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의 반역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황보영조 옮김 / 역사비평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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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은 영광스런 것이든 소박한 것이든, 찬란한 운명이든 평범한 운명이든, 본질적으로 뭔가에 자신을 바쳐야 한다. 이것은 이상하긴 하지만 우리의 실존에 새겨진 피할 수 없는 조건이다. 삶이란 한편으로는 각 개인이 자신을 위해 그리고 자신 때문에 행하는 그 무엇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삶이 오직 내게만 중요하다고 해서 다른 것에 투신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긴장도 없고 '형태'도 없이 헐거워진다.
-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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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06-09-21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렌님이 수고스럽게 남겨주신 좋은 구절을 보니 이 책을 한번 꼭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 ^^

oren 2006-09-27 0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마천님께서 덧글을 남겨주셨군요. 제가 지난 며칠 동안 서울을 떠나 있었더랬습니다. 오랜만에 지리산을 종주하고 왔거든요. 연하천(煙霞泉)과 벽소령(碧宵嶺)에서 마주친 때이른 단풍들이 정말 고와서 좋았더랬습니다. 구름조차 찾기 어려울만큼 청명한 가을 새벽에 찬란히 떠오르는 천왕봉 일출은 이번 산행의 백미였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하여 지리산(地理山)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산 속에 오래도록 머물지 못하고 어느새 복잡한 도심 속으로 이끌려 내려온 걸 보니 사람이 달라지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닌가 봅니다.
 
대중의 반역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황보영조 옮김 / 역사비평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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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지평선으로 가라앉는 것이 아니라고 코페르니쿠스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여전히 가라앉는 것을 본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일차적인 확신을 의미하므로 그는 계속해서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문제는 과학적 사고가 일차적인 혹은 자생적인 사고의 결과를 언제나 억제한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가톨릭 교인도 교리적인 사고를 통해 자신의 진정한 자유로운 사고를 부정한다. 가톨릭 교인에 관한 얘기는 앞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개념을 명맥히 하기 위해 예로 제시한 것일 뿐이지, 그에게 우리 시대의 대중, 곧 '자만에 빠진 철부지'에게 퍼부은 과격한 비난을 가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물론 단 한 가지 점에서는 일치한다. '자만에 빠진 철부지'가 진정성이 없다고 비난했듯이, 가톨릭 교인도 어떤 점에서는 진정성이 없다. 그러나 이는 외관상의 부분적인 일치에 불과하다. 가톨릭 교인은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근대인으로서의 자기 존재에 대해서는 진정성이 없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실제적인 부분, 곧 종교적 신앙에 충실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이는 가톨릭 교인의 운명이 비극적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는 그런 진정성의 결여를 통해 자신의 의무를 완수한다. 그에 반해서 '자만에 빠진 철부지'는 경박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이탈하고 모든 것에 반역한다. 다시 말해서 모든 비극을 회피한다.-1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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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반역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황보영조 옮김 / 역사비평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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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본질 그 자체와 접촉하지 않는 것이 위험요소이자 문제의 근본이다. 인간의 삶 중에서 등장할 수 있는 가장 모순적인 삶의 형태가 '자만에 빠진 철부지'이다.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기 위해 태어난 인간이다. 실제로 '부모 슬하의 자녀'는 이런 환상을 갖는다. 우리는 그 까닭을 잘 알고 있다. 가족 내에서는 어떤 큰 잘못을 범해도 전혀 벌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가족 세계는 상대적으로 인위적이기에, 사회나 외부 세계에서는 자동적으로 파국적이고 피치 못할 결과를 초래할 행위들이 묵인된다. 그러나 '철부지'는 집밖에서도 집안에서처럼 행동할 수 있다고 보며, 돌이킬 수 없고 취소할 수 없는 치명적인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은 뭐든 해도 좋다고 여긴다. 이 얼마나 엄청난 오류인가!

* 가정과 사회의 관계는, 크게 보면 국가와 국제사회의 관계와 같다. '철부지주의'가 보여주는 가장 명백하고 대규모적인 현상 가운데 하나는 일부 국가들이 국제사회 속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기로'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순진하게도 '민족주의'라고 불리고 있다. 나는 국제주의에 대한 맹종에도 반대하긴 하지만, 아직 덜 성숙한 국가들의 일시적인 '철부지주의' 또한 어리석은 짓이라고 본다.-1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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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만에 빠진 철부지
    from Value Investing 2013-12-18 10:25 
    어제 모처럼 아이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그 중 셋이서 함께) 소주 3병을 마셨다. 그런데 아이들이 재미삼아 들려준 얘기들은 소위 '금수저나 은수저를 물고 나온 또래들'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들이었다. 나는 그런 '철부지들'을 너무 부러워하지 말라고 아이들을 조금 다독여(?) 주었다. 문득 오래 전에 읽었던 책 속 구절들이 떠오른다. '철부지들'을 부러워해야 할 이유는 없지만 두려워해야 할 이유조차 없다고 생각하면 그것 또한 얼마나 큰 오류인가 싶다.
 
 
 
대중의 반역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황보영조 옮김 / 역사비평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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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풍요로운 세계에서 태어난 인생이, 결핍과 투쟁의 와중에 있는 인생보다 더 낫고 더 우수하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런 판단에는 매우 엄밀하고 근본적인 이유들이 있긴 하지만 지금 그것을 거론할 때는 아니다. 여기서는 그 이유들을 열거하는 대신, 모든 세습귀족의 비극에 등장하는 언제나 되풀이되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귀족이 뭔가를 상속한다는 것은 자신이 창조하지 않은, 따라서 자신의 개인적인 삶과 유기적으로 결합되지 않은 인생 조건들을 부여받는다는 것이다. 태어나면서 졸지에 영문도 모른 채 부와 특권을 소유한 것을 발견한다. 그것은 그에게서 유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본래 그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 부와 특권은 다른 사람, 다른 인간, 곧 그의 조상이 남긴 거대한 갑옷이다. 그래서 그는 상속자로 살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의 갑옷을 걸쳐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걸까? 세습 '귀족'은 자신의 삶을 사는 걸까, 아니면 선조 귀족의 삶을 사는 걸까?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그는 타인의 삶을 재현해야 하며, 따라서 타인도 자신도 아닌 운명을 짊어진 것이다. 그의 삶은 불가피하게 진정성을 상실하고 순전히 다른 삶을 재현하거나 꾸미는 것으로 변화한다. 그가 관리해야 할 과다한 재산은 자신의 개인적인 운명을 살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그의 삶을 위축시킨다. 모든 삶은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한 싸움이며 노력이다. 인생을 살아가며 부딪치는 어려움은 나의 활동과 능력을 일깨워 활용하게 해준다. 만일 대기가 내게 압력을 가하지 않는다면 내 몸은 이리저리 떠다니는 흐물흐물한 유령처럼 느껴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습 '귀족'의 인격은 삶의 노력과 활용 부족으로 점차 모호해진다. 그 결과 옛 귀족 가문 특유의 어리석음만이 남는다. 이는 아직까지 아무도 그 내부의 비극적 메커니즘 - 모든 세습귀족을 어쩔 수 없이 퇴보하게 만드는 - 을 그려낸 적이 없는 어리석음이다.
-1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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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황보영조 옮김 / 역사비평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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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뚱하고 시대착오적인 것은 1917년의 공산주의자가 이전에 일어난 것과 동일한 형태의 혁명, 과거의 결함과 오류가 조금도 개선되지 않은 혁명에 뛰어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러시아에서 일어난 것은 역사적으로 별다른 흥미가 없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인간 삶의 새로운 시작과는 반대다. 그것은 과거 혁명의 단조로운 반복이며 완전한 재탕이다.-127쪽

그 어떤 시도도 '시대의 높이'에 도달하지 못했으며, 자체 내에 과거 전체를 압축해 그려 넣는 작업을 하지 못했다. 이것이 과거를 뛰어넘는 필수조건이다. 과거와 몸을 맞대고 싸울 필요는 없다. 미래가 과거를 이기는 것은 그것을 삼켜버리기 때문이다. 과거의 일부를 외부에 남겨둔다면 미래는 패배한다.-128쪽

만일 단순한 부정으로 과거를 말살할 수 있다면 모든 문제는 매우 간단할 것이다. 그러나 과거란 본질적으로 유령과 같다. 아무리 내동댕이쳐도 어김없이 되돌아온다. 따라서 과거를 진정으로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그것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과거에 유의하고 과거를 고려해 처신함으로 그것을 멀리 피하는 것이다. 요컨대 역사적 상황에 대한 예민한 의식을 갖고 '시대의 높이에서' 살아가는 것이다.-1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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