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책세상 니체전집 2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이진우 옮김 / 책세상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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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들은 모두 겁이 많았다고 대답했다면

 

 여러 대륙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나라와 민족을 직접 본 여행자에게 가는 곳마다 다시 발견했던 인간의 특성이 무엇이었느냐고 물었다. 그는 모두에게 게으른 습성이 있다고 대답했다. 많은 이들은, 그가 세상 사람들은 모두 겁이 많았다고 대답했다면 더 옳고 맞는 말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풍속과 의견 뒤에 숨는다. 자신이 단 한 번, 유일무이한 존재로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또 어떤 이상한 우연도 두 번씩이나 그토록 기이하게 다채로운 갖가지를 뒤흔들어 섰어 그 같은 하나의 존재로 만들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는 그것을 알고 있지만 나쁜 마음인 것처럼 그걸 숨긴다. 왜? 이웃이 무서워서, 인습을 요구하고, 온통 인습에 휩싸여 있는 이웃이 무서워서. 이웃을 무서워하라고, 무리와 똑같이 행동하라고, 그리고 스스로 즐거워하지 말라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중 몇 명의 특이한 사람들은 부끄러워할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편안함이요, 타성이며, 요컨대 여행자가 말했던 게으른 습성이다. 그는 옳았다. 인간은 겁도 많지만 그보다 더 게으르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무조건적인 정직성과 솔직함을 강요할지 모를 부담을 가장 무서워한다. 오로지 예술가 혼자만이 이 인위적인 매너와 어깨에 걸쳐진 의견에 편안하게 부화뇌동하는 짓거리에 질색한다. 그 혼자만이 누구나 품은 나쁜 마음, 비밀을 폭로한다. 예술가들은 인간은 모두 유일한 기적이라고, 근육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그 자신이며, 그 혼자만이라는 것을 감히 알려주려 한다. 게다가 인간은 유일무이성의 엄격한 결과로서 아름답고 주목받을 만하며, 모든 자연의 작품처럼 새롭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대단한 존재로서 결코 지루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위대한 사상가가 인간을 경멸한다면, 그는 그의 나태함을 경멸하는 것이다. 나태함 때문에 인간은 공장에서 생산된 상품처럼, 관심도 흥미도 없는 것처럼 보이고, 교류할 필요도 가르칠 가치도 없어 보인다. 대중에 속하지 않으려는 인간은 자신에게 반(反)해서 편안해지려는 것을 멈출 필요가 있다. "너 스스로가 되어라! 네가 지금 행하고 생각하고 원하는 것은 모두 네가 아니다"라고 그에게 외치는 양심의 소리를 따르면 된다.

 

 - 『반시대적 고찰 』,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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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이진우 옮김 / 책세상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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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환상, 아폴론이라는 이름

 

음악과 비극적 신화는 똑같은 방식으로 한 민족의 디오니소스적 능력의 표현이며,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양자는 아폴론적인 것의 저 편에 놓여 있는 예술 영역에서 유래한다. 양자는 하나의 영역을 미화하는데, 이 영역이 지닌 쾌락의 화음 속에서는 불협화음과 마찬가지로 공포의 세계상이 매력적으로 울려 퍼진다. 양자는 자신의 강력한 마술을 믿으면서 불쾌의 가시를 가지고 유희한다. 양자는 이러한 유희를 통해 "가장 나쁜 세계"의 실존조차도 정당화한다. 여기서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아폴론적인 것과 견주어볼 때, 현상의 세계 전체를 소생케 하는 영원하고 근원적인 예술의 힘으로 나타난다. 이 현상 세계의 한가운데에는 소생한 개체화의 세계를 삶 속에 붙잡아두기 위하여 새로운 미화의 가상이 필요하게 된다. 우리가 불협화음의 인간화를 생각할 수 있다면 ㅡ 그리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ㅡ 이 불협화음은 살 수 있기 위하여 훌륭한 환상을 필요로 할 것이다. 이 환상은 불협화음이 가진 고유한 본질을 아름다움의 베일로 은폐한다. 이것이 아폴론의 진정한 예술 의도다. 우리는 매 순간 실존 일반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고 그 다음 순간을 체험해보고 싶게 만드는 아름다운 가상의 저 수많은 환영들을 아폴론이라는 이름으로 포괄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 개체는 모든 실존의 기초, 즉 세계의 디오니소스적 기반에 대해 정확하게 아폴론적 미화의 힘에 의해 다시 극복될 수 있는 양만큼만 의식한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예술 충동은 영원한 정의의 원칙에 따라 상호 균형 속에서 자신의 힘을 발휘해야만 한다. 디오니소스의 힘이 격렬하게 고양되는 곳에선, 우리가 이를 체험하고 있는 것처럼, 아폴론도 구름에 몸을 감추고 이미 우리 곁에 내려와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어떠면 다음 세대쯤에선 아폴론의 이 왕성한 미적 효과들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효과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각자가 꿈속에서라도 고대 그리스의 실존 속으로 다시 옮겨졌다고 한번만 생각해본다면 모두들 이를 직관적으로 가장 확실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높은 이오니아식 기둥이 서 있는 복도를 거닐면서 맑고 고상한 선으로 그어진 지평선을 올려다보며, 빛나는 대리석 속에 비치는 자신의 미화된 모습을 곁에 두고, 엄숙하게 걸어가거나 조화로운 음향을 울리면서 율동적인 몸짓으로 부드럽게 움직이는 사람에게 둘러싸인 ㅡ 그가 이 끊임없이 밀려오는 미의 물결에서 아폴론에게 손을 들어 이렇게 외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행복한 민족, 그리스인들이여! 델포스의 신이 그대들의 주신 찬가의 광란을 치유하기 위해선 그와 같은 마력이 필요하다고 간주했다면, 너희 사이에서 디오니소스가 얼마나 위대한 존재여야 하겠는가!" ㅡ 그러나 이런 분위기에 휩싸여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아테네 노인이 아이스킬로스 같은 고상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면서 이렇게 응답할 수 있을 것이다. "자네 이상한 외국 청년, 이렇게도 말해보게. 이 민족은 그렇게 아름답게 될 수 있기 위해 얼마나 많이 고통을 당해야 했겠는가! 그러나 지금 나를 따라와 비극을 보세. 그리고 나와 함께 두 신의 신전에 제물을 바치세!"

 

 -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2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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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형이상학

 

이제 여기서 우리는 과감하게 출발하여 단숨에 예술의 형이상학 속으로 훌쩍 뛰어들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나는 실존과 세계는 오로지 하나의 미적 현상으로서만 정당화되어 나타난다는 앞서 말한 문장을 반복하고자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비극적 신화는 추한 것과 부조화한 것조차 하나의 미적 유희이며 또 이 유희란 의지가 자신의 쾌락이 영원히 충만한 상태에서 자기 자신과 노는 유희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확신시켜야 한다. 그러나 디오니소스적 예술의 파악하기 어려운 이 근원적 현상은 직접적인 방법을 통해서만 유일하게 이해되고, 음악적 불협화음의 놀라운 의미 속에서 직접적으로 파악된다. 세계와 나란히 세워진 음악만이 미적 현상으로서의 세계의 정당화가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에 관한 개념을 제공할 수 있다. 비극적 신화가 산출하는 쾌락은 음악에서 불협화음에 대해 느끼는 즐거움과 같은 고향에서 유래한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고통에서 느낀 자신의 근원적 쾌락과 함께 음악과 비극적 신화의 공통의 탄생지다.

 

그렇다면 우리가 불협화음이라는 음악 관계의 도움을 받음으로써 비극적 효과라는 저 어려운 문제의 해결이 매우 용이해졌다고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제 비극 속에서 보려고 하면서도 동시에 보는 것을 초월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는가. 이것은 예술적으로 사용된 불협화음과 관련하여 우리가 들으려 하면서도 동시에 듣는 것을 넘어서기를 동경한다고 그 성격을 규정해야 했던 상태다. 분명하게 지각된 현실에 대해 최고의 쾌락을 느끼면서 동시에 무한한 것을 지향하는 동경의 날갯짓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상기시킨다. 우리는 그 두 상태에서 디오니소스적 현상을 인식해야만 한다. 디오니소스적 현상은 우리에게 항상 새롭게 반복되는 개체 세계의 유희적 건설과 파괴를 근원적 쾌락의 분출로서 드러낸다. 이는, 신비스러운 사람 헤라클레이토스가, 장난으로 돌을 이리저리 옮겨놓고 모랫더미를 세웠다가 부수는 어린아이를 세계를 형성하는 힘에 비유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2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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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적 신화에서 우리가 느끼는 미적 쾌락은 무엇 때문인가?

 

비극적 신화는 아폴론적 예술 영역과는 가상과 관조에 대한 충만한 기쁨을 공유하면서, 동시에 이 기쁨을 부정하고 가시적 가상 세계의 파괴에서 보다 높은 만족을 얻는다. 비극적 신화의 내용은 일차적으로 투쟁하는 영웅을 찬미하는 서사적 사건이다. 그러나 영웅의 운명에서 볼 수 있는 고뇌, 가장 고통스러운 극복, 비통하기 짝이 없는 동기의 대립, 간단히 말해서 실레노스의 지혜의 예시가, 혹은 미학적으로 표현해서 추악함과 부조화가 그토록 수많은 형식들 속에서 그렇게 사랑을 받으며, 그것도 어떤 민족의 가장 풍요롭고 가장 젊은 시대에 거듭해서 새롭게 표현된다는 수수께끼 같은 특징은, 만약 이 모든 것에서 보다 높은 쾌락이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도대체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인가?

 

왜냐하면, 만약 예술이 자연 현실의 모방일 뿐만 아니라 자연 현실을 극복하기 위하여 그 곁에 세워놓은 자연 현실의 보충이라고 한다면, 삶이 실제로 그렇게 비극적이라는 사실만으로는 어떤 예술 형식의 생성을 거의 설명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극적 신화는, 그것이 일반적으로 예술에 속하는 한, 예술 일반의 이러한 형이상학적 미화의 의도에 전적으로 참여한다. 그러나 만약 비극적 신화가 현상 세계를 고통 받는 영웅의 형상 아래 보여준다면, 그것은 무엇을 미화하는 것인가? 이러한 현실 세계의 "실재성"을 미화하는 것은 가장 거리가 멀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바로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보아라! 잘 보아라! 이것이 너희의 인생이다! 이것이 그대들의 삶이다! 이것이 실존 시계의 시곗바늘이다!"

 

그렇다면 신화가 이 삶을 보여준 것은 우리 앞에서 그것을 미화하기 위해서였단 말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저 형상들이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갈 때 우리가 느끼는 미적 쾌락은 무엇 때문인가? 나는 미적 쾌락에 대해 묻고 있고, 그 밖에도 이러한 형상들 중 많은 것들은 동정이나 도덕적 승리의 형식 아래, 어떤 도덕적 즐거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물론 미학에서 너무나 오랫동안 통용되어왔던 것처럼 비극적인 것의 효과를 단지 이러한 도덕적 원천에서만 도출하고자 했던 사람은 자신이 예술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술은 무엇보다도 자기 영역에서의 순수성을 바라야 한다. 비극적 신화를 설명하기 위하여 제일 먼저 요구되는 것은 동정, 공포, 도덕적 숭고의 영역으로 넘어가지 않고 신화 고유의 쾌락을 순수한 미학적 영역에서 찾는 일이다. 추한 것과 부조화한 것, 즉 비극적 신화의 내용이 어떻게 미학적 쾌락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가?

 

 -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2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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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가치는 자신의 경험에 영원성의 낙인을 찍을 수 있는 정도에 달려있다

 

나는 이제 흥미를 느끼고 따라오는 친구를 고독한 관찰의 높은 고지로 인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거기에는 단지 몇 안 되는 동반자들만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를 격려하면서 우리의 빛나는 지도자, 그리스인을 붙잡고 놓지 말아야 한다고 외친다. 그리스인들로부터 우리는 이제까지 우리의 미적 인식을 순화하기 위해 저 두 신의 형상을 빌려왔다. 이 신들은 각각 독립된 예술 영역을 지배하고 있으며, 두 신이 서로 접촉하고 서로 고양시킨다는 사실을 우리는 그리스 비극을 통해 알게 되었다. 우리는 이 원초적인 두 예술 충동의 기이한 분열로 인해 그리스 비극이 멸망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과정과 그리스의 민족성의 타락 및 변화가 일치한다는 사실은 예술과 민족, 신화와 윤리, 비극과 국가가 얼마나 필연적으로 서로 밀접하게 얽혀 있는지 진지하게 숙고할 것을 요구한다. 비극의 몰락은 동시에 신화의 몰락이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그리스인은 경험한 모든 것을 무의식적으로 곧 신화와 연결시켰다. 아니 이렇게 연관지어야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가까운 현재도 "영원한 모습 아래의 것", 어느 정도 시간을 초월한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국가나 예술은 순간의 부담과 탐욕에서 쉬기 위해 시간을 초월한 것의 흐름 속에 몸을 담근다. 한 민족의 가치는 - 인간의 가치도 마찬가지로 - 자신의 경험에 영원성의 낙인을 찍을 수 있는 정도에 달려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민족이나 인간은 세속에서 벗어나고, 시간의 상대성, 그리고 삶의 진정한, 즉 형이상학적 의미에 대한 자신의 무의식적인 확신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민족이 자신을 역사적으로 파악하기 시작하고 주변의 신화적 방파제를 파괴하기 시작하면 그 정반대 현상이 나타난다. 보통 이와 연관하여 결정적인 세속화, 자신의 과거 실존에 대한 무의식적인 형이상학과의 단절, 그리고 모든 윤리적 결과 등이 나타난다. 그리스 예술, 특히 그리스 비극은 무엇보다 신화의 파괴를 저지한다. 고향땅을 떠나 사상, 윤리와 행동의 거친 황야에서 아무 제약도 없이 살려면 신화도 함께 파괴해야 한다. 지금도 저 형이상학적 충동은 삶을 얻으려고 재촉하는 학문의 소크라테스주의 속에, 약화되긴 했지만 하나의 미화 형식을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똑같은 충동이어도 낮은 수준에서는 단지 성급한 탐색으로 나아간다. 성급한 탐색은 온갖 곳에 출처를 둔 수북이 쌓인 신화와 미신의 복마전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그 한가운데 그리스인이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앉아 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그리스적 명랑성과 그리스적 경박성을 가지고 그레쿨루스Graeculus로서 저 탐구열을 위장하거나 동양적으로 우울한 미신 속에 완전히 마취되는 법을 알게 된다.

 

 -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2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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