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1 동서문화사 월드북 69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맹은빈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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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백 년이나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아

 

"아니야, 난 그런 건 믿을 수 없어." 쏘냐는 되풀이했다. "나는 납득이 가지 않아. 네가 꼬박 일 년 동안 한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가, 갑자기……. 넌 그 사람을 세 번 만났을 뿐이잖아? 나따샤, 나는 널 믿을 수가 없어. 넌 농담을 하고 있는 거야. 단 사흘 동안에 모든 것을 잊고 그런 식으로……."

 

"사흘!" 나따샤는 말했다. "나는 백 년이나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것만 같아. 난 그이 이전에는 아무도 사랑한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게다가 아무도 그이만큼 사랑한 일이 없어. 넌 이것을 모르고 있어, 쏘냐. 잠깐만 여기 앉아." 나따샤는 그녀를 껴안고 키스하였다. "이런 일이 있다는 것은, 나도 이야기에서 들은 적은 있어. 너도 틀림없이 들었을 거야. 그러나 이런 사랑을 경험한 것은 난 이번이 처음이야. 전하고는 달라. 그 사람을 보자마자 나는 느꼈어. 이 사람은 나를 지배할 사람이다, 나는 이 사람의 노예다,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이야. 그래, 나는 노예야! 그 사람의 분부라면 나는 무슨 일이라도 하겠어. 이 기분 넌 모를 거야. 넌 나에게 어떻게 하라는 거야, 쏘냐?" 나따샤는 행복스러운, 그러나 겁먹은 듯한 얼굴로 말했다.(801쪽)


 

 

 

진짜 현인


'확실히 이것이 진짜 현인(賢人)이다!' 삐에르는 생각했다. '즐기고 있는 지금의 순간 말고는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 아무에게도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언제나 명랑하고 만족하며 침착하게 있을 수 있다.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내놓을 텐데!' 삐에르는 부러운 마음으로 생각했다.(819쪽)


 

 

거친 치료

 

궁지에 몰린 부상한 짐승이 쫓아오는 개와 사냥꾼을 바라보듯, 나따샤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아가씨." 삐에르는 눈을 내리깔고, 그녀를 가엾게 생각하는 마음과, 자기가 해야 할 거친 치료를 꺼림칙하게 생각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당신에게는 매한가지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럼, 그 사람이 결혼하였다는 것은 거짓말이군요."

 

"아닙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822쪽)


 

 

그렇지만 내가 용서할 수 있다고는 말하지 않았네

 

"저, 언젠가 뻬쩨르부르그에서 둘이서 토론한 적이 있었지요." 삐에르가 말했다. "기억하고 있습니까?"


"기억하고 있다마다." 성급하게 안드레이가 말했다. "타락한 여잔 용서해줘야 한다고 나는 말했지. 그렇지만 내가 용서할 수 있다고는 말하지 않았네. 난 용서할 수가 없어."

 

"그러나 그것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삐에르는 말했다. 안드레에가 말을 가로챘다. 그는 날카로운 소리로 외쳤다.

 

"옳지, 다시 한 번 청혼하고 관대하게 대해 주라는 말인가? …… 그래, 그건 대단히 훌륭한 일이야. 그렇지만 나는 그 사나이가 걸어간 뒤를 따라갈 수는 없어. 만약 자네가 계속 내 친구가 되고 싶거든, 두 번 다시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지 마……. 그 이야기를 일체 입 밖에 내지 말게. 그럼, 실례, 잘 가게, 그것은 그녀에게 건네주겠지……?"(830쪽)

 

 

 

당신의 인생은 이제부터가 아닙니까?

 

"그를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지 마세요." 나따샤가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그녀는 다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자 더욱 강하게, 가엾은 생각과 귀여운 생각, 그리고 사랑의 감정이 삐에르를 사로잡았다. 그는 안경 밑으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끼고 그것이 그녀의 눈에 띄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하였다.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맙시다." 삐에르는 말했다.

 

나따샤에게는 갑자기 이 삐에르의 온화하고 부드러운, 마음이 깃든 목소리가 몹시 이상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둡시다. 내가 그에게 모든 것을 얘기하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만 부탁해 두겠습니다. 나를 당신의 친구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그리고 만약 당신에게 도움이나 충고가 필요할 때가 생기면, 여하간 그 누군가에게 자기 마음을 털어놓을 일이ㅡ지금이 아니라, 당신 마음이 더 가라앉았을 때ㅡ있으면…… 저를 생각해 주십시오." 그는 나따샤의 손을 잡고 키스하였다.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나는 행복합니다……." 삐에르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제게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난 그럴 가치도 없어요!" 나따샤는 이렇게 외치고 방에서 나가려고 했지만, 삐에르는 그녀의 손을 잡아 세웠다. 그는 아직 나따샤에게 해야 할 말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말을 입 밖에 내자 그는 자기 자신의 말에 놀랐다.

 

"그만두세요, 그만두세요. 당신의 인생은 이제부터가 아닙니까?" 그는 그녀에게 말했다.

 

"나의 안생이? 아녜요! 나에게는 모든 것이 끝났어요." 그녀는 자기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자신을 멸시하면서 말했다.

 

"모든 게 끝났다고요?" 그는 되풀이했다. "만약 내가, 지금의 내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미남이고 머리가 좋고 뛰어난 인간이라면, 그리고 자유로운 몸이라면, 나는 이 순간 당장 무릎을 꿇고 당신의 손길과 사랑을 구하겠습니다."

 

나따샤는 오랜만에 감사와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삐에르를 흘끗 바라보고는 방에서 나갔다.

 

삐에르도 목구멍에 복받쳐 오르는 감동과 행복의 눈물을 억제하면서 그녀를 뒤따라 거의 뛰어가듯이 현관으로 나왔다. 그리고 소매에 손도 넣지 안혹 모피 코트를 걸친 채 썰매에 올라탔다.

 

"이번에는 어디로 모실까요?" 마부가 물었다.

 

'어디라고?' 삐에르는 자신에게 물었다. '지금 도대체 어딜 갈 수가 있단 말인가? 설마 클럽이나 방문?' 자기가 맛보고 있는 감동과 사랑의 감정에 비하면, 그녀가 마지막에 눈물을 통해서 자기를 흘끗 보았을 때의 부드럽고 감사에 찬 눈빛에 비하면, 모든 인간이 지극히 가엾고 초라해 보였다.

 

"집으로."  삐에르는 영하 10도나 되는 추위도 아랑곳없이, 기쁨의 숨을 쉬고 있는 넓은 가슴 위를 덮은 곰 가죽 외투의 앞자락을 열어젖히면서 말하였다.(832-834쪽)

 

 

 

이 별이야말로

 

꽁꽁 얼어붙은 맑은 밤이었다. 지저분하고 어스름한 어둠에 싸인 거리와 검은 지붕 위를, 별이 반짝이는 어두운 하늘이 뒤덮고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삐에르는, 지금 자기의 영혼이 도달해 있는 숭고한 높이에 비하면 이 자상의 모든 것들이 창피할 정도로 하찮게 느껴져 견딜 수가 없었다. 아르바뜨 광장에 들어서는 곳에서 어두운 밤하늘의 거대한 공간이 삐에르의 눈 앞에 펼쳐졌다. 이 하늘의 거의 한복판, 쁘레치스친스끼 가로수 길 상공에, 온통 뿌려놓은 듯한 별에 둘러싸여 다른 것보다 지구에 가깝고, 하얀 빛과 위로 추켜진 긴 꼬리 때문에 한층 눈에 띄는, 거대하고 찬란한 1812년의 혜성이 걸려 있었다. 이 혜성은 이 세상의 모든 공포와 종말을 예언한다고 일컬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긴 빛의 꼬리를 가진 그 반짝이는 별도, 삐에르의 마음에 아무런 두려운 감정을 불러 일으키지 못했다. 반대로 삐에르는 즐거운 마음으로, 눈물에 젖은 눈으로 그 밝은 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헤아릴 수 없이 큰 여러 공간을 포물선을 그리고 날아가, 갑자기 지면에 꽂힌 화살처럼 스스로 고른 저 검은 하늘의 한 점으로 파고들어, 깜빡이고 있는 다른 무수한 별 사이에서 빛을 내고, 흰 꼬리를 반짝이면서 힘차게 그 꼬리를 위로 들어올리고 서 있는 것 같았다. 삐에르에게는 이 별이야말로 새로운 생명을 향하여 꽃피고, 부드러우면서도 고무된 자기 마음과 이 별이 완전히 일치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8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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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1 동서문화사 월드북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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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의 이도, 한 올의 머리카락도 없이 다 빠져버린 뒤에야

 

삐에르는 모스크바에서 유유히 여생을 보내고 있는, 수백 명이나 되는 퇴직 시종관 중 한 사람이었다.

 

7년 전 그가 외국에서 갓 돌아왔을 때에, 누군가 그에게 당신은 이제 아무 것도 찾거나 생각해낼 필요는 없다, 당신의 나아갈 길은 벌써 굳게 다져져서 영원히 정해져 있다, 아무리 당신이 몸부림치더라도 결국은 그와 동일한 처지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같은 것이 되고 만다고 말했다면 그는 얼마나 달랐으랴. 그런 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때로는 러시아에 공화국을 만들려고 열망하기도 하고, 자신이 나폴레옹이 되기를 바랐으며, 때로는 철학자나 나폴레옹을 능가하는 전술가가 되려고 했던 그가 아니었던가? 죄 많은 인류를 다시 태어나게 하거나 자기 자신을 자기 완성의 최고 단게에까지 도달시킬 수가 있다고 보고, 열렬히 그것을 바라고 있던 삐에르가 아니었던가? 학교와 병원을 세우기도 하고, 농민을 해방하려고 한 것도 삐에르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러한 여러 가지 일 대신에 삐에르의 실상은ㅡ부정(不貞)한 아내를 가진 부자 남편이며, 먹거나 마시고, 옷을 풀어헤친 채 때때로 정부를 욕하기를 좋아하는 퇴직 시종관이며, 모스크바의 영국 그룹 회원이고, 모든 사람들의 호감을 사는 모스크바 사교계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그는 현재의 자기가 7년 전에 그토록 깊이 멸시하고 있던 모스크바의 퇴직 시종관 바로 그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을 오랫동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따금 그는 잠시 이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러나 그는 수많은 사람이 그저 잠시뿐이라고 하면서, 자기와 마찬가지로 이와 머리카락이 성했을 무렵에 이런 생활과 이 클럽으로 들어왔다가, 한 개의 이도, 한 올의 머리카락도 없이 다 빠져버린 뒤에야 여기서 나갔다는 것을 생각하고 무서운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742-743쪽)

 

 

그러한 문제를 잊기 위해


그는 많은 사람들, 특히 러시아 사람의 불행한 능력을 몸소 맛보고 있었다. 그것은 선과 정의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믿으면서도, 이제 인생에 진지하게 발을 들여놓을 수 있기 위해서는, 너무나도 뚜렷하게 인생의 악과 허위를 꿰뚫어보는 능력이었다. 어떤 일의 분야에서나 그의 눈으로 보자면 악이 허위와 결부되어 있었다. 무엇이 되려고 해도, 무엇을 하려고 해도 악과 허위가 그를 주저하게 만들고 모든 활동의 길을 막아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해결되지 않는 인생 문제에 짓눌려 있는 것은 너무나도 무서웠다. 그래서 그는 다만 그러한 문제를 잊기 위해 마음이 끌리는 일에 무턱대고 열중했다. 그는 모든 집회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많은 술을 퍼마셨고 그림을 사 모으며 새 건물을 지었다. 특히 독서에 빠져들었다.(745쪽)



독서와 술

 

그는 닥치는 대로 무엇이든지 읽고 또 읽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하인이 외투를 갈아입히고 있는 동안에도 책을 들고 읽을 정도였다. 그리고 독서에서 수면, 수면에서 객실이나 클럽에서의 답담, 잡담에서 연회와 여자로, 연회에서 다시 잡담, 독서, 술로 옮겨갔다. 술을 마신다는 것은 그에게는 차차 육체적인 욕구와 동시에 정신적인 욕구가 되기도 하였다. 의사가 그와 같이 비대한 몸에는 술은 위험하다고 말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몹시 많은 술을 마셨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큰 입에 술을 몇 잔 들이켜 체내에 퍼지는 흐뭇한 따뜻함을 느끼고, 가까운 사람 모두에게 부드러운 애정을 느끼며, 모든 생각에 대해서 그 본질을 깊이 캐 보지 않고 표면적으로 응답하는 마음이 되었을 때 비로소 완전히 좋은 기분이 되는 것이었다. 술을 한두 병 다 마시고 나면 비로소 그는 이제까지 자기를 위협하고 있던, 저 복잡한 무서운 인생의 갈등이 자기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처럼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고 막연히 의식하는 것이었다. 저녁이나 야식 후 머릿속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을 느끼면서 지껄이고, 남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거나 책을 읽거나 하면 그는 끊임없이 그 얽힘을, 어느 쪽이 되었던 간에 그 얽힘의 일면을 보았다. 그러나 술의 힘을 빌릴 때에 한해서 그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풀어 주겠다. 나는 이미 설명을 준비해 두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겨를이 없다. 나중에 천천히 생각하기로 하자!" 그런데 이 나중이라는 것은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아침이 되어 술이 깨면, 이제까지의 여러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무서운 것으로 여겨져 삐에르는 다급히 책을 손에 들고, 만약 누가 찾아오면 몹시 기뻐하는 것이었다.(745-746쪽)

 


오리가 항상 물에서 살도록 만들어진 것처럼


아나똘리는 자기의 지위와 자기 자신과 남에게 항상 만족하고 있었다. 자기는 지금과는 다른 방법으로는 살 수 없고, 자기는 태어난 이래 이제까지 나쁜 짓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본능적으로 믿고 있었다. 또 자기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 자기의 이러저러한 행위가 어떤 결과를 낳게 될 염려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지 않는 품성이었다. 그는 마치 오리가 항상 물에서 살도록 만들어진 것처럼, 자기는 당연히 3만 루블의 수입으로 생활하고, 항상 사회의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도록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787쪽)


 

당신이 그토록 매혹적이라고 해서

 

아나똘리는 나따샤에게 왈츠를 청했다. 왈츠를 추는 동안에 그녀의 허리와 팔을 껴안고 손을 쥐면서 당신에게 나는 마음을 빼앗겼다고 말하고, 당신을 사랑한다고도 말했다. 나따샤가 또 아나똘리와 함께 춘 에꼬쎄즈 때 단둘이 있게 되자 아나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따샤는 왈츠를 출 때 그가 한 말은 꿈이었나 하고 의심했다. 첫 피겨가 끝나자 그는 다시금 나따샤의 손을 잡았다. 나따샤는 겁먹은 듯한 눈으로 쳐다보았으나 상대방의 상냥한 눈초리와 미소 속에 너무나도 자신에 찬 부드러운 표정이 담겨 있어, 그것을 보고 있으면 해야 할 말도 하지를 못했다. 그녀는 눈을 떨구었다.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나는 약혼 중입니다. 다른 분을 사랑하고 있어요." 그녀는 다급히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남자를 보았다. 아나똘리는 그녀의 말에 당황하거나 낙심하는 빛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말은 하지 마십시오. 내게 무슨 관계가 있단 말입니까?" 그는 말했다. "나는 미치도록, 미치도록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그토록 매혹적이라고 해서, 내가 나쁜 것은 아니잖습니까? …… 우리는 이제 시작할 차례입니다."(794쪽)

 

 

그 눈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번쩍번쩍 빛나는 커다란 남성다운 눈이 자기 눈 바로 가까이에 있었으므로, 그녀는 그 눈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따샤?˝ 그의 음성이 물어보듯이 속삭였다. 그리고 누군가 아프도록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나따샤!˝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나는 아무것도 할 말이 없어요.‘ 그녀의 눈은 이렇게 말했다.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내리눌렀다. 그 순간, 그녀는 다시 자기가 자유롭게 된 것을 느꼈다.(7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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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의 생활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로스또프 노백작은 귀족 단장을 그만 두었다. 그 까닭은 그 자리가 너무도 막대한 경비가 뒤따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가게는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 나따샤와 니꼴라이는 이따금 남몰래 걱정스럽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부모의 모습을 보았고, 조상의 유산인 화려한 로스또프네의 저택과 모스크바 근교의 집을 내놓는다는 소문도 듣고 있었다. 귀족 단장 자리에 있지만 않았다면 큰 접대를 베풀 필요도 없었으므로, 오뜨라도노에 마을의 생활도 지난 수년 동안보다는 조용히 지나갔을 것이다. 그렇지만 광대한 본채와 몇 개의 딴채는 여전히 손님들이 끊일 새가 없었고, 식탁에는 늘 20명 이상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이들은 거의가 가족의 한 사람으로서 오랫동안 살고 있는 일꾼 아니면 반드시 백작 집에서 살아야만 한다고 생각되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를테면 악사 짐레르 부처, 댄스 교사 요겔 일가, 같이 살고 있는 노처녀 벨로바, 그 밖에 많은 사람들ㅡ뻬쨔의 가정교사들, 딸들의 이전의 가정교사, 심지어는 다만 집에 있는 것보다는 백작네에서 사는 편이 낫거나 득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전처럼 몰려오는 손님들은 없었지만 생활 모습은 여전했고, 백작 부처도 그 이전의 생활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사냥개의 수도 여전하기보다는 니꼴라이에 의해서 늘어날 정도였고, 마구간에는 여전히 쉰 마리의 말과 열다섯 명의 마부가 있었으먀, 생일날에는 전과 다름없이 서로 값비싼 선물을 주고 받았다. 또 전체 군을 통틀어 초대하는 호화스러운 저녁 만찬, 백작과 짜고 승부를 하는 권리를 최고로 유리한 임시 수입이라고 생각하는 이웃 사람들에게, 여전히 카드를 부채처럼 펼쳐서 모두가 볼 수 있게 해주고 매일 수백 루블을 따게 해주는 백작 일류의 휘스트와 보스턴 카드게임 등이 열렸다.(711쪽) 



모두가 변함 없이 똑같은


˝엄마!˝ 그녀는 말했다. ˝내게 그 사람을 주세요. 네, 주세요, 어머니, 빨리, 빨리요.˝ 그리고 다시금 그녀는 솟구치는 울음을 간신히 참았다.


그녀는 테이블 옆에 앉아서, 역시 테이블 쪽으로 온 니꼴라이와 어른들의 잡담을 듣고 있었다. ‘아, 싫다, 싫어, 늘 같은 얼굴과 같은 화제, 아버지도 여전히 찻잔을 들고, 여전히 차를 식히기 위해 불고 계셔!‘ 모두가 변함 없이 똑같은 집안 사람들에 대해 자기 마음 속에 솟아나는 혐오감을 느끼고 으스스해 하면서 나따샤는 생각했다.(718쪽)



똑같은 사람이면서도 다른


모두가 멜류꼬프네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 언제나 무엇이든 알아채는 나따샤가 자리 배치를 잘 해서, 마담 쇼스와 자기가 짐레르와 같은 썰매를 타고, 쏘냐는 니꼴라이와 하녀들과 다른 썰매를 타도록 하였다.


니꼴라이는 이제는 추월하려고도 하지 않고 일정한 속도로 집으로 향하여 갔다. 그리고 이 기묘한 달빛 속에서 끊임없이 쏘냐를 바라보면서, 그 코르크 눈썹과 콧수염 아래에서 옛날의 쏘냐와 이제는 절대로 놓지 않겠다고 결심한 지금의 쏘냐를 찾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똑같은 사람이면서도 다른 쏘냐를 알아채고는, 키스의 감각과 뒤섞인 그 코르크 냄새를 상기하고 그는 가슴 가득히 얼어붙은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리고 뒤로 사라져가는 대지와 반짝이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자기가 아직 마법의 나라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733쪽)



오래 입었던 가운을 다시 입은 것처럼


모스크바에서 그는, 아름다운 용모가 시들어 빠진, 혹은 시들고 있는 공작 영양들과 많은 하인들이 있는 광대한 저택에 마차를 몰고 들어간 순간, 시중과 마차를 몰고 다니면서 성상(聖像)의 황금 장식 앞에 무수한 촛불이 켜져 있는 저 이베르스까야의 예배당을 본 순간, 아직 마차 바퀴 자국이 나 있지 않은 저 크레믈린 광장이나 거리의 마차, 씨브쩨프 브라제크 거리의 빈민굴을 본 순간, 아무 욕심 없이 서두르지도 않고 여생을 보내는 모스크바의 노인들을 본 순간, 나이 든 여인이나 모스크바의 귀부인들, 모스크바의 무도회나 모스크바의 영국 그룹들을 본 순간, 그는 나의 집, 조용한 휴식의 장소로 돌아온 기분이 되었다. 그는 모스크바로 오자 오래 입었던 가운을 다시 입은 것처럼 마음이 가라앉고, 따뜻하며, 평상적으로 속된 기분이 들었다.


모스크바의 상류 사회 전체가, 할머니에서 어린 아이에 이르기까지, 항상 자리를 준비하여 비워 두고 있는, 기다리고 기다리선 손님으로서 삐에르를 맞이하였다. 모스크바의 사교계에서 삐에르는 더없이 인상이 좋고 착하며 머리가 좋은, 명랑하고 관대한 기인으로, 동시에 소박하고 선량한 러시아적인 낡은 타입의 나리로 통하고 있었다. 그의 지갑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기 때문에 항상 텅텅 비어 있었다.(741-742쪽)



섹스에 관심이 없으니까


젊은 여인과 아가씨들은 그가 별로 누구를 지분거리는 것도 아니고, 야식 뒤에는 누구에게나 다 같이 친절했으므로 그를 좋아했다. ˝저분은 매력적이야, 섹스에 관심이 없으니까.˝ 그녀들은 소곤거렸다.(7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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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사가 경험하는 것과 같은 기분

엘렌이 몹시 머리가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삐에르는 정치, 시, 철학 이야기가 화제에 오르는 아내의 파티나 만찬회에 출석하면 가끔 납득이 가지 않아서 무섭고도 묘한 느낌을 맛보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파티 자리에서 그는, 언제 어느 때 속임수가 간파될지 몰라서 늘 걱정하는 마술사가 경험하는 것과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와 같은 파티를 여는 데에 우열(愚劣)만이 필요한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속임수에 넘어간 인간 자신이 그것을 즐기고 있기 때문인지, 아무튼 속임수는 탄로나지 않았다. 그래서 매력적이고 재치 있는 여성이라는 평판이 베주호프 백작 부인 엘렌의 움직일 수 없는 정평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녀가 아무리 부질없고 어리석은 말을 하더라도, 모든 사람은 그 한 마디 한 마디에 감탄하고 그녀가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깊은 뜻을 그 말 속에서 찾아내는 것이었다.(604-605쪽)


그가 울고 싶었던 것은


식후에 나따샤는 안드레이의 청을 받아 클라비코드 쪽으로 가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안드레이는 여인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창가에 서서 나따샤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가사를 듣고 있던 도중에 그는 입을 다물고 뜻하지 않게 눈물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자기에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몰랐다. 그는 노래하고 있는 나따샤를 보았다. 그러자 무엇인가 새로운 행복 같은 것이 그의 마음 속에 솟아올랐다. 그는 행복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슬프기도 했다. 그에게는 울 만한 일이라곤 조금도 없었지만, 당장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무엇을? 옛 사랑? 작은 공작 부인? 자기 환멸? …… 미래에 대한 자기의 희망? …… 그렇기도 했고 그렇지 않기도 하였다. 그가 울고 싶었던 것은 갑자기 여러 가지로 그가 의식한, 자기 속에 있는 끝없이 위대하고 파악할 수 없는 그 무엇과,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나따샤까지도 예외가 아닌, 답답한 육체적인 그 무엇과의 사이에 가로 놓여 있는 무서운 모순 때문이었다. 나따샤가 노래를 부르고 있는 동안 그 모순이 그를 괴롭히고 또한 기쁘게 했다.(642쪽)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행복의 가능을 믿어야 한다


‘무엇 때문에 나는 발버둥을 치고 있는가? 무엇 때문에 나는 이 좁은, 출구가 없는 틀 안에서 안달을 하고 있는가? 인생이, 모든 기쁨을 가진 인생의 모든 것이 내 앞에 열려 있는데.‘ 그는 마음 속으로 말했다. 그리고 그는 오래간만에 미래의 행복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우선 아들을 교육시켜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양육자를 찾아서 그에게 아들을 맡겨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퇴직하고 외국으로 가서 영국, 스위스, 이탈리아를 보고 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나는 이토록 많은 힘과 젊음을 느끼고 있는 동안에 내 자유를 즐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마음 속으로 말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행복의 가능을 믿어야 한다고 삐에르가 말한 것은 옳은 말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것을 믿고 있다. 죽은 자를 묻는 것은 죽은 자에게 맡겨 두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살아서 행복해져야 한다.‘ 그는 생각했다.(643쪽)



로맨틱하지는 않았지만


안드레이는 그녀의 두 손을 잡은 채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그녀에 대한 여태까지와 같은 애정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의 마음 속에서 갑자기 무엇인가 역전하였다ㅡ이제까지와 같이 로맨틱하고 신비한 희망의 매력이 아니라 그녀의 여자다운, 앳된 나약함에 대한 가련함이 있었다. 모든 것을 바치려고 하는 그녀의 애정과 신뢰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영원히 자기를 이 여자와 결부시켜버린, 무거우면서도 기쁜 의무의 의식이 있었다. 지금의 기분은 전처럼 밝고 로맨틱하지는 않았지만 그 대신 진지하고 강했다.(659-660쪽)



오랜 병 끝에 병석에서 일어난 아이가 안색이 변한 것처럼


˝가지 마세요!˝ 그녀는 이렇게만 말했을 뿐이었지만, 그것은 정말로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그리고 그 후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았던 목소리였다. 그가 떠난 뒤에도 그녀는 역시 울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며칠 동안을 그녀는 울지 않고 방에 틀어박혀, 무슨 일에도 흥미를 잃고 다만 이따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 어째서 그이는 가 버렸을까!˝


그런데 그가 떠난 지 2주일 후에 그녀는, 주위 사람들도 뜻밖이라고 여길 정도로 완전히 마음의 병에서 일어나 전과 같은 그녀로 돌아갔다. 그러나 다만 오랜 병 끝에 병석에서 일어난 아이가 안색이 변한 것처럼, 마음의 모습이 변해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6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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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1 동서문화사 월드북 69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맹은빈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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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지니는 삶 이상의 부질없음

˝아, 자네였나, 젊은이?˝ 그는 말하였다. ˝기분은 어떠시오, 나의 용사?˝

5분 전만 해도 안드레이는 자기를 운반해 준 병사에게 두서너 마디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시선을 골똘히 나폴레옹에게 박은 채 잠자코 있었다…… 그에게는 이 순간, 나폴레옹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모든 관심이 실로 부질없이 여겨지고, 보잘것없는 허영과 승리의 기쁨에 사로잡힌 이 영웅의 모습이, 자기가 보고 이해했던 저 드높고 공평하고 선량한 하늘에 비하면 몹시 시시하게 여겨졌다ㅡ그래서 그는 나폴레옹에게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출혈로 인한 쇠약, 고통, 죽음을 가깝게 각오했기 때문에 그의 마음 속에 불러일으켜진 준엄하고 장중하게 구성된 생각에 비하면, 모두가 무익하고 쓸모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안드레이는 나폴레옹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면서, 위대함의 부질없음과 아무도 그 뜻을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부질없음에 대해서, 그리고 또 살아 있는 자는 누구 한 사람 그 뜻을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죽음이 지니는 삶 이상의 부질없음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403쪽)


한 판만 더


그는 마음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나쁜 짓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내가 누군가를 죽이거나, 모욕하거나, 불행을 바란 일이 있었던가? 어째서 이토록 무서운 불행에 부딪혔을까? 대체 이 불행은 언제 시작됐을까? 조금 전이다. 100루블 벌어서 어머니의 생신 축하를 위해 귀중품 상자라도 사 가지고 집으로 돌아갈 작정으로 이 테이블에 다가섰을 때이다. 그때 나는 그토록 행복했고, 자유롭고, 쾌활했었는데! 그러나 나는 그때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몰랐다! 그 행복은 언제 끝났고 이 새로운, 무서운 상태가 언제 시작되었는가? (중략)


˝왜 그러나, 더 안 해? 나는 굉장한 카드를 가지고 있는데.˝ 마치 자기가 가장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게임 그 자체의 즐거움이라는 듯이 말했다.


‘모든 것은 끝났다, 나는 파멸이다!/ 그는 생각했다. ‘이렇게 되었으니 이젠 이마에 총알 한 발ㅡ남은 것은 그것뿐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즐거운 듯한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자, 한 판만 더 하세.˝(467-468쪽)



제각기 자기식으로


˝어쩌면 자네는 자네로서 옳을지도 몰라.˝ 그는 잠시 침묵하고 있다가 말을 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제각기 자기식으로 살아가고 있어. 자네는 자신을 위해서 살아왔고 그 때문에 하마터면 평생을 망칠 뻔했으나, 남을 위해 살려고 했을 때 비로소 행복을 알았다고 말하고 있어. 그런데 나는 그 반대의 경험을 했지. 나는 명예를 위해서 살았어. 명예란 뭔가? 역시 남에 대한 사랑이 아닌가. 남에게 무엇인가 하고 싶다는 마음, 남의 칭찬을 받고 싶다는 마음이 아닌가. 즉 나는 남을 위해서 살아왔고, 하마터면이 아니라 완전히 내 인생을 못쓰게 만들고 말았어. 그리고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살게 되면서 마음이 안정되었지.˝(528쪽)



떡갈나무


봄날의 따뜻한 빛을 받으면서 그는 포장마차에 앉아, 지금 막 싹이 트기 시작한 풀, 자작나무의 잎, 맑게 갠 푸르른 하늘을 흘러가는 하얀 초봄의 구름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마냥 즐겁고 부질없이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1년 전에 삐에르와 이야기를 나누던 나루터도 지나갔다. 질퍽질퍽한 마을, 탈곡장, 겨울 보리의 새싹, 다리 근처의 눈이 남은 비탈길, 녹은 눈에 씻긴 진흙의 언덕길, 그루터기만 남은 밭, 군데군데 파릇파릇한 덤불을 지나 길 양쪽에 우거진 자작나무 숲으로 들어섰다. 숲 속은 오히려 더울 정도였고 바람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작나무는 온통 끈적거리는 푸른 새싹으로 덮여 까딱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묵은 낙엽 밑에서는 낙엽을 쳐들고 풀과 엷은 자주색 꽃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자작나무 숲 속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어린 전나무는, 볼품없는 상록으로 겨울을 되새겨주고 있었다. 숲 속에 들어서자 말들은 콧김을 내기 시작하고 눈에 띄게 땀을 흘렸다.


하인 뾰뜨르가 마부에게 무슨 말을 하자 마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뾰뜨르는 마부의 동감만으로는 불만이었던지 마부대에서 주인 쪽을 돌아다보았다.

 

"나리, 정말 마음이 홀가분해집니다!" 그는 공손하게 미소짓고 말했다.


"뭐라고?"


"홀가분합니다, 나리."


‘이 녀석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안드레이는 생각했다. ‘그렇지, 봄 얘기군, 아마,‘ 그는 사방을 둘러보면서 생각했다. ‘그렇지, 이미 완전히 푸르군…… 참 빠르다! 자작나무도, 체류무하도, 오리나무도 벌써 파래졌어…… 그러나 떡갈나무가 보이지 않는데, 아, 저기 있다. 저게 떡갈나무다!‘


길가에 떡갈나무가 서 있었다. 숲을 이루고 있는 자작나무보다 열 배도 더 연륜이 많은 듯한 이 자작나무는 어느 나무보다도 굵고, 키도 배는 높았다. 그것은 두 아름이나 되는 거대한 떡갈나무로서, 오래 전에 꺾인 듯한 가지와, 역시 상처투성이인 낡은 딱지가 생긴 껍질을 가진 거목이었다. 커다랗고 볼품없는, 고르지 않게 내뻗은 손과 손가락을 가진 이 고목은 마치 화를 잘 내고 남을 깔보는 늙은 추한 인간처럼, 미소짓고 있는 자작나무 사이에 서 있었다. 오직 그만이 봄의 매혹에 몸을 맡기려 하지 않고 봄도, 태양도 보려고 들지 않았다.


‘봄, 사랑, 행복‘ 그 떡갈나무는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너희들은 용케도 싫증을 내지 않는구나. 늘 똑같은, 부질없고 무의미한 속임수에 말이야. 봄도, 태양도 행복도 어디에 있단 말인가! 저 봐. 저기 짓눌려 죽은 떡갈나무가 웅크리고 있지 않아? 언제나 같은 모양으로 말이야. 그리고 봐, 꺾여서 껍질이 벗겨진 손가락을 펼치고 있다. 그것이 어디서 나든ㅡ등이건 옆구리건 상관 없어. 솟아나면 난 대로 그대로 서 있다. 너희들의 희망과 속임수에 누가 속을 줄 알고?‘(576-5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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