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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러스트
프랜시스 후쿠야마 지음, 구승회 옮김 / 한국경제신문 / 1996년 10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후쿠야마가『역사의 종언과 최후의 인간』이라는 책을 통해 막스헤겔주의적 의미의 '역사의 종언'을 주장한 이후, 경제에 관한 책을 한 권 써야 마땅하다고 생각해서 그 속편 격으로 썼다고 하는 책이다.
이 책의 핵심적인 주장은 경제적 번영에는 문화적 배경이 중요하다는 것이며, 강한 공동체적 연대를 가진 고신뢰 사회와 공동체적 연대가 무너진 저신뢰 사회를 국가간의 비교를 통해 분석한 결과로서 한 국가의 복지와 경쟁력은 하나의 지배적인 문화적 특성, 즉 한 사회가 고유하게 지니고 있는 신뢰의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는 점이다.
즉, 공동체적 연대와 결속은 경제적 도약의 기초이고, 이것이 바로 제임스 콜먼이 말하는 '사회적 자본'이며 사회적 자본은 경제생활 뿐만 아니라 사회적 삶의 모든 국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한 사회의 연대와 결속은 규범과 가치를 공유하고 개인의 이익을 집단의 이익에 종속시키는 공동체의 능력에 달려있다고 한다. 여기서 신뢰가 탄생하며 신뢰는 중요한 경제적 가치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책이 특히 흥미를 끄는 이유는 다음의 두 가지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는 주된 분석의 틀로서 다루고 있는 국가간의 비교를 통해 일본, 독일 및 미국을 고신뢰사회로, 중국, 한국, 이탈리아 및 프랑스를 저신뢰사회로 분류한 점이다. 특히, 한국에 대해서 별도의 장을 통해 세세히 다루고 있어서 한국이 처한 여러가지 어려운 봉착점들에 비춰봐서도 이 책이 출간된지 상당한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많은 논란거리를 제공하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재미있는 분석과 주장들이 넘쳐난다.
두 번째로는 '학술 흥행사'라는 저자의 별명에 어울릴 정도로 '신뢰의 경제적 가치'를 따지기 위해 저자가 파헤치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의 범위가 실로 매우 넓다는 점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경제학자 혹은 사회학자들 가운데에서 중요한 인물들로는 존 로크, 토마스 홉즈, 칼 맑스, 막스 베버, 아담 스미스, 슘페터, 알렉시스 토크빌, 에밀 뒤르껭에서부터 현대에 이르러서는 사무엘 헌팅턴, 케네스 애로우, 제임스 콜먼 등에 이르기도 하며, 정치, 경제, 종교, 철학, 인종등을 아우르는 '문화'의 문제를 다루다 보니 불가피한 것이었는지는 몰라도, 각 국가와 문화별로 오랜 세월에 걸쳐 전승되어온 독특한 '가족 문화'에 대해서도 재미있는 비교분석을 끊임없이 내어놓는다. 심지어는 한국에서의 김씨와 이씨의 인구비율에 관한 분석이라든지, 같은 혈통의 가문에서 위계서열을 확실히 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아직도 버리지 않고 사용중인 공통의 글자(소위 항렬)에 대한 문제까지도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이 책은 저자 스스로도 밝혔듯이 경제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한 방법이라든지, 미국이 어떻게 하면 일본이나 독일을 모방할 수 있을지를 가르쳐 주는 '경쟁력' 분야의 지침서가 아니다. 이 책은 경제적 삶이 어떻게 현대의 삶 자체를 반영하고 형성하며 지탱해 주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경제적 성취와 관련해서 상이한 문화를 비교하고 대비하는 연구이다보니 수많은 독자들에게 저자와는 다른 여러 가지 일반화에 대한 반대의견과 모순된 증거들을 수없이 찾아낼 수 있는 즐거움도 제공해주는 측면도 많다. 여기서 이 책의 내용에 대해 무수히 있어왔던 반박과 비평들에 대해 몇 가지를 덧보태는 것보다는 저자의 주장을 통해 얻은 수확들 가운데 일부분만이라도 이 글에서 언급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번째는 한 국가의 복지와 경쟁력은 하나의 지배적인 문화적 특성, 즉 한 사회가 고유하게 지니고 있는 신뢰의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한 점이다.
두번째는 신고전파 경제학이 제시한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인간 행동의 기본 모델은 80% 정도 들어맞았고 나머지 20%의 인간 행동에 대한 해결은 기질, 습관, 도덕 등 물려받은 윤리적 습관의 결과인 '문화'에 달려있다고 주장한 점이다
세번째는 사회적 자본은 그것이 통상 종교나 전통, 역사적 관습 등 문화적 기제를 통해 창조되고 전수된다는 점에서 다른 형태의 인적 자본과는 차이가 있으며, 한 국가의 부존자원으로 해석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네번째는 '자발적 연대'라는 윤리적인 관습이 있는데, 이런 관습은 조직의 혁신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어서 부의 창출에 필수적인 요인이 된다고 주장한 점이다.
다섯번째는 소련과 동유럽에서 사회주의가 실천되는 과정에서 파생된 가장 참담한 결과는 아마도 '시민사회의 철저한 파괴'일 것이라고 주장한 점이다. 저자는 이로 인해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는 둘 다 자리를 잡을 수 없게 되었다고 보며, 레닌주의 국가는 경제의 '최상부'에서부터 무수한 농장, 소기업, 노동조합, 교회, 신문사, 시민단체 등을 거쳐 가족에 이르기까지 권력에 있어 모든 잠재적 경쟁자를 용의주도하게 궤멸시켜 나갔다고 주장한다.
여섯번째는 모든 경제적인 시도는 가족기업, 즉 소유와 경영권이 가족 구성원에게 주여져 있는 사업으로 시작되며, 가족이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자발적 결사체가 상대적으로 미약한 네 개의 사회(중국,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고 한국)를 저신뢰사회로 규정하고, 가족을 초월한 강력한 자율적 결사체로 구성된 일본, 독일과 미국을 고신뢰사회로 규정한 점이다.
일곱번째는 수천년 동안의 유교주의 전통이 질긴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는 유교 문화권에서의 가족주의적 문화가 공동체적 연대를 이룩하는데 결정적인 장애로 작용한다고 주장한 점이다. 이러한 모습은 가족을 벗어난 신뢰관계가 미약한 이탈리아의 경우에도 발견되는 현상으로서 저자는 이를 '이탈리아식 유교주의'라고 규정하고 있다. 물론 홍콩, 대만, 이탈리아 등의 국가는 소규모 기업들이 가족지향성의 이점을 최대한 살리므로서 거대한 규모를 요구하지 않고 신속한 의사결정구조를 요구하는 급속하게 변화하고 고도로 분절적인 소비자 시장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기업들이 많이 있음도 지적하고 있다.
여덟번째는 현대의 각종 법, 경제제도는 필수적이기는 하지만 번영과 사회복지를 탄탄하게 유지해 나가기에는 충분치 못한데 그 이유는 이와 같은 제도들이 성공적으로 실행되려면 특정한 전통사회 그리고 윤리규범과 결합되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점이다. 풍족하고 복잡한 시민사회는 산업화의 필연적인 귀결이 아니며, 이와는 반대로 일본, 독일, 미국같은 나라는 산업화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적 자본과 자발적 사회성이라는 건전한 사회적 유산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거의 모든 부문에서 주도적인 세계 산업 강대국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아홉번째는 고신뢰사회인 독일과 일본의 문화적 유사성이 대부분 고도로 발전된 공동체적 연대감에 따라 형성되었다고 주장하는 한편, 대체로 보아 일본인들의 신뢰의 범위는 외국인에 대해서는 고정적이고, 오직 일본인들에 대해서만 확대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반해서 독일은 2차대전 이후 근본적인 문화적 변동을 겪게 되면서 일본보다 훨씬 개방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사회로 변모하였으며 독일인들의 정체성을 유럽인에서 찾음으로써 세계시민으로 거듭나고자 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열번째로는 개인주의 사회의 전형인 것으로 간주되는 미국이 탈중심화된 자발적 사회성과 미국식 자유주의를 발전시키고 탄탄한 사회적 연대를 일구어내는 고신뢰사회가 된 데에는 유럽의 어떤 나라와도 다른 종교적 전통을 지닌데 힘입은 바가 크다고 주장하는 점이다. 그러나 미국 신교의 최후의 유산은 안정된 권위나 사회적 여론을 받아들일 수 없는 개인주의적인 정신적 기질이 될 것이라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현대세계에서 거의 모든 경제활동은 개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높은 수준의 사회적 협동을 필요로 하는 조직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재산권, 계약, 상법 등은 시장지향적인 현대 경제체제를 이룩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제도이지만, 이런 제도가 '사회적 자본'과 '신뢰'로 보완된다면 경제활동 비용을 상당히 절약할 수 있다. 한편 신뢰는 공유되는 도덕규범이나 가치를 지닌, 그 전부터 있어 온 공동체의 산물이다. ...... 이런 공동체는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의미에서의 합리적 선택의 산물이 아니다. 필자는 지난 번 책『역사의 종언과 최후의 인간』에서 일반적으로 경제적인 동기라고 받아들여지는 것이 실제로는 합리적인 욕망의 문제가 아니라 인정받으려는 욕망의 구체화임을 다소 장황하게 주장한 바 있다. ...... 경제생활이 가능한 한 최상의 물질적인 풍요를 얻는 것뿐만 아니라 승인과 인정을 얻기 위해서 추구되는 것이라면,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상호 의존성은 더욱 명백해진다. ...... 경제학자 알베르트 히르쉬만은 근대 부르주아의 등장을 귀족사회의 특징인 명예에 대한 '열정'을 신흥 부르주아지의 특징인 물질적인 '이해관계'로 대치시킨 '윤리적 혁명'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실상 이런 대체는 최초의 자유주의적 정치이론가 토마스 홉스의 마음속에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홉스가 보기에 시민사회란 종교적인 열정에서든 귀족적인 허영심에서든 간에 합리적인 부의 축적에 명예에 대한 욕망을 의식적으로 종속시킨 것이라고 생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