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포, 집, 여성
엘리자베스 개스켈, 버넌 리, 루이자 메이 올컷, 메리 셸리 (지음) | 장용준 (옮김) | 고딕서가 (펴냄)
상상력은 경험에 바탕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보고 듣고 만지는 등의 오감과 느낀점까지, 경험이 많을수록 상상력의 크기도 커진다는 얘기였다. 오래전, 여성들의 활동이 제한되던 시기에 그녀들은 어떤 경험을 바탕으로 이런 이야기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특히 앞의 3편의 이야기인 <회색여인>, <오키 오브 오키허스트, 팬텀 러브>, <비밀의 열쇠>가 여성의 시각에서 서술되고 있는 것과 달리 마지막에 수록된 메리 셸리의 <변신>은 남성의 시점으로 진행되며 타인과 몸을 바꾸는 신비한 변신에 관해 얘기한다.
영혼을 담보로 한 악마와의 거래를 소재로 한 작품은 여럿 있었지만 육체를 뒤바꾸는 3일간의 거래라... 이 거래를 믿어도 될까?
세번째 수록작인 <비밀의 열쇠>는 내용도 흥미롭지만 작가가 <작은 아씨들>을 쓴 루이자 메이 올컷이라는 사실이 먼저 흥미를 끌었다. '가족애의 따뜻함을 그려내었던 그녀가 쓴 복수와 비밀은 어떤 결말을 보여줄 것인가?'
낯선 남자의 갑작스런 방문 이후 돌연 죽음을 맞은 리처드 경과 두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난 뒤 더할 수 없이 사랑하던 남편을 향한 사랑을 거두어들인 트레블린 부인. 결혼 전 남편에게 또 다른 아내가 있었다는 충격적인 비밀에 아내 앨리스의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린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쟁으로 사망자 명단이 뒤바뀌고 생사를 알 수 없는 가족을 체념하는 일은 우리에게도 있었지 않은가. 6.25라는 전쟁으로 북에 두고 온 아내와 남쪽에서 다시 꾸린 가정 사이에서 번민하는 가장의 얘기는 그리 멀지 않은 우리 할머니 세대에도 실재하는 이야기다. 뻔하게 흐르리라 예상했던 결말은 살짝 비껴가며 반전의 재미를 더했다.
엘리자베스 개스켈의 <회색여인>을 처음 읽었던 때를 기억한다. 입을 다물 수 없었던 충격적인 결말에 앞으로 되돌아가 다시 읽기를 수차례 반복하며 '복선이란 이런 것이지!'하고 감탄을 숨길 수 없었던 작품이다. 거듭되는 반전과 뒤늦게서야 알게 된 수많은 복선들이 회색여인이라 불렸던 아나의 인생을 더 측은하게 여기도록 했는지도 모른다.
각각의 작품에 등장했던 여주인공들에게선 연민과 응원을 함께 보내게 된다. 그러나 <오키 오브 오키허스트, 팬텀 러브>의 앨리스 오키에게는 왠지 그런 마음이 들지 않는다. 260년 전 동명의 조상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1626년의 앨리스가 남편과 함께 자신의 연인을 살해했듯이 1880년의 앨리스는 그녀 안의 또 다른 앨리스와 함께 남편을 죽음에 몰아붙인다. 니콜라스 오키의 저주가 이루어진 것일까, 아니면 앨리스 오키를 사랑한 남자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도 타고난 것일까?
<오키 오브 오키허스트, 팬텀 러브>와 <변신>은 독자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열린 결말로 읽힐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바로 이 점이 읽을 때마다 다른 감상을 남기게 되는 매력이다. 단편이지만 그 깊이는 결코 짧지 않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다시 읽게 된다면 그때는 또 어떤 느낌과 매력으로 나를 사로잡을지 벌써 다음 재독이 기대된다.
