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스스로 안정을 원한다면, 많은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철학자는 말한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욱 좋지 않은가. 반드시 해야 할 일과, 본디 사회적인 동물인 이성이 요구하는 일만을 그 요구대로 행하라고. 왜냐하면 그것은 사물을 좋게 하는 데서 오는 안정뿐만 아니라, 많은 일에 관여하지 않은 안정도 가져오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방법을 취하면 우리 언동의 대부분이 불필요하게 되어 더욱 많은 시간 여유와 더욱 적은 불안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인간은 언제나 '이것은 불필요한 일의 하나가 아닌가'하고 스스로 물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인간은 불필요한 행위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생각까지도 버려야 한다. 이렇게 하면 부질없는 행위를 하지 않게 된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中에서

 * * *

고대 로마의 스토아학파 철학자는 스스로 '단순하게' 살기 위하여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성찰한 것 같다.

그는 '공적인 이득을 위해 그대의 사상을 쓰지 않는 한, 그대는 남의 일을 생각하는 데 그대의 여생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저 사람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왜 또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가지면, 다른 일을 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잡념은, 우리를 내부 자제력의 구속에서 벗어나 옆길로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다.'라고도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나는 지금 정확하게 그의 권고와는 정반대의 행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 최근에 있었던 '알라딘 서재 뉴스레터'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들에 대해 '관여하지 말라'는 '내부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런 글을 굳이 쓰는 이유를 찾자면 그건 한마디로 말해서 나는 (고대의 스토아학파 철학자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속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남의 일'에 앞으로 많은 '관여'를 하겠다는 생각을 이 참에 밝히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나는 다만 이번 일에 대해 이미 ('아담 스미스'의 입을 빌어) 많은 얘기를 풀어놓은 죄과가 있고, 이제 이번 일이 어느 정도는 수그러든 시점에 이른 만큼 다시 한번 이번 일을 뒤돌아 보면서, 이와 유사한 일들이 앞으로는 가급적 재발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과 더불어, 이 곳 알라딘이 좀 더 서로 '신뢰'가 넘쳐나고 또한 서로 도와주고 지켜주는 '미덕'이 넘쳐나는 그런 공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쓰게 되었음을 미리 말하고 싶다.


① 공정한 방관자의 시각

아담 스미스는 그의 주저(主著)인 『도덕감정론』의 제1부에서 '행위의 적정성'을 다루면서 '우리는 불쾌한 감정에 대하여 친구들의 동감을 얻지 못했을 때 더욱 큰 충격을 받게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또 '불행한 사람들에 대하여 줄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모욕은 그들의 재난을 경시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라고도 말했다.















유쾌한 감정 vs 불쾌한 감정

우리가 친구들에게 더욱 전달하고 싶어 하는 감정은 우리 자신의 유쾌한 감정보다도 불쾌한 격정이라는 것이며, 우리가 친구들의 동감으로부터 더 큰 만족을 얻는 것은 우리의 유쾌한 감정에 대한 친구들의 동감이 아니라 우리의 불쾌한 감정에 대한 친구들의 동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불쾌한 감정에 대하여 친구들의 동감을 얻지 못했을 때 더욱 큰 충격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가장 잔인한 모욕

불행한 사람들에 대하여 줄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모욕은 그들의 재난을 경시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친구의 기쁨에 무관심한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단지 무레한 행동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친구가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을 이야기할 때 진지한 태도로 경청하지 않는 것은 정말로 엄청나게 비인간적인 행동이다.

 -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中에서


그래서 아담 스미스는 '따라서 우리의 친구들이 우리의 우정을 받아들여 주기를 바라는 우리의 마음은 그들이 우리의 분개에 동감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의 절반 정도도 안 된다. 우리가 그들로부터 받을 수도 있는 호의에 대하여 그들이 무관심한 듯한 태도를 보이더라도 우리는 그들을 너그럽게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에게 가해질지도 모르는 침해 행위에 대하여 그들이 무관심한 듯한 태도를 보인다면, 우리는 결코 참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나를 화나게 만드는 분개를 조금도 함께 나누어 가지지 않는다면

사고(思考)나 추측(推測)의 문제에 관한 판단이나 취향의 문제에 관한 감정에서 당신과 내가 완전히 상반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쉽게 무시할 수 있다. 그리고 비록 내가 어느 정도 불만이 있더라도, 나는 여전히 당신과의 대화에서, 심지어는 나와 당신의 견해가 상반되는 바로 그 주제에 관한 당신과의 대화에서도, 어떤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내가 당한 재난에 대하여 어떠한 동류의식도 가지지 않거나 또는 나를 괴롭히고 있는 슬픔을 조금도 함께 나누어 가지지 않는다면, 또는 당신이 내가 당한 침해에 대해 전혀 의분을 느끼지 않는다면, 나를 화나게 만드는 분개를 조금도 함께 나누어 가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것들을 주제로 더 이상 대화를 계속할 수 없다. 우리는 피차 서로를 용납할 수 없게 된다. 나는 더 이상 당신의 친구가 될 수 없고, 당신 역시 더 이상 나의 친구가 될 수 없다. 당신은 나의 분노와 격정에 당황하게 될 것이고, 나는 당신의 얼음처럼 차가운 무감각과 감정의 결핍에 분노하게 될 것이다.

 -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中에서


또한 아담 스미스는 '모든 소소한 사건들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결코 나쁘게만 보지 않았다.


모든 소소한 사건들에 대하여

인간은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이유에서 생기는 비교적 작은 기쁜 일들에는 더욱 쉽게 동감한다. 크게 번영하고 있는 중에도 겸손할 수 있다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일상생활의 모든 소소한 일들에 대해, 지난밤을 함께 보낸 친구들에 대해, 우리가 함께 즐겼던 여흥(餘興)에 대해, 우리가 보고 들은 것에 대해, 현재 대화의 대상이 되고 있는 모든 소소한 사건들에 대해, 인간의 삶의 빈틈을 채워주는 소소한 모든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아무리 큰 만족을 표현하더라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성격적으로 쾌활한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이러한 성격은 일상적인 소소한 사건들이 제공하는 모든 작은 즐거움으로부터 특별한 흥미를 느낄 줄 아는 것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이러한 성격에 쉽게 동감하며, 그리고 이러한 성격은 우리로 하여금 동일한 기쁨을 느끼게 하며,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행복한 성격을 타고난 사람들이 보는 것과 동일한 모든 사소한 일들의 유쾌한 측면을 보게 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청춘(靑春), 즉 모든 것에 즐거움을 느끼던 시절이 그처럼 쉽게 우리의 마음에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사소한 것을 보고도 즐거워하는 이러한 성향은 심지어 꽃까지 피어나게 하고, 젊고 아름다운 눈들을 반짝거리도록 만든다. 이러한 성향은 같은 동성(同性)의 사람들 사이에서도, 나이든 사람까지, 평상시 이상으로 기쁨을 느끼도록 만든다. 그들은 잠시 동안 자신의 노쇠함을 잊어버리고 그들에겐 오래 전에 이미 낯 설어버린 유쾌한 생각과 정서에 자신들을 내맡긴다. 이처럼 많은 행복감을 느낌으로써 유쾌한 생각과 정서가 그들의 마음속에 다시 떠오르게 되면, 그들은 마치 오랫동안 서로 그리워하면서도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다시 만나서는 그 동안의 오랜 이별 때문에 더욱 진심으로 껴안을 수 있는 친구처럼, 이러한 생각과 정서는 그들의 가슴속에 자리를 잡게 된다. 

 -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中에서


그런데, 최근 '알라딘 서재 뉴스레터'에 대한 어느 알라디너의 '반응'에 대해 두 가지 확연하게 엇길린 반응을 보인 건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보게 되면서, 나는 그것이 결국 '공정한 방관자'의 문제에 귀결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 그리고 또 그것은 어쩌면  '지위에 대한 경쟁'과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아담 스미스는 '이 세상 사람들이 온갖 고생을 다하면서 야단법석을 떠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의 지위의 개선'이라는 목적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 '경쟁'에 관해서는 이 글의 뒷부분에 가서 '이타적 호혜주의'를 언급할 때 조금 더 짚어볼 생각이다.


경쟁심의 기원

이 세상 사람들이 온갖 고생을 다하면서 야단법석을 떠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인가? 탐욕과 야심, 부와 권력 및 최고를 추구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

인류 사회의 각계각층의 사람들 모두에게서 나타나는 경쟁심은 어디에서 생기는 것인가? 그리고 소위 자신의 지위의 개선이라고 하는 인생의 거대한 목적을 추구하는 것은 어떤 이익이 있어서인가? 남들로부터 관찰되고 주의와 주목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그들로부터 동감과 호의와 시인(是認)을 받는다는 것이 바로 그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이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안락이나 즐거움이 아니라 허영이다. 그러나 허영이란 항상 자신이 주위로부터 주목을 받고 시인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신념에 기초한다. 부유한 사람이 그의 부유함을 자랑하는 것은 그 부유함이 자연히 세간의 이목을 끈다는 것, 그리고 부유함이 그에게 제공한 모든 유쾌한 감정에 인간들이 쉽게 공감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면 그는 가슴이 벅차오르고 자랑스러움을 느낀다. 그리고 그는 부유함이 가져다주는 다른 어떤 이익보다도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인간생활의 노동의 반이 추구하는 목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보편적인 동감과 주목을 가장 잘 받을 수 있는 지위에 있는 것이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라고 상상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자리 또는 지위(地位: place)는, 고관 부인들의 사이를 갈라놓는 위대한 목표로서, 인간생활의 노동의 반은 이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서이며, 그리고 이것은 탐욕과 야심이 이 세상에 끌어들인 모든 소란과 소동, 모든 강탈과 부정의 원인이 되고 있다.

 -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中에서
















지위

지위는 당신이 마음만 먹으면 남들을 도울 수 있는 자산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이다. 그런 자산에는 아름다움, 독보적인 재능이나 전문성, 유력자들의 신뢰, 그리고 무엇보다 부가 포함된다. 지위를 뒷받침하는 자산들은 대용이 가능하다. 부는 인맥을 만들고, 인맥은 부를 만든다. 아름다움은 (선물과 결혼을 통해) 부로 전환되거나, 중요한 사람들의 주목을 끌거나,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구혼자를 끌어들인다. 그러므로 자산 소유자는 단지 자산 소유자로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후광이나 카리스마를 발산하고 그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의 총애를 받고 싶어한다.사람들이 당신의 총애를 원하게 만들면 항상 편리하므로, 지위는 그 자체만으로도 간절히 원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하루의 시간은 정해져 있고 아첨꾼들은 누구에게 빌붙을지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에 지위는 어디까지나 한정된 자원이다. A의 지위가 높으면 B의 지위는 낮을 수밖에 없으므로 사람들은 경쟁을 해야 한다.
 - 스티븐 핑커,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中에서


알라디너들이 보여준 '상반된 관점'에 대해서는 우선 이 정도로만 언급하고, 뒤이어 '알라딘과 알라디너의 상반된 이해관계'에 대해 조금 생각해 보면 '공정한 방관자'로서 결코 공감할 수 없는 점이 있다. [우리 자신의 행복에 방해된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의 행복을 해치는 행위나, 어떤 것이 우리에게 마찬가지로 유용하거나 또는 그 이상으로 유용하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실제로 유용한 것을 빼앗는 행위나, 또는 이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타인을 희생시켜 가면서 다른 사람의 행복보다 자신의 행복을 중시하는 천성적인 선호(選好)에 몰두하는 행위는 공정한 방관자로서는 결코 공감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행복 vs 전 세계의 행복

속담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그 자신에게는 전 세계일지 몰라도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전 세계의 지극히 하찮은 부분에 불과하다고 한다. 비록 그 자신의 행복은 그를 제외한 전 세계의 행복보다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그의 행복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 이외의 다른 어떤 사람의 행복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비록 모든 개인이 각자의 마음속에서는 자기 자신을 모든 인류보다 더 선호하는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가 다른 사람들을 정면으로 똑바로 쳐다보면서 자신은 이 원칙에 따라서 행동할 것이라고 솔직하게 말해서는 안 된다. 

 -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中에서


이번에 알라딘에서 알라디너들이 만들어낸 컨텐츠에 대해  '거의 무제한적인 사용권'을 당당하게 주장한 것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고객과의 신뢰'를 깨트리는 행위에 가깝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불의의 만연

사회는 항상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침해를 입히려고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존립할 수 없다. 서로에 대한 가해 행위가 시작되는 순간, 서로에 대한 분개와 증오가 나타나는 순간, 사회의 모든 유대관계는 산산 조각나고, 그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그들 간의 불화 감정이 야기한 폭력과 대립에 의해, 사방으로 흩어지고 국외로 달아나게 된다.

만약 강도와 살인자들 사이에서도 어떤 사회가 존재하려면, 주지하는 바와 같이, 적어도 그들 간에 서로 강탈하거나 살해하는 것을 자제해야만 한다. 따라서 자혜(慈惠)는 사회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정의(正義: justice)보다 덜 중요하다. 비록 최선의 상태는 아닐지라도, 사회는 자혜 없이도 존속할 수 있다. 그러나 불의의 만연은 사회를 철저히 파괴시켜 버린다.
······
불의는 필연적으로 사회를 파괴한다. 따라서 불의가 나타날 때마다 인간은 놀라고, 그대로 놓아두면 그에게 소중한 모든 것을 급속하게 파괴시켜 버릴 불의한 사건의 진행을, 중지시키려 달려든다. 

 -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中에서


그래서 나는 이번 '알라딘 서재 뉴스레터'에 관한 일은 '알라딘의 조심성 없는 행동'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조심성 없는 행동

우리는, 한 사람의 조심성 없는 행동에 의해 다른 사람이 고통을 당해서는 안 되며, 비난받을 만한 부주의로 인해 발생한 손해는 부주의한 행위를 한 사람에 의해 배상되어야 한다는 것보다 더 공정한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中에서 



어쨌든 사람들은 모두 '시인을 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 언제나 최고로 중요한 목적임에 틀림없다.'


시인을 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가 되는 것

인간들 중에서 가장 약하고 가장 천박한 자들만이 자신들이 전혀 칭찬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칭찬에 의해 크게 기뻐할 수 있다. 약한 사람은 때때로 그러한 칭찬을 기뻐할지도 모르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경우에 그것을 거부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가 칭찬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으나 칭찬을 받는 경우 그러한 칭찬으로부터 전혀 기쁨을 느끼지 못하지만, 그러나 그가 칭찬받을 만한 일을 자신이 행했을 때에는, 비록 그것에 대하여 결코 칭찬이 부여되지 않을 것임을 스스로 잘 알고 있을지라도, 그는 흔히 최고의 기쁨을 느낀다, 시인을 받을 만하지 못한 경우 인류의 시인을 얻는 것은 그에게 결코 중요한 목적이 될 수 없다. 정말로 시인을 받을 만한 경우 사람들의 시인을 얻는 것은 때로는 그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은 하나의 목적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시인을 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은 언제나 최고로 중요한 목적임에 틀림없다.

 -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中에서


그리고 '언제든지 일반 세상 사람들의 악의적인 판단에 의해 매우 심하게 실망하기 쉽다.'

그러므로 그의 친구들 및 세상 사람들의 호의적인 판단만큼 그를 기쁘게 하는 것은 없고, 그 반대의 것만큼 그를 심하게 낙담시키는 것도 없다. 전자는 그가 자신의 업적에 대하여 받고자 열망하는 호평(好評)을 확인해 주고, 후자는 그것을 흔들어 놓는다. 경험과 성공의 축적이 결국 자신의 판단에 대한 좀 더 많은 확신을 그에게 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언제든지 일반 세상 사람들의 악의적인 판단에 의해 매우 심하게 실망하기 쉽다.

라신(Racine)은 그의 첫 번째 작품인 비극 『패드라(Phaedra)』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너무 실망한 나머지 더 이상 작품을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그의 이 작품은 그의 생명의 활기가 충만할 때, 그의 능력이 절정기에 있을 때 쓴 것으로 아마 현존하는 비극들 중에서는, 어떤 언어로 된 것이건 간에, 가장 뛰어난 비극일 것이다. 이 위대한 시인은 종종 그의 자식에게, 가장 무가치하고 부당한 비판이 언제나 가장 훌륭하고 정당한 찬사가 그에게 주는 쾌락의 정도보다 훨씬 더 큰 정도의 고통을 주었다고 말했다. 볼테르(Voltaire)가 같은 종류의 가장 경미한 비난에 대해 극도로 민감했던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中에서


아담 스미스가 결국 그의 책 『도덕감정론』에서 주장하고 싶은 핵심은, 내가 판단하기로는, '공평무사한 중립적 방관자'인 것 같다.


양심, 가슴 속의 동거인(同居人), 내부 인간, 우리 행위의 재판관 및 조정자(調整者)

그것은 이성(理性), 천성(天性), 양심, 가슴 속의 동거인(同居人), 내부 인간, 우리 행위의 재판관 및 조정자(調整者)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할 때마다 우리 내심의 가장 몰염치한 격정을 향하여 깜짝 놀랄 정도의 큰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소리치는 것은 바로 이 사람이다. 즉, 우리는 대중 속의 한 사람에 불과하고, 어떠한 점에 있어서도 그 속의 다른 어떠한 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으며, 우리가 그처럼 수치(羞恥)를 모르고 맹목적으로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우선시킨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분개와 혐오와 저주의 정당한 대상이 될 것이라고, 우리가 우리 자신들에 관련된 모든 것이 실제로는 사소한 것이라는 사실을 배우는 것은 오직 이 중립적 방관자로부터이고, 이 중립적 방관자의 눈에 의해서만 자애(自愛)가 빠지기 쉬운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을 수 있다. 관용의 적정성과 부정(不正)의 추악성, 우리 자신의 큰 이익보다 다른 사람들의 더 큰 이익을 위하여 우리 자신의 그것을 양보하는 것의 적정성과, 우리 자신의 최대의 이익을 얻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가장 사소한 이익까지 침해하는 행위의 추악성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바로 이 공평무사한 중립적 방관자이다.

 -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中에서



②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고 싶은 마음

사람들의 '마음'이 저지르는 실수들은 그동안 수많은 '심리학적 실험'들을 통해 상당한 수준에 이를만큼 자세히 밝혀 왔다. 특히나 최근에 급속한 발전을 이뤄내고 있는 '진화심리학' 분야의 성과들은 그동안 우리의 마음이 '저절로' 어떤 식으로 작동하게 되는 '이해하기 힘든 문제들'에 대해서조차 많은 해답들을 제시하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이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서 '제 나름대로' 엄청나게 다양한 시각들을 보여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각자의 '성격'이나 '경험' 등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각자가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마다 각자 어떤 대상이나 현상에 대해 '판단'을 내릴 때 나름대로 독특하게 '편향된 시각'을 보이는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인지 부조화'라는 심리적 오류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인지 부조화를 해소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자신의 결정을 극단적으로 합리화하는 형태로 나아가며, 자신이 알고 싶지 않은 정보를 스스로 차단하고 알고 싶은 것만 받아들이게 된다' 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이번에 '알라딘 서재 뉴스레터'의 문제에 있어서도 여러 사람들이 결국 자기 자신이 보고 싶은 문제점만 부각시켜 보게 된 때문에, 정말로 놀랍도록 다양한 반응들이 쏟아져 나왔던게 아닌가 싶다. 알라딘의 횡포에 가까운 '무책임한 사용권 남용'에 분개한 사람들도 있었고, '공개된 글'에 대해서는 '무한에 가까운 책임'을 스스로 지녀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었고, '댓글의 성격'에 따라 달리 반응하는 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사람들의 성격

사람들의 성격도, 기예(技藝)의 창작물이나 정부기구와 마찬가지로, 개인과 사회의 행복을 촉진하는 데 적합할 수도 있고 방해하는 데 적합할 수도 있다. 신중, 공정(公正), 적극적, 과단(果斷), 진지한 성격은 그 사람 자신과 그와 관련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번영과 만족을 약속한다. 반대로 경솔, 오만, 나태, 유약(柔弱), 방탕한 성격은 그 개인에게는 파멸을, 그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재난(災難)을 예고한다. 첫 번째의 심리상태는 적어도 가장 유쾌한 목적을 촉진하기 위해 발명되었던 가장 완전한 기계가 가질 수 있는 모든 미(美)를 가지고 있다. 두 번째의 심리상태는 가장 어색하고 졸렬한 발명품이 갖고 있는 모든 결함들을 다 가지고 있다.

 -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中에서


자기 감정 나름

자, 그렇게 이상한 자극들 앞에서 왜 동물들은 우리에게 그토록 이상하게 보이는 행동들을 할까? 예를 들어 왜 암탉은 결과를 어렴풋이 예측이나 하듯이, 지독하게 흥미 없는 둥우리 속의 알들을 밤새 온몸으로 품을까? 유일한 대답은 자기 감정 나름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짐승들의 본능을 단지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 자신의 본능을 기준으로 해석한다. 왜 사람들은 가능하다면 딱딱한 바닥이 아니라 푹신푹신한 침대에 누울까? 왜 사람들은 추운 날 난로 곁에 앉을까? 왜 방 안에서는 벽을 마주 보는 대신 얼굴을 중앙 쪽으로 향할까? 왜 딱딱한 비스킷과 개울물보다 양 등심과 샴페인을 좋아할까? 왜 젊은이는 아가씨에게 사로잡히고, 그래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이 세상의 어느 것보다 더 중요하고 의미심장하게 보일까? 그것이 인간의 방식이라는 것, 그리고 동물들은 저마다 각자의 방식을 좋아하고 그 방식을 따라 행동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 외에는 달리 말할 것이 없다. 과학이 그 방식들을 신중히 고찰한다면 그것들 대부분이 유용하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각자가 자신의 방식을 따르는 것은 유용함 때문이 아니라 그 방식을 따르는 순간 그것이 유일하게 적절하고 자연스러운 행동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수십억의 사람 중에서 단 한 명도 저녁을 먹으면서 유용성을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음식이 맛이 있고 그래서 더 먹고 싶기 때문에 먹는다. 만일 누군가가 왜 그런 맛의 음식을 더 먹고 싶어하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존경스런 철학자가 아니라 바보 같은 사람으로 여기고 비웃음을 던질 것이다.

이와 같이 동물들은 특정한 물건이 있으면 특정한 행동을 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알을 보면 품고 싶어하는 암탉은, 둥우리 속의 알이 너무나 매력적이고 소중해서 밤새 품고 있을 물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생물이 지구상에 존재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 스티븐 핑커,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中에서


③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

마침 일주일 전에는 그 어떤 영화의 인상적인 장면보다 훨씬 더 극적이었던, '인류 역사를 바꾼 운명의 순간들'이라는 부제가 붙은 책『광기와 우연의 역사』를 쓴 슈테판 츠바이크의 표현을 빌리면 '역사의 피뢰침이 작동하는 순간'과도 같았던 9.11테러가 발생한지 1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 사건을 실제 상황으로 TV화면으로 지켜봤던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새뮤얼 헌팅턴의 책 제목 그대로『문명의 충돌』을 실제로 바라보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리처드 도킨스가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에서 '우리'와 '그들'의 신이 다르다는 단 하나의 차이 때문에 '종교'가 초래한 엄청난 비극들 가운데 첫 손에 꼽았던 사례 또한 9.11 테러였던 것 같다.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이라는 책을 통해 저자인 데이비드 베레비는 '우리와 그들'로 무리를 나눠 인식하려는 '인간 부류 감각'이 얼마나 뿌리깊은 것인지, 그리고 '마음'이 어떻게 세상을 만드는지에 대해 날카로운 설명을 보여줬다. 그리고 '인간은 서로 비슷한 사람들이 한패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한패가 되고 나서 서로 비슷해진다'고 지적했다.















인간은 단지 '부적절한' 부족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서로를 죽인다. 자신이 속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공손하며, 부모를 공경하고 자식을 아끼던 젊은이들이 일말의 가책도 없이 타인의 부모와 자식을 죽이는 일에 나선 사례는 지난 몇 년간만 해도 여러 차례 있었다. 2001년 9월 11일 뉴욕, 2004년 9월 1일 러시아의 베슬란, 1930∼1940년대 나치 지배하의 유럽에서 벌어진 일들이 모두 그런 사례다. 역사 속의 살인자들이 열성적으로 살인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은 희생자들이, 자신들이 아끼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과 같은 종류의 인간이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

예컨대 1997년 8월 어느 날 밤 뉴욕에서는 그러한 결정적 상징이 작은 쇠붙이 조각이었다. 한 백인 경찰관이 체포한 흑인을 구타한 뒤, 두 사람이 함께 경철서 화장실에 들어가 있을 때였다. 거기서 경찰관은 흑인의 목에 걸린 작은 십자가를 발견했다. 그 경찰관이 경찰 대 용의자, 백인 대 흑인이라는 인간 뷰류의 지도 대신 두 명의 기독교인이라는 지도를 선택하게 만드는 데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경찰은 자기도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며 그에게 사과했다.

1994년 5월 6일 르완다의 소부(Sovu)에서는 그러한 상징이 한 조각의 천이었다. 이날 투치족 난민들이 후투족을 피해 소부의 수녀원으로 도망쳐오자, 수녀원장이던 게르트루드 수녀는 후투족 민병대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수백 명의 투치족이 총칼에 난도질당하고 불에 태워졌지만, 게르트루드 수녀는 투치족 수녀들만은 넘겨주지 않았다. 베일이 그들을 살린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한 수녀의 사생아였단 알린이라는 19세 여성이 있었다. 그녀가 베일을 달라고 간청했지만 게르트두르 수녀는 이를 거절했다. 그로부터 7년 뒤, 게르트루드 수녀는 벨기에에서 전범으로 기소되었다. 증인들 중에는 살해된 알린의 어머니도 있었다. 그녀는 "내 딸은 작은 천 조각 하나 때문에 죽었다"고 말했다. ······ 광포한 학살자 무리로부터 살아남느냐, 희생자가 되고 마느냐를 결정하는 상징적인 천 조각이야말로 호모사피엔스만이 창조해낼 수 있는 것이다.

 - 데이비드 베레비,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 中에서















먹는 것과 못 먹는 것

······ 사람들의 도덕적 범위에는 모든 인간이 아니라 자신의 친족, 마을, 부족의 구성원들만 포함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이 모순을 이해할 수 있다. 그 범위 안에 포함된 사람들은 공감의 대상이고, 범위 밖에 있는 사람들은 돌이나 강이나 음식물처럼 취급된다. 이전의 한 책에서 나는 아마존에 사는 와리 부족의 언어에는 먹는 것과 못 먹는 것을 구별하는 일련의 명사 분류사가 있는데, 그 부족의 구성원이 아닌 사람은 누구나 먹는 것으로 분류된다는 사실을 언급한 적이 있다.

식인 풍습과 동물 해방

우리에게 식인 풍습은 아주 불쾌한 것이어서 오랫동안 인류학자들 조차도 그것이 선사 시대에 일반적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우리는 쉽게, 어떻게 사람들이 그렇게 끔찍한 행동을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동물의 권리를 옹호하는 운동가들도 육식을 하는 사람들을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 육식을 하는 사람들은 무수한 생명을 죽음으로 몰 뿐 아니라 그렇게 하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소를 마취도 시키지 않은 채 거세시키거나 낙인을 찍고, 낚싯바늘로 물고기의 입을 꿰뚫어 잡아 올린 다음 보트 바닥에 내동댕이쳐 헐떡거리게 하고, 바다 가재를 산 채로 삶는다. 내 요점은 채식주의를 도덕적으로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폭력과 잔인성에 대한 사고 방식을 조명해 보자는 것이다. 역사학과 민족지학에서는 마치 우리가 바다 가재를 취급하듯이 사람들이 타인을 취급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행동에 대한 우리의 몰이해는 우리의 행동에 대한 동물 권리 운동가들의 몰이해와 비교될 수 있다. 『확대되는 원』의 저자 피터 싱어가 『동물 해방』의 저자인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 스티븐 핑커, 『빈 서판』 中에서


우리는 어쨌든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으로부터 벗어나 '평화로운 공존'을 생각해야 한다. 그 해결책으로 로버트 트리버스가 찾아낸 것이 바로 '호혜적 이타주의'라는 것이다.


호혜적 이타주의

실험을 통해 확인한 바에 따르면, 사람들이 이방인을 가장 돕고 싶어하는 경우는, 낮은 비용으로 그를 도울 수 있을 때, 그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 그리고 그가 보답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을 때라고 한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 베풀 수 있는 호의를 베풀지 않았을 때 죄 의식을 느끼는 사람, 자기에게 호의를 베풀지 않은 사람을 응징해 주는 사람을 좋아한다.


폭력적 본능

홉스는 흔히 자연 상태의 인간은 서로를 증오하고 파괴하는 비합리적 충동에 사로잡힌 존재라고 주장하는 철학자로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분석은 보다 섬세하고 어쩌면 훨씬 더 비극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행위자들의 상호 작용으로부터 어떻게 폭력이 발생하는가를 설명했기 때문이다. 홉스의 분석은 진화 생물학, 게임 이론, 사회 심리학 분야에서 재발견되고 있으며, 나 역시 그의 분석을 토대로 해서 폭력의 논리를 논한 다음 인간이 어떻게 폭력적 본능을 중화하기 위해 평화적 본능을 구사하는가의 문제로 넘어가고자 한다.

다음은 그 유명한 "인간의 삶"에 관한 구절 앞에 제시된 분석이다.

인간의 본성에서 우리는 싸움의 세 가지 주된 요인을 발견한다. 첫째는 경쟁이고, 둘째는 자신감 결여이고, 셋째는 영광이다. 첫 번째는 인간이 이익을 위해 서로를 공격하게 만들고, 두 번째는 안전을 위해 서로를 공격하게 만들고, 세 번째는 가령 말 한마디, 미소, 견해 차이를 비롯하여, 본인이 직접 겪는 것이든 혈연, 친구, 국가, 직업, 이름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겪는 것이든 자신을 무시하는 갖가지 사소한 이유들 때문에 서로를 공격하게 만든다.

첫째는 경쟁이다. 자연 선택의 힘은 경쟁에 있는데, 그것은 자연 선택의 산물들-리처드 도킨스의 비유에 따르면 생존 기계들-이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는 일이면 어떤 것이든 미리 정해진 디폴트 값에 따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략)

둘째, "불신"의 원래 의미는 자신감 결여(diffidence)이다.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번역한 홉스는 "전쟁이 불가피해진 것은 성장하는 아테네의 힘과 그에 대해 스파르타가 느낀 두려움 때문이었다."라는 설명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만약 이웃이 내가 가진 것을 몹시 탐낸다면 나는 그들의 욕구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다. 따라서 나는 자신을 방어할 준지를 해야 한다. 방어란 성벽, 마지노선, 대탄도 미사일 등의 첨단 기술을 망라해도 불확실한 방법이고, 그런 것이 없으면 더욱 미심쩍고 불확실하다. 자기 보호를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잠재적으로 적대적인 이웃에게 선제 공격을 퍼부어 쓸어 버리는 것일 수 있다. 요기 베라의 충고대로 "최상의 수비는 최상의 공격이고, 또 최상의 공격은 최상의 수비이다."

셋째는 영광인데 보다 정확한 단어는 "명예"일 것이다. 인간은 "말 한마디, 미소, 견해 차이를 비롯해 자신을 무시하는 갖가지 사소한 이유들 때문에" 싸운다는 홉스의 말은 17세기에나 지금에나 사실이다. 

- 스티븐 핑커,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中에서


④ 컨텐츠의 중요성과 합리적 사용에 대한 이해상충의 문제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한때(7∼8년쯤 전에) 직업적인 이유 때문에 '컨텐츠의 중요성'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기울인 적이 있었다. 그리고 '문화 컨텐츠'를 핵심사업으로 하는 어떤 기업에 상당한 규모로 투자한 적이 있었다. 그 회사는 수년 동안 성과가 지지부진하였고, 주가 역시 지지부진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으나 어느 한 순간 '증권시장의 피뢰침이 작동했는지' 미친듯이 주가가 치솟는 바람에 '흥분의 도가니'를 맛볼 정도로 '결과'는 좋았다.

최근 주식시장의 흐름이 '우리'에겐 '그들'에 불과한 '미국과 유럽'의 문제로 인해 급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지만, 유독 이런 혼돈스러운 장세 속에서도 홀연히 빛나는 종목들이 있다. 소위 말하는 '컨텐츠' 주식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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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내가 이 글에서 이들 종목을 추천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알라딘'에서도 소위 말하는 '유저'(알라디너)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디지털 컨텐츠'에 대한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스토리'와 그 스토리를 '전달하는 기술'인 것 같다.















"호머(Homer), 초서(Chaucer), 그리고 세익스피어(Shakespeare) 시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전달 매체가 무엇이건 간에 중요한 것은 스토리와 그 스토리를 전달하는 기술이었다." (마이크 아이스너, 월트 디즈니 前 CEO)

 - 마키노 요,『나는 사람에게 투자한다』 中에서


그런데, 알라딘은 아직 '스토리를 전달하는 기술'을 사용하는데 익숙치 못한 것 같다(그 점은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글만 하더라도 그렇다. 이야기의 주제도 뚜렷하지 못하며,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기술'이 산만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알라딘이 최근에 유저(사용자)인 알라디너 스스로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다양한 컨텐츠를 좀 더 잘 '활용'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뭔가를 시도하고 있는 점은 어느 측면에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라고 본다(알라딘이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하면 결국 유저들인 알라디너들도 더이상 여기에 붙어 있을 수 없으므로). 아직 판단하기에는 너무 이른 감이 있지만 최근 종로에 열었다는 '알라딘 중고서점' 역시 '시도'는 훌륭하다고 본다.


⑤ 합리적 해결방식, 고객을 소중히

알라딘을 사용하면서 많은 분들이 '알라딘식(?) 문제 해결 방식'에 나름대로 상당한 불만을 가졌던 적이 있었고, 그 점은 아직까지도 '현재진행형'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의사소통능력의 부족이 빚어내는 '불통'이 상당한 문제점으로 보이는데 그것보다 더 중요해 보이는 건 '고객'을 대하는 태도와 '고객과의 신뢰'를 중시하는 '바탕'이 아닐까 싶다.

예전 글에서도 인용했듯이, [플라톤의 신성한 잠언(箴言)이라고 키케로(Cicero)가 정확하게 부른 것, 즉 자기 부모에 대해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자기 조국에 대해서도 폭력을 사용해서는 결코 안된다는 말]처럼, 어떤 영리조직이든 자기 자신의 고객에 대해서는 결코 폭력(혹은 폭력이라고 느낄 만한 '힘')을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기본에 충실'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초우량 기업에 있어 경영의 핵심은 다른 경쟁 기업과 비교해서 그저 어딘가 모르게 다르다는 정도가 아닌 것이다. 그들의 차별성은 경영학에서 상식으로 통하지만 모든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는 기본에 충실하라는 말을, 실제 현장에서 충실히 지키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 톰 피터스,『초우량기업의 조건』 中에서


찰스 다윈은 '관찰 전에 추리하는 것은 필요하고 관찰 후에 추리하는 것은 유용하지만, 관찰 중에 추리하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이다'라고 말했다. 그런 측면에서 내가 이번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관찰 후에' 정리해본 내용은 결국 다음과 같다.

아무리 알라딘이라는 인터넷 공간에 '공개적으로' 쓴 글이라고 하더라도, '공개된 글의 작위적인 편집 가능성 혹은 거의 제한없는 사용권'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상식'이 강력하게 항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문제라면 그 문제에 대해 알라디너가 반응한 '태도' 혹은 '대처방식'에 있는 것이지(어떤 문제에 대한 과도하게 지나친 반응에 대해서는 통상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공감을 쉽게 얻지 못하거나 심지어 경멸하려는 태도까지 불러 일으킬 수 있다고 본다), 알라디너가 문제를 제기할 수 밖에 없었던 '근본 원인' 즉 '화제의 서재글'이 '그런 식으로까지' 광범위하게 알라딘 서재 뉴스레터 독자들에게 일일이 이메일로 배달될지 몰랐다는 점에 대해서는, 알라딘에서도 분명히 '문제가 있었다는 점'을 뒤늦게 깨닫고(어쩌면 처음부터 '혹시나' 문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염려를 했을 수도 있겠다 싶다) '어떤 식으로든' 개선조치를 취한 게 아닐까 싶다(내 생각으로는,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뒷수습이라기 보다는 대충 무마하고 넘어가는 어정쩡한 땜질식 처방에 가까웠다고 본다).

그리고, '공개된 글이므로 거의 무제한적인 사용의 수용과 비판을 감수해야 한다는 입장'이 다수의 견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면, 그리고 정당한 문제 제기를 한 것으로 보여지는 알라디너가 결과적으로 겪게 된 고통에 대해서 공감하기에 앞서 그 문제제기 방식의 서투름부터 나무란다면, 이 곳 알라딘의 앞날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은 아닐까 걱정스럽고, 결국 알라딘이나 알라딘 서재를 이용하는 알라디너에게나 '합리적인 문제 해결'의 길을 버리고 마녀사냥식의 해결방식을 선호하는 '어두운 세계'에 발을 들여 놓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시 '도덕감정'이라는 주제로 되돌아와서 얘기해 보자면, '그것은 서로 도와주고 지켜주는 모든 동물에게 고도로 중요한 것의 하나이기 때문에 자연선택에 의해 증가'되었을 감정이라는 것이다.
















다윈은 '사회적 미덕의 발달을 위한 또 하나의 다른, 그리고 더 강력한 자극은 우리 동료로부터의 칭찬과 비난에 의해 주어진다'고 말한다. 동료의 시인을 얻는 행동이 항상 이루어지도록 자극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점차 도덕적 행위가 쌓여 서서히 몸에 매어서 '용기있고 동정심이 많으며 충실한 구성원을 많이 가지고, 언제나 서로 위험은 바로 경고하고, 서로 돕고 지키는' 부족은, 그렇지 않은 부족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사회적 자질, 도덕적 자질이 높은 인간이 늘고 퍼져 간다고 생각한다. 집단 생존투쟁의 승리이다.

'제아무리 복잡한 방식으로 이 감정이 생겼다 하더라도 그것은 서로 도와주고 지켜주는 모든 동물에게 고도로 중요한 것의 하나이기 때문에 자연선택에 의해 증가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가장 동정적인 성원을 최대한 가지는 공동체가 가장 번영하고 최대수의 자손을 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도덕감각에 대해 다윈은 J.S.밀이 말한 '도덕감정이 천성적인 것이 아니라 얻어진 것이라 하여도 그 때문에 본디의 것이 아니라고 하는 말은 아니다'를 주로 인용하면서 동물의 사회적 본능과 결부된 천성의 감각임을 설명하고 있다.

'다음 명제는 고도로 개연적이라고 생각된다. 즉 부모와 자식의 애정을 포함해 현저한 사회적 본능이 풍부한 동물이라면, 어떤 동물도 그 지적인 능력이 인간과 같거나 혹은 그에 가까운 정도까지 발달하면 당장 도덕 감각, 혹은 양심을 획득할 것이다.'

 - 다윈, 『종의 기원』中에서(책의 말미에 실린 '다윈의 생애와 사상' 中에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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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20 08: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20 1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신지 2011-09-20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방명록에 쓴 글에 댓글을 확인하러 왔다가, 이 글 지금에야 보게 됐습니다.
(방명록에 마고님과 마립간님 글에는 답글이 있지만, 제 글에만 답글이 없더군요.)
보면은 오렌님과 저는 여러모로 관심사가 비슷한 듯 싶습니다. (한사람님의 서재에서도 그런 것을 좀 느꼈구요)
인용하시는 글들도 대부분 제 '관심사'와도 비슷해서 항상 공감이 잘 되더군요.

다만, 며칠 전 오렌님이 저의'초월적 입장'이라는 글에 주신 인용문은 (도대체 제 글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 )
정말 이해가 안 되더군요.

그런데 이 글에서 <'공평무사한 중립적 방관자'> 라는 것을 언급하시는 것을 보면,
저('초월적 입장'이라는 글)에게 이의를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면, 제 글('초월적 입장'이라는 글)에 오렌님이 남겨주신 댓글은
오렌님이 저에게 뭔가 '깨닫게' 해 주시려고 그처럼 '선문답'같은 인용글을 주신 것인지 궁금합니다.

추석 전에 저에게 뜬금없이 남겨 주신 댓글도 혹시 (사실은) 불만 때문이셨는지요?

그런 것은 다 괜찮습니다.

다만 그렇다면, 자신의 태도를 감추는 모호한 댓글, 인용글을 남기신 것은 (지금 이 글을 보고 나니)
저로서는 좀 불쾌하군요.

(제가 알듯모를듯한 댓글을 싫어한다는 것은 얼마전 마립간님에게도 말했지만,
예전에도 알라딘에서 여러번 말한 적이 있습니다..)

http://blog.aladin.co.kr/cjsak/4266256

이 글과 인용문들은 제가 보기에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이고, 오해할 수 있게,
무척 두루뭉술하게 쓰여져 있습니다.
<이 인용문과 오렌님의 말씀이 어떤 연관이 있을까> 라는 부분에서 말입니다.
즉 오렌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모호합니다.

누가 읽으면 내게 말하는 건가 싶고, 비판하는 것인지, 생각이 다르다는 것인지, 자신은 아담 스미스와 같은 입장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인지....... 말입니다.

불필요한 오해를 줄이기 위해,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오렌님이 저에게 이견이 없는 부분은 어떤 것이고,
이견이 있는 부분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oren 2011-09-20 15:52   좋아요 0 | URL
신지님 반갑습니다.

신지님의 긴 댓글을 보니 솔직히 '겁'부터 덜컥 나는군요. ㅎㅎ

신지님께서 워낙 '칼날처럼' 예리한 비판을 하시는 분이어서 저로선 사실 '여러모로' 신지님의 날선 비판을 감당하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도 솔직히 들거든요.

우선, 신지님께서 제 방명록에 고마운 댓글을 남겨주셨는데 '여태껏' 꾸물거리다가 댓글조차 남겨 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신지님께서 남겨주신 글은 진작에 봤는데, 어쨌든 제 불찰로 아직까지도 답글을 남겨드리지 못했습니다. 신지님께 '정말 고맙습니다'라는 한 마디라도 남겼더라면 불필요한 오해는 없었을텐데, 신지님께 함부로 어설픈 댓글을 달았다가는 또다른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겠다 싶어서 좀 꾸물거렸던 게 그만 일이 꼬인 것 같습니다. 다른 뜻은 추호도 없었으니 제발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신지님을 얼마만큼 납득시킬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부터 성의껏 답변해 보겠습니다.

* * *

① 다만, 며칠 전 오렌님이 저의'초월적 입장'이라는 글에 주신 인용문은 (도대체 제 글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 )
정말 이해가 안 되더군요. 그런데 이 글에서 <'공평무사한 중립적 방관자'> 라는 것을 언급하시는 것을 보면,
저('초월적 입장'이라는 글)에게 이의를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면, 제 글('초월적 입장'이라는 글)에 오렌님이 남겨주신 댓글은 오렌님이 저에게 뭔가 '깨닫게' 해 주시려고 그처럼 '선문답'같은 인용글을 주신 것인지 궁금합니다.

---> 신지님께서 '초월적 입장'이라는 글에서 쓰신 내용에 대해 저 또한 '적극 공감한다'는 뜻의 댓글을 남기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데이비드 베레비의 책 구절에서 봤던 '데페이즈망(depaysement)'이라는 말이 떠올라서, 아하~ 신지님께서 이 글에서 '말씀하시고 싶어하시는 내용'이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거로구나 싶어서 인용했던 것입니다. 제가 쓴 댓글이 다소 모호하다는 신지님의 댓글을 보고 나서, 제가 댓글로 '인용의 한계'를 언급한 것도 그런 측면이었습니다. 오해가 없으셨기를 바랍니다.(오해하셨다면 제 책임이 큽니다)

② 추석 전에 저에게 뜬금없이 남겨 주신 댓글도 혹시 (사실은) 불만 때문이셨는지요?

---> 정말 밤 늦게까지 축구중계를 보다가 우연히 신지님께서 오래 전에 올려 놓으신 긴 글을 읽게 되었는데, 참으로 논리정연하고 '빈틈이 없을 정도로' 날카로운 비판을 하신 글이어서, 저 또한 '적극 공감한다'는 취지로 밤늦은 시각임을 무릅쓰고 댓글을 달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신지님께서도 제 댓글에 공감해 주셔서 댓글을 쓴 '보람'을 느꼈었구요. 이 댓글에 대해서도 신지님께서 '일말의 오해'를 하셨다면 그것 또한 제 불찰입니다.

③ 다만 그렇다면, 자신의 태도를 감추는 모호한 댓글, 인용글을 남기신 것은 (지금 이 글을 보고 나니)
저로서는 좀 불쾌하군요. (제가 알듯모를듯한 댓글을 싫어한다는 것은 얼마전 마립간님에게도 말했지만,
예전에도 알라딘에서 여러번 말한 적이 있습니다..)

---> 신지님께서 평소에도 날카로운 지적을 하시는 모습을 저 또한 가끔씩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솔직히 신지님이 겁이 좀 납니다. ㅎㅎ 제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모호한 댓글과 인용글'을 남긴 것은 아닌데, 제 댓글 때문에 '불쾌'하셨다면 이 곳 공간을 빌어 진심으로 신지님께 사과를 드립니다.

④ 이 글과 인용문들은 제가 보기에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이고, 오해할 수 있게, 무척 두루뭉술하게 쓰여져 있습니다. <이 인용문과 오렌님의 말씀이 어떤 연관이 있을까> 라는 부분에서 말입니다. 즉 오렌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모호합니다.누가 읽으면 내게 말하는 건가 싶고, 비판하는 것인지, 생각이 다르다는 것인지, 자신은 아담 스미스와 같은 입장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인지....... 말입니다.

----> 그런 측면이 충분히 있다고 저도 인정합니다. 어떤 말이든 '비유적으로' 혹은 '중의적으로' 해석될 여지는 있습니다. 그런 부분을 명료하게 가다듬지 못한 것도 제 글쓰기의 한계일 것입니다. 저 역시 이 글을 쓰면서 신지님께서 지적해 주신 부분이 '걱정'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아우렐리우스의 명언록 가운데 일부를 인용한 것이기도 하구요. 신지님께서 지적하신 부분은 제가 감수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지님의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겠습니다.

⑤ 불필요한 오해를 줄이기 위해,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오렌님이 저에게 이견이 없는 부분은 어떤 것이고, 이견이 있는 부분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 솔직히 신지님의 이 '질문'에 대해서는 저로서는 '질문의 범위'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힘이 드는군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면 제 능력껏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신지 2011-09-20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ㄱ.
제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모호한 댓글과 인용글'을 남긴 것은 아닌데, 제 댓글 때문에 '불쾌'하셨다면 이 곳 공간을 빌어 진심으로 신지님께 사과를 드립니다.

ㅡ> 아 그렇다면, 오히려 저의 불찰이지, 오렌님이 사과하실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ㄴ.
어떤 말이든 '비유적으로' 혹은 '중의적으로' 해석될 여지는 있습니다. 그런 부분을 명료하게 가다듬지 못한 것도 제 글쓰기의 한계일 것입니다.

ㅡ> 이전에도 사실 저는 여러번 온라인의 대화가 어렵다는 것을 말한 바가 있는데요, 이는 오렌님만의 문제가 아니라, 저도 그렇고, 누구든 다 그렇지 않은가 싶습니다.

ㄷ.
* 다른 뜻은 추호도 없었으니 제발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 (오해하셨다면 제 책임이 큽니다)

ㅡ> 제 생각에는, 어떤 글이나 주장에는 동의, 이견, 비판, 질문 등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의사소통> 목적의 '질문'을 드린 거였어요. 즉 오해와 착각 등 의사소통의 어려움에 대해서 여러번 말하기도 했고, 저는 고민도 많은데요, 혹시 제가 착각하는 게 아닐까 싶어서요, 질문을 드린 것이니 그점에 대해서는 부디 개의치 말아 주세요. ;;;;;

ㄹ.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면 제 능력껏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ㅡ> 그런데 제가 굳이 오해를 무릅쓰고 ( = 오해했을지도 모르는데), 댓글을 남긴 것은요,
이 글이 읽기에는 독자에 따라서, 제 글에 대한 비판이나 반론으로 여길 수도 있을 듯 해서요.
저는 마립간님의 '초월적 입장'에 대해서 여러번 비판을 했고,
오렌님은 '공평무사한 중립적 방관자'에 대해서 쓰셨으니까요.

만약 그렇다면( =비판이나 반론이라면), 그 부분에 대해서 당연히 해당 글쓴이(저) 또한 해명하고 싶을 것이고, 당연히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무엇에 대한 비판인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비판인지 아닌지- 가 불분명하면 독자들이 오해하게 되는 반면, 비판 받는 사람으로서는 해명할 기회조차 얻지 못할 것입니다. 강준만은 예전에 문학논쟁 땐가요, 비실명 비판의 문제점에 대해서 여러번 비판한 적이 있는데,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oren 2011-09-20 21:15   좋아요 0 | URL
신지님의 댓글 잘 읽었습니다.

신지님께서 댓글을 달아 주신 순서대로 제 의견을 말씀 드려 보겠습니다.

우선, 신지님께서 여러차례 강조하셨듯이 <의사소통과정>에서의 오해와 착각 등에 대해 말씀해 주신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공감을 많이 느낍니다.

① ㅡ> 그런데 제가 굳이 오해를 무릅쓰고 ( = 오해했을지도 모르는데), 댓글을 남긴 것은요, 이 글이 읽기에는 독자에 따라서, 제 글에 대한 비판이나 반론으로 여길 수도 있을 듯 해서요. 저는 마립간님의 '초월적 입장'에 대해서 여러번 비판을 했고, 오렌님은 '공평무사한 중립적 방관자'에 대해서 쓰셨으니까요.

만약 그렇다면( =비판이나 반론이라면), 그 부분에 대해서 당연히 해당 글쓴이(저) 또한 해명하고 싶을 것이고, 당연히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무엇에 대한 비판인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비판인지 아닌지- 가 불분명하면 독자들이 오해하게 되는 반면, 비판 받는 사람으로서는 해명할 기회조차 얻지 못할 것입니다. 강준만은 예전에 문학논쟁 땐가요, 비실명 비판의 문제점에 대해서 여러번 비판한 적이 있는데,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제 답변)

제가 이 글을 쓰면서 [신지님이 쓰신 '초월적 입장'이라는 글을 제가 비판하는 입장에서 '공평무사한 중립적 방관자'를 내세워 쓴 것]은 결코 아닙니다.

지금에 와서야 신지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신지님께서 '제 글을 읽고나서' 어떤 식으로든 해명하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그 점(신지님께서 오해하신 점)은 제가 미처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신지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초월적 입장'이라는 신지님의 글에 대해서 제가 상당한 공감을 느꼈으면서도 왜 제가 이번 글을 통해 '공평무사한 중립적 방관자'를 그토록 강조하므로써, 제 본래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신지님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는지 뒤늦게 알았습니다.

신지 2011-09-20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를 들어, 오렌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알라딘의 횡포에 가까운 '무책임한 사용권 남용'에 분개한 사람들도 있었고"

ㅡ> 저는 "알라딘의 횡포에 가까운 '무책임한 사용권 남용'"이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공개된 글'에 대해서는 '무한에 가까운 책임'을 스스로 지녀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었고"

ㅡ> 또 저는 과연 "무한에 가까운 책임"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는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에게는, 각자 같은 사안에 대해서도, 이런 '시각차'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런데 사람마다 '시각차'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므로,
저는 오렌님의 글이 그냥 이번 서재뉴스사건에 대한 자신의 견해나 생각을 밝히는 것이라면 그다지 불만이 없습니다.
그것은 제 글에 달린 저의 댓글 등에서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

" 이런 문제에 있어서, 마고님과 마고님을 이해해 주신 다른 분들 모두, 각자의 개인적인 판단이 있을 것이고 존중해야한다는 게 저의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누가 잘못한 것이 있다기 보다는, 이견이 있다, 서로 좀 입장이 다른 것- 이라고 생각하는데요(...) ㅡ 신지 "

그러나 오렌님의 글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포괄적인 <인용문>의 대거 사용으로 인해,
오해의 여지가 너무 많은 듯 해서요.

다시 말씀 드리지만, 그 인용문이 <무엇에 대한 비판인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비판인지 아닌지- 가 불분명하면> 독자들이 오해하게 되는 것 같아서요..


oren 2011-09-20 21:20   좋아요 0 | URL
① 예를 들어, 오렌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알라딘의 횡포에 가까운 '무책임한 사용권 남용'에 분개한 사람들도 있었고"
ㅡ> 저는 "알라딘의 횡포에 가까운 '무책임한 사용권 남용'"이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공개된 글'에 대해서는 '무한에 가까운 책임'을 스스로 지녀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었고"
ㅡ> 또 저는 과연 "무한에 가까운 책임"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는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에게는, 각자 같은 사안에 대해서도, 이런 '시각차'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런데 사람마다 '시각차'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므로, 저는 오렌님의 글이 그냥 이번 서재뉴스사건에 대한 자신의 견해나 생각을 밝히는 것이라면 그다지 불만이 없습니다. 그것은 제 글에 달린 저의 댓글 등에서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

(제 답변)

저는 제 개인적으로 '제가 쓴 글의 내용'처럼(알라딘의 횡포에 가까운 사용권 남용) 판단을 했는데, 신지님께서 동의하지 않은 데 대해서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신지님의 말씀대로 '모두 각자의 개인적인 판단이 있을 것이고, 서로 입장이 좀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② 그러나 오렌님의 글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포괄적인 <인용문>의 대거 사용으로 인해, 오해의 여지가 너무 많은 듯 해서요. 다시 말씀 드리지만, 그 인용문이 <무엇에 대한 비판인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비판인지 아닌지- 가 불분명하면> 독자들이 오해하게 되는 것 같아서요..

(제 답변)

제 글의 가장 큰 문제점이 바로 신지님께서 지적하신 그대로입니다.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포괄적인 인용문을 대거 사용하다 보니, 제 글에 대해 읽는 분들이 오해할 여지가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인체에 비유하자면 '좋은 글'이란 '뼈와 살'이 알맞게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데, 제가 쓴 이번 글은 '온통' 살덩이만 잔뜩 끌어다 놓은 채, 그 살덩이들을 제대로 지탱해 주는 뼈대를 갖추지 못한 게 맞습니다.

지금에 와서야 후회되는 일이지만, '이렇게 잔뜩 인용만 늘어놓아서 어쩌자는 건가....'하는 걱정을 많이 했더랬습니다. 신지님의 따끔한 지적을 듣고 보니 저도 참 반성이 많이 됩니다.

신지 2011-09-20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인용문을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ㄱ.
내가 이런 글을 굳이 쓰는 이유를 찾자면 그건 한마디로 말해서 나는 (고대의 스토아학파 철학자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속물'이기 때문이다.

이 곳 알라딘이 좀 더 서로 '신뢰'가 넘쳐나고 또한 서로 도와주고 지켜주는 '미덕'이 넘쳐나는 그런 공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쓰게 되었음을 미리 말하고 싶다.

ㅡ> 이런 말은 오렌님은 '미덕'을 위해서 글을 쓰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 '속물'이라는 얘기밖에 더 되나요. 저는 공론장에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을 다 '속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ㄴ.

그러나 만일 우리에게 가해질지도 모르는 침해 행위에 대하여 그들이 무관심한 듯한 태도를 보인다면, 우리는 결코 참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고 하시고 아담 스미스의 "나를 화나게 만드는 분개를 조금도 함께 나누어 가지지 않는다면(...) "

ㅡ> 이런 생각에도 저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고종석에 대해서(막강한 언론인/ 지식인의 잘못된 글에) 분개할 때, 모든 사람이 동의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제게 동의한 두 세명을 제외하고 모든 알라디너에게 저는 분노해야 하나요.

ㄷ.
그런데, 최근 '알라딘 서재 뉴스레터'에 대한 어느 알라디너의 '반응'에 대해 두 가지 확연하게 엇길린 반응을 보인 건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보게 되면서, 나는 그것이 결국 '공정한 방관자'의 문제에 귀결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 그리고 또 그것은 어쩌면 '지위에 대한 경쟁'과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아담 스미스는 '이 세상 사람들이 온갖 고생을 다하면서 야단법석을 떠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의 지위의 개선'이라는 목적 때문이라고 보았다.

ㅡ> 누구한테 하시는 말씀인지, 이번 일에 발언한 사람들은 모두 '속물'이거나 '경쟁심'이거나 "결국 '자기 자신의 지위의 개선'이라는 목적 때문"이라고 보신다면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



oren 2011-09-20 21:23   좋아요 0 | URL
① 내가 이런 글을 굳이 쓰는 이유를 찾자면 그건 한마디로 말해서 나는 (고대의 스토아학파 철학자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속물'이기 때문이다. 이 곳 알라딘이 좀 더 서로 '신뢰'가 넘쳐나고 또한 서로 도와주고 지켜주는 '미덕'이 넘쳐나는 그런 공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쓰게 되었음을 미리 말하고 싶다.
ㅡ> 이런 말은 오렌님은 '미덕'을 위해서 글을 쓰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 '속물'이라는 얘기밖에 더 되나요. 저는 공론장에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을 다 '속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 답변)

신지님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 보니 저도 낯이 화끈거립니다. 제가 저 대목을 쓰면서 '뭔가 표현이 잘못된 게 아닐까' 은근히 걱정스러웠었는데, 신지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할 말이 없습니다.

② 그러나 만일 우리에게 가해질지도 모르는 침해 행위에 대하여 그들이 무관심한 듯한 태도를 보인다면, 우리는 결코 참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고 하시고 아담 스미스의 "나를 화나게 만드는 분개를 조금도 함께 나누어 가지지 않는다면(...) " ㅡ> 이런 생각에도 저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고종석에 대해서(막강한 언론인/ 지식인의 잘못된 글에) 분개할 때, 모든 사람이 동의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제게 동의한 두 세명을 제외하고 모든 알라디너에게 저는 분노해야 하나요.

(제 답변)

제 글이 '날림공사'였음이 다 드러납니다.

③ 그런데, 최근 '알라딘 서재 뉴스레터'에 대한 어느 알라디너의 '반응'에 대해 두 가지 확연하게 엇길린 반응을 보인 건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보게 되면서, 나는 그것이 결국 '공정한 방관자'의 문제에 귀결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 그리고 또 그것은 어쩌면 '지위에 대한 경쟁'과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아담 스미스는 '이 세상 사람들이 온갖 고생을 다하면서 야단법석을 떠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의 지위의 개선'이라는 목적 때문이라고 보았다. ㅡ> 누구한테 하시는 말씀인지, 이번 일에 발언한 사람들은 모두 '속물'이거나 '경쟁심'이거나 "결국 '자기 자신의 지위의 개선'이라는 목적 때문"이라고 보신다면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

(제 답변)

저는 '속물'이라는 표현은 (거듭 말씀드리지만) 제 스스로를 겨냥하여 쓴 표현이었을 뿐이고, 알라디너 분들에게까지 그런 뉘앙스가 전해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다만 알라디너 분들의 반응이 확연하게 엇갈린 이유가 '경쟁' 또는 '자기 자신의 지위의 개선'과도 어느 정도는 연관이 있다고 제 스스로 판단했다는 건 사실입니다. 물론 이건 저 혼자만의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신지 2011-09-20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ㄹ.
경쟁심은 어디에서 생기는 것인가? 그리고 소위 자신의 지위의 개선이라고 하는 인생의 거대한 목적을 추구하는 것은 어떤 이익이 있어서인가? 남들로부터 관찰되고 주의와 주목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그들로부터 동감과 호의와 시인(是認)을 받는다는 것이 바로 그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이다.
그러므로 자리 또는 지위(地位: place)는, 고관 부인들의 사이를 갈라놓는 위대한 목표로서, 인간생활의 노동의 반은 이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서이며, 그리고 이것은 탐욕과 야심이 이 세상에 끌어들인 모든 소란과 소동, 모든 강탈과 부정의 원인이 되고 있다.

어떤 것이 우리에게 마찬가지로 유용하거나 또는 그 이상으로 유용하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실제로 유용한 것을 빼앗는 행위나, 또는 이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타인을 희생시켜 가면서 다른 사람의 행복보다 자신의 행복을 중시하는 천성적인 선호(選好)에 몰두하는 행위는 공정한 방관자로서는 결코 공감할 수 없는 것이다.]

ㅡ> 역시 누구한테 하시는 말씀인지, 이번 일에 발언한 사람들은 모두 "남들로부터 관찰되고 주의와 주목을 받는다는 것" 이거나........ "타인을 희생시켜 가면서 다른 사람의 행복보다 자신의 행복을 중시하는 천성적인 선호(選好)에 몰두하는 행위는 "라고 보신다면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oren 2011-09-20 21:25   좋아요 0 | URL
① 경쟁심은 어디에서 생기는 것인가? 그리고 소위 자신의 지위의 개선이라고 하는 인생의 거대한 목적을 추구하는 것은 어떤 이익이 있어서인가? 남들로부터 관찰되고 주의와 주목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그들로부터 동감과 호의와 시인(是認)을 받는다는 것이 바로 그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이다. 그러므로 자리 또는 지위(地位: place)는, 고관 부인들의 사이를 갈라놓는 위대한 목표로서, 인간생활의 노동의 반은 이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서이며, 그리고 이것은 탐욕과 야심이 이 세상에 끌어들인 모든 소란과 소동, 모든 강탈과 부정의 원인이 되고 있다. 어떤 것이 우리에게 마찬가지로 유용하거나 또는 그 이상으로 유용하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실제로 유용한 것을 빼앗는 행위나, 또는 이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타인을 희생시켜 가면서 다른 사람의 행복보다 자신의 행복을 중시하는 천성적인 선호(選好)에 몰두하는 행위는 공정한 방관자로서는 결코 공감할 수 없는 것이다.]

ㅡ> 역시 누구한테 하시는 말씀인지, 이번 일에 발언한 사람들은 모두 "남들로부터 관찰되고 주의와 주목을 받는다는 것" 이거나........ "타인을 희생시켜 가면서 다른 사람의 행복보다 자신의 행복을 중시하는 천성적인 선호(選好)에 몰두하는 행위는 "라고 보신다면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제 답변)

이 부분 역시 지금 생각해 보니 '제 머리에 뭔가가 잠깐 스치는 것처럼 걱정했던 대목'입니다. 지금 다시 살펴보니 역시 적절하지 못한 인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타인을 희생시켜 가면서 다른 사람의 행복보다 자신의 행복을 중시하는 천성적인 선호(選好)에 몰두하는 행위는" 알라딘'한테' 한 말이라는 점은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신지 2011-09-21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ㅁ.

ㅡ'인지 부조화를 해소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자신의 결정을 극단적으로 합리화하는 형태로 나아가며, 자신이 알고 싶지 않은 정보를 스스로 차단하고 알고 싶은 것만 받아들이게 된다' 는 것이다.

ㅡ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고 싶은 마음
(...)

ㅡ >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오렌님에게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 =저는 글의 의도를 아직 잘 이해하고 있지 못하니까요)

오렌님이 이렇게 모든 인간에게 포괄적으로 적용되는 인용을 하시면,
그런데 그 글이 오렌님의 어떤 주장이나 생각을 말하는 글일 경우,

오렌님의 말과 인용문이 연결이 잘 안 되면,
마치 <자신은 '성인' ( =인용문)이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어리석다>-
라는 글로 오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oren 2011-09-20 21:27   좋아요 0 | URL
① ㅡ아담 스미스가 결국 그의 책 『도덕감정론』에서 주장하고 싶은 핵심은, 내가 판단하기로는, '공평무사한 중립적 방관자'인 것 같다. ㅡ'인지 부조화를 해소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자신의 결정을 극단적으로 합리화하는 형태로 나아가며, 자신이 알고 싶지 않은 정보를 스스로 차단하고 알고 싶은 것만 받아들이게 된다' 는 것이다. ㅡ신중, 공정(公正), 적극적, 과단(果斷), 진지한 성격은 그 사람 자신과 그와 관련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번영과 만족을 약속한다. 반대로 경솔, 오만, 나태, 유약(柔弱), 방탕한 성격은 그 개인에게는 파멸을, 그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재난(災難)을 예고한다. ㅡ인간의 본성에서 우리는 싸움의 세 가지 주된 요인을 발견한다. 첫째는 경쟁이고, 둘째는 자신감 결여이고, 셋째는 영광이다. 첫 번째는 인간이 이익을 위해 서로를 공격하게 만들고, 두 번째는 안전을 위해 서로를 공격하게 만들고, 세 번째는 가령 말 한마디, 미소, 견해 차이를 비롯하여, 본인이 직접 겪는 것이든 혈연, 친구, 국가, 직업, 이름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겪는 것이든 자신을 무시하는 갖가지 사소한 이유들 때문에 서로를 공격하게 만든다. ㅡ '인간은 서로 비슷한 사람들이 한패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한패가 되고 나서 서로 비슷해진다'고 지적했다. ㅡ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고 싶은 마음 사람들의 '마음'이 저지르는 실수들은 (...) 독특하게 '편향된 시각'을 보이는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인지 부조화'라는 심리적 오류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인지 부조화를 해소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자신의 결정을 극단적으로 합리화하는 형태로 나아가며, 자신이 알고 싶지 않은 정보를 스스로 차단하고 알고 싶은 것만 받아들이게 된다' 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이번에 '알라딘 서재 뉴스레터'의 문제에 있어서도 여러 사람들이 결국 자기 자신이 보고 싶은 문제점만 부각시켜 보게 된 때문에, 정말로 놀랍도록 다양한 반응들이 쏟아져 나왔던게 아닌가 싶다. 알라딘의 횡포에 가까운 '무책임한 사용권 남용'에 분개한 사람들도 있었고, '공개된 글'에 대해서는 '무한에 가까운 책임'을 스스로 지녀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었고, '댓글의 성격'에 따라 달리 반응하는 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
ㅡ >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오렌님에게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 =저는 글의 의도를 아직 잘 이해하고 있지 못하니까요) 오렌님이 이렇게 모든 인간에게 포괄적으로 적용되는 인용을 하시면, 그런데 그 글이 오렌님의 어떤 주장이나 생각을 말하는 글일 경우, 오렌님의 말과 인용문이 연결이 잘 안 되면, 마치 <자신은 '성인' ( = 인용문)이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어리석다>- 라는 글로 오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제 답변)

제 글이 '부실공사'였음이 계속해서 드러납니다. 신지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제가 그런 '오해'를 받아도 할 말이 없게 생겼습니다. 그런 뜻은 결코 아니니 거듭 '오해하시지는 말아 주셨으면' 하고 간청드릴 수 밖에 없군요.

신지 2011-09-20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s.

" 알라딘의 횡포에 가까운 '무책임한 사용권 남용'에 분개한 사람들도 있었고"
ㅡ> 저는 "알라딘의 횡포에 가까운 '무책임한 사용권 남용'"이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

라고 말씀드린 것은, 오렌님의 생각이 틀렸다는 게 아니라,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은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즉, 반박이 아니고,
저는 같은 사안에 대해서도, 사람마다 '시각차'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

제가 너무 많은 댓글을 썼는데, (그러나 그 내용은 간단합니다. 즉 '인용문이 이번에 발언한 사람들을 모두 비하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먼댓글, 페이퍼로 쓰지 않고 댓글을 한 것은,
단순히 <제가 좋아하는 분과의 의사소통>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대화가 끝나면 삭제할 수 있습니다.필요하면 말씀해 주세요.
부디 실례가 아니었으면 좋겠고,
이해해 주실 것 같아서, 만나서 얘기하듯,ㅡ 의사소통 목적이지ㅡ 다른 의도가 아닙니다...


oren 2011-09-20 21:40   좋아요 0 | URL
제가 너무 많은 댓글을 썼는데, (그러나 그 내용은 간단합니다. 즉 '인용문이 이번에 발언한 사람들을 모두 비하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먼댓글, 페이퍼로 쓰지 않고 댓글을 한 것은,
단순히 <제가 좋아하는 분과의 의사소통>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대화가 끝나면 삭제할 수 있습니다.필요하면 말씀해 주세요. 부디 실례가 아니었으면 좋겠고, 이해해 주실 것 같아서, 만나서 얘기하듯,ㅡ 의사소통 목적이지ㅡ 다른 의도가 아닙니다...

(제 답변)

신지님의 기나긴 댓글과 여러가지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 다른 분들이 그렇게(이번에 발언한 사람들을 모두 비하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오해는 전적으로 이 글을 쓴 저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다만 저는 많은 분들의 다양한 '생각의 차이'에 대해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고 판단했고, 그런 이유(생각의 차이를 불러온 이유)를 여러 '인용글'들로부터 찾아내어 '함께' 생각해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섰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지님의 지적대로 [무리한 인용과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호한 부분과 잘 연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음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뒤늦게라도 제 글의 요점을 다시 압축해서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1. 제 생각으로는, 알라딘에서 아무런 사전 예고도 없이 '화제글'을 임의로 '서재 뉴스레터' 형식으로 이메일로 배포한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고 본다.
(알라딘의 처사는 '공정한 방관자'의 시각으로 보더라도 분개할 수도 있다고 저는 판단했습니다)
2. 따라서, 저는 어느 알라디너의 반응에 대해서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분개'에 가까운 반응) 공감한다.
3. 그런 알라디너의 반응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에 있는 분들의 생각 가운데 일부는 '경쟁'이나 '지위의 개선' 혹은 '인간부류 감각'과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4. 찰스 다윈의 표현대로, ''용기있고 동정심이 많으며 충실한 구성원을 많이 가지고, 언제나 서로 위험은 바로 경고하고, 서로 돕고 지키는' 부족은 생존경쟁에서 승리하듯이', 알라딘의 분위기도 '서로 돕고 지키는' 미덕이 발휘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oren 2011-09-20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용글' 때문에 신지님으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들었지만, 제가 이 글을 너무 '날림공사'로 써서 올리다 보니 모두가 제 스스로 자초한 일인 것 같습니다. 신지님 덕분에 '정확한 글쓰기'에 대해 새삼 많은 생각을 하게 되고, 댓글을 쓰다 보니 습관적으로 또 다른 '인용'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 * *
"모든 말은 결핍이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 담지 못한다. 모든 말은 과잉이다. 차마 전하지 않았으면 했던 것들도 전하게 된다."
-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신지 2011-09-21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면 제가 말씀드린 것은 단지
[인용과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호한 부분과 잘 연결되지 않는 부분]이고,잘 설명해 주셔서, 완전히 저는 잘 이해가 되었습니다.

끝에 압축해서 말씀하신 글의 요점을 보니 오렌님의 생각도 잘 이해가 됩니다.

끝에 사진을 보고 웃었는데, 저도 자주 저런 모습이거든요. ^^::
온라인에서 말하기 어렵다는 점, 서로 오해나 착각할 수 있다는 점, 그건 오렌님만의 문제가 아니라
저도 늘 고민하는 문제이고 저 또한 얼마나 실수를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근데, 이번에는 오렌님의 실수라기 보다
독자에 따라서는
오해가 있을 수도 있어서, 글에 질문하고, 설명을 들은 것 아닌가요.

고맙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

-----------------------------------------------------------------------


*ps.

다른 분들에게는 충분히 좋은 글일 수 있는데, 저만의 문제일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앞서 이 사안에 대해서 발언을 했고, 앞서 오렌님과 댓글을 주고받았기 때문에요.
제가 보기에는, 이 글에 대해서 크게 괘념치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oren 2011-09-21 09:43   좋아요 0 | URL
신지님께서 좋은 지적들을 해주셨는데 제 부실한 답변에 대해서도 흔쾌히 이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게 '말'이나 '글'이지만, 그게 '힘'을 지니다 보니 언제나 신중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사용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이번 기회에 새삼 해보게 됩니다.

그리고 신지님께서 ()속에 담아주신 말씀은 제게 좀 부담스럽습니다.
(과공은 비례라고 했는데, '정확한 글쓰기'에 대해 남다른 감각을 지니신 신지님께서 저같이 '부실한' 글을 쓰는 사람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면 제가 몸둘 바를 모르게 됩니다. 저 대목 만큼은 신지님께서 '자삭'해 주시면 안될까요....)

2011-09-21 15: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21 15: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댓글저장
 


세월이 흐를수록 알라딘의 '분위기'가 점점 더 이상해 지는 것 같아 심히 걱정스럽습니다.

[플라톤의 신성한 잠언(箴言)이라고 키케로(Cicero)가 정확하게 부른 것, 즉 자기 부모에 대해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자기 조국에 대해서도 폭력을 사용해서는 결코 안된다는 말]처럼, 어떤 영리조직이든 자기 자신의 고객에 대해서는 결코 폭력(혹은 폭력이라고 느낄 만한 '힘')을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 * *
















되풀이되는 엄중한 도발의 결과 때문이라는 것 65∼66쪽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때 비로소 분개심을 표출하는 우리의 행위가 방관자에게 완전히 유쾌하게 느껴지고 그리고 방관자로 하여금 우리의 분개에 완전히 동감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분개를 격발시킨 원인이, 만약 우리가 그것에 대해 어느 정도라도 분개하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이 비열한 인간으로 되어버리고 그리고 두고두고 모욕을 받게 될 그런 것이어야 한다. 사소한 침해에 대해서는 무시해 버리는 편이 오히려 낫다. 사소한 시빗거리가 있을 때마다 흥분하는 심술궂고 남의 말꼬리 잡고 시비하기 좋아하는 성격만큼 비열한 것도 없다. 우리가 분개하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 불쾌한 격정으로 화가 나서가 아니라, 분개하는 것이 적절하고 또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분개하기를 기대하고 또 요구하고 있다는 자각 때문이어야 한다.

인류가 느낄 수 있는 격정들 중에서 이 분개의 격정만큼 우리로 하여금 그것의 정당성에 대하여 재삼 의문을 가져보게 하고, 우리가 그것을 표출하기 전에 조심스럽게 우리의 본래의 적정성 감각에 비추어 보게 하고, 또한 냉정하고 공정한 방관자가 우리가 표출하는 분개를 보고 어떤 감정을 가지게 될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도록 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관대함이나 우리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존엄을 유지하고자 하는 관심만이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는 이 격정의 표현들을 고상한 것이 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동기이다. 이 동기가 우리의 전체 품격과 태도를 특징짓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우리의 태도는 반드시 소박·소탈하고, 감추는 것이 없고, 솔직해야만 한다. 과단성이 있되 독단적이 아니어야 하고, 고결하되 오만하지 않아야 하며, 무례하고 상스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상해를 가한 자에 대해서조차 너그럽고 솔직하면서도 모든 적절한 배려를 다해 주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분노의 격정 때문에 인간의 선한 본성이 훼손되지 않았음을, 그리고 만약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복수를 하게 된다면 그것은 마지못해서, 필요에 의해서, 그리고 되풀이되는 엄중한 도발의 결과 때문이라는 것이 우리가 그것을 표현하려고 일부러 노력하지 않고서도 우리의 전체 행동에서 저절로 드러나야 한다.

분노가 이런 방식으로 억제되고 진정된다면 그것은 심지어 관대하고 고상하기까지 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분개(憤慨)의 감정 149쪽

분개(憤慨)는 방어를 위해서, 그리고 오직 방어만을 위해서, 천성이 우리에게 부여해준 감정인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정의를 지키는 보호장치이자 죄없는 사람을 지키는 안전장치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가해지려는 해악을 물리치고 이미 가해진 것에 대해서는 보복을 하도록 촉구한다. 그리하여 가해자로 하여금 자신의 부정한 행위를 반성하도록 하고, 나아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같은 처벌을 받을까봐 두려움을 갖도록 함으로써 유사한 죄를 범하지 못하도록 한다.


분개의 감정이 달성하고자 하는 주요 목적 181∼182쪽

분개의 감정이 달성하고자 하는 주요 목적은 우리의 적으로 하여금 고통을 느끼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로 하여금 자신이 자신의 과거의 행동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고, 또한 그로 하여금 과거의 행동을 후회하도록 만들고, 그로 하여금 그가 해악을 가한 그 사람이 그와 같은 식으로 대접을 받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만드는 데 있다. 우리를 해치거나 모욕을 준 사람에 대하여 우리로 하여금 분개하게 만드는 것은 그가 우리를 무시하는 태도, 우리보다 자기기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불합리한 태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언제라도 그의 편의에 따라 또는 기분에 따라 희생되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그의 터무니없는 자애(自愛: self-love) 등이다. 그의 행동에 나타난 두드러진 도덕적 부적정성, 그의 행동에 담겨 있는 큰 오만과 불의는 종종 우리에게 우리가 당한 해악 그 자체보다도 더욱 큰 충격을 주고, 우리를 격분하게 만든다. 다른 사람들이 응당 받아야 할 몫에 대한 보다 올바른 감각을 그에게 심어주는 것, 그가 우리에게 지고 있는 빚이나 그가 우리에게 행한 잘못을 그가 깨닫도록 해 주는 것 등이 우리가 보복하려는 주요 목적이다. 만약 이 목적이 달성되지 못한다면 보복은 항상 불완전하다.


오만(傲慢)한 사람 483쪽

오만(傲慢)한 사람은 표리부동(表裏不同)하지 않고, 마음속 깊숙이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러한 확신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알아맞히기는 흔히 어려울 수도 있다. 그는 당신이, 그가 당신의 입장에 있을 때 자기 자신을 바라볼 그런 눈으로, 자기를 보아주기를 바란다. 그가 당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그가 생각하는 공정(公正)함이다. 만일 그가 자기 자신을 존경하는 것만큼 당신이 자기를 존경해 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는 모욕(侮辱)을 당한 것 이상으로, 마치 그가 정말로 어떤 침해를 당한 것처럼 화를 내고 분개한다. 그러나 그런 때조차도 그는 자신이 당신에게 그런 요구를 하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당신에게 존경을 간청하려고 하지 않으며, 그런 행동을 경멸하는 척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는, 자기 자신의 우월함을 당신으로 하여금 느끼도록 하기보다는 당신 자신의 비천함을 스스로 느끼도록 함으로써, 자기 스스로 상정(想定)한 지위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마치 자기 자신에 대한 당신의 존경심을 자극하기보다는 오히려 당신 자신에 대해 당신이 굴욕감을 느끼도록 자극하기를 더욱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양심, 가슴 속의 동거인(同居人), 내부 인간, 우리 행위의 재판관 및 조정자(調整者) 253쪽

그것은 이성(理性), 천성(天性), 양심, 가슴 속의 동거인(同居人), 내부 인간, 우리 행위의 재판관 및 조정자(調整者)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할 때마다 우리 내심의 가장 몰염치한 격정을 향하여 깜짝 놀랄 정도의 큰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소리치는 것은 바로 이 사람이다. 즉, 우리는 대중 속의 한 사람에 불과하고, 어떠한 점에 있어서도 그 속의 다른 어떠한 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으며, 우리가 그처럼 수치(羞恥)를 모르고 맹목적으로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우선시킨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분개와 혐오와 저주의 정당한 대상이 될 것이라고, 우리가 우리 자신들에 관련된 모든 것이 실제로는 사소한 것이라는 사실을 배우는 것은 오직 이 중립적 방관자로부터이고, 이 중립적 방관자의 눈에 의해서만 자애(自愛)가 빠지기 쉬운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을 수 있다. 관용의 적정성과 부정(不正)의 추악성, 우리 자신의 큰 이익보다 다른 사람들의 더 큰 이익을 위하여 우리 자신의 그것을 양보하는 것의 적정성과, 우리 자신의 최대의 이익을 얻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가장 사소한 이익까지 침해하는 행위의 추악성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바로 이 공평무사한 중립적 방관자이다.

많은 경우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신성한 미덕을 행하도록 촉구하는 것은 우리의 이웃에 대한 사랑도 아니고 인류에 대한 사랑도 아니다. 그러한 경우에 통상 생기는 것은 보다 강한 사랑, 보다 강력한 애정, 즉 명예스럽고 고귀한 것에 대한 사랑, 우리 자신의 성격의 숭고함, 존엄성, 탁월성에 대한 사랑인 것이다.

 -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中에서


 * * * * *
















도덕적 감정들 : 좋아함, 노여움, 감사, 동정, 죄의식, 수치 621쪽

트리버스는 도덕적 감정들을 호혜주의 게임의 전략으로 보고 그것을 다음과 같이 역설계했다.

'좋아함liking'은 이타적 관계를 시작하고 유지하는 감정이다. 대략적으로 그것은 타인에게 호의를 제공하는 자발성이고, 그 방향은 자발적으로 호의를 돌려줄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에게 맞춰진다. 우리는 우리에게 친절한 사람을 좋아하고,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친절하다.

'노여움anger'은 친절함의 대가로 사기를 당하는 경우를 막아 준다. 착취 행위가 발견되면 당사자는 그 불쾌한 행동을 불공정한 것으로 분류하고 분노와 도덕적 공격의 욕구-관계를 단절함으로써, 그리고 때때로 사기꾼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벌을 주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많은 심리학자들이 노여움에는 도덕적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거의 모든 노여움이 정당한 노여움, 즉 의분이라는 것이다. 격노한 사람은 자신이 손해를 입었고, 그래서 부당함을 시정해야 한다고 느낀다.

'감사gratitude'는 최초의 행동에서 비롯된 비용과 이익에 따라 보답하려는 욕구를 조절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어 큰 도움을 주고 그로 인해 큰 손실을 겪은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느낀다.

'동정sympathy'은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욕구이고, 감사를 벌기 위한 감정일 수 있다. 사람들은 호의가 가장 절실할 때 가장 많이 감사하므로, 어려움에 빠진 사람은 이타적 행동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기회다.

'죄의식guilt'은 발각될 위험에 처한 사기꾼을 괴롭힐 수 있다. H.L. 멩켄은 양심을 "우리에게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을지 모른다고 경고하는 내면의 목소리"로 정의했다. 만일 피해자가 미래의 모든 도움을 끊는다면 사기꾼은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악행을 배상하고 그런 일을 되풀이하지 않음으로써 관계 단절을 막는 일에 관심을 기울인다. 사람들이 사적인 범죄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는 것은 그 행위가 공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죄가 발각되기 전에 자백하는 행위는 진실함을 입증하고 피해자에게는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좋은 근거가 된다.

'수치shame'는 범죄가 발각된 후의 반응으로 공개적인 뉘우침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데, 이것도 분명 같은 이유에서다

 - 스티븐 핑커,『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중에서


 * * * * * * *
















신뢰의 경제적 비용


현대세계에서 거의 모든 경제활동은 개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높은 수준의 사회적 협동을 필요로 하는 조직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재산권, 계약, 상법 등은 시장지향적인 현대 경제체제를 이룩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제도이지만, 이런 제도가 '사회적 자본'과 '신뢰'로 보완된다면 경제활동 비용을 상당히 절약할 수 있다.

한편 신뢰는 공유되는 도덕규범이나 가치를 지닌, 그 전부터 있어 온 공동체의 산물이다. ...... 이런 공동체는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의미에서의 합리적 선택의 산물이 아니다. 

필자는 지난 번 책『역사의 종언과 최후의 인간』에서 일반적으로 경제적인 동기라고 받아들여지는 것이 실제로는 합리적인 욕망의 문제가 아니라 인정받으려는 욕망의 구체화임을 다소 장황하게 주장한 바 있다. ......

경제생활이 가능한 한 최상의 물질적인 풍요를 얻는 것뿐만 아니라 승인과 인정을 얻기 위해서 추구되는 것이라면,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상호 의존성은 더욱 명백해진다. ......

경제학자 알베르트 히르쉬만은 근대 부르주아의 등장을 귀족사회의 특징인 명예에 대한 '열정'을 신흥 부르주아지의 특징인 물질적인 '이해관계'로 대치시킨 '윤리적 혁명'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실상 이런 대체는 최초의 자유주의적 정치이론가 토마스 홉스의 마음속에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홉스가 보기에 시민사회란 종교적인 열정에서든 귀족적인 허영심에서든 간에 합리적인 부의 축적에 명예에 대한 욕망을 의식적으로 종속시킨 것이라고 생각했다.

- 프랜시스 후쿠야마,『트러스트』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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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9-07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경써주셔서 항상 감사합니다.
이번 일은 '분개'해야하는 일이라고 저는 판단했습니다.
처음에야 순간적으로 불편하고 욱~하는 정도의 일이었지만, 알라딘의 태도에 의하여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는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저는 아무거나 시시비비를 가리기 좋아하는 성격은 아닙니다, 세상에서 완전히 올바른 것도 완전히 그른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제 행동에도 찬반이 분명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현재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올바르다 생각합니다. 알라딘이 제시한 틀 내에서
무조건 수용해야 한다면, 제가 세상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조차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다만..... 사람의 반응이란 정말 다양하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봅니다.

oren 2011-09-07 13:37   좋아요 0 | URL
'분개'에 대해 깊이 성찰한 도덕철학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르자면,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는 이 격정의 표현들'을 고상한 것이 될 수 있도록, [과단성이 있되 독단적이 아니어야 하고, 고결하되 오만하지 않아야 하며, 무례하고 상스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상해를 가한 자에 대해서조차 너그럽고 솔직하면서도 모든 적절한 배려를 다해 주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게 참 쉽지 않으니 늘 문제 입니다.

2011-09-07 2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oren 2011-09-08 10:18   좋아요 0 | URL
제겐 너무 과분한 말씀이네요..

그리고, 이미 인용했던 내용들이 많은데 자꾸만 울궈 먹는 것 같아 다소 식상하기도 하구요. 그래서 이 글은 안 올릴까 하다가, 혹시나 처음 접하는 분들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염치 불구하고' 올린 겁니다. ㅎㅎ

암튼 댓글 남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페크pek0501 2011-09-09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ren님 덕분에 도덕감정론을 사기로 했어요. 예전의 페이퍼도 읽었는데 좋은 내용이 많더라고요. 감사 드립니다.

oren 2011-09-09 17:16   좋아요 0 | URL
네.. 『도덕감정론』은 저도 오래 전부터 벼르던 책이었는데, 다 읽고 나서도 또 다시 펼쳐 읽고 싶고, 또 읽을 때마다 대단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이런 경험을 하게 만드는 책은 매우 드물었던 것 같습니다)

pek님께서 이 책을 사기로 하셨다니 저도 몹시 기쁘네요. 그리고 댓글 남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2011-09-10 18: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11 0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댓글저장
 
9월 하순에 찾아가본 智異山
지리산 둘레를 따라 만난 풍경 ①
지리산 둘레를 따라 만난 풍경 ②


한걸음 한걸음이 건강이요, 재미요, 즐거움이다. 인생의 근심걱정은 금권주의, 사회의 본질적 속악함과 함께
- 김이 솟아 오르는 골짜기의 가장 낮은 밑바닥에 달라붙는 추악한 독기처럼 - 아득히 저 아래쪽에 남는다. 위쪽에서 우리는 맑은 공기와 날카로운 햇빛 속에서 신들과 함께 걷고, 인간은 서로를 알며 자신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를 안다. 어떤 감정도 '우리 종족의 시조들처럼 충실한 동지들'과 더불어, 어느 냉혹한 절벽을 공격하러 전진하는 감정보다 영광스러울 수는 없다. 설령 바깥쪽으로 툭 튀어나간 기울어진 바위 선반 위에서 오로지 구두징 한 개의 마찰만으로 육체가 희박한 공기 속에 떨어져 내리는 것과, 영혼이 저 위 천국으로(그렇게 희망하자) 날아 오르는 것을 막고 있을 뿐일지라도 한 손의 손가락에 아직도 한 파티의 생명을 맡길 수 있고, 아랫도리에 '무릎이 풀어지는 공포'의 기미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아는 것보다 통쾌한 일은 없다.

 - 알버트 프레드릭 머메리

 * * *

○ 일시 : 2011. 8.19(금) 13:30 ∼ 8.21(일) 13:30
○ 산행 코스 : 백무동 → 장터목(1박)  → 천왕봉  → 세석평전  → 벽소령  → 연하천(2박)  → 노고단  → 성삼재
 

거의 5년 만에 다시 지리산을 종주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지리산을 찾았던 게 대학 1학년 여름방학때(1981년) 였으니, 그로부터 따지면 지리산과 인연을 맺은지도 어언 30년이 되었다. 정말 세월이 빠르다는 말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지리산을 오를 때마다 늘 '지리산을 처음 올랐을 때의 추억'을 되새기곤 하지만, 이번 산행에서는 유달리 '그 시절 그 친구들과의 추억들'이 몹시도 그리웠고, 특히나 이번 산행 코스는 여태껏 올랐던 방향과 정반대 방향(천왕봉 → 노고단)으로 다녀왔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왜냐하면 산행 도중 수없이 마주치게 된 풋풋한 젊은이들(특히 대학생들이 많았다)을 보면서 30년 전의 '우리들' 모습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애쓸 도리가 도무지 없었기 때문이다. 지리산에 오른 대개의 대학생들은 너무나 싱그러운 젊음을 푸른 나뭇잎처럼 발산하고 있었고, 나는 어느덧 딱딱한 껍질을 온 몸에 두르고 있는 나무처럼 제법 많은 세월을 살아 온 중년이 되어 있었다.


<앨범 속 사진 1> 1981년 8월, 대학 1학년 여름방학때 지리산 정상에 오른 모습


(그 당시엔 멋도 모르고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종주산행을 했나 보다. 사진 속 수박 한 통이 인상적이다)


언제부터 산을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쨌든 30년 전 처음으로 가 본 '지리산'은 정말 좋았다. 제법 거창한 4박5일의 종주 산행이었던 데다가, 텐트와 5일분의 식량 때문에 짐도 무거웠고, 등반대의 구성원이 남학생 6명과 여학생 2명으로 이뤄지는 바람에 텐트를 남학생용 대형(7∼8인용) 1개,  여학생용 소형 1개(3∼4인용)로 구색을 맞춰 가져 갔는데, 대형텐트는 정말 무게가 장난이 아니었고, 텐트를 치고 걷는데도 시간이 꽤나 걸렸기 때문에 더욱 고생이 심했고, 그만큼 잊지 못할 추억으로 가득 찬 산행이 되었다.

그 당시를 다시금 회상해 보면, 아무튼 그 땐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거친 산길을 걷고, 하루 세끼씩 꼬박 꼬박 8인분의 식사를 준비하고, 식사를 하고, 설겆이를 마치고, 또 야영을 하는 과정들이 결코 만만치 않았는데, 그런 과정에서 서로 돕고 도우며 '진한 우정'이 싹트게 되었다. 그 때 함께 산행을 한 친구들은 물론 '평생의 친구'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마침 내일 6쌍의 부부가 저녁모임을 갖는데, 대부분 이 때 함께 등반을 간 친구들이다(한 쌍의 부부는 이 때 등산을 함께 간 남학생과 여학생이다).

그 당시엔 1인당 회비를 15,000원씩 거뒀던 걸로 기억하는데(한 학기 등록금이 대략 50만원쯤 했다), 꽁치 통조림은 너무 비싸 정어리 통조림을 훨씬 더 많이 준비해 갔던 기억이 특히 생생하다. 매 끼니때 마다 '정어리 통조림 찌개'는 빠지지 않았고, 배낭을 꾸릴 때마다 그 속에 그득했던 정어리 통조림이 과연 '몇 개나 줄었는지' 세어보곤 했던 기억이 새롭다.

이번에 지리산 종주 산행을 다녀와서 '30년 전 추억'도 떠올려 볼겸 책장 한 켠에 수북히 쌓인 '앨범'을 뒤져보니 내가 산을 좋아하긴 좋아했나 보다 싶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처음으로 얻은 여름휴가때도 배낭에 텐트를 짊어지고 곧장 설악산으로 달려 갔으니 말이다.


<앨범 속 사진 2> 1988년 8월, 직장생활 1년차 여름휴가때 설악산을 찾은 모습

(이 때부터는 월급도 타고 등산화도 사 신었지만, 여전히 청바지를 입고 산행을 했던 모양이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부터 회사 산악회의 총무와 간사 등을 (아마도 10년쯤) 떠맡아 주말마다 이 산 저 산을 참으로 많이도 쏘다녔던 것 같다. 앨범 속을 뒤져보니 온통 '****** 산악회'를 내걸고 찍은 단체사진만 수두룩하다. 그래도 지금 되돌아 보니, 그 때가 참으로 행복했고 참으로 젊었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앨범 속 사진 3> 1990년 10월, 직장생활 3년차 가을에 용문산을 오르다가 찍은 사진

(총각사원 시절에 함께 간 직장 선배님이 찍어준 사진인데, 그 분의 취미가 사진촬영인줄 나중에 알았다)


지리산을 처음 갔을 때 내 나름대로 마음 속에 '다짐'해 둔 게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적어도 5년에 한 번씩은' 꼭 지리산을 오르자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노부부가 지리산 정상을 함께 오르는 모습을 보고 나서 마음먹은 것인데) 60세가 넘어서도 저렇게 지리산을 함께 종주할 수 있는 사람을 '평생의 반려자'로 삼자는 것이었다. 사실 아내와 함께 지리산을 찾은 건 여러 번이었지만 '종주산행'은 여태껏 함께 해보지 못했다. 다만 두 아이가 대학입시를 마치는 대로 함께 '종주산행'을 다녀오자는 구두약속만 해놓은 상태다.

어쨌든 처음 지리산에 갔을 때의 다짐 가운데 어느 하나도 제대로 실행된 건 없지만, 딱 10년 만에 두 번째 종주산행을 다녀올 수 있었고(똑같은 노총각 신세의 고교 동창 세 명이 함께 갔다), 그 뒤로도 야간산행과 종주산행을 몇 번 더 다녀왔던 것 같다.


<앨범 속 사진 4> 1991년 10월, 10년 만에 두 번째 지리산 종주산행을 하면서......

(이 때는 4박5일 동안 야영을 하면서 [화엄사 → 천왕봉 → 칠선계곡]으로 종주산행을 했다)


지리산은 언제 찾아가도 늘 어머님 품 속 처럼 따스하고 포근한 느낌을 받곤 한다. 다른 산에서는 좀처럼 느끼지 못하는 독특한 감정이다. 그리고 지리산의 품은 다른 어떤 산들도 감히 비교조차 하기 어려울만큼 드넓고 넉넉하다. 지리적으로도 남한의 8도 가운데 3도를 차지할 만큼 넓다. 산이 높고 깊은 만큼 그 품에서 흘러 나오는 섬진강의 맑은 물은 또 얼마나 오랜 세월에 걸쳐 얼마나 많은 생명들에게 젖줄이 되어 왔던가 싶은 생각도 든다.

비록 내가 태어난 고향은 태백산맥 자락에 가깝지만, 어른이 되어 지리산을 찾고 부터는 이 곳에 매료되어 마음 속으로 늘 동경하는 곳이 되었다. 이른 봄 남녘의 지리산 자락에서부터 피고지는 구례의 산수유와 광양의 매화향기와 여름 내내 비구름과 운무를 가득 머금은 지리산의 여러 능선들과 계곡들, 가을과 겨울이면 온통 울긋불긋한 단풍과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지리산의 모든 계절이 나에게는 너무나 매혹적이다.

이번 산행은 독특하게도 '동네 성당 산악회'에서 지리산을 종주한다는 선배님의 말씀을 듣고, 그 선배를 따라 (종교의 장벽을 무시하고)  '지리산이 좋아서' 무작정 따라 나섰다. 그 덕분에 오히려 일행들과 함께 휩쓸리지 않고, 산행 내내 조용히 마음속으로 내가 살아온 나날들과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해 많은 생각들을 가져볼 수 있는 기회도 되었다.

올해는 유독 늦여름까지 비가 많이 왔던 만큼, 이번 산행에서는 우리 일행 역시 이틀을 꼬박 빗속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지리산의 최대 장관인 '천왕봉 일출'도 볼 수 없었으며, 지리산의 숱한 비경과 절경들을 카메라에 담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 다음에 또 지리산을 찾게 되면 어둠을 헤치고 말갛게 솟아 오를 붉은 태양과, 태고의 세월을 느껴볼 수 있을 것 같은 멋진 지리산의 모습들을 카메라에 담아 보고 싶다.

이번 산행에서는 비록 많은 비를 맞으며 힘든 산행을 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무릎이 풀어지는 공포'를 거의 느끼지 못할 만큼 체력적인 여유를 느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30년 전에 처음 지리산을 찾았을 때 마음 속에 다짐했던 두 가지를 이루기 위해서라도 부지런히 산을 찾아 다니고 싶고, 또 내일 만날 '오랜 친구들'과도 '다시 한번' 의기투합하여 지리산 능선을 함께 걸으며, 별이 빛나는 밤마다 까마득한 옛 얘기를 오래도록 함께 나눌 수 있는 날들을 기다려 본다.



1. 백무동에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비가 내리기 시작~
(Shooting Date/Time 2011-08-19 오후 12:28:14)





2. 비빔밥과 청국장이 맛있었던 '옛고을' 식당




3. 지리산의 위용이 느껴지는 모습~





4. 장터목 산장을 불과 몇백미터 앞두고 마주친 장관...... (Shooting Date/Time 2011-08-19 오후 5:41:09) 




5. 빗물을 잔뜩 머금은 '모시대'(장터목 산장 도착 몇십미터 전)




6. 장터목 산장의 저녁 풍경 (Shooting Date/Time 2011-08-19 오후 6:10:22) 



7. 비바람 몰아치는 지리산 정상(1,915M) (Shooting Date/Time 2011-08-20 오전 6:58:04)




8. 잠시 '빗줄기가 약한 틈'을 이용해서 찍은 '곰취' (Shooting Date/Time 2011-08-20 오후 1:46:39) 



9. 지리산 산행길 내내 반겨준 '원추리'



10. 소박하고 수줍게 핀 '둥근이질풀'



11. 벽소령을 지나 연하천으로 가는 길목에서~ (Shooting Date/Time 2011-08-20 오후 4:34:15) 



12. 비구름만 가득하다가 아주 잠깐 보여준 운무 (벽소령과 연하천 사이)



13. 산행 3일째, 마침내 연하천 산장에서 맞은 눈부신 일출 (Shooting Date/Time 2011-08-21 오전 5:52:48) 



14. 연하천 산장에서 맞은 지리산의 아침 풍경 (Shooting Date/Time 2011-08-21 오전 5:57:33) 




15. 어느새 하늘은 가을이 느껴질 만큼 푸르고......



16. 아침에 보는 지리산 운해 (Shooting Date/Time 2011-08-21 오전 7:37:10) 



17. 토끼봉을 지나며......



18. 아침 햇살에 빛나는 '둥근이질풀' 



19. 화개재에서 쉬고 있는 등산객들 (Shooting Date/Time 2011-08-21 오전 9:24:57) 



20. 아침 이슬을 머금은 '원추리' (Shooting Date/Time 2011-08-21 오전 9:30:27) 



21. 오고, 가고 또 머무르고.....


22. 운무에 휩싸인 반야봉과 삼도봉



23. 등산로는 아니지만 '가 보면' 좋은 곳



24. 저 멀리 섬진강이 아스라히 보이는 곳



25. 아름다운 동행~ 



26. 종주산행의 종착지, 노고단 풍경 (Shooting Date/Time 2011-08-21 오후 1:03:13)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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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태백산의 겨울
    from Value Investing 2013-01-19 11:27 
    지난 주말, 오랜만에 들뜬 마음으로 '눈꽃열차'를 타고 태백산으로 향했었다. 겨울산으로 달려가는 야간열차 안에서 친구들과 막걸리며 맥주를 나눠 마시는 기분은 정말 요즘 어린애들 말로 킹왕짱이었다. 함께 여행을 나선 친구들과는 대학 1학년때 같은 과 동기생들로 처음 만났으니 벌써 30년 이상을 동고동락해 온 사이가 되었다. 이 친구들과 결정적으로 뭉치게 된 건 아무래도 대학 1학년 여름방학때 난생 처음으로 함께 나섰던 '지리산 종주 산행' 덕분이 아니었을
 
 
마녀고양이 2011-08-26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아요,,, 이제까지는 꿈도 안 꿨지만
이 페이퍼를 보면서 언젠가 너무 길지 않은(2박3일) 정도의 지리산 종주 여행을 저도
가족과 함께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진 보니 가슴이 뛰는걸요, 올 가을에 지난번 말씀하신 북한산에라도 꼭 가겠습니다.

oren 2011-08-27 11:04   좋아요 0 | URL
50대 혹은 60대에 지리산을 처음 찾는 분들도 있더군요. 원대한 계획이 꼭 이뤄지길 바라고, '올 가을엔' 아주 가까운 북한산에 꼭~ 올라가 보시길 바랄께요^^

비로그인 2011-08-26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 oren님 오랜만에 들려봅니다.

사진 참 좋습니다. 저도 조만간,, 카메라를 ^^ 가을의 문턱에서 잘 감상하고 가겠습니다~

oren 2011-08-27 11:06   좋아요 0 | URL
어느 결에 가을 바람이 살랑거리는 계절입니다. 바람결님의 댓글이 무척이나 반갑네요.
바람결님이 카메라를 손에 잡으시면 너무 멋진 작품들이 마구 쏟아져 나올 것 같아요. 기대만발입니다.

blanca 2011-08-26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리산. 대학교 때 과 동기가 지리산에 왔다고 전화했던 기억이 나요. 나도 언젠가는 가겠다고 결심했던 기억이. oren님 사진들 보니 저도 신입사원 연수 때 설악산을 등반했던 기억이 나서 뭉클해지네요. 정말 설산이었는데. 서로 밀고 끌어주면서 함께 했던 추억들이 참 아련하네요.

지리산에 꼭 가보고 싶어요. 사진들도 참 좋네요. 특히 일출이요.

oren 2011-08-27 11:12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만큼 아름다운 산들이 가까운 주변에 널려 있는 경우도 흔치 않은 것 같아요. 그런 산들마다 뚜렷하게 사계절이 따로 있으니 더욱 아름다운 것 같구요.

blanca님처럼 지리산에 처음 가보시는 분들은 가볍게 '노고단'에 올라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성삼재'에서 출발하면, 왕복으로 1~2시간 정도면 충분히 올라갔다 내려올 수 있답니다.

상종 2011-08-30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님의 지리산 종주 산행기를 읽으니 마음쏙 깊은 곳에서 욕정(?)이 솟구쳐나오네요
빨리 배냥꾸려 산으로 달려가라고
우중 산행이 힘들지만 그 만큼 기억에 오래 남을 겁니다.
감사히 잘 보았습니다.

순오기 2011-08-31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 지리산 종주 멋진 산행이네요.
추억 속 사진과 지리산 풍경도 멋집니다!!
아름다운 동행은 옆지기님일까요?^^
지리산은 버스로 한바퀴 돌다가 잠시 내렸던 노고단 풍경만 알아요.ㅜㅜ

oren 2011-08-31 11:35   좋아요 0 | URL
지리산은 버스나 승용차로 돌아 다녀도 가 볼 데가 참 많은 곳인 것 같아요.

'아름다운 동행'에 뒷모습만 찍힌 분들은 저도 이번에 처음 만난 분들입니다. 선배님이 활동중인 '동네 성당 산악회'의 종주 산행에 저 혼자 따라 나섰는데, 사진 속 '부부'와 같은 조(組)에 편성되어 있어서 늘 산행을 함께 했는데, 참 보기가 좋더라구요.

비로그인 2011-09-01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네의 넓은 가슴과 여유로움이 무척 부럽네. 아직은 올려진 글들이 눈에 설지만, 시간날때마다 찬찬히 읽어볼 생각이네. 인생의 뒤안길을 얘기하기에는 아직 이른 나이지만, 앞만 보고 달려온 협곡을 벗어나 가지않은 길에 대한 반추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지 않겠나. 슈바빙은 전혜린의 에세이에 나오는 뮌헨의 예술인의 거리라네. 가본적은 없지만 지은지 300년이나 되는 건물안에 들어서면 그 공간을 거쳐간 예술가들의 숨결을 좀 느껴보게 되지 않겠나. 좋은 글 고맙네.

oren 2011-09-02 11:15   좋아요 0 | URL
뮌헨에 그런 멋진 곳이 있는 줄, 슈바빙이 그런 곳인 줄 처음 안 것 같네. 전혜린의 책은 10대 때 뭔가 뜨겁고 숨을 할딱거리는 것 같은 느낌으로 읽은 것 같은데, 지금은 그저 무덤덤하게만 느껴지는 것 같네. '나이'로부터 비롯되는 느낌의 차이가 이토록 클 수 있다는 게 놀랍지만, 어쨌든 슈바빙에서 아침을 맞게 될 때 '전혜린'의 책을 다시금 펼쳐 보고 싶은 생각도 드네. 댓글 고마워~
* * *
격정적으로 사는 것 - 지치도록 일하고 노력하고 열기있게 생활하고 많이 사랑하고, 아무튼 뜨겁게 사는 것, 그 외에는 방법이 없다. 산다는 일은 이렇게도 끔찍한 일,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만큼 더 나는 생을 사랑한다. 집착한다.
- 전혜린
댓글저장
 

(사진을 클릭하면 조금 더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일시 : 2011-08-24 오후 7:36:14, 오후 7:38:00
 - 장소 : 일산 호수공원


Shooting Date/Time 2011-08-24 오후 7:36:14



Shooting Date/Time 2011-08-24 오후 7: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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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1-08-25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한순간입니다*^^*

oren 2011-08-25 14:45   좋아요 0 | URL
네.. 잠시 동안이었지만 딴 세상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답니다.

stella.K 2011-08-25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년 전 일산호수 공원 갔었는데 정말 좋더군요.
사진 멋지내요.^^

oren 2011-08-25 14:52   좋아요 0 | URL
식구들과 풍동 애니골에서 저녁을 먹다가.... 저녁 노을이 예쁠 것 같아서 서둘러 호수공원으로 달려 갔는데, 정작 아름다운 일몰은 다 놓치고 뒤늦게 어두컴컴한 모습만 겨우 찍었답니다.

마녀고양이 2011-08-26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자주 보던 호수 공원이 맞습니까! ^^
진짜 멋지게 잡으셨네요.

oren 2011-08-26 16:07   좋아요 0 | URL
너무 어두컴컴하지 않나요?
다음엔 좀 더 일찍 나가서 '불덩어리'도 담고,
좀 더 '환상적인' 풍경을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해 볼께요 ^^
댓글저장
 
I have butterflies in my stomach


어느 경제학자의 표현처럼 '아무 말썽도 안 일으키는' 할아버지 단계에 대한 '미리부터의 막연한 걱정' 때문에 괜히 스스로 기분이 우울해지는 때가 유독 올해 봄을 지나면서부터 점차 잦아지는 느낌이 들곤 했습니다.

괜히 책을 읽는 속도도 조금은 더 느려지는 것 같고, 왕성한 의욕을 가지고 각종 취미생활에 쏟아붓는 시간들도 예전만 못한 것 같고, 곰곰히 생각해 보니 드높았던 나름의 목표와 꿈과 그것들을 향한 노력과 열정까지도 어느새 나도 모르게 조금씩 느슨해지고 희미해지고 옅어지는 느낌을 의식하는 시간들도 자꾸만 그 틈을 더욱 넓혀오면서, 나를 조금씩 어디론가 밀어내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하루종일 비가 쏟아지던 그저께 토요일엔 다행히 온종일 동네 도서관에 가서 열심히 책을 읽을 수 있었지만, 어제 일요일엔 도서관에 가서 겨우 오전에만 세 시간쯤 책을 읽고, 점심을 먹기 위해 누군가와 만났다가 그만 오후 내내 엉뚱하게도 커피를 마시며 '삶과 꿈'에 대한 두서없는 얘기들과 '잃어버린 시간들'에 대해서 숱하게 많은 얘기들만 나눴습니다. 히말라야 원정대에 참가했던 등산학교 선생님에 대한 얘기와 히말라야 트레킹을 다녀온 몇몇 친구들의 얘기까지 나누다 보니 어느새 저녁때가 되어, 다시 동네 도서관으로 되돌아 가서 펼쳐 놓은 책을 도로 챙겨 나온 뒤 그 사람과 함께 저녁까지 함께 먹고 나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마침 광복절인 오늘은 도서관이 휴관인 관계로 이번 주말에 예정된 '지리산 종주 산행' 준비를 위해 이것 저것 챙기느라 부산을 떨었습니다. 이번 산행은 안타깝게도 '산장에서의 숙박 예약'에 차질이 생기는 바람에 비박(bivouac)을 이틀이나 해야 할만큼 부담스러운 산행입니다. 그래서 십수년 전 암벽등반을 배우기 위해 '코오롱 등산학교'에 다닐 때 짊어지고 다니던 75리터 짜리 커다란 배낭과 침낭과 매트리스를 실로 오랜만에 다시 꺼내 봤습니다. 침낭은 다행히도 상태가 너무 좋아 비박에 대한 괜한 기대감까지 불러 일으킬 정도였으나, 안타깝게도 배낭은 먼지도 많이 뒤집어쓰고 있었던 데다가 색깔도 바래고 낡아 보여서 적지 않은 '세월의 간극'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앞으로 자주 있을 것 같지 않은 비박 산행을 위해 대용량의 새 배낭을 사는 건 무리다 싶어 낡은 배낭을 부여잡고 먼지도 털어내고 분해할 수 있는 한도껏 분해해서 세탁기로 가져가 봤지만, 매미가 땅 속에서 살고 나온다는 시간만큼이나 기나긴 17년 가까운 세월을 이겨내고 그 배낭이 올 여름 지리산 산행을 위해 제대로 기능을 담당해 줄지 너무 걱정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결국 '덕이동에 가서 배낭뿐만 아니라 이것저것 둘러보자'는 아내의 권유대로 함께 집을 나섰습니다. 온갖 브랜드의 등산용품점들을 두루 섭렵하다시피 한 끝에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60리터 용량의 멋진 새 베낭도 구입하고, 생각에도 없던 아주 가벼운 고기능의 방수복까지 덤으로 사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등산용 배낭은 몇년 전에 백두산에 갈 때도 새로 구입했었고, 그해 가을에 지리산을 종주할 때도 역시나 그 당시 산행계획에 적당한 용량(45리터)으로 따로 구입했었고, 이번에 또다시 새로운 배낭을 구입한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산에도 자주 가지 않으면서 배낭에 대해서만 유독 지나치게 과잉투자를 하고 만 셈이지만, 어찌되었건 침낭과 매트리스, 버너와 후래쉬, 여러벌의 옷가지를 챙겨 넣고도 여유공간이 많았고, 쌀과 반찬을 비롯해서 집을 나설 때 챙겨갈 'DSLR 카메라'까지 넉넉하게 넣을 수 있는 여유를 지닌 배낭을 바라보니 마음이 무척이나 흡족하기만 합니다.

그렇지만, 내가 젊었을 때 '히말라야의 빙벽'이라도 오를 수 있을 것만 같았던 그 뜨거운 열정이 함께 했던 '낡은 배낭'은 어느새 오늘 저녁을 마지막으로 명백한 쓰레기로 뒤바뀐 신세가 되어 집 밖으로 간단하게 내동댕이쳐진 것도 사실이며, 며칠 후면 오르게 될 엄마 품속 같은 그 넉넉한 지리산도 어느새 '앞으로 또 얼마만큼 더 갈 수 있을지 여부'를 따져보는 '여럿 가운데 하나'의 대상과 범주 속에 슬그머니 새로 편입된 사실이 괜히 서글퍼지는 하루였습니다.

'그렇고 그런' 하루를 이제 막 마감하려 할 즈음에 정말 운이 좋게도 blanca님의 '정신이 번쩍 드는 글'을 읽어 보니, 불현듯 제가 오래 전에 어디다 써 두었던 '인생이라는 모험에 찬 여행'이라는 글도 다시금 생각나고. 17년 전쯤 번지점프가 몹시도 하고 싶어서 일부러 그 짜릿한 모험을 할 데가 '여러 곳' 있다는 호주로 신혼여행을 가서  점프대에 올라 '번지~~~~~~~~' 하면서 멋지게 뛰어 내렸던 그 스릴 가득한 모험을 '아무 말썽도 안 일으키는'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다시금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용기마저 생기는 것 같아 주절주절 이 글을 쓰게 됩니다.

아무튼, blanca님의 글 속에 등장하는  '번지점프하는 할머니'가 불러 일으키는 스릴 넘치는 상상 덕분에 저 또한 잠시나마 '가슴이 쿵쾅거리는' 멋진 모험들을 다시금 떠올려 볼 수 있어서, 모처럼 하늘을 박차오르는 새처럼 기분이 상쾌해지고 좋아졌습니다.

 * * *

40세가 지나면......

40세가 지나면 활기가 조금 떨어지기는 하지만, 육체와 정신의 힘은 여전히 활동적인 삶을 이끌기에 충분하다. 탐욕, 분노, 고집, 야망 같은 젊은이의 충동은 중년이 되어서 모두 사라지지는 않으나, 더 잘 통제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중년의 삶은 점진적이거나 급격한 정체의 과정이 된다.

'아무 말썽도 안 일으키는' 할아버지 단계

····· 그러자 세 번째 친구가 "그는 아무 말썽도 안 일으키잖아"라고 덧붙였다. 영국은 할아버지 단계에 들어섰을런지도 모른다. 영국은 제국을 상실하고,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를 잃고, 유럽과의 관계에 대해서 불확실해하며, 유럽의 지도국은 분명 아니면서도 영광스러운 과거 때문에 단지 '여럿 가운데 하나'인 상태에 대해서는 어색해하고 있다. ····· 결론적으로, 영국이 세계경제의 선두에 이르렀다가 다음 단계에 쇠퇴한 것은, 대체로 강렬한 생명력이 점차 경직성과 변화에 대한 저항에 잠식당한다는 내재적인 경향을 쫓는, 국가 생명주기 개념에 잘 부합한다.

 - 찰스 P. 킨들버거, 경제 강대국 흥망사 1500-1990 中에서


 * * *


'인생이라는 모험에 찬 여행'


■ 윌리엄스 대학 기념비에서

  "높이 오르라. 멀리 오르라. 여러분의 목적지는 하늘이다. 여러분의 목표는 별이다."


■ 샤를 드 골

  "이 세상의 그 어떤 위대한 것도 위대한 사람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고,
   사람은 스스로 위대해지기로 작정했을 때만 위대해진다."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시작과 창조의 모든 행동에 한 가지 기본적인 진리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하겠다는 결단을 내린 순간
   그때부터 하늘도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당신이 하는 것, 꿈꾸는 것은 모두 이룰 수 있으니, 시작하라.
   대담함에는 천재성과 힘과 마력이 들어있다."


■ 나폴레온 힐

  "무슨 일에든 처음으로 장벽을 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당신이 그 사람이 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 벤저민 디즈레일리

  "어떤 것도 분명한 목표를 위해 존재하려는 인간의 의지에는 저항할 수 없다."


■ 하나님이 아담에게 하신 말씀

  "나는 너희를 천국으로도 땅으로도 만들지 않았고, 죽게 하도록 만들지도
   영생하도록 만들지도 않았다. 그러니 선택의 자유와 영예를 가지고,
   자신이 바라는 대로 자신을 만들어가라.
   너희는 영혼이 주는 힘을 가지고 더 높은 형태로 다시 태어나 신성한 존재가 되라."


■ 윌리엄 제임스

  "우리 세계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자신의 마음가짐을 바꾸는 것으로 해서
   자신의 인생을 바꿀 수가 있다는 것이다."


■ 서머셋 모옴

  "인생에서 재미있는 사실은, 다른 건 다 마다하고 최고만을 받아들이려고 하면
   그걸 얻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 H.W. 롱펠로우

  "위대한 이들이 도달하고 지키는 정상은 갑자기 날아오른 것이 아니며,
   그들이, 동료들이 잠든 한밤에도 땀흘려 올라간 곳이다."


■ W. 클레먼트 스턴

  "자신에게 긍정적인 암시를 하는 것은 기만도, 진부한 감상도 아니다.
   당신 자신이 하지 않는다면 누가 해주겠는가?"


■ 아서 C. 클라크

  "가능성의 한계를 발견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한계선을 뛰어넘어 불가능으로 넘어가는 것뿐이다."


■ 올리버 웬델 홈스

  "인간의 마음이란 한 번 새로운 생각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하면
   절대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 J. 워렌 매클루어

  "위대성을 갈망하라. 우리는 인생이라는 모험에 찬 여행을 단 한 번 하지만,
   올바로 산다면 그 한 번으로 족하다."


■ 헬렌 켈러

  "인생은 대담무쌍한 모험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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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언젠가는 기차를 타게 되겠지만......
    from Value Investing 2013-01-11 15:14 
    인생의 대상隊商이 지나가는 모습을 보라,매 순간 환희를 맛보라!오, 사키여, 내일의 양식을 걱정하지 마라,잔을 돌려 포도주를 붓고, 내 말을 들어라, 밤이 가고 있다.- 오마르 하이얌 * * *"더 늦기 전에 아이들과 함께 여행이라도 한번 다녀옵시다."내가 늘 '여행에 미온적일 때마다' 아내한테 어김없이 듣는 말이다. 더 늦을 게 별로 없었을 것 같았던 2001년 가을에도 그랬다. '아이들이 둘 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되면' 장기간 여행하기 힘들테니 대
 
 
blanca 2011-08-16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감동적이고 고마운 페이퍼네요. 비박 지리산 종주라니! oren님은 게다가 정식으로 등반을 배우셨군요. 종주하셨을 때 그 기분은 신입사원때 설악산 한번 올라갔을 때 느낀 게 전부이네요. 저에게 지리산은 마지막까지 남겨 놓는 하지만 언제나 꼭 한번 가야한다고 생각되는 곳입니다. 인용구들 중에 제가 원래 좋아했던 얘기도 있고 oren님 덕택에 가슴에 새겨 넣게 된 경구도 있고 그렇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떠날 준비는 다 되셨나요? 아무쪼록 즐겁고 안전한 산행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oren 2011-08-16 10:32   좋아요 0 | URL
'지리산'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산이랍니다. 거의 30년 전쯤 대학친구들과 5박6일쯤 되는 '거창한 종주산행'을 통해 처음 접한 이후, 언제나 늘 틈만 나면 달려가고 싶은 산이 되었지요.

텐트를 짊어지고 다녔을 때가 제일 그립고, 산장에서 숙박하는 산행이 제일 싫었는데, 인터넷 예약에 실패하는 바람에 생전 처음으로 '비박 산행'을 하게 되었으니 이것 또한 색다른 경험이라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ㅎㅎ

그러고 보니, 이제 떠날 준비는 거의 다 된 듯싶네요.
blanca님도 어서 빨리 '지리산의 품 속'에 안겨 보시길~~

마녀고양이 2011-08-17 0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지리산 종주 떠나시나요? 거기다 히말라야도 다녀오셨구요? ㅠㅠ
그리고 도서실에서 내내 책 읽으셨어요? 해박하심에 모험심에... 못 하시는게 무엇일까요?
저 기 죽었어요... 사실 농담이구요, 너무 좋네요, 너무 멋지세요.

저두 이번 주왕산을 계기로, 짧고 쉬운 코스겠지만 등산을 조금씩 해보려구요.
참 좋더라구요... 건강하게 다녀오셔요.

oren 2011-08-18 13:53   좋아요 0 | URL
종주산행이라고 해봐야 2박3일간의 짧은 일정인걸요. '야영'이 가능하던 시절에는 지리산을 종주하기 위해서 보통 4박5일, 길면 5박6일쯤 걸렸거든요. 야영이 금지된 이후 산장(대피소)에서 잠을 자게 되면서, 무거운 텐트와 장기간의 식량을 넣어 다니던 대용량의 배낭도 이젠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지만, 야영의 독특한 즐거움과 낭만들이 많이 사라진 것 같아 아쉽기도 하답니다.

히말라야는 저도 여태껏 가보지 못했구요. '거기'를 다녀온 친구들이나 선후배들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달려가고픈 욕망에 비틀거린답니다. ㅎㅎ

마고님은 일산에 사시니 북한산을 자주 가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북한산 만큼 좋은 산도 별로 없고, 실제로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북한산'을 무지 가보고 싶어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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