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내일이면 히말라야로 간다!

 

"등산가는 자신이 숙명적인 희생자가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산에 대한 숭앙을 거의 버리지 못한다."

 - 알버트 머메리(1855∼1895)

 

 * * *

 



 

 

 

 

 

 

 

 

 

 

 

영화 <히말라야>를 보면서 많이 울었다. 왜 산을 오르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아직도 여전히 많은 걸 보면 산을 찾는 마음을 이해하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란 생각도 든다. 삶의 전부를 걸고 히말라야의 험준한 고봉을 오르기 위해 애쓰는 산악인들의 심정을 보통 사람들이 가슴 깊이 공감하기란 더더욱 어려울지 모르겠다. 그래도 그런 산을 오르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은 앞으로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고? 산은 계속 '거기'에 있을 테니까.

 

세상에는 흔히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는 식의 이야기가 있다. 히말라야에 가 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얼마나 선명한 구분인가. 그런데 히말라야에 삶의 전부를 걸다시피 한 사람들에겐 이런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히말라야에서 살아서 돌아온 사람과 영영 돌아오지 못한 사람. 얼마나 서늘한 구분인가.

 

영화 <히말라야>는 '히말라야에서 영영 돌아오지 못한 산악인'을 다룬 영화다. 이런 이야기가 그리 낯설지는 않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산악인들이 오래 전부터 '거기'에 잠들어 있다. 이미 몇 달 전에 개봉되었던 외화 <에베레스트>도 스토리와 배경이 사뭇 비슷했다. 두 영화를 구분하는 가장 확연한 차이라면 한국인 전문 등반가와 외국인 아마추어 등반가를 다뤘다는 정도일 것이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먼저 봤던 <에베레스트>가 잠깐씩 오버랩되는 걸 억누르긴 어려웠다. 그러나 <히말라야>가 <에베레스트>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그 속에 우리와 함께 살았던 산악인들 사이에 존재했던 '목숨을 걸 만큼 진한 우정'이 깔려 있다는 점이다.

 

목숨이 위태로운 절체절명의 순간에 동료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극도로 위험한 시공간 속으로 온전히 내던지는 일은 얼마나 힘이 드는지, 동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나섰다가 영영 되돌아오지 못한 사람의 희생은 얼마나 숭고한지를 다시금 느꼈다. 예전부터 전해 들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여서 자연스레 영화에 몰입될 수밖에 없었다.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걸출한 산악인이자 살아 있는 전설인 '엄홍길 대장'이 숱하게 겪었을 엄혹한 상황들이 얼마만큼 절박하고 처절했을지 나는 그게 몹시 궁금했다. 그런데 영화는 곧장 비극 속으로 뛰어들진 않는다.

 

누구에게나 간절히 '되돌아 가고 싶은 아름다운 순간들'이 있기 마련이다. 엄홍길 대장과 박무택 대원이 만나고 서로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유쾌하면서도 부푼 희망으로 들떠 있었다. 박무택 대원이 히말라야 원정을 떠나기 위해 원치 않는 결별을 고했던 애인을 다시 만나고 결혼에 이르는 장면들은 그저 순애보처럼 밝기만 했다. 그러나 그런 시간들이 그리 멀지 않아 다가올 비극적 운명의 전주들이라는 점에서 그런 장면들조차 서글프게 느껴져 가슴이 더 아렸다.

 

박무택이 에베레스트에서 하산하다가 조난을 당해 행방조차 찾지 못하자 엄대장은 그의 시신이라도 찾아오기 위해 '휴먼 원정대'를 꾸린다. 그렇게 그들은 아무런 명예도 보상도 없고 슬픔만 더할 여정을 시작하지만 끝내 그를 '거기'에 묻고 산을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산을 사랑했던 산 사나이는 그곳에서 영원히 머무를 운명이었고, 살아 남은 사람들에겐 그의 무덤에 다가가는 일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나는 '아직은 살아 있는' 박무택 대원을 구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폭풍이 몰아치는 희박한 공기 속으로 홀연히 발걸음을 옮긴 백준호 대원의 용기와 희생에 큰 감동을 받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 부분이 제일 가슴 아팠다. 히말라야에 트레킹이라도 해 본 사람들은 얼마쯤이라도 알 수 있다. 산소가 평지의 절반도 안 되는 고산지대가 얼마나 견디기 힘들고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곳이라는 걸 말이다. 그래서 전문 산악인이 아닌 일반인들은 대략 5,000m ∼5,500m 정도를 오르는 게 보통이다. 그러니 거기서도 무려 3,000m씩이나 더 높은 8,000m 이상의 고봉들을 오르고 또 내려오기가 얼마나 힘겨울지는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나도 2년 전 봄에 히말라야 트레킹을 갔을 때 경험해 봤지만 보통 사람들은 해발 고도가 2,800m를 넘어서면서부터 '고산 증세'가 오기 시작하고, 4,500m를 넘어서면 그 증세가 훨씬 더 심해진다. 두통과 어지럼증과 메스꺼움과 호흡 곤란과 의식조차 흐릿해지는 지경에 이르고 자꾸만 땅바닥에 주저앉고 싶어진다. 불과 서너 걸음만 옮겨도 숨을 여러 차례 가쁘게 내쉬며 헉헉거릴 수밖에 없고 산소 부족으로 인한 두통과 심한 메스꺼움도 견디기 어렵다.그러니 무려 8,750m에 달하는 그곳에서 시신을 찾기 위해 온갖 어려움을 견디며 무려 77일 동안 사투를 벌이며 시신을 끝내 찾은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들을 이 땅으로 데려오려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던 셈이다.

 

이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온 뒤 나는 까마득한 옛날에 들었던 '실화'에 대해 궁굼한 게 몇 가지 있어서 인터넷을 뒤졌더니 놀랍게도 이번 영화에서 다룬 얘기가 이미 책으로도 나와 있었다. 책 속에 담긴 몇몇 대목들을 잠깐 살피는 것만으로도 그 당시의 비극적 상황들이 금세 되살아나 다시금 가슴이 아려온다.

 

엄홍길이 박무택의 조난 소식을 들은 것은 얄룽캉(8,505미터) 베이스캠프에서였다.
“뭐라고? 무택이가 어쨌다고”
그는 직직거리는 무전기를 터뜨릴 듯 움켜잡고 고래고래 악을 썼다.
“무택이가 정상 찍고 돌아오다가… 아무래도 조난당한 것 같습니다. 연락도 두절됐습니다.”
엄홍길은 이미 몇 번씩이나 확인한 사실을 묻고 또 물었다.
“무택이가? 나랑 같이 다니던 그 계명대 박무택이가”
엄홍길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조난 소식을 전해온 원정대장 배해동에게 도리어 벌컥 화를 내고 말았다.
“그럴 리 없어! 걘 조난당할 애가 아니야! 이건 뭐가 잘못된 거야!”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히말라야에서 영영 돌아오지 못한 많은 산악인들을 다시금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2년 전에 네팔 포카라의 '산악박물관'에 들렀을 때 뜻밖에 마주쳤던 고 박영석 대장과 강기석, 신동민 대원, 고미영 대장 등도 다시 생각났다.

 

접힌 부분 펼치기 ▼

 * 네팔 포카라 '산악박물관'에서 만난 히말라야의 영웅들

 

 - 세계 최초로 산악 그랜드슬램(히말라야 14좌, 3극점, 7대륙 최고봉 등정)을 달성한 박영석 대장.


 

 - 고미영 대장.
    2006년부터 히말라야 8000m급 고봉 등정에 나서 4년간 11좌를 등정하였으나,
    마지막으로 등정한 낭가파르밧에서 하산하던 중 '칼날능선'에서 실족하여 사망했다.



 - 박영석 대장,
   1989년 랑탕리룽(7,225m)에 최연소 원장대장으로 도전해 동계 세계최초 등반. 
   1991년에는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도전했으나 100m 추락후 이틀 동안 의식을 잃는 사고를 당함.
   2001년 K2 등정에 성공함으로써 한국인 최초 14좌 완등, 세계에서는 8번째 기록.
   2004년과 2005년 남극점과 북극점 정복에 성공하여 세계 최초의 '산악 그랜드 슬램' 달성.
   2011년 안나푸르나(8,091m) 남벽에 신루트 개척을 위해 나섰다가 강기석, 신동민 대원과 함께 실종.

 

펼친 부분 접기 ▲

 

인류가 최초로 해발 8,000m가 넘는 히말라야의 고봉에 올라선 역사는 불과 60여 년에 불과하다. 프랑스 원정대장 모리스 에르조그가 안나푸르나에 최초로 올라선 '역사적 그날' 보다 훨씬 더 까마득한 옛날인 1895년 6월에 그 당시로서는 아무도 넘보지 않았던 히말라야의 8,000m급 고봉인 낭가파르밧을 오르기 위해 인도의 봄베이로 떠난 사람이 바로 알버트 머메리였다. 그도 거기서 되돌아오지 못했다. 두차례의 등정 시도가 좌절된 이후 다른 루트를 찾아보기 위해 친구들과 헤어지고 난 그는 두 사람의 구르카 병사들을 이끌고 능선 저편으로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그가 쓴 산악문학의 명저인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의 서문에는 그가 낭가파르밧에서 부인에게 부친 편지도 실려있다.


"우리는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설령 낭가파르밧에서 실패한다 하더라도 이 거대한 봉우리를 보고, 훈자와 러시아 국경 저편에 있는 위대한 산들을 바라보았으니 후회는 조금도 없소."

 

그리스 비극을 깊이 탐구했던 독일 철학자 니체는『비극의 탄생』이라는 책의 어느 구절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인간의 가치는 자신의 경험에 영원성의 낙인을 찍을 수 있는 정도에 달려있다"고 말이다. 박무택 대원과 백장호 대원, 장민 대원은 히말라야에서 끝내 되돌아오지 못함으로써 살아남은 숱한 사람들에게 더더욱 큰 슬픔을 안겨줬지만 그들이 새긴 '영원성의 낙인'은 어쩌면 그만큼 더 깊게 각인되었는지도 모른다. 이 기회에 다시 한번 고개 숙여 그들의 명복을 빈다.

 

 

접힌 부분 펼치기 ▼

2013년 봄에 히말라야 트레킹을 나섰던 우리 일행은 정말 운이 좋았다. 단 한 번의 트레킹으로도 우린 많은 산악 영웅들을 만났다. 2010년 4월 '여성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m급 14좌를 완등한' 오은선 대장과는 우연히 '트레킹 코스'가 겹쳐 여러 차례 만났고, 귀국길에는 이번 영화에 등장하는 엄홍길 대장까지 만났기 때문이다. 그들의 초인적인 도전에 다시금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하고 싶다.

 

 - 우리 일행 가운데 막내였던 상준이는 셔츠를 내밀어 오은선 대장님의 멋진 사인을 받았다.

 

 

 - 우리 일행 모두와 함께 기념 촬영을 해주신 '오은선 대장님'

 

 - 네팔 카트만두 공항에서 같은 귀국편 비행기를 타게 된 '엄홍길 대장님'과 함께.


 

 - 엄홍길 대장님으로부터 받았던 싸인.

 

 

펼친 부분 접기 ▲

 

 * * *

 

 

 

 

 

 

 

 

 

 

 

 

 

 


댓글(6) 먼댓글(2)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저기 산이 있으니
    from 사의재(四宜齋) 2015-12-26 14:43 
    옛날에는 이해를 하지 못했다. 지금도 의문이다. 왜 그렇게 기를 쓰고 오르려고 하는지. 정말 죽기살기로 죽을똥 살똥 오르고 또 오른다. 정상을 정복한다고 해서 밥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쌀이 쏟아지는 것도 아니다. 뭐 협찬이나 스폰 이런 것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 때문에 오르는 산악인들은 단 한명도 없을 것이다. 흔히 말한다. 저기 산이 있으니 오를 수밖에. 산이 어디로 옮겨갈 수도 없고 인간의 마음 또한 바뀌지 않을 것이니 도리도리 있다없다? 없다.
  2. 아... 히말라야...
    from Value Investing 2018-10-17 23:50 
    "등산가는 자신이 숙명적인 희생자가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산에 대한 숭앙을 거의 버리지 못한다." - 알버트 머메리(1855∼1895) * * * 저 멀리 히말라야에서 또다시 비보가 날아들었다. 히말라야 구르자히말 베이스캠프 인근에서 원정 대원들과 현지 가이드를 포함해서 9명이 모두 시신으로 발견된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그나마 시신 수습은 신속하게 이뤄져 벌써 내일 새벽이면 한국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한다. 국내 최초로 무산소 히말라야 8000m급
 
 
슈샨보이 2015-12-23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봐야겠네요.

oren 2015-12-23 17:33   좋아요 0 | URL
몰입해서 보면 많이 슬픕니다. 어떤 이는 어깨를 들썩이며 계속 울더라구요....

재는재로 2015-12-23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주에보러가는데 많이슬픈가보네요

oren 2015-12-24 09:25   좋아요 0 | URL
제 뒷자리에 앉았던 초딩으로 보이는 꼬맹이의 반응도 재미있었습니다.
엄마·아빠랑 형이라 넷이서 영화를 보러 온 모양인데 시작할 때부터 쉴 새 없이 조잘거리더니 조용해지더군요.
나중에 영화가 끝나고 다들 `숙연한 분위기`였는데 그 꼬마가 아빠한테 자랑스레 말하더라구요.
˝아빠, 난 한 번도 안 울었따~˝
울지 않는 게 큰 자랑일 수도 있더라구요...

그랜드슬램 2017-05-31 0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을 극복한다는 것이 가장 힘들겠죠, 누구나 자신에게는 관대하니까요! 한걸음,한걸음이 만들어내는 인생이라는 기적, 박영석 대장이 가장 아쉬운 것 같아요. 진정한 산악인이자 자기 극복의 자유인인데 말이죠!

oren 2017-05-31 11:21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적‘이자 ‘친구‘가 나 자신인 듯해요. 박영석 대장은 ‘랑탕 계곡‘을 걷는 동안에도 많이 생각했답니다. 그의 발자취와 숨결이 ‘거기 높은 설봉 끝자락 어드메에라도‘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는 듯해서 말이지요....
 

 

어리석음과 지각의 혼란은 잠깐 가르쳐 주어서 될 일이 아니다. 이런 것을 교정하는 문제에는, 막 전투하려는 마당에 군대의 사기를 북돋워 달라고 재촉하던 자에게, "사람들은 훌륭한 연설 한마디로 당장에 용감해지거나 잘 싸우게 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좋은 노래를 듣고, 바로 음악가가 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라고 키로스가 대답한 말이 바로 적용된다. 그것은 미리 오래 두고 꾸준한 훈련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 몽테뉴

 

 * * *

 

 

지난 금요일 밤 음악 공연은 내겐 약간 혼란스러웠다. 제법 기대가 컸던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은 제대로 몰입이 되지 않았고, 뒤이어 연주된 교향곡 4번은 내 가슴에 격동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 '지각의 차이'가 두드러지게 달리 나타나는 분야가 '음악'이라고 하지만, 똑같은 사람이 듣는 음악도 불과 몇십 분을 사이에 두고 그렇게 크게 엇갈릴 수 있다는 사실이 영 믿어지지 않았다.

 

'자신'을 고찰하는 능력에 있어서는 뒤따를 자를 보지 못했던 몽테뉴가 한 말이 과연 맞았다.

 

지금의 나와 조금 전의 나는 확실히 둘이다.

 

이번 도이치 캄머필하모닉이 연주한 작품은 모두 슈만의 곡이었다. '슈만 집중 탐구 프로젝트'인 셈인데 <서곡, 스케르초와 피날레>, <피아노 협주곡 Op.54>와 <교향곡 4번>이 무대 위에 올려졌다. 나는 이 공연을 예매할 때부터 약간은 망설였다. 지휘자인 파보 예르비와 피아니스트 김선욱은 내게 낯설지 않았지만 도이치 캄머필하모닉과 슈만의 작품들은 당장 머리에 떠오르는 기억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파보 예르비는 이번에 여섯 번째로 내한했다고 한다. 나는 그가 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을 이끌고 왔던 2012년에 처음 만났다. 그 연주를 듣고 나는 단번에 그의 지휘에 매료되었다. 그 때 협연했던 힐러리 한의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연주도 좋았고, 특히 말러 5번 교향곡이 멋지게 마무리된 직후의 '감동의 도가니'를 잊지 못했다. 파보 예르비가 그런 관객들의 흥분을 보고 자신마저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곧바로 포디엄으로 뛰어올라가 오케스트라를 마구 휘저으면서 들려주었던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은 또 얼마나 마법처럼 순식간에 그 시공간을 아름답고 영롱하게 물들였던지 그 감동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하다. 그날 그 지휘자는 마치 내일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는 듯 앙코르 연주를 무려 세 번씩이나 들려줬고, 밤 11시가 넘도록 팬들을 위해 아낌없이 싸인을 남겨주고 돌아갔다. 그때부터 그는 언제나 내게 '팬들의 굳은 믿음'을 절대로 무너뜨릴 것 같지 않은 인물로 단단하게 각인되었다.

 

 

협연자로 나선 김선욱은 엊그제 세 번째로 만났다. 2010년 5월에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가 영국 필하모니아를 이끌고 내한했을 때 일산 아람음악당에서 처음 만났고, 그 해 늦가을에 '영국 진출 후 첫 전국투어 리사이틀' 첫날 공연때 아람음악당에서 두 번째로 만났다. 두 번 모두 좋았다. 첫 번째 인상은 이랬다. 이미 명성이 자자한, 먼 데서 오신 하얀 머리의 노신사, 자그마한 체구에 무척 나이가 든 모습으로 등장한 아쉬케나지는 얼굴에 묻어나는 온화한 미소가 이미 온 몸으로 다 퍼져나간 것처럼 첫느낌이 참 따스했다. 그래서 그만큼 더 대비되는 젊은이 김선욱도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새까만 머리에 하얗고 반듯하고 해맑은 얼굴이지만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미소는 찾아 보기 어렵고 어딘지 모르게 진지함만 계속 묻어나는 그 젊은 피아니스트는 늙은 지휘자와 그렇게 서로 묘한 대조를 이뤘다.

 

김선욱과 아쉬케나지를 난생 처음으로 만났던 내가 그날 들었던 음악은 그저 '정말 좋았었다'는 정도로만 요약될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이 들려줬던 음악보다는 그 두 사람의 대조적인 인상이 내게 훨씬 더 강렬하게 새겨졌음에 틀림없다. 그 때의 '감상'을 남겨둔 기록조차 없으니 그때의 나의 '음악적 지각'을 무엇으로 다시 불러올 수 있을 것이며 무엇으로 또 되짚어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 다만 김선욱을 두 번째로 만났을 때 들었던 베토벤의 '월광'은 정말 대단한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새롭다. 피아니스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볼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자리를 잡은 덕분이었다.

 

지난 18일 경기 고양시 고양아람누리 아람음악당. 다소 창백한 듯한 얼굴이었지만 그런 낯빛과는 상관없이 김선욱은 무섭게 베토벤 선율에 빠져들었다. 베토벤 3대 후기 소나타 중 걸작 30번으로 문을 연 뒤 베토벤 소나타 14번 '월광'으로 이어지면서 연주는 후끈 달아올랐다. 슈만의 '아라베스크'와 '크라이슬레리아나'에선 특유의 화려한 손놀림으로 관객을 빨아들였다. 앙코르곡으로 브람스 '인터메조', 슈베르트 '즉흥곡'을 선사하자 객석에선 환호가 터져나왔다. '영국 진출 후 첫 리사이틀 전국 투어' 첫 테이프를 끊은 이날 김선욱의 연주는 예상대로 유쾌했다. (2010.11.19 뉴스에서 발췌)

 

나는 이번 공연을 앞두고 따로 예습할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거푸 이어지는 송년 모임이 끝나고 밤 늦게 집에 돌아온 뒤에도 유튜브를 들락거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찾아낸 '슈만 피아노 협주곡 연주 실황' 가운데 최고는 당연히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연주였다. 그녀의 연주를 지난주에만 너댓번은 들었던 듯하다. 그녀는 이미 50년 전에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했던 사실조차 그녀를 수식하는 더 멋진 장식이 되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그녀는 '건반 위의 마녀'로 불리는 현존 최고의 피아니스트다.

 

 

 

 

 

 

 

 

 

 

 

 

 

 

 

 

그녀가 리카르도 샤이와 함께 연주한 슈만의 피아노협주곡은 '명연주 명음반'이 어떤 것인가를 눈과 귀로 확인시켜주는 일로 끝나지 않았다. 그동안 라디오를 통해 하나의 악장만 따로 떼어내서 들은 적은 많아도 이번처럼 한꺼번에 '협주곡 전곡 연주'를 그것도 여러 차례 반복해서 듣는 기회는 드물다. 이렇게 예습을 조금 열심히 하다 보면 아무리 귀가 어두워도 예전에 미처 듣지 못했던 '음악'들이 조금씩 새롭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내가 '슈만의 피아노협주곡'에 대해 좀 더 알아본 끝에 찾아낸 연주는 아주 젋은 여성 피아니스트 카티아 부니아티쉬빌리(Khatia Buniatishvili)였다. 마침 파보 예르비와 협연한 멋진 실황 영상이 곧바로 내 눈에 띄었던 것이다.

 

 

 

 

 

 

 

 

 

 

 

나는 '슈만 피아노 협주곡'을 틈틈이 듣다가 정말 뜻밖에도 이번 공연에서 실제로 만날 지휘자 파보 예르비까지 덤으로 만나는 행운까지 얻은 셈이었다. 좀 더 알고 보니 파보 예르비는 슈만에 대해서도 '교향곡 전곡 녹음'을 남겼을 정도로 이미 권위를 인정받는 인물이었다. 피아니스트인 김선욱 또한 베토벤에 훨씬 더 깊이 천착하는 듯하지만 '슈만'에 대해 소홀했던 것도 결코 아니었다.

 

2006년 리즈 콩쿠르 우승과 함께 런던으로 음악 무대를 옮긴 김선욱은 자신의 핵심 레퍼토리인 독일 피아니즘, 그 가운데 슈만 피아노 협주곡으로 필하모니아와 만난다. 전통적인 해석의 미덕과 구조와 디테일을 이끌어내는 감각적인 터치로 이미 무수한 수연을 남긴 김선욱이 준비한 비장의 카드가 기대된다.

김선욱은 이미 지난해 영국 레스터시티에서 필하모니아(지휘-아쉬케나지) 오케스트라와 같은 곡을 협연한 바 있으며, 한국 공연을 마친 다음달 8일에도 런던 로열 페스티벌홀에서 필하모니아와 같은 곡을 연주할 예정이다. (2010-04-05 뉴스에서 발췌)

 

5년 전에 내가 김선욱을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연주가 어떤 것이었나 하고 살펴보던 나는 방금 인용한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때 내가 아쉬케나지의 지휘와 김선욱의 연주로 들었던 협주곡이 바로 지금껏 내가 열심히 예습했고 또 이틀 전에 예술의 전당에서 들었던 바로 그 '슈만의 피아노협주곡'일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나는 2010년 봄날 저녁에 도대체 무슨 음악을 들었던 것일까. 귀는 닫고 그저 눈으로만 음악을 보았단 말인가. 5년 전에 나의 음악에 대한 지각이 그토록 둔감했다는 사실이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어쨌든 적잖은 예습, 지휘자와 피아니스트에 대한 한두 차례의 만남에도 불구하고 엊그제 내가 들었던 '슈만의 피아노협주곡'은 내게 좀처럼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몰입을 하기 위해 애를 쓸수록 피아노 연주와 오케스트라 연주가 서로 겉도는 느낌을 떨치기 어려웠다. 연주가 시작되는 처음부터 피아노 소리가 뭔가 둔탁하고 무미건조하게 들리는 듯하더니 그렇게 내 귀에 거슬리던 피아노 소리가 좀처럼 아름답게 바뀔 줄 몰랐다. 그렇다고 그들의 연주가 크게 잘못된 것 같지도 않았다. 김선욱은 연주가 끝나자 곧바로 지휘자와 뜨겁게 포옹할 정도로 자신의 연주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의 협연도 훌륭했음을 거듭 표시했다. 관객들의 박수도 적잖이 뜨거웠다. 비록 나만의 느낌일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아주 열광적이진 않은 듯했다. 예습때 내가 너무 아름다운 연주만 골라 들어서 나의 기대치가 너무 높았던 탓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다음 연주에 기대하는 수밖에...

 

인터미션이 끝난 후 시작된 '슈만 교향곡 4번'은 시작부터 달랐다. 캄머필하모닉이 지닌 소규모 오케스트라 편성에도 불구하고 슈만의 격정과 불안과 방황과 강렬한 열망들이 1악장 연주에서부터 거침없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클라리넷 독주는 당당하면서도 가득한 호소를 담아 매혹적인 소리를 맘껏 뽐냈고 다른 목관악기와 금관악기들의 호흡도 나무랄 데가 없었다. 현악 연주들은 조용히 그런 호소와 갈망들을 받쳐주면서 '어두운 날 새벽에 떠나는 먼 여정'을 차분히 예고해 주는 듯했다. 뒤이은 현악기들의 땅을 뒤흔드는 듯한 저음 연주들은 밝아오는 새아침에 길을 나서는 젊은이의 가슴 벅찬 요동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경쾌한 목관들과 현들이 주고 받는 지저귐은 새소리와 물소리로 변했고 금관의 힘찬 울림은 높은 산마루에 올라 가슴 벅찬 미래를 내다보는 젊은이의 포부를 그대로 표출하는 듯했다. 이따금씩 귓가를 스치는 감미로운 선율들은 금새 뜀박질을 재촉하는 듯한 거친 약동 속에 묻혔다. 내가 미리 예습할 때 느꼈던 '슈만의 격정들'이 캄머필하모닉을 통해서 고스란히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이번 예습때 가장 많이 들었던 레너드 번스타인의 연주)

 

첼로의 독주로 시작되는 2악장에선 꿈꾸는 듯한 아련한 그리움과 슬픈 이별이 가득하다. 그러다가도 애타는 절박한 그리움들이 다시 희망으로, 또다시 아름다운 옛 추억들로 되돌아가는 감정들이 수시로 교차한다. 무릇 어떤 사랑이든 결실을 맺기까지는 무수한 엇갈림과 만남과 이별이 교차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렇게 애잔한 악장이다.

 

네가 가까이 있으면 난 네가 두렵고 멀리 있으면 네가 그립다. 네가 달아나기라도 하면 나의 마음은 네게 끌리고, 네가 나를 찾기라도 하면 나 꼼짝을 할 수가 없다. 나 괴롭다. 그러나 너를 위해 내 어떤 괴로움을 마다했던가!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3악장에선 그런 연약하면서도 여린 감정들이 순식간에 모두 사라지면서 미래를 향한 뜨거운 열정과 벅찬 희망들로 다시 활활 불타오른다. 길고도 어두운 방황과 고뇌와 슬픔들은 저편으로 모두 사라지고 힘찬 미래만 남았다. 떨리는 가슴으로 맞이할 부푼 나날들과 충만한 기쁨들이 금세라도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질 듯하다.

 

마침내 4악장에 이르면 '이젠 됐다'는 감격과 환희가 한 순간에 터져나온다. 니체가 말한 대로 목표에 다다른 사람은 '어깨춤'을 추게 마련이다. 어떤 일이든 헤쳐 나갈 수 있다는 기분으로 뛸 듯이 기뻐하며 신나게 앞으로 내달리는 모습이다. 마치 온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쁨이 느껴진다.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다. 바로 작곡가 슈만이 그토록 오랫동안 꿈꿔왔던 '필생의 연인' 클라라와 마침내 완전한 부부로 맺어지는 환희가 그대로 느껴지는 악장이다. 종반에 다가서면서 숨가쁘게 고조되는 현악의 선율들과 곧이어 격렬하게 뒤흔드는 저음의 선율들은 곧바로 승리의 함성처럼 터져나오는 관악기들의 합주들과 곧장 하나로 뭉쳐 열광적인 클라이맥스로 격렬하게 마무리된다.

 

이제 내가 처음 꺼냈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나는 똑같은 작곡가가 쓴 작품을 똑같은 악단과 지휘자의 연주를 듣고도 그토록 크나큰 '음악적 지각의 차이'를 경험했다. 그리고 김선욱을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연주가 마침 이번에 내가 들은 바로 그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인 줄도 모른 채 '또다른 예습'에 열을 올렸다. 그래도 나는 이번에 경험한 지각의 혼란에 대해 나 자신을 심하게 책망하고 싶지는 않다. 어떤 음악이든 그걸 듣는 사람은 결국 그가 지닌 그릇만큼만 수용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러니 내가 이것은 빈 수레를 끌고 지나가듯 아무것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반면에 저것은 그릇에 다 담지 못할 정도로 철철 넘치도록 많이 받아냈다고 한들 그게 무슨 큰 허물이겠는가.

 

김선욱도 언젠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베토벤이 자신의 모든 생각을 꾹꾹 눌러 담았다면 슈만은 악보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래서 슈만은 연주자마다 너무나 독특한 해석이 나오는 것 같다. ‘슈만이 어때야 한다’는 정답은 없다. 나의 슈만은 나의 슈만일 뿐이다”라고 말이다.

 

고대 페르시아의 훌륭한 대왕이 말했듯이 누구든 훌륭한 연설 한마디로 당장에 용감해지거나 잘 싸우게 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리고 몽테뉴의 말대로 '어리석음과 지각의 혼란은 잠깐 가르쳐 주어서 될 일'이 결코 아니다. 그러니 오래 두고 꾸준한 훈련으로 차츰 더 가까이 다가설 수밖에... 이토록 부실한 '지각'으로 이렇게 어렵사리 쓰는 글 또한 그런 노력의 일환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음악을 잘 감상하기 위해 억지로 시계를 거꾸로 되돌릴 필요가 없다는 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그런 면에서 몽테뉴의 다음 말은 묘한 역설처럼 반갑게 들릴 때도 없지 않다.

 

나는 25세와 35세 때의 내 초상화를 가지고 있다. 나는 그것들을 지금의 것과 비교해 본다. 이미 몇 갑절이나 내가 아니게 되었던가!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 * *

 

 

 

 

 

 

 

 

 

 

 

접힌 부분 펼치기 ▼

 

* 덧붙임 

 

파보 예르비가 2012년 6월에 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을 이끌고 내한했을 때 힐러리 한과 협연했던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E Minor Op.64> 동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는 사실을 오늘에야 알았다. 그날 공연 이후 다시는 그 연주를 듣지 못했는데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차마 몰랐다. 다시 봐도 정말 좋은 연주였다 싶다. 지금까지 조회수는 무려 4,879,543... 

 

 

 

펼친 부분 접기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RINY 2015-12-21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날 점심때까지 멀쩡하다, 오후 들어 1년에 몇번 없는 강력한 위경련이 찾아와서 표를 놓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극찬하는 후기들을 보니 어찌나 배가 아픈지 모르겠습니다.

oren 2015-12-21 12:12   좋아요 0 | URL
그런 끔찍한 일도 생길 수 있군요. 얼마나 속이 쓰리고 배가 아팠을까요? 너무 안타깝습니다...
 

 

위대한 것을 계속 생존하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 즉 기념비적 역사의 저 어려운 횃불 경주가 그들에게서 벌어지리라고 누가 추측이나 했겠는가?

 

 - 니체, 『반시대적 고찰 』,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 중에서

 

 * * *


 

 

 

 

 

 

 

 

 

 

 

 

 

 

책을 읽다가 낯익은 인물들을 만나면 괜스레 반갑다. 그런 인물을 마주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장소에서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쑥 나타난 '낯익은 고대의 인물'을 다시 만날 때면 너무나 반가워 손이라도 덥석 마주잡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다. 그런데 가끔씩은 그런 인물이 그저 반갑기만 할 뿐,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 그를 잡아 이끌며 '커피라도 한 잔 하자'고 할 정도로 친근하게 다가설 만큼은 못 되는 인물들도 있다. 그런 인물들은 대개 내가 그동안 그의 '이름'만 자주 들었을 뿐, 여태까지도 그가 쓴 작품이나 그의 생애에 대해 한 번도 제대로 고찰해 보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귀에 익은 인물들을 수없이 마주쳐도 여전히 낯설기만 했던 경험을 가장 절실하게 느낀 때는 아마도 몽테뉴의 수상록을 맨처음으로 읽을 때였지 싶다. 그 책을 통해 만나는 인물들 가운데 우리에게 전혀 낯선 인물들은 의외로 드물다. 그처럼 비범한 인물의 입술에 자주 오르내리는 인물이 그보다도 덜 비범할 턱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몽테뉴를 처음 만난 때는 겨우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시점이었으니 그가 내세웠던 수많은 인물들의 '위대성'을 내가 어찌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있었겠냐 싶다. 익히 알려졌다시피 몽테뉴는 '인용의 대가'다. 그처럼 뛰어난 인용술을 나는 달리 어떤 인물이나 책에서도 결코 다시 발견할 수 있을 성싶지 않다.

 

 인용의 기술이란 것이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몽테뉴가 그 기술을 최고도로 보유하고 있는 것 같다. 이는, 몽테뉴 자신의 글과 인용이 어찌나 서로를 주해하고 서로를 비추고 서로를 보강해주는지, 그 인용 가운데 그 어떤 것도 들어내고 싶지 않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 이 기술은 특별히 감명 깊었던 문장들, 구절들, 대목들을 소리를 내서든 혹은 내지 않고서든 자주 외워야만 습득할 수 있다. 감히 말하자면 임기응변으로, 전날 혹은 그 순간 우연히 집어 든 책을 이리저리 뒤적이다가 맞닥뜨린 문장을 인용하면, 왠지 모르게 깁고 덧댄 천처럼, 천박한 장식처럼 드러난다.”

 - 발레리 라르보, 『성 히에로니무스의 가호 아래』

 

어쨌든 몽테뉴가 여기저기서 그토록 자주 끌어오는 인물들이 내겐 영 어색하게 다가왔다. 이제 막 대학에 들어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시골, 1980년 겨울'을 고전이나 몇 권 붙잡고 씨름하던 때이니 설사 내가 그런 인물들을 안다고 한들 얼마나 잘 알았겠는가 싶다. 몽테뉴는 마치 내게, 내 친구가 그의 이름을 너무나 자주 들먹여 그에 대해서라면 언젠가 한 번은 꼭 만나보고 싶은 정도가 된, 그렇지만 정작 그런 친구를 실제로는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그런 인물들을 내게 쉴 새 없이 소개해 주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 내가 그런 인물들에 대해 그저 마지 못해 알겠다는 듯 고개만 끄덕일 뿐, 언젠가 그런 인물들을 다시 만날 때가 되면 그들에게 힘차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요청하고 싶을 정도로 반길 줄은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처음으로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을 때 마주쳤던 여러 비범한 인물들 가운데 내게 가장 궁금했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키케로였다. 몽테뉴는 그 책에서 키케로를 정말 지치지도 않고 끊임없이 인용했는데 이상하게도 그의 심사가 한결같은 색조를 띤 적은 별로 없었던 듯하다. 어떨 땐 그 인물에 대해 극도로 칭송하지만 또 어느 땐 그 인물이 지녔던 흠결을 지나치게 부풀려 말하면서 그를 깎아내리기에 바쁜 모습마저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그런 키케로에게 우리가 온전히 다가서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듯하다. 키케로를 읽기 위해 나는 그가 쓴 변론집(『카틸리나 탄핵』,『아르키아스 변호』)까지도 읽는 용기를 내봤지만 그는 여전히 저만큼 멀찍이 떨어진 채로 서 있을 뿐 내게 그다지 친근한 눈길을 주지는 않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키케로의 변론이 담긴 그 책(동서문화사판)의 말미에는 친절하게도 역자가 쓴『키케로의 생애와 사상』이 무려 200쪽에 가까운 분량으로 실려 있어서 그를 이해하는데 적잖은 도움이 되었다. 그 해설만 읽어보더라도 그가 '로마 공화정 말기'뿐만 아니라 '서유럽 정신사'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알 수 있다. 아울러 그가 로마 공화정 시절 당대 최고의 정치가로 활약할 만큼 바쁜 일정 속에서도 저술에 얼마나 많은 정열을 쏟았는지도 살펴볼 수 있다. 어쨌든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서구의 지성사에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웠던 게 분명한 인물이다. 그는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면서 페트라르카와 마키아벨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특히 프랑스 계몽주의 시대엔 몽테스키외와 볼테르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그러다 보니 그의 영향이 마침내 프랑스 대혁명까지도 이어지게 되었단다. 이쯤에서 '키케로가 볼테르에게 끼친 영향'을 책을 통해 조금 더 자세히 살펴 보자.

 

볼테르

 

프랑스 계몽주의의 중심 '볼테르의 시대'와 18세기 중엽을 품위 있게 묘사하는 활동을 펼친 문필가 볼테르는 18세기에서 키케로의 최대 칭송자이다. '키케로 없는 볼테르는 생각할 수 없고, 또 볼테르 없는 키케로는 생각할 수 없다'(라마르틴). 볼테르는 특히 키케로의 작품들 가운데 철학 관련의 책들을 숙독했다. 《신들의 본성에 대하여》에서는 스토아파의 신의 섭리설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투스쿨룸에서의 대화》에서는 영혼이 불사(不死)인가 불사가 아닌가에 자극을 받았다. 볼테르는 통상의 해석과 달리 키케로가 혼은 죽어야 하는 것으로 역설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의무에 대하여》는 시대를 초월해 타당한 도덕의 서술로서 그 뒤 어떤 사람도 도달할 수 없는 이론과 학설로 절찬을 받고 있다. 볼테르는 키케로를 미신에 지나지 않는 실정 종교를 거부하는 자유사상가로 간주하고 있다. 또 카틸리나 사건을 둘러싼 키케로의 대처를, 이 프랑스 계몽기에 지나치다고 비난하는 저작이 몇 개 나타났는데 볼테르는 로마의 구제자로서 키케로를 옹호했다.

 

볼테르는 이신론자(理神論者)인데 이 사상을 그대로 책으로 펴내면 투옥되거나 추방될 위험이 있으므로, 키케로에게 보내는 메니우스의 편지ㅡ때마참 바티칸의 도서관에서 러시아의 후작이 발견해 그것을 볼테르가 러시아에서 프랑스어로 번역했다는 형식ㅡ라는 치장하에서 공개한 것도 알려져 있다. 또한 볼테르를 궁정으로 초청한 둑일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대왕도 대단한 키케로 팬이었다.

 

 - M.아우렐리우스/키케로, 『아우렐리우스 명상록/키케로 인생론』, 《키케로의 생애와 사상》중에서

 

그런데 이쯤에서 내게 문제가 되는 인물은 오히려 볼테르였다. 볼테르 또한 내게는 이름만 귀에 익을 뿐 한번도 그의 작품을 찾아 읽은 적이 없어서 '소문으로만 들어서 아는 인물'일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가 엄청난 작품들을 써낸 천재 작가였고 프랑스 계몽주의 시대를 이끈 대표적인 인물이라는 정도로만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정말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그는 84세까지 살았는데 평생 동안 수많은 비극작품을 써서 크게 성공했고 드높은 명성을 떨쳤다. 일찌기 24세 때 비극『오이디푸스』가 대성공을 거뒀고, 『햄릿』의 모작인『에리필』,『카이사르의 죽음』, 『메로페』,『오레스테스』, 『미노스의 법』등을 늙은 나이가 되도록 줄기차게 써냈다. 그의 창작열은 70대와 80대에 접어들고도 도무지 식을 줄 몰랐다. 그가 쓴 작품이 도대체 얼마나 많은지는 다음 인용문이 증명한다.

 

볼테르는 84세의 나이로 사망했을 때, 유럽 지성계의 왕관 없는 제왕이었고, 계몽 시대의 우뚝한 지도자였으며, 프랑스 혁명에 의해 붕괴된 구체제의 기반을 가장 맹렬하게 파괴한 자로 평가되었다. 극작가, 시인, 역사가, 이야기꾼, 재담가, 신문사 특파원, 논쟁가, 화려한 성격의 소유자 등으로 엄청난 명성을 거두었다. 그의 창작 능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는 1만 4천 통의 편지와, 2천 건 이상의 책과 팸플릿을 남겼다. 하지만 사흘 만에 써냈다는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농담의 책으로 유명하다. 그가 써낸 무수한 냉소적 작품들도 이 단 한 편의 아이러니를 당하지 못한다.

 

『캉디드』는 후대의 소설들이 즐겨 취하는 성장 소설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가령 『적과 흑』도 성장소설이며 『마의 산』은 좀 더 심화되고 확대된 형태의 성장소설이다. 캉디드가 받은 교육은 아주 폭력적인 것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볼테르가 내린 결론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결코 최선이라고 볼 수 없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일은 "우리의 정원을 가꾸는 것"이다.

 

독자들은 이 위악적인 아이러니가 넘치는 걸작을 읽고서 볼테르가 조롱의 대가였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는 버나드 쇼처럼 재치가 넘치지만 동시에 쇼처럼 인간의 정신의 해방을 위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용감하게 싸우는 전사였다.

 

 - 클리프턴 패디먼, 『평생독서계획』중에서

 

방금 확인했듯이 그는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히는『캉디드, 혹은 낙관주의』라는 작품을 '사흘 만에 써냈다'고 한다. 정말 대단한 인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의 책 속에서 내게 '낯익은 인물들'을 불쑥 다시 만난 건 정말 뜻밖이었다. 더군다나 그런 인물들을 볼테르의 안내에 따라 전세계를 다 돌아다니다시피 하다가 무려 이탈리아의 베네치아까지 이끌려가서 만난 건 더욱 놀라웠다. 어느 누가 그토록 아름다운 섬에서, 볼테르의 말에 따르면 그토록 고리타분한 인물들을 만날 지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더군다나 '키케로 없는 볼테르는 생각할 수 없고, 또 볼테르 없는 키케로는 생각할 수 없다'는 평가를 받는 바로 그 사람으로부터 '키케로'에 대한 혹독한 인물평까지 들을 줄이야...

 

비록 볼테르는『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에서 인류를 빛낸 위대한 작가들을 그다운 솜씨로 거침없이 깎아내렸지만 그의 말엔 '고전을 경멸하는 듯한 인물들에 대한 우회적인 공격'을 포함하는 '묘한 아이러니'가 깔려 있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가 짐짓 칭찬하는 듯하다가도 결국 '자신의 취향'이 아님을 내비친 호라티우스만 해도 그렇다. 그는 무려 78세 때『호라티우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작품을 썼을 정도로 그에 대한 열렬한 애독자였다.

 

후세 사람들로부터 '볼테르의 고백록'이라 불릴 만큼 작가 개인이 실제로 겪은 경험담이 다채롭게 녹아 있는 작품이 바로『캉디드, 혹은 낙관주의』다. 이 작품 속 주인공인 사생아 캉디드는 영주의 딸 '퀴네공드'를 사랑한 죄로 하루 아침에 '엉덩이를 발길로 차여' 툰더텐트론크 성에서 내쫓긴다. 그때부터 그는 '성 안에서' 가정교사이자 철학자 팡글로스 선생님으로부터 배웠던 '순진무구한 낙관주의'가 어딘지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어리석은 철학임을 차츰 깨닫게 된다. 그러나 캉디드의 '인생유전'을 통해 불합리와 부조리로 가득찬 세상을 풍자하는 볼테르의 이야기는 묘하게도 그리 과격하게 들리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늘 '어린아이 같은 캉디드의 어깨 너머로 독자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내면서'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을 읽을 때 우리가 볼테르 특유의 아이러니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면 그만큼 그의 작품을 읽는 묘미도 반감될 수밖에 없다. 볼테르가 '키케로'를 포함해서 우리의 귀에 익숙한 인물들에 대해 늘어놓은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농담'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짓자.

 

그들은 식탁에 앉았다. 훌륭한 식사가 끝나자 그들은 서재로 들어갔다. 캉디드는 멋진 장정을 한 호메로스의 저서를 보고 주인의 높은 취향을 찬양했다.

 

「이게 바로 독일 최고의 철학자 팡글로스 박사가 그렇게도 좋아하던 책입니다.」

 

그러자 포코쿠란테가 쌀쌀맞게 말했다.

 

「나는 그 책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모두들 그 책이 재미있다고 해서 나도 예전에는 그런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모든 것이 너무도 지루했습니다. 전투장면은 다 비슷비슷하고 게다가 그런 장면이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여러 신들이 계속 개입을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결정적 역할도 못하지요. 헬레네는 전쟁의 원인이기는 하지만 작품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지요. 게다가 모두들 계속 트로이를 포위 공격하지만 함락시키지도 못하지요. 나는 학자들에게 그들도 나처럼 이 책이 지루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진실한 사람들은 모두 내게 솔직하게 대답하더군요. 너무 지겨워 책을 덮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고대의 걸작이니까 서재에는 꼭 갖춰 놓아야 한다고 말이지요. 내다 팔 수 없는 녹슨 메달처럼 말입니다.」

 

「각하께서는 베르길리우스에 대해서는 그리 생각하지 않으시겠지요?」

 

캉디드가 물었다.

 

「물론 『아이네이스』의 제2, 4, 6권은 뛰어납니다. 그러나 독실한 주인공 아이네아스와 힘센 클로안투스, 충실한 친구 아카테스, 키 작은 아스카니우스, 어리석은 라티누스 왕, 속물인 아마타 왕후, 그리고 개성 없는 라비니아 공주와 같은 인물들은 정말이지 너무도 무미건조하고 불쾌합니다. 그보다는 타소가 나아요. 심지어는 아리오스토의 지루한 이야기도 그보다는 나을 겁니다.」

 

「의원님, 호라티우스를 감명 깊게 읽으셨는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그의 격언들은 꽤 괜찮아요. 사교계 인사가 참고할 만해요. 힘찬 시구로 압축되어 있어서 기억하기도 쉽고. 하지만 브룬두시움 여행기나 형편없는 식사에 대한 묘사나 푸필루스인가 뭔가 하는 작자와 또 다른 한 작자 사이에 오간 상스러운 말다툼은 시원찮더군요. 호라티우스의 표현대로 푸필루스의 말은 <상스러운 독설로 가득 차> 있고, 상대편의 말은 <식초에 절인> 것 같더구먼요. ······ 어리석은 자들은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라면 무엇이든지 높게 평가하죠. 하지만 내 독서는 나만을 위한 것이고 그래서 나는 내 취향에 맞는 것만 좋아합니다.

 

절대로 자기 스스로 판단을 내려서는 안 된다고 배워온 캉디드는 이 말을 듣고 매우 놀랐다. 그러나 마르틴은 포코쿠란테의 사고방식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계속해서 서가를 살펴보던 캉디드가 탄성을 질렀다.

 

「아! 여기 키케로의 책이 있네요. 이 위대한 인물의 작품은 암만 읽어도 안 질리시지요?」

 

그 사람 책은 절대 안 읽어요. 그 사람이 라비리우스나 클루엔티우스를 위해 변호한 것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내가 판결해야 할 소송만 해도 너무 많아요. 그 사람의 철학책에는 좀 관심을 가졌어요. 하지만 그가 모든 것에 대해 회의한다는 것을 안 뒤로 그것도 그만두었어요. 그것에 대해서는 나도 그 사람만큼은 알고 있거든요. 무지를 알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필요는 없는 거니까.」

 

 

 

 

 

 

 

 

 

 

 

 

 

 

 

 

 

 

 

 

 

 

 

 

 

 

 

 

 

 * * *

 

몽테뉴에 대한 추억......

키케로는 왜 몽테뉴에게 밉보였을까?

『키케로의 의무론』에 대하여...

『일리아스』와『오뒷세이아』에 관한 기나긴 이야기

트로이아 전쟁과 헬레네의 행방을 둘러싼 이야기

최초의 로마인의 인생 역정을 다룬 로마 건국 신화

 


댓글(0) 먼댓글(1)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우리는 도대체 언제쯤 이런 연설을 들을 수 있을까?
    from Value Investing 2016-11-03 11:23 
    이게 나라냐 싶은 생각을 잠시라도 떨치기 어려울 정도로 참담한 나날의 연속이다. 책 조차 읽기 싫을 정도로 도무지 뉴스에서 눈을 떼기 어렵다. 어렵사리 옛 고전을 뒤적거리다가 결국 '고대 로마시대의 명연설문'에 이르러서야 겨우 글줄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해서 다시금 만난 글이 로마 공화정 말기 최고의 웅변가인 키케로의 '카틸리나 탄핵' 연설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키케로의 연설이 행해졌던 날로부터 무려 2,000년도 더 시간이 흘렀는데도
 
 
 
다시『월든』을 만날 시간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자신이 이 과정에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만일 네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심연도 네 안으로 들어가 너를 들여다본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4장 <잠언과 간주곡> 중에서

 

 * * *

 

 

 

 

 

 

 

 

 

 

 

 

 

 

내가 이 소설을 만난 건 대략 31년 전쯤이다. 물론 그 때 내가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받았던 대단한 감동은 오랜 세월 탓에 그저 희뿌연 안개 너머로 보이는 풍경처럼 어슴푸레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니 내가 이 걸작에 대해 느꼈던 감정들과 소설의 줄거리들을 다시 되살려 여기에 내놓는다는 건 몹시도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왜 나는 지금 이 거대한 소설을 두고 턱없이 무모한 글쓰기에 나서게 되었을까? 그건 언젠가 한번은 그 멋진 소설을 다시금 읽어보고 싶은 강렬한 열망이 희미하게나마 내 마음 속에서 계속 이어져왔던 때문이고, 그 느낌이 어젯밤에 느닷없이 보게 된 영화 〈하트 오브 더 씨〉때문에 마침내 수면 위로 불쑥 솟아올랐기 때문이리라. 그랬다. 어젯밤에 내가 본 영화 속에는 거대한 흰 고래뿐만 아니라 <모비딕>이라는 그 유명한 소설을 쓴 '허먼 멜빌'이 몸소 나타났던 것이다!

 

 - 허먼 멜빌(1819∼1891) 

 

영화가 시작되면 '무명 작가 허먼 멜빌'은 어떤 노부부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간절히 쓰고 싶었던 소설의 밑바탕이 되는 이야기, 곧 오래 전에 있었던 '전설적인 고래 사냥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그 늙은 노인에게 간청한다. 그 남자야말로 풍문으로만 들리던 '거대한 흰 고래'를 직접 봤던 마지막 생존자였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영화는 '진짜 고래 사냥 이야기'로 불쑥 뛰어든다. 허먼 멜빌의 소설을 통해 수많은 독자들을 사로잡은 바로 그 전설적인 고래 이야기는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는 게 이번 영화의 서사 구조였다.

 

물론 이 영화의 재미는 그 노인이 들려주는 '진짜 이야기' 속에 담겨 있다. 그런데 정작 나는 이 글을 통해 '바다 위에서 벌어지는 바로 그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그건 직접 바다 속으로, 말하자면 영화 속으로 풍덩 빠져봐야 진정으로 실감할 수 있는 일이다. 나 역시 이 영화를 보면서 까마득한 옛날에 <모비딕>이라는 소설을 통해서 느꼈던 그 형언하기 어려운 감동들이 다시금 되살아나는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로 이 영화를 재미있게 봤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이 영화 속 '바다 이야기' 보다는 이 소설가가 단단히 발을 딛고 살았으며, 기나긴 밤 동안 어둠을 밝히며 글을 썼던 바로 그 무대인 '육지 이야기'에 좀 더 흥미를 느꼈다. 왜냐하면 나는 이 소설가를 너무나 오랫동안 잊고 지내다가 아주 엉뚱하게도『월든』이라는 책 속에서, 말하자면 거센 바람과 파도가 휘몰아치는 바다가 아니라 잔잔한 호수로 둘러싸인 아주 고요하고 아늑한 숲 속 풍경 속에서 그를 다시 만났기 때문이다. 바다가 아니라 육지라고?『월든』이라고? 그렇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호숫가에 오두막집을 짓고 살면서 써내려갔던 바로 그 『월든』 속에 허먼 멜빌이 불쑥불쑥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나타났던 기억이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불현듯 내게 되살아난 것이다.

 

『월든』속에 허먼 멜빌이 나타난다고? 많은 사람들은 내 얘기를 믿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월든』을 아무리 여러 차례 읽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정작 그 책 속에서 진짜로 허먼 멜빌을 만난 사람들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그를 어디에서 찾아냈을까? 그는 바로『주석달린 월든 』속에 숨어 있었던 사람이었고, 나는 거기서 비로소 다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주석달린 월든 』속에는 허먼 멜빌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또 한 사람의 소설가 너대니얼 호손까지도 등장한다. 물론 이 소설가도 주석이 달리지 않은『월든』에서는 결코 찾아낼 수 없었던 인물이었다.

 

사실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소설'을 그리 많이 읽지는 않았던 인물이다. 『주석달린 월든』을 통해서 명백히 드러났듯이 그는 주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고전들'을 아주 열심히 읽었던 인물이다. 호메로스가 쓴『일리아스』와『오뒷세이아』는 너무나 여러 차례 인용되고 있어서 그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궁금해서 견디지 못할 정도다. 고대 그리스 비극이나 신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그 외에도 이솝, 플루타르코스, 오비디우스, 헤로도토스가 쓴 작품 속 이야기가 쉴 새 없이 등장한다. 그렇다고 그가 꼭 고대의 인물들이 쓴 책에만 열중했던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주석달린 월든』속에서 우리는 셰익스피어, 프랜시스 베이컨, 몽테뉴, 존 버니언, 토머스 칼라일, 단테, 밀턴 말고도 비교적 그와 가까운 시대 혹은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들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애덤 스미스, 찰스 다윈, 벤저민 프랭클린, 에머슨을 비롯해서 소설가였던 조너선 스위프트, 다니엘 디포, 너대니얼 호손, 허먼 멜빌까지도 말이다.

 

그런데 내가 이 글에서 정작 말하고 싶은 세 사람의 인물들, 즉 허먼 멜빌과 너대니얼 호손 그리고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사실 거의 동시대의 사람들이다. 살았던 동네조차 매우 가까웠다. 그래서 그들은 작품을 통해서도 만났고 혹은 직접적으로도 만났다. 게다가 그들이 발표한 주요 작품들은 발표 시기조차 비슷할 정도다. 허먼 멜빌은 1850년 8월에 너대니얼 호손과 만났고, 『모비딕』의 발표 연도는 1851년이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1849년에 쓴 야심적인 첫 작품(『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 보낸 일주일』)이 실패한 뒤 월든 호숫가로 들어갔고, 거기서 그는『월든』을 썼고, 그 작품을 1854에 발표했다. 너대니얼 호손의 걸작 소설인『주홍글씨』는 그보다 조금 앞선 1850년에 발표됐다. 세 작품이 그렇게 공간적으로 잇닿은 좁은 육지에서, 또한 시간적으로도 그렇게 잇따라 나왔다는 사실을 나는 이번에 처음으로 자세히 알게 되었다.

 

 

 

 

 

 

 

 

 

 

 

 

 

 

 

어쨌든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집에 오자 말자 『주석달린 월든 』을 서둘러 꺼내 펼쳤다. 내가 그 책 속에서 발견했던 허먼 멜빌에 대해 분명히 뭔가를 끄적거려 놓았던 기억이 났고, 그 내용이 과연 어떤 것일까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영화 엔딩 장면에 나오던 '인상적인 자막'에 대한 확실한 내용 또한 그 속에 분명히 있을 터였다. 과연 그랬다. 『주석달린 월든 』에 달아 놓은 나의 주석은 다음과 같았다.

 

허먼 멜빌 소개. 1850년 당시 최고의 작가였던 너대니얼 호손과 친분을 쌓았고, 이듬해 『모비딕』을 출간하며 호손에게 이 작품을 헌정하였다.

 

사실『주석달린 월든』에서 내가 찾아낸 '두 소설가'의 흔적은 결코 적지 않았다. 대략 훑어봐도 무려 일곱 군데에 이를 정도다. 나는 그 '주석'들을 차마 여기에 모조리 옮겨 놓지는 못하겠다. 비록 그러고는 싶지만 말이다. 그래도 내가 허먼 멜빌에 대해 '주석'을 달아놓은 바로 대목에 대해서만은 여기에 꼭 옮겨 보고 싶다.

 

내 생각에는 의상이 우리나라를 비롯해 어느 나라에서나 예술의 경지에 올랐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 듯하다. 요즘에는 많은 사람이 구할 수 있으면 어떤 옷이든 입으려고 안달하지 않는가. 난파선의 선원들처럼 그들은 해변에서 눈에 띄는 것이면 어떤 옷이나 걸치지만, 시간이나 공간에서 약간의 거리가 생기면 서로 상대의 거짓된 모습을 비웃는다. 어느 세대나 과거의 유행을 비웃으며 새로운 유행에 충실히 따른다. 우리는 헨리 8세나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의상을 보고는 식인종 섬143의 왕과 왕비의 의상을 본 것처럼 재미있어 한다. 사람이 벗어 놓은 옷은 안쓰럽고 기괴하기도 하다. 사람이 입은 옷에 비웃음을 억누르고 신성함을 더해주는 것은, 그 옷을 입은 사람이 쏟아내는 진지한 눈빛과 그 사람의 내면에서 흐르는 진실한 생명이다

주석

143. 문명화되지 않은 원주민이 사는 섬을 통칭하는 뜻으로 사용됐지만, 특히 피지 섬을 가리킨 것으로 추측된다. 소로가 허먼 멜빌의 『타이피족Typee』1장에서 읽은 19세기의 노래 <식인종 섬의 왕>을 빗댄 표현일 가능성도 있다. 『타이피족』을 잘 알았던 세 친구 중 하나를 통해 소로는 이 작품을 알게 됐을 거라고 추정된다. 호손은 1846년 3월 25일 《세일럼 어드버타이저》에 이 작품을 호의적으로 평가한 서평을 기고했고, 브론슨 올컷은 1846년 12월에 이 소설을 읽었으며, 엘러리 채닝은 타이피족에 대한 「누구헤바 섬」이라는 시를 지었다.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주석달린 월든』 , <경제> 중에서

 

 

너대니얼 호손과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심지어 함께 배를 타고 여행도 했던 모양이다. 나중엔 배를 팔고 사는 '거래'까지 할 만큼 '일찍부터' 가까이 지냈던 흔적도 발견할 수 있다.

 

보트를 제외하고 내가 전에 내 것으로 소유했던 유일한 집은 천막이었다. 이것은 내가 여름에 여행할 때 가끔 사용했던 것으로 둘둘 말려 지금도 내 다락방에 보관되어 있다. 그러나 보트는 몇 사람의 손을 거친 후에 이제는 시간의 강을 따라 멀리 사라졌다.28 그런데 모든 면에서 알찬 집을 마련했으니 나도 세상에 정착하기 위해 상당히 진전한 셈이었다. 외장을 거의 입히지 않은 이 집은 나를 에워싼 일종의 결정체였고, 내 생각이 고스란히 반영된 집이었다. 또한 윤곽만 그린 그림처럼 많은 의미가 함축된 집이었다. 나는 바람을 쐬려고 집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었다. 집 안의 공기는 언제나 신선한 기운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 안에 앉아 있는 게 아니라 문 바로 뒤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비가 내리는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하리반사」에서는 "새가 없는 집은 간을 맞추지 않은 고기와 같다"라고 말한다. 내 집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어느새 새들의 이웃이 되어 있었다. ……

주석

28. 너대니얼 호손은 1842년 9월 1일의 기록에서, "그 가난한 친구(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돈이 없어 배를 팔고 싶어했다. 그는 그 배를 직접 건조한 사람답게 능숙하게 운전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원하는 값을 주려고 했지만, 그는 고작 7달러를 불렀다. 그리하여 나는 머스케타퀴드의 주인이 됐다"라고 썼다.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주석달린 월든』 ,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위하여 살았는가> 중에서

 

 

『모비딕』을 쓴 허먼 멜빌은 '풍부한 바다 경험'을 쌓은 인물로도 유명하다. 그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19세 때 여객선의 '수습 선원'으로 취직하여 리버풀까지 항해했고, 스물두 살 되던 1840년에는 포경선을 타고 태평양으로 나갔다가 혹독한 선원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항해 18개월 만에 마라케스 제도의 누크히바에서 도망쳐 원주민 부족인 타이피족들과 함께 살기도 했다. 따뜻한 환대를 받았던 식인종 섬에서의 평온함과 무료함마저 견디지 못한 그는 마침 정박해 있던 오스트레일리아 포경선으로 다시 도주했고, 그렇게 바꿔 탄 배에서 그는 승조원 폭행 사건에 휘말려 체포되었다가 또다시 도주하게 된다. 그는 미국 포경선에 의해 구조된 후 하와이에 도착했고, 거기서 다시 미군 수병으로 채용된 끝에 이듬해에 마침내 '육지'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이십대 중반의 나이에 그는 이미 말 그대로 천신만고를 다 겪은 인물이 된 셈이었다.

 

그런 만큼 허먼 멜빌이 쓴『모비딕』이 고래잡이에 나선 인물들의 성격 묘사뿐 아니라 '바다 위에서의 실제 상황'에 대해서도 얼마만큼 자세하고 생생하게 묘사해 놓았을지는 의심할 여지조차 없다. 그렇다고 해서 『모비딕』이 그저 흥미진진한 모험 해양 소설에만 그쳤다면 이 작품이 훗날 그토록 많은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평가를 얻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이 소설은 이번에 개봉중인 영화 엔딩 장면에서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듯이, 이미 동시대의 최고 작가였던 너대니얼 호손으로부터 '호메로스의 대서사시『오뒷세이아』에 필적할 만한 작품'이라는 극찬을 받은 바 있다. 그런데 정작 이 소설은 발표 당시만 하더라도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실제로 허먼 멜빌은 몇몇 작품을 발표한 이후 안정된 수입으로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공직'을 끊임없이 찾아 헤맸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간절한 바램은 매번 수포로 돌아갔고 뒤늦게 얻은 자리 또한 보잘 것 없었다. 그는『모비딕』을 발표하고도 그에 걸맞는 '문인'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궁핍하게 지내다가, 이 걸작 소설을 발표한 지 무려 15년이나 지난 1866년에야 비로소 안정된 공직인 '뉴욕 세관의 하급관리' 자리를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거기서 무려 20여 년을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생활하다가 은퇴한 이후에는 뉴욕의 은둔자로 지내다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소설『모비딕』은 어느덧 세익스피어의 『리어왕』,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과 함께 '‘영문학 3대 비극’에 꼽힐 정도가 되었다. 이 소설이 얼마만큼 비극적이면서도 깊은 철학적 의미를 지닌 작품으로 평가받는지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세하게 고찰한 바가 있다. 『모비딕 - 진실을 말하는 위대한 기예』라는 책을 펴낸 신문수 교수가 소설 배경인 '낸터키트'를 직접 다녀온 뒤에 쓴 답사기도 참고할 만하다.

 

‘모비딕’은 이제 미국 소설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일 뿐만 아니라, 인간 사유의 깊이와 광활한 상상력의 한 정점을 표상하는 대작으로서 세계문학의 판테온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일찍이 영국의 소설가 서머싯 몸은 ‘모비딕’을 세계 10대 소설의 하나로 꼽은 바 있고, 최근에는 모리스 블랑쇼, 호르헤 보르헤스, 질 들뢰즈와 같은 사색가들 또한 ‘모비딕’을 길잡이로 하여 그들 자신의 독특한 사색의 지평을 열어 보였다.

 

 - 新東亞, 2007년 1월호, 신문수, <‘모비딕’ 사냥의 출항지 뉴베드퍼드·낸터키트> 중에서

 

이 소설이 지닌 비극적인 면모의 깊이를 느끼기에 더없이 좋은 '문장들'을 여기서 당장 직접 살펴볼 수도 있다. 그 대목은 방금 내가 인용했던 그 월간지 기사 속에도 오롯이 담겨 있었다. 마침 이번에 개봉된 영화 '하트 오브 더 씨'의 배경이 된 여러 장소들에 대한 생생한 '현장 답사 보고'가 상세히 담긴 그 글 속에서 느닷없이 허먼 멜빌의 장중하면서도 처절하도록 슬픈 비극시 한 토막을 발견한다는 건 몹시도 놀라운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들 가운데 저토록 가슴 아픈 대목을 읽고도 그저 태연히 포경선을 탔던 먼 나라의 고래잡이들만 떠올릴 사람들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왼편 끝줄의 좌석 가장자리 벽면에 ‘허먼 멜빌의 자리(Herman Melville’s pew)’라는 명판이 부착되어 있다. 교회는 그렇게 그가 이곳을 방문한 자취를 남겨 후인들의 호기심을 달래주고 있었다. 이곳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벽면에 새겨진, 검은 테를 두른 대리석 비명이다. 바다에 수장되어 사체를 찾을 길이 없는 선원들의 유족들은 지상의 무덤 대신 이곳 교회당의 벽면에 묘비명을 새겨 상실의 허망함을 달랬다. 이스마엘은 ‘교회’라는 제목이 붙은 소설의 7장에서 그들의 심사를 이렇게 대신 전한다.


아아 망자를 푸른 땅에 모신 사람들이여,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여기 꽃밭 속에 잠들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여! 그대들은 여기 이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황량한 추억을 알 수 있겠는가. 한 줌의 유골도 거기에 없는, 저 검은 테 속의 대리석이 주는 가슴을 치는 공허감! 움직이지 않는 저 묘비명들이 상기시키는 절망감! 모든 신앙심을 무화시키는 저 글귀들 속에 스며 있는 공포 어린 허무감과 불신의 마음. 그것은 무덤도 없이 죽어간 이 귀속할 곳 없는 사람들의 부활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모비딕’ 전체에서 이보다 절절한 문장을 나는 찾지 못한다. 갓 20대에 들어선 젊은이의 입에서 어떻게 이런 절규가 쏟아져 나올 수 있을까. 그것은 삶의 벼랑 끝에서 죽음을 온몸으로 느껴본 자가 아니고서는 토로할 수 없는 외침이다. 삶의 한가운데로 짓쳐들어와 모든 것을 부질없는 환영으로 만들어버리는 그 싸늘한 부동의 침묵. 이것이 또한 소설의 대미를 장식하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 新東亞, 2007년 1월호, 신문수, <‘모비딕’ 사냥의 출항지 뉴베드퍼드·낸터키트> 중에서

 

바다야말로 아주 오랜 옛날부터 숱한 인물들이 자신의 '꿈과 희망'을 찾아 자신의 삶 전부를 걸고 정든 고향을 떠나 자신의 몸을 실었던 무대였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자신의 육지'로 되돌아오리라는 굳은 확신과 맹세를 결코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숱하게 보고 들어왔다. 그 가운데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육지에서의 맹세와 확신'이 결국 어느 한 순간 '바다'에서 물거품처럼 허망하게 스러지고 마는 걸 목도하고야 말았다는 사실을.

 

일찌기 니체가 적확하게 지적했듯이,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자신이 이 과정에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다 속에서 그저 평화롭게 살아갈 뿐인 '하얀 고래'를 '괴물'로 여긴 우리 인간이야말로 '진짜 괴물'은 아닌지를 한번쯤 되돌아보게 만드는 소설이 바로 『모비딕』이라고 말한다면 너무 지나친 말일까. 물론 여기서 '하얀 고래'는 '자연'으로 대표되는 수많은 상징들 가운데 하나일 수도 있다. 내 말이 궁금한 사람들은 이번 기회에 한번쯤 『모비딕』을 읽어 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지 싶다. 이미 그 소설을 감명깊게 읽은 독자라면 이번에 개봉된 영화를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직까지『모비딕』을 읽지 못한 예비 독자들에겐 허먼 멜빌의 '걸작소설'로 이끄는 더없이 친절한 안내 영화가 지금도 극장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하고 싶다.

 

 

 

접힌 부분 펼치기 ▼

 

 

본문 속에 포함시키려다 글이 너무 길어질까 싶어 포기한 '내용들'도 없지는 않았다. 일부는 여기에 남겨본다.

 

 

* 소포클레스는 '인간의 위험천만한 위대성'을 이미 수천 년 전에『안티고네』를 통해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코로스

세상에 무서운 것이 많다 하여도
사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네.

사람은 사나운 겨울 남풍 속에서도
잿빛 바다를 건너며 내리 덮치는
파도 아래로 길을 연다네.
그리고 신들 가운데 가장 신성하고
무진장하며 지칠 줄 모르는 대지를
사람은 말馬의 후손으로
갈아엎으며 해마다, 앞으로 갔다가
뒤로 돌아서는 쟁기로 못살게 군다네.

그리고 마음이 가벼운 새의
부족들과 야수의 종족들과
심해 속의 바다 족속들을
촘촘한 그물코 안으로 유인하여
잡아간다네. 총명한 사람은.
사람은 또 산속을 헤매는 들짐승들을
책략으로 제압하고,
갈기가 텁수룩한 말을 길들여
그 목에 멍에를 얹는가 하면,
지칠 줄 모르는 산山소를 길들인다네.

또한 언어와 바람처럼 날랜 생각과,
도시에 질서를 부여하는 심성을 사람은 독학으로
배웠다네, 그리고 맑은 하늘 아래서 노숙하기가
싫어지자 서리와 폭우의 화살을 피하는 법도.
사람이 대비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아무 대비 없이 사람이 미래사를 맞이하는 일은
결코 없다네. 다만 죽음 앞에서 도망치는
수단을 손에 넣지 못했을 뿐이라네.

하지만 사람은 고통스런 질병에서
도망치는 방법은 이미 궁리해냈다네.

 - 《안티고네》332∼364행

 

 

 

 

 

 

 

 

 

 

 

 

 

 

 

 * 군 복무(83.6∼85.10) 시절에 읽었던 책들은 지금 '실물'로는 단 한 권도 남아 있지 않지만, 독서노트에 볼펜으로 부지런히 기록해 둔 덕분에 그 때의 기억들을 되살릴 수 있게 되었다.

독서노트에 적어 놓은 책들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무엇보다 토인비의《역사의 연구》였던 것 같고, 토머스 홉즈의《리바이어던》과 막스 베버의《사회경제사》도 무척 흥미롭게 읽었던 것 같다.

문학작품으로는 괴테의《파우스트》, 上,中,下 3권으로 된 상당한 분량의 멜빌의《백경》과 당시 노벨문학상 수상작품이었던 마르께스의《백년 동안의 고독》,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등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는 작품들인 것 같다. ……

http://blog.aladin.co.kr/oren/4070322

 

 

 

* 이 자리에서 청춘을 생각하면서 나는 외친다. 육지! 육지! 어둡고 낯선 대양 위에서 열정적으로 찾아 헤매는 항해는 이제 너무나 충분하다! 이제 드디어 해변 하나가 보인다. 그것이 어떻든 거기에 상륙해야 한다. 최악의 피난항일지라도 절망적이고 회의적인 무한함으로 비틀거리며 다시 돌아가는 것보다 낫다. 우리 우선 육지를 단단히 붙잡자.

 

 - 니체, 『반시대적 고찰 』,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 중에서

 

펼친 부분 접기 ▲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포스트잇 2015-12-12 1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 잘읽었습니다. 혹시 멜빌 평전류 중 읽을만한 책 추천해주실 수 있으신지.. 꽤 오래전에 누군가 멜빌 평전을 읽고 쓴 글을 본 적이 있었는데.. 이젠 그 글을 인용한 저자도, 누가 쓴 평전이었는지도 알 수가 없네요. 당시엔 꽤나 인상적으로 본터라 그 평전을 찾아봤었는데 번역이 안됐더군요. 멜빌 평전을 꼭 읽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oren 2015-12-12 12:45   좋아요 1 | URL
제가 허먼 멜빌에 대해 쓴 평전류에 대해선 아는 게 너무 없어서 추천할 만한 책조차 말씀드리기 어렵네요. 다만, 신문수 교수님(서울대 영어교육과 미국문학 교수)이 쓰신 책『모비딕 - 진실을 말하는 위대한 기예』는 권할 만하다 싶어요. 저도 읽어보진 못했지만 책의 `목차`만 대략 훑어봐도 알찬 내용이 많이 담긴 듯해요. `허먼 멜빌`을 연구해서 학위까지 받으셨으니 믿을 만하다 싶고요... 그 분이 쓰신 <‘모비딕’ 사냥의 출항지 뉴베드퍼드·낸터키트> 가운데 일부 내용을 참고삼아 조금 덧붙여봅니다.
* * *
멜빌과 ‘모비딕’의 자취를 찾는 여정은 나에겐 언제나 각별한 설렘을 동반했다. 한때 온 시간을 바쳐 씨름하던 학위 논문의 대상이었기에 내 젊은 날의 잔영이 늘 앞장을 서곤 했기 때문이다. 매사추세츠 서쪽 피츠필드의 생가에서도, 뉴욕 이스트 26번가 104번지, 멜빌이 숨을 거둔 옛 집터에서도, 브롱스의 우드론 묘지의 멜빌 무덤에서도, 그의 모습을 불러내고자 하면 거의 언제나 그의 소설과 힘겨운 대화를 나누던 시절의 내 영상이 겹쳐졌다.

예컨대 이 글을 준비하기 위해 그가 ‘모비딕’을 쓰던 무렵의 행장을 되짚어 보면서 나는 1850년 12월13일자, 뉴욕의 편집자 에버트 다익킹크(Evert Duyckinck)에게 보낸 그의 편지 속 다음의 구절에서 눈길을 멈추었다.

여기 시골에서 바다에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습니다. 사방이 눈으로 덮여 있군요. 아침에 일어나면 마치 대서양 상의 배에서 현창으로 밖을 내다보는 듯이 밖을 내다봅니다. 이곳 내 방은 배의 선실 같습니다. 밤중에 잠이 깨기라도 하면 삐걱이는 바람 소리를 듣습니다. 집에 돛을 너무 많이 달았다고 상상합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지붕 위로 올라가 굴뚝에 색구를 쳐야겠다고 생각하지요.

멜빌은 ‘모비딕’을 쓰면서 이렇게 고래잡이 시절을 회상하면서 거기에 몰입해 살고 있었다. 그해 추수감사절에는 식구들을 모두 보스턴 처가로 보내고 피츠필드에 일부러 혼자 남아서 원고를 쓰기도 했다. 그는 머리에 솟구치는 생각과 이미지들이 언어로 형상화되기 전에 사라지지 않을까 조바심이 나서 늘 시간이 아까웠다. 그는 다익킹크에게 이렇게 써보내기도 했다.

“나에게 쉬운 문체로 글을 잘 쓰는 50여 명의 젊은이를 보내줄 수 있겠습니까…? 그만한 수의 작품을 계획하고 있지만 그것을 따로따로 생각해볼 충분한 시간을 마련할 수가 없군요.”

멜빌은 이렇게 2년여를 오로지 모비딕에 매달려 쓰고 또 썼다. 멜빌 덕분에 나 또한 이 순수한 열정의 시간들을 음미할 행운을 누렸기에 이런 구절들에 새삼 눈길이 가는 것이다.

포스트잇 2015-12-12 13:05   좋아요 1 | URL
이렇게 상세하고 호의넘치시는 답변을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멜빌 작품이든 관련 글이든 읽다보면 평전이나 주요 참고도서 소개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추천하신 신문수 교수님 책부터 읽어봐야겠습니다. 답변 고맙습니다.

kj_Shin 2015-12-15 13: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끔은 자기의 능력에 맞지도 않고 이긴다고 하여도 필요도 없는것을 가질려고 하고 이길려고 한다. 이것이 욕망이 아닐까?
우리는 많은것에서 느끼고 볼수있다. 욕망은 또다른 욕망을 낳고 나중에는 그 욕망에서 헤어날수가 없다. 그 끝은 파멸이라는 것을.....

일전에 저도 책을 읽고 난뒤 머라고 적었던 기억이 나서 찾아보니... 이렇게 적혀 있었네요...
이 영화 보고 싶습니다~

잘봤습니다^^





oren 2015-12-15 16:06   좋아요 1 | URL
투자 님 반갑습니다. 니체가 남긴 저 명언은 마치 허먼 멜빌의 『모비딕』을 읽고 난 직후에 떠올린 감상처럼 느껴지더군요. `괴물`과 싸우는 수많은 어리석은 사람들에겐 니체의 말보다 더 어울리는 말도 찾기 어려울 듯싶어요. <하트 오브 더 씨>는 이야기 전개 방식도 마치 책을 읽는 것처럼 차분해서 좋더군요. 꼭 한번 보세요~

syz0725 2016-10-24 0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연히 들어왔다가 이렇게 허먼 멜빌과 다른 작가들의 관계에 대한 깊은 고찰을 보게될 줄은 몰랐습니다.
작성자님의 글을 보니 앞으로도 더욱 글 쓰는 공부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oren 2016-11-03 16:05   좋아요 1 | URL
syz0725님 안녕하세요? 너무나 늦게 댓글을 달게 되어 죄송하고, 오래 전에 쓴 글에까지 찾아오셔서 고마운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늘 즐거운 나날 되세요~

중독자 2023-05-15 0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섹스스타

2023-05-26 2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김도훈 애딕트 2023-05-15 00: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중독자가 접니다.

2023-05-26 2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책세상 니체전집 2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이진우 옮김 / 책세상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쇼펜하우어는 증명한다

 

마지막으로 ㅡ 무엇보다 이 지상에서 철학자의 실존이 문제가 된다면 또는 ㅡ 내가 의미하는 바에 관해 한 점 의혹 없이 명료하게 말한다면, 어떤 철학자가 지상에 나타나는 것이 국가나 대학의 존속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면, 국가의 실존과 대학의 진흥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 여론의 노예가 되고 자유의 위험이 증가하는 정도만큼 철학의 위엄은 높아질 수 있다. 철학의 위엄이 가장 높았던 때는 몰락하는 로마 공화국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 그리고 철학과 역사의 이름이 은혜를 저버린 수령들의 이름이 되었던 황제 시대였다. 플라톤보다 브루투스가 철학의 위엄을 더 많이 증명한다. 그것은 윤리학이 상투어를 가지기를 중단했던 때였다. 철학이 지금 존경을 받지 못한다면, 왜 지금 위대한 장군과 정치가가 철학을 신봉하지 않는지를 물어보면 된다 ㅡ 그것은 그들이 철학을 찾았을 때, 철학의 이름으로 허약한 환상이, 저 학자적 강단 지혜와 강단-신중함이 그들을 맞이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철학은 그에게 무서운 것이 되어야 한다. 권력을 추구할 사명이 있는 사람들은 어떤 원천의 영웅주의가 철학 속에 흐르고 잇는지를 알아야 한다. 어떤 미국인은 지상에 온 위대한 사상가는 엄청난 힘들의 새로운 중심으로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그에게 말해줄 수도 있다. 에머슨은 이렇게 말한다. "위대한 신이 우리의 행성 위에 사상가를 보낼 때는 조심하라. 그러면 모든 것이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는 마치 대도시에 큰 화재가 발생했지만, 어디가 안전한지 어디에서 화재가 끝날지 아무도 모르는 것과 같다. 내일이라도 학문에서는 급선회하지 않을 것이 없고, 거기서는 문학적 명망도 유효하지 않으며 이른바 영원한 명성도 없다. 인간에게 지금 이 순간 소중하고 가치 있는 모든 것들이 그렇게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은 그들의 정신적 지평 위에 솟아올라 나무에 사과가 달리듯이 사물의 현 질서를 초래하는 이념이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수준의 문화는 순간적으로 인간의 노력의 전체 체계를 전복시킬 것이다." 자, 이런 사상가가 위험하다면, 왜 대학에 있는 우리의 사상가가 위험하지 않은지 그 까닭이 분명해진다. 그들의 사상은 나무에 사과가 열리듯이 그렇게 평화롭게 전통적인 것 속에서 자라나기 때문이다. 그들은 놀라게 만들지도 않고 온통 뒤바꾸지도 않는다. 그들의 모든 노력과 시도에 관해서는, 사람들이 어떤 철학자를 칭찬하자, 디오게네스가 제기했던 이의를 그대로 말할 수 있다. "그가 그렇게 오랫동안 철학을 하면서도 아직 아무도 슬프게 하지 않았는데, 그가 무슨 위대한 일을 보여줄 수 있는가?" 그러나 이것은 진리의 여신의 칭찬이라기보다 늙은 여자의 칭찬이다. 또 저 여신을 단지 늙은 여인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남성들이 아니며 그래서 당연히 권력을 가진 남성들로부터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 시대의 상황이 이렇다면, 철학의 존엄은 더럽혀질 것이다. 철학 자체가 우스꽝스럽거나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것이 되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철학의 진정한 친구들은 이 혼동에 반대 증언을 하고 적어도 철학의 저 거짓 하인과 위엄을 깎는 사람들만이 우스꽝스럽거나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자주 보여주어야 한다. 그들 자신이 행동을 통해 진리에의 사랑은 두려운 것이고 대단한 것임을 증명하면 더 좋을 것이다.

 

이런 것을 쇼펜하우어는 증명한다 ㅡ 그리고 날마다 더 많이 증명할 것이다.

 

 - 『반시대적 고찰 』,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 8장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