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우리는 잔인성을 다시 배워야만 하고 눈을 떠야만 한다

 

인간성을 자랑하게 되는 최근의 시대에도 '사납고 잔인한 동물'에 대한 공포와 공포의 미신이 많이 남아 있어, 그것을 극복하게 되었다는 것이 좀더 인간적인 시대의 긍지를 이룬다. 그래서 명백한 진리마저도 저 사납지만, 결국 죽어버린 동물을 도와 다시 소생시킬 수도 있다는 추측 때문에, 약속이나 한 것처럼 여러 세기 동안 입에 올리지 않은 채 있다. 나는 아마도 그러한 진리가 나에게서 살그머니 빠져나가게 하는 그러한 일을 감행하고자 한다 : 다른 사람들은 그 진리를 다시 잡아, 그것에 '경건한 사유방식이라는 우유'를 충분히 마시게 하고 마침내 조용히 잊혀진 채 그것이 전에 있었던 낡은 구석에 뉘여놓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잔인성을 다시 배워야만 하고 눈을 떠야만 한다. 예를 들어 비극에 관해 고금의 철학자들이 사육해왔던 그러한 뻔뻔하고 비대한 오류가 더 이상 고결한 듯 주제넘은 모습으로 돌아다니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마침내 인내를 저버리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우리가 '더 높은 문화'라고 부르는 거의 모든 것은 잔인함이 정신화되고 심화된 데 바탕을 둔 것이다. ㅡ 이것이 내 명제이다. '사나운 동물'은 전혀 죽지 않았으며 살아 있고 번성하며, 스스로를 단지 ㅡ 신성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비극이라는 고통스러운 쾌락을 만드는 것은 잔인함이다. 이른바 비극적 동정에서 근본적으로는 심지어 가장 높고 가장 섬세한 형이상학의 전율에 이르기까지 모든 숭고함 속에서 쾌감으로 작용하는 것은, 감미로움을 오직 거기에 혼합되어 있는 잔인함의 요소에서 얹은 것이다. 투기장에서의 로마인, 십자가의 황홀함 속에 있는 그리스도교인, 화형이나 투우를 보고 있는 스페인, 비극으로 돌진하는 오늘날의 일본인, 피비린내 나는 혁명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는 파리 변두리의 노동자, 의지가 풀린 채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를 '참으면서 보고 있는' 바그너광 여자들 ㅡ 이 모든 이가 즐기고 비밀스러운 욕정에 휩싸여 마시려고 노력하는 것은 '잔인함'이라는 위대한 마녀의 약초술이다. 이 경우 우리는 물론 잔인성이란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데서 생기는 것이라고 가르칠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어리석은 심리학을 추방해야만 한다 : 자기 자신의 고통, 자기 자신을 스스로 괴롭힌다는 것에도 풍부한, 넘칠 정도의 풍부한 즐거움이 있다. ㅡ 그리고 페니키아인이나 금욕주의자에게서처럼, 오직 인간이 종교적인 의미로서의 자기 부정이나 자기 훼손을 하도록, 또는 일반적으로 관능과 육체를 부정하고 참회하도록, 청교도적인 참회의 발작, 양심의 해부, 파스칼적인 지성을 희생하도록 설득되는 경우 그는 자신의 잔인함에 의해 자기 자신을 향한 저 위험한 잔인성의 전율에 은밀히 유혹되고 앞으로 내몰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인식하는 사람 자신도 정신의 성향에 반하여 그리고 가끔은 자신의 마음에서 원하는 소망에 거슬리면서까지 인식하는 것을ㅡ즉 스스로가 긍정하고 사랑하고 숭배하고 싶어하는데도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을ㅡ스스로의 정신에 강요함으로써 잔인함의 예술가와 변용자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미 그렇게 깊이 철저하게 파고들어 생각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가상과 표면적인 것을 향하고자 하는 정신의 근본 의지에 대한 폭력이며 고통을 주고자 함이다.ㅡ이미 모든 인식의 의욕에는 한 방울의 잔인성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제22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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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좋은 것의 '근저'에는 얼마나 많은 피와 전율이 있단 말인가!

 

오늘날까지도 지상에서 인간이나 민족의 생활 속에 장엄, 진지함, 비밀스러움, 음울한 색조가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일찍이 지상 모든 곳에서 약속하고 저당 잡히고 서약을 할 때 얼마간의 공포가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 과거가, 가장 오래 지속되고 깊이가 있으며 냉혹한 과거가, 우리가 '진지'해 질 때, 우리에게 숨결을 불어넣어 우리 안에서 용솟음쳐 오른다. 인간이 스스로 기억을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여길 때, 피나 고문, 희생 없이 끝난 적은 없었다. 가장 소름끼치는 희생과 저당(첫 아이를 바치는 희생도 여기에 속한다), 가장 혐오스러운 신체 훼손(예를 들면 거세), 모든 종교 의례 가운데 가장 잔인한 의식 형태(모든 종교는 그 가장 깊은 근거에서 잔인성의 체계다) ㅡ 이 모든 것의 기원은 고통 속에 가장 강력한 기억의 보조 수단이 있음을 알아차린 저 본능에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금욕주의 전체가 이에 속한다 : 몇 개의 관념들은 지워질 수 없고 눈앞에 있는 것, 잊을 수 없는 '고정된' 것이 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이러한 '고정 관념들'을 통해 신경과 지성의 전 조직에 최면을 걸기 위한 것이다. ㅡ 금욕주의적 절차와 생활 형식들은 이 관념들을 그 외의 모든 관념과의 경합에서 떼어내어 '잊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들기 위한 수단이다. 인류가 '기억에 남겨둔 것'이 나쁘면 나쁠수록, 인류의 관습의 모습은 더욱 무섭게 된다. 특히 형법의 냉혹함은 인류가 망각을 극복하고, 사회적 공동 생활의 몇몇 원시적 요건들을 순간적으로 감정과 욕망의 노예가 된 이러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자리잡게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알 수 있는 척도를 제공해준다. …… 이 독일인들은 자신의 천민적 근본 본능과 그에 뒤따르는 야수같이 거친 언행을 통제하기 위해, 스스로 무서운 수단을 사용하여 기억하게 만들었다 : 예를 들면 돌로 쳐 죽이는 형별(ㅡ이미 전설이 되어 있듯이 맷돌을 죄인의 머리 위에 떨어뜨리는), 수레로 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벌(형벌의 영역에서 독일의 천재가 가장 독자적인 창의성과 특이성을 발휘한), 말뚝으로 꿰뚫어 죽이는 형벌, 말로 찢어발기거나 밟아 죽게 만드는 형벌, 범인을 기름이나 포도주로 삶는 형벌(14세기나 15세기에도 행해졌다), 가슴에서 살점을 저며내는 형벌, 그리고 또 범죄자에게 꿀을 발라 이글대는 태양 아래 파리떼가 우글거리게 놓아 두는 형벌 등 고대 독일의 형벌을 생각해보라. 그러한 모습이나 전례의 도움으로 사람들은 마침내 사회 생활의 편익을 누리고 살기 위해 약속했던 일에 관해 대여섯 가지의 "나는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 속에 담게 된 것이다. ㅡ 그리고 실제로, 이와 같은 기억 덕분에 사람들은 마침내 '이성에' 이르렀다! ㅡ 아, 이성, 진지함, 감정의 통제, 숙고라 불리는 이러한 음울한 일 전체, 인간의 이러한 모든 특권과 사치 : 이것을 위해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지불했단 말인가! 모든 '좋은 것'의 근저에는 얼마나 많은 피와 전율이 있단 말인가!……

 

 - 니체, 『도덕의 계보』, <제2논문 : '죄', '양심의 가책' 및 기타>, 제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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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함을 지시하고 요구하는 권리

 

이러한 계약 관계를 눈앞에 생생히 그려본다는 것은 물론 앞에서 언급한 것으로 처음부터 예상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러한 관계를 만들고 승인했던 고대 인류에 대해 많은 의혹과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바로 이 관계에서 약속이 이루어지게 된다. 바로 이 관계에서 약속하는 자에게 기억하게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여기가 냉혹함, 잔인함, 고통을 찾아내는 발굴장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채무자는 자신이 되갚을 것이라는 약속에 신용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자신이 한 약속의 진지함과 성스러움을 보증해주기 위해서,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는 상환을 의무나 책임으로 자신의 양심에 새기기 위해서, 계약의 효력은 그가 상환하지 못할 경우 채권자에게 그가 그 외에 '소유'하고 있는 어떤 것, 그밖에 그의 권한에 있는 것을, 예를 들면 자신의 육체나 자신의 아내, 혹은 자신의 자유, 또는 자신의 생명 역시 저당 잡히는 것이다(혹은 특정한 종교적 전제가 있는 곳에서는 심지어 자신의 축복이나 영혼의 구원까지도, 마침내는 무덤 속의 평안까지도 저당 잡히는 것이다 : 이렇듯 이집트에서는 채무자의 시체는 무덤 속에서도 채권자 앞에서는 안식을 얻을 수 없었다 ㅡ 바로 이집트인에게서도 이러한 안식은 물론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더구나 특히 채권자는 채무자의 육체에 온갖 종류의 능욕과 고문을 가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부채 액수에 적합해 보이는 크기만큼 그의 육체에서 살로 도려낼 수 있었던 것이다 : ㅡ 오래전부터 곳곳에서는 이러한 관점에서 사지 하나하나와 신체의 각 부분을 정확하게, 부분적으로는 무서울 정도로 세세하게, 합법적으로 가격을 산정해왔다. 로마의 12표법이 그러한 경우 채권자가 잘라낼 수 있는 분량의 많고 적음은 중요하지 않다("좀더 많이, 또는 좀더 적게 잘라낼지라도 그것은 불법이 아니다")라고 선포했을 때, 나는 이것을 이미 좀더 자유롭고 좀 더 크게 계산하고 있는, 로마의 법률관을 나타내는 증거이자 진보라고 생각한다. 이 배상 형식 전체의 논리를 명료하게 해본다면, 이는 충분히 기묘하다. 등가는 다음과 같이 주어졌다. 즉 손해에 대해 직접적인 이익을 받는 대신 (즉 금전이나 토지, 어떤 종류의 소유물로 보상을 받는 대신) 채권자에게는 배상이나 보상으로 일종의 쾌감을 누릴 권한이 주어졌다. ㅡ 이는 자신의 권력을 무력한 자에게 마음껏 발휘할 수 있다는 쾌감이기도 하며, "악을 저지르는 즐거움을 위해 악을 저지른다"는 육욕적 쾌락이기도 하고 폭행을 즐기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즐김은 채권자의 사회적 지위가 낮고 천할수록 더 높게 평가되며, 채권자는 그것을 좀더 높은 신분에 있는 자가 맛보는 좋은 한 입의 음식, 아니 그 맛보기로 가볍게 여길 수 있었다. 채무자에게 '형벌'을 가함으로써 채권자는 일종의 지배권에 참여한다 : 그리하여 마침내 그 또한 한 인간을 '아래에 있는 존재'로 경멸하고 학대할 수 있다는 우월감을ㅡ아니면 최소한 실제의 형벌권, 형벌 집행권이 이미 '당국'에 넘어갔을 경우에는, 그 사람이 경멸당하고 학대받는 것을 보는 우월감을 한번 맛볼 수 있는 것이다. 보상이란 즉 잔인함을 지시하고 요구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데서 성립한다.

 

 - 니체, 『도덕의 계보』, <제2논문 : '죄', '양심의 가책' 및 기타>, 제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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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숭이도 시인하게 될 오래되고 강력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근본 명제

 

'죄', '양심', '의무', '의무의 신성함' 등과 같은 도덕적 개념 세계의 발생지는 영역, 즉 채무법이다. ㅡ 그 개념 세계의 발단은 지상에서의 모든 대사건과 마찬가지로 철저히 오랫동안 피로 물들었다. 저 세계는 근본적으로 피와 고문이라는 어떤 냄새를 단 한 번도 완전하게 씻어버린 적이 없지 않은가라고 덧붙여 말해도 되지 않을까? (심지어 늙은 칸트에게서도 그런 적이 없다 : 정언명법에는 잔인함의 냄새가 난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죄와 고통'이라는 저 무섭고 아마도 풀어버릴 수 없게 된 관념의 결합이 처음으로 고정되었다. 다시 한번 물어보건대, 고통은 어느 정도까지 '부채'를 보상할 수 있는 것일까?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 최고로 만족을 주는 정도까지이며, 피해자가 손해에 대한 불쾌감을 함께 염두에 두면서, 손해를 이상한 반대의 쾌감과 바꾸는 정도까지이다 :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 ㅡ 이것은 진정한 축제였으며, 이미 말했듯이, 채권자의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에 위배되면 될수록 더 높은 값을 지닌 어떤 것이었다. 이것은 추측하여 말하는 것이다 : 왜냐하면 이러한 지하에 파묻힌 일들을 밝히는 작업이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차치하고라도 철저히 규명하는 것은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복수'라는 개념을 그 와중에 서툴게 사용하는 사람은, 통찰을 좀더 쉽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덮어버리고 모호하게 할 뿐이다. 어느 정도까지 잔인함이 고대인의 성대한 축제의 환락을 이루고 있었는지, 그들의 거의 모든 환락의 구성 요소로 뒤섞여 있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잔인성을 향안 욕망이 얼마나 소박하고 순진하게 나타났는지, 바로 '사심 없는 악의' (또는 스피노자의 말로 하자면, 악의 있는 동정)를 그들은 얼마나 근본적으로 인간의 정상적인 속성으로 여겼고 ㅡ 따라서 양심을 단호하게 그렇다라고 긍정하는 것으로 여겼는지, 이러한 사실을 온 힘을 다해 생각해보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잘 길들여진 가축(말하자면 현대인, 말하자면 우리)의 섬세한 감각에, 더욱이 그 위선에 거스르는 일이다. 좀더 깊이 있는 안목을 가진 사람은 아마 오늘날에도 역시 인간의 가장 오래되고 근본적인 이러한 축제의 환락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선악의 저편》229절에서(그 전에 《아침놀》18절, 77절, 113절에서) 나는 고급 문화의 역사 전체를 일관되게 관통하는 (그리고 어떤 중요한 의미에서 생각해본다면, 심지어 역사를 형성하기까지 하는) 잔인함이 점점 더 정신화되고 '신성화'되는 것을 조심스럽게 지적했다. 어쨌든 사형, 고문, 이단자의 처형 없이는 가장 큰 규모의 제후의 결혼식이나 민족 축제를 생각할 수 없었고, 또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악의나 잔인한 조롱을 쏟아낼 수 있었던 사람 없이는 귀족적 가정 생활을 생각할 수 없었다는 것은 그리 먼 이야기가 아니다( ㅡ 공작부인의 궁정에서 읽히고 있는 《돈키호테Don Quixote》를 떠올려보라 :우리는 오늘날 《돈키호테》의 어느 부분을 읽어도 혀에 쓰디쓴 맛을 느끼며 거의 고문 당하는 듯한 가책을 갖는데, 이는 저작자나 동시대인에게는 대단히 이상한 일이며 이해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ㅡ 그들은 이것을 책 가운데 가장 명랑한 책으로 전혀 양심의 가책 없이 읽었으며, 이 책을 읽고 거의 죽도록 웃었다). 고통을 보는 것은 쾌감을 준다.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더욱 쾌감을 준다. ㅡ 이것은 하나의 냉혹한 명제이다. 하지만 그 밖에도 아마 이미 원숭이도 시인하게 될 오래되고 강력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근본 명제이다 : 왜냐하면 원숭이는 기이한 잔인함을 생각해냄으로써 인간을 이미 충분하게 예고하고 있으며, 마치 인간의 '서곡을 연주하는 것' 같다고 설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잔인함 없는 축제란 없다 : 인간의 가장 오래되고 긴 역사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ㅡ 그리고 실로 형벌에서도 축제적인 것이 많이 있다! ㅡ

 

 - 니체, 『도덕의 계보』, <제2논문 : '죄', '양심의 가책' 및 기타>, 제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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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들 역시 잔인함의 즐거움보다 더 좋은 간식을 바칠 줄 몰랐다는 것

 

덧붙이자면, 나는 이러한 사상으로 삶의 권태라는 시끄럽고 삐걱삐걱 소리가 나는 물방아에 우리의 염세주의자들이 새로운 물줄기를 대는 데 도와줄 의도가 전혀 없다. 반대로 인류가 자신의 잔인함을 아직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던 그때가 염세주의자들이 존재하는 현재보다 지상에서의 삶이 더 명랑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입증해야만 한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수치가 커져가는 상황에 따라 인간을 뒤덮고 있는 하늘의 어둠은 점점 더 확산되었다. 피로에 지친 염세주의적 눈길, 삶의 수수께끼에 대한 불신, 삶에 대한 구토에서 나오는 얼음같이 찬 부정 ㅡ 이러한 것들은 인류의 최악의 시대를 나타내는 표식이 아니다 : 이러한 것들은 늪이 존재할 때, 그에 속하는 늪의 식물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오히려 세상에 알려진다. ㅡ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그 덕분에 '인간'이라는 동물이 결과적으로 자신의 모든 본능을 부끄럽게 여기게 된 병적인 유약화와 도덕화에 대한 것이다. '천사'(여기에서는 더 가혹한 용어를 사용하지 말자)가 되는 도중에 인간은 저 상한 위와 설태가 낀 혓바닥을 양육했으며, 이로 인해 인간은 동물적인 즐거움이나 순진함을 역겨워했을 뿐만 아니라, 삶 자체가 무미건조해졌다. ㅡ 이렇게 해서 인간은 자기 자신 앞에서 때때로 코를 쥐고 서서, 교황 이노센트 3세와 함께 비난하면서도 자신이 혐오하는 것의 목록을 만든다['불결한 생식(生殖), 모태에서의 구역질 나는 양육, 인간을 발육시키는 물질의 더러움, 지독한 악취, 침의 분비와 오줌과 대변의 배설']. 고통이 언제나 생존에 반대되는 논증 가운데 첫번째 논증으로, 생존의 최악의 의문부호로 활보해야만 하는 오늘날, 이와는 반대로 판단했던 시대를 떠올려보는 것이 좋으리라. 왜냐하면 사람들은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 없이는 지낼 수가 없었으며, 그 안에서 최고의 매력을, 삶에 이르는 진정한 유혹물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당시ㅡ유약한 사람에게는 유혹의 말이 되겠지만ㅡ고통은 오늘날처럼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았다. …… 게다가 아마도 잔인함에 대한 쾌감 역시 사실은 사라질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가능성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 다만 이 쾌감은 오늘날 고통이 더 심하다는 사정에 비추어 승화되고 섬세해지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말하자면 상상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 번역되어 드러나고, 그것들에게서는 가장 섬세하고 위선적인 양심에까지도 아무런 혐의를 일으키지 않을 만큼 오직 안심할 만한 명칭으로만 장식된 채 드러나야 할 것이다('비극적 연민'이란 그러한 한 명칭이며, '십자가에 대한 향수'라는 것도 또 하나의 다른 명칭이다). 사실 고통에 대해 사람을 분격하게 하는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함이다 : 그러나 고통 속으로 비밀스러운 구원 장치 전체를 집어넣어 해석한 그리스도교에게도, 모든 고통을 방관자의 입장이나 고통스럽게 만드는 자의 입장에서 해석할 줄 알았던 고대의 소박한 인간에게도 그러한 무의미한 고통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숨겨지고 알려지지 않으며 목도되지 않은 고통을 세상에서 처리하고 이를 솔직히 부정할 수 있기 위해서, 당시의 인간들은 거의 신과 모든 높이와 깊이를 가지고 있는 중간 존재들을, 즉 숨겨진 곳에서 서성거리기도 하고 어둠 속에서도 보며, 흥미 있는 고통스러운 광경을 쉽게 놓치지 않는 그 어떤 존재를 발명할 필요까지 있었다. 그러한 발명 덕분에 그 당시 사람들의 삶은 언제나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자시의 '재난'을 정당화하는 술책에 능했던 것이다. 오늘날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아마 다른 보조적인 발명(예를 들어 수수께끼로서의 삶이라든다 인식 문제로서의 삶)이 필요할 것이다. "신이 그것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재난은 모든 정당하다" : 선사적 감정의 논리는 이렇게 울려퍼진다. ㅡ 이것은 진정 선사적 논리였을 뿐인가? 잔인한 광경을 즐기는 친구로 생각된 신들ㅡ오, 이 태고의 관념 자체가 어느 정도까지 우리 유럽의 인간화에도 파고들어와 있는 것일까! 이 점에 관해서는 칼뱅이나 루터와 상의해보아도 좋다. 어쨌든 그리스인들 역시 그들 자신의 신들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잔인함의 즐거움보다 더 좋은 간식을 바칠 줄 몰랐다는 것은 확실하다. 당신은 도대체 호메로스가 자신의 신들로 하여금 인간의 운명을 내려다보게 한 것은 어떤 눈이었다고 생각하는가? 근본적으로 트로이전쟁과 그와 유사한 비극적이고 무서운 사건들은 어떤 궁극적 의미를 지니고 있단 말인가? 의심할 여지 없이 이것들은 신들을 위한 축제극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 그리고 이러한 것에 대해서 시인이 다른 사람들보다 '신적인' 속성이 있는 한, 시인들을 위한 축제극이기도 했다…… 후에 그리스의 도덕 철학자들이 도덕적인 논쟁이나 유덕자의 영웅주의나 자기 가책을 신의 눈이 내려다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이와 같은 것이었다 : '의무를 진 헤라클레스'는 무대 위에 올려졌으며, 그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목격자 없는 덕행이란 이 배우의 민족에게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자유의지', 즉 선악에서 인간이 절대적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는 발명은 당시 유럽을 위해 처음으로 만들어진 저 대담하고도 숙명적인 철학자의 발명이었지만, 이는 무엇보다도 인간과 인간의 덕행에 대한 신들의 관심이 결코 고갈될 수 없다는 생각을 인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이러한 지상의 무대에서 진실로 새로운 것, 진실로 전대미문의 긴장, 갈등, 파국은 결코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 완전히 결정론적으로 생각된 세계란 신들에게는 알 수 있는 세계이며, 결과적으로 곧 싫증이 나게 된다. ㅡ 이러한 신들의 친구인 철학자들이 자신의 신들에게 그러한 결정론적인 세계를 요구하지 않은 것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고대 인간은 모두 연극과 축제 없이는 행복을 생각할 수 없었던, 근본적으로 공개적이고 근본적으로 명백한 세계로 '관중'을 세심하게 고려했던 것이다. ㅡ 그리고 이미 말했듯이, 대단한 형벌에도 실로 축제적인 것이 많이 있다! ……

 

 - 니체, 『도덕의 계보』, <제2논문 : '죄', '양심의 가책' 및 기타>, 제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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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02-21 2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니체 전집이 비싸서 낱권으로 사봐야 할 듯, 잘 읽고 가네요. 즐거운 밤 보내세요. *^

oren 2016-02-21 23:58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책을 미리 사서 쌓아두고 읽는 성격이 아니라서 기분이 내킬 때마다 한 권씩 따로 사서 읽고 있답니다. 특히나 전집류의 책들은 괜히 한꺼번에 사 놓으면 `저 많은 책들을 언제 다 읽을까` 싶어서 지레 주눅도 들고, 쳐다볼 때마다 한숨만 나올지도 모르니까요. ㅎㅎ

yamoo 2016-02-26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세상 니체 전집을 소장중이신거 같아요~ 전 너무 비싸서 구입을 못해고...결정적인 건 청하출판사에서 나온 니체 전집을 갖고 있는지라...왠지 구매하기가 거시기한 거 같아서요..청하본도 읽을만해서 걍 아직 구입안하고 있습니다만...

요즘 니체 전집을 열독중이신가 봅니다~ 니체에 대한 페이퍼나 리뷰가 기대가 됩니다!

oren 2016-02-26 14:38   좋아요 0 | URL
니체가 쓴 작품들은 모두 `책세상 전집`으로만 선택해서 읽고 있답니다. 그렇다고 전집을 다 가지고 있는 건 아니고요. 한 권씩 읽고 나서 그 다음에 읽기에 가장 알맞는 책을 고르는 식이지요. 책세상 전집 가운데 여태껏 겨우 세 권만 읽었을 뿐인데, 지금까지 읽은 순서는 나름 괜찮은 듯싶습니다.(『차라투스트라』---> 『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바그너의 경우.우상의 황혼.안티크리스트.이 사람을 보라.디오니소스 송가.니체 대 바그너』--->『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順으로 읽고 있답니다. 앞쪽의 세 권은 읽었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은 예전에 한번 읽었지만, 너무나 오래 전의 일이라 이번에 다시 읽어보려고요..)
 

 

"진실이라는 산맥을 타는 일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오늘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든지, 그렇지 않으면 내일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해 힘을 단련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 * *

 

니체가 쓴 문장들을 타고 넘는 일이 결코 쉬울 리는 없다. 어떤 문장들은 몇 번씩 다시 읽어야 겨우 그 뜻을 단지 겉으로나마 희미하게 파악할 수 있을 뿐인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마치 높은 산봉우리처럼 느껴지는 억세고 가파른 문장들을 만날 때면 온갖 근육들을 다 써보아도 그 문장들을 딛고 올라서기가 몹시 힘에 부친다. 니체가 아무런 고려도 없이 그저 독자들을 골탕먹일 속셈으로 그런 험로와 경사와 높이를 일부러 문장 속에 숨겨놓았을 리는 없다고 여기면서도, 어쨌든 그런 문장들을 따라 험준한 산맥을 넘어가듯이 낑낑거리며 힘든 산행을 하노라면, 숨이 너무나 가빠서 자주 헐떡거릴 뿐만 아니라 가끔씩 한숨마저 내쉴 때도 드물지 않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쓴 '몹시도 소화하기 힘든' 단단한 문장들을 만날 때마다 어쨌든 뒤로 물러서기 보다는 기어이 그걸 타고 넘어가 봄으로써 그 다음에 맞닥뜨릴 새로운 도전을 오히려 마음속으로 기다릴 때조차도 아예 없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의 문장들은 온갖 힘겨운 악전고투 끝에 가까스로 전망이 탁 트인 산마루를 올라선 느낌이 들 때마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땀으로 젖은 후줄근한 몸을 한순간에 식혀주는 듯한 상쾌한 휴식과 더불어 노고와 분투를 위무해 주는 듯한 따스한 격려마저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즐겁게 휴식을 취하면서 문득 방금 지나온 가파른 산길들을 되돌아보는 일만으로도 다시금 장차 새롭게 맞닥뜨릴 여정에 대한 부푼 기대와 도전 의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니체의 문장들은 읽을 수록 빠져드는 치명적인 매혹을 지니고 있다.

 

비록 때때로, 좀처럼 속살을 드러내지 않을 듯 단단한 껍질로 중무장한 호두를 깨트리기 위해, 벌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벌리고 어금니 사이에 그 열매를 무작정 들이밀 때를 연상케 하는 문장들을 만날 때도 있다. 호두를 깨트리기 위해 아무리 깨무는 데 쓰이는 턱근육들에 힘을 주어본들 그처럼 단단한 열매가 쉽사리 깨질 리는 없다. 니체의 문장들도 마찬가지다. 나약하게 자신의 껍질을 쉽사리 허물고 깊숙히 감춰둔 속살을 아무에게나 함부로 성급하게 내보이리라 기대하는 것부터 잘못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럴 땐 어금니에 맡길 게 아니라 차라리 망치라는 유용한 도구를 손에 들어야 마땅할 지도 모르겠다. 그저 이빨의 야만적인 힘만 믿고 어리석게도 억지로 힘으로 억누르고 깨물어서라도 껍질 속에 숨은 열매를 맛보기 위해 애를 쓰는 꼴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그렇게라도 시도해 보지 않고는 달리 도리가 없다. 아주 미약하게라도 내 이빨이 그 문장들의 표면에 약간의 자국이라도 낸 것처럼 느껴지기만 하면 나로서는 충분하다고 느낄 때조차 있다. 그렇게라도 해야만 어쨌든 다음 문장으로 꾸역꾸역 넘어갈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어쩌다 운이 좋을 때도 있다. 가끔씩이라도 단단한 껍질이 한순간에 와작 깨지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생기니까 말이다. 그럴때면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안도의 한숨부터 내쉬며 다시 발걸음을 앞으로 내딛는다. 끝없이 밀려오는 듯한 파도처럼 거세고 드높은 새로운 문장들과 또 싸워가며 어쨌든 앞으로 헤쳐나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득 힘겹게 지나온 길들을 한참이나 되돌아 가서, 그가 쓴 문장들을 다시금 살펴볼 때도 있는데, 그럴 땐 내가 처음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광경이나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들을 새롭게 만날 때도 있다. 그 문장들 속에 깊이 숨겨져 있던 오묘한 리듬과 심연처럼 깊은 의미를 새로이 발견하고나서 돌연 화득짝 놀라게 되는 느낌이 들곤 하는 것이다.

 

그가 어떤 철학자였던가. 그는 이미 열 살때 작시와 작곡에 손을 댈 만큼 일찍부터 비범했다. 열여덟 나이에는 벌써 <운명과 역사>라는 거창한 작품(?)을 마치 자신의 운명을 미리 내다보듯 줄줄 써내려갔을 정도였다. 음악에 대한 천부적인 재질과 더불어, 치밀한 분석능력과 인내를 요하는 고전어에 대한 놀라운 재능, 타고난 문학적 기질들을 두루 갖춘 그가 '루터 이후 가장 위대한 독일 언어의 천재'로 불리는 게 결코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싶다. 우리가 이런 평가에 선뜻 동의한다면, 니체는 '루터와 자신' 사이를 지나갔던 수많은 '독일 문학의 천재'들을 모조리 따돌린 셈이다. 심지어 자신이 아주 예외적으로 '보다 높은 인간들'로 칭송해 마지 않았던 극소수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괴테까지도!

 

그런데 우리는 기껏해야 그가 쓴 문장을 어렵사리 우리말로 번역한 문장밖에 접하지 못한다. 문체의 리듬뿐만 아니라 '문체의 속도'에 대해서까지도 놀라운 음악적 감각을 부여할 줄 알았던 그를, 단지 가까스로 번역된 우리말로 겨우 희미하게나마 해독할 능력밖에 없는 딱한 독자들에 대해서라면, 그도 틀림없이 그런 사정에 대해 몹시 안타깝고 슬픈 표정을 지었음에 틀림없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이러한 사정을 조금 더 쉽게 유추해보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그저 그가 '문체의 속도'에 대해 남겼던 다음의 말을 한번 슬쩍 엿보는 것만으로도 아마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문체의 속도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데 가장 어려운 것은 그 문체의 속도이다 : 문체의 속도라는 것은 종족의 성격에, 생리학적으로 말하자면, 그 종족의 '신진대사'의 평균 속도에 근거한다. 충실하게 그 뜻을 담고 있는 번역도, 본의 아니게 원전의 격조를 더럽힘으로써, 거의 위작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오로지 사물과 언어 속에 내재된 모든 위험한 것을 뛰어넘고, 뛰어넘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원전의 대담하고 경쾌한 속도가 함께 번역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2장> 자유정신, 제28절

 

이 독일 언어의 천재는 심지어 자신의 작품 속에 음악의 형식까지도 대담하게 도입했던 것이다. 자신의 작품 속에 '피날레Finale'와 '론도Rondo' 형식을 부여했던 것이다!

 

빠르고 거친 음악의 속도로

 

니체는 이 책의 문체에 대해 여러 곳에서 계속해 언급하고 있다. 그는 이 저서의 "문체는 격렬하며 자극적이고, 정교함이 가득하며, 탄력 있고 다양한 색채로 차 있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선악의 저편》의 서평을 쓴 비트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선악의 저편》이 섬세한 중립적 태도와 머뭇거리며 앞으로 전진하는 움직임"의 속도로 씌어졌다면, 《도덕의 계보》는 빠르고 거친 음악적 속도로 저술했음을 밝히고 있다. 빠르고 거친 속도로 기술함으로써 '어머어마한 긴장감'을 부여하고 있고, 마침내 번개가 치듯 "두꺼운 구름 사이에서 하나의 새로운 진리가 보이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덕의 계보의 마지막을 구성하는} 제3논문은 이와는 다소 다른 색조로 구성되어 있다. 즉 마지막을 장식하며 다시 반복되는 '피날레Finale'와 '론도Rondo'의 형식으로 더욱 대담하게 구성되어 있다고 니체는 말한다.

 

 - 니체,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해설> 중에서

 

니체의 문장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독특한 매력들을 온전히 맛보기 위해서는 근육이 충분히 발달된 튼튼한 팔다리뿐만 아니라 '눈과 귀' 또한 예민한 감각과 함꼐 충분히 열려 있어야 함을 거듭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와 더불어, 그의 문장들은 그저 한번 억지로라도 꾸역꾸역 힘겹게 읽고 넘어갔다고 해서 충분히 해독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번 느낀다. 어쨌든 그의 문장들을 따라 읽으려면 어쩔 수 없이 특별한 노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의 말대로 '근면성과 우직성'도 함께 갖춰야 하는 것이다. 어쨌든 거의 소가 되다시피 해야 한다!

 

『선악의 저편』을 다 읽고 나서 뒤딸린『도덕의 계보』로 곧장 넘어가지 않고, 다시금 도돌이표도 붙지 않은『선악의 저편』의 처음으로 되돌아가 그 책의 내용들을 힘겹게 필사하는 가운데, 저만치 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니체의 문장들' 가운데서 발견한 다음 문장은 어쨌든 나에겐 크나큰 '위로'가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소화가 덜 된 채로 억지로 집어삼켰던 문장들을 도로 끄집어내어 천천히 되새김질 하는 동안에 보다 부드럽게 잘근잘근 씹히는 걸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데, 마치 소처럼 우직하게 그의 문장들을 반추하는 독자를 향해 그가 이토록 놀라운 격려의 말을 미리 준비해 두고 있을 줄은 차마 몰랐다. 더군다나, 니체의 책을 읽다가 마음 속으로 '소가 된들 어떠리...'를 읊조릴 줄은 더더욱 몰랐다.

 

거의 소가 되다시피 해야 한다

 

만일 이 저서가 어떤 사람에게 이해하기 어렵고 귀에 거슬린다 해도, 그 책임이 반드시 내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먼저 이전의 내 저서들을 읽었고 이때 약간의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는 내 전제를 함께 전제한다면, 이 저서는 아주 분명하다 : 사실 이전의 나의 저서들은 그리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나의 '차라투스트라' 에 관해 말하자면,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때로는 깊이 상처받고 또 때로는 깊이 황홀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누구도 그 책에 통달한 자라고 나는 인정할 수 없다 : 이러한 경험을 한 후에야 그는 이 작품이 태어난 평온한 경지에, 그 태양빛 같은 밝음, 아득함, 드넓음, 확실함에 존경심을 지니고 참여하는 특권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경우 잠언 형식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 그것은 사람들이 이 형식을 충분히 진중하게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올바르게 새겨 넣으며 쏟아낸 잠언은 읽는다고 해도 '해독(解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제 비로소 그 해석이 시작되어야만 하며, 거기에는 해석의 기술이 필요하다. 이 경우 내가 '해석'이라 부르는 하나의 모범을 이 책 세 번째 논문에서 보였다 : ㅡ 이 논문의 맨 앞에는 하나의 잠언이 놓여 있으며, 논문 자체는 이에 대한 주석이다. 물론 이와 같이 읽는 기술을 연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오늘날에는 가장 잘 잊혀진 한 가지 일이 필요하다 ㅡ 이렇게 잊혀졌기 때문에 내 저서들을 읽을 수 있게 되기' 까지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ㅡ . 이 한 가지 일을 위해서 사람들은 거의 소가 되다시피 해야 하며 어느 경우에도 '현대인' 이 되어서는 안 된다 : 이는 되새김하는 것[反芻]을 말한다 ……

 

 - 니체, 『도덕의 계보』,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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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02-20 2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니체의 서문을 보니, 오만할정도로 자신감에 넘쳐 있네요. 니체의 원전을 언젠가는 혼자서 음미하는 것이 저의 소망입니다. 아직은 해석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니체의 시적 은유와 서사는 철학을 문학처럼 생각하게 만든는 독특한 매력이 있습니다. 아뭏든 서양철학사에서 중요한 철학이기도 하지만 가장 매력적인 철학이 니체의 철학이죠. *^

oren 2016-02-21 01:21   좋아요 0 | URL
니체는 오만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지극히 위험하기 때문에 더 매력적인 철학자라고 부르는 게 좀 더 정확하지 싶습니다. 사실 그로부터 망신이나 조롱을 당하지 않은 사람들은 손으로 꼽을 정도로 극히 드물었지요. 그에게 혼쭐이 났던 인물들은, 그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세 명의 유대인과 한 명의 유대인 여자(나자렛의 예수와 어부 베드로, 양탄자를 짜는 바울, 그리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가장 대표적인데, 그들 말고도 소크라테스, 플라톤, 칸트, 스피노자, 쇼펜하우어 등등 수많은 사람들이 칭송해 마지 않았던 철학자들도 니체의 비판을 피하지는 못했었지요. 그러니 `저 돌대가리`로 불렸던 존 스튜어트 밀을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가령 이 책에서만 하더라도, 베이컨, 홉스, 로크, 다윈, 허버트 스펜서, 칼라일, 빅토르 위고 등등)은 니체로부터 얼마나 호되게 당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을 만하지요. 사람뿐만 아니라 숱한 책들도 비판을 면치 못했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심한 조롱을 당한 책 또한 《성서》가 될 수밖에 없었지요.<누가복음>,<마태복음>,<로마서>,<요한복음>,<데살로니가전서> 등을 조목조목 빗대어 조롱한 대목들은 『도덕의 계보』 <제1논문>에서 상세히 다루어지고 있답니다.
* * *
ㅡ 그들에게 삶의 온갖 고통에 위로가 되는 것 ㅡ 미리 상정하는 미래의 축복의 환상을 그들은 어떻게 부르는가?
ㅡ ˝무엇이라고요? 내가 제대로 들은 것입니까? 그들은 그것을 `최후의 심판`, 그들 나라, 즉 `신의 나라`의 도래라고 부릅니다 ㅡ 그러나 그날이 오기까지는 그들은 `믿음 속에서`, `사랑 속에서`, `희망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ㅡ 충분하다! 충분하다!

- 『도덕의 계보』, <제1논문 : `선과 악`, `좋음과 나쁨`> 중에서

탕기 2016-02-21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ren 님의 말씀처럼, 니체는 소가 되어 묵묵히 밭을 가는 독자의 자세로 접근해야 하는, 어떤 외경의 영토에 있는 사람입니다. 무척 공감합니다. 가볍게 뛰어넘는 니체 관련 저서들을 보다가 그 책들을 던져버린 기억이 떠오르네요. 하물며 니체를 읽고 자랑질하는 사람들의 글은, 쳐다도 보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 고명섭 씨의 도움을 받고 있는데, 생을 한 번 들여다보고 예의 책들을 다시 읽어볼 참입니다. 그리고 어느 교수가 추천했던 것처럼 莊子를 읽고 카잔차키스를 읽어야겠고요. 미약한 머리로나마 지금껏 생각해온 니체의 위대함이란, 그 시작은 문헌학에서 철학으로의 전회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가서는 아무런 인용도 없이 광인처럼 말을 내뱉어 그걸 읽는 사람들을 뒤흔들었던 것일 테고요.
나이의 문제일 뿐이라고 위무해봅니다만, 솔직히 저는 아직 Oren님처럼 니체를 되새김질 하는 작업이 즐겁지만은 않습니다. 욕지기가 이는 때도 있는 걸요... 필사를 한 번 해볼까요? 저는 그다지 성실한 사람이 아니니, 모르겠습니다. 내공의 차이일 테지요. 오랜만에 니체에 관한 좋은 글 읽고 갑니다. 소가 배부르니, 다시 밭일을 하러 가야할 것 같습니다.^^

oren 2016-02-21 15:15   좋아요 0 | URL
탕기 님 반갑습니다^^ 저도 오래 전부터 니체의 책들을 틈날 때마다 조금씩 훔쳐볼 때가 있었는데, 그의 문장들이 너무나 격렬하고 힘찬 데 놀라서 `함부로 접근했다가는 큰 일 나겠다` 싶은 두려움과 외경을 느낀 적이 있었답니다. 마치 북한산 인수봉도 올라가 보지 못한 주제에 감히 히말라야의 눈 덮힌 고봉들을 쳐다본 심정이었다고나 할까요? 어쨌든 꾸역꾸역 다른 책들을 읽다가 뒤늦게 만난 니체는 확실히 예전보다는 덜 두렵더군요. 그의 책 속에서 예전에 이미 봐 왔던 친근한 인물들을 더러 만날 수 있어서 그런 느낌이 더하는 듯싶기도 합니다.

니체를 읽는 매력은 암튼 그의 문장 속에 깊숙하게 숨어 있는 `니체가 전달하고 싶어하는 온갖 함의들`을 재삼 발견해 내는 기쁨에 있지 싶은 생각도 듭니다. 그는 위대한 철학자들이 대개 그렇듯이 `인류의 천재들이 생산해 낸 온갖 위대한 문헌들`을 온통 거의 다 섭렵하다시피 했던 인물이니까요. 특히 저는 그가 고대 그리스 작가들의 온갖 작품들에 대한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심오한 깊이와 이해를 드러낼 때마다, 그에 대해 경이를 넘어 경외감으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되더군요.

암튼 탕기 님께서도 `쟁기를 깊이 박은` 농부가 부지런한 소를 앞세우며 몰고 가듯이, `재 너무 사레 긴 밭들을` 부지런히 갈아 엎기를 바랄께요~~

yamoo 2016-02-26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체의 속도가 콱 박히는 군요!
소가 되다시피 해야 한다노 인상깊어요~

니체를 읽고 싶단 생각이 듭니다...베르그손이 끝나면 니체를 읽어야 겠습니다!

oren 2016-02-26 14:46   좋아요 0 | URL
철학자들의 문장들이 어디 예사롭지 않은 경우가 과연 얼마나 있겠습니까만, 니체의 문장들 만큼 `절창`인 경우는 드물지 싶어요. 그의 문장들을 읽으면서 가끔씩은 다양한 상상을 해보기도 한답니다. `그가 지금 바로 내 옆에 앉아있다고, 혹은 서서 뜨거운 목소리로 소리 높여 외친다고` 그려보며 읽는다는 얘기이지요. 그렇게 상상하면서 읽을 때라야 겨우 희미하게나마 그의 문체의 속도나 높낮이를 조금은 느낄 수 있을테니까요.
 

 


모든 책이 다 독자들만큼 따분한 것은 아니다. 어떤 책에는 어쩌면 우리의 현 상황에 딱 들어맞는 말들이 들어 있을 가능성도 크다. 만약 우리가 이 말들을 정말로 듣고 이해할 수만 있다면 아침이나 봄보다 우리의 삶에 더 큰 활력을 줄 것이며, 우리에게 사물의 새로운 측면을 보여줄지 모른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한 권의 책을 읽고 자기 인생의 새로운 기원을 마련했던가! 우리의 기적들을 설명해주고 새로운 기적들을 계시해줄 책이 어쩌면 우리를 위하여 존재할 가능성은 크다. 지금 내가 말로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어느 책에 표현되어 있을지 모른다. 우리를 당혹하게 하고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며 우리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는 문제와 똑같은 문제들이 일찍이 모든 현명한 사람들에게도 제기되었다. 한 문제도 빠짐없이 말이다. 그리고 이들 현인들은 저마다 이 질문들에 대해 해답을 제시했다. 자기 능력에 따라, 또 자기 고유의 언어와 생활 방식으로.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 * *

 

나는 밑줄긋기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을 때마다 늘상 펜을 들고 밑줄을 그으며 책을 읽는 게 어느새 버릇이 되었다. 때때로 펜을 손에 쥘 수 없는 환경에서 책을 읽을라치면 마음 한구석이 조금 불편할 정도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책을 읽는 시간의 대부분을 펜과 함께 보낼 수 있는 형편에 놓여 있다. 펜조차 붙잡을 수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책을 읽는 경우는 좀체로 드물기 때문이다.

 

밑줄을 그으며 책을 읽는 습관이 붙은 게 언제부터였는지는 정확히 기억하기 어렵다. 되돌아 보면 나도 꽤 오랜 시간 동안 책을 무척이나 '아끼며' 읽었던 세월이 있었다. 책에다 밑줄을 긋는 일이 마치 책을 더럽히거나 학대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동안은 줄을 긋더라도 연필로 조심스레 밑줄을 그으며 책을 읽었다. 연필이 아닌 볼펜으로 밑줄을 긋더라도 극히 조심스럽게 책을 대했다. 그 증거가 바로 아래 사진이다.

 

(1978년에 초판으로 사서 읽었던『불확실성의 시대』라는 책이다. 고1때 산 책이 아직도 용케 내 수중에 있다.)

 

언제부턴가 책을 읽으면서 뭔가 좀 더 능동적인 책읽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책을 그토록 아끼며 읽는다고 해서 내게 무슨 특별한 보답이 따르는 것도 아니고, 내가 다 읽은 책을 남에게 팔 생각도 없는데, 굳이 내가 스스로 나서서 책을 읽은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애쓸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정적인 변화는 그 무엇보다도 인터넷 서재에서 글을 쓰게 되면서 자연스레 찾아왔다. 글이라는 하나의 건축물을 짓는 데 필요한 건축재료나 장식물로 쓰기 위해서라도 '밑줄'을 책 속에 뚜렷하게 새겨넣을 필요가 있었다.

 

책 속에 밑줄을 적극적으로 긋기 시작하자 차츰 거기에 더해 내 생각을 조금씩 덧붙여 써넣는 일도 자연스레 뒤따랐다. 어떨 땐 아예 책의 말미에 '책을 읽고 난 직후의 생생한 느낌'을 직접 써놓을 때도 있었다. 어떤 책을 읽든지 그 책을 끝까지 다 읽고 난 직후의 느낌이 가장 생생하기 마련인데, 그 느낌들을 따로 리뷰나 페이퍼로 쓸 때도 있었지만, 그런 작업을 차일피일 미루다 보면 어느새 '생생한 느낌'이 차츰 퇴색되고 변질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몰론 오래 전에는 이런 감상들을 기록하는 일들이 대부분 '독서 노트'를 통해서 이뤄졌었다. 책에서 발견한 인상적인 구절들도 마음껏 옮겨 적을 수 있고, 책을 읽는 동안에 수시로 떠오르는 온갖 느낌과 생각들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공간 가운데 '독서 노트'보다 더 좋은 곳은 없었다.

 

 

(2003년쯤부터 작정하고 쓴 독서노트들. 대학노트를 한꺼번에 마련한 덕분에 외관이 가지런한 편이다.)

 

 

(『몽테뉴 수상록』을 읽는 동안에 써내려간 독서노트. 단순히 옮겨 쓰는 일조차도 나는 즐겁다.)

 

 

(내 스스로 만들어 본 일종의 '색인 자료'다.『몽테뉴 수상록』에 담긴 내용을 인용할 때 요긴하게 쓰인다.)

 

 

(작년에 카프카의 『성』을 읽으며 끄적거렸던 내용이다. 언젠가는 꼭 '독후감'을 남기고 싶은 소설이다.)

 

 

 - 나는 '독서 노트'뿐만 아니라 다종다양한 '수첩'들도 평소에 애용하는 편이다. '기록'은 늘 중요하니까...

    저 수첩들도 나를 따라 많이도 돌아다녔다. '산행수첩'은 '백두산'은 물론 '히말라야'에 오르기도 했고,

   '여행수첩'은 이집트의 사막과 실크로드를 함께 다녀오기도 했다.

 

 

( '여행수첩' 속 내용이다. 이집트 여행때 기록했던 내용들이다. 이걸 펼치면 그때의 기억들이 확 되살아난다.)

 

 

(2009년 5월에 가족들과 함께 미국 동부와 캐나다 지방을 여행하는 동안에 기록했던 내용들이다.)

 

 

이렇게 옛날 일들을 돌이켜 보니 문득 내가 밑줄긋기에서 필사로 한걸음 더 내디딘 때가 생각난다. 그건 바로 '미국과 캐나다'를 여행하고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언젠가는 꼭 한번 읽어봐야지 하면서도 계속 미뤄두었던 『월든』을 그때 마침 읽기 시작했는데, 그만 그 책이 온통 나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나는 그 책을 읽는 동안 어느 한 페이지도 도무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온통 밑줄긋기와 '내 생각 써 넣기'로 가득 채우고야 말았다. 그토록 나를 매혹시킨 책이 언제 또 있었나 싶었다. 이 책은 결코 한 번 읽고 말 책도 아니고, 그저 밑줄긋기로만 그칠 책도 아님을 직감했다. 그래서 그 책을 다 읽은 직후에 곧장 그 책을 다시금 펼쳤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내 마음에 드는 대목을 중심으로 필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 증거가 바로 다음의 글이다.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무슨 일에든 첫 발을 내딛기가 힘든 법이다. 한 번 책을 베끼는 데 재미를 들이기 시작하자 도무지 겁날 게 없었다. 그 이후로는 어떤 종류의 책이든 내 마음에 쏙 드는 책만 만나면 '밑줄긋기' 뿐만 아니라 '필사'까지도 기어이 끝내야 직성이 풀렸다. 그런 책들을 읽을 땐 이미 '독서노트'에도 결코 적지 않은 분량을 옮겨 적는 일도 허다했는데 말이다. 필사를 하지 않으면 늘 뭔가가 허전했다. 그 책 속에 담긴 인상적인 대목들이 생각날 때마다 언제 어디서든 다시 찾아 읽기 위해서, 그리고 가끔씩 필요할 때마다 내가 원하는 대목들을 재빨리 '인용'하기 위해서는 '디지털화된 필사'가 최고였다. 그렇게 밑줄긋기와 함께 '필사까지 마친' 책들은 다음과 같다.

 

(『몽테뉴 수상록』은 1,33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필사'를 통해 큰 보람을 느낀 책이기도 하다.)

 

 

(『증권분석』은 초판본(832쪽)과 제3판(943쪽) 두 권 모두 필사했다. 저자에게 조금이라도 더 다가서고 싶었다. )

 

이들 말고도 내가 끊임없이 '필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책들도 있다. 그 책들을 필사하고 싶은 욕망과 새로운 책을 읽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갈등할 때도 적지 않았다. 이런 책들이 앞서 이미 필사를 마친 책들과 비교해서 어디 하나 뒤떨어지는 것도 아니었고, 그 책들이 나에게 감명을 덜 줬다고 말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에, 그런 책들을 베껴쓰는 일을 중도에 포기하기가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는 얘기다. 단지 그런 책들은 내 감정의 변화에 따라 늘상 오르내리기 마련인 필사의 열망에 때맞춰 부응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내 스스로 합리화할 때도 있다.

 

얼마나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하는지

 

어느 이름 모를 필사자는 8세기 어느 때인가 필사를 끝내면서 "얼마나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손가락 3개는 열심히 옮겨 적고, 두 눈은 끊임없이 보고, 혓바닥은 말을 하고, 온몸은 산고(産苦)를 치른다"고 적고 있다. 필사자들은 일을 할 때 자신이 옮겨 적는 단어를 하나하나 발음함으로써 혓바닥으로 말을 했던 것이다.

 

 - 알베르토 망겔, 『독서의 역사』

 

그런 책들 가운데 특히『돈키호테』는 내가 소설을 읽고 나서 처음으로 필사의 열망을 잠시나마 품었던 작품이다. 그만큼 감명 깊게 읽었고 기억해 둘 만한 놀라운 대목들도 정말 많이 만났었다. 하지만 필사하기엔 그 소설이 너무나 두꺼웠다. 다른 한편으로는, 나는 아직도 소설 보다는 다른 분야의 책들을 더 많이 필사하고 싶은 희망도 있었다. 내가 장차 소설을 쓸 일도 없는데, 소설 작품을 읽으면서 아무리 밑줄을 많이 그었다고 하더라도, 그 작품을 처음부터 다시 한 페이지씩 넘겨 가며서 고된 필사를 할 엄두를 내기도 힘들었다.

 

 

 

어쨌든 이제까지 필사를 마쳤거나 어느 정도로까지 필사를 진척시켰던 책들을 이번 기회에 한꺼번에 불러내 봤더니 그 책들의 분량이 결코 적지 않았다. 많은 시간들을 아낌없이 투자하며 필사를 하는 현장은 내 방 컴퓨터 책상 앞이다. 바로 그 위에 내가 필사한 책들을 쌓아 올리고 보니, 모니터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책의 두께가 불어났다.

 

(왼쪽 두 줄이 필사를 마친 책들이고 오른쪽 한 줄은 필사를 끝내지 못한 책들이다.)

 

저 책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가 '필사를 하는 동안에 느꼈던 힘들었던 순간들'이 떠오를 때도 없지 않지만, 도대체 저 책들이 언제 나한테 붙들려 와서 저런 고생을 하고 있나 싶은 측은한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저 책들이 내가 필요로 할 때면 아무 때나 끌려 나와, 나의 손가락의 움직임과 키보드의 동작과 모니터의 감시를 거쳐 통신선을 타고 저 멀리 어느 깊숙한 저장고 속으로 들어가 곤히 잠자고 있다가, 내가 어디서라도 부르기만 하면 순식간에 달려나올 준비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알베르토 망겔이 말했던 '전자 미로' 생각이 떠오른다. 망겔이 쓴 글이 언젠가 내 손가락의 힘에 의해 전자 미로에 붙잡혔다가 이렇게 여기서 다시 느닷없이 불려나와 민낯을 다 드러내 놓고 있는지를 저자는 아마도 새까맣게 모르고 있으리라.

 

끼르륵 끼르륵 낮은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전자 미로

 

내 경우를 말하면, 책을 읽다가 남기게 되는 해설이나 메모는 타인의 기억력을 대신해 주는 워드 프로세서에 보관한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자신만의 기억의 궁전을 떠돌며 인용구나 이름을 끌어낼 수 있었던 르네상스 시대의 학자처럼, 나도 화면 뒤편에서 끼르륵 끼르륵 낮은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전자 미로로 들어간다. 워드 프로세서의 기억력의 도움으로 나는 저 유명한 나의 선조들보다 더 정확하게(정확성이 중요하다면) 그리고 더 많은 양을(양이 가치있는 것이라면) 기억할 수 있지만, 수많은 해설 가운데서 중요도를 판단하고 결론을 도출하는 일은 여전히 내 몫으로 남아 있다.

 

 - 알베르토 망겔, 『독서의 역사』중에서

 

내가 이 글을 쓰는 동안에 '단체 사진'을 찍기 위해 잠시 불려나온 책들은 이제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거짓말이다, 그들은 벌써 제자리로 돌아갔다!) 어떤 책들은 예전에 TV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거긴 그저 아무런 벽도 없는 들판 같은 곳이어서 저 책들은 사람으로 말하자면 거의 노숙인 신세나 마찬가지다. 최근에 사들인 책일수록 그 책들은 내게 푸대접을 받는 셈이다. 저 책들을 볼 때마다 나는 항상 그들에게 미안하다.

 

 

 

오래 전부터 내게 사랑받았던 책들은 좀 더 확고한 자리를 차지한 채 물러날 줄 모른다. 나 또한 저런 책들을 달리 낯선 곳으로 옮길 생각이 별로 없다. 저들은 내 방에서도 터줏대감 노릇을 단단히 하고 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저 책들 가운데 내가 이 방에 들어앉은 15년 전 바로 그때 나와 함께 '동시 입주'를 했던 책들은 사실 별로 없다.

 

 

 

그러고 보니, 내가 그동안 거주지를 옮길 때마다 나와 함께 동행하면서 몇 차례씩이나 나와 '동시 입주'의 영광을 누렸던 '오래된 책들'은 이미 대부분 자리를 떠나고 없다. 그런 책들 가운데는 심지어 '대학교재'들도 있었다! 다시 들춰보지도 않을 책들을 내가 왜 그토록 오랫동안 질질 끌고 다녔는지 아직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몸소 펜으로 꾹꾹 눌러 쓴 '노트'들은 아직까지도 차마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차지하는 면적이라도 좁으니 아직은 넉넉히 봐줄 만하다. 그 옆자리가 바로 앞서 불려 나왔던 독서노트들이 늘상 머무는 곳이다.

 

 

방금 보았듯이, 나는 이런저런 책들을 읽는 동안 나름대로는 밑줄긋기를 꽤나 열심히 해왔다. 그와 동시에 독서노트도 열심히 쓰고, 마음에 쏙 드는 책들은 필사까지 해봤다. 그와 더불어 나는 이런저런 잡다한 글을 쓰면서 '여러 작가의 글'을 내 글 속에 직접 여러번 옮겨 보기도 했다. 그리고 가끔씩은 그 내용들을 한꺼번에 올려 놓느라 '밑줄긋기'로 도배를 하다시피 한 적도 많다. 이런 일들은 어쩌면 내가 지금보다 조금이나마 더 나은 글을 쓰기 위해 애쓰는 하나의 방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 본다. 그래서 나는 500쪽이나 혹은 1,0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책마저도 통째로 필사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물론 그토록 두터운 분량의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다 베낀다는 얘기는 아니다. 내가 판단하기로도 너무나 좋은 글들이고, 남들한테도 언젠가 한번쯤은 꼭 보여주고 싶은 욕심마저 드는, 그런 문장들만 고르고 골라서 베낀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렇게 애써왔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쓰는 글들은 언제나 저런 위대한 작품들 속에 담긴 글을 조금도 닮지 못한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류가 낳은 비범한 천재들이고 나는 기껏해야 수많은 둔재들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점을 나는 항상 인식한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앞으로도 '필사의 욕망'을 좀체로 버리지 못할 듯하다. 왜냐하면 내가 글을 쓰는 동안에, 비록 먼 발치에서나마, 저 위대한 천재들이 쓴 글의 향기나마 희미하게 맡으면서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이 나로선 너무나도 행복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좋은 글을 많이 읽고, 또 그들의 글을 많이 베껴쓰는 일이 '글쓰기'에 얼마쯤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함부로 부인하기는 어렵지 싶다. 그런데 좋은 글을 열심히 읽고 또 열심히 베껴 쓴다고 해서 내 몸에 벤 고약한 버릇까지 쉽게 고칠 수는 없다는 사실도 나는 차츰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런 퇴고도 없이 그냥 단번에 쭉 써내려간 글을 두 번째로 읽을 때에는 '무수히 얼굴을 붉히며' 다시 고쳐 쓴다. 수없이 반복된 동어반복은 그나마 고치기라도 쉽다. 만연체로 길게 늘어쓴 글들은 '주어'와 '술어'조차 서로 뒤영켜 있어서, 그들을 서로 온전히 분리해 내기가 몹시 힘들 때도 많다. 제대로 선택하지 못한 어휘들도 수두룩하다. 니체의 말대로 '언어 오류, 혼란스러운 비유, 불명료한 생략, 상스러운 언행, 부자연스러운 문체' 등이 가득하다. 물론 이런 표현들 조차도 내 글의 결함 가운데 아주 조금만을 말했을 뿐이다.

 

다시 읽을 때에는

 

내 작품은 내게 기쁨을 주기에는 너무나 모자라서 다시 음미해 볼수록 더욱 화만 치민다.

 

나는 다시 읽을 때에는 얼굴을 붉힌다.
왜냐하면 많은 문장이 작가인 내가 판단하기에도
마땅히 삭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비디우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중에서
 

 

내가 이렇게 '밑줄긋기'와 '필사'에 대해 기나긴 이야기를 늘어놓은 이유는 분명하다.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도 '책을 너무 아끼지만 말고' 과감하게 책 속에 밑줄을 긋고, 자신의 생각도 좀 적어보는 시도를 해보라는 권고를 하기 위해서다. 나는 책에다 밑줄을 긋고 내 생각들을 직접 책 속에 적어 넣는 일을 나이 사십이 넘도록 한 번도 제대로 해보지 못했다. 그게 무슨 큰 허물이 된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이왕이면 책을 좀 더 적극적이면서도 능동적으로 읽자는 얘기다. 물론 이미 오래 전부터 자신만의 훌륭한 방식으로 책을 읽는 분들껜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하겠지만...

 

끝으로, 내가 이 글 속에 많은 사진들을 포함시킨 건 물론 그 속에 담긴 책들에 대해 내가 깊은 애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내 책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베껴쓴 책들 이야기'를 하느라고 이 글을 이토록 길게 늘려간 일조차도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애정으로 떨리고 있는 증거'라고 말한다면, 그에 대해 딱히 달리 변명할 말은 없다. 다만, 이 글 속에서 혹시라도 나를 지나치게 평가하거나 경멸하는 모습들이 은연중에 숨어들었다면, 제발 그 부분만이라도 제대로 숨어서 제대로 드러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애정으로 떨리고 있는 증거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어리석게도 나는 내 책 이야기를 하느라고 내 책을 늘겨 간 것인가! 어리석고말고, 이와 같은 일을 하는 다른 자들을 두고 나도 똑같은 말을 한다. "그들이 자기 작품에 그렇게도 자주 곁눈질하는 것은 그들이 자기 작품을 위한 애정으로 떨리고 있는 증거이고, 자기 작품을 경멸하며 박대하는 것까지도 모정다운 뽐내는 애교에 지나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자기를 평가하거나 경멸하는 일은 흔히 똑같은 오만한 태도에서 나온다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할 이유만으로도 그렇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접힌 부분 펼치기 ▼

 

* 밑줄긋기와 필사를 함께 했던 책들. 

  예전에 찍어둔 사진도 있고 이 글을 쓰느라 새로 찍은 사진들도 있다.

  사진을 찍은 후에 내다버린 사진들은 조금이다. 많은 사진들을 이 글에 그대로 실었다.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560쪽)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676쪽)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712쪽)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900쪽)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1240쪽)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600쪽)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650쪽)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722쪽)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776쪽,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도 나오는 대목이다.)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810쪽)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838쪽)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918쪽)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956쪽)

 

 

(스티븐 핑커,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696쪽)

 

 

(스티븐 핑커,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768쪽)

 

 

(스티븐 핑커,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862쪽)

 

 

(스티븐 핑커, 『빈 서판』, 466쪽)

 

 

(스티븐 핑커, 『빈 서판』, 732쪽)

 

 

(찰스 다윈,  『종의 기원』, 462쪽)

 

 

(아담 스미스,  『국부론』, 322쪽)

 

 

(아담 스미스,  『국부론』1186쪽)

 

 

(케인즈,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238쪽)

 

(케인즈,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370쪽)

 

 

(벤저민 그레이엄, 『증권분석』초판, 390쪽)

 

 

(벤저민 그레이엄, 『증권분석』초판, 392쪽)

 

 

(벤저민 그레이엄, 『증권분석』초판, 546쪽)

 

 

(벤저민 그레이엄, 『증권분석』초판, 590쪽)

 

 

(벤저민 그레이엄, 『증권분석』초판, 614쪽)

 

 

(벤저민 그레이엄, 『증권분석』초판, 724쪽)

 

 

(벤저민 그레이엄, 『증권분석』제3판, 586쪽)

 

 

(벤저민 그레이엄, 『증권분석』제3판, 804쪽,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도 나오는 호라티우스의 <시론>)

 

 

(찰스 P. 킨들버거, 『광기, 패닉, 붕괴 금융위기의 역사』, 238쪽)

 

 

(찰스 P. 킨들버거, 『광기, 패닉, 붕괴 금융위기의 역사』, 272쪽)

 

 

(찰스 P. 킨들버거, 『광기, 패닉, 붕괴 금융위기의 역사』, 400쪽)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258쪽, 다른 책들에서 무수히 언급되었던 유명한 대목이다.)

 

 

(오비디우스,  『원전으로 읽는 변신 이야기』, <오르페우스와 에우뤼디케>, 460쪽)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528쪽)

 

 

(니체, 『비극의 탄생 · 반시대적 고찰』, 214쪽)

 

펼친 부분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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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6-02-01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빼곡한 독서노트!!!
적재적소에 맞는 고전 인용글은 이런 노트를 써 오신 힘이군요!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필사까지!

좋아요 100개 드리고 싶어요~~ㅎ
넘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oren 2016-02-01 16:52   좋아요 0 | URL
늘 성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과분한 `좋아요`도 잘 받겠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2-01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 진짜 야뮤 님 말씀처럼 좋아요 101개 드리고 싶은 글이군요..
서재 풍경에 감동하고, 필사 공책에 두 번 감동하고 갑니다..


저도 밑줄긋는 것이 버릇이 되어서 이제는 노란 색연필이 없으면 아예 읽기를 포기하는 상태에 이르기도 하고..
언젠가는 날이 좋아서 종로 밴치에 앉아서 책을 읽으려다 색연필이 없어서 모닝글로리 가서 산 후, 벤치에 앉아서 책을 읽은 적도 있습니다.


oren 2016-02-01 22:26   좋아요 0 | URL
곰발 님께서도 노란 색연필이 없으면 책 읽기가 불편하실 정도군요. 저도 충분히 공감이 가는 말씀입니다. 저도 가끔씩 전철이나 기차를 타면서 책을 읽을 때가 있는데, 어쩌다 하는 수 없이 서서 책을 읽어야 할 때조차 펜을 꺼내 밑줄을 그은 경험도 있었으니까요... 습관이 참 무섭긴 무서운 듯합니다.^^

cyrus 2016-02-01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꾸준한 노력과 인고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소중한 결과물은 마음껏 자랑해도 됩니다. ^^

oren 2016-02-01 22:34   좋아요 0 | URL
읽었던 책을 나중에 다시금 살필 때에는 `밑줄`조차도 아예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조금 더 반갑더군요. 물론 그보다는 책의 여백에 가끔씩 끄적거려 놓은 `그때 내가 떠올렸던 생각들`을 다시 들여다보는 게 훨씬 더 반갑고, 심지어 고마울 때조차도 있고요. cyrus 님께서 책들을 읽고 나서 꼬박꼬박 글로 남기시는 작업도 쌓이고 또 쌓이다 보면 먼 훗날엔 틀림없이 커다란 자산이 될 꺼라 믿습니다.^^

크사나 2016-02-02 08: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커다란 감동과 울림을 받고 갑니다. 정말 대단한 꾸준함이시네요!!

oren 2016-02-02 09:37   좋아요 1 | URL
크사나 님 안녕하세요? 크게 공감해 주시고 격려 말씀까지 남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붉은돼지 2016-02-02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좋아요 200개입니다.!!!!

어제는 정민의 <책벌레와 메모광>을 읽었는데요...여기도 필사와 메모 이야기가 많이나오더군요...사실 저도 책을 읽으면서 인상적인 구절, 의문나는 구절, 신기한 이야기 등등을 메모 좀 해두고 또 어떻게 분류를 잘해서 다음에 어디 써먹었으면 하는데 그 메모가 잘 안되더라구요....책 읽다가 중간에 노트 펼쳐서 적고 하는 것이 귀찮기도 하고요.. 더 나아가서는 메모를 어떻게 분류를 잘해서 필요한 것을 금방금방 찾을 수 있도록 해야하는데 그게 또 어렵기도하고......뭐 모두 제가 게으른 탓이죠 ㅜㅜ

oren 2016-02-02 16:27   좋아요 0 | URL
책 속에서 발견하는 문장들을 어디에 따로 메모하는 일도 쉽지 않은데, 나중에 메모한 내용들이 너무 쌓이다 보면 정작 필요한 내용을 재빨리 되찾기도 어려워지더라구요. 그래서 `밑줄긋기`를 하고 난 뒤에 틈틈이 페이퍼나 리뷰 형식으로 `밑줄긋기` 내용을 글로 따로 저장해 놓으면 좋더라구요. 서재에서 `검색 기능`이나 `태그 기능`을 활용하면 아주 빠르게 원하는 내용을 찾아낼 수 있으니까요. 붉은돼지 님께서도 나중에 언젠가는 `내가 진작에 그 문장을 좀 갈무리해 둘 걸~` 하고 느끼실 때가 틀림없이 찾아오리라 믿습니다~

2016-02-02 16: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02 17: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02 17: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02 17: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16-02-02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좋아요 300개입니다.^^

저는 예쁜 노트에만 마음이 가서 열심히 메모를 해놓고도 나중에 메모해둔 내용을 찾지 못할 때가 많은데, oren님의 노트를 보다보니 제가 메모도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네요. 필사노트랑 서재풍경 열심히 구경하고 갑니다.

<몽테뉴 수상록>과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어봐야겠다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가 완전 두꺼운 책이라는 얘기를 왜 안 해주셨나요?
oren님에게는 보통 두께일지 모르나, 저에게는 1년 프로젝트급이예요. T.T


oren 2016-02-02 17:36   좋아요 0 | URL
아이고.. 페이퍼 하나 쓰고 이렇게나 많은 `좋아요`를 한꺼번에 받아보기는 이번이 처음인 듯싶네요..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는 스티븐 핑커의 마음 3부작(<빈서판>이 2부,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가 3부) 가운데 가장 쉬운 책이어서 `두께` 때문에 너무 겁을 내실 필요는 없는 책이랍니다. 저 책 한 권을 다 읽으시는 동안 정말 여러 권의 책을 한꺼번에 두루 읽는 듯한 독특한 성취감도 맛보실 수도 있고, 나중엔 오히려 `두께` 때문에 더 뿌듯하실 수도 있답니다.

비로그인 2016-02-13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하고 비슷한 독서 습관이네요. 책 속에 메모하기, 독서 노트에 필사하기, 밑줄 긋기 등, 저보다 더 철저하게 책을 읽고 있군요. 칸트나 헤겔 등의 천재들도 고전들을 암송하기 위해 필사를 했다고 합니다. 독서 노트에 필사하는 것 뿐만 아니라 좋은 문장이나 경전의 내용등을 암송을 했다고 하네요. oren 님도 천재들과 같은 노력을 하신다면 훌륭한 작가가 될 수도 있겠죠. 그러니 힘내세요. 홧팅! *^^

oren 2016-02-15 00:11   좋아요 0 | URL
배익화 시인님 반갑습니다. 시인님께서도 저랑 비슷한 독서 습관을 갖고 계시다니 무척이나 반갑습니다.

저는 훌륭한 작가가 되고 싶은 생각은 따로 품어본 적이 없는데, 책을 읽으면서 만나게 되는 좋은 구절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든 제 걸로 만들고 싶은 욕심만은 억누르기 어렵더군요. 좋은 문장들을 작가처럼 똑같이 따라서 써 보는 일만 해도 즐겁고, 또 나중에 그 문장들이 우연히 다시 떠오를 때 언제라도 그 문장들을 내 앞으로 다시 불러올 수 있다는 것도 즐겁고요. 격려의 댓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가을벚꽃 2016-03-11 13: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서재의 메인 글을 보고 들어왔네요. 읽다보니... 독서와 함께 살아 온 삶이 느껴지네요. 저는 필사는 하지 않지만, 책 속표지나 여백에 그 책을 읽으며 매순간 느꼈던 감상들을 적다보니, 그 책만이 가지는 새로운 가치를 느끼더라구요. 점점 디지털화 되어가는 문화 속에서 너무나 소중한 것들을 간직하고 계시네요. 자녀들에게 가보로 물려 주어도 좋겠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oren 2016-03-11 15:50   좋아요 0 | URL
가을남자 님 반갑습니다.^^ 님께서 `책의 여백에다 적어 둔다`고 말씀하신 바로 그 내용을 <몽테뉴 수상록>에서도 발견한 적이 있답니다. 글쎄, 인간이란 얼마나 자주, 쉽게, 빨리, `망각`과 손을 맞잡던지요... 윗 글에서도 이미 밝혀놓았지만, 제가 16년째 눌러 살고 있는 `제 방`으로 이사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책`은 저랑 그리 가깝게 지내는 사이가 아니었답니다. 무엇보다도 `알라딘`에 둥지를 트면서 `독서에 대한 자극`을 많이 받았던 듯해요. 어쨌든 `남에게 통해주지 않으면` 재미가 덜한 법이니까요. 그게 독서든, 여행이든, 혹은 다른 그 무엇이든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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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갈 친구가 없으면

어떠한 쾌락도 남에게 통해 주지 않으면 내게는 멋이 없다. 마음속에 아무리 좋은 생각이 난다고 해도, 그것을 나 혼자 지어냈고 아무에게도 말해 줄 사람이 없다면 화가 난다. ˝예지를 누구에게도 전하지 않고 자기 혼자만 가진다는 조건으로 하기라면, 나는 그것을 거절하겠다.˝(세네카) 또 한 사람은 그것을 더 심한 어조로 말하였다. ˝만일 한 현자가 모든 필요한 사건들을 풍부하게 받아들이고, 그가 알아 둘 가치 있는 사항을 자유로이 관찰하며 한가롭고 여유있게 연구하는 생활을 가졌다면, 그리고도 외롭고 쓸쓸함이 어느 인간도 결코 만나 볼 수 없을 정도라면 그는 인생에서 물러날 일이다.˝(키케로) 아르키타스의 말에, 그가 하늘나라에 가서 저 광대하고 거룩한 천체들 속을 산택한다고 해도 같이 갈 친구가 없으면 불쾌할 것이라고 한 말은 내 성미에 맞는다. 그러나 어색하고 서투른 동행과 여행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혼자서 하는 편이 낫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중에서

시이소오 2016-03-12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렌님은 알라딘에서 꽤 오랜 터줏대감님이시군요.
새내기라 몰라 뵈서 죄송합니다. 꾸벅.
부디 좋은 가르침 달게 받겠습니다. ^^

oren 2016-03-12 00:59   좋아요 1 | URL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2003년에 `회원가입`하고 나서 어쩌다 리뷰를 듬성듬성 올리긴 했지만, 꽤 여러 해에 걸쳐서, 해마다 `장기 외출`이 잦았더랬습니다. 1년에 6개월씩 혹은 10개월씩이나 단 한 번도 알라딘에는 `접속`조차 않고 지낼 때도 많았으니까요. 제가 생각해도 너무 빈번하다 싶을 정도로 자주 접속하게 된 건 요 근래 몇 년 동안입니다... ㅎㅎ

카스피 2016-04-02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서가속의 책들을 보면서 oren님의 내공을 다시한번 느끼에 되네요@.@

oren 2016-04-04 16:57   좋아요 0 | URL
책들을 빼곡히(?) 꽂아둔 서가는 늘상 `외관`이 `실제`보다 훨씬 더 그럴 듯하게 느껴지는 `묘한 착각`을 불러오는 경향이 있는 듯합니다. ㅎㅎ

페크pek0501 2018-11-24 17: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렌 님이 독서광인 건 진작부터 알았고 필사왕인 것도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필사왕일 줄이야... 깜놀~ 깜놀~ 감탄~ 감탄~.
저도 오래된 필사 노트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오렌 님과는 비교가 안 될 꽤 적은 양입니다. 볼펜으로 꾹꾹 눌러 썼지요.
그것도 딱딱한 의자에 앉아서. 한 번 앉으면 소변 보러 화장실에 갈 때까지 안 일어났어요. ... 꽤 열정적인 시간이었죠.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노력을 거의 안 하고 살고 있어요. 게으름을 사랑하게 되었거든요.ㅋ
이 페이퍼를 보니깐 다시 필사를 하고 싶은 마음이 팍팍 듭니다. 그런데 팔이 아파 볼펜보다는 노트북이 좋겠어요.
노트북으로 에이포 용지 한 장씩 매일 필사 한다면 1년 후면 그것도 꽤 많은 양이 될 것 같아 희망적으로 생각해 봅니다.
필사할 글은 많습니다. 밑줄을 그은 책이 많아서요. 나중에 잘 완성되면 저도 페이퍼를 올려 보겠습니다.

오렌 님의 페이퍼를 보고 구입한 책도 많습니다. 대표적인 책으로 <도덕감정론>이 있지요. 이 책 속 문장을 인용해 페이퍼를 쓴 것도 기억 납니다.

좋은 메시지를 주는 글, 잘 보고 갑니다. 저에게 앞으로 노트북으로 필사하는 새로운 습관이 생긴다면 님 덕분입니다.

oren 2018-11-24 19:03   좋아요 1 | URL
페크 님께서 밑줄을 그은 내용들을 하루 한 번씩 노트북에다 옮겨 적는다면, 1년, 3년, 5년 후에는 실로 어마어마한 분량이 축적되지 싶어요.^^ 저도 예전에는 주로 노트에다 옮겨 적었는데, 컴퓨터에 키보드를 두드려서 저장하기 시작하니까 그게 훨씬 좋더라구요. 가장 좋은 점은 무엇보다도 ‘언제, 어디서나, 신속하고도 정확하게‘ 그 내용들을 다시 꺼내 읽을 수 있고, 콕 집어서 검색할 수도 있고, 또 무엇보다도 글을 쓸 때 정확하게 인용할 수 있다는 점이더라고요. 분실할 염려도 거의 없고요. 디지털화되니까요.

아무쪼록 이번 기회에(?) ‘디지털 방식의 필사 작업‘에 재미를 붙여서, 멀지 않은 장래에 그 결실을 볼 수 있기를 학수고대하겠습니다.^^

핑크뮬리 2019-12-06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책을 읽다가 밑줄긋기하며 또는 필사하며 읽고 있는 독서 초보입니다.
요즘 어떤책을 읽으며, 눈물로 감동으로 이어지면서 무언가 작가에게 미안한 생각이 문득 스쳐서 책을 깨끗하게
보아야 하지 않나? 하는 마음이 생겼어요. 어떻게 나온 책일건데..
다른 분들은 어떻게들 읽고 있나? 검색해서 들어오게 됐는데 와~~^^독서 고수님ㅎㅎ
그리고 저 필사노트들 한꺼번에 같은걸로 하니 저리 깔끔하네여
저두 이제 같은 노트로다가,,,
소중한자료들 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oren 2019-12-06 15:10   좋아요 0 | URL
먼 데서 여기까지 찾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는 지금도 독서노트를 쓰고는 있지만, 그걸 다시 펼치는 경우는 드물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뒤부터 가급적 필사를 하는 편이랍니다.^^ 필사를 해서 디지털 저장장치에 옮겨 놓으면 분실 염려도 없을 뿐더러, 언제 어디서나 꺼내 쓸 수 있어서 여러모로 아주 유익하더군요. 아무쪼록 참고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멸치야 2020-09-24 13: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무 잘 보고갑니다.
아 너무 좋은 글이에요. 제가 정말 아끼며 보관하고있는 책들도 보여서 좋네요.

oren 2020-09-25 22:48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소울버그 2022-12-10 0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티븐 핑거의 책 독자평을 보다가 이 글을 읽게 되었는데, 좋은 책들이 참 많네요.
제가 최근에 관심있게 읽고 있는 진화, 철학 관련 서적이 눈에 띄어 반가운 마음이 듭니다..^^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1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에우리피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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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비극의 파괴자 에우리피데스는 또다른 흥미를 부른다. ˝『트로이아 여인들』은 전쟁의 영광을 모두 제거해 버렸고, 『메데이아』는 페미니스트 논문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는 인간과 초자연적 존재의 관계보다는 인간의 열정과 약점의 관계에 대하여 더 큰 관심을 보인다.˝(클리프턴 패디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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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루타르코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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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자신의 시대를 잘 보길 원한다면 멀리서 봐야 한다.˝고 말하며,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보는 것이 적당할까?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보이지 않을 정도의 거리면 족하다.˝고 자문자답했다. 1,585개에 달하는 꼼꼼한 각주는 이 책의 가치를 더 돋보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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