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예술가의 초상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
제임스 조이스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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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은 겉으로 잔잔한 우정을 표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감정이 일기 시작했다.

 

『이 민족, 이 나라, 이 삶이 나를 만들었어』그는 말했다. 『나는 내 자신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거야』

 

『우리편이 되도록 노력해 봐』데이빈이 거듭 말했다. 『너도 마음 속으로는 아일랜드인이면서 자존심이 너무 강해서 그만』

 

『우리의 선조들은 자기네 언어를 버리고 다른 나라의 언어를 택했어』스티븐이 말했다. 『그들은 소수의 외국인들이 자기네를 예속하는 것을 허용했던 거야. 그들이 진 빚을 내가 내 삶과 몸을 바쳐 갚을 것 같으니?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겠니?』

 

『우리들의 자유를 위해서지』데이빈이 말했다.

 

『톤의 시대에서 파넬의 시대에 이르도록 명예를 아끼는 성실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명과 젊음과 애정을 너희에게 바쳤지만, 너희는 그분들이 곤경에 처했을 때 그분들을 적에게 팔아넘기거나 낙담케 했고 아니면 그분들을 비난하며 다른 사람들 편을 들곤 했었지. 그런데도 나더러 너희 편이 되라는 거니? 나는 차라리 너희 민족이 망하는 꼴부터 보고 싶구나』

 

『그들은 자기네의 이상을 위해 죽었어』데이빈이 말했다. 『우리의 날이 다가올 거야. 내 말을 믿어줘』

 

스티븐은 자기 나름의 생각을 좇으며 한동안 잠자코 있었다.

 

『영혼이란 내가 말했던 순간에 처음 탄생하는 거야』스티븐이 막연하게 말했다. 『그것은 더디고 어두운 탄생이며 육체의 탄생에 비해 더 신비한 거야. 이 나라에서는 한 사람의 영혼이 탄생할 떄 그물이 그것을 뒤집어 씌워 날지 못하게 한다고. 너는 나에게 국적이니 국어니 종교니 말하지만, 나는 그 그물에 빠져 도망치려고 노력할 거야

 

데이빈은 자기의 파이프에서 재를 떨어내고 있었다.

 

『그 말은 너무 심오해서 내가 알아듣기 힘드는군, 스티비』그가 말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나라가 제일 중요해. 아일랜드가 가장 중요하단 말이야, 스티비. 나라가 있고 난 후에야 네가 시인도 될 수 있고 신비론자도 될 수 있는 거야』

 

『너, 아일랜드가 무엇 같은지 아니?』스티븐은 냉혹하고 난폭한 어조로 말했다. 『아일랜드는 제 새끼를 잡아먹는 늙은 암퇘지라고』 (312-3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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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조이스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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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스 하우스 뒤쪽 골목은 물이 질퍽거리고 있었다. 그가 젖은 쓰레기 더미 사이를 조심해서 디디며 그 골목을 천천히 내려가고 있는데 담 너머 수녀정신병원에서는 미친 수녀의 비명이 들려왔다.

 

『예수님! 오, 예수님! 예수님!』

 

그는 성난 듯이 머리를 흔들어 그 소리를 귓전에서 떨어낸 후, 썩어가는 오물 사이를 허둥지둥 걸어가는데 혐오감과 쓰라림으로 인해 마음이 아팠다. 아버지의 휘파람 소리, 어머니의 불평, 보이지 않는 미친 여자의 비명 따위가 이제는 그의 오만한 젊음을 꺾기 위해 불쾌하게 위협하는 수많은 소리로 들렸다. 그는 그 소리들의메아리를 저주하면서 마음으로부터 몰아냈다. 그러나 그가 길을 따라 가면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나무 사이로 그에게 비치는 잿빛 아침 햇살을 맡을 떄 그의 영혼은 그 모든 참담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271-2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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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앞에는 한 소녀가 개울 가운데 혼자 서서 가만히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술에 걸려 신기하고 아름다운 바다새의 모습으로 변모한 듯한 소녀였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그 길고 가냘픈 다리는 학 다리처럼 연약했고, 한 줄기 녹색 해초가 살갗에 새겨 놓은 징표처럼 붙어 있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순결해 보이기만 했다. 보다 충만하고 부드러운 상앗빛을 띤 허벅지는 엉덩이까지 드러나 있어서 드로워즈의 하얀 가장자리는 부드럽고 하얀 솜털 깃으로 장식되어 있는 듯했다. 대담하게 허리까지 걷어올린 검푸른 색 치마는 비둘기 꼬리처럼 뒤로 내밀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은 새가슴처럼 부드러웠지만 보잘것없었고, 검은 깃의 비둘기 가슴처럼 보잘것없지만 부드러워 보였다. 그러나 그 긴 금발머리는 소녀답게 보였다. 그녀의 얼굴 또한 소녀다웠고 경이로운 인간적 아름다움을 띠고 있었다.

 

그녀는 혼자 가만히 서서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자기 앞에 와서 숭배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자 그녀의 눈은 그를 향했고 조용히 그의 응시를 받아들이면서도 부끄러워하거나 경망스러운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실로 오랫동안 그녀는 그의 응시를 받아들이고 있다가 조용히 눈을 떼어 개울물을 내려다보면서 발로 점잖게 몸을 이리저리 헤쳤다. 조용하게 출렁이는 희미한 물소리가 처음으로 정적을 깼다. 나지막하고 흐릿하고 속삭이는 듯한 물소리는 잠결에 듣는 종소리처럼 희미했다. 이리저리, 이리저리 물이 출렁이는 소리. 그러자 그녀의 뺨에서는 어렴풋한 불길이 떨리기 시작했다.

 

오, 이럴 수가! 독신(瀆神)적인 환희의 폭발 속에서 스티븐의 영혼은 절규했다.

 

그는 갑자기 그녀에게서 몸을 돌리고 둑을 건너가기 시작했다. 그의 뺨이 화끈거리고 몸은 불덩이 같았으며 사지가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그는 멀리 모래밭을 활보하면서 바다를 향해 미친 듯이 노래했고, 그 동안 그를 향해 소리치고 있던 삶이 임박해지자 그것을 맞이하기 위해 외쳤다.

 

그녀의 이미지는 영원히 그의 영혼 속으로 옮겨갔고, 그가 거룩한 침묵 속에서 느끼던 황홀경을 깨는 언어는 없었다. 살며, 과오를 범하며, 타락해 보고, 승리하고, 삶에서 삶을 재창조하는 거다! 한 야성의 천사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필멸(必滅)의 인간적 젊음과 아름다움을 갖춘 천사요 삶의 아름다운 궁정에서 보내온 사자(使者)인 그가 황홀한 순간에 그를 위해 과오와 영광의 길로 통하는 문을 모두 활짝 열어젖히려 하고 있었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거다! (264-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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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제 그 전설적인 명장(名匠)의 이름을 듣자 그는 침침한 파도 소리를 듣는 듯했고 한 날개 달린 형체가 파도 위를 날아 서서히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있는 듯했다. 그게 무슨 뜻이었을까? 예언과 상징들로 가득한 중세 서적의 한 페이지를 여는 기이한 도안인가? 매처럼 생긴 사람이 태양을 향해 바다 위로 날아가다니 그게 바로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받들도록 되어 있었고 안개 같은 유년기와 소년기를 통해 꾸준히 추구해 오기도 했던 목표를 예언하고 있을까? 자기의 작업실에서 이 지상의 맥빠진 물질을 가지고서 새롭고 신비한 불멸의 비상체(飛翔體)를 빚어 내고 있는 예술가의 상징인가?

 

그의 심장이 떨렸다. 그의 숨결은 빨라졌고, 마치 그가 태양을 향해 날아가고 있듯이 야성의 정령(精靈)이 그의 몸 뒤로 지나갔다. 그의 심장은 황홀한 두려움 속에서 떨었고 영혼은 날고 있었다. 그의 영혼은 이 세상 밖의 하늘을 날고 있었고 그가 아는 육신은 단숨에 정화되어 의혹에서 해방된 후 빛을 발하며 그 정령의 원소와 뒤섞였다. 황홀한 비상의 그의 눈을 빛나게 했고 그의 숨결을 거칠게 했으며 바람에 휩쓸리는 사지가 떨며 야성적인 빛을 발하게 했다.

 

『하나! 둘! …… 조심해!』

 

『오, 맙소사, 빠져 죽겠다!』

 

『하나! 둘! 셋, 가거라!』

 

『다음은 나! 다음은 나!』

 

『하나! …… 억!』

 

『스테파네포로스!』

 

그는 큰소리로 외치고 싶은 욕구 때문에 목이 아팠다. 드높이 하늘을 날고 있는 매나 독수리처럼 외침으로써, 자기가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음을 통렬히 알리고 싶었다. 그것이 삶이 그의 영혼을 상대로 외치는 소리였으며, 결코 의무나 절망의 세계가 내는 그 둔하고 조잡한 목소리가 아니었고, 제대에서 창백한 성직을 수행하라고 그를 불렀던 그 비인간적인 목소리도 아니었다. 한 순간의 야성적 비상(飛翔)이 그를 해방했고 그의 입술이 억제하고 있던 승리의 외침이 그의 두뇌를 갈랐다.

 

 ── 스테파네포로스!

 

이제 생각하니 그것들은 시신이 떨쳐낸 수의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밤낮없이 그가 걸어다닐 때 그를 둘러싸고 있던 그 공포, 그를 옥죄고 있던 그 의혹, 안팎으로 그를 무안하게 만들던 그 수치심, 이런 것들이야말로 수의요, 무덤에서 나온 천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의 영혼은 소년 시절의 무덤에서 일어나 그 시절의 수의를 떨쳐버렸다. 그렇다, 그렇다, 그렇다! 그와 같은 이름을 가진 그 옛날의 위대한 명장(名匠)처럼, 그도 이제는 영혼의 자유와 힘을 밑천으로 하나의 살아 있는 것, 아름답고 신비한 불멸의 새 비상체를 오만하게 창조해 보리라.

 

그의 핏속의 불길을 더 오래 억누를 수 없어서 앉아 있던 바윗덩어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뺨은 화끈거렸고 목은 노래로 고동치고 있었다. 이 세상의 구석구석까지 찾아가 보려는 열정으로 불타고 있던 그의 발에는 방랑의 열기가 일었다. 가자! 가자! 가자! 그의 심장이 외치고 있는 듯했다. 바다 위에서 저녁이 깊어지고, 평원에 밤이 내리면, 방랑자의 앞에 새벽이 번뜩이며 그에게 낯선 들판과 언덕과 얼굴들을 보여주리라. 어딜까?

(260-2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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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물었다.

 

『이런 것을 묻는다면 이상하겠지만, 왜 또 이사를 간다니?』

 

왜냐하면 말이야, 집주인이 말이야, 우리를 말이야, 내쫓으려고 하기 때문이란 말이야』처음 대답했던 그 누이가 대답했다.

 

맨 아래 남동생이 벽난로 저편에서『고요한 밤이면 흔히』라는 곡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하나둘씩 그 노래를 따라 부르자 결국은 모두 합창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이 노래 저 노래로 이 합창곡 저 합창곡을 부르곤 했는데 그러다 보면 결국 마지막 파리한 빛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최초의 어두운 저녁 구름이 나타나 밤이 되곤 했다.

 

그는 한동안 듣고만 있다가 결국 그들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 그는 연약하지만 싱싱하고 천진난만한 그들의 목소리 이면에 지켜운 기색이 감도는 것을 듣고 가슴이 아팠다. 그들은 삶의 여정(旅程)을 지처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가야 할 길에 대해 피로를 느끼고 있는 듯했다.

 

그는 부엌에서 노래하는 목소리의 합창이, 여러 세대의 아이들이 부르는 합창의 끝없는 반향 속으로 메아리 치며 증폭해 가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메아리 속에서 빈번한 피로와 고통의 어조가 울리는 것도 들었다. 모두들 삶을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삶에 지친 듯했다. <모든 시대의 아이들이 체험했던 그 고통과 지겨움 그리고 보다 나은 것들에 대한 희망을, 마치 자연 그 자체의 목소리처럼, 발언하고 있는> 베르길리우스의 단편적 시구 속에서 뉴먼 역시 이런 어조를 들은 적이 있음을 그는 기억했다. (252-2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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