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즐긋기)

 

즉각적으로 자명한 사실

 

'신', 영혼불멸', '구원', '피안'은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조차도 주목하지도 시간을 투자하지도 않았던 개념들이다. ㅡ 내가 정녕 어린아이답지 않았던 것일까? ㅡ 나는 무신론을 결코 결과라고는 이해하지 않는다. 사건으로서는 더더욱 아니다 : 무신론은 내게서는 즉각적으로 자명한 사실이다. 나는 너무 호기심이 많고, 의문이 많으며, 오만하여 조야한 대답에 만족하지 않는다. 신이란 하나의 조야한 대답이며, 우리 사유가들의 구미에는 맞지 않는다 ㅡ 심지어 그것은 본질적으로는 우리에게 조야한 금지를 하는 것일 뿐이다 : 너희는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금지를 말이다 ······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지>, 제1절

 

 * * *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생겨나지 않은 생각은 무엇이든 믿지 말라

 

 - 알코올은 내게 해롭다 : 하루 한 잔의 와인이나 맥주는 내 삶을 '눈물 골짜기'로 만들어버리기에 충분하며, 그러니 뮌헨에는 내 대척자들이 살고 있는 것이다. (중략) 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 나는 어디서든 흐르는 샘에서 물을 길을 수 있는 곳을 선호한다(니스, 토리노, 실스) ; 개 한 말리가 내 뒤를 따르듯, 컵 하나가 내 뒤를 따라다닌다. (중략) ㅡ 간식도 하지 말고, 커피도 마시지 말라 : 커피는 우울하게 만든다. 는 아침에 마셔야만 건강에 이롭다. 약간만이되 강하게 마셔라 ; 차는 조금만 약해도 건강에 아주 좋지 않으며, 하루 종일 힘들게 만든다. (중략) ㅡ 가능한 한 앉아 있지 말라 ; 야외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생겨나지 않은 생각은 무엇이든 믿지 말라 ㅡ 근육이 춤을 추듯이 움직이는 생각이 아닌 것도 믿지 말라. 모든 편견은 내장에서 나온다. ㅡ 꾹 눌러앉아 있는 끈기 ㅡ 이것에 대해 나는 이미 한 번 말했었다 ㅡ 신성한 정신에 위배되는 진정한 라고. ㅡ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지>, 제1


 * *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잡것에 대하여

 

참으로, 모든 어제와 오늘은 글이나 갈겨 쓰는 잡것이 내는 고약한 냄새로 진동하고 있구나!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2부, <잡것에 대하여>

 

* * *

 

(밑줄긋기)

타인과의 교제에서 적지 않은 어려움을 야기시키는 내 본성의 마지막 특징에 대해 운을 떼어도 될까? 나는 섬뜩할 정도로 완벽하게 민감한, 순수에 대한 본능을 갖고 있다. 그래서 나는 모든 영혼의 근접을 또는 ㅡ 뭐라고 말해야 하나?모든 영혼의 가장 내적인 것, 영혼의 '내장'을 생리적으로 지각할 수 있다 ㅡ 냄새 맡을 수 있다 ······ 이 민감성은 내게 모든 비밀을 감지하고 파악해내는 심적 촉수를 제공한다 : 몇 가지 본성들의 밑바닥에는 수많은 은폐된 오물들이 있다. 아마도 나쁜 피 때문에 생겼을 터이며 교육에 의해 하얀 칠이 칠해졌어도, 나는 그것을 한 번만 접촉해보면 곧 의식할 수 있다. 내가 제대로 관찰했다면, 내 순수함에 해가 되는 본성들도 자기들 쪽에서 내가 구토하지 않으려고 조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 그렇다고 그들의 냄새가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 습관적으로 그래왔듯 ㅡ 나 자신에 대한 극도의 순수함은 내 생존 조건이다. 나는 불결한 조건에서는 죽고 만다 ㅡ 나는 말하자면 물속에서 계속 헤엄치고 목욕하며 첨벙거리고 있다. 어떤 완벽하게 투명하고도 빛나는 요소들 안에서 말이다. 그래서 내게 인간과의 교제는 내 인내심에 대한 작지 않은 시험인 것이다 : 내 인간애는 사람들과 함께 공감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내가 그들과 공감한다는 것을 참아내는 데 있다 ······ 내 인간애는 끊임없는 자기극복이다. ㅡ 하지만 나는 고독이 필요하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내게는 회복, 내 자신에게로 되돌아옴, 자유롭고 가볍게 유희하는 공기의 숨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전체는 고독에 대한 송가이다. 또는 나를 이해할 수 있다면 순수에 대한 송가라고 할 수 있다. ······ 다행히도 순수한 바보에 대한 송가는 아니지만. ㅡ 색채를 볼 수 있는 눈을 갖는 자는 그것을 다이아몬드라고 부를 것이다. ㅡ 인간에 대한 구토, '잡것'에 대한 구토는 언제나 내게 가장 큰 위험이었다 ······ 차라투스트라가 구토로부터의 구제에 대해 하는 말을 들어보겠는가?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지? 어떻게 나 저 역겨움에서서 벗어날 수 있었지? 누가 나의 눈을 젊게 만들어 주었지? 어떻게 나 그 어떤 잡것도 샘가에 얼씬대지 않는 이 높은 경지에까지 날아 올라온 것이지?

 

내가 느낀 저 역겨움이 내게 날개를 달아주고, 어디에 샘이 있는가를 알아낼 수 있는 능력을 준 것인가? 진실로, 나 기쁨의 샘을 되찾기 위해 더없이 높은 곳으로 날아 올라야 했거늘!

 

오, 형제들이여, 나 샘을 찾아냈다! 여기 더없이 높은 곳에 기쁨의 샘물이 솟아오르고 있구나! 그리고 그 어떤 잡것도 감히 함께 마시겠다고 덤벼들 수 없는 그런 생명이 있구나!

 

너무나도 격렬하게 솟구쳐 오르고 있구나. 너, 기쁨의 샘이여! 너 다시 채울 생각에서 자주 잔을 비우고 있구나!

 

 

나 어떻게 하면 네게 보다 겸허하게 다가갈 수 있는지를 배워야겠구나. 너무나도 격렬하게 나의 심장이 너를 향해 육박하고 있으니 말이다.

 

짧고 무덥고 우울한, 그러면서도 행복에 넘치는 나의 여름이 작열하고 있는 나의 심장. 나의 뜨거운 심장은 얼마나 너의 냉기를 갈망하고 있는가!

 

우물쭈물 망설이던 내 봄날의 비탄도 어느덧 지나가고 말았구나! 유월에 날린 내 눈발의 심술궂음은 지나가고 말았구나! 나 온통 여름이 되었으며 여름의 한낮이 되었구나! 

 

차가운 샘물이 있고 행복에 넘치는 정적이 서려 있는 이 높은 산정에서의 한여름. 오라, 벗들이여. 여기 이 정적이 한층 더 행복한 것이 되도록!

 

이곳이야말로 우리의 높은 경지이자 고향이기 때문이다. 추잡한 자들이 올라와 갈증을 풀기에는 너무나도 높고 가파른 이곳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벗들이여, 맑은 시선을 나의 기쁨의 샘 속으로 한번 던져보아라! 그런다고 그것이 탁해지랴! 샘은 오히려 그의 깨끗한 눈길로 너희를 향해 마주 웃어주리라.

 

미래라고 하는 나무 위에 우리는 보금자리를 마련한다. 독수리가 부리로 우리 고독한 자들에게 먹을거리를 날라다 주리라!

 

진정, 깨끗하지 못한 자들이 함께 맛보아서는 안 될 그런 음식을 말이다! 저들은 불을 삼킨 것으로 착각, 그것만으로도 주둥이를 데고 말리라!

 

진정, 우리는 이곳에 추잡한 자들을 위해 그 어떤 거처도 마련해놓지 않았다! 저들의 신체와 정신에게 우리의 행복은 차디찬 얼음 동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아주 거센 바람처럼 저들의 머리 위 높은 곳에 살고자 한다. 독수리와 이웃하고, 만년설과 태양과도 이웃하면서 말이다. 거센 바람이라면 그렇게 산다.

 

때가 되면 나 바람처럼 저들 사이를 휩쓸고 들어가 나의 정신으로써 저들의 정신의 숨결을 빼앗으련다. 그러기를 나의 미래는 소망한다.

 

진정, 차라투스트라는 온갖 낮은 지대로 몰아치는 거센 바람이다. 그는 그의 적들에게, 그리고 침을 토해 뱉는 모든 사람들에게 충고한다. "바람을 향해 침을 뱉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지>, 제8절

 

 

 * *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amoo 2016-03-09 23: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실 니체 전집은 오렌 님이 인용해 주시는 이런 글들만 봐도 얼추 읽은 효과가 날 거 같아요. 수고스럽게도 이렇게 인용해 주셔서 넘 고맙습니다!

oren 2016-03-10 00:13   좋아요 1 | URL
저는 책을 한 번 베껴쓰는 것만으로도 그 문장들을 몇 번씩 다시금 음미해 볼 수 있다는 게 참 즐겁습니다. 그리고 그 문장들을 한 번 직접 옮겨 써 놓으면 언제든 생각날 때마다 `아무데서나 다시 꺼내 읽을 수 있다는 사실`도 즐겁고요. 그런데 yamoo 님처럼 `함께` 읽어주시는 분들을 만나면 저는 더욱 즐겁습니다^^
 

 

(밑줄긋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독보적이다

 

 ㅡ 내 작품 중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독보적이다. 이 책으로 나는 인류에게 지금까지 주어진 그 어떤 선물보다 가장 큰 선물을 주었다. 수천 년간을 퍼져나갈 목소리를 지닌 이 책은 존재하는 것 중 최고의 책이며, 진정 높은 공기의 책이다 ㅡ 인간의 만사가 그것의 에 아득하게 놓여 있다 ㅡ 그뿐 아니라 이 책은 가장 심오한 책으로서, 진리의 가장 깊숙한 보고에서 탄생했고, 두레박을 내리면 황금과 선의가 담겨 올라오지 않을 수 없는 고갈되지 않는 샘이다. 거기서는 어떤 '선지자'도, 종교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병과 권력의지의 섬뜩한 자웅동체도 말하지 않는다. 차라투스트라의 지혜의 뜻에 불쌍하게도 부당한 일을 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도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그 평온한 음조를 제대로 들어야만 한다. "폭풍을 일으키는 것, 그것은 더없이 잔잔한 말들이다. 비둘기처럼 조용히 찾아오는 사상, 그것이 세계를 이끌어간다" ㅡ

 

(중략)

 

여기서는 광신자가 말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설교되지' 않는다. 여기서는 믿음이 요구되지 않는다 : 무한히 풍부한 빛과 무한히 깊은 행복에서 한 방울 한 방울, 한마디 한마디가 떨어진다 ㅡ 그 말은 부드럽고도 완만한 속도를 갖는다. 그 말은 선택된 자들에게만 들린다 ; 이때 그 말을 듣는 자가 된다는 것은 비할 바 없는 특권이다 ;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를 들을 귀를 아무나 마음대로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서문> 중에서

 

 * * *

 

장갑을 낄 뿐

 

 ㅡ 내 책들의 공기를 맡을 수 있는 자는 그것이 높은 곳의 공기이며 강렬한 공기임을 안다. 이 공기의 찬 기운으로 인해 병이 나게 될 위험이 적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공기에 알맞게, 그것을 견뎌낼 수 있게끔 되어 있어야만 한다. 얼음이 가까이에 있고, 고독은 엄청나다 ㅡ 그런데도 모든 것이 어찌나 유유자적하게 태양빛 아래 있는지! 어찌나 자유롭게 사람들은 숨쉬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것을 사람들은 자기 발 아래 두고 있다고 느끼는지! ㅡ 내가 지금까지 이해하고 있는 철학, 내가 지금까지 실행하고 있는 철학은 얼음과 높은 산에서 자발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ㅡ 삶의 낯설고 의문스러운 모든 것을, 이제껏 도덕에 의해 추방당해왔던 모든 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금지된 것들 사이에서 그렇게 방랑했던 내 오랜 경험에 의해, 나는 지금까지 도덕화와 이상화를 행했던 원인들을 그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르게 보는 법을 배웠다 : 철학의 숨겨진 역사, 철학이라는 위대한 이름의 심리가 내게 분명해졌다. ㅡ 어떤 정신이 얼마나 많은 진리를 견뎌내는가? 얼마나 많은 진리를 감행하는가? 이것이 나에게는 점점 진정한 가치 기준이 되었다. 오류(ㅡ이상에 대한 밑음ㅡ)는 맹목이 아니다. 오류는 비겁이다 ······ 인식의 모든 성과와 발전은 용기에서, 자신에 대한 엄격함과 순수함에서 나온다 ······ 나는 이상들을 반박하지 않는다. 나는 단지 그것들 앞에서 장갑을 낄 뿐이다 ······ 우리는 금지된 것일수록 애쓴다Nitimur in vetitum : 이런 표지 아래 나의 철학은 언젠가는 승리할 것이다. 지금까지는 오로지 진리만이 철저하게 금지되어 왔기 때문이다. ㅡ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서문>, 제3절

 

 

 * * *

 

나는 폴란드 정통 귀족이다

 

 ㅡ 그런데 여기서 나는 혈통 문제를 언급하려 한다. 나는 나쁜 피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고 독일 피는 거의 섞여 있지 않은 폴란드 정통 귀족이다. 나와 가장 철저하게 대립하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상스러운 본능을 찾아보게 되면, 언제나 나는 내 어머니와 여동생을 발견한다 ㅡ 이런 천민들과 내가 친족이라고 믿는 것은 나의 신성함에 대한 하나의 불경이리라. 내 어머니와 여동생이 나를 대했던 것에 관한 내 경험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말할 수 없을 만큼의 공포를 내게 불러일으킨다 : 이럴 때, 하나의 완벽한 시한폭탄이 작동을 시작한다. (중략) ㅡ 하지만 폴란드인으로서 나는 엄청난 격세유전질이다. 지상에 존재했던 것 중에서 가장 고귀한 이 혈통을, 내가 보여주는 것처럼 그 순수한 본능을 대중 속에서 발견하려면, 몇 세기를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나는 오늘날 귀족적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이 나와는 다르다는 무제한적인 느낌을 갖는다 ㅡ 나는 독일의 젊은 황제에게도 내 마부일 수 있는 명예마저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중략) 사람들은 자기 부모를 가장 적게 닮는다 : 자기 부모를 닮는다는 것은 비천함을 표현해주는 가장 강력한 표시이다. 좀 더 고귀한 본성의 소유자들은 그들에게로 가장 오랫동안 모아지고 아껴지고 축적되어야만 했던 그들의 근원을 무한히 계속 소급해간다. 위대한 개인들은 가장 오래된 사람들이다 : 내가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울리우스 카이사르가 내 아버지일 수도 있으리라 ㅡ 아니면 알렉산더, 이 육화된 디오니소스가 ······ 이것을 쓰고 있는 이 순간 우편배달부가 내게 디오니소스의 머리를 배달한다 ······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지>, 제3절

 

 * * *

 

공격은 내 본능의 일부

 

나를 특징짓는 또 하나의 것은 싸움이다. 나는 기질상 호전적이다. 공격은 내 본능의 일부이다. 적수일 수 있다는 것, 적수라는 것 ㅡ 이것은 아마도 강한 본성을 전제할 것이고, 어떤 경우라도 모든 강한 본성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저항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저항을 찾는다 : 복수심과 뒷감정이 필연적으로 약함에 속하는 것처럼 공격적 파토스는 필연적으로 강함에 속한다. 예를 들면 여자에게는 복수욕이 있다 : 이것은 그녀가 약해서 그렇고, 그녀가 타자의 곤경에 대해 민감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ㅡ 공격자가 어떤 적수를 필요로 하는지는 그의 힘을 측정하는 일종의 척도이다 : 성장한다는 것은 좀더 강력한 적수를 찾는다는 데서 ㅡ 또는 좀더 강력한 문제를 찾는다는 데서 드러난다 : 호전적인 철학자는 또한 문제들에 결투를 신청하지만, 그의 과제는 정녕 적수들을 다 이기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자기의 전 역량과 유연함과 싸움 기술을 힘껏 발휘하면서 전력을 다해야 하는 적수를 이겨내는 데 있기 때문이다 ㅡ 대등한 적수를 이겨내는 데 있기 때문이다 ······적과의 대등함 ㅡ 정직한 결투를 위한 첫 번째 전제. 적을 경멸한다면 싸움을 할 수 없다 ; 명령을 하거나, 어떤 것을 자기 밑에 있다고 얕잡아보면 싸움은 이루어질 수 없다. ㅡ 내 싸움 방식은 네 가지 명제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 나는 승리하고 있는 것들만 공격한다 ㅡ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이 승리할 때까지 기다린다. 둘째 : 나는 내 우군이 없을 만한 것, 나 홀로 싸우는 것 ㅡ 내가 오로지 나만을 위태롭게 하는 것만을 공격한다 ······ 나는 위태롭게 하지 않는 일은 한 번도 공공연하게 해본 적이 없다 : 이것이 옳은 행위에 대한 기준이다. 셋째 : 나는 결코 개인을 공격하지 않는다 ㅡ 다만 개인을 강력한 확대경처럼 사용할 뿐이다. 이 확대경은 일반적이지만 살금살금 기어다니면서 잘 잡히지 않는 비상사태를 보이게 만들어준다. 그래서 나는 다비드 슈트라우스를 공격했던 것이다. 정확히는 낡아빠진 책 한 권이 독일적 '교양'에서 거둔 성공을 ㅡ 그 교양이란 것을 현장에서 급습했던 것이다 ······ 그래서 나는 바그너도 공격했던 것이다. 정확히는 교활한 자를 풍요로운 자로, 뒤처진 자를 위대한 자로 혼동하는 우리 '문명'의 허위와 본능의 불완전함을. 넷째 : 온갖 개인적 차이가 배제되고, 그 배후에서 나쁜 경험을 하게 될 것이 없는 것만을 공격한다. 내게서 공격이란 거꾸로 호의에 대한 증거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감사함에 대한 증거이다. 내 이름을 특정 일이나 특정 개인과 연관시킴으로써 나는 그것에 경의를 표하고 특별한 것으로 만든다 : 내가 찬성하든 반대하든 ㅡ 내게는 그런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내가 그리스도교와 싸움을 한다면, 내게 그럴 권한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스도교 쪽으로부터 어떤 숙명이나 심적 압박도 체험하지 않는다 ㅡ 가장 진지한 그리스도교인들은 내게 항상 호의적이었다. 그리스도교에 꼭 필요한 적인 나 자신은 수천 년간의 숙명을 한 개인의 탓으로 돌릴 생각은 없다. ㅡ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지>, 제7

 

 * *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amoo 2016-03-09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니체가 폴란드 정통 귀족이었다니..@_@
새로운 사실을 하나 더 알고 갑니다~~

oren 2016-03-10 00:14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니체가 저토록 `고귀한` `폴란드 귀족`이었다니요^^
 

 

(밑줄긋기)

 

그리스도교인과 아나키스트는 둘 다 데카당이다

 

실제로 어떤 목적으로 거짓말하는가에 따라 차이가 있다 : 유지하려고 거짓말하는가 아니면 파괴하려고 거짓말하는가에 따라서. 이 점에서 그리스도교인아나키스트는 완전히 같다고도 말할 수 있다 : 그들의 목적과 그들의 본능은 오로지 파괴로만 향한다. 이 문장에 대한 증거는 역사에서 읽어낼 수 있다 : 역사는 무서울 정도로 명료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중략) 그리스도교인과 아나키스트 : 둘 다 데카당이다. 둘 다 해체시키고, 오염시키고 쇠약하게 하며, 흡혈귀처럼 작용하는 일 외에는 할 수 없다. 둘 다 세워져 있거나, 웅장하게 서 있거나, 지속적이거나 삶에 미래를 약속하는 것 전부를 아주 격렬하게 증오하는 본능이다 ······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의 피를 빨았던 흡혈귀이다 ㅡ 그리스도교는 시간이 소요되는 위대한 문화를 위한 지반을 얻으려는 로마인들의 거대한 업적을 밤 사이에 무효화시키고 말았다. ㅡ 이것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가? (중략) 밤과 안개와 모호함 속에서 모든 개개인에게 살금살금 접근해서는 참된 것들에 대한 그들의 진지함과 실재성에 대한 본능 일반을 다 빨어먹는 이 은밀한 벌레. 비겁하고 여성적이며 달콤한 이 무리들은 점차 그 거대한 건축에서 '영혼'을 소외시켜버렸다 ㅡ 로마적인 것에서 자기의 고유한 것과 고유의 진지함과 고유의 긍지를 느꼈던 그 가치 있고 남성적이며-고결했던 본성을 말이다. 위선자의 음흉한 짓거리, 비밀집회의 은밀함, 지옥이나 죄 없는 자의 희생 또는 피를 마시면서 이루어지는 신비적 합일 등의 음산한 개념들, 특히 서서히 들쑤셔 돋우어진 복수의 불길, 찬달라의 복수의 불길 ㅡ 이것들이 로마를 지배해버렸다.

 

 - 니체, 『안티 크리스트』, 제58절

 

 * * *

 

고대 세계의 수고가 깡그리 부질없게 되었다

 

고대 세계의 수고가 깡그리 부질없게 되었다 : 이런 끔찍한 것에 대한 내 느낌을 표현할 말이 없다. ㅡ 그리고 그들의 수고가 하나의 준비 작업이었다는 것, 화강암같이 단단한 자기 신뢰에 의해 몇천 년간 지속될 작업을 위한 기초만이 겨우 놓여졌다는 것, 이 점들을 고려해보면 고대 세계가 갖고 있던 의미 전체가 부질없다! ······ 그리스인이 무슨 소용이며, 로마인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중략) - 그리스인! 로마인! 본능과 취향의 고귀함, 방법적 탐구, 조직과 관리의 천재, 인간의 미래에 대한 신념과 의지, 만사에 대한 위대한 긍정이 로마제국으로서 가시화되고, 모든 감각에 가시화되며, 위대한 양식이 더 이상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고 진리가 되었으며 이 되었었는데 말이다 ······ ㅡ 그런데 밤 사이에 묻혀버렸다. 그것도 자연 현상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게르만인이나 다른 멍청이들에게 짓밟힌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교활하고 은밀하고 보이지 않으며 피에 굶주린 흡혈귀에게 치욕을 당한 것이다! 정복된 것이 아니라 ㅡ 다만 피를 다 빨려버린 것이다! ······ 은밀한 복수심, 비소한 시기심이 지배자가 되어버렸다! 비천한 모든 것, 자신으로 인해-고통받는 모든 것, 좋지 않은-느낌에 의해-엄습당한 것 모두, 영혼의 게토-세계 전체가 단번에 위로 올라섰다! ㅡ ㅡ 어떤 불결한 작자들이 그렇게 해서 위에 올라섰는지를 파악하고 냄새를 맡아보려면 그리스도교 선동가, 그들 중 누구든 읽어보라. 이를테면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우리가 그리스도교 운동의 지도자들이 어떤 식으로든 이성을 잃고 있다고 전제한다면, 우리는 착각하고 있는 것이리라 : ㅡ 오오, 그들 교부님들은 정말 영리하다. 신성하리만큼 영리하다!

 

 - 니체, 『안티 크리스트』, 제59절

 

 * * *

 

 

르네상스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드디어 이해했는가?

 

이 대목에서 독일인에게 수백 배나 더 수치스러운 기억을 건드릴 필요가 있다. 독일인은 유럽이 거두어들이도록 주어진 최후의 위대한 문화적 수확물을 유럽에서 빼앗아버렸다 ㅡ 즉 르네상스의 수확을. 르네상스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드디어 이해했는가? 이해하기를 원하는가? 그리스도교적 가치의 전도이자, 모든 수단과 본능과 천재들을 가지고 수행되었으며, 그 반대되는 가치고귀한 가치를 승리하게끔 했던 시도를 ······ 위대한 싸움은 이제껏 바로 이것밖에 없었다. 르네상스의 문제 제기보다 더 결정적인 문제 제기는 이제껏 없었다. ㅡ 나의 물음은 르네상스의 물음이다 ㅡ : 이보다 더 철저하고 직접적이며 강하게 적의 정면 전체와 중심을 돌파하는 공격 형식도 결코 없었다! 그리스도교의 결정적 지점과 본거지 자체를 공격하는 것, 거기서 고귀한 가치를 왕좌에 올리는 것, 말하자면 거기서 왕좌에 앉아 있는 자의 본능과 가장 심층적인 필요와 욕구에 고귀한 가치를 집어 넣는 것 ······ 나는 완전히 초지상적인 마력과 찬란함을 지니고 있는 가능성을 내 앞에 보고 있다 : ㅡ 그 가능성이 세련된 아름다움의 전율로 반짝거리는 것 같다. 거기서 신적인, 악마처럼 신적인 어떤 것이 일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와 같은 두 번째의 가능성을 찾아 수천 년간을 헤매는 것은 헛된 일이라고 여겨질 정도다 ; 나는 하나의 광경을 보고 있다. 올림포스의 제 신들을 영원히 박장대소하게 할 만한 단초가 될 정도로 그렇게 감각적이고 그렇게 놀라우면서도 동시에 모순적인 광경을 ㅡ 교황으로서의 케사레 보르자를 ······ 나를 이해하겠는가? ······ 좋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오늘날 유일하게 요구하는 승리였을 것이다 ㅡ : 이로써 그리스도교는 폐지되고 말았으니! ㅡ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던가? 루터라는 독일인 수도승이 로마로 갔다. 좌절당한 사제의 복수심이 불타는 본능을 죄다 지니고 있는 이 수도승이 로마에서 르네상스에 대항하여 들고 일어났다 ······ 그리스도교를 그 본거지에서 극복하려는, 실제로 일어났었던 그 거대한 사건을 깊이 감사하면서 이해하는 대신 ㅡ 루터의 증오심은 그 광경에서 자신을 살찌울 양식만을 끄집어낼 줄 알았을 뿐이었다. 종교적인 인간은 단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법이니까. ㅡ 루터가 본 것은 교황청의 부패였다. 바로 그 반대가 명약관화했었는데 말이다 : 옛 부패, 원죄라는 것, 그리스도교는 더 이상은 교황의 자리에 앉아 있지 않았는데도! 오히려 삶이 그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도! 오히려 삶의 개가가! 오히려 높고도 아름답고도 대담한 모든 것에 대한 위대한 긍정이 그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도 말이다! ······ 그리고 루터는 교회를 재건했다 : 교회를 공격하면서 ······ 르네상스가 ㅡ 의미 없는 사건으로, 엄청난 헛수고가 되어버리고 말았다니! ㅡ 아아, 그 독일인들, 그들은 우리에게 벌써 어떤 대가를 치르게 했던가! 헛수고 ㅡ 이것은 항상 독일인들의 작품이다 ㅡ 종교개혁 ; 라이프니츠 ; 칸트와 소위 독일 철학 ; 해방전쟁 ; 독일제국 ㅡ 매번 기존의 것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대한 헛수고이다 ······ 고백하거니와 이런 독일인들은 나의 적이다 : 나는 이들에게 있는 온갖 종류의 개념의 불결과 가치의 불결을, 그리고 정직한 긍정과 부정 앞에서의 비겁을 경멸한다. 거의 천 년 동안 그들은 자기들이 손댄 모든 것을 엉크러뜨리고 혼란에 빠뜨렸다. 그들은 유럽을 병들게 만든 모든 반쪽짜리 것 ㅡ 아니 8분의 3쪽짜리 것! ㅡ 에 대한 책임이 있다. 또한 그들은 존재하는 것 중 가장 불결한 유형의 그리스도교에, 가장 치유하기 어렵고, 가장 반박하기 어려운 유형의 그리스도교에, 즉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해 책임이 있다 ······ 우리가 그리스도교를 끝장내버리지 못한다면, 독일인들이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

 

 - 니체, 『안티 크리스트』, 제61절

 

 * * *

 

인류의 단 하나의 영원한 오점

 

 ㅡ 이것으로 나는 끝을 맺고 나의 판결을 내린다. 나는 그리스도교에 유죄판결을 내리며, 그리스도교 교회를 가장 혹독하게 탄핵한다. 그 어떤 고발자가 입에 담았던 탄핵보다도 더 혹독하게. 내가 보기에 그리스도교 교회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부패 중 최고의 부패이며, 궁극적이지만 실제로도 가능한 부패에의 의지를 지녔다. 그리스도교 교회가 부패의 손길을 대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가치를 무가치로, 모든 진리를 한 가지 거짓으로, 모든 정직성을 영혼의 비열성 하나로 만들어버렸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내게 아직도 감히 교회의 '인도적' 축복에 대해서 지껄여대다니! 여느 비상사태를 없애버리는 것은 교회의 뿌리 깊은 유용성에 어긋난다 ㅡ 교회는 비상사태를 통해 연명해왔고, 자기를 영구화시키기 위해 비상사태를 만들어냈다 ······ 죄라는 벌레가 그 예이다 : 교회야말로 비상사태를 가지고서 인류를 풍부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ㅡ '신 앞에서의 평등'이라는 것. 이 허위, 천한 성향을 지닌 모든 자의 원한을 위한 이 구실, 결국 혁명으로, 현대적 이념으로, 사회질서 전체의 몰락의 원칙이 되어버렸던 이 폭발성 개념. 이것은 ㅡ 그리스도교적인 다이너마이트다 ······ 그리스도교의 '인도적'인 축복이라니! 인류애로부터 자기 모순을, 자기 모독의 기술을, 어떤 대가를 치르든 거짓에의 의지를, 모든 선하고 정직한 본능에 대한 반감과 경멸을 길러내는 것! ㅡ 이것들이야말로 내가 바라보는 그리스도교의 축복이라는 것이다! ㅡ 교회의 유일한 실천으로서의 기생주의 ; 자기의 빈혈증-이상과 '신성함'-이상을 수단으로, 피와 사랑과 삶에의 희망을 전부 다 마셔버려 고갈시켜버린다 ; 모든 현실성을 부정하려는 의지로서의 피안 ; 이제껏 존재했던 것 중에서 가장 지하적인 모반을 인식하게 하는 표지로서의 십자가 ㅡ 건강과 아름다움과 제대로 된 성장과 용기와 정신과 영혼의 선의에 맞서고, 삶 자체에 맞서는 모반 ······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런 영원한 탁핵을 나는 벽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적으려 한다 ㅡ 눈먼 자도 볼 수 있게 하는 글자를 나는 가지고 있다. ······ 나는 그리스도교를 단 하나의 엄청난 저주라고 부른다. 단 하나의 엄청난, 가장 내면적인 타락이라고 부른다. 단 하나의 엄청난 복수 본능이라고 부른다. 어떤 수단도 이것에 대해서는 독성과 은밀함과 지하적임과 비소함에 있어 충분할 수 없다 ㅡ 나는 그리스도교를 인류의 단 하나의 영원한 오점이라고 부른다 ······

 

그런데 우리는 이런 액운이 시작되었던 그 불행한 날을 기점으로 시간을 계산한다 ㅡ 그리스도교가 시작한 첫날을 기점으로! ㅡ 왜 차라리 그리스도교의 최후의 날을 기점으로 삼지 않는가?오늘을 기점으로 삼지 않는가? ㅡ 모든 가치의 전도! ······

 

 - 니체, 『안티 크리스트』, 제62절

 

 

 

 

 

 

 

 

 

 

 

 

 

 

 

접힌 부분 펼치기 ▼

 

 

 

니체 후기 철학의 결정판

 

근대를 지배했던 형이상학적 사유와 전통적 도덕의 붕괴를 통해 철학의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가치를 부르짖은 니체. 그는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감이나 한 듯이 1888년 한 해에 한꺼번에 여섯 작품을 쏟아낸다. 1887년 가을 무렵부터 시작된 정신병적 징후에도 불구하고 생애 최고로 생산적인 해를 보낸 것이다. 한국어판 책세상 니체전집 15《바그너의 경우 우상의 황혼 안티크리스트 이 사람을 보라 디오니소스 송가 니체 대 바그너》는 바로 거센 폭풍과도 같은 니체의 마지막 정열과 사상적 결정체가 담긴 저작이다. 이 여섯 작품은 니체가 카를로 광장에서 쓰러지기 직전에 씌어진 니체 최후의 저작들로 그간의 니체가 보여주었던 현대성 비판, 반그리스도교적 고찰 등 그의 핵심 사상이 총정리되어 있다. 특히 예술(그중에서도 음악), 정치, 역사에 대한 니체의 시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어 니체 후기 철학의 결정판으로 평가받는다.

 

현대 세계와 현대성에 대한 폭발적 분노

 

그렇다면 철학자 니체는 무엇을 위해 1888년 한 해에 자신의 마지막 정열과 혼을 불태웠는가? 현대 세계와 현대성에 마지막 일침을 가하기 위해서이다. 이미《선악의 저편》과《도덕의 계보》에서 그는 이미 퇴폐적인 근대의 여러 현상과 과학정신, 유럽 그리스도교 등을 맹렬하게 비난하는 등 모든 기존 가치의 전도를 극명하게 표명했다. 따라서 그는 이제 더 이상 현대 세계와 현대성에 대해 자신의 경멸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단지 현대 세계의 얼굴에 대고 데카당스! 라고 부르짖는다. 그리스도교! 라고 부르짖는다. 삶을 부정할 뿐 아니라, 삶에 대한 긍정을 억압하는 그리스도교야말로 니체가 보기에는 데카당스의 전형이었고, 음악의 연극화, 극장에서의 성공, 이상주의라는 허울 좋은 무기를 가지고 진정한 음악정신을 죽일 뿐 아니라 생을 부정하고'초월'과 '피안'이라는 낡고 날조된 가치를 보호하는 바그너야말로 음악을 병들게 한 데카당스 예술가였던 것이다. 이제 니체는 삶과 세상을 부정하고 삶의 덕을 증오하는 데카당스의 미학과 예술에 작별을 고한다. 삶을 긍정하고 주인도덕을 표현해주는 아름다운 예술로의 회귀를 위해, 고전 미학으로의 회귀를 위해, 자연과 건강함과 명랑성과 젊음으로의 회귀를 위해 마지막 남은 힘을 쏟아 붓는다.

 

니체 철학을 이해하기 위한 시금석

 

니체는 체계적인 철학자가 아니다. 오히려 철학을 하나의 체계로 만들려는 시도를 조롱하며 그것을 '고결함의 결여'라고 부른다. 니체의 다양한 관찰과 통찰을 하나의 틀에 집어넣기에는 그의 사상이 갖는 매력뿐 아니라 그가 시도하고자 했던 핵심이 단일하지 않다. 니체의 잠언이나 우화를 이용한 글들은 의도적으로 특정 방향을 드러내지 않도록 구성되어 있다. 그는 우리에게 충격을 주고, 우리를 놀라게 하며, 사태를 다른 각도, 다른 관점,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도록 유도한다. 니체주의자 중 한 사람인 미셸 푸코는 단일한 니체 철학이란 없으며 우리의 질문은 "니체를 어떻게 진지하게 써먹을 수 있는가" 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니체의 전 작품을 한눈에 조망하도록 구성되어 있는 이 책에서 니체가 최후까지 강조했던, 니체 철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현대 세계에 대한 강한 반발을 읽어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니체가 이를 위해 자신의 전 작품을 이 주제 아래에서 재고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이 책에서 주요 여섯 작품 외에도 자신의 거의 모든 저서를 새롭게 해석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그의 초기사상이 담긴《비극의 탄생》(1872)에 대해서는"몇 가지를 잊어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책이 끼친 영향과 심지어 이 책의 매혹도 바로 이 책의 문제점 때문에 생긴 것이다"라면서《니체 15》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반(反)바그너적 시점에서《비극의 탄생》을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또한《반시대적 고찰》 부분에서는 "금세기의 긍지인 '역사적 감각'이 최초로 병증으로서, 퇴락의 전형적 징후로서 간파되었다. '독일 제국', '교양', '그리스도교', '비스마르크', '성공'등으로 불리던 모든 것에 대한 절대적 경멸로 가득 차" 있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니체가 바그너에게 비교적 호의적이었을 당시 썼던《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도 "불쌍한 바그너! 그가 어디로 빠져버렸단 말인가! 차라리 돼지들 쪽으로 가버릴 것이지! 하필 독일인들 사이로 가다니!"라면서 바그너를 맹렬하게 비난하기도 한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후기 니체 철학이 집약돼 있는《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등의 작품을 니체는 일일이 열거해 새로운 해석을 가미하고 재조명하는데, 이를 통해 니체 철학을 새롭게 만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미 출간된 책들을 반추해볼 수 있는 기회도 될 것이다.

 

《바그너의 경우》바그너에 대한 혹독한 비판

 

《바그너의 경우》에서 니체는 리하르트 바그너에 대한 오랜 침묵을 깨고 그를 공개적으로 논박하기 시작한다. 철학자 니체에게 바그너는 음악을 병들게 한 자이자, 음악이 데카당스 예술로 변질되어가는 운동을 가속시킨 주범이자 데카당스 미학의 설교자이다. 그리고 그의 음악은 자연과 건강과 명랑과 젊음과 덕으로의 회귀의 정신이 없는, 하찮은 것들에 편승하는 것으로 상정된다. 그래서 바그너를 질병=자유의지가 결여된 자=방울뱀의 행운을 누리는 늙은 거장=지쳐버린 약자를 유혹하는 자로 매도한다. 한때 바그너의 열렬한 추종자로, 그와 두터운 친분을 쌓았던 니체는 말년에 이렇듯 그를 데카당스의 주범으로, 심하게는 당대의 가장 비열한 아첨꾼으로 폄하한다. 그리고 바그너가 일반인(한때 자신을 포함해서)에게 유명해진 이유에 대해서는 당대가 병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결국 니체에게 바그너라는 이름은 전형적인 데카당스 예술가이자, 데카당스로 특징지어지는 현대성에 대한 총괄 개념이다.

 

《우상의 황혼》어떻게 망치를 들고 철학하는지

 

《우상의 황혼》에서 니체는 모든 가치의 전도를 위해 우상들을 캐내고, 우상들을 망치로 부숴버리는 철학적 작업을 수행한다. 이성=덕=행복이라는 공식, 변증법, 독일인들을 우매하게 만드는 알코올, 그리스도교, 음악 등이 우상으로 등장한다.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에서 니체는'내가 용인할 수 없는 자들'로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덕의 투우사), 루소(자연적인 불결함으로의 자연의 복귀), 단테(무덤 위에서 시를 짓는 하이에나), 빅토르 위고(부조리의 바다에 있는 등대), 칼라일(소화 안 된 점심 식사로서의 염세주의), 졸라(악취를 내는 기쁨) 등을 지적하고 있다.< 철학에서의'이성'>에서는 철학자들의 특이 성질이 우상으로 등장한다. 역사적 감각의 결여, 생성에 대한 증오, 실제적인 것의 박제, 개념의 숭배, 감각과 육체에 대한 불신과 경시 등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나아가 니체는 참된 세계와 가상 세계로 세계를 나누는 이분법적인 방식은 그것이 그리스도교이든, 형이상학이든 데카당스의 징후에 지나지 않으며, 철학자들의 참된 세계라는 것은 가상이고, 무의미한 담론에 불과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만이 유일한 실제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우상의 황혼》에서 <어떻게'참된'세계가 결국 우화가 되어버렸는지. 어떤 오류의 역사>는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여기서 니체는 아주 간결한 몇 단어와 형식으로 형이상학의 역사를 오류의 역사로서 개괄한다. 플라톤에서부터 그리스도교를 거쳐 칸트에 이르는 참된 세계와 가상 세계라는 이분법의 변천사가 제시되고, 실증주의를 거치고 니체에 이르러서 이분법 자체가 파괴되어버리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오류의 역사의 종말은 곧 형이상학적 사유의 종말이고 이 종말은 니체에게서 가능해진다.

 

《안티크리스트》모든 가치의 전도

 

후기 저작 대부분에서 니체가 신에 대해 말하고 있는 내용은 매우 불경하고 때로는 세속적이기까지 한다. 그는 신이 속 좁고 감상적인 존재로 변했다고 불평한다.《안티크리스트》에서 니체는 가장 골칫거리였던 데카당스 문제를 그리스도교에 대한 공격으로 표출시킨다. 니체가 이 작품을 쓸 무렵에 이미 그리스도교는 독일 내부와 외부에서 일종의 노쇠해버린 타성으로서, 옛 허섭스레기로 간주되는 경향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도덕적이고도 종교적인 실천으로서의 그리스도교는 서서히 하나의 불운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 경향은 니체의《안티크리스트》를 환호하며 받아들였지만, 니체가 서문에서"이 책은 극소수를 위한 것이다"라고 밝혔듯이 니체의 공격은 비단 종교나 도덕으로서의 그리스도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교를 현대 세계의 가치 전체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규정하고 공격한다. 바꿔 말하면 현대 세계의 가치 전체에 대한 비판이다. 니체는 현대의 철학, 현대의 정치, 정의, 인간의 평등, 민주주의 등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것을 모든 것을 통찰되고 비판한다. 그래서 니체에게 그리스도교의 멸절은 사실상 '모든 가치의 전도'가 될 수 있었다. <그리스도교 반대법> 제6조에서 니체는 신, 구세주, 구원자, 성자라는 말들은 욕설이나, 범죄자에 대한 표지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어 그의 무신 사상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이 사람을 보라》니체 자신을 보라

 

니체에 의해 씌어진 반(半)자서전적인 저서로, 겸손과는 먼 니체를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지>,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지>,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지>, <왜 나는 하나의 운명인지>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에서 니체는 "내 말을 들으시오!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기 때문이오. 무엇보다도 나를 혼동하지 마시오!"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을 철학자 디오니소스의 제자로, 자신의 작품들을 자신의 삶과 격정의 표현으로, 자신의 작품들이 높은 곳의 공기임을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그는 자신의 유일성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으며, 니체라는 자의 본보기적인 위대함을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의 시대에 대고 비난을 퍼부어댄다. 그가 집중하고 있던 여러 문제들이 이제 니체 개인과 그 자신의 문제들의 형식으로 표출된다. 니체는 이 작품 안에서《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아침놀》《 즐거운 학문》《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우상의 황혼》《 바그너의 경우》 등 그의 모든 저서를 새로운 관점에서 반추하고 있다.

 

《디오니소스 송가》니체 사상의 시상 묶은 첫 시집

 

니체는《디오니소스 송가》를 출간하면서 몇 번에 걸친 시집 출간 계획을 마침내 실현시킨다. 니체는 아포리즘과 잠언 형식으로 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대해서 "나의 야심은 다른 사람들이 책 한 권으로 말하는 것을 열 문장으로 말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한 권의 책으로도 말하지 않는 것을"이라고 말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몇 편의 시로 구성되어 있는《디오니소스 송가》는 니체 최후의 합리적, 추상적, 이론적인 사유에서 떨어져서 찌를 듯한 아름다움을 갖춘, 형식과 내용을 한 가지로 확정짓지 않은 잠언집이라고 할 수 있다.

 

《니체 대 바그너》대척자로서의 바그너

 

이 작품의 핵심은 바그너와 니체 자신의 대립적인 관계이다. 바그너와의 관계에 대해 신중하게 고찰하고 있는 이 작품은《바그너의 경우》의 반향에 대한 응답으로 씌어졌다. 서문에서 니체는"우리들은 대척자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 작품에서 바그너의 음악은 삶과 삶의 빈곤에 고통받는 자의 작업이고, 도취와 마비를 찾는 데카당의 작업으로 다시 한번 강조된다.

 

 

펼친 부분 접기 ▲

 

 


댓글(4)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amoo 2016-03-07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체가 르네상스에 대해서도 고민했었군요~!

그리스도교 탄핵....지금도 역시 니체의 발언은 유효한 듯합니다. 조용기가 200억 횡령 기사를 보니...기독교 대형 집회를 보니, 할 말을 잃게 되더군요...에휴~

oren 2016-03-07 17:35   좋아요 0 | URL
니체는 도대체가 모르는 것도 없고, 읽지 않은 책들도 거의 없는 듯해요. `르네상스`에 대해서도 놀라우리만치 깊은 이해와 탐구를 보여주는데, 아무래도 바젤 대학에서 예술사를 가르쳤던 야콥 부르크하르트의 영향이 컸던 듯합니다. 당대의 학자들 가운데 니체가 `유일하게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불렀던 인물이었지요. 그가 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라는 책은 아직도 `르네상스`에 대해 쓰여진 최고의 고전 가운데 한 권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듯하고요. 알라딘 책소개에도 그런 내용이 나오네요..(고전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는 이 책 이후로 `르네상스`라는 말이 역사상의 일반 용어로 쓰이게 되었을 만큼 르네상스사 연구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명저이다...)

탕기 2016-03-07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체가 부르크하르트를 존경했군요! 보르헤스-쇼펜하우어-니체로 맞물리던, 어떻게든 저와 니체의 연결고리를 만들려고 하던 제게 `부르크하르트`라는 또 하나의 퍼즐이 있었던 것이었군요 ^^ 예술 공부를 하는 제가 부르크하르트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이란 애당초 없으니, 이것도 운명일지 모르겠다는 이상한 생각마저 듭니다. 부르크하르트의 『Die Kultur der Renaissance in Italien』은, 어쩔 수 없이 부분 부분 읽어왔지만 모든 글들이 단편의 드라마를 연상케 합니다. `학술`이라는 단어로는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로 유려한 느낌이죠. 제 생각에 그런 느낌은 부르크하르트가 (다소 주관적이라는 분위기가 느껴질 수도 있을) 수많은 형용사들을 사용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니체만큼은 물론 아니겠지만요 ^^

오늘도 니체의 구절들을 이면지에 적어가겠습니다. ˝나의 물음은 르네상스의 물음이다˝라는 니체의 선언에서 제가 부르크하르트의 글과 여태 공부한 르네상스에서 맡았던 고대의 향기가 굉장히 진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 니체의 입장에서 보면 사제 신분으로 한 달 정도 로마에서 지냈던 루터가 교회를 뒤엎으려다가 도리어 교회를 세우고 말았으니, ˝헛수고 ㅡ 이것은 항상 독일인들의 작품이다˝라고 일갈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저 니체의 힘을 제가 감당하지 못할 뿐이지만 말이죠!

oren 2016-03-07 22:36   좋아요 0 | URL
역시 탕기 님께서는 부르크하르트가 쓴, 저는 이제서야 겨우 알게 된 저 유명한 책을 진작에 읽으셨군요! 아무튼 니체는 부르크하르트에 매료되어 그의 강의도 직접 여러 번 들었다고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었는데, <안티 크리스트>에서는 그의 말을 단지 한 번밖에 인용하지 않았더군요. 제가 저 위에 써 놓은 인용문 61절 중간쯤에 있는 ˝이로써 그리스도교는 폐지되고 말았으니!˝라는 대목이 바로 부르크하르트의 언급이었던 모양입니다.(주석엔 한 줄만 나옵니다. J. Burckhardt, Die Kultur der Renaissance in Italien(Leipzig, 1869), 91∼95)

이왕지사 말이 나온 김에, 니체가 다른 책에서 부르크하르트에 대해 언급한 대목을 덧붙여 봅니다.
* * *
예외 중의 예외를 제외하고 보면, 교육의 첫 번째 선결 조건인 교육자들이 결여되어 있다 : 그래서 독일 문화가 하강하는 것이다. ㅡ 정말 진귀한 그 예외 중의 한 명이 바로 바젤 대학에 있는 나의 경외하는 지기인 야콥 부르크하르트이다 : 바젤 대학이 인문학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은 그의 덕택이다.
- 니체, 『우상의 황혼』, <독일인에게 모자란 것> 중에서
 
#나는 페미니스트일까?

 

'페미니즘'에 대한 깊이있는 책들을 전혀 읽어보지 못한 상태에서 이런 글을 읽으니 쉽게 댓글을 달기가 어렵군요. 그나마 탕기 님의 글 속에서 제게 익숙한 철학자들의 이름이나마 겨우 몇몇 발견할 수 있다는 게 이 글을 읽는 데 일말의 위로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말이 조금도 과장은 아닐 듯합니다. 그 두 사람의 철학자들 가운데 좀 더 후대의 사람이 쓴 한 권의 책을 통해 - 좀 더 정확하게는 그 책 가운데 특히 <제7장, 우리의 덕>을 통해 - '페미니즘'에 대한 그 철학자의 깊디깊은 생각들을 민낯으로 생생하게 만나봤던 기억을 이쯤에서 한 번쯤 되살려 보는 일은, 이 글이 제게 주는 또다른 뜻밖의 즐거움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해봅니다. 긴 글 잘 읽었습니다.

 

 * * *


 (밑줄긋기)

 

지적 양심과 취미를 이루는 일종의 잔인함

 

이질적인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정신의 힘은 새로운 것을 낡은 것에 동화시키거나 다양한 것을 단순화시키거나 완전히 모순되는 것을 무시하거나 배제하는 강한 경향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 이와 마찬가지로 정신은 이질적인 것이거나 '외부 세계'에 속하는 모든 것에서 특정한 특징이나 윤곽선을 제멋대로 더 강하게 강조하거나 드러내거나 자기에 맞게 왜곡한다. 이 경우 정신의 의도하는 것은 새로운 '경험'을 동화시키고 새로운 사물들을 낡은 계열 속에 편입시키는 데 ㅡ 즉 성장시키는 데 있다. 좀더 확실하게 말하자면, 성장의 느낌, 힘이 커졌다는 느낌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그것과 상반되는 듯한 정신의 충동이 이러한 동일한 의지에 봉사하고 있다. 즉 그것은 알고자 하지 않거나 임의로 단절하고자 하는 갑작스럽게 솟구쳐오는 결정을 하고 스스로의 창문을 닫아버리며 이러저러한 사물을 내적으로 부정하고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 알 수 있을 만한 많은 것에 대해 일종의 방어 상태에 들어가고 어둠과 폐쇄된 지평에 대해 만족하며 무지를 긍정하고 시인한다. 이와 같은 모든 것은 그 정신의 동화하는 힘의 정도에 따라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ㅡ 실로 '정신'은 위(胃)와 가장 비슷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기에는 때때로 스스로를 기만하는 정신의 의지가 속해 있으며, 아마 이 의지는 사정이 이러이러한 것이 아니고, 단지 이러이러하다고 여겨질 뿐이라는 경솔한 추측을 하면서 온갖 불확실성과 애매성을 즐거워하고 일부러 한쪽 구석의 비좁은 은밀함을, 너무 지나치게 가까운 것을, 표면적인 것을, 확대되거나 축소되거나 의치가 바뀐 것이나 미화된 것을 기뻐하며 스스로 즐거워하고, 이러한 모든 힘을 자의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스스로 즐거워한다. 다른 정신을 기만하고 스스로를 다른 정신 앞에서 위장하려는 정신이 문제가 없지 않지만 기꺼이 응하는 것, 창조하고 형성하고 변형할 수 있는 힘의 저 끊임없는 압력과 충동이 마침내 여기에 속한다 : 정신은 여기에서 자신의 가면의 다양성과 교활함을 즐기며, 여기에서 안정감을 즐긴다. ㅡ 바로 자신의 프로테우스적 기술로 정신은 가장 잘 방어하고 은폐한다! ㅡ 가장에의, 단순화에의, 가면에의, 외투에의, 간단히 말해 표면에의 ㅡ 왜냐하면 모든 표면은 외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지에 대항하여 사물을 깊이 있게 다양하고 철저하게 생각하고 생각하고자 하는 인식하는 사람의 저 숭고한 경향은 맞서 나간다 : 이것이야말로 지적 양심과 취미를 이루는 일종의 잔인함인데, 용감한 사상가는 모두 그것을 가지고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 물론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그는 자신의 눈을 자신을 위해 오랫동안 충분히 단련시켜 예리하게 했고, 엄격한 훈련과 엄격한 말에도 익숙해져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면 말이다. 그는 "내 정신의 성향에는 어떤 잔인한 것이 있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 ㅡ 덕이 있는 사람들이나 친절한 사람들이 그가 그러한 말을 하지 못하게 말리면 좋았을 것인데! 만일 잔인함 대신 '지나친 성실성'이라는 말을 뒤에서 떠들어대고 소문이 나고 평판이 있다면, 실로 이것은 우리에게는 - 우리 자유로운, 지극히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에게는 ㅡ 좀더 점잖은 평가로 들릴 것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제230절

 

  * * *

 

자연적 인간이라는 무서운 근본 텍스트

 

성실성, 진리에 대한 사랑, 지혜에 대한 사랑, 인식을 위한 희생, 진실한 인간의 영웅주의 같은 아름답고 반짝거리고 소리 나는 축제의 언어가 있다. ㅡ 여기에는 한 사람의 마음을 자부심에 부풀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 그러나 은자(隱者)이며 실험용 동물인 우리, 우리는 오래 전부터 은자의 양심에 걸맞는 극도의 비밀스러움으로 스스로를 다음과 같이 설득했다. 즉 이와 같이 위엄 있고 호사스러운 말도 무의식적인 인간의 허영심에서 나온 해묵은 거짓 장식과 잡동사니, 거짓 금가루에 속하는 것뿐이며, 그렇게 아첨하는 색깔과 덧칠 아래에서도 자연적 인간homo natura이라는 무서운 근본 텍스트는 다시 인식되어야만 한다고 말이다. 즉 인간을 자연으로 되돌려 번역하는 것, 지금까지 자연적 인간이라는 저 영원한 근본 텍스트 위에 서툴게 써넣고 그려놓은 공허하고 몽상적인 많은 해석과 부차적인 의미를 극복하는 것, 오늘날 인간이 이미 학문의 훈련으로 엄격하게 단련되어 두려움을 모르는 오이디푸스의 눈과 막힌 오디세우스의 귀를 가지고 오랫동안 "너는 그 이상의 것이다! 너는 더 높은 존재다! 너는 다른 혈통을 지녔다!"고 인간에게 피리로 속삭였던 낡은 형이상학적 새잡이의 유혹의 방식에 귀를 막고 다른 자연 앞에 서 있는 것처럼, 후에는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 앞에 서 있게 만드는 것, ㅡ 이것은 생소하고 미친 과제일 수 있지만, 그러나 이는 하나의 과제인 것이다. 누가 이것을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 왜 우리는 이러한 미치광이 같은 과제를 선택했단 말인가? 또는 달리 묻는다면 "도대체 왜 인식이 있다는 말인가?" ㅡ 누구나 우리에게 이것에 대해 묻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방식으로 내몰려도, 백 번이고 스스로에게 이미 그렇게 물어보았던 우리는 더 이상 좋은 대답을 찾지 못했고, 찾지 못하고 있다 ······

 

- 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제230절

 

  * * *

 

가르칠 수 없는 것에 이르는 이정표가 완전히 '밑바닥에 있다'는 것을 보게 될 뿐

 

배운다는 것은 우리를 변화시킨다. 이것은 생리학자가 알고 있듯이, 온갖 영양을 섭취하는 것과 같은 것을 하고 있는데, 이는 단순히 '유지'시키는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근저에는, 훨씬 '그 밑바닥에는' 물론 가르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으며 정신적 숙명의 화강암이 있고 미리 결정되고 선별된 물음에 대한 미리 결정된 결단과 대답의 화강암이 있다. 중요한 문제가 대두될 때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불변적인 말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녀 문제에 대해 사상가는 배워서 고칠 수 없고, 단지 끝까지 다 배울 수 있을 뿐이다. ㅡ 단지 이러한 남녀의 문제에 대해 자신의 입장에서 '확실한 것'을 마지막으로 발견할 뿐이다. 우리는 때때로 바로 우리에게 강한 믿음을 주는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낸다. 아마 우리는 그것을 앞으로 자신의 '신념'이라고 부를 것이다. 후에 ㅡ 우리는 그 신념 안에서 자기 인식에 이르는 발자취를, 우리 자신이기도 한 문제에 이르는 이정표를 보게 될 뿐이며 ㅡ  더 적절하게 말하자면,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한 커다란 어리석음에 이르는, 우리의 정신적인 숙명에 이르는, 가르칠 수 없는 것에 이르는 이정표가 완전히 '밑바닥에 있다'는 것을 보게 될 뿐이다. ㅡ 내가 나 자신에 대해 행했던 이러한 대단히 점잖은 태도를 감안해서 아마 내가 '여성 자체'에 대해 몇 가지 진리를 숨김없이 말하는 것을 이미 허락해주었으리라 믿는다 : 더욱이 그것이 단지 ㅡ 나의 진리일 뿐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사람들은 알고 있었겠지만 말이다. ㅡ

 

- 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제231절

 

 * * *

 

최악의 진보

 

여성은 자립하기를 원한다 : 그리고 그 때문에 '여성 자체'를 남성들은 계몽시키기 시작한다. 이것은 유럽이 일반적으로 추악해지는 최악의 진보에 속한다. 왜냐하면 여성의 학문성과 자기 폭로의 이러한 서툰 시도가 모든 것을 백일하에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여성에게는 부끄러워해야 할 많은 이유가 있다. 여성에게는 현학적인 것, 천박한 것, 학교 선생 같은 것, 하찮은 오만, 하찮은 무절제와 불손함이 많이 숨어 있다. ㅡ 여성이 어린아이를 상대하고 있을 때를 살펴보라! ㅡ 이러한 것은 근본적으로 지금까지 남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장 잘 억제되고 제어되어왔다. 만일 '여성에게서의 영원히 권태로운 것이 ㅡ 여성에게 이것은 풍부하게 있다! ㅡ 과감하게 밖으로 나오는 일이 생긴다면, 이는 고통스러운 일이다! 만일 여성이 우아하고 장난스럽고 근심을 없애주고 마음의 짐을 벗어나게 하고 매사를 쉽게 생각하는 현명함과 기교를, 만일 여성이 유쾌한 욕구를 처리하는 섬세한 솜씨를 철저하게 근본적으로 잊어버리기 시작한다면, 이는 고통스러운 일이다! 성스러운 아리스토파네스에게 맹세코 말하는데, 지금은 이미 경악하게 하는 여성의 소리가 커져가고 있으며, 여성이 궁극적으로 남성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의학적인 확실함으로 들이닥치게 된다. 여성이 이와 같이 학문적으로 되려고 한다면, 이것은 가장 나쁜 취미가 아니겠는가?

 

- 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제232절

 

 * * *

 

'여성 자체'에 유리한 무엇이 증명된 것처럼 생각한다면

 

만일 어떤 여성이 바로 롤랑Roland 부인이나 드 스탈 부인 또는 조르주 상드George Sand를 끌여들여, 그것으로 인해 '여성 자체'에 유리한 무엇이 증명된 것처럼 생각한다면 ㅡ 악취미를 드러내는 것이라는 점을 도외시하고라도 ㅡ 이는 본능의 타락을 드러내는 것이다. 남성들 사이에서 위에 언명된 사람들은 세 명의 우스꽝스러운 여성 자체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 그리고 이들은 바로 해방과 여성의 자기 예찬에 대한 의도하지 않은 최상의 반증이 될 뿐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제233절

 

 

 * * *

 

나이가 든 딸들에게 주고 싶은 한 마디 말

 

부엌에서의 어리석음. 요리사로서의 여성. 가족과 가장의 섭생을 배려하는 데 끔찍할 정도의 무신경함! 여성은 음식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요리사가 되고자 한다! 만일 여성이 생각하는 존재라고 한다면, 수천 년 간 요리사로 활동을 해왔으니 최대의 생리학적 사실들을 발견하고 의술도 획득했어야 할 것이다! 서투른 요리사로 인해 ㅡ 부엌에서 이성이 완벽하게 결핍되어 있었기 때문에 인간의 발전은 가장 오랫동안 저지되었고, 가장 심하게 해를 입어왔다 :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정은 좋아지지 않고 있다. 더 나이가 든 딸들에게 주고 싶은 한 마디 말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제234절

 

  * * *

 

달아나지 않도록

 

이제까지 여성들은 남성들에 의해 어떤 높은 곳에서 그들에게 잘못 내려온 새처럼 취급되어왔다 : 좀더 섬세하고 상처받기 쉬우며 거칠고 경이로우며 감미롭고 영혼이 넘치는 어떤 것으로, ㅡ 그러나 달아나지 않도록 가두어두어야만 하는 어떤 것으로.

 

- 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제237절

 

 

  * * *

 

어리석은 사람임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표시

 

'남성과 여성'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잘못 생각하고, 여기에 있는 헤아릴 길 없는 대립과 그 영원히 적대적인 긴장의 필연성을 부정하며, 여기에서 아마 평등한 권리와 교육, 평등한 요구와 의무를 꿈꾼다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임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표시이다. 이러한 위험한 장소에서 스스로 천박하다는 것을 ㅡ 본능에서의 천박함을! ㅡ 드러내는 사상가는 대체로 의심스러운 존재이며, 더 나아가 자신의 정체가 드러내고 폭로된 것으로 여겨도 될 것이다 : 아마 그는 미래의 삶을 포함한 삶의 모든 근본 문제에 너무나 '근시안적이며' 결코 어떤 심연으로도 내려갈 수 없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해 자신의 정신에서나 욕망에서도 깊이가 있고, 엄격하고 혹독할 수 있으며 또 그러한 것들과 쉽게 바꾸는 호의의 깊이를 가지고 있는 남성은 여성을 언제나 동양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 그는 여성을 소유물로서, 열쇠로 잠가둘 수 있는 사유 재산으로, 봉사하도록 미리 결정되어 있고 봉사함으로써 자신을 완성하는 존재로 파악할 수밖에 없다. ㅡ 그는 이 점에서는 아시아의 거대한 이성의 편, 아시아적 본능의 탁월함의 편에 서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일찍이 이러한 아시아를 가장 훌륭하게 계승한 자이며 제자였던 그리스인들이 행했던 것과 같은 것으로,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리스인들은 호메로스에서 페리클레스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문화의 힘이 미치는 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여성에 대해서도 한 걸음 한 걸음씩 더욱 엄격해지고 간략히 말해 동양적이 되어버렸다. 이것은 얼마나 필연적이며, 논리적이고, 그 자체로 인간적으로 바람직한 것이었던가 : 이에 관해 우리는 스스로 숙고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제237절

 

 * * *

 

'여성'의 진보를 자신들의 깃발에 적고 있는 동안

 

어느 시대에도 우리 시대만큼 나약한 성이 남성에게 이렇게 존경을 받은 적은 없다. 이것은 노인에 대한 불경(不敬)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적 경향과 근본 취향에 속하는 것이다 ㅡ : 이러한 존경이 바로 다시 악용되는 일이 있다고 해서 그리 놀랄 일은 아니지 않는가?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은 원하게 되고 요구하는 것을 배우게 되며, 마침내 저 당연히 치러지는 존경을 거의 모욕으로 느끼고, 그리하여 권리를 위한 투쟁, 아니 실로 투쟁 자체를 선호하고자 한다 : 어쩄든 여성은 수치심을 잃어가고 있다. 여기에 부가적으로 덧붙인다면, 여성은 또한 취향도 잃어가고 있다. 여성은 남성을 두려워하는 것을 잊고 있다 : 그러나 '두려워하는 것은 잊는' 여성은 자신의 가장 여성적인 본능을 포기하는 것이다. 남성에게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것, 더 명확하게 말해 남성 안에 있는 남성을 더 이상 원하지 않고 남성이 크게 육성되지 않게 될 때, 여성이 과감하게 나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거니와 또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바로 이러한 이유로 여성이 퇴화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일들이 오늘날 일어나고 있다 : 우리는 이것에 대해 잘못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중략) 여성이 이와 같이 새로운 권리를 자기 것으로 하고 '주인'이 되고자 하며 '여성'의 진보를 자신들의 깃발에 적고 있는 동안 놀라울 만큼 명확하게 반대의 일이 실현된다 : 여성이 퇴보해가는 것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제239절

 

 

 * * *

 

어색하게 격분하며 주워 모으고 있는 것

 

프랑스 혁명 이래 유럽에서 여성의 영향력은 여성의 권리와 요구가 증대한 것에 비례하여 감소되어왔다. 그리고 '여성 해방'이란 (천박한 남성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여성 자신에 의해 요구되고 촉진되는 한, 이와 같이 가장 여성적인 본능이 더욱 약화되고 둔화되는 현저한 증후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에는 행실이 바른 여성이라면 ㅡ 더구나 영민한 여성이기도 하는데 ㅡ 근본적으로 부끄러워했을 어리석음이, 거의 남성적인 어리석음이 있다. 그 대신 여성은 어떤 기반에서 가장 확실하게 승리하게 될 것인지를 맡는 후각을 상실해가고 있다. 여성 특유의 무술 연습을 게을리 하고 있다. 전에는 예의 바르고 섬세하고 꽤 겸허함도 몸에 지니고 있었는데, 남성 앞에서 자제력을 잃고 아마 '책에까지' 손대고 있다. 여성 안에 감추어진 근본적으로 다른 이상과 영원히 필연적인 여성적인 것을 믿는 남성의 믿음에 대해 고결한 듯한 불손한 태도로 반대 행동을 하고 있다. 여성은 훨씬 섬세하고 놀라울 정도로 사납고 때로는 마음에 드는 애완 동물처럼 양육되고 보살핌을 받고 보호되고 아낌을 받아야 한다는 남성들의 생각을, 여성은 힘껏 수다를 떨면서 그 말을 끝내 버리고 있다. 지금까지 사회 질서  속에서 여성의 지위 자체가 지니고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지니고 있는 온갖 노예적인 것과 노비적인 것을 어색하게 격분하며 주워 모으고 있는 것이다 (마치 노예 제도가 모든 고도의 문화, 문화 상승의 조건이 아니고 그 반증인 것처럼) : ㅡ 이 모든 것이 만약 여성적인 본능의 파괴와 탈여성화가 아니라면, 무엇을 의미한다는 말인가?

 

- 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제239절

 

 * * *

 

여성의 최초이자 최후의 천직

 

사람들은 거의 어디에서나 온갖 종류의 음악 가운데 병적이고 가장 위험한 음악으로 (우리 독일의 최신 음악으로) 여성의 신경을 망쳐놓고 그녀들을 매일 더 신경질적으로 만들며 강한 아이를 낳는다는 여성의 최초이자 최후의 천직을 무력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여성들을 일반적으로 더욱 '교화'하려고 하며, 이른바 '나약한 성'을 문화를 통해 강하게 만들고자 한다 : 마치 인간의 '교화'와 허약화 ㅡ 즉 의지력을 허약하게 하는 것, 분열시키는 것, 병약하게 만드는 것은 항상 서로 보조를 같이했다는 사실과 세계에서 가장 강하고 영향력 있는 여성들(마지막으로 나폴레옹의 어머니가 그러했는데)은 바로 자신의 의지력 덕분에 ㅡ 학교 선생들의 덕택이 아니라 ㅡ 남성들을 능가하는 자신의 힘과 우월함을 자질 수 있었다는 사실을 역사가 가능한 한 절실하게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말하듯이 말이다. 여성에게서 존경과 때로는 공포마저 일으키는 것, 그것은 남성의 자연보다 더 '자연적인' 그녀의 자연이며, 이러한 것으로는 진정하게 맹수같이 교활한 유연함과, 장갑 아래 숨겨진 호랑이 발톱, 이기주의의 단순함, 교육시키기 어려운 속성과 내적인 야성, 욕망과 덕성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 폭넓은 것, 방황하는 것이 있다 ······ 이와 같이 여러 가지 공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위험하고 아름다운 고양이인 '여성'에게 동정을 갖게 하는 것은, 여성이 다른 어떤 동물보다도 더 고통스러워하고 상처받기 쉬우며 사랑이 필요하고 환멸을 느끼도록 선고받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 지금까지 남성은 이러한 감정을 가지고 여성 앞에 서 있었으며 언제나 한 발은 이미 황홀해하며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비극에 넣고 있었다 ㅡ . 뭐라고? 이것으로 이제 끝내려 한다고? 여성의 매력 상실이 일어나려고 한다고? 여성의 무료화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고? 오 유럽이여! 유럽이여! 너에게는 언제나 가장 매력 있었으며 너를 거듭 위험에 빠뜨리려는 뿔 달린 동물을 우리는 알고 있다! 너의 낡은 우화가 다시 한번 '역사'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ㅡ 다시 한번 엄청난 어리석음이 너를 지배하게 될 수도 있으며, 너를 운반해갈지도 모른다! 그 어리석음 아래에는 어떤 신도 숨어 있지 않다. 그렇다! 단 하나의 '이념', '현대적 이념' 만이 숨어 있을 뿐이다! ······

 

- 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제239절

 

 * * *

 

니체를 단순히 여성혐오주의자로서만 읽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해석

 

근대의 민주주의는 인간들의 평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근대의 제1세대와 1960년대 이후 제2세대 페미니즘은 제도적·정치적으로 억압된 여성의 지위를 끌어올려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확보하려는 것에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여성운동의 역효과는 고유한 성적인 차이를 보지 못하고, 여성성에 기반 하지 않은 남성성과의 인위적인 동일화로 인해 여성만이 가진 내밀한 고유성들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니체는 페미니즘이 지닌 이러한 단점을 근대 민주주의가 초래한 병폐로 보고 이것을 비판한다. 양성의 동일한 사회적 활동이 양성의 무화로 퇴락하는 것을 니체는 경계한다. 성의 차이가 사라진다면 인간은 그 생존을 그치게 되고, 긴장감이 부재하는 양성의 관계는 위버멘쉬의 탄생도 어렵게 만든다. 그래서 니체는 초기 페미니즘의 동일화 운동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 현대 제3세대의 페미니스트들은 니체가 제기했던 이러한 인식을 수용하고, 여성성이 파괴되지 않는 양성의 평등을 위해 니체를 재평가한다. 생물학적 양성의 존속이유는 2세의 출산이다. 여성성과 여성의 몸은 2세의 출산과 육아에 관한 한 핵심적 역할을 한다. 여성성은 늘 생명을 의식하며, 그러므로 미래를 의식하는 성향이다. 이에 비해 남성성은 2세의 출산에 관한 한 보조자의 역할을 할 뿐이다. 또한 여성성이 지니는 고유한 장점을 결핍으로 파악하고, 이를 인위적인 남성성과의 동일화운동으로 없애려한 페미니즘의 경향은 니체가 볼 때 여성성을 죽이는 운동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니체를 과거의 페미니스트들처럼 단순히 여성혐오주의자로서만 읽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해석일 수밖에 없다. 현대의 여성은 가정과 사회 모두에서 그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이 구조에서 여성들의 고유성들은 쉽게 파괴되고 무시되곤 한다. 자연적인 것을 인위적으로 부자연스럽게 만든다는 것은 반인간적인 발상이다. 이렇게 단순화된 평등론이 함의하는 위험을 이미 니체는 경고하고 있는 것이며 그 경고가 현대 사회의 여성 운동에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 정영수, 『니체와 페미니즘』, 순천향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 *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탕기 2016-03-06 2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려운 문제이군요. 판단을 유보하는 어리석은 독자가 되고 싶진 않지만, 니체와 페미니즘 양쪽 모두 주장과 사상의 온도가 대단히 높아서, 자칫하면 살갗들이 한쪽으로 완전히 붙어 떨어지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입니다. Oren 님께서 정성 들여 인용해주신 니체의 모든 구절에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습니다. 음... 그건 어떤 의미에서는 니체에게서 느껴지는 `의지`에의 전투적인 강조... 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조금 엇나가긴 햇는데, 여하튼 그런 강한 확신이 아직까지 저의 빈약한 마음에는 와닿지 않은 까닭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도 다 역량 부족이겠지요.

니체가 반발하는 `단순화된 평등`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하지만 저도 무척 공감합니다. 제 글이 좀 길고 중구난방인이긴 했습니다만(솔직히 너무 쓸데없이 길게 썼다는 생각이 듭니다...), 분명히 언급했듯이 저는 인간은 차등적 존재라고 확신합니다. 우생학의 기본 전제는 사실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니체가 반발하는 `인위성`이라는 걸 제도로 도입하는 (이걸 일본의 한 젊은 철학자는 `역사의 도박장`에 카드를 들고 들어가는 일이라고 표현하는데) 과정을 통해서 그 차등을 상보해줄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도 인간인 것 같습니다. 페미니즘이 모두 `단순화된 평등`이라는 안위성을 추구하진 않는다는 점에서, 정영수 씨의 글에 전부는 공감할 수가 없고요. 하지만 그분의 글이 정확히 겨냥하고 있는 표적에 대해서는 알고 있고 그것에 한해 생각해보면 공감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페미니즘을 읽으며 극복해야 했던 어떤 부정적 이미지들? 그런 것들을 날카롭게 지적해주고 계시거든요. 저 사상도 스펙트럼이 워낙 넓어서, 사실 갈필을 잡기가 힘듭니다.

Oren 님의 인용문들을 이면지에 낙서해가면서 천천히 곱씹어봤습니다. 니체를 경외하고 있는 덕분에, 어쩌면 왜곡될 소지가 있는 부분들을 (아마도) 꿋꿋하게 읽을 수 있었던 것도 같고요. 공감할 수 없는 글이라 할지라도 밀어내지 않는, 순전한 호기심이 있는 것도 다행인 듯도 합니다. 여하튼, 한편으로는 니체가 20세기 들어 진행된 `여성현대예술가`들의 진일보와 20세기 중반부터 급속도로 퍼진 (제3 운동을 포함한) 페미니즘을 봤다면 어떤 의견을 내놓았을까 상상해봤습니다. 같은 말을 했겠지요? 니체는 역사의 변화를 예견했었을까요? 혹시 이 부분과 관련된 인용 구절이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음. 정영수 씨의 글에서 느껴지는 의견 차는 조금 거칠게 정리해보자면 이렇습니다. 저는 『야전과 영원』이라는 텍스트에서 많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역사의 제도는 인위적이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꼭 그렇게 되어야 할 필연성을 부정한다고 할까요? 그래서 ˝자연적인 것을 인위적으로 부자연스럽게 만든다는 것˝이라는 인용 구절에는 공감할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사에 `자연적인 것`이라는 건, 제가 생각하기에 없습니다. 인간은 자연에 `인위`로 적응한다고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이타적 유전자』라는 매트 리들리의 책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가장 위대한 텍스트인 성문법과 그 휘하 콘텍스트들이 만든 것이고, 그런 것들이 사회 속에 하나의 거대한 습관으로 남아 `자연스러운 것처럼` 길들여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프랑스 법철학자인 르장드르의 고증을 여러 차례 살펴보고 푸코의 이로를 따라가면서 역사를 새롭게 바라보게 됐거든요. 확실히 대학 시절과는 다른 시각인 것 같아요. 저는 당분간은 그쪽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될 것 같습니다. 그것이 옳았는지는 또 다른 의견을 계속 읽어가면서 판단하게 되겠군요.

공감이 다 되진 않으면서도 곱씹고 이면지에 옮겨 적게 되는 것은, 니체만의 마력인 것 같습니다. 정말 `마력`이라는 단어가 아니면 딱히 표현할 길이 없어요! 다행이도 제게는 두 쪽 다 낯섭니다. 니체도 낯설고, 페미니즘이 말하는 성정치학, 특히 새로운 언어의 도입 같은 부분은 정말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저는 `남자`라는 젠더로 길들여져온 청년이니까요. 하지만 니체도 그렇고 페니미즘도 그렇고, 저 첨예한 부분에 겁 먹지 않고 계속 서 있어야 <인간>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그것을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지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언젠가 저만의 답이 나올까요? Oren 님처럼 많은 걸 읽고 또 많은 경험을 하고 시간의 축적을 `축복`으로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여유 있는 어른이 된다면, 그때는 제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지 무척 궁금합니다. 하지만 설레는 것보다는 그 모습이 두렵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래도 저는 피하지 않는 독자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런 댓글을 달 때마다 너무 두서가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날씨 정말 좋았습니다. 황사가 다행이도 약해서 오후 내내 자전거를 타고 들어왔는데, Oren 님께서는 가족분들과 즐거운 주말 보내셨는지요? 다음 한 주도 저는 버거운 주제와 씨름하고 늘 실패하는 하루 하루를 보내겠지요. 고비 때마다 인용해주신 구절들에서 번개 같은 순간을 맞이하기도 하고, 몰래 구절을 훔쳐가기도 합니다. 늘 좋은 조언 부탁드립니다. 편안한 밤 되십시오 ^^

oren 2016-03-06 23:54   좋아요 1 | URL
저도 두서없이 `니체의 말들`을 매우 길게(그렇지만 나름대로는 `맥락`이 이어지는 방향으로) 인용했습니다만, 니체의 사상들을 아무런 비판이나 저항도 없이 수용하기는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의 주장은 매번 `인류 전체`를 걸고 `기존의 도덕과 가치체계` 자체를 전복하려는 시도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지요. 심지어 니체는 `계급`을 강력하게 옹호하는 듯한 모습도 거리낌없이 보여줄 정도니까요. 프랑스 혁명에서 부르짖은 `평등`에 대해서도 `어리석은 일`이라고 폄훼할 정도였지요.(그 때문에 루소와 볼테르가 몇 번씩이나 불려나와 혼쭐이 납니다. 그와 반대로 나폴레옹은 매번 극도로 존경을 받고요.ㅎㅎ)

어쨌든 그는 모든 `왜소화`와 `후퇴`와 `퇴화`와 `삶의 위축`등 `삶을 위혐하는 경향들`에 결연히 반대를 부르짖었는데, `조건없는 평등`이나` 민주주의 운동`이나 `여성해방 운동`이나 심지어 `진보`를 내세우는 거의 모든 철학들이 결국은 `노예 도덕`일 뿐이라며 비판할 정도였으니, 탕기 님께서 말씀하신 `인간은 차등적 존재`라는 생각쯤은 니체에겐 `귀족주의`나 `지배자 도덕`을 옹호하기 위해서는 재고할 필요조차도 없을 만한 기본 토대였겠지요.

니체는 아마도 역사의 다양한 변화 방향들을 얼마쯤은 예견할 수도 있었으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는 문헌학자였으니만큼 특히나 고대 헬레니즘의 문화와 철학에는 아주 정통할 정도로 `과거`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몸담은 현재의 현대성 문제`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뚫어져라 들여다보고 비판했으며, 결국 자신이 제기한 인류 도덕의 근본 문제들이 해결책을 모색하게 될 새로운 무대인 `미래`를 내다보는 일에도 결코 소홀히 한 적이 없을 정도로 아주 용의주도했으니까 말이지요.

비록 니체가 `서양 형이상학의 종결자`라는 궁극적 위치까지 넘볼 정도로 높이 평가된 적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는 이미 우리에겐 까마득한 옛날이었을 뿐인 과거를 `현재`로 삼아 철학을 했던 인물인 것도 사실이지요. 그러니만큼 그의 철학들이 우리들의 `현재`에 얼마만큼의 울림을 주는지는 각자가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나 태도`에 따라 현격한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자주 해 봅니다. 그는 늘 자신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는 `예민한 귀`를 가진 `극소수의 독자`를 대상으로, 그것도 무려 `백 년 후에나` 겨우 제대로 읽히게 될 글들을 쓰고 있노라고 자주 주장했는데, 그런 만큼 그에 대한 오해 또한 이해보다 더욱 커질 여지도 얼마든지 많을 수밖에 없었겠지요. 더군다나 그가 남긴 책들만 해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니, 그를 제대로 이해하려는 과제가 오죽이나 힘든 일일까 싶은, 그런 생각도 가끔은 듭니다.

탕기 님께서 뜻밖에도 너무 긴 댓글을 남겨주셔서, 제 글도 그냥 하는 수 없이, 이쯔네거 아무런 두서없이 맺어야겠다 싶습니다. 내내 즐거운 시간 만드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