효율적인 방식을 변질하거나 감추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가장 심오하고 가장 무궁한 책들은 언제나 파스칼의 『팡세』의 그 급작스럽고 잠언적인 특성을 지닐 게 분명하다.˝

˝우리 생각들이 우리에게 온 그 효율적인 방식을 변질하지 말 것.˝ 나는 이 명령을 비범하게 여긴다. 또한 『여명』을 시작으로, 그의 모든 저서에서 모든 장이 단일 단락으로 기술되었음에 주목한다. 이는 어떤 생각이 단숨에 이야기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생각이 빠른 속도로 춤추듯 철학자에게 뛰어와 스스로를 드러낸 모습 그대로 고정되게 하기 위함이다.

- 밀란 쿤데라, 『배신당한 유언들』, <6부 작품과 거미> 중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시종들은 모두가 그를 본떠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기울이고 다녔다. 그리고 디오니시우스의 아첨꾼들은 그와 같이 근시안인 체하느라고, 그의 앞에서 잘 부딪치고 발끝에 걸리는 것을 차고 둘러엎곤 했다. 탈장(脫腸)까지도 때로는 으스대며 자랑할 거리가 되었다. 나는 귀먹은 것도 뽐낼 거리가 되는 것을 보았다. 플루타르크는 왕이 왕비를 미워하자, 궁신들도 덩달아 사랑하는 아내를 쫓아내는 것을 보았다.

더 심한 것은 음탕한 버릇이 모든 버릇과 아울러 유행하고, 불충·모독·잔인성도 그렇고, 사교가 그렇고, 미신·무신앙·태만이 그렇다. 더 나쁜 일로, 도대체 더 나쁜 일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미트리다테스의 아첨꾼들은 그들의 왕이 명의(名醫)라는 영광을 얻고 싶어하자 자기들 몸을 째고 지지고 하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위험한 본보기로 다른 자들은 몸의 가장 미묘하고 고귀한 부분인 심령을 지지도록 그대로 두고 있는 것이다.

 

 - 몽테뉴

 

 * * *

 

몽테뉴가 쓴 『수상록』의 원조격 작품은 플루타르코스의 『윤리론집』이다. 몽테뉴보다 무려 1,500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 쓴 작품이 『몽테뉴 수상록』의 밑거름이 된 셈이다. 몽테뉴의 작품은 세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고, 심지어 스탠포드 대학원에서 선정한 <세계의 결정적인 책 15권>에도 선정될 만큼 그 가치를 널리 인정받고 있는 반면에, 정작 그 작품의 밑바탕이 된 플루타르코스의 작품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듯하여 안타까운 느낌이 적지 않다. 무려 1,900년 전쯤에 고대 그리스어로 쓰여진 그 방대한 작품이 '원전 완역'되기를 바라는 일 자체가 아직은 무리일지도 모르겠다. 같은 저자가 쓴 저 유명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조차도 '그리스어 원전 완역'은 언제 나올지 모르는 판국이니, 하물며『윤리론집』원전 완역은 언감생심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몽테뉴의 수상록을 미리 읽고 나서 뒤늦게야 플루타르코스가 쓴 『윤리론집』을 거꾸로 접하고 보니, 두 작가가 서로 주고 받은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를 새록새록 발견하는 일이 재미있고도 놀랍다. 플루타르코스가 남긴 『윤리론집』에 담긴 에세이는 모두 합하면 무려 78편에 달한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엔 고작 11편밖에 번역되어 나오지 않은 실정이다. 기껏해야 11편의 에세이를 읽었을 뿐인데도 플루타르코스의 작품 속에서 '몽테뉴의 냄새'를 흠뻑 맡았을 정도이니, 플루타르코스의 나머지 작품들까지 모조리 다 읽어본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심정으로 두 인물을 번갈아 쳐다보고 서로를 비교했을까 자못 궁금하다.

 

어쨌든 국내에 번역되어 나온 '플루타르코스의 에세이 11편' 가운데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두 편이다. 첫 번째는 <수다에 관하여>라는 작품이고, 두 번째는 <아첨꾼과 친구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이다.(앞에 든 작품은 천병희 번역, 『수다에 관하여』라는 책에 실려 있고, 뒤에 든 작품은 허승일 번역, 『플루타르코스의 모랄리아』에 담겨 있다.)

 

사실 나는 <수다에 관하여>를 읽는 동안 '수다'에는 일가견이 있는 '숱한 알라디너들'을 떠올리고 속으로 무척이나 웃었더랬다. 왜냐하면 그 작품 속엔 '똑같은 얘기를 지치지도 않고 떠드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수다쟁이들'이 끊임없이 등장하는데, 그들의 면모가 마치 5년 혹은 10년이 지나도 조금도 변치 않고 '언제나 자신의 스타일대로 굳세게, 한결같이' 똑같은 방식으로 글을 쓰는 수많은 알라디너를 계속해서 떠올리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굳이 딴 사람의 예를 들 필요도 없다. 우선 나부터 '나'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몽테뉴는 "되풀이해서 하는 말은 호메로스에 나오더라도 지루해진다."고 그다운 재치있는 말을 남겼다. 플루타르코스의 에세이 가운데 하나인 <수다에 관하여>에 나오는 대목들은 어느 한 대목도 그른 말이 없을 정도로 귀에 쏙쏙 박힐 정도였다. 그 가운데 두 대목만 여기에 옮겨 보겠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나 말고도 속이 뜨끔한 사람들이 더러 있을 것이다.

 

호메로스에 관한 가장 진실한 발언은, 호메로스만이 언제나 새롭고 매력이 넘쳐흘러 사람들이 싫증을 내지 않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호메로스는 자신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미 분명하게 말한 것을

재차 말한다는 것은 내 성미에 맞지 않소.

 

말하자면 호메로스는 이야기란 으레 지루해지기 쉽다는 것을 알고 이를 피하기 위해 듣는 이들을 이 이야기에서 저 이야기로 인도하는가 하면,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제공함으로써 듣는 이들이 포만감을 느끼지 않게 해준다. 그러나 수다쟁이는 마치 글자를 지우고 다시 사용하는 서판(書板)을 펜으로 긁듯이, 같은 이야기를 자꾸 하고 또 함으로써 우리의 귀를 고문한다.

 

 - 플루타르코스, 『수다에 관하여』중에서

 

어디 이것뿐이랴. 수다쟁이의 폐해는 도무지 필설로 다하지 못할 지경이다. 곧바로 이어지는 다음 인용문에 다시금 속이 뜨끔할 사람들이 어디 한둘일까? 누구보다도 바로 나 자신이 '대표적인 케이스'가 아닐까 싶어 얼굴이 다 화끈거릴 지경이다.

 

그러나 수다쟁이는 이야기할 때 전혀 화제를 가리지 않는다. 하지만 특정 화제를 좋아하는 사람은 특히 조심하고, 되도록 그런 화제는 피해야 한다. 그런 화제는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언제나 거기에 살을 붙이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경험이나 재능에서 남들을 능가한다고 생각되는 화제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중심적인 그런 사람은 허영심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자신이 가장 능숙하다고

믿는 일들에 바칠 것이다.

 

독서광은 역사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하고, 문학자는 문법에 관해 토론하기를 좋아하고, 널리 떠돌아다닌 여행가는 낯선 나라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이러한 기호도 조심해야 한다. 수다는 언제나 짐승처럼 낯익은 풀밭으로 가고 싶은 유혹을 느끼기 때문이다. 소년 퀴로스의 처신이 높이 평가받는 까닭은, 그가 자신이 더 잘하는 종목이 아니라 덜 숙달된 종목에서 경쟁하자고 동년배들에게 도전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동년배들을 능가함으로써 고통을 주기보다는 그들에게서 배우고 싶었던 것이다. 수다쟁이는 정반대이다. 그가 배울 수 있고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는 대화가 시작되면, 한쪽으로 밀쳐버리거나 방향을 틀어버린다. 그는 침묵이라는 얼마 안 되는 보수마저 지불할 여유가 없어, 자꾸만 빙빙 돌며 대화를 지루하고 진부한 수다로 몰아가는 것이다. 우리 고향에는 에포로스의 책을 두세 권 읽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듣는 사람을 지루해 죽게 만들었고, 레욱트라 전투와 그 결과를 매번 이야기함으로써 번번이 만찬장의 판을 깨곤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에게 에파메이논다스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 플루타르코스, 『수다에 관하여』중에서

 

이 정도로 끝일까? 플루타르코스의 얘기는 계속 이어진다.

 

하지만 그건 약과이다. 그리고 우리는 수다를 그런 무해한 이야기로 유도해야 한다. 유식한 주제에 관한 수다는 덜 불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글을 쓰거나, 자기들끼리 토론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스토아학파 철학자 안티파트로스는 스토아학파를 격렬하게 공박하는 카르네아데스와 논쟁을 벌일 자신도 없고 의사도 없어 그를 반박하는 글로 여러 권의 책을 가득 채웠으며, 그래서 '소리치는 펜'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런 종류의 펜과의 그림자 싸움은 수다쟁이를 사람들에게서 떼어놓음으로써 사람들에게 점점 덜 부담이 되게 할 터인데, 그것은 마치 개가 막대기나 돌멩이에 분풀이를 하면 사람들에게 덜 사나워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수다쟁이는 자기보다 더 나은 연장자들과 자주 교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런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침묵하는 버릇을 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이런 버릇을 들이고 나면 조심하고 성찰하는 버릇도 들여야 한다. 말하고자 할 때나 말이 혀로 몰려들면, 자문해보아야 한다. "대체 어떤 말이기에 이렇게 억지로 밖으로 튀어 나오려고 하지? 내 혀는 왜 이리 안절부절못하지? 내가 말해서 이로운 점은 무엇이며, 말하지 않아서 해로운 점은 뭐지?" 말하는 것은 무거운 짐을 더는 것과는 다르다. 말은 해도 여전히 남아 있기 떄문이다. 사람은 필요한 것이 있어서 자신을 위해 말하거나, 듣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말하거나, 소일거리나 그때그때의 활동에 양념을 쳐 서로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말한다. 그러나 말이 말하는 사람에게 쓸모가 없고, 듣는 사람에게 불필요하며, 즐거움도 우아함도 없다면, 왜 말을 하는가? 말도 행동과 마찬가지로 무익하고 무의미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 플루타르코스, 『수다에 관하여』중에서

 

 

<수다에 관하여>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 해두자. 정작 내가 이 글을 쓴 '본래의 목적'은 아직도 제대로 꺼내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플루타르코스의 '11편의 에세이' 가운데 내가 두 번째로 꼽은 에세이 제목을 이쯤에서 한번 더 꺼내야 옳을지 모르겠다. 첫 번째 에세이에 대해 너무나 많은 '수다'를 떠는 바람에 그만 두 번째 에세이의 제목으로부터 우리가 이미 한참이나 멀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인상깊게 읽었던 두 번째로 에세이는 바로 <아첨꾼과 친구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였다. 플루타르코스가 이 문제에 얼마나 천착했는지는 '에세이의 길이'만 살펴봐도 금세 알 수 있다. 이 에세이 한편에 할애된 쪽수가 무려 118쪽에 달한다.(물론 우리말로 번역된 책의 쪽수를 말한다. 이 하나의 에세이에 딸린 번역자의 주석 또한 무려 210개에 달한다.)

 

어쨌든 플루타르코스의 작품 가운데 '에세이'만 놓고 보면, 그는『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쓴 전기작가의 면모보다는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미아에서 제대로 공부한 '엘리트 철학자'의 풍모가 훨씬 더 강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가 '아첨꾼과 친구'를 구별하기 위해 쓴 '깊이있는 글'은 여느 다른 작가의 작품에서는 좀처럼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독특한 면모와 깊이를 지니고 있어 매력적이다.

 

이 두 번째 에세이를 읽으면서 우리가 그 누구보다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인물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 그건 물어보나마나 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총선'이라는 커다란 정치 이벤트를 치른지 고작 한 달도 지나지 않았고, 불과 두어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바로 우리의 눈앞에서 시시각각으로 맹활약을 펼친 '정치판의 아첨꾼들'을 지겹도록 생생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기에 하는 말이다. 권력자에게 아첨을 떨기 위해 소위 '진박 감별사'를 자처하는 한심스런 인물까지도 등장했던 판이니 더 말해 무엇할까. '배신의 정치' 운운하며 '아첨꾼들과 한통속'으로 놀아난 위정자의 모습 또한 이 에세이를 읽는 동안 여러 차례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어디 그들뿐이랴. 어떤 조직에서나 늘상 있게 마련인 '교묘한 모습으로 자신을 위장했던 숱한 아첨꾼들'이 참 많이도 떠올랐다. '알라딘 마을'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우리가 이틀이 멀다 하고 들락거리는 바로 이곳 또한 '친구인지 아첨꾼인지 도대체 아리송한 인물들'이 너무나 자주 눈에 띄기에 하는 말이다. 혹시라도 내 말이 의심스러우면 플루타르코스가 1,900년 전에 쓴 다음의 글들을 한번쯤 찬찬히 읽어 보라. '친구와 아첨꾼'은 구별하기가 몹시 힘든 경우도 더러 있겠지만, 우리가 어느 정도 '감별 능력'만 확보할 수 있으면 아첨꾼들을 구별해 내는 일이 그리 어렵지만은 않다는 사실도 알게 될 것이다.

 

플루타르코스의 글을 읽으면서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은 '아첨꾼들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은 결국 '자기 자신'을 파멸로 이끈다는 점이다. 그보다 더 무서운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혹시라도 '아첨꾼'에 대해 한동안 경계를 게을리 해왔다면 이참에 다시 한번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듯하여 '적지 않은 분량'을 아래에 인용해 보았다. 까마득한 옛날에 쓰여진 플루타르코스의 글들이 오늘날에도 딱히 손볼 게 별로 없구나 싶고, 그런 사실이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할 뿐이다.

 

 * * *

 

아첨이 우정을 손상하거나 불신시키지 않게 하기 위해 아첨이 무엇인지 완전히 드러내어 검토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라 통찰력이 요구되는 사항이네. 해충은 죽어 가는 사람을 버리고 떠나지. 해충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피가 생명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네. 아첨꾼들도 그러해 즙과 온기가 없는 곳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고 명성과 권력이 있는 곳에 모여 득실거린다네. 그러나 여기에 변화가 오면, 그들은 재빨리 슬금슬금 빠져나가 사라지지. 그러나 우리는 무익하거나 오히려 해롭고 위험하기까지 한 이런 경험을 할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되네. 그 이유는 친구가 절실히 필요할 때 친구가 아닌 친구를 알아챈다는 것은 잔인한 일이기 때문인데, 그때에는 참되고 믿을 수 있는 사람과 믿을 수 없는 위선적인 사람과를 맞바꿀 수 없기 때문이네. 그러나 친구란 동전과 같아서, 필요로 하기 전에 검증을 받고 인정받는 것이지, 필요한 그때그때 입증하는 것이 아니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손해 볼 때까지 기다릴 것이 아니라,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눈을 크게 뜨고서 아첨꾼을 알아채고 찾아내는 방법을 배워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먼저 독약을 맛보고 나서야 독약의 치명적인 해를 알게 되는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게 되네. 이들은 결단을 내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희생한 거라네. 물론, 우리가 이러한 사람들을 칭찬하는 것이 아닐세. 뿐만 아니라 친구를 고상하고 이로운 무언가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칭찬하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사교적으로 잘 어울리는 사람들을 곧 아첨꾼들이라고 여기는 것도 아니네. 친구란 즐겁거나 순수한 관계이며, 또한 우정에 품위를 주는 것은 쓰라림이나 준엄함이 아니라 우정 속에 들어 있는 바로 이 고결함과 존업성이 달콤하고 바람직한 것이기 때문이지.

 

그리고 불운에 빠진 사람에 대해, 에우리피데스가 읊듯이,

 

정감 어린 남자의 두 눈을 응시하는 것은 달콤하다네.

 

뿐만 아니라 우리와 함께할 때 우정은, 역경에 처했을 때 슬픔과 무력감을 싹 가시게 하고, 이에 못지않게 우리의 번영기에는 즐거움과 기쁨을 선사한다네.

 

에우에노스가 불에 쬐어야 최고의 양념이 된다고 말했던 것처럼, 신은 우리 생활에 우정을 엮어 놓음으로써 즐거운 일에 우정이 관련되어 있을 때에는 만사가 기분 좋고 달콤하고 유쾌하게 되게 하셨지. 정말, 우정이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즐거움이 있을 수 없음을 알아차린 아첨꾼이, 어떤 방법을 써서 자신의 전매특허라 할 즐거움을 사용할 수 있을는지는 누구도 설명해 줄 수 없지. 그러나 가짜 금으로 된 모조품이 오로지 밝은 광채만 내는 것을 모방한 것과 마찬가지로, 분명히 아첨꾼은 친구의 즐겁고 매력적인 성격을 모방함으로써 언제나 즐거운 기분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조금도 상대방에게 거슬리거나 반대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네. 그렇다고 칭찬의 말을 하는 사람들을 곧바로 단순한 아첨꾼으로만 의심하는 것은 타당치 않은데, 제때에 칭찬하는 것은 비난에 못지않게 우정에 어울리기 때문이네. 또한 우리가 불평과 흠잡기는 일반적으로 비우호적이고 비사교적이나, 이에 반해서 고귀한 행동에 흔쾌히 칭찬하는 친밀감은 언젠가는 유쾌하고 부담 없이 훈계하고 솔직한 말을 털어놓으면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말해 줌으로써 더 잘 표현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네. 그도 그럴 것이 칭찬하기를 즐기는 사람은 꼭 필요한 때에만 칠책을 한다고 우리는 믿고 또 만족하기 때문이지.

 

 * * *

 

자! 그렇다면 우리가 경계해야 할 아첨꾼은 어떤 사람일까? 아첨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 아첨한다는 것을 인정하지도 않는 사람, 부엌 주변에서 서성거리는 것을 결코 볼 수 없는 사람, 식사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해시계를 절대 쳐다보지 않는 사람, 술에 만취해 마룻바닥에 절대로 눕지 않는 사람일세. 그는 정신이 말짱하지. 항상 바쁘고, 모든 일에 참견하고, 모든 비밀에도 신경을 쓰네. 연극에 비유하면 비극 배우의 무게를 지닌 친구 역할을 하고, 절대로 희극 배우나 어릿광대의 역할은 안 하네. 플라톤이 말하듯이,

 

누군가가 정직하지 않을 때 정직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부정직의 극치이네.

 

그래서 우리가 취급하기가 어렵다고 간주해야 할 아첨은 본시 숨겨져 있는 것이라네. 이러한 아첨은 참된 우정까지도 불신으로 감염시키지. 만약 우리가 아첨이 우정과 부합되는 많은 점에 주의하지 않는다면 말일세. 페르시아 귀족 중에 고브뤼아스라는 사람이 있었네. 그는 도망치는 사제(司祭) 마고스를 추적해 캄캄한 방으로 들어가 죽을 힘을 다해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네. 그는 뒤따라와 그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다레이오스왕에게 외쳤지. 둘 다 죽이더라도 좋으니, 어서 칼로 치라고 말일세. 그러나 "친구를 죽이게 되더라도 적을 때려눕혀라"는 정서를 결코 용인할 수 없다면, 우리는 서로 얽혀 닮은 점이 많은 친구와 아첨꾼을 구별하려 할 때에 크게 망설일 바가 하나 있네. 해를 당할 위험에 처했을 때 선한 자와 악한 자, 즉 친구와 아첨꾼을 함께 버리든가 아니면 함께 취하든가 하지 않기 위해서지. 그래서 나는 밀의 모양과 크기가 비슷한 독보리 같은 야생 씨앗들이 밀의 씨앗들과 섞였을 때, 야생 씨앗을 골라내는 일은 어렵다고 생각하네. 마찬가지로, 아첨은 모든 감정, 모든 동작, 필요, 그리고 습관과 얽혀 있기 때문에 우정과 구별하기가 어려운 것이네.

 

 * * *

 

우정이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것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리고 우정보다 더 큰 기쁨을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아첨꾼은 즐거움을 주는 방법으로 유혹하고 또 즐거움에 관여하네. 호의와 유용함이 우정과 더불어 있다는 점 때문에(바로 이 이유 때문에 친구가 불과 물보다도 더 없어서는 안 된다고 세상 사람들은 말하는 것이네만), 아첨꾼은 끼어들어 우리를 도우려 하고, 언제나 성실하고 끈기 있고 부지런한 것처럼 보이려고 애쓰지. 싹튼 우정이 아주 각별하게 공고히 되는 것은 취미와 성격이 비슷하기 때문이네. 그래서 일반적으로 같은 일에 즐거움을 느끼고 같은 일을 피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우선 사람들을 함께 모이게 하고, 공감대를 통해서 친숙해지게 하므로, 아첨꾼은 이 사실에 유의해 몸소 이에 적응한다네. 마치 자기가 비활성의 물체인 것처럼 모방을 통해 자기가 공격하려는 사람들에게 맞게 자신을 맞추고 그들이 받아들이게끔 노력한다네. 그리하여 그가 너무나 변화무쌍하고 너무나 복제를 그럴듯하게 잘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외치네.

 

그대는 아킬레우스의 아들이 아닌, 바로 아킬레우스 자신.

 

이라고.

 

그러나 그가 지닌 것 중 가장 파렴치한 속임수는 이것이네. 사회 일반의 평판과 소신에 따른 솔직한 언사가 우정 특유의 언어라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솔직함의 결여가 우정이 없고 야비하다는 점을 감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심지어 이것까지도 철저하게 모방하려 든다는 것이네. 그러나 영리한 요리사들이 단맛의 식상함을 없애기 위해 쓴 즙과 떫은 양념을 사용하는 것처럼, 아첨꾼들은 순수하거나 이롭지 않지만, 말하자면 눈살을 찌푸리는 대신에 윙크하고 오직 기쁘게만 하는 솔직함을 가하지. 이런 이유 때문에 사실 아첨꾼을 간파하기란 어렵네. 주변 환경의 변화에 따라 몸의 색깔을 똑같이 바꾸는 카멜레온들의 경우와 마찬가지지. 아첨꾼이 유사성을 이용해 속이고, 또 자신을 포장하기 때문에, 포장을 풀고 그를 적나라하게 노출하기 위해 플라톤이 언급했듯이, 아첨꾼이 "그 자신의 어떤 결핍 때문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색깔과 모습으로 치장하는" 행동을 할 때, 그 차이점들을 이용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네.

 

 * * *

 

자, 그러면 처음부터 이 문제를 생각해 보지. 우리가 전에 말했듯이 대부분의 사람과 우정을 맺기 시작하는 것은 마음이 맞는 성향과 기질 때문이네. 그래서 습관과 특성이 거의 같은 사람을 서로 환영하고, 같은 일과 활동, 같은 취미를 즐기게 되지. 이 주제로 역시 다음과 같은 말이 있네.

 

노인은 노인에 대해 가장 달콤한 말을 하고,

아이는 아이에 대해,

여인은 여인끼리 잘 어울리고,

병든 이는 병든 이에게,

불행에 우는 이는 불운을 만난 이에게 끌리지.

 

그래서 아첨꾼은, 사람들이 같은 일들에서 기쁨을 맛볼 때 서로에게서 향락과 만족을 느끼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임을 앎므로, 희생자로 삼으려는 각각의 상대에게 처음 접근을 시도하여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때까지 이 과정을 택하네. 그는 마치 목장에서 마음껏 달리는 동물처럼 행동하고, 같은 오락 같은 취미를 가진 척하며, 같은 생활의 이해관계와 태토를 보이는 척함으로써, 그는 점점 그에게 밀착해 완전히 그와 같은 색깔을 띠게 하네. 그래서 마침내 희생자는 그에게 빌미를 주고 유순해지고 아첨꾼의 접촉에 친숙해지지. 아첨꾼은 눈치를 채 언제나 그의 희생자가 싫어하는 행동, 생활, 그리고 사람들을 달가워하지 않네. 반면에 상대를 즐겁게 하는 것이 있다면, 아첨꾼은 보통 정도가 아니라 아주 분명히 당사자 이상으로 놀람과 경이로움으로 칭찬한다네. 동시에 그는 자기의 애증(愛憎)이 감정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이성적 판단의 결과라고 단호하게 주장한다네.

 

 * * *

 

그렇다면 아첨꾼의 가면을 벗기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떤 차이점에 근거해 아첨꾼이 실제로는 같은 마음의 소유자가 아니거나 심지어 같은 마음의 소유자가 될 가망성도 없는 자로서, 단지 이러한 성격을 모방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을까? 첫째, 그의 취미가 단일하고 변함이 없는지 관찰할 필요가 있네. 다시 말하면 그가 항시 같은 것들에서 기쁨을 누리는지, 언제나 같은 것들을 칭찬하는지, 자유인 태생이자 유쾌한 우정과 친교의 애호가가 되는 한 가지 방식에 따라 자기 자신의 생활을 영위하는지를 말이네. 왜냐하면 이러한 것이 친구의 행위이기 때문이네. 그러나 아첨꾼은 특성상 한곳에 오래 머물러 있지 못하고, 자신의 선택인 인생이 아니라 남의 삶을 선택해 거기에 자신을 적응해 살아가기 때문에, 단순하지도 않고,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지. 그 속에는 많은 사람이 들어 있어 변화무쌍하지. 그리고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그릇의 모양에 맞춰 부어지는 물처럼, 그는 늘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이동하고, 자기를 받아들이는 사람에 알맞게 변신한다네.

 

원숭이를 잡아 보면 알 수 있네. 원숭이는 사람이 하는 대로 움직이고 춤을 춤으로써 사람을 모방하려고 애쓰지. 그러나 아첨꾼 자신은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 유인하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을 똑같이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따라 다른 방식을 취하지. 어떤 때는 춤추고 노래하는 사람과 어울리고, 어떤 때는 레슬링을 하면서 흙먼지를 뒤집어쓰기도 하네.

 

 * * *

 

아첨꾼은, 즐겁고 동시에 충실한 사람이 되고 또 그렇게 보이기를 바라기 때문에 더 악한 일에서 더 큰 기쁨을 맛보는 척하네. 이는 마치 품고 있는 큰 사랑 때문에 천박한 것에 대해서조차도 차마 공세를 취하지 못하는 사람과 같긴 하지만, 그러나 아첨꾼은 모든 일에서 친구와 공감하고 동참한다네. 이런 이유로 아첨꾼들은 우리 인간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일어나는 삶의 우연사까지도 한몫 끼기를 거부하지 않는 것이지. 그래서 그들은 상대가 나쁜 병에 걸렸으면 그 병에 걸린 것처럼 행동하고, 상대가 눈이 침침하거나 가는귀 먹었으면 자신도 분명히 보거나 들을 수 없는 것처럼 행동함으로써 제각각 아첨한다네. 이는 마치 참주 디오뉘시오스의 아첨꾼들과 같아서 그의 시력이 떨어지지 만찬 때 아첨꾼들은 서로서로 몸을 부딪쳐 접시들을 깨곤 했지.

 

오히려 고통과 함께 해서 좀 더 상대의 환심을 사고 동료애를 보여 상대방의 마음속 깊이 박혀 있는 비밀까지도 캐내는 사람들이 있네. 예를 들어, 상대방이 결혼이 불행하다거나 아들이나 가족을 의심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아첨꾼들은 온 힘을 다해 자신들의 아이들이나 부인, 또는 친척이나 가족에 대해 개탄하며 자신들이 잘못을 저지른 특정 비밀까지도 다 얘기한다네. 왜냐하면 이런 것이 동료애를 더 강하게 하기 때문이지. 그래서 상대방은 우정의 서약을 다짐 받았다고 생각하며 아첨꾼들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 경향이 늘어나는데, 그렇게 행동함으로써 그들은 아첨꾼들을 옆에 붙들어 두는 격이 되네. 은밀한 관계를 포기하기가 두려운 거지.

 

 * * *

 

그러나 아첨꾼이 하는 일 모두와 그 최종 목적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항상 향료 같은 것으로, 그때그때 기분 맞추는 농담, 웃기는 소리, 재미있는 얘기를 해 가면서 서로서로 쾌락을 자극하는 데 있지. 두어 마디로 표현하자면, 아첨꾼은 기분 좋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반면에, 친구는 때로는 기분 좋은 일도 하고 때로는 기분 나쁜 일도 한다는 것이네. 항상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기 때문이지. 그런데 기분이 나쁜 일을 하는 경우, 그것은 불쾌감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라 불쾌한 일을 그냥 덮어 두고 넘어가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지. 덮어 두고 그냥 넘어가는 일이 더 낫다고 하더라도 말이네. 말하자면 의사와 같은 것이지. 의사는 환자에게 좋다면 사프란이나 감송을 복용하게 하네. 그리고 때때로 쾌적한 목욕이나 몸에 맞는 식이요법을 권하지.

 

 * * *

 

그러므로 친구는 숙련된 음악가와 같은데, 현을 풀었다 조였다 하면서 고상하고 유익하게 변화의 효과를 주어 연주하기 때문이지. 그래서 친구는 자주 즐겁고 항상 유익하다네. 그러나 아첨꾼은 다르네. 아첨꾼은 오직 한 음조에만 맞춰 즐거움과 우아함의 반주곡을 줄곧 연주해 왔기 때문에 저항의 행동이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은 하나도 모르네. 그저 다른 사람의 소원이 무엇인가만 알려 하고 거기에 맞추어 매사 주의를 집중하고 언급을 하지. 자기를 질책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서 칭찬 또한 받는 것이 참 기쁘다고 했던 아게실라오스에 관해 크세노폰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것을 참된 우정으로 간주해야 하네. 간혹 질책이 우리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우리가 소망하는 것을 짓밟는다 하더라도 말이네. 그러나 우리는 즐거움만 추구하는 교제, 사근사근 공손하기만 하고 가시 돋친 말은 전연 없거나 섞이지도 않은 교제가 아닌지 주의해야 하네. 그래서 우리는 스파르테인의 금언을 명심해야 하지. 카릴로스 왕이 칭찬을 받았을 때 했던 말,

 

악한에게조차 엄하지 못한 그가 어떻게 선한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 * *

 

파당 싸움과 전쟁 중에 투퀴디데스는 이렇게 말했네.

 

그들은 보통 받아들여지고 있는 단어들의 의미를 자신들이 행한 행동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의미로 바꿔 버렸다. 그래서 무모한 만용은 진정한 용기로, 신중한 기다림은 그럴듯한 비겁으로, 온건함은 겁쟁이의 구실로, 만사에 대한 명민한 이해는 어떤 일을 맡기에는 행동력이 부족한 것으로 간주하기에 이르렀다.

 

고. 그래서 하는 말인데, 누가 아첨하려고 할 때에 우리리는 주의 깊게 관찰하여 감시의 고삐를 늦추어서는 안 되네. 낭비가 '베풂'으로, 비겁이 '자기 보전'으로, 충동이 '기민함'으로, 인색이 '검약'으로, 호색한이 '사교적이고 호감을 주는 사람'으로, 성 잘 내고 오만방자한 사람이 '기백이 있는 사람'으로, 미천하고 온순한 사람이 '친절한 사람'으로 불리는 것들이지. 플라톤도 어디선가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애인의 아첨꾼이 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부른다고 말했네. 사자코의 애인은 '매혹적'인 사람, 메부리코의 애인은 '왕과 같은' 사람, 피부색이 검은 사람은 '사내다운' 사람, 살갗이 희고 금발인 사람들은 '신들의 아이들'로 말이지.

 

 * * *

 

그러나 악을 덕으로 취급해 칭찬하는 사람의 경우는 다르네. 그는 악에 분개하지 않고 오히려 악을 기뻐하지. 그래서 자기 잘못에 대한 온갖 수치심을 못 느낀다네. 이것이 일종의 큰 재앙을 초래했는데, 시켈리아 주민으로 하여금 디오뉘시오스와 팔라리스의 야만적인 잔학 행위를 '불의와 부정에 대한 증오심의 발로'로 부르게 함으로써 큰 고통을 당하게 했네. 아이귑토스를 파멸시킨 것 역시 이것이었네.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유부단, 그의 종교적 심취, 그의 찬가, 그가 두드리는 북소리에다가 '경건심'과 '신들에 대한 헌신'의 이름을 갖다 붙였기 때문이지. 이것이 바로 공화정 말기 당시에 로마인들의 성격을 비뚤어지게 하고 훼손시킨 것이었네. 안토니우스의 사치, 그의 무절제한 행위, 화려한 전시를 "권력의 신과 행운의 여신의 손을 적절히 이용하는 그의 유쾌하고 친절하고 고상한 행동들"로 두둔하려 했기 때문이지. 프톨레마이오스로 하여금 주색잡기에 빠지게 했던 것은 이것 말고 또 무엇이 있겠는가? 네로에게 비극의 무대를 설치해 주고 그에게 탈을 쓰게 하고 편상(編上) 반장화를 신게 했던 것은 이것 말고 또 무엇이 있겠는가? 그것이 그의 아첨꾼들의 칭찬이 아니었는가?

 

어떤 왕이라도 노래 한 곡조 웅얼거리면 아폴론 신, 술 한 잔 하면 디오뉘소스 신, 레슬링을 하면 헤라클레스 신이라 부르지 않는가? 그렇지 않으면 왕은 기쁨을 누리지 못하지. 그래서 왕은 아첨에 의해 기쁨을 얻고 온갖 종류의 불명예스런 일에 빠져 들지 않았는가?

 

 * * *

 

만일 상대가 글재주가 있음을 알아채면, 아첨꾼은 그에게 자기가 쓴 글 일부를 주며 읽고 고쳐 달라고 요청하네. 미트리다테스는 왕이었는데, 그는 아마추어 의사로 자처했지. 그의 친구 중 몇이 그에게 수술받고 수술 부위를 불로 지져 고쳐 줄 것을 자청하여,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그에게 아첨했네. 왜냐하면 왕은 자기에 대한 그들의 신뢰가 곧 그의 의술에 대한 증거라고 느꼈기 때문이지.

 

여러 모습으로 신들은 나타나네.

 

더욱 약삭빠르고 주의를 필요로 하는 이런 부류의 거짓 칭찬은 의도적으로 만든 어처구니없는 조언과 제안들, 그리고 의식적인 교정들에 의해 밝혀지게 되어 있네. 왜냐하면 만약 그가 어떤 것이든지 반박을 못하고, 만사에 다 동의하고 그걸 받아들이면서 모든 제언에 "좋소", "탁월해" 하고 외친다면,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게 하는 격이기 때문이네.

 

지나가는 말로 묻네만,

다른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건지.

 

그가 실제로 바라는 것은 그의 희생자를 칭찬하여, 그가 더욱더 기고만장하게 하는 것이라네.

 

 * * *

 

이제 더 고심하지 않고 봉사와 도움의 화제로 들어서게 되었네. 아첨꾼이 자신과 친구 간의 차이에 관해서 큰 혼란과 불확실성을 야기하는 것이 바로 봉사와 도와주기에서인데, 그는 매사에 활기차고 열성적인 것같이 보이지만 절대로 속내를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지. 친구의 특징은 무엇인가? 에우리피데스가 말하듯이, 그것은 '진리의 언어'처럼, '단순하고' 분명하며 가식이 없다네. 반면에 아첨꾼의 특징은 바로 그 진실이란 면에서

 

부패하고 병들어 있기 때문에,

좋은 비상 치유책이 많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난다고 나는 과감히 주장하는 바이네. 아는 사람을 만나서 인사하는 예를 들어 보겠네. 친구는 때로는 말은 한마디도 주고받지 않으면서 단순히 힐끗 쳐다보고 미소 지으며 눈을 통해 마음속에 담겨 있는 호의와 친밀감을 넌지시 주고받고 지나치지. 그러나 아첨꾼은 어떻게 하는지 아는가? 그는 달려가 멀리서부터 손을 내밀고 따라가면서 인사한다네. 그리고 상대가 그를 먼저 보고 말을 걸어오면, 먼저 못 봐서 미안하다고 온갖 증거를 대고 맹세까지 해대며 야단법석을 떠는데 행동도 똑같다네. 친구들은 사소한 형식 같은 것은 많이 생략하지. 그래서 친구지간의 일 처리에서 너무 사무적이거나 꼼꼼히 따지지도 않고 할 일에 대해서도 일일이 간섭하지 않지. 그러나 아첨꾼은 크게 다르다네. 그는 일들을 처리할 때 상대방에 대해 순종의 자세를 취하네. 고집스럽게, 주도면밀하며, 지치지도 않은 채 일을 하면서 자기 외에 누구에게 자리를 양보하거나 일 처리에 여유를 주지 않네. 그러나 그는 상대의 명령이 떨어지기를 열심히 기다리지. 그러다가 아무 명령이 없으면 안절부절 못하다가 의기소침해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면서 큰 슬픔에 빠진다네.

 

 * * *

 

그런데 지각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것들은, 순수하거나 고상한 우정의 표현이 아니라 창녀가 남자를 유혹하고 포옹하는 것 이상의 철면피한 우정의 표현이네.

 

그렇지만 우리는 첫째, 봉사하는 두 사람이 보여준 차이점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네. 옛부터 작가들이 말하는 친구가 제공하는 봉사의 형태는 이런 것들이지.

 

물론 내 힘이 닿고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내 기꺼이 그 부탁을 들어 주겠네.

 

반면에 아첨꾼은 이렇다네.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을 속 시원히 다 말해 보게.

그 부탁을 꼭 들어 주겠네.

 

 * * *

 

자네는 원숭이를 본 적이 있겠지. 원숭이는 개처럼 집을 지킬 수도 없고, 말처럼 짐을 나를 수도 없고, 소처럼 밭을 갈 수도 없지. 원숭이는 학대와 욕도 감내하고 짖궂은 장난도 참아가면서 웃음의 노리개가 되네. 아첨꾼도 마찬가지, 그는 말이나 돈으로 남을 도울 수 없고 싸움에서 남을 지원할 수 없고, 힘들거나 중대한 일을 맡기에는 적임자가 아니지. 하지만 그는 비열한 행동을 할 때에는 아무 군소리도 없고, 정사(情事)에는 충실한 조력자이며, 창녀에게 지급할 금액을 정확히 알고 있고, 술이 곁들인 저녁 식사 값을 계산할 때는 실수가 없으며, 여자들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쓴다네. 그러나 부인의 친척들을 냉대하라거나 부인을 집 밖으로 내쫓을 때 도우라는 부탁을 받으면, 아첨꾼은 가차 없이 태연스럽게 수행하지. 결론으로 말하자면, 역시 아첨꾼은 이런 방법으로 찾아내기가 어렵지 않네. 왜냐하면 만약 자네가 하고자 하는 어떤 수치스럽고 불명예스러운 일을 하도록 아첨꾼에게 부탁한다면, 그는 그 일을 맡긴 사람을 만족시키려고 자기 몸을 아끼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기 때문이지.

 

 * * *

 

아첨꾼과 친구 사이의 큰 차이점은 친구의 친구를 대하는 그의 성향에서 아주 분명하게 감지할 수 있네. 친구는 수많은 친구와 사랑하고 사랑받는 데서 가장 큰 즐거움을 찾기 때문이지. 그의 친구도 다른 많은 친구를 사귀게 하고 명예롭게 되도록 언제나 끊임없이 노력한다네.

 

친구들은 모든 것을 공유한다.

 

고 믿기 때문에 친구들만큼 공유되는 것도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지. 그도 그럴 것이 우정을 해치는 나쁜 짓을 저지른다는 것을 자신도 충분히 알기 때문이라네. 우정이 그의 손에 들어가면, 이를테면 위조 동전으로 변한다는 것뿐이지. 아첨꾼은 천성적으로 질투심이 많네. 그래서 자기 본분을 망각하면서까지 나불나불 수다를 떨거나 익살을 부리면서 험담을 늘어놓아 남들을 능가하려고 끊임없이 애쓴다네. 그러나 아첨꾼은 자기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운 경외심을 품고 있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정말로 그는,

 

뤼디아인의 전차와 경주하며 허덕이는 보병이기

 

때문이 아니라, 시모니데스가 표현한 것처럼, 그는

 

정제된 순금과 비교되기 때문이지.

 

그런데 아첨꾼은 가벼운 가짜 도자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순수하고 돈독한 우정과 비교되거나 면밀히 검사받을 때는 언제나 들통이 나 불합격 통지를 받게 되지. 그래서 그는 발각되면 수탉들을 엉망진창으로 그리는 화가처럼 똑같이 행동한다네. 화가는 하인에게 명하여 모든 진짜 수탉들을 겁을 주어 가능하면 아주 멀리 화포/그림에서 쫓아 버리게 하기 때문이네. 그리고 아첨꾼들도 그렇게 진짜 모든 친구를 겁주어 다 쫓아 버리고,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하지. 그런데 만약 아첨꾼이 이런 짓을 할 수 없다면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아는가? 친구들에게 그는 대놓고 굽실거리고, 상냥하게 대하며, 상급자처럼 아주 존경하는 척 거대한 겉치레를 부린다네. 그렇지만 이걸 알아 두게. 그는 암암리에 친구들을 중상 모략하는 말을 넌지시 암시하거나 퍼뜨린다는 걸 말이네. 비록 아첨꾼은 시작 초에 완전히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하더라도, 비밀리에 말하는 것이 언젠가는 아픈 염증을 유발하기 마련이므로 메디오스의 교훈을 되새기며 결과를 지켜본다네. 굳이 그 작자를 거명하자면, 이 메디오스란 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비위를 맞추면서 선한 모든 사람의 접근을 막았던 아첨꾼 패거리의 수완 좋은 우두머리겪이었지. 이 메디오스란 자가 자기 수하들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아는가?

 

중상모략으로 공격하고 고통을 안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게.

대왕의 상처는 다 아물어도 중상모략의 상처 자국은 여전히 남는 법이니까.

 

 * * *

 

이 글의 시작에서 권유했듯이 지금 우리는 자기애와 자만심을 뿌리째 뽑아 버려야 한다고 촉구하는 바이네. 왜냐하면 이것들이 미리 앞질러 우리 자신에게 아첨하게 함으로써 실제로 외부로부터 오는 아첨꾼들에 대한 저항력을 감소시키기 때문이네. 우리가 아첨꾼들을 받아들일 완전한 자세가 되어 있어서네.

 

그러나 만약 신에게 복종하는 가운데 '너 자신을 알라'는 교훈이 우리 작자에게 매우 귀중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주의 깊에 우리 자신의 본성과 훈육, 그리고 교육을 되짚어, 자기애와 자만심이 정말 덕을 쌓는 데 갖가지 방법으로 얼마나 부족하게 되는지, 뿐만 아니라 떼려야 뗄 수 없을 정도로 슬프고도 경솔하게 말하고 행동하고, 느끼는 데서 얼마나 맣은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성찰해 본다면, 아첨꾼들이 그렇게 쉽게 우리를 깔아뭉개려 하지 못하게 할 수 있을 것이네.

 

그런데 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자신을 신으로 선포했던 자들을 불신하도록 그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은 두가지였다고 말했네. 그 두 가지는 숙면을 취하는 것과 여인과 잠자리를 하고픈 욕망을 자제하는 것이었지. 사실상 그는 이런 일들에서 자신의 감추어진 정에 무른 면이 더 드러난다고 느꼈기 때문이네. 우리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만약 우리가 직무 소홀과 직무 수행 모든 면에서 많고 많은 우리 자신의 잘못을 주의 깊게 관찰해 본다면 부끄럽고 슬퍼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자신의 부족한 점을 찾을 것이네. 우리를 좋게 봐 주고 격찬하는 친구가 아니라 우리에게 일을 맡기고, 솔직하게 대하며, 진정 우리의 행동이 잘못될 때 꾸짖는 친구에게서 말이네. 친구에게 호의를 보여주기보다는 오히려 솔직성을 보여주는 용기를 가진 사람은 많은 자 가운데 정말 몇이 안 되는 극소수이기 때문에네. 그런데 극소수 가운데서도 이렇게 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네. 오히려 남이 잘못하거나 잘못한 것을 알아챘을 때 솔직하게 질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네. 하지만 솔직함이란, 약효가 다른 의약품과 같아서, 적시에 써먹지 않으면 무익하고 고통과 혼란만 야기시키지. 그래서 사람들은 솔직함은 고통스러우나 아첨은 즐거움을 가져온다고 말하기도 하지. 사람들은 때가 아닌 때에 칭찬을 받는 것뿐만 아니라 때가 아닌 때에 책망을 받게 되면 상처를 입게 되기 때문이네. 바로 이것이 친구들이 아첨꾼들에게 몰려가 그들의 쉬운 먹잇감이 되는 특별한 이유네. 물이 너무 험준한 언덕들을 피해 편편한 골짜기를 찾아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것과 같지.

 

솔직함은 따라서 좋은 태도가 수반되어야 하네. 그리고 거기에 솔직함이 지나쳐서도 또 너무 강해서도 안 되는 이유가 있네. 이것은 빛의 노출도와 비교해 볼 수 있는데, 과도하게 노출되면 누구나, 매사에 결함을 찾아 매도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자로 인해 곤란을 겪고 고통을 당하기 때문에, 아첨꾼의 그늘로 도피하게 되지. 그래서 고통을 야기하지 않는 방향 전환을 하게 되는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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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플루타르코스가 세 번씩이나 인용했던 플라톤의 문장
    from Value Investing 2018-01-06 14:18 
    그래서 내가 말했네. "누가 무엇을 사랑한다고 제대로 말하려면, 그는 그것의 일부는 사랑하고 다른 일부는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내가 자네에게 상기시켜줘야 하나, 아니면 자네도 기억하고 있는가?" "선생님께서 상기시켜주셔야 할 것 같아요. 나는 기억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내가 말했네. "글라우콘, 자네가 그런 대답을 하다니 정말 뜻밖일세. 소년을 사랑하는 사람은 한창때의 소년들을 보면 언제나 뜨거운 열정을 느끼며 그들
 
 
 
 전출처 : 나무처럼님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전집 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대한 전기 가운데 나무처럼 님께서 인용해 주신 `편지 내용`을 (천병희 번역,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통해) 인상깊게 읽었더랬습니다. 더군다나 그가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호메로스의 두 서사시뿐 아니라 그리스 비극작품과 희극작품까지 `본국에서 전쟁터까지` 가져오도록 해서 탐독하는 모습도 감동적이었구요. 왜 숱한 사람들이 그토록 알렉산드로스를 칭송하는지를 비로소 자세히 알 수 있었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비교 열전` 형식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자세히 알고 보니 그 구성이 꽤나 복잡하더군요. `필사본`에 따라 전기에 포함되는 인물도 서로 다르고 구성도 서로 다르기까지 하더군요. 현재 많은 인쇄 출판 편집본들이 따르고 있는 방식에 의하면, '비교 열전'에 담긴 영웅들의 숫자는 정확히 50명이 맞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좀 더 자세히 알고 보면 23쌍에 대해서는 인물들을 서로 비교하는 `비교열전`이고, 그 가운데서도 특히 네 쌍에 대해서는 `짝`만 지어져 있고, `비교하는 내용` 자체가 없더군요. 그러니까 예를 들어 알렉산드로스와 카이사르는 서로 `짝`을 이루는 인물들이긴 하지만 `두 사람을 비교하는 내용`은 정작 따로 없는 경우인 셈이지요.

필사본에 따른 자세한 차이점들을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해 놓은 내용을 알고 보면, 정작 일반 독자들은 너무나 복잡해서 자세히 알 필요가 없을 정도인데, 그 가운데 그나마 기본적으로 알아둘 만한 대목 `두 가지`정도만 참고 삼아 여기에 `인용 형식`으로 덧붙여볼까 싶습니다.

* * *

플루타르코스의 시대에 가장 가까운 자료를 보자면 람프리아스의 목록을 들 수 있는데, 그것은 위에서 소개한 것과 순서와 목록에서 차이를 보여준다. 인물들이 모두 50명인 것은 같지만, 이들이 모두 25쌍으로 묶여 있다는 점은 다르다. 그리고 위의 목록에 포함되지 않은 두 인물인 에파미논다스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람프리아스의 목록에는 포함되어 있는 반면에, 갈바와 오토가 목록에서 빠진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 * *

23쌍 가운데 19번에는 두 명이 아니라 네 명의 인물(아기스, 클레메네스 /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가이우스 그라쿠스)이 들어 있고, 23∼26번까지는 짝을 이루지 않고 한 사람씩이므로 모두 50명이 된다. 짝을 이루는 23쌍 가운데 네 쌍(테미스토클레스-카밀루스, 퓌로-가이우스 마리우스, 알렉산드로스-율리우스 카이사르, 포키온- 小 카토)을 제외하고 나머지 인물들에 대해서는 두 인물을 비교하는 내용이 끝에 간략하게 덧붙어 있다.



 - 플루타르코스,『두 정치연설가의 생애』, <작품 해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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