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할슈타트로 들어가는 골목을 오가는 여행객들.
    마을로 들어가는 골목이 워낙 좁아 등록된 주민들 차량만 출입이 가능하다.
   우리 일행은 이 마을에서 하룻밤을 묵기 위해 이 좁고 길다란 골목길을 짐가방을 시끄럽게 끌면서 걸어 들어갔다.

 

 

 - 할슈타트에서의 이튿날 점심 메뉴는 바로 이곳에서 잡히는 `송어`로 만든 요리였다.
    비록 `송어회`는 아니었지만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고, 4유로에 마셨던 레드 와인도 무척 좋았다.

 

 

 - 이제는 할슈타트를 떠나야 할 시간.... 
    비가 점점 더 세게 내리니 어느새 짙은 운무가 온 마을을 휩싸고 돌기 시작한다.

 

 

 - 마을에서 떠나 기차역으로 이동 중인 보트 갑판 위에 서서 홀로 비를 맞으며 생각에 잠긴 어느 낯선 여행객.
   이 남자는 도대체 어디에서 와서 또 어디로 가는 것일까? 홀로 이곳에 와서 무슨 생각들을 떠올렸을까?

 

 

 - 마치 간이역 같은 할슈타트 역으로 기차가 들어서고 있다.
    악기를 담은 가방을 양 손에 든 채 모자를 쓴 이 젊은 청년도 혼자 여행중인 모양이다.

 

 

 - 저녁 무렵에 빈 서역에서 가까운 호텔로 이동하여 체크인 후 서둘러 찾아간 곳은 `빈 무지크페라인 황금홀`
    정초마다 전세계에서 5,000만 명 이상이 지켜본다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음악회가 열리는 곳이다.
    빈의 `음악애호가협회`는 1812년에 탄생했고, 무지크페라인은 1870년에 건축됐다고.

 

 

 - 이 공연장이 유럽 최고의 명문 음악당으로 명성을 공고하게 다진 바탕이 된 대공연장 `황금홀`
    지휘자 브루노 발터는 "여기서 처음으로 지휘한 뒤에야 음악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비로소 깨달았다"고 했고,
    프란츠 뵐저-뫼스트는 "음악가들에게 무지크페라인은 카톨릭에서 바티칸 성당과도 같다"라는 헌사를 바쳤다.

 

 

 - 로린 마젤, 카라얀, 주빈 메타, 마리스 얀손스 같은 명지휘자들이 지휘했던 빈 필하모닉의 연주를 이곳에서 직접

   듣지 못해 몹시 아쉬웠지만, 여기서 모짜르트의 음악을 직접 듣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감동이었고 가슴이 벅찼다.

 

 

 -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에서 맨 처음 간 곳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 별궁인 벨베데레 궁전.
    20세기 가장 인기있는 화가인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를 직접 볼 수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클림트의 <신부>, <물뱀>도 있고, 에곤 쉴레, 코코슈카, 그리고 모네·마네·르누아르·밀레 등의 작품도 있다.

 

 

 - 1723년에 당시 빈의 세력가였던 오이겐 폰 사보이 공이 연회장으로 이용할 목적으로 건설한 별궁(상궁) 정면.
    오이겐 공이 죽은 뒤 합스부르크가에서 궁을 사들여 미술 수집품을 보관했다고.

 

 

 - 제국의 왕위 계승자가 된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한 1914년까지 바로 이 궁전에서 지냈다고.
   현재 상궁은 19세기 및 20세기 회화관으로 쓰이고 있다.(사진 촬영은 여기까지만 가능)

 

 

 - 벨베데레 궁전에서 클림트 등 유명 화가의 그림 감상을 끝낸 후 점심 식사를 위해 근처로 이동했다.
   토요일 오전이고 비가 점점 더 거세지는 바람에 거리는 한산하고 근처의 벼룩시장도 제대로 열리지 않았다.

 

 

 - 비엔나에서의 점심은 KBS <걸어서 세계 속으로> 제작진이 들러서 방송을 탔다는 바로 이 식당에서 해결했다.
   거품을 멋지게 장식해서 내놓은 맥주도 물론 아주 맛있었지만....

 

 

 - 산더미처럼 내놓은 `폭립` 비슷한 돼지갈비 요리는 정말 대박이었다. 양도 푸짐했을 뿐 아니라 맛도 최고였다.

 

 

 - 비엔나 국립 오페라 극장 앞에서 트램을 기다리는 중... 굵은 비 때문에 대낮인데도 어두컴컴할 정도였다.

 

 

 - 때마침 `2015 유러비전 송 컨테스트`가 열리는 중이라는 비엔나 시청앞 풍경. 비가 너무 와서 몹시 안타깝다.

 

 

 - 스페인에 가우디가 있다면 오스트리아에는 바로 이 사람, 훈데르트 바써가 있다.
    미술가이며 건축가이자 생태주의자인 그는 무미건조하고 특징 없는 현대주택 양식을 거부하고,
   기발한 색채와 곡선을 구사한 독자적인 작풍으로 친환경 건축을 추구했다. 이 건물은 그가 세운 시영 주택.

 

 

 - 훈데르트 바써 미술관 내 커피숍에서 잠시 차 한 잔 나누는 시간.

 

 

 - 세계 3대 오페라 극장 가운데 하나인 빈 국립 오페라 극장.
   1869년에 완성되어 모짜르트의 <돈 조반니>를 개관 기념으로 무대에 올렸다.
   구스타프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카라얀, 칼 뵘 등 세계적인 지휘자들이 총감독을 맡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 비엔나의 역사·문화 중심인 슈테판성당 주변 케른트너 거리.
    이 거리 주변으로 18~19세기에 걸쳐 절정을 이룬 ‘빈 음악파’들의 희미한 족적을 살펴볼 수 있다고.
    프라우엔 후버라는 오래된 카페는 1788년 개업 때 모차르트가 기념 연주를 했던 곳이며,
    슈테플 백화점 건물은 병마와 싸우던 모차르트가 1791년 숨을 거둔 집이 있던 곳이라고.

 

 

 - 슈테판 대성당 전망대에 올라 보니 비엔나 시내가 훤히 내려다 보인다.

 

 

 - 하루 종일 내리는 비 때문에 성당 한켠 광장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마차는 움직일 줄 모르고 있다.
    사람들은 알록달록한 우산을 쓰고 바삐 다니지만, 말들은 빨강과 파랑 비옷을 두른 채 꿈쩍도 않고 서 있다.

 

 

 - 온종일 비가 내리는 비엔나는 제법 추웠다. 지붕이 덮인 노천 카페는 천장에 히터가 매달려 있어서 제법 따뜻했다.
    흔히 `비엔나 커피`로 부르는 멜랑쥐와 왕가의 주방장이 만든 명물 초콜릿 케익 `자허 토르테`를 주문했다.

 

 

 - 비엔나에서의 둘째날 저녁 프로그램은 빈 국립 오페라극장에서 오페라 공연을 관람하는 것.
   줄지어 선 창구 앞에서 기다렸다가 미리 예약한 `예약번호`를 내밀자 2초도 안 걸려 미리 인쇄된 표를 바꿔준다.
   여행복 차림에 카메라 가방까지 메고 갔지만 `짐`들은 보관소에 맡기는 바람에 핸드폰으로만 몇장 찍었다.

 

 

 - 이곳에서 모짜르트의 작품 <피가로의 결혼>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쉽게도 우리가 비엔나에 머물

   동안 관람할 수 있는 공연은 롯시니의 `체네렌톨라` 뿐이었다.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예약을 몇 번이나 망설였지만

   그래도 예약하길 잘했다 싶었다. 오케스트라와 오페라 가수들의 연주도 정말 놀랍도록 완벽했지만, 관객들의
   감상 태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하나같이 쥐죽은 듯 고요했고 미동도 없었다. 웃고 박수칠 때 빼고는.

 

 

 - 비엔나에서 이틀 밤을 묵는 동안 지하철을 꽤나 자주 탔던 듯하다. 지하철은 한두 번만 타보면 금세 익숙해진다.
    여기는 카를스플라츠(Karlsplatz) 역 지하. 빈 무지크페라인 황금홀과 빈 슈타츠오퍼에 갈 때도 이 역에서 내렸다.

 

 

 - 합스부르크가의 여름 별궁인 쉔부른 궁에서도 자장 높은 언덕에 위치한 글로리에테.

 

 

 - 드넓은 쉔부른 궁전을 돌다보다가 넵튠 분수 근처 벤치에서 잠시 휴식중... 
    1,441개의 방을 갖춘 대궁전은 제쳐 두고 그저 정원을 포함한 외관만 둘러보는 데도 `40분의 시간`은 짧았다.

 

 

 - 쉔부른 궁전은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을 본떠 1696년에 건설하기 시작하여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에 완성했다고.

 

 

 - 궁전의 길이만 180m에 이르는 쉔부른 궁전은 관람객들이 넘쳐나는 바람에 입장 예정 시간이 너무 늦어,
    결국 방 한 칸 구경하지 못하고, 우리 일행은 그 대신 유명 음악가들이 잠들어 있는 중앙 묘지로 찾아갔다. 

 

 

 -  음악가들을 만나기 위해 우리는 `쉔부른 궁전에서는 무려 40분 이상이나 걸려야 갈 수 있다`는 길을 찾아나섰다.
     도중에 두어 차례 길을 물으며 전철과 트램을 바꿔 타야 했다. 

    그 이름도 영롱한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요한 슈트라우스 일가가 바로 거기에 묻혀 있었다.
    이들 중 하나의 무덤만으로도 가슴이 벅찰 일인데, 그토록 위대한 음악가들이 여기 한자리에 다 모여 있었다. 
    빈을 방문한 각국 여행자들이 저마다 꽃다발을 들고 이 공동묘지를 찾는 이유를 굳이 물어볼 필요가 있을까.

 

 

 - ‘음악가들’ 묘역의 중심에 모차르트가 있다. 하지만 모차르트의 무덤은 실제 무덤이 아닌 기념비다.
    모차르트 기념비 뒤 양쪽으로 그를 흠모했던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무덤이 자리잡고 있다. 
    슈베르트는 아예 “죽으면 모차르트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 옆으로는 ‘왈츠의 제왕’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브람스의 묘가 나란히 서 있다.

 

 

 - 아래 사진으로는 볼 수 없지만, 요한 슈트라우스 2세 무덤 뒤쪽엔 <라데츠키 행진곡>을 쓴 그의 부친 
    요한 슈트라우스 1세와 역시 작곡가 겸 지휘자인 요제프 등 음악가 형제들의 무덤이 늘어서 있다. 
    주변을 둘러보면 <경기병 서곡>의 프란츠 폰 주페, 지휘자인 요한 헤르베크의 묘도 발견할 수 있다고.
    작곡가 쇤베르크와 체르니도, 오스트리아의 대표적 건축가 아돌프 로스도 이곳에 묻혀 있다고...

 

 

 - 이곳이 바로 베토벤(1770∼1827)의 묘.
   그는 독일의 본에서 태어나 17세 때 빈으로 건너가 빈의 사교계에서 환영을 받으며 유명해졌다.
   수많은 명곡을 작곡한 뒤 난청에 시달리다가 악화되자 빈 외곽의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유서를 쓴 적도 있다.
   요양을 위해 바덴 등 빈 교외의 온천 휴양지에 머무른 적도 많았고, 구시가에서도 살았다고.

 

 

 - 여기가 바로 브람스(1833∼1897의 묘.  
   그는 독일 북부 항구도시인 함부르크에서 출생했다. 1850년 헝가리의 바이올리니스트 J.요아힘을 알게 되어 
   1853년 그와 함께 연주여행을 떠나 거기서 그의 생애를 통해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슈만 부처를 만나게 되었다.
   1862년 9월 빈으로 이주했고, 1872년 가을부터 1875년까지는 빈 음악인협회 회장도 맡았었다고.

 

 

 - 여기가 바로 프란츠 슈베르트(1797∼1828)의 묘.
   빈 교외인 리히텐탈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독학으로 음악을 배웠지만, 불과 31년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그가 작곡한 가곡은 무려 600곡 이상이나 된다. 베토벤이 죽기 직전에 슈베르트와 만나 `왜 좀더 일찍 알지
   못하였는가`를 한탄했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죽어서나마 영원히 그의 곁에서 함께 머물고 있다.

 

 

 - 면적이 240헥타르에 이르는 광대한 묘지는 종교별로 구획이 나누어져 있다고.
    물론 가장 유명한 곳은 제2문 입구에서 가까운 32A 구역이다.
    위대함을 갈망하다가 마침내 여기에 묻힌 영혼들이여, 부디 고이 잠드소서......

 

 

 - 점심 조차 거르고 `중앙 묘지`를 어렵사리 다녀온 우리 일행은 다시 집합 장소인 `빈 서역`으로 되돌아왔다.
   역사 안에서 사먹은 `스시 도시락`이 기대보다는 훨씬 맛이 좋았다.

 

 

 - 빈 서역 안에 자리잡은 간이 서점 겸 기념품 가게. 
   전날 밤 음악 공연을 보고 난 뒤 밤 늦은 시간에 `캔맥주`를 사러 이곳까지 왔었는데,
   오늘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가 그려진 커피잔 세트를 사러 왔다. 독일어로 쓰인 책은 물론 패쓰~~

 

 

 - 비엔나에서의 2박 3일 일정을 마치고 `빈 서역`에서 특급 열차를 타고 2시간 40분쯤 후에 도착한 부다페스트 역.
   역사 내부가 자연 채광이 조금 부족해서 자칫 여기서 기차를 타면 마치 `호그와트 마법학교`로 떠날 듯하다.

 

 

 - 우리 일행이 묵었던 호텔 근처에 일명 `홍대 거리`라 불리는 골목에 있는 어느 술집 내부.
    젊은이들이 흥겨운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며 술잔과 술병을 들고 술을 마시는 무척 낭만적인 곳이었다.
    분위기도 꽤나 좋았지만 `너무나 착한 가격`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되는 곳.

 

 

 - 술집을 나와서 다시 호텔로 되돌아 가는 길.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모습은 좀처럼 구경하기 어려웠다.

 

 

 - 부다페스트에서 첫번째로 찾은 곳은 `세체니 다리` 건너편 언덕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어부의 요새.
    이곳에서 바라보는 도나우 강과 페슈트 거리의 풍광이 무척 아름다워서 부다페스트 관광의 메카로 손꼽히는 곳.
    멀리 보이는 건물은 야경이 특히 아름다운 헝가리 국회의사당.   

 

 

 - 마치시 교회. 오스만투르크가 점령하던 시대에는 이슬람 사원으로 쓰이기도 했다고.
   1867년, 헝가리 왕으로 즉위한 프란츠 요제프와 엘리자베트 황후의 대관식이 이곳에서 거행되었고,
   리스트는 이 날을 위해 <헝가리 대관 미사곡>을 작곡, 직접 지휘하기도 했다고...

 

 

 - 건국 1000년을 기념하는 건조물로 기획되어 1902년에 완성된 어부의 요새.
   헝가리풍의 뾰족한 지붕을 얹은 로마네스크-고딕 양식이 혼재된 독특한 회랑이 몹시 이채롭다.

 

 

`어부의 요새`라는 명칭은 옛날 이 언덕의 시장을 지켰던 어부 조합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 왕궁의 언덕에서 내려다 본 도나우강, 세체니 다리, 그리고 국회의사당.
   비가 끝없이 내려 시야가 뿌옇게 흐리지만 나름대로 운치도 느껴진다.

 

 

 - 페슈트 지역의 중앙 시장이 마침 일요일이어서 개점 휴업이었다. 
   점심 식사 시간이 될 때까지 이 거리에서 쇼핑도 즐기고 커피도 마셨다. 거리 이름도 모른 채...

 

 

 - 헝가리 사람들은 97% 이상이 마자르 족이다. 그래서 다른 유럽 여러 나라 사람들과는 생김새도 조금 다르고,
    헝가리어 또한 다른 유럽 여러 나라의 언어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정작 이 사진에 담긴 사람들은 헝가리 사람들이 아니라 외국에서 온 관광객일지도 모르겠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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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OH 2015-06-17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너무 멋진 사진들과 글! 잘 보고 간다.

oren 2015-06-18 13:32   좋아요 0 | URL
부사장님께서 어인 일로 여기까지...
그래도 잊지 않고 찾아 주고 댓글까지 남겨 주니 고마우이~~
 

 

여행은 흔히 세 단계를 거치는 듯하다.

첫째, 여행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는 단계.
둘째, 여행 중인 단계.
셋째, 여행을 끝내고 여행을 다시 되돌아보는 단계.

 

나는 이번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여행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는 데는 많이 소홀했던 듯하다. 동유럽의 이름난 도시를 제대로 만끽하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미리 준비해야 할 지를 어렴풋하게나마 알고는 있었다.

 

가령, 프라하 올로케로 찍었다는 영화 <아마데우스>는 필히 봐둬야 한다는 것, 프라하를 떼놓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는 음악가인 드보르작과 스메타나의 음악에 대해서도 좀 더 공부해 둘 것, 또한 프라하 하면 금세 떠오르는 작가인 프란츠 카프카의 몇몇 작품들(<성>, <변신> 등)과 밀란 쿤데라의 작품들(<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농담> 등)을 미리 읽어 두면 더욱 좋다는 것, 비엔나에서는 꼭 `음악연주회`를 빼놓지 말 것, 그리고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다시 한번 봐 둘 것, 부다페스트에서는 돈 아끼지 말고 토카이 와인을 실컷 마셔볼 것 등등.

 

그런데 정작 내가 실제 행동으로 옮겼던 `준비 사항`은 고작 두세 가지가 전부였다. 영화 <아마데우스>를 챙겨 본 것과 비엔나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오페라를 관람하기 위해 티켓을 예매한 것, 그리고 동유럽 여행 관련 책자를 두세 권 정도 읽어 본 것 등.

 

그래서 사실 여행을 떠나면서도 내내 `내가 모르는 사실들` 때문에 여행의 즐거움이 조금이라도 반감될까봐 내심 마음을 졸였던 것도 사실이다. 마치 숙제를 마저 끝내지 못하고 등교하는 초등학생과 같은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아니면 미처 시험공부를 절반도 하지 못한 체 시험을 치르기 위해 교실로 들어서는 기분을 느꼈다고나 할까.

 

(동유럽 여행에 도움이 될 만한 책들. 이 가운데 꼭 읽어 보고 싶었던 네 권의 책은 끝내 여행 가방에 담겼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애매한 감정들은 여행이 시작되면서 어느새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왜냐하면 여행이 시작되자 말자 나는 거의 온전히 `동화와도 같은 동유럽의 풍경` 속으로 풍덩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여행도 `진행 방식`에 따라 몇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겠다. 온전히 여행사에만 의존하는 패키지 투어에서부터, 여행자 자신이 미리 꼼꼼히 계획을 세워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해결해 나가며 `자유롭게` 다니는 자유 여행, 그보다 더욱 많은 융통성을 가지고 발길 닿는 대로 방랑자처럼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는 배낭 여행 등등.

 

그런데 이번 동유럽 여행은 패키지 투어를 기본 바탕으로 하되 자유 여행의 즐거움을 살짝 가미한 형태였다. 아마도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너무 틀에 꽉 짜인 숨막히는 일정의 연속인 `일반적인 패키지 투어`에 어느 정도는 부담을 느껴왔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나도 이번에 얼마쯤 자유 여행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상품을 찾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내가 다녀온 투어는 내 구미에 딱 맞았다. 누구나 꿈꾸는 완전한 자유 여행을 즐기기 위해서는 사실 적지 않은 준비가 필요하다. 숙소 예약과 이동 수단 선택에서부터 언어 소통의 문제까지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다. `자유로운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하자면 그만큼 많은 준비와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다.

 

작년 여름에 내가 유럽으로 덜컥 자유 여행을 떠났을 때 겪은 일들은 지금 되돌아 봐도 아찔한 생각부터 앞선다. 남자 넷이서 뮌헨 공항에 내려 렌터카 회사를 어렵사리 찾아서 Viano라는 멋진 신형 벤츠의 자동차 키를 받아쥘 때부터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다. 사실 거의 모든 게 갑자기 막막하게 느껴졌었다. 복잡한 주차 빌딩의 출구(독일어로 Ausgang)를 제대로 찾아 빠져나가는 것부터 어려웠다! 그렇게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오스트리아를 무려 17일 동안 돌아다녔던 경험을 지금 문득 되돌아 보니 아직도 즐겁고 신났던 순간들 보다 `정말 막막했던 몇몇 순간들`부터 먼저 떠오른다.

 

어쨌든 이번 여행은 `일정, 숙소, 음식, 이동, 언어 소통` 등등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쓸 일이 없었다. 국내에서 비행기를 탈 때부터 시작하여 여행이 끝날 때까지 항상 우리를 보살펴 주는 뛰어난 가이드가 언제든 지근거리에서 우리를 보살펴 주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가이드는 오후 4시∼ 5시 쯤이면 끝나는 공식 여행 일정 말고도 저녁 시간에 찾아가면 좋을 식당이나 카페, 혹은 술집까지도 친절히 알려 주었고, 심지어 음악 연주회 장소까지도 일일이 데려다 줄 정도였다. 그러니 무슨 걱정이 있을까. 그저 여행에만 집중하면 그만이었다.

 

나는 이번 여행이 아주 대만족이었다. 물론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틈날 때마다 주어지는 `자유 시간`에 사진을 마음껏 찍을 수 있어서 특히 좋았고, 아내는 거의 모든 것들이 환상적이었다고 난리다. 여행 스케줄, 숙소, 음식, 가이드, 여행 진행 방식, 우연히 함께 여행했던 동반자들 모두에 대해 대만족이었단다. 그리고 특히 `여행 내내 짖궂게 뿌려대는 비오는 날씨`와 정말 여행객들의 즐거움을 위해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은 `인솔자의 도움`에 대해서는 여행 내내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늘어놓기 바빴다.

 

사실 내가 이토록 어설픈 `여행 후기`를 급작스레 올리는 이유도 거의 전적으로 `아내의 성화`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인천공항에서 만나 우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인솔했던 그 젊은 가이드가 너무나 고생이 많았는데 어서 빨리 후기라도 올려서 그 친구를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라는 것이었다. 우리와 함께 했던 `9박 10일 동안의 여행`이 결코 쉬울 리도 없었을 테고, 때로는 속이 새까맣게 탈 정도로 애를 끓인 적도 많았을 텐데, 우리와 함께 귀국하고 나서 불과 닷새 후에 또다시 `낯선 다른 팀`을 이끌고 똑같은 코스로 또 일(?)을 하러 떠났을 테니 그 가이드 분이 얼마나 힘이 들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 분께 조금이나마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여행 후기를 통해서라도 그 가이드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기운을 북돋아 주란다.

 

이 기회를 빌어 정말 다시 한번 우리와 함께 했던 최석채 가이드님께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이런 알찬 여행을 디자인하고 또 늦은 밤에도 불구하고 `빈 무지크 페라인 음악연주회` 공연 티켓을 급히 예약해 주신 일성여행사 문윤정 팀장님의 도움과 노고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감사드리고 싶다.

 

재치있는 프랑스 철학자 몽테뉴는 `여행은 그 비용 때문에만 힘이 든다`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 '여행과 비용의 함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노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여행은 비용이 증가할수록 즐거움도 함께 증가한다`고 말이다. 그만큼 이번 여행은 흔하디 흔한 동유럽 투어에 비해 조금은 비싼 편이었지만 증가된 비용보다 훨씬 더 큰 여행의 즐거움을 얻었던 아주 멋진 여행이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저녁 시간에 따로 마음에 맞는 동반자들과 함께 생맥주와 와인을 무척이나 자주 마셨다. 그래서 한동안은 여행에서 돌아와서까지도 저녁때만 되면 괜히 `맥주나 와인`을 마셔야만 할 듯한 착각마저 느낄 정도였다. 동유럽의 낭만이 가득한 도시에 들를 때마다 최석채 가이드 님께서 안내해준 여러 카페와 술집들이 모두 술맛도 좋고 음식도 좋았지만, 나한테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아무래도 밤 늦은 시간까지 `안주도 없이` 와인을 기울이며 실컷 떠들었던 `할슈타트의 호숫가 어느 이름모를 술집`이었다. 왜냐하면 거기서 내가 불쑥 내뱉은 `명언` 하나가 함께 했던 동반자들로부터 의외로 뜨거운 반응을 얻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 얘기를 이 여행 후기의 첫머리에서부터 꺼내고 싶었지만 여태 참았다가 이제야 뒤늦게 꺼낸다. 내가 할슈타트에서 무심코 꺼냈던 말은 <대중의 반역>, <돈키호테에 관한 성찰> 등으로 유명한 스페인의 철학자인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다음과 같은 말이었다.

 

"모든 말은 결핍이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 담지 못한다. 모든 말은 과잉이다. 내가 전하지 않았으면 했던 것들도 전하게 된다."

 

이 철학자의 폐부를 찌르는 듯한 말은 `입과 혀`를 지닌 우리 모두에게 언제 어느 때나 항상 옳게 들릴 정도로 강력한 호소력을 지닌 체 다가온다. 우리 속담에도 있듯이 어쨌든 말은 한번 내뱉으면 결코 도로 주워담지 못한다.

내가 손가락을 두드려가며 쓰는 글 또한 입으로 쏟아내는 말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다 담지도 못할 뿐더러 내가 전하지 않았으면 했던 것들도 으레 전하게 마련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말이나 글은 여러모로 `한계`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거기에 비하면 사진은 얼마나 정직한가. 사진은 조금도 `현실`을 왜곡하지 않는다. 다만 카메라가 지닌 눈이 인간의 눈과 달리 조금 더 기계적이기 때문에, 인간이 보지 못하는 것도 볼 수 있을 뿐더러 인간이 쉽게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풍경조차 다 담지 못해 애를 먹을 뿐이다.

 

내가 이번 여행에 대해 좀 더 얘기하고 싶은 게 남아 있다면 그것은 `사진`을 통해 말하는 일이다. 그런데 욕심이 너무 앞서다 보니 그만 사진을 너무 많이 찍었고 또 너무 많이 이곳에 올리게 되었다. 이렇게 많은 사진과 설명글들도 어쩌면 결국 '과잉과 결핍'이라는 양 극단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지도 모르겠다. '여행의 즐거움'을 전달하고자 아무리 애를 쓰더라도 결국은 과잉이 결핍으로 전락하고 마는 경우도 결코 피할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내 몫은 여기까지이고, 나머지는 결국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몫이다.

 

(참고로, 사진은 여행을 다닌 시간 순서에 따라 정리했습니다. 즉 체코 프라하, 체스키 크룸로프를 거쳐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미라벨 광장을 거쳐 할슈타트, 비엔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담았습니다.)

 

* * *

 

- 여행 첫날 저녁에 `맥주나 한잔` 마시러 나갔다가 마주친 `프라하 성의 멋진 야경`

 

 

 - 여행 둘째 날 아침 식사를 끝내고 `집합 시간` 이전에 잠시 짬을 내어 카를교를 산책하며...

 

 

 - 동화 속에 들어온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프라하 카를교 교탑 너머의 이른 아침 풍경.

 

 - 프라하 성은 유명한 관광지로 변모한 지 오래 되었지만 현직 체코 대통령의 집무실로도 쓰이고 있다.

   그래서 프라하 성 입구에는 언제나 시선을 정면으로 고정한 체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는 체코 병사를 볼 수 있다.

 

 

 - 마침 오전 10시 정각이 되었다. 근무 교대식을 보러 관광객들이 구름떼처럼 모여 들었다.

 

 

 - 프라하 성에서 내려다본 프라하 시내 풍경. 사진 속에 `카를교의 교탑`과 다리 위를 걷는 사람들이 보인다.

 

 

 - 성 비투스 대성당 안에서 현지 가이드이신 백승구 님의 설명을 경청하는 우리 일행들.

 

 

 - '도시 속의 도시'인 프라하 성에서도 가장 볼 만한 건축물은 아무래도 성 비투스 대성당이다.

    이 대성당은 1344년에 건축이 시작되어 1929년에야 비로소 공사가 마무리되었단다.

    알폰스 무하가 제작한 아르 누보 양식의 거대한 창문은 보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 멀리 보이는 곳이 성 바츨라프 광장.

    1968년 소비에트의 지배에 대항하여 '프라하의 봄'이라고 알려진 봉기가 일어난 바로 그곳이다.

    봉기가 일어난 지 1년 후 바르샤바 조약기구 군대가 탱크를 앞세워 점령하면서 수많은 시민들이 희생되었다.

 

 

 - 프라하 시내 바츨라프 광장 한켠에 자리잡고 있는 그림같은 건물들.

   `프라하의 봄`에 대한 아픈 기억들이 언제 있었느냐는 듯이 그저 평화롭게만 보인다. 하늘조차 푸르고...

 

 

 - 구시가지 광장의 천문시계를 설명하는 백승구 가이드님.

    이 분의 설명은 너무나 열정적이면서도 깊이 있고 알찬 설명들을 많이 해주셔서 정말 좋았다.

   나중에 따로 물어 봤더니 이 분은 『프라하 이야기』라는 책을 쓴 RuExp의 핵심 멤버였다.

 

 

 - 14세기에 시청 탑에 부착된 이후 아직까지도 '천문학적인 시간'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멋진 벽시계.

    이 탑은 중앙 광장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구조물이다.

 

 

 - 매시 정각마다 벌어지는 `천문시계 쇼`를 구경하기기 위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 천문 시계를 지나면 '두 개의 첨탑'이 아주 인상적인 틴 성당이 나온다.

    1380년에 성당 제작이 시작되어 16세기 중반에야 완성되었다고 한다.

 

 

 - 구 시청 광장에서 골목길을 빠져 나와 다시 카를교 입구로 들어서면 우뚝 솟은 웅장한 교탑이 불쑥 나타난다.

    어젯밤보다 훨씬 더 많은 인파들이 카를교를 가득 메운 듯하다.

 

 

 - 저녁 늦게 홀로 찾아 올라간 `천문시계탑`에서 내려다본 `프라하의 붉은 지붕들`

 

 

 - 천문 시계탑 위에서 내려다본 풍경.

    저택들의 우아한 파사드와 함께 노천카페 주위로 점점이 모인 많은 사람들이 특히 인상적이다.

 

 

 - 여기는 최석채 가이드님 덕분에 찾게 된 우플레쿠(U Fleku)라는 '5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비어홀'이다.

   보헤미안 집시처럼 보이는 아코디언 연주자에게 스메타나의 `블타바`를 부탁했더니 기꺼이 연주해 주었다.

 

 

 - 흑맥주 파티를 끝내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바라본 카를교 교탑.

    마치 수백 년 전의 중세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이다.

 

 

 - 교탑에 점점 다가갈수록 더욱 `동화속` 같다.

 

 

 - 우리 일행들이 묵은 숙소 또한 카를교 바로 옆에 자리잡은 'HOTEL BISHOP'S HOUSE'였다.

    카를교의 야경을 밤늦도록 즐기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숙소였다.

 

 

 - 프라하를 떠나 마을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체스키 크룸로프로 이동중에 만난 유채꽃밭.

   이상 저온 현상이 계속되는 바람에 5월 하순인데도 이제야 꽃이 피기 시작했단다.

 

 

 - `안동 하회 마을`처럼 몰다우 강이 끼고 도는 체스키 크룸로프에 도착했다.(이 근처가 몰다우 강의 발원지) 

    비도 많이 오고 날씨도 차가웠지만 `중세 속으로의 시간 여행`은 즐겁기만 하다.

 

 

 - 공식 일정이 끝나고 자유 시간때 오후 5시쯤 다시 찾아간 성탑은 문이 이미 닫혀 있었다.

    (오후 5시까지 개방하지만 마지막 입장 시간은 오후 4시 30분에 마감이었다.)

    높은 데서 한 눈에 들어올 `환상적인 풍경`은 끝내 볼 수 없었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 마을을 감싸고 도는 몰다우강(블타바강)이 `탐이 날 정도로` 아주 맑게 흐른다.

 

 

 - 이 멋진 동화속 마을 같은 곳에서 우리는 비록 하루 밖에 머물지 못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여전히 수많은 패키지 투어 관광객들은 이 아름다운 마을을 그저 잠깐 스쳐 지나갈 뿐이라는 설명을 들으니...

 

 

 - 망토다리 위에서 구멍난 틈 사이로 빼꼼히 들여다 본 체스키 크룸로프 마을 풍경.

 

 

 - 체코를 떠나 모짜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로 들어왔다. 차창 밖으로 `미라벨 광장` 안내 간판이 보인다.

 

 

 - 식당으로 이동하는 길. 왜 이렇게 사람이 많나 했더니 바로 모짜르트 생가가 있는 `게트라이데` 거리였다.

 

 

 - 잘츠부르크에 도착해서 맨 처음 들른 곳은 게트라이데 거리에 있는 맛집 'da pippo'. 분위기가 근사했다.

 

 

 - 잘츠부르크에서의 점심은 `칠면조 요리`였다. 한낮인데도 기온이 11도에 머물러 따끈한 스프가 더욱 좋았다.

 

 

 - 후식으로 나온 아이스크림. 이게 바로 '잘츠부르크 스타일'인가 싶은 느낌부터 들었다. 정말 달달하고 맛있었다.

 

 

 - 점심 식사를 끝내고 찾아간 곳은 '호엔 잘츠부르크 성'

   케이블열차(푸니쿨라)를 타고 순식간에 높은 데를 날듯이 올라갔다.

 

 

 -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미라벨 정원 너머로 자주 보이던 호엔 잘츠부르크 성에서 내려다본 풍경.

   `폰 트랩 대령의 집`도 보였고, 도나우 강이 유유히 돌아 흐르는 잘츠부르크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 여기가 바로 1756년에 음악 천재 모짜르트가 태어난 집.(게트라이데 9번지)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려 누구라도 금세 찾을 수 있다.

 

 

 - 다시 '간판이 아름다운' 게트라이데 거리.

 

 

 - 호엔 잘츠부르크 성에서 내려와 도나우 강을 건넌 뒤에 성 쪽으로 올려다본 풍경.

 

 

 - 여기는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주된 배경이었던 미라벨 정원.

 

 

 - 잘츠부르크를 떠나 할슈타트로 넘어가기 전에 잠시 들른 곳은 모짜르트 어머니의 생가가 있는 장크트 길겐.

    모짜르트의 Full Name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 그의 어머니가 볼프강 호수 근처에서 자라면서,

    이 호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아들의 이름에 '볼프강'을 넣어서 지었다고 한다.

 

 

 - 장크트 길겐을 뒤로 하고 우리 일행은 운무가 가득한 알프스 산자락을 휘돌아 할슈타트로 이동했다.

    작년 7월에 자유여행을 다닐 때에도 지났던 길을 다시금 찾아오니 감회가 새롭다.

    (그때는 장크트 길겐의 팬션에서 하룻밤을 잤고, 볼프강 호를 둘러본 뒤 할슈타트에서는 1시간쯤 머물렀었다.)

 

 

 - 비가 내리는 덕분에 할슈타트를 둘러싼 산허리마다 온통 운무로 가득하다.

 

 

 - 어둑어둑할 무렵이지만 할슈타트의 그림같은 풍경에 취해 저녁 먹는 것도 잊어버렸다.

 

 

 - 백조 한 마리와 청둥오리 여섯 마리가 한가로이 호수 위를 이리저리 떠다니는 풍경이 마치 그림 같다.

 

 

 - 선물 가게 안에 내걸린 `할슈타트의 겨울 풍경 사진`

 

 

 - 이튿날 아침 `뷰 포인트`로 알려진 `할슈타트의 맨 안쪽 골목길`에서 최석채 가이드님과 한 컷.

 

 

 - 여행 내내 친구처럼 즐겁게 어울렸던 두 분과도 한 컷.

 

 

 - 운무가 끊임없이 변하며 할슈타트를 아름답게 장식하기 바쁘다.

 

 

 - 성당 뒤쪽으로 난 좁고 가파른 길을 쭈욱 따라 오르다 보면 넓은 길에 이어 `등산로`가 나온다.

    멋도 모르고 아내와 씩씩거리며 오르다가 중도에 포기하고 결국 케이블열차(푸니쿨라)로 전망대에 올랐다.

 

 

 - 소금광산으로 이어지는 전망대 꼭대기에서 내려다 보니 호숫가의 집들이 마치 장난감처럼 자그마하다.

 

 

 - 전망대에 오르면 저 멀리 '만년설이 뒤덮인 알프스'를 볼 수도 있다.

    할슈타트에 가시는 분들은 꼭 푸니쿨라를 타고 '전망대'에 올라가 보시길 추천드린다.

 

 

 - 알프스 산자락에서 내려와 할슈타트 호수로 흘러드는 물은 손으로 떠서 마셔도 좋을 정도로 너무나 맑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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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푸니쿨라의 추억
    from Value Investing 2017-03-02 00:19 
    높은 곳에 오르기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까? 혹 있을지도 모르겠다. 높은 곳을 오르기엔 다리도 몹시 아프고 숨도 벅찰 테니까. 그런데 언젠가부터 높은 곳에 오르기가 아주 쉬워졌다. 바로 푸니쿨라(등산전차)가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그동안 푸니쿨라를 몇 번씩이나 타봤으면서도 그걸 나폴리 민요인 '푸니쿨리 푸니쿨라'와 연결해서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그저 그 노래를 '귀에 익숙한 멜로디'로만 여기고, 그 노래에 얽힌
  2. 푸니쿨라의 추억
    from Value Investing 2017-03-02 11:45 
    "여기에서는 전망은 트이고, 정신은 고양된다." ㅡ 그러나 높은 곳에 있고 전망이 트여 있는데도 아래를 내려다보는 반대 부류의 인간이 있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9장, 고귀함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 * *높은 곳에 오르기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까? 혹 있을지도 모르겠다. 높은 곳을 오르기엔 다리도 몹시 아프고 숨도 벅찰 테니까. 그런데 언젠가부터 높은 곳에 오르기가 아주 쉬워졌다. 바로 푸니쿨라(등산전차)가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세실 2015-06-11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을 잊게 하는 환상적인 풍경들입니다.
오렌님 반가워요~~~~~~
꼭 가보고 싶은 프라하.......

oren 2015-06-13 13:24   좋아요 0 | URL
제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더군요.
서유럽에서는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우월감`이나 `오만함`이 느껴질 때가 있는데, 동유럽은 그런 요소들이 이상하게도 서유럽에 비해 훨씬 덜 느껴지고, `동화속 같은 느낌`이 훨씬 더 강하게 느껴지는 듯해요.

세실 님께서도 `프라하`에 꼭 가보세요...
그리고 프라하에 가시면 `RuExp의 팁가이드`를 이용하셔도 좋을 듯합니다.
그리고 백승구 님이 쓰신 『프라하 이야기』도 한번 읽고 가시면 더욱 좋을 듯하구요.
(Ruexp, 프라하 등등 검색하시면 관련 정보들이 쭈욱~ 나오더라구요.)

qualia 2015-06-11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ren 님, 정말 환상적이군요.
솔직히 말해 저는 열등감을 무척 많이 느낍니다.
한국에서는 이곳저곳 구석구석을 다녀도
저렇게 깨끗한 풍경은 발견하지 못합니다.
저들은 저들만의 독특한 양식이 있죠.
하지만, 한국은 어디에서든
한국만의 독특한 양식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풍경의 디자인, 집/건축/거리의 디자인...
거듭 서구의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 자신을 재확인합니다.
좀 더 긍정적이고 밝은 댓글을 달 수 없어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oren 님의 글과 사진들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oren 2015-06-13 13:39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에는 우리나라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아름다움이 저는 많다고 생각해요.

제가 지난주에 2박 3일로 다녀 왔던 안동 지방만 하더라도 안동 하회마을, 농암 고택, 지레 예술촌 등등은 정말 환상적으로 아름답습니다. 설악산의 가을 단풍 또한 알프스의 풍경조차 부럽지 않을 정도고요...

서양에서 가장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주된 특징들은 `높고 화려하게 건축된 고성들`과 `하늘을 찌를 듯한 성당들`이지요. 물론 아름답고 화려하고 웅장한 풍경입니디만, 그런 건축물들의 이면에는 `권력을 가진 자들을 위한 무수한 백성들의 숱한 희생`이 뒤따랐다는 사실이 숨어 있음을 의식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말을 빌려, ˝제발 돌들은 제자리에 놓아 두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우린 qualia 님의 말씀처럼 `서양 건축물들과 자연의 독특한 아름다움`에 매혹되지 않을 도리도 없긴 하지요. 오스트리아와 독일 등지에서 위대한 음악가들이 유달리 많이 탄생하고 또 활동했던 이유들도 생각나고요.

희꾸리 2015-06-17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행사는 어디로 다녀오셧너요?

oren 2015-06-18 13:35   좋아요 0 | URL
여행사는 제 글 본문에도 명확히 밝혀 놓았는데 그만 깜빡 놓치신 모양이군요...
아래 주소로 가보세요~
http://www.ilsungtour.com/customer/?sel=15&sel_page=61&bbs_page=view&bd_bbs_head_seq=1458&page=2

Roy Kim 2019-10-28 0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과 멋진 사진들을 보게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특히나 터널 구도로 찍은 사진들이 눈에 들어와 전하고 싶으신 멧시지를 더욱 잘 알게된 듯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oren 2019-10-29 23:32   좋아요 0 | URL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와 주시고, 좋은 말씀 남겨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안재욱 2021-06-03 1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튜브에 실린 글을 읽고 여기까지 찾아왔네요.
아름다운 도시이긴하지만 어쩌면 사진을 이리도 잘 촬영하셨는지요.여행사진 전문가 수준입니다.
전 아직까지 가보지 못했는데 건강이 따라주면 꼭 한 번 가고싶은 도시입니다. 글은 천천히 정독해서 읽을 예정입니다.

oren 2021-06-05 23:42   좋아요 0 | URL
유튜브 영상 아래 설명글과 함께 링크를 덧붙여놓길 잘했네요.^^

동유럽의 아름다운 풍경들은 서유럽과는 또다른 매력이 있더라구요... 안선생님께서도 숱한 여행을 통해 이미 경험하셨겠지만, 동유럽의 풍광들은 서유럽의 이름난 도시들에서 느껴지는 웅장함이나 세련미, 혹은 다소 거들먹거리고 뽐내는 듯한 풍경 대신, 고즈녁하면서도 고상하고 차분한 느낌이 많이 들었습니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도 자연스레 풍기는 고상한 아름다움도 있고, 뽐내지 않아도 저절로 멋진 기품도 느껴지고, 동화속 이야기가 곳곳에 숨어있는 듯한 천진난만함이나 순진무구함도 느껴지고요...

여행, 음악, 미술, 사진, 영화 등등에 두루 조예가 깊으신 안선생님께도 동유럽 여행을 가보시면 분명 커다란 만족을 느끼시리라 믿습니다.^^
 
17일 동안의 유럽 여행에서 만난 풍경과 사람들

 

 

어영부영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모처럼(?) 아내와 함께 동유럽을 여행하기로 계획을 세웠던 게 올해 3월 초순쯤 되었던 듯하다. 그런데 그동안 뭐가 그리도 바빴는지 여태 아무런 준비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내일(5/18)이면 뮌헨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라타야 한다. 속절없이 흘러간 두어 달의 세월이 그저 야속하기만 하다.

 

따지고 보면 작년 7월에 감행했던 '17일 동안의 유럽 자유 여행 경험'이 이번 여행에 대한 준비 소홀에 크게 한 몫을 한 듯하다. 작년 여행만 하더라도 '하나에서 열까지' 정말 준비할 게 많았다. 그런데 이번 여행은 어쨌든 '패키지 여행'이니 그저 안내자가 이끄는 대로 아무 생각없이 그저 따라다니기만 해도 그만이라는 생각부터 앞섰다. 도대체 준비할 게 뭐가 별 게 있겠냐 싶은 알량한 생각에 아무 생각도 없이 지내다 보니 어느새 여행을 떠날 날짜가 코앞에 불쑥 다가오고 말았다.

 

동유럽을 여행한다고 하더라도 어디  가볼 만한 도시가 어디 한둘일까마는, 우리는 특별히 몇몇 도시만 집중적으로 돌아다니는 '여행 스케줄'을 따로 골랐다. 그래서 이번에 여행할 나라는 체코, 오스트리아, 헝가리 딱 세 나라다. 도시 또한 체코의 프라하와 체스키크룸로프,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 할슈타트, 비엔나, 헝가리의 부다페스트가 전부다.

 

여러 나라의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는 여행 상품도 많았지만 주마간산격으로 도시를 스치듯 지나치며 장거리를 부지런히 이동하는 게 도대체 무슨 재미가 있을까 싶어 일부러 애써 찾아봤더니 마침 알맞은 상품이 나와 있었다. 이번에 고른 여행상품은 최대인원을 열댓명으로 제한한다는 점도 좋았고, 유명 관광지의 한가운데서 묵을 수 있다는 점도 무척 매력적이었고, 무엇보다도 '자유시간'을 듬뿍 준다는 점이 좋았다.

 

 - 동유럽 여행 코스(뮌헨 in, 프랑크푸르트 out)

(붉은 색 표시는 항공편으로 이동)

 

우리가 묵게 될 숙소들은 대략 프라하에서도 중심지역(카를교 근처), 체스키크룸로프, 할슈타트, 비엔나 중심, 부다페스트 중심 등인데, 특히 체스키크룸로프와 할슈타트의 동화 속 풍경 같은 곳에서 하루씩 묵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대된다. 특히나 할슈타트는 작년 여름에 우리 일행이 직접 차를 몰고 다녀온 곳인데, 그 멋진 풍경 속에서 그리 오래 머물지 못한 아쉬움이 너무나 컸었기 때문에 이번 여행에서 '할슈타트에서의 저녁과 밤과 아침'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너무나 가슴이 설렌다.

 

 - 이번 여행과 작년 여행이 겹치는 경로. 점선 동그라미는 작년 여름 여행때 특별히 인상깊었던 여행지들

 

 

 - 맨 왼쪽 동그라미는 장크트 길겐(St.Gilgen) 마을. 모짜르트의 어머니가 태어난 곳이니 모짜르트의 외가인 셈.

   볼프강 호수 주변의 멋진 휴양지에서 지난해 여름에 우리 일행은 아주 예쁜 펜션에서 하루를 묵었었다.

 

 

 - 두 번째 동그라미_우리가 묵었던 숙소에서 대략 20여 km쯤 떨어진 잘츠감머굿 호숫가의 그림같은 풍경

 

 

 - 세 번째 동그라미_할슈타트 풍경. 이번 여행에서는 이 작은 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낼 예정.

 

 

 - 여행자들의 로망이라 불리는 할슈타트를 찾은 낯선 여행자

 

 

 

작년에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 여행을 다녀오면서 얻게 된 여러 가지 소득 가운데 정말 '뜻밖의 소득'이 하나 있었다면 그건 바로 클래식 음악을 듣는 데 '독일 여행'이 굉장히 많은 도움이 되더라는 점이다.

 

사실 클래식 음악을 얘기하면서 '독일'을 빼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서양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바흐도 독일인이고,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 추앙받는 베토벤 또한 독일 사람이니 달리 더 말해 무엇할까.

 

어쨌든 작년에 독일을 구석구석 누비고 온 덕분에 클래식을 들려주는 라디오 방송에서 곧잘 접하게 되는 '음악가들의 발자취'를 더듬는 얘기들을 들을 때마다 이런저런 도시와 장소들이 머릿속에 다시금 떠오르면서 그 얘기들이 정말 귀에 쏙쏙 들어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비록 작년 여름 여행때 정작 실제로 음악 공연을 접했던 건 딱 한 번 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 바그너의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의 무대인 뉘른베르크

 

 

 - 뉘른베르크는 독일에서도 가장 맛있는 소세지를 맛볼 수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우리 일행은 다음 행선지인 라이프찌히로 서둘러 달려가야 했기 때문에 이 소시지를 달리는 차안에서 먹었다.

 

 

 - 바흐가 살아생전 가장 오랫동안 활약했고 이제는 그의 영원한 안식처가 된 라이프찌히의 성 토마스 교회

 

 

 - 라이프찌히를 떠나 우리 일행이 도착한 곳은 '엘베 강의 피렌체'로 불리는 음악 도시 드레스덴.

    사진의 맨 오른쪽 건물이 바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드레스덴 젬퍼 오페라 극장이다.

    이 극장의 위치를 제대로 알지 못해 우리 일행은 7월의 뙤약볕 아래 꽤나 많은 시간을 헤맸었다.

 

 

 - 드레스덴 젬퍼 오페라 극장 정문 일부

 

 

 - 드레스덴을 떠나 다다른 곳은 베를린. 수많은 거장들이 거쳐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로 통하는 길

 

 

 - 마침내 그 유명한 베를린 필하모니 홀까지 찾아왔지만 그저 외관만 구경하고 돌아설 수밖에 ...

 

 

 - 여러 도시들을 거치고 난 뒤 우리 일행은 마침내 하이델베르크에 와서야 '고성 음악회'를 즐길 수 있었다.

   이때 들었던 드보르작의 교향곡 8번 가운데 3악장은 정말 온 몸에 전율을 느낄 만큼 감동적이었다.

 

 

지난해 여름 여행에서 아쉬웠던 점이 어디 한둘일까마는 그 가운데 가장 큰 아쉬움은 아무래도 음악으로 유명한 여러 도시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루체른과 잘츠부르크와 비엔나를 건너뛰었다는 점이다. 언제 또다시 갈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지척의 거리를 두고도 그런 도시들을 그냥 못 본 체 스쳐 지나가야 한다는 건 두고두고 후회스러울 만큼 여간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행히 이번 여행때는 잘츠부르크와 비엔나도 충분히 여유롭게 둘러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체코의 프라하에서도 온전히 이틀밤을 묵을 정도로 여유있는 일정이어서 지난해 여름에 가졌던 아쉬움을 얼마쯤 달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부터 든다.

 

체코의 프라하는 드보르작이나 스메타나 뿐만 아니라 모짜르트에게도 매우 특별한 도시여서 평소에도 몹시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그래서 내가 이번 여행을 앞두고 결코 빼놓아서는 안 되겠다 싶은 준비사항이 따로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그 유명한 음악 영화인 〈아마데우스〉를 '미리' 봐 두는 일이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여태껏 그 유명한 영화를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가 하필이면 내가 군에 복무할 때와 겹쳐서 그랬던 듯하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 이후에 얼마든지 그 영화를 볼 기회가 있었을 텐데, 여태 그 영화를 보지 못한 나도 참 어지간하다 싶긴 하다.)

 

이번에 마침 밀린 숙제 하듯이 영화〈아마데우스〉를 보고 나니 모짜르트의 걸작 오페라인 〈피가로의 결혼〉과 〈돈 조반니〉가 초연된 곳도 바로 프라하였다는 사실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모짜르트가 그의 조국인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보다 체코의 프라하에서 더욱 열렬한 환영을 받았던 사실은 자주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모짜르트에게 프라하가 그 정도로 사랑받은 도시인 줄은 미처 몰랐다.

 

프라하는 비단 모짜르트에게만 특별한 도시도 아니다. 블타바가 포함된 연작 교향시〈나의 조국〉을 작곡한 스메타나는 물론 헝가리의 보헤미안 정서를 대표하는 음악들을 여럿 남긴 드보르작도 결코 프라하를 빼놓고는 이야기하기 어렵다. 게다가〈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쓴 밀란 쿤데라, 〈변신〉과 〈성(城)〉을 쓴 프란츠 카프카에게도 프라하는 '결코 떠날 수 없는 도시'이자 자신들의 삶과 작품의 무대 그 자체였다.

 

그토록 걸출한 인물들이 평생 동안 고스란히 그곳에서 살다가 묻힌 여러 이름난 도시들을 이번 여행을 통해 두루 직접 둘러볼 수 있게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벌써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더군다나 이번 여행을 앞두고 또하나 빼놓지 않은 '준비물'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음악의 본고장인 비엔나에서 직접 음악 공연을 볼 기회를 만드는 일이었다.

 

욕심 같아서는 빈 뮤지크페라인에서 모짜르트의 피아노협주곡도 들어보고 싶고, 칼스 성당에서 모짜르트의 레퀴엠도 직접 들어보고, 빈 슈타츠오퍼에서는 모짜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돈조반니, 코지 판 투테까지 모조리 보고 왔으면 싶지만 그저 희망사항일 뿐이다. 비엔나에서 머무는 게 고작 이틀 뿐이다 보니 원하는 공연이 마땅한 게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빈 슈타츠오퍼를 구경할 겸 체네렌톨라를 예약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아주 좋은 자리를 고르느라 거금을 들였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이미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 정말 여행을 떠날 날이 코앞에 바싹 다가왔다. 이것저것 몇가지 얘기를 더 쓰고 싶지만 더 이상은 무리다. 이쯤에서 마무리해야겠다. 여행을 다녀 오지도 않은 사람이 '떠날 여행'에 대해 너무 많은 말을 늘어놓는 것도 흠이라면 흠이겠다. 여행을 다녀와서도 얼마든지 이야기를 풀어놓을 시간은 있을 테니 그 때 좀 더 알차고 풍성한 이야기를 꺼내 놓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럼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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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공연 후기...
    from Value Investing 2015-11-23 09:38 
    "장소가 회상시키는 힘은 그렇게도 크다! 그리고 이 도시에서의 그 힘은 무한히 크다. 어디를 걷든지 우리는 역사의 유적 위에 발을 디디는 것이다"(키케로) 나는 그들의 용모와 자세와 의복을 고찰해 보기가 재미난다. "나는 이런 위대한 이름들을 내 입에 올려 보며, 그것을 내 귀에 울려 오게 한다. 나는 그들을 숭배하면 이런 위대한 이름들 앞에 일어선다."(세네카) - 몽테뉴 * * * 사흘 전에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내한 공연을 보고 왔다. 연주 프
  2.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_뤼벡과 그 밖의 도시들
    from Value Investing 2017-07-26 23:47 
    나는 저축하는 버릇을 버렸다. 큰 돈을 쓰며 하는 여행의 재미가 이 어리석은 생각을 뒤집었다. - 몽테뉴 * * * 뒤늦게(?) 토마스 만의 소설『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을 읽고 있다. 이 작품은 꽤나 긴 소설이지만 독일 사람들은 이 소설을 여전히(?) 아주 즐겨 읽는다고 한다. 토마스 만은 1897년 10월 말부터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1900년 7월 18일에 끝냈다고 하는데, 그가 태어난 해가 1875년이었으니 불과 스물 다섯에 이 거대한 장편
 
 
LAYLA 2015-05-17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전히 즐거운 여행이 되시기를 빕니다 :)

oren 2015-05-18 00:03   좋아요 0 | URL
LAYLA 님께서 총알 같은 댓글을 달아주셨군요. 성원해 주셔서 넘흐 감사합니다~

2015-05-18 0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01 16: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5-05-18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는 내내 제가 다 설렙니다. 즐거운여행 하고 돌아오셔서 귀한 이야기 풀어주세요~

oren 2015-06-01 16:43   좋아요 1 | URL
여행은 너무 좋았는데 여행 내내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이래 저래 설쳐대는 바람에, 여독이 아직도 다 풀리지 않은 듯해요. 빈에서 음악 연주회를 들었던 이틀 밤을 빼놓고는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밤 열두시를 넘길 때까지 야경을 즐기러 쏘다니거나 카페 혹은 술집을 전전하면서 맥주와 와인으로 목을 축였더니 아직도 밤만 되면 뭘 좀 마셔야 될 듯한 착각이 들 정도랍니다. ㅎㅎ

sijifs 2015-05-18 0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떠날 여행이 끝나고 돌아온 여행이 되면, 여행이야기 들려주세요^^

oren 2015-06-01 16:45   좋아요 0 | URL
여행사에서도 `사진을 곁들여` 여행 후기 남겨달라고 조르더라구요.
사진을 컴퓨터에 업로드하는데만 두어 시간 걸리더라구요. 아직 사진은 걸러지지도 못한 채 엉망진창으로 쌓여 있구요. 여독이 좀 풀려야 `작업`을 좀 해 볼 텐데 말이지요. ㅎㅎ

붉은돼지 2015-05-18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말씀처럼 제가 다 설레는군요^^
짤즈캄머굿 지역은 정말 멋지죠~~ 괜히 제 엉덩이가 들썩들썩 ㅋㅋㅋㅋ
잘 다녀오세요~

oren 2015-06-01 16:49   좋아요 0 | URL
잘츠캄머구트는 정말 환상적인 곳이지요..

이번 여행에서 `작년 여름 여행때` 직접 운전하며 지났던 길을 다시 찾아가니 정말 가슴이 벅차오르더군요.

이번엔 볼프강 호수에 자리잡고 있는 장크트 길겐에 들러 모짜르트 어머니의 생가에도 들렀고, 거기서 30km쯤 떨어진 할슈타트에서는 1박 2일 동안 샅샅이 돌아다니며 알프스 산악지방과 호수 풍경을 완전히 만끽할 수 있었답니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에요. 나중에 할슈타트 풍경 사진을 여러 장 올려볼까 합니다. ㅎㅎ

세실 2015-05-18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떠나셨군요~~~
갔던 장소를 다시 가보는것도 참으로 좋을듯요. 낯익은 풍경들....
행복 만땅하고 오시길요^^

oren 2015-06-01 16:51   좋아요 0 | URL
1년 만에 다시 가 본 할슈타트와 장크트 길겐은 첫 여행때도 너무나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곳이어서 기대가 컸는데, 이번에 다소 여유롭게 다시 들렀더니 더욱 다채롭고 아름다운 풍광들을 보여주더군요. 낯선 곳이 문득 익숙해 진다는 사실이 여간 흥미롭지 않았어요. ㅎㅎ

1004ajo 2015-05-19 0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독일 가 보고 싶어요.
중2 고1 두 아들과 함께~

oren 2015-06-01 16:54   좋아요 0 | URL
독일은 여행하기 정말 편안한 나라에요. 사람들도 너무나 친절하고요.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도둑맞을 일도 거의 없을 정도로 안전하기도 하고, 자동차로 여행할 경우에도 `도로 사정`이 아주 좋고, 길을 찾아 다니기에도 참 편리하구요. 무엇보다 여기 저기 찾아가 볼 곳이 너무나도 많은 곳이지요.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꼭 한 번 `독일`을 가보시길 바래봅니다.

kj_Shin 2015-05-27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러워요^^

oren 2015-06-01 16:55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경중 님..

B.J.OH 2015-06-18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에게 클래식이란...
물론 그 녀석과 친해지려는 노력을 안해본건 아니다.
CD 전집을 두번이나 충동구매해서 의무감에 듣기 시작했으나, 포기까지는 일주일을 넘기지 않았고
와이프 손에 이끌려 간 예술의 전당 쇼팽교향곡 연주회에서는 한시간 남짓 목을 간질이는 기침을
참아내는 인내력을 발휘했지만, 10분 휴식후 다시 들어가는 좌절감을 맛봐야 했다.
펀드로 진행한 뮤지컬 아이다 덕분에 공연티켓을 주변에 선심쓰면서도 같은 공연을 세번이나 보러가는
아줌마들의 열정은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oren !
이런 내가 이번 자네 여행기를 탐독하고 나서 그 해법을 찾아보려 하네.
기회가 된다면 멋진 동유럽여행도 가보려 하네.
다음에는 분위기좋은 카페의 편안한 소파에서 와인 한잔하며 클래식 음악 얘기나 해 주게나.

oren 2015-06-30 20:25   좋아요 0 | URL
클래식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대상이었다면 클래식이 아니지 싶은 생각도 드네..
쉽게 다가오지도 않고, 익숙할 때보다 낯설 때가 훨씬 더 많고, 때로는 난해하기까지 하고...
그런데 자꾸 듣다가 보면 조금씩 조금씩 `들리게` 되고, 낯설게만 느껴지던 음악들이 익숙하게 되고,
차츰 친숙하게 되면서 어느새 나도 모르게 미리 `예측하던 곡조들`이 실제로 내 귀와 몸 속으로 찾아들고,
그러면서 차츰 `음악의 기쁨을 아는 몸`이 되어가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싶네..

기회가 되면 동유럽 여행은 꼭 한 번 가보라고 권하고 싶네..
분명 두고두고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으로 오래도록 남을 터이니 말일세...
 
T.S. 엘리엇의『황무지』와 사랑 받았던 여자 시뷜라

 

죽은 자의 매장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도 라일락은 자라고

추억과 정욕이 뒤섞이고

잠든 뿌리가 봄비로 깨어난다.

차라리 겨울은 따스했거니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고

메마른 구근으로 작은 목숨을 이어줬거니.

 

 - T.S.엘리어트의 '황무지 <1> 매장(埋葬)' 중에서

 

 

 * * *

 

 

또 한 번의 4월이 지나갔다. 그 누군가에게는 틀림없이 '내 삶에서 가장 잔인한 달'로 각인된 채로...

 

T.S. 엘리어트가 『황무지(荒蕪地)』를 쓰지 않았더라도 우리가 이토록 자주 4월을 잔인한 달로 묘사할 수 있었을까.

 

어느새 4월은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서 앗아간 듯하다. 라일락 향기에 잠시 정신이 아득하던 순간들도, 찔레꽃 꺾으러 아지랭이 피어오르던 덤불숲들을 헤치며 땀을 삐질삐질 흘리던 추억들도, 찔레꽃 너머로 살포시 겹쳐지던 어릴적 동네 여자 친구의 꽃처럼 예쁘던 동그란 얼굴도, 어린 아가의 손처럼 앙증맞게 돋아난 새잎들 위로 촉촉히 내리던 봄비의 추억들마저도...

 

4월이 잔인한 이유는 너무도 많다. 굳이 천재 시인이 93년 전에 쓴 '심오한 뜻'까지 헤아리지 못한다손 치더라도 말이다. 사실 그 시인이 그 시에서 말하고자 했던 바는 그가 '죽은 자의 매장' 앞에 끌어다 놓은 다음 몇 줄로도 충분하다.

 

한번은 쿠마에 무녀가 항아리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을 직접 보았지.

아이들이 '무녀야, 넌 뭘 원하니?' 물었을 때 그녀는 대답했어.

"죽고 싶어"

 

그토록 오래 살았던 쿠마에의 무녀가 저토록 처절한 소원을 내뱉게 된 원인이 무엇이었을까.

 

로마 신화에 따르면 이 무녀는 꽃처럼 피어오르던 아리따운 처녀 시절에 아폴론 신으로부터 구애를 받을 때 말했던 '한 가지 소원'이 화근이었다. 그녀는 결국 자신을 사랑한 아폴론 신으로부터 '먼지 알갱이 수만큼 많은 생일'을 선물로 얻었지만 '그 세월이 줄곧 청춘이어야 한다는 요구'를 그만 깜빡하고 말았다. 그 바람에 그녀는 항아리 속에 매달려 있을 만큼 쪼그라든 채로 제때에 죽지도 못하는 슬픈 운명에 빠지고 말았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천장에 그려 넣은 쿠마에 무녀는 결국 늙었으나 여성스러움을 잃어버리고 남성처럼 우람한 근육과 힘을 갖춘 모습으로 뒤바뀐 채 아직도 그곳에 남아 있다. 지나친 과욕은 해마다 돌아오는 4월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를 해소할 수 없는 영원한 고통 속으로 빠트릴 수 있다는 교훈과 함께.

 

 


[쿠마에의 무녀], 도메니키노(Domenichino 1581∼1641), 1610년경, 피나코테카 카피톨리나, 로마

 

T.S. 엘리어트가 '찬란한 4월'을 보며 떠올린 건 바로 '고통스런 삶의 반복'이었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고 다시 태어나야 하는 '자연'에게도, 죽을 만큼 괴로워도 어쨌든 삶이 끝날 때까지는 또다시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 인간들에게도 4월은 그래서 늘 잔인하게 다가오고 또 잔인하게 지나간다.

 

그런데 자연과 닮은 인간이 유독 자연과 틀린 점 하나가 이 대목에서 불쑥 도드라진다. 자연이 창조한 존재 가운데 유독 인간만이 '탐욕과 절제'를 모른다는 점이다. 인간의 탐욕은 그래서 늘 비극의 씨앗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목적'이 '특정한 쾌감을 산출하는 데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카타르시스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비극에서 얻는 쾌감은 '위험 부담을 남에게 전가하고 얻는 경험의 쾌감'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이웃에 불행과 고통을 주지 않고는 배출될 수 없는 격렬한 감정의 스릴'을 비극이라는 안전판 위에서는 마음껏 즐길 수 있게 되는 셈이다.

 

그런데 비극에 빠진 사람들의 형편이 '결코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로 전환되는 순간 우리는 곧장 깊은 연민으로 빠져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우리에게 내재된 '공감하는 능력'이 불러일으키는 '확대되는 원' 때문이다.

 

고대의 시인들이 다룬 비극들은 거의 대부분 '왕가의 비극'이나 '영웅들의 비극'이 많았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과 『안티고네』, 아이스퀼로스의 『아가멤논』과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와 『헬레네』등 비극의 제목만 살펴봐도 이 점은 쉽사리 알 수 있다.

 

그런데 현대의 비극은 오히려 '대중들'에게 주역을 떠맡겨놓은 느낌이 들 때가 많다. 굳이 세월호의 비극이나 네팔 대지진의 참극을 예로 들 필요조차 없다. 사람들이 좀 더 풍요롭게 살기 위해 고안해 낸 '증권시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온갖 비극들만 살펴봐도 '대중이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은 자명해 보인다.

 

인간 탐욕의 역사를 살펴 보면 아주 오랜 옛날에는 주로 '전쟁을 통한 이민족 지배'가 탐욕을 만족시켜줄 주된 수단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모든 걸 얻게 된다. 단지 영토와 재물과 노예만 얻는 것이 아니라 승리에 뒤따르는 드높은 영광과 명예까지도 송두리채 차지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얻을 수 있는 것' 가운데 전쟁보다 더 빠른 수단은 없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를 고찰해 보면 아주 오랜 옛날부터 가장 최근에 이르기까지 '전쟁의 역사'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이 금세 드러난다. 우리는 아직도 '전쟁이 남긴 비극'과 '전쟁에 대한 사죄 문제'가 여전히 우리의 코 앞에서 벌어지는 가장 뜨거운 뉴스임을 매일 확인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과학이 진보하고 지식이 축적됨에 따라 이 모든 걸 뒤바꾸어 놓았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고 무역이 활발해 지면서 곧 '경제와 돈'이 인간의 삶을 급속도로 빠르게 지배하기 시작했다. 전쟁을 수행하는 능력 또한 거의 전적으로 '경제력'에 따라 판가름날 정도가 되었다. 이른바 '자본'이 모든 걸 좌지우지하는 '자본주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주식회사가 빠르게 생겨나고 암스테르담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증권거래소'가 곧 전세계 여러 도시에서도 재빠르게 생겨나기 시작했다. 일부 자본가가 독점하던 주식회사는 곧 '주식'으로 잘개 쪼개져 '일반 대중들'에게도 급속하게 공급되면서 '기업의 소유권'이 널리 분산되기에 이르렀다. '주식의 대중화 시대'가 열린 것이다.

 

탐욕스런 일반 대중들의 손에 주식이 쥐어졌으니 주가가 급등락을 겪는 일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했다. 어느새 '금융투기의 역사'가 '전쟁의 역사' 만큼 흥미를 끌기 시작했다.

 

'투기의 역사'에서 결코 빠지지 않는 게 바로 '튤립'이다. 그 무대 또한 증권거래소가 처음으로 생겨났던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이었다.

 

1624년 황제튤립은 당시 암스테르담 시내의 집 한 채 값과 맞먹는 1,200플로린에 거래되었다.

튤립뿌리 1파운드가 단 1주일만에 20길더에서 1,200길더까지 치솟기도 했다.
당시 노동자 1달 봉급수준에서 5년치 연봉에 상응하는 값으로..

튤립 한뿌리를 위해 지불한 2,500길더로 27ton의 밀과 50ton의 호밀, 살찐 황소 4마리,
돼지 8마리, 양 12마리, 포도주 2드럼, 맥주 2큰통, 버터 10ton, 치즈 3ton, 린넨 2필,
장롱하나에 가득찬 옷가지, 은컵 1개 등을 살 수 있었다.

마침내 1637년 2월 3일 튤립시장이 붕괴했다.

 - 에드워드 챈슬러, 『금융투기의 역사』중에서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놀라운 결과를 이끌어내는지도 늘 흥미롭지만 그보다 더욱 흥미를 끄는 점은 '인간의 탐욕'은 결코 꺼질 줄 모른다는 점이다. 마이클 더글러스가 주연으로 나섰던 『월스트리트 2』의 제목도 그래서 'Money never sleeps'였다. 돈은 결코 잠드는 법을 모른다.

 

2015년 4월을 가장 잔인한 달로 기억하게 될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몸에 좋다는 '비타 500'을 한 박스나 선물받은 것으로 전해지는 전직 총리에게만 4월이 잔인했던 건 물론 아니다. 갱년기 여성들에게 더할 나위없이 좋다는 '백수오'를 건강기능식품으로 만들어 판 사람들과 그 회사의 주식을 사들인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올해 4월은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을 만큼 충분히 잔인했을 듯하다.

 

'백수오' 하나로 빅히트를 치면서 2013년 10월에 증시에 데뷔한 내츄럴엔도텍이라는 회사는 상장 이후 1년 반 동안에 시가총액이 무려 1조 7,633억에 달할 정도로 뻥튀기에 성공했다. (19,334,232주 × 91,200원=1,763,281,958,400원)

 

뒤늦게나마 이 회사를 살펴보기 위해서 주식을 공모할 당시 내놓은 '투자설명서'를 뒤져 보니 2012년말 종업원수는 고작 26명이었고, 매출액은 약 316억, 순이익은 약 44억 규모에 불과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형자산은 15억(토지 약 12억, 기계장치 약 3억)에 불과했다.

 

사정이 훨씬 나아진 2014년 결산 시점으로 바꾸어 살펴봐도 사정은 그리 썩 나아보이지 않는다. 직원수는 고작 76명으로 늘어나는 데 그쳤고, 매출액은 1,241억, 영업이익 259억, 순이익 208억 수준이다. 자산에서 부채를 뺀 자기자본은 716억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런 회사를 두고 목표주가 10만원(시가총액으로 환산하면 1조 9,334억)을 그리도 당당하게 외치는 애널리스트가 어떻게 한꺼번에 여럿 등장할 수 있었는지 나는 오히려 그게 궁금하다. 심지어 한국을 대표하는 재벌 계열 증권사에서는 '백수오 가짜 파문'이 불거진 이후에도 줄곧 '투자의견 매수'와 '목표주가 10만원'을 계속 고집하는 만용을 부렸다. 건전한 일반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행동이 아닐 수 없다.

 

그 애널리스트의 말을 순진하게 곧이곧대로 믿고 행동할 만한 어리석은 투자자가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마는 혹시라도 그 애널리스트의 '투자의견'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받아서 그 이후에라도 그 회사의 주식을 매수한 투자자들이 아예 없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고, 한국 증권시장을 둘러싼 제반 환경의 한심스러운 처지를 제 스스로 드러내는 추악한 몰골을 엿보는 듯해서 여간 입맛이 씁쓸하지 않다.

 

이번 '백수오 가짜 파문'을 보면서 꼭 1년 전에 벌어진 참극인 '세월호 침몰'과 다를 게 무엇이냐는 자조 섞인 반응이 나오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다. 세월호 기내 방송에서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라'는 주장이나, '백수오가 가짜일 지도 모른다'는 한국 소비자원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목표주가 10만원에 매수하라'는 주장은 닮아도 너무 닮았다.

 

'백수오 가운데 이엽우피소가 섞여 있으니 자진 폐기하고 회수하라'는 소비자원의 권고에도 아랑곳없이 회사는 오히려 한국 소비자원을 상대로 이엽우피소 검출 사실에 대해 '발표 금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내고, 그 와중에 어떤 임원은 '동작 빠른 놈이 장땡'이라는 식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빠져 나가기 바빴고, 어떤 임직원들은 스톡옵션을 행사하느라 분주했고, 또 어떤 임원들은 주식을 내다팔기에 바빴다.

 

대표이사는 소비자원의 발표가 잘못되었다며 오히려 뒤집어씌우기에 나서는 한편 일간지에 대대적으로 광고를 내고 '자사주 매입'에 나설 만큼 '자신들의 혐의'에 대해 '극렬하게 저항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그게 다 '자신들의 안전한 탈출을 위한 절박한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이 모든 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결국 '인간의 탐욕' 때문에 생겨난 일이 아닌가 싶다. '천 년 만 년 살 것처럼 행동하는' 인간도 결국 언젠가는 죽기 마련이다. 그리고 꼭 오래 산다고 해서 행복이 그에 비례하는 것도 결코 아니다. 심지어 '천 년을 살았던' 쿠마에의 무녀는 '죽고 싶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국부론』을 쓴 아담 스미스가 오래 전에 남겼던 충고는 여러모로 다시금 음미해 볼 필요를 느낀다. 그는 자신이 경제학자로 남기 보다는 오히려 도덕 철학자로 남기를 더욱 바랬다. 그가 자신의 묘소를 찾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도덕감정론』의 저자, 여기에 잠들다."였다. 그가 오래 전에 책 속에 남겨놓은 말을 5월의 첫날에 다시 한 번 음미해 보고 싶다.  어쨌든 5월은 가정의 달 아닌가. 헛된 탐욕으로부터 벗어나 딸린 식구들을 먼저 생각할 때다.

 

어느 한 사람의 묘비에 새겨진 글

역사의 기록들을 검토해 보고, 당신 자신이 경험한 범위 내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회상해 보고, 당신이 책에서 읽었거나 이야기를 들었거나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로서 자신의 개인생활에서건 사회생활에서건 극히 불행했던 모든 사람들의 행위가 어떠했었는지를 주의를 기울여 고찰해 보라. 그러면 당신은 그들 중 절대다수 사람들의 불행은 그들이 자신의 한창 좋은 때가 언제인지, 조용히 앉아서 만족하고 쉬어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것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즉, 만족하고 멈추어야 할 때를 몰랐던 데 있는 것이다). 온갖 약을 복용함으로써 건강한 자신의 신체를 더욱 건강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던 어느 한 사람의 묘비(墓碑)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나의 몸은 건강했다. 나는 더욱 건강해지기를 원했다. 그리고 지금은 여기에 있다"라고.

 - 아담 스미스(Adam Smith), 『도덕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中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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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5-01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꺼질 줄 모르고 팽창하기만 하다 터져버리는 풍선처럼 인간의 탐욕이 화를 불러오는 허다한 일들 앞에서 도덕감정론의 인용글은 일침을 놓네요. 오렌님의 정돈되어 숙성된 페이퍼 잘 읽었습니다

oren 2015-05-01 18:17   좋아요 0 | URL
정말 오랜만이네요. 프레이야 님~

요즘 다른 곳들은 사정이 어떤지 몰라도 주식시장만큼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답니다. 그러다보니 호황기만 되면 어김없이 꼭 나타나는 부작용들이 벌써부터 하나둘씩 터져나오기 시작하는 것 같아요. 갱년기 여성들에게 특히 좋다는 그 `백수오로 만든 건강기능식품들`이 그토록 불티나게 팔릴 줄도 몰랐지만, 이토록 다방면에 걸쳐 `고약한 부작용`을 몰고올 줄은 정말 몰랐네요.

cyrus 2015-05-01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월이 시작되는 날에 엘리엇의 `황무지`를 읽으니 느낌이 새롭습니다. 4월이 되면 언론에서는 `잔인한 달`이라는 관용어를 남발했었는데 자고 일어날수록 세상이 하수상해서 그런지 이제는 진부하게 느껴집니다. 이번 달에도 잔인하게 느껴지는 사건들이 생길까봐 걱정도 됩니다.

oren 2015-05-01 18:21   좋아요 0 | URL
cyrus 님 오랜만이네요..

더없이 화창한 5월의 첫날에 다소 우울한 얘기를 꺼내놓고 보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네요. 아무쪼록 나쁜 일들은 어서 빨리 좋은 방향으로 수습되고 앞으로는 기분좋은 일들이 좀 더 많이 생겨났으면 하는 바램뿐입니다.

대길 2015-07-11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제학수업때 교수님께서 아담스미스가 살아있다면 신자유주의자들의 신봉자가 되기를 싫어 했을 거라는 이야기가 얼핏 생각이 나네요~ 그가 추구한 것은 인간의 무한한 탐욕이 아니라 인감의 양심을 바탕으로 한 자유였다는 것을 책을 읽어보면 안다고 하셨던 기억이~ 예전에 그 기억을 가지고 다시 국부론을 시작해볼까~ ㅋ 잘 읽었습니다

oren 2015-07-16 11:56   좋아요 0 | URL
unun1718 님 안녕하세요? 님의 댓글을 읽어 보니 그 경제학 교수님께서 제대로 가르치신 듯합니다. ㅎㅎ

아담 스미스에 대해서는 사실 `성급한 오해`가 너무나 만연되어 있어서 그를 조금만 더 알게 되더라도 지금보다는 훨씬 더 존경받는 철학자가 되었으리라는 생각조차 듭니다. 그가 쓴 (케인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단 하나의 불후의 경제학 명저`인 『국부론』은 꼭 한 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그 책을 읽고 나신 후에는 물론 그보다 훨씬 더 심오한 책인 『도덕감정론』까지 읽으시길 바라겠고요. 아무튼 건투(?)를 빕니다.
 

 

(아주 오랫만에 '투자'에 대해 길게 써 본 글이라 여기에도 남겨 봅니다. 투자에 관심 있는 분들만 읽어보세요~)

 

 

"높이 오르라. 멀리 오르라. 여러분의 목적지는 하늘이다. 여러분의 목표는 별이다."

 - 윌리엄스 대학 기념비에서

 

* * *

 

까마득한 옛날인 1930년에 태어나 어느새 우리 나이로 여든여섯에 접어든 '워렌 버핏' 할아버지를 모르는 사람은 이제 드물지 싶습니다.

 

그토록 명석했던 그가 세계 최고의 스승인 벤저민 그레이엄으로부터 오랜 기간 동안 대학원 강의(컬럼비아 대학원)와 회사 업무(그레이엄&뉴먼 투자회사) 등을 통해 '위대한 가르침'을 온몸으로 전수받은 뒤에 고향인 오마하로 돌아가 소위 전업 투자를 시작한 게 그의 나이 이십대 중반이던 1956년쯤이었을 겁니다.

 

그토록 걸출한 투자자가 마침내 1988년에 '코카콜라' 회사에 투자하면서 자기 스스로를 자책했던 말은 다름아닌 '이 한심한 화상아' 였답니다. 그가 꼭 그처럼 표현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셰익스피어 희곡의 대사에 나온다는 그 유명한 말이 마침 떠올라 '멍청한 버핏 할아버지'가 그토록 뒤늦게 코카콜라에 투자하고 난 직후에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할 때 자책하듯 내뱉었다는 그의 말을 재미삼아 살짝 비틀어봤습니다. 어쨌든 그의 말뜻은 셰익스피어가 표현하고 싶었던 바로 그 심정과 조금도 다를 게 없었을 테니까요.

 

그가 전업투자를 막 시작했을 무렵에 한국에 살던 사람들 가운데 '코카콜라'를 마셔본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요? 1956년 쯤에 말입니다. 얼마 전에 개봉된 영화 《국제시장》을 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눈보라가 휘날리던 바람찬 흥남부두'를 떠나 무작정 남쪽으로 내려온 이북 사람들만 가난한 게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땅 위에 사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전쟁으로 모든 게 무너져내린 '폐허' 위에서 하루 하루 힘겨운 삶을 살아내야 했던 시기가 바로 1950년대 중반이었습니다. 심지어 '제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 날'을 떠올려 봐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을 겁니다. 1960년대 중후반 말이지요. 그때까지만 해도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코카콜라'는 커녕 '보리쌀 한 톨 조차' 구경하기 어려워 온갖 구황 작물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였고, 새봄이 돌아오면 진달래 꽃잎을 따먹기 바빴으며 한창 물이 오르는 소나무의 여린 껍질을 벗겨 먹으며 허기를 달래기 일쑤였습니다.

 

사정이 그러했으니 '너 코카콜라 먹어봤냐'는 질문 조차 극소수 사람들에게나 주고받을 법한 얘기였음에 틀림없을 듯합니다. 어쨌든 누구나 태어나서 난생 처음으로 먹어본 그 짜릿하고 달콤상쾌하기 그지없는 '코카콜라 맛'은 누구도 평생 잊지 못할 게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워렌 버핏이 전업투자를 막 시작하던 당시만 하더라도 전세계 인구의 대부분은 코카콜라의 바로 그 유명한 맛을 꿈에도 알지 못했다는게 '정설'입니다.(세계 인구의 대부분은 중국, 인도 등 아시아와 브라질 등 남미에 훨씬 많이 살고 있으니까요.) 그때는 이미 코카콜라가 탄생한 지 70주년이 다 되었을 무렵이었는데도 말입니다.(코카콜라는 1886년 약제사였던 존 펨버튼 박사(Dr. John Pemberton)가 맨처음으로 만들었답니다. 어느새 코카콜라의 나이가 므두셀라를 따라기가 시작했군요...)

 

그런 까마득한 옛날 옛적에, 스물여섯에 불과한 청년이, 미국 중부 내륙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오마하라는 시골에 살면서 그 당시로서는 그저 '머나먼 미래'였던 '70억이 넘는 인구가 실시간으로 거의 모든 소식들을 주고 받으며 살고 있는 기가 막힌 오늘날의 세계'를 온전히 내다본다는 건 꿈에서조차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그로서도 그저 코카콜라를 시도때도 없이 즐겨 마시기만 할 뿐 그 회사의 '먼 미래'를 내다보는 일에는 능력이 미치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능히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물론 아주 가끔씩은 '투자 대상'으로 잠깐씩 스쳐 지나가듯 고민해 보았으리라는 짐작도 아예 배제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겠지만요. 아마 그 당시에도 '70년 역사를 지닌 코카콜라'가 남겨 놓은 '엄청난 거부들의 탄생 스토리'가 틀림없이 시중에 시끌벅적하게 떠돌아다녔을테니까 말입니다.

 

제가 여기서 '코카콜라' 이야기를 하다가 지쳐서 이쯤에서 그만 '수정' 버튼을 누르고 이 창을 빠져나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제 글에 조금씩 속도를 좀 올려보겠습니다. 그래야 우리 각자가 원하는 시간에 자신이 원하는 일로 제때에 되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어쨌든 '오마하의 청년' 워렌 버핏은 '코카콜라'를 살지 말지를 두고 '환갑'이 다 되도록 계속 '고민'을 하며 살게 됩니다. 그보다 훨씬 아둔한 우리가 보더라도 그는 참 '멍청한 넘'임에 틀림없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현재는 매순간 빠르게 과거로 뒤바뀌면서 영원히 닫혀 버리지만 우리는 기억을 통해 거의 모든 과거의 일들을 명쾌히 밝혀내며 '누가 맞고 누가 틀렸는지' 언제나 명쾌한 판결을 내릴 수 있으니까 하는 말이지요. 그렇지만 또한 우리가 미래를 향해 얼굴을 돌리기만 하면 그 즉시 우리는 거의 대부분 '바보 멍청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미래는 언제나 활짝 열려 있으면서 매순간 쏜살같이 우리에게로 가까이 다가오지만 언제나 어김없이 '알 수 없는 상태로만' 다가올 뿐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결국 그토록 총명했던 워렌 버핏도 '먼 미래에는 새로운 경지가 개척될 것이다. 코카콜라는 전세계 어디서나 누구든지 즐겨 마실 것이다. 비록 지금은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일부 유럽 사람들만이 즐겨 마시지만 말이다....' 라는 사실을 아주 늦은 나이에 '어느날 문득'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가 다짜고짜로 '허겁지겁 달려가서' 코카콜라 주식을 마구 쓸어담았을까요? 그는 결코 그렇게까지 서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과연 오마하의 현인 다웠고 운도 참 좋았습니다. 1987년 10월에 느닷없이 뻥 터진 블랙먼데이가 바로 그에게 30년 이상이나 앓아왔던 해묵은 고민을 마침내 속시원히 해결해 주었기 때문이지요. 어릴 때부터 그토록 마시기를 즐겼고, 미수( )를 코앞에 둔 아직까지도 여전히 즐겨 마시고 있는 '코카콜라'를 만드는 회사에 마침내 마음껏 투자할 기회를 바로 그때 얻었던 것이지요. 그때 그 시절에 쓸어담은 코카콜라 주식 때문에 그는 마침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세계 최고의 부자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고 보니 제 말머리의 결론을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지 못하고 있군요. 글을 쓰다보니 자꾸만 제 얘기의 물줄기가 '워렌 버핏'이라는 거목이 자라게 된 '토양'을 거쳐 땅 속 뿌리까지 적시고 말겠다는 꼴이라고나 할까요. 이쯤에서 다시 물줄기를 바로잡아야겠습니다. 제가 묻고 제가 답하고 싶은 '서론 부분의 결말' 같은 질문은 바로 다음에 있습니다.

 

워렌 버핏이 코카콜라를 사들이는 데 왜 그토록 오랜 세월이 필요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 올바른 대답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투자에 대한 많은 비밀'을 이미 얼마쯤 터득한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투자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세상 이치에는 무척 밝은 사람'임에 틀림없을지도 모르겠구요. 물론 정답은 헤아릴 수 없이 많겠지요. 그가 코카콜라를 사기 전까지는 제법 멍청했다거나, 그조차도 '예측불가능한 먼 미래'는 온전히 내다볼 수 없었다거나 하는 말들도 결코 조금도 틀린 말은 아닐테니까요.

 

제가 좀 더 현실적으로(이 게시판 사정에 맞게) 떠올려본 이유는 대략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듯합니다. 무엇보다도 우선, 코카콜라는 너무 비싸 보였습니다. 스승인 벤저민 그레이엄의 가르침에 의하면 '코카콜라는 PER과 PBR이 너무나 높아 보였던' 게 사실이지요. 또 하나의 이유는 소위 'Invisible asset'이라고 불리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무형의 자산'으로부터 창출되는 어마어마한 가치를 완벽하게 파악하는 일은 워렌 버핏에게서도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요구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지 싶습니다.

 

그는 이미 오랜 투자 경력의 거의 대부분을 언제나 '무형의 자산'을 중시하는 투자를 해왔는데도 불구하고 유독 '코카콜라'에 투자하는데 그토록 애를 먹었던 모양입니다. 그가 투자했던 종목으로 널리 알려진 회사들은 대략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워싱턴 포스트, 버팔로 뉴스, 네브라스카 가구, 보쉐하임(보석회사), 월트 디즈니, 맥도날드, 질레트(면도기 회사) 등인데, 이들 회사의 대부분은 '예측할 필요조차 없을 만큼' 미래가 훤히 내다보이는 특징을 지니고 있지요. 그랬던 그도 '코카콜라'를 사는 데 그만큼 오래 걸렸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가장 최근 뉴스로는 이미 보유종목인 케첩업체 하인즈가 미국 대형 식품업체 크래프트와 합병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인수를 성사시켰다는 사실입니다. '크래프트 하인즈'는 세계 5위 식품 기업이 될 예정이라고 하지요. 아 참... 세계 굴지의 철강회사로 꼽히던 'POSCO'를 전량 매도했다는 뉴스도 있었네요...)

 

서설이 너무나 길었네요. 어쨌든 저뿐만 아니라 여러 투자자들이 최근 몇 년 동안에 가장 놀란 건 아마도 아래 표에 실린 몇몇 기업들의 '엄청난 주가 상승'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시가총액이 저토록 엄청나게 불어났을까요? 한 종목 한 종목을 유심히 뜯어보시고 살펴보시면 뭔가 공통된 점들이 조금씩 수면위로 붕 떠오르는 게 느껴질 겁니다. 이들 기업들은 무엇보다 오랜 업력을 쌓아오는 동안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력한 해자'를 구축해 온 내수 기반의 불황을 모르는 기업들이며, 세상이 (교통과 통신의 발달과 여행의 확산 등으로) 점점 더 빠르게 좁혀짐에 따라 자연스럽게 '영업의 외연'을 좁은 한국땅을 벗어나 해외로 꾸준히 확장해 온 기업들입니다.(물론 몇몇 예외도 있긴 합니다만..)

 

이들이 이토록 엄청난 시총으로 불어나고 영업이익의 20∼40배, 순이익의 30∼70배에 이르는 엄청난 멀티플을 대접받는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이미 오래 전에 워렌 버핏이 그토록 고민했듯이 말입니다.(맨 끝에 '비교'를 위해 덧붙여 놓은 대상홀딩스는 아직까지는 '참 착한 멀티플'을 가지고 있네요.)

 

 

 

이 글이 오래도록 머물게 될 공간은 결국 '대상홀딩스 종목 게시판'일 수밖에 없으니, 여러 지주회사들도 함께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표를 작성하면서 저는 대략 두세 가지 생각을 떠올릴 수 있었답니다.

 

첫째, 제일모직은 역시 엄청나게 비싼 주식임에 틀림없구나. 영업이익의 88.9배, 순익의 41.7배 멀티플은 과연 합리적인가? 외국인은 왜 꼴랑 2.5%만 투자하고 있을까? 저 주식이 액면가 5,000원으로 환산하면 7,025,000원에 달한다는 사실은 제대로 살피고 투자하는 것일까? 저 회사의 오너는 '투자 원금 대비 1,405배(주가 140,500원/액면가 100원)'로 뻥튀기했다는 사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등등.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던 속담이 그냥 생긴 게 아니더군요.

 

둘째, '업력 60년'을 자랑하는 대상그룹의 지주회사 시총이 '저 위치'에 있는 게 과연 얼마나 합리적일까?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한번 꼼꼼하게 '지주회사들의 실적과 투자 지표와 '현위치' 등을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가급적 '명백한 사실들'만 말하고자 할 뿐 굳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근거없는 '장밋빛 전망'까지 보태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어차피 판단은 언제나 각자의 몫일 테니까요.

 

 

'대상홀딩스의 미래'를 전망하는 일이 그리 어렵진 않을 듯합니다. 단기적으로는 2014년 2/4분기와 3/4분기에 '일회성 비용 계상' 때문에 나타났던 일시적인 실적 하락이 딱 그만큼 반전될 여지를 미리 예약해 두고 있기도 하고, 최근까지도 비우호적이었던 환율 흐름도 반전 가능성을 보이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주된 원재료인 '옥수수 시세'가 아직까지도 말이 아니게 헐값에 머무르고 있으니 '당분간의 실적 호전'은 따놓은 당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 국제 옥수수 가격 추이

 

 

무엇보다도 먼 미래에 대한 전망이 중요합니다. 그 얘기를 빼놓을 순 없겠지요.

 

압도적인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초강력 브랜드인 '종가집 김치'는 이제 더이상 한국 사람들만 먹는 식품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더 여러 나라로 수출될 게 뻔한 가장 확실한 먹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거대한 인구를 바탕으로 '놀라운 위력'을 드러내기 시작한 드넓은 중국으로의 수출은 아직 제대로 시작도 못해본 채 이제 다시 막 열리기 직전이구요.

 

세계적인 발효기술을 통해 만들어 내는 식품 소재 분야의 사업 전망도 여전히 밝아 보입니다. 서양인들이 빵을 비롯한 수많은 음식에 캐첩과 마요네즈를 즐겨 곁들여 먹듯이 꼭 그렇게 한국 사람들은 음식을 먹을 때마다 고추장, 된장, 쌈장, 간장을 빼놓지 않고 곁들여 먹습니다. 비빔밥을 먹는데 고추장이 빠질 수 없고 삼겹살을 먹을 때 쌈장이 없을 순 없겠지요. 그 분야에서 '최고의 맛'은 누가 뭐래도 '순창 고추장, 된장, 쌈장'과 '햇살 담은 간장' 브랜드가 가지고 있습니다.

 

'카레 여왕'과 '맛선생'의 놀라운 활약도 빼놓을 순 없겠지요. 최근 식품업계의 놀라운 변화 가운데 하나는 1인 가구의 빠른 확산과 아울러 라면 시장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는 간편식의 빠른 성장세인데, 대상 청정원 브랜드의 선전이 돋보입니다.

 

앞으로 소득수준이 더욱 향상되고 건강에 대한 관심이 늘어날수록 점차 확산될 게 분명한 유기농 식품 사업을 영위하는 초록마을의 전망도 매우 밝습니다. 식자재 유통 사업과 오랜 해외 조림 사업 끝에 이제 막 생산을 개시한 인도네시아 팜오일 사업도 장기적으로 매출 성장과 수익 확대에 크게 기여하리라 믿습니다. 아직도 빠진 것들이 더러 있겠지만 이쯤에서 마무리하지요. 회사의 주요한 사업 내용과 미래 전망에 대한 보다 자세한 힌트들은 이미 '사업보고서'에도 상세히 나와 있으며, 동네 이마트 매장에 가서 여러 제품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볼 수도 있을 테니까요.

 

 

결국 먼 미래에는 모든 게 여러모로 지금과 달라져 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기업이나 주가나 사람이나 무엇 하나 변하지 않는 건 아무 것도 없을 테니까요. 아무쪼록 '좋은 방향으로' 변해 있길 바랄 뿐이지요. 아래의 그림들을 얼마쯤이라도 닮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래 기업들은 '환골탈태'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답니다.

 

3년 3개월 만에 30배가 오르다니요!
3년 10개월 만에 15.9배가 오르다니요!

 

그게 주식이랍니다.

 

 

* 삼립식품의 최근 1,000일 동안의 주가 추이

 

 

* 한샘의 최근 1,000일 동안의 주가 추이 

 

그러고 보면 벤저민 그레이엄이 1949년에 세상에 맨 처음으로 내놓았던『현명한 투자자』의 맨 끝 구절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평소 신중하면서도 기민한 자세로 대처하는 모든 현명한 투자자에게 이와 유사한 화려한 경험을 약속할 수는 없다. 우리는 시작할 때 우스개 소리로 했던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될 수 있다"라는 J.J.Raskob의 슬로건으로 끝맺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증권시장에는 흥미로운 가능성들이 넘쳐나니, 현명하고 적극적인 투자자는 이 떠들썩하고 즐거운 서커스에서 즐거움과 이익을 모두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흥분의 도가니를 보장한다.

 

두서도 없는 기나긴 글을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무쪼록 모든 분들께 크나큰 행운이 따르기를~

 

Good L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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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15-04-05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참만에 뵙습니다 oren님 ^^
안그래도 삼립식품은 요즘 제가 놓친 아쉬움에 땅을 치고 있는 종목이라 관심있게 읽었네요.` 기본적` 분석에 충실해야 된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늘 망각하니 그런가 봅니다.

oren 2015-04-05 12:40   좋아요 0 | URL
정말 오랜만이네요. 야클 님~

저도 삼립식품은 관심만 가져봤을 뿐 침도 못 발라봤어요. ㅎㅎ

어느날 문득 4만원대까지 오르길래 무슨 일인가 싶어 재무제표도 몇 번씩 들여다보고, 동네 편의점에 가서 `삼립식품`에서 나온 제품들 가운데 인기를 끌고 있는 상품들이 어떤 게 있는지도 물어봤구요. 그런데도 좀 더 깊이 연구하지 못해 결국 30만원이 되도록 `강 건너 불구경`만 하고 있답니다.

허니버터칩이 그렇게 인기가 좋다고 해서 크라운제과도 한참 들여다봤는데 결국 손도 대지 못했구요. 어제 자주 가는 동네 도서관 앞 편의점에 가서 ˝허니버터칩 있어요˝ 하고 알바 여학생한테 물어봤더니 ˝이런 데까지 허니버터칩을 깔아주지는 않는다˝는 요상한 대답을 하더라구요. 이른바 감질나게 공급하는 마케팅 전략을 구사한다나요.. 그래서 전 여태까지 허니버터칩은 구경도 못해봤답니다. 참 맛있다던데 말이지요..

요즘은 마침 `실적 발표 시즌`이라 기업들의 변화된 실적을 들여다보느라 눈이 아플 지경이네요. 숫자로 빼곡한 재무제표를 들여다보는 일도 `눈이 벌개서` 할 때가 있긴 있더라구요. 돈이 되니까 말이지요. ㅎㅎ

yamoo 2015-04-06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 저 곡선들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줄창 보낼 때가 있었지요. 떨어지는 칼날은 받는 게 아니라던 말을 새기면서도 멍청한 짓을 한 것도 생각나고...그래도 주식해서 손해 보지는 않았던 거 같습니다. 마지막에 손해를 좀 보긴 했지만 평균적으로 30퍼센트의 이익은 보았던 거 같습니다. 마지막에 너무도 큰 투자를 했기에 손실이 커서 그렇지 전체적으로는 괜찮은 투자를 했다고 평하며, 주식은 빠이빠이 했습니다.

근데, 오렌님 페이퍼에서 주식 그래프를 보고 엔날 생각이 잘 줄이야...^^;;

주식 하면서 참 많은 걸 배웠던 거 같습니다. 제가 마지막(2009년 무렵)에 관심가졌던 종목이 LED였었는데, 최근에 보니 관련 종목들이 많이 뛰었더군요. 어쨌든 오랜님의 전문 분야의 페이퍼를 보니 의외로 반갑네요!ㅎ

oren 2015-04-07 16:28   좋아요 0 | URL
yamoo 님 반갑습니다. yamoo 님께서 이런 뜻밖의 댓글을 달아주실 줄이야...ㅎㅎ

주식은 참 `양날의 검`인 듯해요.. 잘만 투자하면 여간 흥미롭고 스릴 넘치는 게 아니죠.. 돈까지 벌면서 말입니다. 저야 뭐 전공이 경영학이다보니 자연스레 <투자론>도 배우고, 학창 시절부터 `명동 증권가`를 들락거리며 일찌기 실전 투자를 경험했고, 졸업 이후엔 투자신탁회사로 들어가 애널리스트도 해 보고, 펀드매니저도 해 봤으니, 사실상 `전문 투자자`나 마찬가지인 셈이지요만.. `지식과 경험`이 뒤따르지 않으면 참으로 성공 확률이 낮고 위험천만한 곳이 `주식 투자 영역`이 아닌가 싶어요..

지금에 와서 문득 지난 과거를 되돌아 보니 한국증시의 시가총액이 100조원 남짓 할 무렵에도 증권시장에 발 담그고 있었고, 그 땐 저도 1조 6,000억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거금을 굴리며 제법 힘깨나 쓰던 시절도 있었구나 싶어요. 그런데 그게 벌써 20년 전 옛 일이네요.. 그 시절에 비하면 요즘엔 그저 누가 뭐라든 오로지 나의 판단과 분석에만 오롯이 의존하는 `은둔형 투자자`가 된 듯한 느낌도 든답니다.. ㅎㅎ

rudwnd 2015-05-28 1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오렌님.
오렌님께서 쓰신 글 좋아요^^

워렌 버핏이 코카콜라를 사들이는 데 왜 그토록 오랜 세월이 필요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코카콜라는 먹으면 톡 쏘는 느낌이 있잖아요... 그 맛을 잊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먹고나면 트림도 나오니깐... 소화도 잘되는 것 같고요. 또한 강력한 마케팅으로 햄버거나 피자를 먹을 때 콜라하고 안먹으면 안되는것 같은... 소비자에게 알게 모르게 각인시키는 점진적인 마케팅... 대단한 회사가 코카콜라인 것 같습니다.

오늘 알았습니다. 워렌버핏이 코카콜라를 블랙먼데이 때 샀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