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막내딸처럼 돌봐줘요
심선혜 지음 / 판미동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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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막내딸처럼 돌봐줘요

심선혜 (지음) | 판미동 (펴냄)

건강한 사람은 아프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아파도 자신을 계속 돌보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책표지 글에서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건네는 섣부른 위로는 위로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상처가 될 수도 있다. 겪어보지 않았으면서 '안다, 이해한다'는 말은 얼만큼의 진심을 담고 있을까? 걱정했다는 말을 건네는 그 안에 진짜 걱정보다는 "내가 너를 걱정했다"는 생색이 담기지는 않았는지.

비극과 슬픔, 아픔이 준비하고 대비한다고 해서 막상 맞닥뜨렸을때 그 충격과 고통이 덜해질 수 있을까?

힘내라는 위로 대신 '점이라도 찍을 힘'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이 오히려 더 큰 위로가 된다고 얘기하는 그녀의 말에 공감한다고 하면 너무 섣부를까...

자신을 걱정하는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괜찮다"를 입에 달고 살며 맘 놓고 울 수도 없었다는 그녀를 가만히 말없이 토닥여 주고 싶다.

감정에도 크기가 있다는 듯이 경쟁적으로 비교들을 해댄다. "내 고통이 더 크다"고 자신을 비운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만고만한 무리들 중에서 "그래도 내가 너희보단 낫다"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남는 것이 뿌듯함은 아닐 것이다.

타인의 불행이나 행복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나의 불행이나 행복도 언제나 불안할 뿐이다.

<138. "예술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사고가 가능하다. 어둡고, 괴롭고, 추한 작품을 보고 누군가의 감각을 깨울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히 예술의 가치가 있다."

추한 것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추한 것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말은 고통과 슬픔으로 채워진 인생도 인생이라는 진실에 닿는다.

꽃길만 걷는 인생이 아니라고 해서 인생이 아니라고 삶이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는다. 그 안에서도 의미를 찾으며 살아가지 않는가 말이다. 쓴 맛을 본 뒤에 닿는 혀끝의 단맛이 더 달콤하듯이...

아픈 그녀의 글을 읽으며 오히려 내가 치유받고 오히려 내가 위로 받는다. 격정적인 호소글보다 담담하게 담아낸 일상이 더 많이 공감되고 울린다.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에.

과거의 힘들어 하던 나에게 지금의 내가 위로와 응원을 할 수 있듯이 미래의 나에게 도움을 청해보자. 지금의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들과 그에 따는 불안을 떠넘겨 미안하지만 지금보다 더 성숙해지고 성장해있을 미래의 나에게.

사랑의 시작은 관찰이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내가 나를 애정어린 관찰을 해 본적이 있었던가?

아프다고 해서 죽을 날을 받아놓은 사람처럼 지레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으며 살 필요는 없다.

사람은 모두 죽는다. 많이 배웠다고 해서 부자라고 해서 정해진 죽음을 피할 도리는 없다. 어차피 인생의 끝이 죽음이라고 해서 모든 과정이 무의미하다 여기고 죽은 듯이 살 필요는 없지 않은가! 미리 죽음을 예고 받았는가 아닌가의 차이일 뿐.

기쁨은 행복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 아니라는 선혜 씨의 말은 참으로 큰 위로가 된다. 지금의 고난과 시련이 나를 불행으로 이끄는 것이 아닌 행복으로 가는 다른 길임을 이제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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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유산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221
찰스 디킨스 지음, 류경희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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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유산

찰스 디킨스 (지음) | 류경희 (옮김) | 열린책들 (펴냄)

<위대한 유산>. 제목을 보자마자 떠오르는 이미지는 기네스 펠트로와 에단 호크가 분수대를 사이에 두고 물을 마시는 장면이다. 원작은 소설임에도 영화의 그 장면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영화를 보지 않았음에도). 그리고 곧바로 연상되는 장면은 어린 핍이 처음 미스 해비셤의 저택으로 들어가는 모습이다. 이 이미지는 중학생이던 시절에 책으로 <위대한 유산>을 읽으며 머리속으로 그려봤던 모습이다.

디테일한 내용은 모두 지워지고 딱 이 두개의 이미지만 남은 채 30년이 훌쩍 넘은 세월을 지나 재독을 시작했다.

비록 아직은 상권만 읽었을 뿐이지만 세상을 배우지 못했던 그때와 기대수명의 절반 정도를 살아온 지금의 감상이 사뭇 다르다. 무엇보다도 핍의 매형인 '조 가저리'가 자꾸만 눈에 박힌다. 아프지만 눈부시게!

부모님이 모두 일찍 돌아가시고 난 뒤 스무살 넘게 차이나는 누나에게 "손수" 길러진 핍은 유년기가 그리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매형 조가 아니었다면 그나마 핍의 순수함이 그정도라도 존재할 수 있었을까 싶다. 세상 사람들의 눈과 기준에는 모자르는 조이지만, 그런 조이기에 누군가를 순수하게 좋아할 수 있었던게 아니었을까 싶다.

어릴적 부모님의 묘지 근처에서 맞닥뜨린 탈옥수와의 만남은 핍에게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피하고 싶은 기억이다.

에스텔라를 본 이후로 자신의 무식과 가난을 처음으로 부끄러워 한 핍. 자신에게 우정과 사랑, 믿음만을 보여준 진정한 친구인 매형 조를 부끄러워 한다. 좋아하는 소녀에게 그런 모습을 창피하다고 느끼는 핍의 어린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줄곳 자신을 모욕하고 무시하는 에스텔라를 흔들림없이 쭉 사랑하는 것은 이해가 안된다. 이쁘면 무조건 되는건지...(이 와중에 외모지상주의 참 슬프다 ㅜㅜ)

익명의 후원자로부터 거액의 유산을 상속받게 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이 핍을 대하는 태도는 180도로 변한다. 양복점 주인은 비굴할 정도의 아첨을 하고, 미스 해비셤의 친척들은 분노에 가까운 시기 질투를 보이며, 펌블추크 씨는 이 모든게 자신의 덕이라며 생색내고 핍과 자신의 사이가 대단한 것인냥 과시하기에 바쁘다. 오로지 조와 비디만이 런던으로 신사교육을 받으러 가는 핍에게 이별의 서운함을 비칠 뿐이다.

재거스 변호사 사무실에서 만난 직원 웨믹은 일로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무미건조하지만 부친과 애인에게는 다정한 사람이다. 런던으로 온 이후 변해가는 핍과는 정반대다.

핍을 포함한 모두들 익명의 후원자를 미스 해비셤이라 생각하고 있다. 이 뒤틀린 심성의 노인에게도 뼈아픈 배신의 상처가 있었음을 허버트를 통해 알게되지만 그녀의 의도는 짐작하지 못한다. 에스텔라의 짝으로 자신을 "찍었기"때문에 "신사교육"을 시키려 한다고 짐작할 뿐이다.

후원자의 지시대로 신사교육을 받기위해 런던으로 온 핍은 과거의 자신을 송두리째 부정하듯 자신을 만나러 먼길을 온 조마저도 대면대면 대하고 만다. 아무리 조라지만 그만한 눈치가 없을까? 거리감을 느낀 조는 신사분이라고 깍뜻하게 존칭을 쓰며 핍을 만나고 돌아간다. 조를 대하는 태도가 점차 변해가는 핍을 보고 있노라니 참 마음이 아프다.

하권에서는 핍의 새로운 인생이 성장이 될지 몰락이 될지, 그리고 미스 해비셤의 숨겨진 의도와 후원자의 정체를 알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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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막내딸처럼 돌봐줘요
심선혜 지음 / 판미동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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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약해도 엄마는 강하다고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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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핑 더 벨벳 세라 워터스 빅토리아 시대 3부작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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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핑 더 벨벳

세라 워터스 (지음) |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펴냄)

동성애는 현재에도 일반적으로 금기시되는 주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라 워터스의 "빅토리아 시대3부작"이라 불리우는 '핑거 스미스', '끌림', '티핑 더 벨벳'이 외설이 아닌 문학작품으로 인정받는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여기고 읽기 시작했다.

<티핑 더 벨벳>은 그녀의 나머지 두 작품과 비교해도 그 수위가 가장 높다.

여성 동성애자를 뜻하는 '톰'.

톰이라는 사실이 알려질까봐 두려워하던 키티는 매셔로 살아오던 인생을 뒤로 하고 낸과 결별하며 월터스와의 결혼으로 평범한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려 한다. 낸시가 받은 충격과 배신은 다른 어느 연인들의 사랑과 비교해도 덜하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키티에게 사회적 매장과 손가락질이 뻔한 삶을 계속하라고 강요할 수도 없다. 다만 자신 때문에 고향과 가족을 떠나온 낸시에게 이해와 양해를 구해야하는게 먼저 아니었을까?

낸시가 키티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남자친구였던 프레디와 결혼해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었을까? 낸시가 매셔로, 톰으로, 남창으로 점점 추락하는 삶을 살게 되었지만 그것을 꼭 키티의 잘못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평범한 긴 세월보다 쾌락의 500일을 선택하며 다이애나의 전속 창녀가 되기로 결정한 것은 낸시 본인이었다. 가족의 곁으로 돌아갈 기회를 놓아버린 것도, 친절한 밀른 부인과 그레이스의 곁을 떠난 것도 낸시였다. 그러나 나는 낸시도 비난하고 싶지 않다. 사랑하는 감정의 방향을 마음대로 전환할 수 있었다면 세상의 동성애는 애초에 없었을지 모른다.

사회의 시선을 의식해 거짓된 삶을 선택한 키티, 너무 부유해서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었던 다이애나, 자신의 정체성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플로렌스 그리고 상대에 따라 여러 색깔로 변하는 낸시.

매셔로 이름을 날리던 때에는 유명 배우 낸 킹으로, 다이애나에게는 전속 창녀로, 플로렌스에게는 그녀의 사회적 후광에 가리워진 그녀의 여자로 살아간다.

'티핑 더 벨벳'. 제목에 숨겨진 진짜 속 뜻을 알고는 무척 놀랐다.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들은 지금보다 더 구속되고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남성 위주의 권위적인 시대에 마음의 위안과 안식을 이성인 남성보다 동성인 여성에게서 받으려 했던 것 같다.

톰으로 살아서가 아니라 톰으로 살아가는 방법이 잘못이었다고 낸시에게 말해주고 싶다. 현실을 제쳐두고 사랑에 함몰되어서도 안되고, 사랑은 배제된채 쾌락만을 쫒아도 안된다고.

낸시가 성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자아 정체성'을 놓아버리는 모순을 보았다. 동성을 사랑하는 낸시가 사랑을 찾는 동안 그녀 자신을 잃어버리는 모순. 키티에 대한 동경과 선망에서 시작된 동성의 사랑은 시간이 지날수록 뚜렷한 목적도 방향도 없어 보였다.

플로렌스를 만나 진실한 감정을 나누며 낸시는 드디어 자아 정체성을 찾아간다. 소식을 끊었던 가족에게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결심을 하고 돌아와 달라는 키티를 통해 플로렌스와의 사랑을 깨달으며 방황이 끝난다.

범죄나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일반적이지 않다고 해서 세상의 잣대와 다르다해서 비난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남들과 다른 조금 특별한 사랑을 하는 그들을 조금만 더 열린 시각으로 볼 수 있는 내가, 세상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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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 - 폴란드에서 온 건반 위의 시인 클래식 클라우드 28
김주영 지음 / arte(아르테)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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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쇼팽~!! 그글클로 만나는 예술의 거장들은 언제나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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