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get me stultitia mea(나의 우둔함은 나를 짜증나게 해)
고전을 읽어라. 그전에 패디먼을 먼저 만나보라.
내 말을 잘못 알아들으셨군요.

 

 

"모든 말은 결핍이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 담지 못한다. 모든 말은 과잉이다. 내가 전하지 않았으면 했던 것들도 전하게 된다."

 -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 * *

 

 

때로는 간단한 대사 한 구절이 우리의 생활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가령 "이 한심한 화상아!(Alas, poor caitiff)"는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의 4막 1장에서 나오는 말인데, 나는 이 대사로부터 위안을 얻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결혼 후 고부 갈등으로 중간에 끼어 힘들었을 때, 첫 직장에서 타의로 퇴직하게 되었을 떄, 친구에게 배신을 당하고 돈마저 떼었을 때, 나는 이 대사를 중얼거리곤 했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나 자신이 불쌍해지면서 그런 나 자신을 격려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평생 독서 계획』은 소포클레스 항목에서, 연극은 운명 앞의 절망과 가능성 앞의 희망이 충돌하는 긴장이며 그 긴장의 해소에서 커다란 즐거움이 온다고 말한다. 그런 연극적 상황 속에 나 자신을 설정하면 기이하게도 긴장이 이완되면서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이런 간단한 대사에서 삶의 활력을 얻은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가령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는 자기 자신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Piget me stultitia mea(나의 우둔함은 나를 짜증나게 해)." 그리고 한참 있다가 이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Egom mihi placui(그래도 나는 나 자신이 대견스러워)." 나는 대학에서 셰익스피어 드라마를 배울 때에는 "이 한심한 화상아!"라는 대사의 심오함을 전혀 알지 못했다. 사실 젊은 대학생에게 셰익스피어 드라마는 벅찬 독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왜 그것을 읽고 또 배울까? 어릴 때 그것을 배우지 않으면 나중에 나이 들어 그 가르침의 선견지명을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성숙을 촉진하는 교육의 본령이고, 『평생 독서 계획』의 원대한 취지이며, 텍스트와 주석의 관계인 것이다.

 

좋은 책은 좋은 사람과 비슷한 점이 많다. 사람을 처음 만나면 잘 알 수 없듯이 책도 한 번 읽어서는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여러 번 되풀이하여 읽는 과정에서 그 책을 잘 알게 되고 그리하여 아주 가까운 친구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가 없으면 더 이상 삶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 같은 느낌마저 갖게 된다. 이것을 보여 주는 좋은 에피소드가 있다. 독일의 소설가 프란츠 베르펠은 토마스 만의 『부덴부로크 가의 사람들』이라는 장편소설을 너무 좋아하여 평생 30번 가량 읽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마지막으로 그 소설을 읽은 것은 죽기 한 달 전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30번이라는 횟수가 아니라 죽기 한 달 전의 경황없는 상황에서도 토마스 만의 소설을 읽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베르펠에게 있어서 죽음은 곧 만의 소설을 읽지 못하는 것이었으리라.(475∼476쪽)

 

 - 『평생 독서 계획』, <역자 후기> 중에서

 

 

카시오(오셀로가 '연적'이라고 오해한 자신의 부관)가 말한 대사 "Alas, poor caitiff"에 대한 '해석'이 다양하다. 『평생 독서 계획』을 번역한 분(이종인)은 그 대사를 "이 한심한 화상아!"라고 해석했지만, 민음사판 전집 시리즈(최종철 번역)에서는 "아, 딱한 천것!"이라고 번역했다. 두 번역 사이의 뉘앙스의 차이가 매우 크다. 내가 가진 또다른 오래된 책(『학원 세계문학전집』(전30권), 김재남 번역, 1993년 1월)에서는 "흥, 그까짓 게!" 라고 번역해 놓았다. 도대체 저 대사의 속뜻은 무엇일까.

 

이걸 자세히 설명하자면 이야기가 길어지고 조금 복잡하다. 간략하게 줄여서 말하자면 이렇다.

 

온갖 수작을 다 부려서 오셀로를 '질투심으로 미치게 만드는 공작'을 꾸미던 이아고는 4막 1장에 이르러 마침내 비앙카(매춘부, 카시오의 연인)를 끌어들여 '오셀로의 질투심'을 활활 타오르게 만든다. 이 대목에서 이아고는 오셀로를 잠시 물러나게 하고 '카시오의 행동'을 관찰하도록 만든다. 이아고는 카시오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비앙카'를 화제에 끌어들여 오셀로가 오해하기 딱 좋은 '카시오의 행동'을 유발시키는데,  오셀로는 그런 카시오의 행동을 자신의 아내인 데스데모나에 대한 카시오의 반응으로 완전히 오해한다. 이아고는 바로 그 점을 노리고 둘(카시오와 오셀로) 사이에 끼어들어 '질투심'에 부채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아고가 카시오한테 말하기를, '비앙카의 능력'을 이용하여 데스데모나에게 '복직 문제'를 부탁하면 어떻겠냐고 하자, 카시오는 그에 대한 반응으로 "Alas, poor caitiff"라는 대사를 내뱉는다. 비앙카를 "딱한 천것" 혹은 "그까짓 게"로 여긴다는 투다. 그러면서도 카시오의 입가엔 웃음이 걸린다. 오셀로는 카시오의 그런 행동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질투심을 더욱 활활 태우는' 연료로 쓰는 데 여념이 없다.

 

극중 인물들이 주고 받는 대사의 내용이나 극의 흐름으로 판단해 볼 때 "Alas, poor caitiff"에 대한 해석으로는 까마득한 옛날에 나온 책에서 오늘 우연히 발견한 번역인 "흥, 그까짓 게!"라는 표현이 가장 이해하기 쉬워 보인다. 그런데 이런 해석을 받아들이면 『평생 독서 계획』의 번역자가 말한 내용이 조금 이상해진다. "흥, 그까짓 게!"라는 뜻의 대사를 "이 한심한 화상아!" 라고, 다시 말하자면 '자책하는 뜻을 강하게 내포하는' 대사로 잘못 받아들인 셈이 되고, 결국 번역하신 분이 오랫동안 그 대사 덕분에 여러 차례 위안을 얻게 되었다는 말도 우습게 변하기 때문이다. 기껏 글을 쓰고 나니 이런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굳이 이런 점까지 말할 의도는 조금도 없었는데 말이다.

 

"흥, 그까짓 게!"

 

그까짓 대사 한 줄이 사람을 아주 우습게 만든다.

 

 

오셀로

알겠나, 이아고?

난 아주 교묘하게 참겠지만 ㅡ 알겠지? ㅡ

아주 잔인할 테야.

 

 

이아고

빗나간 건 아니지만

다 때를 맞추세요. 물러나시겠어요? (오셀로 물러난다.)

난 이제 카시오에게 비앙카 얘기를 물어야지.

그 계집은 자신의 욕망을 팔아서

먹을 빵과 입을 옷을 사는데 고것이

카시오에게 혹했다. ㅡ 많은 사람 속이고

하나에게 속는 것이 그 갈보의 저주니까.

카시오는 그녀 얘길 들으면 넘치는 웃음을

참지 못할 것이다. 여기 그가 오는군.

 

카시오 등장.

 

그가 지을 미소에 오셀로는 미칠 테고

무식한 질투심을 품었으니 불쌍한 카시오의

미소와 몸짓과 경박한 행동을 완전히

오해할 수밖에 없다. 부관님, 기분이 어때요?

 

카시오

내 직위를 불러 주니 더욱 나빠지는군,

그게 없어 죽을 지경이니까.

 

이아고

데스데모나를 다그치면 확보하실 겁니다.

(낮은 목소리로)

그런데 이 청이 비앙카의 능력에 달렸다면

얼마나 빨리 성공하겠어요!

 

카시오

아, 딱한 천것!

 

오셀로

봐, 놈이 벌써 웃고 있어!

 

이아고

남자를 그토록 사랑하는 여자는 못 봤어요.

 

 카시오

아, 딱한 잡것, 정말 날 사랑하는 것 같아.

 

 오셀로

이젠 그걸 살짝 부인하면서 웃어 넘겨.

 

 이아고

들었어요, 카시오?

 

오셀로

이젠 그가 그 얘기를

해 달라고 조르네. 허 참, 잘했다, 잘했어.

 

 

이아고

당신이 자기와 결혼할 거라고 하는데

그럴 작정이세요?

 

카시오

하, 하, 하!

 

오셀로

환희한단 말이지, 로마인아, 환희해?

 

 카시오

내가 결혼해! 뭐, 고객이! 제발 내 판단력을 자비롭게

봐 주게, 너무 부실하다고 생각하진 말게나. 하, 하, 하!

 

오셀로

그래, 그래, 이긴 자가 웃는다.

 

이아고

사실, 소문에는 결혼하실 거랍니다.

 

카시오

제발, 올바로 말하게!

 

 

이아고

아니라면 제가 정말 나쁜 놈입니다.

 

『오셀로』, <4막 1장, 90∼125행>

 

 

 * * *

 

 

OTHELLO

 

Dost thou hear, Iago?
I will be found most cunning in my patience;
But--dost thou hear?--most bloody.

 

IAGO

That's not amiss;
But yet keep time in all. Will you withdraw?

OTHELLO retires

Now will I question Cassio of Bianca,
A housewife that by selling her desires
Buys herself bread and clothes: it is a creature
That dotes on Cassio; as 'tis the strumpet's plague
To beguile many and be beguiled by one:
He, when he hears of her, cannot refrain
From the excess of laughter. Here he comes:

Re-enter CASSIO

As he shall smile, Othello shall go mad;
And his unbookish jealousy must construe
Poor Cassio's smiles, gestures and light behavior,
Quite in the wrong. How do you now, lieutenant?

CASSIO

The worser that you give me the addition
Whose want even kills me.

IAGO

Ply Desdemona well, and you are sure on't.

Speaking lower

Now, if this suit lay in Bianco's power,
How quickly should you speed!

CASSIO

Alas, poor caitiff!

OTHELLO

Look, how he laughs already!

IAGO

I never knew woman love man so.

CASSIO

Alas, poor rogue! I think, i' faith, she loves me.

OTHELLO

Now he denies it faintly, and laughs it out.

IAGO

Do you hear, Cassio?

OTHELLO

Now he importunes him
To tell it o'er: go to; well said, well said.

IAGO

She gives it out that you shall marry hey:
Do you intend it?

CASSIO

Ha, ha, ha!

OTHELLO

Do you triumph, Roman? do you triumph?

CASSIO

I marry her! what? a customer! Prithee, bear some
charity to my wit: do not think it so unwholesome.
Ha, ha, ha!

OTHELLO

So, so, so, so: they laugh that win.

IAGO

'Faith, the cry goes that you shall marry her.

CASSIO

Prithee, say true.

IAGO

I am a very villain else.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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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7-08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 짧은 대사 하나 속에 작품 전체의 내용이 담길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oren 2017-07-09 00:24   좋아요 1 | URL
『오셀로』의 4막 1장에 나온다는 ˝Alas, poor caitiff!˝에 대한 번역이 출판사마다 서로 다르더군요. 『평생 독서 계획』을 읽을 때만 하더라도 그냥 우리가 흔히 쓰는 ˝이 한심한 화상아!˝라는 뜻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말이지요. 오랫동안 장식품처럼 책장에 꽂혀 있던 ‘학원 세계문학전집판‘ 『셰익스피어』에서 그 대목에 대한 ‘보다 정확한 뜻‘을 알게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평생 독서 계힉』을 번역하신 분의 말대로 ˝사람을 처음 만나면 잘 알 수 없듯이 책도 한 번 읽어서는 잘 알 수가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똑같은 텍스트라고 하더라도 번역하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마다 서로 다른 ‘해석‘이나 ‘주석‘을 붙이는 이유 또한 궁극적으로는 ‘말이 지닌 결핍과 과잉‘ 때문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명박 물광피부 2017-12-21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어본까지 보니 좋네요

oren 2017-12-22 00:04   좋아요 0 | URL
영어로는 똑같은 세 단어를 두고 사람마다 이토록 다양하게 ‘번역‘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더군요.^^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묘한 '말', 묘한 '욕망'

 

만일 우리가 손에 잡히는 것밖에 누리지 못한다면, 돈도 금고 속에 있으면 내 것이 아니고, 아이들도 사냥 나갔으면 내 아이들이 아니겠지?

 - 몽테뉴

 

 * * *

 

'미처 날뛰는 포악한 주인'에게서 벗어난 기분을 소포클레스만큼 재치있게 말한 사람도 드물다. 여기서 말하는 '포악한 주인'은 물론 '여자와 동침하고 싶은 욕망'을 의인화한 표현이었다. 소포클레스가 얼마나 그 욕망에 시달렸으면 그런 말을 다 했을까 싶다. 어쨌거나 그는 노년에 이르러 마침내 그 주인에게서 벗어난 기쁨을 격하게 표현했는데, 마침 그 '대화의 현장'엔 케팔레스 옹도 있었던 모양이다. 플라톤의 『국가』에 그런 얘기가 나오니 말이다.

 

 

예끼, 이 사람. 그런 말 말게.

그래서 내가 말했네. "케팔레스 옹, 나는 연로하신 분들과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오. 우리는 그분들한테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마치 어쩌면 우리도 지나가야 할 길이 어떠한지, 거칠고 험한지, 아니면 쉽고 순탄한지 우리보다 먼저 그 길을 지나간 사람들한테서 배우듯이 말이오. 그대는 지금 시인들이 '노년의 문턱'이라고 말하는 그런 연세가 되신 만큼, 나는 무엇보다도 그대의 심경이 어떠하신지 듣고 싶어요. 산다는 것이 힘드신가요? 아니면 뭐라고 말씀하시겠어요?"

케팔로스 옹이 말했네. "제우스에 맹세고, 내 심정이 어떠한지 그대에게 말하겠소, 소크라테스 선생. 나는 또래의 늙은이들 몇 명과 가끔 모이곤 하는데, 옛 속담 그대로지요. 우리가 만나면 대부분은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해요. 그들은 젊은 시절의 즐거움을 그리워하며, 연애하고 술 마시고 잔치에 참석하던 일 등등을 회상하지요. 그러다가 그들은 자기들이 지금은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을 크나큰 상실로 여기고 화를 내곤 하지요. 그때는 잘 살았는데 지금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들 중 몇몇은 자기들이 늙었다는 이유로 가족에게 괄시받는다고 투덜대며, 그래서 온갖 참상이 다 노년 탓이라고 읊어대곤 하지요. 그러나 소크라테스 선생, 이들은 탓해서는 안 될 것을 탓하고 있는 듯해요. 그게 정말 노년 탓이라면, 나도 노년과 관련하여 똑같은 경험을 했을 테고, 다른 노인들도 모두 같은 경험을 하겠지요. 그러나 전혀 그렇게 느끼지 않는 사람을 나는 여럿 만났소. 예컨대 누가 시인 소포클레스에게 '소포클레스 선생, 그대의 성생활은 어떠시오? 그대는 아직도 여자와 동침할 수 있나요?'라고 물었을 때 나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소포클레스 님은 '예끼, 이 사람. 그런 말 말게. 나는 거기에서 벗어난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몰라. 꼭 미쳐 날뛰는 포악한 주인에게서 벗어난 것 같다니까'라고 대답하더군요. 그때도 그분의 대답이 훌륭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도 그때 못지않게 그렇다고 생각하오. 노년이 되면 의심할 여지없이 그런 감정들에서 해방되어 마음이 아주 편해지니까요. 욕망들이 한풀 꺾여 귀찮게 조르기를 멈추면 소포클레스가 말한 그대로 우리는 미쳐 날뛰는 수많은 주인에게서 해방된다는 말이지요. 이 점에서나 가족과의 관계에서나 탓할 것은 한 가지뿐인데 그것은 노년이 아니라 성격이라오, 소크라테스 선생. 사람 됨됨이가 반듯하고 자족할 줄 알면 노년도 가벼운 짐에 불과하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소크라테스 선생, 노년뿐 아니라 젊음도 견디기가 힘들다오."

 

- 플라톤, 『국가』제1권

 

 

우리가 책을 늘 옆에 끼고 살고 싶은 욕망도 그와 비슷한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책을 곁에 쌓아놓고 살아야 만족할까. 나도 한때는 '책으로 빙 둘러싸인 내 서재'를 꿈꾼 적이 있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싶었다. 그런데 책이 방안에 자꾸 쌓이니 불편한 점도 여럿 생겨나기 시작했다. 내가 다시 찾아 읽고 싶은 책을 재빨리 찾지 못한다는 게 무엇보다도 불편했다. 책이 많아지면 '책탑'이 독버섯처럼 자꾸 생겨나서 자라기 시작한다. 마침 어젯밤에 그 중 하나가 너무 웃자랐던지 마침내 '꽈다당'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무너져내렸다. 그것도 오밤중에.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잠자던 아내마저 '이게 무슨 소리냐'고 놀라 물었을 정도였다. 책탑이 여럿 생기니 '원하는 책'을 빼낼 때마다 힘도 든다. 미처 읽지도 않은 책이 책탑 저 밑에 깔려서 낑낑거리고 있는 꼴을 보면 우습기도 하고 안쓰러울 때도 있다.

 

그나저나 우리는 도대체 '몇 권의 책'을 가져야만 직성이 풀릴까. 내가 가진 책들은 많은가? 적은가? 가끔씩 도서관 서가에 꽂힌 수많은 책들을 둘러 보노라면 '내가 가진 책들'이 너무나 보잘 것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화들짝 놀랄 때가 있다. 시내에 있는 초대형 서점에 들러도 마찬가지다. 이 많은 책들이 도대체 언제 다 팔릴까 궁금하기도 하지만, 이들과 비교해서 내가 지닌 책들이 차지하는 부피가 너무나 자그마하다는 사실에 더욱 놀란다. 어쨌든 사람은 마음 속으로나마 늘 비교하기 마련이다. 하물며 전세계에 널린 그 수많은 도서관에 쌓여 있는 엄청난 규모의 책들에 비한다면 내가 가진 책들이 지닌 '초라함'이야말로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먼가? 가까운가?

만일 우리가 손에 잡히는 것밖에 누리지 못한다면, 돈도 금고 속에 있으면 내 것이 아니고, 아이들도 사냥 나갔으면 내 아이들이 아니겠지? 우리는 이런 것을 더 가까이하기를 원한다. 들에 있으면 먼 것인가? 반나절쯤의 거리라면? 뭐? 40km 떨어져 있으면 먼가? 가까운가? 그것이 가깝다면 44km는? 48km는? 52km는?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책을 파는 알라딘에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책을 많이 팔기 위해 애쓴다. 과거의 구매 기록, 현재의 지역별 연령대별 랭킹뿐만 아니라 미래의 연장선까지도 미리 정확하게 내다보도록 도와준다. 달리 말하면 책을 조금이라도 더 사도록 끊임없이 부추긴다는 말이다. 책을 많이 샀다고 해서 그게 '자랑'이라는 생각을 품은 적은 별로 없다. 내 곁에 두는 책이 많을수록 좋은 점도 많다. 왜 없겠는가. 그러나 이미 사 둔 책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끊임없이 '새 책, 새 책'을 외치며 책을 사들이는 데 열을 올리는 사람들을 보면 딱하다는 생각마저 들 때도 있다. 제 손아귀에 움켜쥔 걸 놓지 못해 사람에게 붙잡히고 마는 아프리카 원숭이도 어리석지만, 내 손에 이미 들어 있는 책엔 눈길도 주지 않고 자꾸만 갖지 못한 다른 책을 끝없이 탐내는 것도 어리석긴 매일반이 아닐까. 

 

 

우리의 욕망은 내 손에 있는 것은 경멸하며 넘겨 버린다. 그리고 자기가 갖지 않은 것을 차지하려고 애쓴다.

그는 수중에 있는 것은 경멸하고
잡히지 않는 것을 추구한다.                                                                  (호라티우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문득 고대 신화에 나오는 에뤼식톤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탐욕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 결국 더 큰 탐욕을 부르기 마련이다. 책이든 무엇이든 '더 많이' 가지려고 애를 쓸수록 결국 더 큰 '허기'를 느끼게 되지 않을까. 책은 좀 더 특별하기 때문에 다른 경우와는 달리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에뤼식톤과 그의 딸)

 

책도 일정한 한계 수준을 넘으면 결국 '짐'으로 뒤바뀌는 수도 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월든』에서 '지평선을 송두리째 차지하고도 가난을 면치 못한 어느 농부'를 안타깝게 바라봤다. 아일랜드에서 이민을 온 그 농부의 '진흙수렁 같은 생활방식'이 가난의 원인이었는데도 그 사람은 결코 그같은 '삶의 방식'을 바꿀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소로우는 범인들과는 판단이 너무나 달랐던 사람이다. '그대로 내버려둘 수 있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부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그토록 강조한 것도 제발 '간소하게' 살라는 말이었다. 독서를 아주 많이 했던 그도 자신의 서재에 있는 몇백 권의 책으로 만족할 줄 알았다.

 

간소하게

간소하게, 간소하게, 간소하게 살라! 제발 바라건대, 여러분의 일을 두 가지나 세 가지로 줄일 것이며, 백 가지나 천 가지가 되도록 두지 말라. 백만 대신에 다섯이나 여섯까지만 셀 것이며, 계산은 엄지손톱에 할 수 있도록 하라.

간소화하고 간소화하라. 하루에 세 끼를 먹는 대신 필요하다면 한 끼만 먹어라. 백 가지 요리를 다섯 가지로 줄여라. 그리고 다른 일들도 그런 비율로 줄이도록 하라.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중에서

 

 

나는 아직까지는 '책 짐'에 대해서라면 제법 운이 좋은 축에 속한다. 여태까지 이사를 다니면서 '책' 때문에 고생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재활용을 하는 날 산더미처럼 내다버리는 책들을 보면 옛날엔 그저 안타깝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는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책이 결국 '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 과감하게 자신이 빠진 '궁지'에서 마침내 벗어나고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궁지

덫에 걸린 꼬리를 잘라내고 달아난 여우는 운 좋은 놈이었다. 덫에 걸린 사향쥐는 자유의 몸이 되기 위하여 세번째 다리라도 물어서 끊는다고 한다. 인간이 자신의 탄력성을 잃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얼마나 자주 궁지에 빠지는가? "여보시오, 선생! 외람된 말이지만 궁지에 빠진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이오?" 당신이 예민한 관찰력의 소유자라면,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 뒤로 그가 소유하는 모든 것과 자신의 것이 아닌 척하는 물건들, 심지어는 부엌 가구와 그 외에 그가 계속 모아두면서 태워버리지 못하는 온갖 잡동사니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것들에 묶인 채로 어떻게든지 앞으로 전진해보려고 무척 애를 쓰고 있을 것이다. 자신은 옹이구멍이나 출입문을 빠져나갔지만 썰매에 실은 자신의 가구와 짐은 문턱에 걸려 나오지 못할 때 나는 그가 궁지에 빠졌다고 말한다.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중에서 

 

 

여기까지 쓰고 보니 이런 생각에 대해 '심각한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불쑥 나타날까 자못 두렵다. 물론 '어떠한 이치라도 그 반대의 이치가 없는 것은 없다'고 말한 철학자의 말이 맞다. '읽은 책'이 아니라 '구매한 책'에 대해서도 '다다익선'이라고 누가 자신있게 말을 하지 못할까. 그러나 '다양한 관점'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달'을 보라고 말하는 데도 기어이 '손가락'을 보는 사람이 있다. '책'을 보라는 데도 '구매한 책'이 많으니 적으니, '읽은 책'이 많으니 적으니를 따진다. 나 또한 그런 '통계'에 마음이 흔들린다. 알라딘은 책 장사꾼이니 응당 그렇다 치더라도 알라디너마저 거기에 너무 동조하거나 집착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어떠한 이치라도 그 반대의 이치가 없는 것은 없다고 철학자들 중의 가장 현명한 학파(피론 학파)는 말한다. 나는 방금 옛 사람(세네카)이 인생을 경멸하며 "언젠가는 없어질 것으로 생각되는 것밖에는 어떠한 보배도 우리에게 쾌락을 주지 못한다", "한 사물을 잃어버렸다는 비통과 그것을 잃을 것이라는 공포심은 똑같다"(세네카)고 한 이 묘한 말을 음미하고 있었다. 이 말은 그것을 잃을 근심이 있으면 생을 즐긴다는 것이 진실한 재미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뜻이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어떤 보배가 내 것으로 확실히 되어 있지 않고 빼앗길 우려가 있는 경우, 그것에 더 한층 애착을 가지고 악착스레 틀어쥐며 매달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불이 찬 기운이 있을 때에 더 잘 일어나듯, 우리의 의지는 반대에 부딪칠 때에 더 날카로워지는 것을 우리는 확실하게 느낀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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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면서 맨 처음으로 떠올렸던 '책 속 구절'은 아래와 같다. 이 대목을 본문에 인용할 만큼 '강한 글'을 쓸 재간이 없었다는 사실을 털어놓기 위해서 '접어서' 덧붙인다. 

 

 

모든 부질없는 상념들은 울적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자연은 우리들에게 외따로 반성하는 소질을 풍부하게 선사하였고, 우리는 부분적으로는 사회의 신세를 지고 있지만, 그 최대 부분은 우리 자신에게 신세지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스스로 반성해 보도록 자주 권고한다. 내 공상에도 어떤 질서와 계획을 세워서 몽상해 가도록 정리하여 그것이 바람결에 흩어져 사라지는 것을 막으려면, 이 공상에 떠오르는 하고많은 자디잔 생각들에 형체를 주어서 기록해 두는 수밖에 없다. 나는 몽상들을 기록해 두어야 하기 때문에, 이 몽상들을 주의해서 듣는다. 내가 얼마나 여러 번 어떤 행동에 관해서 예법과 이성이 드러내 놓고 비난하지 못하게 하는 데 마음속에 화가 북받쳤는가, 그것을 대중에게 알려 주려는 의도도 없지 않아서 여기에 털어놓는다. 그리고 참으로---

저 잡놈의 눈깔 위에 탁!
배때기에 탁! 등때기에 탁!                                                                                              (마로)

이 시의 채찍은 몸뚱이에 때릴 때보다 종잇장 위에 매질할 때에 자국이 더 잘 박힌다. 뭐? 내가 다른 책들에서 무엇이건 도둑질해 작품을 장식하거나, 보강할 수 있을까 하고 엿보아 온 것에, 좀더 책들의 말에 주의해서 귀를 기울이면 어떠냐고? 나는 책을 만들기 위해서 공부한 것이 아니고, 책을 만들었기 때문에 얼마쯤 공부하였다. 적어도 이때는 이 작가, 저때는 저 작가의 머리나 다리를 스쳐 보고 꼬집어 보는 것이 공부라면 말이다. 결코 내 사상을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니다. 벌써 오래 전에 형태가 잡힌 사상들을 보충하고 거들어 주기 위해서 하는 일이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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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7-06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서재에 있는 책들을 보면 든든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들을 얼마나 온전하게 아는지 자신에게 물어본다면 제대로 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많은 친구를 사귀는 것보다 진정한 친구 1명을 사귀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은 비단 친구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닌듯 합니다...

oren 2017-07-06 23:17   좋아요 1 | URL
그렇죠. 한 번 읽은 책은 늘 ‘거기‘에 머물고 있는데 우린 좀처럼 다시 만날 생각을 하질 못하죠. ‘친한 친구‘라면 절대로 그렇게 홀대하진 않을텐데 말이지요. 헤럴드 블룸도 ‘독서‘와 ‘우정‘이 매우 비슷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자주 언급했던 기억이 납니다.
* * *
『돈 키호테』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같은 작품은 구성을 찾으려고 읽어서는 절대 안 된다. 인물의 발전 과정과 작가의 비전이 펼쳐지고 밝혀지는 것을 보려고 읽어야 한다. 따라서 산초 판자와 돈 키호테, 스완과 알베르틴은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처럼 친밀하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존재가 된다. 나는 스탕달과 디킨스에 관해서 다시 읽는다는 개념에 대해 주창한 바가 있는데, 이는 제인 오스틴이나 세르반테스의 경우에는 더더욱 필수적이다. ……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즐거움은 첫 번째 독서보다 더 다양하고 계몽적인 요소가 된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아도 어떻게 , 왜 일어났는가를 이해하는 일은 새로운 인식이다. 무엇이든 한 번 더 본 것에 다가가기가 쉽다.

cyrus 2017-07-07 15: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서재에 새 책을 소개하는 분들이 부쩍 많아졌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저는 이런 현상을 좋게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새 책을 소개하는 글을 자주 접하면 정작 제가 읽어야 할 책, 이미 산 책들을 쳐다보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간략한 설명 없이 ‘알라딘 상품 넣기’ 기능만으로 작성된 게시물도 있습니다. 글이라도 볼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게시물’이라고 했습니다. 사지도 못할 거면서 새 책(한 권이 아니라 여러 권)을 성의 없이 소개하는 게시물이 있으면 못 보는 척하고 넘어갑니다. 그런 게시물을 쓰는 분들을 보면 오기가 생겨요. 저는 그분들과 반대로 절판된 책, 오래된 책들을 알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웬만하면 새 책을 읽었으면 ‘리뷰’로 기록하려고 합니다. 새 책이 포함된 페이퍼는 별점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oren 2017-07-07 16:32   좋아요 0 | URL
cyrus 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제가 이 글을 쓰기 전부터 꼭 포함시키고 싶었던 내용이 ‘책을 건축물에 비유해서 바라볼 수는 없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이 글을 쓰면서 그런 내용을 일부 집어 넣었다가 결국엔 도로 뺐습니다만..)

인류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건축해 놓은 수많은 걸작들을 책으로 비유한다면 아마도 ‘고전‘에 비유할 수 있겠지 싶어요. 실제로 고대 그리스 비극 작품을 ‘파르테논 신전‘과 같은 걸작 건축물에 비유한 인물도 있었고요.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전에 지어진 르네상스 시대나 고대의 건축물 가운데서도 현대인의 눈을 의심케 하는 걸작들도 숱하게 많지요. 인류가 남긴 위대한 고전 작품 가운데서도 그런 걸작들이 많다고 봅니다. 물론 현대에 와서도 뛰어난 건축술이 발휘된 예술작품 같은 건축물이 드물진 않지만, 500년이나 10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위대한 건축물들에 비하면 어딘지 ‘깊이‘가 좀 부족하다는 느낌도 떨치기 어렵습니다. 그 나름대로의 매력과 가치는 충분히 지니겠지만요. 그런데 정작 우후죽순 격으로 마구 지어지는 ‘조잡한 신축 건물‘을 닮은 듯한 ‘신간‘들은 ‘걸작 건축물‘에 비한다면 그 예술성과 가치가 상당히 의심스러운 것도 사실이지요. 건축물에서도 ‘인류의 문화유산‘과도 같은 탁월한 걸작이 있듯이, 책에서도 그런 걸작들이 분명히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건축물과 달리 책은 ‘아주 값싼 비용으로도‘ 그런 걸작들을 충분히 쉽게 만나볼 수 있고요. 마구 쏟아지는 신간들에 너무 눈길을 주다 보면 결국 탁월한 작품들을 만날 시간을 그만큼 빼앗길 수밖에 없다고도 봅니다. ‘새로운 책‘이 새로운 만큼 우리 눈에 반짝 빛날 수는 있겠지만 과연 그만큼 ‘빛나는 가치‘를 지닌 책인지는 늘 의심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간통 같은 독서

 

헤럴드 블룸의 『교양인의 책 읽기How To Read and Why』는 책의 제목이 번역 과정에서 엉뚱하게 바뀐게 몹시 아쉽다. 이 책을 볼 때마다 그냥 원제 그대로 번역했더라면 훨씬 더 낫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블룸의 '책 읽기에 대한 강의'는 내 판단으로는 수준이 꽤나 높다. 문학 전공자들에게 권장할 만한 책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쨌든 나는 그 책을 먼저 읽고 나서 '셰익스피어'도 읽고, '윌리엄 포크너'도 읽었는데, 이렇게 거꾸로(?) 책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헤럴드 블룸의 책을 먼저 읽으면 마치 '작품 감상'에 앞서서 미리 예습을 하는 기분이 들어서 좋고, 작품을 읽고 나서 다시 헤럴드 블룸의 책을 펼치면 '복습'하는 기분마저 든다.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헤럴드 블룸의 책으로 '예습'을 하고 그 작품을 읽으니 훨씬 더 쉽고 재미있었고, 포크너의 책을 읽고 나서 다시 헤럴드 블룸의 책을 펼쳐 보니 '복습'하듯 명쾌하게 작품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윌리엄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에 대한 '헤럴드 블룸의 해설'은 나에게 '케케묵은 숙제' 하나를 새롭게 꺼내 놓도록 요구했다. 이제부터 그 얘기를 해 볼까 싶다.

 

우선, 윌리엄 포크너의 걸작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에 대한 '헤럴드 블룸의 해설' 도입부를 잠깐 살펴 보고 넘어 가자. 이 소설은 무엇보다도 '화자'가 계속 바뀐다는 점에서 형식부터 아주 독특하다. 소설의 등장인물이 바뀔 때마다 바로 그 사람이 '화자'가 되는 구조다.

 

20세기 미국 소설 중에서 가장 멋진 시작은 윌리엄 포크너가 쓴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가 아닌가 싶다. 59개의 내적 독백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에서 53개는 번드렌 가家 사람들의 독백이다. 번드렌 가는 가난하지만 자부심이 강한 백인 가족이다.

 

이들은 홍수와 불의 위험을 무릅쓰고 어머니의 관을 미시시피 주 제퍼슨에 있는 묘지로 옮기는 중이다. 할아버지 곁에 묻히기를 바라는 어머니 애디의 뜻을 위해서다.

 

도입부를 포함한 전체 중 19개 부분은 달 번드렌이 말하고 있는데, 그는 몽상가로 나중에는 광증의 경계를 넘어선다. 달은 사이가 좋지 않은 형 주얼과 함께 어머니가 죽어가는 집을 향해 달려간다.(305쪽)

 

 - 헤럴드 블룸, 『교양인의 책 읽기』

 

 

헤럴드 블룸의 해설 대로, 이 소설은 번드렌 가의 둘째 아들인 달이 이끌고 가는데, 소설의 막바지에 가면 마침내 달이 '사고'를 친다. 형이 손수 짠 관에 죽은 어머니를 안치한 채 마차에 싣고 시골길을 열흘 가까이 이동하는 동안에 관에서 악취가 나기 시작하자 '아버지와 5남매로 구성된 장례 일행'은 어딜 가나 문전박대를 당한다.  어느 날 밤, 냄새 때문에 어머니의 관은 숙소에서 멀리 떨어진 헛간으로 옮겨지는데, 한밤중에 헛간에서 불길이 치솟는다. 몹시 예민한 성격을 지닌 달이 '시신 운구 여행'을 견디다 못해 광인(狂人)처럼 느닷없이 헛간에 불을 지른 것이다. 누이동생 듀이 델의 '고자질'로 '방화범'으로 지목된 달은 경찰에 붙잡혔고, 이제 기차에 실려 '감옥'으로 호송되는 중이다.
 

그들은 자리 두 개를 합쳐 달을 앉혔다. 창문 옆에 앉아서 달은 실컷 웃었다. 한 사람은 그의 옆 자리에 앉고, 또 한 사람은 그 앞에 앉아 거꾸로 가고 있었다. 미시시피의 돈은 각각 앞면과 뒷면이 붙어 근친상간을 하고. 그 돈으로 그들은 기차를 타고 있다. 5센트짜리 동전은 한 면에 여자가 있고 다른 면엔 물소가 새겨져 있다. 얼굴만 두 개고 뒤통수가 없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달은 전쟁 중 프랑스에서 얻은 쌍망원경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 그 안에는 여자와 돼지가 새겨져 있었는데, 얼굴은 없고 모두 뒤통수만 있었다. 그게 뭔지 나는 알고 있다. "달, 그래서 웃고 있는 건가?"

 

"맞아 맞아 맞아 맞아 ……."

 

 - 윌리엄 포크너,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이 대목에 대한 헤럴드 블룸의 해설이 없었다면 우리들의 '작품 이해'는 상당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그의 해설이 그만큼 '놀라운 깊이'를 지녔기 때문이다.

 

분열된 달은 자기 자신과 대화를 주고받는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보는 자'다. 즉 "근친상간인 주(州)의 화폐"다. 이 구절은 이아고의 이성애異性愛에 대한 라블레의 익살로 보인다. 두 개의 등을 가진 한 마리의 야수라는 생각은 '주의 화폐'를 근친상간으로 보는 점에서 셰익스피어의 『잣대엔 잣대로』와 비슷하다.(312쪽)

 

 - 헤럴드 블룸, 『교양인의 책 읽기』

 

 

'미시시피의 돈'에서 윌리엄 포크너는 셰익스피어의 작품 『오셀로』에 나오는 '이아고의 말'과 '근친상간'을 동시에 떠올린다. 헤럴드 블룸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한 것이다. 나는 블룸의 해설에 등장하는 '두 개의 등을 가진 야수'라는 표현을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서 맨처음으로 만났었다. 조이스 역시 그 표현을 셰익스피어의 작품 『오셀로』에서 빌려온 것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제임스 조이스가 세익스피어의 그 표현에 얼마나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는 작품 속에서 '거듭 반복되는 인용'만 봐도 충분히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어쨌든 나는 이번 기회에 '두 개의 등을 가진 야수' 이야기를 꺼낼 기회를 꽉 붙잡게 되었다. 여기서부터는 잠시 무대를 '미시시피 강'에서부터 아일랜드의 '더블린'으로 옮길 필요가 있다. 여기까지 나를 따라온 독자들이라면 이제부터 인용하는『율리시스』의 소설 내용까지 굳이 자세히 이해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쯤은 충분히 눈치채고 있으리라. 우리는 그저『율리시스』의 주석에 딸린 내용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약간 벅차다.

 

ㅡ 내 생각으로는 내가 여태껏 내 일생에서 들은 가장 연마된 문장들 가운데 하나가 부쉬의 입술에서 떨어졌지. 그것은 저 형제 살해사건. 덧문즈의 암살 사건이었어. 부쉬가 그를 변호했지.

 

그리하여 나의 귓구멍에 부어 넣었노라.157)

 

 

그런데 어떻게 그가 그걸 알아냈던가? 그는 잠 도중에 죽었지. 아니면 다른 이야기, 두개의 등을 가진 야수(野獸)?158)

 

ㅡ 그게 무엇이었는데? 교수가 물었다. (114∼115쪽)

 

주석

 

157) 유령이 햄릿 왕자에게 자신이 클로디어스에 의해 암살당한 방법을 알리는 구절(『햄릿』1막 5장 59∼63)

 

158) 그런데 어떻게 …… 죽었는데 ㅡ 유령은, 죽은 다음에 자신을 죽인 방법이 폭로되어지지 않는 한 그 방법을 알 수 없다는 것. 다른 얘기는 …… 야수를 ㅡ 유령은 왕자에게, 클로디어스는 '간통의 야수'라 말하고 왕비는 '미덕을 가장한 자'라 말함.(『햄릿』1막 5장 42∼46). 이는 스티븐에게, 숙부와 어머니는 부왕의 죽음 전에 간통을 범함으로써 이아고의 말대로 '두 개의 등을 가진 야수'(『오셀로』1막 1장 117∼118)라는 사실을 암시해 줌. 그러나 이 두 가지 사실을 죽은 부왕이 어떻게 알 수 있었느냐가 문제로 남음.

 

 -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제7장 신문사(아이올러스)> 중에서

 

 * * *

 

모두들 듣는다. 그리고 그들의 귀의 현관에 나는 부어 넣는다.

 

ㅡ 영혼이 이전에 이미 치명적인 상처를 받았소. 독(毒)이 잠자는 귀의 현관에 부어졌던 거요. 그러나 그들의 창조주가 다가올 생(生)의 저 지식을 그들의 영혼에 부여하지 않는 한 잠 속에 죽음을 당한 자들은 자신들의 소멸의 방식을 알 수 없는 거요.286) 독살과 그것을 재촉했던 두 개의 등을 가진 야수(野獸)를 햄릿 왕의 유령은 그가 자신의 창조주에 의해 지식을 부여받지 않는 한 알 수 없었을 거요.287)  바로 그것이 언어(그의 말라빠진 보기 흉한 영어)가 항상 다른 데로 이탈하고, 후퇴하는 이유지요. 강탈자며 강탈당하는 자로서, 그가 의지(意志)하려 했거나 의지하려하지 않았던 것이, 루크리스의 푸른 정맥으로 둘러싸인 상아(象牙) 같은 유방.289)에서부터 다섯 끗 점 사마귀 있는, 이모겐의 벌거벗은, 젖가슴에까지 자신과 동행하지요. (이하 생략)

 (161∼162쪽)

 

주석

 

286) 『맥베스』, 1막 7장 72행

287) 성교(性交)를 암시함(『오셀로』, 1막 1장 118행)

289) 셰익스피어 작 『루크리스의 강간』, 4행∼7행

 

 -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제9장 국립도서관(스킬라와 카립디스)> 중에서


 * * *

 

 

스티븐

 

(성냥을 눈 가까이 가져간다) 살쾡이 눈이야. 안경을 사야겠어. 어제 그걸 깼지. 16년 전에. 거리(距離). 눈은 모든 걸 평평하게 보지. (그는 성냥을 멀리 끌고 간다. 불이 꺼진다.) 두뇌는 생각하도다. 가까이: 멀리. 가시적인 것의 불가피한 양상. (그는 신비스럽게 상을 찌푸린다) 흠. 스핑크스다. 한밤중에 두 개의 등을 지닌 짐승이군.482)  시집을 가다니.(456쪽)

 

주석

 

482) 『오셀로』, 1막 1장 117∼118행에서 이아고가 한 말 "저는 말입죠. 따님과 무어놈이 지금 잔등이 둘 달린 짐승을 연출하고 있는 ……" 밤의 여인 조지너 존슨은 스티븐에게 불성실함으로써 두 개의 등을 가진 야수를 연출하는 셈임. 또한 『햄릿』에서도 부왕 햄릿이 죽기 전에 클로디어스가 왕비와 간음을 행함으로써 '두 개의 등을 가진 야수'가 됨.

 

 -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제15장 밤의 거리(키르케)> 중에서


 

제임스 조이스는『율리시스』에서 『오셀로』를 (내가 세어 본 바로는) '아홉 번' 인용했는데, 그 가운데 무려 '세 번'이 이아고가 말한 '두 개의 등을 가진 야수'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작 우리나라에서 읽는『오셀로』에서는 '두 개의 등을 가진 야수'를 좀처럼 만날 수 없다. 심지어 (물론 내가 아는 좁은 범위 내에서만 말하는 거지만) '그와 비슷한 번역' 조차 구경하기 힘든 실정이다. 이렇듯 '원래의 문장이 지닌 강렬한 이미지'를 다 내다버리고 밋밋하기 짝이 없는 문장으로 번역함으로써 독자들은 '셰익스피어 언어의 놀라운 힘'을 결국 놓치고 마는 게 아닐까.

 

내가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에 나오는 한 대목을 두고 이토록 자세하면서도 복잡하게 인용문들을 잔뜩 늘어놓으면서 이야기하는 것도 다 이아고가 말한 그 유명한 대사 때문이다. 제임스 조이스와 윌리엄 포크너와 헤럴드 블룸이 모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목했던 셰익스피어의 그 놀라운 표현을 왜 우리들은 여태 모를 수밖에 없었던가. 그건 바로 '번역' 때문이었다! 이 문제야말로 내가 '두 개의 등이 달린 야수'를 만난 이후 오랫동안 품어 왔던 '진짜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였다. 우연히 집어든 윌리엄 포크너의 작품이 마침내 그 실마리를 풀어보도록 내게 요청해 온 셈이었다.(헤럴드 블룸이 슬쩍 언급한 『잣대엔 잣대로』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생략했다. 이쯤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어서다. 일물일가의 법칙도 있잖은가. 잣대엔 잣대로.)

 

마지막으로 덧붙일 건 내가 읽은『오셀로』에 나오는 이아고의 밋밋하기 짝이 없는 대사다.

 

    브라반티오

입버릇 더러운 넌 누구냐?

 

         이아고

어르신, 전 당신 딸과 무어인이 지금 배를 맞추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온 사람입니다.

 

    브라반티오

네놈은 악당이다!

 

         이아고

당신은 의원입죠!

 

- 최종철 번역, 『오셀로』, <1막 1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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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7-07-04 15: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귓구멍에 부어 넣는다면 바로 햄릿이 떠오르는데, 두 개의 등을 가진 야수는 처음 봅니다. 오셀로를 제대로 안 읽었나.. 했더니 오렌님께서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다 해주시니 책을 뒤지지는 않겠지만 아쉽습니다. 멋진 표현인데..

oren 2017-07-04 15:39   좋아요 1 | URL
예전에 읽은 어떤 책에서 본 ‘번역 후기‘도 생각납니다. 대학에 다닐 때 영문학 수업 시간엔 세익스피어의 비극『오셀로』4막 1장에 나오는 대사 ˝Alas, poor caitiff!(이 한심한 화상아!)˝의 뜻을 잘 몰랐는데, 나중에서야 그 말의 깊은 뜻을 알게 되었다고요. 그런데 제가 찾아본 그 어떤『오셀로』에서도 ‘이 한심한 화상아!‘라는 번역은 찾질 못하겠더군요.

겨울호랑이 2017-07-04 16: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학의 표현은 역사를 가지고 있군요. 작품 자체의 의미도 표현도 중요하지만, 다른 작품과의 연계성까지 고려해야 온전한 작품 감상이 이 된다는 것을 oren님 덕분에 깨닫게 됩니다.^^:

oren 2017-07-04 16:57   좋아요 1 | URL
제 생각으로는, ‘텍스트 간의 관련성(intertextuality)‘을 극대화한 작품이 아마도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아닐까 싶어요. 작가가 일부러 숱한 ‘미로‘와 ‘건너 뛰기 어려운 협곡‘들도 만들어 놓은 듯하고요. 그 때문에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그 작품을 ‘해석‘하느라 기를 쓰고 달려들고 있기도 하고요. 천병희 선생님이 번역한 책들도 ‘주석‘이 많기로 유명한데, 작품을 쓴 옛날 사람들이 미리 ‘텍스트 간의 관련성‘을 두루 염두에 두고 썼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 * *
베르길리우스 시의 묘미를 느끼려면 호메로스의 시를 알아야 하듯,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도 그의 선배 시인들의 시를 알고 있으면 그 깊은 맛을 구석구석 느낄 수 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를 비롯한 그리스 라틴문학의 읽는 재미를 극대화하려면 텍스트 간의 관련성(intertextuality)을 파악할 것을 권한다. 앞서 말했듯이 네스토르는 젊은 나이에 칼뤼돈의 멧돼지 사냥에 참가하지만 멧돼지가 덤벼들자 당장 이를 피해 마치 장대높이뛰기 하듯 창자루를 짚고 나무 위로 도망치는데(8권 260∼546행 참조), 이 장면은 그가 『일리아스 』에서 그리스 장수들의 회의석상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자기는 젊었을 때 아무리 강한 적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며 다른 장수들을 나무라는 장면들을 알고 있어야만 더 재미있게 읽히는 것이다.

- 오비디우스, 『원전으로 읽는 변신 이야기』, <옮긴이 해제> 중에서
 


(밑줄긋기)


여자들의 삶이 힘겹기는 하다. 종종 남자들이 …… 저지른 죄에 대한 변명이 있다면 그것은 남자 탓이지. 사람이 한평생 사는 일이 만만하지가 않다. 그렇지 않다면 선량한 사람이 죽어야 할 이유가 없겠지.

 

"이봐 아가씨, 그런 생각일랑 지워버려요. 그것은 어쨌거나 하느님이 주신 것이오. 비록 악마를 통해서일지라도 말이오. 하느님의 뜻이 생명을 없애버리는 것이라면 그렇게 될 것이오. 레이프에게 돌아가서 그가 준 10달러로 결혼이나 하시요."

 

"약국에 가면 살 수 있을 거라고 레이프가 말했거든요."

 

그녀가 말했다.

 

"그렇다면 가서 구해 봐요. 그러나 이곳에서는 살 수 없소."

 

손에는 보따리를 들고, 신발로 바닥을 쓸면서 그녀는 밖으로 나갔다. 출입문에서 그녀는 다시 멈칫거렸다. 창문을 통해 거리로 걸어 나가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소녀에 대한 나머지 이야기는 앨버트를 통해 들었다. 마차 한 대가 그러미트의 철물점 앞에 멈춰 섰는데, 여자들은 모두들 손수건으로 코를 틀어막았고, 냄새에 그리 민감하지 않은 남자들과 소년들은 마차 주변에 둘러서서 한 남자와 경찰관이 다투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차 위에 앉아 있는 그 남자는 키가 좀 큰 듯하고 얼굴이 초라한 사람이었는데, 이 거리는 공공시설이니만큼 자신이 거리에 서 있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찰관은 주민들이 냄새를 견딜 수 없으므로 마차를 치우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앨버트에 따르면 관 속의 시체는 벌써 여드레나 되었다고 한다. 요크나파토파 어딘가로부터 온 그들은 제퍼슨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마치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거리에 던져진 썩은 치즈같이 보였던 것이 틀림없다. 금방이라도 부숴질 듯한 마차에다, 집에서 짜 만든 관, 그 위에 누워 있는 다리 부러진 남자, 그리고 앞자리에 앉은 아버지와 작은 소년을 보며, 사람들은 그들이 마을을 빠져 나가기도 전에 모두 산산조각 나버리지 않을까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래서 경찰관은 그들이 한시라도 빨리 마을을 떠나게 하려고 애쓰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은 공공 도로요. 다른 사람들처럼 우리도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지 않소. 돈도 있단 말이오. 원하는 곳에서 자기 돈을 쓰겠다는데, 안 된다는 법이 어디 있소." 그 남자가 말한다.

 

그들은 시멘트를 사려고 멈추었던 것이다. 아들 하나가 그러미트의 철물점에서 시멘트를 사고 있었는데, 시멘트 한 부대를 헤트려 10센트어치만 사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마침내 그러미트는 그 사람들을 빨리 떠나게 할 요량으로 부대를 뜯어 그가 원하는 만큼을 팔았다. 부러진 다리를 고정시킬 목적으로 필요한 모양이었다.

 

"당신들은 저 남자를 결국 죽게 할 거요. 시멘트를 바르면 다리를 잃게 될 거란 말이오. 어서 의사에게 데려가시오. 그리고 시체는 빨리 땅에 묻으시오. 공공 위생을 저해한 죄로 당신을 감옥에 넣을 수도 있는 것을 도대체 알기나 하오?"

 

"우리도 최선을 다하고 있소." 아버지란 사람이 말했다. 그는 자신들이 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마차가 돌아오기를 얼마나 학수고대했는지, 다리가 어떻게 떠내려갔는지, 다른 다리를 찾아 다시 8마일을 갔으나 그것마저 떠내려가 여울목으로 강을 건넌 이야기, 그 와중에 노새를 잃은 이야기, 그래서 다른 노새를 구해서 가보니 길이 떠내려가 다시 모슨으로 우회해서 가고 있다는 이야기 등등을. 시멘트를 사러 갔던 아들이 돌아와서 이 광경을 보고는, 떠벌리는 아버지에게 닥치라고 말했다.

 

"우린 곧 떠날 거예요." 아들이 경찰관에게 말했다.

 

"누구도 귀찮게 하지 않을 거요." 아버지가 말했다.

 

"저 친구를 의사에게 보내시오." 시멘트를 들고 있던 아들에게 경찰관이 말했다.

 

"그는 괜찮을 거예요." 그가 말했다.

 

"우리들이 몰인정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요. 아마도 당신들 자신이 더 잘 알 거요." 경찰관이 말했다.

 

"물론이죠. 보따리를 전달하러 간 듀이 델이 돌아오는 즉시 떠날 거예요."

 

사람들이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 뒷걸음치는 가운데, 소녀가 신문지로 둘둘 만 보따리를 들고 나타날 때까지 그들은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234∼237쪽)

 

 - 윌리엄 포크너,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 * *


포크너의 이 작품은 제목에서부터 의도적으로 애디 벤드렌을 말하고 있다. 그녀는 작품이 시작되자마자 죽음을 맞는다. 포크너는 아가멤논의 유령이 오딧세우스에게 한 말(「오뒷세이아」11권, 「죽음의 세계로의 하강」)을 인용하고 있다.

 

내가 누워 죽어갈 때 개의 눈을 가진 그녀는 내 눈조차 감겨 주지 않았소. 내가 죽음의 세계로 내려가는 동안 말이오.

 

아내와 그녀의 정부(情夫)에게 살해당한 아가멤논의 운명은 포크너의 소설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 포크너는 문맥보다는 그 구절만을 원해서 취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애디와 아들 달의 애정 결핍이 클뤼타임네스트라와 오레스테스, 그리고 엘렉트라의 관계와 비슷한 점이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클뤼타임네스트라는 "개의 눈을 가진 여자"로 죽은 아가멤논의 눈을 감겨 주지도 않고 떠나 보낸다. 애디는 클뤼타임네스트라보다 더 불쾌한 여자다.(307∼308쪽)

 

 - 헤럴드 블룸, 『교양인의 책 읽기』, <3. 장편 소설> 중에서

 

오뒷세이아_11권 저승

소포클레스의 『엘렉트라』

 

 * * *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에서는 자연 그 자체가 하나의 상처로 그려지고 있다. 앙드레 지드는 포크너의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에게는 영혼이 빠져 있다고 말했다. 지드는 번드렌 가 사람들은 콤슨 가(『음향과 분노』에 등장하는 인물들) 사람들처럼 파멸적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신은 두 집안 사람들에게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심연으로부터 왔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운명이다. 듀이 델이 필사적으로 신을 믿는다고 외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는 파멸적인 인간의 상황을 묘사했다. 특히 핵가족이 그런 파멸 가운데서도 가장 공포스럽다는 것을!(312∼313쪽)

 

 - 헤럴드 블룸, 『교양인의 책 읽기』, <3. 장편 소설> 중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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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토의 경우
영웅들의 ‘운명‘에 대하여
로마의 역사를 뒤바꾼 ‘성폭행 사건‘을 둘러싼 내밀한 심리 묘사가 압권인 작품

 

 

"브루투스, 너 마저?"

 

이 짧은 대사만큼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 것도 드물다. 이 말은 삼척동자도 웬만큼 안다. 왜? 누구나 한 번만 들어도 금세 '상황 파악'이 되기 때문이다. 친구들끼리 장난을 치다가도 "아무개, 너 마저?" 라고 외칠 만한 상황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맞닥뜨렸던가.

 

나도 언젠가부터 저 짧은 대사를 듣고 알게 되었다. 그게 언제였는지는 결코 알 수 없지만. 그 이후로 오랫동안 내가 품었던 생각은 이랬다. '브루투스는 '참 나쁜 사람'이었구나, 카이사르가 자신을 그토록 믿고 아껴주었는데 어떻게 그 끔찍한 '암살'에 가담하게 되었을까?' 그런 오해와 의문이 완전히 해소된 건 아마도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거듭 읽고 나서였지 싶다. 몽테뉴가 '저 위대한 브루투스'라고 말하며 칭송을 거듭할 때까지도 그의 위대성을 도무지 실감할 수 없었으니까.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는 '카이사르 암살 장면'이 두 번 거듭해서 나온다. 한 번은 「카이사르 편」에서, 다른 한 번은「브루투스 편」에서. 그런데 묘하게도 플루타르코스가 쓴 책에는 "브루투스, 너 마저?"라는 대화는 눈을 씻고 찾아 봐도 없다. 「카이사르 편」을 거듭 뒤져 봐도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과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말고는 더 이상 인상적인 대사가 없다. 카이사르 암살 장면에서 플루타르코스로부터 직접 들을 수 있는 카이사르의 음성은 기껏해야 "비겁한 놈! 카스카, 이게 무슨 짓인가?"가 전부다.(「브루투스 편」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일부러 살짝 비틀어 번역한 "카스카, 이 못된 놈! 이게 무슨 짓이냐?"라는 문장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 저 유명한 대사는 말 그대로 '셰익스피어의 작품'이었다!

 

        카스카

손이여 말해 다오!                (그들이 시저를 찌른다.)

 

           시저

브루투스, 너 마저? ㅡ 그럼 시저, 죽으리라. (죽는다.)

 

           신나

자유다! 해방이다! 독재는 무너졌다!

뛰어가서 공포하라, 길거리에 외쳐라.

 

 - 『줄리어스 시저』, <3막 1장> 중에서

 

 


 - 원로원에서 암살당하는 카이사르, 빈센초 카무치니

 

이 '역사적인 장면'에서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에게 했다는 그 유명한 말에 대해 좀 더 정확하게 알려면 천병희 선생님이 번역한 발췌 번역본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찾아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천병희 선생님만큼 꼼꼼하게 주석을 달아서 번역하는 분은 드물기 때문이다.

 

브루투스도 카이사르의 아랫배에 일격을 가했다. 일설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저항하며 그들의 가격을 피해 이리저리 몸을 틀면서 도와달라고 소리쳤으나 브루투스가 단검을 빼어든 것을 보자 머리에 토가를 뒤집어쓰고는 …… (550쪽)

 

주석)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에게 했다는 "내 아들아, 너 마저?"(kai su, teknon?)라는 유명한 그리스 말은 수에토니우스의 『황제전』중 「율리우스 카이사르 전」82장에 기록되어 있다. "브루투스여, 너 마저?" 라는 말은 셰익스피어의 사극 『줄리어스 시저』에 나온다.

 

 - 천병희 번역,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중에서

 

이 주석에서 셰익스피어의 사극에 나온다는 "브루투스여, 너 마저?"에 앞서 소개된 내용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카이사르가 죽으며 브루투스에게 했다는 말 "내 아들아, 너 마저?"는 결코 카이사르가 죽을 때 정신줄을 놓으며 내뱉은 '헛소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저간의 사정을 플루타르코스의 설명을 통해 좀 더 알아 보자.

 

카이사르도 브루투스를 무척 아꼈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부하들에게, 전투를 할 때에도 브루투스는 죽이지 말라는 특별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만일 그가 항복하면 자기에게 데려오고, 끝까지 저항하더라도 절대로 다치게 하지 말고 도망가도록 놓아두라고 했다. 카이사르가 이렇게까지 한 것은, 브루투스 어머니인 세르빌리아 때문이었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젊은 시절에 세르빌리아를 알게 되어 한때 서로 깊이 사랑했던 사이였다. 브루투스가 태어난 것도 바로 그 무렵 일이었으므로 카이사르는 어쩌면 그가 자기 아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언젠가 로마를 뒤엎으려는 카틸리나의 음모를 밝히기 위해 원로원에서 회의가 열렸을 때였다. 서로 반대 의견을 주장하던 카토와 카이사르는 열띤 논쟁을 벌였다. 그때 카이사르에게 쪽지 한 장이 전해졌고, 이를 본 카토는 분명히 적과 내통하는 자들로부터 온 편지일 것이라며 카이사를 공격했다. 다른 의원들까지 카이사르를 몰아세웠으므로 카이사르는 하는 수 없이 그 쪽지를 카토에게 넘겨주었다. 그런데 그것은 카토의 누이인 세르빌리아가 카이사르에게 보낸 사랑의 편지였다. 카토는 그 편지를 카이사르에게 도로 던져주며 이렇게 말했다.

 

"에이, 술주정꾼 같으니라고. 어서 가져가게."


카토는 다시 회의에 정신을 쏟았다. 카이사르와 세르빌리아의 사랑 이야기는 이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모두 알려졌을 만큼 유명했다.(1775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마르쿠스 브루투스 편>

 

 

이쯤에서 다시 셰익스피어에게 돌아가자. 셰익스피어가 쓴『줄리어스 시저』에서는 여덞 명의 등장인물이 죽는다. 그들 가운데 카이사르가 맨 처음으로 죽고, 브루투스는 맨 나중에 죽는다. 이 극의 핵심 주제는 그토록 위대했던 두 사람이 왜 죽는지 그리고 그 죽음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 주제는 '이상주의'이다. 로마의 긴 역사를 통해 볼 때 브루투스만큼 '고귀한 성품'을 지닌 인물도 드물었다. 브루투스의 이상주의는 '공화정 옹호와 독재 반대'로 나타나면서 불가피하게 카이사르의 암살로 이어진다. 브루투스가 생각하는 공화정 최고의 가치는 '자유'였다. 그로서는 이 자유가 한 사람에게만 허용되는 '왕정'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유 수호'를 위해서 그는 기꺼이 자신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셰익스피어가 그려낸 '이상주의와 현실의 충돌'은 극의 도입부에서부터 선명하게 그려진다. 카이사르의 개선 장면에 열광하는 '로마 시민들'을 보고 한심해 하는 셰익스피어의 '대사'가 참으로 인상적이다.

 

 

왜 축하해? 그가 뭘 정복해서 가져오지?

어떤 조공 사신들이 포로 되어 묶인 채

전차 바퀴 장식하며 로마로 따라오지?

 

 

로마 시민들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폼페이우스가 개선할 때 그와 똑같은 식으로 열광했었다. 그런데 시저가 폼페이우스를 죽이고 돌아오는 지금도 반응은 역시 똑같았다. 로마의 군중들은 "목석 같은 멍청이, 짐승만도 못한 것들"이라고 욕을 잔뜩 먹었다. 물론 셰익스피어가 등장시킨 극중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서였다. 오로지 자신의 권력을 잡기 위해 서로 죽고 죽일 뿐인 국가 지도자를 보면서, 매번 똑같은 역할을 떠맡지만 '등장 인물'만 바뀔 뿐인데 거기에 매번 열광하는 로마 시민들을 셰익스피어는 그렇게 꾸짖었던 것이다.

 

이제부터는 '카이사르 암살'에 대한 브루투스의 태도를 살펴 보자. 브루투스가 처음부터 '카이사르 암살'을 주도했던 건 아니다. 그 사정을 자세히 살펴 보면 우리는 마르쿠스 브루투스의 먼 조상인 '유니우스 브루투스'까지도 이 사건에 희미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브루투스, 지금도 살아 계셨더라면!


그러나 브루투스가 카이사르 암살 음모를 꾸미게 된 까닭은 카시우스와는 좀 다르다. 그와 가까운 친구들과 시민들이 끊임없이 그를 설득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익명의 편지들이 그에게 쏟아졌던 것이다. 어떤 시민은 옛날에 왕정을 뒤엎었던 유니우스 브루투스 동상에 이런 글을 새기기도 했다.


"브루투스, 지금도 살아 계셨더라면!"

 

"브루투스, 우리는 당신이 필요해요."

 

그리고 법무관인 브루투스가 법정에 나갈 때면, 그의 자리에는 다음 같은 글이 적힌 쪽지들이 수북하게 쌓였다.

 

"브루투스, 아직도 잠자고 있는가?"

 

"당신이 진정한 브루투스인가?"

 

하지만 브루투스가 카이사를 암살하기로 마음먹게 된 결정적 까닭은 카이사르에게 아첨하는 이들의 경솔한 행동 때문이었다. 그들은 민중의 이름을 빌려 카이사르에게 온갖 영광을 주려 했고, 한밤에 몰래 카이사르 동상 위에 왕관을 씌워놓아, 집정관을 넘어서 왕으로 내세우려 했다. 그러나 이런 행동들은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왔는데, 이것은 카이사르 전기를 보면 잘 알 수 있다.(1779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마르쿠스 브루투스 편>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을 주도했던 인물은 브루투스의 의동생이었던 카시우스였다. 그는 처음엔 브루투스와 카이사르 사이의 돈독한 관계 때문에 브루투스에게 '자신의 의중'을 솔직히 밝힐 수 없었다. 오랫동안 브루투스를 암살 계획에 가담시킬 방법을 궁리하던 카시우스는 마침내 그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 카시우스가 브루투스를 설득하는 대사가 매우 길지만 거기에서도 역시 '또 한 명의 브루투스'가 빠지지 않았다.

 

 

 우리의 이 시저가 무엇을 먹었기에

이렇게 커졌지? 시대여, 넌 창피당했다!

로마여, 네 고귀한 혈통은 다 사라졌다!

대홍수 이래로 어느 한 시대가

한 사람만으로 유명한 적 있었단 말인가?

지금까지 로마를 얘기할 때 그 누가

그 넓은 거리가 한 사람만 품었다 할 수 있나?

오로지 한 사람만 있게 된 지금이야말로

진정한, 게다가 여지가 충분한 로마로다.

오, 자네와 난 선친들이 하는 얘기 들었지,

일찍이 또 한 명의 브루투스는 로마에서

왕이 쉽게 자기 옥좌 지키게 하느니

영원한 마왕이 그러도록 놔뒀을 거라고.

 

(『줄리어스 시저 』, <1막 2장>)

 

 

셰익스피어가 『줄리어스 시저』를 쓰면서 참고한 책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었다. 그는 플루타르코스가 쓴 원전을 조금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도 '원작'보다 훨씬 더 생생한 극작품을 탄생시켰다. 그것도 오로지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통해서 말이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플루타르코스는 과연 어떻게 썼는지 살펴 보면 셰익스피어의 극작품이 얼마나 독자들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자극하는지 금세 알 수 있을 것이다.

 

마르쿠스 브루투스의 조상은 유니우스 브루투스이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타르퀴니우스를 쫓아내고 왕정을 몰락시킴으로, 로마인들은 그가 칼을 빼들고 선 동상을 카피톨리움에 있는 왕들 동상 사이에 세웠다. 성격이 지나치게 강직한 그는 남들과 타협하지 않았으며 학문으로도 그런 성격을 누그러뜨리기는커녕 오히려 독재자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독재자와 공모한 자기 아들들까지 모두 사형시켰다.

 

그러나 이제부터 쓰려는 브루투스는 성격이 유순한 데다가 철학과 학문을 갈고닦아 더할 나위 없이 조화롭고 훌륭한 인격을 갖춘 인물이다. 그는 이러한 성품으로 나랏일에 헌신했으며, 그 때문에 사람들은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뒤에 좋은 일들은 모두 브루투스 공으로 돌리고, 나쁘거나 잔인한 일들은 브루투스의 친척이자 친구인 카시우스 잘못으로 돌렸다. 그만큼 카시우스는 정직함이나 동기의 순수함에서 브루투스를 따라가지 못했다. ……

 

브루투스의 어머니 세르빌리아는 철학자 카토와 남매 사이였다. 브루투스는 로마 사람들 가운데 외삼촌인 카토를 가장 존경했으며, 뒷날 카토의 딸 포르키아를 아내로 삼았다.(1772∼1773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마르쿠스 브루투스 편>

 

이렇게 해서 마침내 브루투스가 카이사르 암살 계획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런데 암살에 가담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나자 '비밀 유지'가 무엇보다 관건이 되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훗날 마키아벨리가 『로마사론』의 한 장을 할애했던 <음모에 대하여>에서도 '카이사르 암살 음모의 장애 요인'에 대해 별도로 분석할 정도였다. 브루투스가 어느날부터인가 갑자기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걸 가장 먼저 눈치챈 사람은 그의 아내 포르키아였다.

 

브루투스는 이제 용맹과 문벌에서 로마 으뜸가는 인물들 운명이 모두 자기 한 사람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집 밖에서는 행동을 조심하면서 여느 때처럼 일을 처리했지만, 일단 집 안에 들어온 뒤에는 여러 문제들로 고민하며 밤을 꼬박 새기도 했다. 그러나 한방을 쓰는 아내가 이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이 중대한 문제로 고민하고 있거나, 아니면 매우 위험한 일을 계획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브루투스의 아내 포르키아는 카토의 딸로, 두 사람은 사촌 간이었다. 포르키아는 젊었을 때 첫 남편이 죽자, 어린 아들 비불루스를 데리고 브루투스와 재혼했다. 비불루스는 뒷날 《브루투스 회상록》을 남기기도 했다.

 

남편과 마찬가지로 철학을 사랑했으며, 용기도 뛰어나고 이해심도 넓었던 포르키아는 남편에게 비밀을 묻기 전에 먼저 자기 의지력을 시험하기로 했다. 그녀는 시녀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낸 다음 손톱을 깎는 날카로운 칼로 자신의 허벅지를 세게 찔렀다. 많은 피가 쏟아졌고, 심한 통증에 포르키아는 온몸을 덜덜 떨었다. 포르키아는 자신을 간호하는 브루투스에게 통증을 참으며 이렇게 말했다.

 

"브루투스, 나는 카토의 딸이에요. 내가 당신과 결혼한 것은 당신과 잠자리나 하려던 것이 아니라 운명을 함께하기 위해서였지요. 이제껏 우리는 잘 지내왔고 당신도 잘못한 게 없었어요. 그러나 지금 당신은 무언가로 무척 괴로워하면서도 내게는 말 한 마디 안 하고 있어요. 물론 당신이 나를 걱정하기 때문이라는 걸 잘 알아요. 그런 중대한 일이라면 비밀과 믿음이 꼭 지켜져야 하겠지만, 나는 무슨 일인지 알아야겠어요. 당신에게 나의 사랑을 증명할 기회를 주세요. 본디 여자들은 마음이 약해 비밀을 잘 지키지 못한다는 건 나도 알아요. 그러나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바른 교육을 받고 훌륭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다 보면 여자들도 달라지는 법이에요. 나는 카토의 딸이고, 브루투스의 아내예요. 그리고 나는 이 사실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그 전에는 내가 정말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러웠지만, 이제 나 스스로 시험해 보니 어떤 고통도 참고 이겨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러고는 허벅지 상처를 남편에게 보여주며, 이것은 자신의 의지를 시험한 증거라 털어놓았다. 브루투스는 깜짝 놀라더니, 포르키아에게 부끄럽지 않은 남편이 되고, 자기 계획에 신의 축복이 있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포르키아에게 자신의 계획을 모두 알려주었다.(1782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마르쿠스 브루투스 편>

 

 

포르키아와 브루투스, 19세기경, 발랑시엔 미술관

펠릭스 오브레(1800∼1833, 프랑스)

 

카이사르 암살은 결국 성공했고, 브루투스는 로마 시민들을 상대로 '암살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명연설을 했으나 이 모든 노고가 로마 시민들을 향한 '안토니우스의 선동'으로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었다.(카이사르 암살 직후에 안토니우스가 취한 놀라운 행동과 로마 시민들을 격분시키는 명연설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에서도 특히 돋보이는 장면이다.) 

 

브루투스에게는 졸지에 '카이사르 살해자'라는 오명이 씌어졌다. 그는 안토니우스와 간신히 타협하여 마케도니아 속주 총독 자격으로 망명하듯 길을 떠났다. 로마에서는 옥타비아누스가 급부상하면서 안토니우스와 손잡고 암살 공모자들에 대한 복수에 나섰다. 오늘날 동부 마케도니아에 위치한 '필리피 전투'에서 브루투스는 잘 싸우고도 전황을 오판하여 끝내 자결하고 만다. 그의 죽음과 함께 '로마 공화정'도 끝나고 말았다. 브루투스의 죽음은 결코 그 혼자만의 죽음이 아닌 셈이었다. 남편의 소식을 들은 카토의 딸 포르키아도 남편 못지 않게 인상적인 죽음을 택했다.

 

한편 브루투스의 시신은 안토니우스에게 발견되었다. 안토니우스는 그의 시신을 가장 값진 자줏빛 옷으로 감싸도록 했으며, 그 뒤 그의 유골은 어머니인 세르빌리아에게 보냈다.

 

브루투스의 아내 포르키아는 몇 번이나 목숨을 끊으려 했지만, 친구들 감시 때문에 도저히 죽을 수가 없었다. 끝내 그녀는 벌겋게 달아오른 숯덩이를 입에 물고 질식해 죽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철학자 니콜라우스와 역사가 발레레우스 막시무스 기록에 나와 있다.(1814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마르쿠스 브루투스 편>

 

 

포르키아, 카토의 딸, 브루투스의 부인(Porcie, fille de Caton d'Utique, épouse de Brutus)

 17세기경, 베르사이유와 드리아농 궁

 

셰익스피어는 '안토니우스의 입'을 빌려 브루투스의 죽음을 각별하게 애도했다.

 

 안토니

이 사람이 그들 중 가장 귀한 로마인이었다.

그를 뺀 나머지 공모자들 모두는

위대한 시저에게 악심 품고 그 짓 했다.

오직 그만 공적이고 정직한 생각에서

모두의 공익을 위하여 한 패가 되었다.

그의 삶은 고귀했고 인성은 완벽하여

자연의 여신조차 일이서서 온 세상에

'이게 사람이었다.'라고 했을 것이다.

 

(『줄리이서 시저』, <5막 5장>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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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투스를 아낀 사람은 안토니우스 말고도 여럿이 더 있었다. 플루타르코스가 전하는 다음의 '일화'도 흥미롭다.

 

알프스 내륙의 갈리아 지방에는 오늘날까지도 브루투스 동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카이사르는 브루투스가 죽고 나서 몇 년 뒤에 이곳을 지나다가 그 동상을 발견했는데, 브루투스 얼굴과 너무나 비숫한 훌륭한 작품이었다. 카이사르는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여러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그곳 관리를 꾸짖었다. 이 도시가 적을 숭배하고 있으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관리들은 절대 그런 일이 없다면서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러자 카이사르는 브루투스 동상을 가리키며 눈살을 찌푸렸다.

 

"보시오! 저기에 우리의 적이 서 있지 않소?"

 

이 말을 들은 관리들은 더욱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카이사르는 얼굴에 미소를 띠면서, 불행한 처지에 놓인 친구라 할지라도 그 사람에 대한 의리를 잃지 않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라며 갈리아 사람들을 칭찬했다. 그리고 그 동상을 영원히 보존하라고 명령했다.(1818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디온과 브루투스의 비교>

 

 

 - 마르쿠스 브루투스(기원전 85∼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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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마지막으로 '브루투스 가문'의 인물들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평가를 살펴볼 차례다. 브루투스 가문의 사람들만큼 '로마의 역사'에 깊은 영향을 준 인물도 흔치 않다. 마키아벨리의 얘기를 들어 보면 "브루투스, 너 마저?"라는 짧은 대사에 담긴 의미가 얼마나 다양한 함의를 지니는지를 새삼 느낄 수 있다.

 

 

속속들이 썩어버렸기 때문

 

로마의 실례만큼 이 점에 꼭 맞는 것은 달리 없을 것이다. 타르키니우스 가를 멸망시킨 뒤 로마는 곧바로 자유를 획득하여 이를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나 가이우스 칼리굴라, 그리고 네로가 죽고 카이사르의 혈통이 완전히 절멸한 뒤에 로마는 자유를 유지하기는 커녕 그에 한 발도 접근할 수 없었다. 같은 도시를 무대로 해서 같은 조건 아래 생긴 일인데도 결과가 아주 정반대로 되어 버린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즉 타르키니우스 시대에는 로마인이 아직 그다지 타락해 있지 않았던 데 비해, 카이사르 시대에는 속속들이 썩어 있었다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타르키니우스 시대에는 로마의 민중으로 하여금 국왕의 압제 정치를 물리치고자 굳게 결의시키는 대신, '로마에서는 앞으로 어떤 왕도 통치할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민중에게 맹세시키는 일만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 시대가 되자 전 오리엔트의 지지를 배경으로 가진 브루투스의 권력이나 가혹함을 가지고도 로마 민중을 분기시켜서 자유를 지키게 할 수는 없었다. 이 브루투스는 초대 브루투스를 본받아서 로마 민중에게 자유를 되돌려주려고 노력한 인물이다. 이처럼 자유를 회복하는 일에 성공하지 못한 것은 그때까지 가이우스 마리우스 일파가 민중에게 심어 놓은 타락한 풍조 때문이다. 그리고 마리우스의 평민당 수령이 된 카이사르는 교묘하게 민중의 눈을 가려 버렸기 때문에, 그들은 목에 칼을 쓰고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이상과 같은 로마의 실례에 대해서는 다른 어떤 예를 꺼낸다 해도 맞설 수 없는 것이지만 나는 이 점을 둘러싸고 현대의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생생한 실례를 열거해 보고자 한다. 즉 천지가 뒤집힐 대소동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밀라노나 나폴리가 두 번 다시 자유를 손아귀에 넣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두 국민은 속속들이 썩어 버렸기 때문이다.(207쪽)

 

 - 마키아벨리, 『로마사론』,

   제1권 제17장 <퇴폐한 민중은 해방된다 하더라도 자유를 유지해 나가기가 매우 어렵다>

 

 

오랫동안 한 군주 밑에서만 통치되어 온 민중이, 타르키니우스 추방 뒤의 로마처럼 우연한 계기로 자유로운 몸이 된다 하더라도 그 자유를 유지해 나가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역사 속의 숱한 실례만 보더라도 명백한 일이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유 때문이다. 즉 이런 국민은 본래 거친 야생의 맹수가 우리에 갇혀 사육되어 온 것과 비슷하다. 이런 짐승은 어쩌다가 들판에 놓여지더라도 어떻게 먹이를 찾아야 할지 어디에 숨어야 할지 도무지 모르기 때문에, 잡으려고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지 문제없이 잡을 수 있다.(202쪽)

 

 - 마키아벨리, 『로마사론』,

   제1권 제16장 <군주정치의 지배를 감수하는 민중은 해방된다 하더라도 자유를 유지하기 곤란하다> 

 

 

훌륭한 일을 수행했기 때문에 그 철저한 배려와 현명함을 높이 찬양받는 인물이라 하더라도,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바보처럼 가장하고 수행한 그 행동에는 가까이 따라갈 수 없으리라 생각된다.

 

티투스 리비우스는 브루투스가 그런 짓을 한 것은 자기의 몸의 안전과 집안의 대를 지켜 나가기 위해서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브루투스가 한 행동을 생각해 보면, 그가 바보를 가장하고 있었던 것은 자신의 속셈을 눈치채이지 않으려는 수단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는 왕을 타도하고 로마를 해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아폴로 신전의 신탁에 대한 해석 방법을 보면 그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탁을 받을 때 그는 자기의 계획에 신의 가호를 얻을 수 있게 하기 위해 일부러 발부리를 차고 넘어져서 남몰래 어머니인 대지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루크레티아의 죽음에 즈음해서는, 아버지와 그의 남편과 그 밖의 친척들이 모인 가운데서 맨 먼저 그 상처에서 단도를 뽑고는, 앞으로는 어떤 왕의 지배도 로마에서는 용납하지 않는다는 맹세를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시켰다.

 

이 브루투스의 고사는, 군주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배워야 할 일이다. 즉 우선 자기 자신의 실력을 측량해야 한다. 그리하여 상대를 적으로 맞아 당당하게 싸워 나갈 만한 확신이 설 만큼 자기의 실력이 갖추어져 있다면 당연히 싸움에 돌입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위험이 적은 자랑스러운 행동이라 할 수 있겠다.(434쪽)

 

- 마키아벨리, 『로마사론』,

   제3권 제2장 <백치를 가장하는 것이 때로는 가장 현명할지도 모른다>

 


 

 

타르키니우스 수페르부스는 아주 가증스런 방법으로 왕국을 손에 넣었다. 그렇다고는 하나 그가 이전의 왕들의 유훈에만 따랐더라도 그의 입장은 그대로 용인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원로원과 평민이 힘을 합해서 그의 손으로부터 국가를 빼앗는 사태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추방된 것도 그의 아들 세스투스가 루크레티아에게 무례함을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본인 자신이 국법을 유린하고 제멋대로 폭정을 폈기 때문이다.

 

(중략)

 

앞에서 말한 루크레티아에 대한, 아들 세스투스의 능욕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뭔가 다른 사건이 벌어져서 결국은 같은 결과가 되었을 것이다. 타르키니우스 자신이 자중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그 때까지의 국왕과 변함 없는 행동을 했더라면, 아들 세스투스가 실수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브루투스도 코라티누스도 세스투스에게 복수하겠다는 것을 타르키니우스에게 호소했을 뿐이지 인민에게 호소해서까지 그와 같은 행동을 일으킬 리는 없었다.


따라서 옛날부터 오랜 세월에 걸쳐서 사람들이 익혀 온 법률이나 제도나 습관을 군주 스스로 깨뜨렸을 때 국가는 그의 수중으로부터 떠나기 시작한다는 것을 군주는 명심해야 한다.

 

군주의 권위를 박탈당한 뒤에야, 그때 순순히 충언을 들었더라면 왕국을 유지해 나가기가 쉬웠을 텐데 하고 아무리 후회해 봤자, 국가를 잃었다는 슬픔만 점점 더 더해갈 것이다. 이런 자책감은 어떤 벌보다도 더 뼈에 사무칠 것이다.(438∼439쪽)

 

 - 마키아벨리, 『로마사론』,

   제3권 제5장 <국왕이 세습한 왕국을 잃는 이유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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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투스와 소(小)카토에 대한 마키아벨리(1469∼1527)의 드높은 평가를 곧바로 이어받은 인물은 프랑스 사람 몽테뉴(1533∼1592)였다. 그가 마키아벨리의 『로마사론』을 읽었는지는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다만, 몽테뉴가 마키아벨리만큼 '로마사'에 정통했다는 점은 명확하다. 그러니 그 두 사람의 판단이 결코 다를 수가 없었다.

 

 

브루투스의 경우 439

나는 브루투스가 도덕에 관해서 쓴 저작이 소실된 것을 수백 번은 애석하게 여겼다. 왜냐하면 실천을 잘할 줄 아는 인물의 이론을 알아두는 것은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교와 설교자는 같은 것이 아닌 만큼, 나는 브루투스를 플루타르크의 저서에서나 그 자신의 저서에서나 마찬가지로 읽어 보고 싶다. 나는 차라리 그가 전투한 다음 날 자기 군대에게 해 준 언행보다, 전투하기 전날 자기 천막 속에서 친한 친구 하나와 흉금을 털어놓고 하던 이야기를 알고 싶으며, 그가 자기 사무실이나 방에서 하던 일을, 그가 광장이나 원로원에서 하던 일보다 더 알고 싶다.

 

 

 

esse videatur 440

모든 점을 참고해 보고, 그의 웅변을 비길 바 없는 것으로 평가한 사람들 속에서도 그의 웅변에 흠이 있는 것을 간과하지 않은 자들이 있었다. 그의 친구였던 저 위대한 브루투스도 그의 것을 '부서지고 허리 부러진' 웅변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의 세기와 가까운 시대의 웅변가들도 역시 그가 문장의 끝에 붙이는 기다란 시가에 다는 운을 각별히 유의해서 집어넣는 버릇을 꼬집으며, esse videatur(그런 듯싶을 것이다)라는 말을 자주 쓰는 것을 지적하였다. 나로서는 장단격으로 짧게 떨어지는 음절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그는 드물기는 하지만 음절의 수를 가끔 뒤섞는 일이 있다. 나는 그의 문장에, "나로서는 늙기 전에 늙는 것보다는 늙고 나서 오래 있지 않는 편이 낫다"(키케로)라는 말이 귀에 거슬렸다.

 

 

 

키케로와 브루투스 786

나는 옛 사람들의 문장에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쓰는 자는, 그런 생각을 가진 체하고 말하는 자보다 더 강한 감명을 주는 것에 주목한다. 키케로가 자유애(自由愛)에 관해서 말하는 것을 들어 보라. 브루투스가 같은 제목으로 말하는 것을 들어 보라. 그 문장에서, 이 후자는 생명을 내걸고 자유를 살 인물이라는 것이 울려 온다.

 

 

 

 

적당하게 살아가는 일 1239∼1240

본성이 자기를 나타내고 계발하기 위해서는 운수 따위는 상대할 거리도 안 된다. 본성은 모든 층계에서 똑같이, 마치 장막이 없는 것처럼 그 뒷면까지도 나타내 보인다. 계락을 꾸밀 것이 아니라, 행동 습관을 꾸미는 것이 우리가 할 업무이다. 전쟁에 승리하여 영토를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 행실에 질서와 안정을 얻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우리의 영광스럽고 위대한 걸작은 우리가 적당하게 살아가는 일이다. 지배한다, 재물을 모은다, 건설한다는 따위의 모든 일들은 기껏했자 부수적이며 부차적인 데 지나지 않는다.

나는 한 군대의 장군이 방금 공격하려고 하는 돌격구(突擊口) 아래에서, 친구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서 마음을 터놓고 한가로이 담소하는 장면이나, 천지가 자기와 로마의 자유에 반대해서 음모를 꾸미고 있는 때에 브루투스가 순회 근무에서 물러나와 밤의 몇 시간을 안심하고 사학자 폴리비오스를 읽으며 주(註)를 달던 모습을 보는 것이 즐겁다. 하찮은 심령들이나 자기 일의 무거운 부담에 눌려 지내며, 그런 일에서 완전히 풀려나와 채워 두었다가 다시 잡아서 처리할 줄 모르는 것이다.

오오, 나와 함께 가장 독한 시련을 겪어 온 용감한 전사여,
오늘은 그대 근심을 술잔에 담그라.
내일 우리는 망망한 대해로 배 띄워 나가리라.
                                                                       (호라티우스)

 

 

 

요즈음 사람들 252

우리의 판단력은 병들어서 타락한 풍속을 좇고 있다. 우리는 대부분 우리 시대의 정신들이 옛 사람들의 행동을 비굴하게 해석하고 그들에게 헛된 사정과 원인들이나 꾸며 붙이며, 고대의 아름답고 후덕한 행적들의 영광을 더럽히는 약은 꾀만 쓰는 것을 본다.

위대한 재간이지! 글쎄, 가장 훌륭하고 순결한 행동을 내놓아 보라. 그러면 나는 거기 그럴듯하게 50가지 나쁜 의향을 꾸며 댈 것이다. 거짓말을 펴 보려고 하는 자에 의해서, 우리 속마음의 의도가 얼마나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해갈 것인가는 하느님만이 아신다. 그들은 남을 모함하는 데는 심술궂기보다도 더 둔중하고 상스럽게 재간을 부린다.

사람들이 이런 위대한 이름들을 깎아 내리는 데 쓰는 수고로, 그와 똑같이 방자하게 나는 이런 이름들을 높이는 데 수고하며 어깨를 빌려 줄 것이다. 그 희귀한 모습들은 현자들의 동의를 얻어서 세상의 모범으로 추려낸 것이니, 나는 이 이름들에 영광을 다시 살려 주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능력을 다하며, 유리한 사정으로 해석해 보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사색 노력은 그들의 가치를 이해할 힘이 너무나 부족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세상에 있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도덕을 묘사하는 일은 착한 사람들의 임무이다. 그리고 이렇게 거룩한 모범을 위해서 감격하며 열중하는 것은 우리에게 맞지 않는 일도 아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이와 반대로 하는 수작은 악의로 하거나, 또는 지금 내가 말한 바 인물들의 신용을 자기들 수준으로 끌어내리려는 악덕에서 하거나, 또는 차라리 이렇게 생각해 보고 싶지만, 찬란한 도덕을 그 소박한 순결성대로 생각해 볼 수 있을 만큼 이해력이 강력하고 명석하지 못하고 그러한 훈련도 받은 일이 없는 탓이다. 마치 플루타르크가 말하는 바, 그의 시대에 어떤 자들이 작은 카토의 죽음의 원인을 카이사르가 무서워서 그랬다고 하는 따위이다. 거기에 대해서 플루타르크가 분개한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이것으로도, 이 죽음을 야심뿐이라고 해석하는 자들에 대해 그가 얼마나 분개하고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아름답고 후덕하고 정당한 행동을 그는 영광을 얻기 위해서보다는 차리리 세상의 추악함을 더럽게 생각하여 버렸을 것이다.

이 인물은 진실로 인간의 도덕과 지조가 어느 정도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를 보여 주기 위해 대자연이 골라 놓은 시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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