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볼 - 불공정한 게임을 승리로 이끄는 과학
마이클 루이스 지음, 윤동구 옮김, 송재우 감수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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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전부터 한국 출신의 메이저리거들이 늘면서 우리의 시선은 태평양 건너 아메리카라는 대륙의 야구장으로 꽂히기 시작했다. 또 덩치큰 선수들이 그 덩치에 비해 작게 보이는 나무 방망이를 휘두르는 모습과, 또 이 덩치들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사각공간(스트라이크 존)안으로 야구공이 빨려들어가는 모습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우리마저도 그들의 현란한 몸짓에 열광하고 흥분하는데(비록 열광하는 우선순위는 코리안리거들이 먼저이지만...) 미국 자국민들은 과연 어떠랴.
 
이 <머니볼>이라는 책은 바로 순순한 팬들의 열정과 열광에 의해 태어난 책이다. 왜냐하면 이 책이 팬들의 환호에 직접 반응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순수한 몇몇 골수팬에 의해 정보가 수집되고 이 수집된 정보와 그라운드에서 일어나는 일(통계적 야구)을 분석해서 만들어진 야구백서와 같은 책들을 밑받침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독자적으로 그들의 야구를 분석한 몇몇 이들이 없었다면 아마 이 책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오클랜드 어슬랜틱스'와 그 구단주인 '빌리 빈'도 언론의 머릿기사에 자주 오를 일도 없었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오클랜드 어슬랜틱스'의 단장인 '빌리 빈'이 앞서 말한 골수 팬들에 의해 만들어진 야구백서와 같은 책들을 통해 그만의 야구 철학을 완성지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시말해 이 '머니볼'은 돈많은 메이저리그 구단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가는 '오클랜드 어슬랜틱스'의 사투기이다. 같은말로 '빌리 빈'의 확률에 근거한 도박기로도 부를 수 있을 듯 하다.
 
보통 야구는 통계의 집대성이라 불린다. 그들이 그라운드에서 하는 모든 몸짓은 바로 숫자이다. 타자가 공을 치던지 못치던지 모든게 숫자로 표현되며, 투수가 몇개의 공을 던지고 몇번째에서 공을 맞았는지 등등... 이 모든것이 또한 그들의 성적과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앞서 소개한 '빌리 빈'은 다른 구단주들이 철썩같이 믿고, 맹신하는 몇가지 숫자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다만 다른 구단주들이 무시하고 심지어 그런 숫자들이 있는지 알지 못하는 다른 숫자들을 믿는다.
 
내가 가장 흥미있게 보았던 내용을 예로 들자면, 수비의 에러(실수)는 말 그대로 말장난인 것이다.  그리고 같은 말로 타자의 안타 또한 말장난이다. 수비의 에러이든, 타자의 안타든 이 모든것은 공격을 내비치는 말이다. 즉, 공이 배트에 맞고 그라운드 안으로 들어가야 안타던지 수비 실수던지 나온다는 것인데, '빌리 빈'은 이 말의 뿌리를 '공격'에 두지 않고 '수비'에 중점을 두었다. 즉, 안타는 그 공에 이르지 못한 수비의 범위를 말하는 것이며, 수비 실수 또한 그라운드 내의 공의 3차원적 위치와 수비의 불균형이라는 말이다.
 
사족들을 걷어내고 단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행운'인 것이다. 그러니까 수비의 균형 즉, 빠른 발, 정확한 송구 능력과 그것을 가능해주는 어깨의 힘, 그리고 진루주자를 다음 누상에 두지 않기위한 순간적 판단력만 갖추어진다면 공이 안타로 만들어지 위한 공간을 수비수가 수비 할 수 있는 범위안에 충분히 둘 수 있다는 말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자면 외야수가 달려들어 비어있는 그라운드로 떨어지는 공을 멋지게 낚아채어 플라이 아웃으로 만들어버리는 일명 'play of the day'를 차지 할 수 있는 멋진 호수비 또한 수비수의 체크를 통한 확률적 숫자놀음으로 만들 수 있으며 이는 안타를 수비수와 의존적인 관계로 만들어 충분히 제어할 수있다는 뜻이 숨어있다.
 
공격 역시 '빌리 빈'의 입장에서는 보통의 구단주들과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다. 공격은 멋진 top player들의 야구에 의존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다. 반대로 그는 일명 팀의 조화를 들고 나오는데... 어떻게 생각해보면 '플래툰'시스템도 이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즉, 첫타에 안타를 친다는 것은 명백히 팀을 위협하는 행동이다. 그것이 비록 홈런으로 이어졌다고 해도 말이다. 왜냐하면, 이같은 행위는 과학적 통계에서 벗어난 독단적인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즉, 운이 좋아 첫타에 안타가 만들어지든, 홈런이 만들어지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빌리 빈'의 과학적 공격은 무엇일까?
 
과학적 공격은 바로 소극적 야구이며, 이것은 다른 말로 '스몰 볼'이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야구의 진정한 공격은 한방으로 홈런을 만드는 것이 아닌, 4구(포볼)로 1루에 무사히 진출하는 것이다. 즉, 상대 투수의 투구수와 피로도를 극한으로 이끌어내어 상대방의 심리전에도 쉽게 대응할 수 있고, 자신들의 팀의 사기 진작은 물론, 상대팀의 투수가 던지려는 공의 예측또한 쉬워지고, 보이지 않는 스트라이크 존에서 자신의 타자들이 원하는 'hot'지역 내지 'cool'지역으로의 상대 투수의 빈번한 투구를 이끌어내는 것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기회를 노려 대량득점을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즉, 공격은 '빌리 빈'에게 있어서 '기다림의 야구'이다.
 
리뷰에 이런 이야기를 쓴다는 것이 매우 한정되어 있기에 정리를 해본다면, 이들은 즐기는 야구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그라운드내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들을 계획안으로 밀어 넣으려는 일종의 의도된 야구, 전략의 야구이다.
 
그렇다면 왜 '빌리 빈'은 이런 소극적 플레이를 하게끔 코치진에게 지시를 할까. 그것은 바로 '오클랜드 아슬랜틱스'라는 야구팀이 매우 가난하기 때문이다. 그 해의 신인 대어를 낚아올 수도 없고 심지어 자신의 팀에서 성장한 선수를 계속 묶어 둘 수 있는 돈도 없다. 그러니까 항상 스크우터들을 통해 팬들의 열광지수를 높일 수 있는 멋진 외모는 일찍부터 고려대상에서 제외시켰으며, 순위안에 드는 선수들 또한 이적으로 데려올 생각도 꿈꾸지도 않는다.
 
'빌리 빈'의 생각은 이렇다. 어느 하나라도 괜찮으면 데려와서 좀 훈련시킨 다음에 그가 가진 단점은 최대한 무시하고 장점만을 부각시킨다. 그래서 언론이나 다른 구단에 눈이 띄이기라도 하면 웃돈을 주고 판다. 그리고 남은 수익금을 가지고 다음 해에 그나마 괜찮은 선수(물론 이 선수도 대어급은 아니다)에 투자한다. 그러니까 싹수만 보이면 데려다 쓴다는 말이다.
 
이는 '빌리 빈'이 허영에 사로 잡혀있지 않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자신의 팀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고, 심지어 제한된 범위안에서 가능한 모든 변환을 즐긴다. 이는 똑같이 돈없는 다른 구단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빌리 빈' 또한 예전엔 대어급 선수였다. 하지만, 그는 돈때문에 야구를 선택했고 그의 선수생활은 엉망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결심하게 된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때에는 결코 돈을 보지 않기로 말이다. 그는 선수시절 꽤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지만, 야구가 싫다는 스트레스 때문에 결국 일찍 야구를 그만두게 된다. 하지만 그는 야구의 메니지먼트에 눈을 뜨게 되고 야구에 관련된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일어나 관리직으로 전향하게 된다.
 
이 뒤에는 몇 번의 지구 우승을 거머쥐게 된다. 비록 플레이 오프에는 그만의 전략이 쉽게 먹혀들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는 보통 이상의 남는 장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어보면, 코치석이나 관중석에서 보는 야구가 아닌 저 위 쪽의 구단주의 위치에서 보는 야구를 즐길 수 있다. 그들이 스카우트 하는 거라든지, 선수들의 이적을 시키려는 노력, 그리고 일부 선수들의 개인적 감정등... 야구 외적으로 내적으로 수많은 것들을 보게되고 즐길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비록 이 책이 주로 '빌리 빈'의 시각에서, 그러니까 관리직이라는 측면에서 접근되어진 것이지만, 충분히 선수들 입장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끌어올리는 방법이라던지, 좀 상투적이지만 꿈과 희망을 잃지않고 계속 유지시킨다던지..하는 방법들 또한 읽을 수 있다.
 
야구를 좋아하지 않아도 재밌게 볼 수 있으며(물론 야구에 대한 약간의 관심은 필요할 수도...), 자기계발이나 경영과 같은 장르의 책과도 많은 부분 부합된다.
 
개인적으로는 야구의 통계에 대한 '빌리 빈'의 확고한 믿음과 점찍은 선수를 데려오려는 그만의 머리쓰는 것들이 재미를 배가시켰다.
 
한번쯤 이런 책도 읽어두면 좋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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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F가 된다
모리 히로시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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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 책을 쓴 저자는 [모리 히로시]라는 일본 나고야 공대의 조교수로 재직하면서 이 책을 냈다 한다. 역시 이 소설의 주인공은 한 대학교의 건축학 교수이다. 먼저 이 책은 재밌기는 하다. 그렇지만, 소설의 플롯이라든지 주인공들에게 쏙 빠져들은 흡인력은 약하다. 가끔 추리소설이나 어떤 스릴러 소설들은 소설을 읽고 큰 의미를 던져주진 않는다. 그러한 소설들을 읽고 그 속에서 주제를 찾는 것은 어찌보면 멍청한 짓거리일 수 있다. 하지만, 소설의 기반이 인간의 가치나 인간이 추구하고자 하는 어떠한 사상위에 갖추어져 있을때는, 일반 추리소설이나, 스릴러, 심지어 SF까지도 어떠한 문학소설만큼이나 재미와 더불어 크나큰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심지어 심리적 위안거리마저도 얻을 수 있다. 이 작가를 높이 평가할 수 있는 이유는 윤리적 기반에 사고를 두고 그 위에 과학적 혹은 공학적 소재들로 차곡차곡 조립해나가는데 있다. 하지만, 반대로 그 두가지가 잘 조합되어있지 않고 후반부에 어거지 조립공정을 거친다면 그 소설은 실패한 것이 된다. 이 책이 어거지로 맞추어있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조립공정이 독자에게 큰 재미를 못주는데에 좀 실망을 했다. 한마디로 세련되게 추리적 단서들을 던져주지 않은 것에 있다. 그래서 몰입도도 떨어지는 듯 하다. 물론 번역과정에 있어서 딱딱한 번역을 했을 수도 있지만, 내가 보기엔 번역은 무난한것 같다.

하지만, 비록 몰입력에선 좀 떨어지는 부분이 있지만, 이 소설의 소재는 독특하다. <<모든 것이 F가 된다>> 가끔 이런 메세지의 역할이 소설의 반전내지, 이야기 흐름을 이끌어 가는 경우가 있지만, 이 소설의 경우 추리를 푸는데 있어서 한 가지의 열쇠가 될 뿐, F가 무엇인지 알고나서 '아 이것이었구나'하며 찬탄이 나오진 않았다. 그래도 앞서 언급했듯이 과학적 추리소설이기에 나는 이러한 열쇠나 메시지에 큰 점수를 준다. 그리고 오히려 나를 가장 매혹시켰던 재료는 바로 '감시카메라의 녹화'이다. 어떤 방안에 있는 것을 24시간 내내 녹화해놓는 과학적 방식의 오류를 찾는거야 말로 단순하면서도 과연 무얼까..독자들을 끊임없이 생각의 계곡으로 몰아넣는 그러한 소재인것 같다. 오히려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열쇠인 'F'보다 더 공감을 하게되고 이 소설을 더욱 세련되게 만들었지않나 싶다. 또 하나의 이 소설의 거대한 뼈대는 바로 '밀실 살인사건'에 있다. 이러한 추리는 복고적인 추리 경향을 가지는데, 누가 사건을 저지렀느냐보다는 어떻게 사건을 저질렀느냐가 이 소설의 매력일 수도 있겠다. 이 소설의 밀실은 3중 밀실이다. 첫번째 밀실은 밀폐되어 있는 공간 혹은 방, 두번째 밀실은 그 방이 속해있는 연구센터, 마지막 세번째 밀실은 연구센터가 자리잡고 있는 섬.. 바로 이러한 공간적 특성을 가졌기에 독자들이 현실과 떨어진 상상의 그리고 환상적인 공간으로 만들어감으로써, 이 소설은 추리적 성격을 넘어서 어찌보면 SF적인 면모도 함께 내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더욱 과학적 소재로 다가오지 않았나 싶기도하다.

이 소설은 분명 주제가 있다. 이 소설의 주제를 언급한다고 소설속의 추리적 성향까지 다 까발리진 않는 것이기에 주제에 관해 몇 마디 덧붙이자면, 이 소설의 주제는 '인간의 순수성과 과학의 발전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이기'이다.

인간의 편리성을 추구하기 위해 더욱 발전된 과학은 점점 시간이 흐르고 문명화되어짐에 따라 독립적이고 상호 보완적이 되어지지 않고, 점점 더 과학에 대한 의존적으로 발전되어 왔다. 인간은 과학을 이해하려고 하지만, 그 반대로 과학은 인간을 이해하지 않는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과학이기에 과학은 인간을 생각하지 인간과 더불어 자연을 이루고 있는 다른 무수히 많은 생물들 입장은 더더욱 대변하지 않는다. 심지어 인간이라는 부류속의 개개인 까지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 세상에서 천재성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들에 의해 과학은 더욱 더 발전하고 인간은 더욱 더 그 영역에 종속되어만 갈 것이다. 그런데 천재성을 가진 아니, 천재라고 불리는 그러한 사람들은 과학의 본성을 가지지 아니한, 인간의 본성을 가진 그러한 인물로 이 책에서는 묘사되어진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과학은 하나의 이용가치일 뿐 더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따라서 이 책에 비극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 내용은 '사람들은 과학을 믿지, 인간의 순수성은 믿지 않는다'라는 것에 있겠다. 

참..이러한 주제를 소설속의 추리과정에서 찾는 다면, 그 독자는 추리소설을 그만 읽고 다른 인문서를 읽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겠다. 그래서 그런지 이러한 주제를 가진 이 소설은 주인공의 회상내지 사건을 돌아보는 순간에 모든 것을 알아서 작가가 정리해주는 나름대로 친절한 면모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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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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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소설이다... 그런데..당연히 이 책은 소설이다. 이 책은 구차(苟且)한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글쎄... 삶이 구차하다는 말을 쓴 내가 책을 잘못 읽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역시나 삶은 구차하다. 

이 소설은 마치..거친 고난을 역경의 삶을 산 사람이 내 앞에서..앨범을 펼쳐놓고..사진 한장 한장 보여주며...이때는 이랬지...그래서 어떻게 된줄 아나?...라고...자신의 삶을 내게 회상하듯이 보여주는 것 같이 느껴졌다.

이 이야기가 보여주는 단 하나의 이야기는 인생은 새옹지마...이다. 우리의 주인공 허삼관이 피를 판 돈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개척하듯이..그의 인생은 피로써 이룩한 누차하지만..정이 있는 거룩한 삶이다. 하지만..어떤 특정한 에피소드들로 이 허삼관의 인생을 구현하다보니...허삼관의 지나온 삶이 그리 크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한권의 책으로는 좀 부족하지 않나 싶다.

소설에 나와있지 않은 허삼관의 띄엄띄엄한 인생들 사이 사이가 궁금증을 일으킨다. 비록 주인공이 허삼관이지만..이 소설은 가족에 관한 이야기이기에 그의 가족들의 삶 또한 어느정도 제대로 다루어져있어야한다고 생각이 든다. 허삼관의 매혈(賣血)은 첫번째와 마지막번째를 제외하곤 자신을 위해 판 적은 없기 때문이다. 물론..더 상세히 말한다면..첫번째 매혈 또한 호기심이었고, 마지막 매혈은 너무 나이가 들어 매혈을 거부당했기에..그는 전적으로 그 자신만을 위한 매혈은 없다고 봐야겟다.

이 책을 읽다 보면...매혈이라는 상황이 없었다면..허삼관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든다.

그의 첫번째 매혈은 호기심에 이루어졌고..그걸 통해 상당한 금액을 받았으며..결국 허옥란이라는 부인을 얻게된다. 이 허옥란은 이미 약혼자가 있었지만..허삼관이 허옥란의 아버지와의 끈질긴 설득과 회유를 통해..그리고 금전을 통해 결국 이 여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게 바로.. 허삼관의 첫번째 보너스 인생이다. 그리고 허삼관은 자식을 낳게 되는데..일락, 이락, 삼락이라는 세명의 아들을 낳는다. 이게 바로 두번째 보너스이다.

허삼관에게 매혈은 곧 보너스이자..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단한 무기이다.

비록 삶이 구차하고 대단친 않지만... 생각해보면... 정말 부러운 인생이다.

자신이 힘들고 괴로울때마다...보너스가 주어진다면... 과연 어떨까..

이 책을 읽고...우리 스스로 보너스로 점철(點綴)된 그러한 인생을 살 수 있을까? 한번 생각해본다..

이 책...읽을만하다...가볍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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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속의 세계 -상 - 우리는 어떻게 세계와 소통했는가
정수일 지음 / 창비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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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나에게 경탄과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을 안겨주었다. 약 1주간 이 책을 읽었는데, 읽을때마다 새로운 모험이고, 새로운 발견이었다. 또한, 이 책을 읽음으로써 우리 조상들의 실체에 조금 더 다가설 수 있음을 느끼며, 그들이 가지고 있었거나, 수용했던 여러 다양한 문화들을 제대로 세계만방에 알리지 못한 것에 애타는 감정이 솟는다.

우리가 그동안 책이나 교육을 통해 알아왔고, 본능적으로 예감했을 우리의 실체는 그동안 희뿌연 안개에 확실히 가려져 있는듯 하다. 그런 감추어져있던 실체들을 이 책을 통해 어느정도 통감하고 체감하였으나 역시 그것에 대해 더욱 더 호기심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이 책에 빠져있던 기간동안 너무나 힘들었다. 결코 책이 두권으로 되어있어서가 아니다. 그리고 글이 재미없다거나 어렵게 쓰여있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쉽게 빠져들 정도로 재미있으며, 내용 또한 쉬이 읽을 수 있게 되어있다. 하지만, 이 책은 너무 방대하다.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엄청난 긴 여정을 이 책과 같이 한 느낌이다. 수많은 인물들이 책 속에 생생하게 그려져 있으며, 수많은 문물이 보물상자처럼 빽빽히 차 있다.

이 책이 주는 단 한가지 것은 '느껴라'이지 않을 까 싶다. 결코 과거 역사적 사실들을 '배워라'이거나 '습득하라'가 아니다. 단지 느끼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기 위해 보냈던 시간을 충분히 보상 받을 것이다. 아니 보상을 뛰어넘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말 그대로 '한국속의 세계'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은 지금 이 제목이 얼마나 반어적이며 그동안 알고 있다는 우리의 역사만큼이나 소박한 말인지 알 수 있다. 결코 한국속에 내재하고 있는 세계성이 아니다. 좀 지나친 말 일 수 있고 겸손하지 않은 말 일 수 있지만, 내가 느낀 바는 한국이 바로 세계이다. 좀 겸손을 부린다면, '한국 또한 세계이다'라고 바꿀 수는 있다.

우리는 세계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자리하고 있을까.. 물론 지정학적 위치로는 다들 아시다시피 동북아의 끄트머리이다. 하지만, 그 끄트머리의 땅은 여러 문화와 서로 교류하며 소통하고 있었다. 가까이는 중국과 일본, 그리고 몽골. 저 멀리 나아가서는 동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 그리고 전혀 다른 이질의 문화권인 아랍문명까지, 더 넘어간다면 로마와 그 주변의 서양까지. 우리는 육로로 그리고 해로로 수많은 이들을 만나고 대화하며 문물을 건내주고 건내받아왔던 것이다. 어찌 숨어있는 나라라 부를 수 있을까.

문화적으로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만들었으며, 세계 최고의 자기를 생산하였고, 역대 최고들 중 하나의 기행문인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세계 4대 기행문중 하나)'과 <최부>의 '표해록'(3대 중국 기행문중 하나)을 기록으로 남겼다.

또한  종교적으로는 신라시대때 받아들였던 고대 동방 기독교와 고려시대때 받아들였던 이슬람교, 그리고 각자 그들에 맞게 받아들였던, 삼국시대의 불교까지..이는 어느 한쪽만을 우대하고 배척하지 않은 우리 조상들의 관용정신과 특유의 종교문화적에 부드러운 면모를 볼 수 있다. 비록 우리 역사속에서 얼마간의 종교 배척도 있었지만, 말 그대로 그 시대에 처해있는 상황에 따른 어쩔 수 없는 면모도 있기 때문에 너무 부정적으로 볼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선사시대 때부터 일제강점시대에 이르기까지 역사, 문화, 무역, 종교등 인류가 그 동안 배출해온 모든 것들을 우리의 위치에서 소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얼핏보면 우리는 받기만 한 것 같지만, 우리는 스스로 길을 내어 문물을 전수도 하였으며, 특유의 소통문화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우리는 한 순간의 역사적 실수로 많은 부분을 상실하였고, 가리워졌지만 역사가 허구의 기록이 아닌이상 그 진실과 그 이면의 것들은 서서히 차근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지금의 우리 가슴속에도 우리 조상들이 가졌던 얼과 기술은 여전히 들어서 있으며, 우리는 그와 같은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채 세계속에서 서서히 살아나고 있다. 이 책은 이와같은 자각을 좀 더 빠르고 확실하게 보여주는데 많은 부분 도움을 줄 것이다.

과거에 있었거나 행했던 일들은 과거에만 묻혀있고, 과거속에서만 끝난것이 아님을 이 책을 보는 내내 느낄 수 있었다. 현대나 미래의 사항을 보여주거나 예견하는 부분은 없지만, 충분히 우리의 미래를 투영시켜 볼 수 있는 시각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역사를 우리 안에서만 끌어안지 말고 확실하며 튼튼한 역사적 논리들을 찾아내 우리 역사를 지켜내는데 힘써야한다는 사실도 더불어 당부한다.



우리는 실크로드를 그들만의 길, 문화로 보아왔지만 더 이상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것이기도 하며 그들의 것이기도 한 것이다. 앞으로 뻗어나갈 한국의 기상을 생각한다면 머지 않아 실현될 현대의 실크로드를 개척하여 다시금 조상들이 보여주었던 소통을 이끌어냄이 바람직 할 것이며 그 소통을 통해 우리의 생존을 넘어서 세계의 생존에 우리가 한 몫 한다면 또한 우리 스스로의 멋지고 독특한 문화를 다시한번 계승하고 이어나가는 것이 될 것이다.

여전한 세계 문화의 생산자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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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데이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로버트 하인라인 지음, 안정희 옮김 / 시공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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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시작한지 얼마지 않아.. 난 내가 의도했던 소설의 방향이 아니라는 것을 감지했다. 이 책을 읽기 전.. 이 책의 주인공이 AP(Artificial Person : 인조인간)라는 것을 알았기에... 이 인조인간의 불완전한 정체성을 그려낼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사실.. 이 예상은 맞았다. 그런데.. 내가 가지고 있던.. 편견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결론은 이것이 아니다.

솔직히 나의 예상은 '스타워즈'에 나오는 "내가 니 애비다..." 와 같이...뒷통수를 내리치는 강렬한 느낌을 바랬는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이 문장도 이젠 식상하지만 말이다. 암튼..이런식의 강렬한 통한의 한마디 정도는 남길 줄 알았다.

"내가 인조인간 이었다니... 이럴수가... 나를 이 더러운 세상에 잉태시킨 인간을 .....용서치않겠어..." 대충.. 이런 한 마디 정도는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실은 그게 아니다.  또한 '블레이드 러너'에서 나오는 <리플리컨트>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보전하려는 그들의 애절한 사투를 벌였던 것 처럼.. 이 Friday라는 인조인간 여성도 쫓고 쫓기는 처절한 삶을 살 줄 알았다. (사실...이 Friday 또한 좋은 환경에서 살진 않는다. 이 인조인간의 직업은 마피아 같은 조직의 밀사이다.)  사실.. 소설은 영화보다 더 디테일하게 묘사를 할 수 있기에, '블레이드 러너'의 [헤리슨 포드]가 "나 또한 리플리컨트인가?" 하며  상상하며...막을 내렸던 것 같이.. 끝낼 순 없다. 소설이 주는 엄청난 상상력 때문에 그와 같이 막을 내렸다가는 아마 뇌가 터질 것이다. 영화에선 애매모함이 인정되지만, 소설은 전혀 인정할 수 없다.(적어도 나는..)  그래서... 이 소설은 마지막에 회고 처리를 한 것인 지도 모르겠다. 하나..이는 중요치 않다.

하나... 내가 앞서 주저리 주저리..떠드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 SF소설은 스타워즈에서 나오는 정체성도 블레이드 러너에서 나오는 정체성과도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이 640여 페이지나 되는 이야기는 우리의 암울한 미래를 투영시킨 디스토피아에서 꽃피는 처절한 "성장소설"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며 계속 나의 뇌리에 남았던 것은.. 천진무구했던..'링컨 6-에코'나 '조던 2-델타'보다 더욱  천진무구한 'Christopher'를 느꼈기 때문이다. 참고로...'링컨 6-에코'와 '조던 2-델타'는 <마이클 베이>감독의 '아일랜드'에서 나오는 두 복제인간이다. 그리고 <Christopher>는 내가 얼마전에 읽었던...'Curious Incident in the Night-time'이란 책에서 나오는 자폐아 소년이다.

그만큼..이 소설은 SF형식의 성장소설이다. 사실 나는 400페이지나 넘게 읽는 동안 이 소설이 왜 SF소설이 되어야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단순히 인조인간이 등장해서 그런가...아니면...일부 지구인들이 정착하고 있는 정착행성들 때문인가..암튼.. 이 소설은 장르가 중요하지 않다. 초반엔 오히려.. 첩보 스릴러물(본 아이덴티티 같은)로 생각했었으니까..

그런데... 이 소설을 '성장소설'로 본다면... 이 소설은 훌륭하다. 비록 내가 원했던...SF적인 배경이 많이 등장하진 않지만, 또 이게 '하인라인'식이라고는 하지만, 암튼.. 인조인간 Friday의 끊임없는 자신에 대한 질문은 그녀를 결국 그녀가 바라는 환경으로 스스로 데려다주었다. 여기서 나오는 인조인간은 로봇과 같은 인조인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유전공학적 변칙 기술을 써서 만든 '강화인간'정도로 표현하면 맞을 듯 싶다. 건담 시리즈의 '코디네이터'라고 하는 것이 제일 나을 듯...모든 외형이 인간과 같고, 심지어 만든이 조차도 AP와 human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이지만, AP는 그들만의 자격지심을 가지고 산다. 다만, Friday는 워낙 암흑가에서 활동하다 보니, 그녀 스스로 자신만만하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능력(인간보다 빨리 다닐 수 있고, 싸움을 훨씬 잘하며, 정신력 또한 강하다. 모든 것이 인간보다 낫다.)을 함부로 쓰진 않는다. 위급상황을 제외하고는.

이 책은 몇가지 사회적 이슈를 던져준다. 글로벌 기업간의 전쟁이라든지..이 부분에선 국가의 개념이 좀 희박해진다. 그리고 에너지 문제...그리고 성적인 문제.. 이 책에서 나오는 성적인 문제는 부부가 남,녀 한명씩이 아닌... 그룹으로 부부가 맺어질 수 있다는 히피 문화적 성격을 띄고 있다. 

그런데..이 책에 나오는 미래의 배경은 어떠할까... 솔직히 이 작품의 연대는 1982년이다. 그리고 2006년의 시각으로 봤을때, 지구 말고 우주에 다른 정착행성이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리 먼 과거는 아닌 것 같이 느껴졌다. 아니 오히려, 요즘 이야기라해도 크게 이상할 것도 없다. 하지만, 역시나 우주를 나갈 수 있고, 몇십광년을 짧은 시간에 갈 수 있다고 본다면..먼 미래의 일이기도 하지만, 솔직히 우주를 나갈 수 있는 시대로 상상하기에는 많은 부분에서 부족함을 느끼는 것도 사실인 것 같다.

이 책의 결말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좀 무리가 있다. 아니..당연하다. 만약 직접적으로 언급했다가는 이 640여 페이지나 되는 이야기들이 시시해질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 소설의 결말에 대해 이야기 안 할 수가 없다. 앞서 이 책을 '성장소설'로 한정 짓는다면..어느정도 이해는 간다. 그리고 그 속에는 충분히 로맨스와 사회성도 포함되므로, 특히 사회적 현상에 관한 한마디 교훈쯤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결론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준다는 것이다. 그럼 인조인간이 나오는 소설속에서 주는 결론이 무엇일까... 대체적으로 이런 이야기들 혹은 소설들이 주는 결론은 인조인간의 '새로운 탄생'이다. 혹은 '새로운 자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새로운 탄생'은 인조인간이 과학기술이든, 신적 계시든 어떤 것으로 인해 인간으로 새로이 탄생한다던지, 아니면, 인조인간 그 스스로의 새로운 자각으로 자신의 부류들을 새로이 볼 수 있는 눈을 갖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탄생 혹은 자각'은 '성장소설'이나 있을법한 이야기이고(그래서 성장소설일 수 있겠지만...), 미래소설, 혹은 SF소설이라 봤을 때는 마지막 이야기의 끝과 함께... 새로운 의문 혹은 궁금증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먼저...이 소설은 앞서 말했듯이...우주선을 통해...우주 이곳저곳을 옮겨 다닐 수 있는 과학기술력이 있다는 설정을 해 놓았다. 그리고 이 책에 나오는 인조인간들은 인간과의 마찰에 매우 조심스러우며, 자신들의 정체성이 튀어 나오는 것을 꺼려한다. 하지만, 이는 지금 현대의 사회상에 비추어봤을때 나올 수 있는 현상이다. 이 책에는 '외계인'이 나오지 않는다. 생물학적으로 인간과는 전혀 본질이 다른, 그리고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외계인말이다. 이러한 외계인의 등장을 제한함으로써 이 소설은 완성되어지는 것이다. 왜.. 외계인의 등장이 없을까... <하인라인> 자신이 상상을 못했을까.. 외계인은 이 우주에 없다. 혹은 지구인이 우주를 떠돌아 다닌다해도..아직...'외계인'들과 조우할 그럴 기술력의 단계엔 아직 오지 않았다는 뜻일까? 아니면, 전지전능한 인간이 아주 미계한 외계인들을 찾아내지 못한 것일까...

물론...이 이야기속에 '외계인'이 나타난다면...이 소설은 한낱 종이쪼가리에 불과할 것이다. 이 책은 인조인간의 정체성, 인간과 다름을 한탄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모든 SF가 '스타트랙'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 지구인들이 '워프'할 수 있는 기술력을 가지기 전부터 외계인이 지켜본다는 '스타트랙'의 설정은 이 소설과는 그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물론 전개방식조차도 다르다. 그럼...이 'Friday'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A.I.'와 닮아있을까? 이 'A.I.'라는 영화도 결국은 인조인간 꼬마의 이야기이다. 물론 성장소설이자 모험담으로도 충분히 통할 것이다. 내가 'A.I.'를 보고 정말 놀라웠던 순간은 이 꼬마의 모든 이야기가 끝났다 싶을때 ... 새로운 이야기의 전개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종말' 혹은 '외계인의 등장'이다. 지구의 새로운 종이 등장하며...이 꼬마와의 조우로 통해... 새로운 이야기로 끌고가며, 거의 끝부분까지 달려왔던 하나의 통일된 이야기가 완전 새롭게 변모했던것이다. SF의 특징에 더 놀라운 SF적 상상력을 더 했고..그것은 이야기속에서 충분히 발휘되었다. 그리고 이 꼬마 또한 소원을 이루며, 이것으로 이 영화가 주려는 메시지를 우리는 받게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A.I'처럼 또 다른 이야기를 끌어내진 못했다. 어찌됐든...'외계인'은 나타나지 않았고, 이 인조인간은 그가 지난시절 겪었던 정체성에 대하여 극복한 일들을 통해 일생을 회고하며 웃음짓고 끝나기 때문이다.

얼마전..NFL(북미프로미식축구 리그)의 '슈퍼볼 영웅' <하인스 워드>가 내한하였다. 그리고 <노무현>대통령을 포함한 수많은 인사와 만남을 가졌다. 그의 이야기는 진정 드라마틱한 '성장소설'이다. 혼혈아의 벽을 넘고 세계의 빅 리그에서 그의 이름을 펄펄 날렸으니까.. 그런데..이는 오직 우리 사회에서만 통용된다는 점이 문제가 있다(물론 미국에서도 인종차별적인 문제 또한 가지고 있다.). 미국이 보는 <하인스 워드>의 관점에 우리 사회는 혼혈아라는 사회적 편견을 더 덧붙였으니까.. 이 'Friday'라는 소설이 이러한 식이다. "<하인스 워드>는 혼혈아라는 시각을 극복하고... 그는 슈퍼볼의 영웅으로 잘 먹고 잘 살았다..." 이런식으로 보았을때...이 <하인스 원드>가 우리 사회에 던진 질문과 이 소설이 던져주는 질문은 크게 다르지 않는다. 비록 이러한 사실 또한 우리에게 던지는 큰 질문이며, 풀어야될 숙제이지만... 끝을 너무 미화시킨 감이 없진 않다. 그래서 이 소설이 '성장소설'에만 국한되어 보이는지도 모를 일이다.

다시말해 처음 이 소설이 SF일까..라는 의문이, 결국엔 처음 그 느낌대로 포장된 SF라는 답변으로 돌아온 꼴이다...

나는 이 부분이 아쉬웠다. 정말 무언가가 있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비록 인조인간이었던...우리의 'Friday'는 노후를 인간처럼 아니..인간과 인조인간을 구분짓는 세상이 아닌곳에서 편안히 보냈지만, 나는 결코 이 소설속에서 '그 후 이들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았단다'라는 동화속 편집된 인생을 보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 이 책을 봤을때.. 한권짜리 640여 페이지는 매우 많다라고 느꼈지만, 오히려 너무 짧았다. 무수한 에피소드들만 나열되어 있었지만..(물론 그 에피소드들이 다 연관은 되어있지만 말이다.) 충분치 않았다.

그런데..난 이 소설을 하룻만에 읽었다. 매우 재미있었다. 왜냐하면....나는 '성장소설'도 매우 좋아하고 잘 읽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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