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각사>에 있어서 ‘남천참묘의 공안’이 갖는 의미



yamoo 님께서 이번에 소설 『금각사』를 무려(?) 세 번째로 읽고 나서 쓰신 '남천참묘의 공안'이라는 글 내용이 한동안 제 머리를 떠나지 않네요. 비록 그 소설을 전혀 읽어본 적이 없는데도 말이지요. yamoo 님께서 올려주신 흥미로운 글들을 읽으니 마치 그 소설 속에서 펼쳐지는 내용이 금방이라도 제 눈 앞에서 그려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랍니다. 그런데 저는 yamoo 님의 글을 읽으면서 생뚱맞게도 (제가 최근에 읽었던) 막스 베버의 글 내용 가운데 일부가 희미하게 겹쳐 떠올라 약간은 놀랬습니다. 왜냐하면 막스 베버 또한 '근대적 인간의 삶'을 바로 '행위와 체념'이라는 두 가지 상반되는 '개념쌍'에 입각해서 접근했는데 바로 그 부분이 우연하게도 yamoo 님의 글 내용과 갑작스레 어떤 연관을 맺게 된 모양이니까 말이지요. 더군다나 베버가 그렇게 꿰뚫어 본 내용 가운데 일부는 그 유명한 '괴테의 걸작 소설들'과도 깊은 연관을 맺고 있어서 yamoo 님의 글과 일말의 '선택적 친화력'을 지닌 듯한 느낌마저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yamoo 님께서 이미 오래 전에 막스 베버에 대해서도 각별한(?) 애정을 보여주신 기억도 새삼 떠오르고 해서 이렇게 무턱대고(?) 먼댓글 형식으로나마 제가 떠올린 그 부분을 '밑줄긋기' 하듯이 올려 볼까 합니다.

 * * *

 

베버에 따르면 칼뱅주의자들은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행위에 의해 자신의 구원의 확실성을 스스로 창조하는데, 이는 괴테가 『잠언과 성찰』에서 한 다음과 같은 격언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어떻게 자기 자신을 알 수 있을까? 관찰을 통해서는 결코 안 되고, 행위를 통해서나 가능하다. 네 의무를 이행하도록 애써라. 그러면 너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곧 알게 될 것이다. ─ 그런데 너의 의무는 무엇인가? 일상의 요구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 베버는 계속해서 이렇게 주장한다 ─ 칼뱅주의는 다른 어떤 신앙 형태보다 사경제의 발전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영향을 끼쳤는데, 이 역시 수동적인 관조가 아니라 적극적인 행위에 칼뱅주의 윤리의 핵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칼뱅주의자들에게도 다음과 같은 괴테의 명제가 적용되었다. "행위하는 자는 언제나 비양심적이다. 양심을 가진 자는 관망하는 자뿐이다." 결국 베버는 칼뱅주의의 행위윤리와 괴테의 행위윤리 사이에 근본적인 유사성이 존재함을 확인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이는 근대인의 인격 및 근대의 문화와 윤리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근대 세계에 대한 베버의 논리 전개는 행위에서 멈추지 않는다. 즉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마지막 부분에서 '행위'(Tat, Handeln)를 '체념'(Entsagen)과 결합하고 있다. 체념이란 개인의 삶을 전문적 직업노동에 한정하며 다방면에 걸쳐 끊임없이 새로운 삶을 추구하는 파우스트적 인간성을 포기함을 의미한다. 행위와 체념은 근대인의 특성이자 숙명으로서 서로 밀접한 관계이다. 베버가 보기에 이 둘의 관계는 괴테의 교양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시대』와 희곡 『파우스트』에 문학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근대적 직업노동이 일종의 금욕주의적 특성을 갖고 있다는 생각도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인간의 삶을 전문 노동에 한정하는 것 그리고 그 결과로 다방면에 걸친 삶을 살려는 파우스트적 인간성을 포기하는 것은 오늘날의 세계에서 가치 있는 행위를 위한 일반적인 전제 조건이 되며, 따라서 '행위'와 '체념'은 오늘날 불가피하게 서로를 조건 짓고 제약한다. 시민계층적 생활양식의 이러한 금욕주의적 기조─이 생활양식이 무(無)양식이 아니라 어떻게든 양식이 되기를 원한다면 그러한 기조를 가질 수밖에 없었는데─는 이미 괴테도 그 삶의 지혜가 절정에 이른 시기에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시대』를 통해 그리고 희곡의 주인공 파우스트의 삶의 마지막 단계에 대한 묘사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것이다. 괴테에게 이러한 인식은 완전하고 아름다운 인간성의 시대로부터 체념 어린 작별을 고하는 것을 의미했다. 고대 아테네의 전성기가 되풀이될 수 없듯이, 그러한 시대 역시 우리의 문화 발전 과정에서 되풀이될 수 없을 것이다. 청교도들은 직업 인간이 되기를 원했다 ─ 반면 우리는 직업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금욕주의가 수도원의 골방에서 나와 직업 생활 영역으로 이행함으로써 세속적 도덕을 지배하기 시작했고 또 공장제·기계제 생산의 기술적·경제적 전제 조건과 결부된 저 근대적 경제질서의 강력한 우주를 건설하는 데 일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우주는 그 추진력에 편입된 모든 개인들의 생활양식을 ─ 비단 직접적으로 경제적 영리 활동에 종사하는 자들의 생활양식뿐만 아니라 ─ 엄청난 강제력으로 규정하며 아마도 그 마지막 톤의 화석연료가 다 타서 없어질 때까지 규정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35)

35) Max Wever,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P. 203[364∼365쪽]

 


베버에 따르면 행위는 각 개인이 세계에 대하여 의식적으로 자신의 입지를 정립하고 이 세계에 주관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을 전제한다. 그는 이러한 의지와 능력을 인격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러한 개인의 인격은 불가피하게 분화되고 전문화되어 한정적이고 일면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바로 괴테가 그의 문학 작품에서 형상화한 내용이다. 이처럼 베버의 인격 개념과 괴테의 인격 개념은 본질적으로 '선택적 친화력'을 보여준다. 선택적 친화력에 대해서는 바로 아래에서 논의할 것이다.

 

그 밖에도 베버는 1917년의 강연 '직업으로서의 과학'(Wissenschaft als Beruf)에서 괴테같이 위대한 예술가의 경우에도 자신의 삶을 예술작품으로 만들려고 한 시도는 예술에 해로운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하면서 행위와 체념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예술가의 인격도 이 행위와 체념에서 나온다는 것이 그의 확신이다.

 

베버에게 괴테가 가지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의미는 방법론적 차원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 방금 언급한 ─ '선택적 친화력'(Wahlverwandtschaften)이라는 개념이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인식 과제를 "일정한 형태의 종교적 신앙과 직업윤리 사이에 과연 그리고 어떤 점에서 특정한 '선택적 친화력'이 인식될 수 있는지 연구하는" 것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 경우 종교적 이념이 생활양식의 하부구조를 구성한다. 사실 일견 하등의 연관성도 존재하지 않는 이 범주 사이에 이처럼 하부구조와 상부구조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방법론적으로 도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역사적 사실에 대한 경험적 진술일 따름이다. 인간의 문화적 삶에서는 내적·정신적 요소들과 외적·물질적 요소들 사이에 아주 다양한 관계가 성립한다. 즉 저해하는 관계, 중립적인 관계 또는 정초하는 관계가 성립할 수 있으며, 또한 일방적 관계나 상호적 관계가 성립할 수 있다. 이처럼 경험적으로 다양한 요소들 사이에 다양한 양태의 관계가 성립할 수 있는 역사적 개연성에 대한 방법론적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 베버가 도입한 것이 바로 '선택적 친화력'인 것이다.

 

선택적 친화력이란 개념이 처음 사용된 곳은 화학이다. 화학자들은 이 개념으로 원소들 사이의 결합 관계를 설명했다. 그러다가 1809년에 출간된 괴테의 소설 『선택적 친화력』(Die Wahlverwandtschaften)에 의해 인간 세계에 적용되었다. 베버는 바로 이것을 역사적 연구에 대한 방법론적 사유에 도입했던 것이다.

 

 -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옮긴이 해제 <종교 ·경제 ·인간 ·근대> 중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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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은 직무는 강제가 가장 적은 직무이다. 예지가 자기 힘에 맞춰서 욕망을 조절해 주는 자들에게는 그 예지가 얼마나 좋은 일을 해 주는 것일까! 그보다 더 유용한 지식은 없다. 소크라테스가 입버릇처럼 늘 하던 '자기 힘에 맞게'라는 말은 대단히 알찬 말이다. 우리 욕망을 가장 쉽고 가까운 것으로 설정하여 거기에 멈추게 해야 한다.

 - 몽테뉴

 

 * * *

책읽기 혹은 책 구매에도 엄연히 '순위'가 있다는 걸 늘상 잊지 않도록 우리에게 깨우쳐주고 다그치기도 하는, 그런 곳이 다 있을까? 정말 있다. 바로 이곳 알라딘이다. 잊을 만하면 '결코 잊지는 말라'고 애써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게 상술임을 뻔히 알면서도 우리는 기꺼이 그 '순위표'를 들여다보며 즐거워하거나 혹은 실망한다. 설마 거기에 분노하는 사람들까지야 없으리라 믿고 하는 얘기다.

'책읽기'를 둘러싼 (알라딘 내에서의) 제반 활동에 대한 '종합 명세서'는 아무래도 연말이 가장 알찬(?) 듯하다. 그렇다고 제 생일에 슬며시 내미는 중간 명세서가 그리 허접한 것도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연말이 되기도 전에 뜬금없이 펼쳐보게 된 '중간 정산 내역'이 무려 16개 항목에 이른다. 그 가운데 내게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항목 몇 가지만 '나'를 기준으로 간략히 살펴보고 싶다.

①  599권, 247,178페이지

 

대략 2003년에 알라딘에 둥지를 튼 셈 치고는 그리 많은 책을 산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사들인 책을 모조리 다 읽은 것도 아니고. 그래도 나름대로는 책을 사는 데 꽤나 신중한 편이어서 '읽지도 않을 책'을 마구잡이로 사들인 경우는 거의 없었던 듯하다. 평균 쪽수가 412쪽에 이르는 점도 그리 기분나쁜 수치는 아니고.

 

 

② 8,380,120원, 7,530번째




책을 사들인 금액이 '많다'는 생각은 여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늘 적으면 적었지 많다는 쪽으로는 좀처럼 생각이 미치지 않는 것이 책에 대해 지출하는 비용이라 여긴다. 그러니 저 금액에 대해서 내가 무슨 특별한 느낌이 들 리 있을까. 그런데 7,530번째라는 숫자에 대해서는 묘한 감정이 생겨난다. 누군가는 1번째(전국 수석?)일 테고, 또 분명 어느 누군가는 100,000번째일 텐데, 각자 자신의 '순위'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릴까 궁금하다. 나는? 글쎄? 이 순위가 하필이면 왜 학력고사때 받아든 실망스러웠던 전국 석차와 비슷할까?


③ 50대, 1,494번째


나는 아직까지도 '50대'라고 특별히 다를 건 없다고 믿고 싶다. 그리고 책 구매 금액이 그리 중요한 건 아니지 않나?

 

 노년의 주름살

우리의 심령은 노년기에는 젊은 시절보다 더 번거로운 폐단, 불완전과 질병에 매이기 쉬운 것 같다. 어리석고 노쇠한 자존심과 진력이 나는 잔소리, 사귈 수 없는 가시 돋친 성미, 미신, 그리고 사용할 기회도 없는데 재간에 관한 꼴같잖은 걱정 따위 말고도 더 많은 시기심과 부정과 악의를 발견한다. 노년은 우리의 이마보다도 정신에 더 주름살을 붙여 준다. 그리고 늙어 가며 시어지고 곰팡내 나지 않는 심령이란 없으며, 있다 해도 매우 드물다. 사람은 그 전체가 성장과 쇠퇴로 향해 간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④ 일산동구, 563번째


연령대별 분석에 뒤이어 지역별 분석까지 내놓으니 마치 '지역별 투표 성향'을 보는 듯하다. 어쨌든 내가 사는 동네라고 해서 다른 동네와 특별히 다를 건 없지 싶다.



⑤ 북플 마니아


북플 마니아에 대해서는 대체로 '신뢰도'를 매우 낮게 평가하는 입장이어서 뭐라 말하기 곤란한데, 유독 생명과학/심리학/정신분석학/뇌과학 분야에서 '한 손' 안에 든다고 한다. 내가 저런 분야의 책을 그토록 열심히 읽었었나 싶다.

 


⑥ 80세까지 1,590권


이번에 알게 된 정말 '충격적인' 소식이다. 나는 대략 앞으로 (남은 여생 동안) 1,000권의 책도 읽기 어렵다고 생각해왔다. 굳이 자세히 따져보진 않았지만 말이다. 나이가 들수록 무엇보다도 '독서 의욕'이 차츰 떨어질 테고, 언젠가는 눈도 침침해 질 게 뻔하니 말이다. 그런데도 '지금처럼' 계속 책을 읽는다면 무려 1,590권의 책을 읽을 수 있다니! 정말 놀랍고도 기쁘다. 아직도 늦지 않았구나, 앞으로 죽기 전까지 '이름만 들었던' 숱한 명저들을 차례차례 섭렵해보자, 이런 생각부터 앞선다. 알라딘이 아니라면 쉽게 내밀 수 없는 '잔존 독서량 예측'이 아닐 수 없다 싶다. 결론은 매번 뻔한 데도 이렇게 불쑥 내미는 명세서가 매번 궁금하니 나 원 참...

 

"책을 잡고 글을 읽으세"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은 『고백록』의 어느 중요한 단락에서 두 가지 방식의 독서법-소리를 내는 방법과 소리를 내지 않는 방법-이 거의 동시에 이뤄지는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우유부단함에 화가 난 나머지, 또 자신의 과거 죄에 분노를 느끼면서,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결단을 내려야 할 시간이 왔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며 그때까지 자신의 여름 정원에서 (큰 소리로) 함께 책을 읽고 있던 친구 알리피우스 곁을 빠져 나와 무화과 나무 밑으로 몸을 던져 흐느껴 울었다. 바로 그때 근처의 어느 집에서 어린이(소년인지 소녀인지, 그는 밝히지 않았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노래의 후렴이 "책을 잡고 글을 읽으세"였다. 그 노랫소리가 자신을 향한 것이라 믿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알리피우스가 아직도 꼼짝 않고 앉아 있는 곳으로 다시 달려가 미처 다 읽지 못했던 바울의 『사도행전』한 권을 집어들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나는 그 책을 집어 펼친 뒤 시선이 가장 먼저 닿은 첫 부분을 소리내지 않고 읽었다"고 말한다. 그가 소리내지 않고 읽은 단락은 로마서 13장으로, "육신을 위해 양식을 준비하지 말고 그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갑옷처럼' 걸쳐라"라는 훈계였다. 혼비백산한 그는 문장의 끝에 이른다. '믿음의 빛'이 그의 가슴에 충만하고 '회의의 어둠'은 말끔히 걷힌다.

 - 알베르토 망겔, 『독서의 역사』 중에서

 

http://www.aladin.co.kr/events/eventbook.aspx?pn=150701_16th_records&custno=64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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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5-07-03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분석이십니다. 80세까지 쭈욱! 같이 읽어요^^

oren 2015-07-03 08:44   좋아요 1 | URL
보물선 님의 `명세서`는 정말 어마어마하네요.
님께서 80세까지 쭈욱 `지금처럼` 읽으시면 아마 100층도 쉽게 넘길 듯해요! 화이팅입니다.

2015-07-03 08: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03 08: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08 1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08 17: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공연하게? 또는 은밀하게?

 

 

"오오, 필멸의 존재로 태어난 우리 모두가 되돌아오는

이 지하 세계를 다스리시는 신들이시여. 거짓말과

애매모호한 말은 집어치우고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허용되고

또 그대들이 허락해주신다면, 내가 이리로 내려온 것은

어두운 타르타라를 구경하려는 것도 아니고, 메두사 같은 괴물의,

뱀들이 친친 감고 있는 세 개의 목에 사슬을 채우려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이리로 온 것은 아내 때문입니다. 발에 밟힌 독사가

그녀에게 독을 퍼뜨려 그녀의 꽃다운 청춘을 앗아갔으니까요.

나는 참고 견딜 수 있기를 바랐고, 아닌 게 아니라 또 그렇게 하려고

노력도 해보았습니다. 하나 아모르가 이겼습니다.

그분은 여기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상계(上界)에서는

잘 알려진 신이지요. 아마 여기서도 그럴 겁니다.

그리고 옛날의 납치 이야기가 거짓말이 아니라면

아모르는 그대들도 맺어주었습니다. 공포로 가득 찬 이 장소들과,

이 거대한 카오스와, 이 광대한 침묵의 왕국의 이름으로 청하옵건대,

너무 일찍 풀린 에우뤼디케의 운명의 실을 다시 짜주십시오.

우리는 모두 그대들에게 귀속됩니다. 잠시 지상에서

머문다 해도 머지않아 우리는 한곳으로 달려갑니다.

우리 모두는 이곳으로 향하고, 이곳이야말로 우리의 마지막 거처이니

그대들이 인간의 종족을 가장 오랫동안 통치합니다.

그녀도 명대로 살다가 때가 되면 그대들의 지배를 받게 될 것입니다.

운명이 내 아내에게 그런 특혜를 거절한다면 나는 단연코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두 사람이 죽게 되니 그대들은 기뻐하실런지요!"


 - 오비디우스, 『원전으로 읽는 변신 이야기』

 

 * * *

 

어느날 느닷없이 뻥 터져나온 '신경숙 표절 사건'도 벌써 보름 가까이 지난 듯하다. 그동안 내가 이 사건을 바라보며 떠올린 '낱말들'만 여기에 주욱 나열하더라도 아마 몇 줄은 족히 채울 수 있지 않았을까. 그만큼 나는 이번 사건을 둘러싸고 한꺼번에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온 여러 글들을 틈날 때마다 제법 열심히 찾아 읽었다. 물론 내가 온갖 다양한 매체에 올라온 글들을 '심각한 이해당사자'가 된 것처럼 눈을 부릅뜨고 살핀 건 아니다. 그저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멀찍이 떨어져 이번 사건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구경꾼'의 심정일 뿐이었다. 그러니 내가 이번 일을 바라보며 떠올렸던 낱말들이라고 해봐야 다른 대다수 사람들의 마릿속에 떠오른 그것들과 그리 다를 리는 없었다. 쉽게 말하자면 '더럽고, 치사하고, 짜증나고, 한심스럽고, 참담하고, 어이없는' 그런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단어들, 가령 거짓말, 사기, 속임수, 분개, 오만, 몰염치... 와 같은 단어들이 대부분이었다.

 

사람도 결국 그 오랜 유래를 따지고 거슬러 올라가 보면 원숭이에서 진화한 존재일 뿐이다. 그래서 유달리 남의 흉내를 내는 데 타고난 소질을 발휘한다. 모방 본능은 사람의 본성 가운데 결코 제거할 수 없는 뿌리깊은 본능이다. 프랑스 역사상 가장 뛰어난 글쟁이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몽테뉴가 이미 오래 전에 '인류의 모방 본능'에 대해 유난히 깊은 관심을 쏟은 끝에 그 점에 대해 아주 많은 말들을 한꺼번에 쏟아내 놓았다고 해서 별로 이상할 건 없다.

 

우리에게 가장 많은 짐승은, 모든 짐승들 중에서 가장 추하고 못난 짐승이다. 과연 외부에 나타난 모습과 얼굴의 형태로 보아서, 그것은 원숭이일 것이다.

가장 못난 짐승인 저 원숭이, 어찌도 그리 우리를 닮았는가!                                                   (엔니우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사실 몽테뉴보다 조금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 보면, 문학의 기원 또한 '모방'에서 비롯되었음을 아리스토텔레스는『시학』에서 명백히 밝혀 놓았을 정도이다. 훌륭한 역사가였던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라는 방대한 저작을 통해 인류 역사 발전의 근원적인 힘을 결국 '모방'에서 찾을 정도였다. 그러니 도대체 참을 수 없는 뿌리깊은 욕망인 '모방 본능'을 그 누가 무작정 탓할 수가 있겠는가.

 

모방한다는 것

모방한다는 것은 어렸을 적부터 인간 본성에 내재한 것으로서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도 인간이 가장 모방을 잘하며, 처음에는 모방에 의하여 지식을 습득한다는 점에 있다. 또한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모방된 것에 대하여 쾌감을 느낀다.
이러한 사실은 경험이 증명하고 있다.

 -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중에서 


그런데 다른 일도 흔히 그렇지만 '본능' 또한 항상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잘 쓰면 약이 되지만 잘못 쓰면 독이 된다는 사실이다. 하긴 인간의 욕망 가운데 타고난 본능대로 몸을 움직일 경우 대략 낭패를 보지 않을 욕망이 과연 얼마쯤이나 있을까마는.

 

어쨌든 우리 모두는 결국 필멸의 존재들이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결국 '어두컴컴한 지하세계'에 들어갈 것이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떠올리기조차 싫어하는 그 지하세계를 자발적으로 애써 찾아간 인물들이 더러 있었다. 그들은 '문학 역사상' 아주 걸출한 주인공들 가운데 아주 가끔씩 나타났다. 굳이 호메로스나 베르길리우스가 쓴 위대한 서사시의 주인공이었던 오뒷세우스나 아이네아스의 이야기를 꺼낼 필요도 없다. 그런 인물들의 '중차대한 임무'는 우리들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어서 그들의 절박한 얘기조차 우리들 가슴에는 좀처럼 와 닿지 않는다. 우리에게 훨씬 더 가까이 다가오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은 오르페우스이다. 노래 하나로 온 우주를 감동시켰다는 전설의 가인 오르페우스만큼 '절절한 심정'으로 지하세계를 자발적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간 인물이 또 있었을까.

 

물의 요정들을 데리고 풀밭을 거닐다가 뱀 이빨에 복사뼈를 물려 꽃다운 나이에 덜컥 딴 세상 사람이 되고 만 아내 에우뤼디케의 신랑이 바로 전설의 가인(佳人) 오르페우스였다. 아내를 잃고 살아갈 의욕을 한순간에 다 잃어버린 오르페우스에게 남겨진 일이란 오로지 '저세상 끝까지 다 뒤져서라도' 기어코 아내를 다시 찾아내는 일뿐이었다.

 

에우뤼디케를 데려오기 위해 지옥으로 내려가는 오르페우스(부분)
장 레스투(Jean Restout), 18세기경, 루브르 박물관

 

그가 저승에 당도하자말자 '사랑스럽지 못한 왕국'을 다스리는 명부의 신들에게 자신의 방문 목적을 밝히는 대목이 자못 인상적이다. '거짓말과 애매한 말은 집어치우고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자신은 바로 아내 때문에 그 멀고도 험한 길을 마다않고 찾아왔다는 것이다. 인간 세계에서 도대체 얼마나 '거짓말과 애매한 말'이 많았으면, 그래서 지하 세계의 신들조차도 허구헌 날 지겹도록 들어야만 했을 지 모를 바로 그 '거짓말과 애매한 말'을 자신은 결코 꺼내지 않겠다는 다짐부터 먼저 꺼내는 오르페우스를 보라.

 

'말만 하면 곧바로 시가 되는 바람에' 수입이 좋은 변호사 직업조차 포기할 만큼 타고난 시인이었던 오비디우스조차도 '남을 속이는 거짓말'이 얼마나 끈질기게 우리의 입에서 떨어지기 힘든 지를 결코 모르지 않았다. 오르페우스가 목숨을 걸고 자신의 아내인 에우뤼디케를 찾아 지하세계로 찾아간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혹여 '거짓말과 애매한 말'이 끼어들어 (신들로부터 의심을 받게 된다면) 자신의 간절한 소원을 망치지나 않을까 두려워 조바심을 내는 느낌마저 불러일으키는 듯하다.

 

신화에서 현실로 돌아오자. 신화에서든 현실에서든 '우리는 결국 언젠가는 죽게 될 존재'임엔 다르지 않다. 그리고 누구라도 살아가는 동안 얼마쯤 거짓말을 할 수는 있다. 그게 심각한 거짓말이든 사소한 거짓말이든 별 상관없이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언제나 그 거짓말을 얼마쯤 할 수밖에 없을 당시의 '상황'이 문제가 되는 듯하다. '벽에도 귀가 있다'는 속담을 꺼낼 필요까지도 없다. 백주대낮에, 만천하에, 공개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상황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 자신이 명백한 거짓말을 하고도 남들이 전부 바보가 되어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면 결국 자신이 거짓말쟁이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일이 결국 그렇게 풀리고 나면 그 자신은 아마도 평생을 거짓말쟁이로 낙인찍힌 채 살아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심지어는 죽고 난 이후까지도 '영원히' 거짓말쟁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길이 없을지 모른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토록 자주 거짓말쟁이들의 말을 듣고 살아야 할까. 그건 아마도 '허황된 환상'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자신을 너무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오만과 허영'이 그런 거짓말을 하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종용하기 마련일 테고 끝내 사람들은 나약하게도 거짓말의 욕망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명망있던 사람들이 '거짓말' 때문에 평생 고개를 들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보아왔던가. 줄기세포 가짜 논문으로 온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국립 서울대 박사와 숨겨놓은 아들을 두고 유전자 검사까지 자청했던 전직 검찰총장은 '그날 이후' 어디로 꼭꼭 숨었는지 행방조차 묘연할 정도이다.

 

근거 없는 칭찬에 기뻐하는 것

근거 없는 칭찬에 기뻐하는 것은 결코 있지도 않았던 모험담을 이야기하면서 동료들의 존경을 받으려고 하는 우매한 거짓말쟁이, 자기에게는 그럴 자격조차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높은 신분인 체하고 기품 있는 체하는 난봉꾼(coxcomb)들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틀림없이 자신들은 갈채를 받고 있다는 공상에서 기뻐한다. 그러나 그들의 허영은 어떤 이성적인 사람이 어떻게 속아 넘어갈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허황된 환상으로부터 발생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속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입장에 자신을 놓고 자기 자신에 대하여 가장 큰 감탄을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동료들에게 실제로 어떻게 보이고 있을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동료들이 자신들을 본다고 그들이 믿고 있는 그러한 관점에서
자신들을 보는 것이다.

그들은 피상적인 나약함과 우매함 때문에 자신의 눈을 내부로 돌리지도 못하고, 또한 만약 진실이 알려진다면 자신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얼마나 경멸스런 인간으로 보일 것인지 그들의 양심이 말해 줄 그런 경멸스런 관점에서 그들 자신을 바라보지도 못한다.


 -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중에서

 

경제학자보다는 도덕철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훨씬 더 명망이 높았던 아담 스미스는 '인간의 도덕 감정'에 대해 탁월한 통찰을 보여준 인물이다 .'인간의 유래와 진화'에 대해 불멸의 업적을 남긴 찰스 다윈조차도 그에게 한 수 배웠을 정도이다. 그런 아담 스미스가 '수치심'이나 '양심의 가책'이라는 형태로 끝없이 타오를 '보복의 화염'을 놓쳤을 리는 만무하다.

 

수치심과 양심의 가책이란 보복의 화염

가장 그럴 듯한 상류사회의 모든 화려한 허식 속에서도, 돈에 매수된 고위 인사들과 저명한 학자들의 비열한 아첨 속에서도, 일반 민중들의 어리석지만 천진난만한 환호 속에서도, 그리고 모든 정복과 전쟁에서의 승리로 교만해진 가운데서도, 내심에서 은밀하게 솟아나는 수치심과 양심의 가책이란 보복의 화염은 그를 휩싸서 놓아주지 않는다. 그리고 영예가 사방팔방으로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때에도 그 자신은 자신의 상상 속에서 어둡고 추악한 불명예가 그를 바짝 뒤쫓고 있으며 언제라도 그를 덮치려고 하는 것처럼 느낀다.


 -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중에서

 

어쨌든 '거짓말과 애매한 말'로 남을 속이는 '배반과 기만'은 참으로 몹쓸 악덕이다. 그에 따른 악영향 또한 너무 광범위하다. 그래서 자연히 '치욕'이라는 관념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스티븐 핑커 또한 인간 심리의 진화 과정에서 가장 고도로 발달한 감정 가운데 하나가 '거짓말쟁이를 구별하는 기술'이라고 말할 정도였으니, 그 해악이 얼마나 오랫동안 인류에게 치명적으로 나쁜 것이었던지를 능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배반(背叛)과 기만(欺瞞)

배반(背叛)과 기만(欺瞞)은 극히 위험하고 극히 두려운 악덕이다. 그리고 동시에 매우 용이하게, 그리고 많은 경우 매우 안전하게 빠져들게 되는 악덕이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어떤 악덕들보다 이것에 대해 더 많은 경계심을 갖는다. 그래서 우리의 상상력은 모든 사정과 모든 경우에 있어서 이들에 대하여 치욕의 관념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은 여성에게 있어서의 정절(貞節)의 상실과 유사하다. 정절은, 마찬가지 이유로, 우리가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서 극도로 조심하는 미덕이다. 그리고 우리의 감정은 양쪽 모두에 관해서 똑같이 민감하다. 정절의 파기는 회복할 수 없는 불명예를 준다. 어떤 상황이나 어떤 유혹도 변명거리가 되지 못한다. 어떠한 슬픔이나 또는 어떠한 후회도 그것을 속죄하지 못한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너무나 민감하기 때문에, 심지어 강간(强姦)당한 것까지도 수치스럽게 여기며, 마음속으로 스스로 무고(無辜)함을 믿는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상상 속에서 더럽혀진 육체를 씻어 주지는 못한다.


 - 아담스미스, 『도덕감정론』 중에서


 

오래 전에 진작 내려졌어야 마땅할 어느 작가의 작품에 대한 '표절 확진 판정'이 왜 이토록 오랜 시간을 끌고 나서도 여전히 깔끔하게 마무리되지 못하는 걸까. 그리고 그 작가는 도대체 너무나도 뻔한 사실을 두고도 그토록 애써 '진실'을 감춘 채 앞뒤조차 맞지 않는 거짓말을 태연히 우리 앞에 내놓는 것일까. 우리 사회는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거짓말쟁이들을 넓은 아량(?)으로 계속 용서해줘야 할까. 도대체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가짜'에 대한 판별이 이토록 어리숙하고 흐리멍덩하게 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현애살수(懸崖撒水)라는 말이 있다. 벼랑(崖)에 매달려(懸) 잡고 있는 손(手)을 놓는다(撒)는 뜻이다. 찾아보니 송(宋)나라 야부도천(冶父道川) 선사의 게송(偈頌)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천 길 낭떠러지 위에 매달린 사람이 어떻게 '붙잡은 나뭇가지'를 손에서 놓을 수 있겠는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국 방하착(放下着)의 지혜를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거꾸로 '단축'하고 만다. 마치 흉내내기를 몹시도 좋아하는 원숭이가 호리병 속에 담긴 먹이를 손에 움켜쥔 채 '아침이 될 때까지' 손을 빼려고 애를 쓰다가 결국 알제리 농부에게 붙잡히는 꼴과도 닮았다. 스스로도 표절한 사실조차 모른다고 발뺌을 하는 작가를 보니 자꾸만 흉내내기를 몹시도 좋아하면서 한편으로는 손에 움켜쥔 먹이는 끝내 놓치기 싫어하는 우리의 머나먼 옛 조상의 모습이 어른거리는 느낌을 좀처럼 떨쳐내기 어렵다.

 

원숭이의 욕심

수많은 사람들이 돈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자신을 내버리는 방식은 원숭이의 욕심을 연상시킨다. 알제리의 카바일 족(주로 알제리 북부의 해안 산악 지대에 사는 부족-역자주) 농부가 호리병을 나무에 단단히 붙들어 매놓고 그 안에 약간의 쌀을 넣어두었다. 호리병의 주둥이는 원숭이의 손이 간신히 들어갈 정도의 크기를 갖고 있다. 원숭이는 밤에 나무로 와서 손을 집어넣고 쌀을 움켜쥔다. 쌀을 쥐고 있어서 손이 빠지질 않지만 원숭이에겐 쌀을 놓고 손을 뺄 지혜가 없다. 그렇게 해서 원숭이는 아침이 될 때까지 거기에 서 있다가 사람에게 잡히고 만다.


 - 새뮤얼 스마일즈, 『인생을 최고로 사는 지혜』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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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너무 무거워질까 두려워 끝내 이 글에 담아내지 못한 책 속 구절들)

 

 

거짓말

거짓말이라는 것은 천한 악덕이다. 그리고 옛 사람(플루타르트를 말함)은 이것을 수치스럽게 묘사하며, 그것은 신을 경멸하고 동시에 인간을 두려워한다는 증거를 보여 주는 일이라고 하였다. 이 악덕의 흉칙스럽고 비굴하고 난잡스러움을 이보다 더 풍부하게 표현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인간에 대하여 비굴하고 신에 대해서 용감하다는 것보다 더 비굴한 일을 달리 상상해 볼 수 있는가? 우리들의 상호 양해는 오로지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 말을 그릇하는 자는 공공 사회를 배반하는 것이다. 말은 그 방법으로 우리의 의지와 사상을 서로에게 전달하는 유일한 연장이다. 그것은 우리들 심령의 통역이다. 말이 우리에게 없으면 우리는 서로 의지할 수 없으며, 알아보지도 못한다. 말이 우리를 속인다면 우리의 모든 관계를 부수며 우리 사회의 모든 연락을 무너뜨린다.
(737쪽)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손에 든 무기

온갖 협잡으로 게임이 진행되는 이 세계에서 사람은 강철같은 의지를, 운명의 일격을 막아낼 갑옷을, 사람들
을 밀치며 나아가기 위한 무기를 지녀야 한다. 인생은 하나의 기나긴 전투다. 인생의 매 단계에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볼테르가 정확히 말했듯이, 우리가 성공할 때는 칼날 바로 끝에서 성공하며, 우리가 죽을 때는 손에 든 그 무기로 죽는다.


-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난 사기 사건에 공범이 될 순 없소. 암묵적인 동의를 통해서라도 말이오.

"유감이오, 친애하는 선생. 정말 유감이오. 당신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건 원칙의 문제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하오. 난 사기 사건에 공범이 될 순 없소. 암묵적인 동의를 통해서라도 말이오. 당신은 정말 멋진 소장품들을 갖고 있소. 그러니 이번엔 솔직하게 당신이 속았다는 걸 인정해야 하오. 난 작품의 진위 문제에 대해 타협 같은 건 하지 않소. 속임수와 거짓된 가치가 도처에서 기승을 부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확실성이 있다면 걸작의 그것 아니겠소. 우리는 온갖 위조범들로부터 우리 사회를 지켜야 하오. 내게 예술작품이란 신성한 거요. 나에게 작품의 진위는 종교라고 할까 ······. 당신의 반 고흐 작품은 가짜요. 그 불행한 천재는 살아 있는 동안 충분히 배반을 맛보았소. 적어도 사후에는 우리가 그를 배신으로부터 보호해줄 수 있고, 또 그래야 하잖소."

"말 다했소?"

 

"놀라운 일이오. 당신처럼 명망 있는 사람이 내게 그런 조작에 공범이 되어달라고 하다니······."

 - 로맹 가리, 『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가짜>  중에서

 

 

오만(傲慢)한 사람

오만(傲慢)한 사람은 표리부동(表裏不同)하지 않고, 마음속 깊숙이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러한 확신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알아맞히기는 흔히 어려울 수도 있다. 그는 당신이, 그가 당신의 입장에 있을 때 자기 자신을 바라볼 그런 눈으로, 자기를 보아주기를 바란다. 그가 당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그가 생각하는 공정(公正)함이다. 만일 그가 자기 자신을 존경하는 것만큼 당신이 자기를 존경해 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는 모욕(侮辱)을 당한 것 이상으로, 마치 그가 정말로 어떤 침해를 당한 것처럼 화를 내고 분개한다. 그러나 그런 때조차도 그는 자신이 당신에게 그런 요구를 하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당신에게 존경을 간청하려고 하지 않으며, 그런 행동을 경멸하는 척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는, 자기 자신의 우월함을 당신으로 하여금 느끼도록 하기보다는 당신 자신의 비천함을 스스로 느끼도록 함으로써, 자기 스스로 상정(想定)한 지위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마치 자기 자신에 대한 당신의 존경심을 자극하기보다는 오히려 당신 자신에 대해 당신이 굴욕감을 느끼도록 자극하기를 더욱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양심, 가슴 속의 동거인(同居人), 내부 인간, 우리 행위의 재판관 및 조정자(調整者)

그것은 이성(理性), 천성(天性), 양심, 가슴 속의 동거인(同居人), 내부 인간, 우리 행위의 재판관 및 조정자(調整者)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할 때마다 우리 내심의 가장 몰염치한 격정을 향하여 깜짝 놀랄 정도의 큰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소리치는 것은 바로 이 사람이다. 즉, 우리는 대중 속의 한 사람에 불과하고, 어떠한 점에 있어서도 그 속의 다른 어떠한 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으며, 우리가 그처럼 수치(羞恥)를 모르고 맹목적으로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우선시킨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분개와 혐오와 저주의 정당한 대상이 될 것이라고, 우리가 우리 자신들에 관련된 모든 것이 실제로는 사소한 것이라는 사실을 배우는 것은 오직 이 중립적 방관자로부터이고, 이 중립적 방관자의 눈에 의해서만 자애(自愛)가 빠지기 쉬운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을 수 있다. 관용의 적정성과 부정(不正)의 추악성, 우리 자신의 큰 이익보다 다른 사람들의 더 큰 이익을 위하여 우리 자신의 그것을 양보하는 것의 적정성과, 우리 자신의 최대의 이익을 얻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가장 사소한 이익까지 침해하는 행위의 추악성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바로 이 공평무사한 중립적 방관자이다.

많은 경우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신성한 미덕을 행하도록 촉구하는 것은 우리의 이웃에 대한 사랑도 아니고 인류에 대한 사랑도 아니다. 그러한 경우에 통상 생기는 것은 보다 강한 사랑, 보다 강력한 애정, 즉 명예스럽고 고귀한 것에 대한 사랑, 우리 자신의 성격의 숭고함, 존엄성, 탁월성에 대한 사랑인 것이다.


 -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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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모방자, 꾸미는 자, 모조자, 맹목적인 모방자들은
예술을 개념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참된 작품을 보면, 마음에 들거나 효과가 뚜렷한 점에만 관심을 두고, 이것을 명확하게 하여 개념으로서, 즉 추상적으로 파악한 다음에 공공연하게 또는 은밀하게 교활한 생각을 품고 모방한다. 그들은 기생 식물처럼 타인의 작품에서 양분을 섭취하고, 해파리처럼 그 양분의 색깔을 갖는다. 비유를 사용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끌어 넣은 것을 잘게 깨어 혼합시킬 수는 있지만, 영원히 소화할 수 없는 기계와 같다. 따라서 그 혼합물 속에서는 언제나 다른 성분을 발견할 수 있고 그것을 거기에서 가려낼 수 있다.······· 모방자나 꾸미는 자는 타인의 걸작을 개념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개념은 결코 작품에 내적 생명을 부여할 수 없다. 시대 일반, 즉 그 시대의 다수를 점하는 어리석은 대중은 기교를 부린 작품에 기꺼이 갈채를 보내며 환영한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은 2,3년이 지나면 재미가 없어져 버린다. 왜냐하면 시대정신, 즉 유행의 개념이 변했기 때문인데, 이러한 작품의 유일한 근거는 이 유행의 개념이다.

자연과 인생에서 직접 이끌어 낸 참다운 작품만이 자연이나 인생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젊고 언제까지나 근원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참된 작품은 특정한 시대의 것이 아니라 인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작품은 그 시대에 영합하는 것을 경멸하고 시대로부터는 냉담한 대우를 받으며, 그때그때의 잘못이 그 작품에 의해 간접적이고 소극적으로 발견되기 때문에, 나중엔 진가를 인정받게 된다. 또 이러한 작품은 진부해지지 않고, 시대가 지난 후에도 여전히 신선하고 언제나 새롭게 사람의 마음에 호소한다. 이렇게 인정받은 이상, 이제는 무시되거나 오인받을 염려는 없어진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판단력이 출중한 소수의 사람들의 칭찬으로 영광의 왕관을 쓰고 진가를 인정받게 되기 때문이다.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중에서

 

 * * *

 

 

어느 인기 작가의 작품들에서 그토록 많은 '표절'이 그토록 오래 숨어 있었다니 그저 놀라우면서도 한편으로는 황당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런 사실들이 이미 오래 전부터 '공공연한 비밀'로 치부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관련 기사를 검색하다가 아래와 같은 오래된 글을 찾아 읽어보니 더욱 놀랍다. 메르스 증상이 의심되는 환자를 두고 그저 쉬쉬하고 숨기기에만 급급했던 것과 무엇이 다른가. '표절의 기나긴 잠복기'에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제발 이번엔 '확진 판정'으로 이어져 '격리'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부터 앞선다.

 

http://blog.naver.com/ye0jung/2128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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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거짓말과 애매모호한 말은 집어치우고...
    from Value Investing 2015-07-01 15:55 
    "오오, 필멸의 존재로 태어난 우리 모두가 되돌아오는이 지하 세계를 다스리시는 신들이시여. 거짓말과애매모호한 말은 집어치우고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허용되고또 그대들이 허락해주신다면, 내가 이리로 내려온 것은어두운 타르타라를 구경하려는 것도 아니고, 메두사 같은 괴물의,뱀들이 친친 감고 있는 세 개의 목에 사슬을 채우려는 것도 아닙니다.내가 이리로 온 것은 아내 때문입니다. 발에 밟힌 독사가그녀에게 독을 퍼뜨려 그녀의 꽃다운 청춘을 앗아갔으니까요.나는 참
 
 
 

 

 - 동화 속으로 들어온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여행도 어느새 오늘이 마지막이다.
    화사한 빛깔의 우산 아래 알록달록한 색깔들을 지닌 핸드백들조차 여행자에겐 구경거리 그 자체이다.
    여행이란 때론 `익숙한 것들과의 이별` 혹은 같은 뜻의 다른 말인 `낯선 것들과의 조우`일 테니까...

 

 

 - `영웅 광장`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는 사이에 `세체니 다리`를 다시 쳐다봤다.
    1839년부터 10년에 걸쳐 건설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폭파되었다가 재건되었단다.
    그저 `다리` 하나일 뿐인데도 `부다페스트의 상징`으로 격상된 이유를 곰곰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 세체니 다리는 자동차만 건너 다니는 다리가 아니었다.
    이 다리 위를 직접 걸어보기 위해 찾아온 관광객들도 많았고, 다리 자체가 관광코스가 되어 있었다.

 

 

 - 헝가리 국립 오페라 극장의 화려한 내부.
    비록 극장 안까지 완전히 들어가 볼 수는 없었지만 현관만 보더라도 이 극장이 얼마나 화려할지 짐작이 간다.

 

 

 - 혼자서 부다페스트에 머무르는 일이 많았던 황후 엘리자베트는 특히 이곳에 몰래 와서 자주 오페라를 감상했다고.
    그래서 무대 왼쪽 위 발코니는 황후의 애칭을 붙여 `시씨 로제`라고 불린단다.

 

 

 - 언드라시 거리에서 가장 빛나는 건축물인 헝가리 국립 오페라 극장의 외관.
   19세기 후반에 건설된 네오르네상스 양식의 화려한 건물이다.

 

 

 - 언드라시 거리. 선글라스를 낀 남자는 우리 일행의 여행 안내를 맡은 현지 가이드. 훤칠한 키와 외모가 돋보인다.

 

 

 - 이슈트반 대성당의 장엄하고도 화려한 내부.

 

 

 - 본당 중앙의 돔은 높이가 96m에 이른다고 한다.

 

 

 - 이슈트반의 오른손 뼈가 들어 있다는 `성스러운 오른손`을 보기 위해 헤맨 끝에,
    우리 일행 몇 명은 결국 대성당 꼭대기에 있는 돔 전망대까지 올라오고 말았다. 
    결국 오른손은 구경도 못한 채 뜻밖에 `부다 지역`과 `페슈트 지역`을 한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저 멀리 왼쪽으로는 왕궁, 오른쪽으로는 마차시 교회와 어부의 요새까지 보인다.

 

 

 - 이슈트반 대성당의 웅장한 외관.
    헝가리 초대 국왕이자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성인인 이슈트반을 기리기 위해 세운 부다페스트 최대의 성당이다.
    1851년에 착공하여 1906년에 완성되기까지 3명의 건축가가 대성당 건축에 참여했다고..

 

 

 - 시내 투어도 모두 끝나고 다시 자유시간이다. 다시 바찌 거리로 이동중...

 

 

 - 관광객들로 늘 넘쳐나는 바찌 거리에서 동전을 구걸하는 퍼포먼스(?). 이토록 어려운 자세가 가능할까?
    결국 의심많은 이 아가씨한테 딱 걸렸다. 저 사람은 진짜가 아니라 가짜였다! 허수아비가 돈을 벌고 있었던 셈.

 

 

 - 이 아이는 의심많은 아가씨에 의해 결국 `가짜임이 들통난 우스운 꼴`의 허수아비를 한참이나 살펴보고 있다.

 

 

 - 천진난만한 아이들을 보는 건 언제나 흥미롭다. 알록달록한 치마가 예쁜 부다페스트에 사는 아이들.

 

 

 - `도나우 강 크루즈`를 위해 수백 명이 너끈히 탈 수 있는 커다란 유람선에 딸랑 우리 일행만 승선했다.
    최석채 가이드님이 우리를 위해 미리 준비한 `토카이 와인`을 테이블 위로 내놓고 있다.

 

 

 - 저녁 8시에 승선해서 10여 분쯤 달리자 어느새 국회의사당 건물이 나타난다. `야경`을 보기엔 아직 너무 밝다.

 

 

 - 토카이 와인은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왕의 와인, 와인의 왕`이라고 극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16세기 중반에 토카이 지방에서 세계 최초의 귀부 와인(botrytised wine, ~ )이 개발되어 일약 유명해졌다.

 

 

 - `도나우 강의 진주`로 불리는 부다페스트에 저녁 노을이 차츰 물들기 시작했다.
    유람선에서는 아까부터 요한 슈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의 선율이 계속 흘러 나오고,
    토카이 와인과 도나우강의 물결 위로 시원하게 부딪혀오는 저녁 강바람에 취해 우리는 정신이 아찔할 지경이다.

    도나우강은 알프스에서 흘러 내려 오스트리아의 평원을 건너 북쪽 빈을 지나 멀리 동쪽 흑해로 흘러가는
    매우 긴 강이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는 왈츠곡 가운데서도 유난히 아름다운 곡으로, 유유히 흐르는 
    이 강의 양쪽 언덕의 아름다운 물 위에서 즐겁게 노니는 온갖 새들과 사람들과 강바람까지 연상케 한다.

 

 

 - 세체니 다리 아래를 지날 때쯤 부다페스트의 밤을 화려하게 수놓을 `야간 조명`이 막 켜지기 시작했다.

 

 

 - 도나우 강변에서도 유난히 아름다운 건물이 바로 이 국회의사당 건물이다.
    건설하는 데 20년(1884∼1904)이나 걸렸으며 `내부의 모든 것들이 현란함으로 매혹된다`는데,
    우리는 그저 화려한 불빛으로 장식된 야경만 봐도 충분히 매혹되고도 남을 정도였다.

 

 

 - 정면에서 바라본 국회의사당. `빈의 의사당을 능가하기 위해` 더욱 현란하고 호화롭게 지어진 건물이라고 한다.

 

 

 - 크루즈가 끝날 무렵 문득 뒤돌아 보니 저 멀리 도나우 강 위로 펼쳐진 온갖 건물들이 마치 `동화속`처럼 여겨진다.

 

 

 - 우리 일행 몇몇은 도나우 강 크루즈가 끝난 뒤에도 도나우 강변을 오르내리는 트램에 계속 머물렀다.
    한참 후에 트램에서 내린 우리는 걸어서 도나우 강가로 다가가 아름다운 야경을 좀 더 즐겼다.
    이 왕궁이 최초로 지어진 것은 13세기 중반이지만 몽골 군의 습격, 오스만투르크 군의 공격 등으로 
    여러 차례 파괴되었다가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에 마침내 큰 궁전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헝가리 국립 갤러리, 부다페스트 역사 박물관, 세체니 도서관 등으로 쓰이고 있다고.

 

 

 - 세체니 다리의 야경. 다리 너머로 저 멀리 마차시 교회와 어부의 요새도 보인다.
    길이 375m, 너비 16m인 이 다리는 중앙에 있는 48m의 돌 아치와 사슬에 의해 지탱된다고.

 

 

 - 오늘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헝가리를 떠나는 날이다. 드디어 햇살이 환하게 비친다.
    아무런 일정이 없이 오전 11시에 공항으로 이동 예정이어서 아침 식사 이후에 다시 한번 세체니 다리를 찾았다.

 

 

 - 세체니 다리 위애서 올려다본 왕궁. 
   15세기, 중세 헝가리의 황금시대를 이룩한 마차시 1세 시대에 이 성은 화려한 르네상스 양식으로 다시 지어졌고,
   이탈리아에서 문인들과 예술가를 불러들여 르네상스 문화를 개화시킨 주무대 역할을 하기도 했단다.

 

 

 - 오랫동안 계속 비가 오는 날씨 탓이었는지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가 `불그스레한 도나우`로 변해 있었다.

 

 

 - 실로 오랫만에 본 푸른 하늘과 흰 뭉개구름. 
    강물만은 여전히 `오랫동안 내린 비`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비 온 뒤 불어난 한강`을 꼭 닮았다.

 

 

 - 이 낯선 여행객은 또 어디에서 와서 이곳 세체니 다리 위에서 저 아름다운 풍경을 사진에 담고 있을까.
    여행이 끝나는 이 순간마저 어느새 또다른 여행을 꿈꾸는 건 왜일까. 그건 바로 여행만큼 우리의 삶에 
    본질적이면서도 항구적인 즐거움을 안겨 주는 것도 그만큼 드물기 때문이 아닐까...

   "도착하기만 바란다면, 역마차를 집어타고 갈 수도 있다. 하지만 여행을 하고자 한다면, 걸어가야 한다." 
   장 자크 루소가 그의 저작《에밀(Emile)》에서 한 말이다. 나도 `도착하기` 만을 바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어디에 도착한다는 말인가? 내 마음에 드는 것은, 늘 얘기했던 것처럼, `가는 것` 그 자체다.
    - 베르나르 올리비에, 『여행』수채화판 실크로드 여행수첩 中에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동화속 같은 동유럽 여행`은 이제 끝났다.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다른 여행보다 `훨씬 더 많이 걷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무거운 카메라 가방을 메고 다닐 일이 조금은 걱정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생각했던 것보다 별로 힘이 들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문득 신종 플루가 한창 극성을 부리던 2009년 봄에 미국 동부지방과 캐나다를 여행하던 중에 현지 가이드로부터 들었던 말이 다시금 생각난다. 그때 `다리 떨릴 때 여행 다니지 말고 가슴 떨릴 때 열심히 여행다녀라`던 가이드의 말에 나이 드신 분들이 유별나게 박장대소를 하며 맞장구를 치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다.

무슨 일에든 때가 있다고는 하지만 나는 `여행` 만큼은 예외가 아닐까 싶은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그리스의 비극 시인인 소포클레스는 노년에 성욕에서 벗어난 것을 자랑하며 "나는 거기에서 벗어난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네. 꼭 미쳐 날뛰는 포악한 주인에게서 벗어난 것 같다니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나중에 혹시 늙어서 `여행 의욕`마저 잃게 된다면 삶에서 그것만큼 서러운 일이 또 있을까 싶은 생각부터 떠올린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도 『월든』이라는 책에서 이에 대한 경고를 잊지 않았다.

물론 오래오래 살아서 차비라도 벌어놓은 사람은 언젠가는 기차를 타게 되겠지만 그때는 활동력과 여행 의욕을 잃고 난 다음일 것이다. 이처럼 쓸모없는 노년기에 미심쩍은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인생의 황금 시절을 돈 버는 일로 보내는 사람들을 보면, 고국에 돌아와 시인 생활을 하기 위하여 먼저 인도로 건너가서 돈을 벌려고 했던 어떤 영국 사람이 생각난다. 그는 당장 다락방에 올라가 시를 쓰기 시작했어야 했다.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도 좋은 말을 남겼다. `휴양없는 인생만큼 괴로운 것도 없다. 그것은 여관에 묵지 않으며 오랜 여행을 하는 것과 같다`고 말이다. 당나라의 선승이었던 임제선사는 내가 이 여행기를 통해 마지막으로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다음과 같이 여덟 글자로 매우 간결하게 요약했다.

"卽是現今 更無時節" (지금이 할 때이고, 그 때는 다시 없는 법)

이렇게 길고도 긴 여행 후기를 남기고 보니 이제야 마침내 내가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지녔던 `숙제를 덜한 기분`으로 학교에 가는 심정이 비로소 말끔히 사라지는 듯하다. 미처 못다한 숙제까지 마치고 나니 기분이 날아갈 듯하다. 이쯤에서 마무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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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11 16: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13 1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Nussbaum 2015-06-11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리신 사진과 글.. 마음이 탁 트입니다. 일상 속 마음이 꿈틀하기도 하고요. oren 님 여행 후기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

oren 2015-06-13 13:47   좋아요 0 | URL
Nussbaum 님께서 제가 돌아다녔던 여행 코스를 둘러보셨더라면 훨씬 더 아름다운 사진과 글들을 무수히 쏟아내셨을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음악과 미술에 특별히 남다른 깊이를 지니신 만큼 언제 기회가 되시면 `동유럽 음악&미술 여행`을 해보시면 좋을 듯해요. 음악에 문외한이었던 제 친구도 작년에 `예술의 전당`에서 몇 개월 음악 강의를 듣고 나더니 그 강좌의 수강생들과 함께 `유럽 음악 연주 감상 여행`을 다녀오더라구요.

낭만인생 2015-06-11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이 기가막힙니다.

oren 2015-06-13 13:53   좋아요 0 | URL
카메라에 담지 못한 순간들과 풍경들도 정말 많았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도 있고, 백견이 불여일행이라는 말도 있듯이, 그 무엇보다 직접 그 장소와 시간 속으로 풍덩 빠져 보는 것이 최고일 듯해요. 사진으로는 공기의 기온과 바람의 느낌도, 음식의 맛과 냄새도, 사람들의 목소리와 표정들 까지도 포함해서 그 어느 하나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말이지요.

수이 2015-06-16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ren님 사진과 글에 귀 기울이고 있노라니까 필터 효과 있는 사진은 더 이상 찍고 싶지 않아졌어요. 마음을 꿈틀거리게 만든다는 누스바움님의 말씀 그대로_

oren 2015-06-16 16:27   좋아요 0 | URL
야나 님께서 올리시는 `은근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진들`이 혹시 필터를 쓰신 건가요?
그런 사진들은 풍경사진들과 달라서 경우에 따라 필터를 쓰는 게 훨씬 더 나아 보일지도 모르니 너무 괘념치 않으셔도 될 듯요...

cwk 2015-06-30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람답게 산다는 게 이런거구나 싶네. 오재한 동우 아내의 미소가 정말 행복해 보이네.
사진 하나하나가 작품이고 서정적이네. 참 잘 다녀 왔구만. 부러우이... 행주 동양화 연구모임.

oren 2015-06-30 20:30   좋아요 0 | URL
나이 들어서 아이들도 떼어 놓고 아무런 부담없이 홀가분하게 여행길에 올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정말 `시간을 멈춰 세우는 듯한` 여행을 즐기다 온 듯합니다. 낭만이 가득 넘치는 듯했던 그곳 동유럽의 여러 장소들이 어느새 차츰 그리움으로 번질 만큼 말이지요... 선배님께서도 언제 한번 훌쩍 다녀오시길 바랄께요~~

2015-07-16 06: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16 1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17 05: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19 1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19 2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혜덕화 2015-08-07 1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이 정말 예술이군요.
마치 그 장소에 다시 가 있는 느낌.
동유럽이 그리우면 사진 보러 올게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