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예술가의 초상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
제임스 조이스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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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6일  ── 확실히 그녀는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 린치는 모든 여인들이 과거를 기억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녀는 자기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내게 어린 시절이 있었다면, 내 어린 시절도 기억하리라. 과거는 현재 속에서 소모되고, 현재가 살아 있는 것은 오직 그것이 미래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린치의 말이 옳다면, 여인의 조상(彫像)에는 언제나 천을 완전히 둘러야 하며 한 손은 유감스러운 듯이 자기 뒤를 만지고 있어야 한다.

 

4월 6일 나중에 계속해서 씀 ── 마이클 로바츠는 잊혀진 아름다움을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팔로 그녀를 감쌀 때면 이 세상에서 사라진 지 오래되는 사랑스러움을 품속에 꼭 껴안는다. 하지만 이게 아니다. 전혀 아니다. 나는 아직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고 있는 사랑스러움을 품속에 꼭 껴안고 싶다.

 

4월 10일  ── 아무리 애무해도 일깨울 수 없는 지쳐버린 애인처럼 꿈에서 꿈이 없는 잠으로 옮겨간 이 도시의 정적을 거쳐 무거운 밤의 장막 아래로 희미하게 들리는 도로 위의 말발굽 소리. 다리에 가까워지자 이제는 발굽 소리도 그리 희미하지가 않다. 그 소리가 어두워진 창문들을 지나고 있을 떄 순간적으로 정적이 화살을 맞은 듯 놀람으로 갈라진다. 발굽 소리가 이제는 멀리서 들린다. 무거운 밤중에 보석처럼 빛나는 발굽들이 잠이 든 들을 건너 어딘지 여행의 종착점을 향해 서둘러 가고 있다. 누구의 가슴에 무슨 소식을 전하기 위해 가고 있는 걸까?

 

4월 11일  ── 간밤에 써놓은 것을 읽어보다. 모호한 정서를 표현하는 모호한 말들. 그녀가 그것을 좋아할까? 좋아하리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나도 그것을 좋아해야지. (387-3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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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1일 밤  ── 자유롭다. 영혼으로부터 자유롭고 공상으로부터 자유롭다. 죽은 자들의 장레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두라. 그래,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와 결혼케 하라.

 

3월 24일  ── 어머니와의 논쟁으로 시작되다. 논제 : 성모 마리아. 내가 남자요 젊어서 불리했다. 곤경을 모면하기 위해 예수와 아버지 간의 관계를 들어 마리아와 아들 간의 관계에 맞세우다. 종교는 산부인과 병원이 아니라고 했다. 어머니는 귀엽게 보아주었다. 내가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으며 책을 너무 많이 읽은 탓이라고 했다. 사실이 아님. 읽은 것도 적으려니와 이해한 것은 더욱더 적음. 그러자 어머니는 내 마음이 불안정해서 그러므로 언젠가 신앙을 되찾게 되리라고 했다. 그것은 죄악의 뒷문으로 교회를 빠져나갔다가 회개의 천창(天窓)으로 다시 교회를 찾는 것을 의미한다. 회개할 수는 없다.(3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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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크랜리』그가 말했다. 『너는 내게 내가 무엇을 할 것이며,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이냐만 물어왔어. 내가 무엇을 할 것이며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지를 말해 주마. 내가 믿지 않게 된 것은, 그것이 나의 가정이든 나의 조국이든 나의 교회든, 결코 섬기지 않겠어. 그리고 나는 어떤 삶이나 예술 양식을 빌려 내 자신을 가능한 한 자유로이, 가능한 한 완전하게, 표현하고자 노력할 것이며, 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내가 스스로에게 허용할 수 있는 무기인 침묵, 유배(流配) 및 간계를 이용하도록 하겠어

 

크랜리는 그의 팔을 움켜잡고 레슨 파크 쪽으로 가기 위해 그를 돌려세웠다. 그는 거의 교활해 보일 정도로 웃으며 연장자가 연소자에게 베푸는 듯한 애정을 가지고 스티븐의 팔을 꾹 눌렀다.

 

『간계를 쓰겠다고 했겠다!』그가 말했다. 『네가 그런 말을 하다니! 가난한 시인인 네가!』

 

『네가 나에게 그런 고백을 하게 만들었어』스티븐은 자기 팔을 누르는 힘에 전율을 느끼며 말했다. 『과거에도 나는 너에게 다른 많은 것들을 고백했잖니?』

 

『그래, 이 녀석아』크랜리는 여전히 기분 좋게 말했다.

 

『너는 나에게 내 두려움들을 고백하게 했어. 하지만 나는 너에게 내가 두려워하지 않는 것들도 말해 주마. 나는 외로이 지내는 것,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쫓겨나는 것, 그리고 내가 버려야 할 것이 있으면 무엇이나 버리는 것, 이런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어떤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이 설사 큰 잘못이고 평생에 걸친 잘못, 어떠면 영원히 계속될 잘못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크랜리는 다시 심각해져서 걸음을 늦추며 말했다.

 

『외로운 것, 아주 외로운 것. 너는 그걸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그런데 너는 그 말의 뜻이라도 아니? 그것은 다른 모든 사람들로부터 떨어져서 살아야 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친구가 하나도 없음을 의미한다고』

 

『그런 위험 정도야 감수할 용의가 있어』스티븐이 말했다.

 

『친구 이상이 되어줄 사람, 가장 귀하고 가장 진실된 친구 이상이 되어줄 사람을 한 사람도 갖지 못하는데도?』 크랜리가 말했다.

 

그의 말은 그 자신의 천성 속에 숨어 있는 깊은 심금(心琴)을 울린 것처럼 들렸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 즉 있는 그대로의 자신 혹은 되고자 하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던가? 스티븐은 얼마 동안 묵묵히 그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싸늘한 슬픔이 그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즉 자기가 두려워하는 자신의 고독에 대해서 말했던 것이다.

 

『너는 누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니?』드디어 스티븐이 물었다.

 

크랜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379-3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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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떠나야지. 떠날 때가 되었어. 한 목소리가 스티븐의 외로운 마음을 상대로 부드럽게 말하면서 그에게 떠나라 했고 그의 우정도 끝나고 있음을 일러주었다. 그렇다. 그는 떠나야 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상대로 다투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자기의 역할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나는 떠날 거야』그가 말했다.

 

『어디로?』크랜리가 물었다.

 

『어디든지 갈 수 있는 곳으로』스티븐이 말했다.

 

『그래』크랜리가 말했다. 『네가 여기서 살기는 힘들지도 몰라. 하지만 힘이 들어서 떠나려는 거니?』

 

『나는 떠나야 해』스티븐이 대답했다.

 

『가기 싫다면 굳이 네 자신이 쫓겨난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고 또 네 자신을 이단자나 무법자로 여길 필요도 없기 때문에 하는 얘기야』크랜리가 계속해 말했다. 『세상에는 훌륭한 신자이면서도 너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단다. 그게 너에게 놀라우냐? 교회는 단순히 돌로 지은 건물이 아니고 심지어는 성직자나 그들의 도그마도 아냐. 교회란 그 속에 있도록 태어난 모든 것들의 총집합체이거든. 나는 네가 일생 동안 무엇을 하려는 건지 몰라. 우리가 하코트 스트리트 정거장 밖에서 서 있던 날 밤 네가 내게 말했던 것이 너의 포부냐?』

 

『그래』스티븐은 크랜리가 장소와 관련지어서 생각들을 기억해 내는 데 대해 미소를 짓고 싶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376-3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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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런던에서 어떤 소녀가 마차를 탔어』그는 말을 계속했다. 『그녀는 여러 해 동안 보지 못한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어. 어떤 길모퉁이에서 한 화물차의 끌채가 그 마차의 창에 부딪쳐 창을 별 모양으로 부숴놓았어. 기늘고도 긴 바늘 같은 유리 조각이 소녀의 심장을 찔렀거든. 그녀는 그 자리에서 숨졌어. 신문기자는 그것을 비극적인 죽음이라고 불렀어. 그러나 그건 틀렸어. 내 정의에 의하면, 그 죽음이 공포나 연민과는 거리가 멀지.

 

사실, 비극적인 정서란 두 방향으로 바라보는 한 얼굴이며 각각 공포와 연민을 향하고 있지. 이 두 가지는 모두 비극적 정서는 정적(靜的)이라는 뜻이야. 아니, 극적 정서가 정적이라고 하는 편이 낫겠군. 부적절한 예술이 자극하는 감정은 욕망이냐 혐오냐를 가릴 것 없이 모두 동적(動的)이거든. 욕망은 우리를 충동하여 무엇을 소유하거나 찾아가게 하는가 하면, 혐오는 우리를 충동하여 무엇을 버리거나 떠나가게 하니까. 그러므로 이 욕망이나 혐오를 자극하는 예술은, 그것이 외설적이냐 교훈적이냐를 막론하고, 모두 부적절한 예술이지. 그러므로 일반적인 술어로 말해 미적 정서는 정적이라고. 마음은 붙잡혀서 욕망이나 혐오를 초월하도록 고양되니까』(315-3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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