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읽기

 


"그들은 말한다, 오디세우스, 놀라움에 지친 그가

사랑 때문에 곧장 다시 울었다고. 그의 이타카가

소박하고 푸르른 걸 보고서, 예술이란 마치 이타카,

단순한 놀라움이 아닌, 영원한 푸르름의 이타카 같은 것."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시학』(1958)에서

 

 * * *


책을 읽다가 반가운 작가와 작품을 만나면 옛 친구를 만나는 것처럼 반갑다. 작품 속의 주인공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문학작품이 꾸며낸 놀라운 주인공들은 사실 작가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고 다채롭다. 누가 돈키호테와 산초의 이름을 듣고도 여전히 따분하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겠는가. 누가 로빈슨 크루소의 얘기를 듣고도 그저 무덤덤할 수 있겠는가.

 

문학이 창조한 숱한 인물들 가운데 내가 다른 책에서 마주칠 때 가장 반가운 인물은 단연 오뒷세우스다. 그 사람보다 더 다채로운 인물이 누가 있을까를 나는 항상 궁금해 한다. 그의 진면목을 아는 데는 그 사람을 다룬 작품을 읽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다. 어떤 사람의 조언에도 아랑곳없이 곧장 그 인물을 만나러 곧바로 '작품 속으로' 뛰어드는 게 가장 좋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견해가 독자들의 순수한(?) 만남을 살짝 방해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늘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다. 그를 만나기 위해 들춰야 할 책들은 쉽게 깨지지 않는 단단한 호두껍질을 외피로 두른 듯 읽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가끔씩은 올려다 볼수록 까마득한 바위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느낌을 주는 책 가운데는 제임스 조이스의『율리시스』가 대표적이다. 나도 맨 처음 그 책을 펼쳤을 땐 '이게 과연 책인가' 싶은 느낌부터 들었다. 알프스의 융프라우를 오를 때 잠시 기차 밖으로 내다봤던 그 유명한 '아이거 북벽'을 연상시킬 정도로 강렬했다. 한마디로 아찔했다.

(내가 읽은 책들 가운데 '오뒷세우스'가 핵심 인물로 등장하는 책들만 모아봤다. 단테의 『신곡』, 『테니슨 시선』,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등은 그런 종류의 책이 아니라고 누군가 반문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저 책들은 '오뒷세우스'를 빼고는 결코 얘기할 수 없는 명백한 이유들을 가지고 있다. 그런 내용들을 이 글에 담았기에 저 책들을 사진에 포함시켰다. '호메로스 서사시의 현대판 속편'으로 불리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오디세이아』는 아직까지도 '작품 해설' 정도만 읽어 본 채 도로 덮어 두고 있다. 어느날 문득 오뒷세우스가 몹시 그리울 때 카잔차키스의 저 책을 펼칠 날이 있으리라 믿는다.)


그런데 오뒷세우스는 마냥 외면하기에는 너무나 매력적인 인물이다. 한 번 그와 사귀고 나면 계속해서 그를 찾을 수밖에 없게 된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일리아스』 와 『오뒷세이아』를 통해서였다. 그 뒤로는 한동안 그를 만날 일이 좀처럼 없었다. 왜냐하면 호메로스의 작품은 너무나도 훌륭한 고전이라고 다들 한결같이 말했기 때문에 어떤 의무감으로 읽은 책이지 정말 그 책에 담긴 이야기가 궁금해서 견디지 못해 찾아 읽은 책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청년기때 너무나도 얄팍한 독서 경험만 지닌 채로 그 책을 읽었기 때문에 오뒷세우스에 대한 온갖 매력을 충분히 느끼지도 못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그 책으로부터 흘러나온 강물이 오랜 세월에 걸쳐 온 대지를 적시고 산봉우리들을 휘감아 돌면서 멋진 풍광들을 만들어 내는 동안, 나는 오뒷세우스를 다룬 걸작들을 애써 찾아 읽을 생각을 거의 떠올리지 못했던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오래 전에 헤어졌던 옛 친구도 우연히 다시 만나는 법이다. 책과의 인연도 그와 닮은 듯하다. 어쩌다 세월이 흐르고 보니 나도 '오뒷세우스'를 옛 친구 만나듯이 그렇게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 옛날 어떤 의무감과 호기심이 적당한 비율로 뒤섞인 상태에서 엉덩이를 슬쩍 뒤로 빼고 읽었던 그 책에 담겼던 그 오뒷세우스를 말이다.


어떨 땐 그 인물이 시(詩) 속에서도 발견되었다. 어떨 땐 그리스 비극 속의 조연으로도 내 앞에 불쑥 나타났다.(소포클레스의 비극 『필록테테스』와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트로이아 여인들』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그 인물이 내 앞에 거대한 존재로 다시 부각된 건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스』를 읽을 때였다. 그 엄청난 소설은 호메로스-단테-셰익스피어-테니슨 등등으로 면면히 이어진 '오뒷세우스의 문학 여정'이 없었더라면 결코 탄생할 수 없는 작품이었고, 제임스 조이스에 이르러 마침내 거대한 봉우리 하나가 불쑥 솟아 오른 것도 기나긴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호메로스의 샘'이 있었기 때문이고, 까마득한 옛날 트로이 전쟁 때 거대한 목마 속에 무장병사들을 숨겨 '적의 힘으로 적진 속으로 잠입하는 작전'을 머리에 떠올린 꾀많은 오뒷세우스가 전쟁터에서 죽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가 귀향길에서 온갖 풍랑과 고난을 겪으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고 고향으로 살아 돌아왔기 때문이고, 이타케 섬으로 돌아와 아귀같은 연적이자 정적들을 모조리 물리치고 왕위를 되찾았으면서도 기어코 자신의 모험을 거기서 끝내지 않고 미지로의 새로운 모험을 계속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바로 그 '포기할 줄 모르는 불굴의 용기와 모험심을 지닌 오뒷세우스'가 정말 좋았다. 그만큼 다채로운 인물을 나는 다른 어떤 작품에서도 결코 만날 수 없었다.


오뒷세우스를 다룬 작품에 곧바로 뛰어들지 못해 아직까지도 그를 제대로 만나지 못한 독자들이라면 '독서 대가들'의 '진솔한 체험담'으로부터 많은 힌트를 얻을 수도 있다. 그의 매력적인 면모를 만끽하기 위해 어느 성급한 독자가 제임스 조이스의『율리시스』를 펼칠 수도 있다. 그러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는 오뒷세우스를 닮은 인물조차도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오뒷세우스와 페넬로페(아내)와 텔레마코스(아들)에 해당하는 인물인 블룸(남자 주인공)과 몰리(블룸의 아내이자 여주인공)와 스티븐(블룸의 아들 격인 또다른 주인공)이 그 소설의 주인공이긴 하다. 그러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는 가능하다면 다른 책들을 충분히 읽고 난 뒤에 펼쳐도 결코 늦지 않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 책에는 '독서 체험'이 많은 사람들일수록 그 책을 읽는 기쁨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기묘한 장치들'이 수없이 많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 책은 쉽게 말하자면 수십 개, 혹은 수백 개의 문이 달린 책이라고 말해도 좋다. 어떤 문은 아무리 열려고 애를 써도 열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꾸준히 책을 읽은 독자들이라면 틀림없이 수십 개의 문들을 쉽게 밀치고 들어갈 수 있으며, 그 문을 통해서 또다른 통로로 이어진 수많은 문들을 끊임없이 계속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클리프턴 패디먼의 지적은 백 번 옳다. '『오뒷세이아』와는 다르게, 이 책은 읽으면 알 수 있는 책이 아니다. 베토벤의 후기 현악 4중주곡들이 오래 듣고 연구할수록 그 풍부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듯이, 오로지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만 그 비밀스러운 뜻을 드러내는' 그런 책이다.


어쩌다가 내 얘기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쪽으로 너무 치우친 듯하다. 그 책을 읽고 나서 후끈 달아올라 '멋진 서평'을 쓰겠다고 잔뜩 벼르다가도 그만 그 책을 다 읽고 나서 너무 성급하게 다른 책을 붙잡는 바람에 서평 쓰는 최적의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는데, 그 아쉬움을 내가 이 글을 통해 뒤늦게나마 잔뜩 풀어놓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 당시 서평을 쓰기 위해 내가 다시금 펼쳤던 책 가운데는 알베르토 망겔의『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이펙트』와 단테의 『신곡』도 있었다. 그 부분을 이번 기회에 밑줄긋기로나마 옮겨 본다. 느닷없이 이런 글을 쓰게 된 직접적 동기는 헤럴드 블룸의 『교양인의 책읽기』때문이었다. 그 책 속에서 앨프리드 테니슨의「율리시스」를 다시 만났기 때문이다. 그의 시를 책에서 만난 건 이번이 네 번째인 듯한데, 그 시를 읽을 때마다 내 가슴도 여전히 울렁거리는 걸 느낀다. 그 옛날 한 때는 격하게 울렁거릴 때도 있었다. 아마도 테니슨의 시를 내 글에 맨 처음으로 인용할 때가 특히 더 그랬던 듯하다. 벌써 희미한 옛 추억으로 변한 듯하지만 말이다.


 * * *

(밑줄긋기)

 

젊은 시절, 그러니까 지금보다 더 인내심이 있었던 교수 시절에 나는 예일 대학에서 빅토리아 시대의 시를 강의하면서 학생들에게 테니슨의 뛰어난 극적 독백 「율리시즈Ulysses」를 외우자고 제안했다. 그 시는 외울 만한 가치가 있고 외우고 있으면 그 사실만으로도 비판적 통찰력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그 시는 '율리시즈'가 등장하는 다른 시들을 떠오르게 한다. 호머의 『오디세이Odyssey』, 단테의 『신곡La Divina Commedia』중 「지옥Inferno」, 셰익스피어의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Troilus and Cressida』, 그리고 밀턴의 실낙원에 등장하는 사탄으로 변형된 율리시즈 등.

 

테니슨은 가장 친한 친구였던 아서 헨리 할람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에 빠졌지만 「율리시즈」를 통해 의도적으로 삶을 계속해야 하는 필요성을 표현했다. 테니슨이 쓴 멋진 시들 중에는 「인 메모리엄In Memoriam」이나 「아서의 죽음Morte d' Arthur」처럼 아서에 대한 비가로 구성된 작품들이 많다.

 

(중략)

 

나이 든 많은 남자들은 수세기에 걸쳐 남들에게는 아니겠지만 이런 영웅적인 태도로 자기 삶을 반추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율리시즈는 이기적이기는 하지만 대단한 웅변가여서 그를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우리는 쉽게 그 생각을 바꾸고 만다.


 

나는 여행을 그만두고 쉴 수가 없어:

인생의 술잔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모두 마셔야 해, 언제나 나는

큰 기쁨과 고통을 맛보았지,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또는 혼자서, 육지에 있을 때나 거친 물살을 뚫고 비를 실은 하이데스 성좌가

희미하게 보이는 바다를 분노케 할 때에도: 나는 이름을 얻었지

언제나 굶주린 가슴을 안고 방랑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알게 되었어:도시들과

색다른 풍물과 기후, 지방과 중앙의 평의회들

그리고 그 중에서 무시당하지 않고 영예를 누린 나 자신도:

그리고 내 적수들과 겪은 전투의 기쁨도 맛보았지,

저 멀리 칼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는 바람 거센 트로이의 전쟁터에서,

나는 내가 겪은 모든 일에서 나름의 역할을 했지.

그러나 모든 경험은 하나의 아치, 그것을 통해

아직 여행해 보지 못한 저 미지의 세계가 빛난다, 그 세계의 지평은

내가 움직일 때마다 영원히 사라진다.

얼마나 지리한 삶인가, 여행을 중지하고 끝장낸다는 건!

닦지 않고 녹슬게 내버려 두고, 써서 빛내지 않는다는 건!

마치 숨쉬는 것이 인생인 양! 삶 위에 삶을 쌓는다는 건

너무나 보람없는 일일 거야. 그리고 이제 내게 그러한 삶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시간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줄 수 있다면

저 영원한 침묵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3년이란 세월을 이곳에서 썩는다면 죄악일 거야.

이 백발의 정신이 열망하는 것은

진리를 따라 유성처럼

인간 사고의 극한 그 너머로 가는 것일진대.


 

독자는 이 시에서 저항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하게 자신이 영웅과 동일시됨을 느낀다. 이 부분의 에토스Ethos(예술 작품의 윤리성)는 헤밍웨이적 코드, 즉 삶은 마지막까지 지속되어야 함을 예언하고 있다. 물론 헤밍웨이적 투우사나 사냥꾼을 율리시즈라는 영웅 중의 영웅과 비교할 수는 없다.

 

(중략)

 

테니슨이 원전으로 삼았던 것은 『오디세이』중의 영적인 극적 독백과는 다른 단테의 「지옥」칸토26이다. 여기에서 율리시즈는 계율을 위반한 모험가로 묘사되었다. 단테의 율리시즈는 남자를 돼지로 만든 마녀 키르케를 떠나지만 페넬로페와 이타카로 돌아가지 않고 알려진 세상의 끝 너머 지중해를 뚫고 마침내 대서양의 혼돈 속으로 들어간다.


저기 항구가 보인다. 돛이 바람에 부푼다.

저 망망대해에 어둠이 깔린다. 나의 선원들…

나와 고락을 같이하고, 함께 일하고, 함께 생각을 나눈 영혼들,

그대들은 언제나 장난스럽게 반가이 맞이했지 ㅡ

저 천둥과 햇볕을, 그리고 거침없는 가슴과 이마들을

서로 맺대었지 ㅡ 이제 그대들과 나는 늙었어.

허나 노년에도 그에 따르는 위엄이 있고 해야 할 과업이 있지.

죽음이 모든 것을 끝낸다. 그러나 그것이 오기 전에

무엇인가 고귀한 일을 할 수 있을 거야.

신들과 겨루었던 대장부에 손색이 없도록.

저 해안 절벽에서 등대 불이 반짝이기 시작하는군.

긴 하루가 저물어 가는구나: 큰 달덩이가 천천히 떠오른다.

깊은 바다는 수많은 소리를 내며 신음한다. 벗들이여, 떠나세.

신천지를 찾아가는 일이 아직 너무 늦지는 않았으니,

배를 바다로 밀어 내세. 모두 정위치에 자리를 잡고

노로 물결을 세게 쳐서 바다에 이랑을 만드세.

내 목표는 저 해지는 곳. 저녁 별들이 미역감는 곳 너머로 노 저어

가는 것이야 ㅡ 죽는 날까지

해류가 우리를 저 수평선 밑으로 휩쓸어 버릴지도 모르지.

아니면 극락에 기항할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거기서 옛날 우리가 알았던 저 위대한 아킬레스를 만나게 되겠지

지금 우리에게 많은 게 사라졌지만 아직도 많은 게 남아 있어.

이제 우린 옛날 천하를 호령하던 그 힘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역시 우린 우리야.

그건 한결 같은 영웅의 기개,

시간과 운명 때문에 약회되긴 했지만, 강한 의지를 가지고

노력하고 탐색하고 발견하면서 결코 굴복하지 않는 정신이야.

 

 

이 위대한 시를 어떻게 읽을까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야기한 듯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시를 계속해서 읽어야 할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위대한 시가 주는 즐거움은 실로 다양하다.


테니슨의 시 「율리시즈」는 내게 끝없는 즐거움을 준다. 우리가 타인과 교류를 하는 데 있어서 시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처럼 기묘한 때를 제외하고는 하나의 아름다운 이상Idelism일 뿐이다.

 

고독은 흔히 우리가 처한 상황을 나타낸다. 우리는 어떻게 그 고독 속에서 살 것인가? 시는 우리 자신에게 보다 명료하고 완전하게 말하며 그 말을 잘 엿들을 수 있도록 도와 준다. 셰익스피어는 그런 엿듣기의 대가였다. 그가 창조한 인물들은 테니슨의 율리시즈와 마찬가지로 그런 엿듣기에 있어 뛰어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타자, 혹은 우리 안의 가장 훌륭하고 오래된 누군가에게 말을 건다. 우리는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시를 읽는다. 그럼으로써 보다 충분히, 그리고 미묘하게 자신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106∼113쪽)

 

 - 헤럴드 블룸, 『교양인의 책읽기』, <2. 시> 중에서

 

(나의 생각)

 

앨프리드 테니슨의 「율리시스」를 책 속에서 만나는 건 테니슨의 시집을 포함하면 이번이 네 번째다. 이 시를 만날 때마다 언제나 반갑다. 이번에도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옮겨 본다.


 * * *


 

그런 사람이 단 한 번도 묘사된 적이 없다

 

조이스는 버젠에게 자신이 『오디세이아』에 기반을 둔 책을 하나 쓰고 있으며, '다재다능한 인물'의 일생 중 열여덟 시간을 다룰 것이라고 말했다. 조이스는 그런 사람이 단 한 번도 묘사된 적이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리스도, 햄릿, 파우스트 모두 삶의 완전한 경험이 결핍되어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여성과 함께 살아보지 못한 독신자로, 햄릿을 아들이었을 뿐 남편이나 아버지가 되어보지 못한 총각으로, 파우스트는 젊지도 늙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집이나 가족도 없이 '언제나 그를 자기 옆구리나 발꿈치에 매달고 다니는'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저지당하는 한심한 자로 내몰았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 목록을 채울 수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오디세우스는 '라에르테스에게는 아들이고, 텔레마코스에게는 아버지이며, 페넬로페에게는 남편이고, 칼립소에게는 연인이며, 트로이아를 포위한 그리스 전사들에게는 전우이고, 이타카의 백성들에게는 왕이었다. 그는 많은 고난을 당하지만, 지혜와 용기로 모든 것들을 이겨냈다. 더 나아가 조이스는 버젠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시켰다. 오디세우스가 전쟁터에서는 용감한 전사이며 끝까지 전투를 지켜보기로 결심했지만, 전쟁에 참여하기 전에는 나귀와 황소를 함께 멍에로 묶어놓고 밭을 갈면서 미친 척하며 병역을 기피하려고 노력했던 협잡꾼이라는 사실 말이다.(하지만 징병 담당자가 그의 쟁기 앞에 어린아이였던 텔레마코스를 놓자 그의 사기 행각은 탄로났다.) 이 이야기는 아킬레우스의 어머니가 아들을 전쟁에 나가지 않게 하려고 여자들 사이에 숨겼을 때, 그 여장(女裝)을 한 영웅이 오디세우스가 가져온 여러 선물들 중에서 방태와 창을 고르는 것을 보고 탄로났더라는 이야기와 짝을 이룬다.(276∼277쪽)

 

(나의 생각)

 

제임스 조이스가 자신이 창조한 '불멸의 예술작품'의 주인공으로 '오디세우스'를 고른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의 작품『율리시스』에 딸린 주석에 따르면, 그는 일찍이 벨비디어 중학 시절에 오디세우스 장군에 관해 <내가 좋아하는 영웅>이라는 제목으로 수필을 썼다고 하니 말이다.


 

오디세우스는 사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가장 복잡한 인물들 중 하나이다. 『일리아스』에서 그는 신중하고 합리적인 전사이다. 또한 유능한 외교관이었기에 아가멤논의 화해 요청을 아킬레우스에게 전할 수 있었으며, 수사(修辭)의 달인이라 청중을 더욱 놀라게 하려면 언제 침묵해야 하는지도 아는 사람이었다. 프리아모스의 오랜 조언자였던 안테노르는 오디세우스가 다중 앞에서 말할 때, 처음에는 뻣뻣이 선 채 눈을 땅에 고정시킨 뒤 연설을 터뜨린다고 서술한다.

 

그대는 말했을 것이오. 무뚝뚝하고 틀림없이 생각 없는 자일 거라고.

그러나 그가 우렁찬 목소리를 가슴속에서부터 토해내면서

겨울철에 휘날리는 눈보라처럼 말을 쏟아내기 시작하자,

그다음에는 오디세우스에게 논쟁을 걸지 못했지요, 그 누구도!


 - 『일리아스』, 제3권 220∼223행


(나의 생각)


오디세우스야말로『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에 '모두' 등장하는 진정한 영웅이다. 아킬레우스도 『오뒷세이아』에 등장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고작 '저승'에서 아주 잠깐 얼굴을 내밀 뿐이다. 오디세우스의 외교관으로서의 활약상은 유명 화가의 그림으로도 살필 수 있다 ☞ http://blog.aladin.co.kr/oren/6972956


 

 

 

단테가 썼던 모든 시구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워서, 영어로 번역할 수 없을 정도

 

일단 오디세우스의 이야기가 로마에 이르렀을 때, 영웅의 본성이 변했다. 물론 다른 모습으로 변한 오디세우스의 그리스적인 전례도 있었다. 이는 기원전 415년에 에우리피데스가 『트로이아의 여인들』이라는 작품에서 그를 폭력적이며 약자를 괴롭히는 비열한 군인으로 그렸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작품에서의 오디세우스는 사악하고 자만심이 강한 자로 묘사되며, 로마인들의 마음속에서 동지중해 지역의 영악한 그리스 사람들과 겹쳐졌다. 그런데 이 사람들에 대해 로마인들은 뿌리 깊은 반감과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베르길리우스는 오디세우스를 무정한 약탈자이자 '범죄의 달인', 말하자면 그리스의 모리아티로 묘사했다. 오디세우스는 이 세 번째 인격성을 입고서 유럽 문학에 들어왔다. 단테는 오디세우스를 그의 동료인 디오메데스와 싸잡아 비난한 뒤 지옥의 여덟 번째 계로 보내버렸다. 이곳에는 사기 행위의 조언자들과, 다른 자들에게 도적질하라고 부추기는 영적인 도적들이 영원히 타오르는 화염 속에 봉인된 채 괴로움에 몸부림친다. 내부에서부터 그들을 태워버렸던 탐욕스러운 열정이 이제는 외부에서부터 그들을 태우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이 혀를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을 탐욕에 불타오르게 했다면, 이제는 불꽃의 혀들이 그들을 태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이 바로 단테가 직관적으로 오디세우스로 하여금 테이레시아스의 예언을 완수하도록 만드는 곳이다. …… 테이레시아스는 오디세우스에게 말한다. 만약 그가 특정한 조건들을 만족시킨다면 이타카에 도착하는 것은 물론, 그의 아내에게 구혼하는 자들을 죽일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러면서 집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은 그의 운명이 아니라는 말도 덧붙인다. 또한 오디세우스는 "한 번 더 멀리 나가려는" 충동을 느낄 것이며, 마지막이자 치명적인 여행을 수행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단테가 묘사한 오디세우스의 마지막 모험은 단테가 그때까지 썼던 모든 시구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워서, 영어로 번역할 수 없을 정도이다.

 

* 알베르토 망겔의 책에는 실리지 않은 단테의 『신곡』「지옥편」에 등장하는 '오디세우스의 마지막 모험'을 덧붙인다. 그 책의 '주석'에 따르면 '오디세우스의 항해 이야기는 문학적, 역사적 근거를 찾을 수 없으며, 단테의 창작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오직 한 척의 배에 의지해

늘 나와 함께했던 소수의 동료들과 함께

깊고 넓은 바다로 나왔소.

 

멀리 에스파냐와 모로코까지 이쪽 해안과

저쪽 해안을 보았고, 이 바다에 몸을 적시는

사르데냐와 다른 섬들도 보았소.

 

나와 동료들은 늙어 갔고 몸도 둔해졌다오.

그 무렵 우리는 그 누구도 넘어가지 못하도록

헤라클레스가 표지를 꽂아 둔

 

비좁은 어귀에 도착했소.

오른쪽으로는 세비야를 떠난 뒤였고

반대쪽으로는 세타를 떠난 뒤였소.

 

나는 이렇게 말했다오. '오, 형제들이여! 수많은 위험을

무릅쓰고 드디어 우린 세상의 서쪽 끝에

다다랐다. 우리에게 생명은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태양의 뒤를 좇아 사람이 살지 않는

세상을 찾아가려는 마음을 버리지 마라!

 

그대들의 혈통을 생각하라! 그대들은

짐승처럼 살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덕과 지혜를 따르기 위해 태어났다.'

 

그 짧은 연설에 동료들은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욕망에 불타

나중에는 그들을 멈추게 할 수 없을 정도였다오.

 

선미를 아침에 두고 우리는

미친 듯 파닥거리는 날개처럼 노를 저어서

계속 왼쪽으로 왼쪽으로 항해했소.

 

밤에는 다른 극의 모든 별들이

보였소. 우리 극의 별들은 낮게 내려와

바다의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았소.

 

우리가 그 무모한 모험을 시작한 뒤

달 아래의 빛이 다섯 번이나

켜졌다가 다시 꺼졌을 무렵,

 

산 하나가 멀리 희미하게 나타났는데,

어찌나 높이 솟았던지

그런 산을 본 적이 없었소.

 

우리는 기뻤소. 그러나 기쁨은 금방 통곡으로

바뀌었다오. 그 낯선 땅에서 풍랑이 일어나

뱃머리를 들이받았기 때문이오.

 

풍랑은 우리 배를 바닷물과 함께 세 바퀴 돌게 했다오.

네 바퀴째에 선미가 높이 솟아오르더니 뱃머리에서 떨어져,

마침내 바다가 우리 위로 덮쳐 왔소.

 

하느님께서 원하셨던 대로였다오.


 -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지옥편> 제 26곡 100∼142행


(나의 생각)

 

단테의 『신곡』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도 수없이 자주 인용된다. 내 기억으로는, 성서와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자주 인용되는 작가가 단테였던 것 같다. 호메로스와 단테와 제임스 조이스는 서로 무척이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셈이다.



 

6세기가 더 지난 뒤, 앨프리드 테니슨 경은 활기차고 감동적인 개작본을 상상했다. 하지만 그것은 단테가 이룬 성취에 충실하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다. 그 작품은 이렇게 끝맺고 있다.

 

노년은 아직 그 영광과 노고를 간직하고 있었다.

죽음은 모든 것을 닫는다. 그러나 끝나기 전에 무엇인가가 있다.

고귀한 어떤 일이 여전히 완수될 수 있으니,

신과 투쟁했던 사람들은 흉한 것이 아니다.

빛은 반석들로부터 반짝거리기 시작한다.

긴 하루가 저물어간다. 느린 달이 솟아오른다. 깊은

신음이 수많은 목소리와 함께 맴돌고. 오라, 내 친구들이여,

더 새로운 세상을 찾기에 너무 늦어버린 것은 아니다.

밀어버려라, 그리고 질서 정연하게 자리 잡고 앉아서 쳐라

울려 퍼지는 밭고랑들을. 일몰 너머로 그리고

서쪽 모든 별들이 몸을 담그는 저 욕조들 너머로

돛을 펼치려는 나의 계획은 내가 죽을 때까지 유보되어 있으니.

해협들이 우리를 휩쓸어 침몰시킬 수도 있다.

우리는 행복한 작은 섬에 닿을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던 위대한 아킬레우스를 볼 수도 있다.

비록 많은 것들을 거두어갔지만, 많은 것들이 남아 있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지금은 그 옛날 땅과 하늘을 움직였던

그 힘은 아니지만, 우리는 우리가 지금 있는 그대로이다.

영웅적인 심장들의 한가지로 똑같은 기질,

시간과 운명에 의해 약해졌지만, 투쟁하고, 탐색하고,

찾으며, 결코 포기하지 않는 의지 안에서만은 강하다.


(나의 생각)

 

앨프리드 테니슨의 「율리시스」는 우리말로 번역되면서 도리어 '시적 운율과 감흥'을 떨어뜨리는 듯하다. 시인의 번역이 아니니 그럴 만하다 싶지만 번역된 시를 읽을 때마다 매번 아쉬움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모든 논리에 반하여 불가능한 것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인간들이 가지는 매력


케임브리지 대학교 시절에 고전에 빠져 있던 테니슨은 단테에게 비난받은 왕을 자신의 호메로스적 원천으로 되돌려 보낸다. 오디세우스는 '여행에서 벗어나 쉬지 못하고 있었는데', 선량함에 비해 너무 영악한 부랑자로서의 역할을 포기하고 다시 영웅으로서의 정체성을 담당해야만 한다. 자신의 길었던 여행을 요약하는 오디세우스는 스스로를 '아무도 안'이라고 소개했던 귀향 병사에서, 집으로 와서도 다시 한 번 더 항해를 떠나려고 열망하는 왕으로 돌아온 과정을 요약하면서 "나는 하나의 이름이 되어 버렸다."라고 말한다. 페루의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요사는 이렇게 썼다. "오디세우스가 상징(또는 대표)해왔던 수많은 것들 중에 변함없는 것 하나가 서양의 문학 안에 있다. 한계를 제거하며 '가능한 것'에 종속되는 대신, 모든 논리에 반하여 불가능한 것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인간들이 가지는 매력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스의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쓴 길고 시적인 번안에서, 오디세우스는 테니슨의 번안에 나오는 해당 주인공보다 더 삭막한 모습으로 변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 찾아다니는 방랑자이자 카멜레온과 같은 인물로서 ㅡ 테니슨의 시행에 나오는 대로 ㅡ "내가 만났던 모든 것의 한 부분"이다. 그는 왕이자 군인이고 연인이며, 아프리카에 유토비파적인 공동체 사회를 건설한 불행한 인물이다. 그러나 이 오디세우스에게는 실패가 경험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 많은 부분으로 이루어진 저 타자(他者), 즉 빙하로 뒤덮인 북극의 황무지에서 삶을 마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처럼, 카잔차키스의 오디세우스는 남극의 황무지에서 씻겨나간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말은 『신곡』에 있는 단테의 말을 메아리로 울려댄다.

 

그때 살점은 녹고, 시선은 굳어버렸으며, 심장박동은 멈춰버렸다.

그리고 그 위대한 마음은 그것의 거룩한 자유의 정상으로 뛰어올랐고,

텅 빈 날개로 퍼덕거렸으며, 그리고 난 다음 똑바로 위를 향해 대기를 뚫고

높이 치솟았고, 그 마지막 새장, 그것의 자유로부터 스스로를 자유롭게 했다.

모든 것이 연약한 안개처럼 흩어졌다, 오직 하나의 용감한 외침만이

짧은 시간 동안 고요하고 무지몽매한 물속에 걸릴 때까지.

"전진하라, 내 용사들아. 돛을 올려라, 죽음의 산들바람이 순풍으로 불어온다."


(나의 생각)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오디세이아』는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지만 그가 쓴 다른 많은 작품들에 비해 그리 많은 독자를 확보한 책은 아닌 듯하다. 나도 여태 안 읽었지만, 나중에 언젠가는 꼭 한번 읽고 싶다.


오랫동안 알려져온 것은 가장 많이 고려된 것이고, 가장 많이 고려된 것은 가장 잘 이해된 것

 

조이스의 『율리시스』는 호메로스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 아니며, 다시 만든 이야기도 아니고, 모방한 작품이라고 할 수도 없다. 새뮤얼 존슨 박사는 1765년에 쓴 저작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수학 체계의 완벽함은 곧 드러났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인간 지성의 공통된 한계를 넘어서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덧붙여 말한다면, 국가와 민족이 변하고 세월이 흘러가면서 인간 지성은 호메로스가 이야기한 사건들의 순서를 바꾸고, 그가 만든 등장인물들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며, 그의 감성을 돌려 말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저술들에 대해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존경은, 지나간 시대의 우월한 지혜에 대한 경솔한 신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인간의 타락에 대한 우울한 확신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인정받았으며, 또 의심할 수 없는 입장들의 결론이다. 즉 오랫동안 알려져온 것은 가장 많이 고려된 것이고, 가장 많이 고려된 것은 가장 잘 이해된 것이라는 말이다." 조이스는 호메로스의 입장을 인정하는 일 외에 다른 것도 했다. 그는 모든 시대의 모든 남자들이 수행했던 근본적인 모험 이야기를 다시 상상했다. 그가 짝지어놓은 것은 오디세우스와 블룸 사이였지, 호메로스와 조이스 자신 사이였다고 볼 수는 없다. 즉 창작자들 사이에 짝을 지어놓았다기보다는 창작물들 사이에 짝을 지어놓았다는 말이다. 다른 작가들은 번역과 치환, 투사를 통해 호메로스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지만, 조이스는 '다시 시작함으로써' 호메로스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나의 생각)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 대한 알베르토 망겔의 깊이 있으면서도 풍부하고 예리한 해석이 참으로 마음에 든다. 새뮤얼 존슨 박사의 탁월한 견해에도 전적으로 동감한다. 헤럴드 블룸이 존슨 박사를 두고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스승'이라 부른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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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면서 되살펴 보니 앨프리드 테니슨의 「율리시스」를 인용했던 글이 이미 세 편이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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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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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7-04-22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일리아스>를 읽었는데 전집의 한 권으로 읽었고 지금 갖고 있지 않아요.(제 기억이 확실한가 싶어서 제 독서목록노트로 확인했음.)
두꺼운 책의 사진을 보니 탐나기는 하지만(책이 잘 생겨서) 이젠 두꺼운 책을 읽어 낼 자신이 없어서 300쪽 내외의 책만 산답니다. 300쪽 이내의 책을 더 좋아하고요. ㅋ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로 두꺼운 고전에 대해 글을 쓰시는 오렌 님의 서재에 오면 책이 더 좋아지니, 책을 막 사고 싶으니 이건 무슨 일일까요?

oren 2017-04-22 23:21   좋아요 0 | URL
페크 님께서 오래 전에 읽었던 『일리아스』는 어떤 모습이었을지 몹시 궁금합니다. 1980년 겨울에 제가 처음으로 읽었던 『일리아스』는 아직도 제 눈 앞에 선하기만 한데 그 모습은 온데 간데가 없네요. 그 당시 읽었던 책은 판형이 지금보다 조금 작으면서도 몹시 똥똥한 모양이었더랬죠. 읽던 페이지를 펼쳐 놓고 양쪽으로 힘주어 움켜잡지 않으면 자꾸만 책이 덮이려고 용을 쓰는 압력도 만만치 않았던 기억도 나고, 또 무엇보다도 세로 판형이었고요. 그 책이 아직까지 남아 있었더라면 인명이나 지명이 지금과는 꽤나 다르고 낯설게 번역되어 있는 걸 보고, 세월의 간극을 보다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을 텐데 말이지요. 책 사진들을 이렇게 찍어둔 것도 먼 훗날에는 다시금 우리들 눈에 생경하게 비치는 걸까, 그게 문득 궁금해집니다.

qualia 2017-04-22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ren 님의 윗글만으로도 오뒷세우스의 모험의 여정이 장대하고도 웅혼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인용해주신 여러 편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해일처럼 밀려오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 혹은 감동의 격랑을 느꼈습니다. 글 혹은 시의 힘은 대단한 것 같습니다. oren 님의 인용을 거쳐 부분적으로만 읽을 뿐인데 이토록 꿈틀거리는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열정이라니~!


oren 2017-04-23 00:37   좋아요 0 | URL
qualia 님께서 격하게 호응해 주시니 싯구절들을 부지런히 옮긴 보람을 느낍니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서도 호메로스의 서사시『오뒷세이아』가 무척이나 자주 인용되는데요. 조이스가 그 기나긴 소설에서 가장 처음으로『오뒷세이아』를 인용한 부분만 봐도 그 소설이 벌써 심상치 않습니다. ‘바다‘에 대한 두 번째 인용인 ‘탈라타! 탈라타!‘에서는 단번에 독자들의 가슴을 뜨겁게 활짝 열어젖힐 정도입니다! 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를 읽은 독자들이라면 ‘바다! 바다!‘ 하고 외치는 크세노폰 군대의 외침이 얼마나 격렬하면서도 벅찬 외침이었는지를 결코 모를 수 없기 때문이지요.

* * *

ㅡ 맹세코! 그는 조용히 말했다. 바다는 앨지가 부르듯, 그대로가 아닌가: 위대하고 감미로운 어머니 말이야? 코딱지초록빛 바다. 불알을 단단하게 하는 바다. ‘에피 오이노파 폰톤‘(Epi oinopa ponton. 그리스어. 호메로스가 『오뒷세이아』에서 바다를 묘사한 말, ‘포도주빛 바다‘라는 뜻). 아 데덜러스, 그리스 사람들 말이야! 내가 자네한테 가르쳐 줘야겠다. 자네는 그걸 원문으로 읽어야 하네. ‘탈라타! 탈라타!‘(Thalatta! Thalatta! 그리스어, 아테네의 역사가 크세노폰의 저서 『아나바시스』에서, 그가 1만 명의 그리스 용병의 지도자로서 페르시아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와의 항쟁을 마치고 흑해에 당도하여 바다를 보고 부르짖었다는 함성) 바다는 우리들의 위대한 어머니야. 와서 보게나.
-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제1장 탑(텔레마코스)> 중에서

겨울호랑이 2017-04-23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작품에 대한 이해없이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고 어려워했던 기억이 나네요..oren님 리뷰를 통해 그 전에 넘어야할 산이 많았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

oren 2017-04-23 00:50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 님께서는 예전에 이미『율리시스』를 읽으셨군요. 그것만으로도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이 책을 볼 때마다 저는 클리프턴 패디먼의 친절한 안내와 부단한 격려의 말을 좀체로 잊을 수 없답니다. 그 양반 덕분에 이 책을 끝까지 붙들고 읽게 되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니까 말이지요.

* * *

주석서를 읽고 나서도 『율리시스』는 읽기가 쉽지 않다. 모든 문장, 생략된 문장, 미세한 의미, 암유, 혹은 앞에 나온 내용들에 대한 간접적 언급 등을 모두 이해하려고 들지 마라. 읽을 수 있는 데까지 읽어라. 그런 다음 책을 내려놓았다가 1년 뒤에 다시 시작하라.

조이스는 이 기념비적 작품을 위하여 새로운 문학적 테크닉을 많이 개발했다. 가령 내적 독백, 의식의 흐름, 패러디, 꿈과 악몽의 시리즈, 말장난, 신조어, 비관습적인 구두점 등. 평범한 작가는 등장인물의 생각을 선별하거나 요약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조이스는 시냇물 같고, 꿈같고, 형체 없는 흐름을 가진 생각들 그 자체를 독자에게 전달한다.

『율리시스』를 읽으려고 시도했다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모험이다. 또 독자에게 큰 소득을 안겨줄 것이다.

겨울호랑이 2017-04-23 01:11   좋아요 0 | URL
^^: oren님 덕분에 다시 「율리시스」를 들고 싶다는 용기가 나네요^^: 「율리시스」공략을 위해 메꿔야할 해자도 알게 되었으니 조급한 마음 대신 돌아가는 여유를 가져보려고 합니다^^: 격려와 좋은 길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oren님^^!

oren 2017-04-23 11:26   좋아요 1 | URL
네.. 저도 그 책을 읽으면서 ‘언젠가 나중에,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책들을 더 읽고 난 뒤에, 꼭 다시 잊지 않고 이 소설을 다시 찾아 읽으리라‘는 다짐을 거듭 하게 되더군요. 독자들이 ‘재독, 삼독을 위해 그런 마음속 다짐을 품게 만드는‘ 책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겁습니다^^
 

(밑줄긋기)

"더 이상은 재미가 없군"


「흰 코끼리 같은 언덕들」이라는 5페이지짜리 단편은 젊은 연인이 스페인의 한 작은 마을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나누는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남자는 마드리드에 도착하는 대로 여자가 낙태 수술을 하기 바라고 연인 사이의 다툼이 계속된다.


소설에서는 그녀가 패배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결국 그들의 관계는 종말이 보일 것이다. 이것이 내용의 전부다. 대사로 미루어 보건대, 여자는 활기 넘치고 품위 있어 보이지만 남자의 경우 명석하긴 해도 이기적이며 속이 텅 비어 매력이라고는 없는 것 같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소"라는 남자의 말에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제발 닥쳐요"라고 대답하는 그녀 편에 독자들은 설 것이다. '제발'을 일곱 번이나 반복하는 일은 지나치지만 「흰 코끼리 같은 언덕들」에서는 그러한 반복이 타당하고 설득력 있다.


이야기는 제목의 직유법에 이미 정교하게 예시돼 있다. 에브로 강의 계곡을 가로지르는 길고 흰 언덕은 여자에게 '흰 코끼리'처럼 보이지만 남자는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장원莊園 유지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파산한 신하들에게 샴국의 왕이 선물로 주었다고 알려진 흰 코끼리는 원하지 않는 아이, 무기력한 남자에게는 정신적으로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하는 성적 관계를 나타내는 은유다.


헤밍웨이의 개인적 신비로움 ㅡ 전사, 사냥꾼, 투우사, 권투 선수로서 그의 모습 ㅡ 은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걸 알잖아"라고 말하는 남자의 말이나 「흰 코끼리 같은 언덕들」이라는 작품과 잘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작가의 대리인이라 할 수 있는 닉 아담스(헤밍웨이의 연작 단편들에 나오는 주인공)가 「무언가의 끝The End of Something」이라는 작품에서 한 여성과 관계를 끝내며 "더 이상은 재미가 없군"이라고 한 대사에서 더 헤밍웨이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문장을 좋아할 여성은 없겠지만 그것은 적어도 미숙한 한 남자의 자기 고발이다.(57쪽)


 - 헤럴드 블룸, 『교양인의 책 읽기』, <1. 단편소설_어니스트 밀러 헤밍웨이> 중에서


(내 생각)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걸 잘 알잖아"라는 대사와 "더 이상은 재미가 없군"이라는 두 대사가 내게는 정말 이상하게 들린다. 마치 '알라딘'을 떠나버린 많은 '옛 사람'들이 여길 떠날 무렵에 했던 '마음 속으로나마' 읊조리던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이게 나만의 생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러고 보니 문득 생 종 페르스의 말도 떠오른다. 몇 년 전에 어떤 알라디너의 글에 그의 말이 인용된 문장의 일부를 댓글로 단 적이 있었는데, 그 분도 요즘 와서 보니 알라딘을 '거의' 떠나신 것 같다.  아마 그 분도 틀림없이 오랫동안 로맹가리가 느꼈던 '지평을 바꾸는 일'을 마음 속으로 고민했으리라.

 

 * * *

 

그에게는 지평을 바꾸는 일이 시급했다. 다른 곳에서 숨쉬는 것이.
생 종 페르스는 말한다. ˝떠나자! 떠나자! 이것이 살아 있는 자들의 말이다!˝

- 도미니크 보나, 『로맹가리』

 


 

 * * *


"날 위해 뭘 좀 해 줄 수 있겠어?"


미국 어느 대학 문학 교수인 제프리 메이어스가 1985년에 쓴 헤밍웨이 전기를 펼쳐 들고서, 「흰 코끼리 같은 언덕들」과 관계된 부분을 읽어 본다. 내가 가장 먼저 알게 되는 것은, 이 단편이 '아마도 하들리(헤밍웨이의 첫 번째 부인)의 두 번째 임신에 대한 헤밍웨이의 반응을 묘사하는 것 같다.'라는 것이다. 그러고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이어지는데, 나 자신의 고찰을 괄호 속에 넣으며 이를 따라가 보도록 하자.


"원치 않은 아기처럼, 무용한 것을 표상하는 비현실적인 동물인 흰 코끼리에 언덕을 비유한 것은 이 이야기의 의미에 매우 중요하다.(코끼리를 원치 않은 아기에 비유한 것은 다소 억지스럽다. 이 비유는 헤밍웨이 것이 아니라 그 교수 것으로, 이 단편에 대한 감상적 해석을 준비하기 위한 것 같다.) 이 비유는 논란거리가 되며, 경치에 감동한 상상력이 풍부한 여인과, 그녀의 견해에 찬동하길 거부하는 고지식한 사내 사이의 대립을 초래한다. (중략) 여자의 감정에 완전히 무감각한(이것도 전혀 근거 없는 얘기다.) 사내. 그는 둘 사이가 예전과 똑같아질 수 있도록 여자를 낙태시키려 애쓴다. (……) 낙태를 자연에 전적으로 위배되는 일로 여기는 여인은 아기를 죽이고(아기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상 그녀는 아기를 죽일 수 없다.) 자신 또한 다칠까 봐 몹시 두려워 한다. 사내가 하는 말은 모두 허위이며(아니다. 사내가 하는 말은 모두 흔한 위로의 말들, 그런 상황에서 할 수밖에 없는 말들일 뿐이다.) 여자가 하는 말은 모두 아이러니컬하다.(우리는 아가씨의 말을 얼마든지 다르게 설명할 수 있다.) 그는 그녀가 그의 사랑을 되찾을 수 있도록(그녀가 그 사내를 사랑했다거나 그의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 수술에 동의하도록 그녀를 강요하지만(사내는 '난 네가 원하지도 않으면서 그걸 하는 걸 원하지 않아.' 라고 두 번이나 말하며, 그의 말이 진정이 아니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가 그녀에게 그런 일을 요구한다는 사실 자체가 앞으로는 두 번 다시 그녀가 그를 사랑할 수 없게 되리란 점을 내포한다.(이 역에서의 장면 뒤에 일어날 일을 예상하게 하는 요소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녀는 마치 도스토옙스키가 묘사한 지하실의 사내나 카프카의 요제프 K처럼, 남편의 태도를 반영하기만 하는 인격 분열 지경에 이른 뒤에야 그 자기 파괴 형태(태아의 파괴와 여성의 파괴는 같은 게 아니다.)를 받아들인다. '그럼 그걸 하겠어. 왜냐하면, 어째도 내겐 마찬가지니까.'(타자의 태도를 반영하는 것은 분열이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에게 복종하는 모든 아이들이 분열 증세를 보이며 요제프 K처럼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단편 속 아내는 어디에서도 남편으로 지칭되지 않았다. 게다가 헤밍웨이의 글에서는 여성 등장인물이 언제나 girl, 즉 아가씨인 까닭에 그는 남편일 수가 없다. 이 미국 교수가 일부러 아가씨를 woman(부인)이라고 칭하는 거라면, 이는 의도적인 경멸이다. 그는 두 등장인물을 헤밍웨이와 그의 아내로 이해시키려는 것이다.) 그런 뒤 그녀는 그에게서 멀어져 (……) 자연에서, 말하자면 보리밭과 나무들, 시내,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언덕들에서 위안을 찾는다. 도움을 구하기 위해 눈을 들어 언덕 쪽을 쳐다볼 때 그녀의 그 평화로운 관조는(우리는 자연의 관조가 그 아가씨에게 일깨우는 감정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씁쓸한 심정이었다가 뒤이어 내뱉는 그녀의 말들, 어떤 경우에도 그 말은 평화로울 수 없다.) 구약 「시편」121을 상기시킨다.(헤밍웨이의 문체가 간결해질수록 이 해설자의 문체는 과장된다.) 하지만 이 정신 상태는 토론을 계속할 것을 고집하는 사내에 의해 파괴되며(주의 깊게 이 단편을 읽어 보자. 잠시 멀어졌다가 먼저 말을 꺼내 토론을 계속하는 쪽은 미국인이 아니라 아가씨다. 사내는 토론을 하려 들지 않는다. 다만 아가씨를 달래고자 할 뿐이다.) 그녀를 신경증 발작으로 이끌고 간다. 그래서 그녀가 버럭 짜증을 내며 외친다. '날 위해 뭘 좀 해 줄 수 있겠어? (……) 그럼, 그 입 좀 다물어. 부탁이야!' 이는 리어왕의 '다시는, 다시는, 다시는, 다시는'을 떠올리게 한다.(여기서 셰익스피어를 상기하는 일은 도스토옙스키나 카프카를 상기한 경우와 마찬가지로 전혀 무의미하다.)"(210∼213쪽)


 - 밀란 쿤데라, 『배신당한 유언들』, <5부 잃어버린 현재를 찾아서> 중에서


(나의 생각)


먼저 인용한 헤럴드 블룸의 설명을 들어보면 '코끼리'에 대한 밀란 쿤데라의 비평("코끼리를 원치 않은 아기에 비유한 것은 다소 억지스럽다")이 도리어 억지스럽다. 그러나 다른 비평들은 대체로 밀란 쿤데라의 주장에 쉽게 동의할 수 있다. 밀란 쿤데라는 위의 인용문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글에서 '미국 문학 교수'의 비평을 다섯 가지로 '거듭' 요약한다. 그 중 하나만 소개하면 이렇다.


"단편의 기본 내용(한 남자와 한 여자가 낙태를 하러 떠난다는)을 바탕으로 교수는 자기 자신의 단편을 창작한다. 자기중심적인 한 사내가 자신의 아내에게 낙태를 강요하는 중이며, 아내는 남편을 경멸하기 때문에 이제 다시는 그를 사랑할 수 없을 거라는 내용의 소설 말이다."


여기까지 옮기고 나서도「흰 코끼리 같은 언덕들」때문에 갑자기 떠올리게 된 '이별을 둘러싼 여러 복잡한 감정들'은 여전히 약간의 뒷맛을 남긴다. 흰 코끼리 같은 언덕은 왜 여자에게만 '흰 코끼리'처럼 보이고 남자에겐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무언가의 끝The End of Something」이라는 작품 속 대사에 담긴 '미숙한 한 남자의 자기 고발' 속에 해답이 있는 걸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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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몽테뉴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우리는 사물을 해석하기보다도 해석을 해석하는 데 더 일이 많으며, 책을 놓고 쓴 책이 다른 제목을 두고 쓴 것보다 더 많다. 우리는 우리끼리 서로 주석하는 짓밖에는 하지 않는다." 나는 책에 대해 쓴 책을 볼 때마다 몽테뉴가 했던 저 말이 생각난다. 어쨌든, 몽테뉴가 뭐라고 말했든지에 상관없이, 나는 책에 대해 쓴 책은 별로 읽지 않는다. 그런 책을 읽을 시간에 한 권이라도 더 책다운 책을 읽기 위해서다. 우리는 이미 좋은 책들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좋은 책 속에 이미 얼마나 많은 다른 좋은 책들이 소개되어 있던가. 책을 몰라서 책을 못 읽는 건 아니다. 시간은 우리에게 매번 우호적이지도 않다. 그래도 가끔씩은 '대가들의 말씀'을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책뿐만 아니라 책을 왜,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도 알려주기 때문이다. 최근에 우연히 펼친 헤럴드 블룸의 『교양인의 책읽기』는 다른 책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지침 몇 가지가 담겨 있어서 놀라웠다.


 * * *



이야깃거리를 찾기 위해서가 아닌 고찰하고 숙고하기 위해 독서하라


독자로서 나의 이상이며 평생 스승인 사무엘 존슨 박사는 독서의 힘과 한계 모두를 알고 표현했다. 다른 모든 활동과 마찬가지로 존슨 박사는 독서에도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우리에게 가장 가깝게 다가오고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그런 의미에서 프란시스 베이컨은 존슨에게 몇 가지 아이디어를 제공해 주고, 독서에 대해 유명한 충고를 했다.


"논박이나 반박을 위해, 맹목적으로 믿거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위해 독서하지 말라. 이야깃거리를 찾기 위해서가 아닌 고찰하고 숙고하기 위해 독서하라."


베이컨과 존슨 외에 또 한 사람의 현자로 랄프 왈도 에머슨이 있다. 역사와 모든 역사주의를 완강히 반대했던 그는 이렇게 말했다.


"최고의 책은 '하나의 본성이 글을 쓰며 바로 그 본성이 읽는다'는 확신을 우리가 느끼게 해 준다."


베이컨, 존슨, 에머슨의 생각을 종합해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하나의 공식으로 만든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가 고찰하며 숙고하는 데 사용되는 것,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당신 자신이 작가의 본성을 공유하는 것처럼 스스로에게 다가서는 바로 그것을 찾도록 하라! 실용주의적인 측면으로 말하면, 먼저 셰익스피어를 찾고 이후 셰익스피어가 당신을 찾도록 하라는 의미다. 만일 리어 왕이 당신을 찾는다면 그것이 당신과 공유하는 본성, 즉 당신에 대한 그 작품의 밀접한 관계를 고찰하고 숙고하라.


 * * *


<독서 회복의 제1원칙>


인생과 마찬가지로 문학의 가치는 특이한 것, 의미를 지닌 행위와 관련 있다. 역사주의자들 ㅡ 우리 모두가 사회사에 의해 규정된다고 믿는 비평가들 ㅡ 이 문학 작품 속의 인물들을 한낱 종이 위에 쓰여진 표시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우리의 사고가 무시된다면 햄릿은 역사상 한 사례에도 속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존슨 박사의 <독서 회복의 제1원칙>을 말하고자 한다.


"마음에서 위선의 말들을 없애라."


위선적인 말이란 엄숙하지만 진부한 뜻을 갖거나, 어떤 특정 부류에서 쓰이는 은어 등을 가리킨다. 이른바 대학에서 사용하는 젠더Gender(사회적 성), 섹슈얼리티Sexuality(생물학적 성)나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 같은 말이 그것이다. 존슨의 충고를 따른다면 이렇게 고쳐 써야 한다.


"마음에서 학문적 위선의 말들을 없애라."


 * * *


<독서 회복의 제2칙>


<독서 회복의 제2원칙>은 "독서를 통해 이웃이나 주변을 개선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 개선은 정신과 영혼을 위한 중요한 작업이다. 독서의 사회적 윤리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원초적 무지를 없애 버릴 때까지는 마음의 평정을 유지해야 한다. 미숙한 행동주의로의 일탈은 그 자체로는 매력있지만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다. 우리에게 독서를 위한 충분한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든 과거든 시간을 역사화하는 일은 일종의 우상으로 시간 안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강박적인 숭배다.


 * * *


<독서 회복의 제3원칙>


존 밀턴이 찬양하고 에머슨이 제시했던 대로 "내적인 빛으로 독서하라." 이는 <독서 회복의 제3원칙>인데 "학자는 모든 사람의 사랑과 욕망이 불을 붙이는 촛볼"이기 때문이다. 월러스 스티븐스는 자신의 근원을 망각한 채 그러한 은유에 관한 놀라운 변주곡들을 쓰고 있지만, 독창적인 에머슨의 구절이 <독서 회복의 제3원칙>에 대해 보다 명백히 언급하고 있다.


 * * *


<독서 회복의 제4원칙>


사회는 교양 있는 남녀 없이 유지될 수 없다고 에머슨은 말했다. 그는 예언적으로 "작가의 고향은 대학이 아니라 사람들이다"라고 덧붙였다. 에머슨이 말한 의미는 남의 대표성에 종속된 자들이 아니라 스스로를 대표하는 강력한 작가와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는 영혼의 정치학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대학 교육의 기능은 에머슨이 쓴 「미국의 학자」라는 글에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는 학자의 의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학자들은 모두 자기 신뢰로 구성되어 있을지 모른다."


나는 에머슨의 이 표현을 빌어 <독서 회복의 제4원칙>을 정하고자 한다 :


"우리는 잘 읽기 위해서 발명가가 되어야 한다."


에머슨이 말한 '창조적 글읽기'를 나는 한때 '그릇된 글읽기'라고 명명한 적이 있었는데, 이 말 때문에 경쟁자들은 내가 의도적인 읽기 장애를 앓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한 편의 시를 읽으면서 보는 폐허나 여백은 이미 그들 안에 있는 것이다. 자기 신뢰는 선천적인 게 아니고 오랜 시간의 심도 깊은 독서를 통해서만 얻어진다. 미학에는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 있을 수 없다.


 * * *


<독서 회복의 제5원칙>


우리는 독서를 통해 자신도 모르게 본래 마음보다 더욱 독창적인 마음을 추구하게 된다. 피상적인 측면에서 볼때, 이데올로기는 아이러니를 이해하고 인식하는 능력을 파괴한다. 나는 이 '아이러니의 회복'이 <독서 회복의 제5원칙>이라는 것을 제시하고자 한다. 햄릿의 끊임없는 아이러니를 생각해 보라. 그는 무언가 말할 때 언제나 다른 의미를 내포하며 가끔 전혀 반대의 의미를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원칙은 절망적으로 느껴진다. 누군가에게 아이러니를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은 그들에게 고독해지라고 가르칠 수 없는 것과 같다. 따라서 아이러니의 상실은 독서의 죽음이며 우리 본성 속에서 문명화된 모든 것의 죽음이다.



나는 뱃전에서 바다를 향해 놓은 널빤지 위를 눈 가린 채 걷네.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머리 위로 별들이 느껴지고

발 아래는 바다가 있네.

다음 한 걸음이

내 마지막 걸음이 될지도 몰라

나는 불안하게 걸음을 옮기네.

누군가 경험이라 부른 그것을.


   ㅡ 에밀리 디킨슨



여성과 남성은 걷는 모습이 다르다. 굳이 성적으로 구분하지 않아도 우리는 모두 다른 모양으로 걷는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는 아이러니를 모르면 제대로 감상할 수 없다.


그녀는 한 길만을 걷고 있다. 위험한 널빤지 위를. 그러나 그녀의 느리고 조심스러운 걸음은 '머리 위로 별들을 느끼고' '발 아래 바다가 있는' 거대함과 아이러니를 이룬다. 그 다음 한 걸음이 마지막 걸음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녀는 불안하게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것을 경험이라 불렀다고 말한다.


그녀는 에머슨의 수필『경험Experience』을 읽었을 것이다. 그 수필은 에머슨에게는 그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몽테뉴가 자신의 수필 『경험에 대하여Of Experence』에서 느꼈던 만큼 최상의 작품이었다. 그녀의 작품 속에 묘사된 아이러니는 에머슨의 수필 첫 부분에 나오는 다음 구절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디에서 자신을 발견하는가? 우리가 알 수 없는 일련의 극단 속에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극단이 아무것도 지니고 있지 않는다는 것을 믿게 된다."


디킨슨에게 극단은 다음 걸음이 마지막 걸음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만일 누군가가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언제 우리가 가장 현명한지 알기만 한다면!"


이렇듯 이어지는 에머슨의 공상은 기질 면에서 ㅡ 혹은 디킨슨의 말처럼 걸음걸이 면에서 ㅡ 디킨슨의 공상과는 다르다. 에머슨적 경험의 영역에서는 "모든 것들이 헤엄치고 빛난다." 에머슨의 따뜻한 아이러니는 디킨슨의 불안정한 아이러니와는 다르다. 두 사람이 공론가는 아니지만 그들은 각자의 아이러니가 발산하는 경쟁적인 힘 속에 살고 있다.


잃어버린 아이러니의 길 끝에 마지막 걸음이 있으며 그것을 넘으면 문학적 가치는 다시 회복될 수 없다. 아이러니는 은유일 뿐이다. 더구나 한 시대의 아이러니는 다른 시대의 아이러니와 같을 수가 없다. 아이러니의 재생이 없다면 한때 창조적 문학이라고 불렀던 것들은 모두 상실되고 말 것이다.


 * * *


우리는 결코 평범함에는 아무런 빚을 지지 않았다는 것


그릇된 독서를 하는 것은 그릇된 삶을 사는 것과 같다. 내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몰라도 시간은 그다지 자비롭지 않은 듯하다. 우리가 신이나 자연에 죽음을 빚지고 사는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는 결코 평범함에는 아무런 빚을 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진전되거나 적어도 대표하고자 의도하는 집합성이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 * *


그렇다면 깊이 읽도록 하라


우리는 셰익스피어, 단테, 초서를 비롯하여 세르반테스, 디킨스, 프루스트 그외에도 많은 작가의 작품을 읽는다. 왜냐하면 그들을 통해 우리의 삶은 더할 수 없이 확대되기 때문이다. 실용적인 면에서 그것들은 '무한한 시간 속으로 이어지는 보다 많은 삶'이라는 진정으로 야훼(히브리인의 신)적인 의미의 축복이다.


우리는 다양한 이유로 독서를 한다. 그 이유의 대부분은 너무 잘 아는 것들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더 잘 알고 자아와 타인뿐 아니라 사물의 본질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도 책을 읽는다. 그러나 오늘날 남용된 전통적 정전에 대해서 깊이 독서하려는 이유는 가장 강력하고 진실한 쾌락을 찾기 위한 것이다.


나는 독자들이 자기 스스로에게 가까이 다가서는 것, 그래서 비교하고 숙고할 수 있는 무엇을 찾아 내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깊이 읽도록 하라. 믿지 말고, 받아들이지 말고, 논박하지 말고, 읽고 쓰는 하나의 본성에 참여하는 법을 배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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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4-19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 회복 제2원칙이 독서에 대한 저의 가치관과 조금 비슷합니다. 웬만하면 책 좋아하는 분들에게도 책 추천을 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좋은 책’을 추천해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좋은 책’의 의미가 불분명합니다. 제가 생각한 ‘좋은 책’이 다른 분들에게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책’일 수도 있어요. 추천 도서가 ‘누구나 읽으면 좋은 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평범한 독자들은 명사의 추천 도서에 관심을 가져요. 그런데 꼭 그 책들을 무조건 읽을 필요가 있을까요? 저는 명사의 추천 도서 목록이 개인의 독서 취향을 변하게 만드는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에 거부감을 느낍니다. 상대방이 소설만 읽는 것을 ‘편식 독서‘로 규정해서 인문 도서도 읽어보라고 추천하는 일은 독서 회복의 제2원칙에 위배되는 일입니다. 인용한 문장 마지막 말처럼 독자 스스로 책들에 다가서고, 자유롭게 고르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oren 2017-04-19 19:39   좋아요 1 | URL
cyrus 님께서 길게 피력해 주신 댓글 잘 읽었습니다. 에머슨의 <독서 회복의 제2원칙>은 제가 인용한 문장이 전부입니다. 앞뒤로 생략된 문단이 전혀 없기 때문에 오로지 제가 인용한 저 짧은 문장만으로 ‘독자 스스로‘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2원칙‘이 문장 그대로 ˝독서를 통해 이웃이나 주변을 개선하려고 하지 말라˝는 뜻으로 읽었답니다. 뒤이어 이어지는 ‘자기 개선은 정신과 영혼을 위한 중요한 작업이다. 독서의 사회적 윤리란 있을 수 없다.‘라는 문장도 마찬가지로 읽었구요. 제가 해석한 바로는 ‘독서‘가 마치 ‘이웃이나 주변을 개선할 수 있다‘는 듯이 너무 ‘계몽적 목적‘을 강조하는 일부의 경향을 헤럴드 블룸이 비판하는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독서의 사회적 윤리‘를 언급한 것도 그 연장선이겠구요. 헤럴드 블룸이 말한 ‘미숙한 행동주의로의 일탈‘도 그런 뜻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고 봤습니다. 제가 인용한 문장의 마지막 부분인 ‘나는 독자들이 자기 스스로에게 가까이 다가서는 것, 그래서 비교하고 숙고할 수 있는 무엇을 찾아 내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깊이 읽도록 하라.‘ 라는 문장도 ‘자기 스스로에 가까이 다가서는 것‘과 ‘깊이 읽도록 하라‘ 두 곳에 방점이 찍혀 있다고 읽었더랬습니다. 헤럴드 블룸의 문장은 함축적인 표현들이 많아서 꽤나 ‘다의적으로‘ 읽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헤럴드 블룸의 생각을 자주 접해보지 못해서 제가 저 문장을 오독한 것일지도 모르겠는데, 아무튼 똑같은 글을 읽고도 이렇게나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다시『월든』을 만날 시간


"시인이라면 자신의 전기를 써야 하는가? 훌륭한 일기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그가 창조해낸 상상의 영웅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싶은 게 아니라 현실의 주인공이었던 그가 매일의 삶을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싶은 것이다"

 - 헨리 데이빗 소로우, 1857년 10월 21일의 일기에서


 * * *


 

어떤 작가는 오로지 작품으로만 그를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호메로스가 대표적이다. 작가의 삶이 덜 알려질수록 작품이 더욱 신비로운 색깔로 채색되는 경우도 드물지는 않다. 『신들의 계보』를 쓴 헤시오도스나 『변신 이야기』를 시로 쓴 오비디우스도 그런 인물들이다.

철학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앙리 베르그송은 아예 대놓고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한 철학자의 삶은 그의 이론을 이해하는데 아무런 빛도 던져주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렇더라도 우리의 호기심은 결코 작품으로만 만족하는 법을 모른다. 그 작품을 쓴 작가에 대한 궁금증이 끈질기게 그 작품에 따라붙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서도 숱한 영웅적인 인물들이 살아 움직이지만 '현실의 주인공'이었던 작가만큼 생생할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작품보다 훨씬 더 생생한 '작가의 진짜 삶'을 구경하고 싶어한다. 작가의 전기가 없다면 일기장이라도 기어이 뒤져봐야 직성이 풀리는 게 사람의 성정이다.

그런데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경우는『월든』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이다. 그 책이 담고 있는 내용들이 그의 전부를 다 드러낼 정도로 옹골차기 때문이다. 그의 문장은 나무랄 데가 거의 없다. 솔직하고 재치 넘치고 원기왕성하고 활달하다. 문장 하나 하나를 파고들수록 깊이도 한량없다. 『월든』은 19세기에 쓰여진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도 자주 손꼽힌다. 그러니 무슨 구차한 말들이 더 필요하겠는가. 이 대가의 글은 '신화처럼' 읽어도 나쁠 게 없을 정도다.

나는 『월든』에 너무나 감동을 받은 나머지 그의 작품은 모조리 섭렵하다시피 책을 찾아 읽었다. 많은 작품들이 저마다 소로우의 매력을 한껏 더해주는 듯했다. 비록 『월든』만큼 완성도가 탁월한 작품이 아니어도 좋았다. 소박하고, 단순하고, 독립적이고, 반항적이고, 날카로우면서도 따스하고, 고상한 이 특별한 인물을 거듭 알아가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찰 지경이었다. 자연의 일부로 보일 만큼 자연 속에 깊이 몰두하는 에세이들도 한결같이 좋았다. 편지에는 진솔함과 따스한 인간미가 스며 있고, 일기엔 간결함과 단단한 결심들과 맑은 고뇌만 담겨 있을 뿐, 원망이나 회한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타고난 본성이 거짓과 불순을 모르는 자연을 너무 닮았다.


(『월든』은 두 번, 『주석달린 월든』은 한 번 읽었지만 '주석' 부분만큼은 가끔씩 더 찾아 읽었다. 다른 작품들 가운데 특히 놓치기 어려운 작품은 그의 처녀작인 『소로우의 강』이다. 원제는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의 일주일』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소로우의 진면목'을 가장 생생하게 느꼈다. 소로우는 생애 마지막을 보내던 어느 따스한 봄날에 여동생 소피아에게 이 책의 마지막 장을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나슈아 어귀를 지나쳤고, 곧 새먼 부룩도 지나칠 즈음, 우리의 배를 가로막는 것은 바람밖에 없었다." 이때 그는 "이제야 멋진 항해가 시작되는군"하고 나직한 소리로 중얼거리다 잠시 후 숨을 거뒀다.)


소로우의 매력에 한껏 이끌린 독자들이라면 국내에 번역된 그의 작품과 일기를 전부 찾아 읽더라도 여전히 작가에 대해 더 알고 싶은 욕심을 떨치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아직까지는 소로우에 대한 전기가 국내에 제대로 번역되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음이 성급한 이들은 콩코드와 월든 호수까지도 한걸음에 달려가고 싶은 감정마저 느꼈으리라. 나도 한때는『월든』이라는 불후의 작품을 쓴 그 작가의 삶에 대해서 얼마나 자주 입에 올렸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사람이 살았던 소박한 삶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설 기회를 무의식 중에 계속 갈망해 왔던 것도 사실이리라.


그렇게 소로우를 흠모하고 그리워하면서도 그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던 시간들이 한참이나 흐르고 나서야 문득 깨닫게 된 사실 하나가 있었다. 나는 정작 그의 친구들을 비롯한 주변 인물들에 대해서 너무 무관심했다는 점이다. 물론 그의 일기와 몇몇 작품을 통해서도 주변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적잖이 접할 수는 있었다. 『소로우의 강』을 통해서는 그가 가장 의지하고 좋아했던 형(존 소로우)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고, 『주석달린 월든』을 통해서는 랄프 왈도 에머슨으로 대표되는 '콩코드 사람들'에 대해서도 제법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소로우는 대학을 다니기 위해 케임브리지에 머물렀던 시기와 윌리엄 에머슨(랄프 왈도 에머슨의 형)의 자녀들을 가르치기 위해 스태튼 아일랜드(뉴욕 맨해튼 섬 근처)에 잠깐 머문 때를 빼고는 평생을 콩코드에서만 살았다. 그가 사귄 사람들은 대부분 '콩코드 사람들'이 아니면 '콩코드를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에머슨은 꽤나 오랫동안 이름만 알고 지내왔었다. 나는 정말 엉뚱하게도『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읽고 나서야 겨우 그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 책에 대한 열렬한 찬미자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에머슨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렵사리 먼 길을 돌아서 '소로우의 베프'였던 에머슨의 작품들을 만났지만, 아쉽게도 그의 책에서 '소로우의 이름'을 직접 발견할 수는 없었다. 나중에 에머슨에 대해서 쓴 페이퍼에 달린 어느 알라디너 덕분에 나는 무심코 '소로우 에머슨'을 검색하게 되었는데, 그 때 마침 새롭게 발견한 책이『소로우와 에머슨의 대화』였다. 곧바로 동네 도서관에서 그 책을 빌려 읽었다. 절판된 탓에 중고상품으로 주문했던 책은 빌린 책을 다 읽은 시점에 정확하게 맞춰서 집에 도착했다. 그래도 몹시 반가웠다. 드디어 내 책이 되었으니 말이다.)


거듭 얘기하지만『소로우와 에머슨의 대화』는 정말 뜻밖의 책이었다. 내가『월든』을 거의 네 번쯤 읽는 동안에도 미처 자세히 알 수 없었던 '여러가지 일들'이 너무나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에 잠시도 '책 곁'을 떠나기 어려울 정도였다. 내가 『주석달린 월든』을 통해서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알고 싶었던 수많은 궁금한 얘기들이 거기에 거의 다 담겨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였다. 모습이 궁금했던 여러 인물들 사진은 특히 반가웠다.『소로우의 일기』와 『소로우의 강』을 통해서 언뜻 언뜻 엿볼 수 있었던 '소로우와 에머슨의 우정과 갈등'에 대해서도 아주 자세히 나와 있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에 밑줄 하나 긋지 못해 애를 먹은 대신에 나는 기억해둘 만한 부분들을 '독서노트'에 부지런히 옮겨 적었는데, 그 분량이 자그만치 12쪽이나 되었다.


이 책에 실린 내용에 대해서 과연 내가 얼마나 압축해서 이 글에 담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내가 여태껏 알고 있던 '소로우와 에머슨의 관계'는 사실상 거의 대부분『주석달린 월든』에 딸린 '주석'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마침『소로우와 에머슨의 대화』를 감격에 겨워 읽고 난 지금이야말로 다시금 그 책 속으로, 다시 말하자면『월든』속으로 풍덩 뛰어들 더없이 알맞은 시간이라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그래서 나는『주석 달린 월든』에 담긴 '주석'을 다시금 세세히 살폈다.『소로우와 에머슨의 대화』에 담긴 내용들과 '주석'에 쓰인 내용들이 얼마만큼 긴밀하게 서로 호응하고 연결되는지를 다시금 확인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소로우가 쓴『월든』에는 '에머슨'이라는 이름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 책 속에서 '에머슨'을 수없이 자주 발견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주석달린 월든』은 그런 근거들을 더없이 자세히 밝혀 놓은 책이다. 그 책을 다시 읽어 보니 주석에 '에머슨'의 이름이 등장하는 곳만 무려 59쪽에 달한다. 에머슨의 아들 에드워드 에머슨의 흔적도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에드워드 에머슨이 쓴 책은『소로와 함께한 나날들』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나와 있다.)


『소로우와 에머슨의 대화』에 등장하는 숱한 '현실적인 이야기'가 이미『주석달린 월든』에서도 적잖이 자주 소개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에 담아 둔 건 생각보다 훨씬 고무적인 데가 있었다.『주석달린 월든』의 '주석'을 통해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여러가지 일들과 그들이 서로 주고받은 영향들'을 '주석' 특유의 작은 글씨와 딱딱한 서술 방식으로 어렵사리 알아차릴 수 있었던 데 비해, 정확하게 똑같은 이야기가 『소로우와 에머슨의 대화』라는 책에서 보여준 전기적인 서술방식에서는 얼마만큼 더 부드럽고 따뜻하게 서술될 수 있는지를 새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령, 스무 살 청년이었던 소로우와 그보다 열네 살이나 선배였던 에머슨이 '처음으로 만나는' 광경에 대한 묘사 하나만 보더라도 딱딱한 주석에 담긴 그것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1837년 4월 9일 일요일, 헨리는 브라운 부인과 함께 도보로 십분 거리에 있는 에머슨의 집으로 향했다. 에머슨이 어머니를 모시고 부인과 아들, 세 명의 여자 하인과 살던 하얀 대저택은 케임브리지와 보스턴으로 가는 길목에 2에이커의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건축한 지 8년밖에 안 된 건물은 당시 뉴잉글랜드 풍의 건물과 달리 천장이 높고 창문이 큼지막했다. 주인의 사회적 위치를 잘 드러내는 인상적인 집이었다.


에머슨은 현관에서 인사를 건네는 이 하버드 대학 학생이 예사로운 젊은이가 아님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동창들에게 헨리는 고개를 숙인 채 발끝만 보고 걷는 "무뚝뚝하고" "차가운" 눈에 띄지 않는 학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에머슨 앞에선 달랐다. 에머슨과 같은 뛰어난 지성인 앞에서 헨리는 갑자기 생기를 띠었다. ……


헨리는 아무 부끄럼 없이, 더러 젊음을 과신하는 양 자신 있게 얘기했다. 에머슨은 "혁명을 계획하는" 것처럼 보이는 "어린 거인"으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헨리의 입을 통해 사회, 종교, 고전 이야기가 술술 풀려나오는 것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에머슨은 이런 뛰어난 인재가 어떻게 그 보잘것없는 환경에서 배출된 것인지 경이로웠다. 그는 늘 소로우의 집안과 그 환경을 깔보는 경향이 있었다. 헨리 같은 인재가 그 불우한 환경에서 나올 수 있었다는 시실이 그의 머리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21쪽)


 - 하몬 스미스 지음, 『소로우와 에머슨의 대화』, <첫 만남> 중에서


(5년 만에 다시 펼친『주석달린 월든』은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많은 것들이 새롭게 내 눈에 들어왔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등장했던 많은 인물들이 『월든』속에도 여러 곳에 숨어 있었다. 에머슨이 『위인이란 무엇인가』에서 중요하게 다뤘던 '셰익스피어'는『월든』에서도 역시 많은 곳에서 인용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소로우가 에머슨의 서재에서 빌렸던 많은 책들이『월든』속에 녹아 있는 점도 이전과는 달리 보였다. 가령, 소로우가 '그리스어 원전'을 직접 번역해서 몇몇 잡지에 기고할 수 있었던 것도 '에머슨의 서재' 덕분이었기 때문이다 )

 

다시금『소로우와 에머슨의 대화』에 담긴 내용을 계속 이어 나가자. 이 책의 원제는 『My Friend, My Friend : the story of Thoreau's relationship with Emerson』이다. 두 사람의 우정이 핵심이지만 무게 중심이 소로우에게 좀 더 쏠려 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의 만남은 앞에서도 소개했듯이 '서로의 생각' 말고는 여러모로 '차이'가 컸다. 그토록 개성이 넘치는 두 사람의 우정이 25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는 사실이 도리어 신기할 정도였다.

 

두 사람이 첫 만남을 가졌던 해는 1837년이었다. 그해 8월 30일에 스무 살이던 소로우는 '중간 정도의 성적'으로 하버드를 졸업했다. 그래도 그는 '간략한 졸업사'를 하는 졸업생 22명 가운데 끼어 있었다. 그런데 그해 졸업식에는 에머슨도 참석했다. 당시 서른네 살이었던 그는 이미 그때 '미국의 문화적 독립선언서'로까지 일컬어지는 <미국의 학자>라는 유명한 졸업식 축사를 할 정도의 저명인사였다. 탁월한 자연 에세이인 《자연》을 출간한지 1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당시 인구 2,000명 정도가 살던 콩코드에서 함께 살았던 두 사람이 주고 받은 영향은 실로 지대했다. 가난한 이웃이자 뚜렷한 직업조차 없었던 청년 소로우에게 에머슨은 '천재일우'의 기회이자 기댈 수 있는 큰 언덕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에머슨이 소로우의 '후원자'를 자처한 건 결코 아니었다. 독립심이 강한 소로우가 그런 제안을 받아들일 리도 없었다. 그래도 에머슨은 소로우에게 금전적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비록 소로우는 그 댓가로 온갖 허드렛일을 많이 하긴 했지만 말이다. 에머슨은 소로우에게 자신의 집으로 '이사'를 오게 했고, 일자리를 소개해 주기도 했으며, '서재 열람'을 허용했고, 탁월한 문인들을 자주 소개해 줬고, 자신의 땅인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살도록 허용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도움은 소로우에게 '가능성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지속적으로 보여준 점이었다.

 

에머슨에게도 소로우는 더할 나위없이 소중한 친구였다. 두 사람의 우정이 작가로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힘든 노력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내 리디안과의 소원한 관계 때문에 일부러 장기간 유럽 강연 여행을 떠날 때에도 소로우를 믿고 그에게 '온갖 집안일'과 '가족들'을 내맡길 정도였다.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의 원인들도 적진 않았다. 소로우에겐 좀처럼 다루기 어려운 '논쟁적인 기질'이 아주 강했다. 에머슨이 '선생으로서의 역할을 계속 고집하는 동안, 소로우가 반항적으로 대응한 것도 둘 사이의 갈등을 키우는 요소였다. 에머슨의 아내 리디안에 대한 소로우의 애착심도 둘 사이의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때때로 소로우는 에머슨 때문에 느낀 모욕감이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 있었고, 분하다는 생각에 에머슨이 내민 화해의 손짓마저 거두어들였고 에머슨의 행동 하나 하나를 다 배신행위로 여겼다.


"내 친구는 이렇게 얘기한다. '나는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었노라. 진실도 고결함도 신성한 것도 없다 ……' 그러나 이러한 말은 바로 자기가 덕이 없다는 뜻이다. 내가 아무리 못났어도 그 친구의 행동은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그와의 관계에서는 희망을 찾을 수 없다." 소로우는 에머슨이 다른 이들에게 "듣기 좋은 말은 아니겠지만 차갑고 무심한 말투로라도" 화해를 청했었다고 한 말에 더 낙담하고 말았다. "아!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이야! 인간의 온갖 죄를 한데 모아놓은 것 같구나. 그가 나를 천 번이나 의심한다고 해도, 그것을 잔인하게 발설하기 전까지는 그래도 작은 희망과 기대가 남아 있었다."(252쪽)

 

둘 사이의 관계가 이만큼 악회될 때가 있었다는 것은 놀랍다. 저자는 갈등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소로우가 마음속에 키워온 주관적인 상황 인식'을 꼽는다. 당시 소로우는 자신의 처녀작인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의 일주일』의 실패로 크나큰 자괴감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에머슨은 그 책에 담긴 '자신을 패러디한 듯한 일부 내용' 때문에 기분이 몹시 상해 있었다. 에머슨은 그 책에 대해 "이 작은 배의 여행 이야기는 성실히 씌어졌지만 그렇게 큰 구슬들을 엮어내기엔 실이 너무 가느다랗다"라고 평가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겐 그 책을 칭찬했다. 어쨌든 지난 10 년간 소로우의 '천재성'을 주장해 왔지만 그 책이 실패로 끝나자 에머슨 역시 실망이 컸다.)

 

처녀작의 상업적 실패로 타격을 입은 소로우는 '작가로 인정받으려면 좀 더 나은 책을 출판하는 것이 유일한 활로'임을 잘 알고 있었다. 월든 호숫가에 살기 시작한 때로부터 무려 9년이 지난 1854년 8월 9일에 마침내 일곱 번이나 고쳐 쓴 『월든』이 출간되었다. 출판에 응한 티크너앤필즈는 이미 너새니얼 호손, 헨리 롱펠로, 제임스 러셀 로웰, 올리버 웬들 홈스와 같은 최고의 작가들을 영입해 책을 펴내고 있었다. 소로우가 쓴『월든』도 그런 작가들 수준의 저서이고 "에머슨의 글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보아 '1류 작가'에게 제공되는 수준으로 인세 15%를 약속했다.

 

책이 출판되자 에머슨은 "마치 자기 동생이 쓴 것인 양 기뻐했다." "즐겁고, 활기가 넘치고,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으며,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가치를 담고 있는" 책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그 찬사가 무조건적인 건 아니었다. 소로우는 "항상 힘 있는 글을 쓴다"고 하면서도 책 자체의 평가는 제한적이었다. "때로는 탁월한 수준까지 오르고" "놀라운 깊이와 아름다움"을 보여준다고 호평했지만 문학사적 가치와 위상까지 언급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월든』출간 이후 갑자기 유명해진 소로우는 한때 쇄도하는 강연 때문에 바쁠 때도 있었다. 그러나 강연보다는 자연 탐구에 더욱 열정을 쏟으며 계속 글을 써나갔다. 1860년 12월 어느 날 그는 '나무의 나이테를 세다가' 심한 감기에 걸린다. 그때 얻은 병이 끝내 기관지염과 폐결핵으로 이어지면서 그는 결국 45세로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만다. 1862년 5월 9일 소로우의 장례식때 에머슨이 읽은 추도사는 그가 어떤 존재였던가를 우리에게 새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토록 숭고한 영혼이 자신이 누구인가를 우리에게 다 보여주기 전에 이승을 떠났다는 것은 모욕이다."


헨리 소로우를 아는 사람들이 그를 "거의 숭배"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에머슨은 그것이 전혀 신비스러운 게 아니라고 말했다. 그들은 소로우의 '심원한 정신'과 '위대한 마음'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소로우는 쉽게 만날 수 없는 "뛰어난 지혜의 소유자"였다. 그는 "진리의 웅변가요 행동가"였다. "지극히 사소한 것들에는 어떤 관심이나 욕망이나 열정도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가 추구했던 "가치들이 때로는 극단적"으로 흐를 위험도 있었지만, 그의 '거룩한 생애'는 모두에게 본보기가 되었다.(321쪽)


『소로우와 에머슨의 대화』는 탁월한 두 인물이 나눈 우정 그 자체의 본질을 강조한다. 그러나 독자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졸업 직후 '삶의 현장'에서 '생활고'를 걱정하며 장래를 고민하는 취준생 소로우가 훨씬 더 눈에 띈다. 그리고 그가 문학으로 성공하기 위해 기울인 엄청난 노력을 눈여겨 보게 된다. 그는 핀다로스의 <송가>, 오비디우스의 <변신> 등을 직접 번역하기도 하고, 무수한 자작시를 끊임없이 썼지만 결국 1840년대 초엽에 그 시들을 모두 버리는 엄청난 결단을 내린다. '이제 자신의 나이에 맞게 자신의 시재(詩才)가 어느 정도인지 깨달아야 한다'는 에머슨의 말에 크나큰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여태껏 '소로우의 에세이'만 읽은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시인이 되기 위하여'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 소로우를 보고 새삼 놀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소로우는 단순하게 보자면 '문학가'이면서 '독립적이고 소박한 삶'과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 모두를 아주 훌륭하게 이뤄낸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소로우의 말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용한 절망의 삶을 영위한다." 소로우의 위대한 정신은 바로 거기에 있다. 에머슨은 "진실이라는 선물과 짝 지워지는 하나의 조건은 진실의 활용이다. 배운 것을 실천하는 사람에게 배워야 한다"라고 말했다. 소로우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생활인 소로우의 삶'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본다고 해서 그에 대한 평가를 달리 바꿀 필요는 별로 없다. 탁월한 문학작품으로 승화시킨『월든』이 '소로우의 곤궁했던 현실적인 삶'에 비해 너무 아름답게 쓰여졌다 하더라도, '신화처럼' 읽어야 할 『월든』을 평범한 에세이로 바꿔 읽을 필요는 더더욱 없다. 그 이유를 나는 『주석달린 월든』의 머리말에서도 아주 쉽게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소로우가 쓰고 있던 것은 분명히 신화였다. 『월든』을 의도된 방향이 아닌 다른 관점에서 읽는 독자는 실패하기 십상이다. 소로우는 「독서」에서 "올바른 독서, 즉 참다운 책을 참다운 정신으로 읽는 것은 고귀한 운동이며, 요즘의 세태가 높이 평가하는 어떤 운동보다도 독자에게 힘든 운동이다. 운동선수들이 받는 것과 같은 훈련이 요구되고, 책을 읽겠다는 마음가짐을 거의 평생 동안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책은 처음 씌어졌을 때처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읽혀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 『주석달린 월든』, <머리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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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4-18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머슨과 소로우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이렇게 연결되는군요. 두 천재의 만남이 이렇게 긍정적으로 연결되기도 하지만, 고갱과 고흐의 관계처럼 비극적인 결론으로 끝난 경우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됩니다..

oren 2017-04-18 22:52   좋아요 1 | URL
두 사람의 만남은 정말 특별했던 듯해요. 둘 다 ‘자연‘을 깊이 사랑했던 공통점도 중요했고요. 에머슨이 쓴 《자연》이 소로우에게 ‘엄청난 영감‘을 불어넣었는데, 나중에는 소로우가 훨씬 더 ‘자연‘에 동화된 점도 재미있고요. 소로우에게는 에머슨 말고는 엘러리 채닝이라는 시인 정도가 절친이었지만, 에머슨은 당대에 함께 살았던 유명 작가들을 엄청나게 만났더군요. 존 스튜어트 밀,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워즈워스, 헨리 제임스, 찰스 디킨즈, 앨프리드 테니슨, 토머스 칼라일, 알렉시스 토크빌, 너새니얼 호손, 허먼 멜빌, 월트 휘트먼 등등..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아끼고 사랑한 친구가 소로우였지요.

겨울호랑이 2017-04-18 22:56   좋아요 0 | URL
에머슨은 정말 당대의 마당발이었군요^^: oren님 덕분에 소로우와 에머슨을 개별 작가로서가 아니라 이들의 우정이라는 면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oren 2017-04-18 23:57   좋아요 1 | URL
에머슨은 마당발이자 명연설가이기도 했지요. 노예제도에 반대했던 그가 링컨 대통령을 만나기 전에 워싱턴에서 했던 유명한 연설도 재미있습니다. 에머슨은 나중에 링컨으로부터 ‘미국의 아들‘이란 영광스런 별호를 얻었다고 하더군요.
* * *
˝The South calls slavery an institution... I call it destitution... Emancipation is the demand of civilization˝. 남부는 노예제를 사회제도라고 합니다. ..저는 이것을 destitution이라고 부릅니다. 노예해방은 문명사회의 요구입니다.

그랜드슬램 2017-06-14 16: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3년전 백두대간을 가면서 월든을 가지고 갔더랬죠! 억수로 비가와서 배낭이 다 젖어 월든이 물에 흠뻑 스며 들었는데 어찌어찌하여 말렸는데 영 훼손되어 다시 구입했지요^^ 개인적으로 소로우의 강도 훌륭하지만 소로우의 일기가 간결하면서도 좋더군요, 생각이 번민이 많을 때마다 읽으면 맑은 공기속에서 녹차를 마시는 것처럼 좋습니다^^ 좋은 글 감사드리고 요즘 글이 뜸하시네요, 기다리고 있습니다^^

oren 2017-06-14 18:23   좋아요 0 | URL
소로우가 일기를 쓰게 된 것도 에머슨의 권유 때문이었더군요. 소로우나 에머슨이나 ‘일기‘를 통해 엄청난 문학적 발전을 이룬 걸 보며 ‘일기‘를 쓰던 습관을 잊어버린 나 자신이 너무 안타깝게 느껴지더군요. 이젠 ‘일기‘를 다시 쓰려고 해도 너무 어색해서 도무지 그리 할 수도 없다고 느껴지고요. 요즘 계속해서 ‘셰익스피어‘를 읽고 있는데, 적당한 글감이 떠올랐을 때 한두 번씩 글로 끄적거리다가도 금세 그만두고 얼른 다시 셰익스피어에게로 달려가기가 바쁘네요^^

2019-02-08 1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08 19: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우리는 젊은 시절에 소설과 시를 즐겨 읽는 경향이 있다. 왜? 이런 장르는 열다섯 살과 쉰다섯 살 사이에 우리를 가장 괴롭히는 문제인 사랑을 많이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중년에 접어든 사람들은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점점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우리의 삶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도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전기에 관심을 많이 기울이게 되고, 어떤 통찰을 얻지 않을까 싶어서 그 사촌격인 역사와 철학도 뒤적거리게 된다.

 - 마이클 더다, 『고전 읽기의 즐거움』중에서


 * * *


에머슨의 글은 '곡진하게 체험하지 않으면' 쉽사리 와 닿지 않는 문장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그만큼 독자들로부터 쉽사리 외면받기도 쉽다. 그의 책을 세 권이나 읽어도 가슴에 탁 와닿지 않는 문장들을 도대체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


『평생독서계획』을 쓴 클리프턴 패디먼은 헨리 데이빗 소로우에게는 격찬을 퍼부었지만(가령 "소로는 살아생전에는 자기 자신을 상대로 무수히 많은 독백을 했다. 그러나 사후에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상대로 말하고 있다. 어쩌면 수억 명의 사람들을 상대로 호소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에머슨에겐 좀 더 냉혹한 평가를 내리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20세기에 들어와 소로우의 영향력은 점점 커져 가는 동안, 그의 친구인 에머슨의 영향력은 감소하고 있다. 객관적인 사실을 더 대담하고 더 확실하게 파악한 소로우는 이제 기다란 그림자를 던진다. 에머슨의 특징은 다음 셋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 그는 허풍과 반복에도 불구하고 19세기의 핵심적 미국 사상가들 중 한 사람이었다. 둘째, 영구히 미국적인 것으로 굳어진 태도를 형성한 사람이다. 셋째, 작가로서 좋은 글을 쓸 때에는 힘과 재치와 생기와 신선함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특히 그는 영어 경구의 대가였다. 이런 특징 때문에 우리는 그의 글을 읽는다. 하지만 그의 글을 너무 많이 읽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때때로 그는 독창적 아이디어가 아니라 번드레한 말만 늘어놓고, 또 자신이 다루는 방대한 자료들을 잘 조직하거나 압축하지 못한다.(235쪽)


 - 클리프턴 패디먼, 『평생독서계획』, <69. 랄프 왈도 에머슨> 중에서


그런데 좀 더 알고 보면 소로우는 에머슨에 비하면 여러모로 불쌍한(?) 사람이었다. 에머슨과는 한 동네에 살았고, 같은 대학을 나온 선후배 사이였지만 나이도 열네 살이나 어렸고 처지도 한참이나 달랐다. 소로우의 집은 가난해서 매 학기마다 등록금과 기숙사비를 걱정할 처지였고, 소로우는 학창 시절 내내 푸른 코트 한 벌로 지낼 정도였다. 거기에 비하면 에머슨은 대저택에 하인들까지 여럿 두고 살 정도로 형편이 몹시 넉넉했다.


그렇지만 에머슨에게도 '아픔'이 없었던 게 아니다. 그는 꽃다운 나이의 아내를 폐결핵으로 잃었고, 정신질환을 앓던 동생도 잃었고, 2년 후에는 막내 동생도 잃었고, 재혼 후에 얻은 첫 아들은 성홍렬로 잃었다. 그런 '경험'들이 <경험>이라는 에세이에 담겨 있는 것이다. 뼈에 사무치는 슬픔이 담담한 붓끝에서 뚝뚝 떨어져 흘러내린 듯한 문장들을 겉만 훑으며 빠르게 지나쳐 읽는 사람들이 그의 글을 충분히 제대로 음미하지 못한다고 해서 나무랄 수도 없는 노릇이다.


1832년 3월 29일 에머슨은 1년 2개월 전에 죽은 아내 엘렌 터커의 무덤을 파헤치고 관을 열어보았다. 그 동안 19세의 어린 나이에 저 세상으로 간 아내의 무덤을 거의 하루도 빼지 않고 찾았지만, 그는 아내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일기에서 여전히 아내에게 말을 건네고 시를 써보내고 그녀를 위하여 기도를 드렸다. 그들이 결혼하였을 때, 엘렌은 시인을 꿈꾸는 아름답고 총명한 18세의 소녀였고 그는 카턴 마더 일가가 개척한 유서 깊은 보스턴 제2교회에서 시무하는 장래가 촉망되는 27세의 목사였다. 신혼의 꿈에 젖을 사이도 없이 이내 악화되기 시작한 엘렌의 폐결핵은 그들의 결혼 생활을 불과 1년 6개월 만에 마감케 하였던 것이다. ……


죽음은 에머슨의 삶의 길목에 숨어 있는 복병과 같은 것이었다. 엘렌의 죽음은 그 복병이 기습 공격을 시작한 것일 뿐이었다. 엘렌과의 사별의 충격에서 겨우 벗어난 1834년, 에머슨은 이번에는 바로 손아래 동생인 에드워드를 폐결핵으로 잃는다. 이어 1년 반 뒤인 1836년에는 뛰어난 재능으로 주위의 선망의 대상이었고 에머슨도 수월성의 한 기준으로 삼아 아끼고 사랑하였던 막내동생 찰스마저 폐결핵으로 쓰러진다.(216∼217쪽)


 - 랄프 왈도 에머슨, 신문수 옮김,『자연』, <역자 해설, 초월주의자의 길> 중에서 -


에머슨의 〈경험〉은 그나마 다른 수필들에 비하면 훨씬 이해하기 쉬운 편이다. 우리도 충분히 공감할 만한 내용들이 제법 많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바위처럼 단단하거나 암초처럼 전모를 헤아리기 어려운 문장들도 수두룩하다. 가령 다음의 문장을 처음 읽는 사람들은 이 대목을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좋은지 잠시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인생은 염주처럼 기분들의 연속이다. 우리가 그 기분들을 하나씩 겪어나갈 때, 그들은 그 자신의 색깔로 세상을 칠하는 다채색 렌즈라는 것을 드러낸다. 기분은 각기 초점에 잡힌 것만을 현시하기 때문이다.(175쪽)


 - 랄프 왈도 에머슨, 신문수 옮김,『자연』, <경험> 중에서


이 대목을 다른 책에서는 이렇게 번역해 놓았다.


인생이란 한 줄에 꿰인 염주와 같은 마음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연속인 것이다. 우리가 이들을 하나하나 통과하며 지나갈 때, 이들은 모두 각기 독특한 빛깔로 세상을 물들이고, 각기 자기의 초점 속에 들어오는 것만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형형색색의 만화경의 렌즈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47쪽)


 - 랄프 왈도 에머슨, 이창기 편역, 『자신감』, <경험> 중에서


두 권의 책에서 똑같은 구절을 '다른 번역'으로 읽어 봤지만 여전히 뭔가 아리송하기만 하다. 손아귀에 단단히 붙들리는 것이라곤 거의 없다. 아무리 움켜쥐더라도 자꾸만 모래알처럼 스르르 빠져나가는 무언가가 있다는 느낌을 더 받기 쉽다. 이 문장들 속에 담긴 함의를 나는 엉뚱한 책에서 기어이 찾아냈다. 이미 절판된 책이어서 구할 수도 없었는데 마침 동네 도서관에서 발견한 책 속에 그 구절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인생이란 유리구슬을 꿰듯 여러 감정mood을 줄줄이 엮어가는 것이다. 살면서 느끼게 되는 감정은 저마다 그만의 색조로 세상을 비추고 그만의 초점으로 세상을 보여주는 다채로운 빛깔의 렌즈와 같다. 우리는 구슬을 꿰듯 그 갖가지 감정들을 하나씩 통과해 간다.


에머슨의 에세이 <경험>에 나오는 글귀다. 그해 봄 일기에 이 에세이를 써내려가던 에머슨은 아들을 잃은 비통한 심정에 젖어 있었다. 전적으로 '정직하게만' 인생을 묘사하기로 맘먹고 예전과는 완전히 딴판인 그림을 그려나갔다. 곡진하게 체험하면 어떤 확신을 갖게 되듯이, 인생무상의 세계관으로 삶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전나무의 나뭇가지에 감겨 있듯, 죽음은 살아가는 동안 매순간 우리 눈가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모든 것이 둥둥 떠다니다 차츰 흐릿해지고 만다."


그는 아무 의문을 품지 않고 삶을 그냥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만족할 만한 인생이 찾아온다고 씁쓸하게 결론지었다.(117쪽)


 - 하몬 스미스 지음, 서보명 옮김, 『소로우와 에머슨의 대화』, <에머슨 가족의 한 사람이 되다> 중에서


에머슨의 '경험'은 <보상을 생각해 본다>에도 여기저기에 깊이 배어 있다. 그 에세이의 마지막 대목에서 에머슨의 쓰라린 아픔들을 짚어내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재난의 보상은 또한 오랜 시일이 지난 뒤엔 인간의 이해력에도 뚜렷이 알려진다. 질병 · 상해 · 잔혹한 실망, 재산 손실 · 벗의 사별 등이 그때에는 보상되지 않는, 그리고 보상될 수 없는 손실로 생각된다. 그러나 어김없는 세월은, 모든 사실의 밑바닥에 깔린 깊은 구제의 힘을 드러내 보인다. 친한 친구 · 아내 · 형제 · 애인의 죽음은 다만 상실로만 생각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것은 자기의 안내자나 보호신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이러한 재앙이 흔히 우리의 생활양상에 혁명으로 작용하고, 바야흐로 끝나려고 하고, 유년 또는 청년의 한 시기에 종지부를 찍고, 종래의 직업 · 가정 · 생활방식 따위를 버리고, 인격의 발전에 한층 편리한 새로운 것을 형성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새로운 지기(知己)를 만들고, 다음에 닥쳐 오는 세월에 가장 긴요한 새로운 세력을 받아들이도록 내버려 두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강요한다. 이리하여 담이 쓰러지고 정원사가 돌보지 않아서 멀리 뿌리를 뻗을 여지도 없고, 머리 위에 지나친 햇볕을 받으며, 그저 햇빛 잘 받는 정원꽃이 될 한 남녀가 도리어 숲 속의 보리수가 되어 널리 세상 사람에게 그늘과 과일을 제공하게 되는 것이다. (308∼309쪽) ·


 - 랄프 왈도 에머슨, 『위인이란 무엇인가/자기신념의 철학』, <보상을 생각해 본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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